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의 시련으로부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 남자가 사는 법

 

 

 

 

 

 

 

빈센트 반 고흐  「귀가 잘린 자화상」 1889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넓은 보리밭 한가운데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버리지 못했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눈 지 이틀 만인 1890년 7월 29일 동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신질환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눈을 감은 뒤에야 세상은 그를 알아주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인상주의의 거장, 빈센트 반 고흐.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서양화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고흐는 정말 '불행'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릴 정도로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 사랑하던 여인과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하고 아버지까지 사망하자 큰 상실감에 빠진다. 광적인 신앙을 갖기도 했고 자기 학대를 일삼기도 했다. 술과 담배, 정신질환으로 몸과 마음은 쇠약해져만 갔다. 고흐는 잘 알려진 대로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아를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고흐에게 정신병원은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병동에 생활하는 동안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삶이 다른 데가 아닌 정원에서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슬프지 않다"라고 털어놓기도 한다.

 

고흐는 정신병원 내부에 마련된 정원을 거닐면서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오히려 세상과 단절된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은 고흐의 예술혼을 꺾지 못했다. 정원에 있는 꽃과 나무에 둘러싸인 채 홀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고흐에는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정신병원에서 놓여나자마자 들판으로 달려나가 꽃핀 나뭇가지마다 찾아 다니며 온종일 그림만 그렸을 고흐의 모습이 상상된다. 지독한 삶의 시련으로부터 만신창이가 된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그림에 몰두했던 것이 그를 화가로서의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Vecent,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돈 맥클린의 노래 'Vecent'의 아름다우면서 슬픈 멜로디와 가사는 고흐의 불행한 사연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고흐가 불행한 삶의 고통들을 어떻게 극복했고 견뎠는지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리고 고흐가 왜 삭막하고 음침한 정신병원 내부의 정원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여러 점 그렸는지도.

 

고흐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원 속에 들어가면 꽃과 나무와 대화를 나눈다."라고 했다. 세상에 의해서 고집스럽고 괴퍅한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힌 채 살아가야만하는 고흐의 서글픈 심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만약에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은 채 홀로 남의 정원 한가운데서 꽃 한 송이 앞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면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만 해도 짐작이 간다.  

 

고흐는 꽃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못한 세상에 대한 자조 섞인 비애를 뱉어냈을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과 밀애를 나누듯이 꽃의 아름다움을 높이 사는 감미로운 표현을 했을까? 그가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을지 확인하는 방법은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고흐는 어떻게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자신의 처지를 꽃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했을 것이다. 불행한 삶을 살다간 고흐의 인생을 연상시키게 하는 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류시화 시인이 쓴 <오월 붓꽃>이다. 이 시에는 고흐가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붓꽃과 그를 심은 화자가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빈센트 반 고흐 「붓꽃」 1889년

 

 

 

 

봄눈이 내리던 날

오월 붓꽃을 심었지요

병을 앓고 난 끝이었는데

당신은 말했지요

아직 눈이 몇 차례 더 내릴 거라고

그 덕에 뿌리가 강해질 것이라고

늘어진 쥐똥나무 가지를 바람에 묶어 놓고

잠이 덜 깬 흙을 어루만져 주자

당부할 필요도 없이

봄은 말하는 듯했지요

잎을 내기 위해서는 상처를 견뎌야 한다고

 

(중략)

 

신비에 가까운 보라색 얼굴

겨우 겨울을 넘긴 가난과 화려

일시적인 소유에 기뻐하는 순간이 지나면

마지막 꽃잎을 떨구면서 오월 붓꽃은

속삭이는 듯했지요

나는 당신이에요, 나는 죽지 않아요

또 여러 번의 봄이 지나고

이곳에 나 혼자 남는다면

그래도 혼자 남는 게 아니라는 걸

오월붓꽃이 말해 주겠지요

 

(생략)

 

 

- <오월 붓꽃> 부문, p 58~59 -


 

 

마음의 병으로 괴로워하는 화자는 봄눈이 내리던 5월에 붓꽃을 심었다. 그는 애초부터 남은 삶을 더 이상 연명하기를 바라지도 않을 정도로 회의적이다. 그러던 중 화자는 우연하게 자신이 심은 붓꽃의 작은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붓꽃은 화자에게 말을 건넨다.  "아직 눈이 몇 차례 더 내릴 겁니다. 그 덕분에 뿌리가 강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따뜻한 봄을 맞이하게 되면 이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때까지 차디찬 겨울, 즉 삶이 안겨준 시련으로 인해 생긴 상처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힘든 시간이 지나가고나서야 붓꽃은 화려한 보라색을 발하면서 아름다운 꽃 한송이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붓꽃도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는 불변의 과정을 거스를 수 없는 법. 화려했던 보라색 꽃이파리가 하나씩 땅으로 떨구어지기 시작하면서 붓꽃은 낙화(落花)를 눈 앞에 두게 된다. 그러면서 붓꽃은 자신을 심어주고, 보살펴주고 아껴준 화자에게 애정이 담긴 말 한 마디를 남긴다. "나는 당신이에요, 나는 죽지 않아요."  자신의 죽음 때문에 삶의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붓꽃이 화자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였다.

 

붓꽃의 꽃말은 '기쁜 소식'이다. 아름다움을 발산하기에는 붓꽃에게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붓꽃은 낙화의 시간이 다가온다고해서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다. 붓꽃의 생은 여기서 한 번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년 봄에 다시 개화하기 때문이다. 꽃봉오리가 활짝 펴기 전까지 이어지게 될 추운 겨울철을 견대내면 된다. 붓꽃 한 송이가 피고 지는데까지의 시간적 과정은 인간의 흥망성쇠를 압축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는 기쁜 일, 불행한 일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줄곧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 앞에서 스스로 괴로워하고 비탄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불행한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다시 찾아오게 될 희망을 기다린 채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으로 받은 정신적 상처를 혼자 치유한다고해서 빨리 낫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의 정신적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건내줄 수 있고 '공감'과 '연대'로 끌어안아야 한다. 고흐는 운이 좋게도 자신의 외골수적인 성격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행복함을 맛볼 수 있었다. 동생 테오 반 고흐, 닥터 가셰 박사, 우체부 룰랭 씨 그리고 넓은 정원 속에서 그가 먼저 말 걸어오기를 기다렸던 수많은 꽃과 나무들. 

 

 

  

 

 내 인생의 화연영화는 바로 너와 함께 하고 있는 그 순간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사자성어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의미한다. 영화 탓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슬픔이 묻어 있는 느낌이다. 아름다운 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는 아쉬움, 그래서 더 깊게 묻어나는 애잔함까지. 그래서 나는 한 때 잠시나마 화양연화는 별도로 '존재해서는 안되며' 삶의 모든 시간은 이른바 '전성기'이든 아니든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류시화 시인의 <화양연화>를 읽는 순간, 그런 인식은 단지 화려했던 시간 뒤에 찾아오는 아쉬움과 후회를 어떻게든 잊어버리기 위한 자기합리화적인 위선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마르크 샤갈  「생일」 1915년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들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우리는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혀버린 존재를

 

 내가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훗날 인생에서 우연히 명성을 얻고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 때가 나의 화양연화였지

 다락방 어둠 속에서 달처럼 희게 빛나던

 그 이마만이 기억에 남아 있어도

 

 

 - <화양연화> 부분, p 68~69 -

 

 

 

이 시는 제목과 내용만 본다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 그 중에서 뜨겁게 사랑을 나누던 과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는 분명 '사랑 노래'이다. 연시(戀詩)는 대개 실연의 상처를 노래하거나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함으로써 임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자의 고독과 상처를 드러내는 특징을 갖는다. <화양연화>의 전체적 내용을 본다면 과거 사랑을 나누었던 임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읊조리고 있지만 마지막 5연에서 화자는 지나간 과거의 시절이 자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화자가 그리워하는 '사랑'이란 단순히 상대에게 성적으로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동떨어진 채 살고 있는 '난해한 시'인이다. 어떻게 보면 <화양연화> 속 화자야말로 주류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던 예술가 반 고흐의 삶과 가깝게 느껴진다. 시인인 화자는 자신의 문학성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좌절감에 시달리다 못해 정신적으로 큰 문제로 고민하게 되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직전까지 오게 된다. 하지만 화자에게는 본인의 슬픔을 이해해줄 수 있는 연민의 눈물을 흘릴 줄 알며 나락에 빠진 불쌍한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라는 연인이 존재하고 있다. 시 속에 등장하는 '나'의 연인 '너'는 화자가 쓴 난해한 시마저도 이해할 정도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 연에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나'는 현재 '너'와 단절된 상태 중이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아무도 돌봐주지도 않는 외톨이 시절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후회한다. 시인 '나'에게 있어서 화양연화는 유명한 시인이라는 직함이 만들어주는 명예와 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화자의 진정한 화양연화는 자신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힘들 때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안아주고 보살펴 주었던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으리. 이제는 '너'의 존재가 남기고 간 다락방 안에서의 추억은 '고독'이라는 어두운 감정에 지배당해 점점 기억의 망각 속으로 퇴색되어질 뿐이다.   

 

 

 

 

 우리는 '류시화'의 시가 더 필요하다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 <옹이> 전문, p 12 -

 

 

 

동양적 자연관에 비추어 보면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즉, 자연을 자신과 분리시킨 객관적 관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 속에서 자연과 합일된 삶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상태를 물아일체(物我一體) 등으로 표현한다.

 

두 번째 시집 발표 이후 무려 15년 만에 쓴 류시화 시인의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에 수록된 시들은 대체적으로 '물아일체'의 자연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체인 '화자'와 객체인 '자연', 즉 꽃, 옹이, 뭉돌, 반딧불이 등 일체 및 조화를 이루었다는 감정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물아일체적이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적인 자연관과 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시인이 단지 '인간 대 자연'이라는 범위의 틀 속에서 조화만을 강조하고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물아일체적 사상을 좀 더 '인간 대 인간'으로 전위함으로써 현대사회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공감'과 '연대' 그리고 '조화'를 그리워하고 있다. 시인은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공감'과 '연대'의 감정을 끄집어내어 시를 통해 감정이 빈곤한 독자들을 위해 환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고통, 불행, 시련을 견뎌줄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시집의 추천사를 쓴 이문재 시인은 우리에게는 시가 더 필요하며 더 많아져야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내'가 '나'를, '내'가 '너'를 만나기 힘들어진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속세의 명예와 부에 대한 탐욕을 놓지 않으면서도 감정의 빈곤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요즘, 우리에게는 '류시화'의 시가 더 필요하다. 네 번째 시집이 언제 발간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빛나는 문장들이 벌써부터 나오기를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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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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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 '선거 불완전론' 레토릭의 위험성

 

 

 

 

 

 

 

 

최근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안을 놓고 당내에서 내홍의 사태가 번지면 번질수록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 결과 여부에 대한 화제가 살짝 묻힌 감이 있다. 이번 주 월요일에 현장투표와 모바일투표를 벌였고 오늘 실시하는 미투표자를 대상으로 한 모바일 투표 결과를 합산하여 통합진보당의 차기 대표가 선출된다. 대표 경선은 구당권파의 지원을 받는 강병기 후보와 신당권파의 강기갑 후보의 양자 대결로 펼쳐지고 있어 선거 결과에 따라 당의 쇄신 방향뿐만 아니라 이석기, 김재연 의원의 제명이 결정될 것이다.    

 

이석기 의원은 올해 상반기동안 수많은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명언들(?)을 남겼다. 애국가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인해서 정계, 대중, 여론으로부터 '종북주의자'라는 비난의 뭇매를 받았지만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비난대상이 되고 있었던 자신의 정치적 가치관과 그간의 행적들에 대해서 자기합리화하는 발언도 있었다. 4.11 대선이 끝난 이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이 거론되면서부터 그 문제적 이슈 한가운데에 이석기 의원이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서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이 의원은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하여 당내 부정선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 의원은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 대해 "일부 부실이나 부정은 있을 수 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번 사태는 전체 선거를 부정할 만큼의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번 경선을 '총체적 부정선거'로 매도하는 것은 정치적인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 진보정당은 천상의 정당이 아니다. 진보정당이기 때문에 100%여야 한다는 건 대단히 무서운 논리"라며 당 안팎의 비난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일부 부정을 인정한 점 그리고 완벽한 선거가 없다는 그의 주장을 통해서 당내 비례대표가 부정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이 의원 본인이 스스로 시인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비례대표로 선출할 수 있게 만든 부정적인 과정들이 정당한 행위였음을 뻔뻔하게 자기합리화하고 있다.

 

그런데 '선거의 불완전함'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이 의원의 레토릭(Rhetoric)은 논리성이 부실하면서도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기도 하다. '선거'(選擧)국민에게 정치참여의 기회와 통로를 제공하여 여러 형태의 정치참여 중 가장 일반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하도록 기능한다. 이 의원의 '선거 불완전론'은 선거의 정치적 참여기능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점 또한 강조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1987년 6.29 선언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 사회로 이행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정치과정은 국민들에게 정치불신과 함께 정치적 소외의식을 불러일으켜 '정치적 무관심'(Political apathy)을 낳게 만든다. H.D. 라스웰(H.D. Lasswell)과 M.A. 캐플런(M.A. Kaplan)은 현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탈(脫)정치적, 무(無)정치적, 반(反)정치적' 이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탈정치적 무관심은 권력의 행사에 의한 자신의 요구 충족에 실패하여 권력에 환멸을 느끼고 후퇴하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무정치적 무관심은 예술 등 정치 이외의 가치에 극단적으로 기울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반정치적 무관심은 아나키스트(Anarchist)나 종교적 원리주의자 등 자신이 갖는 가치가 본질적으로 정치와 충돌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나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무관심은 탈정치적 유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고 자신이 요구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허술한 정치권력의 행보에 대해서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서 불신에 이르게 된다. 정치에 대한 불신의 폭이 깊어지면 깊을수록 국민들은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의 정도가 낮게 되며 정치과정에 대해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문제점에만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면 자칫 '민주주의'를 현실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그저 '민주적 원리만을 강조하는 이론'으로 인식하게 된다.

 

 

 

 

 민주주의, 정말로 최악의 정치 체제인가?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민주주의는 우리가 여태껏 채택했던 모든 제도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치 체제'라고 말했다. 만약 '정치적 무관심'이 만들어 낸 패배주의적 감정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어리석은 대중이 처칠이 한 말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모순과 문제점을 옹호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은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정치 체제란 말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즉, 완전히 맞다고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틀렸다고도 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최악의 정치 체제이면서도 동시에 인류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최고의 정치 체제다. 처칠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역설적 표현이 구사된 영국식 유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로저 오스본이 펴낸『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본다면 고대 아테네에서 처음 등장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민주주의 체제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부터 시작해서 입헌군주제가 탄생하게 만든 영국의 명예혁명, 유럽 정치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의 과정 등 이름만 들어도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왜 처칠이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치 제체'라고 말했는지 독자들은 고개를 자연스럽게 끄덕이게 것이다.

 

 

 

 

 말도 많고 탈이 많았던 민주주의의 역사   

 

민주주의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democratos(국민의 지배)'라는 말이 나왔듯이 그리스에서 기원하였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발전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직접민주주의에 그쳤다. 모든 시민들이 '입법의원'이 되어 직접 참여하였다. 이때의 여성들은 선거권이 없었고, 노예제도가 존속하고 있었다. 물론, 고대사회의 민주제도에서도 평등원칙이 존중되기는 하였으나 보편성에 입각한 만인의 평등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의 정치적 참여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러한 원칙을 최초로 문서화하여 선보인 곳이 오늘날 스위스 알프스에 위치하고 있는 그라우뷘덴이다. 1499년 그라우뷘덴 주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해 자유국가임을 선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주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투표제도 또한 실시했는데 국정 운영을 담당하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오늘날의 국민투표제의 형태라기보다는 주의 지도자가 제안한 정책사안에 대해서 마을 주민 전체의 합의를 도출하는 공동체적 측면이 강한 투표제였다.

 

이렇다보니 공동체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을 강조하는 그라우뷘덴의 정치형태에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오직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공동체적 삶에 익숙한 주민들은 자아의 주관적 의식을 배제한 채 정책결정에 참여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라우뷘덴의 통치 기구들의 권한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집단적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사법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치명적 약점이었다. 

 

 

 

민중이 완전한 자주권을 쥔 상황에서 그 힘에 대한 견제가 부족하다면 제멋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나름대로 만들어놓은 법을 마을 전체가 통째로 위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735년 한 사내가 반역 혐의를 받은 사건이 터졌다. 용의자의 집은 약탈당했고, 추종자는 돌 세계를 맞았다. 한 마을 주민은 "합당한 왕국"에 의뢰해 재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곧 당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 133)

 

 

 

1688년에 발생한 영국의 명예혁명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왕권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역사 시간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명예혁명 이후에도 영국의 의회정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민주적이지 않았다. 정말 문자 그대로 '의회'만이 주권을 가진 의회정치였을 뿐 실질적으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의회에 입성하기 위한 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혈연 중심으로 유권자를 내세운다거나 매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비민주적인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정치 체제 속에서 인민의 대표로써 책임을 다하는 민주적인 '정치인'이 나올 리가 없었다.

 

 

1715년에서 1831년 사이, 스카버러 구에서만 서른여섯 번의 정기선거과 보궐선거가 치러졌지만 여러 후보가 경쟁한 것은 고작 일곱번 뿐이었다.  ...  중앙정부가 적어도 의석 하나를 수중에 넣거나 아예 두 의석 모두 독차지하기 일쑤였다. 

 

 (중략)

 

개인과 가문의 경쟁 구도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  진정으로 치우침이 없는 후보는 극히 드물었다.   (p 169)

 

 

비단 명예혁명을 이룩한 영국에서만 비민주적인 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민혁명의 전형이라고 알려져 있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또한 혁명 성취 이후 지금의 민주주의 체제로 온전하게 확립되기까지 수많은 진통을 겪어야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선거 투표율을 기록한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사료에 의하면 1791년 당시 파리에는 대략 8만 명의 유권자가 있었지만 이 중에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1만 7천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입후보한 총 946명의 선거인단 중에서 고작 200명만 당선되었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 헌법에서는 인민들의 투표권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곧 실제 선거 투표 참여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프랑스 시민들이 투표를 행사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선거인단 사이에서도 자신들의 당선을 위해서 부패와 사기, 협박, 폭력이 은밀하게 자행되었다. 심지어 비밀투표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파의 후보의 추종자들은 버젓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투표할 정도였다.

   

 

 

 

 

학식이 높은 토머스 제퍼슨의 펜 끝에서 주로 다듬어진 독립선언문은

장엄하고 화려한 수사학의 극치를 드러내는 이념적 문헌이라 할 만하지만,

헌법은 넉 달 동안이나 논쟁과 줄다리기, 타협을 거듭하며 도출해낸 실용 문건이었다. (p 188)

 

존 트럼벌 「1776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의 미합중국 독립선언」 1820년

 

 

인류 최초로 삼권분립을 명시하였으며 자유민주제도를 성문화하는 등 근대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확립한 미국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곧 권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대립과 권모술수가 펼쳐진 미국 정치판의 역사이기도 하다. 독립혁명(1775~1776) 승리 이후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채택되기에 이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과정들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순전히 평화적으로 이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시계방향 순으로 왼쪽 위에서부터 토머스 제퍼슨(1743~1826, 제3대 대통령), 존 애덤스((1735~1826, 제2대 대통령),

애런 버(1756~1836. 제퍼슨 행정부의 부통령), 알렉산더 해밀턴(1755/1757~1804, 연방주의자),   

 

제퍼슨, 애덤스, 해밀턴 이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조지 워싱턴과 함께 미국 헌법 제정을 위해 이바지를 한 '동지'였으나 얽키고 설킨 상반된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서로 등을 돌려야하는 '적'이 되고 말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1790년에 조지 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에 취임했지만 강력한 중앙정부를 주장하는 연방주의자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정책대립으로 1793년에 사임하였다. 그리고 제퍼슨과 해밀턴을 주축으로 한 반 연방주의자와 연방주의자 간의 대립은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어졌다. 제퍼슨은 해밀턴과 같은 연방 당에 소속된 존 애덤스와 경쟁을 벌였지만 결과는 존 애덤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선거에 배패한 제퍼슨은 부통령에 만족해야만 했지만 두 사람의 대립은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현되었다. 이번에는 제퍼슨이 애덤스를 물리치고 제3대 대통령으로 올랐다. 재미있게도 제퍼슨의 승리에는 정적 해밀턴의 도움이 있었다. 해밀턴이 정적을 도와주게 되는 배경의 이유에는 자신의 또 다른 정적 애런 버의 정치적 진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선거에 패배한 애런 버는 부통령으로 임명하게 되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애런 버는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지닌 반 연방주의자인 제퍼슨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다. 애런 버의 분노는 1804년 해밀턴과의 결투를 성사하게 만들었는데 해밀턴은 결투 끝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어 사망하게 된다. 미국 건국을 위해 큰 공로를 기여를 한 정치인들의 복잡한 정파 경쟁은 오늘날의 미국 특유의 정당정치 체제를 완성해주었지만 그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에는 피를 부를 정도로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 이들은 정당의 이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에 반하는 숙적과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인신공격은 기본이며 해밀턴과 애런 버의 결투처럼 서로 간에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은 그 당시로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정치적 이념에만 초점을 둔 정파 경쟁은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모하여야 한다고' 천명한 독립선언문의 내용이 무색하게 할 정도로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대중들이여, 민주주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지어다

 

시중에 민주주의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서적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저 오스본의『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와 같이 정말 지극히 '현실적인' 민주주의의 역사를 상세하게 소개하는 책이 과연 몇 권이나 있을까?  고대 그리스부터 스위스 알프스, 영국, 미국,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공산주의가 무너져 냉전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되는 현대까지 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민주주의 체제가 인류의 투쟁과 타협이 반복되어 만들어 낸 고귀한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투쟁'의 의미에는 단순히 민주주의에 반하는 부당 세력에 맞서 자신들의 주권을 찾으려고 하는 인민들의 혁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정치인들 간의 대립 역시 포함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민들의 주권 확립과 거리가 먼 정치인들 간의 정치적 대립이 민주주의 체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 역사 속의 투쟁들을 보게 되면 대한민국 정치사를 보는 듯한 데자뷰를 불러일으킨다. 영국 명예혁명과 프랑스 혁명 이후의 역사를 보라. 1960년 4.19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이라는 획기적인 일대사건이었지만 4.19 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未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한 모습의 과정이 영국과 미국의 사례와 흡사한 면이 있다. 그리고 독립전쟁 이후 미국 내의 정파 경쟁은 정당이 내세우는 이념과 가치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정당 내부의 대립을 마다하지 않는 최근 여.야당의 행보를 보는 듯하다.

 

다만 적나라할 정도로 벌거벗은 민주주의의 역사만 가지고 여전히 민주주의를 '최악'의 체제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이상형에 사로잡힌 채 현실적인 정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정치적 무관심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투쟁'과 '타협'의 과정들은 결국 민주주의가 그 시대상의 유동적인 변화에 따라서 끊임없이 적응하기 위한 과정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민주주의 사회는 '수많은 삶의 표현'이며 최종적으로 달성되는 단일적인 체제가 아니라 늘 변화가 이루어지는 '현재 진행형'이다. (P 497)  변화가 잦고 불확실한 사회체제의 변화 과정 속에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부당한 간섭과 부정부패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해법을 확답을 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선례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부당한 반민주적 거대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도출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들 앞에서 굴복한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 채 왜곡된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대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곳에서 채택된 정체는 민주주의다. 우리는 해외의 적들이 극렬하게 매도했던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형제들이여, 민주주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지어다.  (1809년 영국의 언론인 겸 목사 알라이어스 스미스의 말, P 193)

 

 

 

정치적 무관심의 왜곡된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중들 그리고 민주주의 원리의 문제점만 부각시켜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여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사회의 국론을 분열시키는데 조장하고 우둔한 대중들을 현혹하는 시정잡배들에게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내부의 적들이 부정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완벽한 이상형'이라는 환상적인 옷을 입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민주주의의 역사를 제대로 한 번 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그 역사를 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지구상 '최악'이면서도 '최고'의 정치 체제. 진짜 '민주주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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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1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길을 잃었어요. 제퍼슨은 알겠는데..( '') 흥미롭네요. 다 이해가(절반도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시루스님 리뷰에는 문제가 없고 이건 제 탓이에요. 혹시 미국 대통령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인문서 알아요? :)

1,3,4공화국이 자행한 민주선거의 어이없는 작태가 떠오르지만 프랑스, 미국 역사도 흥미롭네요.

아홉시 뉴스에서 올 선거 지금의 최대 화두가 '경제 민주주의'라고 했어요. 지식욕에 불지르는 굿 리뷰예요! 뭐 제 지식욕은 당연히 지식욕에서 끝납니다. 대부분.( '')

좋은 주말 밤이에요^^

cyrus 2012-07-15 23:57   좋아요 0 | URL
요즘 제가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을 읽고 있는 중이라서 미국사에 대해서 부쩍 관심이 생기게 되었어요. 저도 많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추천할 수 있는 건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이 있고요,
그나마 미국 대통령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이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이 있는데, 이 책이 나온지 10년 좀 넘었어요. 지금 알라딘에 검색하면 절판 상태로 나와요. ^^;;

제가 책을 읽으면서 중요하다싶은 내용을 나름 선별해서 썼는데 상세하게 쓰다보니 아이리시스님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 책 분량도 그리 얇지 않아서, 한 권 완독하는데만 2주 정도 걸렸어요. 역사서라서 그런지 중간에 지루한 부분도 조금 있었고요 ^^;;

지나가다 2012-07-15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리뷰인데, 떠오르는게 있어서 주제넘는 몇마디 적어놓고 갑니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면 이석기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고요. ㅎㅎㅎ

민주주의의에 대한 믿음은 대체로 민주주의가 역사에 도달한 최종 지점이며, 각 개인의 평등과 서로 다른 주장을 통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하는 도덕적 전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각 개인에게 요구하는 요인들은 실제로는 까다로운 것들입니다.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민주주의의 개인들은 정치적 관건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그 관건에 맞춰 토론할만한 소통능력과 역량을 갖춰야하는 개인들이 되어야 하고, 모든 안건을 투표에 붙여도 기꺼이 참여해야 하는 실천성과 개인성을 훼손하는 프레임을 방지하지 위해 정치적 움직임을 적정 수준에서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성적 개인, 그 사람의 성향이나 행위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견과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무지의 베일을 뒤집어쓸 의무,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선택되었다면 그것의 무오류성을 인정해야 하는 의무까지. 민주주의가 직접 지시하지 않는 여러 한계들과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 요구하는 수준은 무척 까다롭습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정치적 관건을 논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볼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이상속에서 민주주의가 도덕으로 기능하는 현상이 아닌지...

대한민국 사회의 국론을 분열시키는데 조장하고 우둔한 대중들을 현혹하는 시정잡배 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겠고 충분히 동의하지만, 민주주의는 분열되고 토론되어야만 기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최장집이 말하듯, 민주주의는 갈등과 불안의 현장를 뜻하지 화합되고 안정된 정치체를 뜻하는게 아니니까요. 민주주의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므로 그 원칙은 하나의 도달점으로 설정된 채 훼손되는 것은 안된다고 자동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혹시 도덕화 된 민주주의의 이면은 아닐까요. 오히려 민주주의다운 것은 민주주의의 숨겨진 가정을 끄집어 내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담지해낼 수 있는 정치체인지, 무엇을 보완하고 바꾸어가야 하는지를 격렬하게 토론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짧은 생각을 잠시 해 보았습니다.

좋은 글인데, 괜한 소리를 남기고 가는 것 같네요. 책 많이 읽으시고 더 정진하시면 좋겠습니다. 부족하고 생각이 짧은 글 면목없게 남겨두고 갑니다.

cyrus 2012-07-16 00:10   좋아요 0 | URL
조용하고 많이 부족한 서재에 찾아와 좋은 내용의 댓글을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님께서 쓰신 댓글 내용이 너무 좋고 인상 깊어서 여러 번 또 읽었습니다. ^^
제가 보기에는 전혀 주제넘는 내용이 아닌데요. 손님으로 댓글 남기신 점에 대해서 오히려 아쉽게 느껴집니다. 저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깊은 내공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최근에 민주주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알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리뷰의 책 이외에도 해밀턴과 매디슨이 쓴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와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는 중이랍니다.
게다가 이번에 나온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이 미국 정치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주를 이루고 있어서 겸사겸사 읽게 된 계기가 있었고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익숙한 이 단어인 민주주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고요. 최근에 본격적으로 독서를 통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

마지막 부분에 님께서 밝혔듯이 올바른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대해서 공감합니다. 님의 의견이 오히려 제가 이 리뷰를 쓰면서 꼭 강조하고 싶었던 견해였는데.. 어떻게 쓰다보니 그 중요한 내용을 잠시 간과하고 말았네요. ^^;;

댓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제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보충삼아 새로운 관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혹시 제 답글이 님이 말씀하시고자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와 부합되지 않는다면 아직 많이 배워야할 정도로 부족한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이 점에 대해서 관대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2-07-1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논쟁한 주제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와닿죠.특히 지방분권이냐 중앙집권이냐 하는 문제는 지방자치나 경제학 논쟁에도 많은 빛을 던져줍니다.
알렉시스 트 토크빌<앙시앙레짐과 프랑스 혁명>은 혁명사 공부할 때 읽었는데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종합은 이렇게 하는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미국민주주의 같은 책도 정치 및 사회사상사의 고전이죠.

cyrus 2012-07-18 20:48   좋아요 0 | URL
네, 노자님이 언급하신 두 권의 책 읽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의 저자인 해밀턴과 매디슨은 미국 행정학 발전사에서도 잠깐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읽고 있습니다. ^^

감은빛 2012-07-1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
미국 역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
이 글을 읽고나니 관심이 생기네요.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 점은 출판사입니다.
하필 저 출판사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니 모순이란 생각이 드네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출판사에서요.

개인적으로 이 출판사 책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절대 사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이 출판사에 일하는 사람이라면 사귀지 않습니다.
그 출판사가 어떤 출판사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와 말이 통하기 쉽지 않을테니 사귈 이유가 없구요.
알면서도 거기 일하는 사람이라면 제가 경멸을 보내야할 처지이니 서로 사귀면 피곤하겠지요.
말이 길어졌는데, 이 출판사에서는 이런 좋은 책은 안나왔으면 좋겠네요.

암튼 저야말로 좋은 글에 쓸데없는 댓글을 남겨서 죄송하네요!

cyrus 2012-07-18 20:55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죄송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
방금 검색해봤는데,,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안 알려주셨다면 몰랐을거에요.
정말 아이러니하네요. 그렇다고 저를 외면하시면 안 됩니다. ^^;;
 

 

 

 

 * 인상주의 (印象主義, impressionism)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출발하여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상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경향. 인상주의는 대상의 객관적 존재를 묘사하기보다는 주관적 인상을 있는 그대로 옮겨 그리는 정서적, 감각적 태도다. 문학예술의 경우 그것은 지속과 영속에 대한 순간의 우위를 강조한다. 우연이 모든 존재의 원리가 된다.

 

 

 - 네이버 백과사전 중에서 -

 

 

 

 * Read as impressionistic Paul Auster (줄여서 RIPA)

 

 인상주의적으로 폴 오스터 읽기, 폴 오스터 특유의 문학적 관점에 대해서 논하기보다는 독서를 통해서 느끼게 된 주관적 인상을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하고 잡문 형식으로 자유롭게 풀어내는 새로운 독서 및 작문 형태이다. cyrus라는 독자(讀子)가 독자적(獨子的)으로 마음대로 풀어내기 때문에 폴 오스터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전개해나가는 것이 큰 특징. 작품 속 구절을 마음대로 발췌 인용하여 거기서 얻게 된 순간의 독자의 주관적 인상을 강조한다. 그래서 일관성 없는 우연성이 이 글의 존재 원리가 된다.

 

 

 

 

 

 

 

 

 

 

 

 

 

 

 

 

 

 

 

 

 

 

지넌 여름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다가 이제 그만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냥 그런 겁니다. 갑자기 그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든 거죠. 아마 너무 여러 해 동안 야구 구경을 못 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더블 플레이와 홈런을 정량만큼 보지 못하면 정서가 고갈되기 시작할 수도 있거든요.

 

 - 폴 오스터 『거대한 괴물』열린책들 p 33 -

 

 

 

 

 

 처음이자 마지막인 야구장 관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야구장에 직접 가본 게 딱 한 번 뿐이다. 그런데 야구장에 가 본 경험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없다(!)  야구장에 한 번 가봤다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은 야구장에 가 본 그 닥 한 번의 유일한 경험이 아주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정확히 몇 살 때 갔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와 단 둘이서 야구장에 갔다는 사실뿐이다. 내가 태어난 곳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곳이 대구다. 대구라는 지역에 야구를 논하게 된다면 당연히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삼성 라이온즈이다. 그리고 라이온즈 팀의 홈 구장이 바로 시민운동장이다.

 

그런데 야구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열기에 대한 첫경험이 그리 좋지 않았나보다. 그 때 그 시절에 대해서 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어린 나 때문에 야구 경기 제대로 관람하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낯선 사람들이 꽉 들어서 있는 관람석에 들어선지 10분도 채 안 되어 울고 불고 난리 부르스를 쳤단다. 어린 마음에 수많은 어른들이 환호성 지르는 모습이 무척 낯설고 무서웠던가 보다. 그리고 하필 그 때가 한참 무더운 여름철이라서 나는 야구장 외곽에 위치한 작은 식료품 코너에서 아이스크림 두 세 개를 먹어치웠다고 한다. 괜히 어린 아들과 함께 야구장 데리고 갔다가 경기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한편으로는 '웃프게' 느껴진다. 차라리 내가 야구라는 스포츠의 흥미에 눈을 떴을 때 데리고 가시지...  그 이후로는 아버지와 함께 야구장에 관람한 일이 없었고, 정작 야구를 좋아하면서도 야구장 한 번 가보지 못했다.

 

 

 

 

 여름의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솟구치는 야구 구경에 대한 갈망 

  

너무 오랫동안 야구 구경다운 구경을 하지 못 해서 그런지 야구장에 정말 가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들 때가 많은 요즘이다. 최근에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야구장에 가고 싶은 갈망이 잦아졌다.

 

주변의 친구들이 여자친구 혹은 동성 친구들과 함께 야구장을 관람하고 있다는 '인증샷'을 보게 되면 한편으로는 그들이 부러우면서도 야구장 한 번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게다가 시즌 초반부부터 하위권을 맴돌던 삼성 라이온즈가 어느새 1위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 누가 야구장에 가서 야구 경기를 직접 보는 것을 마다하겠나. 내가 발췌 인용한 폴 오스터의 『거대한 괴물』속 구절처럼 야구 경기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해서 지루하면서 진부한 일상으로 인해서 '삶의 즐거움'이라는 정서가 고갈되지 않을까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한다.  

 

 

 

 어설프지만 재미있었던 '초딩식' 야구 경기  

 

내가 정말 '야구'라는 스포츠를 본격적으로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때가 초등학생 4학년 때부터다. 평소에 운동 같은 걸 즐겨 보지 못할 정도로 천성적으로 운동을 좋아하는 체질이 아닌 나는 운 좋게도 또래 친구들 사이에 끼여 야구를 처음 해보게 되었다. 요즘 최신식으로 변모하고 있는 최근의 학교 운동장에 비하면 구식에 가까울 정도로 모래만 있는 열악한 상태였지만 야구공, 야구 배트 그리고 글러브 몇 개만 있으면 얼마든지 야구 경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내가 했던 '초딩식' 야구는 투수, 포수라는 직책은 없었다. 오직 타자와 수비수 그리고 주자의 플레이를 지휘하는 주루코치만 있으면 되었다.

 

일단 야구 경기를 하는데 최대한 불러 모일 수 있는 인원의 수에 따라서 동등한 인원으로 두 팀으로 나눈다. 그리고 야구 경기장처럼 운동장에 다이아몬드 형태의 내야 라인과 베이스(Base)를 표시해둔다. 먼저 공격하는 팀의 타자는 본인이 직접 야구공을 위로 던져 배트를 휘둘러 친다. 자신이 직접 공을 던져 배트를 휘두를 수 있는 기회는 단 세 번. 세 번의 기회에도 야구공 한 번 제대로 맞지 못하면 아웃(Out)이며 다음 타순으로 넘어간다. 스트라이크(Strike) 삼진 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파울(Fowl)은 적용되었지만 정식 야구 경기와는 다르게 스트라이크에 포함되지 않았다. 일단 공을 쳐서 안타를 만들어야 했다. 공 한 번 제대로 맞추지 못 한다면 끝이다. 타자가 친 공이 내야 라인에 크게 넘어가면 홈런으로 인정했다. 세 번의 타자가 아웃 되면 공수 전환으로 이루어진다.

 

경기 규칙에 대해서 더 이상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어설프게나마 이런 방식으로 야구 경기를 했다. 하지만 무척 재미있었다. 특히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야구 경기에 몰입하다보면 친구들끼리 싸울 때가 있었다. 다이아몬드 라인과 주자 베이스를 모래 운동장에 표시를 하다보니 가끔은 베이스에 있는 주자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세이프(Safe)인지 아웃(Out)인지 정말 애매모호한 판정이 나올 때가 있다. 야구 경기를 진행하는 데 꼭 필요한 정식 심판이 없다보니 간혹 상대 팀 친구들과 언쟁을 벌인다거나 심하면 단체 싸움으로 돌변하여 벤치 클리어링(Bench-clearing)까지 번질 때 있었다.

 

그 때 야구를 엄청나게 좋아했던 몇 몇 친구들은 그 당시 초등학생들의 꿈이었던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야구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들은 거의 주말마다 직접 시민운동장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배우거나 야구 경기를 했고 종종 라이온스 소속 야구선수들을 직접 만났다고 맨날 자랑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또 어떤 녀석은 선수들의 싸인이 있는 볼을 자랑하기도 했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천성적 성격 및 체질 탓에 또래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한 횟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때 많이 놀지 못한 게 후회를 할 때가 있다. 야구라도 운동 하나 제대로 즐겼더라면 현재의 저질 체력이 나오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야구 보는 재미에 산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승승장구 행보에 라이온즈 팬으로써 이 즐거운 감정을 숨길 수가 없는 건 사실이다. 처음 시즌 초반부 때 부진했던 선수들의 플레이에 실망할 때도 있었지만 역시 삼성 라이온즈는 'UTU'(Up Team is up, 올라갈 팀은 올라간다)였다. 반면에 시즌 초반에 상위권으로 순조롭게 출발했던 LG 트윈스가 현재 연패의 부진으로 7위까지 하위권으로 밀리게 됨으로써 또 한 번 'DTD'(Down Team is down,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의 무시무시한 '과학성'이 또 한 번 재현되고 있는 상태다.

 

 

 

 

왼쪽에 '국민타자' 이승엽, 오른쪽에 '돌부처', '끝판왕' 마무리투수 오승환.

요즘 이 두 선수의 맹활약 덕분에 이번 시즌 역시 야구 보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사실 이번 시즌이 시작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에 활약하던 이승엽 선수의 복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반신반의했다. 타자로써 커리어 사상 각종 신기록을 세웠고 일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친 이승엽이었지만 막상 국내 친정 팀으로 복귀하는 '승짱'의 모습이 일본 리그로 옮기기 전, 아시아 선수 홈런 신기록을 세웠던 그 때 막강했던 과거의 이미지가 떠올려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승엽보다는 지난 시즌에 생애 첫 홈런왕으로써 활약했던 최형우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면서 뚜껑을 열어본 순간, 내가 예상했던 것과 너무다도 판이하게 나왔다. 이승엽은 꾸준하게 타점을 올리면서 팀 승리에 기여하는 활동을 해주고 있는 반면에 의외로 빈타가 많아진 최형우의 부진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상대 팀 타자들의 불방망이를 무력화시켰던 '끝판왕' 오승환이 롯데 전에서 기록한 6피안타의 블론 세이브(Blown Save) 또한 나름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필승의 기운을 만들어주었던 투수진에서도 부진이 이어져 삼성은 시즌 초반부터 심상치 않게 '우승 후보'답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난세 속에서도 영웅이 등장하는 법, 4번 타자를 맡을 정도로 지난 시즌보다 타격감이 물 오른 내야수 박석민의 활약에다가 2군에서 '제2의 오승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투수 심창민의 깜짝 등장은 삼성이 상위권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서 작지만 많은 기여를 해주었다.

 

 

 

 진정 야구 팬들이 원하는 방향 쪽으로 나가야 한다

 

이제 야구 시즌이 올스타전을 코 앞에 두고 있다. 요즘 제10구단 창설 문제에서 비롯된 KBO와 선수협 간의 갈등으로 인해서 올해 시즌에는 올스타전을 못 볼 수도 있다. 제10구단 창설에 강력히 반대하는 각 프로야구 팀 구단주와 이에 대해서 어중간하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KBO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서 선수협 측에서는 올해 시즌 올스타전뿐만 아니라 내년 초에 열리게 될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회 참가를 보이콧 선언을 하게 됨으로서 제10구단 창설 문제를 둘러싸고 양측 간의 갈등과 대립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치킨 게임' 상태로 현재진행중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야구 선수들뿐만 아니라 전. 현직 야구 감독들 그리고 야구를 즐기고 사랑하는 관중들도 제10구단 창설을 간절히 원하고 있고 열렬히 찬성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재 지속되고 있는 KBO-선수협 간의 갈등이 장기화가 될 경우, 단순히 올스타전과 WBC 대회에 활약하는 야구 선수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지 못할뿐만 아니라 프로야구의 흥행에도 약영향을 주게 된다. 선수협 그리고 수많은 야구팬들의 소망을 무시하는 KBO가 주관하는 프로야구 경기를 과연 재미있게 보는 사람이 있을까?  프로로 전향하기를 바라는 아마리그 선수들 또는 프로 야구선수가 되기를 바라는 고등학생 유망주들에게 활약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새로운 야구 구단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야구팬들이 제10구단 창설에 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KBO와 야구 팀 구단주들은 수많은 야구팬들의 여론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팬심을 무시하면서까지 독단적인 체제로 운영되는 스포츠는 '대중을 위한 스포츠'라고 말할 수 없다.

 

 

" 아마 너무 여러 해 동안 야구 구경을 못 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더블 플레이와 홈런을 정량만큼 보지 못하면 정서가 고갈되기 시작할 수도 있거든요. "

 

 

아마도 KBO 협회와 야구 팀 구단주들은 1000만 관중의 야구팬들보다 여러 해 동안 야구 구경을 못했던가 보다. '승리'를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이 만들어 내는 화려한 선수들의 플레이와 항상 이들을 열렬히 응원하고 지켜보는 국내 야구 팬들을 정량만큼 보지 못한 탓에 야구를 사랑하는 대중들을 위한 정서가 이미 고갈된 상태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주장을 끝까지 일관되게 고집하는 태도를 봐서는 제10구단 창설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P.S

 

이번 달부터 본격적으로 온라인 독서 활동 카페에서 진행되는 '폴 오스터 읽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 글이 그 시작을 알리는 첫 글인 셈이다. 그런데 막상 쓰다보니 폴 오스터와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글이 되고 말았다. 폴 오스터 매니아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 아무래도 폴 오스터 문학이 나에게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폴 오스터의 소설에 완전히 익숙하고 적응하기까기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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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z.  다음 이 시에서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정치적 의미를 찾아서 100자 내외로 설명해보시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오늘 아침부터 정말 '황당한' 신문기사를 접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통합민주당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도종환 시인의 시와 산문 등 모든 작품들을 국어 교과서에 삭제할 것을 권고했다는 내용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새누리당 소속의 이자스민 의원이 일반인 시절 찍은 영화 <완득이> 사진이 수록된 교과서도 수정 보완을 권고했다는 것이다. 평가원 측에서는 이러한 권고를 내리게 된 기준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육의 중립성'이다. 평가원은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면 교육의 중립성이 훼손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여러 매체에 소개된 도종환 시인의 작품 삭제 논란에 대한 기사들을 쭉 훑어보면서 나는 평가원이 말하고 있는 '교육의 중립성' 그리고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그 의미와 기준이 무척 궁금했다.  그동안 작품성을 인정받아 교과서에 멀쩡히 실려 있던 문학 작품을 단순히 작가나 특정 인물이 정치에 입문했다는 이유만으로 '삭제 대상'으로 분류해야하는 결정적인 명분 또한 없어보였다.

 

먼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도종환 시인의 대표작 [담쟁이]를 읽어보자. 이 시는 절망을 극복하는 담쟁이를 통해서 삶의 의지와 생명력을 묘사하고 있다. [담쟁이]는 1993년에 출간된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에 수록되어 있는데 시인이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 투옥생활을 한 경험을 비추어볼 때 시인이 투옥생활을 하고 있는 시기 때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과거에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서 옥살이를 했다는 점 그리고 현재 대선에 출마하게 되는 문재인 상임고문의 핵심 후원조직 '담쟁이포럼' 소속의 정치인이라고 해서 과연 [담쟁이]를 포함한 그의 시와 산문들이 특정 인물을 가리키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규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계에 몸 담기 이전에 쓰여진 특정 작가의 글이 학생들의 교육에 유해할 정도로 정치적 중립성에서 어긋난 것일까?  

 

 

 

 

 

 

 

 

 

 

 

 

 

 

 

 

 

 

 

 

 

사실 평가원의 도종환 시인의 작품 삭제 권고 논란 기사는 참으로 뜬금없는, 한편으로는 첫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부터 (그렇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실소를 머금케 하는 '웃음'을 대중들에게 선사해주었다. 대중들 앞에서 평가원 스스로 우스운 처사를 단행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평가원이 내세우고 있는 그 '정치적 및 교육의 중립성'이라는 기준을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국내 작가들의 작품들에 적용한다면 굳이 도종환 시인의 작품만 권고할 필요가 있을까?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 '꽃'은 수많은 국어, 문학 교과서에 많이 실려 있으며 지금까지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애송하고 있는 시작품 중 하나이다. 그런데 민주정의당 창당 발기인과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 김춘수 시인의 [꽃] 이외에도 다른 작품들은 생전 시인이 현직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을 때는 물론이요, 지금도 중, 고등학생들은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김춘수 시인의 작품들을 국어시간에 배우고 있다.

 

 

 

 

 

 

 

   

 

  

  

 

 

 

 

 

 

 

 

 

김춘수 시인의 작품뿐만 있는 게 아니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이 쓴 산문 또한 삭제되어야 마땅하다. 평가원의 검인정이 통과된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18종 중에서 1963년에 이어령 고문이 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수록되어 있는 '풍경 뒤에 있는 것'은 총 1종('천재'), <바람이 불어오는 곳> 중 일부인 '폭포와 분수'는 총 3종('블랙', '상문','지학(박)')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평가원은 교과서 공통 검정 기준을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생활 영역에서 차별을 조장하는 내용' 그리고 '정치적·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거나 특정 종교교육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 내용이 있는지' 여부를 적용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중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국어 교과서보다는 오히려 고등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문학 교과서에 평가원의 공통 검정 기준에 적용되어지고 삭제 검토되어야 할 작품들이 꽤 있다.

 

 

 

 

 

 

 

 

 

 

 

 

 

 

 

 

 

 

 

다음 소개하는 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카프(KAPE,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동했던 월북 시인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 중 일부다.

 

 

 

(중략)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섰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섦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야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꼬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어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는 총 3종의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디딤돌', '대한'. '민중')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인 '누이동생'이 감옥에 갇힌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서사시'다. 카프에 활동했던 시인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는 그 당시 1920~30년대에 국내에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서사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노동 운동과 계급 투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정감 있게 그려냈다.

 

시적 화자 누이동생의 오빠와 동생 영남이가 가입되어 있는 '피오닐'은 '개척자', '선구자'라는 뜻의 러시아어이며 '소련 공산당원'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생략된 시의 전반부에는 피오닐에 가입한 누이동생의 오빠는 노동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에서 '화로'는 '가족애'와 '불타는 계급 투쟁 의지'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을 담을 수 있는 화로의 속성은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한 집안의 가장인 동시에 계급 투쟁에 열성적이었던 공산당원으로서의 이미지와 연관지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몰락해버린 지금, 고등학교 교과서에 왜 '계급 투쟁'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임화의 시를 고등학생들은 왜 배우고 있는가?  카프(KAPE)는 1920~30년대에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던 작작가들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당시의 퇴폐적, 감상적 문학예술 활동을 비판하고 신경향파 문학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인 사상을 주장, 민중을 같은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데 목적을 둔 창작을 강조하였다. 카프는 이념 지향의 차이점에서 비롯된 작가들 간의 분열로 인해서 얼마 못 가 와해되었지만 그 당시 문단을 지배하고 있었던 감상주의를 비판한 카프의 활동은 문학사적인 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공산당'을 연상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단어를 문학작품에 사용하고 무엇보다도 월북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수십 년 전에 쓰여진 카프의 작품들이 현재 평가원이 말하고 있는 '정치적 중립성'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까?  물론,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임화 등과 같은 카프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계급 투쟁'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정치적이면서도 개인적인 편견을 전파하고 있으며 노동자(프롤레타리아)를 착취, 억압하는 자본가(부르주아) 간의 계급 갈등 및 차별을 뚜렷하게 강조,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벽초 홍명희의 대표작 <임꺽정>도 일부의 내용이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2종에 수록되어 있는데 나 또한 <임꺽정>이 수록된 문학 교과서('문원')를 통해 수업시간에 작품에 대해서 자세하게 배우기도 했다. 

 

'임꺽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10권이나 되는 이 소설이 단순히 역사적 인물의 일대기를 그려낸 평범한 대하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도적 임꺽정의 이야기를 허구화한 이 소설은, 천민계층의 반봉건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생활양식을 다룬 데 그 특징이 있다. 또한 봉건 귀족을 우월성의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천민계층을 이상화함으로써 계급의식과 집단의식을 현저하게 드러냈다. 벽초는 <임꺽정>을 통해 계급의 관점에서 식민지적 모순보다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겨냥하는 특수한 역사의식의 시야를 노출시켰던 것이다.

 

그는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지만 곧 바로 월북하여 부수상 등 주요 요직을 맡으면서 이제 막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김일성 공산당 정권 수립에 일조를 했다.

 

<임꺽정>이라는 작품 속에서 전체적으로 계급의식과 자본주의적 모순이 깔려 있다는 점 그리고 작가가 김일성 정권 수립에 큰 기여를 한 이력으로만 살펴본다면 애초에 10권짜리 <임꺽정>은 출판해서도 안 되며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는 평가원의 기준으로 의해서 교과서에 삭제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참에 국방부는 60여 년 전에 발표된 벽초의 소설을 '불온서적'으로 추가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금서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평가원이 이번 국어 교과서 검정에서 적용했다고 밝힌 세부 검정 기준을 살펴보면 중립성이 훼손된다는 근거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 불거진 평가원의 기준 논란뿐만 아니라 국방부가 지정한 불온서적을 규정하는 기준 또한 그렇다. 명확힌 기준이 없다고 해서 평가원이 예전 1970년대의 공연윤리위원회(공윤)처럼 우리나라에 모든 문학작품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쏟아져나오고 있는 신진 작가들의 문학적 창작물들을 대상으로 제목. 특정 구절만 가지고 ';정치성'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시시비비 따져가면서 검열을 하고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교과서에 퇴출 결정을 내린다면 이는 다시 자유표현을 억압하는 시대로 역행하는 것이며 문화적 발전을 지체하는 요인이 된다. 문학에서 적정한 선에서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중립성의 기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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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1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오늘 아주, 도종환 시인 글을 교과서에 넣어라 말아라
생쇼를 하더만요..... 기가 차서. 수준 미달입니다. 정말 생각할 가치가 없어요.
오늘 결국 한 발 슬그머니 빼는 꼴이란. 제일 꼭대기가 문제면 밑에도 모두 머저리가 되는걸까요?

cyrus 2012-07-11 20:30   좋아요 0 | URL
결국엔 어제 선관위까지 나서게 되었죠.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았던 논의를 선관위까지 가게 되다니 어제 평가원의 결정들이 한 편의 코미디였습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2-07-14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관위가 나서기 전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평가원 측에서 사람이 나와 도종환의 시를 삭제해야 한다는 소신을 매우 진지하게 펼치던데 하루만에 꽝! 아유~ 그 분이 다시듣기로 듣는다면 얼마나 민망할까요...이제 영원히 그 파일이 인터넷상에 남을텐데...여하튼 글조심 말조심...인터넷은 무서워요.절대 안 지워지니까요.

cyrus 2012-07-14 23:5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진짜 민망하겠네요. 하여튼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를 내세우다가 그만 제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되어버렸네요 ^^
 

 

 

 

 

 

 

올해 1학기에 있었던 복수전공으로의 외도는 저에게 주전공 강의에서 접할 수 없었던 좋은 경험을 가져다주었지만 전체적 결과를 본다면 썩 좋지 못했습니다. 이번 1학기의 학교생활을 표현하자면 무전 상태에서 혼자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낯선 강의실에서 혼자서 무작정 공부했던거죠.

... 이렇다보니 정작 중요한 주전공 공부를 소홀히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성적표 때문에 나름 혼자서 저 스스로에 대해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사실 제가 복수전공을 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작년까지만해도 진로선택을 확실히 정하지 않아서 무작정 남들 하는대로 인기 전공과목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그러니까 2007년에 저뿐만 아니라 행정학과 야간 학우들 사이에는 정말 공무원 진로를 꿈꾸던 몇 명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주위를 둘러보면 공무원보다는 취업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학우들이 눈에 띄게 많이 늘어난거 같습니다.

사실 주위에 그런 학우들 보면서 내심 제 자신이 걱정되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나도 이참에 취업 쪽으로 준비해봐? "

진로가 제대로 정하지 못한 방황의 감정 탓에 공무원 진로에 대한 기표가 조금씩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리고 '나' 자신을 위한 진로 결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야할 길은 공무원임을 확고히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대학의 행정학과 모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공무원 고시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방학 때 행정학 전공책 한 권 잡아 다 읽어봐야한다고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고대 중국의 우공이라는 노인은 집 앞을 가로막은 큰 산을 보자 길을 만들기 위해서 산을 옮기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포크레인이 나오지도 않았던 옛날 시대입니다. 지금도 큰 산을 파는데만 족히 몇 년은 걸립니다. 주위 사람들은 노인 우공을 미친 놈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종일 혼자서 산에 있는 모래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우공의 작업은 그가 죽은 뒤 자식 대대로 이어지게 되면서 목표가 이루어졌습니다.

솔직히 이번 방학동안 전공책 한 번 다 본다는 것. 제가 옳은 선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어랑 자격증 공부 때문에 방학 기간 내에 끝까지 못 볼 수도 있고요. 그리고 요즘에는 노량진이나 공무원 고시 학원 수업만 제대로 듣는다면 행정학이나 행정법 과목 같은 건 1년 안에 다 땐다죠.

하지만 학부생인 지금, 학업과 공무원 시험 공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제가 아는 과 선배는 졸업을 맞아 학업과 공무원 시험 공부 동시에 병행하기도 합니다만 공부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간이 제대로 맞춰지지 않는 이상 매일 어마어마한 분량의 공부를 한다는 건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선배도 저에게 왠만해서 학업과 공무원 고시 병행하는 '짓'은 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본인은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지라 어쩔 수 없이 뒤늦게나마 이런 공부를 하고 있는거라고 말했습니다.  

 

대학생활 얼마 안 남은 지금. 정말 뭐라도 해야죠. 벌써부터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아예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할 수 있을 때 해야합니다.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높기 때문에 그만큼 합격하게 되는 날은 금방 오지 않을거 같습니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그저 묵묵히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남들이 먼저 사회에 진출해서 성공하더라 기죽지 않고 오직 목표만 바라보고 걸어갈겁니다.

일찍 찾아오는 성공을 위해서 뛰는 것도 좋지만 제 공부 스타일로 봐서는 저는 목표 달성을 위해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괜히 조급하게 준비하다가는 제 풀에 벌써부터 지쳐버리거나 넘어질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스스로 포기하게 됩니다.

이제 정말 마지막 방학이라고 생각하면서 행정학, 영어,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겠습니다. 졸업 때까지 외국어가 어느 정도 기초를 다지고, 자격증 한 두개 따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공부에 매진한다고 해서 독서를 소홀히 한다는 건 아닙니다. 졸업할 때까지 꼭 읽어야 할 책은 읽어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주말이 끝나고 새로운 주가 시작되는 월요병에 질색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는 주말이 금방 지나가고 새로운 주가 시작된다고 해서 짜증이 나지 않는 편입니다. 오히려 내일 월요일이 무척 기다려집니다. 반대로 시간이 금방 지나가서 어느새 성큼 주말이 찾아오면 저는 그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본격적으로 7월 그리고 새로운 주가 시작되는 내일 월요일,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척 기대됩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마음으로 미래를 위해서 착실하게 준비해나가겠습니다. 서재 이웃님들도 월요병을 극복하고 새 마음으로 새 주를 기쁘게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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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0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궁, 힘드네요.
저보다도, 훨씬.
언제나 응원하고 있을테니 공무원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가봐요!
파이팅.
저는.... 기말고사를 향해서 달려야하는데 이러고 있네요. 후후.

cyrus 2012-07-05 19:42   좋아요 0 | URL
지금쯤이면 이진님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겠죠. 그러고보니 저도 계절학기 기말시험이 다음주 수요일... ㅡ,ㅡ 벌써 코 앞이네요 ㅋㅋㅋㅋ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 받으세요,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