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는 분명 좋은 책이지만, 다소 아쉬운 구석이 있다. 특히 내가 인용한 다음 문장에 역주가 없는 점이 불만족스럽다.

 

 

 페루, 리마의 플로라 트리스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처음 생겨난 페미니스트 단체들 중 하나이다. (53)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이 문장에 역주가 없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아니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만약에 내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번역을 맡았다면, ‘플로라 트리스탄이 누군지 설명하는 역주를 써넣을 것이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사람 이름이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여성 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단한 인물이다.

 

 

 

 

 

플로라 트리스탄(Flora Tristan, 트리스탕으로 표기하는 책도 있다). 그녀는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보다 훨씬 더 앞서서 여성과 노동자 운동에 헌신했다. 체트킨과 룩셈부르크가 고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라면, 트리스탄은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다. 트리스탄의 사회주의 운동, 체트킨과 룩셈부르크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한 여성해방운동의 목표는 비슷하다. 이 세 사람은 남성의 지배여성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이 두 가지 문제가 여성을 억압한다고 봤다. 그런데 어째서 트리스탄은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가? 트리스탄의 업적을 이해하려면 먼저 19세기 유럽을 수놓은 다양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을 두루 살펴봐야 한다.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열린책들, 2012)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을유문화사, 2007)

    

 

 

 

 

 

 

 

 

 

 

 

 

 

 

 

 

* 로버트 오언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천줄 읽기)(지만지, 2012)

* 샤를 푸리에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외(책세상, 2007)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소설 유토피아에서 사유재산제를 폐지하는 과격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모어를 공상적 사회주의의 원조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로버트 오언(Robert Owen), 생시몽(Saint Simon),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19세기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19세기는 유토피아 사상이 만발했다. 산업혁명으로 물질문명은 발달했지만, 삶은 더욱 각박해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상적 노동이 가능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다. 오언은 농업과 산업이 모두 발전하고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인디애나 주에 땅을 사들여 뉴 하모니라는 공동체 마을을 만들었다. 푸리에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고, 자급자족하는 팔랑스테르를 세웠다. 사회주의자들은 계몽과 설득을 통해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콧방귀를 뀌었다.

 

 

 

 

 

 

 

 

 

 

 

 

 

 

 

 

 

 

 

 

 

 

 

 

 

 

 

 

 

 

 

 

* [품절]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상에서 과학으로(새날, 2006)

* 리오 휴버먼 리오 휴버먼의 자본론(어바웃어북, 2011)

* 한형식 맑스주의 역사 강의(그린비, 2010)

* [품절] 욜렌 딜라스-로세리외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서해문집, 2007)

 

 

 

 

마르크스엥겔스는 오언, 푸리에 등의 사회주의자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분류하여 그들의 입장을 현실적 기반을 갖지 못한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엥겔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를 비판할 땐 가차 없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훼손되지 않고 굳게 뿌리내리기 위해 과학적 공산주의로 분류했다. 트리스탄은 오언과 푸리에와 가까이 지냈다. 과학적 공산주의가 실패했더라도 트리스탄의 업적이 덜 알려지거나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트리스탄의 여성해방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리스탄은 스페인계 페루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는 공장 노동, 판화를 채색하는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했다. 트리스탄은 페루에 생활하면서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는 노예들의 열악한 처우를 목격했고, 이를 고발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 그녀는 푸리에의 사회주의 사상 속에 담긴 여권 옹호론에 주목했다. 푸리에는 네 가지 운동과 일반적 운명에 대한 이론이라는 글(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외수록)에 여성의 경제적 자유와 성적 자유를 억압하는 남성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해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부르주아 여성들까지도 비판했다.

 

 

 

플로라 트리스탄의 삶과 주요 활동을 간략하게 언급한 책들

 

 

 

 

 

 

 

 

 

 

 

 

 

 

 

 

 

 

 

 

 

 

 

 

 

 

 

 

 

 

 

 

* 안체 슈룹, 파투 그림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숨쉬는책공장, 2016)

*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젠더와 사회(동녘, 2014)

* [절판] 수잔 앨리스 왓킨슨 페미니즘(김영사, 2007)

* [품절] 이효재 엮음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창비, 1989)

 

 

 

 

푸리에가 지적한 대로 19세기 유럽 남성들은 생각하는 여성에 반감을 드러냈다. 트리스탄의 남편도 그런 부류의 남성이었다. 트리스탄의 남편은 그녀를 학대했다. 그 시대에 여성은 이혼할 권리가 없었다. 트리스탄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여행길에 올랐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딸의 후견 문제로 남편과의 법적 싸움이 이어졌고, 남편은 트리스탄에게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사생아’, ‘혼혈아’,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아내라는 삼중 굴레 속에서도 트리스탄은 영국, 프랑스로 건너가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라티오, 2014)

 

 

 

영국에 체류한 그녀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트리스탄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1843년에 <노동자 연합>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트리스탄은 노동자 중심의 협동조합에서 나오는 기금으로 병원, 학교 등을 설립한다면 여성 해방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연합>은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라티오, 2014)보다 먼저 영국 노동자계급의 노동조건과 생활상을 분석하고 운동 방향을 제시한 문헌이다. 트리스탄의 견해에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있었으나 남성 사회주의자와 일부 남성 노동자들은 여권을 주장하는 트리스탄의 견해에 반대했다. 또 남성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는 트리스탄의 노력을 무마하려고 했다. 트리스탄은 자신을 노동해방의 걸림돌’, ‘공장을 망치려는 여성으로 바라보는 남성 사회주의자와 남성 자본가들의 냉담한 반응을 이해하고 있었다.

 

 

거의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합니다. 남자들은 내가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기 때문이고, 기업주들은 내가 임금노동자의 해방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37)

 

 

트리스탄은 자신의 의견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도보로 여행을 하고, 자신이 쓴 책을 홍보했다. 강행군을 펼친 트리스탄은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녀는 열병으로 쓰러지고 말았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트리스탄을 지지한 세탁부와 중산층 부부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 노동자들은 트리스탄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그녀를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준비할만한 돈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트리스탄의 기념비가 있는 무덤을 만들기 위해 손수 기부금을 갹출했다. 1848년 혁명 이후 여전히 트리스탄을 기억하는 노동자들은 그녀의 무덤에 찾아가 조의를 표했다. 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플로라 트리스탄은 무덤이 필요하다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몇 년 동안 노동가들의 애송가로 알려졌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페루 리마에 그녀의 이름을 딴 페미니스트 단체가 세워졌다.

 

 

 

 

 

 

 

 

 

 

 

 

 

 

 

 

 

 

* [품절]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람기획, 1999)

* 프랑수아즈 카생 고갱 : 고귀한 야만인(시공사, 1996)

 

 

 

트리스탄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흐른 뒤에 그녀의 손자가 태어났다. 손자는 할머니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된다. 그 손자의 이름은 폴 고갱(Paul Gauguin)이다. 고갱은 회고록에 어린 시절에 전해 들은 할머니에 대한 모습과 생전 활동을 언급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호인이며 묘한 여인이었다. 그분의 이름은 플로라 트리스탕이라고 하며, 프루동(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의 말에 따르면 재능 있는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실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프루동의 말만 믿을 뿐이다.

  그분은 수많은 사회주의적인 것을, 그중에서도 노동조합을 만들어냈다. 노동자들은 그분에게 감사하며 보르도의 묘지에서 기념비를 세웠다.

나는 진실과 꾸민 이야기를 조금도 구별할 수 없을 듯해서 그저 있는 그대로만 얘기할 따름이다. 그분은 1844년에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는 많은 대표자들이 참여했다.

  그래도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플로라 트리스탕이 참으로 예쁘고 기품 있는 부인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또 그분이 늘 여행을 했고, 노동자의 송사에 전 재산을 사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75~176)

 

 

플로라 트리스탄은 마르크스, 엥겔스, 클라라 체트킨의 노동해방운동에 영향을 준 선구자다. 그런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다. 트리스탄의 업적을 생각하면 부당한 평가이다. 왜 아무도 트리스탄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을까? 트리스탄이 공상적 사회주의자라서? 아니면, '남성 지식인보다 뛰어난 여성'이라서? 어쩌면 지금도 세상은 그녀를 반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단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특히 마르크시즘보다 비교적 온전한 사회주의마저 불온한 사상으로 몰아세우는 우리나라에서는 트리스탄을 빨갱이로 취급할 게 뻔하다. 마르크스에 경도된 좌파들은 그녀를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의 준말)’으로 취급할 것이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부터 시작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만 집중 조명하는 우리나라의 풍토도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저평가 받게 한 원인 중 하나이다. 근대적 페미니즘의 시작에 자유주의자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를 개선해나간 사회주의자들도 여성 운동에 뛰어들었다. 너무 많이 늦었지만, 플로라 트리스탄은 기념비가 필요하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당신이 좌파라면 트리스탄을 모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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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3-29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가 아니라도 ‘트리스탄‘ 이라는 이름은 기억해야 겠네요! 훌륭한 삶을 사신분으로...

cyrus 2018-03-30 16:17   좋아요 0 | URL
짧으면서 굵게 사신 분이죠. 트리스탄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나 그녀가 쓴 저서를 읽어보고 싶어요. 당분간은 이런 책들이 나오기 힘들어 보입니다. ^^;;

2018-03-30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30 16:18   좋아요 0 | URL
‘고갱의 외할머니’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것처럼요.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트리스탄’으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

2019-05-02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2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5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5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집안의 노동자 - 뉴딜이 기획한 가족과 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56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음, 김현지.이영주 옮김 / 갈무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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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미국 전역을 덮친 대공황은 많은 사람을 실업과 가난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작은 정부’ 중심의 자유주의를 고집했다. 후버 정부의 미온적인 대책은 불난 집에 부채질만 하는 꼴이 됐다. 물가는 계속 폭락했고, 실업자도 날로 늘어나 수천만 명에 이르는 파산자가 속출됐다. 후버의 뒤를 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을 들고 나왔다.

 

루스벨트는 가난한 하층민을 상징하는 ‘잊힌 사람(The Forgotten Man)’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잊힌 사람들을 위한 뉴딜 정책’을 천명했다. 뉴딜 정책은 국정 운용과 경제의 틀 자체를 변화시켰다. 루스벨트 정부는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 대신 정부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 케인스 경제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연방정부의 기능과 권한을 확대해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쳤다. 또한,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등 노동자의 복지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추진됐다. 역사학자들은 뉴딜 정책이 대공황으로 위험에 빠진 자본주의를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복지국가체제의 기틀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뉴딜 정책 신화’에 가려진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 진실은 시간이 지나서야 명백해진다. 뉴딜 정책의 일부 사회보장제도가 실제로는 여성과 흑인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경제의 ‘경’ 자도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글로 설득력 있게 쓴 책이 1983년에 나왔다. 이탈리아의 여성 운동가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집안의 노동자》(갈무리, 2017)이다.

 

이 책에서 코스따는 루스벨트 정부가 시행했던 여러 가지 정책들과 그 결과를 제시한다. 루스벨트 정부가 경제성장의 기폭제로 내놓은 것은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계획(TVA)이다. 뉴딜 정책 일환으로 추진된 TVA는 테네시강 본류와 지류에 26개 대형 댐을 건설하고 남부 내륙 운하를 설치하는 대형 토목공사였다. 루스벨트 정부는 공공 일자리를 만들면 노동자의 임금이 향상되고, 내수 소비가 살아나서 생산과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뉴딜 정책이 창출한 일자리 대부분은 ‘백인 남성’이 차지했다. 정부는 백인 남성‘에게 가족과 국가를 재건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흑인 남성은 여전히 열악한 근로환경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여성은? 여성은 ‘집안의 노동자’로 전락했다. 여성의 재생산노동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집안일, 가족을 돌보는 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등의 가족과 사회가 유지되는 데 필수적인 노동을 의미한다. 대공황의 여파로 망가진 경제는 가족의 해체를 불렀다. 돈이 없어서 자식에게 일을 시키거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증가했다. 정부는 경제위기가 초래한 가족 해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에게 집안의 노동을 직접 담당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겼다. 정부는 여성에게 ‘가정학’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으며 가사노동을 ‘사랑으로 하는 노동’으로 포장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코스따는 여성을 위한 뉴딜 정책이 여성에게 ‘집안의 노동자’ 역할을 부여한 전략적 기획이라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남편은 바깥일, 아내는 집안일’이라는 성별 노동 분업이 미국 사회에 강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정부는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여성의 노동을 착취했다. 이렇게 여성의 가사노동은 ‘특별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 ‘당연히 여성이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게 되고, ‘집안의 노동자’는 뉴딜 정책 신화에 가려져서 ‘잊힌 여성(The Forgotten Woman)’이 되었다.

 

남성의 노동력은 가족 내 가사노동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여성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에 의지하게 되고, 여성의 가사노동 및 임금은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없다는 전제로 설정된다. 뉴딜 정책 시기의 미국 여성들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받는 차별뿐만 아니라 ‘집 밖의 일’을 얻는 기회조차 받지 못했고, 저임금을 받는 이중, 삼중의 차별까지 겪었다. 남성 노동자 파업에 동참하거나 파업을 주도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순히 노동에 따른 보상을 받기 위한 일이 아니다. 재생산노동을 남성들의 임금노동 하위에 위치시키면서 가사노동을 여성들에게 전가하고 여성 노동력을 ‘0원’으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저항이다.

 

《집안의 노동자》는 뉴딜 정책 시대의 남성과 여성의 성별 분업 구도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치밀한 분석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역작이다. 《집안의 노동자》을 읽으면 지금도 변함없는 여성 노동 문제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노동자로 제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으면서 일해본 적이 없다. 물론, 한때 ‘알파 걸’, ‘슈퍼 우먼’ 같은 일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유행했지만 사회는 ‘집 밖의 노동자’가 되어 일하고 싶은 여성에게 ‘집안의 노동자’ 역할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요한다. 결혼과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여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여전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국가는 재생산노동의 책임을 여성에게 일차적으로 부여하면서 여성 노동력을 비정규직 형태로 노동시장에 흡수하려는 정책을 고집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여성들은 성별 분업을 조장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맞서 자신을 저항주체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될, 힘겹지만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여성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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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8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29 13:45   좋아요 0 | URL
네.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에 참정권을 준 국가입니다. 뉴질랜드 내에서도 여성 참정권 획득을 위한 운동이 펼쳐졌는데요, 미국과 영국 페미니스트들의 참정권 운동이 많이 알려져서 그런지 이 중요한 사실을 다룬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요.

sprenown 2018-03-2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아때문에 어쩔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요즘은 집안일만 하는 여성이 더 눈총받는거 같아요^^.비정규직이나 시간제라도 돈벌어오기 바라죠. 씁쓸한 현실..

cyrus 2018-03-29 13:50   좋아요 1 | URL
문제는 비정규직, 시간제 근무 여성을 위한 고용 보장이 열악해요. 기본적인 노동 3권 원칙조차 지키지 않은 회사가 많아요.

AgalmA 2018-04-01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육아, 가사 일을 여성이 잘 한다고 본성이나 특성으로 틀로 만든 경향이 있죠. 생물학 보면 호르몬상의 차이는 분명 있는 거 같지만 사회 생활 속에서 같이 분담하는 문화를 만들었다면 이렇게까지 고착화되진 않았을 겁니다.
여성이 사회생활에 진출하니 어디 얼마나 잘 하나 감시 & 평가가 아니라 서로서로 도와야죠. 평등과 평화 말로만 떠들게 아니라^^;;

cyrus 2018-04-01 19:43   좋아요 1 | URL
여성이 취업하는 과정을 보면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점이 많아요. 특히 면접 때 남성 면접관은 여성 구직자에게 결혼 계획이나 남자친구 유무를 묻습니다. 회사는 결혼하는 여성을 직원으로 고용하는 걸 꺼려하죠. 여성 직원은 일처리가 미숙하다는 남성 직원의 편견도 여성의 ‘가정주부화‘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45
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 갈무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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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을 받든, 존경을 받든 어떠한 형태로라도 절대 잊히지 않을 마르크스가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았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발달의 필연적인 산물로 규정했다. 즉 자본주의에서 사회의 생산력은 급속히 성장하지만,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라는 생산 관계의 모순을 심화하여 빈곤 문제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모순 극복을 위해 생산수단의 사유폐지와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을 강조했다. 엥겔스《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두레, 2012)이라는 책에서 원시 사회는 사유재산 없는 모계사회였지만 잉여재산과 상속 때문에 가부장제 사회가 됐다고 주장했다. 일부일처제의 탄생은 부계제도에 기초한 가족의 출현을 동반했으며 계급사회의 출현을 촉진했다. 과거에는 남성과 여성의 일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생산 활동은 가정에서 분리된다. 그래서 가정과 일이 분리되는 ‘성별 노동 분업’이 생겼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해석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독일의 사회주의자 클라라 체트킨, 아우구스트 베벨 등은 “여성해방의 첫 번째 전제는 모든 노동자 여성을 계급 투쟁에 참여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혁명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고, 계급이 해방될 때 곧 여성이 해방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을 배제한 채 참정권을 요구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를 비판했다. 그러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계급 해방 이후의 노동자 여성을 가사노동과 양육 등 보살핌 노동을 전담하는 존재로 보았다. 여성 평등권을 주장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를 견고하게 해주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의 여성해방론은 가부장제 철폐를 위한 실천적인 여성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1986년에 나온 마리아 미즈《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자본주의 체제의 여성 착취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생명 생산’으로 명명되는 여성의 노동을 협소하게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만 비판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제가 결탁하여 서구 여성, 제3세계 여성을 착취하는 구조를 보지 못하고, 오로지 평등만을 주장하는 주류 페미니스트들에게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마리아 미즈의 비판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과 권력 모두 쥔 남성(서구 남성, 아시아 남성, 제3세계 남성)은 여성(서구 여성, 아시아 여성, 제3세계 여성)을 ‘가정’에 묶어두어 가부장적 권력으로 통제하려고 한다. 여성은 결혼하는 순간, ‘주부’가 된다. 미즈는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이 ‘가정주부화’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가정주부가 된 여성은 저임금 또는 무임금 노동을 하게 되고, 남성 노동과 여성 노동 간의 임금 격차는 커진다. 여성의 가정주부화가 진행되는 자본주의 체제는 성별 노동 분업을 강화한다. 이 불편한 문제를 외면하면 여성의 사회 · 경제적 불평등이 좀처럼 완화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경제’ 체제 안에서 여성의 삶이 착취 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여성 운동이 진행되어야 한다. 또 성장중심주의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미즈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대안 경제모델을 제시한다. 그 대안 경제모델의 핵심은 ‘자급’이다. 여성은 여성 노동을 착취하는 다국적 기업의 제품, ‘가정주부’,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여성성 모델을 강조하는 상품 등을 소비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의식주에 필요한 기본적인 생필품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급’은 ‘완전한 자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자급사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미즈도 이 점을 분명히 강조했다. ‘부분적 자급’ 활동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출간 이후로 지금까지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자급 활동이 많이 알려졌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대안 생리대’는 여성의 몸을 위한 자급 활동 중 하나이다. 자급 활동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즈는 자급 경제모델 내에서 남성도 가사 노동에 대한 책임을 분담해야 하며 여성과 함께 자급 활동에 동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사노동은 고된 노동이라기보다는 여성이 전담해야 하는 부차적인 활동으로 이해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성한테 가정은 쉼터지만 여성들은 자신의 일터인 집안에서 일해야만 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긴밀히 결합하여 서로를 지탱하는 사회 구조는 타의에 의해 가정에 속박당하는 여성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여성해방의 첫 단추는 전 세계에 꽉 묶인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매듭을 풀어주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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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7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28 10:48   좋아요 0 | URL
세상이 문명사회 이전으로 회귀해도 남성의 경쟁심, 지배 욕구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

마립간 2018-03-2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도 단편적으로 언급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문명지향적입니다. 여성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이동합니다. 여성이 (남녀평등적) 페미니즘을 위해 그런 사회(, 예로 부탄으)로 이주한다면 보편적 사건이 아닌 예외적 사건이죠.

cyrus 2018-03-28 16:4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여성들은 문명지향적인 존재이며 열심히 일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기를 원하고, 사회적 지위 상승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일부 남성들은 여성이 가사노동보다 ‘집 밖의 일’에 관심을 보이면 경계하고 반대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소생하는 영혼
호즈미준 지음, 함정연 옮김 / 현민시스템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전 세계가 ‘미투(#MeToo) 운동’으로 떠들썩하다. 그런데 일본은 미투 운동에 대해 전반적으로 잠잠한 편이다. 프리랜서 기자 이토 시오리가 유명 방송 기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지만, 그녀의 고백은 미풍에 그쳤다. 다행히 이토를 중심으로 시민들, 지식인 등이 모여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위투재팬(#WeTooJapan)’이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다. ‘위투재팬’의 영향력이 얼마나 오래 갈지 관심이 집중된다.

 

 

 

 

 

 

 

 

사실 이토 시오리가 일본 미투 운동의 시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전에 일본에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백한 사례가 있었다. 1991년 11월 <침묵을 깨고-어린 시절에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증언>이라는 책을 통해 고백한 ‘익명의 성폭력 생존자들’이다. 어린 시절 친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호즈미 준이라는 여성은 ‘익명의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해 자신도 고통의 경험을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호즈미 준이 쓴 《소생하는 영혼》은 1994년 일본에 출간되었고, 1996년에 국내 번역본이 나왔다. 호즈미 준은 끔찍한 날 이후로 절망적인 시련이 몸과 마음을 관통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고, 본인 스스로 구멍 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친족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밝혀 어린 시절 불행한 기억의 그림자를 스스로 걷어내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도 가부장제 사회이고, 여성 차별 및 성폭력 문제에 침묵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90년대 일본에서는 ‘친족 성폭력’을 뜻하는 정식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살던 호즈미 준은 자신의 책에 ‘친족 성폭력’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용어를 찾지 못해 부득이하게 ‘근친 강간’을 뜻하는 영어 ‘Incest(인세스트)’를 썼다. 1994년에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도 성폭력이란 용어가 생경했던 시절이 있었다.

 

친족 성폭력 범죄는 매년 꾸준하게 증가세를 보인다. 아동 성폭력의 80% 이상이 ‘아는 사람’에 의해 이뤄졌고, 특히 이 가운데 가해자는 ‘친족’이다. 친족 성폭력의 위험성과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친족 성폭력이 일부 가정의 정신 병리적 문제가 낳은 범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족 성폭력은 가해자가 친족이란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또 피해 아동은 친족인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 거주하며 학대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아 장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친족 성폭력은 쉽게 지울 수 없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20대나 30대가 되어서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적 혼란과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호즈미 준은 두 번이나 이혼했고, 임신과 출산에 거부감을 느끼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렇듯 친족 성폭력은 다른 폭력에 비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긍정적인 성 정체성 형성, 성인이 되어 건강한 성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 등에 크나큰 손상을 입게 된다.

 

친족 성폭력 피해 아동들 상당수는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신고나 상담조차 꺼려한다. 성폭력 사건이 가족의 명예를 떨어뜨린다는 편견 때문에 피해 아동들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신고하지 못하고, 상담조차도 받지 못한다. 호즈미 준의 어머니는 딸의 고통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들의 죄를 끝까지 방관했다. 어머니는 딸이 아닌 아들의 편에 섰다. 어머니가 딸에 2차 가해를 한 셈이다. 호즈미 준은 이 책에서 어머니에 향한 분노와 원망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어머니가 미웠다.

  그토록 궁지에 몰아넣고서도 미안하다는 말도 고사하고, 오히려 소리를 지르며 야단친 여자. 어머니라는 것만으로 나를 누구보다도 상처 낸 사람.

  어머니,

  당신은 한 손에 사랑을 들고, 다른 손엔 예리한 칼을 쥐고 있다. 자식으로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만, 그러나 당신 곁에 있으면 나는 늘 상처를 입는다. 내 어머니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상처를 주고서도 걸핏하면 부모라고 나를 위협하는 당신이 밉다. 그리곤 부모를 미워하는 스스로를 미워한다. 이 지경이 되도록, 그 자가 부모를 미워하게 만들고, 그래서 죄를 짓도록 만든 당신이 밉다.

  [중략] 어머니는 어째서 내 기대와 희망을 때려 부수는 것일까? (89쪽)

 

 

호즈미 준은 깊게 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국에서 출간된 <회복에의 용기>라는 책을 읽는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살면서 견뎌야 했던 고통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회복에의 용기>는 현재까지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최고의 지침서’로 평가받는 책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특별한 용기》(동녘, 2012)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성폭력은 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이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의사에 반한 성적 언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라면 이런 문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성폭력을 ‘피해자가 수치심을 갖고, 가해자가 되레 억울하게 보이는 범죄’로 여긴다. 피해자가 말하면 말할수록 도리어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편견과 의혹의 시선이 증폭된다. 성폭력 경험을 말하고 크게 외치는 순간이 바로 회복의 시작이다. 성폭력 생존자들은 가해자와 그의 편에 서는 부당한 사회에 향해 욕도 하고, 화를 내고, 소리 지를 수 있다.

 

 

  사람에게 ‘조언’은 필요 없다. 사람은 본래 자기 안에 회복에 필요한 모든 것, 답도, 힘도, 지니고 있다.

  정말 고통스러웠을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울게 놔두었던 사람이 있었다. 설교, 조언, 위로, 일체 없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울게 놔두었던, 넉넉한 가슴의 소유자가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닦아준 사람이.

  사람에게 재출발할 용기를 주는 것은 이런 부드러움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부드러움이 생각날 때마다 용기와 격려를 다시 얻게 된다. (252쪽)

 

 

호즈미 준은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조언’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성폭력 생존자는 적극적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자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 성폭력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오랫동안 가슴 한편에 묵혀왔던 고통스러운 말들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게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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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3-2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합니다 멋지네요!
서양도 그렇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가부장제가 고통의 뿌리인거 같아요.
지금의 이자본주의도 마찬가지고요.

cyrus 2018-03-26 11:39   좋아요 0 | URL
sprenown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요즘 제가 읽고 있는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추천합니다. ^^

sprenown 2018-03-26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그렇잖아도 읽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고맙습니다.
 

 

 

 

지난주 목요일 대구는 하얀 눈으로 뒤덮었습니다. 폭설이 내린 이후로 사흘이 지난 지금, 대구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3월인데 대구는 여름 날씨입니다. 이틀 전인 일요일도 날씨가 무척 좋았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을 알게 된 이후로 요즘 저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서점, 도서관, 헌책방을 전전하던 제가 처음으로 독립영화관에 가게 됐습니다. 대구 동성로에 독립영화관 오오극장이 있습니다. 곽병원 근처에 있어요. 오오극장 안에 커피 및 각종 음료, 술을 주문할 수 있는 삼삼다방이 있어요. 그래서 영화를 예매할 수 있고, 커피와 술을 주문하여 상영관 안에서 마실 수 있답니다. 이런 좋은 곳이 있었다니! 솔직히 저는 대구에 독립영화관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책바보라서 진짜 바보예요. 오오극장에서 나와 경상감영공원 쪽으로 가면 레드스타킹 아지트이자 독서인들을 위한 안식처인 스몰토크가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311) 오오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피의 연대기>김보람 감독님이 참석하는 관객과의 대화(GV)’가 진행되었습니다. 오후 2시 영화 상영 후 GV가 시작되었습니다. 김 감독님이 오오극장에 찾아온 건 두 번째입니다. 지난달에 이미 삼삼극장에서 GV가 진행된 적이 있었는데요, 저는 이날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GV 진행은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 지식이 풍부한 레드스타킹 멤버가 맡았습니다.

 

<피의 연대기>여성의 월경, 즉 생리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보여준 영화입니다. 영화 제목의 피는 생리 혈을 의미합니다. 생리 혈. 이 단어를 듣자마자 기분 나쁘고, 불쾌한 기분이 드나요? 초경을 경험한 여성들은 생리를 한다는 것 자체를 창피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생리 혈이 새어나왔을까 걱정 안 해본 여성들은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생리를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리가 여성들만의 영역이고 감추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죠. 그리고 생리는 당연히 몸의 현상인데, 부모나 학교는 이를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여성들은 생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 없이 빨간 날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초경을 당황스러운 일로 인식하게 됩니다.

 

<피의 연대기>는 여성들마저 쉽게 공유하지 못한 생리를 공론의 장으로 드러낸 작품입니다. 영화는 생리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여성 운동과 생리대의 상관관계를 조명합니다. 무상으로 생리대와 탐폰을 공급하는 법안을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오면 대부분 남성은 이러한 반응을 보입니다.

 

내가 낸 세금이 왜 여성들을 위해서 써야 되는 거죠?”

무상 생리대 정책이라니? 이거 빨갱이 정책 아닌가요?”

생리를 특권으로 여기는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정책이군요.”

 

무상 생리대 법안 도입뿐만 아니라 생리 휴가를 보장하는 법을 반대하는 남성들도 있어요. 이들은 무상 생리대 지급, 생리 휴가 도입을 찬성하는 여성들에게 메갈충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합니다. 그들은 무상 생리대, 생리 휴가가 여성들을 위한 특혜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들의 말이 맞을까요?

 

 

 

 

 

 

 

 

 

 

 

 

 

 

 

 

 

 

* 김보람 생리 공감(행성B, 2018)

* 박이은실 《월경의 정치학(동녘, 2015)

* 글로리아 스타이넘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현실문화, 2002)

 

 

 

생리와 생리통 그리고 생리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생리가 특혜라고 말할 수 없어요. 생리는 여성만 경험할 수 있는 특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몸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의 생리를 기피했고, 생리 혈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어요. 과거나 지금이나 생리의 자를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이 있는데, 생리가 여성의 특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김 감독은 자신의 책 생리 공감(행성B, 2018)생리를 기피하는 문화가 여성을 억압하는 점을 날카롭게 짚어냈습니다.

 

 

생리는 몸의 일이다. 여성의 몸, 특별히 질 그리고 질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오랜 세월 금기시되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되고, 그것에 대한 경험은 공유되거나 기록되는 대신 잊히고 삭제된다. 이토록 오랜 시간 이 피를 금기시한 사회는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방치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피를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로 만들었고 그 피를 처리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과 비용 그리고 고통은 모두 여성 개인의 몫으로 남겨 뒀다. (프롤로그, 9)

 

 

영화에 박이은실 님이 출연합니다. 박이은실 님은 예전에 월경의 정치학(동녘, 2015)을 펴낸 적이 있습니다. 김 감독님은 자신의 책에 월경의 정치학을 인용했습니다. 월경의 정치학생리를 남녀 모두 불편하게 만드는 금기로 규정하여 여성을 억압하게 만드는 인류 역사와 사회 구조를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 터부에 가려 언급이 금기시돼온 생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통해 남성이 생리를 하는 세상을 상상했습니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녀는 월경이 분명 부럽고도 자랑할 만한 남성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에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초경을 한 소년들은 드디어 남자가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정부는 사회 발전에 헌신하는 남성을 위해서 생리대를 무료로 지급합니다. 종교인들은 남성이 흐르는 피가 죄를 씻어 내리는 신성한 반응이라고 말하고, 월경이 없는 여성들은 불결한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생리를 특혜라고 주장하는 분들이라면 아주 좋아할 만한 유토피아군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생리는 여자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은 여성의 생리를 부러워했던 걸까요? 남성 중심사회는 오랫동안 생리를 불결한 것,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게끔 했습니다.

 

<피의 연대기>는 생리대를 통해 여성들이 살고 있는 생리 기피 사회, 생리대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대기업이 만든 일회용 생리대만 선택하고 착용해야 하는 여성의 경험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영화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생리 공감에서는 생리를 안 할 권리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저는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먼저 읽었어요. 영화를 못 보신 분이라면 김 감독이 쓴 생리 공감을 읽으면 됩니다. 책에 영화 속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의 연대기>생리 공감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성 장애인의 생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생리를 경험하는 장애인 여성들만의 불편함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비장애인 남성인 저는 장애인 여성들의 생리 경험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김 감독님도 여성 장애인의 생리 문제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공감했지만, 여성 장애인의 생리 문제를 영화로 만들 능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비장애인 여성인 자신이 여성 장애인의 생리 경험을 주제로 영화를 만든다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리하는 여성의 몸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그것 또한 혐오예요. 생리는 몸이 변화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므로 건강한 생리를 위해 필요한 도움을 받는 건 당연한 인간의 권리입니다. 여성들은 생리를 혐오하는 문화에 반항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성들은 생리를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Trivia

 

 

 

GV가 끝난 후에 감독님의 친필 사인을 받았습니다.

 

 

 

 

 

 

 

 

 

삼삼다방에 연회비 3만 원을 내면 영화 관련 도서들과 영화 DVD를 대여할 수 있습니다. ‘책 덕후인 제가 삼삼다방에 있는 책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죠. 책 구경하다가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여성론(까치, 1990) 제본 판을 발견했어요. 저는 이 책을 가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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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13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너는 남자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여성에 대해
지대하게 관심을 갖는지 감탄을 넘어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런 남자들이 30년 전이나 후나 꼭 있어.
30년 전엔 그럼 남자들 면도기 무상으로 지급하라고 해서
무산됐다는 얘기 있었는데 말야.
무상은 고사하고 싸게라도 팔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생리대 고급화 전략을 쓰면서 값만 올려놨잖아.
생리대의 유해성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도 않았으면서.
네가 아는지 모르겠는데
일반 생리대가 또 점점 사라지고 있어.
울트라라고 얇고 흡수력이 좋은 게 매대를 점령하고 있지.
작년까지만 해도 반반 정돈데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어져 버렸더군.
내 말은, 지금 일반 생리대의 유해성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울트라는 약품처리를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런데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걸 할 수 없이 써야한다는 게 말이되니?
이런 전략을 쓰는 거 남자들이지 여자들일까?
다음 모임은 언제 가 될지 모르겠지만 기회되면 얘기 좀 해 봐봐.

cyrus 2018-03-14 12:12   좋아요 0 | URL
제가 지금은 ‘비혼주의자’이지만, 독신으로 산다고 해도 여성의 경험을 모르고 살아갈 수 없어요. 제가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남자라서 여자에 대해서 잘 몰라요... ㅎㅎㅎ 여자에 대해 잘 모를수록 여자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되고, 여성을 ‘혐오’하게 돼요.

남자인 제가 생리대를 얘기하면 ‘맨스플레인’이 될 수 있으니 간략하게 말할게요. 일회용 생리대를 거부하고 ‘생리컵’을 착용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해요. 생리컵 이외에도 ‘대안 생리대’가 아주 많아요. <생리 공감>에 다양한 대안 생리대와 생리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어요. ^^

북깨비 2020-06-1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제목을 방금 처음 보고 맨 처음 든 생각이..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남자 화장실 청소는 누가 할 것인가.. 제가 여지껏 실수로 문을 연 남자화장실이나 너무 급해서 들어간 (비어 있던) 남자 화장실이나 남녀공용 화장실이나 여자 화장실과는 달리 너무 지저분하고 냄새가 심해서 ㅠㅠ 결벽증이 약간 있는 저는 남자는 역시 월경이 없는 것이 낫지 않은가.. ^^;; 물론 그게 논점이 아니지만 책 제목을 본 순간 제일 먼저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라 끄적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