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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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화

이 이야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밥과 책, 이 두 존재 없이는 살 수 없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좋은 대학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인생을 위해서 학교 공부에 죽어라 매달렸다.  

집안 형편도 그렇게 넉넉하지가 않아서 남들이 다 가는 입시학원을 못 다녔고 고액 과외도 꿈도 못 꾸었다. 하지만 ‘ 노력만이 살 길이다’ 라는 막연한 마음을 품은 채 학교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는 밤 10시가 되어도 귀가하기보다는 깜깜한 골목길을 지나서 독서실로 향했다.  

그리고 또 앉아서 공부했다. 몇 몇 사람들은 공부만 하는 학창 시절은 너무 재미없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입으로 내 학창 시절, 재미없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물론, 학창 시절에 공부만 한다면 재미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학창 시절에 즐거움의 단비도 있었다. 공부하다가 지루하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학생 때는 학교생활이 주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대체로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이공원에 간다거나 부모님 몰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남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는 혼자서 책 읽는 것이 좋았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책 읽는 게 좋았다. 이런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게 된 것도 학교 환경도 영향이 컸다. 중학생 3년, 고등학교 1학년. 총 4년을 남학생들과 부대끼는 생활을 해왔었다. 

그러다가 나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2학년에는 남녀공학 교실로 배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교실 총원 30명, 그 중에 여학생이 20명. 남학생보다 10명 보다 많았다. 우스갯소리로 한 교실에 남학생과 여학생이 생활하게 되면 남학생은 평소에 예쁘지 않던 동급 여학생을 예쁘게 보인다는 속설이 있다. 속설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남자이다 보니 모든 여학생이 예뻐 보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성에 대한 솟구치는 관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런 공부와 책 밖에 몰랐던 필자가 큐피드는 너무 딱해보였는지 나에게 사랑의 화살을 쏘았는가 보다. 그것도 강렬한 사랑에 취하도록 만든 화살을.

결국에는 같은 교실의 여학생 K를 좋아하고 말았다.  

하지만 내심 좋아한다고 직접적으로 고백할 자신이 없었다. K가 공부 밖에 모르는 사랑의 백면서생인 나를 좋아할까? 몸도 비쩍 마르고, 이마도 넓어서 내 얼굴이 그렇게 잘 생긴 것도 아닌데 K가 내 고백을 받아줄까?  

나는 내성적인 성격인 반면에 K는 명랑하고 털털한 성격이었다. 괜스레 성격이 맞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퇴짜 맞을까봐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같은 교실 친구이며 연애 고수인 A에게 나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A는 나보다 잘 생겼으며(당시 나를 포함한 10명의 남학생 중에서 그나마 잘 생겼다) 연애 경험도 풍부했다. 사실은 연애 비법을 전수받고자 해서 속마음을 A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나름 도움이 되고 희망적인 내용을 얻기를 바랬건만, 막상 연애 고수 A가 추천하는 비법은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A의 여심을 사로잡는 비법은 이렇다. 먼저 K에게 주말을 잡아 단 둘이 놀자고 제안한다. 만약에 K와의 즐거운 시간이 확정되면 나는 하루동안 놀아야 할 일정을 정하고, 당일에는 멋진 옷을 입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놀 때는 놀이공원에서 놀고, 식사는 외식 전문 식당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감정이 무르익었다면 고백하라는 것이다. 연애에 젬병이었던 필자는 A의 비법을 100% 믿지 않았다. 그리고 A가 말한 대로 실천하는 것도 두려웠다. K가 흔쾌히 승낙해줄 건지 미지수이며, 재미있게 노는 경험이 전혀 없었던 필자에게는 막상 그렇게 말할 자신도 없었다. 필자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그냥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으로 접어야만 했다. 그리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서 손 때 묻은 거무칙칙한 수학의 정석을 끼적거렸다.  

.

그리고 2주 뒤에 연애 고수 A와 여학생 K는 핑크빛이 우러나오는 교내 커플이 되었다. 
 

   

  

 

 

  사랑도 모르고 표현할 줄도 모르는 남자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원작이라는 것도 있었고, 나름 연애에 대한 비법(?)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반신반의로 에드몽 로스탕의『시라노』을 읽었건만... 역시 읽고나서 얻은 건 이야기의 재미였을 뿐 정작 얻고자하는 소득은 없었다.

‘사랑을 모르지만 표현하는 일을 하는 남자’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사랑은 알지만 표현할 줄 모르는 남자’ 크리스티앙이라면

나는 ‘사랑도 모르고 표현할 줄도 모르는 남자’ 였다.

『시라노』를 읽기 전에는 나는 크리스티앙형인줄 알았는데 읽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시라노는 남들보다 큰 코라는 자신의 약점 때문에 사랑의 감정을 얻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남들과의 미움의 벽을 쌓아야 했다. 그러나 묵묵히 록산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마음속에 꾹 눌러 지켜나갔다. 사실, 뼈아픈 짝사랑의 실패 이후 나도 시라노처럼 괜히 여학생들에게 무뚝뚝하면서도 냉정하게 대하곤 했었다.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고백하지도 못하는 소심남 주제에 한 번 겪은 사랑의 실패 원인을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일부러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었다. 왜곡된 마음이 삐딱한 시선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연애 비법을 찾는답시고 책을 읽었다가 도리어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 동시에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내 인생에 찾아온 짝사랑의 기회를 스스로 인고하면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뒤늦은 후회감도 들었다. 

   

 

 

  '사랑 고백 조작단 ' 되기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이른 아침 감은 눈을 억지그레 떠야하는 피곤한 마음속에도
나른함속에 파묻힌 채 허덕이는 오후의 앳된 심정 속에도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모습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층층계단을 오르내리며 느껴지는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속에도
십년이 휠씬 넘은 그래서 이제는 삐걱대기까지 하는 낡은 피아노
그 앞에서 지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내눈속에도
당신의 사랑스러운 마음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도 느낄 수 있겠죠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도 느낄 수 있겠죠
비록 그날이 우리가 이마를 맞댄채 입맞춤을 나누는
아름다운 날이 아닌 서로의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잊혀져 가게 될 각자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그런 슬픈 날이라 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당신께 사랑을 받기 위함이 아닌
사랑을 느끼는 그대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유영석 <사랑 그대로의 사랑> 전문 -

 

케이블 방송에서 S 방송국 심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가수 유영석 씨가 출연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유영석 씨가 미모의 미스코리아 부인을 둔 자신만의 비법(?)을 공개했다. 평소에 ‘사랑’에 대한 감정을 틈틈이 글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영석 씨는 많고 많은 미완의 글을 갈고 닦아서 ‘사랑 그대로의 사랑’ 이라는 노래를 탄생시켰다.    

 

사랑의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한 가사와 피아노 건반에서 울려나오는 잔잔한 멜로디는 유영석 씨 본인이 꼽는 최고의 자작곡인 동시에 지금도 연인들이 고백할 때 사용하는 음악이다. 그리고 유영석 씨 본인도 부인에게 이 노래로 고백을 했다고 한다. 사실, 까놓고 말하면 유영석 씨는 잘 생긴 외모와 거리가 먼 평범한 얼굴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외모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적극적인 태도를 동시에 살려서 아리따운 피앙세를 얻었던 것이다.  


『시라노』에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은 서로의 장점을 보완하여 록산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시라노는 이성을 유혹하게 하는 달콤한 화술, 크리스티앙은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 뒤에 숨어서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록산을 유혹하게 한다. 크리스티앙은 그냥 시라노의 말에 입만 뻥긋거리면 되었다. 두 사람이 스스로 ‘사랑 고백 조작단’이 된 것이다. 간혹 이 둘의 행동이 맞지 않아 록산이 의심하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조마조마하게 만들면서도 익살스럽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잘 생긴 외모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격이 착해서 이성이 좋아할 수도 있으며 유재석 씨처럼 재치있는 말솜씨와 편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다. 각자 나름의 장점을 살려서 이성에게 어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제대로 어필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용기 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그리고 유영석 씨처럼 이성을 사로잡는 자신만의 사랑 고백 조작만이 커플이라는 꿈의 등급으로 상승(?)될 수 있는 비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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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0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영석님의 <사랑 그대로의 사랑> 이 곡 너무 좋죠.
음악에 깔려서 나직한 목소리로 읽어가는 시.....

남녀간의 사랑이란게 밀고 땡기기를 잘해야 한다는건 농담이 아닌듯 해요. 지금 바라봤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과 성실인데도, 그 시점에 호르몬의 영향을 무시 못 한단 말이죠. 사람은 자기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사람을 제일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나 없이도 잘 살거 같은 사람이 꼭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거죠... 이건, 아마도 그런 사람을 소유함으로서 내 가치가 올라갈 것 같은 환상 때문일까요? ㅎㅎ.

cyrus 2011-01-06 15:26   좋아요 0 | URL
제가 컴맹이라 동영상을 올리지 못했네요. ^^;;
아직 저에게는 사랑이란 정말 어려운 단어인거 같아요.

stella.K 2011-01-0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 책 덕분에 시루스님의 쓴 첫 사랑 이야기도 알게 됐군요.
K 양이 털털하다면 무난히 시루스님을 받아줬을지도 모르는데 넘 소극적이었던 건
아닙니까?ㅋ 하긴 지난 일인걸요. 어쨌든 누구나 첫 사랑은 실패한다지 않습니까?
저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시루스님 나름 알찬 청소년기를 보내셨군요. 저도 청소년기를 다시 산다면
시루스님 같이 살아보고 싶은데, 문제는 인생을 다시 살아도 청소년기만큼은
절대 노라는 거죠.ㅎㅎ

cyrus 2011-01-06 15:28   좋아요 0 | URL
가끔 고등학생 동창회로 만나게 되면 항상 나오는게 실연 이야기랍니다.^^;;
막상 이야기가 나오게되면 창피스럽기도 하지만, 스텔라님 말씀대로
청소년 때 내가 헛으로 살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하지만 저도 그 때로 돌아가기 싫어요. 군대 또 가야되잖아요^^:;

감은빛 2011-01-07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첫사랑!
저는 사실 친구 A와 비슷한 경험은 있습니다.(조금 다릅니다!)
정말 쑥맥이었던 친구녀석이 전화번호를 하나 갖고 와서,
전화를 해서 말을 좀 걸어달라고 해서,
실컷 물밑 작업을 해주고, 녀석에게 직접 전화하고 만나라고 했는데,
이 녀석이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냥 포기해버리는 겁니다.
덕분에 내가 전화를 계속 하다가 만나게 되고,
결국 사귀게 된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고딩이었고, 여자애는 중딩이었어요.
나름 재밌었습니다.
아, 써놓고 보니 자랑처럼 들린다거나,
기분나빠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절대 자랑하려거나, 기분 나빠하시라고 쓴 건 아닙니다. 아시죠 ^^

cyrus 2011-01-07 12:3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오히려 감은빛님의 러브스토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요. ^^ 용감한 사람만이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진리가 맞는거 같습니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104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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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8월 말에 썼던 글입니다.  열린책들에서 주최한 리뷰 대회 때 쓴 글이었는데 이 글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카페 올린 글들 읽다가 이 글이 서재 블로그에 올리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좀 뒤늦게나마 글을 올려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책이 만화가 김태권 씨가 추천한 책이기도 하네요, ^^   

http://blog.aladin.co.kr/celebrities/4316651 

이 때가 서울에 열렸던 퓰리처 상 사진전에 가기 전 쓴 글이었는데 , , ,  지금도 그 때 사진전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네요.   그리고, 몇 달 지나고서야 제가 사는 대구에서도 퓰리처 상 사진전이 열리는 아픈 기억도 있기도 합니다. 

 그 때 왕복으로 KTX 타고 간 비용만 생각하면 , , ,  ㅠ_ㅠ

오랜만에 카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들 보니,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손발이 오글거리네요. 무수히 많은 오타 투성이에다가,  제가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모순어법들 ^^;; 

그래도 예전에 썼던 글을 읽어보니 몇 몇 책은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0년에 올해 썼던 글들을 다시 한 번 보는 것도 좋은거 같네요.  

 

  

 

 

  잊지 못할 퓰리처 상 사진 전시회 
 

수많은 관람객들이 찾아 큰 인기를 끌었던 퓰리처 상 사진전이 이제 4일 밖에 안 남았다.(전시회는 29일까지다) 이번 사진 전시회가 다음에도 열릴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사진 전시회의 흥행기록만 따져보면 언젠가는 다시 우리나라에 찾아올 것이라고 희망의 기대를 해본다. 필자는 한 달 전에 전시회 관람을 했다. 그것도 큰 맘 먹고 혼자서(!) 한 번 타는데 5만 원 정도 드는 KTX를 타고 서울의 전시회에 갔다. 사실 이런 대형 전시회를 관람해보는 것이 평생소원인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홀로 전시회에 간 이유는 주변 지인들이 이런 문화적 생활에 관심을 가지지 않다보니 서울에 같이 동행할 사람이 없었다. 교통비용도 만만치 않은 것도 그렇고 완전 대구 토박이 혼자서 서울에 가는 것이 불편해서 그냥 포기할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안 간다는 게 너무 아쉬워서 미지의 서울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전시회에 찾았다. 전시회가 열리는 예술의 전당에 처음 와봤는데 건물 내부도 좋고 TV로만 봤던 건물을 보니 한편으로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전시회에 찾은 관람객들이었다. 그 때가 방학 기간이다 보니 관람객 중에서 초, 중학생 자식들과 같이 온 가족들도 많이 있었다. 서울에서의 일정이 당일치기였고 전시회 내부에는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어서 무척 아쉬웠지만 평소에 책에서 봤던 유명한 사진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사진에서 전하고 있는 현장의 생생함과 어두웠던 역사의 이미지를 통해서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무모했던 서울 당일치기는 외로웠기 보다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보람찬 하루였다.


 Truth or Lie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서 전시회에 가보셨다거나, 혹은 안 가보셨더라도 이 사진은 많은 매스컴과 책을 통해서 많이 보셨을 것이다.  

  


 

1945년 수상작인 조 로젠탈의 <수리바치 산에 게양되는 성조기>라는 사진이다. 역대 퓰리처 상 수상작 중에서 베스트 포토로 꼽히는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고, 제임스 브래들리의 소설 『아버지의 깃발』의 책 앞표지와 소설을 원작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동명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이 사진이 변주되었다. 사진의 배경과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이오지마 섬의 수리바치 산 정상에서 미군들이 성조기를 게양하는 내용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서 이 사진은 연합군의 승리, 곧 미국의 승리로 상징되는 사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진의 제목과 배경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이제 막 미국이 일본에게 승리하여 승리의 상징인 성조기를 세우고 있는 역사적인 장면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 사진은 100% 자연스러운 장면을 찍은 것이 아니다. 사진작가의 연출이 만든 장면인 것이다. 조 로젠탈이 이미 사진을 촬영하러 수리바치 산에 올라왔을 때는 미군 병사들은 이미 성조기를 게양하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병사들에게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재연해줄 것을 요구하여 이 장면을 토대로 사진 작품이 나온 것이었다. 전쟁 종결 이후 연출된 사진은 본의 아니게 의기양양한 전쟁의 승리자 미국의 얼굴과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숨겨진 사실은 이 사진이 미국이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고 난 뒤에 찍은 것도 아니다.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오지마 섬에서의 전투 기간은 가장 치열했고 미국과 일본을 통틀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진 속 미군 병사들 중 3명은 사진 촬영 이후 전투 중에 전사하고 만다. 



 역사는 역사다?

우리는 역사를 증명해주는 사진뿐만 아니라 문헌자료, 그림만 봐도 역사 그 자체를 단순히 믿어버리게 된다. 앞에서 언급했던 조 로젠탈의 사진을 통해서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은 세계대전을 승리한 미국의 우월감과 자기도취를 확인하게 된다. 진실 되지 않는 사진 덕분에 조 로젠탈은 퓰리처 상을 받았고, 사진 속 병사들 중에서 생존한 병사는 조국으로 귀환하여 대중들에게 전쟁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그만큼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향수를 잊지 않은 미국인들에게는 이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말하면 대부분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 호의 뗏목>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174~175페이지 사이에 그림 사진이 있음



줄리언 반스의 소설『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에서도 로젠탈의 사진과 같은 유사한 내용이 있다. 제5장「난파」라는 제목의 장인데 테오도르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 호의 뗏목』에 대해서 작가가 약간의 픽션을 가미한 내용이다. 제리코의 그림은 실제로 난파된 메두사 호의 생존자들이 구조되는 사건을 토대로 한 그림이다. 그림 속 장면에는 뗏목 위에 죽은 사람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데 생존자들이 죽어가는 사람의 인육을 먹으면서 목숨을 부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로젠탈의 사진을 보는 관람객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과 ‘전쟁에서 패한 일본’이라는 이분법적 이미지가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제리코의 그림도 관람객에게 승자를 강조시켜주는 이분법적 관점을 불러일으키도록 의도하고 있다.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결국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는 죽은 자는 살아남은 자에게 먹히고 마는 약해 빠진 인물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그 약한 자들의 시체를 먹으면서까지 목숨을 유지한 강인한 인물이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자들은 쓸모가 없는 약한 자들을 뗏목에서 내다버리고. 심지어 인육을 먹기 위해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 인륜적인 행동을 했지만 관람객들은 그림 속의 처참했던 현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불편한 진실을 간과한 채 그림을 감상한다.

「난파」의 내용 중에는 제리코의 그림에 대한 주해가 나오는데 나폴레옹 파들은 메두사 호가 좌초되는 장면을 그리지 않은 것을 빌미로 이분법적 이미지의 구도를 당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빗대어 투영하였다. 그리고 메두사 호의 좌초가 결국에는 무능한 왕당파의 모습이라고 비꼬아서 공격하기도 한다. 당시 기득권자인 왕당파의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제리코는 그림 제작에 약간의 설정을 가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역사 다큐멘터리나 박물관에서 보고,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역사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제목처럼 기득권자들이 조작하고 남은 불과 10과 1/2 정도일지도 모른다. 반스가 세계 역사를 임의대로 10과 1/2장으로 축약한 것처럼 좁은 시야로 보고 있는 10과 1/2의 역사가 진짜 역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과거에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삭제시키고 화려했던 환락의 역사는 항상 보존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역사의 범위와 관점이 10과 1/2로 줄어들게 된다. 


   

 반스가 만든 역사의 미로 속에서 찾은 것

반스의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10장의 역사는 픽션 또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가미한 내용이다. 그러나 제목의 1/2로 상징되는「삽입장」은 에세이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각 장의 내용들이 독립적으로 따로 놀다보니 각 장이 미로로 된 역사를 보는 듯하다. 하나의 장을 읽으면 다음 장들과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각 장은 헤어날 수 없는 하나의 폐쇄된 줄거리 공간이다. 그래서 그나마 허구가 없는 내용이라는 삽입장마저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열린책들 세계문학 중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다음으로 난해한 작품인거 같다) 삽입장의 내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화자(아마도 작가 본인)가 사랑하는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주제가 ‘역사’로 전환된다. 그리고 어느새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다 가 결말에는 잠을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끝난다. 작가가 언급했던 ‘사랑하는 그녀’, ‘역사’, ‘사랑’이 결국에는 역사를 비유하여 사랑하고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제목 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삽입장을 써서 독자들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작가의 의도된 장난인지는 알 수 없다. 역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답다. 정형적인 소설 형식의 틀을 거부하고 있는 동시에 독자들에게 작품의 각 장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도 복잡한「삽입장」속 내용에서 그나마 인상 깊었던 것은 역사에 대한 언급이다. 역사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맹점을 작가 는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객관적 진실은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수많은 주관적 진실을 끌어내고 이것들을 평가하고 우화화해서 역사를 만들고, 어떤 신의 이름으로 <실제의> 사건을 각색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렇게 신의 이름으로 각색한 것은 속임수이다. (중략) 이렇게 객관적 사실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객관적 진실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줄리언 반스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삽입장」p 337 -



역사가 기록된 문헌이나 이미지 등은 당시 사회의 관점과 기준에 따라서 사건의 불필요한 잔상들을 거둬내고 진정한 하나의 역사로 가공된다. 하지만 왜곡되어 삭제된 불필요한 잔상들 속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진실의 내용도 있을 수가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단순히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믿고 넘어가기보다는 보이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알려고 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 사진  출처

http://www.segye.com/Articles/News/People/Article.asp?aid=20060821000284&ctg1=02&ctg2=00&subctg1=02&subctg2=00&cid=0101120200000&dataid=200608212052000309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media_id=590409&docid=700897&dir_id=090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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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2-30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도 역사가 많이 취약하여 요즘 세계사와 국사를 다시 들춰보고 있는데요.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때로 '관점'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0-12-30 14:07   좋아요 0 | URL
역사를 공부할 때 무조건 글자 그대로 보려고 하는것보다는
균형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의 안목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네요. 그래서 김태권 씨가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일거구요^^

다이조부 2010-12-3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태권 관심저자인데 그이가 추천했군요 ^^

아참 그리고 퓰리처 사진전을 못 봤는데 어마어마했나 보네 ㅎㅎㅎ

근데 대구에서 몇 달 후에 전시가 있었다고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듯

작품이 똑같이 전시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리고 몇 달 먼저 볼 기회가 있었잖아요

그리고 막상 동네에서 했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못갈 확률이 높아요 ㅋ

cyrus 2010-12-30 14:0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듣고보니 그런거 같네요. 예전에 저도 그런 경우가
많았거든요ㅎㅎ

마녀고양이 2010-12-3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TX를 타고 퓰리처 사진전을 보러온 사이러스님을 보니
오늘 넘 춥다고 코 끝 하나 베란다 내밀어보고
샤갈 전을 포기하려는 제가 좀 한심하다눈..........

아아, 역시나 나가볼까요?

cyrus 2010-12-30 14:12   좋아요 0 | URL
시간이 되시면 코알라 손 잡고 꼭 보러 가보세요.
춥다고 계속 미루다보면 못 갈 수도 있어요^^
아직 안 가봤지만, 내년에 꼭 가보고 싶은 전시회거든요.
열린책들에서 매월 리뷰 대회가 진행중인데
12월 리뷰 대회 상품이 샤갈 전 초대권이랍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벤트만큼은 당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12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재만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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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또예프스끼의 대표작이 될뻔한 미완성 소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 이렇게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운데 , , ,  '  

도스또예프스끼가 한 작품을 열심히 집필했더라면 자신의 대표작 <죄와 벌><카마라조프 가의 형제들>과 맞먹을 수 있는 장편소설이 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이 작품이 도스또예프스끼가 쓴 소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생소하기에 짝이 없는 소설 제목은 한 번에 기억하기가 쉽지가 않다.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는 작가 생활 초창기 때 쓰여진 미완성 소설이다.  

출판사에서는 이 소설을 '장편소설' 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분량만 봐도 중편소설 쯤으로 보인다. ( 지금도 '장편' 과 '중편' 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는 사실,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안나' 이며, '네또츠까' 는 애칭이다.   

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어느 러시아 소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리고 있다. 소녀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작가는 이 소설을 장편 '대작' 으로 집필할 계획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대한 집필 계획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집필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는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는 아예 처음부터 완성할 수 없었던 소설이었다.  24세라는 나이로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소설 한 편으로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 문단의 총아가 되었지만, 뒤이어 <분신>이 발표된 이후부터는 문단의 반응은 시들어져만 갔다. 이전과 다른 문단의 반응에 젋은 도스또예프스끼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데뷔 때 누렸던 달콤한 명성의 시절이 그리웠다.  작가로서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그는 단기간동안 꽤 많은 단편소설들을 써내왔지만, 이 역시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이렇다보니, 소설을 통해서 들어오는 수입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작가로서의 명예와 그 뒤에 따라오게 되는 물질적인 부(副)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빈곤한 형편 속에서도 꾸준히 소설을 집필하였으며 소설 말고도 여러 잡지를 통해서 잡문을 쓰기도 했다.  이렇다보니, 장편소설을 쓸 환경적 여건이 되지 못했다.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다난한 상황 속에서 장편소설을 구상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이 소설에서도 비평가로부터 꾸준히 지적되어 온 부족한 구성력과 지나치게 많은 독백 설정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이 많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읽는데도 힘들었다)  장편소설을 쓰기에는 20대의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아직 문학적 원숙미가 갖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길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작가는 그 러시아 내에서 유행하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 뻬뜨라셰프스끼 모임 ' 이라는 비밀 모임에 자주 참석하게 되었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사상은 왕정을 타도하려는 불온한 사상으로 낙인 찍히고 있었다.  결국, 이 모임에 연루되어 도스또예프스끼는 체포되어 기나긴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겪어야 했다. 

 

 

  어느 불행한 음악가의 이야기  

소설의 주인공은 네또츠까이지만,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역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소설의 제1부는 자신의 계부인 예피모프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피모프의 직업은 음악가(바이올린 연주가)인데, 1부가 가장 기억남는 줄거리이면서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예피모프는 훌륭한 음악적 재능을 보유하고 있지만, '음악가' 로서의 명예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초창기 소설이 다 그렇듯이, 이 소설에서도 선배 작가들의 소설들의 플롯을 모방하고 있다.  명예에 눈이 먼 불행한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강바라>와 니콜라이 고골의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번역할 정도로 발자크의 문학에 심취하였다)  

예피모프는 자신의 음악적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자신보다 바이올린 연주를 잘 하는 음악가를 불 같이 질투하는 동시에 한계에 부닥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스스로 좌절하고 혐오하고 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그의 지나친 열정은 후에 집착으로 변하게 된다.  1부에서 예피모프 다음으로 불쌍한 인물이 네또츠까의 어머니이며 예피모프의 부인이다.   

네또츠까의 어머니는 자신의 미래가 이미 보장되었다고 승승장구한 예피모프의 모습에 현혹되어 결혼하고 만 것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 예피모프의 초라한 현실를 마주하게 된 어머니는 자신이 처한 불행한 삶에 절망해야 했다.   하지만, 예피모프는 자신이 겪고 있는 가난한 생활고의 원인을 아내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훌륭한 재능을 망쳐 버린 것 또한 아내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예전과 같은 예술적인 재능을 상실했다는 지나친 과신, 거기에다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외부적인 이유로 전가하는 예피모프의 모습은 자신 스스로 파멸하는 지름길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과신에 속아 결혼하게 된 아내가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예피모프는 아내의 싸늘한 주검을 놔둔 채 매정하게 떠나버린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예피모프는 네츠또까와 함께 도망치면서 아내의 죽음은 자신 탓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자기 혼자 아내의 주검이 있는 집으로 향하는 도중 갑작스런 정신 착란 증세로 숨을 거두고 만다.   

 

  

  자신 스스로 만들어낸 ' 자신을 위한 ' 오마주

갑작스런 예피모프의 죽음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어떻게든 1부를 마무리하려는 설정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예피모프의 죽음은 자신의 재능에 대한 광적인 믿음으로 가득한 자에 걸맞은 최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예피모프의 일생을 보게 되면 젊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실루엣이 비춰지기도 한다.  이 작품을 집필하고 있는 시기는 작가로서의 슬럼프를 겪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도 훌륭한 소설 한 편 쓸 수 있다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희망적인 불씨가 남아 있었다.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를 쓰고 있을 무렵에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난 열심히 쓰고 있어.  항상 난 우리 문학계와 잡지들, 비평가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조국 수기]에 실릴 내 3부작 소설(네또츠카 네즈바노바)로 나에게 악의만 가득한 사람들의 면전에서 올해 나의 우월함을 확신시킬 거야.  

 - 1846년 12월 17일 편지,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주3, p 26 -  

편지가 쓰여진 1846년은 <분신> 발표 이후 비평가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을 시기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 버금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 집필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전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헛된 자만감에 눈이 먼 나머지 앞날이 캄캄한 자신의 미래 앞에서 청년작가는 불안했던 것일까?  다음 편지에서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내 문학 경력의 세 번째 해야. 나는 안개처럼 살고 있어. 삶이 보이지 않고, 제정신을 차릴 시간도 없어. 그들은 회의적인 평을 하고 있어. 이 지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어. 가난, 삯일, 그것만이라면 난 쉬었을 텐데!  

 -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주11, p 72 -  

젊은 작가에게는 명예와 부, 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에는 무척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무척 셌던 도스또예프스끼로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예피모프가 자신의 가난함을 아내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도스또예프스끼 역시 본인 능력의 한계를 외부적인 이유로 찾아냄으로써 욕구 불만을 해소시켰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을 펜과 종이에서 찾았다. 그리고 소설에서 자기 자신을 묘사하였다. 그 사람이 바로 예피모프이다.  

발자크, 고골처럼 러시아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대문호가 될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설이었다. 소설은 작가 자신의 눈을 통해 본 현실세계를 재창조하는 이야기 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의 능력과 불행하기 짝이 없는 상황과 유사하는 가공의 주인공 예피모프를 탄생시켰다.  비록, 결말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지만, 소설 속 화자인 네또쯔까가 아버지 예피모프에 대해서 연민과 동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이 처한 불행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도스또예프스끼는 존경을 마다하지 않는 선배 작가들의 소설을 모방하는 것 같으면서도 예피모프를 통해서 젊은 나이에 러시아 문단을 뒤흔들어놓은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네또츠까 네즈바노바>의 예피모프는 발자크나 고골 같은 선배 작가들을 향한 존경어린 오마주라기보다는 반대로 언젠가는 이들의 능력치를 뛰어넘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을 위한 오마주일 수도 있다. 예피모프라는 오마주에는 자신이 겪고 있는 암울한 현실을 일시적으로나마 해소시켜주는 동시에 대작가가 되려는 젊은 도스또예프스끼만의 염원과 야망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인 성공학 연구자인 나폴레온 힐은 성공하고 싶어하는 소원이나 갈망을 종이에 적어두고 지갑에 보관하면서 틈만 나면 들춰봤다고 한다. 성공을 바라는 소원이 적힌 종이를 계속 본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성공을 이루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며 그런 강렬한 마음의 자세 덕분에 성공이 찾아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자신의 성공을 적어놓은 종이가 일종의 부적인 셈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유형 생활을 끝나고 난 뒤에도 중간에 쓰다 만 이 소설을 집필하는데 열중하였지만, 결국에는 지금의 내용으로 마무리짓는다. 성공에 대한 욕망을 해소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오마주가 등장하는 이 미완성 소설이 먼 훗날, 자신에게 가져올 명예, 그리고 죽어서도 고골과 발자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명성를 부르는 부적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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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2-23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홍~
cyrus 님의 자세한 소개 덕분에 관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다 :D
이 소설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다양한 얼굴을 만나 볼 수 있겠군요~

cyrus 2010-12-23 19:13   좋아요 0 | URL
지금 연도순으로 도스또예프스끼를 읽고 있는데,,,
참으로 매력적인 작가인거 같습니다.^^ 음악에 관심이 많으신
바람결님이 읽어보신면 좋은 소설인거 같습니다.
1부의 예피모프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예술소설 같은 느낌도 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12-2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 겁니다.열린책들 이전에 70년대 초에 정음사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나왔는데 헌책방에서 몇 권 구했지요.하지만 이 작품이 든 권은 구하지 못했습니다.페트라셰프스키 사건 이전의 작품이면 젊은 시절 것이로군요.

cyrus 2010-12-23 23:48   좋아요 0 | URL
네, 그 사건 이전에 집필하고 있었답니다.
자이트님의 세계문학에 대한 내용의 댓글을 보면 지금보다 예전 세계문학
출판이 풍성한 느낌이 드네요. 정말 열린책들이 아니었으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소개되지 못했을겁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2-24 17:40   좋아요 0 | URL
40여년 전에 번역되고 그 이후엔 절판된 명작들이 꽤 있어요.이런 건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게 상책이죠.저는 소설 외에 역자의 작품소개나 작가소개도 정독하는 편입니다.시대적 배경에 관심이 많으니까요.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전기는 시중에도 꽤 나와 있는 편이죠.저도 다섯권을 가지고 있고 그외에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다룬 책을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아무래도 그가 반동적인 종교관이나 반혁명관을 소설을 통해 풀어내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보니 다른 이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어떻게 해석하는 가도 알고 싶어 이런저런 책들을 모아 읽지요.

blanca 2010-12-2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 지금 너무 놀랐어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도 그리고 그런 미완의 것이 번역 출판되어 있다는 것도요. 나폴레옹 힐 책은 제가 애장했던 책인데^^ 막 줄 긋고 열심히 봤던 기억이 나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가요....

cyrus 2010-12-23 23:50   좋아요 0 | URL
이 사실이 블랑카님에게 또 한 번 놀라게 해줄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이 낭만주의적 요소를 시도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역자 해설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저는 이 사실에 놀랍더라고요.
도스또예프스끼와 낭만주의라면 매치가 안 되는데 말이죠^^;;

다이조부 2010-12-24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편과 장편을 나누는 경계선이라.....

보통 책 1권으로 통째로 나오면 장편소설 이라고 하죠

중편은 애매한게 100페이지 내외로 알고 있어요~ 단편과 중편을 가르는 기준이 종종
애매할때도 있죠~

cyrus 2010-12-24 14:46   좋아요 0 | URL
그렇죠, 단편과 중편을 구분할 때도 헷갈려요^^;;

2010-12-24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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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인 18세기 후반 러시아는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8세기 초에 표트르 대제(1672~1725)는 폴란드와의 국토 분쟁 해결, 발트해 진출로 승승장구하면서 러시아는 대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좀더 나은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표트르 대제는 군사, 행정,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행력 부족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강압적으로 밀어부친 인세 제도는 왕정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만 높이 살 뿐이었다. 제국 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가득차기 시작하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갑작스럽게 얻은 병으로 표트르 대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러시아 내 정세는 점차적으로 불안정해져만 갔다. 

여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가 1762년에 즉위될 때까지 그 전에 황제들은 오랫동안 나라를 통치하지 못했다. 특히 예카테리나 2세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남편인 표트르 3세(1728~1762)의 왕위를 찬탈하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재위한지 6개월 만에 부인한테 왕관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리고 부인이 여제로 즉위된지, 1주일 후에 그는 여제의 친위대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예카테리나 2세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불고 있던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하는 계몽전제군주로서 개혁을 꾀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이 역시 시끄러운 정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이전에 표트르 대제가 규정해 놓은 엄격한 종신근무제는 귀족들의 힘을 키워놓고 말았으며 반면, 귀족들에게 예속된 농노들의 힘은 약해져만 갔다. 러시아의 농노들은 사회적인 지위도 보장할 수도 없는 노예가 전락하고 말았다.  농노들은 자신들의 불리한 입장에 불만을 토로하였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귀족의 특권을 보장해주기만 하였다.

자신들의 부당한 지위가 이어지자 농노들은 농노제에 반발하는 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농민 반란의 핵에는 푸가초프(1742~1775)라는 인물이 있었다. 1773~1775년동안 푸가초프는 러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다. 푸가초프는 자신이야말로 표트르 3세라고 자칭하며 새로운 지도자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농노 해방을 부르짖으면서 지주들을 잔인하게 처형하였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땅들은 농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러시아 군사력과 비교하면 수준은 낮았지만 반란군은 반란 초기부터는 전국적으로 막강한 힘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농노들로 주축된 반란군에도 치명적 결함이 있었고 확실한 기동력을 갖춘 러시아 정부군에게 패배하였다. 결국, 농민반란의 우두머리인 푸가초프는 1775년에 처형당하게 된다.  

 

  뿌쉬낀의 펜으로 재탄생된 푸가초프의 난

러시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푸가초프의 난은 18세기 러시아 왕족, 관료, 귀족들에게는 기억하기 싫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난이 진압당한지 정확히 61년 뒤인 1836년에 러시아의 시인은 푸가초프의 난을 주제로 한 걸작을 완성하게 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이다. 

뿌쉬낀이 활동하던 그 당시 러시아에서도 농노제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정부 입장에서는 기억하기 싫은 푸가초프의 난을 주제로 젊은 작가가 글을 쓴다면 아니 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뿌쉬낀은 작품 속 푸가초프를 인간미가 넘치는 순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당시로서는 푸가초프에 대한 뿌쉬킨의 묘사는 파격적이다. 정부들이 기억하는 푸가초프는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잔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789년부터 1799년까지 유럽 대륙 전역에 불었던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러시아에서까지 미치게 되자 정부는 급진적인 자유 사상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자유적인 사상이 담긴 글 때문에 유배당한 적이 있었던 뿌쉬낀 역시 정부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쓴 글들은 항상 검열의 대상이었다. 뿌쉬낀은 정부의 검열을 교묘히 피하기 위해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예카테리나 2세 역시 어려움에 처한 주인공을 도와주는 긍정적인 인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뿌쉬낀은 왕정을 옹호하려는 생각으로 이 작품을 집필한 것이 아니다.  뿌쉬낀은 작품 속에서 은근히 러시아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농노제에 대해서 비판하는 입장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푸가초프의 난을 중립적인 관점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잔인하기만 했던 푸가초프의 활동에 크게 중점을 두기보다는(이 구성 역시 뿌쉬낀이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문학적 의도라는 점을 배제할 수 없지만) 역사 속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남녀 주인공의 러브 스토리를 통해서 역사적인 사건을 간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 믿음 ' 이 만들어낸 해피엔딩  
   
<대위의 딸>은 청년장교 그리뇨프와 사령관의 딸인 마리아 간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도 볼만 하지만, 푸가초프와 그리뇨프의 만남 또한 흥미롭다. 작품 속에 형성하고 있는 그리뇨프-마리아, 그리뇨프-푸가초프와의 관계는 '믿음' 이라는 연결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들 간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있는 믿음은 그리뇨프와 마리아뿐만 아니라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바라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결말로 이끌도록 하고 있다. 

 

                                     Turst #1  그리뇨프 - 푸가초프 

강압적인 군인 아버지의 명령에 그리뇨프는 어쩔 수 없이 마리아의 아버지인 사령관이 부임하고 있는 요새로 향하게 된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씨 속에서도 그리뇨프를 성심껏 모시고 있는 마부와 함께 요새로 향하던 중, 한 농부를 만나게 된다. 농부와의 만남 덕분에 그리뇨프는 무사히 마을에 안착하여 눈보라의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덕분에 그리뇨프와 동행하게 된 농부 역시 다행히 동사를 면할 수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리뇨프와 농부는 서로 친해지게 되었다. 농부의 복장이 안쓰럽기만 하였고 마을을 알려주게 한 감사의 마음으로 자신이 입고 있던 토끼털 외투를 농부에게 건네주게 된다.  따뜻한 토끼털 외투를 선물로 받게 된 농부는 그리뇨프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면서 자기 갈 길로 향한다. 


  부랑자는 나의 선물에 지극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마차까지 나를 배웅한 뒤 허리 굽혀 절하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나리의 덕행에 주님의 보답이 있으시길 빕니다. 나리의 은혜는 길이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 <대위의 딸> (미스터 노 세계문학) 석영중 역, p 33 -  


이야기 중반부에 이르게 되면서 이 농부의 말은 진짜 현실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푸가초프 반란군의 습격으로 인해서 그리뇨프가 장교로 활동하고 있던 요새는 점령당하게 되며 요새를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들은 처형당하게 되었다. 우리의 주인공 그리뇨프 역시 처형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처형당하기 직전에 그리뇨프는 반란군의 지휘자인 푸가초프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지휘자가 예전에 자신의 토끼털 외투를 줬던 그 농부였던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리뇨프 곁에 있었던 마부가 먼저 푸가초프가 예전에 만났던 농부임을 알게 되면서 그리뇨프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뇨프는 러시아 정부와 한통속이라고 할 수 있는 요새의 장교였지만 푸가초프는 그 때의 만남처럼 거리낌없이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푸가초프는 그 때의 친숙했던 만남을 기억한 것뿐만 아니라 귀족들만 입을 수 있는 토끼털 외투를 낯선 이에게 선물로 건내준 일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푸가초프는 그리뇨프의 착한 인상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뇨프는 적군에게 속하고 있지만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푸가초프는 젋은 주인공을 끝까지 도와주었다. 그리뇨프와 마리아의 재회 역시 푸가초프가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작품 속 극적인 장면 중의 하나이다. 정부군에 의해 처형당하는 순간까지 푸가초프는 그리뇨프라는 인물을 끝까지 믿고 있었다. 그리뇨프와 동행하는 도중에 푸가초프는 반란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서슴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 모스끄바까지 진격할 생각입니까? 」

   참칭자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 나도 몰라. 나는 운신의 폭이 좁다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내 부하놈들은 잘난 척만 하고 게다가 모두 도적놈들 아닌가. 그래서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어. 전세가 역전되면 제 목숨 살리겠다고 당장에 내 모가지를 갖다 바칠걸세. 」

  - <대위의 딸> p 147 -


푸가초프는 농노들을 위한 더 좋은 나라를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군인이 아닌 농민인 본인으로서는 이미 커다란 일로 번지게 된 자신의 반란에 대해서 소신있게 말하고 있다. 실제로 자신이 이끌고 있는 반란군들의 모함으로 푸가초프의 모가지는 정부군에게  바치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든 허구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잔인하기만 할 거 같은 반란군의 우두머리도 반란 활동의 한계를 깨닫고 있다는 점이 이채로우면서도 자신의 강력한 우두머리 이미지에 부정적일수도 있는 반란의 한계에 대한 생각을 그리뇨프에게 밝히는 모습은 그리뇨프에 대한 푸가초프의 전적인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Turst #2  그리뇨프 - 마리아

마리아의 아버지가 부임하고 있는 요새가 푸가초프 반란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마리아의 부모들은 반란군 일당들에게 처형당하며 마리아만 간신히 살아남게 된다. 이전에 그리뇨프의 동료이며 요새 소속 장교였던 쉬바브린은 전세가 푸가초프 쪽으로 흐르게 되자 푸가초프 밑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리고 자신 역시 사랑하고 있던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푸가초프에게 병든 아내라고 거짓말을 한다. 결국, 그의 거짓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뇨프의 등장으로 들통나게 되고 그리뇨프와 마리아는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 푸가초프의 도움으로 마리아는 그리뇨프의 부모가 살고 있는 집으로 피신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뇨프는 또 한 번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푸가초프의 난이 진압되기 시작하면서 간사한 쉬바브린은 그리뇨프를 푸가초프와 한 패라고 정부에게 밀고하게 된다.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그리뇨프가 체포당하게 된 사살을 알게 된 마리아는 사랑하는 남자를 살려내기 위해서 예카테리나 여제가 살고 있는 뻬제르부르그로 가게 된다. 자신이 직접 여제를 만나 그리뇨프에 대한 선처를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도 그리뇨프-푸가초프의 만남처럼 마리아 역시 예카테리나 여제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그리뇨프를 풀려나게 할 수 있었다. 여제가 살고 있는 궁정으로 향하던 중 만나게 된 귀족 부인이 예카테리나 여제였던 것이다. 여제는 마리아를 호의적으로 보게 되었고 그리뇨프의 딱한 사정을 이해하면서 그를 석방시키도록 하였다. 초반에 마리아는 요새의 대포 소리에도 크게 놀라는, 요새 안에서만 생활한 어리숙한 여성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뇨프의 선처를 구하기 위해서 머나먼 뻬쩨르부그르까지 가서 러시아에서 제일 높은 신분인 여제를 만나려는 무모함을 감행한다. 그 무모함 뒤에는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간절하고도 희망적인 마리아의 믿음이 있었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뿌쉬낀, 그리고 농노들의 불신

그리뇨프와 마리아의 두 번째 재회로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행복하게 끝나버리는 바람에 아쉬운 감이 있다.  뿌쉬낀은 이 작품을 통해서 러시아 정부의 농노제를 은근히 비판하고는 있지만,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개선에 대한 일말의 생각을 드러나지 않고 있다. 지나친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사회에 대한 생각을 밝힐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뿌쉬낀은 급진적인 자유 사상을 받아들인 시인이었지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귀족들만 잘 사는 러시아 사회를 묘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는 대놓고 비판할 수가 없었다. 급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젊은 시인의 한계이다. 그리고 뿌쉬낀은 귀족 출신이다.  농노들에게는 불리한 입장을 처하게 만들고 있는 러시아 농노제에 대해서는 불신의 입장을 보였겠지만 직접적으로 농노제의 폐해를 고칠 수 있는 사회 개선에 대해서는 귀족 신분인 그에게는 실질적으로는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잘 사는 사회를 위한 개선의 변혁이 이루어지는 마당에 러시아에서만은 사회 개선에 대한 변혁에 대한 생각은커녕 불안정하고 부조리한 사회는 밑바닥으로 거듭 추락하고 있었다.  

소설 속 남녀 주인공은 푸가초프의 난이라는 역사 속 소용돌이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실제 러시아의 사회 분위기는 혼돈 속으로 빠져만 갔다.  농노들을 위한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 반란을 주도한 푸가초프는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1861년에 농노해방령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노들의 생활고는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농노들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절망적인 불신은 날로 커져만 갔다.  절망적 불신이 만들어낸 민중의 시한폭탄과 이를 안일하게 대처한 정부의 태도는 결국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의 등장으로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4년동안 러시아를 지배했던 로마노프 왕조, 그리고 러시아의 카이사르로 자칭하던 지배자인 차르(Tsar)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게 되었다. 자신이 끝까지 러시아의 지배자라고 자칭하면서 처형당한 푸가초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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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12-05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위의 딸은 초등학교 시절에 어린이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참 여간해서 러시아 문학은 손이 잘 안 가요.
재밌게는 읽은 것도 같은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에 없고.
마침 저 책은 절판이네요. 새판이 나왔나...?
시루스님 정말 책을 많이 읽나봐요. 하루에 몇 시간? 한 달이면 몇 권?
님 전공이 뭔지 물어봐도 되나요?ㅋ

cyrus 2010-12-05 13:53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전집 출간의 일환으로 몇년 전에 'Mr.know 세계문학' 으로
나왔었는데 지금은 그 전집들을 절판된 상태이고 '열린책들 세계문학' 으로
새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 중에서도
몇 권은 절판인가 보네요. 뿌쉬낀의 <대위의 딸>은 열린책들 말고도
펭귄클래식에서도 출간되었습니다.

제가 새벽에 아르바이트로 편의점에 일하고 있어서 그 시간에는 카운터에 앉아서
독서나 개인적인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퇴근하여 집에 와서
수면을 취하고 점심 시간 이후에는 운동을 하고 그 때에도 틈틈히 책을 읽습니다.

cyrus 2010-12-05 14:00   좋아요 0 | URL
그리고 점심 시간 이후에는 운동 하다가 저녁쯤에도 책을 읽습니다.
제가 TV를 그렇게 많이 보는 편도 아니고, 컴퓨터는 뉴스 검색,
서재 블로그랑 출판사 공식 카페에 들리는 것 외에는 오래 사용하지 않습니다.
한 주에 많아야 5권 읽습니다. 서로 다른 내용의 책이라도
한꺼번에 읽게 되는거죠. 그렇게 읽으면 읽는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렇게 읽어보면 서로 다른 내용의 책들에서도 서로 상호연결되는 의미를
찾을 수 있어서 좋은거 같습니다.

그리고 전공은 행정학입니다. 그리고 저 그렇게 하루종일 책만 읽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평일에는 야간 아르바이트 때문에
못 놀고 있을뿐이지, 일 안하는 주말에는 친구들 만나서 놀기도 합니다.^^

stella.K 2010-12-06 11:17   좋아요 0 | URL
한 달에 5권도 아닌, 한 주에 5권이라구요?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
그랬구나. 행정학. 그러고 보니 얼핏 그렇게 쓴 걸 본 것도 같아요.
정신하군...ㅠ
야간에 일하는 거 힘들지 않나요?
댓글이 꼭 하루키를 문득 생각나게 만드는 서술이었습니다.ㅋㅋ

cyrus 2010-12-06 11:25   좋아요 0 | URL
사실 대학교 신입생 때는 한 달에 5권도 안 될 정도로 책을 멀리했었답니다.
학점 관리에다가 과 사람들 만나면서 술 먹게 되다보니,,,^^;;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책을 안 읽었던 시기가 대학교 1학년 때인
2007년인거 같네요. 수험생 시절이었던 고등학생 때에는
입시 성적 관리 때문에 책을 많이 읽지 못하게 되고 반대로 대학교 때는
그 때보다 더 책을 읽을 수 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저는 반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어떻게든 읽고 싶은 책은 읽곤 했었는데
대학생이 되서부터는 책을 멀리하고 있었더군요. 그래서 지금도 그 때
시절이 가장 아쉬운 해로 남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년 복학 때는
일주일에 5권은 못 읽더라도 한 달에 5권 정도를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2-05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 오래 전 푸시킨의 대표작이라는 명성만 듣고 구입해 읽었던 책입니다.드라마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요.저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예카테리나의 생애를 알고 싶었어요.그때 그녀의 전기가 번역된 게 있었거든요.하지만 어물어물하다가 못사고 말았습니다.지금도 서점엔 피요트르 대제 전기 번역본은 있어도 예카테리나 여제 전기는 없더군요.

cyrus 2010-12-06 10:58   좋아요 0 | URL
처음에 <대위의 딸>이 그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을 알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그저 지루한 역사소설인줄 알았는데, 막상 읽고나니
러시아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드라마를 보는것같은
극적인 전개가 재미있었습니다. 자이트님이 소개하신 예카테리나의 생애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뿌쉬낀의 소설 속에서는 온화한
인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남편인 왕을 암살하여 왕위를 차지할 정도로
간사하고 궁정 생활이 방탕했다고 하던데, 소설과 같이 읽어보면
흥미로울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2-06 16:51   좋아요 0 | URL
러시아사를 읽어보면 예카테리나에 대해서 유능하기 하지만 전형적인 전제군주였다고 하는 평가가 일반적이더군요.

모든 독자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은 아니니 그런 건 몰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게 소설을 쓰는 것도 작가의 역량이라고 봅니다.그런 점에선 이 소설은 잘 쓴 것이지요.

쉽싸리 2010-12-08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죠. 삼중당문고인가? 하여간 문고판,,, 내용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러시아 소설들 참 좋아요. 뭐랄까, 저한텐 코끝이 찡해지는 게 있어요. 언젠가 다시 쭉 읽어봐야하는데, 그때의 감흥과는 다르겠지만,,,

cyrus 2010-12-08 14:58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러시아 소설들이 내용이 재미있고 작품성이 훌륭한거 같습니다.
뿌쉬낀 이외에도 도스또예프스끼나 고골도 재미있고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1001-174] 지킬박사와 하이드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 이상 <거울> 중에서 - 

 

 

  사회적 인물들의 주먹질과 매질        

최근에 모 대기업 회장의 친척관계인 재벌 2세가 노동자를 구타하고 이에 대한 매 값을 지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문제적인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자 재벌 2세의 행동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난 후, 또 한 번 부자들에 대한 대중의 냉소적인 시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돈과 권력이 많은 자의 비인간적인 횡포에 국민들 머리에 뿔이 나고 만 것이다.  자신보다 연세가 많으며 자신의 생존권을 되찾기위해서 홀로 1인 시위를 벌인 노동자에게 혹독한 매질을 가한 것은 문제가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그 자신이 행한 폭행을 금액으로 계산 처리하여 지불한다는 점은 자신의 성숙되지 않은 인격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만 셈이다.

이번 재벌 2세의 폭행 사건 이전에도 사회 내에서 공공의 인물로 알려진 유명인사들의 폭행 사건이 많이 있었다. 최근에 막을 내린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개최되기 전 쯤에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수가 고급 주점에서 여종업원을 성추행하고 경비원들을 폭행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그 선수의 아버지가 유명 대기업의 회장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뉴스에서도 소개되었지만 이번 폭행 사건만큼 크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그 뉴스가 전파되고나고 한 달 뒤에 문제의 국가대표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그 선수의 문제적인 행동은 잠잠해졌다.  재벌 2세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바른 자세와 호감적인 이미지를 보여줘야할 연예인들도 자신들이 일으킨 폭행으로 인해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남자 탤런트가 자신의 후배 여성 연기자에게 폭행을 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출연하던 드라마에서 중도 하차를 하고 말았다.  

    

 

  지킬 박사의 고백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등장하는 주인공 지킬 박사는 인간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전형적이면서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현대인의 자아분열 그리고 이중인격자를 우리는 ' 지킬 & 하이드' 라고 비유하면서 부르기도 한다. 이 소설이 발표된지 124년이나 되었는데도 지킬 박사의 이야기는 꾸준히 읽혀지고 있으며 영화, 뮤지컬로 각색되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모든 인류들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중성을 포착한 작가의 관찰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백년이 지난 소설들은 고리타분하며 진부적인 느낌이 드러나는 고전으로 취급받기 쉽상인데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원작으로 읽어도 줄거리를 무척 흥미진진하다.  

특히, 에드워드 하이드라는 악마의 본성을 지닌 또 하나의 자아에 굴복당하고 마는 지킬 박사의 내면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결국, 자신 고유의 자아인 헨리 지킬로 돌아오지 못한 채 박사는 자살하고 마는데 그가 자살하기 전에 남긴 유서에는 그동안 말 못했던 자아 분열의 고통과 그런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들을 고백하고 있다.  

 

나는 18xx년에 태어났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고 그밖에도 훌륭한 신체를 물려받았으며 천성적으로 부지런했다. 학식 있고 훌륭한 동료들로부터 존경받는 일을 기뻐했다. 따라서 당연히 명예롭고 빛나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의 가장 큰 단점은 쾌락을 탐하는 성향이었다. 쾌락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만, 고고한 자긍심으로 대중들 앞에서 철저하게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오만한 욕망을 가진 내게 쾌락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욕망을 감추었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킬 박사와 하이드> p 105 -  

 

지킬 박사는 우리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감성의 만족,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즐거운 감정을 좋아하는 일반인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으로서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의 감정을 스스로 억제하고 감추려고 하였다. 지킬 박사는 남에게 과시하는 욕망의 감정은 자신의 부조리함 혹은 추악한 본성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약점을 타인에게 노출시키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였다. 결국에는 지킬 박사는 자신의 이중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쾌락을 향한 탐욕은 지킬 박사를 선과 악의 본성으로 갈라진 이중성이 만들어낸 은밀하고도 위험스러운 유혹의 늪으로 향하게 하였다. 

저주받은 약물을 복용하고난 뒤, 악의 본성으로만 가득찬 하이드로 변하면서 그동안 마음 속에 감추어두었던 폭력성을 드러낸다. 지킬 박사는 하이드가 되어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행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기도 하지만 그는 약물 복용을 멈추지 않는다. 타인들에게 드러나기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감추웠던 지킬 박사의 욕망과 쾌락은 하이드라는 제2의 자아의 발현을 통해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지킬 박사는 하이드를 통해서 자신의 쾌락을 탐하였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이중적인 본성을 인정한 지킬 박사의 고백은 나쁜 감정들을 남에게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살아야하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평상시에 생활할 때는 자신의 이중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킬 박사처럼 '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 ' 이 되기 위해서 추악한 감정과 본능을 숨기려고 한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연예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 사람' 이다.  대중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서 항상 올바른 자세와 밝은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카메라 앞에서는 힘든 내색이나 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문단속한다. 하지만 억지로 감추어두었던 추악한 본성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지킬 박사의 친한 동료인 어터슨이 말한 것처럼 숨기려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꼭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악한 본성을 ' 찾아내는 사람 ' 은 자신이 아닌,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한 폭력을 저지른 남자 탤런트는 사건이 알려지게 된 이후에 한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자살하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하이드의 위험성을 알고 난 뒤 지킬 박사는 경찰들로부터 체포당하기 전에 자살을 하고 만다. 인간은 자신의 추악한 본성을 발현하고나서야 자기 자신의 모순적인 이중성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상의 시 구절처럼 현실적인 자아와 내면적 자아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쾌락과 욕구로 가득한 내면적 자아가 현실적 자아가 내민 악수를 받지 않을 정도로 귀가 먼 '괴물' 하이드로 성장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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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0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장이나 저랑 남자이니까 이런거 물어봐도 뻘줌하지는 않은데

구매리스트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즐겨가는 타인의 서재중에서 구매리스트 공개하는 사람은 1명밖에 없어서요 ㅋ

물론 사생활의 영역이라고 선을 그으면 할수 없지만, 주인장은 어떤 책을 구입하는지 살짝 궁금하네요

cyrus 2010-12-02 12:30   좋아요 0 | URL
서재 구매리스트를 관심 있어하는 분도 있었군요,
사실은 서재 블로그 시작할 때부터 공개로 해놓았는데,,,
구매한 책들 대부분 주로 건강책들이라서,, ^^;;
제가 읽는 것이 아니라 어머님이 건강책들 읽는 거 좋아해서
구입한거랍니다. 지금 바로 공개 설정으로 하겠습니다.

다이조부 2010-12-02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장리스트 잘 보았습니다. 근데 의외의 책이 몇 권 보이네요~ 공병호 책 이라든지 ㅎㅎ

건강책 보면서 무척 효자구나 싶네여. 저희 어머니는 건강이 무척 좋지 않은데 제가 너무

무심한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됩니다.

다이조부 2010-12-02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리스트 를 보면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민음사 200권 전집을 구입했다는 소식에~
와우..... 얼마나 매력적인 가격으로 할인을 했길래 눈 찔끔 감고 그런 도전을 했을까
궁금해지네요 ㅎㅎㅎ

근데 주인장이랑 저랑 생각이 갈리는 지점이 있네요. 저는 죽기전에 시리즈를 훝어만 봤지만
세상에 꼭 읽어야 할 책이라든지 꼭 방문할 여행지 라는게 존재하는지 의문이거든요. ^^
저는 책읽기 보다는 더 흥미진진한 일이 세상에 있지 않을까 믿고 싶어요.
아무튼 주인장 문학애호가 인정 ^^

cyrus 2010-12-02 20:36   좋아요 0 | URL
아.. 공병호 책은 제 동생이 읽고 싶다고 해서 구입한겁니다.^^
저와 동생, 어머니가 제 알라딘 계정으로 읽고 싶은 책을 구입합니다.
그래서 한 때는 플래티넘 등급을 넘볼 수 있을 정도로 이번 해는
책을 많이 구입했는데,, 10월달 들어서는 책 구입 횟수가 줄어들어서
일반 회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민음사 전집은 정말,, 군생활하면서 모았던 월급과
군 입대 전에 알바로 모아둔 목돈을 쪼개서 산 거랍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전집을 산게 그게 처음입니다.
다행히 홈쇼핑에서 팔고 있길래 샀습니다.

사실 저도 꼭 죽기 전까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문학에 관심을 갖자는 취지로 정할 뿐이지
그렇게 크게 얽매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

oren 2010-12-03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여태까지 원작은 사서 읽어볼 생각조차 못했군요. (아마도 어릴 때 '어린이용'으로는 읽어본 것 같기도..) 이 작품은 뮤지컬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 오히려 원작이 덜 읽혀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동영상으로만 봐도 감동적인 '조승우 버전'은 한 번도 못봤고, 다른 배우가 공연했던 작품과 브래드 리틀의 내한 공연때 가봤네요.)

* * * * *

cyrus 2010-12-04 00:0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oren님.

다른 분들 서재에 들리게 되면 oren님의 댓글도 유심히 보게 되던데 서재에
뮤지컬 동영상까지 남겨주셔서 오히려 제가 동영상을 잘 봤다고 oren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네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의 동영상을 댓글로
올려주시다니, 감사합니다.

2010-12-04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4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2-0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 이라는 변수는 상상도 못했나요 ㅋ

아마도 책장은 선물이겠죠? ㅋ

cyrus 2010-12-05 13:44   좋아요 0 | URL
책장은 상품입니다. 그런데 책장 상태와 모양새는 괜찮은데
200권 세트를 다 꽂지 못하더라고요^^:;
할수 없이 열 몇 권은 다른 책장에 꽂아야하는,,-_-;;
그게 좀 아쉬웠더라고요. 200권 모두 한 책장에 꽂혀있으면
폼날텐데 말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12-05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소설 굉장히 좋아합니다.분량도 그리 길지 않고...특히 비밀 실험실이 있는 집을 묘사한 대목이 좋더군요.좀 이상한 취향이라고도 하겠지만요.유명하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책을 하나하나 골라 읽는 Cyrus 님 취향이 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cyrus 2010-12-06 11:04   좋아요 0 | URL
뮤지컬로 각색한 것을 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았었는데
원작을 읽어보니 오히려 뮤지컬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라도 원전의 내용과 살짝 다르기 마련이거든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원작에는 비중 있게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이 없더군요.
지킬 박사라는 캐릭터를 부각시켜주는 작가의 배경 묘사는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해주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런 점이 괴기소설이나
고딕소설 읽기의 매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 계기로
스티븐슨의 소설 말고도 고골이나 모파상이 쓴 괴기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12-06 16:55   좋아요 0 | URL
아하...뮤지컬엔 여자주인공이 있군요.실제로 원작에 비중있는 여자는 안 나오는데 말이죠...

고골의 '코'를 괴기소설로 분류하기도 하더군요.십여년전에는 <모파상 괴기소설선>이라는 책도 나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