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 정재승의 시네마 사이언스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약에 영화 <레인맨>에서 동생 찰리가 자폐증 증세를 보이는 형 레이먼드의 옆을 지켜주지 못한 채 그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가로챘더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이자 강박증 환자인 소설가 멜빈이 인내심이 강한 캐럴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의 결말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될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운명도 한 순간에 180도로 뒤바뀌었을 것이다.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일상생활이나 상식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암기에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자폐증 환자의 삶을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다. 이 영화 한 편 덕분에 자폐증 환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분한 자폐증 환자 레이먼드는 숫자와 언어에서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이라는 개념을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심어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자폐증 환자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강하다. <레인맨>의 레이먼드처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완벽한 기억력을 지녔다거나 2005년 세계수영선수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움으로써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자폐증 수영선수 김진호 씨의 사례를 제외한다면 우리나라 자폐증 환자들은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를 받고 있으며 환자의 가족들 역시 자폐증 환자를 돌보면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자폐증 환자의 특징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작년 '미국 정신과 저널(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온라인판에 미국 예일대의대 어린이연구센터의 김영신 교수팀은 한국 어린이 38명 가운데 1명이 자폐증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이나 유럽엣의 자폐증 발생률의 3배 가까운 수치다. 그리고 이번 연구를 통해서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어린이 중 3분의 2가 일반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학교에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원인을 모르고 치료도 받지 않고 있었다. 이런 학생들은 대부분 병의 중간단계인 야스퍼거스 증후군으로 분류되어 특수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조금 달랐다.

 

자폐증은 지적 수준은 보통이지만 사회적 능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과 상호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정서적인 유대감도 일어나지 않는 증후군으로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상태를 보인다. 사회적 교류가 잘 되지 않으며 의사소통이 어렵고 언어 발달이 늦으며 행동상의 문제, 특정분야에만 치우친 관심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자폐증 특유의 성격상 특징은 '서번트 신드롬'이라고 해서 특별한 재능 수준으로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꼭 모든 자폐증 환자들이 '서번트 신드롬'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전체 자폐증 환자 중 약 10% 정도만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신드롬'이란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과 같이 전체를 휩쓸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그러나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자폐증 환자 전체가 뛰어난 암기력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자폐증 환자의 특별한 재능 자체를 '신드롬'이라고 규정, 명명하기에는 사실은 민망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심리학계에서는 비상한 재능을 가진 자폐증 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를 '서번트 신드롬'이라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자폐적 천재'(Autistic savant)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자폐증 환자들의 근본적인 발병 원인이 무엇이며 정신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이들에게 유독 왜 일반 사람의 지능을 뛰어넘는 '자폐적 천재'를 보이는 걸까?  지금까지도 그 원인에 대해서 수많은 연구를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원인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자폐 증세의 발병에 작용할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자폐증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되지 못한 지금, 자폐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 그리고 자폐증 환자와 함께 생활하는 가족들이 유독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자폐증이 과연 가족의 유전적 요인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여부다.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라면 꼭 가지게 되는 편견 중 하나가 바로 양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를 자폐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 자폐증이 가족의 유전적 요인에 의해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는 나쁜 양육 환경과 방식 때문에 자폐증이 발병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폐증은 가족의 유전자에서 이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뇌 구조 자체에서 이상을 일으킨다고 보면 된다. 자폐증 환자의 뇌를 들여다보면 측두엽 안에 존재하는 감정이나 공격성을 담당하는 아미그달라와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분이 정상인의 뇌에 비해 덜 발달되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강박증 또한 단순히 마음의 병이라기보다는 엄밀히 과학적으로 규명해본다면 뇌의 생물학적 요인이 강박장애 발생과 연관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뇌 영상 연구 결과를 통해서 강박장애에서 특정 신경회로 영역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약물치료 내지는 행동요법치료 후 이러한 영역의 문제가 정상화 됨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래서 초기에 병원을 방문하면 약을 먹지 않고 상담이나 행동치료를 통해 병을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환자들은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스스로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사회생활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병원을 찾지 않는 환자가 많다. 일부 민간생명보험사에서 정신과 진료 기록을 들어 보험가입을 거부하는 사례가 있는 등 사회적인 편견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이 정신적 장애 환자들을 더욱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 '힐링'(Healing, 치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힐링' 가운데서도 자연 치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화학적 치료가 부작용이 많다는 점에서 몸이 병을 이기도록 하는 자연 치유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환자들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환자의 정신을 좀 더 안정시켜줄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여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정신 장애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치료법은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가족들 또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지인들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캐럴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던 멜빈의 신경질적인 성격을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캐럴이다. 그리고 따뜻하게 먼저 마음을 열어줌으로써 그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항상 그의 곁을 지켜줬다.

 

이번에 새로 발간한 정재승 교수의 신작은 단순히 영화를 통해서 뇌과학의 세계를 흥미롭게 들여다보고 설명하는 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고통받고 있는 정신 장애 환자들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인식이 각성되기를 강조하고 있다. 정신 장애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뇌과학의 역할이지만 정신 장애 환자들이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뇌과학이라는 학문이 정신적 약자들을 위한 치유의 과학으로써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화상전 - 거장들의 자화상으로 미술사를 산책하다
천빈 지음, 정유희 옮김 / 어바웃어북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거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만약 거울이 없으면 맑은 물에라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야 말 것이다.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그때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의 관찰과 평가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람은 이 같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도 비추어 본다. 정확한 자기 확인과 자기 점검, 자기 준비와 자기 개선을 위해서다.

 

시인 윤동주는 달이 비치고 구름이 흐르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의 얼굴을 비추어준 거울은 어느 외딴 우물이었다. 우물 속에 비추어 들여다본 자신의 모습은 피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내면의 실체였다.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눈은 시력을 투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을 '수단'으로 빌리되 심안(心眼)을 동원해야 내면의 실체에 대한 투시가 가능할 것이다. 윤동주는 바로 그 같은 마음의 눈으로 두 번씩이나 돌아섰다 생각을 바꾸어 되풀이 자신을 성찰하고 점검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본래 그대로의 자신의 정확한 실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윤동주처럼 그렇게까지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거울'을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거울'은 그저 우리의 모습 원형을 그대로 비춰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일명 '셀카'라고 알려진 '셀프 카메라'(Self-camera)가 그것이다. 셀카는 단지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사진에 담는다. 연예인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부각시켜주기 위해서는 셀카를 많이 찍곤 하는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자신의 외모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 좋은 셀카를 찍을 수 있는 촬영 각도 등 셀카 찍는 방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본인 스스로 사진기술을 통해서 그대로 본떠서 재현한다는 것. 어찌 보면 화가들이 직접 자화상을 그리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셀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누구라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자화상인 셈이다. 이름만 들어도 잘 아는 유명한 화가들 중에서는 자화상 단 한 점을 남기지 않은 이가 드물다.  적어도 두 점 정도를 그린 화가에서부터 평생 죽을 때까지 수십 점이 넘을 정도로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캔버스에 담긴 다작 화가도 있다. 화가들이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자기 PR'의 용도인 동시에 은연중에 자신이 '화가'라는 예술적 기질이 내포되어 있는 자의식을 과시하기 위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도판 p 16) 

 

 

 

'자화상'을 예술에서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근원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자화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뒤러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 수 있었던 업적이 바로 자화상이다. 뒤러는 자화상을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진 복제품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자신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떳떳하게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뒤러가 활동하던 당시의 유럽 르네상스 시절에는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반해 독일에서는 '화가'는 그저 그림을 그리는 기능인 '화공'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피우기 전, 중세 시절에 활동한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석공이나 구두 수선공과 비슷했다. 그만큼 사회적 신분이 낮은 직업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그림이란 예술적 표현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림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삼는 정도에 불과했다. 중세의 화공들이 제작한 그림들 중에는 제작자의 서명이 없는 것이 많은데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화공'이라는 직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제약을 먼저 뛰어넘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뒤러였다. 뒤러는 젋은 시절 화가들이 주로 모여서 활동했던 공방 생활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 때만해도 여전히 화공은 사회적으로 그리 높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뒤러는 뛰어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이제 막 명예를 얻기 시작할 무렵인 29세 때 그려진『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에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도록 묘사되어 있다. 뒤러는 자신의 모습을 예수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스물아홉 살의 나를 네가 지닌 색깔 그대로 그렸다"라고 적힌 글귀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뒤러가 예수의 이미지를 차용한 의도는 자신을 예술적 창조자로서 타고난 자신의 재능의 원천을 신의 능력과 대등하다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뒤러는 자신의 실력이 신에 의해 부여되었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신과 대등한 존재로서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서 스스로 격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화상』 연대 미상

 

 

 

하지만 모든 화가들이 뒤러처럼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의 상징으로 자화상을 제작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에 비해 자화상만큼은 많이 남기지 않은 화가들도 있다. 그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르네상스가 낳은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자화상은 딱 두 점뿐이다. 두 점 다 소묘로 그려졌으며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년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유명 화가들 사이에서는 종종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듯이 조그맣게 본인의 얼굴을 그려넣는 방식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다 빈치 역시 몇 몇 작품에 자신의 젋은 시절의 모습을 그려넣었을 뿐 실질적으로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았다. 예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던 르네상스의 천재라면 자신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에 멋지게 채색된 자화상 한 두 점 정도 남겼을 법하다. 그런데 왜 다 빈치는 습작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달랑 소묘 자화상 두 점만 남겼을까?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다 빈치가 자화상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완벽함을 추구하는 천재의 전형적인 특성에서 찾고 있다.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했던 다 빈치는 자신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불완전함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 빈치는 자화상의 특성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화상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모든 것을 외부에 완전히 관객들 앞에서 드러내야하는 일종의 '자기고백'으로 인식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스물 네 살의 자화상』 1804년  (도판 p 164)

 

 

 

인간은 언젠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불완전함 또는 단점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게 되고 그것을 숨기려고 한다. 각각 개인의 특성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이 타의에 의해서 외부적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때로는 심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일반 사람들에 비해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들에게는 내면의 약점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심하게 다투고 난 뒤에 왼쪽 귀를 잘랐던 것도 단지 고흐의 특이한 성격 탓만으로 볼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위의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앵그르가 24살 때 그린 자화상이다. 그냥 봐도 한창 왕성하게 화가로 활동하던 젋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보통 자화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자화상 속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숨겨져 있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24살의 자화상은 앵그르가 일흔이 된 나이에 다시 개작한 것이다. 24살 때 제작하여 이미 완성된 그림에 일흔 살의 앵그르는 다시 손을 본 것이다. 자신의 완성된 그림이 화가 본인이 마음에 안 드면 다시 손질하여 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개작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나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고 생전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일흔 살의 앵그르가 그 많고 많은 자신의 작품들 중에 하필 젊은 시절의 자화상을 개작한 것일까?

 

사실 이 자화상 한 점으로 인해 앵그르는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24살의 자화상이 그려지기 전에 앵그르는 이미 비평가들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엘리트 예술가였다. 이미 젊은 나이에 벌써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청년 앵그르는 전작보다 더 뛰어난 작품들을 그리고 싶어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적 능력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그러한 자부심 속에서 만들어 진 그림이 바로 이 문제의 자화상이다. 신예 화가 앵그르는 자화상을 살롱전에 당당하게 출품했다. 그 당시 살롱전이라면 비평가와 대중들로부터 널리 인정받은 화가들의 그림만이 출품이 가능했던 그림 전시회다. 앵그르는 초상화 제작에 대한 재능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화상도 크게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앵그르는 그전에 자신을 칭찬했던 수많은 비평가들로부터 혹평만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살롱전에서도 입상하지 못하게 되는 불명예스러운 결과를 받아들여야했다. 그 후로 앵그르는 생전에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8살에 되어서야 그는 무려 54년 전에 제작했던 자화상을 다시 그렸다. 어느 누구도 흠 잡을 데 없을 정도로 위대한 화가로 자리잡게 된 앵그르는 애써 과거의 상처를 잊기 위해서였을까?  그가 왜 자화상을 개작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성공의 꼭대기에 서 있는 앵그르가 실패한 자화상을 다시 손을 보게 됨으로써 젊은 시절에 겪었던 예술가로서의 흠을 한층 성숙되고 완벽한 예술적 명성이 묻어 나 있는 붓으로 직접 손질함으로써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했을 것이다. 앵그르는 자화상을 개작하는 것만으로 자기 위안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스물 세 살의 자화상』 1821년   (도판 p 174)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만을 똑같이 찍어내는 사진과 다르다. 렘브렌트, 반 고흐, 고갱 등 위대한 화가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점검하며 성찰하기 위해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유독 수 십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되돌아보면서 보다 나은 내면의 성숙을 이루어내기 위해 그리는 것이다. 렘브렌트는 매년 자화상을 그렸다. 그 역시 젊은 앵그르와 마찬가지로 명망 있는 화가로 출세하여 젋은 시절부터 부와 명예를 누리기 시작할 때 화려한 복장을 입은 자화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제 없는 탐욕으로 인해 그동안 화가로 활동하면서 얻은 수많은 재산을 탕진했고 부인의 죽음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한순간에 명성이 추락하게 되어 별 볼일 없는 가난한 늙다리 화가가 되었을 때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노년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다.  일그러진 자기 내면이 드러난 자화상, 늙어 쭈글쭈글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고통일 수 있지만 렘브란트에게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려 놓고 들여다보는 것은 그 고통을 감내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그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약점이 있고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물이라고 할 수 없다. 인생의 부귀영화는 죽을 때까지 오랫동안 누린다는 것은 쉽지 않으며 젋음의 상징인 검은 피부와 탱탱한 피부는 나세월의 변화 앞에서는 주름 가득한 피부와 흰 머리로 변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기나긴 인생을 종지부를 찍는 죽음 앞에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절대적인 숙명이다. 화가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인간의 불완전한 존재에 대해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이미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남들에 비해 그러한 약점 앞에서 무척 괴로워했다. 스물 세 살의 들라크루아는 이미 인간의 숙명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자화상 속의 모습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앞에서 크게 갈등을 했던 덴마크의 왕자 햄릿으로 형상화시켰다.

 

거울은 자칫 보기에 따라 자신의 모습에 반해 터무니없는 자아도취나 혹여 반대로 자기 환멸이나 절망에 사람을 빠뜨리게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나르시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 속에 숨겨진 모든 것까지 캔버스에 담고자했던 자화상 제작, 즉 이러한 화가들의 내면적 체험은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문 앞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에 걸맞게 실행하는 값진 노력이다. 그러하기에 고된 인생의 과정 속에서 내적 성찰의 노력이 만들어 낸 위대한 산물인 예술가들의 자화상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도둑 2012-07-30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화상 이야기 흥미롭네요. 유일하게 자신의 모습을 남길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요?...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자가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분명 어긋나는 지점들이 있었을 법한데...그 부분을, 그 틈을 그림으로 설명하려고 했을까요?,,,특히 자의식이 강한 화가들은 더 그랬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사이러스님 글 읽으면서 글로 자화상을 묘사해본다면? 엉뚱한 생각도 함께 하게 되네요..
온통 미화와 왜곡으로 얼룩진 자화상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쪽팔려서 솔직하게 그려낼 수 있을지..ㅋㅋ

cyrus 2012-08-01 20: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맞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알라딘 블로그에 제 사적인 생활에 대한 글을 잘 안 쓰는 편이에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면 몰라도요 ^^:;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유명 화가의 자화상을 꽤 많이 소개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이야기가 빠진거요. 칼로의 자화상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유명한데 말이죠.
 
호모 심비우스 - 이기적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 다윈의 대답 시리즈 1
최재천 지음 / 이음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약육강식, 적자생존', 왜곡된 다윈의 진화론

 

 

 

 

 

자연의 세계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작동된다? 

일부 맞는 부분은 있지만 자연의 세계가 꼭 그렇게 강한 자들에게만 유리한 '그들'만의 무대는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하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떠올린다. 그동안 진화론은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다윈가 살던 19세기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유럽의 힘센 나라들은 세상의 곳곳을 집어삼켰다. 자연 상태에서도 강하고 흉포하며 교활한 자들이 살아남게끔 되어 있다.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힘없는 나라를 억누르고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 특별한 문제로 삼지 않았다. 만약에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정당성을 반박하는 이가 있었다면 당하는 게 억울하다면 국력을 키우면 될 것이라고 맞섰을 것이다. 이렇듯 다윈의 진화론은 억압과 침략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로 쓰이곤 했다.

 

진화론은 또 20세기 들어 군비경쟁이나 자유경쟁 논리, 우생학, 사회진화론 분야에서 오도된다. 인종 차별과 여성 차별 같은 사회문화적 현상은 진화론적으로 적응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특히나 '경쟁'을 강조하는 시장자유주의의 현대사회에도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 같은 용어는 그대로 유효하고, 생명 탄생이나 인종 차별, 성차별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진화론 등장 자체가 단순히 과학사를 떠나서 인류사에 있어서 너무나 큰 획기적인 사건임은 분명하고 그 영향력도 인류 전반에 미쳤기 때문이다.

 

사실 이 등식은 다윈의 이론을 전파하기 위해 그의 '성전'을 끼고 세상으로 뛰쳐나간 '전도사'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실제로 다윈은 그런 용어를 즐겨 쓰지 않았다. 오히려 진화론에 처음으로 '적자생존'을 도입한 사람이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1820~1903)다. 스펜서는 생물학자가 아니기에 실제로 생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명확히 이해했다기보다는, 그저 생물학 이론들을 차용해 현실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럴듯하게 설명했을 뿐이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생태학자들, 특히 남성 생태학자들은 95%가 자연계의 치열한 경쟁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추세는 달라졌다. 자연계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무조건 남을 제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서 이제는 '호모 심비우스'다


흔히 '협동'은 인간만이 가진 고도의 기술이고 동물은 단지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에 맞춰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를 비추어본다면 오히려 생각했던 것과는 거꾸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시장자유주의의 원리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경쟁의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게 살아가고 있는 반면에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일부 생물들 중에는 자신과 전혀 다른 종(種)들과 경쟁을 하기보다는 서로 협동하면서 인간 사회보다 더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는 자연의 세계에서 잘 살아남고 있다.

 

현생인류와 같은 종으로 분류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학명의 어원 속에는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뜻하고 있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는 결코 그 어원처럼 영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연을 잘 이용해 만물의 영장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무차별적인 세계화, 국가간 빈부격차, 환경 오염 등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 문제에 있어서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는 이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한테서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호모 심비우스는 공생을 뜻하는 'Symbiosis'에서 착안한 말로 그가 만들어 쓰는 말이다. '함께'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syn'과 '삶'이라는 뜻의 'biosis'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동안 최재천 교수의 글을 관심있게 읽어 본 독자라면 용어가 낯설어도 그 의미만큼은 무척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공생', '협조'의 방식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알이 닭을 낳는다』와 같은 대중들을 위한 과학 에세이집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알면 사랑한다'라는 메시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다가 올해 초에 다윈의 진화론를 새롭게 조명한 『다윈 지능』을 통해 '호모 심비우스'라는 새 용어로 정립하여 '공생'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강조하게 되었다. ('다윈의 대답' 시리즈의 첫 번째를 장식하는『호모 심비우스』는 작년 12월에 처음 초판본이 출간되었고『다윈 지능』은 그 다음 올해 1월 초에 출간되었다) 

 

그는 자연계가 수차례 멸절 위기를 겪었음에도 다양성을 회복한 것은 '니치'(Niche), 곧 자기만의 독특한 공간을 갖고 공존해왔기 때문이라 말한다. 지구의 생물 중량 중 으뜸인 것은 식물, 개체수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곤충인데,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을 대신해 곤충이 꽃가루를 날라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으며 공생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럼핏나무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는데, 그 속에 아즈텍개미들이 입주하여 산다. 나무는 개미에게 집은 물론 개미들이 선호하는 단백질이 함유된 뮬러체라는 먹이도 제공한다. 개미들은 그 대가로 나무를 모든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이파리를 갉아먹는 모든 초식동물들은 물론 물과 햇빛을 두고 경쟁할 다른 주변 식물들까지 제거해준다. 아즈텍개미와 트럼펫나무는 진화의 역사를 통해 공생의 지혜를 터득하여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p 34~36)

 

 

'니치'를 통한 공생의 생존방식의 대표적인 예가 트럼핏나무와 아즈텍개미의 관계이다. 트럼핏나무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고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식물로는 드물게 동물성 단백질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뮬러체라는 물질을 분비해 줄기 내부에 사는 아즈텍개미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뮬러체는 아즈텍개미가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아즈텍개미는 트럼핏나무를 위한 보답으로 나무 전체를 순찰하면서 온갖 포식동물로부터 보호한다.

 

 

 

 

 

 '공생'이 없는 생태계 = 동반멸종

 

 

 

 

 

생태 피라미드

(그림출처: http://cafe.naver.com/iyh0606/3)

 

 

 

 

생물학 용어 중에 '생태 피라미드'(Ecological pyramid)라는 것이 있다. 생물군에 있어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각 단계의 개체군의 양적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먹히는 동물의 수는 그것을 먹는 동물의 수보다 항상 많다. 따라서, 먹히는 동물을 저변으로 하고, 먹는 동물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생태계'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생태계 피라미드(또는 먹이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저변 동물은 초식성이고 소형이며 다수이다. 정점 동물은 육식이고 대형이며 소수이다. 이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동물의 한 종류가 멸종하면 '생태계' 피라미드는 무너진다. 이는 곧 자연 파괴를 뜻한다.

 

 

 

 

 

 

개미가 멸종하면 그와 공생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동식물들이 줄줄이 멸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이 같은 공생-동반멸종(Mutualism coextinction)이 최근 보전생물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서로 치밀한 공생관계를 맺으며 엄청난 생물다양성을 이룩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지만, 이제 전례 없는 환경 파괴로 인해 그들이 멸종의 길을 걷게 되면서 공생이 동반멸종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공생관계를 잘 이용하면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을 복원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p 94) 

 

 

하지만 단순히 먹고 먹히는 관계로 인해 특정 종이 사라진다고해서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공생을 통해 살아남은 동식물의 관계가 '환경 파괴'로 인해 어긋나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던 다른 동식물도 멸종하게 되어 생태계 전체가 교란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공생-동반 멸종'(Mutualism coextinction)이라고 한다.

 

부전나비의 애벌레는 다른 나비의 종과는 다르게 개미굴에서 자란다. 개미가 직접 부전나비의 애벌레를 개미굴로 데리고 들어와 일종의 보모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애벌레가 개미들이 마음껏 포식할 수 있는 먹잇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생태계를 먹고 먹히는 과정만이 작용하는 세상으로 인식하는 '경쟁'에 익숙한 인간의 머리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이다)  부전나비는 개미굴 속에서 개미들의 도움으로 자란다. 부전나비와 공생 관계의 개미가 살기 위해서는 실내온도가 높은 토양에서 군락을 형성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풀이 많이 자라지 않으면서 햇볕이 많이 드는 토양이라면 개미뿐만 아니라 부전나비의 번식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이러한 공생 관계를 모른 채 점차 개체수가 줄어드는 부전나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식지에 인간과 동물들이 넘나들지 못하게 말뚝을 쳐서 아예 보호관리구역으로 만들게 된다면 부전나비의 수가 늘어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게 되면 서식지에 수많은 식물들이 자란다. 식물들이 자라나게 되면서 햇빛을 받지 못하는 토양의 온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개미가 서식하기에 적합하지 않는 환경 상태가 되어버린다. 보호관리구역에 개미가 살 수 없다면 이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전나비 애벌레 또한 생명유지를 보장할 수 없다. 당연히 부전나비의 수가 더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보호관리구역을 해체하고 그 곳에 소나 말을 풀어놓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소와 말이 풀을 뜯어 먹음으로써 토양에 햇볕이 들게 되어 온도가 상승한다. 그러면 그 곳에 다시 개미가 살게 되고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부전나비의 수도 늘어나게 된다.

 

 

 

 

 공생하는 인간이 사회 경쟁력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해 확실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이기적인 동물로 규정하고 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남을 해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피부색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는 인종차별주의자도 있고, 종교가 다르다고 원수처럼 서로 전쟁을 하고 있다.  이기적 인간이 얻는 이익은 이타적 인간이 얻는 이익보다 늘 크다. 그러나 이는 결국 소멸, 파괴, 파멸이라는 결과를 남긴다. 그래서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결코 고립된 상태로 주위 생명체를 무시하고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생태계에서도 공생의 생존 방식을 볼 수 있다. 개미는 진드기를 돌봐주고, 진드기 분비물을 영양분으로 섭취하고 살아간다. 악어새는 악어의 이빨을 청소해 주는 대신 먹이를 얻어먹고 있다. 살벌할 것 같은 동물의 세계도 이렇게 공생의 관계가 많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견해가 다르다고 상대를 증오하는 일이 많다. 진보 세력은 보수 세력이 전부 없어지면 세상에 낙원이 올 것이라 상상하고, 보수는 진보가 사라져야 세상이 평화로울 거라 생각한다. 어떤 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의 인종만이 단언 우수하기 때문에 지구상에 살아남아야 된다는 망상을 갖고 있다.  이렇게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생할 줄 아는 동식물보다도 생각이 짧다.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인간 세계에만 보지 말고 자연 세계에 한번 들여다봐야 한다. 또, 동물들의 지혜로운 공생관계를 알아 인간 사회에 접목하여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라고 볼 수 없다.

 

'호모 심비우스'는 단순히 공생하는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만 아니다. '공생'의 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온갖 전자기기를 통해 사이버 세상과는 그렇게 잘 공감하는 듯하지만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친구와는 교감하지 못하는 이러한 '불통'(不通) 사회에 무조건 '공생'을 강조한다는 것은 '우이독경'(牛耳讀經)으로 그칠 뿐이다.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처럼 동식물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공생'을 알게 되는 '공감'이 형성된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타인들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2-07-22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재천 교수의 이야기에 딱히 태클을 거는 것은 아니고, 위의 이야기들에 상당히 공감합니다만,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는 상당수 인간의 문제인 것 같아요. 자연의 동식물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것이고, 그 방식을 인간이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글의 논의대로 동식물의 진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부분을 인간이 강조해서 보는가의 문제도 또 있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cyrus 2012-07-23 18:55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공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는데요. 상리공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공생의 의미입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종이 서로 이익을 얻으면서 돕는 것이죠. 이와는 조금 다른게 편리공생인데 한 쪽에만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은 이익 또는 불이익을 얻지 않으면서 돕는 관계를 말합니다. 사실 최재천 씨의 책을 읽게 되면 공생을 강조하면서 설명하는 것 같은데 편리공생에 대해서는 언급이 잘 없더군요. (정확한 기억이 아닙니다. 공생의 정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잠깐 편리공생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있고요) 어찌 보면 이러한 관점도 동식물의 관계 특정 부분만을 인간의 생활방식과 견주어 강조할 수도 있겠고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도 모르게 돈으로 거래되고 있는 것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모든 것이 거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p 19)

 

 

 

* 올해 하반기부터 지정좌석제로 운영하는 정기이용권 버스가 시범 운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기이용권 버스는 1개월 이상 이용권을 구매한 승객을 대상으로 출근시간대 3시간(오전 6~9시), 퇴근시간대 5시간(오후 5~10시) 동안 좌석제로 운행된다. 하루 운행 횟수는 편도 기준 4회 이하다. 예컨대 일산에서 서울역까지 오가는 버스의 정기이용권을 구입하면 매일 지정장소와 시간에 좌석버스를 타는 식이다. 요금은 지역 여건을 반영할 수 있도록 자율신고제 방식으로 운영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과거 불법 사설 버스가 경기 용인에서 서울 삼성역까지 월 9만 9000원을 받고 운행한 적이 있으나, 정기이용권 버스 비용은 이보다 낮은 수준일 것"이라며 "일부 승용차 이용자들도 흡수해 대도시 교통난 완화에 도움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 인천지역의 일부 중등고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일제고사를 잘 치르면 상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들 학교는 기초학력 부진 학생이 없거나 성적이 우수한 학급에 상금을 주고, 기초학력 부진에서 벗어난 학생에게 1만원짜리 상품권을 지급하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리고 성적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학생은 자전거, 헤드폰, 선크림 등을 부상으로 받기도 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에 따르면 일제고사를 잘 보면 학급에 상금을 지급하거나 학생에게 문화상품권을 주겠다고 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조사 대상 96개 학교(중학교 54곳, 고교 42곳) 가운데 22%인 21개교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 최근에 방한했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청중 1만 명을 대상으로 무료 강연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샌델 교수의 강연을 돈으로 사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웃지 못할 역설이 발생했다. 이번 강연은 이메일로 신청자를 대상으로 선착순으로 무료 입장권이 지급됐으며, 신청자가 폭주하면서 입장권 발송이 조기 마감되었다. 하지만 신청이 마감된 입장권을 구하려는 사람이 여전히 많자, 이번에는 입장권에 웃돈을 얹어 팔려고 내놓은 암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강연 당일 인터넷 중고장터 등에는 샌델 교수의 강의 입장권을 장당 1만 원에서 많게는 3만 원까지 판매한다는 판매 글이 수 십 개씩 올라왔다.

 

 

돈은 편리하다. 또한 우리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돈의 권력은 막강하다. 일상생활의 웬만한 불편거리는 대부분 돈으로 해결된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이 그야말로 딱 어울릴 만큼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돈을 그만큼 많이 벌어야만 한다는 현실을 이제 한국사회는 시장지상주의에 익숙해진 듯하다. 하지만 돈을 대하는 태도는 어쩐지 불안하고도 이중적이다.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시장지상주의를 온몸으로 받아낼 자신도, 피해낼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다. 세상에는 이렇게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많다. 생명, 질서, 출생, 자연과 같은 가치들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샌가 돈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고 있다. 일정한 금액을 지불한다면 얼마든지 지정된 버스좌석에 앉아 편안하게 출퇴근할 수 있다. 그리고 시험만 잘 쳐셔 좋은 성적을 받게 된다면 노력의 성과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일정한 상금 및 상품을 받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샌델 교수의 강연 입장권마저도 거래 대상이 되었다. 후문에 의하면 강연 당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샌델 교수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사회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이루어진다?

 

 

 

 

 

(左) '보이지 않는 손'의 시장경제를 주장한 애덤 스미스 

(右)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공리주의를 창시한 제레미 벤담

 

시장을 옹호하는 두 번째 주장은 경제학자에게 좀 더 친숙한 것으로 공리주의자(Utilitarian)의 입장이다. 공리주의자는 시장에서의 거래가 구매자와 판매자에게 똑같이 이익을 제공하고, 결과적으로 집단의 행복이나 사회적 효용을 향상시킨다고 말한다.  (중략)  이렇게 시장 거래의 결과로 구매자와 판매자는 모두 행복해지고 효용은 증가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시장이 재화를 효율적으로 분배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입장이다.  (p 52~53)

 

 

시장경제 또는 자유주의 경제체제(시장자유주의)는 분업에 의해 생산된 재화와 용역을 자유 가격 체제의 수요와 공급 관계에 의해 분배하는 사회구성체이다. 실제로는 순수한 형태로서의 시장경제체제는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각 국가 또는 사회마다 다양한 형태로 수용되고 있다. 시장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모든 경제주체의 생산활동은 자유로우며, 시장에서의 물품구입도 자유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같은 흐름을 일견 너무 자유로워 무질서한 경제활동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가격이라고 하는 메커니즘이 시장에서의 상품매매를 성사시키고, 또 이것을 근거로 생산과 소비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의 특징은 장기적으로 보아 가격의 자유로운 흐름에 따라 자원의 합리적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시장자유주의 경제는 매우 효율적인 경제 체제이기는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경제적 효율성은 달성할 수 있지만, 형평성은 달성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리고 시장자유주의는 모든 경제 주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전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고 타고난 능력과 소질도 제각기 다르므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형평성 문제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면 사회적 불평등이 야기될 수 있다.   

 

 

 

 

 

공리주의적 효용 분배의 문제점

(참고자료 : 김정헌 『정책학NOTE』학문사)

 

공리주의에 입각한 정책(또는 제도) B의 전체 효용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갑과 을이라는 사회 구성원 개인 간의 배분상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면 정책 B는 불평등한 정책이 되고 만다. 이것은 결국 사회 전체의 효용 극대화를 강조하는 공리주의의 기본전제에 위반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역설은 시장경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시장자유주의의 환상을 부추기는데 공리주의가 일조하고 있다. 시장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근거의 배경에는 공리주의적 입장이 내포되어 있다. 공리주의는 한마디로 사회구성원 전체 효용을 극대화하도록 목표를 두고 있는데 시장지상주의자들은 시장 거래 행위에 참여하는 구매자, 판매자만 효용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 발전에 있어서 효응을 최대한 증진시켜 극대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각 개인은 자기의 이익을 뜻대로 추구하고 있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상상치 못했던 사회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봤던 애덤 스미스의 주장과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시장지상주의자들은 공리주의의 원리가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리주의 역시 시장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효율 분배에 대한 형평성 및 공정성의 기준으로 본다면 문제점에 직면하게 된다.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 효용의 극대화라는 기본전제로 인해서 개인상호간의 효용을 교환하는 것마저도 허용하고 있다. 즉,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 내용대로 도덕적 추구가치로 인정되고 있는 자유, 정의, 공익, 생명 등이 효용의 한 구성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전체 효용이 단지 크다는 이유만으로 개개인간의 배분이 제대로 돌아갔다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즉, 개인간의 효율배분이 불평등하더라도 전체 효용의 극대화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 간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공평성 또는 형평성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위에 제시한 표가 의미하는 것처럼 공리주의에 입각한 정책(또는 제도)이 전체 효용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갑과 을이라는 사회 구성원 개인 간의 배분상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면 그 정책(또는 제도)은 불평등한 성격이 되고 만다. 이것은 결국 사회 전체의 효용 극대화를 강조하는 공리주의의 기본전제에 위반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역설은 시장경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소개된 사례 하나를 예를 들어보겠다. 미국에서는 '전담 의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연회비 1500~2만 5천 달러를 지불하여 서비스에 가입한 환자는 불필요하게 기다릴 필요도 없이 본인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며 24시간 내내 언제나 건강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말 그래도 환자에는 '주치의' 한 명을 두고 있는 셈이다. 내용과 취지만 본다면 환자들이 좀 더 신속하고 원활하게 진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좋은 제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일정한 연회비를 지불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환자에게만 가능하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환자들은 진료 받기를 대기하고 있는 또 다른 환자들과 함께 진료실 밖에서 줄 서서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이들도 질 좋은 진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라면 비싸더라도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여 특별 진료 서비스 예약권이 암표로 판매되기도 한다. 과연 이러한 전담 의사 제도가 진료를 받기를 원하는 모든 환자들에게 전체 효용을 가져다주는 좋은 장점의 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제도는 단지 특정 상류층 계층만을 위한 '주치의' 서비스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의사들의 윤리적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선서 속 내용이 무색하게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적인 도덕적 윤리가 퇴색될 수 있다.

 

  

 

 

 도덕적 가치와 덕목은 상품이 아니다

 

1980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를 억제하여 '작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시행함으로써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시장지상주의의 번영을 알리는 서막의 신호탄으로 애덤 스미스의 초상화가 새겨진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해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시장자유주의가 오랫동안 경제 호황을 가져다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유례없는 풍요와 번영을 이끌어낸 시장자유주의는 인류가 미처 그 다음을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인간사회 자체를 거래가 최선의 행위로 강조하는 시장사회로 만들어버렸다. '재화를 사고 판다'는 논리가 더 이상 물질적 재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점차 현대인의 삶 전제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들은 대부분 저자가 태어난 곳이며 이미 시장경제가 활발히 작동하고 있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책의 서론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장경제의 윤리적 딜레마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답게 거래 대상이 천차만별이다. 미국의 일부 도시에는 죄수가 일정 비용만 지불하면 호텔방 못지 않은 독방을 마련해주는 교도소가 있다. 댈러스에 위치하는 어느 학교는 학생들이 책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돈을 지급해준다. 심지어 어느 명문대는 학생의 성적이 나쁘더라도 부유한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명문대로 입학하기 위한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면 입학을 허락해주는 비공식적인 관례(?)도 있다고 한다. ('관례'라기보다는 '청탁성 뇌물'에 가깝다)

 

미국에서는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 윤리적 딜레마의 사례들이 과연 우리나라에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곳곳에 시장경제체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윤리적 딜레마들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시장중심적 사고를 일상생활에서도 흡수하고 있다. 아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이미 잠식당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타주의, 관용, 결속, 시민 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   (p 177)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되면, 시민정신, 관용, 공공성, 우정과 사랑, 명예 등 인간사회의 중요한 윤리적 덕목이 사라진다. 샌델의 말처럼 이 윤리적 덕목과 가치들은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는 데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근육이다. 올바른 삶의 질로 이루어진 '근육'이 균형잡혀야 '사회'라는 신체가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다. 하지만 근육은 오랫동안 운동하지 않는다거나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된다. 이렇듯  삶에서 중요하고도 가치로운 것이 상품화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정한 것들의 가치가 변질되거나 저평가되어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게 된다. 시장가치를 내면화하는 경향은 삶의 질, 맺어온 관계들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의 대상이 아닌 '사물'로 인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경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시장 중심의 사고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센델은 시장경제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시장에 대한 도덕적, 정신적 논쟁을 꺼리는 태도로 인해 공적 담론에서 도덕적 에너지와 시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여전히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부패가 만연하다. 시장경제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딜레마는 빠른 시일 내 해결하기는 무척 어렵다. 시장경제 메커니즘이 우리 삶에 가져다주는 이익과 효용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 또한 외면하거나 방관해서는 안 된다.  

 

문제를 인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다. 우선 시장의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하여 시장의 가치에 의해 침해받고 있는 공공의 가치가 무엇이며, 그러한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공적 토론을 벌임으로써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는 토론 여건이 필요하다. 공공의 영역으로 중요시되는 교육, 의료, 시민권 등은 돈과 시장의 가치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영역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밀어내서는 안 되며, 공공선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이견이나 생각을 이끌어내는 공적 토론이 필요하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논의와 시장에서 가격으로 결정되어서는 안되는 사회적 재화를 평가하는 방법에 대한 공적 토론을 통해 적어도 우리가 선택했고 적응하고 있는 사회의 이면에 대해서 대중들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7-19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9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2-07-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귀하셨군요. 학기는 잘 마치셨는지

cyrus 2012-07-19 23:0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세인트님, 무더운 여름 잘 보내고 계신가요? 지금 방학인데도 학업을 위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 학기나 방학이나 일상은
변한게 얺네요 ^^:;

카스피 2012-07-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언제나 느끼는점이 정말 리뷰를 성실히 잘 하세요^^

cyrus 2012-07-19 23:10   좋아요 0 | URL
요번 1학기 때부터 공부하느라 블로그 관리 소홀히 하다보니 예전처럼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었던
분위기가 나지 않네요. 게다가 페북이랑 카스토리에 빠져서 요즘엔 짧은 글을 쓰는게 좋더라고요 ^^;;

2016-02-14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2-15 08:05   좋아요 1 | URL
이 글, 진짜 오랜만에 봅니다. 이상하게 옛날에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면 부끄럽습니다. ^^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마이클 샌델

 

 

 

서재는 시공을 초월하는 삶의 경험과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보물이에요. 집에 있는 저의 서재에는 책상과 나무로 만든 책장, 그리고 정원이 바라보이는 창문이 있어요. 대부분 철학, 역사 관련 서적들이 꽂혀있는데, 제가 학창시절부터 공부해온 정치 철학 관련 책들이 많은 편입니다. 그 책들 중 일부에는 제가 공부하며 필기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요. 가끔 제 아들이 그 책을 빌려 읽곤 하는데, 그럴 때면 '아빠가 학생 때 직접 필기하며 읽었던 아주 가치가 있는 책' 이라고 말해줍니다.

 

 (중략)

 

살아가면서 윤리적 딜레마에 부딪히게 될 때면, 저는 매우 곰곰이 생각을 합니다. 지인들과 대화를 하거나 토의를 하기도 하죠. 우선적으로 매우 강한 도덕관을 가진 제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녁을 먹으면서, 또는 여행을 하면서 크고 작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곤 했어요. 물론 가족 간에 서로 다른 의견들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개인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정의로운 판단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찾는다면, 그 고민을 가족과 함께 나누면서 가족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토론을 통해 함께 결론을 도출해 내는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마이클 샌델 인터뷰 내용 발췌 인용)

 

 

 

 

정말 멋있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는 열정적인 학자로서의 모습이 아닌 살아가는데 유용한 지식을 자식에게 되물림해주는 소박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2-07-16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하네요. 대단한 사람들은 비상한 이성과 뜨거운 마음까지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더더욱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어져요.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직도 장식용으로 깔끔하게 꽂혀있는 책장을 보며 한탄할 뿐입니다 ㅠ 그래도 나중에 제 아이가 마이클 샌델의 아들녀석처럼 말해주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아요. 그러려면 더 노력해야겠죠 +_+!!

cyrus 2012-07-17 12:57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책 아직 한 번도 안 읽어봤어요. 그 책 읽으려면 철학 기본지식이 있어야하는데 전 좀 더 기본지식부터 알고나서 한 번 도전해보려고요. 저도 샌델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이리시스 2012-07-1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샌델은 무슨 책을 읽는데요? (가서 보면 될 걸 또 묻는다..@.@)

cyrus 2012-07-17 12:58   좋아요 0 | URL
사진출처 옆에 글자 꾸욱 눌리면 바로 볼 수 있게 링크 걸어놨어요. 그런데 샌델이 읽는 책이..
좀 어려운게 많았어요. ^^;; 자신이 강추한 책 세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헤겔의 법철학,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에요 ㅎㅎㅎ;;

2012-07-18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8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8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9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2-07-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저 표정 애 같네요...ㅋㅋ
이 아저씨는 완전 한국에서 유명인사 되더만...네이버 서재까증 만들고..^^
근데..윤리적 딜레마가 늘 화두이던데...과연 답이 있을까요?,,

cyrus 2012-07-18 20:43   좋아요 0 | URL
정확한 답을 찾기가 어려울거같아요, 다만 토론을 통해서 윤리적 딜레마의 다양한 문제점을 인식시킨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금이나마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