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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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는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고, 또다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예루살렘은 죽은 연인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늙은 성중독자처럼, 관계하는 동안 자신의 짝을 삼켜버리는 흑거미처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 아모스 오즈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중에서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예루살렘 전기』p 35 재인용) -

 

 

 

 

 

 

 해답 없는 국제적 난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국제 사회엔 난제가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해결이 가장 어려운 것을 꼽는다면 단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다. ㅣ지난해, 9.11 테러의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로 자신감을 얻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양측의 국경선 획정을 '1967년 이전으로 돌릴 것'을 주창하고 나섰다. 여기서 '1967년 이전'이란 1967년에 발생했던 이스라엘 대 아랍권 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간의 제3차 중동전쟁 이전을 말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개전 초 아랍 국가들의 공군기지를 무력화시켜 제공권을 장악한 뒤 지상전에서도 승전을 거듭하기에 이른다. 개전 4일 만에 시나이 반도, 요르단 강 서안지구, 가자 지구 등을 점령했다. 아랍 국가들은 결국 전쟁 시작 엿새 만에 요충지를 점령당하고 UN이 제안한 정전협정안을 받아들인다. 이후 2만 7000㎢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의 영토는 단 6일 만에 6만 8000㎢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오바마의 언급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문제 중에서 금기 사항이나 다름 없다. 특히 전쟁을 통해서 이득을 봤던 이스라엘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자 오바마는 며칠도 못 가 자신이 거론한 문제에 대해서 한 발 물러섰다. 공식 석상에서 그는 자신의 '1967년 전 국경선 회귀' 발언은 국경선을 근거로 협상해야 한다는 뜻에서 말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반세기 이상이나 지속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중동 평화를 위한 협정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일부 아랍권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심한 반발로 해결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사실 문제가 풀기 어려운 것은 양측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단 3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장의 선언문이 가져온 중동의 혼란
 
그 동안 유태인들은 2천년 동안 고국을 떠나 전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핍박의 슬픈 역사를 안은 채 떠돌던 유대인들은 민족주의 '시오니즘'의 기치 아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랍 민족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어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모두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은 힘겹게 나라를 지켜왔다. 특히 1967년 3차 중동전쟁 승리 후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이 때문에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67년 경계 이전으로 국경선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이스라엘의 입장이며 오마바의 발언에 크게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벨푸어 선언이 명시된 서류 원본

 

 

하지만 원래 살던 땅에 살게 해 달라는 팔레스타인들의 주장도 절박하고 정당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아주 오래된 기원전 시대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 오스만제국 붕괴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국은 아랍인들의 염원을 진전시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1917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하게 되고 1947년 유엔 총회에서 유대국과 아랍국 영토 분할 승인을 주도하게 되는 영향을 주게 된다. 시들어가는 시오니즘 운동에 고민하던 유대인들은 환호했지만 이 선언문 한 장으로 인해 테러가 테러를 낳는 중동의 불행은 커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수천년 간 터를 잡고 살아온 아랍 민족은 뒤늦게 벨푸어 선언을 전해 듣고 배신감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모두가 탐낸 '성전' 예루살렘

 

역사가들은 중동 분쟁의 신호탄을 벨푸어 선언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 중동은 그 전부터 오랫동안 수많은 내전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으며 무고한 중동의 사람들은 시퍼런 칼과 무시무시한 총탄 앞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특히 중동 내전의 중심에는 바로 '예루살렘'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담당하는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동시에 거듭된 파괴와 재생의 순간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길은 '예루살렘'으로 통한다. 구약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다윗 왕 이후 이 성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지였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처음 전파한 곳도 예루살렘이었다. 하지만 '성전' 예루살렘의 역사는 기독교인들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에게도 '위대한 성지'였고, 문명이 충돌하는 전략적인 전장이자 무신론과 신앙이 부딪치는 최전선의 지역이었다. 그랬기에 이 도시는 많은 세월동안 뺏고 뺏기는 전쟁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군침을 흘렸으며,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묘사한 옛 문헌 기록이나 오늘날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왜 그토록 수천년동안 예루살렘 하나를 둘러싸고 피 튀기는 혈투를 벌였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성스러운 도시', '성지', '성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예루살렘를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 위에 세워진 훌륭한 도시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예루살렘은 경제학적이나 입지조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 지중해 해변의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물도 부족하고 여름에는 태양이 작열하며 겨울에는 바람이 살을 에일 정도로 춥다. 게다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돌산들은 험하기로 악명 높아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완벽한 도시의 조건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이렇게 피를 흘려야하는 전쟁을 치뤄면서까지 별 볼 일 없는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했을까?

 

 

 

 

 

일리야 레핀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우는 선지자 예레미야」 1870년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에게는 예루살렘은 '성전', 즉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인들은 이 성스러운 예루살렘을 통해 자신들만의 신성(神聖)을 부여하고 싶었고 점점 예루살렘을 신성화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예루살렘이 '성스러운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신성이 무수히 만들어 낸 신화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예루살렘이 '거룩함의 원형'이 된 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윗 왕이 지은 성전과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이 세운 지성소 때문이다. 하지면 역설적이게도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파괴가 예루살렘의 신성화에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이 점령한 예루살렘에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를 왕좌에 앉혔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을 방문하고 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반역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당시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의 예언을 한 예레미야에게 붙잡히고 마는 신세가 된다. 공포와 망상으로 가득한 채 무방비 상태의 예루살렘은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만다. 바빌로니아 인들에게 파괴된 예루사렘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예루살렘은 멸망한 도시들이 겪는 지옥 같은 약탈을 경험했다. 죽임당한 사람들이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  "굶주림 끝에 신열로 저희 살갗을 불가마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시온(예루살렘 내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유대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여인들이 겁탈을 당했습니다. 저들의 손에 고관들이 매달려 죽었습니다."    (p 101)

 

 

 

성전이 파괴되는 대재앙을 겪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강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자신들의 화려했던 영화만큼은 잊지 않기 위해서 '시온의 영광'을 기록하고 호소했는데, 유대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이를 '전설'로 만들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영화만큼이나 예루살렘 또한 '성전'으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수많은 군주와 영웅들마저 영토 확장의 목표물로서 탐내는 곳이 되었고 성경에 나오는 평화와 환희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에서부터 수많은 십자군, 이슬람의 살라딘과 심지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예루살렘에 눈독을 들였다.

 

 

 

 

 학살과 약탈이 멈추지 않았던 '저주받은' 예루살렘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 사이먼 시벡 몬티피오리의 『예루살렘 전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있게 한 1967년 6일 중동 전쟁까지 예루살렘과 관련된 모든 인류의 방대한 역사를 책 한 권에 담고 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독자들이 예루살렘과 관련된 수많은 당사자들의 각각의 입장에서 볼 수 있도록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역사적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방대한 예루살렘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지만 학살과 약탈이 만연된 끔찍하기 짝이 없는 파괴의 역사를 일부 독자들에게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의 서막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격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일단 첫 내용부터 '전쟁' 이야기다. 예루살렘을 침략한 로마 군뿐만 아니라 혼란의 '멘붕 상태'에 이르게 된 예루살렘 내부에서 유대인 군벌들이 자행했던 학살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은 인간의 폭력성이 실로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벽 주변에는 생지옥 같은 끔찍한 장면들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구의 시체들이 햇빛 아래 썩고 있었다. 악취는 견디기 힘든 정도였다. 개와 자칼 떼가 인육으로 만찬을 벌였다. 지난 몇 달간 티투스는 모든 죄수나 탈주자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500명의 유대인이 매일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도시 주변의 올리브 산과 바위산은 십자가로 빼곡히 들어차 더 이상 십자가를 꽂을 공간 공간도 없었고, 만들 나무도 없었다. 티투스의 군인들은 희생자들의 사지를 기괴한 자세로 벌린 채 묶어져 못질하는 것을 스스로 오락으로 삼았다.   (p 36)

 

네로 이후 세 명의 로마 황제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혼란스러운 권력승계가 나타났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고 있을 당시, 이 도시는 세 개의 군벌에 의해 분열되어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유대인 군벌들은 가장 먼저 성전 마당을 피로 물들이는 전투를 벌였고 도시를 약탈했다. 그들의 전사들은 부유한 이웃과 협력하면서 가정집을 약탈하고, 남성을 죽이고, 여성을 희롱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단지 오락거리였다."   (중략)   "용납할 수 없는 더러움"에 넘어간 예루살렘은 매음굴이자 고문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성지였다.  (p 37)

 

 

 

로마의 티누스 침략 이후부터 예루살렘은 '성전'이라는 이유만으로 내전의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 영역이 되기도 했다. 카이사르와 함께 한 삼두정치로 인해 분할된 권력을 만족하지 못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자신들의 탐욕을 예루살렘에 뻗치기도 했다. 폼페이우스는 솔로몬 왕의 신성한 업적이 남아있는 지성소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마음대로 그 곳을 드나들었고 크라수스는 예루살렘 습격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성스러운 보물들을 약탈해갔다. 약탈한 보물들은 전쟁자금으로 확보하는 데 쓰였다.

 

 

 

 

에밀 시뇰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 1847년

 

 

1096년부터 시작해서 12세기 말까지 이어져 온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에게 파괴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봉건영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폐쇄적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는 탐욕의 절정이 만들어 낸 잔인하면서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피 비린내나는 전쟁이었다. 원정단들은 자신들을 예수로부터 보호받는 '순례자들'이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예수의 이름 아래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안과 밖을 막론하고 성벽 주위에선 사라센(중세의 유럽인들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들의 썩어가는 시체에서 어찌나 악취가 나던지, 시체들은 학살당한 곳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p 363)

 

 

 

 

 

 인류의 죄악이 만들어 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흑거미'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란 본래 뜻과는 다르게 단 한 순간도 지속적으로 평화를 누린 적이 없으며 파괴와 재건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그마나 고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함으로써 추방된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역사를 제외하고는 신의 축복보다는 잊고 싶은 저주가 많이 기억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은 이제 중동의 화약고이며, 서구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상황은 달랐지만 과거 티투스, 네부카드네자르, 십자군 전쟁 시기와 같이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긴장의 연속 상태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서 속에서만 성스럽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과연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것이 도래할 것인지, 몇십 년 후에도 예루살렘이 존재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오로지 핏빛의 미래만 보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모스 오즈는 현재의 예루살렘을 파괴를 자초하는 마력을 지닌 흑거미라고 표현했다. 그의 표현 속에는 예루살렘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중동의 분쟁을 예루살렘에게만 죄를 가중하는 건 못마땅하다. 평범한 흑거미를 '신성한 아름다움'이라는 착각에 눈이 멀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다툼을 마다하지 않은 우리 인류 또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공범자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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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8-08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벨푸어 선언 바빌론 유수 로마제국 십자군 육일전쟁...격동의 역사죠.

옥의 티...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cyrus 2012-08-12 21:40   좋아요 0 | URL
두꺼운 분량이라서 처음에는 읽기 시작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중동 갈등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오타 지적하신 점, 감사합니다. 5일동안 여름휴가 보내느라
방금 수정했습니다. ^^

2012-09-01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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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열대야가 무척 지독하다. 차가운 맥주의 거품만으로도 뜨뜻미지근한 밤 공기를 식혀주지 못하고 있다. 억지로 잠을 청해해보지만 수면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창문을 열어놔도 시원한 바람 한 점 불어오는 대신에 습한 공기의 손길이 자꾸만 내 얼굴을 어루만질 뿐이다. 자다가 깨고나면 TV로 올림픽 중계를 시청하는 대신에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다고해서 열대야가 싹 달아나는 건 아니지만 한밤중의 고요 속에서 책을 읽는 기분은 정말 유쾌하고 좋다. 특히 딱딱하고 두꺼운 분량의 인문서나 사회과학 서적 대신에 감성을 말랑하게 해주는 소설이나 시집 한 권 읽으면 어느 정도 무더위와 피곤함은 잊혀지게 된다.

 

고요한 열대야가 찾아 온 어제 새벽 3시 경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다.  '설국'. 이름만 봐도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설국』을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 겨울에 읽어야 제 맛이라고 하던데 나는 순전히 소설 제목만으로 열대야의 무더위에 지쳐버린 감성을 식혀주지 않을까 싶어서 책장 속에 꽂혀 있던 얇고 하얀 『설국』을 집어 들었다. 일본 소설은 많이 읽는 건 아니라서 이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설국』의 니가타 현으로 향하는 국경의 긴 터널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금은 망설였다. 평생 고독과 허무에 지배당한 삶을 살다가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마는 작가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설국』곳곳에서도 삶의 유한성 앞에서 비롯되는 감상적인 허무의 매력은 회화적인 은유법으로 이루어진 문장들 속에 숨겨져 있다. 이 소설로 인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일본 특유의 미의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설국』의 섬세하면서도 세밀한 문장과 스토리를 서양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혔는지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 스웨덴의 한림원은 이 작품을 노벨 문학상으로 선정하는 이유를 '자연과 인간 운명에 내재하는 존재의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어쩌면 작가의 섬세한 미의식과 감각적인 문체가 만들어 낸 자연의 정경 묘사가 서구인들에게는 비서구인 일본의 세계를 '신비'의 영역에 가둬두고자 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작품 속에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허무'의 감정마저도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동양의 미학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시마무라는 허무주의자다. 그나마 정형적인 성격의 시마무라와는 정반대인 게이샤 고마코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삶이라는 감옥 안에서 발버둥을 쳐보지만 한낱 시마무라 앞에서 울분만 토해내는 불만 표출에 그칠 뿐이다. 그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시마무라는 여인에게서 고미코에서도 허무를 읽는다. 하지만 시마무라와 고미코, 이들은 서로에게 '허무'만 읽는 게 아니라 그것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연민 또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시마무라는 고마코분만 아니라 설국 지방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도 만나게 된 요코라는 여자에게도 은근한 감정을 품는다.

 

 

 

요코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 닿았다. 그가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이러한 모습을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p 110)

 

 

 

소설은 시마무라와 고마코 그리고 요코, 이 세 인물 간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제일 눈에 많이 띄는 여주인공은 고마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마코는 처음에 시마무라를 만났을 때만 해도 과거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시마무라를 접대하는 일이 잦아들게 되면서 고마코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이 궁금해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어한다. 여성들이 남성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빙빙 둘러서 말하듯이 고마코도 은근슬쩍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고마코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결국 게이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 박복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눈만 쌓이는 폐쇄적인 설국 지방에서 자란 고마코는 타 지방에서 오는 수많은 낯선 손님들을 접대하고 눈 녹듯이 떠나보내야하는 게이샤로서의 삶은 지루함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단기적인 만남보다는 정말 제대로 된 인간애가 묻어나오는 사람다운 사람의 만남을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여자들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삶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가 원하고 원했던 만남의 최적 대상이 바로 시마무라인 셈이다.

 

 

고마코는 깔끔하게 앉아 있다가 탕에서 나온 시마무라에게,

 '이렇게 조용한 데서 바느질을 했으면' 

방금 청소를 끝낸 방의 낡은 다다미 위에 가을 아침 햇살이 깊숙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느질 할 줄 아나?'

 '그런 말은 실례예요, 형제 가운데 가장 고생했죠. 생각해 보면 바로 제가 자랄 무렵이 집안이 힘든 시기였떤 것 같아요'

 

 (p 99)

 

 

고마코 말대로 시마무라는 정말 그녀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고마코는 천상 여자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던 고마코에게 조용한 방에서 바느질을 한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애정을 듬뿍 받으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게이샤로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한낱 희망사항일뿐이다. 더욱이 이 무뚝뚝한 허무주의자 시마무라는 그런 고마코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 속 이 장면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여성적이면서도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이성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으며 그 누구로부터 확인마저 받지 못한 그녀에게 연민이 느껴지게 된다. 고마코는 정말 사마무라로부터 '좋은 여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시마무라가 불쑥 말했다.

 '당신은 좋은 애야'

 '어째서요? 어디가 좋아요?'

 '좋은 애라고'

 '그래요? 이상한 분이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정신 차려요' 하고 고마코는 시선을 돌리고 시마무라를 흔들며 뚝뚝 끊어 혼내듯 말하더니 잠자코 있었다.

 

 (중략)

 

 '그런데 어디가 좋은 애라는 거죠?'  하며 고마코는 약간 울먹이는 소리로, '처음 만났을 땐 당신이 정말 싫더군요.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는 이는 또 없을 거예요. 정말 싫었어요'

 시마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지금까지 제가 그걸 말 않고 있었던 걸 아세요? 여자가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이미 다 끝난 거 아닌가요?'

 '괜찮아'

 '그래요?' 하고 고마코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듯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한 여자의 삶의 느낌이 따스하게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왔다.

 '당신은 좋은 여자야'

 '어떻게 좋은데요?'

 '좋은 여자'

 '이상한 사람' 하고 어깨가 가려운 듯 얼굴을 가렸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고개를 들고는,

 '그게 무슨 뜻이죠? 네, 무슨 말이에요?'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고마코를 보았다.

 '말해 줘요. 그래서 절 만나러 온 거예요? 당신은 절 비웃고 있었군요. 역시 비웃고 계셨던 거군요'

 

 (p 126~127)

 

 

   

하지만 시마무라의 감정은 고마코에게만 향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시마무라는 전형적인 게이샤인 고마코를 사랑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요코를 떠올리지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시마무라가 요코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일은 없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을 정복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마무라는 사랑의 감정조차 자연의 변화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마치 나무가 계절을 입듯, 아무 것도 없었다가, 초록의 잎을 갖고, 그리고는 빨갛게 물들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감정은 영원하지 못하다. 우리 인생처럼 말이다. 그래도 연정을 품고는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녀 주인공들의 허무한 행위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고마코의 사랑이 부질없는 '투명한 허무'가 되어 하얀 눈 속으로 파묻혀지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진다. 고요한 열대야 속에 읽은 『설국』은 한 여름밤에 마시는 따뜻하게 데운 사케였다. 따뜻한 사케는 추운 겨울에 마셔야 제 맛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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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2-08-0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북극 허풍담]을 읽을 동안 시루스님께서는 [설국]을 읽으셨군요.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여름엔 아무리 사케라도 시원하게 마셔야하지 않을까요?
아니 여름에 사케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군요.
역시 겨울에 호호 불어가며 마시는 뜨거운 사케가 제 맛이죠. ^^

cyrus 2012-08-12 21:42   좋아요 0 | URL
소설 문장은 참 좋습니다. 설경이나 자연물을 등장인물의 심리와 정서에 비유하는 표현이
저는 좋더라고요. ^^
 

 

 

 

 

 

 

 

오늘 우연히 도서출판 '푸른역사'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서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중남미 정치 및 역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 교수님께서 어제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53세. 생전에 학술 연구뿐만 아니라 대중 독자들을 위한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및 역사 관련 책들을 많이 집필하셨고 외서 번역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2003년에 출간했던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읽은, 이 분이 쓴 저서 중에 유일한 읽은 책입니다. 중학생 시절이었던 제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흥미로운 세계사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 난 이후로 제가 알고 있었던 세계사가 유럽 중심 사관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 자리잡았던 유럽 사관의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게 만듦으로써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한층 더 새롭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 책이 저의 지적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역사책으로 기억이 남습니다.

 

 

 

 

 

 

 

 

 

 

 

 

 

 

 

 

 

故 이성형 교수는 1990년에 <라틴 아메리카 자본주의 논쟁사>를 시작하여 여러 권의 책을 집필 또는 번역을 함으로써 그 당시 생소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문화, 역사를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시대의 변화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및 문화에도 변환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간했던 고인의 책은 현재 절판 상태입니다. 그래서 현재 변모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연구 활동을 왕성하게 할 수 있는 시기에 갑작스레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많이 뒤늦은 감이 있지만 고인의 학문적 업적이 다시 한 번 재평가되어 우리나라 라틴 아메리카 연구의 맥이 끊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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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8-0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형 씨 신문칼럼 몇 개를 오려놨는데...이제 나이가 50대 초반이군요.한참 일할 나인데...

cyrus 2012-08-06 19:51   좋아요 0 | URL
그동안 제가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생전에 이대 재임용 때문에 여러 모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군요.
그 일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이성형 씨의 부고를 무척 안타깝게 여겼어요..

아띠 2012-08-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학계의 병폐를 고스란히 당하고만 살았던 것 같아요. 저 세상에서나마 공평한 대우받고 잘 지내시길 바래요

감은빛 2012-08-0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안타까운 소식이군요.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 정재승의 시네마 사이언스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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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영화 <레인맨>에서 동생 찰리가 자폐증 증세를 보이는 형 레이먼드의 옆을 지켜주지 못한 채 그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가로챘더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이자 강박증 환자인 소설가 멜빈이 인내심이 강한 캐럴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의 결말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될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운명도 한 순간에 180도로 뒤바뀌었을 것이다.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일상생활이나 상식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암기에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자폐증 환자의 삶을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다. 이 영화 한 편 덕분에 자폐증 환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분한 자폐증 환자 레이먼드는 숫자와 언어에서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이라는 개념을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심어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자폐증 환자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강하다. <레인맨>의 레이먼드처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완벽한 기억력을 지녔다거나 2005년 세계수영선수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움으로써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자폐증 수영선수 김진호 씨의 사례를 제외한다면 우리나라 자폐증 환자들은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를 받고 있으며 환자의 가족들 역시 자폐증 환자를 돌보면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자폐증 환자의 특징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작년 '미국 정신과 저널(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온라인판에 미국 예일대의대 어린이연구센터의 김영신 교수팀은 한국 어린이 38명 가운데 1명이 자폐증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이나 유럽엣의 자폐증 발생률의 3배 가까운 수치다. 그리고 이번 연구를 통해서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어린이 중 3분의 2가 일반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학교에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원인을 모르고 치료도 받지 않고 있었다. 이런 학생들은 대부분 병의 중간단계인 야스퍼거스 증후군으로 분류되어 특수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조금 달랐다.

 

자폐증은 지적 수준은 보통이지만 사회적 능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과 상호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정서적인 유대감도 일어나지 않는 증후군으로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상태를 보인다. 사회적 교류가 잘 되지 않으며 의사소통이 어렵고 언어 발달이 늦으며 행동상의 문제, 특정분야에만 치우친 관심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자폐증 특유의 성격상 특징은 '서번트 신드롬'이라고 해서 특별한 재능 수준으로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꼭 모든 자폐증 환자들이 '서번트 신드롬'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전체 자폐증 환자 중 약 10% 정도만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신드롬'이란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과 같이 전체를 휩쓸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그러나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자폐증 환자 전체가 뛰어난 암기력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자폐증 환자의 특별한 재능 자체를 '신드롬'이라고 규정, 명명하기에는 사실은 민망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심리학계에서는 비상한 재능을 가진 자폐증 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를 '서번트 신드롬'이라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자폐적 천재'(Autistic savant)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자폐증 환자들의 근본적인 발병 원인이 무엇이며 정신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이들에게 유독 왜 일반 사람의 지능을 뛰어넘는 '자폐적 천재'를 보이는 걸까?  지금까지도 그 원인에 대해서 수많은 연구를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원인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자폐 증세의 발병에 작용할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자폐증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되지 못한 지금, 자폐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 그리고 자폐증 환자와 함께 생활하는 가족들이 유독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자폐증이 과연 가족의 유전적 요인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여부다.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라면 꼭 가지게 되는 편견 중 하나가 바로 양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를 자폐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 자폐증이 가족의 유전적 요인에 의해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는 나쁜 양육 환경과 방식 때문에 자폐증이 발병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폐증은 가족의 유전자에서 이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뇌 구조 자체에서 이상을 일으킨다고 보면 된다. 자폐증 환자의 뇌를 들여다보면 측두엽 안에 존재하는 감정이나 공격성을 담당하는 아미그달라와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분이 정상인의 뇌에 비해 덜 발달되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강박증 또한 단순히 마음의 병이라기보다는 엄밀히 과학적으로 규명해본다면 뇌의 생물학적 요인이 강박장애 발생과 연관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뇌 영상 연구 결과를 통해서 강박장애에서 특정 신경회로 영역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약물치료 내지는 행동요법치료 후 이러한 영역의 문제가 정상화 됨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래서 초기에 병원을 방문하면 약을 먹지 않고 상담이나 행동치료를 통해 병을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환자들은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스스로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사회생활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병원을 찾지 않는 환자가 많다. 일부 민간생명보험사에서 정신과 진료 기록을 들어 보험가입을 거부하는 사례가 있는 등 사회적인 편견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이 정신적 장애 환자들을 더욱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 '힐링'(Healing, 치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힐링' 가운데서도 자연 치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화학적 치료가 부작용이 많다는 점에서 몸이 병을 이기도록 하는 자연 치유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환자들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환자의 정신을 좀 더 안정시켜줄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여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정신 장애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치료법은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가족들 또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지인들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캐럴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던 멜빈의 신경질적인 성격을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캐럴이다. 그리고 따뜻하게 먼저 마음을 열어줌으로써 그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항상 그의 곁을 지켜줬다.

 

이번에 새로 발간한 정재승 교수의 신작은 단순히 영화를 통해서 뇌과학의 세계를 흥미롭게 들여다보고 설명하는 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고통받고 있는 정신 장애 환자들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인식이 각성되기를 강조하고 있다. 정신 장애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뇌과학의 역할이지만 정신 장애 환자들이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뇌과학이라는 학문이 정신적 약자들을 위한 치유의 과학으로써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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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전 - 거장들의 자화상으로 미술사를 산책하다
천빈 지음, 정유희 옮김 / 어바웃어북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거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만약 거울이 없으면 맑은 물에라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야 말 것이다.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그때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의 관찰과 평가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람은 이 같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도 비추어 본다. 정확한 자기 확인과 자기 점검, 자기 준비와 자기 개선을 위해서다.

 

시인 윤동주는 달이 비치고 구름이 흐르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의 얼굴을 비추어준 거울은 어느 외딴 우물이었다. 우물 속에 비추어 들여다본 자신의 모습은 피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내면의 실체였다.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눈은 시력을 투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을 '수단'으로 빌리되 심안(心眼)을 동원해야 내면의 실체에 대한 투시가 가능할 것이다. 윤동주는 바로 그 같은 마음의 눈으로 두 번씩이나 돌아섰다 생각을 바꾸어 되풀이 자신을 성찰하고 점검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본래 그대로의 자신의 정확한 실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윤동주처럼 그렇게까지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거울'을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거울'은 그저 우리의 모습 원형을 그대로 비춰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일명 '셀카'라고 알려진 '셀프 카메라'(Self-camera)가 그것이다. 셀카는 단지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사진에 담는다. 연예인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부각시켜주기 위해서는 셀카를 많이 찍곤 하는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자신의 외모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 좋은 셀카를 찍을 수 있는 촬영 각도 등 셀카 찍는 방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본인 스스로 사진기술을 통해서 그대로 본떠서 재현한다는 것. 어찌 보면 화가들이 직접 자화상을 그리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셀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누구라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자화상인 셈이다. 이름만 들어도 잘 아는 유명한 화가들 중에서는 자화상 단 한 점을 남기지 않은 이가 드물다.  적어도 두 점 정도를 그린 화가에서부터 평생 죽을 때까지 수십 점이 넘을 정도로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캔버스에 담긴 다작 화가도 있다. 화가들이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자기 PR'의 용도인 동시에 은연중에 자신이 '화가'라는 예술적 기질이 내포되어 있는 자의식을 과시하기 위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도판 p 16) 

 

 

 

'자화상'을 예술에서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근원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자화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뒤러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 수 있었던 업적이 바로 자화상이다. 뒤러는 자화상을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진 복제품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자신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떳떳하게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뒤러가 활동하던 당시의 유럽 르네상스 시절에는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반해 독일에서는 '화가'는 그저 그림을 그리는 기능인 '화공'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피우기 전, 중세 시절에 활동한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석공이나 구두 수선공과 비슷했다. 그만큼 사회적 신분이 낮은 직업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그림이란 예술적 표현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림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삼는 정도에 불과했다. 중세의 화공들이 제작한 그림들 중에는 제작자의 서명이 없는 것이 많은데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화공'이라는 직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제약을 먼저 뛰어넘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뒤러였다. 뒤러는 젋은 시절 화가들이 주로 모여서 활동했던 공방 생활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 때만해도 여전히 화공은 사회적으로 그리 높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뒤러는 뛰어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이제 막 명예를 얻기 시작할 무렵인 29세 때 그려진『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에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도록 묘사되어 있다. 뒤러는 자신의 모습을 예수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스물아홉 살의 나를 네가 지닌 색깔 그대로 그렸다"라고 적힌 글귀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뒤러가 예수의 이미지를 차용한 의도는 자신을 예술적 창조자로서 타고난 자신의 재능의 원천을 신의 능력과 대등하다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뒤러는 자신의 실력이 신에 의해 부여되었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신과 대등한 존재로서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서 스스로 격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화상』 연대 미상

 

 

 

하지만 모든 화가들이 뒤러처럼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의 상징으로 자화상을 제작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에 비해 자화상만큼은 많이 남기지 않은 화가들도 있다. 그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르네상스가 낳은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자화상은 딱 두 점뿐이다. 두 점 다 소묘로 그려졌으며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년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유명 화가들 사이에서는 종종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듯이 조그맣게 본인의 얼굴을 그려넣는 방식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다 빈치 역시 몇 몇 작품에 자신의 젋은 시절의 모습을 그려넣었을 뿐 실질적으로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았다. 예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던 르네상스의 천재라면 자신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에 멋지게 채색된 자화상 한 두 점 정도 남겼을 법하다. 그런데 왜 다 빈치는 습작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달랑 소묘 자화상 두 점만 남겼을까?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다 빈치가 자화상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완벽함을 추구하는 천재의 전형적인 특성에서 찾고 있다.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했던 다 빈치는 자신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불완전함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 빈치는 자화상의 특성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화상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모든 것을 외부에 완전히 관객들 앞에서 드러내야하는 일종의 '자기고백'으로 인식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스물 네 살의 자화상』 1804년  (도판 p 164)

 

 

 

인간은 언젠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불완전함 또는 단점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게 되고 그것을 숨기려고 한다. 각각 개인의 특성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이 타의에 의해서 외부적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때로는 심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일반 사람들에 비해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들에게는 내면의 약점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심하게 다투고 난 뒤에 왼쪽 귀를 잘랐던 것도 단지 고흐의 특이한 성격 탓만으로 볼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위의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앵그르가 24살 때 그린 자화상이다. 그냥 봐도 한창 왕성하게 화가로 활동하던 젋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보통 자화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자화상 속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숨겨져 있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24살의 자화상은 앵그르가 일흔이 된 나이에 다시 개작한 것이다. 24살 때 제작하여 이미 완성된 그림에 일흔 살의 앵그르는 다시 손을 본 것이다. 자신의 완성된 그림이 화가 본인이 마음에 안 드면 다시 손질하여 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개작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나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고 생전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일흔 살의 앵그르가 그 많고 많은 자신의 작품들 중에 하필 젊은 시절의 자화상을 개작한 것일까?

 

사실 이 자화상 한 점으로 인해 앵그르는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24살의 자화상이 그려지기 전에 앵그르는 이미 비평가들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엘리트 예술가였다. 이미 젊은 나이에 벌써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청년 앵그르는 전작보다 더 뛰어난 작품들을 그리고 싶어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적 능력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그러한 자부심 속에서 만들어 진 그림이 바로 이 문제의 자화상이다. 신예 화가 앵그르는 자화상을 살롱전에 당당하게 출품했다. 그 당시 살롱전이라면 비평가와 대중들로부터 널리 인정받은 화가들의 그림만이 출품이 가능했던 그림 전시회다. 앵그르는 초상화 제작에 대한 재능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화상도 크게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앵그르는 그전에 자신을 칭찬했던 수많은 비평가들로부터 혹평만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살롱전에서도 입상하지 못하게 되는 불명예스러운 결과를 받아들여야했다. 그 후로 앵그르는 생전에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8살에 되어서야 그는 무려 54년 전에 제작했던 자화상을 다시 그렸다. 어느 누구도 흠 잡을 데 없을 정도로 위대한 화가로 자리잡게 된 앵그르는 애써 과거의 상처를 잊기 위해서였을까?  그가 왜 자화상을 개작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성공의 꼭대기에 서 있는 앵그르가 실패한 자화상을 다시 손을 보게 됨으로써 젊은 시절에 겪었던 예술가로서의 흠을 한층 성숙되고 완벽한 예술적 명성이 묻어 나 있는 붓으로 직접 손질함으로써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했을 것이다. 앵그르는 자화상을 개작하는 것만으로 자기 위안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스물 세 살의 자화상』 1821년   (도판 p 174)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만을 똑같이 찍어내는 사진과 다르다. 렘브렌트, 반 고흐, 고갱 등 위대한 화가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점검하며 성찰하기 위해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유독 수 십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되돌아보면서 보다 나은 내면의 성숙을 이루어내기 위해 그리는 것이다. 렘브렌트는 매년 자화상을 그렸다. 그 역시 젊은 앵그르와 마찬가지로 명망 있는 화가로 출세하여 젋은 시절부터 부와 명예를 누리기 시작할 때 화려한 복장을 입은 자화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제 없는 탐욕으로 인해 그동안 화가로 활동하면서 얻은 수많은 재산을 탕진했고 부인의 죽음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한순간에 명성이 추락하게 되어 별 볼일 없는 가난한 늙다리 화가가 되었을 때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노년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다.  일그러진 자기 내면이 드러난 자화상, 늙어 쭈글쭈글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고통일 수 있지만 렘브란트에게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려 놓고 들여다보는 것은 그 고통을 감내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그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약점이 있고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물이라고 할 수 없다. 인생의 부귀영화는 죽을 때까지 오랫동안 누린다는 것은 쉽지 않으며 젋음의 상징인 검은 피부와 탱탱한 피부는 나세월의 변화 앞에서는 주름 가득한 피부와 흰 머리로 변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기나긴 인생을 종지부를 찍는 죽음 앞에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절대적인 숙명이다. 화가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인간의 불완전한 존재에 대해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이미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남들에 비해 그러한 약점 앞에서 무척 괴로워했다. 스물 세 살의 들라크루아는 이미 인간의 숙명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자화상 속의 모습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앞에서 크게 갈등을 했던 덴마크의 왕자 햄릿으로 형상화시켰다.

 

거울은 자칫 보기에 따라 자신의 모습에 반해 터무니없는 자아도취나 혹여 반대로 자기 환멸이나 절망에 사람을 빠뜨리게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나르시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 속에 숨겨진 모든 것까지 캔버스에 담고자했던 자화상 제작, 즉 이러한 화가들의 내면적 체험은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문 앞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에 걸맞게 실행하는 값진 노력이다. 그러하기에 고된 인생의 과정 속에서 내적 성찰의 노력이 만들어 낸 위대한 산물인 예술가들의 자화상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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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7-30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화상 이야기 흥미롭네요. 유일하게 자신의 모습을 남길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요?...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자가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분명 어긋나는 지점들이 있었을 법한데...그 부분을, 그 틈을 그림으로 설명하려고 했을까요?,,,특히 자의식이 강한 화가들은 더 그랬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사이러스님 글 읽으면서 글로 자화상을 묘사해본다면? 엉뚱한 생각도 함께 하게 되네요..
온통 미화와 왜곡으로 얼룩진 자화상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쪽팔려서 솔직하게 그려낼 수 있을지..ㅋㅋ

cyrus 2012-08-01 20: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맞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알라딘 블로그에 제 사적인 생활에 대한 글을 잘 안 쓰는 편이에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면 몰라도요 ^^:;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유명 화가의 자화상을 꽤 많이 소개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이야기가 빠진거요. 칼로의 자화상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유명한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