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지식채널e - 어느 독서광의 일기

 

 

 

 

Scene #1

 

 

 

 

 

 

 

 

 

 

 

 

 

 



벡곡(栢谷) 김득신은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백이전’(伯夷傳)을 총 11만 3천 번이나 읽을 정도로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기로 유명한 조선의 문인(文人)이다. 김득신의 아버지는 아들이 노자처럼 훌륭한 학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어린 김득신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제대로 된 내용 하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썩 총명하지 못했다.

 

주위 이웃과 친지들은 김득신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아버지만큼은 아들의 능력을 굳게 믿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믿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김득신은 오로지 책만 읽었다. 이때부터 책 전체의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기 시작했다. 결국 59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해 아버지가 그렇게 바라던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40년 간 책을 읽고 나서야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김득신의 묘비명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 있다.

 

"재주가 남보다 못하다고 해서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나보다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그러니 힘쓰는데 달려있을 따름이다."

 


 

 

Scene #2

 

 

 

 

 


 

 

 

 

 

 

김득신의 반복 독서법도 대단하지만 그가 그토록 열심히 읽었던 ‘백이전’을 쓴 고대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도 김득신 못지않게 무수한 인고(忍苦)의 노력 끝에 뒤늦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 낸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물이다. 사마천의 아버지는 천문과 역법을 주관하고 황실의 도서 관리를 담당하는 벼슬을 맡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방대한 중국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사마천에게 자신의 작업을 마무리해줄 것을 부탁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사마천은 아버지처럼 황실 도서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어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사기>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중국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던 흉노의 포위 속에서 부득이하게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그만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사마천은 일생 일대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된다. 한 순간에 대역죄인으로 몰리고 말았다. 황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내렸지만 그 당시 중국에서는 사형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벌금을 내야 하는 것, 또 하나는 벌금을 낼 수 없다면 궁형(宮刑)을 받아야했다. 궁형은 남자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이다. 그 당시 궁형은 중국에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 중의 하나였다. 사마천은 어떻게든 사형을 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유지를 계속 이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벌금을 낼 경제적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어떻게든 벼랑 끝에 몰린 삶을 부지하기 위해서 궁형을 선택했다. 사마천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맡은 벼슬보다 한참 낮은 환관(내시)로 좌천되어야만 했고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아 운신의 폭도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세상의 멸시와 핍박 속에서도 <사기>의 저술을 멈추지 않았으며 마침내 필생의 역작 <사기>를 완성했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권, 52만 6천 5백자. 34세 때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5년 만에 완성했다.

 

 

 


Scene #3


김득신과 사마천, 공통적으로 이 두 사람은 아버지의 소원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일에만 충실히 노력했으며 오랜 노력의 시간을 통해 하나의 목표를 끝내 이루고 마는 강한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주위의 냉담한 시선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그들의 시선에 맞춰 한계를 두지 않았다. 김득신의 묘비명대로 결국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목표의 달성 여부는 그것을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따라 달려있다.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계를 스스로 안다면 그것 또한 옳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자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놓고 애초부터 할 수 없다고 체념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를 해선 안 된다. 그것은 결국 미련하고 게으른 자의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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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08-25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네요. 사마천의 일화는 예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cyrus 2012-08-27 22:07   좋아요 0 | URL
두 사람 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죠. 항상 이런 일화를 접하게 되면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맥거핀 2012-08-2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득신을 그냥 조선의 문인 중의 하나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배경이야기가 있는 인물이군요. 덕분에 하고자하는 일에 있어서 좀 힘이 생겨나는 듯 합니다. 59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다라...
(cyrus님 잘 지내시죠?)

cyrus 2012-08-27 22:10   좋아요 0 | URL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 개학이라서 좀 놀면서(?) 개강 준비하고 있습니다 ^^;;

2012-08-28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르케스 찾기 2016-11-0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광불급... 백곡 김득신의 이 책도 읽으셨군요... 리뷰 찾아 읽다보니 cyrus님의 리뷰들이 눈과 마음에 맴맴 도네요.

cyrus 2016-11-04 14:24   좋아요 1 | URL
《미쳐야 미친다》가 2004년에 나왔으니 저는 그때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 해에 이 책을 읽었고, 전역한 뒤에 또 읽었습니다.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들 중 한 권입니다. ^^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과신한다.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p 300) -

 

 

 

 

 

 합리적 인간의 불편한 진실

 

춘추 전국 시대 초나라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한가운데쯤 왔을 때 칼을 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바로 주머니칼을 꺼내서 배에 자국을 내어 빠뜨린 부분을 표시해 두었다. '떨어진 자리에 표시해 놓았으니 칼을 찾을 수 있겠지.' 그는 배가 언덕에 닿자마자 뱃전에 표시해 두었던 물속으로 뛰어 들었으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씨춘추』에서 유래된 '각주구검'(刻舟求劍)에 관한 일화다. 각주구검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배를 타고 강에 나가서 칼이 빠져버린 위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양쪽 강변의 지형 지물을 보는 것이다. 칼의 주인이 떨어뜨린 칼에만 몰두하지 않고 강변을 주목했더라면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융통성 없는 이 바보스러움을 우리는 반복하기도 한다. 그 바보스러움은 각주구검의 그것과 같이 시간성과 공간의 변화라는 점을 무시한 목적의 설정이라는 것이다.

 

시간성과 공간뿐만 아니라 숫자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개미들이 투자를 할 때 기점이 되는 가격은 말할 나위 없이 매입가, 즉 본전이 된다. 그들은 항상 지금이 본전 대비 이익인지 손실인지를 따지고 든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 기준가가 바뀌기도 한다. 만약 주가가 상승해서 한 번 그 주식이 고점을 쳤다면 그 고점이 새로운 기준가로 변한다. 개미들은 주가가 그 고점에 갔을 때의 기분을 이미 느껴봤고 그 가격대를 또 다른 나의 본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증시가 조금이라도 주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면 시장에서는 비관론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비관론이 만약 논리적이라고 판단되면 주식을 파는 것이 마땅한데, 개미들은 얼마 전에 경험했던 고점에 미련이 남아 지금 가격대에 팔기가 싫어 하는 경향을 보인다. 만약 지금 팔았다가 바로 주가가 반등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가가 상승을 하다가 다시 하락하면 전 고점은 또 하나의 숫자로 각인이 되고 투자자들은 그 고점을 본전으로 여긴다. 그 숫자에 집착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 경제학 용어로 '기준점 편향'(Anchoring Bios, 닻내림 편향)이라고 말한다.

 

합리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은 왜 이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인가?  과연 인간은 지구상에 유일한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성과 직관, 두 가지 생각 시스템의 상호작용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생각을 크게 2가지로 구분한다. 직관을 뜻하는 시스템 1의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이성을 뜻하는 시스템 2의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다.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는 동물적 감각의 순발력, 끔찍한 사진을 보자마자 저절로 인상이 찌그리게 되는 것처럼 완전히 자동적인 개념과 기억의 정신활동이 '빠르게 생각하기'이다. 반면 123 x 456의 문제처럼 머릿속에 즉시 떠오르지 않는 문제의 답, 복잡한 논리적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확인할 때는 '느리게 생각하기'가 작용된다.

 

인간은 어떠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두뇌 속에서 시스템 1과 시스템 2이 상호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면 냉장고 안에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자. 내가 냉장고 안에 있는 우유를 보는 순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시스템 1, 직관, 빠르게 생각하기가 만들어 낸 충동적인 인지 과정이다. 그러나 유통기한을 지난 우유를 마시게 되면 배탈이 날 수가 있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기한이 지난 우유를 벌컥 들이마셔서는 안 된다. 기한 날짜를 먼저 확인하고 우유가 상했는지 유리잔에 부어 확인한다. 그래야만 복통의 괴로움을 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 2, 즉 이성적으로 느리게 생각함으로써 행동을 통제한다.

 

 

 

 

 휴리스틱(Heuristic)에 의한 사고의 오류

 

 

● 언론이 집중 조명한 비행기 추락 사고는 일시적으로 비행기의 안전에 대한 느낌을 바꿔 놓는다. 길가에서 불타는 자동차를 본 후 당신 머릿속에는 그 사고 장면이 잠시 동안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당분간 훨씬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

 

● 개인적 경험, 사진, 생생한 사례들은 타인에게 일어났던 사건이나 단순한 말 혹은 통계보다 훨씬 더 머릿속에 잘 떠오른다.

 

 

 (p 190)

 

 

하지만 시스템 2에 의해 인간의 행동이 통제된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스템 2는 인지적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반복되고 낯익은 문제나 상황 앞에서는 나태해지고 회피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럴 때 인간의 행동을 통제되어야 할 시스템 2는 평소보다 기능이 약해지고 시스템 1에 의해서 의사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아는 것에 바탕을 두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을 주의해야 한다. 두뇌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단축을 선호한다. 애매모호한 자료나 대상은 자연스럽게 무시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사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가용성 휴리스틱이 만들어 낸 편향이다. 이것을 가용성 편향이라고 한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 난 후부터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보다는 기차나 배를 타는 것을 더 선호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가용성 편향이 만들어 낸 잘못된 생각일 뿐이다. 실제로 교통수단의 사고발생 빈도 수에 대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비행기보다는 우리가 자주 타는 자동차의 사고 발생이 높다고 한다. 가용성 편향의 착각에 빠지게 되면 실증적인 통계자료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직관의 함정에 빠지는 인간

 

그렇다면 통계자료를 완벽히 분석하고 이해하면 가용성 휴리스틱의 오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완벽한 대안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것 또한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 형성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통계자료와 같은 과거의 기록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의 기준과 틀로 이루어진 정합적인 사고로 형성된다. 의사결정자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근거의 자료를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만 가지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상황 및 사회문제들은 우연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은 작은 실마리를 토대로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하나의 이야기처럼 규칙적이면서도 정함성을 갖고 돌아가지 않는다. 지난번에 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잘될 것이라는 맹점에 빠지게 되는게 이것을 '정당성의 착각'라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오류는 분석적인 의사결정 성향이 강한 기업의 CEO들에게 많이 볼 수 있다. 분석적이고도 논리적인 사고를 지향한다는 CEO마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스템 1의 직관에 의해 생각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일부 CEO들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정합적인 과거만을 이해함으로써 미래를 예측하고 운의 역할을 무시한다. 그리고 아는 업무에만 집중하게 되어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과신하는 초낙관주의 성향에 빠지게 된다.

 

시스템 1의 직관의 기능과 관련된 인간의 오류적 판단 경향은 '전망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대니얼 카너먼과 故 아모스 트버스키의 공동 연구에 의해 밝혀졌으며 2002년에 심리학자 카너먼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안겨 주었던 이론이다. 우리는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이익보다도 손실에 더욱 민감하고 손실을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했던 '기준점 편향'에다가 위협을 기회로 여기는 낙관적인 사고까지 어울린다면 종종 자신에게 유리한 이익을 거부하게 되는 모순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매몰비용으로 상당한 손실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실 규모가 더욱 확대될 정도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개발 사업을 오랫동안 매달렸던 영국와 프랑스의 경우가 전망 이론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콩코드 효과)

 

 

 

 

 합리주의자들이여, 익숙한 생각의 지배에서 벗어나라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그래서 기억하는 동물이며 결국 후회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말이야 쉽지 합리적인 인간이라도 올바른 결과를 위한, 옳은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 '잘'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상 유일한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명예로운 훈장을 내려놓아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범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습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훈련만 한다면 완벽한 해답에 도달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쉽게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실행할 수 있다. '생각'에 의해 작동하는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만큼 현명한 선택을 할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익숙함과의 결별'이 중요하다. 이미 주어진 정보와 지식만을 가지고 의견을 보강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보다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에 의도적으로 개방하고 수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최대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을 활용하여 문제 예측의 시나리오를 만든다. 이러한 시나리오에는 예측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정보도 포함되기 때문에 판단의 오류에 의한 손실을 줄일 수 있다.

 

모든 성공은 최면이요 마약이다. 언제든 반복될 수 있고 어디서든 통할 것만 같다. 모 통신사 광고 카피처럼 '생각대로' 하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불확실성, 경쟁이 있는 사회에서 우리가 바라는대로 쉽게 생기지 않는다. 변화 빠른 시절에 과거의 성공 그리고 정보와 지식들은 그야말로 과거일 뿐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그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을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합리적인 동물' 인간은 자기 과신, 지나친 오만에서 비롯되는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그렇기에 카너먼은 이 책을 통해 세상을 합리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 경고보다는 충언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되돌아보고 인식할 것을 권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스스로 존재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겸손과 지혜가 필요해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하고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오랜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던 이 익숙한 생각부터 결별하는 것이 최우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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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죄인이로다', 괴짜 시인 프랑수아 비용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인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수도 없어요.

그들은 저희 마을 교회에

하프가 울려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을 그려서 보여주었어요.

하나는 내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p 150)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를 읽으면서 혹시 이런 시구를 발견하셨는지?  시 속 화자인 '늙은 여인'은 교회에 그려진 천국과 지옥 그림 앞에서 신의 성스러움에 탄복하는 동시에 지난 날의 과오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신의 섭리를 강조하는 기독교적인 교훈이 깃든 한 편의 종교시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시를 쓴 자가 절도와 살인 전과가 있는 범죄자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시를 쓴 시인은 프랑스 중세 말기에 활동했던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 1431~?)이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작가일 것이다. 진중권도 책에 이 시를 인용하면서 비용을 '중세 말의 괴짜 시인'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인의 일생을 살펴보면 '괴짜'라기보다는 '괴팍스러움'에 가깝다. 

 

비용의 본명은 프랑수아 드 몽코르비에르. '비용'이라는 성(姓)은 어린 시절 그를 길러주었던 기욤 드 비용이라는 신부에게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나다가 부유한 신부의 양자가 되었다. 비용의 유년시절은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대학 석사 자격을 얻을 정도로 머리는 능숙했다. 만약 이러한 재능을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비용은 중세의 평범한 대학교수 또는 학자로서의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시절부터 비용은 난폭한 성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젊은 혈기를 주체할 수 없었던 비용은 위험한 장난, 패싸움, 도박, 그리고 민중 봉기 등에 가담했다. 물론 당시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직후로서 강토는 황폐되고 도처에 도적과 살인과 방화가 잇따라 민심이 흉흉하던 때이고 당시의 학생들 중에는 부랑자, 불한당이 많았으므로 비용도 그 때까지는 이런 부류에 속하였다. 이 때부터 비용은 중세 말의 아웃사이더(Outsider)로서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0년에 故 송면 연세대 불문과 교수가 번역하고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유언시: 비용 시전집』

판형은 문고판과 같은 크기다. 알라딘과 일부 공공도서관 검색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귀본이 되었다.

 

 

 

비용의 무절제한 성격은 결국에는 피를 부르는 살인에 이르게 되었고 비용은 평생 도망과 방랑 생활을 해아만했다. 1455년에는 여자 문제로 인한 사소한 말다툼 끝에 교회 신부를 죽이고 도망쳤다. 이듬해에 사면령이 내려 파리로 돌아왔으나, 1456년 절도 사건으로 또다시 몸을 피해야만 하였다. 이 무렵 비용은 『유증시』(遺贈詩, Le Lais) 등의 많은 시(발라드, Ballade: 중세 유럽에서 형성된 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서사시)를 썼다. 한 권의 작은 책자를 남긴 채 비용은 파리를 떠나 앙제라는 이름의 소도시로 피신한다. 파리 시로부터 추방령을 받은 이후부터 그의 신세는 완전한 부랑자, 거지가 되어 여러 도시를 전전한다. 그 후로 비용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남아 있는 문헌들을 통해서 비용은 또다시 감옥에 투옥될 정도로 살인과 절도 행각을 멈추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때마침 왕위에 오른 루이 11세가 모든 죄수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되여 사형수 신세로 감옥에 갇혀있던 비용은 풀려나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나이 겨우 31세(32세로도 추정)였지만 그 동안 겪은 가난과 고생과 방랑과 감옥살이로 심신이 모두 병들어 있었다. 이제 죽음의 예감도 깊이 들었던지 그는 그의 생활을 총람하는『유언시』(遺言詩,Le Testament)를 썼다. '유언시집'이라고 불리우는 두 번째 시집은 그의 대표작이다.

 

하지만 비용의 불행과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다시 우연한 패싸움에 끼여들어 감옥에 투옥된다. 이미 여러 차례의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 죄가 가중되어 교수형의 선고를 받는다. 비용은 당시의 최고 재판소에 탄원서를 내어 겨우 사형을 면했으나 10년 동안 파리 입성을 금하는 추방령을 받았다. 이후부터 그의 이름은 역사상의 기록이나 사람의 입에서 영영 사라진다. 영국에 가서 살았다고도 하고 지방 소도시에서 신비극을 쓰고 상연했다는 말이 있으나 현재까지도 비용의 최후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된 비용을 상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비용의 발라드는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노여움, 소망 그리고 비웃음이 섞인 슬픈 호소로 나타나고 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신의 자비를 빌고 있다.

 

 

나는 죄인이로다, 그것을 잘 알고 있거늘

그러나 신은 내 죽음을 바라지 아니하고

죄에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실을 고치고 선하게 살기를 원하도다.

내가 죄로 인하여 죽는다 하더라도

신은 산다고 하셨기에

내 양심이 가책을 느낄 때

그 자비로움은 나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그리고 저 고귀한 『장미 이야기』의

제1권 첫머리에는

청춘의 미숙한 마음도 노년이 되어

성숙한 마음으로 보일 때는 용서되는 법이라.

분명히 씌어져 있는데

아, 이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

그러나 지금 나를 그처럼 가혹하게 비난하는 자들은

성숙한 때의 나를 보려고는 하지 아니하는구나.

 

 

 

 - 『유언시』제14, 15행, 송면 역, 문학과 지성사(p 77~78) -

 

 

 

생전의 비용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각들 그리고 기성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방랑자 신세에 대해서 남몰래 깊은 회한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비용의 범죄 행각은 그 당시 중세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반사회적 행위였다. 신은 온갖 죄와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 비용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어린 양'으로 인도했을지 몰라도 중세의 사회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던 비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하기에 『유언시』와 『유증시』속에 가난과 실패와 죽음에 부딪친 인간이 거대한 세상 앞에서 외치는 절실한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유언시』와 『유증시』내용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유언이나 유품 분배에 대한 목록은 문학적 형태로 갖추기 위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시 속에 그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것, 그의 약점과 죄악, 그의 사랑과 즐거움, 그의 소망과 믿음, 인생의 무상, 죽음의 가혹함 등을 꾸밈없이 솔직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겸손은 오만을 죽인다', 괴짜 화가 카라바조

 

 

 

 

 

 

 

 

 

 

 

 

 

 

 

 

프랑스의 괴짜 시인의 이름이 완전히 잊혀진 지 수백 년이 지난 후, 유럽은 창조성이 무시된 암울한 분위기의 중세를 벗어나 학문과 예술의 창조적 맥박이 뛰게 되는 르네상스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예술의 본고장 이탈리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는 꼭 이들만이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하게 9년 후, 또 다른 '미켈란젤로'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미켈란젤로 데 카라바조(1571~1610)다. 당대 널리 알려진 화가 미켈란젤로와 구분하기 위해서 소년 시절에 살던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따 붙이게 되었는데 지금의 '카라바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은 비용과 무척 닮았다. 카라바조도 비용처럼 유년 시절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양부모의 보살핌 없이 고아로 유년 시절을 보내야했다. 비용보다는 더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다. 불안정한 유년 시절에 형성된 성격은 카라바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음침한 친구들과의 교류, 반복된 투옥, 살인 혐의, 수년간의 도주생활, 때 이른 죽음 등 천재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완벽하게 갖춘 가장 찬미 받는 회화의 반항아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적 재능마저도 세상의 빛을 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비용과는 달리 카라바조는 생전에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마음껏 펼쳤으며 그 당시 기성 예술가들과 차별화된 천부적인 미적 감각을 지녔다. 카라바조의 작업 방식은 캔버스에 직접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바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기성 예술가들은 그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전에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의 그림들이 너무 사실적인데다가 기독교적 교화를 중시하는 교회미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번 퇴짜 맞아 그림을 다시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명암법을 독창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녔고,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의와도 조화를 이루었다.  

 

 

 

 

 

미켈란젤로 데 카바라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05~1606년

 

 

 

하지만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생명의 위협을 여러 번 느껴야했다. 1606년 카라바조는 결투를 벌이다가 상대방을 죽여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도주를 한 상황이라 이탈리아 곳곳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수배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작품의 주문을 받았고 단시간내에 훌륭한 그림들을 완성했다. 신의 구원을 받지 못할 지경에 이른 음울한 삶의 종지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문득 깨달았던 것일까?  주문받은 그림들을 하나씩 완성하고 나면 로마 주위 도시를 중심으로 도주 생활을 거듭했다. 카라바조는 사면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로마로 가던 길에,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로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사면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기 위해서 로마 근처 항구에 머무르고 있던 배 안에서 슘어 지내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몰랐지만, 사면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카라바조는 생전에 단 한 점의 자화상을 남지 않았는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여러 그림들에 등장하는 살인자 혹은 살해당한 자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바꿔치기 했다. 1606~1607년 사이에 제작된 대표작『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카라바조의 청년 시절과 중년 시절, 두 가지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 속에 볼 수 있는 이중적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속 소년 다윗이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다윗의 얼굴은 청년 카라바조를, 골리앗은 중년 카라바조를 의미한다. 그 당시 르네상스에 살았던 이탈리아 인구 수명이 4, 50대를 넘기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30세에 접어든 카라바조는 르네상스 시대의 수명 기준으로 본다면 중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의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자루는 악덕을 무찌르는 '정의'를 상징한다. 칼날에는 'HAS O S'라는 수수께끼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약자를 풀이하면 H(UMILIT)AS O(CCIDIT) S(UPEBIAM). 즉 '겸손은 오만을 죽인다'라는 뜻이다.

 

다윗의 표정에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괴롭혔던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적군의 잘려진 머리를 연민의 표정으로 바라본다. 인물들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감정은 '후회'와 '슬픔'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는 삶의 말년을 상징하며 '다윗'은 헛된 삶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재능만 믿고 오만하고 무절제했던 '카라바조'의 목을 벤 또 하나의 '카라바조'를 그림으로써, 구원에 대한 열망을 나타나고 있다. 순수한 청년 카라바조가 죄 많고 타락한 중년 카라바조를 살해함으로써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던 작가의 깊은 참회가 그림 속에 투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신으로부터 참회의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도주 생활 도중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던 두 명의 보헤미안 예술가를 위한 애도가(哀悼歌)

 

 

 

 

 

 

 

 

 

 

 

 

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는 퀸이라는 존재를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만든 대표곡이다. 감미로운 멜로디와는 다르게 난해하고 절망적인 가사 또한 유명하다. 노랫말은 한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을 죽인 사형수가 엄마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죄의식에 몸부림치며 죄값을 치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때가 되자 죽고 싶지 않다며 발버둥친다. 그 후 사형수의 환상 속에서 재판장에서의 격앙된 분위기와 대중들의 비난 혹은 동정이 담긴 외침들(오페라 부분)이 펼쳐진다. 사형이 확정된 후 좌절과 분노로 오히려 대중들에게 '너희들이 죄가 없으면 내게 돌을 던져라'식의 발악을 부려보지만 결국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퀸의 메인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곡이라는 주장과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소년이 결국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죽게 되는데, 그 때 남긴 유서에서 곡을 만들었을 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 슬프고도 절망적인 랩소디 속 가사의 의미와 숨겨져 있는 사연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프레디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MP3에 무한반복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비용과 카라바조의 삶과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인상에 불과한 것일까?  남들보다 앞서는 영특한 재능을 지녔지만 살인이라는 비인륜적인 행위를 저지른 바람에 한 순간에 사형수로 낙인찍혀 기성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반항아,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참회했으나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신의 구원마저도 받지 못해 파멸의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충동적인 기질을 억누르지 못해 평생의 절반을 방랑과 도주 생활로 보내야만했던 삶의 방식이 보헤미안과 흡사하다. 두 명의 예술가들을 위한 애도가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앖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질렀던 수백년 전의 과오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자신들을 옥죄었던 시대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예술가적 광기와 폭력을 감당하지 못했던, 우여곡절의 사연이 있는 이 두 명의 사형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카라바조가 그림을 그렸을 때 즐겨 사용하던 '키아로스큐로'는 '빛과 어둠'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비용과 카바라조. 이들의 삶에는 인간으로서의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빛과 어둠' 즉, 선과 악이 동시에 마음 속 깊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우리가 그들을 살인자라고 해서 돌을 던질 자격이 과연 있을까?

 

 

 

 

 

* P.s  요즘 세상이 전보다 더 흉흉해졌습니다. 본의 아니게 제가 쓴 주관적인 감상글이 '살인'과 연관되어 있고 글 중간 곳곳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이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글 마지막에서도 밝혔듯이 이 글은 비인륜적인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글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제가 읽고, 보고, 들은 것, 즉 텍스트, 이미지 그리고 음악에서 찾은 연관성 있는 인상을 해석한 텍스트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상대적인 입장의 감상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만약 글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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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4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일제 강점기 역사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반일' 감정  

 

 

 

 

 

 

KBS 드라마 '각시탈'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을 응징하는 한국판 슈퍼히어로의 대활약을 그려낸 이야기다. 시청자들은 2대 각시탈 이강토(주원 분)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악랄한 만행을 제대로 다뤄주길 원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각시탈' 연출 관계자들은 드라마를 애청하는 시청자들 때문에 종종 곤혹을 치뤄야 할 때가 있다. 지난 7월에 모 포털 사이트에서는 ''각시탈' 속 기미가요 장면 논란'을 주제로 네티즌 투표가 실시된 적이 있었다. 7천명이 넘는 네티즌이 참여한 가운데 '연출을 위해 필요한 장면'이라는 대답이 70.6%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 드라마에서 기미가요는 부적절한 장면'이라는 대답은 29.4%로 집계됐다. 이에 대해 '각시탈' 측 연출 관계자는 "기미가요는 극의 흐름상 꼭 필요했던 장면의 일부였을 뿐 중점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강토는 각시탈로 변신, 일본 형사들을 모조리 제압한다. 통쾌한 복수극에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모두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각시탈' 항일정신이 부각되는 시점이면 온라인 반응은 뜨겁기만 하다. 하지만 일본인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때는 여지 없이 혹평이 쏟아진다.

 

어제 SNS를 중심으로 경기 고양시 지하철 3호선 화정역 광장의 모양이 일본의 '욱일승천기' 문양을 그대로 닯았다는 논란이 확산되었다. 욱일승천기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문양 주변에 붉은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해 만든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상징으로 인식돼 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 외교 관계가 불화의 국면 상태로 접어들고 있는지라 국민들의 반일(反日)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있는 해프닝이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6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드라마 속 기미가요 장면에 대한 시청자들의 예민한 반응 또한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기피감으로부터 비롯된 반일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 찬탈의 원인을 고종과 노론에서 찾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쇠락의 기운이 완연했던 대한제국의 모습 그리고 일제의 식민 통치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 행했던 일제의 만행만큼이나 한국 근대사 역시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를 꺼리는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기지만 고대와 중세보다도 더 멀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제 강점기 역사를 기피하고 자세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친일' 문제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는 일본정부의 몰염치를 끊임없이 비판, 감시하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심이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자신이 펴낸『근대를 말하다』에서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집권했던 일제 강점기 역사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과거와 같은 똑같은 역사적 실수와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역사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덕일 소장은 조선 망국의 뿌리를 1623년 인조반정 체제로까지 끌어올린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그 후예인 노론은 조선을 시대착오적인 사회로 끌고 갔다. 사지선다형이어야 할 외교는 숭명(崇明)이란 이념으로 통일되어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여러 사상 중 하나에 불과한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들고, 해체되어야 할 신분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500년 조선'은 단 30분 만에 이루어진 협상에 의해 멸망되었다.

 

노론 세력의 기득권 유지 속에서도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을 수 있도록 더욱 재촉하게 만든 것은 고종의 리더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고종의 리더십을 둘러싸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이르게 한 무능한 군주인지 아니면 근대화를 앞장서 이끈 개혁을 시도한 군주인지 대해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2010년에 펴낸 『조선 왕을 말하다 2』에서도 이덕일 소장은 고종의 '개혁군주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의 리더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 책에서도 망국의 결과를 초래한 고종의 오판에 대해 질타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사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 인물, 1896년 아관파천)

 

 

 

고종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혜안이 없었다. 그리고 친일파만 득실거릴 뿐, 국제 정세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 주변에 없었다. 그게 대한제국으로서는 가장 뼈아픈 점이었다.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도 입헌정치체제가 전제왕권을 조금이라도 저해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관련 인물들을 제거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척살했고, 아관파천(약 1년 동안 고종과 왕세자가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서 거처한 사건)으로 온건 개화파를 몰아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는 일본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러시아가 강했지만, 국민적인 단결이 이뤄진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됐을 때까지도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은 일본의 지배권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고종의 이중적인 처신은 극에 달한다. 이미 세계가 대한제국을 일본의 몫으로 인정했음에도 고종은 줄타기 외교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됐고, 급기야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고종은 뒤로는 의병들에게 밀서를 내려 나라를 되찾자고 독려했다. 이 같은 이중적인 정치 행보는 조선이 망국의 길을 내달리는 동안 계속됐다.

 

 

 

 

 개나 고양이보다 못했던 조선인들의 삶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은 일왕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조선인에게는 일방적으로 복종만을 강요하는 명령권자였다. 조선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무단통치는 헌병경찰제도에 기반을 두었다. 헌병경찰제도는 군사경찰인 헌병이 보통경찰의 직무를 겸직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이것은 헌병으로 하여금 경찰권을 장악하게 한 것이다. 헌병경찰은 곧 총독의 수족이었다. 조선인을 완전무장해제시킨 다음 조선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 제도를 제정, '범죄즉결례'를 공포했다.

 

이 때 무단통치의 시기의 조선인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했다. 불경한 언어와 거동, 일본인들에 대한 욕설 등을 이유로 조선인들은 일본 순사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태형을 맞곤 했다. 태형 장면을 목격한 한 독립운동가의 증언을 보게 된다면 일본의 비인륜적 통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벌려놓은 형틀과 그 형편(刑鞭, 채찍)은 조선 왕조가 자국민을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고대의 태형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달랐다. 형판(刑板)에 사람이 엎드리면 음부가 닿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며 두 팔을 십자판에 벌려놓고 두 다리와 허리를 묶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음경(牛陰莖, 소 음경으로 만든 매)은 끝에 납을 달아서 노출된 둔부를 치면 그 납이 살에 파고들어가 피가 흐르고 살이 찢긴다. 매는 1차 80대가 보통이며 중도에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3일 후에 다시 때린다.

 

 

 

일본은 조선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서 조선의 산업자본을 키우고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제국의회에서 회사설치법안을 통과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매수에 힘을 기울였다. 비옥한 토지를 강제로 사들여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토지에서 생산되어 나온 곡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나갔다. 일본의 토지 착취 이후로 조선의 자작농들은 가난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본은 농업 경제만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 경제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인만 회사를 설립, 운영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기형적인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민족자본 형성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 하에서 제정되었다. 조선인들에게만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제 강점기의 법령들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본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당시 일본 관리들은 조선 회사령의 목적을 '조선 경제계의 발달에 기여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를 한국의 근대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근거를 들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오늘날 일본 극우파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항일 정신이 살아 숨쉬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올해 3.1절을 맞아 전국 교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대문제'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의하면 고등학생들의 86%가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이 정신대문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응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학생의 67.8%이 정신대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일본 정부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정부의 고의적인 무관심에 대해서도 98%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한ㆍ일 과거사에 대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민족 수난의 아픈 상처들만 기억되는 암울한 시기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도 바라볼 수도 있다.

 

지금 일제 강점기 과거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명확하면서도 한정적이다. 친일 청산 문제, 위안부, 독도.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결정적으로 국권을 온전히 일본에게 속절없이 넘겨져야만 했던 무기력한 국력 상태로 유지되어 온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불거진 민감한 사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아픈 과거사인데도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 심지어 학창 시절 역사를 배웠던 한국의 성인들마저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기억하기 싫은 우울한 역사라고 해서 그것을 외면하는 인식이다.

   

과거사를 교과서 공부하듯이, 오직 '친일 청산, 위안부, 독도' 프레임으로만 보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역사적 시각과 인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항일무장투쟁은 을사늑약, 한일합방 이전 근대에서 발생했던 의병 활동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이 절정기였다. 나라를 팔아먹은 왕족과 지배층은 일제에서 주는 합방공로작과 은사금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반면에 일가족을 이끌고 북풍이 휘몰아치는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회영과 이시형은 전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광복 자금을 갖고 6형제 일가족 60여명을 이끌고 망명길에 나섰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 이미 죽은 나라나 다름 없었지만 여전히 항일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렇듯 나라의 패망 시기에 엇갈린 판단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매해 광복절 즈음에는 일본 군경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한 생존 유공자들이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정부에서 주는 적은 생계비에 의지해서 고령과 병마와 싸우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항일·독립유공자들이 국가로부터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자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항일'(抗日)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움'이라는 뜻이다. '반일'(反日)은 '일본에 반대함 또는 일본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항일'과 '반일'의 사전적 의미만 본다고해서 양자의 의미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지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항일'과 '반일'의 개념은 서로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과거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을 반대하는 인식 및 정서를 과연 '항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반일'의 의미에 가깝다. 우리가 드라마 속에 흘러나오는 기미가요나 욱일승천기와 비슷한 이미지의 대상만 가지고 분노하는 것은 그저 역사 인식이 결여되고 과거사에 대한 불편한 기억 속에서 비롯된 '반일' 감정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정말 과거사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의해서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 원인 및 배경을 알고 있어야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망국의 책임을 고종과 노론에게만 씌울 수는 없다.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 국제적 정세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

 

과거사, 즉 일제 강점기의 근대사는 단지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말끔히 지워낼 수 있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우리의 역사는 함께 지키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세울 수 있도록 정부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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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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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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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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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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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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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코 세대'라 쓰고 '삼포 세대'라 읽다

 

 

 

 


지난 주말 인기 드라마 ‘신사의 품격’이 종영했다. 특히 극중 인물인 임메아리(윤진이)는 ‘메앓이 열풍’을 일으키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은 최윤(김민종)을 사랑하지만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에 눈물 흘릴 때가 많았다. 그래도 열렬한 구애 끝에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최윤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극중 메아리는 1988년생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아닌 현실 속 88년생들에게 결혼은 ‘그림의 떡’이다. 79년에서 92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에코(Echo∙메아리) 세대라고 한다. 전후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세대가 결혼해 낳은 2세 들이다. 베이비붐의 메아리와 같아 에코다. 그런데 베이비부머와 달리 에코 세대의 결혼 불능 현상은 심각하다.


최근 통계청이 조사한 ‘베이비부머 및 에코 세대의 인구·사회적 특성분석’에 따르면 기혼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베이비부머가 24.0세, 에코 세대는 25.3세였다. 또 베이비부머의 결혼 비율은 54.5%였지만 에코 세대는 8.3%에 불과했다. 두 세대 간의 결혼 비율의 격차가 크게 나타난 것이다. 기혼 여성의 경우 베이비부머는 평균 2.04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에코 세대는 이에 절반도 못 미치는 1.10명이었다.

베이비부머의 자녀인 에코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결혼은 늦게, 자녀는 적게 낳는 현상은 저출산 분위기에 따른 초고령화 사회로 우리 사회가 더욱 급속하게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나라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저조한 출산율은 고령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는 부양비 증가, 재정지출 부담 확대 등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생산 가능인구 감소는 노동력 저하와 소비 감소를 불러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린다.

에코 세대가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할 경우 베이비부머들이 일으켰던 소비 붐이 다시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다. 하지만 경제 침체가 지속된다면 이들의 구매력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치솟는 물가, 취업난, 집값 등 압박으로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하는 ‘삼포(三抛)세대’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은 돈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빚 때문에 미래를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1903년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요정 에코는 미소년 나르키소스에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할 수 없어 사랑을 거절당했고, 이에 상심한 나머지 야위어 가다가 목소리만 남아 메아리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에코들도 절망으로 야위어 가고 있다. 사회적·경제적 환경 때문에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에코 세대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연애와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로 경제적인 부담을 꼽은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8월 18일자 중앙일보 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게재 예정)

 

 

 

 

 

* 지난 주까지만해도 여름방학답게 푹 쉬고 놀기만 했다. 덕분에 책은 많이 읽었지만 블로그 글쓰기는 좀 소홀했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 탓에 컴퓨터 앞에서 글 쓰는 것이 고역이다. 여전히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로 글 쓰는게 편하다. 페이스북을 시작한지 4개월째 접어들었는데 최근에 중앙일보가 페이스북에서 진행하고 있는 '나도칼럼니스트'(줄여서 '나도칼')를 알게 되었다. 매주 나도칼 페이스북에 올려지는 전국 대학생들이 쓴 칼럼들 중에 가장 우수한 글 한 편을 선정하여 토요일에 발행되는 일간지의 오피니언에 '대학생 칼럼' 자격으로 게재하는 혜택이 주어진다. 최대 10편 가량의 칼럼이 나도칼 페이스북에 올려질 정도로 꽤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글 실력을 뽐내고 있다.

 

나는 정확히 8월 12일, 그러니까 '신사의 품격'이 종영되던 그 날에 처음 '나도칼' 공식 페이스북을 알게 되었다. '나도칼'을 보자마자 칼럼 한 편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번 주 내내 고민한 끝에 어설프게나마 칼럼 한 편 완성했다. 본격적으로 칼럼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화요일부터였고 최종적으로 완성한 날은 어제였다. 분량과 형식이 자유로운 인터넷 블로그 서평 쓰기에 길들여져 있다보니 1500자 제한 형식의 칼럼 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썼던 글을 다시 고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문장 하나를 빼면 다음 문장과의 의미 연결상 맥락이 맞지 않기도 했다.

 

몇 시간동안 불필요한 단어나 문장을 수없이 지우고 고친 끝에 총 1378자 정도의 글로 완성되었다. 내가 쓴 칼럼은 에코 세대가 처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적 문제점에 대한 경각심을 독자들에게 일깨워주려는 의도를 중심으로 작성했다. 내가 생전 처음으로 '칼럼'이라는 글을 썼다보니 신문 논설을 담당하는 분께서 투박하기 짝이 없는 글을 좀 더 매끄럽게 다듬어주셨다.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는데 제목도 살짝 고쳐져 있었다.

 

내일 토요일 중앙일보 오피니언에 ['에코 세대'라 쓰고 '삼포 세대'라 읽다]라는 칼럼이 실릴 것이다. 글 옆에 흑백으로 된 얼굴 사진과 실명(!)도 있다. 안 그래도 못 생긴 얼굴에 흑백으로 처리하게 된다면 더 못 나게 나올텐데...  혹시 내일자 중앙일보를 보다가 내가 쓴 글 아니 내 얼굴을 보고 크게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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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8-17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런 축하드려용^^

cyrus 2012-08-18 21:23   좋아요 0 | URL
ㅎㅎ 먼저 축하 인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hnine 2012-08-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에코세대, 삼포세대, 전 오늘 처음 알게 된 말이네요.
저는 드라마를 안봐서 잘은 모르지만, 글감을 잘 잡으신 것 같아요.
멋져요! (그리고, 미남이시네요 ^^)

cyrus 2012-08-18 21:24   좋아요 0 | URL
오히려 흑백으로 된 모습이 실물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ㅎㅎㅎ
아직은 부족한 글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