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문학전집 1 - 시 서정시학 문학전집 3
백석 지음, 최동호 외 엮음 / 서정시학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백석의 시는 언제나 읽어도 은은하고 구수하고 슬프고 아름답다. 먹고 입고 이야기하고 사랑하는, 외로워하고 그리워하는 우리 모든 삶이 시 속에 정감어린 토속어로 녹아 있다. 그의 시는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며, 시인의 시선은 속속들이 깊으면서도 좁은 곳에 얽매어 있지 않다. 한국의 시인 중에 백석처럼 전통과 현대가 제법 잘 어울릴 정도로 공존하고 있는 시를 쓰는 이가 보기 드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 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p 121) -

 

추운 겨울, 하얀 함박눈이 내릴 때면 뜨끈한 어묵과 사케 그리고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함께 떠올린다. 이국적인 이름의 여인 나타샤 그리고 토속적인 분위기의 흰 당나귀. 전통과 현대가 오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이 시는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반복해서 읽어도 전혀 차갑지도 않으며 쓸쓸하지도 않다. 어느 눈 내리는 밤, 소주를 마시면서 한 청년이 아름다운 나타샤를 기다린다. 그는 소주잔을 앞에 놓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나타샤'는 가난한 화자(백석)로 하여금 낭만적 사랑의 도피행을 꿈꾸게 하는 견고한  뮤즈(Muse)이다.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출출이(뱁새)만 외로이 우는 마가리('오막살이'의 평안 방언)로 숨어 들어가려는 사내의 의지에 나타샤가 적극적인 호응을 한다. 그녀는 사내의 귀에 대고 자신들의 사랑이 세상에 져서 쫓겨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악한 세상을 거부하는 적극적 행위라고 속삭인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화자의 겨울은 춥지도 않으며 곤궁하지도 않다. 나와 나타샤가 만들어 내는 사랑의 열기는 추운 겨울을 더욱 포근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을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 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p 185~186) -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신의주 남쪽 지역에 이는 마을인 유동에 화자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주인 이름이 박시봉

* 삿 : 삿거리,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 쥔을 붙이었다 : 주인을 정하여 세 들었다

* 누긋한 : 메마르지 않고 눅눅한

* 딜옹배기 : 질흙으로 빗은 옹배기(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벌어진 작은 그릇)

* 북덕불 : 짚이나 풀, 나무 부스러기 등이 뒤섞여 엉쿨어진 뭉텅(짚북데기)로 태운 불

* 굴기도 : 구르기도

* 나줏손 : 저녁 무렵

* 바우섶 : 바위 옆

 

 

한문으로 된 제목, 짧지 않은 내용의 문장들. 쉽게 기억되지 않을 이 낯선 제목 탓인지 그 밖의 백석의 대표작들처럼 자주 읽는 편이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시를 끌고 가는 유장한 호흡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살아가야 하는 한 외로운 사내가 흥얼거리듯 고백하는 '슬픔과 어리석음'이 읽을 때마다 나에게는 서러운 노랫소리로 들려온다. 거의 모든 행에서 쉼표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그 쉼표는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처지에 선 자의 안간힘이었을까. 쉼표 하나 하나에 화자의 참을 수 없는 '슬픔이며 어리석음'이 아프게 고여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순간에 화자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행동을 취한다. 상실의 끝판에서 마지막 희망을 찾으려는 화자의 몸짓이다. 감당하기 힘든 자신의 삶을 운명에 귀속시키고 체념한 화자는 다시 고통을 안겨줄지 모르는 외부의 시련에 맞서 자신을 지켜줄 상징적 표상을 설정한다. 그것이 바로 '굳고 정한 갈매나무'다. 어둠 속에 눈을 맞으면서도 의연한 자태를 유지하는 깨끗하고 바른('정한') 갈매나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다. 인간 누구나 상실의 체험과 극복의 과정을 겪는다. 그러기에 이 시는 상실의 고통에 힘겨워할 때 공감을 주고 지친 마음에 위안을 준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중략)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 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 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 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멫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멫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묵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백 석 [여우난곬족](p 52~54) -

 

 

* 여우난곬 : '여우가 자주 나오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유래한 마을이름

* 아배 : '아버지'의 방언

*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 아르간 : 아랫간

* 조아질 : 공기놀이

* 쌈방이 : 주사위와 같은 평북 지방의 놀이 도구

* 바리깨돌림 : '바리깨'는 주발 뚜껑, 이것을 팽이처럼 돌리며 노는 일

* 호박떼기 :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한 줄로 늘어서서 상대 대열의 끝에 붙어 있는 아이호박을 대열로부터 떼어 놓는 놀이

* 제비손이구손이 : 서로 마주 앉아 다리를 엇갈리게 끼우고 손으로 다리를 차례로 세며 노래를 부르는 평안도 지방의 놀이

* 화디 :나무나 놋쇠 같은 것으로 만든 등잔을 얹어놓는 기구

* 사기방등 : 사기로 만든 등잔

* 홍게닭 : 새벽에 자주 우는 붉은 수탉

* 텅납새 : '추녀'의 평안 방언

* 무이징게국 : 징게미민물새우에 무를 썰어 넣은 끓인 국

 

명절날, 여우가 나오는 골짜기의 진외갓집에 일가친척이 한데 모여 소박하고 풍요로운 공동체적 삶을 누리는 모습을 노래한, 참으로 솔직하고 흥겨운 시이다. 먹을 것과 놀이기구가 태부족이던 옛날이었지만 마음만은 풍요롭던 명절이었다. 그 시절은 그랬다. 밤늦도록 온갖 놀이를 벌이며 떠들어도 어른들 눈치 보지 않아 좋았고,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뒤엉겨 자면서도 사뭇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나 여우가 난 골에 여우가 사라졌듯이 가족들 간의 훈훈하고 푸근한 유대감 또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의 풍경이 아쉽게 느껴진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 석 [흰 바람벽이 있어] (p 165~166) -

 

 

* 때글은 : 때가 묻어 검게 된

* 앞대 : 평안도에서 볼 때 남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

* 개포 :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 이즈막하야 : 아슥한 시간이 되어서

* 울력하는 : 힘을 북돋는

* 눈질 : 눈으로 흘끔 보는 것

* 귀해하고 : 귀하게 여기고

* 바구지꽃 : 박꽃

* 짝새 : 뱁새

 

백석이 노래한 바람벽은 추위를 막아주는 단순한 벽이 아니라 삶의 풍파를 막아주는 울타리였다. 그곳은 김이 피어오르는 더운 대구국을 앞에 놓고 지아비와 지어미, 어린 것들이 마주 앉은 정겨운 공간이다. 백석은 그 평화로운 공동체를 그리워했다. 시인에게 흰 바람벽은 조국이며, 사랑하는 여인 자야였으며, 훈김 피어나는 가족의 체취이며, 고향이었다

 

백석의 시 속에서 등장하는 화자는 어렵고 지친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바라보는데, 그렇다고 절망에서 끝나지 않는다. 운명의 짐을 하늘이 부여한 몫으로 선선히 받아들이되 꿋꿋함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조용히 길어 올린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이제는 볼 수 없는, 영영 사라져버린 일상생활의 추억을 발견할 수 있다. 백석의 시 전집은 한 권의 앨범이기도 하다. 시 속에서 묘사된 생활의 풍경 속에서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이웃, 가족들 간의 소박한 정(情)을 발견할 수 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 백석의 시가 독자들, 특히 마음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어주는 '힐링 포엠'(Healing Poem)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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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9-26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이 부분도 좋고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부분도 좋아요.
좋아하는 시예요. 탄생 100주년이라 책이 쏟아지는구나..

되게 영화화하고 싶은 장면의 시들이 많아요.

cyrus 2012-09-27 23:17   좋아요 0 | URL
백석의 시를 읽으면 정말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인상 깊은 장면이 발견할 때가 있어요.
사실 이 시들 이외에도 '여승'이라는 시도 좋아합니다. 좋아한다기보다는
내용이 슬퍼서 백석 시집 읽으면 꼭 빠뜨리지 않고 반복해서 읽어요 ^^
이 책 말고도 다른 역자의 전집도 나왔어요. ㅎㅎㅎ
 
여성 한시 선집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1
강혜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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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중 아리아 '여자의 마음'에 나오는 노랫말 중 일부다. 노래만 들어서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몰라주는 변덕스런 여자를 향한 안타까움과 원망이 담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류의 탄식과 애원으로 들린다.

 

리골레토는 만토바 공작의 꼽추 어릿광대이다. 공작은 난봉꾼, 호색한이고 리골레토는 그 일에 충실한 조력자이지만 자신의 딸 질다가 혹여 그런 몹쓸 꼴을 당할까 전전긍긍이다. 하지만 신분을 숨긴 공작은 이미 질다를 만나 그녀의 사랑을 얻었고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리골레토는 청부업자에게 공작 살해를 요청한다. 공작을 유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청부업자의 요염한 여동생이 등장하고 공작은 그녀를 꼬드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때 바로 이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이 나온다. 리골레토는 질다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공작의 실체를 알리려 그곳에 질다를 데려간다. 숨어서 자신에게 한 공작의 모든 말과 행동이 거짓이었음을 고통스럽게 확인하고도 질다는 공작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딸을 구하고 그 복수를 하려던 리골레토는 죽어 가는 딸을 부둥켜안고 저주하며 울부짖는다.

 

변덕스런 게 여자의 마음이라 알 수 없다는 공작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질다가 숨어 가슴 치며 듣는 아리아가 바로 그 '여자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원작을 보게 된다면 질다의 마음만이 변하기 쉬운 갈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아리아를 부르는 만토바 공작이 극악무도한 플레이보이라는 함정이 있다는 점. 부질없이 흔들리는 쪽은 남성인데도, 도리어 여성을 향해 변덕스럽다며 비난하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여자의 마음은 갈대'는 쉽게 마음이 변하는 여성들을 조롱하는 관용어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대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문 닫기 아쉽기만 하네

 

 

 

 

 

신윤복  「연당여인(蓮塘女人, 연못가의 여인)」 18세기

 

 

 

누군가, 아니 일부 남자들 중에는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이 말을 여자를 가리키는 공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남자의 마음' 역시 갈대인 모양이다. 그리고 여자의 마음은 갈대만 있는 게 아니라 한 사람만을 바라볼 줄 아는 '해바라기'도 있다.『여성 한시 선집』에 수록된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쓴 시를 읽으면 남성 독자들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그리움과 만남이 다만 꿈에 기대니

내 임 찾아갈 때 임은 날 찾아왔나봐.

바라거니, 언젠가 다른 날 밤 꿈에는

같은 때 같이 길 떠나 도중에 만나기를.

 

- 황진이 《상사몽(相思夢)》(p 15) -

 

무엇을 간절히 원하면 그 꿈이라도 꾸게 된다고는 하지만,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은 꿈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듯하다. 당대 사내들을 환장시킨 천하의 황진이(?~?)도 예외가 아니다. 왜 사내들이 그녀의 앞에만 서면 끙끙 앓았는가. 육체적인 사랑은 흔쾌히 동의해도 결코 마음을 내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황진이는 눈먼 기생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매몰차게 버렸다. 너무나 아름답게 피어난 황진이는 가슴 깊이 남자에 대한 불신과 냉담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은 제 모습을 아무리 숨겨도 은은한 향기가 드러내는 법. 황진이도 천상 '여자'였다. 그녀 또한 상사병을 견뎌내기가 힘들었으리라. 자신 스스로 억압한 욕망은 꿈의 의식으로 발현된다고 프로이트가 말했던가.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임을 꿈 속에서조차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 꿈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약하는 마음을 읊조리고 있다. 비록 임과 이별하게 되어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꿈 속에서라도 임의 곁에 있고 싶은 것이다.

 

 

기약하고 어찌 이리 돌아오지 않나요?

뜰에 핀 매화도 지려 하는데.

문득 들려오는 가지 위 까치 소리에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그려봅니다.

 

- 이옥봉 《규원(閨怨)》(p 28) -

 

 

이옥봉(?~?)은 허난설헌(1563~1589)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조명받고 있다. 허난설헌의 기구한 운명 못지 않게 이옥봉의 삶 또한 그리 순탄하지가 않다. 옥봉은 서녀 출신이었다. 출신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결혼 생활이 첩살이 밖에 못함을 비관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을 포기한 채 서울로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문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작문 실력은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마저도 극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김없이 사랑의 콩깍지 귀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옥봉이 사랑했던 사람은 조원(1544~1595)이라는 문신이었다. 옥봉은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의 첩이 되기를 간청한 후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두 번 다시 시를 짓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첩살이는 시작되었고 10년 채 안 된 어느 날 그녀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그 내용인즉, 조원 집안의 산지기가 소도둑으로 몰려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처하자 산지기의 아내가 이옥봉에게 찾아와 눈물로 하소연하며 조원과 각별한 사이였던 파주목사에게 살려줄 것을 부탁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산지기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분명 소도둑을 빙자해서 아전들이 돈을 갈취하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되었다. 옥봉은 곧장 파주목사에게 자신의 장기인 시를 한 수 적어 보내 산지기는 이내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조원은 맹세를 깼다는 이유로 옥봉을 쫓아내고야 말았다. 옥봉을 쫓아낸 조원의 분노 속에는 그녀의 재주가 자신보다 뛰어난 점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생긴 일종의 질투심도 있었다.

 

옥봉은 남편을 향한 구애와 특출한 재능, 둘 다 외면받은 불행한 여자다. 그러나 재회할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여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 반 설레임 반에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한다. 임에 대한 그리움과 재회에 대한 염원의 심정으로. 그러나 옥봉을 더욱 처량하게 만드는 부질없는 일. 처량한 신세와 나날이 깊어져만 가는 고독을 견뎌내기에는 홀몸이 된 옥봉이 견뎌내기에는 힘들었던가 보다. 제목처럼 규방에서 혼자 원망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급기야 자신이 쓴 시를 온몸에 칭칭 감고서는 바다에 뛰어들어 꽃 같은 생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소도둑으로 내몰린 산지기를 구하기 위해 시를 한 수 썼건만, 남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고 바다에 몸을 던져야 했던 그녀의 삶이 애처롭기만 하다.

 

 

봄바람만 공연히 불어오는데

밝은 달은 이미 황혼인 것을.

그대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문 닫기 아쉽기만 하네.

 

 

- 복아 《별주수남미로(別主倅南眉老, 사또 남미로와 헤어지며)》 (p 24)

 

 

기생 신분의 여인들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기생들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대부 사회의 특성상 황진이의 명성 버금가는 정도가 아니라면 기생의 존재는 웃음을 파는 노류장화(路柳墙花)에 불과했다. 황진이도 그러했듯이 글솜씨가 출중한 기생들이 사랑의 원초적인 욕구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詩)였다. 우리에게 생소한, 복아라는 이름의 기생이 쓴 시는 떠나 보내야만 했던 남미로라는 사또를 향한 그리움과 애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문 닫기가 아쉬워하는 마음 뒤에는 슬픈 사랑의 결말이라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진 복아의 외사랑이 더 애달프게 느껴진다. 과연 사또 남미로는 복아를 진정 사랑하고 있었을까?  저 멀리 복아는 홀로 쓸쓸히 이별의 쓸쓸함을 삼키고 있을 때, 남미로는 또 다른 기생들과 어울려 달콤한 술을 삼키고 있지 않았을까..   

 

 

 

 세 명의 자식을 떠나보내야만하는 부모의 피눈물

 

닿을 수 없는 거리는 그리움을 낳고, 메울 수 없는 거리는 외로움을 낳는다. 바라는 보아도 품을 수 없는 것들은 사무침으로 다가온다. 가까이 있다가 멀어지면 그 거리만큼 눈물이 흐른다. 이별의 강은 그래서 마르지 않는다. 이별 중에서도 가장 비통한 것은 생전에 자식을 잃는 것이다. 허난설헌의 《곡자(哭子)》는 창자를 끊는다.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

두 무덤 한 쌍이 마주 보며 솟았네.

쏴쏴 바람은 백양나무에 불고

도깨비불은 무덤에서 반짝인다.

지전을 살라 너의 혼을 부르고

술을 따라 너희 무덤에 붓는다.

나는 아네, 너희 형제의 혼이

밤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을 줄.

배 속에 아이가 있다만

어찌 자라기를 바라랴?

부질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운다.

 

 

- 허난설헌 《곡자(哭子)》(p 72) -

 

 

 

허난설헌은 명문가 집안의 딸로서 부러울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우했다. 남편 김성립은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세 아이를 모두 잃은 것이다. 스물일곱에 생을 마감한 그는 생전에 앞의 글 《곡자》라는 시를 통해 자식 잃은 어미의 비통한 심정을 읊었다. 시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슬픔을 절절히 담고 있다. 세상 누구라도 자식 잃은 비통함은 같겠지만 유일한 희망인 뱃속에 있는 세 번째 아이마저 잃어야했던 그녀의 절망적인 상황을 알고 난 뒤에《곡자》를 읊조리면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부질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운다.'라는 대목에서 그녀의 통곡은 이 세상 모든 부모의 통곡이 된다. 자식 잃은 부모의 비통함은 시대를 초월해 같다.
 

 

 

 케케묵은, 그러나 너무나도 슬픈...

 

조선시대 여성들이 쓴 시 속에 드러난 공통적인 감정들, 특히 연분을 맺은 임에 대한 그리움과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현들이 유교 사회가 여자들에게 강조했던 '삼종칠거(三從七去)'와의 관계성과 밀접한 의식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여성들은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데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부녀자가 시작(詩作)을 한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통념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오늘날에는 심적 고민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 여성들이 힘든 시집살이가 기다리고 있는 '시월드'와 규방 속에 갇혀 억압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풀 수 있는 건 문방사우(文房四友)뿐이었다. 양반 집안이 아닌 이상 평생 문자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이름마저 없는 조선시대의 여성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글로나마 자신의 존재를 알린 소수의 여성들은 정말 축복을 받은 셈이다.『여성 한시 선집』에 수록된 글들은 그저 케케묵은 내용들이 아니다. 사대부 사회로부터 받은 사회적 소외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아야만했던 마음의 상처와 눈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슬픈 문장들이다. 여성을 '갈대'라고 생각하면서 본인이 여성을 무시하면서 '갈대'처럼 행동하는 남성중심적 사고야말로 케케묵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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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9-2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21세기인 현재 한글강좌에 등록한 이들은 모두 60세 이상의 여자들입니다.집에서 학교를 안 보낸 탓이죠.80년대까지만 해도 남녀의 대학진학률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cyrus 2012-09-27 23:21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해도 문자를 쓸 줄 아는 여성들이 극소수인줄 알았습니다. 유명한 여성
문인들이 황진이, 허난설헌, 이옥봉 등이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선집을 보면서 기생에서
사대부 부인까지 생각보다 꽤 많은 여성들이 한시를 썼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기괴물 물고기

 

 

 

 

 

르네 마그리트  『집합적 발명』 1953년

 

 

우리나라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1960년대 초 어느 일간지가 상반신은 물고기, 하반신은 여자의 하체로 이루어진 괴상한 사진을 실었다. 사진은 '기어(奇魚) 발견!'이라는 제목과 함께 해외토픽난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신문에 웃지 못할 정정기사를 났다. '괴상한 물고기가 아니고 사진작업을 통해 조작한 포토 몽타주였다' 1960년대 신문의 인쇄 상태를 감안한다면 그 당시로서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괴상한 사진을 접한 신문 독자들 그리고 마그리트의 그림을 한 순간에 괴물 물고기로 만들어버린 신문기자까지도. 마그리트의 미술이 소개되지 않은 그 당시로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그리트는 서로 다른 개념의 사물이나 풍경을 나란히 놓으면 또 하나의 다른 개념의 기이한 풍경으로 바뀐다는 변증법적 방법론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마그리트의 미술은 상식의 세계를 뒤집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예술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익숙한 감각과 관습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생각하는' 화가이자 철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이성의 프레임에 갇혀버린 무능한 지식인들을 '초현실적'으로 비꼰다. 프랑스 지식층을 통칭해 '카르테지앙(cartésien)'이라고 한다. 이성과 합리성의 표상인 데카르트의 자손이라는 긍지도 되고 꽉 막힌 답답한 친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마그리트는 답답한 이성의 아성을 훨훨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의 곡예'를 선보임으로써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함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도 통쾌한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엉뚱하고, 이상한 철학하기

 

 

 

 

 

튜바를 쓴 마그리트

(1960년 촬영, 사진출처: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p 16)

 

 

 

마그리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이상하다', '낯설다', '엉뚱하다' 등의 반응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그리트 특유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난해한 그림으로도 볼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일반적인 화가들과는 달리 관객들에게 일방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불친절하게(?) 이미지를 통해 생각하고 사유할 것을 제안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그리트의 미술을 '철학'처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철학'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이루어진 총합적 학문이다. 그림으로 표현한 마그리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을 해보자.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철학의 사상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마그리트의 낯선 이미지들 속에 숨겨진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철학을 공부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되고 깊은 사유와 통찰력을 배양할 수 있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미술에서 요구하는 '철학'은 깊은 사유를 통해 이미지를 해석하기 위한 '돋보기'일 뿐이다. 돋보기를 통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미세한 대상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 돋보기는 마그리트 미술의 반을 이루고 있는 사유의 영역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한 부수적인 도구이다. 안 그래도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판에 철학까지 공부한다면 머리만 아파질 수 있다. 오히려 철학과 마그리트, 둘 다 싫어하는 역효과만 생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마그리트의 미술은 기존의 상식과 평범함을 거부하는 실제와 같은 '낯선 세계'를 지향한다. 마그리트가 구축한 이 '낯선 세계' 속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가끔은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엉뚱한 생각도 해봐야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 위에 중절모 대신 커다란 튜바를 쓴 마그리트처럼 직접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실천해봄으로써 그림 속에 숨겨진 그의 의중을 좀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낯설면서도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는 것. 마음만으로는 쉬운 일이지만 몸소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게 어렵다. 일탈적인 사고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상'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끔 조언을 해주는 책이 프랑스의 칼럼니스트 로제 폴 드르와가 쓴 『일상에서 철학하기』다. 이 책에는 총 101가지의 철학 체험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자는 '체험'이라기보다는 '놀이'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철학 고유의 딱딱하고 진지함이 없을 정도로 '철학 도서' 같지 않는 '철학 도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의 이름이나 사상에 대해서 단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위대한 사상을 익히거나 철학자들이 지나온 생각의 길을 가보는 대신에 오로지 일상 속에서 '나'만의 철학을 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오줌 누면서 물 마시기', '공원묘지에서 달려보기', '방 안에서 동물이 되어보기', '소리를 줄인 채 TV 화면 보기', '상상으로 사람 죽이기'(!) 등 얼핏 제목만 보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정말 엉뚱한 철학 체험들이다.

 

그러나 로제 폴 드르와가 제안하고 있는 이 101가지의 철학 놀이들은 마그리트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창의적인 체험들이다. 이 책은 마그리트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낯설게 하기'를 이해하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엉뚱하지만 깊이 있는 철학 체험을 통해 뇌 속에 갇힌 생각을 해방시키고 단조로운 일상을 탈출하여 마그리트의 세계로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다.

 

 

 

 

 철학 체험 #1 : 그림 속으로 빠져들기

 

 

 

 

 

『끝없는 정찰』 1963년

 

 

일반적으로 미술관에 오는 관객들의 역할은 액자 속에 고정된 이미지만 보는 게 전부다. 미술관에 전시된 수많은 그림들 모두 다 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저 도슨트(Dosent)의 설명대로 그림을 이해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와 비슷하게 그림으로 구현된 상상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림들은 늘 당신과 같은 공간 속에 있다. 그리고 운이 좋을 경우, 당신은 갑자기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당신을 둘러싼 일상의 공간에 일종의 균열일 발생하면서 당신을 그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로제 폴 드르와 『일상에서 철학하기』p 228)

 

 

 

아무래도 일상의 공간에 균열을 만들어줄 수 있는 화가라면 단언 마그리트라고 말하고 싶다. 마그리트가 관객을 위해 열어주는 이 '균열'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다. 마그리트의 그림『끝없는 정찰』을 주목해보자.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친숙하게 등장하는 중절모 신사 두 명이 서 있다. 그런데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땅이 아니라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는 하늘 위에 서 있다!  일반적인 관객이라면 그저 재미있는 발상이 돋보이는 그림으로만 볼 것이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이 그림에서 관객들을 위해 은연중에 일상의 현실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균열'을 만들었다. 그림 속 두 명의 중절모 신사들처럼 하얀 구름이 펼쳐진 높고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한 번 들어가보자. 동시에 여러 개의 공간 속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일상적인 사고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마그리트가 만들어 낸 낯선 세계로 가기 위한 균열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철학 체험 #2 : 풍경을 그림처럼 접어보기

 

 

 

 

 

 

『들판으로의 열쇠』 1936년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한 지점의 풍경을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풍경의 '그림'을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접어본다. 아니면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풍경의 장면을 '유리창'으로 생각하고, 과감하게 망치로 그 그림을 깨뜨려보자. 풍경은 산산히 부셔져 파편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풍경의 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풍경을 종이와 유리창으로 만들 수 있는 주관적인 의식과 풍경 그대로의 모습으로 구성된 객관적이면서도 실제인 세계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철학 체험 #3 : 낱말의 의미에 구멍 내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9년

 

 

'낱말의 의미에 구멍을 낸다?', 언뜻 문장만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간단하다. 손에 쥐고 있는 익숙한 사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 사물의 이름을 몇 번 반복해서 불러본다. 시간이 지나면 실체적 대상인 사물과 그것을 뜻했던 낱말이 분리된다. 분리되는 순간,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를 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부르고 있는 사물의 이름은 진정한 실체를 가리고 있는 '낱말'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명제를 구성할 때 그에 상응하는 '그림'을 산출한다. 건축가가 떠올리는 청사진처럼, 언어를 사용하면서 어떤 '대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이름이 뜻을 갖는 것은 이름들 간의 논리적 관계라는 맥락 안에서다. 그래서 사물에 향한 시선과 인식은 본질적인 실체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캔버스에 하나의 파이프를 단순하게 그리고 바로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음으로써 이미지의 묘사 혹은 재현의 모든 과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사고의 혼란이 시작된다. 그림 속 파이프가 단순한 오브제를 나타낼 수도 있고, 잘못된 언어와 결합하면 이미지가 오히려 사물 그 자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마그리트는 회화를 통해 이미지와 단어를 별개로 봤으며 단어는 그 자체를 지칭하는 데만 소용된다고 생각했다. 낱말과 사물의 분리를 통해 일상에서 볼 수 없었던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마그리트처럼 삐딱하게 세상 보기

 

 

 

 

 

 

(왼쪽)『강간』 1934년 

(오른쪽)『빛의 제국』1954년

 

 

잘 짜인 기획들을 망쳐버리고, 예상치 못한 사태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기대를 빗나가게 하라. 순응하지 말고 악착같이 이 사회를 역주행하라. (『일상에서 철학하기』p 96)

 

 

 

『일상에서 철학하기』에 소개된 철학 제험 중에 '광대처럼 삐닥하게 세상 보기'라는 것이 있다. 저자는 아예 대놓고 '미친 놈'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정도 '미친 놈'이 되라는 건 아니다. 반복된 일상이 만들어 낸 고정관념에 벗어나는 일상을 경험해보자는 것이다. 마그리트는 보통 화가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그림에 전통적으로 부여하는 회화의 덕목 즉, 원근법과 명암법, 구도, 색채, 질감 그리고 표현의 테크닉 같은 일반 회화의 범주를 거부했다. 덕분에 사실 같은 초현실적인 그림들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었다. 마그리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의 사상가인 조르주 바타유는 『강간』이라는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흥분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여성의 얼굴에서 여성의 토르소가 있는 마그리트의 발상은 삐딱하게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지 않는 이상 쉽게 나오지 않는다. 여성의 나체를 바라보는 남성 화가와 관람자들의 은근한 욕망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얼굴의 진실을 몸으로 대체해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의 구현으로 완성했다. 마그리트의 대표작 『빛의 제국』에서 나타난 낯과 밤의 동시성은 밝은 낮과 어두운 밤으로 구분짓는 이분법적 허상을 깨뜨리고 있다. 마그리트의 아이코노클라즘(Iconoclasm, 상식 파괴)은 철저히 초현실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장치만으로 이렇게 경이롭고 낯선 이미지를 구성했다.

 

 

 

 

 

 

 

 

 

 

 

 

 

 

 

 

J. 호이징가는 인간의 삶을 유희, 즉 놀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호이징가는 놀이의 조건을 제시했다. 호이징가가 말하는 '놀이

란 자발적 행위, 비일상적인 것,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에 규정되지 않은 공정한 것이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해

 

(중략)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선보기 하루전에 홀딱 삭발을
비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야이야이야이야이야


할일이 쌓였을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안에서 스트립쇼를
야이야이야이야이야

 

모두 원해 어딘가 도망칠 곳을 모두 원해
무언가 색다른 것을 모두 원해 모두 원해

 

 

 - 자우림 '일탈' 중에서 -

 

 

'일탈' 노랫말에 담긴 발산 욕구는 낯설고도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표출 행위다. 굳이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 돈이 들 필요가 없다. 시간과 비용을 최대한 절약할 수 있는 '철학 놀이'를 통해 일상 속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의 족쇄를 풀어 삶을 즐기고 유연하게 볼 수 있는 여유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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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산책 - 소설보다 재미있는 진화의 역사
션 B. 캐럴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Biz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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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창조론자 요구에 항복하다

 

지금은 시들었지만 올해 최근에 과학교과서를 둘러싼 창조론과 진화론이 격돌한 적이 있었다. 기독교계 단체인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교진추)는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종(種)이 아니고 말의 진화 계열은 상상의 산물"이라며 교육과학기술부를 대상으로 현행 과학 검인정교과서 내 관련 자료 삭제를 요청했다. 이에 해당 교과서를 펴낸 출판사 일곱 곳 중 여섯 곳은 시조새 부분을, 세 곳은 말 진화 부분을 각각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교과서에서 진화론이 삭제된 것을 놓고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네이처> 온라인판은 '한국, 창조론자들의 요구에 항복했다'(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독교 창조론자들의 요구에 항복하는 한국 과학계에 대해서 학문적 차원의 우려와 조롱을 표명하는 기사였다. 창조론의 공격 앞에서 적극적인 반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과학계의 태도는 특정 종교의 교리가 교과서에 반영되는데 일조하고 있다. 진화론이 과학교과서에서 퇴출된다는 사실은 교육적 측면에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진화론에 대한 공격은 다윈이 처음으로 진화론을 주장할 때부터 유래되었던 보수적인 기독교 복음주의의 산물이다. 아직까지 완벽하지 못한 진화론의 틈새를 파고들어 교묘하게 음지의 창조론을 대중들의 관심사로 끌고 들어오고 있다.

 

 

 

 진화론으로 향하는 산책로에서 만난 과학자들

 

 

  

 

 

찰스 다윈에게 큰 영감을 준 독일의 박물학자 알렉산더 훔볼트 (왼쪽)

다윈보다 먼저 진화론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레스 (중간)

인류 조상의 화석 발굴에 주력하여 진화론을 증명한 네덜란드의 의사 프랑수아 토머스 뒤부아 (오른쪽)

 

 

 

진화론은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 아닌, 반드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핵심적 이론이다. 진화론은 갑자기 하늘에서 한 사람의 머리로 뚝 떨어져서 나온 게 아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각자의 연구를 통해서 얻은 결론들을 종합해서 하나의 전체적인 이론으로 정립되어진 집합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진화론'이라고 하면 대중들은 한번쯤은 이러한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진화론을 연구하고 증명하고자 했던 과학자들은 연구실에 틀어박혀 생물학 논문을 읽는 사람들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진화론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결정적 원인이 다윈을 포함한 박물학자들의 수많은 모험과 탐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션 B. 캐럴이 쓴 『진화론 산책』을 읽어본다면 진화론이 왜 교과서에서 삭제되어서는 안 되는 과학적 이론인지 확인할 수 있다. 제목만 본다면 대중들에게 진화론을 소개하기 위해서 쓴 개론서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과학 선생님처럼 지루하게 진화론을 강의하듯이 설명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인류의 진화 과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과학자들의 탐험의 여정을 들려줌으로써 진화론이 증명되는 과정을 보다 쉽고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초보 독자들은 제목대로 '산책'하듯이 가볍게 과학자들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원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1  첫 번째 지점, 찰스 다윈

 

진화론으로 향하는 산책로 중에서 아무래도 익숙한 지점은 바로 '찰스 다윈'일 것이다. 다윈이 본격적으로 진화의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는 22세 때 비글 호 항해에 나서기 시작할 때부터다. 다윈이 평생 진화론을 탐구하게 되는 지적 여정의 반은 비글 호 항해 시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애초에 진화를 밝혀내기 위한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배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탐험에 동승할 젊은 과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자마자 모험심을 주체하지 못해 비글 호 탐험을 결심했던 것이다. 영국을 출발해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무인도와 호주를 거치는 긴 항해의 여정이었다. 몸이 약한 다윈은 줄곧 배멀미에 시달리다 잠잠할 때를 틈타 해양 무척추 동물을 연구했다. 배가 상륙하면 열심히 화석과 동식물 표본을 수집했다. 파타고니아 섬에서 운좋게 멸종한 거대 매머드 화석을 발견했고, 안데스 산맥에서는 다른 연대의 화석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지층을 발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큰 성과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핀치의 부리에 주목한 것이었다. 섬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른 핀치의 부리는 훗날 진화론의 토대가 된다. 다윈은 탐험길에서 발굴, 수집한 화석 표본들을 본국에 있는 학자나 생물학회에 보냈다. 이러한 수많은 화석 표본 덕분에 다윈은 진화의 원리를 하나하나씩 증명해나갈 수 있었다.

 

 

 #2  두 번째 지점,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

 

재미있게도 다윈이 비글 호 탐험을 통해 화석을 수집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젊은 영국인도 말레이 제도를 중심으로 여행하면서 동물들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다윈과 함께 진화론을 발견한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다. 그 역사 다윈처럼 진화의 기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데나 여행을 하면서 동물들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8년동안 말레이 제도의 수많은 섬들을 여행하면서 표본 수집과 자연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탐사를 통해 월레스도 다윈과는 다른 접근 방법으로 자연선택과 진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3  찰스 다윈과 월레스, 우연히 만나는 교점

 

비글 호 항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다윈은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본격적으로 진화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탐구의 매듭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세상 앞에서 공표하기를 꺼려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창조론을 단 한 번에 뒤집힐 수 있다는 이단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중과 학회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연구 발표를 망설였던 것이다. 그러자 다윈이 주저하고 있던 사이에 월레스는 말레이 제도 여행을 통해서 얻은 진화에 대한 결론을 한 편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놀랍게도 월레스가 쓴 논문의 내용은 다윈이 연구했던 내용과 일치한 내용이 많았다. 이에 다급해진 다윈은 독자적으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동일한 개념을 착안한 월레스가 진화론을 자신보다 먼저 발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와 함께 공동 저자로 학회에 발표할 것을 제안했다. 이미 전부터 다윈과 교류를 맺고 있으며 순진하고 착한 품성을 지닌 월레스는 다윈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할 획기적인 이론의 발견이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을 못했으며 오히려 관심조차 없었다. 무명의 학자에 불과했던 월레스는 이미 학계로부터 인정받은 다윈으로부터 진화 연구에 대해서 조언을 얻는다거나 그 주제를 중심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월레스에게 다윈이라는 존재는 음지에 가려질뻔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양지로 나오게 해준 '지적 동료'이자 '은인'이었다. 지금은 진화론이라고 하면 월레스보다는 다윈이라는 이 익숙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의 일부는 월레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4  생소하지만 꼭 가봐야 할 지점, 훔볼트와 뒤부아

 

요즘 진화론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다윈과 월레스의 관계가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오랜 세대 걸쳐 이루어진 진화론 탐구의 전체 역사를 감안한다면 일부에 불과하다. 다윈과 월레스가 연구를 위해서 위험한 탐험길에 용기 있게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더 훔볼트의 존재가 있기에 가능했다. 독일 출신의 알렉산더 훔볼트는 지리학과 천문학, 생물학, 광물학, 화학, 해양학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 여러 분야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또한 탐험가였다. 남미와 중앙아시아 곳곳을 누비며 지질과 식생 등을 탐사하고 연구했다. 그 이름은 세계 곳곳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훔볼트는 진화론 탐구에 있어서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훗날 다윈이 박물학자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다윈이 비글 호에 탑승하며 배멀미를 잊기 위해서 읽은 책이 바로 훔볼트가 쓴 여행기였다. 젊은 다윈은 선배 과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 또한 훔볼트에 비견할만한 위대한 성과를 발견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훔볼트는 젊은 후배 과학자들이 생명의 근원을 찾기 위한 모험의 길에 뛰어들 수 있도록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아프리카 현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 사진

 

 

 

훔볼트가 남긴 위대한 과학의 발자취는 다윈과 월레스에 이어 네덜란드의 의사까지도 따르게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젊고 전도유망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29세의 프랑수아 토머스 뒤부아는 자신의 직업을 과감하게 버리고 동인도 제도로 떠났다. 뒤부아 역시 다윈과 월레스의 진화론에 깊은 관심을 가져 다윈이 예견한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화석을 발견하려고 결심했다. 그야말로 인류의 기원에서 '읽어버린 고리'를 찾고자 하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그는 과감하게 가족과 함께 수마트라로 건너가게 되면서 그 곳 일대를 조사하여 화석 발굴에 주력했다. 그러나 열대 지방 특유의 습한 기후와 질병은 엘리트 생활에 익숙한 뒤부아를 괴롭혔다. 그러나 탐구 열정만큼 꺾을 수는 없었다. 수마트라, 자바 일대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탐사한 끝에 뒤부아는 오래된 인류의 화석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뒤부아는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라는 학명을 붙였다. 훗날 자바 원인(Java 猿人) 발견의 단서가 되었는데, 동시대의 다른 화석 인류와 함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고 불리게 된다.

 

     

 

 진화론은 탐구의 열정을 지닌 과학자들의 노고

 

다윈의 등장 이후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 속에서 가려졌던 진화의 비밀이 한꺼풀씩 세상 앞에서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절대적인 논리를 앞세워 세계를 지배하던 종교계의 거센 반발은 채 10년을 가지 못했다. 신학자들의 논리는 30여년에 걸쳐 자연을 관찰하며 얻어낸 과학자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모든 생물에서 진화가 진행 중이라는 대전제는 아직도 유효하다. 아직까지 미국과 유럽내 일각에서는 진화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거나 창조론을 교과서에 추가해야한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종교계마저 진화론에 맞춰 사상을 재무장하고 있다. 진화론이 위대한 것은 하나의 이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최종 이론'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 탄생의 과정은 생명의 기원을 발견하고자 위험이 도사리는 탐험을 마다하지 않은 과학자들의 노고이다.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이들의 수많은 탐구의 열정들을 생각한다면 진화론이 창조론에 밀려 교과서에서 퇴출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허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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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9-2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찰스와 엠마'라는 다윈의 러브 스토리 쟁여놓고 있는데...
이 리뷰를 보니, 혹~하는 걸요.
날 잡아 트라이투 해봐야겠어요, ㅋ~.
잘 지내시죠?^^

cyrus 2012-09-21 17:1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나무꾼님.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 학교 다니고 있어요. ^^
이 책 어렵지 않습니다. 진화론이 발견되는 과정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태풍이 지나고 난 뒤부터 어느 새 가을 날씨가
찾아왔네요. 아침 저녁이 쌀쌀하니 감기 조심하세요 ^^

노이에자이트 2012-09-2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훔볼트를 소개하니 반갑습니다.제가 좋아하는 남자입니다.탐험가와 과학자와 문필가의 소질을 모두 가지고 있죠.훔볼트 이름을 딴 해류와 펭귄도 있죠.

cyrus 2012-09-24 16:26   좋아요 0 | URL
저도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옛날에 나온 것 중에
<훔볼트의 선물>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된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자주 다니던 동네 도서관에
인적 드문 지리학 분야 서가에 꽂혀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 책이 나온지 오래되서 그런지
요즘에는 잘 보이지 않더군요.
 

 

 

 

 

 

 

 

 

 

 

 

 

 

 

 

 

 

 

2주 전 주말에 자원봉사활동 차 자살예방 전문 상담기관인 한국 생명의 전화가 주최하는 '생명사랑 밤길 걷기' 행사에 참가했다. 오후 6시에 대구 스타디움을 출발하여 수성못을 거쳐 다시 되돌아오는 코스를 해 뜨는 새벽까지 걷는 것이다. 이 때 걸었던 코스의 길이는 총 34km이다. 군대 시절 때 했던 유격행군에 비하면 34km 걷는다는 게 쉽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34km의 거리가 꽤 길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긴 거리를 완주했다는 기쁨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지만 장기간 걷기에서 비롯되는 육체적 고통과 피로감 또한 감당해야 한다.

 

아마도 인간의 삶 절반은 걷기가 많이 차지할 것이다. 살다보면 가끔 정처 없이 걷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정처 없음은 목적지가 없다는 뜻이므로 또한 쓸쓸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왕 걷는 것이라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쓸쓸하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을 안고 당도해야 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길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 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 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더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안 보이는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찌 우리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저번 밤길 걷기를 했던 것도 있었지만 이성부 시인의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사실은 결국 걷는다는 행위는 경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들보다 빨리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면 승리하는 경보를 제외하고 태초에 인류가 처음으로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했던 오랜 역사를 통틀어 걷기의 행위는 남들과의 겨룸도 아니고 자신을 이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빨리 가고자 하면 걷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목표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달리는 것뿐이다. 오를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 걸으면 보인다. 미세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이, 걷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걸음으로써 볼 수 있다. 그래서 걷는 것이 행복하다.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걷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것, 고단한 마음을 잠시만 잊고 작은 것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그것이 걷는 자의 행복이다. 걷기의 행복을 느끼게 된다면 길게만 느껴지는 거리도 어느새 축지법 쓰듯이 완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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