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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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실의 속에 빠진 친구가 있으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위로 한 마디를 전한다. “힘내. 시간이 지나면 좋은 일이 오게 될 거야.” 그런데 프랑스 출신의 아르튀르 드레퓌스라는 사람은 별나다. 스무 살 친구가 삶이 지루해서 은퇴가 빨리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르튀르가 하는 말. “너 자살은 생각해봤니?”

 

평소 대화에서는 ‘자살’이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는다.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아르튀르는 고민이 가득한 친구에게 위로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생뚱맞게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질문한다. 여기까지만 읽은 채 아르튀르가 친구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자살 방조자로 오해하지 마시길. 살아가면서 행복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한 친구에게 충격요법 방식으로 살벌한(?) 위로를 한 것이다. 이어서 아르튀르는 말한다. 인생의 향후 45년을 ‘은퇴’를 향한 지겨운 과도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당장 오늘 인생을 끝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아르튀르를 상대한 친구의 반응이 흥미롭다. 지루한 삶의 연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으로 조기 은퇴를 원하면서도 자살 행위를 끔찍하게 보는 이 반응. 웃기지 않은가. 은퇴를 원하기 위해서는 지긋지긋한 인생을 현재 나이의 2배를 더 살아야 한다. 논리적인 의미로 따져 본다면 인생 살아가기 귀찮을 때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자살이다. 굳이 은퇴를 기다리기 위해 괴로움 가득한 1년 365일 감당하면서 살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자살 행위를 정당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자살을 권유한 아르튀르의 살벌한(농담에 가까운) 질문을 듣는 순간 조기 은퇴를 원하는 친구처럼 삶의 진정한 가치와 진짜 행복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드러나게 된다. 친구의 모습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늙은 노인과 비슷하다. 만사가 귀찮고 힘들다고 해서 ‘죽음의 신’이 얼른 자신의 명(命)을 데려가기를 원했다가 막상 신이 자신의 곁에 다가오자 겁에 질려버리는 이중적인 태도 말이다. 우리가 자신의 무지함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조기 은퇴를 원한다는 궤변의 푸념을 늘어놓지 않게 것이다.

 

아르튀로는 우리의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직업’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가 쓴 <삶이라는 직업>에서 착안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베세는 42살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직업을 갖기를 원하며 한 번 갖게 된 직업으로 기운 팔팔할 때까지 일하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막 성인이 된 20대부터 정년을 앞두는 60세까지 남녀노소 직업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연봉에 따라 자신이 취직하기를 원하는 직업은 천차만별이지만 스스로 무직자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한 가지 직업을 가지게 된다. 직업의 노동을 통해 노동의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 일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번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인생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직업’인 것이다. 하지만 직업 환경 및 조건이 불만스러우면 간혹 파업에 돌입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에 불만투성이에다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좌절감을 표출하는 ‘행복의 파업자들’이 있다. 파업한다는 것은 곧 일을 중지한다는 의미다. 우울감에 빠져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고 모든 일에 손 놓고 싶은 심정과 같다. 장기간으로 인생의 ‘파업’이 지속한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진전이 없다.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다.

 

 

 

♣ 아르튀르는 자신의 짓궂은 질문에 실망한 친구를 위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을 썼다. 단순하게 짝이 없는 제목답게 그가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행복의 의미도 단순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한 삶’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불행의 원인은 섣부른 해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물이 반쯤 담겨 있는 컵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아실 것이다. 그걸 보고 한쪽은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군.’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했다. 친숙한 이야기를 좀 더 심화, 확장해서 생각해보자. 오아시스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걷고 있다.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은 반 정도 물이 담긴 물통이 있다. 물통 속에 든 물을 보고 두 사람은 방금과 같은 대조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막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한 사람이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높다. 부정적인 사고는 사기를 저하한다. 긍정적 사고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정도로 올바른 마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부정적인 사고만 가득한 회의주의자는 모든 것을 부정적, 회의적으로 해석한다. ‘내가 못생겨서’, ‘내가 별 볼 일 없어서’, ‘내가 최악의 운세를 타고 나서’ 등이라는 이유로 불행한 삶을 정당화한다. 어떤 현상의 반대편 입장을 생각하지 않은 채 회의적인 사고의 틀에 갇힌다면 고독만 남을 뿐이다. 폐쇄와 단절이 빚은 고독이 자살을 선택하게 한다.

 

 

 

현실 도피적으로 과거의 행복에 아쉬워하고 집착하는 것 또한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현재 자기가 소유하고 느끼고 있는 행복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느껴야 한다. 사소한 행동, 물건 그리고 익숙하게만 느껴진 장소 등이 또 다른 느낌의 행복을 선사해줄 수 있다. 아르튀르는 공항을 좋아한단다. 왜냐하면, 식기세척기 내부보다 깨끗해서. 행복의 원인이라고 느꼈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새롭게 보이면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실행해보는 것도 좋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좋은 것은 신중하게 아껴 쓴다거나 후일을 위해 참는 습성이 있다. 여러 가지 반찬 중에 맛있는 소시지가 있다면 소시지를 맨 나중에 먹는다거나 물건을 구입하려는데 단위가 큰 지폐를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와타나베의 여자친구 미도리가 하는 대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비스킷통이다.’ 비스킷통 안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비스킷과 그렇지 않은 비스킷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좋아하는 비스킷을 먹게 되면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된다. 그래서 괴로운 일이 생기면 먼저 겪어 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르튀르였다면 일본 처녀의 인생철학을 반대할 것이다. 아마도 비스킷 상자 안에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었을 것이다. 아르튀르는 마카롱의 교훈을 들려주면서 행복할 기회를 손쉽게 놓쳐버리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유명한 파티시에로부터 받은 맛있는 마카롱을 특별한 기회에 먹으려고 바로 먹지 않고 따로 보관했다. 일주일 후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마카롱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봉지는 개봉한 순간 마카롱이 곰팡이가 필 정도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르튀르는 단 한 개의 마카롱을 맛을 보지 못했다.

 

비스킷이나 마카롱이나 어차피 입에 들어가는 것들이다. 마카롱을 받자마자 개봉해서 몇 개라도 먹었더라면 먹지 못해서 느낀 아쉬운 감정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맛있는 비스킷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단위가 큰 지폐를 지불하고 싶지 않아서 비스킷 먹는 것을 포기한다면 나중에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는가. 소소한 일상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누리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괴로운 일을 먼저 선택하고 참는다면 괴로움이 우리 삶에 전달하는 고통이 더 가중될 수 있다.

 

 

 

이 책은 아르튀르가 자신의 친구를 위해 쓴 것이다. 제목에 혹해서 이 책을 손에 집었다면 읽지 않기를 권한다. 특히 지금 당신의 삶이 행복하다면 읽지 않는 것이 좋다. 행복한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겉멋 든 ‘개똥철학’으로 보일 수 있다. 아르튀르도 행복한 사람이 자신의 책을 읽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심오한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친구가 이 책을 읽기를 바랄 뿐이다. 아르튀르의 책은 자신 주변을 둘러싼 사소한 일상을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단상의 연속체다. 거대한 삶 속에서 지극히 사소한 삶의 과정까지 되돌아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증명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마음속 상태를 있는 그대로 나열한 그의 글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결론은 단 하나다. “삶이 의미 없다 해도, 행복이 삶의 방향이다.”(46쪽)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복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것을 목표의 지향점으로 삼아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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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진중권 / 휴머니스트

 

 

철학의 한 분야인 미학이 대중 사이에 유행어가 된 것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덕이다. 이 책에 이어 미학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게 2008년에 펴낸 <서양 미술사> 시리즈다. 1권 고전예술편을 시작으로 2011년에는 모더니즘 편 그리고 이번에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편을 출간해서 미술사 시리즈가 완간되었다.

 

이번 책에서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 세계와 비평의 역사를 넘나든다. 전후 예술계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비평가들의 평론을 중심으로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플럭서스, 팝아트 등 후기 모던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을 탐구한다. 변기, 깡통 수프 등이 현대 미술사에서는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었는지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의 바탕에 깔린 사유와 논리를 명료하게 보여줌으로써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철학 개념들을 풀이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신간평가도서로 이 책이 꼭 선정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학기 회화과 수업으로 ‘현대미술론’을 수강하고 있는데 강의에서 배우고 있는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당연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이다. 그리고 이번 기수 신간평가단 추천도서로 예술 분야 도서가 단 한 권도 선정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인문, 사회과학, 과학, 역사 분야 도서 한 권씩 선정되었는데 마지막에 예술 분야가 선정됨으로써 12기 신간평가단 추천도서의 ‘화룡정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정하웅 외 / 사이언스북스

 

 

‘구글 신(神)’이란 말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구글을 이용하면서 생기는 구글의 영향력을 표현한다. 구글을 통해 독감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심지어 구글 검색 분석을 통해 향후 주식 시장의 움직임을 예측해 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구글이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데이터(빅데이터)를 이용한 ‘데이터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KAIST 교수들의 강의를 담은 시리즈 첫 권이다. 책의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자 컴퓨터까지 미래 정보학을 소개하고 있다. 과학의 담장을 넘어 경제와 사회, 정치 영역에까지 파급을 미치고 있는 최신 이슈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리퀴드 러브>  지그문트 바우만 / 새물결

 

 

리퀴드(Liquid)는 우리말로 ‘액체’, ‘유동하는’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을 가지고 현대인의 불안정한 삶의 양식을 설명하는 연작으로 널리 알려진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다. 근대성을 리퀴드라 정의하는 저자답게 이번 신작에 논의하는 주된 대상은 ‘유대 없는 인간’이다. ‘유대 없는 인간’은 관계가 사라진 유동하는 현대에 살고 있다. 관계보다는 네트워크에 그치려는, 그럼에도 네크워크보다 관계를 갈망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이중성을 그려내고 있다. 작년에 출간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동녘, 2012)의 연장선상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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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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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역사책, 몸젠의 로마사

 

로마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은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로마 시대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로마의 탄생과 멸망을 시오노 나나미식의 대작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핵심적인 내용만 추린 한 권으로도 끝낼 수 있다. 또 아무데나 손 가는 대로 펼쳐 로마 시대의 미시사를 가볍게 읽는 책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로마사 고전을 읽지 않은 채 로마 역사에 능통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 참고 문헌 목록을 본 적이 있는가.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사용한 2차 사료 중 하나가 테오도르 몸젠(1817~1903)의

 

 

 

 로마는 영웅 전설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책은 로마 역사를 '신화'로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고대 로마인의 삶과 로마의 흥망성쇠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서 저자는 로마의 역사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룬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전체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민족과 언어의 원류를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은 로마 건국의 신화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야기로 독자를 로마의 세계로 초대한다. 하지만 몸젠의 책은 다르다. 이탈리아 초기 민족이 반도에 정착되는 사실부터 시작한다.

 

 

로마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2천 7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가 한 곳에 압축돼 있다. 로마를 본다는 것은 그 안에 응축된 역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국 설화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지로 정하고 암소와 황소에 쟁기를 달고 사각형의 경계선을 그어 로마가 탄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몸젠이 수집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기원전 753년 이전에도 고대 이탈리아 민족은 조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민족은 크게 라티움 지방 종족과 움브리아 종족으로 나뉘는데 초기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이탈루스 왕에 의해서 농경 생활로 전환하게 된다. 이탈루스 왕은 이탈리아 초기 법 제정에도 깊이 관여할 정도로 이탈리아 역사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몸젠의 실증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진정한 로마 건국의 시초는 이탈루스인 것이다.

 

 

 

 2천 년 묵은 민족적 통일의 씨앗

 

이탈리아의 역사는 로마 제국 분열 이후 동, 서로마로 분열되다가 중세에 들어서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같은 도시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시국가의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탈리아는 작은 왕국들을 통틀어 부르는 하나의 집합체 이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민족주의 부흥에 힘입어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간추린 이탈리아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이탈리아인들이 ‘민족’으로서의 동질성 인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굵직굵직한 역사의 근간만으로 역사 속 민족의 특징을 규정하면 곤란하다. 이탈리아가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는 '콩가루' 나라가 아니다.  

 

 

민족적 동질성을 정치 영역보다는 놀이와 예술에서만 드러내는 희랍인과 다르게 이탈리아 인은 이미 자기통제에 기초한 민족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라티움 평야에 있는 작은 부락들은 독립된 주권을 가질 정도로 통치자가 다스리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그러면서도 ‘연맹체’라는 공동체 의식은 남아 있었다. 몸젠은 씨족 부락의 라티움 연맹 공동체의 등장에 대해 지역 분리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민족적 유대감을 고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민족적 통일의 꽃은 가리발디가 활동하던 19세기에 늦게 피었을 뿐 종자는 이미 고대에 형성되었고 발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2천 년 묵은 연꽃 종자가 조그만 새싹을 틔우듯이 그렇게 ‘로마 민족’은 탄생했다.

 

 

 

 

 실증주의 역사의 대부(代父)

 

몸젠의 역사 서술 방식은 역사적 증거물을 제시해서 실증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의 역사에는 ‘가정(假定)’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나긴 세월의 풍파에 파묻혀 역사가의 기억 속에 사라질 뻔한 역사적 문헌을 분석하는데도 몸젠은 주관적인 해석을 지양한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쿠르베는 “나는 보이지 않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실주의적 회회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몸젠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며 증명 불가능한 신화를 역사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는 신화를 ‘스스로 역사이기를 희망하지만 훌륭할 것 없는 단순한 설명’이라고 정의한다. 자신 즉, 역사가가 사료를 충분히 검토해서 설명될 수 있는 내용을 진짜 ‘역사’라고 인식했다. 몸젠의 로마사는 실증주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에 쓴 책이다. 간혹 전체적인 틀을 보는 거시사적 관점을 옹호하고 개인의 행위, 사유, 문학 등을 역사의 대상으로 제외해야 한다는 역사관을 드러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역사관은 사망할 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로마사 개정에 몸 바친 탐구 정신을 생각해서 애교로 봐주자.(몸젠이 최종적으로 개정 증보한 로마사는 그가 죽은 후 1904년에 출판되었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소설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세우는 일본인이 쓴 로마사와 비교하면 몸젠의 로마사는 인문학적 가치가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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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신문을 소리 내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책을 소리 내서 읽어본 경험은 하나씩 다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신문을 소리 내서 읽어보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매일 아침 조간신문을 소리 내서 읽는 우리의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솔직히 신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서 읽는 사람을 만나기란 드문 일이니까요.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신문을 눈으로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는 신문을 보는 이들을 자주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20대에게 신문은 여전히 낯선 인쇄매체입니다. 스마트폰, 인터넷 서핑에 익숙한 우리는 그나마 인터넷 신문을 읽긴 합니다. 하지만 종이신문을 꼼꼼히 읽는 20대는 많지 않습니다. 지하철에 탔을 때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보세요. 종이신문을 읽고 있는 중후한 연세의 어르신 옆에는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대학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제 주변에 있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매일 종이신문을 읽거나 신문 기사 내용을 주제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게다가 집에서 종이신문을 정기 구독하는 친구도 보기 어렵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들은 신문 읽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문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신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거죠. 신문 읽기는 나이 든 사람의 습관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대신에 종이신문을 들여다보는 20대를 어디 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젊은 친구들에게 신문 읽기를 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문을 읽어야 지식이 축적되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혀질 것이라는 식으로 장점을 말로 열거한다고 해서 네모난 스마트폰 화면 속에 갇혀버린 그들의 생각을 구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종이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종이신문 대신에 스마트폰 화면 안에 있는 인터넷 뉴스를 보라고 말합니다. 스마트폰으로 한눈에 수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확인한 정보의 기억은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요?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습득한다고 해서 우리의 뇌가 '스마트'(smart)하게 되진 못합니다. 그냥 눈으로 인터넷 신문을 훑어보는 것은 수박 겉핥기식 정보 습득에 불과합니다.

 

매스미디어 홍수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수많은 매체들로부터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정보매체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문제의 핵심은 인터넷 독자들은 대개 관심 있는 것만 골라서 보기 때문에 사고의 극단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모바일폰 이용의 부작용을 연구한 학자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동일한 텍스트를 읽더라도 종이책이 아닌 컴퓨터 화면으로 읽으면 기억이나 성찰 능력이 떨어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랑, 정의, 배려, 경청, 관용, 도덕과 같은 가치를 성찰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스마트폰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신문과 책을 많이 읽은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을 만들었는데, 스마트폰 이용자, 특히 젊은 세대는 신문과 책 읽기 장애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분석을 제공하는 신문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신문 읽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일부 신문 기사들 중에는 공정하지 못하고 올바른 내용이 없는 영양가 불량인 것이 많다고요. 이에 대해서 주류 언론에 할 말이 많았던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나라 없는 사람>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매체인 신문과 TV는 오늘날 국민 전체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부실하고, 너무나 무책임하고, 너무나 비겁하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매체는 책밖에 없다.”

 

 

 

 

 

 

 

 

 

 

 

 

 

 

 

 

 

 

사실 종이신문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는 합니다. 특히 나쁜 신문의 그릇된 기사는 신문을 맹목적으로 읽는 젊은 독자의 상식 습득의 과정과 양심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을 읽는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가 선택한 신문의 기사 내용과 논조를 그대로 믿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특정한 신문을 선택한 바로 그 이유가 자신이 그 신문에 보내는 신뢰의 결과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일단 선택한 뒤에는 스스로 어떠한 의심이나 비판도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신문 읽기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가 중요합니다. 저학년 어린이나 청소년들 대부분은 NIE 교육을 많이 배우게 됩니다. NIE 교육은 무조건 이제 막 성장하려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닙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기 위해 걸음마하기 시작하는 대학생들도 NIE 교육을 받으면 좋습니다.

 

신문은 단순한 정보와 지식을 나열한 종잇조각이 아닙니다. 신문 속에는 많은 지혜,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와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게 됩니다. 또한 세상을 바르고 반듯하게 살아가기 위한 진리와 가치와 정의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한 삶의 방법과 우리의 생활을 한층 윤택하게 해 주는 구실을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한 단순 검색이나 뉴스 검색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하여 해설 기사나 사설, 칼럼 등은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생각하며, 표현하는 기능을 길러주는지 종이 신문을 찬찬히 읽으며 정리해야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힘을 통해 광범위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인생의 길잡이로서 신문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매일 아침에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종이신문을 눈으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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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근법의 탄생

 

 

 

 

 

 

 

 

 

 

 

 

 

 

 

 

 

 

 

 

 

 

 

 

 

 

 

 

 

 

 

기원전 2만 년경,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탄생한 미술의 최대 꿈은 박진감 넘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차원의 현실을 이차원의 평면에 그리는 것은 아주 오랜 동안 거의 불가능한 요원한 꿈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변화하게 될 것들을 미리 자신 앞으로 끌어당겨서 자기의 작품 속에서 그 역동적 에너지를 원근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당시 원근법은 단순히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원근법이라는 구성방식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마사초 「삼위일체」  1426년경

 

 

원근법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3차원 공간의 물체나 공간을 2차원의 평면 위에 거리감과 깊이감을 주어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원근법은 주로 풍경화 등 넓은 공간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1417년 무렵 건축가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최초의 실험적 시도로써 투시 원근법과 소실점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완성한 이후, 회화에서는 마사초(1401~1428)의 <삼위일체>에서 최초로 실현되었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광학과 기하학적 지식에 근거한 원근법을 이용하여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 대상의 사실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마사초는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투시 원근법을 이 작품에 응용하는 창의성을 발휘하게 된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근법을 사용해 후면의 벽면과 천장이 깊어 보이는 입체감을 주는 공간구성 방식을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이 좁은 공간에 삼위일체의 형상을 묘사하는 성부를 포함해 6명의 형상을 그려 넣어도, 전혀 좁아 보이지 않게 작품을 구성했다.

 

 

 

 서양의 대표적 원근법, 투시 원근법

 

원근법은 투시 원근법과 대기 원근법으로 나뉘는데, 투시 원근법은 일정한 비율이나 법칙이 없이 단순히 멀리 있는 것을 위에 또는 작게 그리거나 사선을 사용하여 배경을 표현하는 초보적인 원근 표현방식을 탈피하여 기하학적인 기초 위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체계화시킨 일종의 공식이다. 투시 원근법은 삼차원의 대상물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대상들이 이루는 공간 내에서의 원근을 표현하기 위해 소실점을 도입했다. 소실점의 개수에 따라서 1점 투시, 2점 투시, 3점 투시로 나눌 수 있다.

 

 

 

 

 

마인데르트 호마바  「미들하르니스의 길」 1689년

 

 

1점 투시는 소실점이 한 개다. 물체의 한 면을 정면에서 볼 때 생기는 투시로, ‘평행선 원근법’이라고도 한다. 주로 건축물 실내, 길게 나 있는 길, 가로수, 가로등 등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고, 소실점이 가운데 집중되어 멀고 깊은 공간감을 느낀다. 2점 투시는 소실점이 2개다. 물체의 한 면 대신 모서리를 중심으로 볼 때 생기는 투시로, ‘사선 원근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기하학적인 입체가 시선에 빗겨 일정한 각도로 틀어져 있거나, 모서리가 화면 표면에 완전히 돌출된 듯이 보인다. 3점 투시는 소실점이 3개이고, 위에서 내려다 볼 때 생기는 투시로, ‘조감도법’이라고도 한다. 물체를 바로 위에서 바라보면 좌, 우, 위 3개의 소실점이 생긴다.

 

 

 

 

 

 동양의 원근법, 삼원법

 

 

 

 

 

 

 

 

 

 

 

 

 

 

 

 

중국의 북송(北宋) 때의 화가 곽희는 북송 산수화 양식을 완성하여 화면에 포치하기 위한 시점의 다변화를 최초로 시도했다. 이 때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산수화를 표현할 때 삼원법이라는 원근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삼원법은 고원법, 평원법, 심원법 3가지가 있다. 독립된 각 시점에 일치한 시점만의 고집에서 이러한 시점을 한 화면에 복합적으로 적용했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곧 산점투시(散點透視)를 의미한다.

 

 

 

 

 

정선  「청풍계(淸風溪)」 제작연도 미상

 

 

산점 투시는 이동 시점에서 생기는 여러 시점으로 바라본 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고정된 시점에서 대상을 보지 않고, 위치를 여러 번 바꾸어 가면서 대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미술가가 한 공간 안에, 같은 시간대에 동시에 출현할 수 없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는 사물들을 한 화면에 담을 수 있게 함으로써, 작품의 주제를 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

 

산점 투시는 구도의 배치에도 자유롭다. 고정된 소실점에 따라 물체를 바라보는 서양의 투시 원근법과 다르게 산점 투시는 소실점이 다양하며 고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구도의 필요에 따라 좌우와 상하의 거리 조정 등의 표현이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화가는 대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화면의 예술적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화가 자신이 가장 절실하다고 느낀 부분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해서 표현한다.

 

 

 

 

정선 「금강전도(金剛全圖)」 1734년 (왼쪽, 고원법)

김홍도 「명경대(明鏡臺)」 제작연도 미상 (가운데, 평원법)

정선 「구룡폭포」 제작연도 미상 (오른쪽, 심원법)

 

 

‘고원법’은 높은 산을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상태에서 생기는 높이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고원법을 이용한 그림은 자연의 웅대함과 위압감을 느낄 수 있다. '진경산수'를 대표하는 정선의 <금강전도>는 서양의 원근법과는 전혀 다른 다시점의 공간구성법을 통해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을 하나의 화폭에 담고자 한다. 화가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되 풍경에 대한 어떤 이상향적 관념을 품은 채 금강산의 숭고미와 신비감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평원법’은 산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느낌으로 마치 앞산에서 뒷산을 건너다보는 평평한 공간의 넓이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평원법을 이용한 그림은 자연의 광활함이 느껴진다. ‘심원법’은 높은 산의 정상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표현하는 방법으로, 심원법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은 자연의 깊이감을 느낄 수 있다. 채색을 할 때 고원인 경우에는 청명한 느낌이 나게 하며, 평원은 밝고 어두움이 고루 나타나게 하여 심원은 무겁고 어둡게 표현한다.

 

 

 

 객관적 재현을 강조한 서양, 체험의 공간을 강조한 동양

 

 

 

 

 

 

 

 

 

 

 

 

 

 

 

 

 

르네상스시대 서구 미술을 지배해 오며, 환영적 사실주의를 꾀했던 전통적 방법은 1점 투시에 의한 원근법이었다. 이는 화면에서 시점의 통일성을 요구하게 되어 관찰자로 하여금 형태의 사실적 화면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뛰어넘어 동양에서는 다시점(多視點)을 통한 화면전개 방식을 구사했다. 한 화면 속에 고원, 심원, 평원 등의 적용은 흩어진 시점 즉 복수시점을 말한다.

 

 

 

 

파블로 피카소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의 초상」 1912년

 

 

바로 상반된 논리를 동시다발적 표현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큐비즘(cubism)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데, 큐비즘은 대상을 해체하고, 시점을 이동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본 대상을 자유롭게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인지하는 것으로 그리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그림은 3차원의 모방을 넘어서 시간을 담은 4차원으로 이동하였다.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큐비즘의 다시점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동양의 화가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서양회화의 가장 핵심적인 기법은 원근법인데, 전근대 동양의 그림에서는 이 원근법을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런 것일까?  그렇다고 원근법이 없는 동양화의 미적 가치를  서양화와 비교하면서 낮출 필요는 없다. 이것은 인식의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다. 원근법은 과학의 대두와 개인의 등장이라는 르네상스시대의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별적·독자적 주체인 화가의 시선으로 대상을 보고 그것을 화폭에 옮길 때 원근법이 출현한 것이다. 동시에 원근법은 수학적 질서다. 공간은 시점의 각도에 의거해 기하학적 질서로 인식된다. 근대 서양회화의 그림은 이 기하학적 공간에 사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따른다. 그러니까 기하학적 공간을 회화의 공간을 만드는 보이지 않는 선험적 공간인 셈이다.

반면에 동양의 그림에는 이런 기하학적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곧 주체는 그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풍경의 일부이다. 그 풍경 안에서 산수의 신비감과 숭고미를 체험하는 것이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진경산수’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진경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금강산을 마음에 품은 채로 그 산의 숭고미와 신비감을 극단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그렇게 그린 이유를 김우창 교수는 회화의 기법을 근본적으로 규정한 세계관에서 찾는다. 풍수사상이 보여주는 대로 땅은 사람이 깃들어 사는 곳이자 무한을 향해 초월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상한다. 그 땅의 세계와의 일체감이 중요했기 때문에, 동양의 산수화는 풍경을 대상화하기보다는 그 안에 들어가 체험하는 공간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반면에, 서양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꼈다.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우리의 눈을 통한 관찰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관념적으로 직접 보지 않고 그리는 예도 있지만 시각적 언어인 그림은 어떠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그림을 그릴 때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는 대상물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는가에 따라 실제적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다. 대상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에 앞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그리는 화가의 자세다. 그리고 동양의 삼원법을 통해서 서양의 원근법처럼 그림을 그릴 때 언제나 정확한 형태와 배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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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3-05-0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북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읽다보면 말이죠,
가본 것만으로도 축복이고 은총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나와요.
그렇다면 보고 경험하고 할 수 있는...
현대를 살아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우리들은 행복한가 하고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자세와 더불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자세까지 얘기하자면 오지랖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