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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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역사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반일' 감정  

 

 

 

 

 

 

KBS 드라마 '각시탈'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을 응징하는 한국판 슈퍼히어로의 대활약을 그려낸 이야기다. 시청자들은 2대 각시탈 이강토(주원 분)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악랄한 만행을 제대로 다뤄주길 원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각시탈' 연출 관계자들은 드라마를 애청하는 시청자들 때문에 종종 곤혹을 치뤄야 할 때가 있다. 지난 7월에 모 포털 사이트에서는 ''각시탈' 속 기미가요 장면 논란'을 주제로 네티즌 투표가 실시된 적이 있었다. 7천명이 넘는 네티즌이 참여한 가운데 '연출을 위해 필요한 장면'이라는 대답이 70.6%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 드라마에서 기미가요는 부적절한 장면'이라는 대답은 29.4%로 집계됐다. 이에 대해 '각시탈' 측 연출 관계자는 "기미가요는 극의 흐름상 꼭 필요했던 장면의 일부였을 뿐 중점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강토는 각시탈로 변신, 일본 형사들을 모조리 제압한다. 통쾌한 복수극에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모두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각시탈' 항일정신이 부각되는 시점이면 온라인 반응은 뜨겁기만 하다. 하지만 일본인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때는 여지 없이 혹평이 쏟아진다.

 

어제 SNS를 중심으로 경기 고양시 지하철 3호선 화정역 광장의 모양이 일본의 '욱일승천기' 문양을 그대로 닯았다는 논란이 확산되었다. 욱일승천기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문양 주변에 붉은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해 만든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상징으로 인식돼 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 외교 관계가 불화의 국면 상태로 접어들고 있는지라 국민들의 반일(反日)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있는 해프닝이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6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드라마 속 기미가요 장면에 대한 시청자들의 예민한 반응 또한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기피감으로부터 비롯된 반일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 찬탈의 원인을 고종과 노론에서 찾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쇠락의 기운이 완연했던 대한제국의 모습 그리고 일제의 식민 통치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 행했던 일제의 만행만큼이나 한국 근대사 역시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를 꺼리는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기지만 고대와 중세보다도 더 멀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제 강점기 역사를 기피하고 자세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친일' 문제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는 일본정부의 몰염치를 끊임없이 비판, 감시하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심이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자신이 펴낸『근대를 말하다』에서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집권했던 일제 강점기 역사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과거와 같은 똑같은 역사적 실수와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역사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덕일 소장은 조선 망국의 뿌리를 1623년 인조반정 체제로까지 끌어올린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그 후예인 노론은 조선을 시대착오적인 사회로 끌고 갔다. 사지선다형이어야 할 외교는 숭명(崇明)이란 이념으로 통일되어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여러 사상 중 하나에 불과한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들고, 해체되어야 할 신분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500년 조선'은 단 30분 만에 이루어진 협상에 의해 멸망되었다.

 

노론 세력의 기득권 유지 속에서도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을 수 있도록 더욱 재촉하게 만든 것은 고종의 리더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고종의 리더십을 둘러싸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이르게 한 무능한 군주인지 아니면 근대화를 앞장서 이끈 개혁을 시도한 군주인지 대해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2010년에 펴낸 『조선 왕을 말하다 2』에서도 이덕일 소장은 고종의 '개혁군주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의 리더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 책에서도 망국의 결과를 초래한 고종의 오판에 대해 질타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사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 인물, 1896년 아관파천)

 

 

 

고종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혜안이 없었다. 그리고 친일파만 득실거릴 뿐, 국제 정세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 주변에 없었다. 그게 대한제국으로서는 가장 뼈아픈 점이었다.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도 입헌정치체제가 전제왕권을 조금이라도 저해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관련 인물들을 제거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척살했고, 아관파천(약 1년 동안 고종과 왕세자가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서 거처한 사건)으로 온건 개화파를 몰아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는 일본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러시아가 강했지만, 국민적인 단결이 이뤄진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됐을 때까지도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은 일본의 지배권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고종의 이중적인 처신은 극에 달한다. 이미 세계가 대한제국을 일본의 몫으로 인정했음에도 고종은 줄타기 외교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됐고, 급기야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고종은 뒤로는 의병들에게 밀서를 내려 나라를 되찾자고 독려했다. 이 같은 이중적인 정치 행보는 조선이 망국의 길을 내달리는 동안 계속됐다.

 

 

 

 

 개나 고양이보다 못했던 조선인들의 삶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은 일왕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조선인에게는 일방적으로 복종만을 강요하는 명령권자였다. 조선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무단통치는 헌병경찰제도에 기반을 두었다. 헌병경찰제도는 군사경찰인 헌병이 보통경찰의 직무를 겸직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이것은 헌병으로 하여금 경찰권을 장악하게 한 것이다. 헌병경찰은 곧 총독의 수족이었다. 조선인을 완전무장해제시킨 다음 조선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 제도를 제정, '범죄즉결례'를 공포했다.

 

이 때 무단통치의 시기의 조선인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했다. 불경한 언어와 거동, 일본인들에 대한 욕설 등을 이유로 조선인들은 일본 순사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태형을 맞곤 했다. 태형 장면을 목격한 한 독립운동가의 증언을 보게 된다면 일본의 비인륜적 통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벌려놓은 형틀과 그 형편(刑鞭, 채찍)은 조선 왕조가 자국민을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고대의 태형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달랐다. 형판(刑板)에 사람이 엎드리면 음부가 닿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며 두 팔을 십자판에 벌려놓고 두 다리와 허리를 묶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음경(牛陰莖, 소 음경으로 만든 매)은 끝에 납을 달아서 노출된 둔부를 치면 그 납이 살에 파고들어가 피가 흐르고 살이 찢긴다. 매는 1차 80대가 보통이며 중도에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3일 후에 다시 때린다.

 

 

 

일본은 조선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서 조선의 산업자본을 키우고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제국의회에서 회사설치법안을 통과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매수에 힘을 기울였다. 비옥한 토지를 강제로 사들여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토지에서 생산되어 나온 곡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나갔다. 일본의 토지 착취 이후로 조선의 자작농들은 가난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본은 농업 경제만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 경제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인만 회사를 설립, 운영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기형적인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민족자본 형성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 하에서 제정되었다. 조선인들에게만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제 강점기의 법령들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본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당시 일본 관리들은 조선 회사령의 목적을 '조선 경제계의 발달에 기여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를 한국의 근대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근거를 들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오늘날 일본 극우파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항일 정신이 살아 숨쉬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올해 3.1절을 맞아 전국 교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대문제'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의하면 고등학생들의 86%가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이 정신대문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응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학생의 67.8%이 정신대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일본 정부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정부의 고의적인 무관심에 대해서도 98%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한ㆍ일 과거사에 대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민족 수난의 아픈 상처들만 기억되는 암울한 시기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도 바라볼 수도 있다.

 

지금 일제 강점기 과거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명확하면서도 한정적이다. 친일 청산 문제, 위안부, 독도.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결정적으로 국권을 온전히 일본에게 속절없이 넘겨져야만 했던 무기력한 국력 상태로 유지되어 온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불거진 민감한 사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아픈 과거사인데도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 심지어 학창 시절 역사를 배웠던 한국의 성인들마저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기억하기 싫은 우울한 역사라고 해서 그것을 외면하는 인식이다.

   

과거사를 교과서 공부하듯이, 오직 '친일 청산, 위안부, 독도' 프레임으로만 보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역사적 시각과 인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항일무장투쟁은 을사늑약, 한일합방 이전 근대에서 발생했던 의병 활동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이 절정기였다. 나라를 팔아먹은 왕족과 지배층은 일제에서 주는 합방공로작과 은사금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반면에 일가족을 이끌고 북풍이 휘몰아치는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회영과 이시형은 전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광복 자금을 갖고 6형제 일가족 60여명을 이끌고 망명길에 나섰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 이미 죽은 나라나 다름 없었지만 여전히 항일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렇듯 나라의 패망 시기에 엇갈린 판단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매해 광복절 즈음에는 일본 군경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한 생존 유공자들이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정부에서 주는 적은 생계비에 의지해서 고령과 병마와 싸우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항일·독립유공자들이 국가로부터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자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항일'(抗日)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움'이라는 뜻이다. '반일'(反日)은 '일본에 반대함 또는 일본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항일'과 '반일'의 사전적 의미만 본다고해서 양자의 의미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지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항일'과 '반일'의 개념은 서로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과거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을 반대하는 인식 및 정서를 과연 '항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반일'의 의미에 가깝다. 우리가 드라마 속에 흘러나오는 기미가요나 욱일승천기와 비슷한 이미지의 대상만 가지고 분노하는 것은 그저 역사 인식이 결여되고 과거사에 대한 불편한 기억 속에서 비롯된 '반일' 감정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정말 과거사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의해서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 원인 및 배경을 알고 있어야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망국의 책임을 고종과 노론에게만 씌울 수는 없다.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 국제적 정세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

 

과거사, 즉 일제 강점기의 근대사는 단지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말끔히 지워낼 수 있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우리의 역사는 함께 지키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세울 수 있도록 정부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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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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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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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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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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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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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코 세대'라 쓰고 '삼포 세대'라 읽다

 

 

 

 


지난 주말 인기 드라마 ‘신사의 품격’이 종영했다. 특히 극중 인물인 임메아리(윤진이)는 ‘메앓이 열풍’을 일으키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은 최윤(김민종)을 사랑하지만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에 눈물 흘릴 때가 많았다. 그래도 열렬한 구애 끝에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최윤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극중 메아리는 1988년생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아닌 현실 속 88년생들에게 결혼은 ‘그림의 떡’이다. 79년에서 92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에코(Echo∙메아리) 세대라고 한다. 전후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세대가 결혼해 낳은 2세 들이다. 베이비붐의 메아리와 같아 에코다. 그런데 베이비부머와 달리 에코 세대의 결혼 불능 현상은 심각하다.


최근 통계청이 조사한 ‘베이비부머 및 에코 세대의 인구·사회적 특성분석’에 따르면 기혼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베이비부머가 24.0세, 에코 세대는 25.3세였다. 또 베이비부머의 결혼 비율은 54.5%였지만 에코 세대는 8.3%에 불과했다. 두 세대 간의 결혼 비율의 격차가 크게 나타난 것이다. 기혼 여성의 경우 베이비부머는 평균 2.04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에코 세대는 이에 절반도 못 미치는 1.10명이었다.

베이비부머의 자녀인 에코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결혼은 늦게, 자녀는 적게 낳는 현상은 저출산 분위기에 따른 초고령화 사회로 우리 사회가 더욱 급속하게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나라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저조한 출산율은 고령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는 부양비 증가, 재정지출 부담 확대 등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생산 가능인구 감소는 노동력 저하와 소비 감소를 불러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린다.

에코 세대가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할 경우 베이비부머들이 일으켰던 소비 붐이 다시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다. 하지만 경제 침체가 지속된다면 이들의 구매력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치솟는 물가, 취업난, 집값 등 압박으로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하는 ‘삼포(三抛)세대’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은 돈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빚 때문에 미래를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1903년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요정 에코는 미소년 나르키소스에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할 수 없어 사랑을 거절당했고, 이에 상심한 나머지 야위어 가다가 목소리만 남아 메아리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에코들도 절망으로 야위어 가고 있다. 사회적·경제적 환경 때문에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에코 세대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연애와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로 경제적인 부담을 꼽은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8월 18일자 중앙일보 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게재 예정)

 

 

 

 

 

* 지난 주까지만해도 여름방학답게 푹 쉬고 놀기만 했다. 덕분에 책은 많이 읽었지만 블로그 글쓰기는 좀 소홀했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 탓에 컴퓨터 앞에서 글 쓰는 것이 고역이다. 여전히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로 글 쓰는게 편하다. 페이스북을 시작한지 4개월째 접어들었는데 최근에 중앙일보가 페이스북에서 진행하고 있는 '나도칼럼니스트'(줄여서 '나도칼')를 알게 되었다. 매주 나도칼 페이스북에 올려지는 전국 대학생들이 쓴 칼럼들 중에 가장 우수한 글 한 편을 선정하여 토요일에 발행되는 일간지의 오피니언에 '대학생 칼럼' 자격으로 게재하는 혜택이 주어진다. 최대 10편 가량의 칼럼이 나도칼 페이스북에 올려질 정도로 꽤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글 실력을 뽐내고 있다.

 

나는 정확히 8월 12일, 그러니까 '신사의 품격'이 종영되던 그 날에 처음 '나도칼' 공식 페이스북을 알게 되었다. '나도칼'을 보자마자 칼럼 한 편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번 주 내내 고민한 끝에 어설프게나마 칼럼 한 편 완성했다. 본격적으로 칼럼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화요일부터였고 최종적으로 완성한 날은 어제였다. 분량과 형식이 자유로운 인터넷 블로그 서평 쓰기에 길들여져 있다보니 1500자 제한 형식의 칼럼 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썼던 글을 다시 고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문장 하나를 빼면 다음 문장과의 의미 연결상 맥락이 맞지 않기도 했다.

 

몇 시간동안 불필요한 단어나 문장을 수없이 지우고 고친 끝에 총 1378자 정도의 글로 완성되었다. 내가 쓴 칼럼은 에코 세대가 처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적 문제점에 대한 경각심을 독자들에게 일깨워주려는 의도를 중심으로 작성했다. 내가 생전 처음으로 '칼럼'이라는 글을 썼다보니 신문 논설을 담당하는 분께서 투박하기 짝이 없는 글을 좀 더 매끄럽게 다듬어주셨다.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는데 제목도 살짝 고쳐져 있었다.

 

내일 토요일 중앙일보 오피니언에 ['에코 세대'라 쓰고 '삼포 세대'라 읽다]라는 칼럼이 실릴 것이다. 글 옆에 흑백으로 된 얼굴 사진과 실명(!)도 있다. 안 그래도 못 생긴 얼굴에 흑백으로 처리하게 된다면 더 못 나게 나올텐데...  혹시 내일자 중앙일보를 보다가 내가 쓴 글 아니 내 얼굴을 보고 크게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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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8-17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런 축하드려용^^

cyrus 2012-08-18 21:23   좋아요 0 | URL
ㅎㅎ 먼저 축하 인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hnine 2012-08-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에코세대, 삼포세대, 전 오늘 처음 알게 된 말이네요.
저는 드라마를 안봐서 잘은 모르지만, 글감을 잘 잡으신 것 같아요.
멋져요! (그리고, 미남이시네요 ^^)

cyrus 2012-08-18 21:24   좋아요 0 | URL
오히려 흑백으로 된 모습이 실물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ㅎㅎㅎ
아직은 부족한 글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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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는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고, 또다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예루살렘은 죽은 연인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늙은 성중독자처럼, 관계하는 동안 자신의 짝을 삼켜버리는 흑거미처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 아모스 오즈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중에서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예루살렘 전기』p 35 재인용) -

 

 

 

 

 

 

 해답 없는 국제적 난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국제 사회엔 난제가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해결이 가장 어려운 것을 꼽는다면 단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다. ㅣ지난해, 9.11 테러의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로 자신감을 얻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양측의 국경선 획정을 '1967년 이전으로 돌릴 것'을 주창하고 나섰다. 여기서 '1967년 이전'이란 1967년에 발생했던 이스라엘 대 아랍권 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간의 제3차 중동전쟁 이전을 말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개전 초 아랍 국가들의 공군기지를 무력화시켜 제공권을 장악한 뒤 지상전에서도 승전을 거듭하기에 이른다. 개전 4일 만에 시나이 반도, 요르단 강 서안지구, 가자 지구 등을 점령했다. 아랍 국가들은 결국 전쟁 시작 엿새 만에 요충지를 점령당하고 UN이 제안한 정전협정안을 받아들인다. 이후 2만 7000㎢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의 영토는 단 6일 만에 6만 8000㎢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오바마의 언급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문제 중에서 금기 사항이나 다름 없다. 특히 전쟁을 통해서 이득을 봤던 이스라엘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자 오바마는 며칠도 못 가 자신이 거론한 문제에 대해서 한 발 물러섰다. 공식 석상에서 그는 자신의 '1967년 전 국경선 회귀' 발언은 국경선을 근거로 협상해야 한다는 뜻에서 말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반세기 이상이나 지속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중동 평화를 위한 협정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일부 아랍권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심한 반발로 해결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사실 문제가 풀기 어려운 것은 양측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단 3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장의 선언문이 가져온 중동의 혼란
 
그 동안 유태인들은 2천년 동안 고국을 떠나 전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핍박의 슬픈 역사를 안은 채 떠돌던 유대인들은 민족주의 '시오니즘'의 기치 아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랍 민족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어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모두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은 힘겹게 나라를 지켜왔다. 특히 1967년 3차 중동전쟁 승리 후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이 때문에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67년 경계 이전으로 국경선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이스라엘의 입장이며 오마바의 발언에 크게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벨푸어 선언이 명시된 서류 원본

 

 

하지만 원래 살던 땅에 살게 해 달라는 팔레스타인들의 주장도 절박하고 정당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아주 오래된 기원전 시대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 오스만제국 붕괴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국은 아랍인들의 염원을 진전시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1917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하게 되고 1947년 유엔 총회에서 유대국과 아랍국 영토 분할 승인을 주도하게 되는 영향을 주게 된다. 시들어가는 시오니즘 운동에 고민하던 유대인들은 환호했지만 이 선언문 한 장으로 인해 테러가 테러를 낳는 중동의 불행은 커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수천년 간 터를 잡고 살아온 아랍 민족은 뒤늦게 벨푸어 선언을 전해 듣고 배신감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모두가 탐낸 '성전' 예루살렘

 

역사가들은 중동 분쟁의 신호탄을 벨푸어 선언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 중동은 그 전부터 오랫동안 수많은 내전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으며 무고한 중동의 사람들은 시퍼런 칼과 무시무시한 총탄 앞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특히 중동 내전의 중심에는 바로 '예루살렘'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담당하는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동시에 거듭된 파괴와 재생의 순간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길은 '예루살렘'으로 통한다. 구약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다윗 왕 이후 이 성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지였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처음 전파한 곳도 예루살렘이었다. 하지만 '성전' 예루살렘의 역사는 기독교인들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에게도 '위대한 성지'였고, 문명이 충돌하는 전략적인 전장이자 무신론과 신앙이 부딪치는 최전선의 지역이었다. 그랬기에 이 도시는 많은 세월동안 뺏고 뺏기는 전쟁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군침을 흘렸으며,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묘사한 옛 문헌 기록이나 오늘날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왜 그토록 수천년동안 예루살렘 하나를 둘러싸고 피 튀기는 혈투를 벌였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성스러운 도시', '성지', '성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예루살렘를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 위에 세워진 훌륭한 도시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예루살렘은 경제학적이나 입지조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 지중해 해변의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물도 부족하고 여름에는 태양이 작열하며 겨울에는 바람이 살을 에일 정도로 춥다. 게다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돌산들은 험하기로 악명 높아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완벽한 도시의 조건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이렇게 피를 흘려야하는 전쟁을 치뤄면서까지 별 볼 일 없는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했을까?

 

 

 

 

 

일리야 레핀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우는 선지자 예레미야」 1870년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에게는 예루살렘은 '성전', 즉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인들은 이 성스러운 예루살렘을 통해 자신들만의 신성(神聖)을 부여하고 싶었고 점점 예루살렘을 신성화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예루살렘이 '성스러운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신성이 무수히 만들어 낸 신화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예루살렘이 '거룩함의 원형'이 된 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윗 왕이 지은 성전과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이 세운 지성소 때문이다. 하지면 역설적이게도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파괴가 예루살렘의 신성화에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이 점령한 예루살렘에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를 왕좌에 앉혔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을 방문하고 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반역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당시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의 예언을 한 예레미야에게 붙잡히고 마는 신세가 된다. 공포와 망상으로 가득한 채 무방비 상태의 예루살렘은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만다. 바빌로니아 인들에게 파괴된 예루사렘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예루살렘은 멸망한 도시들이 겪는 지옥 같은 약탈을 경험했다. 죽임당한 사람들이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  "굶주림 끝에 신열로 저희 살갗을 불가마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시온(예루살렘 내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유대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여인들이 겁탈을 당했습니다. 저들의 손에 고관들이 매달려 죽었습니다."    (p 101)

 

 

 

성전이 파괴되는 대재앙을 겪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강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자신들의 화려했던 영화만큼은 잊지 않기 위해서 '시온의 영광'을 기록하고 호소했는데, 유대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이를 '전설'로 만들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영화만큼이나 예루살렘 또한 '성전'으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수많은 군주와 영웅들마저 영토 확장의 목표물로서 탐내는 곳이 되었고 성경에 나오는 평화와 환희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에서부터 수많은 십자군, 이슬람의 살라딘과 심지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예루살렘에 눈독을 들였다.

 

 

 

 

 학살과 약탈이 멈추지 않았던 '저주받은' 예루살렘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 사이먼 시벡 몬티피오리의 『예루살렘 전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있게 한 1967년 6일 중동 전쟁까지 예루살렘과 관련된 모든 인류의 방대한 역사를 책 한 권에 담고 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독자들이 예루살렘과 관련된 수많은 당사자들의 각각의 입장에서 볼 수 있도록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역사적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방대한 예루살렘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지만 학살과 약탈이 만연된 끔찍하기 짝이 없는 파괴의 역사를 일부 독자들에게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의 서막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격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일단 첫 내용부터 '전쟁' 이야기다. 예루살렘을 침략한 로마 군뿐만 아니라 혼란의 '멘붕 상태'에 이르게 된 예루살렘 내부에서 유대인 군벌들이 자행했던 학살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은 인간의 폭력성이 실로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벽 주변에는 생지옥 같은 끔찍한 장면들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구의 시체들이 햇빛 아래 썩고 있었다. 악취는 견디기 힘든 정도였다. 개와 자칼 떼가 인육으로 만찬을 벌였다. 지난 몇 달간 티투스는 모든 죄수나 탈주자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500명의 유대인이 매일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도시 주변의 올리브 산과 바위산은 십자가로 빼곡히 들어차 더 이상 십자가를 꽂을 공간 공간도 없었고, 만들 나무도 없었다. 티투스의 군인들은 희생자들의 사지를 기괴한 자세로 벌린 채 묶어져 못질하는 것을 스스로 오락으로 삼았다.   (p 36)

 

네로 이후 세 명의 로마 황제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혼란스러운 권력승계가 나타났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고 있을 당시, 이 도시는 세 개의 군벌에 의해 분열되어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유대인 군벌들은 가장 먼저 성전 마당을 피로 물들이는 전투를 벌였고 도시를 약탈했다. 그들의 전사들은 부유한 이웃과 협력하면서 가정집을 약탈하고, 남성을 죽이고, 여성을 희롱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단지 오락거리였다."   (중략)   "용납할 수 없는 더러움"에 넘어간 예루살렘은 매음굴이자 고문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성지였다.  (p 37)

 

 

 

로마의 티누스 침략 이후부터 예루살렘은 '성전'이라는 이유만으로 내전의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 영역이 되기도 했다. 카이사르와 함께 한 삼두정치로 인해 분할된 권력을 만족하지 못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자신들의 탐욕을 예루살렘에 뻗치기도 했다. 폼페이우스는 솔로몬 왕의 신성한 업적이 남아있는 지성소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마음대로 그 곳을 드나들었고 크라수스는 예루살렘 습격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성스러운 보물들을 약탈해갔다. 약탈한 보물들은 전쟁자금으로 확보하는 데 쓰였다.

 

 

 

 

에밀 시뇰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 1847년

 

 

1096년부터 시작해서 12세기 말까지 이어져 온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에게 파괴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봉건영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폐쇄적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는 탐욕의 절정이 만들어 낸 잔인하면서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피 비린내나는 전쟁이었다. 원정단들은 자신들을 예수로부터 보호받는 '순례자들'이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예수의 이름 아래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안과 밖을 막론하고 성벽 주위에선 사라센(중세의 유럽인들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들의 썩어가는 시체에서 어찌나 악취가 나던지, 시체들은 학살당한 곳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p 363)

 

 

 

 

 

 인류의 죄악이 만들어 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흑거미'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란 본래 뜻과는 다르게 단 한 순간도 지속적으로 평화를 누린 적이 없으며 파괴와 재건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그마나 고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함으로써 추방된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역사를 제외하고는 신의 축복보다는 잊고 싶은 저주가 많이 기억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은 이제 중동의 화약고이며, 서구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상황은 달랐지만 과거 티투스, 네부카드네자르, 십자군 전쟁 시기와 같이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긴장의 연속 상태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서 속에서만 성스럽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과연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것이 도래할 것인지, 몇십 년 후에도 예루살렘이 존재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오로지 핏빛의 미래만 보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모스 오즈는 현재의 예루살렘을 파괴를 자초하는 마력을 지닌 흑거미라고 표현했다. 그의 표현 속에는 예루살렘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중동의 분쟁을 예루살렘에게만 죄를 가중하는 건 못마땅하다. 평범한 흑거미를 '신성한 아름다움'이라는 착각에 눈이 멀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다툼을 마다하지 않은 우리 인류 또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공범자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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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8-08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벨푸어 선언 바빌론 유수 로마제국 십자군 육일전쟁...격동의 역사죠.

옥의 티...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cyrus 2012-08-12 21:40   좋아요 0 | URL
두꺼운 분량이라서 처음에는 읽기 시작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중동 갈등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오타 지적하신 점, 감사합니다. 5일동안 여름휴가 보내느라
방금 수정했습니다. ^^

2012-09-01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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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열대야가 무척 지독하다. 차가운 맥주의 거품만으로도 뜨뜻미지근한 밤 공기를 식혀주지 못하고 있다. 억지로 잠을 청해해보지만 수면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창문을 열어놔도 시원한 바람 한 점 불어오는 대신에 습한 공기의 손길이 자꾸만 내 얼굴을 어루만질 뿐이다. 자다가 깨고나면 TV로 올림픽 중계를 시청하는 대신에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다고해서 열대야가 싹 달아나는 건 아니지만 한밤중의 고요 속에서 책을 읽는 기분은 정말 유쾌하고 좋다. 특히 딱딱하고 두꺼운 분량의 인문서나 사회과학 서적 대신에 감성을 말랑하게 해주는 소설이나 시집 한 권 읽으면 어느 정도 무더위와 피곤함은 잊혀지게 된다.

 

고요한 열대야가 찾아 온 어제 새벽 3시 경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다.  '설국'. 이름만 봐도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설국』을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 겨울에 읽어야 제 맛이라고 하던데 나는 순전히 소설 제목만으로 열대야의 무더위에 지쳐버린 감성을 식혀주지 않을까 싶어서 책장 속에 꽂혀 있던 얇고 하얀 『설국』을 집어 들었다. 일본 소설은 많이 읽는 건 아니라서 이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설국』의 니가타 현으로 향하는 국경의 긴 터널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금은 망설였다. 평생 고독과 허무에 지배당한 삶을 살다가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마는 작가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설국』곳곳에서도 삶의 유한성 앞에서 비롯되는 감상적인 허무의 매력은 회화적인 은유법으로 이루어진 문장들 속에 숨겨져 있다. 이 소설로 인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일본 특유의 미의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설국』의 섬세하면서도 세밀한 문장과 스토리를 서양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혔는지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 스웨덴의 한림원은 이 작품을 노벨 문학상으로 선정하는 이유를 '자연과 인간 운명에 내재하는 존재의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어쩌면 작가의 섬세한 미의식과 감각적인 문체가 만들어 낸 자연의 정경 묘사가 서구인들에게는 비서구인 일본의 세계를 '신비'의 영역에 가둬두고자 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작품 속에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허무'의 감정마저도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동양의 미학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시마무라는 허무주의자다. 그나마 정형적인 성격의 시마무라와는 정반대인 게이샤 고마코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삶이라는 감옥 안에서 발버둥을 쳐보지만 한낱 시마무라 앞에서 울분만 토해내는 불만 표출에 그칠 뿐이다. 그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시마무라는 여인에게서 고미코에서도 허무를 읽는다. 하지만 시마무라와 고미코, 이들은 서로에게 '허무'만 읽는 게 아니라 그것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연민 또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시마무라는 고마코분만 아니라 설국 지방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도 만나게 된 요코라는 여자에게도 은근한 감정을 품는다.

 

 

 

요코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 닿았다. 그가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이러한 모습을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p 110)

 

 

 

소설은 시마무라와 고마코 그리고 요코, 이 세 인물 간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제일 눈에 많이 띄는 여주인공은 고마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마코는 처음에 시마무라를 만났을 때만 해도 과거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시마무라를 접대하는 일이 잦아들게 되면서 고마코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이 궁금해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어한다. 여성들이 남성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빙빙 둘러서 말하듯이 고마코도 은근슬쩍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고마코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결국 게이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 박복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눈만 쌓이는 폐쇄적인 설국 지방에서 자란 고마코는 타 지방에서 오는 수많은 낯선 손님들을 접대하고 눈 녹듯이 떠나보내야하는 게이샤로서의 삶은 지루함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단기적인 만남보다는 정말 제대로 된 인간애가 묻어나오는 사람다운 사람의 만남을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여자들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삶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가 원하고 원했던 만남의 최적 대상이 바로 시마무라인 셈이다.

 

 

고마코는 깔끔하게 앉아 있다가 탕에서 나온 시마무라에게,

 '이렇게 조용한 데서 바느질을 했으면' 

방금 청소를 끝낸 방의 낡은 다다미 위에 가을 아침 햇살이 깊숙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느질 할 줄 아나?'

 '그런 말은 실례예요, 형제 가운데 가장 고생했죠. 생각해 보면 바로 제가 자랄 무렵이 집안이 힘든 시기였떤 것 같아요'

 

 (p 99)

 

 

고마코 말대로 시마무라는 정말 그녀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고마코는 천상 여자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던 고마코에게 조용한 방에서 바느질을 한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애정을 듬뿍 받으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게이샤로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한낱 희망사항일뿐이다. 더욱이 이 무뚝뚝한 허무주의자 시마무라는 그런 고마코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 속 이 장면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여성적이면서도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이성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으며 그 누구로부터 확인마저 받지 못한 그녀에게 연민이 느껴지게 된다. 고마코는 정말 사마무라로부터 '좋은 여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시마무라가 불쑥 말했다.

 '당신은 좋은 애야'

 '어째서요? 어디가 좋아요?'

 '좋은 애라고'

 '그래요? 이상한 분이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정신 차려요' 하고 고마코는 시선을 돌리고 시마무라를 흔들며 뚝뚝 끊어 혼내듯 말하더니 잠자코 있었다.

 

 (중략)

 

 '그런데 어디가 좋은 애라는 거죠?'  하며 고마코는 약간 울먹이는 소리로, '처음 만났을 땐 당신이 정말 싫더군요.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는 이는 또 없을 거예요. 정말 싫었어요'

 시마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지금까지 제가 그걸 말 않고 있었던 걸 아세요? 여자가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이미 다 끝난 거 아닌가요?'

 '괜찮아'

 '그래요?' 하고 고마코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듯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한 여자의 삶의 느낌이 따스하게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왔다.

 '당신은 좋은 여자야'

 '어떻게 좋은데요?'

 '좋은 여자'

 '이상한 사람' 하고 어깨가 가려운 듯 얼굴을 가렸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고개를 들고는,

 '그게 무슨 뜻이죠? 네, 무슨 말이에요?'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고마코를 보았다.

 '말해 줘요. 그래서 절 만나러 온 거예요? 당신은 절 비웃고 있었군요. 역시 비웃고 계셨던 거군요'

 

 (p 126~127)

 

 

   

하지만 시마무라의 감정은 고마코에게만 향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시마무라는 전형적인 게이샤인 고마코를 사랑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요코를 떠올리지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시마무라가 요코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일은 없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을 정복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마무라는 사랑의 감정조차 자연의 변화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마치 나무가 계절을 입듯, 아무 것도 없었다가, 초록의 잎을 갖고, 그리고는 빨갛게 물들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감정은 영원하지 못하다. 우리 인생처럼 말이다. 그래도 연정을 품고는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녀 주인공들의 허무한 행위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고마코의 사랑이 부질없는 '투명한 허무'가 되어 하얀 눈 속으로 파묻혀지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진다. 고요한 열대야 속에 읽은 『설국』은 한 여름밤에 마시는 따뜻하게 데운 사케였다. 따뜻한 사케는 추운 겨울에 마셔야 제 맛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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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2-08-0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북극 허풍담]을 읽을 동안 시루스님께서는 [설국]을 읽으셨군요.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여름엔 아무리 사케라도 시원하게 마셔야하지 않을까요?
아니 여름에 사케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군요.
역시 겨울에 호호 불어가며 마시는 뜨거운 사케가 제 맛이죠. ^^

cyrus 2012-08-12 21:42   좋아요 0 | URL
소설 문장은 참 좋습니다. 설경이나 자연물을 등장인물의 심리와 정서에 비유하는 표현이
저는 좋더라고요. ^^
 

 

 

 

 

 

 

 

오늘 우연히 도서출판 '푸른역사'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서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중남미 정치 및 역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 교수님께서 어제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53세. 생전에 학술 연구뿐만 아니라 대중 독자들을 위한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및 역사 관련 책들을 많이 집필하셨고 외서 번역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2003년에 출간했던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읽은, 이 분이 쓴 저서 중에 유일한 읽은 책입니다. 중학생 시절이었던 제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흥미로운 세계사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 난 이후로 제가 알고 있었던 세계사가 유럽 중심 사관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 자리잡았던 유럽 사관의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게 만듦으로써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한층 더 새롭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 책이 저의 지적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역사책으로 기억이 남습니다.

 

 

 

 

 

 

 

 

 

 

 

 

 

 

 

 

 

故 이성형 교수는 1990년에 <라틴 아메리카 자본주의 논쟁사>를 시작하여 여러 권의 책을 집필 또는 번역을 함으로써 그 당시 생소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문화, 역사를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시대의 변화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및 문화에도 변환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간했던 고인의 책은 현재 절판 상태입니다. 그래서 현재 변모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연구 활동을 왕성하게 할 수 있는 시기에 갑작스레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많이 뒤늦은 감이 있지만 고인의 학문적 업적이 다시 한 번 재평가되어 우리나라 라틴 아메리카 연구의 맥이 끊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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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8-0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형 씨 신문칼럼 몇 개를 오려놨는데...이제 나이가 50대 초반이군요.한참 일할 나인데...

cyrus 2012-08-06 19:51   좋아요 0 | URL
그동안 제가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생전에 이대 재임용 때문에 여러 모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군요.
그 일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이성형 씨의 부고를 무척 안타깝게 여겼어요..

아띠 2012-08-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학계의 병폐를 고스란히 당하고만 살았던 것 같아요. 저 세상에서나마 공평한 대우받고 잘 지내시길 바래요

감은빛 2012-08-0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안타까운 소식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