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 우리는 왜 부정행위에 끌리는가
댄 애리얼리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컨닝 행위를 하는 이유

 

 

 

 

 

 

 

자신이 공부한 만큼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이시험의 올바른 목적이다. 그러나 학생이면 누구나 이왕이면 자신의 실력보다 조금은 좋은 성과를 얻기를 바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학의 학점이 다음 학기 장학금과 취업에서의 점수 등 자신의 미래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운이라도 따랐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시험기간에 빠지기 쉬운 유혹이 있으니 바로 컨닝이다. 시험이라는 제도를 인류가 시행하면서부터 시작되었을 컨닝은 적은 노력으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나 또한 컨닝이 보내는 유혹의 손짓을 여러 번 느낄 때가 있었다) 또한 예전부터 대학가에는 컨닝이 너무나도 만연해있어서 컨닝을 하는 학생을 구경하는 것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컨닝이 대학문화의 일종이며 젊은 시절 한번씩은 해보는 낭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컨닝은 분명히 불법행위다.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남보다 쉽게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옳지 않은 행위다. 그러나 컨닝을 하는 학생도, 또는 하지 않는 학생도 컨닝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부당함에 대해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왜 컨닝 행위가 부정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시험을 보면서 기회가 있으면 남의 답을 훔쳐보는 이유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실험 참여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고 컴퓨터로 수학 시험을 보게 했다. 그리고 첫 번째 A 그룹에게는 스페이스 바를 눌러야 답이 모니터에 나오게 했고 두 번째 B 그룹에게는 엔터키를 누르지 않아도 5초 내에 답이 저절로 모니터에 뜨게 했다. 과연 어느 그룹에서 컨닝 행위가 발생했을까? 연구결과 두 번째 B 그룹 참여자들이 컨닝을 더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났다. B 그룹은 별도로 키 조작을 안 해도 답이 모니터에 나오기 때문에 자기는 부정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더 쉽게 답을 볼 수 있었다. 즉, 이런 부도덕한 행동이 자신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때 더 많이 답을 베꼈던 것이다.

 

 

 

 

 인간은 편익을 위해서 부정행위를 저지른다?

 

 

 

 

 

 

조르주 드 라 투르  『속임수 (사기 도박꾼)』 16세기경

 

 

 

사람들은 옳은 일 또는 그른 일과 마주쳤을 때 감정적인 갈등을 경험한다. 이 때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도덕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종종 우리 사회에서는 정직하고 도덕적인 이미지를 지닌 사람이 과거에 저지른 부정행위에 들통이 나버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만큼 이성적이면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는 인간도 도덕과 부정행위 사이의 갈등 앞에서 쉽게 굴복하고마는 나약한 존재다. 이러한 뉴스를 접하면서도 사람들은 부정행위가 어떠한 행위에 들어가는 비용과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편익을 고려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합리적 범죄의 단순 모델'(Simple Model of Rational Crime, SMORC)라고 한다. 즉,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부정행위를 쉽게 저지른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SMORC 모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반박하는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시각장애인과 일반인을 태운 택시기사 실험을 주목해보자.

 

일부 비양심적인 택시기사들 중에는 손님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운전할 때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먼 길로 운전하는 일명 '뺑뺑 돌기'라는 꼼수를 부리기도 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먼 길을 일부러 운행함으로써 손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요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본다면 비용편익 효과에 기반하는 부정적 행위에 대한 일반적인 요인이다. 그렇다면 만약에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손님이 택시를 탔다면 비양심적인 택시 기사는 일반인 고객보다 쉽게 '뺑뺑 돌기' 운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SMORC 모델에 상반된 실험 결과가 나왔다. 택시기사들은 시각장애인보다 일반인을 태웠을 때 길을 우회하는 부정을 더 많이 저질렀던 것이다. 길을 돌아가도 인지하기 어려운 시각장애인 손님을 속였을 때 부정행위가 발각될 우려가 없고 일반인보다 속이기 편하다. 이러한 실혐 결과를 통해서 인간의 부정행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요인이 작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만 부정행위를 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정직을 추구한다던 당신도 거짓말이야~"

 

아빠는 8살짜리 딸이 짝꿍의 연필 한 자루를 훔쳤다는 내용의 편지를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내며 2주 동안 학교에 갈 때 외에는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벌을 준다. 너무 화가 난 아빠는 벌을 주면서 아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연필이 필요하면 얘기를 하지 그랬어? 아빠한테 말하면 되잖아. 그러면 아빠가 회사에서 연필 한 자루가 아니라 몇 다스는 가져다줄텐데 말이야."   (p 51)

 

 

같은 반 친구의 연필 한 자루를 훔치는 행위가 나쁜 짓이라는 건 알면서 회사 사무실에 있는 연필 한 다스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집으로 가져가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댄 애리얼리는 인간은 이득을 얻기 위해 사소한 부정을 저지르지만 자신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합리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능력은 도덕적인 이미지와 이기적인 욕망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발현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정직하고 올바른 인간으로 봐주길 바란다. (자아 동기부여, Ego motivation) 반대로 다른 사람을 속여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재정적 동기부여, Financial motivation)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도덕 갈등의 경험은 바로 이 두 가지의 상반된 동기부여의 충돌로부터 비롯된다. 부정행위에 대한 죄의식의 결과를 두려워한다면 '도덕'이 승리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꼭 좋은 행위의 결과를 선택하는 건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은 부정행위에 쉽게 끌리고 저지르게 된다. 부정행위로부터 얻게 되는 결과적 이익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가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자기합리화하게 된다. 즉, 자신은 부정행위를 하면서도 스스로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사소한 부정행위 앞에서 어떠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아무리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도 부정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

 

 

 

 

 착한 사람이 부정행위자로 돌변하는 것을 막는 게 어려운 일인가?

 아니면 부정행위자를 착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어려울까?

 

그가 책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실험 사례들은 아무리 정직한 인간이라도 부정행위의 욕망 앞에서 무너지게 되고 어떻게 작용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빈번이 저지르게 되는 부정행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까?  댄 애리얼리는 도덕적 행위의 규범을 기준으로 삼아 공과 사적 행위를 스스로 규정지을 수 있는 선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다만, 저자는 사람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바꾸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실토한다. 그렇지만 도덕적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기간의 훈련과 연습이 아니라 장기적인 측면으로 문화적 변화를 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소개된 인간의 부정행위에 관한 재미난 사례를 소개할까 한다. 학교 내 화장실에서 주말마다 새 두루마리 휴지를 두고 가면 다음 주 월요일만 되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화장실 휴지는 공유물이므로 개인적인 용도로 가져가지 말라는 쪽지를 화장실 문에 붙여놨다. 이 쪽지를 붙이고 난 뒤부터 도난당한 화장실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정작 경고 문구가 담긴 쪽지를 붙이지 않은 다른 화장실에는 휴지가 사라지는 일이 여전했다. 저자는 '사라지는 두루마리 휴지 사건' 사례를 통해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 도덕적 규범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방안의 필요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사례만 가지고는 거짓말, 부정행위를 쉽게 저지르면서도 그걸 또 쉽게 죄의식에 빠져 도덕적 인간이 되어버리는 인간의 단순한 면모를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다.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인간의 복잡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이 사회규범을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되면 스스로 도덕성 기준을 바꿔버리고 그의 행동을 자신의 모델로 삼게 된다. 모델이 저지른 부정행위 수위를 본인에게 허용되는 기준 범위로 생각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앞에서 소개한 컨닝 사례처럼 상대방이 저지른 부정행위를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묵인해버리고 자신도 똑같이 부정행위를 모방하게 된다. 이것이 부정행위의 전염성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최근에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 사건 현상과 결부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제안한 도덕적 규범 기준의 필요성이 꼭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부정행위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을 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화장실 휴지 사건이 주는 교훈만으로도 현실적으로 부정행위의 수준을 줄이고, 도덕성을 개선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와 비슷한 일례로 동물원을 가 보 사람들이라면 겪어 보거나 목격하게 되는 사소한 부정행위로 들 수 있다.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는 쇠창살에 보면 '동물이 있는 곳으로 돌이나 이물질을 던지지 마세요, 동물이 다칠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다. 일부 동물원에서는 관람객이 먹는 스낵을 주지 말라는 경고도 종종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동물에게 돌을 던지게 되면 그것을 음식물로 착각하게 되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게 된다. 심지어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돌덩어리는 동물들에게 상처를 입힐 우려가 있다. 그리고 동물들의 심리를 자극하여 공격 성향을 드러날 수도 있다. 동물들의 건강뿐만 아니라 동물원을 구경하는 관람객 전체에게 크게 해를 입힐 수 있는 부정행위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간결한 문구도 뭉용지물이다. 동물들에게 돌을 던지는 철이 들지 못한 관람객들(특히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을 동물원에서 볼 수 있다. 이렇듯, 제 아무리 도덕 규범을 강조해도 인간의 부정행위를 자발적으로 또한 제도적으로 억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이 부정을 쉽게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기합리화'라는 눈가리개를 씌운 이상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부정행위를 조금씩 저지르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착한 사람들이 사소한 부정행위 하나라도 행하지 못하게 막는 것도 어려우며 부정행위에 익숙한 비양심적인 사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키는 것 또한 어렵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착한 독자'들에게는 댄 애리얼리의 주장이 여간 수긍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자신이 몰래 저지른 부정행위의 원인들을 증명하고 있는 진실 앞에서 부끄러워할지도. 우리 사회에 발생하고 있는 부정행위들을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지만 댄 애리얼리가 주장하는 도덕적 규범의 중요성은 온갖 부정으로 판치며 그것을 묵인하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직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언론에 난 정치인 등의 부정, 경제인들의 비리를 보면서 분노한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은 이런 저런 작은 부정과 작은 비리를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글의 마무리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격언으로 맺을려고 한다. 부정행위를 가볍게 생각하는 독자라면 대문호가 남긴 격언을 자신만의 '도덕적 규범'의 기준으로 삼아 되새겨볼 것을 권한다.  

 

 

 선을 행함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악을 억제하려면 보다 더 노력이 필요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2-09-18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책감을 못느끼고 저지르는 부정이 있고, 죄인줄 알기 때문에 합리화하려는 심리도 있을 겁니다.이래저래 보통 사람들이 저지르는 조그만 죄가 많지요.그래서 자기는 자기를 냉정하게 심판할 수 없어요.이런 책을 읽으면 왠지 도둑질하다 들킨 기분이죠.

cyrus 2012-09-19 23:12   좋아요 0 | URL
그렇겠죠, 저도 읽으면서 느낌이 이상했어요. 내용을 읽다보면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찝찝하더라고요 ^^;;

감은빛 2012-10-1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밀히 따지고 들면 죄를 안 짓고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러니 기독교의 '원죄론'이 먹히는 것이겠죠.
그렇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인간은 실수 할 수 밖에 없는 동물이 아닌가 싶어요.
사소한 잘못들은 순간의 실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cyrus 2012-10-20 14:05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리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지도 잘 모르기도 하죠 ^^
 
멀티플라이어 - 전 세계 글로벌 리더 150명을 20년간 탐구한 연구 보고서 멀티플라이어
리즈 와이즈먼 외 지음, 최정인 옮김, 고영건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작년에 국내에 개봉한 영화 『Money Ball』의 주인공 빌리 빈의 대사다. 『Money Ball』은 20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의 만년 꼴찌 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돌풍과 최악의 구단을 최고의 구단으로 변신시킨 빌리 빈 단장에 대한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다. 매 시즌마다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야만했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재정 악화로 인해서 팀의 주축을 양키스나 보스턴 등 부자구단에 내주게 되는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빈은 경제학을 전공한 분석관을 부단장으로 영입하며 구단의 체질개선에 나서지만 "야구는 직관과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스카우터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하지만 빌리 빈은 자신의 확신에 따라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데이터 야구'를 펼쳤다. 그것이 바로 훗날 '머니볼 이론'(Money Ball Theory)이라고 불리게 되는 전략이었다. '머니볼 이론'은 경기 데이터를 철저하게 분석해 오직 데이터를 기반으로 적재적소에 선수들을 배치해 승률을 높이는 방법이다. 볼넷을 하도 잘 골라 볼넷의 영웅이라 불리는 선수, 수비를 두려워하는 1루수지만 출루율은 높은 선수, 지구력은 떨어지지만 한방은 있는 노장 선수들을 활용해 출루율을 최대한 높이는 전략을 구사하는 등 오로지 선수들의 성적 데이터를 분석해 선수들의 장점을 찾아냈고 팀을 꾸렸다. 착실하게 팀을 재정비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메이저리그 최초로 20연승이라는 신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빌리 빈이 꼴찌 구단을 최고의 구단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각 선수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와 이를 분석해내는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각 선수들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알아야 하고 장점과 단점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선수의 진짜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은 선수들에 대한 애정과 지대한 관심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빌리 빈은 라커룸을 돌아다니며 선수들을 격려하지만, 자신의 뜻에 따라주지 못하는 선수는 가차 없이 잘라낸다. 빌리 빈의 리더십은 문제 있는 학생을 모두 퇴학시키고 뜻에 공감하는 교사들과 학교를 뜯어고치는 '고독한 스승'에 가깝다. 결국 머니볼 이론의 핵심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저비용 고효율'에 있으며, '반드시 이기자'가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최대치를 만들게끔 하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동요하지 않고 무능해보이는 선수들에게 숨어 있는 능력을 끌어올려 과감하게 경기에 출전시킨 빌리 빈의 경우, '멀티플라이어'(Mltiplier)와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멀티플라이어'란 리더십 전문가 리즈 와이즈먼과 그렉 맥커운이 공동으로 저술한 동명의 책에서 나온 용어로 상대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팀과 조직의 생산성을 높이는 리더를 뜻한다. 스포츠계에서도 또 다른 멀티플라이어를 꼽으라면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돌풍을 이끈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을 들 수도 있다. 히딩크의 리더십은 월드컵이 폐막되고 난 뒤부터 이미 조명받기 시작했는데 스타 플레이어의 천재성에 의지하지 않고, 집단의 천재성을 만드는 그의 리더십은 노력하는 멀티플라이어 리더의 전형이다.

 

멀티플라이어는 재능자석, 해방자, 도전자, 토론 주최자, 투자자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재능 있는 사람을 모아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재능자석) 그러기 위해서는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해방자) 자유롭게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줘야 한다.(도전자)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일하는 사람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게 만들어(투자자) 토론을 통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만든다.(토론 주최자)

 

멀티플라이어가 되기 위한 원칙과 비결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다 '멀티플라이어'가 될 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양한 성격과 재능을 조직원들로 구성된 하나의 집단 속에서 리더는 그 무리 속에서 자신이 똑똑하다는 인식을 쉽게 느낄 수 있겠지만 조직원 전체 모두 똑똑하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사실 이 지구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 내 모든 조직의 리더들은 멀티플라이어의 반대인 디미셔너(Diminisher)에 가깝다. 디미셔너는 직원들의 재능을 사용하고 직원들에게 명령하며 스스로 결정하고 직원들을 통제한다. 멀티플라이어와 마찬가지로 분명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다. 다만 조직 내부로부터 훌륭한 성과를 나오게 만드는 원동력인 조화로운 집단 지성을 끄집어내고 확산시키는 일에는 어려워한다. 이들은 조직원의 지성과 재능이 고정된 것이라서 바뀌지 않는다고 믿으며(착화된 의식구조)에는 개인의 잠재된 능력과 가치를 낭비하도록 만듦으로써 그들의 업무수행 능력을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낳게 만든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리더 대다수는 자신이 조직을 나쁘게 만드는 디미셔너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직원들에게 명령하고 통제하는 상부하달 유형의 리더십이 여전히 조직 사회에서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만큼 멀티플라이어 리더가 된다는 게 책 속 내용처럼 쉬운 게 아니다. 특히나 상부하달식 관계 구조의 조직이 많은 우리나라만큼은.   

 

그러나 빌리 빈과 히딩크가 디미셔너의 리더쉽에 익숙한 팀을 조직원들이 함께 업무에 참여하여 성과를 얻는 멀티플레이(Multiplayer)가 가능한 팀으로 만들었듯이 디미셔너도 멀티플라이어로 변신할 수 있다. 일단 독불장군식으로 조직원을 몰아 붙여서는 안 되며 조직원들에게 성과를 창출할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그 성과 창출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기대 이익을 강조하여 지혜와 능력을 자발적으로 배양시킬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자세를 멀리하고 각 조직원들 간의 긴밀한 의사소통을 자주함으로써 경청과 공감의 자세 또한 필요하다. 『멀티플라이어』의 저자 리즈 와이즈먼은 디미셔너가 멀티플라이어로 변신하여 성공한다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 멀티플라이어가 갑자기 하늘 아래 뚝 떨어졌는가?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다양한 멀티플라이어 리더들의 사례를 본다면 조직을 이끄는 데 있어서 겪은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노하우로 만들었다. 키스는 글로 배울 수 있다지만 '리더십의 역량'은 글로만 배운다해서 갑자기 얻어지는 건 아니다. 운동선수들은 오직 승리라는 성과의 증거를 경험하기 위해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듯이 디미셔너 리더가 멀리플라이어 리더가 되기 위한 자발적인 참여와 적용을 무시한다면 영영 제대로 된 성과 하나 얻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이끌고 있는 조직을 부진의 늪으로 빠뜨리게 만드는 'X맨'이 될 수도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2-09-0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언제나 와도 좋은 글 많이 쓰고 계시는군요 ^^ 이런 책이 저에게도 필요한데 흠..내용 좋네요 ㅋ 후후 저도 얼렁 글이나 하나 올려야 되는데 이러고 있네요 가을입니다. 시루스님 학교 잘 다니고 계시죠 ㅋ ^^

cyrus 2012-09-10 08:50   좋아요 0 | URL
진짜 오랜만이네요, 루쉰님~~!! 잘 지내고계시죠? 요즘 저도 개강인지라 잠수타기 일부 직전인데
먼저 반가운 인사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씩 근황이라도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루쉰님도
행복하고 좋은 일 있기를 바라요 ^^

2012-09-05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0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광장』의 굴욕?

 

문학작품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시대적 상황과 연관돼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꾸준히 읽혀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 안에 담겨 있는 '시대정신', 즉 당시 사람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고뇌를 온전하고 명료하게 표현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특히 최인훈의 『광장』과 작품 속 주인공 이명훈이 분단시대에서 4.19혁명으로 나타난 역사적 전환기의 민족의 사상과 고뇌를 상징한다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는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몰락해가는 도시 빈민들의 삶을 통해 70년대 경제성장의 사회상의 폐해를 고발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의 단면들이 발표된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난쏘공』이 출간 30년 만에 통산 100만 부의 판매 기록이 세웠을 때 작가 조세희는 '현재 철거민의 삶은 30년 전이나 똑같다'고 말하면서 '30년 전에 나온 내 소설이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읽혀진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냉담한 소감을 밟혔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로부터 소외받아야만 했던 '난장이의 꿈'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광장』도 마찬가지다. 작가 최인훈은 여러 차례 개작 끝에 탄생된 수정본을 출간하게 된 이유를 『광장』의 역사적 시대의 산물이며 좀 더 문학성을 보강하여 후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명준이 바다에 투신한 지 42년이 지난 지금도 분단의 대립은 여전하다.

 

최인훈의 『광장』도 문학 교과서에 많이 수록되고 지금까지도 수정본으로 나올 정도로  전후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세희의 『난쏘공』에 비하면 대중의 인지도는 조금 낮은 편이다. 철거민 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조명되는 사회적 이슈가 거론될 때면 항상 연관되어 따라 언급되는 게 바로 조세희의『난쏘공』이다. 그런데 지금도 '분단국가'인데도 '분단 문학'의 인기는 그리 많지 않다. 5, 60년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뚜렷했던 사회상을 그려냈기에 오늘날 읽기에는 너무 케케묵은 소설이라는 인식 탓일까?  4.19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되는 시점에서 나온게『광장』인데 4.19 혁명을 기념하는 날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 정도면 문학적 평가에 비하면 상당히 굴욕적이다.『광장』은 수십년 전에 출간된 책치고는 50만 부를 넘을 정도로 스테디셀러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판매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능 세대를 거쳤던 기성 세대들이나 현재 수능 시험을 앞두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광장』은 역대 수능시험 지문 출제 작품이면서 모의고사에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소설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저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문학 시간에『광장』을 배웠던 사람들 중에서 텍스트 전체를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광장'과 '밀실'의 사회

 

한반도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는 세계적인 공간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불행하게도 지금도 갈등의 기억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이데올로기 갈등은 해방 이후에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러한 체제 갈등과 경쟁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율성을 크게 훼손하기에 이른다.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흐름이나 반대로 이데올로기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지향하던 세력이나 개인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 팽배하고 있었던 1960년, 때마침 이데올로기의 싸움에 지쳐버린 이명준이 등장하는 『광장』이 탄생하게 되었다.『광장』이 나올 수 있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도 한몫했다. 소설은 4.19 혁명으로 드러난 의식의 전환과 시대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4.19 혁명은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시킴과 아울러 민족 통일의 염원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존의 정치세력들은 갑자기 폭발한 민중들의 자유의 에네르기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고 그 혼란을 틈타 군사독재가 등장함으로써 자유로운 사회의 탄생에 대한 민중들의 갈망은 끝내 '미완'으로 남아야만했다.

 

'자유'가 없는 사회에는 오직 '억압'과 '복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명준은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인식하에 제3국을 선택하지만, 끝내 바다에서 자살하고 만다. 이명준은 '광장' 과 '밀실'로 구분되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만들어 낸 희생양이다. '광장'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의 이념을 추구하면서 바람직한 사회 건설을 위해 토론하고 실천하는 공적 공간이다. 반면, '밀실'은 개인이 삶의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사적 공간이다.

 

아버지의 월북 이력이 문제가 되는 바람에 남한 사회는 이명준을 빨갱이로 몰아붙였고, 그는 이를 계기로 남한의 개인주의적이고 폐쇄된 밀실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하기에 이른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밀실' 속에서 사적 이익만을 탐닉하는 퇴락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그와 동시에 '광장', 다시 말해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묘한 동경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명준의 눈에 비친 북한 사회는 활기차고 정의로운 공동체적인 '광장'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만이 남아서 개인의 자율성이 크게 훼손되는 사회였다. 심지어 '사랑'마저도 허용되지 않은 통제사회였던 것이다. 이명준의 눈에 비친 남한과 북한은 모두 불구적인 사회다. 그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은 바람직한 광장이 건재하되 밀실이 존중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사회의 조화, 이념과 행복이 공존을 이루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사회를 발견하지 못했다.

 

『광장』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이명준의 행적과 심리적 자의식을 통해 작가는 남과 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명준은 나름의 방식으로 남북의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현실에 순응하지도, 현실을 무작정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속한 사회와 현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친일파가 해방 후 고위직에 오르고 타락과 부조리, 방종에 가득 찬 '남한 사회'나 경색된 이데올로기, 허위, 부자유가 만연한 '북한 사회' 모두 환멸의 대상일 뿐이다. 모두 진정한 인간 삶을 충족시키기 어려운데, 그것은 애당초 남과 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모두 사회 성원들의 자생적인 욕구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p 196)

 

 

이명준이 포로수용소에서 나누는 인상적인 이 대화에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고뇌, 나아가 우리 민족의 고뇌가 응축돼 있다. 이명준이 선택한 '중립국'은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나라가 아니라, 남과 북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대립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밀실'과 '공간'이 공존하지 않는 한국 사회

 

 

 

 

 

'밀실'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광장'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와

'밀실'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광장'을 만들려다가 고초를 겪었던 자.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는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개념으로 '공론장'을 주장했다. 공론장은 개인들이 모여 권력의 간섭이나 제약없이 이성적인 비판과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국가 권력의 방향을 논의하는 공간이다. 공론장의 엄청난 힘은 현대 민주주의 혁명의 동력이 되었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밀실과 광장이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밀실보다 광장에서 존재감을 찾는다. 광장은 열린 공간이자 보다 적극적인 소통의 창구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고 다양성을 교감하며 통일성을 지향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광장을 열어라"라는 저항의 외침과 "무조건 열 수는 없다"라는 거부의 몸짓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중이다. 한쪽은 자신을 진보라 부르고, 다른 한쪽은 보수로 이름 붙인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실종되었고, 대화와 타협은 사라졌다. 정부의 얼굴이 여러 번 바뀌어도 철 지난 이데올로기 대립과 그에 대한 불신만 반복되고 있다. 이 땅에 진정한 진보와 보수가 있는지 의문만 커질 뿐이다.

 

60년 전의 이명준이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본다면 심정이 어떠했을까?  '밀실'의 암흑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오직 '광장'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 그리고 '밀실'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고초를 겪어야만했던 자가 같은 땅덩어리 내에서 살고 있는 게 지금 우리나라 사회의 현주소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고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구 냉전시대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국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낡은 이분법적 영향력이 유지되는 사회는 결국 사회구성원 간의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젋은 세대들은 이명준처럼 이데올로기로 인한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진정한 삶의 행복을 스스로 찾지 못한 채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밀실'에서 나와 '광장'에서 공론의 장을 형성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깊게 패인 극단적 단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9-03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저도 학교 독후감 숙제 때문에 <광장> 읽어야 하는데...
전에 조금 읽어봤더니 살인적으로 어렵더군요. 그땐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랬고, 지금은 읽을 수 있겠죠.. 히

cyrus 2012-09-04 16:30   좋아요 0 | URL
<광장>은 중고등학생이 읽어야 할 필수 소설이에요. 저도 고등학생 때 문학시간에 처음
접했을 때 좀 어려웠어요. 아무래도 작품 중간 곳곳에 비유가 많이 있고요, 게다가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은 소설 텍스트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서 처음부터 안 읽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런 작품은 한 번만 읽어서 끝나는게 아니라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어두면 좋아요, 저는 이번에 세 번째로 읽게 되었어요. 참고로 <광장>은 여러 번 개정판으로
나왔는데 각 판마다 내용이 조금씩 달라요. 참고하세요 ^^

아이리시스 2012-09-04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구운몽]이 왜 저기 있는지 한참 생각한 1인..........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을 외치던 명준의 메아리가 오래 남아서 이후로 오랫동안 <광장>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어요.

명준은 결국 중립국으로 갔을까요?
한국사회는 왜 진정한 공론의 장과 이분법적인 잣대 겨누기를 멈추지 않는 걸까요?

cyrus 2012-09-04 16:35   좋아요 0 | URL
<광장>하면 같이 수록된 단짝 <구운몽>이 빠질 수 없죠 ^^;; 저도 소설 중에서 제일 기억나는
장면이에요, 고등학생 때 문학 시간에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때 감정이 아직도
기억나요. 인물의 심정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뚜렷하게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명준은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갈등이 없는 또 다른 세상을 추구하고 싶었을거에요.
소설을 읽는 독자들마다 명준의 죽음이 옳다, 잘못했다라고 해석의 차이가 있겠지만요.
아무튼 명준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에요. 이념 대립의 사회적 상황과 명준의 개인적 상황
(남과 북에 사랑했던 여인의 부재)을 맞물려 돌아본다면 명준의 죽음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요.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 짜게 본 역사, 간을 친 문화
유승훈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옛날이여", 화려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소금

 

이틀 전에 방영된 KBS 2TV '비타민'에서 '나트륨 중독'에 대해서 소개했다. 나트륨, 즉 소금 섭취 과잉은 근래 한국인의 나쁜 생활습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는 것 중 하나다. WHO의 하루 소금 권장 섭취량은 2,000mg(5g) 이하다. 반면 2012년 현재 한국인의 1인당 1일 평균 소금 섭취량은 WTO 권장량의 2배를 훨씬 넘는 5000㎎(12.5g) 선인 걸로 나타났다. 짜게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이 주요 질병의 증가 원인이 되고 있다. 소금 섭취량이 늘면 고혈압, 심장병 등 주요 만성질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금 섭취를 줄이는 방법 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금에 대한 인식은 딱 두 가지다. 음식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 그리고 반대로 설탕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운 조미료. 좋든 나쁘든 간에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소금의 존재는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조미료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소금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지금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은 놀라울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소금은 생존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 지역의 특징은 강이나 바다가 근접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어획 방법의 발달로 보고 있지만 놀랍게도 이 때부터 고대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서 소금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 염호가 있는 장소는 교역의 중심이 되고,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하여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소금을 얻기 위한 교역로가 발달되었다. 또, 고대 그리스 사람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고대 로마의 병사들은 월급으로 소금을 받았다. 그래서 '급여, 월급'을 뜻하는 영어 Salary가 소금의 Salt에서 비롯되었다. 간략하게 이 정도의 역사적 상식만 본다면 과거의 소금은 그저 음식을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경제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또는 재화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이 없다면 나라가 발전 못해요, 아~ 미운 소금~~♬"

 

세계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화려했던 역사라고 해서 우리가 흔하게 보는 소금을 그저 짠 맛의 조미료로만 보지 말지어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한국사에서도 소금의 존재와 그 영향력은 무시 못한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소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전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전에서 얻게 되는 소금량에 따라 국가의 발전에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을 주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도 소금은 그에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생산물과 거래, 교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 지방의 사람들은 소금 맛 보기가 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해안 지방에 위치한 염전업자들 간에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는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다보니 염전업자는 최대의 이윤을 얻을 정도로 최고의 직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소금을 부엌에서 볼 수 있는 단순 조미료라기 보다는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재화 정도로 인식했다.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위한 재정이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소금의 최대 생산지였던 전남 지역을 점령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고려 말의 충선왕은 '각염법'이라는 소금 전매법을 시행하였다. 국가가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백성들이 소금을 얻기 위해서는 세금의 일종인 '소금세'를 지불한다거나 또는 일종의 생산량을 교환해야만 했다. 소금 생산 및 판매로 벌여들인 소금세와 교환 거래를 통해 국가 재정을 좀 더 수월하게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국가 또는 관리가 염전사업에 관여하다보니 정작 소금이 필요한 백성들이 피해를 얻는 문제점이 속출하게 되었다. '국가 재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급하게 찾다보니 소금을 요리에 필요한 조미료라는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용도를 잊고 말았다. 국가가 시행하는 소금 전매법에 관여하는 왕족 또는 권문세족들에게 소금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본의 용도로 보고 있었다. 소금이 권세가들만을 위한 귀한 최상급의 조미료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고려 정부도 소금을 자신들과 가까운 왕족, 고급관리들에게 분배할 정도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일정 기간 소금세와 생산량을 바쳐도 백성들이 양손 한 가득 소금 담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원나라의 간섭에 의한 조공을 피하기 위해서 만든 각염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배층들의 폐단을 더욱 낳게 만들었으며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어주었다. 고려 말의 소금 전매법의 폐단은 조선 건국 초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나가야 할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선 건국의 공신 중의 한 사람인 삼봉 정도전이 태조에게 염법의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로 국가 발전에 있어서 소금 개혁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염법 개혁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왕권 강화를 재정 확보'와 '백성들의 민심 얻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누가 소금을 외면하게 만드는가

 

어떻게 보면 소금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요하면서도 백성들에게 불편을 준 양면적인 존재다. 오늘날에는 건강상 해로운 조미료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과거에는 권세가들의 배만 불리게 만드는, 백성의 생활을 괴롭게 만드는 조미료였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땐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야 하는 법. 국가 재정 확보에 있어서 농산물과 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소금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조선의 성군 세종은 오랜 기근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복지정책의 재원으로 소금을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시기 속에서도 백성들의 식량과 군사들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해결 방법을 류성룡은 염전에서 발견했다.

 

자염은 질박한 토기에 바닷물을 담은 뒤에 끓여서 소금을 채취하는 방식이다. 천일염은 갯벌에 바닷물을 가둔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말려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자염이 사라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산업과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국책 사업에 밀리는 바람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람과 햇볕에 의해 말리는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오랜동안 누려온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염전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식생활에서 음식의 간을 조절하는 것은 소금, 간장, 된장 등 소금기가 있는 조미료였다. 우리 여성들은 짠맛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짠맛의 시대'는 가고 '단맛'과 '매운맛'의 시대가 왔다. 짠 음식과 소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널리 퍼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소금을 불필요하게 짜게 만들어 건강을 해치게 한 장본인은 인간이었다. 부엌에 있어야 할 소금을 그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황금'으로만 봤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방대한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소금의 화려했던 블루스가 너무나도 짜게만 느껴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2-09-0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곳곳에 소금에 관한 우여곡절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삼국지에도 보면 관우가 하던 일이 소금 밀매업자와 연결되어 있다, 혹은 그의 뒤를 봐주던 사람이다, 혹은 소금 밀매업에 종사하던 사람이다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cyrus 2012-09-03 11:17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알라딘 검색창에 소금이라고 검색하면 꽤 소금의 역사에 관한 책이 많았어요. ^^

아이리시스 2012-09-0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금으로 역사책이 나오는 게 신기하네요. 미시사도 좋아하지만 소금책도 읽는 시루스님이 더 좋아요.
제목 좋네요, 소금 블루스.
예전엔 오롯이 국가사업이었고, 부의 사업이었고, 권력과도 연관이 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cyrus 2012-09-03 15:07   좋아요 0 | URL
예전에 나온 책 제목 중에 슈가 블루스라고 있어요. 설탕이 건강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반박하는
일종의 설탕 예찬론에 관한 책이었는데 거기서 따왔어요. 사실 지금 소금도 설탕과 마찬가지로
건강에 유해한 조미료라는 인식이 강하잖아요, 하지만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면 소금의 존재가
얼마나 유용했는지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책 제목에서 따온거에요 ^^
 
카라바조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6
질 랑베르 지음, 문경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관심 있게 알아보고 있는 화가가 이탈리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다. 이름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와 비슷한데 국내에선 카라바조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선 미켈란젤로 못지않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고흐를 능가하는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불같은 성격, 시대를 앞서갔지만 결국 외면 받아야만 했던 남다른 천재 그리고 요절. 이러한 카라바조의 삶에 비하면 고흐는 양반에 불과하다. 경쟁 화가들 그리고 자신에게 그림을 주문했던 사람들을 무시하는 발언은 예사였고 수차례에 걸쳐 폭행 및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고 탈옥을 감행하여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보라. 딱 얼굴만 봐도 그의 격정적인 성격이 인상에서도 묻어 나온다. 예술적인 삶보다는 카라바조의 무시무시한 전과 이력이 제일 먼저 떠올려서 그런지 초상화 속에서 그가 쥐고 있는 것이 붓이 아니라 생전에 품속에서 지녔다던 단검처럼 보인다.

『성 마태오의 소명』1599~1600년


카라바조는 어린 시절부터 도제 생활을 거쳐 예술적 능력을 점점 키워나갔다. 콘타랠리 예배당에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와 <성 마태오의 소명>이 각광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권력자였던 델 몬테 추기경이 후원자로 나서고 로마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양식을 추구한 그는 악마적 화가,‘회화의 반(反) 그리스도'라는 비판도 받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집시나 부랑자, 창녀의 모습을 성자나 예수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성사회의 비판과 조롱을 비웃기라도 하듯, 충격적인 주제 선택과 표현 방식에 대한 고집이 묻어 나 있는 카라바조의 붓은 절대로 꺾이지 않았다.


『마리아의 죽음』1606년경






임종한 성모 마리아를 그리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의 썩어가는 시신을 모델로 사용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부탁했던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그림 모델에 대한 출처불명의 소문보다는 교회 관계자들을 더욱 실망하게 만든 것은 카라바조의 표현 방식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왼팔이 축 늘어진 채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임종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 있다. 교회 관계자들은 이러한 그림 구도를 마음에 들지 못했다. 성모의 죽음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장면이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성모 가까이에서 임종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 속 성모의 모습에 대해서도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맨 발을 드러낸 채 죽은 성모의 모습이 저속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를 들면서 카라바조의 그림을 비난했다. 그나마 그림 속 죽은 여자가 성모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희미한 후광만 그려져 있을 뿐, 이것마저 그려 넣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 또한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카라바조는 지극한 성스러움은 결국 지독한 세속적인 삶에 기초해 있으며, 성(聖)과 속(俗)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첫 번째 그림, 현재 소실됨)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수정된 그림)


카라바조는 그림 제작 주문자들로부터 총 두 번이나 거절당할 정도로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 마태오와 천사>다. 첫 번째 그림 속 성 마태오가 너무 초라하고 천사가 마태오 옆에 너무 가까이 묘사되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천사의 영감을 받아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마태오의 모습은 평범한 하층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마태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탓에 그의 발바닥은 그림을 보는 관중들 앞으로 드러나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본 순간, 마태오가 성인으로써의 면모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레토의 성모』1604~1605년


비록 성당이 요구하는 작품을 위해 카라바조는 고귀하고 근엄한 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도록 그림을 수정했지만 평범하고도 세속적인 종교화를 추구하고자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적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성 마태오와 천사> 두 번째 그림이 완성된 지 2년 뒤에 그려진 <로레토의 성모>에서는 성모와 아기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늙은 순례자의 맨발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카라바조는 그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사실주의적 화법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1593~1594년경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초창기의 카라바조 그림을 보게 되면 이미 사실주의적 표현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과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처음 보는 독자라면 훗날 그려지게 될 종교화에 비하면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점의 그림을 박물관에서 실제로 보게 된다면 좀 더 가까이 살펴 볼 것. 과일과 이파리가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과일은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흐를 정도로 싱싱하게 느껴진다. 특히 포도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각각의 포도 알맹이가 하얗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는데 포도 열매 위에 묻은 하얀 가루를 보는 듯하다. 이것을 사람들은 농약이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다행히도 농약 성분은 아니다. 그리고 카라바조가 살았던 시대에는 농약이라는 게 나오지도 않았다. 포도 속 당분으로 포도 껍질이 변해 생성된 것뿐이다. 하얀 가루가 많은 포도일수록 당분이 높고 신선함이 유지되어 있다. 과연 카라바조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그렸던 것일까?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1596~1597년


카라바조는 종교화를 그렸던 화가이면서도 동시에 폭행, 살인 전과가 적지 않은 범죄자라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독특한 화가이다. 하지만 렘브란트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등장할 수 있게 명암법을 처음으로 시도했으며 극적인 순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방식은 훗날 조르주 라 투르와 쿠르베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미술은 정당한 대우를 받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카라바조의 종교화를 반복해서 볼수록 차분해지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물론 화가의 생애를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을 본다면 그림이 주는 감동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카라바조도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의 모습을 주제로 한 그림 한 점을 남겼는데 불같은 성격의 화가가 그렸다는 생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고요하다. 두 눈을 감고 얼굴을 숙인 막달레나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면 눈물 한 방울이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막달레나의 얼굴에 흐르고 있는 이 눈물 한 방울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마저도 숙연하게 느껴진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09~1610년


카라바조의 생애와 미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찻잔 속의 태풍’이다. 카라바조는 평범한 기교의 예술에 의한 마니에리즘(Mannerism)이 지배하던 시대에 태어나 독특하고 파격적인 주제와 표현법으로 세상을 뒤흔들 젊은 천재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범죄 이력과 도주 생활은 활짝 펴야만했던 예술적 능력의 꽃을 시들게 만들었다. 카라바조의 예술이 세상에 가져다 준 파급 효과는 한 순간일 뿐이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점점 소멸되어가는 태풍처럼 카라바조는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다. 아마 반 고흐를 제외하면 이처럼 파격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짧은 삶을 살았던 예술가도 드물 것이다. 이제는 르네상스 거장 중의 한 사람인 미켈란젤로에 맞먹을 정도로 평가를 받고 있는 카라바조 출신의 미켈란젤로('카라바조‘라는 성은 화가가 태어난 지명으로부터 유래됨)를 고풍스러운 미적 취향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림 장면의 절반을 지배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흑(黑)의 영역이 많이 차지하고 있는 명암법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줄까? 그리고 과거의 불미스러운 이력만 가지고 장점을 무시하고 심지어 끝까지 냉담한 선입견을 거두지 않는 우리 사회 속에서 과연 전과자의 그림들이 그러한 선입견 없이 예술적 평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자신의 목을 참수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 자화상으로 그렸던 카라바조의 파격적인 예술을 아직 우리 사회는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2-08-2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바조를 다시 보게 돼서 정리가 돼요. 예전에는 마로니에 북스에서 나오는 화가 일대기 종종 읽었는데 요즘은 통-_-;; 저도 현대미술에 관심 좀 가져야 될 듯 싶어요. 아는 사람이 앤디 워홀 뿐이라니 orz

카라바조 페이퍼에 앤디 워홀 얘기하는 쓸데없는 댓글..

cyrus 2012-08-31 22:32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부터 마로니에북스 시리즈 완독 도전해보려고요. 분량도 많지도 않고 시리즈 중에 제가
관심 있는 화가들이 꽤 있어서 이번 기회에 화가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내일 모레부터 2학기 시작이라는 게 함정이네요.. ㅋㅋㅋ ㅠㅠ
다음 마로니에북스 시리즈는 앤디 워홀을 읽어보겠습니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