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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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에 목마른 더벅머리 소년, 정(情)을 그리워한 노학자

 

인연은 바람처럼 스쳐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스쳐지나가는 찰나적 만남은 한때의 마주침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 만남에 불과하다. 그래서 한 번 맺어진 인연이 사람의 명이 다할 때까지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그 만남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확 달라지게 되는 삶이 연출될 수도 있는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것도 있다. 사실 우연한 만남이 운명을 바꾸는 기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많으며 한 사람의 인생 자체를 넘어서 역사의 흐름 한 줄기를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들어가게 할 수 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 생각지도 못한 관계로 발전하는 만남, 그런 만남은 정말 운명을 바꾸는 만남이다. 오랜 기간의 만남은 인연의 폭과 골을 넓고 깊게 만든다. 그런 만남의 인연(因緣)은 아름다운 연인(戀人)으로 바뀐다.

 

비록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의 만남은 우연의 만남으로 인해서 맺어인 인연이 평생동안 서로를 의지해주는 사제로 이어지게 된 극적이면서도 대단한 관계이다. 역사에서 '만약~했더라면'으로 시작하는 가정법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에 정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되지 않은 채 조정 내에서 승승장구한 학자로서의 삶을 유지했다면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강진에서 이룩한 학문적 성과물들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단 정다산의 학문 업적에만 손실을 얻는 건 아니다. 진실되게 한결같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훌륭한 제자 한 명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1802년,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정다산은 외인이나 다름 없었다. 저 멀리 한양에 살고 있는 부인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너무나고 보고 싶었고 그리웠다. 그가 좋아하는 학문 수양과 시작(詩作)만으로도 관계의 정(情)이 결핍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주막집에 작은 서당을 열어 그 곳 마을에 사는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서당에 모여든 아이들 중에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까막눈들도 있었지만 정다산은 친절하게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글공부를 시켰따. 서당에 공부하는 아이들 무리 중에는 지방 관아의 하급관리 아전의 아들이었던 열다섯 살 더벅머리 소년도 있었다.

 

어느 날, 서당에서 공부를 마친 아이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정다산은 그 더벅머리 소년을 따로 불러 서당에 남도록 했다. 그러자 소년은 스승과 단 둘이 있는 상황 때문인지 긴장감이 역력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스승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니, 질문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억눌린 감정들을 뱉어내는 듯한 고민에 가까웠다. 그러자 정다산은 친절하게 소년의 고민을 들어주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 선생님! 그런데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

 

 - 그렇구나. 내 이야기를 들어보렴,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 그것이 무엇입니까?

 

 -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가르치면 한 번만 읽고도 바로 외우지. 정작 문제는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히 넘어가는 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세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않고 대충 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 정 민『삶을 바꾼 만남』pp 34~35 -

 

 

정다산은 소년의 고민과 그에 대한 답변을 글로 남겼다. 글의 제목을 '삼근계'(三勤戒)라고 지었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다산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소년은 스승이 써준 글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이 한 번의 가르침 그리고 스승이 제자에게 건내준 종이 한 장이 더벅머리 소년이었던 황상의 인생을 한 번에 뒤바꿔놓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오직 황상의 인생 자체에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황상이라는 정직한 제자 한 명을 두게 된 정다산은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에서의 외로움을 달래 줄 수 있는 동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정신적 부족함들을 채워줄 수 있는 일생 일대에 있어서 중요한 만남이었다.

 

 

 

 

 '제자바보' 정다산, '스승바보' 황상

 

정다산과 황상, 두 사제의 교류 관계는 정다산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을 죽을 때까지 실천했을 정도로 정말 대단한 점은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들의 관계가 우직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요즘 젋은 세대들이 인터넷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조어 중에 '~바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딸바보'라는 용어는'딸을 바라보는'의 준말. 즉 자신의 딸을 각별히 아끼는 아버지를 뜻한다. '딸' 대신에 특별히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을 대상을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정다산은 항상 황상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로 각별히 아꼈고,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려고 했던 유일한 제자였다. 말 그대로 정다산은 '제자바보'였고, 황상은 '스승바보'인 것이다.

 

정다산과 황상의 돈독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황상은 18살에 장가를 가게 되었다.  장가들어 신혼의 재미에 빠진 황상이 그동안 부지런하게 이어져 온 학문 수양에 점점 소홀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자 이를 잠자코 지켜 보고 있던 정다산은 제자의 태도에 대한 실망감과 한심함을 담은 편지 한 통을 보내게 된다.

 

네 말씨와 외모, 행동을 보니 점점 태만해져서, 규방 가운데서 멋대로 놀며 빠져 지내느라 문학 공부는 어느새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한다면 마침내 못나고 어리석은 인간이 된 뒤라야 그칠 것이다. 텅 비어 실지가 없으니 소견이 참으로 걱정스럽구나. (중략) 진실로 능히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뜻을 고쳐, 내외가 따로 거처하도록 해라. 마음을 오로지하여 글공부에 힘을 쏟을 수 없다면, 글이 안 될 뿐 아니라 병약해져서 오래 살 수도 없을 터.

 

 

  - 정 민『삶을 바꾼 만남』pp 137~138 -

 

 

 

황상의 공부 태도에 못마땅하게 여겨 스승이 그에게 각방을 써라고 훈계를 한 것이다. 이제 막 신혼의 달콤함에 젖은 제자 입장에서는 각방을 요구하는 스승의 훈계에 황당할 터. 하지만 황상은 스승이 보낸 편지 한 통 앞에서도 스승의 격노한 모습이 느껴졌던가 보다. 그는 노한 스승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 뒤 신혼집을 뒤로하고 이전에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고성사라는 절로 올라갔다. 어떻게 보면 공부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정다산의 훈계 그리고 그를 곧이곧대로 따르는 황상의 반응이 오늘날 현대의 독자가 보기에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유교사회 내에서는 사제 간의 예의 역시 부자 간의 예의만큼이나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기본적인 도리였으며 항상 스승의 가르침을 끝까지 따르려고 하는 황상의 한결같은 성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새신랑 황상에게 각방을 써라고 하는 훈계의 의미 뒤에는 외로움을 참지 못하는 정다산의 말 못하는 심정이 숨어 있다. 오랜 유배생활하는 동안에 부인의 얼굴이 잊혀질 정도로 만나지 못해 그리워하는 마당에 신혼생활을 하기 시작한 제자의 모습이 살짝 질투가 날 법했을 것이다. 그리고 황상이야말로 자신이 가르쳤던 강진 서당의 제자들 중에 친아들처럼 여길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제자였다. 외로운 스승은 자신의 곁에 황상과 함께 하기를 바랬다. 특히 자신이 직접 인정할 정도로 시작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황상과 함께 시를 쓰면서 관계가 지속되기를 원했다.

 

 

 

 노스승의 마지막 가르침

 

하지만 사람의 관계가 한결같이 유지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정다산은 길고 길었던 유배생활을 끝내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황상은 학식 좀 있는 선비들이라면 가게 되는 벼슬아치가 되는 삶의 길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농민으로서의 삶의 길을 선택했다. 이 두 사람은 간간이 편지로 근황을 확인했지만 오랫동안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지역적 제약 때문에 자주 보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지역만큼이나 이 두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간절한 그리움뿐만 아니었다. 속세의 삶에 집착하는 몇 몇 제자들로 인해서 정다산은 괴로워했으며 일부 제자들은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황상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사 일에 충실하느라 그동안 충실했던 학문 수양이 예전에 비해 소홀히 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밭과 관련된 복잡한 송사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각자 처하고 있는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이 두 사람은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했고 만나고 싶었다,

 

그러다가 정다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접한 황상은 드디어 스승을 찾아 뵙기 위해 상경하게 된다. 이 때 정다산의 나이는 75세, 황상의 나이는 49세였다. 황상이 더벅머리 소년 시절 때 정다산을 처음 만난지 34년의 세월이 흘렀고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로 18년 만에 재회하였다. 백발의 스승은 건강이 성치 않았지만 자신이 아끼던 제자의 방문을 알아봤고 크게 반가워했다. 비록 짧은 체류였지만 49세의 황상은 소년 시절 때처럼 변함없이 정다산의 곁을 지켜주었다. 정다산을 만난 지 이틀 뒤에 황상은 작별의 큰절을 올리고 다시 고향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정다산은 황상과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노환과 질병으로 인해 의식이 혼미한 상태 속에서도 애제자를 위해서 짤막한 글씨와 작은 선물을 전해주었다.

 

 황자중(=황상)에게 준다.『규장전운』한 건, 중국 붓 한 자루, 중국 먹 한 개, 부채 한 자루,

 연배 한 개, 여비 돈 두 냥

 

 

  - 정 민『삶을 바꾼 만남』pp 404~405 -

 

 

늙어버린 스승은 예전처럼 제자를 위해서 긴 내용의 시와 편지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힘들지만 간단하게 제자에게 전해주고 싶은 선물의 목록만 썼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짤막한 선물 목록에는 애제자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 있다.『규장전운』이라는 책자 한 권을 준 이유는 농사일 때문에 접어두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것을 권하는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제자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배를 곯을까봐 여비까지 따로 마련해주었다. 스승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계'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었다.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자 보은에 49세의 제자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흐를 뿐이었다. 스승과의 작별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못난 제자를 위해 끝까지 배려해주는 스승의 고마움에 황상은 눈물을 흘렀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에 황상은 또 한 번 울어야했다. 황상이 떠난 지 이틀 뒤에 정다산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런 스승과 제자, 또 없습니다."

 

 

 

 

내 스승이신 다산 선생께서는 이곳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계셨네. 그 긴 세월에 날마다 저술에만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리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네.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 몸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이르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이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날로 나는 죽은 목숨일세.

 

 

  - 정 민『삶을 바꾼 만남』pp 13 -

 

 

 

황상은 소년 시절 때 정다산이 강조했던 '삼근계'의 가르침을 절대로 잊지 않았으며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항상 '삼근계'를 마음에 새기며 평생 공부에 매진했고,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한마음으로 공부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황상은 정다산의 삶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었다. 깊은 산속에 거처를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시 짓기 등의 공부를 계속 했으며, 늘그막에는 '일속산방'(一粟山房)이라는 조그마한 거처을 마련하여 그 곳에서 오직 공부에만 전념했다. 정다산의 제자들이 출세를 위해 공부할 때, 오직 황상은 스승이 입버릇처럼 일러주신 유인(幽人)의 삶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하지만 스승의 날을 맞이해야 할 학교 내 분위기는 예전 같지가 않다. 사제 간의 의리와 정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스승이 어떤 분인지를 묻는 제자가 없는 시대다. 그리고 학교는 더 이상 학문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는 없고 돈과 폭력이 학교를 창고처럼 만들었다. 요즘 정다산처럼 숙제를 어렵게 내주고 토씨 한 개에 변죽을 부리는 선생이 있다면 인터넷에서 몰매를 맞을지도 모른다. 학부모위원회에 회부될 수도 있다. 사실 정다산은 까다롭고 쫀쫀하고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두 아들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끼는 제자인 황상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보게 된다면 매번 공부할 것을 권하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유배지에 찾아오는 아들들에게 그동아 공부했던 것들을 확인할 정도로 무척이나 깐깐한 스승이었다. 애제자를 위해서 죽을 때까지 보살핀 스승과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어서까지도 어린 시절처럼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스승의 곁을 지킨 제자 그리고 수십년동안 이어져 온 끈끈한 사제 간의 정(情)은 이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다산과 황상, 두 사제 관계에서 비롯된 일화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신뢰와 존중이라는 핵심 가치가 녹아 있다. 진정한 교육과 만남이 어떤 것인지 살펴볼 수 있다. 제자는 없고 학생만 있는 요즘 학교 교육의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연인은 사랑하는 남녀관계를 의미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되는 마음 깊은 모든 관계를 지칭한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만남도 가식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적 관계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될 미덕이다. 관계를 아름답게 바꾸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내가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연인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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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카카 2012-04-3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의 책 속의 스승은 다산이신가 봅니다^^

cyrus 2012-05-01 14:59   좋아요 0 | URL
네, 사실 블로그 메인사진 밑에 있는 문구가 다산이 황상에게 했던
말의 일부에요. 다산이 황상에게 삼근계를 전해주는 이야기는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에서도 잠깐 소개하고 있어요.
저는 그 책을 통해서 다산의 삼근계을 좌우명으로 삼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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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나의 아프리카!

  대대로 물려받은 대초원에서 당당하던 무사들의 아프리카,

  나의 할머니가 머나먼 강둑에 앉아 노래한 아프리카.

  나는 그대를 결코 알지 못하지만

  내 얼굴은 그대의 피로 가득하다.

  들판을 적시는 그대의 아름다운 검은 피,

  그대가 흘린 땀의 피,

  노동의 땀,

  노예 생활의 노동,

  그대 아이들의 노예 생활

 

  (중략)

 

 

  - 디오프「아프리카」중에서 -

 

 

 

 

 

 

 

 아프리카의 참상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

 

 

 

 

 

 

케빈 카터 「독수리와 소녀」1994년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던 아프리카 수단. 카메라를 목에 건 당신 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비쩍 마른 여자아이가 보급품을 받기 위해 급식센터를 향해 네발 짐승처럼 기어가고 있고, 그 뒤로 독수리 한 마리가 서 있다. 독수리의 눈초리는 노골적이다. 얼른 소녀가 기력을 잃고 쓰러지길 바라는 포식자의 시선이다. 게걸스러운 독수리는 소녀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줄곧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를 밟고 있다.

 

아프리카 기아 상황을 촬영하기 위해 수단 남부로 들어간 남아공 출신의 케빈 카터는 우연히 기운을 잃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어린 소녀 뒤에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순간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런 다음 그는 독수리를 쫓아내고 이 소녀를 아요드 식량센터로 데려갔다.

 

카터가 찍은 사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반향은 대단했다. 소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수많은 독자들의 편지가 신문사로 폭주했다. 이듬해 카터가 권위 있는 사진작가들에게 수여하는 퓰리처상을 받으며 문제적 사진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사진가에 대한 비난의 여론 또한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굶주린 소녀를 도와주지 않은 채 사진 촬영을 단행한 작가의 선택에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이 작품이야말로 과연 퓰리처상의 수상 취지에 부합되는 사진인지에 대해서 논란을 제기하기도 했다. 심지어 카터를 독수리 맞은편에서 비슷한 눈높이를 한 채 쪼그리고 있었을 카터 또한 독수리와 다를 바 없는 모리배라는 인신공격성 비난이 나올 정도로 그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높아져만 갔다. 그칠 줄 모르는 대중의 냉담한 비난으로 인해 심한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던 카터는 결국 퓰리처상을 받은 지 두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Black & Blue, '아프리카'에 대한 이중적 시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끔찍한 광경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많은 질병들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으며 정치적 내전으로 인한 잡읍은 아프리카의 상처를 더욱 악화시켜주고 있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모습들은 케빈 카터의 사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비참한 현실을 담은 사진들 또는 그러한 장면을 TV를 통해서 보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슷한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아왔기 때문에 감각이 둔해지고 무덤덤해 져서 그 때만큼 충격을 받지 않는다. 비슷한 장면을 계속 봄으로써 신선함과 충격이 사라지게 되는 현상을 '이미지 중독' 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도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우리 대중의 시선은 '이미지 중독'에 빠져 있다.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자신과 관련된 일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당신의 지갑 안이나 옷 주머니 구속 어딘가에 있을 단돈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은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 20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성금한 총 금액이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모 건설기업 CF '아프리카' 편 장면 중에서

 

 

 

 

'이미지 중독'에 의한 아프리카의 시선 및 인식은 단순히 아프리카의 비극을 알면서도 눈 감고 있는 것만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어떠한 대상을 바라볼 때는 항상 좋은 점만 보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아프리카는 자원의 보고를 넘어 신흥시장으로, 현지 생산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암흑대륙'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5~7%대의 성장세를 이루며 '지구의 마지막 성장엔진'으로 주목받고 있는 중이다. 중국 일본 미국 등은 제2의 중동으로 떠오르는 아프리카 공략을 위해 원조 및 경제 협력 카드를 제시하며 발벗고 나서고 있으며 이제 우리나라도 아프리카 진출 경쟁에 뛰어들었다.

 

작년에 모 건설기업에서는 아프리카 시장 진출 사례를 토대로 한 광고가 제작되었다. 모 건설기업의 '아프리카' 편 TV 광고는 자사기업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통해 남들과 다른 생각과 도전정신으로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기업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광고 배경음악으로 아프리카 유명 어린이 합창단 '지라니 합창단'의 잠보(JAMBO)라는 곡을 삽입했고 광고음악 사용료는 지라니 합창단 어린이들을 위해 전액 후원했다는 점에 있어서 타 기업 광고와 차별화된 방식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TV 광고 한 편 덕분에 기업은 자신들이 이룩한 성공적인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었겠지만 여기서 아프리카는 기업의 이익 창출을 위한 자원이 많은 시장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또 국내 기업이 참여한 개척 사업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며 광고 카피처럼 아프리카의 미래가 밝아지리라는 보장도 할 수 없다. 모 건설기업 이전에도 수많은 세계의 기업들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아프리카의 땅을 '수많은 자원의 보고'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 곳에서 사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경제적 형편을 개선해주거나 향상시켜줄 수 있는 국제개발적 사업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굴지의 글로벌 은행들마저도 자본창출을 위한 '블루오션'으로 아프리카를 눈여겨 보고 있다. 세계 경기 이중침체 우려 및 유로존 재정위기의 악영향을 받고 있는 글로벌 은행이 아프리카 사업 진출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JP모건, 스탠다드차타트(SC) 등과 같은 글로벌 은행들이 유럽 재정위기로 인한 손실을 피하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아프리카 금융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우리는 아프리카를 '가난, 굶주린 어린아이들이 많은 기아의 나라, 끊임없는 발생하는 내전이 일어나는 암흑(Black)의 대륙'이면서도 '풍부한 자원이 있는 블루(Blue)오션'이라는 서로 상반되면서도 이중적인 이미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왜곡된 '블랙 아프리카'를 만들어 낸 서구인들의 편협된 인식

 

요즘 인터넷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조어 중에 '웃프다'라는 말이 있다. '웃기다'와 '슬프다'라는 형용사를 조합한 단어다. 즉 어떠한 상황이나 장면에 대해서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프다라는 뜻이다. 우리를 포함한 서구인들이 바라보는 아프리카의 시선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웃프다'.

 

정작 아프리카를 새로운 사업을 개척할 수 있는 자원이 넘치는 무한한 대륙으로 보면서도 여전히 문화적으로 낙후되면서도 미개한 지역으로 바라보는 왜곡된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공식 석상에서 아프리카를 '믿을 수 없는 병으로 신음하는 국가'라고 말했으며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프리카라는 대륙에는 애초부터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구시대적인 발상의 망언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 정치인들의 말 한 마디 속에는 아프리카를 제대로 알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비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무시하는듯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사업 진출을 위한 새로운 시장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제국주의를 내세운 19세기 정치인들의 사고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사실 지금까지도 거론될 정도로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블랙 아프리카'(Black Africa)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되고 편협된 인식들이 만들어 낸 함축적인 암흑의 결정체다.

 

아프리카인을 검은 피부색을 가진 인종이라고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부터라고 이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검은 피부색을 지닌 아프키라인이 최초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변신 이야기』중 태양신의 아들인 파에톤이 혼자서 태양마차를 모는 장면에서 '아이티오피아(에티오피아)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이 검은 피부색을 가진 이유를 파에톤의 서투른 태양마차 운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이티오피아 사람들 피부가 새까맣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열기 때문에 피가 살갗으로 몰려서 그렇다는 것이다.

 

 -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이윤기 역, 민음사, pp 73 -

 

 

그리고 17세기부터는 검은 피부색이 생기게 된 이유를 나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문화적 진보를 기준으로 인종을 구분하는 입증의 시도 역시 등장했다. 검은 피부색을 지닌 아프리카인들을 퇴화된 인종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다. 검은 피부가 인종적 퇴화의 증거라는 인식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이어져오게 되면서 열등한 아프리카인들을 지배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로 변화되었다.

 

또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미개한 인종의 역사일뿐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심지어 의도적으로 세계사에서 삭제시키려고 했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구전 전승되는 형식이라서 이를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구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이유를 근거로 아프리카의 역사 존립 자체를 무시하였다. 다시 15세기 대항해시대를 다루는 대목에서 잠시 다시 등장하는 아프리카는 마치 유럽 탐험가들이 도전 끝에 얻어낸 전리품처럼 묘사된다. 기존 세계사에서는 15세기 이전의 아프리카 역사는 애써 기술할 필요가 없는 분야로 취급됐다.

 

이는 헤겔이『역사철학강의』에서 아프리카를 유아기의 인류, 고차원적 사고능력이 없는 흑인들의 땅이자 어두운 밤의 장막에 둘러쳐 있는 대륙으로 묘사한 데서 정점에 이른다. 이후 아프리카 인을 성경의 족보에서 지워 유럽의 인종적·종교적 순수성과 우월성을 지키려 했다. 제1차 대전 무렵엔 지능지수 결과가 더해져 흑인들은 저능하고 미개하며 야만적이라는 인식을 확대 재생산했다.

 

 

 

 

 메마른 아프리카에서도 평화의 나무가 자라날 수 있을까?


폭력사태와 그에 따른 난민들, 각종 전염병에 신음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기아의 땅, 그곳이 아프리카인 것이다. 대부분 아프리카를 정확히 보지 못하고 그저 감상적인 동정주의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익과 헤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 '보물섬'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많은 한국 기업들이 아프리카에 진출하고 있지만, 정작 아프리카를 안다고 하기에는 교류의 양이나 지식이 매우 부족하다. 오랫동안 서구 국가들이 제공하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뉴스를 통해 전해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접하고 있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는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최근 서구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자원의 보고', '미래를 위한 마지막 거대 소비 시장'으로 탈바꿈 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하지만 현재 아프리카의 많은 상처들은 고무와 금 그리고 노예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로 진출했던 서구 열강들의 흔적들이다. 어떻게 보면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아프리카 시장 진출 역시 경제적 논리를 앞세운 것으로 과거 서구 열강들의 행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프리카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 있겠지만, 그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는 경제적 진출은 아프리카의 상처를 더욱 깊게 할 뿐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곳곳에서 벌어지는 내전이나 해적활동을 조금 자세히 생각해봐도 서구의 경제적 논리가 얼마나 아프리카에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알게 된다. 사실 내전이 장기화 되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내전 국가들은 스스로 무기를 만들 능력조차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군들은 무기를 구하기 위해서 대부분 다이아몬드 같은 자원을 선량한 시민들에게 채취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확보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무기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즉 아프리카의 상황을 이용하는 무기 생산국들이 있기 때문에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장기화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되는 내전의 악순환은 아프리카 전체를 병들게 할뿐더러 아프리카인들의 피와 눈물을 온 대륙 전체에 적시게 만들고 있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여러 아프리카 국가 어린이들은 굶주리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기를 구입하고 내전이나 종족 간 전쟁 또는 영토 쟁탈전을 위해 쓰는 돈은 넘쳐나고 있다. 일부 아프리카인들은 차라리 식민통치 시대가 오히려 더 살기 좋았던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을 정도이다. 아프리카에서의 경제 발전 및 민주 발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이후 정권을 잡은 지도자들의 부(富)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이 많지가 않다. 작년에 리비아에서 불기 시작한 재스민혁명으로 오랫동안 독재정권을 유지해왔던 카다피가 축출당했한 이후부터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민주화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비극은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빈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명목상 거의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이 되었지만, 아직도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과연 메마른 아프리카 대륙에 평화의 나무가 자라날 수 있을까?  쟈스민혁명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이 당면한 현실적 과제는 민주적 제도를 정착시키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 식민지적 구태를 벗어버리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성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아프리카다. 새싹을 내미는
 끈기 있게 고집스럽게 다시 일어서는

 그리고 그 열매에 자유의 쓰라린 맛이

 서서히 배어드는 이 나무가

 

 

 - 디오프「아프리카」중에서 -

 

 

 

변화의 흐름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자유'라는 것은 단번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유의 맛이 달콤한 만큼 쓰디쓰기도 하는 인고의 지혜를 알고 있어야하며, 초조하지만 꿈이 성취될 수 있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프리카인들이 자유롭고 옹감했던 과거의 역사를 잊은 채 현재는 암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드렝게 가해지는 억압과 착취의 끈을 끊고 끈질기게 일어설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서는 가운데 자유의 참의미를 깨달아, 그 열매 속에 자유를 채워 갈 늘푸른 나무가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아프리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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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9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30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벚꽃이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을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 김지하 「새 봄」-

 

 

 

 

 

이번 4월은 시험 공부하느라 정말 정신 없을 정도로 보낸 것 같습니다. 제가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고 있어서 작년에 비해 공부해야 할 분량도 많았고요, 자연히 책 읽을 시간이랑 알라딘 블로그에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적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간고사는 이번 주 수요일에 끝났습니다. 시험이 끝난지 3일이 지나서야 알라딘 블로그에 들어온 것은...  간만에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노느라 (^^;;) 이제서야 오랜만에 서재 블로그에 들어와서 글을 써보게 되었네요.

 

한동안 블로그에 안 들어온 사이에 알라딘 서재에 수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논쟁의 중심에 친분이 있었던 서재 이웃분들이 관련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제가 그 분들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제때에 전달하지 못해서 송구스럽기도 하네요. 그리고 알라딘 서재를 한 달동안 휩쓸고 지나간 논쟁들의 이력을 쭉 읽어보면서 좀 무서운 마음도 들기도 했습니다. 논쟁의 결과를 떠나서 의미는 다르지만 각자의 생각이나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 중에서 서로에게 반목의 골만 넓혀만가는 관계의 상처를 안겨준다는 사실이 무서웠습니다. 어쨌든 갈등의 논쟁이 마무리되어 예전의 알라딘 서재의 분위기로 돌아와서 다행이네요.

 

이번 달에 마지막으로 쓴 글에서 모 서재 이웃분께서 제가 한동안 블로그에 들어오지 않으셔서 걱정하셨는데 진심으로 저를 생각해주신 점,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블로그를 소홀히 하다보니 괜한 걱정을 안겨준 거 같네요. ^^;;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의 인생에도 권태기가 찾아오게 되듯이 사실 4월 초부터 블로그 활동에 대해서 권태기가 있었습니다. 하필 그 시기부터 카카오스토리를 시작하게 되면서 블로그에서 긴 문장의 글을 쓰는 것보다는 짧고 간결하게 글 쓰는 것이 더 재미있고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개인적으로 글을 길게 쓰는 단점 때문에 나름 고심하던 찰나에 카카오스토리 덕분에 짧게 글 쓰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오프라인 공간이지만 알라딘 블로그보다 카카오스토리를 통해서 친한 사람들과 시시각각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다는 점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었고요.

 

그런데 제가 모 출판사로부터 부탁 받은 서평 도서에 대한 리뷰를 수십일 동안 미룬 상태라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작성하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글을 써서 그런지 긴 문장의 글 한 편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지식과 그에 대한 감상들을 기록하고픈 의지가 다시 샘솟게 되었습니다. 긴 글을 쓰기가 귀찮았던 생각이 싹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냥 짧게 글을 쓸 수 있는 카카오스토리도 하면서 길게 글을 쓸 수 있는 알라딘 블로그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각자의 취향이 있고 각자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래서 좋고 이것은 이래서 싫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그러나 또 상황에 따라서 좋았던 것이 다른 결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싫었던 것이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오랫동안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 가지 생각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고지식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살이도 그런 거 같아요. 특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어떤 사람은 어떠한 장점이 있는 반면 또 다른 단점이 있고, 어떠한 단점이 있는 반면 또 다른 장점이 있는 것입니다. 모두 장점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개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개성이 그 존재의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계절이 변해도 늘 푸르다는 것은 변화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단순하고 삭막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 소개된 시의 화자뿐만 아니라 우리는 계절에 변함에 따라 서로 다른 벚꽃과 푸른 솔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푸른 솔과 벚꽃이 어우러진 모습이 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이라면, 시류에 쉽게 영합하지 않는 지조 있는 사람과 시류의 흐름에 따라서 이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변화하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이야말로 조화로운 인간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생각과 가치를 이해할 줄 아는 공감이 필요하고요. 공감 없는 세상은 곧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기 위한 반목, 경쟁 그리고 갈등만 남아있는 세상입니다. 갈등과 경쟁의 관계에서 제아무리 승리해서 살아남았다하더라도 서로에게만 깊은 쓰라린 상처만 안겨다주는 '피로스의 승리'에 불과합니다.  비록 유토피아적 발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입장이라도 이해해주고 공정한 대화를 통해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성숙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짤막하게 근황만 알리는 글을 쓰려다가 그만 내용이 엉뚱하게 옆길로 새버렸네요 ...

 

 여전히 쓸데없이 길게 쓰려는 습성은 남아 있었네요 ^^;;

 

 저는 저녁에 또 친구들을 만나 밤새도록 즐겁게 달리기 위해서(?) 마음 단단히 임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서재 이웃분들의 서재 블로그에 방문해서 인사 차 댓글을 남기고 싶은데

 

 약속이 있어서 간단하게 눈팅만 하게 되었습니다.

 

 서재 이웃분들뿐만 아니라 모든 분들 다 좋은 주말 보내셨으면 합니다. ^^

 

  

 

 

 그리고 제가 요즘 카카오스토리앓이 중인데

 

 서재 이웃분들 중에서 카카오스토리 계정이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저랑 친추 맺어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성별, 나이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혹시 원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비밀 댓글 남져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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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4-28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 끝나고 자유시군요!!! 날씨 너무 좋고, 기분도 좋으실테고...
청춘을 마음껏 즐기시길 바래요! 부럽네요^^

cyrus 2012-04-30 13:31   좋아요 0 | URL
ㅎㅎ 이번 주말을 그냥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버렸어요.
주말이 너무 금방 지나가버렸네요 ㅜㅜ

차트랑 2012-04-2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대학생일 때는 저렇게 좋은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 같다는 ㅠ.ㅠ

많은 분들께서 비밀 댓글을 달아주셨으면 합니다^^
(아참, 시험도 끝났는데 친구분들과 신나게 노시구랴~^^)

cyrus 2012-04-30 13:33   좋아요 0 | URL
랑공님, 간만에 주말에 기분 좋게 잘 놀았습니다. ^^

사실 저 시는 제가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맨 처음 나오는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 중학교에 입학해서 맨 처음 배우면서 알게 된
시이기도 하죠, 그 때 국어선생님이 이 시의 의미를 조화의 중요성으로
설명하셔서, 그 때 기억을 떠올리면서 블로그에 써봤습니다. ^^

2012-04-29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30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30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4-29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하느라 바쁘실텐데, 뭐 글을 의무적으로 쓸 필요야 없겠죠.^^ 또 사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뭘 쓰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날씨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뭐든지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 보기 좋은데요. 뭐 근데 글쓰는 솜씨는 여전하신데요. (저는 카톡도 카카오스토리도 하지 않아서, 스마트폰을 거의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cyrus 2012-04-30 13: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요즘 가면 갈수록 바빠지는데 의무적이라기보다는 그냥 생각날 때마다 쓰려고요, ^^

티티카카 2012-04-29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오셨군요~ 새 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동안 지난 글들을 읽어봤어요. 저는 서재를 사용하지 않아서 논쟁의 전말은 모르겠으나 사이러스님의 말씀은 동감합니다~^^

cyrus 2012-04-30 13: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티티카카님. 그렇게 특별한 내용도 없는데 읽으셨다니
쑥스럽네요 ^^;; 저는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온지라 논쟁의 결과만
보게 된 셈인데 논쟁에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의견 역시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하지 않은 채 비판에 치우친다면
서로 간의 깊은 갈등의 상처만 깊어질뿐이지요 ^^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요즘 같은 계절은 딱 시집 읽기에 좋다. 꼭 낙엽과 함께 우수의 감상이 사로잡히는 가을에만 시를 읽으란 법은 없다. 봄이라는 계절도 때때로 인간의 감성을 자극해주기도 한다. 이제 곧 꽃봉오리가 피기 시작할 때 오랜 겨울 추위동안 움츠린 채 메말라가던 감정을 시집으로 촉촉하게 적셔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요즘 시집을 읽긴 한데 아직 '봄'과 관련한 시를 단 한 편도 접해보지 못했다. '봄'과 어울리는 멋진 시나 구절을 발견하면 개인적인 감상문을 쓰고 싶었는데 여간 접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도 '봄'이라고 먼저 떠오르는 시는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뿐이다.

 

이 시를 아는 사람이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는 나온지도 무척 오래됐다. 일제 강점기 시기인 1920년대쯤에 나온 걸로 기억하고 있다. 이 짤막한 시를 처음 접해본 사람들은 이 시를 봄이라는 계절을 고양이로 비유한 내용으로만 볼 것이다. 하지만 1920년대 이 시 한 편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당시 시단을 놀라게 할 정도로 극찬을 받았다. 그 당시 문단의 입장에서는 고양이를 봄과 연결시키는 감각적인 연상이 참신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유행하던 낭만주의 시단과는 차별화된 정서와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오늘날까지에도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를 보게 되면 시적 분위기는 봄의 기운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생기발랄하다. 새로운 생명의 약동이 시작되는 봄 특유의 역동적인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봄'을 연상시키는 유일한 시로 내 머리 그리고 가슴 속에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가 단순히 감상적이라서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시의 분위기처럼 봄은 모든 사람들들을 즐겁게 해주고 얼어붙은 감정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해가 뜨면 대지에는 양지와 음지가 생기게 되듯이 봄은 우울과 애상감이라는 어두운 감정을 동반하기도 한다. 특히 이장희라는 시인의 생애가 그러했다. 국권이 상실된 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생의 관계들은 유약하기만했던 시인의 감정을 괴로움의 나락 속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것은 젋은 시인의 생를 단축시켜주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시인 이장희는 1900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부유한 집에서 11남 8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실상 시인은 어린시절을 그리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소속된 관리였고 어머니는 시인이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계모 밑에서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와의 불화 관계가 깊어지게 되었다. 부유한 관리였지만 한편으로는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라고 볼 수 있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부친이 중추원 소속 관리로서 일본인들과의 교제가 빈번하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다.가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장남 이장희를 그의 아버지는 자신처럼 조선총독부에서 일할 수 있는 명망 있는 관리가 될 것을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아버지의 제안에 한 번도 따르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이장희 시인을 버린 자식으로 아주 단념하였다 한다. 그래서 시인은 극도로 빈궁한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불화 관계보다 시인을 괴롭혔던 것은 바로 친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괴로운 기억이다. 어미니의 때 이른 죽음은 시인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상처로 자리잡게 되었을 뿐만 우울과 에상으로 가득찬 섬세한 감성을 형성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교우 관계도 그리 폭넓지 못했다. 그와 친했던, 지금도 잘 알려져 있는 문학가 몇 몇을 꼽으라면 양주동, 이상화, 현진건, 오상순 등이 있다. (이상화, 현진건 역시 대구 출신이며 이장희와 함께 대구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시절에 활동한 대표적인 문인들이다) 문인들의 교류가 무척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생전에 시인으로서의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시집 한 권도 출판해본 적이 없었다. 점점 가면 갈수록 시인의 삶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고 이미 병들고 지쳐버린 시인의 감정은 피폐해져만 갔다. 상실된 주권의 나라에서 살아야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 절망과 허무감에 빠졌던 젊은이들은 어떻게든 그러한 괴로움의 정서를 떨쳐내버릴 수 있는 삶의 해방구를 찾으려고 했다. 이장희도 마찬가지였다. 억눌려 있는 생의 절망감과 허무감을 시를 통해서 표출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도 허사였다. 결국 이장희는 29살의 젊은 나이에 청산가리로 음독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죽기 직전 그는 기괴한 행동을 보였다고 하는데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놓았다고 한다.

 

이장희는 고양이를 소재로 한 시를 '봄은 고양이로다'뿐만 아니라 '고양이의 꿈'이라는 제목의 시도 썼는데 '봄은 고양이로다'의 시적 분위기와는 무척 상반된다. '고양이의 꿈'에서도 봄 기운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봄 특유의 우울함과 허무함이 묻어 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생이 일찍 마감될 것이라는 예감했던 것일까?  검은 그림자의 칼날에 베인 '푸른 고양이'는 시인 본인를 상징하고 있다. 푸른색은 우울함을, '멀리서 찾아오는 검은 그림자의 칼날'은 죽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를 연상케 한다.  

 

 

   고양이의 꿈


                                                         이장희

 

 


 시내 위에 돌다리, 달 아래 버드나무

 봄 안개 어리인 시냇가에, 푸른 고양이

 곱다랗게 단장하고 벗겨 있소, 울고 있소.

 기름진 꼬리를 쳐들고

 밝은 애달픈 노래를 부르지요.

 푸른 고양이는 물오른 버드나무에 스르르

 올라가 버들가지를 안고

 버들가지를 흔들며 목놓아 웁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칼날같이 은같이 번쩍이더니,

 푸른 고양이는 볼 수 없고,

 꽃다운 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저 쓸쓸한 모래 위에 선혈만 흘러있소.

 

 

  

   

그가 생전에 발표했던 수가 많지 않은 시에는 유독 '봄'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된다. '봄은 고양이로다'를 제외하면 요절시인 이장희에게 '봄'은 허무와 상실의 계절이었다. 29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동안 젊은 이장희는 '봄'이 주는 긍정적 양지(陽地)에 가 보지 못했다. 희망, 생성 그리고 부활을 상징하는 봄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이장희에게 '봄'은 절망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살아가면서 행복과 사랑 한 번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던 시인은 그나마 고독함과 우울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룩한 유방'뿐이었다. 자신의 쓸쓸한 심령으로 인한 '무심한 식욕'을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잠시일뿐. 이마저도 하늘 위로 쏜살같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청천(靑天)의 유방(乳房)

 

 

                                                                이장희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볕을 놓으며

 불룩한 유방(유방)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송이보다 더 아름다워라.
 
 탐스러운 유방을 볼지어다

 아아 유방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이때야말로 애구(애구)의 정(정)이 눈물 겹고

 주린 식욕이 입을 벌이도다

 

 이 무심한 식욕
 이 복스러운 유방...

 쓸슬한 심령이여 쏜살같이 날러지어다.

 푸른 하늘에 날러지어다.


 

 

 

에드거 앨런 포, 샤를 보들레르, 장 뤽튀스 그리고 이상. 이들의 공통점은 빈곤한 삶을 살다 갔으며 세상은 남들보다 앞서면서도 독특한 천재성을 알아주지도 못했다.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취급 받았으며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삶을 저주하다가 일찍 이승을 떠났다. 무엇보다도 이 네 사람의 관계를 확실하게 묶어주고 있는 것이 바로 훗날 자신들의 이름을 빛나게 해준 시(詩)다.

 

이제부터 저주받은 시인의 리스트에 이장희를 추가해야 한다. 이장희 역시 앞에서 언급한 네 명의 시인 못지 않게 정말 불행한 삶을 살다 갔다. 아니, 오히려 이들보다 더 죽어서도 여전히 불행의 그림자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네 명의 시인들이 비해 생전에 남긴 시가 많지 않다. 시대를 앞서간 섬세한 감상을 강조하는 문학성을 세상 앞에서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장.희'. 이 이름 석 자의 요절시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대구 출신 사람들이라면 제일 먼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가 떠올리기 쉽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서도 문학적인 면모가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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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카카 2012-04-07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봄과 고양이가 어울려져 노는 게 마냥 아름답네요.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시, 참 좋아했는데... 시인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군요.(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나머지 두 편의 시 소개도 고맙습니다. 이김에 시집을 빌려봐야겠네요. 잘 보았어요!
덧) 사진이 너무 귀엽네요. 보자마자 꺆

cyrus 2012-04-28 16:16   좋아요 0 | URL
티티카카님, 제가 이번 달 내내 바쁜 관계로 뒤늦게 답글을 달게 되었네요.
아쉽지만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이장희 시집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몇 편의 시는 국내 시인들의 대표적인 시들을 모은 시집에서 간간히
볼 수 있는 수준이라서 시인의 문학적 가치가 제대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

2012-04-07 0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8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4-2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을 자주 쓰셨는데
최근 전혀 글을 볼수가 없군요.
행여 그동안 알라딘을 뜨겁게 달구었던 일부의 내용이
마음에 걸려있는 침묵이라면 그러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을 놓치는 것은 독자인 제게 손해가 크답니다.
너무 개의치 마시고 글을 써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마음이 딴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들어 매시기를....

당신의 애독자 차트랑공 드림

cyrus 2012-04-28 16:21   좋아요 0 | URL
차트랑공님, 제가 이번 달 내내 시험공부하느라 바빠서
한동안 서재 블로그를 방치하고 있었습니다. ^^;;

사실 뒤늦게서야 오랜만에 서재에 와보니, 제가 안 들어온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더군요. 하필 제가 호감적으로 보고 있는
이웃분들이 논쟁에 휘말려 있어서 안타깝네요.

그래도 랑공님이 저를 생각해주셨다니 정말 기쁘면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시험도 끝나겠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이 찾아왔으니
오랜만에 글도 쓰고 다른 이웃분들이랑 교류를 하려고 합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요, 일교차가 큰 날씨인만큼 감기 조심하세요 ^^


차트랑 2012-04-2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험중이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생들도 중간고사 시험을 치루는게 맞는데 ㅠ.ㅠ

워낙 고등학생들의 시험에 몰두하다보니
고등학생이 아니면 시험이 없는 줄 알았나봅니다^^

선생님을 뵈러 대전으로 내려 갈때면
모든 분들이 대전에 가고있나보다 생각하게되더라니까요^^
참으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지 않을 수 없다니까요.
저도 어쩔수가 없는 거 있죠..ㅠ.ㅠ

cyrus 님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모두 다 소중한 분들인데 말이지요...

책을 읽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에요^^
부럽습니다.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리고요^^


 
찰리 채플린 - 모던 타임즈 - [할인행사]
찰리 채플린 감독, 찰리 채플린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이번에 학교에 듣고 있는 경영학 수업 중에 '노사관계론'이라는 과목을 수강하고 있는 중이다. 말 그래도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사회문제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특히 '노사관계론' 과목은 이번 학기에 들어서 수강신청한 과목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 비록 담당교수님이 점수평가하는데 있어서 인색하다는 평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 발생하고 있는 노사관계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접하는 것만이라도 만족한다. 무엇보다도 이 수업이 좋은 점은 수업방식에 있다. 노사관계 문제에 있어서 약소의 힘을 가진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경영가들에게 손을 들어주는 데 치우쳐져 있는 교과서 위주의 수업보다는 경영가와 노동자, 타협과 갈등으로 이어져 있는 두 관계에 비롯되는 문제를 균형적인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강조하고 있다. 말 그대로 노동자의 입장에서도 사회현상의 문제를 바라보고,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흐름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학습중점으로 두고 있다.

 

며칠 전에 산업사회의 문제점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 유명한 고전영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시청하게 되었다. 이름만 들어봤던 명작을 이 수업을 통해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두 시간동안 그 영화 한 편, 풀버젼을 보게 되었다! 유명한 영화를 본 것도 좋았지만 수업 두 시간을 영화시청으로 때울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하루 종일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하는 공장 노동자 찰리.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장 사장의 감시를 당하며 나사를 조인다. 심지어 그에게는 담배를 피울 여유도 없다. 몰래 담배 한 개비를 피우기 위해서 입에 문 순간, 공장 곳곳에 설치된 거대한 화면에서 사장이 등장하여 담배 한 개비 피는 것마저도 게으름으로 생각하여 크게 호통을 친다. 그리고 얼른 다시 컨베이어벨트 작업장으로 갈 것을 명령한다. 이러한 작업환경에서 살게 되다보니 찰리의 직업정신은 어느새 비정상적인 직업병이 되었다. 찰리 본인 스스로 절제하지 못할 정도로 나사와 닮은 모든 것들을 보이는 족족 조이려 달려든다. 심지어 중년 여성의 앞섶에 있는 단추를 보고도 연장을 들고 달려들어 된통 혼나고, 톱니바퀴에 빨려들어 가서까지도 나사를 조이려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통지서다. 그리고 그는 신경쇠약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공장은 찰리가 컨베이어벨트 노동에 투입하는 순간부터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다. 공장에 해고되는 순간까지도 일만 죽어라 하는 공장 속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노동을 비인간화하는 원흉으로 지목된 생산 방식은 '자동차왕' 헨리 포드에 의해 설립된 1913년 T모델 자동차를 싼 값에 쏟아낼 수 있게 해준 바로 그 발명품이다. 일반적으로 '포드'라는 이름만 들으면 자동차를 만든 위대한 발명가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자동차 산업을 주도한 개척자로 알려지게 된 것은 자신이 창안한 생산 방식 덕분이다. 포드 자동차는 일관된 생산 방식, 즉 '포디즘'(Fordism)으로 현대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 대량생산체제의 창조주이다. 오랜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세상사람들에게 포드주의에 의한 대량생산은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그러나 포디즘의 등장은 '인간 없는 노동'을 만들었다. 엄격한 노동규율과 통제를 요구했다. 노동자의 동작을 23개의 동작으로 쪼개서 각각의 기본동작에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계산해 직무관리를 하고 노동자의 동선을 직선화하기까지 했다. 이런 방식이 있었기에 공장주들은 노동자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 면밀히 감시할 수 있었다. 이런 감시의 눈 속에서 노동자들은 제대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장받지 못했고 그저 공장 속의 '기계'가 되어야만했다.

 

 

어찌 보면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는 공장 실직자이며 떠돌이 찰리가 어떻게 해서 부조리한 산업사회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보여주고 있는 삶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래도 '모던 타임스'라고 한다면 우리의 주인공이 거대한 수레바퀴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오르게 되다보니 이 영화를 대량생산에 눈이 먼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문제적 영화로만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모던 타임즈]의 백미는 영화를 통해 고발하고자 하는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희화화하는 장면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 찰리가 인간의 삶을 병들게 만드는 산업사회 속에서 어떻게 행복과 자유를 찾아가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 역시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 만한 핵심적인 줄거리이자 영화 전반을 이루고 있는 장면이다.

 

정신병원에 빠져나와 떠돌이가 된 찰리는 얼떨결에 사회주의와 관련된 시위 주동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만다. 하지만 그 곳은 찰리에게 뜻밖의 행운을 선사해주었다. 찰리는 탈옥수를 막는 공로로 한순간에 모범수가 되어 부족할 것 없는 감옥 생활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 공로 덕분에 찰리는 모범수로 석방되는 동시에 감옥소장의 추천서 한 장으로 인해 어디든지 안정된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는 보장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감옥 밖의 도시는 찰리에게는 불편함만 가져다 주었다. 찰리의 능력에 맞는 일자리도 없거니와 작업하는 데 조금만 실수해도 쓸모 없는 노동력으로 치부하는 현실은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찰리의 숨통을 죌 뿐이었다. 찰리는 각박한 현실보다 감옥소 생활이 더 낫다고 생각해 일부러 가게에 있는 사과를 훔치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범죄자가 되어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빵을 훔치다가 적발된 소녀를 만나게 되어 자신이 빵을 훔친 죄를 뒤집어 씌우게 된다.

 

그 이후로 찰리와 소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우여곡절 끝에 찰리는 백화점 경비로 취직을 하게 되지만 강도가 된 예전의 공장 동료와 함께 백화점에 진열된 술을 마시는 바람에 또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만다. 무일푼 떠돌이 신세가 된 찰리와 소녀는 화려한 집에서 부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언제 저런 집을 장만할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한다. 채플린과 소녀가 서로 행복한 미래를 꿈꾸지만 실상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랑의 행복 그리고 안정된 직장과 집, 이 세 가지의 소원을 꿈꾸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하는 오늘날 젋은 세대들의 비애를 보는 듯하다. 수많은 실직자들이 늘어나기만 했던 그 당시 경제대공황 시절의 미국이나 신자유주의 경제로 인한 변변한 직장 하나 구하지 못한 채 비정규직 생활로 전전하는 88만원 세대의 모습이다. 이제는 돈이 없어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마는 '삼포세대'라는 또하나의 불명예스러운 명함을 받게 되었다. 집 장만은 꿈도 꿀 수 없다. 출산을 꺼릴 정도로 보육문제는 젊은 부부에게 엄청난 부담이다. 모두가 이러한 불투명한 사회 속에서 불안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좌절의 시대'이다.

 

하지만 찰리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좌절의 눈물을 흘린다거나 사회에 대해서 큰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는 예전 공장 직원으로 생활하면서 경험하지 못한 삶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의 행동들이 하나같이 도덕적으로 어긋난 사회적 일탈이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의 행복에 겨운 나머지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동 그 자체다. 찰리와 소녀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손에 손을 잡고 밝게 웃으며 저 멀리 지평선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간다.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무슨 소용이 있나요." 흐느껴 우는 소녀에게 채플린은 대답한다.

 

 "그렇지만 죽는다고는 말하지 마!  삶을 포기해선 안돼. 우린 잘 해낼 수 있어!”

 

그리고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담긴 '스마일'을 권한다. "슬픔의 흔적은 모두 지워버리고 기쁜 얼굴을 하고 있으렴." 주제가 '스마일'이 화면에 가득 흐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비록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직장과 집을 얻지는 못했지만 찰리는 이미 행복을 발산하게 해주는 희망의 근원을 발견했다. 무일푼이지만 언제나 그의 곁을 지켜주었던 소녀 그리고 웃음이었다.

 

채플린은 '웃음없이 지내는 날은 무의미한 하루일 뿐이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명언의 의미대로라면 어쩌면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를 사회문제를 고발한 어두운 흑백영화로 연출하기가 나름 아쉬웠을 것이다. 원래 마지막 장면은 소녀는 수녀가 되어 찰리와 영영 헤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만약에 이렇게 됐다면 [모던 타임즈]는 그야말로 답답하고 희망 없는 시대의 초상화로 기록될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채플린은 지금의 유명한 장면을 채택했다. 어쩌면 영화의 엔딩 장면은 웃음이 사라진 당시 미국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려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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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4-05 11:37   좋아요 0 | URL
이 영화 참 인상 깊게 봤는데.
그래도 이 영화는 산업사회에 대한 조롱이고 페이소스란 생각이 들어.
엔딩이 어떤지 기억에 없지만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렇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웃어야 해. 뭐 그런 자조는 아닐까? 암튼...

cyrus 2012-04-06 21:16   좋아요 0 | URL
사실 이 영화, 산업사회 속 노동자들의 실상을
중심으로 보라고 교수님이 보여주셨는데 저는 그냥 이 영화를
극장에서 영화 보듯이 봤어요 ㅋㅋㅋㅋ

꽃도둑 2012-04-05 13:18   좋아요 0 | URL
아 귀여운 찰리... 사랑스러운 사람,,, 그리고 천재!

cyrus 2012-04-06 21:16   좋아요 0 | URL
채플린 영화들을 모아놓은 DVD를 구입하고 싶더라고요,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