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도 모르게 돈으로 거래되고 있는 것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모든 것이 거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p 19)

 

 

 

* 올해 하반기부터 지정좌석제로 운영하는 정기이용권 버스가 시범 운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기이용권 버스는 1개월 이상 이용권을 구매한 승객을 대상으로 출근시간대 3시간(오전 6~9시), 퇴근시간대 5시간(오후 5~10시) 동안 좌석제로 운행된다. 하루 운행 횟수는 편도 기준 4회 이하다. 예컨대 일산에서 서울역까지 오가는 버스의 정기이용권을 구입하면 매일 지정장소와 시간에 좌석버스를 타는 식이다. 요금은 지역 여건을 반영할 수 있도록 자율신고제 방식으로 운영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과거 불법 사설 버스가 경기 용인에서 서울 삼성역까지 월 9만 9000원을 받고 운행한 적이 있으나, 정기이용권 버스 비용은 이보다 낮은 수준일 것"이라며 "일부 승용차 이용자들도 흡수해 대도시 교통난 완화에 도움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 인천지역의 일부 중등고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일제고사를 잘 치르면 상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들 학교는 기초학력 부진 학생이 없거나 성적이 우수한 학급에 상금을 주고, 기초학력 부진에서 벗어난 학생에게 1만원짜리 상품권을 지급하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리고 성적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학생은 자전거, 헤드폰, 선크림 등을 부상으로 받기도 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에 따르면 일제고사를 잘 보면 학급에 상금을 지급하거나 학생에게 문화상품권을 주겠다고 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조사 대상 96개 학교(중학교 54곳, 고교 42곳) 가운데 22%인 21개교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 최근에 방한했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청중 1만 명을 대상으로 무료 강연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샌델 교수의 강연을 돈으로 사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웃지 못할 역설이 발생했다. 이번 강연은 이메일로 신청자를 대상으로 선착순으로 무료 입장권이 지급됐으며, 신청자가 폭주하면서 입장권 발송이 조기 마감되었다. 하지만 신청이 마감된 입장권을 구하려는 사람이 여전히 많자, 이번에는 입장권에 웃돈을 얹어 팔려고 내놓은 암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강연 당일 인터넷 중고장터 등에는 샌델 교수의 강의 입장권을 장당 1만 원에서 많게는 3만 원까지 판매한다는 판매 글이 수 십 개씩 올라왔다.

 

 

돈은 편리하다. 또한 우리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돈의 권력은 막강하다. 일상생활의 웬만한 불편거리는 대부분 돈으로 해결된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이 그야말로 딱 어울릴 만큼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돈을 그만큼 많이 벌어야만 한다는 현실을 이제 한국사회는 시장지상주의에 익숙해진 듯하다. 하지만 돈을 대하는 태도는 어쩐지 불안하고도 이중적이다.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시장지상주의를 온몸으로 받아낼 자신도, 피해낼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다. 세상에는 이렇게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많다. 생명, 질서, 출생, 자연과 같은 가치들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샌가 돈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고 있다. 일정한 금액을 지불한다면 얼마든지 지정된 버스좌석에 앉아 편안하게 출퇴근할 수 있다. 그리고 시험만 잘 쳐셔 좋은 성적을 받게 된다면 노력의 성과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일정한 상금 및 상품을 받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샌델 교수의 강연 입장권마저도 거래 대상이 되었다. 후문에 의하면 강연 당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샌델 교수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사회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이루어진다?

 

 

 

 

 

(左) '보이지 않는 손'의 시장경제를 주장한 애덤 스미스 

(右)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공리주의를 창시한 제레미 벤담

 

시장을 옹호하는 두 번째 주장은 경제학자에게 좀 더 친숙한 것으로 공리주의자(Utilitarian)의 입장이다. 공리주의자는 시장에서의 거래가 구매자와 판매자에게 똑같이 이익을 제공하고, 결과적으로 집단의 행복이나 사회적 효용을 향상시킨다고 말한다.  (중략)  이렇게 시장 거래의 결과로 구매자와 판매자는 모두 행복해지고 효용은 증가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시장이 재화를 효율적으로 분배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입장이다.  (p 52~53)

 

 

시장경제 또는 자유주의 경제체제(시장자유주의)는 분업에 의해 생산된 재화와 용역을 자유 가격 체제의 수요와 공급 관계에 의해 분배하는 사회구성체이다. 실제로는 순수한 형태로서의 시장경제체제는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각 국가 또는 사회마다 다양한 형태로 수용되고 있다. 시장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모든 경제주체의 생산활동은 자유로우며, 시장에서의 물품구입도 자유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같은 흐름을 일견 너무 자유로워 무질서한 경제활동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가격이라고 하는 메커니즘이 시장에서의 상품매매를 성사시키고, 또 이것을 근거로 생산과 소비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의 특징은 장기적으로 보아 가격의 자유로운 흐름에 따라 자원의 합리적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시장자유주의 경제는 매우 효율적인 경제 체제이기는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경제적 효율성은 달성할 수 있지만, 형평성은 달성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리고 시장자유주의는 모든 경제 주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전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고 타고난 능력과 소질도 제각기 다르므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형평성 문제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면 사회적 불평등이 야기될 수 있다.   

 

 

 

 

 

공리주의적 효용 분배의 문제점

(참고자료 : 김정헌 『정책학NOTE』학문사)

 

공리주의에 입각한 정책(또는 제도) B의 전체 효용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갑과 을이라는 사회 구성원 개인 간의 배분상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면 정책 B는 불평등한 정책이 되고 만다. 이것은 결국 사회 전체의 효용 극대화를 강조하는 공리주의의 기본전제에 위반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역설은 시장경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시장자유주의의 환상을 부추기는데 공리주의가 일조하고 있다. 시장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근거의 배경에는 공리주의적 입장이 내포되어 있다. 공리주의는 한마디로 사회구성원 전체 효용을 극대화하도록 목표를 두고 있는데 시장지상주의자들은 시장 거래 행위에 참여하는 구매자, 판매자만 효용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 발전에 있어서 효응을 최대한 증진시켜 극대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각 개인은 자기의 이익을 뜻대로 추구하고 있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상상치 못했던 사회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봤던 애덤 스미스의 주장과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시장지상주의자들은 공리주의의 원리가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리주의 역시 시장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효율 분배에 대한 형평성 및 공정성의 기준으로 본다면 문제점에 직면하게 된다.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 효용의 극대화라는 기본전제로 인해서 개인상호간의 효용을 교환하는 것마저도 허용하고 있다. 즉,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 내용대로 도덕적 추구가치로 인정되고 있는 자유, 정의, 공익, 생명 등이 효용의 한 구성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전체 효용이 단지 크다는 이유만으로 개개인간의 배분이 제대로 돌아갔다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즉, 개인간의 효율배분이 불평등하더라도 전체 효용의 극대화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 간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공평성 또는 형평성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위에 제시한 표가 의미하는 것처럼 공리주의에 입각한 정책(또는 제도)이 전체 효용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갑과 을이라는 사회 구성원 개인 간의 배분상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면 그 정책(또는 제도)은 불평등한 성격이 되고 만다. 이것은 결국 사회 전체의 효용 극대화를 강조하는 공리주의의 기본전제에 위반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역설은 시장경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소개된 사례 하나를 예를 들어보겠다. 미국에서는 '전담 의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연회비 1500~2만 5천 달러를 지불하여 서비스에 가입한 환자는 불필요하게 기다릴 필요도 없이 본인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며 24시간 내내 언제나 건강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말 그래도 환자에는 '주치의' 한 명을 두고 있는 셈이다. 내용과 취지만 본다면 환자들이 좀 더 신속하고 원활하게 진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좋은 제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일정한 연회비를 지불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환자에게만 가능하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환자들은 진료 받기를 대기하고 있는 또 다른 환자들과 함께 진료실 밖에서 줄 서서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이들도 질 좋은 진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라면 비싸더라도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여 특별 진료 서비스 예약권이 암표로 판매되기도 한다. 과연 이러한 전담 의사 제도가 진료를 받기를 원하는 모든 환자들에게 전체 효용을 가져다주는 좋은 장점의 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제도는 단지 특정 상류층 계층만을 위한 '주치의' 서비스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의사들의 윤리적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선서 속 내용이 무색하게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적인 도덕적 윤리가 퇴색될 수 있다.

 

  

 

 

 도덕적 가치와 덕목은 상품이 아니다

 

1980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를 억제하여 '작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시행함으로써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시장지상주의의 번영을 알리는 서막의 신호탄으로 애덤 스미스의 초상화가 새겨진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해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시장자유주의가 오랫동안 경제 호황을 가져다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유례없는 풍요와 번영을 이끌어낸 시장자유주의는 인류가 미처 그 다음을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인간사회 자체를 거래가 최선의 행위로 강조하는 시장사회로 만들어버렸다. '재화를 사고 판다'는 논리가 더 이상 물질적 재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점차 현대인의 삶 전제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들은 대부분 저자가 태어난 곳이며 이미 시장경제가 활발히 작동하고 있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책의 서론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장경제의 윤리적 딜레마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답게 거래 대상이 천차만별이다. 미국의 일부 도시에는 죄수가 일정 비용만 지불하면 호텔방 못지 않은 독방을 마련해주는 교도소가 있다. 댈러스에 위치하는 어느 학교는 학생들이 책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돈을 지급해준다. 심지어 어느 명문대는 학생의 성적이 나쁘더라도 부유한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명문대로 입학하기 위한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면 입학을 허락해주는 비공식적인 관례(?)도 있다고 한다. ('관례'라기보다는 '청탁성 뇌물'에 가깝다)

 

미국에서는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 윤리적 딜레마의 사례들이 과연 우리나라에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곳곳에 시장경제체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윤리적 딜레마들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시장중심적 사고를 일상생활에서도 흡수하고 있다. 아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이미 잠식당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타주의, 관용, 결속, 시민 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   (p 177)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되면, 시민정신, 관용, 공공성, 우정과 사랑, 명예 등 인간사회의 중요한 윤리적 덕목이 사라진다. 샌델의 말처럼 이 윤리적 덕목과 가치들은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는 데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근육이다. 올바른 삶의 질로 이루어진 '근육'이 균형잡혀야 '사회'라는 신체가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다. 하지만 근육은 오랫동안 운동하지 않는다거나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된다. 이렇듯  삶에서 중요하고도 가치로운 것이 상품화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정한 것들의 가치가 변질되거나 저평가되어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게 된다. 시장가치를 내면화하는 경향은 삶의 질, 맺어온 관계들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의 대상이 아닌 '사물'로 인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경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시장 중심의 사고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센델은 시장경제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시장에 대한 도덕적, 정신적 논쟁을 꺼리는 태도로 인해 공적 담론에서 도덕적 에너지와 시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여전히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부패가 만연하다. 시장경제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딜레마는 빠른 시일 내 해결하기는 무척 어렵다. 시장경제 메커니즘이 우리 삶에 가져다주는 이익과 효용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 또한 외면하거나 방관해서는 안 된다.  

 

문제를 인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다. 우선 시장의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하여 시장의 가치에 의해 침해받고 있는 공공의 가치가 무엇이며, 그러한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공적 토론을 벌임으로써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는 토론 여건이 필요하다. 공공의 영역으로 중요시되는 교육, 의료, 시민권 등은 돈과 시장의 가치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영역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밀어내서는 안 되며, 공공선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이견이나 생각을 이끌어내는 공적 토론이 필요하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논의와 시장에서 가격으로 결정되어서는 안되는 사회적 재화를 평가하는 방법에 대한 공적 토론을 통해 적어도 우리가 선택했고 적응하고 있는 사회의 이면에 대해서 대중들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7-19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9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2-07-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귀하셨군요. 학기는 잘 마치셨는지

cyrus 2012-07-19 23:0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세인트님, 무더운 여름 잘 보내고 계신가요? 지금 방학인데도 학업을 위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 학기나 방학이나 일상은
변한게 얺네요 ^^:;

카스피 2012-07-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언제나 느끼는점이 정말 리뷰를 성실히 잘 하세요^^

cyrus 2012-07-19 23:10   좋아요 0 | URL
요번 1학기 때부터 공부하느라 블로그 관리 소홀히 하다보니 예전처럼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었던
분위기가 나지 않네요. 게다가 페북이랑 카스토리에 빠져서 요즘엔 짧은 글을 쓰는게 좋더라고요 ^^;;

2016-02-14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2-15 08:05   좋아요 1 | URL
이 글, 진짜 오랜만에 봅니다. 이상하게 옛날에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면 부끄럽습니다. ^^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마이클 샌델

 

 

 

서재는 시공을 초월하는 삶의 경험과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보물이에요. 집에 있는 저의 서재에는 책상과 나무로 만든 책장, 그리고 정원이 바라보이는 창문이 있어요. 대부분 철학, 역사 관련 서적들이 꽂혀있는데, 제가 학창시절부터 공부해온 정치 철학 관련 책들이 많은 편입니다. 그 책들 중 일부에는 제가 공부하며 필기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요. 가끔 제 아들이 그 책을 빌려 읽곤 하는데, 그럴 때면 '아빠가 학생 때 직접 필기하며 읽었던 아주 가치가 있는 책' 이라고 말해줍니다.

 

 (중략)

 

살아가면서 윤리적 딜레마에 부딪히게 될 때면, 저는 매우 곰곰이 생각을 합니다. 지인들과 대화를 하거나 토의를 하기도 하죠. 우선적으로 매우 강한 도덕관을 가진 제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녁을 먹으면서, 또는 여행을 하면서 크고 작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곤 했어요. 물론 가족 간에 서로 다른 의견들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개인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정의로운 판단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찾는다면, 그 고민을 가족과 함께 나누면서 가족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토론을 통해 함께 결론을 도출해 내는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마이클 샌델 인터뷰 내용 발췌 인용)

 

 

 

 

정말 멋있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는 열정적인 학자로서의 모습이 아닌 살아가는데 유용한 지식을 자식에게 되물림해주는 소박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2-07-16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하네요. 대단한 사람들은 비상한 이성과 뜨거운 마음까지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더더욱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어져요.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직도 장식용으로 깔끔하게 꽂혀있는 책장을 보며 한탄할 뿐입니다 ㅠ 그래도 나중에 제 아이가 마이클 샌델의 아들녀석처럼 말해주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아요. 그러려면 더 노력해야겠죠 +_+!!

cyrus 2012-07-17 12:57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책 아직 한 번도 안 읽어봤어요. 그 책 읽으려면 철학 기본지식이 있어야하는데 전 좀 더 기본지식부터 알고나서 한 번 도전해보려고요. 저도 샌델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이리시스 2012-07-1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샌델은 무슨 책을 읽는데요? (가서 보면 될 걸 또 묻는다..@.@)

cyrus 2012-07-17 12:58   좋아요 0 | URL
사진출처 옆에 글자 꾸욱 눌리면 바로 볼 수 있게 링크 걸어놨어요. 그런데 샌델이 읽는 책이..
좀 어려운게 많았어요. ^^;; 자신이 강추한 책 세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헤겔의 법철학,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에요 ㅎㅎㅎ;;

2012-07-18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8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8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9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2-07-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저 표정 애 같네요...ㅋㅋ
이 아저씨는 완전 한국에서 유명인사 되더만...네이버 서재까증 만들고..^^
근데..윤리적 딜레마가 늘 화두이던데...과연 답이 있을까요?,,

cyrus 2012-07-18 20:43   좋아요 0 | URL
정확한 답을 찾기가 어려울거같아요, 다만 토론을 통해서 윤리적 딜레마의 다양한 문제점을 인식시킨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금이나마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의 시련으로부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 남자가 사는 법

 

 

 

 

 

 

 

빈센트 반 고흐  「귀가 잘린 자화상」 1889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넓은 보리밭 한가운데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버리지 못했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눈 지 이틀 만인 1890년 7월 29일 동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신질환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눈을 감은 뒤에야 세상은 그를 알아주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인상주의의 거장, 빈센트 반 고흐.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서양화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고흐는 정말 '불행'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릴 정도로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 사랑하던 여인과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하고 아버지까지 사망하자 큰 상실감에 빠진다. 광적인 신앙을 갖기도 했고 자기 학대를 일삼기도 했다. 술과 담배, 정신질환으로 몸과 마음은 쇠약해져만 갔다. 고흐는 잘 알려진 대로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아를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고흐에게 정신병원은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병동에 생활하는 동안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삶이 다른 데가 아닌 정원에서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슬프지 않다"라고 털어놓기도 한다.

 

고흐는 정신병원 내부에 마련된 정원을 거닐면서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오히려 세상과 단절된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은 고흐의 예술혼을 꺾지 못했다. 정원에 있는 꽃과 나무에 둘러싸인 채 홀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고흐에는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정신병원에서 놓여나자마자 들판으로 달려나가 꽃핀 나뭇가지마다 찾아 다니며 온종일 그림만 그렸을 고흐의 모습이 상상된다. 지독한 삶의 시련으로부터 만신창이가 된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그림에 몰두했던 것이 그를 화가로서의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Vecent,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돈 맥클린의 노래 'Vecent'의 아름다우면서 슬픈 멜로디와 가사는 고흐의 불행한 사연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고흐가 불행한 삶의 고통들을 어떻게 극복했고 견뎠는지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리고 고흐가 왜 삭막하고 음침한 정신병원 내부의 정원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여러 점 그렸는지도.

 

고흐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원 속에 들어가면 꽃과 나무와 대화를 나눈다."라고 했다. 세상에 의해서 고집스럽고 괴퍅한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힌 채 살아가야만하는 고흐의 서글픈 심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만약에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은 채 홀로 남의 정원 한가운데서 꽃 한 송이 앞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면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만 해도 짐작이 간다.  

 

고흐는 꽃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못한 세상에 대한 자조 섞인 비애를 뱉어냈을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과 밀애를 나누듯이 꽃의 아름다움을 높이 사는 감미로운 표현을 했을까? 그가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을지 확인하는 방법은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고흐는 어떻게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자신의 처지를 꽃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했을 것이다. 불행한 삶을 살다간 고흐의 인생을 연상시키게 하는 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류시화 시인이 쓴 <오월 붓꽃>이다. 이 시에는 고흐가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붓꽃과 그를 심은 화자가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빈센트 반 고흐 「붓꽃」 1889년

 

 

 

 

봄눈이 내리던 날

오월 붓꽃을 심었지요

병을 앓고 난 끝이었는데

당신은 말했지요

아직 눈이 몇 차례 더 내릴 거라고

그 덕에 뿌리가 강해질 것이라고

늘어진 쥐똥나무 가지를 바람에 묶어 놓고

잠이 덜 깬 흙을 어루만져 주자

당부할 필요도 없이

봄은 말하는 듯했지요

잎을 내기 위해서는 상처를 견뎌야 한다고

 

(중략)

 

신비에 가까운 보라색 얼굴

겨우 겨울을 넘긴 가난과 화려

일시적인 소유에 기뻐하는 순간이 지나면

마지막 꽃잎을 떨구면서 오월 붓꽃은

속삭이는 듯했지요

나는 당신이에요, 나는 죽지 않아요

또 여러 번의 봄이 지나고

이곳에 나 혼자 남는다면

그래도 혼자 남는 게 아니라는 걸

오월붓꽃이 말해 주겠지요

 

(생략)

 

 

- <오월 붓꽃> 부문, p 58~59 -


 

 

마음의 병으로 괴로워하는 화자는 봄눈이 내리던 5월에 붓꽃을 심었다. 그는 애초부터 남은 삶을 더 이상 연명하기를 바라지도 않을 정도로 회의적이다. 그러던 중 화자는 우연하게 자신이 심은 붓꽃의 작은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붓꽃은 화자에게 말을 건넨다.  "아직 눈이 몇 차례 더 내릴 겁니다. 그 덕분에 뿌리가 강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따뜻한 봄을 맞이하게 되면 이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때까지 차디찬 겨울, 즉 삶이 안겨준 시련으로 인해 생긴 상처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힘든 시간이 지나가고나서야 붓꽃은 화려한 보라색을 발하면서 아름다운 꽃 한송이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붓꽃도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는 불변의 과정을 거스를 수 없는 법. 화려했던 보라색 꽃이파리가 하나씩 땅으로 떨구어지기 시작하면서 붓꽃은 낙화(落花)를 눈 앞에 두게 된다. 그러면서 붓꽃은 자신을 심어주고, 보살펴주고 아껴준 화자에게 애정이 담긴 말 한 마디를 남긴다. "나는 당신이에요, 나는 죽지 않아요."  자신의 죽음 때문에 삶의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붓꽃이 화자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였다.

 

붓꽃의 꽃말은 '기쁜 소식'이다. 아름다움을 발산하기에는 붓꽃에게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붓꽃은 낙화의 시간이 다가온다고해서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다. 붓꽃의 생은 여기서 한 번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년 봄에 다시 개화하기 때문이다. 꽃봉오리가 활짝 펴기 전까지 이어지게 될 추운 겨울철을 견대내면 된다. 붓꽃 한 송이가 피고 지는데까지의 시간적 과정은 인간의 흥망성쇠를 압축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는 기쁜 일, 불행한 일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줄곧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 앞에서 스스로 괴로워하고 비탄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불행한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다시 찾아오게 될 희망을 기다린 채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으로 받은 정신적 상처를 혼자 치유한다고해서 빨리 낫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의 정신적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건내줄 수 있고 '공감'과 '연대'로 끌어안아야 한다. 고흐는 운이 좋게도 자신의 외골수적인 성격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행복함을 맛볼 수 있었다. 동생 테오 반 고흐, 닥터 가셰 박사, 우체부 룰랭 씨 그리고 넓은 정원 속에서 그가 먼저 말 걸어오기를 기다렸던 수많은 꽃과 나무들. 

 

 

  

 

 내 인생의 화연영화는 바로 너와 함께 하고 있는 그 순간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사자성어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의미한다. 영화 탓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슬픔이 묻어 있는 느낌이다. 아름다운 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는 아쉬움, 그래서 더 깊게 묻어나는 애잔함까지. 그래서 나는 한 때 잠시나마 화양연화는 별도로 '존재해서는 안되며' 삶의 모든 시간은 이른바 '전성기'이든 아니든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류시화 시인의 <화양연화>를 읽는 순간, 그런 인식은 단지 화려했던 시간 뒤에 찾아오는 아쉬움과 후회를 어떻게든 잊어버리기 위한 자기합리화적인 위선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마르크 샤갈  「생일」 1915년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들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우리는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혀버린 존재를

 

 내가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훗날 인생에서 우연히 명성을 얻고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 때가 나의 화양연화였지

 다락방 어둠 속에서 달처럼 희게 빛나던

 그 이마만이 기억에 남아 있어도

 

 

 - <화양연화> 부분, p 68~69 -

 

 

 

이 시는 제목과 내용만 본다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 그 중에서 뜨겁게 사랑을 나누던 과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는 분명 '사랑 노래'이다. 연시(戀詩)는 대개 실연의 상처를 노래하거나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함으로써 임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자의 고독과 상처를 드러내는 특징을 갖는다. <화양연화>의 전체적 내용을 본다면 과거 사랑을 나누었던 임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읊조리고 있지만 마지막 5연에서 화자는 지나간 과거의 시절이 자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화자가 그리워하는 '사랑'이란 단순히 상대에게 성적으로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동떨어진 채 살고 있는 '난해한 시'인이다. 어떻게 보면 <화양연화> 속 화자야말로 주류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던 예술가 반 고흐의 삶과 가깝게 느껴진다. 시인인 화자는 자신의 문학성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좌절감에 시달리다 못해 정신적으로 큰 문제로 고민하게 되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직전까지 오게 된다. 하지만 화자에게는 본인의 슬픔을 이해해줄 수 있는 연민의 눈물을 흘릴 줄 알며 나락에 빠진 불쌍한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라는 연인이 존재하고 있다. 시 속에 등장하는 '나'의 연인 '너'는 화자가 쓴 난해한 시마저도 이해할 정도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 연에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나'는 현재 '너'와 단절된 상태 중이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아무도 돌봐주지도 않는 외톨이 시절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후회한다. 시인 '나'에게 있어서 화양연화는 유명한 시인이라는 직함이 만들어주는 명예와 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화자의 진정한 화양연화는 자신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힘들 때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안아주고 보살펴 주었던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으리. 이제는 '너'의 존재가 남기고 간 다락방 안에서의 추억은 '고독'이라는 어두운 감정에 지배당해 점점 기억의 망각 속으로 퇴색되어질 뿐이다.   

 

 

 

 

 우리는 '류시화'의 시가 더 필요하다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 <옹이> 전문, p 12 -

 

 

 

동양적 자연관에 비추어 보면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즉, 자연을 자신과 분리시킨 객관적 관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 속에서 자연과 합일된 삶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상태를 물아일체(物我一體) 등으로 표현한다.

 

두 번째 시집 발표 이후 무려 15년 만에 쓴 류시화 시인의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에 수록된 시들은 대체적으로 '물아일체'의 자연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체인 '화자'와 객체인 '자연', 즉 꽃, 옹이, 뭉돌, 반딧불이 등 일체 및 조화를 이루었다는 감정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물아일체적이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적인 자연관과 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시인이 단지 '인간 대 자연'이라는 범위의 틀 속에서 조화만을 강조하고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물아일체적 사상을 좀 더 '인간 대 인간'으로 전위함으로써 현대사회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공감'과 '연대' 그리고 '조화'를 그리워하고 있다. 시인은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공감'과 '연대'의 감정을 끄집어내어 시를 통해 감정이 빈곤한 독자들을 위해 환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고통, 불행, 시련을 견뎌줄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시집의 추천사를 쓴 이문재 시인은 우리에게는 시가 더 필요하며 더 많아져야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내'가 '나'를, '내'가 '너'를 만나기 힘들어진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속세의 명예와 부에 대한 탐욕을 놓지 않으면서도 감정의 빈곤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요즘, 우리에게는 '류시화'의 시가 더 필요하다. 네 번째 시집이 언제 발간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빛나는 문장들이 벌써부터 나오기를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 '선거 불완전론' 레토릭의 위험성

 

 

 

 

 

 

 

 

최근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안을 놓고 당내에서 내홍의 사태가 번지면 번질수록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 결과 여부에 대한 화제가 살짝 묻힌 감이 있다. 이번 주 월요일에 현장투표와 모바일투표를 벌였고 오늘 실시하는 미투표자를 대상으로 한 모바일 투표 결과를 합산하여 통합진보당의 차기 대표가 선출된다. 대표 경선은 구당권파의 지원을 받는 강병기 후보와 신당권파의 강기갑 후보의 양자 대결로 펼쳐지고 있어 선거 결과에 따라 당의 쇄신 방향뿐만 아니라 이석기, 김재연 의원의 제명이 결정될 것이다.    

 

이석기 의원은 올해 상반기동안 수많은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명언들(?)을 남겼다. 애국가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인해서 정계, 대중, 여론으로부터 '종북주의자'라는 비난의 뭇매를 받았지만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비난대상이 되고 있었던 자신의 정치적 가치관과 그간의 행적들에 대해서 자기합리화하는 발언도 있었다. 4.11 대선이 끝난 이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이 거론되면서부터 그 문제적 이슈 한가운데에 이석기 의원이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서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이 의원은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하여 당내 부정선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 의원은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 대해 "일부 부실이나 부정은 있을 수 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번 사태는 전체 선거를 부정할 만큼의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번 경선을 '총체적 부정선거'로 매도하는 것은 정치적인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 진보정당은 천상의 정당이 아니다. 진보정당이기 때문에 100%여야 한다는 건 대단히 무서운 논리"라며 당 안팎의 비난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일부 부정을 인정한 점 그리고 완벽한 선거가 없다는 그의 주장을 통해서 당내 비례대표가 부정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이 의원 본인이 스스로 시인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비례대표로 선출할 수 있게 만든 부정적인 과정들이 정당한 행위였음을 뻔뻔하게 자기합리화하고 있다.

 

그런데 '선거의 불완전함'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이 의원의 레토릭(Rhetoric)은 논리성이 부실하면서도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기도 하다. '선거'(選擧)국민에게 정치참여의 기회와 통로를 제공하여 여러 형태의 정치참여 중 가장 일반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하도록 기능한다. 이 의원의 '선거 불완전론'은 선거의 정치적 참여기능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점 또한 강조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1987년 6.29 선언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 사회로 이행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정치과정은 국민들에게 정치불신과 함께 정치적 소외의식을 불러일으켜 '정치적 무관심'(Political apathy)을 낳게 만든다. H.D. 라스웰(H.D. Lasswell)과 M.A. 캐플런(M.A. Kaplan)은 현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탈(脫)정치적, 무(無)정치적, 반(反)정치적' 이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탈정치적 무관심은 권력의 행사에 의한 자신의 요구 충족에 실패하여 권력에 환멸을 느끼고 후퇴하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무정치적 무관심은 예술 등 정치 이외의 가치에 극단적으로 기울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반정치적 무관심은 아나키스트(Anarchist)나 종교적 원리주의자 등 자신이 갖는 가치가 본질적으로 정치와 충돌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나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무관심은 탈정치적 유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고 자신이 요구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허술한 정치권력의 행보에 대해서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서 불신에 이르게 된다. 정치에 대한 불신의 폭이 깊어지면 깊을수록 국민들은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의 정도가 낮게 되며 정치과정에 대해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문제점에만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면 자칫 '민주주의'를 현실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그저 '민주적 원리만을 강조하는 이론'으로 인식하게 된다.

 

 

 

 

 민주주의, 정말로 최악의 정치 체제인가?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민주주의는 우리가 여태껏 채택했던 모든 제도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치 체제'라고 말했다. 만약 '정치적 무관심'이 만들어 낸 패배주의적 감정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어리석은 대중이 처칠이 한 말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모순과 문제점을 옹호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은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정치 체제란 말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즉, 완전히 맞다고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틀렸다고도 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최악의 정치 체제이면서도 동시에 인류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최고의 정치 체제다. 처칠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역설적 표현이 구사된 영국식 유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로저 오스본이 펴낸『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본다면 고대 아테네에서 처음 등장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민주주의 체제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부터 시작해서 입헌군주제가 탄생하게 만든 영국의 명예혁명, 유럽 정치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의 과정 등 이름만 들어도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왜 처칠이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치 제체'라고 말했는지 독자들은 고개를 자연스럽게 끄덕이게 것이다.

 

 

 

 

 말도 많고 탈이 많았던 민주주의의 역사   

 

민주주의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democratos(국민의 지배)'라는 말이 나왔듯이 그리스에서 기원하였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발전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직접민주주의에 그쳤다. 모든 시민들이 '입법의원'이 되어 직접 참여하였다. 이때의 여성들은 선거권이 없었고, 노예제도가 존속하고 있었다. 물론, 고대사회의 민주제도에서도 평등원칙이 존중되기는 하였으나 보편성에 입각한 만인의 평등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의 정치적 참여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러한 원칙을 최초로 문서화하여 선보인 곳이 오늘날 스위스 알프스에 위치하고 있는 그라우뷘덴이다. 1499년 그라우뷘덴 주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해 자유국가임을 선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주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투표제도 또한 실시했는데 국정 운영을 담당하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오늘날의 국민투표제의 형태라기보다는 주의 지도자가 제안한 정책사안에 대해서 마을 주민 전체의 합의를 도출하는 공동체적 측면이 강한 투표제였다.

 

이렇다보니 공동체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을 강조하는 그라우뷘덴의 정치형태에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오직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공동체적 삶에 익숙한 주민들은 자아의 주관적 의식을 배제한 채 정책결정에 참여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라우뷘덴의 통치 기구들의 권한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집단적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사법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치명적 약점이었다. 

 

 

 

민중이 완전한 자주권을 쥔 상황에서 그 힘에 대한 견제가 부족하다면 제멋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나름대로 만들어놓은 법을 마을 전체가 통째로 위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735년 한 사내가 반역 혐의를 받은 사건이 터졌다. 용의자의 집은 약탈당했고, 추종자는 돌 세계를 맞았다. 한 마을 주민은 "합당한 왕국"에 의뢰해 재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곧 당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 133)

 

 

 

1688년에 발생한 영국의 명예혁명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왕권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역사 시간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명예혁명 이후에도 영국의 의회정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민주적이지 않았다. 정말 문자 그대로 '의회'만이 주권을 가진 의회정치였을 뿐 실질적으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의회에 입성하기 위한 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혈연 중심으로 유권자를 내세운다거나 매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비민주적인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정치 체제 속에서 인민의 대표로써 책임을 다하는 민주적인 '정치인'이 나올 리가 없었다.

 

 

1715년에서 1831년 사이, 스카버러 구에서만 서른여섯 번의 정기선거과 보궐선거가 치러졌지만 여러 후보가 경쟁한 것은 고작 일곱번 뿐이었다.  ...  중앙정부가 적어도 의석 하나를 수중에 넣거나 아예 두 의석 모두 독차지하기 일쑤였다. 

 

 (중략)

 

개인과 가문의 경쟁 구도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  진정으로 치우침이 없는 후보는 극히 드물었다.   (p 169)

 

 

비단 명예혁명을 이룩한 영국에서만 비민주적인 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민혁명의 전형이라고 알려져 있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또한 혁명 성취 이후 지금의 민주주의 체제로 온전하게 확립되기까지 수많은 진통을 겪어야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선거 투표율을 기록한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사료에 의하면 1791년 당시 파리에는 대략 8만 명의 유권자가 있었지만 이 중에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1만 7천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입후보한 총 946명의 선거인단 중에서 고작 200명만 당선되었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 헌법에서는 인민들의 투표권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곧 실제 선거 투표 참여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프랑스 시민들이 투표를 행사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선거인단 사이에서도 자신들의 당선을 위해서 부패와 사기, 협박, 폭력이 은밀하게 자행되었다. 심지어 비밀투표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파의 후보의 추종자들은 버젓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투표할 정도였다.

   

 

 

 

 

학식이 높은 토머스 제퍼슨의 펜 끝에서 주로 다듬어진 독립선언문은

장엄하고 화려한 수사학의 극치를 드러내는 이념적 문헌이라 할 만하지만,

헌법은 넉 달 동안이나 논쟁과 줄다리기, 타협을 거듭하며 도출해낸 실용 문건이었다. (p 188)

 

존 트럼벌 「1776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의 미합중국 독립선언」 1820년

 

 

인류 최초로 삼권분립을 명시하였으며 자유민주제도를 성문화하는 등 근대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확립한 미국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곧 권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대립과 권모술수가 펼쳐진 미국 정치판의 역사이기도 하다. 독립혁명(1775~1776) 승리 이후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채택되기에 이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과정들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순전히 평화적으로 이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시계방향 순으로 왼쪽 위에서부터 토머스 제퍼슨(1743~1826, 제3대 대통령), 존 애덤스((1735~1826, 제2대 대통령),

애런 버(1756~1836. 제퍼슨 행정부의 부통령), 알렉산더 해밀턴(1755/1757~1804, 연방주의자),   

 

제퍼슨, 애덤스, 해밀턴 이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조지 워싱턴과 함께 미국 헌법 제정을 위해 이바지를 한 '동지'였으나 얽키고 설킨 상반된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서로 등을 돌려야하는 '적'이 되고 말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1790년에 조지 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에 취임했지만 강력한 중앙정부를 주장하는 연방주의자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정책대립으로 1793년에 사임하였다. 그리고 제퍼슨과 해밀턴을 주축으로 한 반 연방주의자와 연방주의자 간의 대립은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어졌다. 제퍼슨은 해밀턴과 같은 연방 당에 소속된 존 애덤스와 경쟁을 벌였지만 결과는 존 애덤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선거에 배패한 제퍼슨은 부통령에 만족해야만 했지만 두 사람의 대립은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현되었다. 이번에는 제퍼슨이 애덤스를 물리치고 제3대 대통령으로 올랐다. 재미있게도 제퍼슨의 승리에는 정적 해밀턴의 도움이 있었다. 해밀턴이 정적을 도와주게 되는 배경의 이유에는 자신의 또 다른 정적 애런 버의 정치적 진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선거에 패배한 애런 버는 부통령으로 임명하게 되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애런 버는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지닌 반 연방주의자인 제퍼슨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다. 애런 버의 분노는 1804년 해밀턴과의 결투를 성사하게 만들었는데 해밀턴은 결투 끝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어 사망하게 된다. 미국 건국을 위해 큰 공로를 기여를 한 정치인들의 복잡한 정파 경쟁은 오늘날의 미국 특유의 정당정치 체제를 완성해주었지만 그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에는 피를 부를 정도로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 이들은 정당의 이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에 반하는 숙적과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인신공격은 기본이며 해밀턴과 애런 버의 결투처럼 서로 간에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은 그 당시로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정치적 이념에만 초점을 둔 정파 경쟁은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모하여야 한다고' 천명한 독립선언문의 내용이 무색하게 할 정도로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대중들이여, 민주주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지어다

 

시중에 민주주의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서적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저 오스본의『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와 같이 정말 지극히 '현실적인' 민주주의의 역사를 상세하게 소개하는 책이 과연 몇 권이나 있을까?  고대 그리스부터 스위스 알프스, 영국, 미국,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공산주의가 무너져 냉전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되는 현대까지 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민주주의 체제가 인류의 투쟁과 타협이 반복되어 만들어 낸 고귀한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투쟁'의 의미에는 단순히 민주주의에 반하는 부당 세력에 맞서 자신들의 주권을 찾으려고 하는 인민들의 혁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정치인들 간의 대립 역시 포함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민들의 주권 확립과 거리가 먼 정치인들 간의 정치적 대립이 민주주의 체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 역사 속의 투쟁들을 보게 되면 대한민국 정치사를 보는 듯한 데자뷰를 불러일으킨다. 영국 명예혁명과 프랑스 혁명 이후의 역사를 보라. 1960년 4.19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이라는 획기적인 일대사건이었지만 4.19 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未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한 모습의 과정이 영국과 미국의 사례와 흡사한 면이 있다. 그리고 독립전쟁 이후 미국 내의 정파 경쟁은 정당이 내세우는 이념과 가치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정당 내부의 대립을 마다하지 않는 최근 여.야당의 행보를 보는 듯하다.

 

다만 적나라할 정도로 벌거벗은 민주주의의 역사만 가지고 여전히 민주주의를 '최악'의 체제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이상형에 사로잡힌 채 현실적인 정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정치적 무관심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투쟁'과 '타협'의 과정들은 결국 민주주의가 그 시대상의 유동적인 변화에 따라서 끊임없이 적응하기 위한 과정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민주주의 사회는 '수많은 삶의 표현'이며 최종적으로 달성되는 단일적인 체제가 아니라 늘 변화가 이루어지는 '현재 진행형'이다. (P 497)  변화가 잦고 불확실한 사회체제의 변화 과정 속에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부당한 간섭과 부정부패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해법을 확답을 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선례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부당한 반민주적 거대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도출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들 앞에서 굴복한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 채 왜곡된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대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곳에서 채택된 정체는 민주주의다. 우리는 해외의 적들이 극렬하게 매도했던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형제들이여, 민주주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지어다.  (1809년 영국의 언론인 겸 목사 알라이어스 스미스의 말, P 193)

 

 

 

정치적 무관심의 왜곡된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중들 그리고 민주주의 원리의 문제점만 부각시켜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여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사회의 국론을 분열시키는데 조장하고 우둔한 대중들을 현혹하는 시정잡배들에게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내부의 적들이 부정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완벽한 이상형'이라는 환상적인 옷을 입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민주주의의 역사를 제대로 한 번 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그 역사를 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지구상 '최악'이면서도 '최고'의 정치 체제. 진짜 '민주주의'이니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2-07-1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길을 잃었어요. 제퍼슨은 알겠는데..( '') 흥미롭네요. 다 이해가(절반도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시루스님 리뷰에는 문제가 없고 이건 제 탓이에요. 혹시 미국 대통령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인문서 알아요? :)

1,3,4공화국이 자행한 민주선거의 어이없는 작태가 떠오르지만 프랑스, 미국 역사도 흥미롭네요.

아홉시 뉴스에서 올 선거 지금의 최대 화두가 '경제 민주주의'라고 했어요. 지식욕에 불지르는 굿 리뷰예요! 뭐 제 지식욕은 당연히 지식욕에서 끝납니다. 대부분.( '')

좋은 주말 밤이에요^^

cyrus 2012-07-15 23:57   좋아요 0 | URL
요즘 제가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을 읽고 있는 중이라서 미국사에 대해서 부쩍 관심이 생기게 되었어요. 저도 많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추천할 수 있는 건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이 있고요,
그나마 미국 대통령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이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이 있는데, 이 책이 나온지 10년 좀 넘었어요. 지금 알라딘에 검색하면 절판 상태로 나와요. ^^;;

제가 책을 읽으면서 중요하다싶은 내용을 나름 선별해서 썼는데 상세하게 쓰다보니 아이리시스님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 책 분량도 그리 얇지 않아서, 한 권 완독하는데만 2주 정도 걸렸어요. 역사서라서 그런지 중간에 지루한 부분도 조금 있었고요 ^^;;

지나가다 2012-07-15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리뷰인데, 떠오르는게 있어서 주제넘는 몇마디 적어놓고 갑니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면 이석기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고요. ㅎㅎㅎ

민주주의의에 대한 믿음은 대체로 민주주의가 역사에 도달한 최종 지점이며, 각 개인의 평등과 서로 다른 주장을 통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하는 도덕적 전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각 개인에게 요구하는 요인들은 실제로는 까다로운 것들입니다.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민주주의의 개인들은 정치적 관건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그 관건에 맞춰 토론할만한 소통능력과 역량을 갖춰야하는 개인들이 되어야 하고, 모든 안건을 투표에 붙여도 기꺼이 참여해야 하는 실천성과 개인성을 훼손하는 프레임을 방지하지 위해 정치적 움직임을 적정 수준에서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성적 개인, 그 사람의 성향이나 행위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견과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무지의 베일을 뒤집어쓸 의무,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선택되었다면 그것의 무오류성을 인정해야 하는 의무까지. 민주주의가 직접 지시하지 않는 여러 한계들과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 요구하는 수준은 무척 까다롭습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정치적 관건을 논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볼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이상속에서 민주주의가 도덕으로 기능하는 현상이 아닌지...

대한민국 사회의 국론을 분열시키는데 조장하고 우둔한 대중들을 현혹하는 시정잡배 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겠고 충분히 동의하지만, 민주주의는 분열되고 토론되어야만 기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최장집이 말하듯, 민주주의는 갈등과 불안의 현장를 뜻하지 화합되고 안정된 정치체를 뜻하는게 아니니까요. 민주주의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므로 그 원칙은 하나의 도달점으로 설정된 채 훼손되는 것은 안된다고 자동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혹시 도덕화 된 민주주의의 이면은 아닐까요. 오히려 민주주의다운 것은 민주주의의 숨겨진 가정을 끄집어 내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담지해낼 수 있는 정치체인지, 무엇을 보완하고 바꾸어가야 하는지를 격렬하게 토론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짧은 생각을 잠시 해 보았습니다.

좋은 글인데, 괜한 소리를 남기고 가는 것 같네요. 책 많이 읽으시고 더 정진하시면 좋겠습니다. 부족하고 생각이 짧은 글 면목없게 남겨두고 갑니다.

cyrus 2012-07-16 00:10   좋아요 0 | URL
조용하고 많이 부족한 서재에 찾아와 좋은 내용의 댓글을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님께서 쓰신 댓글 내용이 너무 좋고 인상 깊어서 여러 번 또 읽었습니다. ^^
제가 보기에는 전혀 주제넘는 내용이 아닌데요. 손님으로 댓글 남기신 점에 대해서 오히려 아쉽게 느껴집니다. 저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깊은 내공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최근에 민주주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알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리뷰의 책 이외에도 해밀턴과 매디슨이 쓴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와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는 중이랍니다.
게다가 이번에 나온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이 미국 정치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주를 이루고 있어서 겸사겸사 읽게 된 계기가 있었고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익숙한 이 단어인 민주주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고요. 최근에 본격적으로 독서를 통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

마지막 부분에 님께서 밝혔듯이 올바른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대해서 공감합니다. 님의 의견이 오히려 제가 이 리뷰를 쓰면서 꼭 강조하고 싶었던 견해였는데.. 어떻게 쓰다보니 그 중요한 내용을 잠시 간과하고 말았네요. ^^;;

댓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제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보충삼아 새로운 관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혹시 제 답글이 님이 말씀하시고자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와 부합되지 않는다면 아직 많이 배워야할 정도로 부족한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이 점에 대해서 관대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2-07-1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논쟁한 주제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와닿죠.특히 지방분권이냐 중앙집권이냐 하는 문제는 지방자치나 경제학 논쟁에도 많은 빛을 던져줍니다.
알렉시스 트 토크빌<앙시앙레짐과 프랑스 혁명>은 혁명사 공부할 때 읽었는데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종합은 이렇게 하는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미국민주주의 같은 책도 정치 및 사회사상사의 고전이죠.

cyrus 2012-07-18 20:48   좋아요 0 | URL
네, 노자님이 언급하신 두 권의 책 읽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의 저자인 해밀턴과 매디슨은 미국 행정학 발전사에서도 잠깐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읽고 있습니다. ^^

감은빛 2012-07-1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
미국 역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
이 글을 읽고나니 관심이 생기네요.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 점은 출판사입니다.
하필 저 출판사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니 모순이란 생각이 드네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출판사에서요.

개인적으로 이 출판사 책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절대 사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이 출판사에 일하는 사람이라면 사귀지 않습니다.
그 출판사가 어떤 출판사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와 말이 통하기 쉽지 않을테니 사귈 이유가 없구요.
알면서도 거기 일하는 사람이라면 제가 경멸을 보내야할 처지이니 서로 사귀면 피곤하겠지요.
말이 길어졌는데, 이 출판사에서는 이런 좋은 책은 안나왔으면 좋겠네요.

암튼 저야말로 좋은 글에 쓸데없는 댓글을 남겨서 죄송하네요!

cyrus 2012-07-18 20:55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죄송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
방금 검색해봤는데,,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안 알려주셨다면 몰랐을거에요.
정말 아이러니하네요. 그렇다고 저를 외면하시면 안 됩니다. ^^;;
 

 

 

 

 * 인상주의 (印象主義, impressionism)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출발하여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상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경향. 인상주의는 대상의 객관적 존재를 묘사하기보다는 주관적 인상을 있는 그대로 옮겨 그리는 정서적, 감각적 태도다. 문학예술의 경우 그것은 지속과 영속에 대한 순간의 우위를 강조한다. 우연이 모든 존재의 원리가 된다.

 

 

 - 네이버 백과사전 중에서 -

 

 

 

 * Read as impressionistic Paul Auster (줄여서 RIPA)

 

 인상주의적으로 폴 오스터 읽기, 폴 오스터 특유의 문학적 관점에 대해서 논하기보다는 독서를 통해서 느끼게 된 주관적 인상을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하고 잡문 형식으로 자유롭게 풀어내는 새로운 독서 및 작문 형태이다. cyrus라는 독자(讀子)가 독자적(獨子的)으로 마음대로 풀어내기 때문에 폴 오스터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전개해나가는 것이 큰 특징. 작품 속 구절을 마음대로 발췌 인용하여 거기서 얻게 된 순간의 독자의 주관적 인상을 강조한다. 그래서 일관성 없는 우연성이 이 글의 존재 원리가 된다.

 

 

 

 

 

 

 

 

 

 

 

 

 

 

 

 

 

 

 

 

 

 

지넌 여름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다가 이제 그만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냥 그런 겁니다. 갑자기 그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든 거죠. 아마 너무 여러 해 동안 야구 구경을 못 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더블 플레이와 홈런을 정량만큼 보지 못하면 정서가 고갈되기 시작할 수도 있거든요.

 

 - 폴 오스터 『거대한 괴물』열린책들 p 33 -

 

 

 

 

 

 처음이자 마지막인 야구장 관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야구장에 직접 가본 게 딱 한 번 뿐이다. 그런데 야구장에 가 본 경험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없다(!)  야구장에 한 번 가봤다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은 야구장에 가 본 그 닥 한 번의 유일한 경험이 아주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정확히 몇 살 때 갔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와 단 둘이서 야구장에 갔다는 사실뿐이다. 내가 태어난 곳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곳이 대구다. 대구라는 지역에 야구를 논하게 된다면 당연히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삼성 라이온즈이다. 그리고 라이온즈 팀의 홈 구장이 바로 시민운동장이다.

 

그런데 야구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열기에 대한 첫경험이 그리 좋지 않았나보다. 그 때 그 시절에 대해서 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어린 나 때문에 야구 경기 제대로 관람하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낯선 사람들이 꽉 들어서 있는 관람석에 들어선지 10분도 채 안 되어 울고 불고 난리 부르스를 쳤단다. 어린 마음에 수많은 어른들이 환호성 지르는 모습이 무척 낯설고 무서웠던가 보다. 그리고 하필 그 때가 한참 무더운 여름철이라서 나는 야구장 외곽에 위치한 작은 식료품 코너에서 아이스크림 두 세 개를 먹어치웠다고 한다. 괜히 어린 아들과 함께 야구장 데리고 갔다가 경기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한편으로는 '웃프게' 느껴진다. 차라리 내가 야구라는 스포츠의 흥미에 눈을 떴을 때 데리고 가시지...  그 이후로는 아버지와 함께 야구장에 관람한 일이 없었고, 정작 야구를 좋아하면서도 야구장 한 번 가보지 못했다.

 

 

 

 

 여름의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솟구치는 야구 구경에 대한 갈망 

  

너무 오랫동안 야구 구경다운 구경을 하지 못 해서 그런지 야구장에 정말 가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들 때가 많은 요즘이다. 최근에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야구장에 가고 싶은 갈망이 잦아졌다.

 

주변의 친구들이 여자친구 혹은 동성 친구들과 함께 야구장을 관람하고 있다는 '인증샷'을 보게 되면 한편으로는 그들이 부러우면서도 야구장 한 번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게다가 시즌 초반부부터 하위권을 맴돌던 삼성 라이온즈가 어느새 1위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 누가 야구장에 가서 야구 경기를 직접 보는 것을 마다하겠나. 내가 발췌 인용한 폴 오스터의 『거대한 괴물』속 구절처럼 야구 경기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해서 지루하면서 진부한 일상으로 인해서 '삶의 즐거움'이라는 정서가 고갈되지 않을까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한다.  

 

 

 

 어설프지만 재미있었던 '초딩식' 야구 경기  

 

내가 정말 '야구'라는 스포츠를 본격적으로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때가 초등학생 4학년 때부터다. 평소에 운동 같은 걸 즐겨 보지 못할 정도로 천성적으로 운동을 좋아하는 체질이 아닌 나는 운 좋게도 또래 친구들 사이에 끼여 야구를 처음 해보게 되었다. 요즘 최신식으로 변모하고 있는 최근의 학교 운동장에 비하면 구식에 가까울 정도로 모래만 있는 열악한 상태였지만 야구공, 야구 배트 그리고 글러브 몇 개만 있으면 얼마든지 야구 경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내가 했던 '초딩식' 야구는 투수, 포수라는 직책은 없었다. 오직 타자와 수비수 그리고 주자의 플레이를 지휘하는 주루코치만 있으면 되었다.

 

일단 야구 경기를 하는데 최대한 불러 모일 수 있는 인원의 수에 따라서 동등한 인원으로 두 팀으로 나눈다. 그리고 야구 경기장처럼 운동장에 다이아몬드 형태의 내야 라인과 베이스(Base)를 표시해둔다. 먼저 공격하는 팀의 타자는 본인이 직접 야구공을 위로 던져 배트를 휘둘러 친다. 자신이 직접 공을 던져 배트를 휘두를 수 있는 기회는 단 세 번. 세 번의 기회에도 야구공 한 번 제대로 맞지 못하면 아웃(Out)이며 다음 타순으로 넘어간다. 스트라이크(Strike) 삼진 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파울(Fowl)은 적용되었지만 정식 야구 경기와는 다르게 스트라이크에 포함되지 않았다. 일단 공을 쳐서 안타를 만들어야 했다. 공 한 번 제대로 맞추지 못 한다면 끝이다. 타자가 친 공이 내야 라인에 크게 넘어가면 홈런으로 인정했다. 세 번의 타자가 아웃 되면 공수 전환으로 이루어진다.

 

경기 규칙에 대해서 더 이상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어설프게나마 이런 방식으로 야구 경기를 했다. 하지만 무척 재미있었다. 특히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야구 경기에 몰입하다보면 친구들끼리 싸울 때가 있었다. 다이아몬드 라인과 주자 베이스를 모래 운동장에 표시를 하다보니 가끔은 베이스에 있는 주자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세이프(Safe)인지 아웃(Out)인지 정말 애매모호한 판정이 나올 때가 있다. 야구 경기를 진행하는 데 꼭 필요한 정식 심판이 없다보니 간혹 상대 팀 친구들과 언쟁을 벌인다거나 심하면 단체 싸움으로 돌변하여 벤치 클리어링(Bench-clearing)까지 번질 때 있었다.

 

그 때 야구를 엄청나게 좋아했던 몇 몇 친구들은 그 당시 초등학생들의 꿈이었던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야구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들은 거의 주말마다 직접 시민운동장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배우거나 야구 경기를 했고 종종 라이온스 소속 야구선수들을 직접 만났다고 맨날 자랑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또 어떤 녀석은 선수들의 싸인이 있는 볼을 자랑하기도 했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천성적 성격 및 체질 탓에 또래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한 횟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때 많이 놀지 못한 게 후회를 할 때가 있다. 야구라도 운동 하나 제대로 즐겼더라면 현재의 저질 체력이 나오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야구 보는 재미에 산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승승장구 행보에 라이온즈 팬으로써 이 즐거운 감정을 숨길 수가 없는 건 사실이다. 처음 시즌 초반부 때 부진했던 선수들의 플레이에 실망할 때도 있었지만 역시 삼성 라이온즈는 'UTU'(Up Team is up, 올라갈 팀은 올라간다)였다. 반면에 시즌 초반에 상위권으로 순조롭게 출발했던 LG 트윈스가 현재 연패의 부진으로 7위까지 하위권으로 밀리게 됨으로써 또 한 번 'DTD'(Down Team is down,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의 무시무시한 '과학성'이 또 한 번 재현되고 있는 상태다.

 

 

 

 

왼쪽에 '국민타자' 이승엽, 오른쪽에 '돌부처', '끝판왕' 마무리투수 오승환.

요즘 이 두 선수의 맹활약 덕분에 이번 시즌 역시 야구 보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사실 이번 시즌이 시작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에 활약하던 이승엽 선수의 복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반신반의했다. 타자로써 커리어 사상 각종 신기록을 세웠고 일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친 이승엽이었지만 막상 국내 친정 팀으로 복귀하는 '승짱'의 모습이 일본 리그로 옮기기 전, 아시아 선수 홈런 신기록을 세웠던 그 때 막강했던 과거의 이미지가 떠올려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승엽보다는 지난 시즌에 생애 첫 홈런왕으로써 활약했던 최형우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면서 뚜껑을 열어본 순간, 내가 예상했던 것과 너무다도 판이하게 나왔다. 이승엽은 꾸준하게 타점을 올리면서 팀 승리에 기여하는 활동을 해주고 있는 반면에 의외로 빈타가 많아진 최형우의 부진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상대 팀 타자들의 불방망이를 무력화시켰던 '끝판왕' 오승환이 롯데 전에서 기록한 6피안타의 블론 세이브(Blown Save) 또한 나름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필승의 기운을 만들어주었던 투수진에서도 부진이 이어져 삼성은 시즌 초반부터 심상치 않게 '우승 후보'답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난세 속에서도 영웅이 등장하는 법, 4번 타자를 맡을 정도로 지난 시즌보다 타격감이 물 오른 내야수 박석민의 활약에다가 2군에서 '제2의 오승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투수 심창민의 깜짝 등장은 삼성이 상위권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서 작지만 많은 기여를 해주었다.

 

 

 

 진정 야구 팬들이 원하는 방향 쪽으로 나가야 한다

 

이제 야구 시즌이 올스타전을 코 앞에 두고 있다. 요즘 제10구단 창설 문제에서 비롯된 KBO와 선수협 간의 갈등으로 인해서 올해 시즌에는 올스타전을 못 볼 수도 있다. 제10구단 창설에 강력히 반대하는 각 프로야구 팀 구단주와 이에 대해서 어중간하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KBO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서 선수협 측에서는 올해 시즌 올스타전뿐만 아니라 내년 초에 열리게 될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회 참가를 보이콧 선언을 하게 됨으로서 제10구단 창설 문제를 둘러싸고 양측 간의 갈등과 대립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치킨 게임' 상태로 현재진행중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야구 선수들뿐만 아니라 전. 현직 야구 감독들 그리고 야구를 즐기고 사랑하는 관중들도 제10구단 창설을 간절히 원하고 있고 열렬히 찬성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재 지속되고 있는 KBO-선수협 간의 갈등이 장기화가 될 경우, 단순히 올스타전과 WBC 대회에 활약하는 야구 선수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지 못할뿐만 아니라 프로야구의 흥행에도 약영향을 주게 된다. 선수협 그리고 수많은 야구팬들의 소망을 무시하는 KBO가 주관하는 프로야구 경기를 과연 재미있게 보는 사람이 있을까?  프로로 전향하기를 바라는 아마리그 선수들 또는 프로 야구선수가 되기를 바라는 고등학생 유망주들에게 활약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새로운 야구 구단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야구팬들이 제10구단 창설에 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KBO와 야구 팀 구단주들은 수많은 야구팬들의 여론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팬심을 무시하면서까지 독단적인 체제로 운영되는 스포츠는 '대중을 위한 스포츠'라고 말할 수 없다.

 

 

" 아마 너무 여러 해 동안 야구 구경을 못 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더블 플레이와 홈런을 정량만큼 보지 못하면 정서가 고갈되기 시작할 수도 있거든요. "

 

 

아마도 KBO 협회와 야구 팀 구단주들은 1000만 관중의 야구팬들보다 여러 해 동안 야구 구경을 못했던가 보다. '승리'를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이 만들어 내는 화려한 선수들의 플레이와 항상 이들을 열렬히 응원하고 지켜보는 국내 야구 팬들을 정량만큼 보지 못한 탓에 야구를 사랑하는 대중들을 위한 정서가 이미 고갈된 상태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주장을 끝까지 일관되게 고집하는 태도를 봐서는 제10구단 창설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P.S

 

이번 달부터 본격적으로 온라인 독서 활동 카페에서 진행되는 '폴 오스터 읽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 글이 그 시작을 알리는 첫 글인 셈이다. 그런데 막상 쓰다보니 폴 오스터와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글이 되고 말았다. 폴 오스터 매니아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 아무래도 폴 오스터 문학이 나에게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폴 오스터의 소설에 완전히 익숙하고 적응하기까기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