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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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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 이야기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 <변신> p 9 -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시작하는 첫 구절이다.
카프카는 첫 구절부터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을 언급하는 동시에
이 인물이 벌레로 변해있음을 알려주면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벌레 그레고리에 관한 묘사는
서술자가 환상적인 사건을 지켜보고 있듯이 자세히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첫 구절의 당황함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그레고리 가족들의 소동을 보게 된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한 모습으로 인해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봐  

두려움에 떨게 된다.
평상시대로라면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고 있어야하지만,
그는 방에서 나올 자신감은 상실되었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도 그레고르가 나오지 않게 되자,
결국에는 그레고르가 일하는 회사의 지배인과 그에 대한 걱정을 느낀 가족들이
그의 방으로 모인다. 그레고르는 방문을 잠그고, 밖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가족들과 지배인은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잠근 문을 열쇠로 열리는 순간, 몇 시간 전에 자신을 걱정했던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보자 태도가 돌변한다. 소름 끼치는 벌레 보듯이
가족들은 그를 피하게 되며 이 집에서 쫓아내버리려고 한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 그레고르는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려 하지만,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을 위한 자기의 희생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고,
열등감, 고통에 시달리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상처를 입은 채
자신의 방에서 쓸쓸히 죽고 만다. 그의 죽음 이후 가족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평온을 되찾았다고 생각하여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교외로 산책을 나간다. 
 

 

 

 방어기제의 환(環)

<변신>의 상징적 의미는 현대인의 소외 현상과 삶의 부조리이다.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과 변신한 후에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변신 전에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지만, 변신 후에는 그레고르를 구박하고 소외시킨다.
비록 소설은 짧고 우화적이지만 한 인간이 벌레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소외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레고르의 삶은 현재 우리 삶에도 그레고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작품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금 우리 삶이다.
물론 그레고르의 삶이 우리 현대인들의 삶과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는 그레고르의 경우와 다른 특수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옆집에 살던 이웃이나 친구, 그리고 한 집에 살던 가족이  

겉모습이 벌레로 변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벌레로 변하여 자신의 주관적이며 잘못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들 스스로 상대방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서민으로 상징되는 세탁소의 딸인 금잔디가
부잣집 자식들만 모인다는 명문고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부잣집의 학생들은 집단적으로
금잔디를 왕따 시키며 날달걀과 밀가루를 쏟아 붓는다.
명문고 학생들은 명문고라는 사회 집단 속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자라왔다. 그런 사회 속에서 부자와 정 반대인 서민 학생이  

명문고에 들어왔다고 생각해봐라.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 들어옴으로써
금잔디는 자연스럽게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
그러나 금잔디가 세탁소의 딸로 태어나고 싶은 것도 아니며  

서민으로 자라고 싶은 것도 아니다.
금잔디가 명문고 왕따로 만들어버린 큰 원인은 명문고 학생들 자체에 있다. 
 

명문고 학생들 내면에 자리 잡은 ‘종족의 우상’ 이 그녀를 왕따 시킨 것이다. 
‘종족의 우상’ 은 인간 본성 속에 잠재하는 선입견이다.
서민의 이미지는 돈 없고 빈곤함이다. 부자의 이미자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금잔디=서민’ 이라는 감정으로 시작된
‘서민 ≠ 부자’ 라는 방어기제의 환(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고르의 소외도 ‘종족의 우상’ 의 희생양이다.
작품 속의 그레고르는 벌레 이전에 한 가족의 일원이었으며, 벌레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정신과 마음만은 그레고르라는 근본적인 주체성아 남아있어서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어필한다.
비록 모든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외면하였지만, 누이동생은 소설 중반부에서야
그레고르를 곤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누이동생만은 왜 다른 가족들보다 늦게 그레고르를 곤충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는가?
누이동생을 제외한 그레고리의 부모들은
벌레로 변한 아들을 보자마자 

뇌에서 벌레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바퀴벌레에 대한
불쾌감을 느끼게 되어 벌레를 기피하고 죽이려고 한다.
그레고르 부모의 심리에도 ‘벌레=무서움 & 불쾌감’
‘벌레가 된 그레고르 ≠ 자식’ 이라는 방어기제의 환이 작용하게 된 것이다.
단지, 누이동생은 방어기제의 환이 뒤늦게 작용되어 일시적이지만  

오빠 그레고르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작품 속 사과의 의미

그레고르를 죽음을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는 것이다.
사과가 몸에 박힌 채 그래도 놔두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죽게 된다.
왜 하필이면 그레고르는 사과에 맞아 죽게 되었을까?
그의 비극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방에서 홀로 쓸쓸히 죽는 설정도 괜찮은데 말이다.

근본적으로 <변신>의 그레고르는 결국 작가 자신 프란츠 카프카이다.
그도 그레고리처럼 실제로 누이동생 3명과 어린 시절을 자라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카프카와 누이동생들과 나이 차가 많아
누이동생들과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래서 몹시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레고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소외를 느끼고 있었다.
성장하면서 문학을 좋아했으나,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공부하여 
좋은 직장에다가 결혼을 하는 성공적인 가장이 되기를 원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지만,
문학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글을 쓰느냐 아니면 아버지가 원하는 안정적인 삶을 사느냐.
그의 일기에는 삶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보인다. 

   조상도 없이, 결혼도 안하고, 자손도 없이.
  조상에 대한, 결혼에 대한, 자손에 대한 강렬한 욕망만을 지닌 채.
  조상, 결혼, 자손.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1921년 1월 21일 일기 내용 중에서 - 
 


결국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문학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일기에 알 수 있듯이 카프카는 자신의 인생에 놓인 두 길 중에
어느 길에 가야할 지 꽤나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메모에는 자신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를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 즉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문학가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문학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카프카는 자신이 원하던 문학가가 되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기대감을 저버린 결과의 죄책감이 묻어난다.
카프카는 <변신>의 그레고르를 통해 죄책감에 대한 벌(罰)을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분신인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사과를 맞아 죽게 한 것이다.
비록 작품 안이지만 카프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음으로써 벌을 받게 되고,
자신의 몸에 박힌 사과는
<주홍 글자>에 등장하는 헤스터가 간통죄로 A라는 글자를 달고 살듯이
아버지를 어긴 죄의 대가를 평생동안 짊어지겠다는 자조적인 반성이다. 
 

 

 

 고독한 까마귀

‘카프카’ 의 체코 어로 직역하면 ‘까마귀’ 라는 뜻이다.
그만큼 카프카라고 하면 대표작인 <변신>뿐만 아니라
고독, 불행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그는 죽기 직전 2개월간의 요양 기간과 짧은 국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프라하에서 지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심하게 내면적이며 고독과 불행을 홀로 짊어진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카프카는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그는 천성부터 극단적인 내면성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하여
평생 자신의 고향 프라하에서 지낸 프란츠 카프카.
그레고르가 흉측한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방문을 잠그듯이
카프카에게는 프라하라는 곳이 타인에 의한 두려움을 기피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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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집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7
윌리엄 호프 호지슨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1001-236] 경계지의 집

 

 

 


 The House on the Borderland  

 





 

 

 

 

우리나라에 번역된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이계(異界)의 집>의 원어 제목이다.
Borderland를 영어 사전에 찾아보면
뜻이 ‘국경지, 두 가지 지질 또는 생각의 중간 상태, 영역’ 이라고 나와 있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는 ‘경계지의 집’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실 ‘경계지’ 라는 해석이 사전적으로 정확하나,
‘경계지의 집’ 이라는 책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면 독자들은  

이 책에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계’ 라는 제목으로
책 표지에 장식하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기성(奇城)과 어울려진
지금의 모습이 훨씬 나아보이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나는 <죽기 전 책 1001>에서 소개된 책을 꼭 읽을 것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 책에서 소개된 <이계의 집>의 간략 내용이 흥미로워서 읽게 되었다.
소설 속의 두 남자가 외딴 마을의 바닷가에서 폐허가 된 집을 발견하고
(책 표지에 나오는 기성을 연상하게 한다)
거기서 폐허가 된 집의 전 주인인 노인의 낡은 수기가 발견된다.
노인이 자신의 집에서 생긴 불가사의한 현상들을 겪는 것을
수기에 기록하는데, 중요한 결말이 소개되지 않았다.
결말이 더욱 더 궁금할뿐더러
처음 접한 작가의 작품, 거기에다가 내가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이라서 읽고 싶었다.  

 

 

 

 이 작품의 정체가 뭐야?

사실 읽기 전부터 이 책에 대한 평가가 궁금하여
리뷰를 참고하려고 했었는데, 딱 한 편이 있다.
그러나, 책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럴 만도 하겠다.
책이 출간된 연도가 1908년이며, 장르가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이다.
즉, 직역하면 ‘우주 공포 소설’ 이다.
그리고 처음 작품의 사건 발단은 좋다. 
하지만 내용이 전개될수록
장광설을 펼치는 수기의 내용에 독자들은 꽤나 머리 아플 것이다.
반전을 기대하면서 인내심 가지고 읽은 독자들은 
시원치 않은 결말에 대해 당혹스러울 것이다.
아니,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뒷표지에는 호러 소설의 선구자 러브크래프트가 작품에 대한 칭찬을 보고,
이 작품도 러브크래프트式 호러 소설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읽었을 것이다.
결국, 표지의 광고 한 구절 때문에 독자들은 낚였다고 해야 하나.

이 책인 코스믹 호러인만큼
노인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우주이다.
광대한 우주의 현상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태양계의 행성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그리고 녹색의 구체(球體)가 등장하여 노인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노인은 자신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현상들을 수기에 기록하는데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이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작부터 노인은 자신 집 지하에 발견된 균열을 발견하는데
균열 내부는 나락(奈落)의 세계이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으로 균열 속으로 내려가는 장면부터는 흥미진진하다.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어두컴컴한 광대한 나락의 세계에서
돼지 인간들의 등장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다.
여기서부터 노인과 돼지 인간의 피 튀기는 혈전이 그려질 것이라고 예상하겠지만,
작가는 독자들의 기대를 뒤엎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락의 세계는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이 보라색으로 변하다던가, 낮과 밤의 길이는 고작 1분도 안된다. 

수기는 이상한 자연 현상들을 설명하다가 중간 내용이 누락되어 끊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노인은 자신의 방에서  시간이 수만년이나 흘러가는 것을 느끼게된다.  

옆에서 자고 있던 애완견 개는 썩어서 먼지가 되어버리고, 

방 주위에도 시간의 세월을 못이겨 회색 먼지로 뒤덮여있다. 

그래도 노인은 황당 시츄에이션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수기로 기록한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긴 ‘가넷’ 님뿐만 아니라
악령이나 악마가 등장하는 오컬트 문학 매니아들도 실망하신다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 작품은 호러 분야 중에서 드문 ‘코스믹 호러’ 라서
책의 내용을 차지하는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의 장면 기록은 지루한 감이 있다.
분명 순차적인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내용 구성이 어긋난 것 같은 느낌도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읽는 것이 수월하지가 않다.
그리고 전개부터 등장하는 돼지 인간은 가면 갈수록 출연 비중이 적어진다.
읽어나갈수록 이들의 정확한 정체는 밝히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결론적으로 이 책에 대한 평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뒤죽박죽 세계에 대한 뒤죽박죽 표현한 거 같은 소설이었다. 
 

 

 

 읽어야 하는가, 읽지 말아야 하는가

그러면 듣도 보지 못한 작가의 난해한 내용의 작품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죽기 전 책 1001>에는 분명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책이 소개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책들 중에는 많은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읽혀지며
읽어도 그 가치가 지금도 유효하는 불후의 명작들이다.
이들 작품의 작가는 명망이 높으며 내용의 구성과 전개는 훌륭하다.
즉, 간단히 표현하자면 ‘정상적이며 모범적인’ 책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살면서 모범적인 책들만 읽던가.
마법을 부리는 소년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부터 시작해서
노골적인 성 묘사를 차치하는 성애 소설까지
전 세계의 독자들은 다양한 소재와 구성의 작품들을 읽는다.
이런 작품들은 인물과 내용이 일상적이지 않으며 특이하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 속에도 우리가 ‘고전’ 이라고 불리는 것도 많다.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이계의 집>은
‘코스믹 호러’ 라는 장르를 처음 시도했기에 문학사적으로는 희귀하다. 
장르의 시작과 희귀성이라는 가치가 있기에
<죽기 전 책 1001>이 명단에 드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으며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사실상 호러 문학의 선구자는 러브크래프트 이전에
윌리엄 호프 호지슨이 있었다.
그러기에 러브크래프트에게 찬사를 받을만하다. 
 

 

 

 나락의 세계에서 종말 이후의 우주를 보다

우리나라에는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번역된 작품은 단 두 작품뿐이다.
<이계의 집>과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유령 사냥꾼 카낙키’ 시리즈 중의 하나인
<휘파람을 부는 방>이다. 아직 그의 작품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에 대한 번역가의 해설도 호지슨에 대해  

관심 있을 독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작가의 생애와 그가 끼친 문학적 영향만 소개되어 있을뿐
정작 작품에 대한 해설은 없다.

노인이 본 초자연적인 우주 현상과 돼지 짐승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노인이 본 우주가 먼 훗날 핵무기로 인해 종말 되어버린 지구와 우주를  

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붕이 없는 집의 중앙부에서 피처럼 새빨간, 거대한 불길 기둥이 솟구쳤다.
 비틀린 작은 탐과 망루가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지만.....
 <녹색 태양>의 광선이 집을 난타했고, 새빨간 불길과 뒤섞였다.
 마치 붉은 불과 녹색 불이 불타오르는 용광로처럼 보였다.....
 까마득하게 아래쪽에 지구가 보였고, 점점 거대화하는 불길에 휩싸인 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 주위의 지면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상 여기저기에서
 무거운 노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불길에 휩싸인 집을  

 중심으로 지구 전체가 발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핏빛을 띤 기괴한 구름이 고공까지 올랐다. 
  

                                                                             - <이계의 집> p 183~184 - 
 

 

<녹색 태양>이 집을 파괴하는 장면은 흡사 핵무기에 투하되는 장면과 비슷하다.
태양 광선의 색깔이 다를 뿐, 핵무기가 투하되면 주위는  

온통 오렌지 빛 광선으로 뒤덮이며
반경 지점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버리게 한다.
그리고 투하된 지점에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생성된다.

결말이 다다를수록 작품에는 녹색 구체가 손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살아있는 것들을 타버리게 만든다.
고양이가 녹색 광채에게 당하는 장면은
핵폭탄에서 발생하는 방사능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느닷없이 고양이가 길고 날카로운 절규를 내질렀다.....
 무엇인가 형광을 발하는 어렴풋한 것이 고양이를 에워싸고 있었고,
 내가 보는 사이에도 점점 더 커지더니, 곧 빛을 발하는 투명한 손으로 변했다.
 녹색 광채가 그 주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
 내 눈앞에서 고양이가 연기를 내며 불타올랐다. 
 

                                                                              - <이계의 집> p 215 -   

  

 

그리고 녹색 형체에 닿아버린 노인의 애완견이 커다란 녹색 반점의 상처를 입게 되며
녹색 반점은 점점 커질수록 개는 무기력한 증상이 보인다.
그리고 녹색 광채에 오염된 개가 노인의 손을 살짝 핥게 되는데
나중에 노인의 손에도 개처럼 녹색 반점이 생기게 된다.
노인의 손에 있는 녹색 반점도 커지게 되며 노인도 정신적인 공황과 무기력감에 빠진다.
방사능에 오염되어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정신적인 장애를 겪는 피폭자를  

보는 거 같다. 작품 속 돼지 인간은 방사능이 만들어낸 돌연변이다.  

 


 

 

 

 

 

 

 

 

 샌디 스코글런드 作 <방사선 고양이> 

 <이계의 집> p 215의 구절을 읽으면서 딱 떠올랐던 사진 작품. 

 사진 속 노부부와 방사선에 오염되어 녹색을 띈 고양이, 

 그리고 회색으로 이루어진 밀폐되어 보이는 방은  

 <이계의 집>에서 수기 속에서 등장하는 노인과 그의 누이, 

 녹색 형체에 휩싸인 고양이, 그리고 시간이 흘러 먼지로 뒤덮인 노인의 방이 연상된다.

  

 

작가가 핵폭탄의 존재를 예언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작가가 그린 나락의 세계가 핵전쟁 이후 모든 것들이 종말이 된

세계와 흡사한 점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다.

지금도 몇 몇 나라에는 나라 전체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불량 국가들은 핵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재료들을 은밀히 거래되고 있으며

핵무기를 보유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국가적인 힘을 과시한다.
그리고 괜히 핵무기를 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핵무기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지구는 죽음의 불모지가 되어버린다.
지구 전체를 뒤엎은 방사능은 우주 전체까지 퍼지게 되어
코스모스(Cosmos)가 파괴되어 버리고 다시 원시의 카오스(Chaos)로 되돌아간다.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칫 핵무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 인간도 노인처럼 우리 눈 앞에서 있어서는   

안 될 세계가 펼쳐지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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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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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5]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사춘기  
 

우리는 젊음을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사춘기(思春期)이다.
말 그래도 성난 바람과 무섭게 몰아치는 파도처럼 
주체할 수 없는 청년의 감정 상태를 뜻한다.
이성에 사랑에 빠지게 되면 평소보다 더 열정적이게 되며
폭풍우가 그치듯이 사랑의 열정이 식어지면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와 여러 가지 상황들에 민감하여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처럼 감정의 변화가 잦다.
사춘기가 찾아오면 청년은 쉽게 기뻐하며, 쉽게 절망한다.
사춘기는 정신적인 변화 이외에도 성인이 되는 육체적 변화도 포함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춘기는 정신적인 변화로만 보고 있다.
15~20세가 되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춘기가 항상 이 나이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심신 발달은 계속 된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정신 발달 속도도 다르다.
사춘기는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 나이에 겪는 사람이 있으며
성인으로써의 신체적 발달은 이루었지만 조금 늦은 나이에
정신적인 사춘기를 겪는 사람도 있다.
나이는 먹더라도 정신만은 아직 젋고, 여전히 생기(生氣)가 넘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40년 동안 함께 결혼 생활하고 있는 부인이
여전히 사랑스러워서 젊었을 때의 그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낀다는
어느 60대의 애처가의 말처럼
젊음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지내는 것은
로맨시스트들의 소원일 것이다.

그런데 정신적인 사춘기가 늦은 나이에 갑자기 찾아온다거나
또 한 번 느꼈던 사춘기가 또 다시 찾아온다면 좋은 것일까? 
 

  

 

 죽어도 못 보내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비운의 남자,
‘베르테르’ 도 어떻게 보면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춘기의 희생자이다.
베르테르가 25세가 되던 해에 로테를 보고 한 눈에 반하게 된다.
그러나 로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인 베르테르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없어서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약혼자의 존재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 그런 괴로움을 주체할 수 없어서인지,
그는 빌헬름이라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사연들을 애애절절하게 풀어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베르테르는 사랑의 폭풍우를 겪게 된다.
로테가 자신에게 조금이라고 호감 가는 말이나 태도를 보이면
베르테르는 집에 돌아와서 혼자서 그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암묵적으로 추파를 던져보나
로테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면 갑자기 불이 타오르듯 절망과 자괴감에 휩싸인다.
로테 곁에 약혼자가 있는 것을 목격하면 절망과 동시에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베르테르의 롤러코스터식 심정 변화를 기록된 편지들을 보게 되면
마치 어느 정신병자의 수기를 보는 거 같다.
아니, 베르테르는 너무 지나친 ‘일루전 증후군(Illusion Syndrome)’ 의  

증상이 보이고 있다. 일루전 증후군의 특징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호감이 가는 사람이 조금만 잘해줘도
착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정신적인 혼란 상태를 겪게 된다.
그리고 하루 내내 그 사람이 생각나 머리가 깨지듯이 아프며  

무언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일루전 증후군은 정신병은 아니다.
일루전 증후군은 지극히 우리가 살면서 겪는 정상적인 심리적 현상이다.
그리고 이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법은
증후군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자신의 의지로 기억에서 지우면 된다.
그러나 베르테르처럼 너무 지나치게 증상이 계속되면 문제가 있다.
오히려 베르테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로테에 대한 사랑을 지울 의지도 없다.
자신이 지금 하나의 여자 때문에 미쳐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 스스로 사랑의 늪에 뛰어 들어가 고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결국 그 늪에 들어간 대가(代價)는 자살이라는 죽음을 맞게 된다. 
 

 

 

 젊은 88만원 세대들의 슬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발표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다.
출간 이후 베르테르처럼 자살하는 젊은이가 많았다고 하며
나폴레옹도 이 책을 즐겨 읽었단다.

그런데 나는 읽는 내내 이 작품에 대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베르테르처럼
불같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감정 이입이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간혹 읽다가 사랑에 관한 의미심장한 구절도 있긴 있었지만,
베르테르가 자신의 심정을 이러쿵저러쿵 쓴 편지들을 읽어나갈수록
오히려 읽고 있는 내가 베르테르의 꼴이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어떻게 보면 편지를 읽는 대상자인 빌헬름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친구가 기껏 한 여자 때문에 어린애처럼 투정부리는데도
정신의사가 자신의 환자들의 사연을 귀담아 듣는 것처럼
담담하게 그 편지들을 읽어나간다. 그리고 베르테르가 죽고 나서도
많은 편지들을 모아서 기록하여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한다.

그리고 내가 이 작품에 큰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작품 속 시대의 ‘사랑’과 현재 시대의 ‘사랑’ 사이의 괴리감(乖離感)이다.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게 된다.
즉, 로테가 있기에 나도 살아 있다는 점이다.
해바라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항상 해를 쳐다보듯이
베르테르는 로테에 향한 사랑의 감정을 통해
사랑 앞에서 울고 웃는 청년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창 괴테가 살던 독일은 낭만주의가 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이다.
사회 흐름의 분위기에 탄 젊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사랑은
인간으로서 꼭 누려야 하는 정신적인 교감이었다.
괴테의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런 베르테르를 이상적(理想的)인  

젊음의 표상으로 추앙하였다.
요즘 시대와 비교하자면 ‘아이돌(Idol) 스타’ 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 젊은 우리들은 사랑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정일의 시 구절처럼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라디오’ 와  

같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금방 사랑하고 금방 헤어진다.
그리고 지금 88만원 세대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낭만을 누릴 여유가 없다.
20대가 되면 본격적으로 취업 전쟁에 뛰어들면 자기 먹고 살기가 급급하다.
그리고 자신의 풍족한 삶을 위해서 사랑보다는 돈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사회이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녀가 서로 다른 부(副)의 차이가 나게 되면 평생 지속될 사랑은 누릴 수가 없게 된다.
사랑이란 그냥 돈 많은 사람을 만나야 잘 사는게 장땡인 것이다. 
 

  

 더욱 더 슬픈 베르테르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면 베르테르 이외에도  

사랑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열의 사나이들이 있다.
자신의 가문과 라이벌 가문의 딸을 너무나 사랑해서
기어코 몰래 그녀를 찾아가 그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로미오,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애인을 되찾기 위해 주류 밀매로 부자가 되어
옛 애인에게 찾아가 접근을 하는 'The Great' 개츠비,
비록 운명은 베르테르처럼 비극적이지만 지금도 그들의 사랑에 대한 열정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베르테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마당에
자신이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슬퍼할 것이다.
우리가 ‘베르테르’ 라고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베르테르 효과’ 일 것이다.
베르테르처럼 소설을 읽고 자살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한 사람의 자살로 인해 연쇄적으로 자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안타까운 사랑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자살 유발자로 인식하게 된다.
아마도 그의 이름은 ‘자살 유발자’ 라는 오상(誤象)의 이미지가 지속될 것이다. 
 

 

 Don't Read this at home! 
 

감정이 메말라가는 우리 사회에도
베르테르의 연애담을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가치는 여전히 있다.
지금도 베르테르처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예전의 젊었을 때의 그 뜨거운 감정들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은 중년층들도 있을 것이다.

단, 사랑으로 인한 열병 말기 환자들에게 절대로 이 작품을 읽지 말기를 경고한다.
베르테르의 회의적인 감정에 쉽게 몰입이 되어  

당신들의 증상은 오히려 더 악화될 것이다.
괜히 이 책 읽다가 베르테르처럼 자살하지는 말기를.
자살을 하면 베르테르가 당신을 원망할 뿐이다.
그리고 당신의 고귀하고 유일한 생명을 한 순간의 선택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당신을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을 더욱 더 슬프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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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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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7] 코

 

 

 

 

 코의 행방불명 
 

만약에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봤는데 자신의 얼굴에 코가 사라졌다면?
상상만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서 난감하면서도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면서 스스로 기겁할 것이다.
한 개의 호흡 통로는 사라지고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할 것이다.
축농증이나 비염과 같은 코와 관련된 질환에 걸려본 사람을 알 것이다.

코가 막혀서 입으로만 숨을 쉬는 것도 불편하다는 것을.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꽃들의 냄새를 맡지 못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코가 사라지게 되면 사회 생활이 불가능하다.
코 없이 밖에 돌아다녀 봐라.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코 없는 당신에게 집중할 것이다.
그러면 외모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고,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집에만 있는 폐쇄적인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이 가상의 이야기의 결론은
코 하나의 상실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존재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이야기를 달라진다.
우리나라의 완벽한 과학적(?) 성형 의술의 힘을 빌어  

어떻게든 인조 코를 만들어 다닐 수도 있다.
냄새를 맡지 못하고 숨 쉬는 것이 불편해도
인조 코 하나만 달고 있어도 사람 만나는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코가 없어진다는 가정 하의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는데
비약이 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새 발의 피다.
이것보다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사라진 코가 사람처럼 살아 움직이고 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콧대 높은 자의 콧대 꺾기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소설인 <코>에는
앞에서 상상했던 ‘코의 행방 불명 + 살아 움직이는 코’ 라는  

주제가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소설에 나오는 러시아의 관리 꼬발료프는 낮은 계급이지만
관리’ 라는 꼬리표가 있어서 허세를 부리는 인물이다.  
어느 날, 면도 후 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코를 찾아야한다는 심정으로 미친 듯이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코를 찾았지만..... 꼬발료프는 눈 앞에서 펼쳐진 황당한 장면에 까무러친다.
코가 사람처럼 행세하는 것 아닌가.
그것보다도 더 황당한 것은 코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관리라는 점이다.
꼬발료프는 공손하게 고급 관리 코에게 자신의 신체 일부분임을 설명하나
코는 자신보다 낮은 계급인 꼬발료프의 말을 무시한다.
퇴짜 맞은 꼬발료프는 코에게 무시당했다는 점에 분통을 느낀다.
코의 상실감으로 인해 낙심한 가운데 엉뚱하게도
거리를 지나가던 경찰관 덕분에 잃어버린 코를 되찾았다.
일단 코를 되찾기는 했으나, 문제는 원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코를 붙이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으나
코는 얄밉게도 자신의 얼굴에 붙여지지 않았다.
의사를 만나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의사의 처방은 그냥 코 없이 살아라고 말한다.
코를 원래대로 붙일 수 없다는 사실에 반쯤 포기한 상태에서 코발료프는
잠을 자게 되는데,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듯이 코가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완전한 형태의 얼굴로 돌아온 모습에 꼬발료프는 무척 기뻐한다.
그리고 며칠 전 코가 없어서 쩔쩔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평소대로 면도를 하면서 관리 특유의 허세를 부린다.

이야기는 짧고 설정도 황당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가볍게 볼 소설은 아니다.
고골은 코를 비유하여 당시 러시아 관리들을 조롱하였다.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관리나 사람들 앞에서는 콧대 높이면서 위풍당당하다가
계급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위축해지고 아부를 떠는  

러시아 관리들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꼬발료프의 행동은 계급 사회에서는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직장에서는 보다 높은 직책으로 승진하기 위해서  

윗사람 앞에서 굽실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TV에서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던 사람이
막상 카메라가 없어지면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으려하고,
자신의 정치 행적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 보려고 하지도 않고  

어떻게든 입 막으려고 한다.
단지, 자신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쓰고 싶은 거 쓰면서 자신의 배만 채우기에 급급하다.

고골은 <코>를 통해 희화적으로 콧대 높은 자들의 콧대를 꺾고 있는 셈이다. 
 

  

 

 주종(主從) 관계의 전복

<코>의 황당무계한 플롯은 한편으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소설을 보는 거 같다.
그의 글도 우리가 평소에 상상하지 않았던 요소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모음집 <나무>(열린책들, 2003)에 보면
‘조종(操縱)’ 이라는 소설이 있다. 거기에는 왼손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고골의 코처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왼손은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글을 써서 나타낸다.
소설 속의 왼손은 주인이 오른손잡이라는 사실에 실망하여 반란을 일삼는다.
주인이 왼손으로 무엇을 할려고 하면 행동을 거부한다거나
시키지도 않은 짓을 저지른다. 심지어 잠을 자는 주인의 목을 조르거나
주인이 깊은 잠에 빠진 사이에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결국 왼손에 굴복한 주인은 왼손과 오른손에게  

서로 협력 계약을 맺어주고 양손잡이가 된다.
그리하여 왼손이 그 주인을 마음대로 조종하게 되면서
결국 왼손이 인간의 ‘주인’ 이 된다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고골의 <코>와 비슷한 장면이 떠올린다.

얼굴에 붙어있었던 코의 주인은 꼬발료프였다.  

하지만 코가 떨어져나가고 고급 관리가 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코가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주종(主從) 관계의 전복’ 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고골의 작품은 1836년에 발표되었다.
베르베르의 상상력의 독특함은 둘째 치더라도, 수백 년 전에 고골이 이미 
베르베르式 플롯의 소설을 썼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무관심당한 자들의 반란

고골의 <코>는 환상적이며 일반적인 소설 플롯과 다른 특이한 작품이다.
어떻게 보면 내용이 뭔가 부실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코>를 읽으면서
이야기 전개상에 나타난 공백에 대해 다양한 상상과 문제 제기를 할 수가 있다.
나도 이 이야기를 읽고 난 후,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꼬발료프의 코는 왜 이유 없이 사라지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까?

읽어보면 코가 꼬발료프의 얼굴을 떠난 정확한 이유에 대한 장면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코>가 러시아 관리들을 조롱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코가 허세 부리는 관리 꼬발료프에게 ‘X 먹어라’ 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면 베르베르 소설의 왼손처럼 무관심만 받고 있던 코가
관심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려는 주인에 대한 역행적 행동일 수도 있다.
베르베르의 <조종> 결말과의 차이점으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조종>의 왼손은 반란 투쟁에 성공하여 결국에는 주인을 지배하는 반면,
꼬발료프의 코는 일시적인 반란일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주인이 오른손잡이라서 자신을 무시하는 왼손이 제멋대로 행동하듯이
코도 다른 신체 부위보다 관심을 받지 못해 질투가 나자
‘나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세요’ 하듯 가출을 한 셈이다.
코가 가출하고 나서 고급 관리로 변신하고 나서야
꼬발료프는 평소에 느껴보지도 못했던 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드디어 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꼬발료프는 원래대로 돌아오도록 종용하지만
코가 예전의 서러움이 생각나서 주인 꼬발료프를 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면서 움직이면서도 
평소에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러다가 불의의 사고로 신체 일부가 없어지고 나서야
신체 존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는다.
코 말고도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신체 부위가 있다.
눈은 작지만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부위다.
눈이 없으면 어둠만 있을 뿐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손톱에 때가 끼거나 좀 길어지면 깎아야한다는 점에 불만을 가지게 마련인데
손톱이 없으면 손발이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손은 물건을 집을 때 손에서 발생하는 힘을 받쳐주는 작용을 하는데
없어지게 되면 물건을 집을 수가 없다.
발톱도 그렇다. 발 다리가 있어도 발톱이 힘을 받쳐주지 못해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새끼발가락이 없어진다면?
우리가 서 있을 때 새끼발가락의 부재(不在)로 인해 몸의 균형이 깨진다.
그러면 오래 서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 몸에 이루어져 있는 모든 신체 기관과 부위의 메커니즘에 의해서
‘인간’ 이라는 하나의 집합체가 구성되고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베르베르의 소설처럼
모든 신체 부위들이 인간의 주인이고
인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냥 신체 부위가 움직이고 싶은 것에 따라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종이 아닐까하는 발칙한 상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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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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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6] 고리오 영감

 

 

 

 

 

 기러기 아빠의 눈물 

 

요즘 그리스에서 온 경제 위기라는 불청객이 우리나라에도 찾아와 민폐를 끼치고 있다.
지난 달 말에는 환율이 1200원대를 상승하다가 한 때 1270원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다.   

경제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환율이 고작 70원 올랐다고  

왜 그렇게 호들갑 떠냐고 그럴 것이다.
물론 환율이 오르면 경제적인 면에서 좋은 점도 있긴 하다.
그러나 환율이 올라갈수록  피해를 보고  

실제적으로 속이 타들어갈 사람들은 ‘기러기 아빠’ 들이다.
먼 타국에 공부하고 있을 자녀들에게 돈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러기 아빠들이 보낼 수 있는 송금은 1500달러~2000달러라고 한다.
환율이 1000원인 경제적 상황에서 환전을 하면 150만원~200만원이다.
그런데 환율이 1270원으로 치솟았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원화도 동반 상승하게 되어 원화도 190만원~254만원으로 올라간다.
이런..... 왜 기러기 아빠들이 환율 상승에 왜 그렇게 민감한지 그 심정을 알 거 같다.
환율이 1000원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40~50만원 더 오르게 된다.
환율이 오르면 오를수록 원화도 올라가 송금이 어려워지게 된다.
환율의 급락은 다양한 사회, 경제 요인들로 인해 변하므로
전문가들도 올라갈지 내려갈지 정확히 예측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만약 환율이 안정적인 상황 속에서 기러기 아빠들이 송금을 150만원 모았는데
예기치 않게 환율이 상승하여 보낼 수 있는 송금이 190만원 이상이라면  

아빠들 입장에서는 대략 난감하다.
타국에 있는 가족들은 보고 싶고, 외로워서 서러운 마당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고생해서 번 돈을 환율 때문에 보낼 수 없게 되면
기러기 아빠들은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러기 아빠 : 기러기 자녀 = 고리오 영감 : 라스띠냑크

 

일단 시대부터 비교해봐도 많이 차이가 날뿐더러  

저 멀리 바다 건너편에 있는 나라의 이야기다. 

원래 '기러기 아빠' 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낳은 사회적 인물이다. 

그리고 소설의 허구적 인물과  실제 인물을 비교한다는 것이 억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동명(同名)의 주인공도 살펴 보면 우리나라의 ‘기러기 아빠’ 와는 다를 게 없다.

기러기 아빠들은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고 있을 사랑하는 자식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외롭게 돈을 벌어 자식들에 송금하는 것처럼
고리오 영감도 사랑하는 두 딸들이 상류 사회에서의 행복한 삶을 누려 주기 위해서
역시 혼자 살면서 딸들에게 돈을 보낸다.
결국은 자신의 삶은 손해보더라도 사랑하는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혼자서 번 돈을 보내는 것이 비슷하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두 아버지들은 운명의 최후도 비슷하다.
가끔 자신의 삶이 힘들거나 타국에 있는 자식과 아내가 자기 자신을 소외하게 되면
자살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선택하는 기러기 아빠들도 있다.
그리고 고리오 영감은 빈털터리가 되어 소설의 말미에
딸들의 보살핌 없이 병으로 인해 쓸쓸히 죽고 만다.
하지만 소설 속의 고리오 영감이 더 비극적이고 불쌍하게 느껴진다.
타국에 있는 기러기 자식들은 한국에 혼자 남아 있는 기러기 아빠를 그리워하고
그런 아빠를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그런데 고리오 영감의 딸들은 자기 아버지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아버지에게 보답을 해준 것도 없다.

고리오 영감과 함께 자주 등장하면서도 나름 원샷 비중(?)이 어느 정도 있는
제2의 주인공 라스띠냑크도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기러기 자녀’ 과 비슷하다.
라스띠냑크는 지방의 가난한 귀족 출신이다. 그래서 화려한 출세를 위해
홀몸으로 파리에 왔건만 그의 말대로 파리는 ‘진흙 투성이’ 였다.
상류층들만의 세상이 되어버린 파리를 보고  

자신의 출신과 능력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지방에서 적지 않은 돈을 보내는 가족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더욱 더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감과 슬픔을 느낀다.
자신의 삶을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는 기러기 자식들의 심정도
라스띠냑크와 비슷하다.
처음에 외국에 오게 되면 고국과 다른 분위기의 나라에서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외국의 동갑내기들과 함께 공부를 하다보면
외국 친구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자신의 능력을 실감할 것이다.
외국인의 눈이 보는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그리고 이렇게 공부한다고 해서 자신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기러기 자식들은 정신적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유학 생활을 포기한다거나
최악의 상황으로 타국에서 자살을 선택하곤 한다. 
 

 

 ‘레알’ 하게 표현한 세태 풍경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답게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을 통해 자본주의화 되어 가는 19세기 프랑스의 세태를
요즘 유행하는 젊은 세대 언어를 빗대어 표현하자면 ‘레알’ 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프랑스 사회에 지배하고 있는 ‘돈의 논리’ 의 위력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돈을 통한 비정상적인 고리오 영감의 부성애는 딸들이 건전한 가치관을 갖지
못하게 되고 아버지를 비참하게 죽게 만든다.
고리오 영감뿐만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돈의 위력 앞에서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탈옥수 보뜨랭은 세상은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안다.
그러고는 돈이 필요한 라스띠냑크를 유혹하려고 하지만
라스띠냑크는 악마의 유혹을 거절함과 동시에  

당당히 그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고 맞선다.
고리오 영감의 두 딸들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부(副)를 이용하여  

신분 상승을 한 불효녀들이다.
죽음이 코 앞에 둔 영감의 소식을 듣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 귀족들이 모이는 무도회에 나가고 싶어 하는 냉담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고리오 영감이 신분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딸과 사위들은 그를 무시한다.

비록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상의 인물들이지만
소설 속의 등장 인물들을 보면 여간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감과 라스띠냑크를 보면
우리 사회의 ‘기러기’ 아빠와 그 자녀들과 비슷하고,
고생 끝에 키운 자식들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듯이

냉정하게 부모들은 무시한다.  

결국 늙고 아무 능력도 없는 부모들은 ‘독거 노인’ 이 되어
부질 없는 세상을 한탄하다가 쓸쓸히 독방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고리오 영감이 두 딸들을 비난하면서 외롭게 죽듯이 말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을 우리 사회와 유추해보면
비슷하다는 점이 신기하고 놀랍기보단 무섭기만 하다.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자크가 그린 사회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야, 나랑 싸우자!

 

  눈 뜨면 뭐가 돈 될까 머리 또 굴리지
  dirty cash에 배부른 니 주머니
  제발 좀 작작해 독 같은 drity money
  부모형제와 친구마저도 버린 거니  

  (중략)  

 

  사과 하나 없는 사과 상자 속엔 비열한 자들의 욕심이 가득해  

  부모 제사상 앞에 싸움판이네 부모 형제보다 돈이 더 중요해  


빅뱅의 ‘Dirty Cash' 의 가사 일부분이다. 
소설을 읽고 나니 불현듯이 이 노래가 생각이 났다.
발자크가 돈에 오염된 프랑스 사회를 직설적으로 소설로 표현했다면
빅뱅은 지금 한국 사회를 직설적으로 가요로 잘 표현했다.
빅뱅 말고도 돈에 찌들린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노래를 부른 가수는 많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소설에서 표현한 사회상과 비슷하게만 느껴진다. 
 

노래 제목도 직역하면 '더러운 돈' 이고  

고리오 영감의 사회와 우리나라 사회는 더러운 돈 때문에  

오염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영감의 장례식을 참석하고 난 뒤,
라스띠냑크는 정신을 가다듬고 ‘진흙투성이’의 파리와  

정면 대결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여기서 소설이 마무리 짓게 되면서 후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발자크는 독자에게 상상을 해줄 수 있는 여백을 남겨주었다.

 

과연 그가 거대한 사회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은 라스띠냑크가 혹여나 고리오 영감처럼 되어버릴지 않을까
짓궂은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 앞에서 당하기만 하고 늘 뒤에 한탄만 하는 것보다
한 번은 무모하게 사회의 핵주먹에 흠씬 두들겨 맞아보면서  
미친 척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기에 좋은 일이다.

최치원의 한시 한 구절이  

사회에 맞서는 젊은이들과 라스띠냑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세파 속을 헤매면 웃음거리 될 뿐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지요 
  

                   - ‘곧은 길 가려거든’ 중에서 (출처: 새벽에 홀로 깨어, 돌베개, 2008)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기러기 아빠의 눈물' 환율 급등해 용돈 송금 못해] 

머니투데이 5월 25일 입력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52515443734340&outlink=1 

 

[기러기 가족의 비극…세 모녀 이어 아빠마저...] 뉴스웨이 5월 11일 입력 

http://www.newsway.kr/news/articleView.html?idxno=8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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