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교사』 1954년

 

 

저 끝으로 마을이 어슴푸레하게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들판 위에 한 남자가 홀로 서 있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볼 수 없다. 차림새로 보아 세련된 도시풍의 중년 신사로 짐작된다. 검정 코트를 반듯하게 차려 입었고 코트에 어울리는 중절모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달. 중절모의 머리 바로 위로는 그믐달이 교교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달빛의 기운을 받았는지 밤하늘의 어둠은 청색조로 온통 물들어 있다. 초저녁일까 새벽일까? 천지사방은 적막할 뿐이다.

 

얼핏 봐서 그림에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다. 적어도 이상한 점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야릇한 의문과 신비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우선 그믐 치고는 사위가 너무 훤하다. 중절모 위에 거의 내려앉은 듯한 달의 위치도 묘하고, 낮게 깔린 지상의 풍경과 대비된 남자는 거인처럼 커 보인다. 그리고 왜 저렇게 부동의 차렷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을까? 양복점 마네킹처럼 혹은 방부 처리되어 압정으로 고정된 곤충표본처럼 미동도 않는 모습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림 전체는 뭐라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신비와 경이의 영역으로 우리를 몰입하게 만든다.

 

마그리트가 그린 ‘교사’(敎師)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제목과 그림 전체의 이미지와의 연관성도 수수께끼다. 그의 그림은 늘 이렇다. 불합리, 부조리, 불가해함. 더불어 시와 꿈과 환상이 배어있는 그림.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정확히 그려진다. 다만 그려진 내용은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모습들이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참이라고 믿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속성 때문에 참이라고 믿는 순간, 동시에 우리는 모순과 역설에 직면한다. 정작 그려진 건 도저히 참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술은 이때 발생하고 우리는 일상의 현실과 이미지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그러나 그 헤매는 과정에서, 관성에 젖은 평범한 현실 너머를 호흡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우울증 속에서 은둔자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 자신의 뒷모습이 연상된다. 실제 마그리트는 종종 작품 속에 등장하는 중절모 사나이와 비슷한 복장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할 때 작품이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했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했던 화가 자신에게는 헛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래도 마그리트 그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거창하게도 세계 속 단독자의 절대적인 고독이 보인다.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존재. 그 존재의 황당함.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멸의 순간에 대한 예감과 더불어 살아간다. 누구나 간직한 이 예감의 능력은 곧 '천형(天刑)'이다.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의 이별이다.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무상(無常)으로서 곧 영원(永遠)을 구현한다. 그러나 그 끝없는 생성과 소멸의 질서 속에 사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다. 개별자의 삶이다. 그만큼 불만족스럽다. ‘산’의 질서를 수락은 하되 그 삶이 구족(具足)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꽃이 좋아서 산에 사는 새도 있다. 이것이 곧 삶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는 노래한다. 그러나 그 만족스러움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꽃은 지고 또 진다. 별리(別離), 또는 영결(永訣)을 피할 수 없다. 산유화는 무상 속에서 영원을 구현하는 산의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개별자로서의 고독과 사랑과 비애 또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또 받아들이면서 그 모순의 한가운데 담담히 서 있다.  

 

이 망 위를 부지런히 오가는 동안에는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공포와 불안은 유보되거나 경감된다. 그러나 우리의 발은 망 사이의 틈새로 빠지기 일쑤다. 그때 절대 고독과의 대면은 불가피하다. 마그리트의 이 그림이 바로 그 불가피한 대면의 순간을 형상화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중절모를 쓴 사내는 저만치 혼자서 고독의 질서를 받아들인 채 서 있다. 무한한 세계와 유한한 인간의 적나라한 만남.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그림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뒷모습이 누구인지 중요하지가 않다. 그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는 척 외면할 뿐이다. 그리고 묵묵히 고독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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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6-04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프잖아 ㅠㅜ
 
서점은 죽지 않는다 - 종이책의 미래를 짊어진 서점 장인들의 분투기
이시바시 다케후미 지음, 백원근 옮김 / 시대의창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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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서점에 대한 아련한 추억

 

스위스의 소설가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한 책방으로 들어가 포르투갈어로 된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중년의 서점 주인이 그 옆으로 오더니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세요?”라고 묻는다. 주인공이 모른다고 하자 “그럼 번역을 해드릴까요?”하며 서문을 읽어준다. 주인공은 그 문장들에 매혹되어 포르투갈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책을 갖게 되고, 마침내 책의 저자를 추적하고 싶은 마음에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탄다. 서점 주인이 읽어준 책 한 권 때문에, 예순을 앞둔 사람이 그제까지 유지해왔던 생활 방식을 버리고 일종의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저 정도로 극적이진 않지만, 내게도 내 일생에 큰 영향을 준 동네 서점 하나가 있다.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이 사준 세계문학전집류 외엔 다른 책을 읽은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스스로 책을 고를 줄도 몰랐다. 그날 나는 처음 내 돈으로 책을 살 작정이었다. 뭘 골라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는 내게 책방 주인이 걸어와 추천한 책이 정재승 교수의 <과학 콘서트>였다. 처음으로 굳어 있던 생각의 시선을 과학의 세계 쪽으로 향하게 만든 의미 있는 책이었다.

 

동네 서점들의 폐업 위기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엔 그런 소식이 부쩍 잦다. 그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 건, 동네 서점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독서 체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쾌적한 환경과 합리적인 시스템의 대형서점이 지금보다 더욱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줄 수 없는 작지만 빛나는 2%의 그 무엇. 사상 최악의 출판 위기라는 지금 그 무엇이 더욱 애타게 그립다.

 

누군가는 책의 몰락을 말한다. 출판 불경기가 극심하고 책 읽는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만든 책은 팔리지 않고 서점은 문을 닫는다. 이러다가 책의 운명이 영영 소멸해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일은 생기지 않는다. 출판사가 망해도 책은 죽지 않고 서점이 문을 닫아도 책은 살아남는다. 다만 바람직하고 다양한 책이 살지 못하고 잘 팔리는 책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 애서점가들이 말하는 책 알리는 비결 

 

그렇다면 동네 서점도 살리고, 팔리지 않는 좋은 책이 살아남아 고객에게 반응을 줄 최고의 방법이 있을까?

 

그 해답은 일본의 출판 전문 주간지 편집장을 지내고 있는 이시바시 다케후미가 만난 소형 서점 운영자들의 비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 <서점은 죽지 않는다>에서 등장하는 여덟 명의 서점 사람들이 책을 고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신조는 같다. 책 제목처럼 ‘서점은 죽지 않는다’라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객들에게 좋은 책 한 권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소통하려는 그들은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책 한 권을 알리기 위해 서점을 지키고 있을 진정한 ‘애서점가’(愛書店家)다.

 

그래도 종이 만지는 일은 언제나 몸부림이다. 운명적으로 팔리지 않는 책을 서가 한쪽 구석으로 옮기는 검열에 시달리는 일이며, 자본에 한없이 부대끼는 일이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종이를 만지고 소개하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이들에게 책은 소비재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와야 서점의 점장으로 활동했던 이토 기요히코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런 일들은 하던 시대는 끝났다.’ 눈앞의 판매량에 따른 수익을 좇아 베스트셀러나 화재의 신간만 찾아 진열하는 과거의 모습을 단절한 것이다. 이제는 책을 멀리하는 고객들의 냉담한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지 못하는 낡고 고집스러운 판매 전략이다. 과거의 서점들은 일방적인 판매의 이윤목적 달성에만 관심을 뒀기 때문에 고객이 선호하는 책의 종류나 독서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네 서점은 비교적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길 가다가 편안한 마음에 방문해서 종이책을 음미할 수 있는 안락한 휴식처가 될 수도 있다.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켜 가장 효과적인 방향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서점의 역할이 필요하다.

 

 

 

 ♣ 책 읽어주기 100회 도전

 

이하라 아트숍을 운영하는 이하라 마마코의 사례가 지역 동네 서점이 존속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이하라 아트숍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서점에 불과하다. 남녀노소 지역 주민은 이곳을 방문하는데 책을 사기 위해서 오는 건 아니다. 서점은 책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판다. 책장이 아니라 냉장고로 향하는 손님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이하라는 책 대신에 아이스크림을 사더라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이하라는 어린이 책 전시 판매회를 홍보하기 위해서 본인이 직접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명 ‘책 읽어주기 100회 도전’. 가게 출입구에서 그림책을 읽는 것이다. 진지하게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이하라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지나가는 길을 멈추고 그녀의 낭독을 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하라는 책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홍보 방법이라고 말한다.

 

독서 행위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손님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것. 단순히 책을 더 많이 팔릴 수 있는 판매 전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동네 서점에게는 좋은 책을 널리 알리려는 열정을, 주민들에게는 열독(熱讀)의 중요성을 각인시켜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해야 할 어린이들이 직접 이하라의 ‘책 읽어주기’ 행사에 참여한다면 금상첨화다.

 

즐거운 놀이는 아이의 언어적, 인지적, 사회성 발달을 촉진한다. 이때 아이의 몸에서는 자연스레 엔도르핀이 나오고 아이들은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게 된다. 책을 소리 내서 읽는 행위를 하나의 즐거운 놀이로 만들어 아이의 성장과 지적 발달을 도모할 수 있다.

 

그리고 ‘책 읽어주기’는 시각 및 지적 장애인들에게 실제적인 독서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들은 신체장애 등의 이유로 일반적인 독서활동에 제약을 받는 편이다. 공공기관으로부터 화면 낭독 및 확대 S/W, 독서확대기, 점자정보단말기 등의 통신 보조기가 지원되고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동네 서점이 이들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복지 서비스 제공자가 되어 서점의 역할이 재조명된다. 꾸준한 참여가 이루어진다면 지식정보 취약계층을 위한 낭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볼런티어리딩’(volunteereading)으로 발전할 수 있다. 육성을 통한 도서 낭독은 장애인들의 독서 능력과 사색의 범위가 성장하고, 책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서점의 미래를 만드는 것은 바로 한 사람

 

이시바시는 말한다. 서점의 미래를 다시 한 번 만드는 것은 바로 한 사람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어렵다. 하지만 책의 존재는 건실하여서 한 사람 한 사람 책을 읽게 하는 독서 문화를 만든다면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은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라고 말했다. 독서에는 혼자 읽고 이해하고 느끼는 개인 독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읽고 공유하는 독서, 즉 ‘소셜 리딩(Social Reading)’이 있다. 같은 책을 읽고 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환경과 맥락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고, 그 안에서 내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같은 책을 함께 읽음으로써 주민은 서점 존재의 중요성을, 동네 서점은 주민이 원하는 독서의 유형을 알 수 있다. 동네 서점과 지역 주민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화합의 장이 마련된다면 동네 서점과 독서의 중요성이 무관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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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나라 - 갑을관계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배해왔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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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잣집 딸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는 것은 192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풍속화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돈과 섹스, 그리고 파티와 사치에 빠진 상류층, 서슬파란 금주법에도 불구하고 지겹게 반복하는 일상성을 알코올 소비로 상쇄하려는 대중들, 주류밀매로 한몫 챙겨 상류층으로 상승을 도모하는 약삭빠른 부류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표 없이 방황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술과 파티에 절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로스트 제너레이션’ 젊은 미국인들의 모습이다.

 

돈과 사랑, 신의와 배반 사이의 갈등 속에서 자기 파멸로 치닫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관심이 아마도 작가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집필하게 한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미 20대 초반에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피츠제럴드가 28세 되던 해에 집필하기 시작한 개츠비의 이야기는 가난한 청년은 부유한 여자와 결혼할 수 없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개츠비는 군 복무 중 미모의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 그는 유럽 전선으로 떠나고 기다린다던 데이지는 곧 시카고 출신의 부자 톰 뷰캐넌과 결혼한다. 종전 후 귀국한 개츠비는 데이지의 결혼 사실을 알고 그녀를 되찾고자 롱아일랜드에 대저택을 산다. 개츠비는 3년 동안 번 돈으로 큰 저택을 사고 호사 주말파티를 열어 손님들을 모은다. 첫사랑을 만나보려는 일편단심에서다. 이제 개츠비는 재산을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사용한다. 다시 그녀를 차지하고자 한다.

 

자신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단지 첫사랑 때문에 젊은 졸부가 된 개츠비의 모습은 어이없이 찾아온 불행한 최후를 생각해본다면 너무나도 허무하기만 하다. 소설과 영화를 본 사람은 그가 어리석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가난했던 그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부자가 되게 만든 열등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전쟁과 가난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전운의 소용돌이, 언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갈지 모르는 총탄에 두려움은 감당할 수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도 이어지는 가난한 삶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전장에 간 그를 기다릴 줄만 알았던 연인은 부유한 남자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그 열등감과 분노감은 말 못할 정도로 자존심을 짓밟았을 것이다.

 

개츠비와 데이지 두 사람이 8년 만에 만난 장면은 아주 극적이다. 데이지를 자신의 호화스러운 집에 초대한다. 그동안 쌓여왔던 열등감의 서러움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게다가 오랜만에 데이지와 함께하는 단 둘만의 시간. 개츠비의 집을 본 데이지는 그 규모에 놀란다. 의기양양한 개츠비는 영국 주재원이 자신에게 선물한 호화 셔츠를 방안에 던지며 과시한다. 데이지는 그 중 하나를 잡고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는 처음 본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왜 자기를 기다리지 않았느냐는 개츠비의 물음에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말하며 덧붙인다. “부잣집 딸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요.”

 

 

 

 

 ♣ 억울해? 억울하면 출세해라!

 

피츠제럴드의 유명한 대표작이 영화로 리메이크되어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내용 속 당시 시대적 배경의 이면을 살펴보면 개츠비가 처한 현실의 구조는 갑과 을로 관계를 구분 짓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하다.

 

기업들의 지나친 '갑'의 노릇으로 우리 사회는 심한 홍역을 치루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불합리한 차별의 제도가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놓여 있다. 개천에서도 용이 탄생할 수 있는 사다리는 있어야 평등한 사회라 할 수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근검절약으로 을에서 갑으로 진입하려는 힘없는 세력의 노력이 경쟁의 초석이 되고 갑으로 진입하는 길을 열게 하는 경쟁력이 된다. 갑들이 많은 세상은 을들이 살아가는 데는 너무 힘들고 도처에 갑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가 높은 장벽이 되어 을들의 반란을 부르기도 한다. 성공한 갑의 집단은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 을은 언제나 피해자인양 억울해 하다보면 양극화 현상으로 사회문제를 야기해 사회가 혼란스럽게 된다. 우리 사회는 갑의 과부화에 노출되어 있다. 갑을 관계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노예관계’라는 말이 나올 만큼 더 심각하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오늘날 갑을 관계의 뿌리를 조선 시대 관존민비로부터 찾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관은 민을,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지배하는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공직’이라는 성격을 더욱 강화했다. 반공을 앞세운 과대성장국가는 시민사회를 억압하면서 형성됐기에 기존 관존민비를 더욱 강고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존민비에서 출발한 갑을 관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뜯어먹기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결국 갑을 관계는 한국 사회의 삶의 방식과 연결되는 문제다. 갑을관계를 일상적인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출세할 수 있고 배가 아파 병원을 갈 때도 인맥이 있어야 빨리 진찰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이 ‘갑을 관계’다. 갑질이라는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돈을 벌어서 크게 출세를 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면 우선 인맥이라도 갖춰야 한다.

 

 

한 대기업 임원이 항공기 여승무원 폭행 사건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중략) 네티즌들의 댓글 한두 개를 보자. (중략) “돈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듯하군요. (비즈니스 석에 탑승해서) 발 닦아달라는 요구도 한다지요. 돈은 일단 많이 벌고 봐야 할 듯!!” (7쪽)

 

 

 

이런 물질적 불균형이 인격적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게 한국적 갑을관계의 가장 큰 비극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인격적으로 평등한 사회이고 사회적 위치가 다르더라도 개개인 모두 동등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물질적으로 열세인 상대방을 동등한 계약 상대자가 아니라 ‘나보다 부족하거나 못한 사람’으로 보는 전근대적·봉건적 인식이 남아 있다. 약탈과 착취를 위해 도입된,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는 을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현실을 인식하도록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을이 강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억울하지만 출세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은 일단 많이 벌고 봐야 한다"라는 열등 의식이 내포된 사고가 내면화된다. 빈농이었던 개츠비가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애인을 다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부가 되는 과정은 을의 전형적인 심리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갑을 미워하면서도 자신 또한 갑처럼 닮아 가는 것이다.

 

 

 

 ♣ 증오에 호소하는 시위만으로 갑을 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

 

갑에 대한 을의 분노는 시위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촛불 시위가 등장해 평화적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고 있지만 과거에 흔히 보던 폭력적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의 하나로 이는 집단적 형태로 행하여지는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의 일종이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민주정치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이자 소수자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불법시위에 대해 대체적으로 관대한 편이다. 과격한 행동을 하더라도 인내하였고 영업방해를 받더라도 감내하였다. 수십 년간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투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생긴 면역력 때문일 것이다.

 

강 교수는 심정에 호소하는 감성 민주주의의 ‘뗑깡 시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의사 표시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시위 집단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식의 감성적 분쟁해결 습성이 법 절차에 의한 해결에 앞서 작용하기 때문에 건전한 시위문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피해 의식에 대한 분노가 조종하는 폭력적 시위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하고 그 폭력에 짓밟히는 제2, 3의 을이 나올 수 있다. 갑이라는 이름의 가해자가 된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 때 간도에서 생활하는 조선인의 비참한 삶을 그린 최서해의 <홍염>의 결말을 기억하는가. 주인공 문 서방은 소작인으로 살아가지만, 소작료를 제때 내지 못해 그의 외동딸 용례를 중국인 지주인 인가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에 문 서방은 자신의 딸을 빼앗아 사위가 된 중국인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온 그를 도끼로 쳐 살해하고, 딸을 구하게 된다. 조선의 ‘을’로서 억압받는 조선인 빈농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울분의 심정을 장중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빈곤과 계급 차별을 폭로하고 이에 저항하는 인물을 설정하는 신경향파 소설에 한계가 있다. 문 서방이 선택한 문제 해결의 방식인 살인과 방화라는 장치가 한 충동적 개인의 보복 수단에 그쳤다. 주인공의 극단적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고찰함으로써 을이 갑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 방식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파편화된 개인적 체험으로 끝나버린다.

 

강 교수는 갑을관계의 종언을 고하기 위해서는 을의 반란이 ‘증오의 이용’을 넘어 ‘증오의 종언’을 향하는 정신의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원한과 복수심이라는 증오만으로 갑을 관계의 뿌리를 완전하게 뽑을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적과 동지’, 일명 편 가르기 식으로 모든 문제를 갑을 관계로 해석해서 자신의 행위가 폭력적, 불법적인데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일상 속에 깊게 침투한 갑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공감,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성찰이 필요하다. '갑을'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널리 퍼져 굳어진 계급의식이나 상하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갑을관계는 윽박지르면 따르는 사이가 아니라 상생하는 관계여야 한다. ‘슈퍼 갑’으로 통하는 대기업, 공무원과 그 아래로 통하는 중견기업, 하청업체, 대리점 등 대부분의 사례를 찾아보면 갑은 을을, 을은 병을, 병은 정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갑도 을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고 을도 갑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잘못된 주종, 상하 관계를 개선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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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적 체질

 

                                       류근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상처를 잘 받는 체질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아보는 오독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이 상처 받을까봐 배려하는 오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세상은 상처투성이로 비춰진다. 관조자가 오히려 더 다치고 상처 입는 경우도 많다. 시인에게 상처는 악기가 된다. 낭만은 없고 고통만 남은 강물, 바다, 하늘, 바람, 별이 악보가 된다. 겹겹이 누적된 상처로 스스로가 폐허가 되어감에도 그는 사랑을 열망한다. 어떤 달콤한 절망도 쓰러뜨리지 못한다. 너무 아픈 상처는 그에게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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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5-28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시보다(라고 말하면 아무래도 쫌 그럴까? ㅋ) 아니 시만큼이나 니 평 좋다, 멋진 녀석!!!! (근데 서울 안 와? 이번에는 얼굴 좀 보고 가!!!!)

cyrus 2013-05-28 23:41   좋아요 0 | URL
시집 즐겨 읽는 누님! 누님은 류근 시집 읽어보셨겠죠? 제목의 표제시처럼 사랑의 상처 받는 내용의 시가 왜이리 많던지.. 오늘 같은 날 시집 읽으면서 괜히 우울해지더군요 ^^;; 방학 때 서울에 갈꺼 같은데 누님 만나는 스케줄 잡도록 노력할께요. ^^

hnine 2013-05-2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독'이고 '오만'일까요?
상처가 악기가 될 수 있는 시인이라면 그건 행운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 반대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라는 말도 있지만,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겠지요.

cyrus 2013-05-28 23:4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하이네님. 말씀 듣고보니 제가 시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많은 크고 작은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았는가 봐요.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가고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은근히 그게 참 쉽지 않은거 같아요.
 
알라딘 중고매장 대구점 내부소개

 

 

 ♣ 왜 이제야 왔니?

 

 

 

 

 

서울 매장에 많이 가본 탓일까?

처음으로 대구점 입구에 들어서는데도 낯설지가 않다.

오랫동안 멀리서 지내고 있던 친구가 처음으로 우리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달에는 중간고사 시험공부에 매진하느라 블로그에 들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 달 받은 알라딘 신간평가 도서 두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서평도 정해진 기간 안에 쓰지도 못할 정도였다. 시험 끝나고 부랴부랴 번갯불 콩 구워 먹듯이 읽고 서평을 작성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라딘 서재를 기웃거리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 할 정도로 놀라운 소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드디어 대구에도 알라딘 중고매장이 생긴 것이다!

 

 

4월 1일, 거짓말 같이 대구에 알라딘 중고매장이 처음 문 열게 되었다. 4월 초부터 중간고사 시험 공부하기 시작했고 블로그 방문이 뜸하기 시작할 때였다. 하필 그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알라딘 중고매장이 열린 것이다. 시험 끝나고 난 뒤에 접한 소식이라 믿기지 않으면서 얼마나 반갑던지...

 

대구점이 개장하지 않았던 몇 달 전에 알라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부천, 전주에서도 매장이 열리는 소식을 접할 때 한 번 이런 농담 반 진심 반 댓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아... 언제 대구에도 알라딘 중고매장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ㅠ_ㅠ”

 

 

올해 서울에 갈 일이 잦았는데 꼭 알라딘 중고매장을 방문하고 책을 구입했다. 강남점을 제외하고는 서울에 위치한 전 지역 매장은 두 번 이상은 다 가봤다. 한 번 매장이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세 시간 정도는 잡는 편이다. 왜냐하면 책 한 권 구입하는데 꽤 꼼꼼하게 고르기 때문이다. 알라딘 중고서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수중에 있는 돈으로 구입한 뒤에 후회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신중하게 고르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알라딘 중고매장에 책을 구입할 때 책을 구입하는 나만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여윳돈이 다 쓸 때까지 책을 구입한다. 여분의 돈이 남으면 그 가격에 맞는

시집 한 권 구입할 것.

2. 도서관에 읽었던 책들 중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구입한다.

3. 시중에는 구할 수 없는 절판, 품절된 책을 구입한다.

 

 

이러한 기준을 삼아 책을 고르고 구입하고 나면 보통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책을 구입하고 매장을 나오면 알라딘 비닐에 담은 책 한 보따리 정도 손에 들려 있다. 매장 한 번 가면 5권 이상 구입한다. 적게 구입한 때가 5권이고 가장 많이 구입한 권수는 7권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대구로 돌아가는 길은 좀 피곤하다. 한 손에 책 보따리를 들고 있어야하니까. 그래도 매장을 떠난 뒤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돈이 조금 만 더 있었으면 그 책을 살 수 있었을텐데...’, ‘아.. 그 책 절판본일텐데.. 다른 사람이 구입하면 어쩌나..’ 마음 같으면 10권 정도 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아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대구에도 알라딘 매장이 생겼으니까. 그것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집에서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학교 가기 전이나 학교 갔다 오고 집에 가는 길에 종종 들리게 될 것이다. 이러다가 매장에 몇 시간 동안 책 읽고 고르는 ‘매장 죽돌이’가 되는 건 아닐지 벌써부터 앞날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서와.. 알라딘 대구점은 처음이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 한가?)

 

- <논어> ‘학이편’ 중에서 -

 

 

 

 

대구점 매장이 처음인데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서울 매장을 많이 가본 탓일까? 멀리서 살고 있던 친구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친구야, 왜 이제야 왔니?’

 

 

분야별로 배치된 책장을 둘러보면서 책 한 권을 신중히 고르는 손님, 고른 책을 책상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진 손님, 독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손님들의 귀에 속삭이는 음악. 지역만 다를 뿐 매장 풍경은 서울이나 대구나 비슷했다.

 

 

 

 

 

 

 

 

 

대구점이 다른 지역 매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외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와 지하철에서 들어오는 입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건물에 입구가 두 개 있는 셈이다. 그래서 건물 전체 분위기가 산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개의 입구가 있는 서울 매장들이 폐쇄적인 건물 구조 때문에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대구 매장은 두 개의 입구가 있어서 개방적인 건물 구조로 만들어졌다. 지하철로 향하는 입구 쪽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상이 있어서 독서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하철 입구 쪽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매장 건물에까지 들리기 때문이다. 스피커에 울려 나오는 음악 소리로도 지하철의 소음을 덮지 못한다.

 

 

 

 

 

 

"이번에는 어떤 책을 고를까?"

가장 집중력이 가장 최고조로 높아지는 순간이

아마 바로 알라딘 매장에 책을 고르는 시간이지 싶다. 

이런 집중력으로 열심히 공부했다면

시험 치고 난 뒤에 후회감에 땅을 치지 않았을텐데... 

 

 

 

나는 책을 고르기 위해서 읽을 때 꼭 책장 주변에 서서 읽는 편이다. 앉아서 읽기 보다는 서서 읽으면서 책 고르는 걸 선호한다. 오히려 독서에 더 집중이 잘 된다. 그래서 세 시간동안 매장에 있어서 다리가 아픈 걸 느끼지 못한다. 구입할 책이 다 고르고 나서야 다리가 저려오는 것을 느낀다. 역시 집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매장에 있어서 그런지 책을 고르는 데 여유가 생겼다. 아마도 네 시간 정도 책을 골랐을 것이다. 의외로 대구 매장에도 절판본 몇 권이 발견된다. 그것도 서울 매장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책들이 눈에 띄었다.

 

 

 

 ♣ 절판본 득템하기

 

 

 

 

 

 

보통 5권 이상 책을 구입하면 매장 직원은 알라딘 비닐 두 장 정도 혹은 대형 비닐에 담는다. 마침 공돈이 있어서 12권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총 구입 가격은 5만 원 밖에 안 들었다. 책 5권 구입 가격으로 산 것이다. 그런데 대구 매장에 이 정도 책을 구입하는 손님이 내가 처음인가 보다. 대형 철제 바구니에 담은 책을 한 권씩 계산하는 여성 매장 직원(내 나이 또래거나 나보다 어린 대학생일 것이다)이 놀라움이 섞인 미소로 웃었다. 하긴 젊은 대학생이 책 10권 한꺼번에 구입하는 경우는 흔지 않지...

 

 

 

 

 

 

 

 

 

 

 

 

 

 

 

이번에도 절판본 위주로 책을 샀다. 특히 몇 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 목록에 포함된 책 세 권을 구입했는데 모두 다 현재 절판, 품절 상태다.

 

 

 

 

 

 

 

 

 

 

 

 

 

 

 

 

 

 

 

 

 

 

 

체코의 작가라면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 카렐 차페크 정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체코 출신 작가 중에 이반 클리마(1931~   )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1995년에 솔출판사에서 <하룻밤의 연인, 하룻낮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장편소설이 번역된 적이 있었다. 이 책에 소개된 작가의 이력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을 강제 수용소에서 보냈으며 이 때의 불안과 죽음의 체험은 그의 작품의 핵심적 분위기로서 반영된다. (중략) 70년 이후부터 89년까지 '체제 비판적 경향'을 이유로 창작 발표를 금지당했다."

 

 

 

책 뒷표지 소개에 의하면 '카프카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반 클리마의 소설을 접할 수 있는 책은 단 세 권 뿐인데 솔출판사에서 번역한 장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두 권은 체코 출신 작가들의 단편 모음집이므로 클리마의 단편을 만날 수 있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1617년에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집필하고 난 뒤에 사망한다. 그 작품은 <사랑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2000년 바다출판사에 번역 출간되었다. 현재 품절이며 다행히 E-Book 버전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래도 이왕이면 종이책도 다시 출간해주면 좋겠다)

 

 

 

 

존 클레랜드의 <내 사랑 패니 힐>은 <소돔 120일> 프랑스의 사드 후작, <채털리 부인의 사랑> 영국의 D.H. 로렌스 그리고 <북회귀선> 미국의 헨리 밀러와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에로티즘 문학 작품이다. 존 클레랜드는 18세기 영국에 살았던 문필가다. 번역본에 작가의 생애가 상세하게 소개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작가가 빚을 갚지 못해 투옥되었는데 감옥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변태적인 성추문 사건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된 사드는 그 곳에서 <소돔 120일>을 완성했다. 사드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클레렌드의 <내 사랑 패니 힐>도 노골적인 성적 묘사로 인해 금서로 지정되었고 초판이 나온 지 무려 250년에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 소설은 에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알라딘에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이라고 검색하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처음 국내에 소개된 <도깨비불>이 나온다. 그러면 이번에 검색창에 '삐에르 드리외 라 로셸'이라고 검색해보시라. 그러면 표지가 없는 두 권의 절판본이 나올 것이다. 그 책이 인화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두 권짜리로 된 장편소설 <몽롱한 중산층>이다. 초판은 1995년에 출간되었다. <도깨비불>은 1931년에 처음 출간했고 <몽롱한 중산층>은 1937년에 완성되었다. 이 소설은 프랑스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묘사하고 있다.

 

읽을 책이 너무 많다보니 정작 구입한 책을 펼치지 못한 채 책장에 모셔 두고 있다. 이제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느끼기에 왠만하면 구입한 책은 바로바로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을 듯하다. 심심하면 중고매장에 들려서 6권 이상 구입한다면 서점에 꽂히는 책이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방문 횟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만 들려야겠다. 한 달에 두 번 방문하는 것도 많은 것일까?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매장에 찾고 돈 있으면 읽고 싶고 마음에 드는 책이나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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