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유전자 정치 - 우생학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 12
앤 커.톰 셰익스피어 지음, 김도현 옮김 / 그린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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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  ★★★★☆  A






우생학은 역사상 가장 악명을 떨친 유사 과학이다영국의 유전학자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이 만든 우생학은 인종주의와 나치즘(Nazism)이 만연하던 시절에 인종 차별과 집단 살해(genocide)를 정당화하는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독일의 나치 정권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유대인과 장애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치즘을 비판한 지식인들 역시 우생학에 열광했으며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동참했다사회주의자와 페미니스트들도 우생학의 대중화에 동참했. 페미니스트들은 임신 중절이 합법화되면 장애인이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과거에 수많은 희생자를 낸 우생학이 과학의 가면을 쓴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알고 있그런데 우생학이 죽은 학문이 된 지금, 장애인 차별 문제와 장애인 권리를 무시한 사회 정책은 사라졌는가? 장애와 유전자 정치는 역사로 남은 과거 우생학을 비판만 하고 있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의 저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우생학을 주목한다. 하나의 유령이 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그것은 우생학이라는 유령이다.[주] 우생학 유령은 계속해서 과학과 사회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유전공학이 발전하면서 유전자 검사가 상용화되었다. 유전학자들은 유전체 편집 기술로 유전 질환을 치료할 수 있을 거로 기대한다. 유전체 편집 기술은 유전체 내 특정 유전자를 삽입하고 교정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이 도입된다면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유전병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 유전공학 기술과 관련한 윤리적 문제에 민감한 유전학자들은 유전학의 최신 성과와 과거 우생학을 철저히 구분하기 위해 개혁 유전학또는 신유전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시했. 신유전학에 기반을 둔 의료기술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장밋빛 전망을 심어준다. 하지만 저자들은 신유전학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신유전학 관점에서 바라본 장애와 질병은 치료해서 제거해야 할 비극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장애인은 장애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산다. 장애를 불운한 경험으로 인식하고, 마땅히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도 장애인의 주체적인 삶을 무시하는 차별이다.


비장애인 페미니스트들은 장애아 출산과 보육에 부담감을 느낀 여성들을 위해서 임신 중절이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임신 중절 합법화를 옹호하지만, 임신 중절이 장애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것에 비판한다신유전학과 장애아 선별 임신 중절은 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고 보는 우생학적 관점이 되살아난다. 신유전학은 19세기부터 유럽을 떠돌던 우생학 유령이 21세기 유전학에 빙의되어 생긴 학문이다.


그렇다면 이 오래되고 끈질긴 우생학 유령을 사냥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학자/지식인 집단과 시민이 합심하여 동맹을 맺어야 한다저자들은 유전학이 모든 사람을 위한 학문으로 발전되기 위해서 학자와 시민이 유전학의 윤리적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과학자들은 유전공학 기술의 문제점과 부작용을 외면해선 안 된다. 유전학의 연구 성과와 그로 인한 부작용을 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게(이러한 행위는 가르치는 것에 가깝다) 아니라 시민들이 과학자들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질의하면서 비판할 수 있도록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시민과의 토론에 참여한 과학자는 장애인의 장애 경험을 경청할 수 있다


공산당 유령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계급과 자본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려고 했듯이 우생학 유령은 건강하면서도 똑똑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장애와 질병을 제거하려고 했다. 두 유령의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유령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일으킨 심각한 문제점을 역사를 통해 배웠다. 교조적 공산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말살했다면, 우생학은 장애인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외면했고 장애인을 억압하는 정책을 만들었다. 장애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도 개인의 자유이며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생명권이다우생학 유령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정의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우생학 유령이 극우주의자들만 따라 붙는다는 편견을 버리시라. 이러한 편견은 우생학 유령을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을 패러디했다.



* 47,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에 대한 역주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사회비평가다. 그의 작품 중 피그말리온은 뮤지컬로, 마이 페어 레이디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주], 1925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 피그말리온(Pygmalion)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는 제목이 다르지만, 내용이 같은 작품이다뮤지컬과 영화 제목 모두 마이 페어 레이디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는 1956년에 초연되었고,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출연한 동명의 영화1964년에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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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9-04 22: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생학의 유령에서 자유롭지 않은 거 같아 뜨끔했습니다. 장애인들 다 없애야해 이런 극단적인 건 아니지만, 저 깊숙이는 백인이 더 우월할 것만 같은 맘이 있는 거 같아요. 의식적으로 안 그러려고 하지만요... 왜 이런 씨앗이 심어졌는지 똑땅...
<마이 페어 레이디>가 피그말리온이라는 이름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용!ㅎㅎ

cyrus 2021-09-05 23:17   좋아요 4 | URL
똑똑하고, 잘생긴 사람은 누구나 좋아할 수 있어요. 저도 좋아해요. 그건 본능에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완벽하다고 생각하면, 그들과 다른 모습과 능력의 진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돼요.
 
나의 절친 - 예술가의 친구, 개 문화사
수지 그린 지음, 박찬원 옮김 / 아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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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개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반려동물이다이제는 인간과 함께 사는 개를 가족 구성원’으로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인류의 조상은 사냥에 함께 나선 용맹스러운 가족 일원인 개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모습을 벽화에 남겼다. 개와 함께 살았던 예술가들은 개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를 그렸다. 어떤 화가는 개와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이처럼 개가 등장한 예술작품은 아주 오래전부터 맺어지기 시작한 인간과 개의 친밀한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개를 가족이 아닌 애완동물로 여긴 인간은 특정 품종의 개를 개량했다. 우리가 귀엽다고 느껴지는 개의 생김새는 인위적인 개량을 거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그려진 개의 초상화는 인간에 의해 개량되기 전 개의 생김새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史料). 이런 시각적 자료를 그저 개를 너무 좋아하는 화가가 남긴 희귀한 작품으로만 볼 수 없다. 


나의 절친(Dogs in Art)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그리고 동서양 예술가들이 묘사한 개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애견인이라 자부하는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화집이 아니다저자는 개가 예술작품의 엑스트라에서 당당히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는 시대적 변화의 과정을 주목한다개를 소중하게 여긴 예술가들은 개를 말 못 하는 동물이 아닌 몸짓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인류의 친구이자 가족으로 생각했다. 개의 초상화나 조각 작품 속에 소중한 존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걸작의 기준을 깐깐하게 보는 평론가의 눈에는 예술작품 속의 개가 미물로 보일 것이다. 미술사의 한쪽을 장식하는 거장이 만들었다고 해도 평론가들은 미물의 모습을 묘사한 거장의 작품을 외면한다하지만 개를 유달리 좋아하는 예술가들은 그런 평가에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은 개가 등장하는 특별한 걸작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예술가들은 미물이 아닌 자신만의 소중한 보물’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보게 될 후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되길 바랐을 수 있다. 그들은 죽어서도 자신의 보물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제 친구이자 가족을 봐주세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죠?”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24





골리아 갈리아(Gallia)



[주1] 갈리아 인은 현재 프랑스와 벨기에 일대,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살았던 민족이다. (Gaul)이라는 이명도 있다. ‘Gallia’의 한글 표기명은 갈리아.

  




* 275

 

 개는 보나르가 칸에 고립되기 전부터 마르트와 함께 사는 집에서 빠져나갈 많은 이유와 핑계를 찾아주었다. 산책을 데리고 나갔고, 산책하러 나가 카페에서 가까운 친구들을 만났다. 알프레드 자리(보나르는 자리의 희곡 속 괴물 같은 주인공 페르 우부[2]의 모습을 드로잉으로 100여 점을 그렸다)도 그중 한 친구였다.

 


[2] 프랑스어 발음에 따른 한글 표기명은 위뷔또는 위비. 알프레드 자리(Alfred Jarry)의 희곡 제목은 ‘Ubu roi’다. 위뷔 왕(동문선, 2003)’위비 왕(연극과인간, 2003)’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페르(Père)는 아버지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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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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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털 없는 원숭이(문예춘추사, 2020)를 쓴 영국의 동물학자다털 없는 원숭이는 인간을 뜻한다. 모리스는 이 책에서 인간이 지구상 가장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친척인 영장류처럼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해온 동물로 규정한다모리스의 또 다른 직업은 화가다. 초현실주의자들과 친분을 맺은 모리스는 동료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은 그림들을 그렸다. 1948년에 초현실주의적 그림들을 전시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은 동물을 관찰하는 동물학자가 아닌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한 화가들을 지켜본 최후의 초현실주의자의 입장에서 쓴 책이다초현실주의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프랑스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24년에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초현실주의 선언(미메시스, 2012)을 발표하여 과거와 결별하는 예술 사조의 등장을 알렸다. 브르통이 주도하여 결성된 초현실주의 예술가 집단은 전통과 관습을 거부하면서 살았던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저마다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다.


은밀한 매력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서른 두 명의 초현실주의자들의 사생활을 보여주고 있다초현실주의자들은 자유와 예술과 사랑을 동시에 지향한 예술가였다. 이들 대부분은 자유 연애를 선호했으며 동료 예술가의 아내와 사귀거나 동침하는 것에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차례 전쟁을 겪은 초현실주의자들은 사랑과 자유만이 암울한 현실에 짓눌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일삼은 초현실주의자들은 때론 경솔하고 무례하게 비치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일상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초현실주의자들 중에 여성은 총 다섯 명이다하지만 책 속에 엑스트라 급으로 나오는 여성 초현실주의자들도 주목해야 한다모리스는 서론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을 분류하면서 회화와 조각 작품을 남기지 않은 초현실주의자와 초현실주의 사진가를 제외했다고 밝혔다. 그렇다 보니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의 아내 누쉬(Nusch), 피카소(Pablo Picasso)가 사귄 여인 중 한 사람인 도라 마르(Dora Maar), 리 밀러(Lee Miller)에 대한 언급이 적다. 도라 마르와 리 밀러는 사진작가다. 두 사람 모두 동료 초현실주의자들의 초상 사진을 찍었다. 특히 리 밀러는 종군 사진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아무래도 지면의 제약 때문인지 모리스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활동한 소피 토이버(Sophie Taeuber-Arp), 발렌틴 위고(Valentine Hugo), 자클린 랑바(Jacqueline Lamb), 케이 세이지(Kay Sage)를 비중 있게 소개하지 않았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을 남긴 화가인데다 자클린 랑바와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이 책에 그녀의 이름만 잠깐 나올 뿐이다. 실제로 칼로는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로 규정한 브르통 면전에서 거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래도 칼로가 초현실주의자와 교류를 맺은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360

 

 한 친구[]가 미술 모델이자 피카소의 또 다른 상대인 제르맹 피쇼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연애가 잘 풀리지 않자, 상심한 그는 결국 혼잡한 식당에서 제르맹을 총으로 쏘았다. 자신이 그녀를 죽였다고 착각한 그는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누고 쏘았다. 그는 그날 밤에 사망했다.



[주] 젊은 시절 피카소의 죽은 친구는 카사헤마스(Carles Casagemas). 카사헤마스는 발기부전을 앓고 있었고, 제르맹 피쇼(Germaine Pichot)와의 연애가 잘 되지 않자 우울증을 앓았다. 1901년 제르맹을 포함한 몇몇 친구들이 모인 저녁 식사 중에 카사헤마스는 제르맹에게 자신과 결혼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제르맹이 거절하자 카사헤마스는 그녀를 향해 총을 쐈다. 다행히 총알은 빗나갔고, 카사헤마스는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







피카소는 죽은 친구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으며 1904년까지 어두운 청색 위주로 그림을 그렸다. 뛰어난 초기 걸작들이 나온 시기(1901~1904년)를 청색 시대라고 부른다.





* 407







롤론드 펜로즈 롤런드 펜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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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02 2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현실주의라니 왠지 제 취항일거 같은데 그림에는 전문지식이 제로여서 😅
저 그림은 글을보니 좀 섬뜩하네요 ㅡㅡ

cyrus 2021-09-03 21:49   좋아요 1 | URL
몽환적이면서 조금은 으스스한 분위기가 나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좋아해요. 그래서 마그리트와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을 가장 좋아해요. 초현실주의 그림은 해석할 필요 없어요. 그림을 보고 느끼면 돼요.. ㅎㅎㅎ
 
여자가 쓴 괴물들 - 호러와 사변소설을 개척한 여성들
리사 크뢰거.멜라니 R. 앤더슨 지음, 안현주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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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미국의 작가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별명은 호러 킹(horror king)’이다. 그가 쓴 공포소설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완성도도 높다. 킹이 태어나기 전에 활동한 호러 킹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몬터규 로즈 제임스(Montague Rhodes James),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 앨저넌 블랙우드(Algernon Blackwood), 리처드 매드슨(Richard Matheson) 등이다. 그렇다면 킹에 견줄만한 호러 퀸(horror queen)이 있을까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다시대별로 대표하는 여성 공포 소설 작가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호러 퀸이라 부르고 싶다


고딕 문학 연구자인 두 명의 저자가 합심하여 쓴 여자가 쓴 괴물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호러 퀸들을 소개한 논픽션이다. 공포 문학은 남성 작가들이 독점한 장르가 아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 저항한 여성 작가들이 마음껏 뛰놀던 블랙 오션(black ocean)’이다. 남성 중심 사회 속의 여성은 주변부에 머물렀으며 창작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여성에게 글쓰기는 시간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지적 활동이 아니다가사 노동으로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도 하며 여성의 존재를 투명하게 만드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힘껏 낼 수 있게 해준다글을 쓰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할 힘을 얻는다. 글쓴이가 이 힘을 얻으면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게 되며 세상에 반기를 들 수 있다. 글 쓰는 여성은 이성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간이라고 확신한 남성들이 만들어낸 관습에 도전했다. 보수적인 남성들은 글 쓰는 여자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고, 그들을 광인 또는 괴물과 같은 존재로 취급했다. 여성 작가는 남성 중심 세상을 조롱하면서 파괴할 수 있는 괴물과 유령들을 창조했다공포 소설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주제로 한 문학 장르다. 대다수 사람은 공포 소설이 오컬트에 심취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장르로 이해하거나 심심풀이용으로 읽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공포 소설에 대한 선입견이다. 지금까지 공포 문학이 발전하는 데 기여한 여성 공포소설 작가들의 재능을 잘 모르는 데서 생긴 착각이다.


여자가 쓴 괴물들에 소개된 여성 작가 중에는 남성들과 토론하기를 즐겼던 철학자로 알려진 마거릿 캐번디시(Margaret Cavendish)가 있고, 아멜리아 에드워즈(Amelia Edwards)나 마저리 로렌스(Margaery Lawrence)와 같은 여성의 권리나 젠더 평등에 목소리를 높인 페미니스트들도 있다19세기를 대표하는 호러 퀸이라 할 수 있는 메리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는 여권 신장을 주장한 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의 딸이다. 셸리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은 페미니즘 비평으로 해석 가능한 공포 소설이다여성 공포 작가들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상식과 교양을 넓히는 고전으로 알려진 작품을 쓴 작가들에 주목한 문학사에서 배제되어 왔다여자가 쓴 괴물들의 등장은 장르문학을 하대하는 주류 문단과 남성 작가 중심 문학사의 허를 찌르는 도전이다


이 책에 여성 작가들의 삶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읽어야 할 작품들에 대한 정보도 있다. 역자는 국내에 출간된 공포 소설의 작품명과 출판사 이름을 꼼꼼하게 표기했다. 공포 소설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다. 하지만 국내에 나온 작품임에도 출판 정보가 없는 것도 있다두 명의 저자가 엄선한 여성 공포소설 작가들은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호평받을 만한 이야기꾼이다. 그러나 여자가 쓴 괴물들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여성 공포소설 작가들이 있다.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이라는 필명으로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문학동네, 2006)를 쓴 카렌 블릭센(Karen Blixen)기이한 이야기(만복당, 2021)의 작가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메이 싱클레어(May Sinclair)괴담 형식의 공포 소설을 쓴 일본의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 등이다. 이 세 사람 역시 독자들이 주목해야 할 여성 공포소설 작가들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호러 퀸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와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인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가 이 책에 짤막하게 소개돼서 아쉽다두 사람은 이 책에서 곁다리로 분류되어 있다.


백과사전은 죽지 않은 책(undead book)’이다. 백과사전 편찬자가 죽어도 백과사전에 새로운 정보가 담긴 항목이 계속 추가되기 때문이다. 여자가 쓴 괴물들여성 공포 소설 작가들에 대한 최고의 백과사전[주]이라면 새로 발굴되거나 재조명받은 여성 작가들이 추가되어야 한다. 여자가 쓴 괴물들2판이 나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107: 월터 스코트 월터 스콧   

29쪽에 월터 스콧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 168: <밤의 갤러리>, 194: 로드 셜링의 쇼 <나이트 갤러리>

명칭을 하나로 통일해서 써야 한다.






* 170, 172쪽의 무셔운 짚은 오자가 아니다. ‘무셔운 짚의 원제는 ‘Horrer Howce’. ‘Horrer Howce’‘Horror House(무서운 집)’의 철자를 틀리게 쓴 단어다. 역자는 원제의 의미를 살린 제목을 표현하기 위해 무서운 집이 아닌 무셔운 짚으로 썼다

 


* 303: 레스타트 왕자와 아틀란티스 왕국』 → 『레스타 왕자와 아틀란티스 왕국



[주] 책 뒤표지에 있는 문구다. 그런데 백과사전이라면서 100여 명의 작가 이름과 그들이 쓴 작품 제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색인(찾아보기)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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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쓴 괴물들 - 호러와 사변소설을 개척한 여성들
리사 크뢰거.멜라니 R. 앤더슨 지음, 안현주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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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쓴 괴물들》의 등장은 장르문학을 하대하는 주류 문단과 남성 작가 중심 문학사에 대한 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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