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4

 

                                   김지하

 

 

아직 살아 있으니

고맙다.

 

하루 세 끼

밥 먹을 수 있으니

고맙다.

 

새봄이 와

꽃 볼 수 있으니

더욱 고맙다.

 

마음 차분해

우주를 껴안고

 

나무 밑에 서면

어디선가

생명 부서지는 소리

새들 울부짖는 소리.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4월이 잔인한 달이라... 아무래도 낯설고, 어색하고, 동의하기 어려운 이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올해도 반쪽을 찾지 못한 모태솔로에게 4월은 정말 잔인한 계절이기는 합니다.

 

4월은 꽃 피고, 새가 지저귀는 생명의 계절, 축복의 계절입니다. 지금 온 천지가 꽃의 물결이고, 연둣빛 생명이 넘실거리는 봄의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김지하 시인은 새봄의 정기를 만끽할 수 있는 삶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춘심(春心)에 몸과 마음을 차분히 맡겨 보면서 삶의 여유를 가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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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라지지 마 - 노모, 그 2년의 기록
한설희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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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만큼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부르게 되는, 항상 부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부르지 못한 것만 같은 그 이름, 엄마. 엄마의 모습을 자신만의 피사체로 담아낸 사진집 <엄마 사라지지 마>는 예순아홉, 노년에 접어든 주부 사진가가 처음으로 사진기로 표현하는 시각적 사모곡이자, 내밀한 고백이다. 2010년부터 2년간 매일 경기도 용인 자신의 집에서 서울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죽음을 앞둔 어머니의 하루하루를 카메라에 담았다. 하얀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할 정도로 노년으로 접어든 자녀는 이미 백발이 성성한 93세의 노모를 바라볼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진가는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엄마 바라보기’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긴 시간, 한 번도 그녀에 대한 진솔한 마음을 드러낸 적은 없다. ‘엄마, 사라지지 마.’



사진가는 ‘엄마’를 이렇게 정의한다. 「주름 골이 깊고 검버섯이 핀 여자. / 흐트러진 백발과 초점 없는 눈으로 침묵하는 여자. / 고단한 세월이 옹이처럼 얼굴에 박힌 여자. / 혼자 누워 있거나 밥을 먹는 여자.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자.」(p 33)

그것은 사진가 자신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 시대 모든 어머니들이 살아낸 모성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길고 긴 산고를 겪고, 제 젖을 물리고, 제 살을 떼어주며 우리를 키워낸 엄마. 그 촌스럽고 어리석고 못난 이름, 한 남자만을 평생 바라보기로 약속한 순간 ‘여자’이기를 포기해버린 이름. 그래서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이다. 카메라 셔터의 손끝에서 더욱 미련하고 촌스럽게, 그래서 더욱 아프게 그려진다.



어두컴컴한 바다 깊숙이 사는 심해어는 햇빛이 들어오는 해수면 위로 오르면 오래 살지 못한 채 죽고 만다. 엄마는 빛이 전혀 투과되지 않은 고독의 심연 속에서 산 심해어다. 사진가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채 살았던 ‘엄마’를 세상의 빛이 비치는 양지로 머물도록 소리 내어 불러본다.

「엄마, 이거 봐요. 빛이 이렇게 좋아요. / 누가 밖에서 보면 어떡하니. / 구십 넘은 할머니를 누가 훔쳐본다고 그래요.」(p 55)




「저 하늘에 해와 달은 변함없이 비치지만 / 사랑하는 우리 엄마 어느 곳에 계시나요. / 비 옵니다. 비 옵니다.....」(p 79)

살아가면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하라’는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잘 와 닿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잘 알지만, 어쩐지 막연하게 엄마와 나는 헤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는 착각에 빠져 살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종종 ‘엄마’에 관한 것은 ‘2순위’가 되곤 한다. ‘다음에 해도 되니까, 나중에 봐도 되니까’라는 말로 엄마보다는 연인을, 친구를, 그리고 나 자신을 앞세우고 살지는 않았던가. 그래도 언제나 이해해줄 것만 같고, 언제나 기다려줄 것만 같은 사람도 바로 엄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스마트폰으로 향할수록 정작 가까이에 있는 것을 놓칠 때가 있다. 바로 엄마다. 혼자 있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 시간은 물 흐르듯이 지나간다. 그러나 엄마 곁에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공중으로 금방 증발되는 아세톤처럼 줄어든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같이 정말 소중하면서도 가까운 존재의 부재를 너무 뒤늦게 깨달아버린다.

「늦든 빠르든 우리는 언젠가 고아가 된다. / 내 머리 위를 받치고 있던 커다란 우산이 순식간에 거두어지고. /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비와 눈을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것. / 그것이 부모를 잃는 경험이 아닐까.」(p 20)




한평생, 무겁고 가혹한 삶에 억눌려 살아온 사람이 명줄만은 질기게 길어 아흔 해를 사는 엄마. 그 긴 세월을 자식한테 행여 누가 될까 뒷전에서 숨죽여 바라보며 가슴 속 응어리마저 삭히며 살아온 그녀는 사람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쓸쓸한 무인도가 되었다. 그 모습이야말로 지은 죄도 없는데 평생 자신을 희생하며 우리를 키워낸 우리들의 엄마일지 모른다.




이 사진집을 읽는 도중에 문득, 엄마 생각이 나면 가슴이 뻥 뚫린 듯 명치끝이 아려왔다. 분명 내 옆에 있는데도 말이다. 엄마의 따스한 감촉을 잃은 지 어언 10여 년이 지났다. 이제야 엄마와 함께 보낸 하루하루가 ‘행복’이었음을 깨닫는다. 「엄마가 거기에 있다는 것, / 그 사실이 새삼 고맙다.」(p 60) 사진가의 솔직한 고백은, 사실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마음껏 표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엄마가 계신 지금, 미루지 말고 함께 행복을 나눠보도록 아들인 내가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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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신경림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스스로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
왜 스스로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만 건네주는 것일까
깨고 나면 나는 더욱 억울해진다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오늘 자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읽은 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억울해하면서 사는 거 같다. 무언가 손해를 본 것 같고 누군가한테 당한 거 같기도 하고... 그러나 조금만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보면 어떨까. 내가 조금 손해를 봐서 다른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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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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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미국에 불기 시작한 '정부재창조' 바람 

 

 

 

 

 

 

미국 연방정부의 구조는 198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환경의 변화로 과거와는 다른 관점에서 주된 초점으로 정부 운용의 변화를 시도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신보수주의의 물결로 인해, 미국 연방정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정부 기능의 민영화, 정부지출 삭감, 지방정부 간 관계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클린턴-고어 행정부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클린턴-고어 행정부는 출범 초기인 1993년 범정부적인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NPR : National Performance Review)을 마련, 관리통제 위주의 업무 직위를 줄이고 능률향상을 통한 ‘일 잘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Works better and Costs less) 정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앨 고어의 MPR은1998년 두남이라는 출판사에서 '기업형 정부 재창조'라는 제목으로 번역 발간되었다) 이를 위해 1993년 NPR 보고서를 통해 5년간 연방공무원 25만개 직위를 폐지를 권고했다. 이후 대대적인 인원감축에 들어가 공무원의 수를 클린턴 행정부 출범 초기의 218만 8천 647명에서 집권 말기인 2000년 12월에는 176만 1천 376명으로 42만 7천여명, 19%를 줄였다.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는 백악관 조직도 대대적으로 감축을 시도했다. 과거 30년간 600여명으로 유지돼오던 백악관 인력을 25% 감축, 500명 선으로 줄였다.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이러한 개혁프로그램을 주도하기 위해 신설한 정부혁신사업단을 직접 이끌면서 정부실적 및 결과에 관한 법과 정보기술개혁법 등을 제정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앨 고어가 주도한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의 중요한 의의는 인사행정 개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규제 완화, 민영화를 통한 정부 부문의 독점성을 파괴함으로써 시민을 위한 공공 서비스 공급자의 역할로 전환할 것을 강조한다. 1992년에 집필한 오스본과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기업가적 정신이 공공 부문을 어떻게 전환시키는가>는 고어의 NPR 실행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오스본과 게블러는 정부를 기존의 행정 관료제적 접근이 아닌 기업가적 접근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 기업가적 정부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중점적으로 축약할 수 있다. ① 정부는 과거처럼 노를 젓기보다는 방향을 잡아 주어야(Steering) 한다. ② 정부의 활동으로서 서비스의 독점보다는 서비스 제공에 경쟁 개념을 도입한다. 시장 지향적 정부로 변모해야 한다. ③ 고객(국민)이 원하는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낭비를 줄이고 고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오스본과 게블러가 주창한 ‘정부재창조론’은 이듬해 클린턴-고어 행정부의 기업가 정신을 통한 정부혁신을 주도하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업가적 정부가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오스본 &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그리고 앨 고어의 정부혁신은 경영에서 볼 수 있는 ‘다운사이징’(Downsizing)과 비슷하다. 다운사이징은 조직을 야위게 만드는 경영 기법을 말하는 것으로, 슬림화를 통해 능률의 증진을 추구한다. 기업체의 관료화에 따른 불필요한 낭비조직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구를 단순화하여 의사소통을 원활화하여 신속한 의사결정을 도모할 수 있다. 오스본 & 게블러가 주장한 새로운 정부 형태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사회를 위해 더 많은 정책을 담당하며 제도를 움직이는 정부의 역할은 무조건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더 많은 공공 서비스 권한을 이양하는 쪽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시민 스스로 지역사회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둘 수 있으며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공공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촉진한다. 이는 곧 참여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행정학 전공에서 배우고 있는 정부재창조론의 장점이다. 공무원 시험 문제에도 출제될 정도로 정부재창조론은 지금까지도 행정 이론의 발달에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는 정부재창조론 도입에 비롯되는 장점을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7년에 행정학 전공 기초 강의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전에 이미 미국의 정부재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 나왔을 줄이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 책을 읽게 될 줄이야. 그 책은 바로 매튜 A.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가 함께 쓴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두 정치학자는 시민의 정치 참여를 중요시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마저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 때문에 ‘다운사이징’되었다고 비판한다. 기업가적 정부의 역할이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는 오스본의 주장과 상반되는 입장이다.

 

 

 

 시민의 정치 역할이 축소되는 개인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다수 시민의 의사에 배치되는 통치행위를 할 때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통치자의 임기를 매우 짧게 하고, 추첨의 방법으로 선발과 교체를 빈번하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통치자의 전횡 기회를 최대한 억제하려 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통치자의 책임은 사회계약론으로 설명되었다. 통치자와 시민 사이의 신뢰가 깨지면 시민은 저항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시민 간 계약의 실증적 기초도 없고, 통치자에 대한 시민의 선출권이 전제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소극적 권리 이상일 수 없었다.

 

 

또 다른 접근은 국가권력을 분할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에 의해 실현된 삼권 분립이 대표적이다. 이 제도가 분할된 국가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민의 통제권이 확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회와 행정부는 서로의 권력을 경쟁적으로 확대했다. 두 권력 기구의 갈등 사이에서 사법부의 힘 역시 커졌다. 이러한 권력 확대의 과정에서 정부 권력을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시민의 정치 참여의 범위가 다시 축소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여민주주의가 축소된 결정적인 계기가 클린턴 행정부 때 실행된 앨 고어의 NPR이다. 저자 크렌슨과 긴스버그는 정부 혹은 정치 엘리트들은 더 이상 능동적이고 대중적인 시민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도 권력을 유지,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의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두 가지의 형태로 구분한다. 대중민주주의(popular democracy)와 개인민주주의(personal democracy). 대중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대중의 능동적인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는 참된 민주주의다. 정치 엘리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非) 엘리트, 즉 시민의 정치 참여를 종용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는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개인민주주의로 변했다. 종래 대중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통해 공론의 장을 형성하던 대중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사익(私益)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미국 연방 정부의 변화는 민주주의를 집단으로서의 대중이 아니라 개인들의 사익을 위한 참여 범위로 제한을 두는 꼴이 되었다. 정부는 고객이라는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 선택의 기회를 하나의 유인으로 제공한다. 고객은 자신의 공공 서비스 선택 및 참여가 정치적 권한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민의 도움 없이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정치 엘리트의 새로운 기술을 그동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대중의 능동적 정치 참여를 수용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이 축소된 것이다. 사실 기업가적 정부 모형을 기반을 둔 정부재창조론은 정부의 목적을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나 정부의 목적만 격하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정치 참여 목적 또한 점점 격화되고 있다.

 

 

 

 시민의 참여가 제한된 정부 혁신은 반쪽짜리 성공

 

책은 주기적 선거만으로 정부에 대한 시민의 통제권으로 행사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민의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단지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에서 기인한 심각한 문제로 볼 수 없다. 공익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견제하는 대중민주주의의 해체에서 비롯된 개인민주주의의 문제를 보여주는 심각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되기 위해서는 시민이 주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대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민주주의는 잘못된 통치의 책임을 일상적으로 추궁하고 실질적으로 더 나은 정부로 재창조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된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민주주의는 ‘지루한 성공’만을 허용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매 정부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정부 혁신이 관료제적 정부를 변화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 몰라도 시민의 정치적 행사를 축소하고 정치 엘리트들이 시민의 힘을 도외시한다면 지루한 성공이 아니라 반은 실패한 반쪽짜리 성공이다. 오늘 당장은 잘못된 통치를 비판하고 저항해야 하겠지만, 결국엔 힘을 조직하고 대안을 형성하는 시민의 결속력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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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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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의 히마티온을 벗은 그리스의 속살 보기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외국영화를 보게 되면 남녀 모두 하얀 천을 온몸에 두르는 형태로 옷을 입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장의 이름은 히마티온(himation). 고대 그리스 남녀 모두 착용한 전통 의상 중의 하나이다. 고대 로마인들의 복장과 비슷해서 똑같이 히마티온을 입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식과 형태에서 히마티온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명칭도 다르다. 고대 로마인의 전통 의상은 토가(toga)라고 부른다.

 

예전에 ‘그리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뜨거운 태양 햇살을 듬뿍 받은 채 자라는 올리브 나무, 히마티온을 입은 고대 그리스인들 그리고 옛날 그들이 숭배했던 올림포스의 신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가 독서의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상에 떠돌던 신들의 이야기를 故 이윤기 선생은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되어 상상력이 메마른 우리나라의 땅에 안착시켰다. 이때부터 우리에게 그리스는 변방의 유럽 국가가 아닌 ‘신화의 나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가 ‘신화의 나라’라고 해서 그곳 사람들이 고대인들처럼 히마티온을 입고 보이지 않는 신들에게 경배할까? 그렇지가 않다. 지금의 그리스를 보라. 젖과 꿀이 흐르는 풍족하면서도 영원불멸한 신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예전의 ‘그리스’가 아니다. ‘경제 파탄 국가’, ‘경기침체의 화약고’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만 거론된다. 지금의 그리스는 최악의 경기침체 속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 최고의 관광국가로 손꼽을 정도로 살기 편한 나라였는데 이제는 치안마저도 위태로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골의사 박경철은 생뚱맞게 그리스를 여행한다. 그리고 그리스 땅에서 남겨진 자신의 발자국 흔적들을 한 권의 책으로 다시 되살려냈다. 시골의사의 그리스 여행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여행 안내자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다.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를 인도해준다는 신계의 헤르메스가 아닌 진짜 그리스 인 카잔차키스와 동행을 선택했다. 시골의사의 여행 안내자 선택은 탁월하다. 만약에 헤르메스였다면 자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의 흔적만 쫓는 고리타분한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카잔차키스와 함께하는 시골의사가 바라보는 그리스의 모습은 ‘히마티온’을 벗은 나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신화’라는 이름의 히마티온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크 안티시쥐지’, 이중적인 자아를 가진 그리스인

 

시골의사는 현재 그리스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생각했던 그리스가 맞는지 의문이 든다. ‘신화의 나라’라는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확 깨는 순간이다.

 

 

그리스에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 안에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p 35)

 

 

그리스인은 ‘안티시쥐지’(antisyzygy), 이중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시골의사는 그리스를 여행하는 이방인이라면 이 정도의 당혹감은 충분히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스를 동경하는 이방인이라면 그리스의 속살에 크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특성을 제대로 모른다면 그리스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은 현자들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불장난이 잦을 정도로 바람기 많은 제우스처럼 쾌락에 탐닉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코린토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 여사제들의 축제가 열렸는데 지중해를 드나드는 남정네 마음에 유혹의 손짓을 보낼 정도로 향락의 축제였다.

 

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를 다스렸던 페리안드로스의 이야기는 ‘그리크 안티시쥐지’(Greeks

antisyzygy)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페리안드로스는 경제학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이미 노예제의 폐해를 지적했으며 훌륭한 통치술을 펼쳐 7대 현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공(功)보다 과(過)가 더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 잔인한 독재자로서의 악명 높았다. 임신한 아내를 발로 차 살해하는 것도 모자라 코린토스의 모든 여자들의 옷을 벗겨 불로 태울 정도로 비정상적인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로마의 네로, 칼리굴라 뺨칠 정도다. 후대의 평가 중에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악의가 포함된 것도 있지만, 우리는 페리안드로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파멸의 길로 스스로 몰아세우는 이중적 자아의 위험성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경제 침체 이후 자아 분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그리스를 보는 듯하다.

 

 

 

 낭만적 정열과 고요한 명상을 동시에 품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인류애’와 ‘야만’이 충돌하는 안티시쥐지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그리스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침략자의 불의에 맞서 투항했던 시인 조지 바이런의 낭만적 정열이 남아 있으며 세속을 피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고요한 명상을 하는 수도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리스다.

 

 

 

 

그리스 테르베나키아에 위치한 콜로코트로니스의 동상

 

 

오랜 굴종의 끈을 단칼에 자르려 했던 그는 근대의 헤라클레스라 불려 마땅한 사람이었다. (p 147)

 

 

한국에 이순신이 있다면 그리스에는 혁명 영웅 콜로코트로니스가 있다. 그리스는 15세기 말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1822년에 그리스의 독립이 선언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의 시인 조지 바이런이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콜로코트로니스는 게릴라 독립군 8000명을 이끌어 이보다 다섯 배 많은 3만 6000여 명의 오스만투르크 군을 격파한 공적을 세운 그리스의 진짜 영웅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인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리스의 도시 중심부에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 가면 고요한 정교회의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 청학동처럼 속세의 발길이 드물고 정진과 수행에 집중하는 수도사들을 볼 수 있다. 수도원은 절벽이 깎아 내지르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 적의 침략을 피할 수 있으며 세속과 단절하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수도원들이 신앙만 추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때 세속의 한가운데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때 수도원들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전쟁에 참전했다. 성스러운 심장 속에 국가를 위해 몸 바칠 줄 아는 정열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은 필요하지 않아 퇴화하게 되는데, 그 탯줄이 떨어지고 남은 자리에 생기는 것이 배꼽이다. 배꼽은 태어나기 전, 생존을 위해서 필요했던 탯줄의 흔적이다. 태어나고 나서는 인체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 배꼽에는 피부의 다른 부위와 같이 피부 분비물, 각질의 죽은 세포 등이 뭉쳐서 때가 생기고, 주름이 많은 구조이기 때문에 때가 쌓이기 쉽다. 또한, 주름에 의해서 습한 환경이 조성되어서 세균이 번식하기도 좋은 조건이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를 ‘문명의 배꼽’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그리스는 과거의 영화를 누렸던 ‘문명의 배꼽’이 아니다. 서양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던 역사의 흔적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잦은 외적의 침략과 내부 분열을 거듭한 문명의 배꼽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가 아니다. ‘판데모스(Pandemos, 세속)’의 그리스가 있다. 문명의 배꼽 안에는 세속과 홍진의 때가 쌓여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속의 그리스를 외면해야 되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시골의사의 여행안내자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를 동경하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그리스의 얼굴은 열두번씩이나 글씨를 써넣었다 지워버린 팰림프세스트이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레아 기행> p 7) 과거에 썼던 글자를 지우고 또다시 새로운 글씨를 쓰는 양피지처럼 지금의 그리스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수히 많은 변화의 역사를 겪었다. 그러한 역사의 지층 속에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문명의 배꼽에 남아 있는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우라니아’의 그리스로 만들기 위해 ‘판데모스’의 그리스를 외면한다는 것은 히마티온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지 않는 것만 못 하다. 예민한 문명의 배꼽에 편견의 자극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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