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삽화, 귀스타브 도레, 1861년

 

 

 

책이여, 그대가 신중한 태도로
훌륭한 사람들 곁에 다가간다면
세상 물정 모르면서 우쭐대는 사람은
그대의 생각을 알지 못해 감히 말을 건네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의 손에 넘어가
매우 조급하게 다루어진다면
비록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짐짓 꾸밀지라도

그대는 이내 알게 될 것이오.
그가 정곡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p 18)

 

 

 

현실의 정곡을 너무 벗어나면 허상과 광기만 남을 뿐이다. 기사도 소설에 탐독하다가 자신을 기사라고 착각하는 라만차의 늙은 귀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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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영화 '타워'를 극장에서 보면서 훌쩍 거리는 몇몇 사람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궁금한 점. 과연 '타워'를 보면서 눈물 흘렸던 사람들 중에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채 순직한 소방관들의 뉴스에 진정 눈물을 흘리는 이가 과연 몇 명이 있을까? 작년에 일간지 오피니언에 실렸던 내 아는 동생이 쓴 칼럼의 내용이 생각난다.

 

 

 

눈물 흘릴 때만 격려하지 말라  

(윤석현 /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3학년)

# “소방관은 보험을 제대로 드는 것도 어렵데이.” 의무 소방원으로 배치받은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한 소방관이 말했다. 정작 보험에 가입되더라도 혜택의 제한이 많거나 보험료가 비싼 경우가 허다하단다. “하긴 하루에도 몇 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직업인데 누가 보험을 받아주겠노.” 보험도 들기 힘들다는 그의 말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 모든 국민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올림픽 참가 선수를 응원하고 있던 지난 1일 오후 10시. 50대 소방관이 화재가 난 부산 신발 공장에서 추락사했다. 그는 3남매의 자랑스러운 아버지이자 80대 노모를 모시던 효자였다. "이번 여름에는 꼭 가족 여행 가자”는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혹시라도 대피하지 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공장으로 들어간 영웅은 돌아나오지 못했다.

올해만 벌써 두 명의 소방관이 순직했다. 의무소방원으로서 현장에서 소방관을 보조하는 필자에게 이런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남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아프다. 또한 이런 일이 짤막한 기사 한 줄로 소개되고, 대중들의 관심이 반짝 일다가 사라지는 것 같아 더욱 슬프다.

현장에서 바라본 소방관의 복지 실태는 밖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심각했다. 많은 소방관이 목숨을 걸고 매일 화재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도 이들을 위한 위험수당은 고작 월 5만원에 불과하다. 이들의 열악한 상황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유일한 기회는 동료 소방관이 순직했을 때 잠시뿐이다.

대선을 앞두고 수많은 복지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국민을 보호하는 ‘소방’, 그리고 그 책임을 수행하는 ‘소방관’들을 위한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소방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낮기에 정치권에서도 따로 정책을 세우지 않는 듯하다.

얼마 전 이기환 소방방재청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방공무원 예산 2조4000억원 가운데 1.8%만이 중앙정부의 지원”이라고 말했다. 지방자치 수준에선 한계가 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소방 분야에 대한 장기적인 예산 지원과 소방관에 대한 복지 확대가 시급하다.

어디선가 생명을 바쳐 불을 끄는 소방관도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아들이다. 그들의 무거운 방화복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는 방법은 잠시의 박수가 아니다. 더 이상 눈물 흘릴 때만 격려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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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2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끔합니다...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네요.

cyrus 2013-02-03 21:50   좋아요 0 | URL
이진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고 계시죠? ^^ 저도 아는 동생이 쓴 글 읽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oren 2013-01-29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타워' 보면서 알바하던 대학생이 뉴스 전광판으로 '청소부 엄마'를 떠올리던 장면에서 눈물을 왈칵 흘렸더랬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방관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이 많이 쓰이더군요. 제 고향 친구들 가운데 특히나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바로 119 구조대 소속이었거든요. 그 친구는 대구농고를 졸업하자말자 공수부대에서 10년 가까이 직업군인 생활을 마친 뒤 다시 소방공무원으로 20 년쯤 근무했답니다. 오랫동안 '일이 너무 힘들고 위험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친구는 정말 무사히 안전하게 희망퇴직을 했어요. 그리고 꿈에 그리던 '귀농'을 해서 지금은 '고향'에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http://blog.aladin.co.kr/oren/5903921

그 친구가 서울에서 근무할 때 참 자주 술잔도 나누고 전화통화도 자주 했는데, 걸핏하면 전화 통화 중에도 느닷없이 사이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출동이다'를 외치며 전화를 끊곤 현장으로 달려가곤 했어요. 저도 그 친구 덕분에 소방서에도 몇번 가보고 다른 소방관들과 술잔을 나눈 적도 가끔씩 있었답니다.

저는 그래서 '타워' 속에 등장하는 소방관들이 제가 듣고 알아 왔던 '실제'보다 너무 '영화적'이어서 오히려 몰입이 덜 되더라구요.


cyrus 2013-02-03 21:5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영화 보면서 주연보다는 조연에 눈이 가더군요. 그리고 소방관 관련 칼럼을 쓴 동생이 지금 의무소방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로부터 소방관의 실제 모습을 듣고 영화를 보고나니 오렌님처럼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죽음이란 무엇인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또는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고 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

 

 

 

 

 Memento mori,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

 

 

 

장 프랑수아 밀레  『죽음과 나무꾼』 1856년

 

 

커다란 막대기 다발을 갖고 노인이 먼 거리를 여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몹시 지쳐 있음을 깨닫고, 그 막대기 다발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노인은 죽음의 신에게, 자기를 불행한 생활로부터 제발 해방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의 부탁에 죽음의 신은 바로 찾아와서, 노인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제발, 제가 짐을 다시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솝 우화' 중에서)

 

사람은 종종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남들 다 죽는데 나도 그때 죽으면 되는 것이지,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가는 거지.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죽기 전까지만 통용될 뿐이다. 죽음이 임박하면 그런 생각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누구나 편안히 잠드는 것처럼 죽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 외모가 다르듯 죽어가는 모습 역시 다르다. 천차만별의 죽음을 보며 '잘 살아야 잘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많은 죽음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챙기게 된다. '오늘 하루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가'를 살피며 살게 된다. 진정으로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의 근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정의, 생각해 보셨습니까?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죽음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워했지 죽음 단어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서 살아 왔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 이 문제는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극대화되고 분초를 다투어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에 와서도 이 문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예일대에서 '죽음'을 주제로 교양철학 강좌를 진행한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의 정의를 두 가지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물리주의자 시선으로 바라보는 죽음(물리적 죽음)과 육체의 관점으로 보는 죽음(육체적 죽음). 물리주의자는 육체가 P 기능(Person function, 인지 기능)을 유지하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고, 기능이 멈추면 죽은 것이다. 육체적 죽음은 말 그대로 B 기능(Body function, 신체 기능)이 멈추면 죽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신체와 인격(마음, 정신 등 포함) 두 가지 요소로 죽음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죽음의 시점을 정의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 않다.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환자에게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는가. 식물인간은 대뇌의 손상으로 의식과 운동 기능이 상실되었으나 호흡과 소화, 흡수 따위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다. 식물인간은 P 기능이 상실되었고 B 기능만 남아 있다. P 기능이 상실되었다고 해서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P 기능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다시 기능을 재개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죽은 게 아니다. 죽음의 정의를 생각한다는 건 무척 골치 아픈 일이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죽어 있는 '상태'가 어떤건지 알려고 하는 과정이다.  

 

 

 

 죽음의 '사'가지를 피하는 방법

 

인간이 죽으면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P 기능과 B 기능만 멈추는 것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생의 시간도 멈춰버린다. 살아있다면 누릴 수 있는 삶의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린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나쁘게 보는 근본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죽음은 박탈의 성격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필연성', 얼마나 살지 모른다는 '가변성',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성',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편재성'이다. '죽음'의 이미지에 걸맞게 '사'(死, 숫자 四)가지다.

 

그러나 케이건 교수는 죽음의 네 가지 부정적인 특성을 근거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관점을 역설한다. 스피노자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죽음이란 무엇인가』p 377)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덜 부정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썩 기쁘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생의 한정성에 얽매어 여생을 살아간다는 건 무척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몇 살까지 살지 모른다고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쓸데없는 '기우'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음의 신의 손길은 우리 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자. 만약에 사람마다 태어나면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죽는 날을 알면서 살아간다면 일상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죽는 날까지 주어진 시간동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초점을 맞추며넛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에 완벽하게 집중할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선고 받은 이후부터 연구에 매진했다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처럼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Memento mori

 

죽음은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있을지 몰라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삶이 아닌 내 인생의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부질없이 허망한 일들로 자신의 삶을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은 생방송이다. 사람들은 텅 빈 자신의 삶 앞에 죽음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그제야 후회와 아쉬움에 절망한다. 이렇게 가슴 치는 일보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자신의 삶 속에서 늘 죽음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의미 있는 삶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게 될 것이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생의 아름다운 졸업이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한다면 죽음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덜어내고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곧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의 미래인 죽음에 대해 성찰하기는 꺼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미래의 사건으로 여기고 현재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들을 "죽음 앞에서의 부단한 도피"를 하는 자들이라고 꼬집었다. 우리는 죽음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는가. 오늘 밤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기쁨으로 반길 준비가 돼 있는가. 이제는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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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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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링하니까 청춘이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한 청년이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며 ‘앞으로 연애와 결혼도 포기하기로 했다’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기도 비정규직인데 여자 친구도 백수라서 만나면 만날수록 서로 불안한 상황이 더 증폭되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젊은이들이 이 같은 가슴 아픈 고민을 안고 있는데 이들을 ‘삼포(三抛)세대’라고 한다.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들이란 의미인데 대체적인 의미는 연애, 결혼, 출산을 지칭한다. 제대로 된 취업을 할 수 없고 취업을 한다고 해도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니 버거운 생활비용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도 포기 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세대들이란 말이다. 몇 년 전 고용 불안으로 인해 ‘88만원 세대’란 말이 나오더니 이제는 청년 세대들로부터 가족 구성에 필요한 통상적 세 단계를 포기한다는 ‘삼포세대’란 말이 나오니 우울하고 또 우려된다. 불안과 스트레스, 우울증 등 정신적인 이유로 자살을 생각해본 20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가 우리 생활에 흔하게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2012년 한 해 가장 많이 이용된 도서 80권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지난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본 책이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었다. 2011년에 1위를 지킨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2위에 머물렀다. 이와 같은 결과를 통해 2012년의 화두가 ‘힐링’과 ‘청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가 들려주는 힐링법

 

치유의 바람은 새로운 흐름의 전주곡이다. 힐링이 인문학 연구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작년 한국연구재단 주최 ‘2012년 인문주간’의 주제가 ‘치유의 인문학’이다. ‘치유의 인문학’, ‘인문 치료’, ‘철학상담치료’ 등 이름은 조금씩 달라도 지향하는 바는 같다. 인간성 상실과 내면의 상처로 인한 ‘마음의 병’ 혹은 ‘문화적 질병’의 치유가 목표다. 인간 연구가 본령인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넓히는 일이다. 실용적 가치가 적다는 이유로 후순위로 밀렸던 인문 정신이 삶의 위기를 계기로 하여 삶의 가치를 회복해 줄 근원적 자원으로 활용되는 셈이다.

 

'청춘', '힐링', '인문학'. 이 세 가지 화두를 적절하게 버무린 책이 있다면 바로 <눈물닦고 스피노자>이다. 이 책은 형식이 독특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괴로워하는 20대 청년, 철수가 우연히 고시원 화장실에서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를 만나 매일 밤 철학 상담을 한다. 진짜 철학자가 매일 밤에 '철학 상담치료'를 해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저술한 책 <에티카>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여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다양한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요즘 제가 쓰고 있는 《에티카》 내용 중 <2부.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에서 정리 19를 보면 ‘인간 정신은 오직 신체가 받는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만 인간 신체 자체를 인식하며 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p 29~30)

 

젊은 세대들은 사회가 규정한 현실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안정적인 근로의 직장에만 들어가면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고 돈만 있다면 잘 살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게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대기업, 공기업이나 공무원과 같은 안정직 취업을 선호하고 많은 시간에 취업 준비에 투자한다. 그러나 구직자들이 선호하는 대기업과 공기업 등 괜찮은 일자리는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식 경쟁의 장이 된지 오래다. 젊은 세대는 승자독식이 굳어진 살벌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젊은 세대의 마음은 점점 지쳐가고 자조적으로 변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신체 변용을 통해서 낯선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욕망의 흐름에 맡긴다면 불안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봤다. 변용이란 신체가 외부의 물체를 만나 딱딱하거나 부드러워지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하자면 타인의 입장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동안 인정하기 못했던 자신에 대한 존재의 불안함을 떨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체 변용을 통해서 나 자신의 욕망에 맡겨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현대사회의 새로운 불치병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울증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단순히 마음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거대한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억압된 인간 관계망에서 우울증의 원인을 찾는다. 외부와의 관계에 예속되면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발현할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표출하지지 못한다면 슬픔의 감정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울증인 것이다. 욕망은 곧 자신이 사랑하는 감정을 표상하여 실행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그러기 우리 스스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망을 재배치해야 한다. 자신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관계망으로.

 

“관계 자체가 예속과 복종의 관계처럼 아예 사랑과 욕망의 힘을 좌절시키는 방향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언제까지고 슬픔의 관계에만 머물러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관계를 기쁨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아직까지 기억에 없고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색다른 사랑의 실천에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미지의 것을 향한 욕망의 흐름과 같은 것입니다. 둘 사이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새로운 상상이 떠오르고, 색다른 무엇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기쁨의 관계를 만들어보세요. 창발적인 관계망은 가능합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욕망이 증대되고 촉발되는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61~62)

 

작년에 청춘들이 ‘힐링’에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과 좌절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힐링하는 방법을 명사나 책을 통해서만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힐링을 남들이 하는 걸 따라 맞출 필요 없다. 우리 삶에 작은 변화를 주는 힐링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사람을 만나 기쁨의 관계를 구축하는 삶의 과정도 힐링이 될 수 있다.

 

 

 

 긍정의 힘을 보여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명제를 예로 들면서 완벽한 인간의 이성적 사유와 주체성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명제는 최종 확인을 위해서는 수많은 '나'가 있어야 하고 그 수많은 '나' 중에 또 주체가 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나'라는 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작동시켜주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정신적 상실을 망각으로 바꾸는 힐링만으로는 마음의 불치병을 완전히 치유하기가 어렵다. 상실을 자기 안에 수락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자기를 변용해내는 방식을 택하며 자기 세계를 재배치해야 한다. 자기를 삶의 주인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 필요하다.

 

스피노자의 힐링 철학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감정적 고통의 원인을 아는 것이며, 하나는 다른 감정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감정적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이보다 더 강력한 긍정적인 감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끈질기게 커지며, 괴로움에 괴로움을 더할 뿐이다. 우리 스스로 긍정적인 경험을 간직하고 자신의 정서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불행한 삶을 살다간 바루흐(Baruch, '축복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스피노자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긍정의 힘을 외면한 채 막연하게 먼 곳에서만 힐링을 찾으려고 하는 현대인들을 경고하는 듯하다. 나를 위한 셀프 힐링은 아깝지 않다. 감정적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축복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것이 바로 긍정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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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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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산다는 건 그런게 아니겠니
원하는 데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것


 

- 여행스케치 '산다는 건 그렇게 아니겠니' 중에서 -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1995년에 미래학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는 '디지털화하지 않으면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디지털 혁명의 부정적 측면은 디지털 세상이 갖는 강력한 특징 때문에 부각되지 못할 것이라며 디지털 낙관론을 펼쳤다. 아날로그가 모든 영역에서 디지털화하는 세상을 지켜보면서 그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느낀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스콧 피츠제럴드가 활약하던 1920년대를 '황금시대'를 동경한다. 길이 꿈꾸는 1920년대를 사는 아드리아나는 고갱과 드가가 살았던 1890년대를 '황금시대'로 꼽는다. 고갱과 드가는 한술 더 떠 르네상스 시대를 '황금시대'로 부르며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상상력이 죽은 시대'라고 한탄한다. 저마다 동경하는 '황금시대'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다. 모든 '황금시대'는 과거를 조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에 등장하는 세스는 과거의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는 직업 만화가이면서도 과거에 발행되었던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는 만화를 수집하는 외골수다. 그는 우연히 잡지 '뉴요커'에 실린 '캘로'라는 필명이 그린 만화를 알게 된다. 세스는 만화가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 어렸을 때 살았던 스트라스로이로 향하게 된다. 시간이 멈춘듯한 스트라스로이에서 세스는 잊고 있었던 과거 일상의 흔적을 발견한다.

 

 

 

 

 

 

하지만 만화 속 주인공의 성격에 대해서 독자들마다 호불호가 엇갈릴 것이다. 과거가 현재보다 낫고 현재는 좋았던 과거를 파괴하고 있는 슬픈 현실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비관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황금시대'를 추억하는 심리를 한 꺼풀 벗겨보면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나쁜 일은 빨리 잊고 좋은 기억만을 남기려는 경향이 강하면 '무드셀라 증후군'에 빠질 수도 있다.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복고 열풍을 빠진 현대인이나 만화 속 세스의 모습은 각박하고 치열한 현실에 기댈 곳 없는 상황과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오는 불안감의 표상이다. 불안정성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황금시대'에 열광하는 모양새다.

 

그래도 조금은 슬프다. 우리의 감성과 정서는 여전히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데 주변은 모두 디지털로 전환되고 있는 것 같아서다. 과거의 즐거웠던 일상을 담은 추억의 스냅사진은 언젠가 희미해질 기록이지만 추억은 더 진하게 남지 않겠는가.

 

약간의 소음이 음악의 일부인양 느껴지는 LP판과 소통이 있었던 아날로그 TV가 더 정겹고, 문자나 카톡보다는 학창시절 연애편지처럼 기다림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던 편지의 애절함도 그립다. 그렇다고 아날로그 생활만을 고집하며 살 수는 없다.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 감성을 불어넣어,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디지털 세상에서 행복과 동행할 수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 되지 않을까.

 

 

 

 

 

 

세스의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인생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당신의 인생이면서 또 나의 인생이기도 한 이야기. 어쩌면 무심하고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빛나는 이야기들. 아주 미국적인 것도 같지만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사들이 들어 있다.

 

인생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인생은 정해진 순서대로 예측가능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정해져있고, 예측가능한 대로만 된다면, 인생 살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필연적으로 불안감을 만들어 내고, 이 불안감은 때로는 현재를 괴롭힌다. 인간은 늘 불안감을 갖고 살아왔고, 이러한 뿌리 깊은 불안감으로 인해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을 찾고자 애써왔다.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을 찾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과거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확실성을 찾지 못하면 현실의 삶이 고달프면 과거를 동경하는 게 사람의 심리인 것 같다. '그래도 그 때가 좋았지'라는 과거 지향형의 향수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담긴다. 옛 향수를 안주 삼아 일상의 지친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자 하는 데는 현실이 고단하기 때문일 게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부정은 지금보다 별반 좋을 것도 없는 과거에서 위안을 삼으려는 경향을 커지게 한다.

 

사실 잘 산다는 것은 상대성이 있다. 세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행복의 가치도 다르고 만족의 크기도 저 마다 다르다. 결과가 과정을 대신해준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하고, 무엇보다도 인생이란 본디 불확실한 일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오늘의 행복을 놓치는 우를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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