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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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 싸우는 이유는 국가가 조장하는 빈곤과 오랜 독재와 군국주의가 가져온

인간 파멸에 끝없이 희생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 p 531)

 

 

 

 

 

  제3세계 국가들은 지금까지도 못 사는걸까?

 

내가 다니는 학교 행정학과 3학년 전공수업 중에 ‘발전행정론’이라는 과목이 있다. 이번 2학기에 개설되어 있는 과목으로 수학하고 있다. 발전행정론은 발전도상국의 국가발전을 위한 전략과, 국가발전 추진 체제로서의 행정 체제의 발전 문제를 연구하는 행정학의 한 분야이다. 발전도상국의 발전 전략을 거시적으로 다루는 과목이라 오늘날 행정학과 과목 중에 구식에 속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에 크게 유행하다가 1970년대에 사라진 반짝 이론인 것이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신청한 전공수업 중에서 제일 관심 있게 공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발전도상국들의 빈곤은 4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니까. 과거에 ‘제3세계’라고 불리던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은 선진국들에 비해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사실 과목 내용 자체만 흥미로워서 공부하는 건 아니다. 발전행정론 수업이 토론방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 과목을 안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토론 방식은 한 주마다 교과서 한 챕터를 주제로 삼아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것이다. 토론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찬반 의견을 나누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준비한 의견들을 서로 교환, 비교해나가면서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몇 주 전에 했던 토론 주제는 ‘제3세계 국가의 저발전 원인과 대책’이었다.

 

25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각자 제3세계 국가의 저발전 원인에 대해서 의견을 말했는데, 다양한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학생은 기후가 열악해서 원조를 받아도 발전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은 일부 제3세계 국가에서는 여전히 선진국의 경제 원조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제3세계가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학생들의 토론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학자들 사이에서도 저발전의 원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1960년대에 잠시 유행했던 발전행정론 역시 개발도상국으로 부상한 제3세계의 저발전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문 분야이다. 발전행정론의 유행이 시들어지면 또 다른 학자들은 저발전의 원인을 분석한 이론들을 가지고 나온다. 이처럼 시대가 바뀔수록 이들 국가의 저발전 원인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고 하고 있지만,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 경제제도의 방향이 국가 발전을 좌우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북한)과 포용적 경제제도(남한)가 만들어 낸 빈곤과 발전의 결과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공동으로 저술한 경제학자 대런 애시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우리 발전행정론 토론을 듣고 있었다면 아마도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학생들이 주장한 기후 원인론, 원조 부족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주장하는 세계 저발전의 원인은 간명하다. 지구촌 빈부 격차는 지리나 문화 탓이 아니다. 정치, 경제 제도가 얼마나 포용적(inclusive)이냐, 착취(extractive)하느냐가 결정적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남북한의 차이를 비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북한이 이처럼 경제적으로 다른 길을 걸은 연원은 분명하다. 남한에서는 경제적 삶을 지배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규칙인 경제제도가 국민의 저축과 투자, 혁신을 보상해준 반면, 북한은 그렇지 못했다. 양측 모두 중앙집권화의 역사를 통해 성장이 가능했지만, 원래 그런 권력이란 좋게도 쓰이지만 나쁘게도 쓰이는 법이다. 남한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수출과 혁신을 장려하고 공공재를 제공했지만, 북한은 탄압과 통제를 위한 권력을 휘둘렀을 뿐이다" (p 15)

 

 

남북한이 보여주는 차이에는 전 세계 부국과 빈국의 차이를 통해 일반 이론의 모든 요소를 설명할 수 있다. 저발전의 원인은 바로 '제도'에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포용적인 제도'는 발전 성공으로 이끌며 모두를 끌어안고 잘살게 만든다. 반면 지배계층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가져온다.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법체제가 공평무사하게 시행되고, 누구나 교환 및 계약이 가능한 경쟁 환경을 보장하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는 포용적인 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착취적인 제도에 의한 국가의 경제는 곧 패망으로 가는 길이며 저발전이라는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착쥐적인 제도에 의한 국가 실패를 지도자의 무지 탓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무조건 옳은 말은 아니다. 소수 엘리트가 수탈적 제도를 선택하는 건 경제발전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포용적 제도가 불러올 창조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가 불러올 결과는 부와 소득분배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 권력도 분산시키며 다원화된 사회로 변모된다. 이렇게 되면 수탈적 체제의 지배층이 인민을 통제하기는 더 이상 어렵다. 이러한 착취적 제도에 의한 저발전 상태는 현재 북한의 김정은 체제뿐만 아니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 구 소련, 해방 이후 제3세계 국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한 국가라고 여겨지고 있는 저발전 상태의 일부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군부, 관료 독재 체제에 의한 착취적 제도가 작동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예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진부한 이론 

 

책의 공동 저자는 경제 발전에 지리적 위치를 강조하는 제레드 다이아몬드, 문화적 차이를 중시하는 막스 베버, 선진국 경제학자들이 잘 가르쳐 주기만 하면 가난한 나라도 부자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책의 뒷표지 심지어 책 마지막 장까지 이 책에 대한 수많은 찬사들을 할애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이론을 비난한 제레드 다이아몬드까지도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예비 노벨경제학상이라 불리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은 경제학자의 주장이라고해서 기존 학계를 뒤흔들 신선한 이론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과찬이다. 사실 이 한 권의 책에 대한 수많은 찬사들은 몰이해를 넘어서 참을 수가 없이 요란스럽다. 

 

애쓰모글루의 주장은 '미시적 행위의 거시적 결과'라는 시각에서 설명한느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즉, 착취적 제도를 만들어 내는 국가의 지배자, 개인의 행위에서 저발전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이미 1960년대 미국의 경제학자 맨커 올슨(1932~1998)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얼핏 고전적 엘리트 이론을 연상케 한다. 다음 책 본문에서 인용한 구절을 보자.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실수와 무지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뜻이다. (p 109~110) 

 

 

19세기 말에 등장한 고전적 엘리트 이론은 사회는 권력을 가진 소수 엘리트와 가지지 못한 일반대중으로 구별되며, 소수의 동질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지도자(엘리트)가 다수의 일반대중을 지배한다고 본다. 소수 엘리트 체제는 자율적이고 다른 계층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사회전체나 일반대중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정책을 결정한다. 대표적인 고전적 엘리트 이론은 파레토의 법칙(20대 80 법칙)과 미헬스의 과두제 철칙 등이 있다. 그 중에 과두제 철칙은 애스모글루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다.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는 민주적, 다원주의적 체제와 구분된다. 이렇듯 애스모글루는 고전적 엘리트 이론을 경제 체제와 접목해서 저발전의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포용적인, 너무나 포용적인' 제도의 결과는 시장실패

 

저발전 원인을 딱 한 가지 관점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통해 저발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일부 국가의 저발전 현상은 학자들의 명철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애스모글루는 저발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국가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은 착취적 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제시했으나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허점이 몇 가지 있다.

 

사유재산이 보장된다는 것은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한다. 결국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경제제도와 비슷하다. 다만 포용적 제도와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신자유주의는 공정한 경쟁와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며 그로 인한 국가 내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포용적'과 거리가 먼 문제점을 낳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진 기업들은 자본을 독점화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 역시 '포용적 제도'의 취지랑 다르다.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하고, 소득 분배가 고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시장실패'로 이어지며 저발전의 원인이 된다 .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정부 시절의 경제발전을 '포용적 제도'의 사례로 보기에는 어색한 점이 있다. 제3세계 국가에서는 경제사회의 원초적 자본축적의 결핍을 원인으로 경제발전을 주도하게 되고, 국가주도 산업화는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출현을 조장하기 쉽다. 정치발전(민주주의)와 경제발전(자본주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지만 양자의 과제가 동시에 진행, 달성된다는 건 쉽지 않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산업화의 효율적인 추진과 발전위기의 극복을 명분으로 대부분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구사하며, 특히 민중부문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내세워 노동자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배제시키는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통치제도는 민주적 정당성의 위기를 자초하여 민중저항을 유발하고, 이 와중에 경제적 측면의 효율성과 효과성마저 감퇴되면 저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은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특수적 사례인 셈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애스모글루는 한국 박정희 정부의 발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하는 게 아니라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취하고 있다.   

 

"한국의 사례처럼 착취적 정치제도에도 불구하고 경제제도가 포용적 성향을 띤 덕분에 성장이 가능하다 해도, 경제제도가 더 착취적으로 바뀌어 성장이 멈춰 버릴 위험이 상존한다."  (p 144)

 

 

 

부록을 제외한 본문만 해도 6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에 한국의 사례가 소개되었다고 해서 그리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다.한국에 대한 평가는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드러날 뿐이니까.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사회와 경제는 포용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는 권력 실세와 엘리트 관료의 부패는 아직 착취적 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 점점 부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실자본주의의 폐해를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진정한 창조적 파괴를 물론, 고성장에 의한 국가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장 성공적으로 고성장한 한국은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실패한 국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치와 경제 체제의 포용성을 높이기 위한 청사진이 나와야 한다. 창의와 혁신을 북돋울 포용적인 제도의 정착이 중요하지만, 냉혈한과 경쟁만이 남아 있는 이 척박한 한국 사회 지도에 '포용'을 그려 넣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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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 쿠바 미사일 위기 회고록
로버트 F. 케네디 지음, 박수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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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K) 대통령이 말했다. <최악의 상황은 오판, 즉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거야>

 

- 로버트 F. 케네디 『13일』(13 days) p 51 -

 

 

 

 

 

 

 1962년 10월 16일 화요일 아침, 위기의 시작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와 미국의 대통령 JKF

 

 

 

 

올해 10월은 쿠바 미사일 위기 50주년이다. 요즘 사람들 중에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 하지만 50년 전 이 때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는 그리 가볍게 볼 사건은 아니다. 1960년대는 미국과 구 소련을 정점으로 동서 양 진영의 대립이 첨예화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터진 게 그 유명한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이다. 피델 카스트로(1926~    )가 이끄는 혁명정부가 쿠바에 들어서면서 소련의 흐루쇼프(1894~1971) 공산당 서기장과의 밀월관계에 들어가고 미국은 초긴장 상태에 빠진다. 1962년 10월 16일. 미국과 소련은 13일 간 전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는 힘으로 무장한 채 으르렁거렸다. 평범한 일상이 될 법한 그 날 화요일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평화가 달려 있는 위기의 시작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전쟁이 발발한다면 핵전쟁이 될 것이다. 핵전쟁은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갈 것임을 잘 알면서도 전쟁의 문턱까지 갔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생적 사회주의 국강인 쿠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량의 무기를 쿠바에 반입했다. 이에 미국은 방어용 무기의 반입은 묵인하겠지만 공격용 무기만큼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쿠바에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 기지가 세워진다면 소련으로서는 전략적으로 확고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쿠바는 미국 아래 카리브 해역에 있다. 미국은 소련이 최악의 행동은 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당시 흐루쇼프 서기장은 존 F. 케네디(JFK, 1917~1963) 미국 대통령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에 미국 수뇌부는 소련이 미국의 뒷통수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나톨리 도브리닌(1919~2010) 주미 소련 대사 역시 백악관을 방문하면서 그런 최악의 상황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오히려 핵전쟁의 전초전을 우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를 건설 중인 것을 발견했다. 소련에게 뒷통수 맞은 미국 수뇌부는 황급히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 엑스콤)를 소집했고 모든 대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최적의 해결 방안을 도출하기 위한 의사 결정 과정

 

 

 

 

 

 

백악관 정원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JFK와 바비(로버트 F. 케네디)

JKF는 정책을 결정할 때 항상 바비의 의견을 귀 기울였다고 한다.

(『13일』수록)

 

 

JFK의 동생이자 케네디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으로 활동했던 로버트 F. 케네디(애칭 '바비', 1925~1968)는 당시 엑스콤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 때 당시 회의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회고하고 있다. 미사일 반입을 묵인한다는 안에서부터 공중공격을 통한 기지 파괴 심지어 카스트로를 암살해야 한다는 극비 침공까지 다양한 안이 탁자에 올랐다. JFK 입장에서는 수뇌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해 확실한 방안 하나 제대로 결정하기가 힘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JFK와 바비는 쿠바 침공을 통한 소련과의 전면전보다는 포성 없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JFK는 좀 더 활발한 토론을 통한 최적의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기존의 의사결정 방식에 변화를 줬다.  각각 부처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수렴하기 위해서 대책 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의견을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의사 결정 참여에 있어서 내부의 정보만 참고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정보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외교 활동에 잔뼈가 굵은 전직 소련 주재 대사의 의견을 참고할 정도로 다양한 의견들을 듣고자 노력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최종 교훈,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소련이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과시해야 했다. 그러나 대응 강도를 높여서 소련에 압박을 줘서도 안 되었다. 소련에게 생각할 시간과 체면을 잃지 않은 채 후퇴할 수 있는 여지도 주어야 했다. 그래서 채택된 것이 해상봉쇄였다. 10월 22일. JFK는 중대 연설을 통해 쿠바로 향하는 모든 선박에 실린 공격용 군사무기를 철저히 봉쇄할 것이며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도발을 중단하고 미사일을 제거할 것을 촉구했다.

 

일부 미국 여론과 보수 진영의 공화당 진영은 JFK의 해상봉쇄령이 소련과의 갈등을 더욱 장기화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비판적인 지식인이었던 버트런드 러셀마저도 미국의 강경책에 비난할 정도였다. 그러나 JFK는 소련이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지 않고 소련이 국익 때문에 대응 강도를 높이지 않도록 심사숙고하게 검토했다. 상대방 소련의 입장을 최대한 생각하고 존중한 대응책인 것이다. 쿠바 미사일 기지를 정찰하고 있었던 미국 U-2기가 격추당하는 돌발의 사태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JFK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전면전의 위기 속에서도 흐루쇼프 서기장과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단순히 미국과 소련 간의 전면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전초전이 아니다. 세계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핵무기로 무장한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 수 있었다. JFK는 전쟁으로 인한 인류 멸망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흐루쇼프가 자국의 이익이 아닌 인류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되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제안과 역제안이 오가는 비밀협상을 통해 미국은 쿠가 불가침과 터기 및 이탈리아 배치 미사일 철수를 약속했고 소련은 선박을 회항시켜 쿠바 미사일 계획을 철회함으로써 위기는 풀렸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꼭 읽어봐야 할 논픽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지도자의 특성과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로버트 케네디는 13일 간 이루어진 위기 극복의 과정을 『13일』이라는 한 권의 논픽션을 통해 그 당시의 상황들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원활한 의사결정 과정이 이루어지기 위한 알아야 할 교훈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첫 번째, 의사결정자는 항상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들으려 하는 맹신에 빠진다. 그리고 익숙한 정보와 경험만 가지고 상황을 판단하고 추측하려는 성향이 있다. 미국은 사태 이전동안 쿠바 미사일 기지를 정찰하면서도 소련이 쿠바 땅에 기지를 설치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당시 흐루쇼프 서기장은 JFK에게 공식 비공식 채널을 통해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두 번째,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속에서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것. 만약에 JFK가 해상봉쇄령 대신에 전면전을 예고하는듯한 강경한 군사적 대응을 준비했더라면 지금쯤이면 이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침공을 주장하는 군 수뇌부의 입장만 곧이곧대로 들었다면?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역사 교과서에 '쿠바 미사일 위기'와 함께 '제3차 세계대전'이 소개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의 마지막 장면처럼 전 세계 인류가 핵으로 멸망했을지도.

 

세 번째,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세가 아니다.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상대방의 입장 또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제아무리 논리적인 사람이라도 자신의 의견과 대립되는 입장에 선 의견이나 정보를 무시하게 된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라는 스티븐 잡스의 말처럼 자신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 필요하다.   

 

비록 냉전시대의 사건이라서 지금의 구도와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국가의 전략을 논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국익을 지켜내는 강력한 리더십을 생각한다면 지금 미국이나 한국 정부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역사적 사례이다. 냉전의 찌꺼기기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반도의 분단구조를 등에 업고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버거운 생존게임(survival game)을 벌이고 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교전 상황에서도 상대 의중을 정확히 파악해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채널과 통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평화는 우세한 군사력에 엄격한 통제 시스템, 대외 협상력과 외교 그리고 국민의 의지가 뒷받침돼야 유지될 수 있다. 로버트 F. 케네디의 논픽션은 당시 사태의 긴장감을 살리지 못해 밋밋한데다 가벼운 분량이다. 하지만 여전히 군사적 충돌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지금 한반도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그리 가볍게 볼 책은 아니다. 특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선을 앞둔 채 차기 한국의 지도자를 준비하고 있는 대권주자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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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3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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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과신한다.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p 300) -

 

 

 

 

 

 합리적 인간의 불편한 진실

 

춘추 전국 시대 초나라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한가운데쯤 왔을 때 칼을 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바로 주머니칼을 꺼내서 배에 자국을 내어 빠뜨린 부분을 표시해 두었다. '떨어진 자리에 표시해 놓았으니 칼을 찾을 수 있겠지.' 그는 배가 언덕에 닿자마자 뱃전에 표시해 두었던 물속으로 뛰어 들었으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씨춘추』에서 유래된 '각주구검'(刻舟求劍)에 관한 일화다. 각주구검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배를 타고 강에 나가서 칼이 빠져버린 위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양쪽 강변의 지형 지물을 보는 것이다. 칼의 주인이 떨어뜨린 칼에만 몰두하지 않고 강변을 주목했더라면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융통성 없는 이 바보스러움을 우리는 반복하기도 한다. 그 바보스러움은 각주구검의 그것과 같이 시간성과 공간의 변화라는 점을 무시한 목적의 설정이라는 것이다.

 

시간성과 공간뿐만 아니라 숫자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개미들이 투자를 할 때 기점이 되는 가격은 말할 나위 없이 매입가, 즉 본전이 된다. 그들은 항상 지금이 본전 대비 이익인지 손실인지를 따지고 든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 기준가가 바뀌기도 한다. 만약 주가가 상승해서 한 번 그 주식이 고점을 쳤다면 그 고점이 새로운 기준가로 변한다. 개미들은 주가가 그 고점에 갔을 때의 기분을 이미 느껴봤고 그 가격대를 또 다른 나의 본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증시가 조금이라도 주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면 시장에서는 비관론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비관론이 만약 논리적이라고 판단되면 주식을 파는 것이 마땅한데, 개미들은 얼마 전에 경험했던 고점에 미련이 남아 지금 가격대에 팔기가 싫어 하는 경향을 보인다. 만약 지금 팔았다가 바로 주가가 반등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가가 상승을 하다가 다시 하락하면 전 고점은 또 하나의 숫자로 각인이 되고 투자자들은 그 고점을 본전으로 여긴다. 그 숫자에 집착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 경제학 용어로 '기준점 편향'(Anchoring Bios, 닻내림 편향)이라고 말한다.

 

합리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은 왜 이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인가?  과연 인간은 지구상에 유일한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성과 직관, 두 가지 생각 시스템의 상호작용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생각을 크게 2가지로 구분한다. 직관을 뜻하는 시스템 1의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이성을 뜻하는 시스템 2의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다.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는 동물적 감각의 순발력, 끔찍한 사진을 보자마자 저절로 인상이 찌그리게 되는 것처럼 완전히 자동적인 개념과 기억의 정신활동이 '빠르게 생각하기'이다. 반면 123 x 456의 문제처럼 머릿속에 즉시 떠오르지 않는 문제의 답, 복잡한 논리적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확인할 때는 '느리게 생각하기'가 작용된다.

 

인간은 어떠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두뇌 속에서 시스템 1과 시스템 2이 상호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면 냉장고 안에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자. 내가 냉장고 안에 있는 우유를 보는 순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시스템 1, 직관, 빠르게 생각하기가 만들어 낸 충동적인 인지 과정이다. 그러나 유통기한을 지난 우유를 마시게 되면 배탈이 날 수가 있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기한이 지난 우유를 벌컥 들이마셔서는 안 된다. 기한 날짜를 먼저 확인하고 우유가 상했는지 유리잔에 부어 확인한다. 그래야만 복통의 괴로움을 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 2, 즉 이성적으로 느리게 생각함으로써 행동을 통제한다.

 

 

 

 

 휴리스틱(Heuristic)에 의한 사고의 오류

 

 

● 언론이 집중 조명한 비행기 추락 사고는 일시적으로 비행기의 안전에 대한 느낌을 바꿔 놓는다. 길가에서 불타는 자동차를 본 후 당신 머릿속에는 그 사고 장면이 잠시 동안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당분간 훨씬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

 

● 개인적 경험, 사진, 생생한 사례들은 타인에게 일어났던 사건이나 단순한 말 혹은 통계보다 훨씬 더 머릿속에 잘 떠오른다.

 

 

 (p 190)

 

 

하지만 시스템 2에 의해 인간의 행동이 통제된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스템 2는 인지적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반복되고 낯익은 문제나 상황 앞에서는 나태해지고 회피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럴 때 인간의 행동을 통제되어야 할 시스템 2는 평소보다 기능이 약해지고 시스템 1에 의해서 의사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아는 것에 바탕을 두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을 주의해야 한다. 두뇌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단축을 선호한다. 애매모호한 자료나 대상은 자연스럽게 무시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사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가용성 휴리스틱이 만들어 낸 편향이다. 이것을 가용성 편향이라고 한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 난 후부터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보다는 기차나 배를 타는 것을 더 선호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가용성 편향이 만들어 낸 잘못된 생각일 뿐이다. 실제로 교통수단의 사고발생 빈도 수에 대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비행기보다는 우리가 자주 타는 자동차의 사고 발생이 높다고 한다. 가용성 편향의 착각에 빠지게 되면 실증적인 통계자료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직관의 함정에 빠지는 인간

 

그렇다면 통계자료를 완벽히 분석하고 이해하면 가용성 휴리스틱의 오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완벽한 대안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것 또한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 형성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통계자료와 같은 과거의 기록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의 기준과 틀로 이루어진 정합적인 사고로 형성된다. 의사결정자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근거의 자료를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만 가지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상황 및 사회문제들은 우연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은 작은 실마리를 토대로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하나의 이야기처럼 규칙적이면서도 정함성을 갖고 돌아가지 않는다. 지난번에 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잘될 것이라는 맹점에 빠지게 되는게 이것을 '정당성의 착각'라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오류는 분석적인 의사결정 성향이 강한 기업의 CEO들에게 많이 볼 수 있다. 분석적이고도 논리적인 사고를 지향한다는 CEO마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스템 1의 직관에 의해 생각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일부 CEO들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정합적인 과거만을 이해함으로써 미래를 예측하고 운의 역할을 무시한다. 그리고 아는 업무에만 집중하게 되어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과신하는 초낙관주의 성향에 빠지게 된다.

 

시스템 1의 직관의 기능과 관련된 인간의 오류적 판단 경향은 '전망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대니얼 카너먼과 故 아모스 트버스키의 공동 연구에 의해 밝혀졌으며 2002년에 심리학자 카너먼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안겨 주었던 이론이다. 우리는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이익보다도 손실에 더욱 민감하고 손실을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했던 '기준점 편향'에다가 위협을 기회로 여기는 낙관적인 사고까지 어울린다면 종종 자신에게 유리한 이익을 거부하게 되는 모순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매몰비용으로 상당한 손실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실 규모가 더욱 확대될 정도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개발 사업을 오랫동안 매달렸던 영국와 프랑스의 경우가 전망 이론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콩코드 효과)

 

 

 

 

 합리주의자들이여, 익숙한 생각의 지배에서 벗어나라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그래서 기억하는 동물이며 결국 후회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말이야 쉽지 합리적인 인간이라도 올바른 결과를 위한, 옳은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 '잘'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상 유일한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명예로운 훈장을 내려놓아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범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습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훈련만 한다면 완벽한 해답에 도달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쉽게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실행할 수 있다. '생각'에 의해 작동하는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만큼 현명한 선택을 할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익숙함과의 결별'이 중요하다. 이미 주어진 정보와 지식만을 가지고 의견을 보강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보다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에 의도적으로 개방하고 수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최대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을 활용하여 문제 예측의 시나리오를 만든다. 이러한 시나리오에는 예측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정보도 포함되기 때문에 판단의 오류에 의한 손실을 줄일 수 있다.

 

모든 성공은 최면이요 마약이다. 언제든 반복될 수 있고 어디서든 통할 것만 같다. 모 통신사 광고 카피처럼 '생각대로' 하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불확실성, 경쟁이 있는 사회에서 우리가 바라는대로 쉽게 생기지 않는다. 변화 빠른 시절에 과거의 성공 그리고 정보와 지식들은 그야말로 과거일 뿐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그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을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합리적인 동물' 인간은 자기 과신, 지나친 오만에서 비롯되는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그렇기에 카너먼은 이 책을 통해 세상을 합리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 경고보다는 충언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되돌아보고 인식할 것을 권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스스로 존재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겸손과 지혜가 필요해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하고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오랜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던 이 익숙한 생각부터 결별하는 것이 최우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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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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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모르게 돈으로 거래되고 있는 것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모든 것이 거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p 19)

 

 

 

* 올해 하반기부터 지정좌석제로 운영하는 정기이용권 버스가 시범 운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기이용권 버스는 1개월 이상 이용권을 구매한 승객을 대상으로 출근시간대 3시간(오전 6~9시), 퇴근시간대 5시간(오후 5~10시) 동안 좌석제로 운행된다. 하루 운행 횟수는 편도 기준 4회 이하다. 예컨대 일산에서 서울역까지 오가는 버스의 정기이용권을 구입하면 매일 지정장소와 시간에 좌석버스를 타는 식이다. 요금은 지역 여건을 반영할 수 있도록 자율신고제 방식으로 운영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과거 불법 사설 버스가 경기 용인에서 서울 삼성역까지 월 9만 9000원을 받고 운행한 적이 있으나, 정기이용권 버스 비용은 이보다 낮은 수준일 것"이라며 "일부 승용차 이용자들도 흡수해 대도시 교통난 완화에 도움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 인천지역의 일부 중등고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일제고사를 잘 치르면 상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들 학교는 기초학력 부진 학생이 없거나 성적이 우수한 학급에 상금을 주고, 기초학력 부진에서 벗어난 학생에게 1만원짜리 상품권을 지급하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리고 성적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학생은 자전거, 헤드폰, 선크림 등을 부상으로 받기도 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에 따르면 일제고사를 잘 보면 학급에 상금을 지급하거나 학생에게 문화상품권을 주겠다고 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조사 대상 96개 학교(중학교 54곳, 고교 42곳) 가운데 22%인 21개교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 최근에 방한했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청중 1만 명을 대상으로 무료 강연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샌델 교수의 강연을 돈으로 사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웃지 못할 역설이 발생했다. 이번 강연은 이메일로 신청자를 대상으로 선착순으로 무료 입장권이 지급됐으며, 신청자가 폭주하면서 입장권 발송이 조기 마감되었다. 하지만 신청이 마감된 입장권을 구하려는 사람이 여전히 많자, 이번에는 입장권에 웃돈을 얹어 팔려고 내놓은 암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강연 당일 인터넷 중고장터 등에는 샌델 교수의 강의 입장권을 장당 1만 원에서 많게는 3만 원까지 판매한다는 판매 글이 수 십 개씩 올라왔다.

 

 

돈은 편리하다. 또한 우리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돈의 권력은 막강하다. 일상생활의 웬만한 불편거리는 대부분 돈으로 해결된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이 그야말로 딱 어울릴 만큼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돈을 그만큼 많이 벌어야만 한다는 현실을 이제 한국사회는 시장지상주의에 익숙해진 듯하다. 하지만 돈을 대하는 태도는 어쩐지 불안하고도 이중적이다.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시장지상주의를 온몸으로 받아낼 자신도, 피해낼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다. 세상에는 이렇게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많다. 생명, 질서, 출생, 자연과 같은 가치들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샌가 돈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고 있다. 일정한 금액을 지불한다면 얼마든지 지정된 버스좌석에 앉아 편안하게 출퇴근할 수 있다. 그리고 시험만 잘 쳐셔 좋은 성적을 받게 된다면 노력의 성과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일정한 상금 및 상품을 받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샌델 교수의 강연 입장권마저도 거래 대상이 되었다. 후문에 의하면 강연 당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샌델 교수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사회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이루어진다?

 

 

 

 

 

(左) '보이지 않는 손'의 시장경제를 주장한 애덤 스미스 

(右)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공리주의를 창시한 제레미 벤담

 

시장을 옹호하는 두 번째 주장은 경제학자에게 좀 더 친숙한 것으로 공리주의자(Utilitarian)의 입장이다. 공리주의자는 시장에서의 거래가 구매자와 판매자에게 똑같이 이익을 제공하고, 결과적으로 집단의 행복이나 사회적 효용을 향상시킨다고 말한다.  (중략)  이렇게 시장 거래의 결과로 구매자와 판매자는 모두 행복해지고 효용은 증가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시장이 재화를 효율적으로 분배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입장이다.  (p 52~53)

 

 

시장경제 또는 자유주의 경제체제(시장자유주의)는 분업에 의해 생산된 재화와 용역을 자유 가격 체제의 수요와 공급 관계에 의해 분배하는 사회구성체이다. 실제로는 순수한 형태로서의 시장경제체제는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각 국가 또는 사회마다 다양한 형태로 수용되고 있다. 시장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모든 경제주체의 생산활동은 자유로우며, 시장에서의 물품구입도 자유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같은 흐름을 일견 너무 자유로워 무질서한 경제활동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가격이라고 하는 메커니즘이 시장에서의 상품매매를 성사시키고, 또 이것을 근거로 생산과 소비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의 특징은 장기적으로 보아 가격의 자유로운 흐름에 따라 자원의 합리적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시장자유주의 경제는 매우 효율적인 경제 체제이기는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경제적 효율성은 달성할 수 있지만, 형평성은 달성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리고 시장자유주의는 모든 경제 주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전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고 타고난 능력과 소질도 제각기 다르므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형평성 문제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면 사회적 불평등이 야기될 수 있다.   

 

 

 

 

 

공리주의적 효용 분배의 문제점

(참고자료 : 김정헌 『정책학NOTE』학문사)

 

공리주의에 입각한 정책(또는 제도) B의 전체 효용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갑과 을이라는 사회 구성원 개인 간의 배분상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면 정책 B는 불평등한 정책이 되고 만다. 이것은 결국 사회 전체의 효용 극대화를 강조하는 공리주의의 기본전제에 위반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역설은 시장경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시장자유주의의 환상을 부추기는데 공리주의가 일조하고 있다. 시장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근거의 배경에는 공리주의적 입장이 내포되어 있다. 공리주의는 한마디로 사회구성원 전체 효용을 극대화하도록 목표를 두고 있는데 시장지상주의자들은 시장 거래 행위에 참여하는 구매자, 판매자만 효용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 발전에 있어서 효응을 최대한 증진시켜 극대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각 개인은 자기의 이익을 뜻대로 추구하고 있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상상치 못했던 사회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봤던 애덤 스미스의 주장과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시장지상주의자들은 공리주의의 원리가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리주의 역시 시장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효율 분배에 대한 형평성 및 공정성의 기준으로 본다면 문제점에 직면하게 된다.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 효용의 극대화라는 기본전제로 인해서 개인상호간의 효용을 교환하는 것마저도 허용하고 있다. 즉,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 내용대로 도덕적 추구가치로 인정되고 있는 자유, 정의, 공익, 생명 등이 효용의 한 구성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전체 효용이 단지 크다는 이유만으로 개개인간의 배분이 제대로 돌아갔다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즉, 개인간의 효율배분이 불평등하더라도 전체 효용의 극대화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 간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공평성 또는 형평성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위에 제시한 표가 의미하는 것처럼 공리주의에 입각한 정책(또는 제도)이 전체 효용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갑과 을이라는 사회 구성원 개인 간의 배분상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면 그 정책(또는 제도)은 불평등한 성격이 되고 만다. 이것은 결국 사회 전체의 효용 극대화를 강조하는 공리주의의 기본전제에 위반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역설은 시장경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소개된 사례 하나를 예를 들어보겠다. 미국에서는 '전담 의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연회비 1500~2만 5천 달러를 지불하여 서비스에 가입한 환자는 불필요하게 기다릴 필요도 없이 본인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며 24시간 내내 언제나 건강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말 그래도 환자에는 '주치의' 한 명을 두고 있는 셈이다. 내용과 취지만 본다면 환자들이 좀 더 신속하고 원활하게 진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좋은 제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일정한 연회비를 지불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환자에게만 가능하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환자들은 진료 받기를 대기하고 있는 또 다른 환자들과 함께 진료실 밖에서 줄 서서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이들도 질 좋은 진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라면 비싸더라도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여 특별 진료 서비스 예약권이 암표로 판매되기도 한다. 과연 이러한 전담 의사 제도가 진료를 받기를 원하는 모든 환자들에게 전체 효용을 가져다주는 좋은 장점의 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제도는 단지 특정 상류층 계층만을 위한 '주치의' 서비스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의사들의 윤리적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선서 속 내용이 무색하게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적인 도덕적 윤리가 퇴색될 수 있다.

 

  

 

 

 도덕적 가치와 덕목은 상품이 아니다

 

1980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를 억제하여 '작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시행함으로써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시장지상주의의 번영을 알리는 서막의 신호탄으로 애덤 스미스의 초상화가 새겨진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해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시장자유주의가 오랫동안 경제 호황을 가져다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유례없는 풍요와 번영을 이끌어낸 시장자유주의는 인류가 미처 그 다음을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인간사회 자체를 거래가 최선의 행위로 강조하는 시장사회로 만들어버렸다. '재화를 사고 판다'는 논리가 더 이상 물질적 재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점차 현대인의 삶 전제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들은 대부분 저자가 태어난 곳이며 이미 시장경제가 활발히 작동하고 있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책의 서론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장경제의 윤리적 딜레마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답게 거래 대상이 천차만별이다. 미국의 일부 도시에는 죄수가 일정 비용만 지불하면 호텔방 못지 않은 독방을 마련해주는 교도소가 있다. 댈러스에 위치하는 어느 학교는 학생들이 책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돈을 지급해준다. 심지어 어느 명문대는 학생의 성적이 나쁘더라도 부유한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명문대로 입학하기 위한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면 입학을 허락해주는 비공식적인 관례(?)도 있다고 한다. ('관례'라기보다는 '청탁성 뇌물'에 가깝다)

 

미국에서는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 윤리적 딜레마의 사례들이 과연 우리나라에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곳곳에 시장경제체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윤리적 딜레마들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시장중심적 사고를 일상생활에서도 흡수하고 있다. 아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이미 잠식당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타주의, 관용, 결속, 시민 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   (p 177)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되면, 시민정신, 관용, 공공성, 우정과 사랑, 명예 등 인간사회의 중요한 윤리적 덕목이 사라진다. 샌델의 말처럼 이 윤리적 덕목과 가치들은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는 데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근육이다. 올바른 삶의 질로 이루어진 '근육'이 균형잡혀야 '사회'라는 신체가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다. 하지만 근육은 오랫동안 운동하지 않는다거나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된다. 이렇듯  삶에서 중요하고도 가치로운 것이 상품화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정한 것들의 가치가 변질되거나 저평가되어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게 된다. 시장가치를 내면화하는 경향은 삶의 질, 맺어온 관계들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의 대상이 아닌 '사물'로 인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경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시장 중심의 사고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센델은 시장경제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시장에 대한 도덕적, 정신적 논쟁을 꺼리는 태도로 인해 공적 담론에서 도덕적 에너지와 시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여전히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부패가 만연하다. 시장경제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딜레마는 빠른 시일 내 해결하기는 무척 어렵다. 시장경제 메커니즘이 우리 삶에 가져다주는 이익과 효용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 또한 외면하거나 방관해서는 안 된다.  

 

문제를 인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다. 우선 시장의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하여 시장의 가치에 의해 침해받고 있는 공공의 가치가 무엇이며, 그러한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공적 토론을 벌임으로써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는 토론 여건이 필요하다. 공공의 영역으로 중요시되는 교육, 의료, 시민권 등은 돈과 시장의 가치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영역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밀어내서는 안 되며, 공공선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이견이나 생각을 이끌어내는 공적 토론이 필요하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논의와 시장에서 가격으로 결정되어서는 안되는 사회적 재화를 평가하는 방법에 대한 공적 토론을 통해 적어도 우리가 선택했고 적응하고 있는 사회의 이면에 대해서 대중들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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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9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9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2-07-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귀하셨군요. 학기는 잘 마치셨는지

cyrus 2012-07-19 23:0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세인트님, 무더운 여름 잘 보내고 계신가요? 지금 방학인데도 학업을 위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 학기나 방학이나 일상은
변한게 얺네요 ^^:;

카스피 2012-07-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언제나 느끼는점이 정말 리뷰를 성실히 잘 하세요^^

cyrus 2012-07-19 23:10   좋아요 0 | URL
요번 1학기 때부터 공부하느라 블로그 관리 소홀히 하다보니 예전처럼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었던
분위기가 나지 않네요. 게다가 페북이랑 카스토리에 빠져서 요즘엔 짧은 글을 쓰는게 좋더라고요 ^^;;

2016-02-14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2-15 08:05   좋아요 1 | URL
이 글, 진짜 오랜만에 봅니다. 이상하게 옛날에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면 부끄럽습니다. ^^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 '선거 불완전론' 레토릭의 위험성

 

 

 

 

 

 

 

 

최근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안을 놓고 당내에서 내홍의 사태가 번지면 번질수록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 결과 여부에 대한 화제가 살짝 묻힌 감이 있다. 이번 주 월요일에 현장투표와 모바일투표를 벌였고 오늘 실시하는 미투표자를 대상으로 한 모바일 투표 결과를 합산하여 통합진보당의 차기 대표가 선출된다. 대표 경선은 구당권파의 지원을 받는 강병기 후보와 신당권파의 강기갑 후보의 양자 대결로 펼쳐지고 있어 선거 결과에 따라 당의 쇄신 방향뿐만 아니라 이석기, 김재연 의원의 제명이 결정될 것이다.    

 

이석기 의원은 올해 상반기동안 수많은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명언들(?)을 남겼다. 애국가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인해서 정계, 대중, 여론으로부터 '종북주의자'라는 비난의 뭇매를 받았지만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비난대상이 되고 있었던 자신의 정치적 가치관과 그간의 행적들에 대해서 자기합리화하는 발언도 있었다. 4.11 대선이 끝난 이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이 거론되면서부터 그 문제적 이슈 한가운데에 이석기 의원이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서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이 의원은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하여 당내 부정선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 의원은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 대해 "일부 부실이나 부정은 있을 수 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번 사태는 전체 선거를 부정할 만큼의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번 경선을 '총체적 부정선거'로 매도하는 것은 정치적인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 진보정당은 천상의 정당이 아니다. 진보정당이기 때문에 100%여야 한다는 건 대단히 무서운 논리"라며 당 안팎의 비난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일부 부정을 인정한 점 그리고 완벽한 선거가 없다는 그의 주장을 통해서 당내 비례대표가 부정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이 의원 본인이 스스로 시인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비례대표로 선출할 수 있게 만든 부정적인 과정들이 정당한 행위였음을 뻔뻔하게 자기합리화하고 있다.

 

그런데 '선거의 불완전함'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이 의원의 레토릭(Rhetoric)은 논리성이 부실하면서도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기도 하다. '선거'(選擧)국민에게 정치참여의 기회와 통로를 제공하여 여러 형태의 정치참여 중 가장 일반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하도록 기능한다. 이 의원의 '선거 불완전론'은 선거의 정치적 참여기능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점 또한 강조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1987년 6.29 선언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 사회로 이행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정치과정은 국민들에게 정치불신과 함께 정치적 소외의식을 불러일으켜 '정치적 무관심'(Political apathy)을 낳게 만든다. H.D. 라스웰(H.D. Lasswell)과 M.A. 캐플런(M.A. Kaplan)은 현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탈(脫)정치적, 무(無)정치적, 반(反)정치적' 이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탈정치적 무관심은 권력의 행사에 의한 자신의 요구 충족에 실패하여 권력에 환멸을 느끼고 후퇴하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무정치적 무관심은 예술 등 정치 이외의 가치에 극단적으로 기울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반정치적 무관심은 아나키스트(Anarchist)나 종교적 원리주의자 등 자신이 갖는 가치가 본질적으로 정치와 충돌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나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무관심은 탈정치적 유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고 자신이 요구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허술한 정치권력의 행보에 대해서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서 불신에 이르게 된다. 정치에 대한 불신의 폭이 깊어지면 깊을수록 국민들은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의 정도가 낮게 되며 정치과정에 대해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문제점에만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면 자칫 '민주주의'를 현실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그저 '민주적 원리만을 강조하는 이론'으로 인식하게 된다.

 

 

 

 

 민주주의, 정말로 최악의 정치 체제인가?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민주주의는 우리가 여태껏 채택했던 모든 제도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치 체제'라고 말했다. 만약 '정치적 무관심'이 만들어 낸 패배주의적 감정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어리석은 대중이 처칠이 한 말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모순과 문제점을 옹호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은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정치 체제란 말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즉, 완전히 맞다고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틀렸다고도 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최악의 정치 체제이면서도 동시에 인류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최고의 정치 체제다. 처칠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역설적 표현이 구사된 영국식 유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로저 오스본이 펴낸『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본다면 고대 아테네에서 처음 등장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민주주의 체제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부터 시작해서 입헌군주제가 탄생하게 만든 영국의 명예혁명, 유럽 정치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의 과정 등 이름만 들어도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왜 처칠이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치 제체'라고 말했는지 독자들은 고개를 자연스럽게 끄덕이게 것이다.

 

 

 

 

 말도 많고 탈이 많았던 민주주의의 역사   

 

민주주의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democratos(국민의 지배)'라는 말이 나왔듯이 그리스에서 기원하였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발전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직접민주주의에 그쳤다. 모든 시민들이 '입법의원'이 되어 직접 참여하였다. 이때의 여성들은 선거권이 없었고, 노예제도가 존속하고 있었다. 물론, 고대사회의 민주제도에서도 평등원칙이 존중되기는 하였으나 보편성에 입각한 만인의 평등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의 정치적 참여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러한 원칙을 최초로 문서화하여 선보인 곳이 오늘날 스위스 알프스에 위치하고 있는 그라우뷘덴이다. 1499년 그라우뷘덴 주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해 자유국가임을 선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주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투표제도 또한 실시했는데 국정 운영을 담당하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오늘날의 국민투표제의 형태라기보다는 주의 지도자가 제안한 정책사안에 대해서 마을 주민 전체의 합의를 도출하는 공동체적 측면이 강한 투표제였다.

 

이렇다보니 공동체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을 강조하는 그라우뷘덴의 정치형태에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오직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공동체적 삶에 익숙한 주민들은 자아의 주관적 의식을 배제한 채 정책결정에 참여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라우뷘덴의 통치 기구들의 권한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집단적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사법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치명적 약점이었다. 

 

 

 

민중이 완전한 자주권을 쥔 상황에서 그 힘에 대한 견제가 부족하다면 제멋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나름대로 만들어놓은 법을 마을 전체가 통째로 위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735년 한 사내가 반역 혐의를 받은 사건이 터졌다. 용의자의 집은 약탈당했고, 추종자는 돌 세계를 맞았다. 한 마을 주민은 "합당한 왕국"에 의뢰해 재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곧 당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 133)

 

 

 

1688년에 발생한 영국의 명예혁명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왕권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역사 시간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명예혁명 이후에도 영국의 의회정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민주적이지 않았다. 정말 문자 그대로 '의회'만이 주권을 가진 의회정치였을 뿐 실질적으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의회에 입성하기 위한 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혈연 중심으로 유권자를 내세운다거나 매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비민주적인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정치 체제 속에서 인민의 대표로써 책임을 다하는 민주적인 '정치인'이 나올 리가 없었다.

 

 

1715년에서 1831년 사이, 스카버러 구에서만 서른여섯 번의 정기선거과 보궐선거가 치러졌지만 여러 후보가 경쟁한 것은 고작 일곱번 뿐이었다.  ...  중앙정부가 적어도 의석 하나를 수중에 넣거나 아예 두 의석 모두 독차지하기 일쑤였다. 

 

 (중략)

 

개인과 가문의 경쟁 구도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  진정으로 치우침이 없는 후보는 극히 드물었다.   (p 169)

 

 

비단 명예혁명을 이룩한 영국에서만 비민주적인 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민혁명의 전형이라고 알려져 있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또한 혁명 성취 이후 지금의 민주주의 체제로 온전하게 확립되기까지 수많은 진통을 겪어야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선거 투표율을 기록한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사료에 의하면 1791년 당시 파리에는 대략 8만 명의 유권자가 있었지만 이 중에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1만 7천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입후보한 총 946명의 선거인단 중에서 고작 200명만 당선되었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 헌법에서는 인민들의 투표권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곧 실제 선거 투표 참여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프랑스 시민들이 투표를 행사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선거인단 사이에서도 자신들의 당선을 위해서 부패와 사기, 협박, 폭력이 은밀하게 자행되었다. 심지어 비밀투표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파의 후보의 추종자들은 버젓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투표할 정도였다.

   

 

 

 

 

학식이 높은 토머스 제퍼슨의 펜 끝에서 주로 다듬어진 독립선언문은

장엄하고 화려한 수사학의 극치를 드러내는 이념적 문헌이라 할 만하지만,

헌법은 넉 달 동안이나 논쟁과 줄다리기, 타협을 거듭하며 도출해낸 실용 문건이었다. (p 188)

 

존 트럼벌 「1776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의 미합중국 독립선언」 1820년

 

 

인류 최초로 삼권분립을 명시하였으며 자유민주제도를 성문화하는 등 근대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확립한 미국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곧 권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대립과 권모술수가 펼쳐진 미국 정치판의 역사이기도 하다. 독립혁명(1775~1776) 승리 이후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채택되기에 이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과정들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순전히 평화적으로 이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시계방향 순으로 왼쪽 위에서부터 토머스 제퍼슨(1743~1826, 제3대 대통령), 존 애덤스((1735~1826, 제2대 대통령),

애런 버(1756~1836. 제퍼슨 행정부의 부통령), 알렉산더 해밀턴(1755/1757~1804, 연방주의자),   

 

제퍼슨, 애덤스, 해밀턴 이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조지 워싱턴과 함께 미국 헌법 제정을 위해 이바지를 한 '동지'였으나 얽키고 설킨 상반된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서로 등을 돌려야하는 '적'이 되고 말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1790년에 조지 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에 취임했지만 강력한 중앙정부를 주장하는 연방주의자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정책대립으로 1793년에 사임하였다. 그리고 제퍼슨과 해밀턴을 주축으로 한 반 연방주의자와 연방주의자 간의 대립은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어졌다. 제퍼슨은 해밀턴과 같은 연방 당에 소속된 존 애덤스와 경쟁을 벌였지만 결과는 존 애덤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선거에 배패한 제퍼슨은 부통령에 만족해야만 했지만 두 사람의 대립은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현되었다. 이번에는 제퍼슨이 애덤스를 물리치고 제3대 대통령으로 올랐다. 재미있게도 제퍼슨의 승리에는 정적 해밀턴의 도움이 있었다. 해밀턴이 정적을 도와주게 되는 배경의 이유에는 자신의 또 다른 정적 애런 버의 정치적 진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선거에 패배한 애런 버는 부통령으로 임명하게 되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애런 버는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지닌 반 연방주의자인 제퍼슨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다. 애런 버의 분노는 1804년 해밀턴과의 결투를 성사하게 만들었는데 해밀턴은 결투 끝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어 사망하게 된다. 미국 건국을 위해 큰 공로를 기여를 한 정치인들의 복잡한 정파 경쟁은 오늘날의 미국 특유의 정당정치 체제를 완성해주었지만 그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에는 피를 부를 정도로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 이들은 정당의 이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에 반하는 숙적과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인신공격은 기본이며 해밀턴과 애런 버의 결투처럼 서로 간에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은 그 당시로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정치적 이념에만 초점을 둔 정파 경쟁은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모하여야 한다고' 천명한 독립선언문의 내용이 무색하게 할 정도로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대중들이여, 민주주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지어다

 

시중에 민주주의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서적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저 오스본의『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와 같이 정말 지극히 '현실적인' 민주주의의 역사를 상세하게 소개하는 책이 과연 몇 권이나 있을까?  고대 그리스부터 스위스 알프스, 영국, 미국,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공산주의가 무너져 냉전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되는 현대까지 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민주주의 체제가 인류의 투쟁과 타협이 반복되어 만들어 낸 고귀한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투쟁'의 의미에는 단순히 민주주의에 반하는 부당 세력에 맞서 자신들의 주권을 찾으려고 하는 인민들의 혁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정치인들 간의 대립 역시 포함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민들의 주권 확립과 거리가 먼 정치인들 간의 정치적 대립이 민주주의 체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 역사 속의 투쟁들을 보게 되면 대한민국 정치사를 보는 듯한 데자뷰를 불러일으킨다. 영국 명예혁명과 프랑스 혁명 이후의 역사를 보라. 1960년 4.19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이라는 획기적인 일대사건이었지만 4.19 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未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한 모습의 과정이 영국과 미국의 사례와 흡사한 면이 있다. 그리고 독립전쟁 이후 미국 내의 정파 경쟁은 정당이 내세우는 이념과 가치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정당 내부의 대립을 마다하지 않는 최근 여.야당의 행보를 보는 듯하다.

 

다만 적나라할 정도로 벌거벗은 민주주의의 역사만 가지고 여전히 민주주의를 '최악'의 체제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이상형에 사로잡힌 채 현실적인 정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정치적 무관심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투쟁'과 '타협'의 과정들은 결국 민주주의가 그 시대상의 유동적인 변화에 따라서 끊임없이 적응하기 위한 과정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민주주의 사회는 '수많은 삶의 표현'이며 최종적으로 달성되는 단일적인 체제가 아니라 늘 변화가 이루어지는 '현재 진행형'이다. (P 497)  변화가 잦고 불확실한 사회체제의 변화 과정 속에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부당한 간섭과 부정부패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해법을 확답을 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선례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부당한 반민주적 거대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도출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들 앞에서 굴복한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 채 왜곡된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대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곳에서 채택된 정체는 민주주의다. 우리는 해외의 적들이 극렬하게 매도했던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형제들이여, 민주주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지어다.  (1809년 영국의 언론인 겸 목사 알라이어스 스미스의 말, P 193)

 

 

 

정치적 무관심의 왜곡된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중들 그리고 민주주의 원리의 문제점만 부각시켜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여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사회의 국론을 분열시키는데 조장하고 우둔한 대중들을 현혹하는 시정잡배들에게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내부의 적들이 부정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완벽한 이상형'이라는 환상적인 옷을 입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민주주의의 역사를 제대로 한 번 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그 역사를 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지구상 '최악'이면서도 '최고'의 정치 체제. 진짜 '민주주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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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1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길을 잃었어요. 제퍼슨은 알겠는데..( '') 흥미롭네요. 다 이해가(절반도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시루스님 리뷰에는 문제가 없고 이건 제 탓이에요. 혹시 미국 대통령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인문서 알아요? :)

1,3,4공화국이 자행한 민주선거의 어이없는 작태가 떠오르지만 프랑스, 미국 역사도 흥미롭네요.

아홉시 뉴스에서 올 선거 지금의 최대 화두가 '경제 민주주의'라고 했어요. 지식욕에 불지르는 굿 리뷰예요! 뭐 제 지식욕은 당연히 지식욕에서 끝납니다. 대부분.( '')

좋은 주말 밤이에요^^

cyrus 2012-07-15 23:57   좋아요 0 | URL
요즘 제가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을 읽고 있는 중이라서 미국사에 대해서 부쩍 관심이 생기게 되었어요. 저도 많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추천할 수 있는 건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이 있고요,
그나마 미국 대통령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이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이 있는데, 이 책이 나온지 10년 좀 넘었어요. 지금 알라딘에 검색하면 절판 상태로 나와요. ^^;;

제가 책을 읽으면서 중요하다싶은 내용을 나름 선별해서 썼는데 상세하게 쓰다보니 아이리시스님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 책 분량도 그리 얇지 않아서, 한 권 완독하는데만 2주 정도 걸렸어요. 역사서라서 그런지 중간에 지루한 부분도 조금 있었고요 ^^;;

지나가다 2012-07-15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리뷰인데, 떠오르는게 있어서 주제넘는 몇마디 적어놓고 갑니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면 이석기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고요. ㅎㅎㅎ

민주주의의에 대한 믿음은 대체로 민주주의가 역사에 도달한 최종 지점이며, 각 개인의 평등과 서로 다른 주장을 통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하는 도덕적 전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각 개인에게 요구하는 요인들은 실제로는 까다로운 것들입니다.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민주주의의 개인들은 정치적 관건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그 관건에 맞춰 토론할만한 소통능력과 역량을 갖춰야하는 개인들이 되어야 하고, 모든 안건을 투표에 붙여도 기꺼이 참여해야 하는 실천성과 개인성을 훼손하는 프레임을 방지하지 위해 정치적 움직임을 적정 수준에서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성적 개인, 그 사람의 성향이나 행위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견과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무지의 베일을 뒤집어쓸 의무,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선택되었다면 그것의 무오류성을 인정해야 하는 의무까지. 민주주의가 직접 지시하지 않는 여러 한계들과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 요구하는 수준은 무척 까다롭습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정치적 관건을 논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볼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이상속에서 민주주의가 도덕으로 기능하는 현상이 아닌지...

대한민국 사회의 국론을 분열시키는데 조장하고 우둔한 대중들을 현혹하는 시정잡배 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겠고 충분히 동의하지만, 민주주의는 분열되고 토론되어야만 기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최장집이 말하듯, 민주주의는 갈등과 불안의 현장를 뜻하지 화합되고 안정된 정치체를 뜻하는게 아니니까요. 민주주의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므로 그 원칙은 하나의 도달점으로 설정된 채 훼손되는 것은 안된다고 자동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혹시 도덕화 된 민주주의의 이면은 아닐까요. 오히려 민주주의다운 것은 민주주의의 숨겨진 가정을 끄집어 내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담지해낼 수 있는 정치체인지, 무엇을 보완하고 바꾸어가야 하는지를 격렬하게 토론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짧은 생각을 잠시 해 보았습니다.

좋은 글인데, 괜한 소리를 남기고 가는 것 같네요. 책 많이 읽으시고 더 정진하시면 좋겠습니다. 부족하고 생각이 짧은 글 면목없게 남겨두고 갑니다.

cyrus 2012-07-16 00:10   좋아요 0 | URL
조용하고 많이 부족한 서재에 찾아와 좋은 내용의 댓글을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님께서 쓰신 댓글 내용이 너무 좋고 인상 깊어서 여러 번 또 읽었습니다. ^^
제가 보기에는 전혀 주제넘는 내용이 아닌데요. 손님으로 댓글 남기신 점에 대해서 오히려 아쉽게 느껴집니다. 저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깊은 내공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최근에 민주주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알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리뷰의 책 이외에도 해밀턴과 매디슨이 쓴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와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는 중이랍니다.
게다가 이번에 나온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이 미국 정치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주를 이루고 있어서 겸사겸사 읽게 된 계기가 있었고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익숙한 이 단어인 민주주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고요. 최근에 본격적으로 독서를 통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

마지막 부분에 님께서 밝혔듯이 올바른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대해서 공감합니다. 님의 의견이 오히려 제가 이 리뷰를 쓰면서 꼭 강조하고 싶었던 견해였는데.. 어떻게 쓰다보니 그 중요한 내용을 잠시 간과하고 말았네요. ^^;;

댓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제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보충삼아 새로운 관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혹시 제 답글이 님이 말씀하시고자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와 부합되지 않는다면 아직 많이 배워야할 정도로 부족한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이 점에 대해서 관대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2-07-1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논쟁한 주제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와닿죠.특히 지방분권이냐 중앙집권이냐 하는 문제는 지방자치나 경제학 논쟁에도 많은 빛을 던져줍니다.
알렉시스 트 토크빌<앙시앙레짐과 프랑스 혁명>은 혁명사 공부할 때 읽었는데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종합은 이렇게 하는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미국민주주의 같은 책도 정치 및 사회사상사의 고전이죠.

cyrus 2012-07-18 20:48   좋아요 0 | URL
네, 노자님이 언급하신 두 권의 책 읽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의 저자인 해밀턴과 매디슨은 미국 행정학 발전사에서도 잠깐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읽고 있습니다. ^^

감은빛 2012-07-1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
미국 역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
이 글을 읽고나니 관심이 생기네요.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 점은 출판사입니다.
하필 저 출판사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니 모순이란 생각이 드네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출판사에서요.

개인적으로 이 출판사 책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절대 사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이 출판사에 일하는 사람이라면 사귀지 않습니다.
그 출판사가 어떤 출판사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와 말이 통하기 쉽지 않을테니 사귈 이유가 없구요.
알면서도 거기 일하는 사람이라면 제가 경멸을 보내야할 처지이니 서로 사귀면 피곤하겠지요.
말이 길어졌는데, 이 출판사에서는 이런 좋은 책은 안나왔으면 좋겠네요.

암튼 저야말로 좋은 글에 쓸데없는 댓글을 남겨서 죄송하네요!

cyrus 2012-07-18 20:55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죄송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
방금 검색해봤는데,,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안 알려주셨다면 몰랐을거에요.
정말 아이러니하네요. 그렇다고 저를 외면하시면 안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