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2세 나남 셰익스피어 선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성일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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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왕관은 내어 놓겠지만, 내 슬픔은 언제나 내 것이야. 

내 영광과 내 통치권은 자네가 탈취할 수 있겠으나, 

내 슬픔은 안 되지.   나 언제나 슬픔을 거느리는 제왕이니까. 

-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4막 1장 중에서 리처드의 대사 중에서, pp 139 -

 

   

  리처드 2세, 그는 누구인가?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왕,  리처드 2세 (1367~1400)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국왕들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을 많이 집필하였다. <리처드 2세>는 그가 쓴 사극 중에서 집필 시기상으로는 다섯번째 작품이지만 작품 배경 시기로 구분하면 <리처드 2세>가 가장 앞서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사극 역시 종종 무대에 올려지고 TV 드라마로도 각색되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4대 비극과 희극에 비하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의 사극을 읽기 위해서는 영국의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도 필요하다.   영국 왕조의 직계는 여러 가지 가문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실로 복잡하다.   영국사에서 등장하는 왕가로는 처음에  북유럽에서 건너온 노르만 족의 정복 아래 시작된 노르만 왕조로 시작해서 플랜태저넷 왕가, 랭커스터 왕가, 요크 왕가, 튜더 왕가, 스튜어트 왕가, 하노버 왕가 그리고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재임하고 있는 지금의 원저 왕가로 이어져 있다.   

리처드 2세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왕이다.  자신의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3세(1312~1377)의 뒤를 이어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아직 미성년이었기에 리처드 2세의 숙부인 랭커스터 가의 공작 존 오브 곤트(1340~1399)가 섭정에 나섰다.    존 오브 곤트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실정이 시작하면서부터 나라 안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의 군비 조달을 위해 정부는 전주민에게 인두세를 부과함으로서 농민들의 삶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다.  이는 결국 와트 타일러의 반란이라는 영국 사상 최대의 농민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어린 리처드 2세의 재임 기간 중 최초로 큰 위기를 맞았지만 반란의 주도자의 입장을 타협하는 거짓 약속을 제시하다가 그를 처형시킴으로써 반란세력을 무마시켰다.  

성년이 되면서 리처드 2세는 자신의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자신의 왕조를 세우겠다는 개인적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존 오브 곤트의 동생인 토머스 우드스톡(1355~1397)을 비롯한 왕권에 도전하는 입장을 보인 의회파와 청원파 소속 귀족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청원파였던 존 오브 곤트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헨리 볼링브로크(1366~1413)마저 추방한다. 얼마 후 존 오브 곤트가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헨리 볼링브로크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가의 모든 재산과 영지를 몰수하였다.   아직 정국이 불안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적을 제거했다고 안심한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 침략을 위해서 잠시 영국 조정을 비워두었다.   이는 리처드 2세가 몰락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   반란의 기회만을 엿보던 의회파에게 틈을 준 것이나 다름 없었고 헨리 볼링브로크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영국으로 침입하여 왕좌 찬탈에 성공한다.  

뒤늦게서야 자신의 위기를 알게 된 리처드 2세는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헨리에게 굴복하게 되며 정식적으로 폐위당하고 만다.    그는 체포되어 폼프레트 감옥에 유폐되어 있다가 감금된 지 4개월 후에 굶어 사망하게 된다.  

리처드 2세의 죽음은  헨리 볼링브로크 아니 헨리 4세의 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랭커스터 왕가가 영국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무능한 군주' 리처드 2세 vs '마키아벨리즘 군주' 헨리 볼링브로크  

다음과 같은 리처드 2세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인 사실만 이해할 수 있으면 <리처드 2세>를 수월하게 읽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리처드 2세>의 내용이 꼭 역사적 사실에만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사극의 시대적 배경은 리처드 2세가 폐위당하기 전의 시기를 그리고 있다.  오늘날에도 리처드 2세의 죽음에 대해서 다양한 설이 존재하고 있지만 셰익스피어는 작품의 비극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감옥 안에서 헨리에게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는 걸로 그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당연히 리처드 2세가 주인공이지만 이 사극을 읽거나 혹은 연극을 보게 된다면 리처드 2세와 헨리 볼링브로크, 뚜렷한 대비의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을 비교해서 보는 것이 좋다. 

역사 속에서의 리처드 2세는 전제군주를 꾀한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극 속에서는 국고를 탕진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민중에게 인기가 없는 군주로 그러져 있다.    2막 1장에서는 리처드 2세를 겨냥한 신하들의 뒷담화가 이루어져 있다.

 

무거운 과세로 평민들의 재산을 약탈하였고, 

그네들의 인심을 잃었소.  귀족들에게 해묵은 

분쟁에 대해 벌과금을 부과했고, 인심을 잃었소. 

- 같은 책, 2막 1장 중에서 로스의 대사, pp 67 -

 

3막 2장에서의 리처드 2세는 우리가 생각했던 강인한 군주의 모습과는 상반된다. 헨리가 반란군을 이끌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 다가오게 될 자신의 최후에 대한 불안감에 쉽게 휩싸이는 감정을 표출하게 된다.  

  

어디가 무슨 상관이냐?  위로될 말은 하나도 없구나. 

무덤과 지렁이와 묘비명 이야기나 하자꾸나.  

(중략) 

내가 땅에게 남겨줄 게 또 무엇 있단 말인가? 

짐의 국토, 짐의 생명, 그 모두가 다 볼링브로크의 것. 

그리고 짐이 짐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건 죽음뿐 

(중략) 

제발, 내 이르노니, 우리 땅바닥에 주저앉아  

군왕들의 죽음에 얽힌 슬픈 이야기나 하자꾸나.  

 

- 3막 2장 중 리처드 2세의 대사, pp 104~105 -

  

결국 그는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한 채 쉽게 헨리에게 왕관을 넘겨주게 된다. 폐위당한 이후 리처드 2세의 심리는 최악의 비극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미쳐버리고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전형적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착란의 증세까지 보이게 된다.  (5막 5장) 

반대로 헨리 볼링브로크의 모습은 애초부터 전형적인 군주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무능한 리처드 2세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작품 해설에서는 리처드 2세의 모습은 마키아벨리가 강조하던 전형적인 군주형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하고 있다. (작품해설, pp 197) 

오히려 헨리 볼링브로크야말로 마키아벨리즘적 군주의 모습에 가깝다.   

그러나 헨리가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왕의 약점을 잡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간사한 인물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마키아벨리즘을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지리 않는 반도덕적, 비열한 군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는 왜곡된 내용이다.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운(fortuna)와 역량(virtu)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운' 이란 군주가 된다거나 또는 군주로서의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필요한 타인의 호의와 정세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행운을 의미하며 '역량' 은 쉽게 말하면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이끌줄 아는 '능력' , '용기' , '결단력' 등을 의미한다.   

리처드 2세의 무던한 현실적 대응 때문에 폐위라는 운명을 스스로 좌초한 것도 있지만 헨리 볼링브로크가 반란군을 이끌어 왕권을 찬탈하는 과정을 보게 되면 운과 역량 덕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처드 2세에 대한 기대감과 신뢰를 포기한 의회파들의 호의에 힘입어 헨리는 반란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그는 처음부터 리처드 2세의 권력을 빼앗기 위한 목적만으로 반란을 행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존 오브 곤트의 죽음 이후로 랭커스터 가의 재산과 땅을 강제적으로 몰수당한 것을 리처드 2세로부터 되찾기 위한 것이다.   

 

제 선친 소유의 기물은 모두 압류되어 팔려 버렸고, 

그뿐 아니라 모두가 다 엉뚱한 데로 가 버렸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신민의 한 사람이고, 

제 권리를 주장합니다.  법적 도움을 받을 길이 막혔고, 

따라서 저는 적자로서의 재산 상속에 대한  

저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입니다.  

 

- 2막 3장 중 헨리 볼링브로크의 대사 중에서, pp 89 -

 

억울하게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반란을 주도한 헨리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에 등장하는 루셔스 앤드로니커스를 연상케 한다.  뚜렷한 명분과 목적 의식이 있었기에 헨리는 추방당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결단력을 유지했으며 그 덕분에 민심을 잃어버린 왕권을 타파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길 수 있었다.  

  

  

  이 사람을 보라, 권력을 누려본 자의 모습을...  

   

 

조르주 루오 <늙은 왕>  1937년 

 

셰익스피어가 리처드 2세를 무능한 군주로 묘사하기 위한 의도로 집필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리처드 2세>를 무능한 군주가 몰락하는 과정의 이야기로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헨리 볼링브로크를 통해서 군주로서 갖춰야할 덕목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및 비극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작품 속 권력자들의 모습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거나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인해서 내적 번민에 빠져 자괴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 리처드 2세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러운 조부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야했던 리처드 2세는 자신의 머리 위에 놓여있는 왕관과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신하들을 보면서 평생 권력을 누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금소총 권력자들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번에 잡은 권력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하는 법이다.  거대한 왕국을 자랑하던 왕이 병이 들어 죽으면 왕국은 분열하게 되고 권력 집착에 기인한 자만심 때문에 외부로부터 왕권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리처드 2세는 와트 타일러의 반란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지만 다행히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그토록 믿어왔던 내부 조직에서 비롯된 정치적 위기만큼은 그가 군주로서 극복하기에는 어려웠다.  젊고 생경한 리처드 2세 입장에서는 말이다.  

이미 상황을 역전하기에 어렵다고 판단한 리처드 2세는 자신의 인생이나 마찬가지인 권력의 무상함 그리고 권력을 갖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권력자 특유의 불안감에 시달리는데 제4막 1장에서의 거울 앞에서 한탄하는 리처드 2세의 대사와 모습은 권력의 무상함과 권력자라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회한을 더욱 잘 표현해주고 있다.   

 

아, 거울도 아첨을 하는구나. 

나 한창 좋은 세월이었을 때 날 따르던 무리처럼, 

거울도 날 속이는구나.  이 얼굴이,  날이면 날마다 

왕실 지붕 아래에서 일만 명을 거느리던 바로 그 얼굴인가?   

(중략) 

부서지기 쉬운 영광 이 얼굴에 빛나는구나. 

이 얼굴도 영광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 -  [거울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저것 보아,  일백 개의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걸.  

말씀 없으신 임금,  잘 새겨 두시오,  이 장난의 의미를  

내 슬픔이 내 얼굴을 얼마나 빨리 깨드렸는지.  

 

- 4막 1장 리처드의 대사 중에서, pp 143~144 -

  

한때 '왕관을 써본' 리처드 2세는 이제 막 '왕관을 쓰기 시작한' 헨리를 향하면서 거울을 깨뜨렸다.    거울에 비춰진 리처드 2세는 화려한 군주의 모습이지만  그것은 외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권력을 상실한 리처드 2세는 거울을 통해서 그동안 권력에 기대어 자만했던 자신의 어리석었던 모습, 즉 내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힘들게 공들여 얻은 권력은 너무나 쉽게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뒤늦게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아이러니한 권력의 존재이다.  경험의 진리를 새로운 권력자인 헨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헨리는 거울을 깨뜨린 리처드 2세의 행동을 본인의 허상을 깨드린 것에 불과하다고 봤다. (4막 1장)      하지만 이미 권력의 달콤함을 누려본 자의 진리는 틀리지 않았다.  헨리 역시 수차례의 전쟁과 반란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왕권을 이을 방탕한 아들(훗날 헨리 5세가 됨)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였다.   이게 다 권력에 의해 생길 수 밖에 없는 권력자가 겪어야 할 인과적인 경험들이다.  

자리가 지도자를 만든다. 하지만 그도 결국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에 몸을 떨고, 공허해하고 좌절하며 번민한다.  <리처드 2세>에는 평범한 인간 혹은 권력과 명예를 누리게 될 권력자의 고뇌와 자질 그리고 삶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P.S>  

1) 이번에 나남출판에서 셰익스피어 선집이 출간된다고 한다.  선집 1차분 번역으로 <리처드 2세>와 <줄리어스 씨저>가 발간되었다.  추후 언제 출간될지 모르겠지만 근간 작품으로는 널리 읽혀지고 있는 4대 비극<리처드 3세><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베니스의 상인><폭풍> 총 10권 출간 예정이다.  

2) <리처드 2세> 말미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국 왕가(랭커스터, 요크, 튜더 가)의 가계도가 실려져 있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읽기 전에 참고하면 좋은 유용한 자료다. 

3) 나남출판의 셰익스피어 선집은 이성일 연세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아무래도 근간 10권 역시 이성일 교수가 번역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성일 교수는 자신의 번역을 실제 연극 무대에 염두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원작의 시행 전개를 있는 그대로 번역하였으며 원문 특유의 리듬을 살리는데 배려했다. (참고: 옮긴이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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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8-1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잘 몰라서 페이퍼를 읽고도 가계도를 그리기 힘들지만 어딜가나 권력의 마력은 거기서 거기인가 봐요. 셰익스피어는 널리 알려진 몇몇 빼곤 대부분 희곡인가요? 너무 많아서 제목과 내용만 보고도 한 시간이 가더라구요.ㅎㅎ

나남출판에서 나오는 건 선집인가 봐요. 저는 옮김까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나온다니 어쩐지 반갑네요.^^

cyrus 2011-08-17 22:00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도 비극과 희극이 어떤건지 구분이 안 가요. ^^;;
사실 영국의 왕들의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 생각보다 많아요.
예전에 국내에 방영되었던 영드 덕분에 알려진 헨리 8세 이외에는
정말 남의 나라 국왕 이야기들이에요.

구체적인 발간 계획은 모르겠지만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작품들 위주로 발간되었으면 좋겠어요 ^^

마녀고양이 2011-08-17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항상 '거울'이라는 대상에 필이 꽂힌단 말이죠.

시루스님, 아이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벙긋 웃기 시작하는 때가
자아 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는 때라는거 아세요? 침팬지는 거울 놀이를 좋아하지만
사자 새끼는 거울을 가져다주면 또다른 녀석인줄 알고 덤비게 되죠.

리처드 2세의 거울에 대한 독백을 들으니 다시 '거울'에 대해
심상을 모아놓은 책이 없을까 궁금해저버려요. 저, 진짜 읽고 싶거든요.

cyrus 2011-08-17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문학 작품 속에 거울이 언급되는 내용이 참 인상깊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이상의 거울이랑,, 제목이 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에서도 잠깐 거울이 등장한 것도 있었는데,,

저도 급궁금하네요,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거울에 대해서요.
기회가 된다면 페이퍼로 작성해보고 싶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1-08-1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남에서 나오는 것이 10권이라고 하면 전집 같습니다.유명 출판사에서 기획하는데 굳이 선집으로 끝낼 것 같진 않네요.

cyrus 2011-08-18 23:58   좋아요 0 | URL
일단 근간 리스트에는 총 10권의 작품이 있던데,, 이왕이면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들이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콜로서스 2011-08-2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책 읽어보고 싶어요.
 
사물들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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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001-599] 사물들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 조르주 페렉 <사물들> 펭귄클래식코리아,  pp 63 -

 

   

  풍요 속의 욕망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자기가 부자라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그 까닭을 이렇게 풀어준다. ' 인간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남들보다 잘살기를 바랄 뿐이다.'  

욕심은 끝없이 자라는 나무와 같다. 사람은 배불러도 만족을 모른다. 살 만해지면, 살림살이가 기죽지 않을 정도는 되었으면 하는 욕망이 생긴다. 그러나 자신과 비교하려는 ‘이웃’의 수준도 점점 올라간다. 처음에는 옆집, 옆 동네에 눈길을 주다가, 눈높이는 마침내 텔레비전에 나오는 재벌들 수준까지 나아가 버린다. 그들의 재산 수준을 비교하면서 본인에 대해서 자탄을 하게 된다.   

    

 

  조르주 페렉의 문학적 유희  

조르주 페렉의 처녀작 <사물들>을 읽기 시작해서 끝까지 다 읽고나게 되면 저자가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소설이다.  

일단 첫 장부터 도입부가 독특하다.  소설 외부에 존재하는 화자는 관찰하듯이 방 안에 높인 사물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설명하는 묘사를 따라서 다음 장으로 읽어나가도 사물에 대한 관찰 묘사는 시종일관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인물 간의 대화가 별로 없다.  이 소설 속에서 제롬가 실비라는 젊은 남녀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사건 전개와 괸련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인물 간의 대화도 많지가 않다.   제롬과 실비 역시 화자에게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과 동등한 '관찰' 대상일 뿐이다.  

작품 해설 내용을 제외하면 139쪽이라는 짧은 분량의 소설이 조르주 페렉을 처음 접해 본 독자에게는 지루할 수 있겠다.  하지만 조르주 페렉이라고 하면 발표되는 소설마다 일반적인 소설 창작 형식의 틀을 가차없이 파괴하는 실험적 글쓰기를 주장한 프랑스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규칙 없이 나열되어 있어 보이지만 화자, 즉 페렉이 기록하고 있는 사물들에 대한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묘사들이 결국에는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일상 생활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조르주 페렉은 자신의 창작에 대해서 ' 빠져나갈 작정인 미로를 만들어야만 하는 쥐들 ' 이라고 스스로 정의하였다.  결국 인물 간의 대화를 최대한 배제한 채 소설 외부의 화자인 페렉이 유지하고 있는 관찰의 기록은 그가 독자들을 위해서 고안해낸 미로, 즉 문학적 유희인 것이다.  독자는 페렉의 미로에 들어가게 되면서 문학적 유희를 만들어낸 쥐, 즉 작가가 지나간 흔적을 좇아가게 된다.    미노스의 미궁에 갇혀버린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통해서 미로를 탈출할 수 있었듯이 소설 속 화자로서 개입한 작가의 관찰은 독자들의 시선을 고정시켜주도록 만들고 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물들>을 완독한다고해서 독자는 페렉이 만들어낸 사물들의 미로에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미로를 탈출하고 난 뒤 독자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탈출구가 없는 사회적 미로에 갇혀버린 채 절망하고 안주하는 제롬과 실비 그리고 실제로 체엄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제롬과 실비는 끝없는 소비의 욕망을 갈구하게 되지만 끝내 좌절하는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지오가 모종의 관계가 있다.  소비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혀주고, 우리에게 자아 정체성을 만들어준다. 우리의 욕망과 기호가 소비행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행태가 우리의 욕망과 기호를 결정한다.    

 

그들은 부자가 되고 싶었다. 자신들이 부자일 줄 안다고 믿었다.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바라보고, 웃을 줄 알았을 것이다.   (중략)     

반대로, 상황은 쉽지 않았다. 가난하지만 않을 뿐 부(富)를 갈망하는 가진 것 없는 젊은 커플에게 이보다 더 곤란한 상황은 없을 듯했다.  그들은 수준에 맞는 정도만 갖고 있었다.  (중략)    

그들의 경제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현실이고 달리 기대할 게 없었다.  하지만 바로 곁 주변에, 늘 걸어 다니는 거리를 따라 죽 늘어선 골동품 가게, 식료품점, 지물포에는 매력적이지만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중략)   

이대로 영원히 취기 어린 상태로 그 유혹에 자신들을 내맡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빠져들고는 했다.  하지만 욕망의 끝은 냉혹하게 꽉 막혀 있다.  커져만 가는 불가능한 꿈은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 같은 책,  pp 22~23 -  

  

소비주의에 낚인 사람들은 소비 나르시시즘의 나락에 떨어져 오로지 자기만이 예외적이고 특권적으로 중요하고, 자기만의 권력, 총명함, 성적인 매혹을 지녔다는 망상 속에서 산다.  이런 망상 속에서는 자신이 겪게 된 실패나 실망은 언제나 내가 아닌 외부의 잘못이다. 소비가 주는 기쁨의 유효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결국 삶의 감각이 마비된다. 소박한 즐거움에는 반응하지 못하게 되어 더 강한 자극을 찾아 구매욕에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사물들' 로 가득한 자본주의 사회에 우리는 행복은 찾을 수 있을까?  

오늘날 물질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풍요로움이 어떤 정형화된 행복을 가져다주었지요.   (중략)   실비와 제롬이 행복하고자 하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벗어날 수 없는 사슬에 걸려든 겁니다.  행복은 계속해서 쌓아 올려야 할 무엇이 되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중간에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 1965년 [레 레트르 프랑세즈]와의 인터뷰, 같은 책 pp 142 -


 

20:80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일명 파레토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전체 결과의 80%는 20%의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내용의 법칙이다.  전체 부의 80%는 20%의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게 그 사례로 흔히 제시된다. 결국 20%만이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들이 끝내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행복' 이라는 단어는 헛된 희망이다.  결국에는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만족감에 불과한 '정형화된 행복' 일 뿐이다.

눈을 떠서 주변을 돌아보면,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게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영화, TV드라마, 광고 등을 이용하여 그 신화적 욕망을 이미지에 담아냄으로써 소유하고 소비하고픈 욕망을 일깨워준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화려한 성공신화를 홍보함으로써 ‘나’도 부르주아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불태우게 한다.   하지만 소비의 사회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 준다. 그리고 실패한 나머지 모두에게는 ‘너희’가 능력이 안 되거나, 열정을 바치지 않았거나, 아니면 운이 없어서라고 책임을 전가한다.     

현대 문명은 늘 ‘위기’ 상태이다. 욕망을 키워야만 버틸 수 있는 문화가 건강할 리 없다. 다스리지 못한 욕망은 재앙을 낳는다.  욕망이 만들어낸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소설 속 제롬과 실비처럼 튀니지로 도피하면 된다.  하지만 그들이 찾아간 튀니지 역시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복으로 가득한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결국에는 자본주의 문명 속 우리들도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유롭게 비상하지 못한 채 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미로 속에서 탈출하여 행복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  조르주 페렉은 <사물들>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 속의 소비 행태와 행복과의 관계를 적확하게 묘사할 뿐 아쉽게도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실타래를 독자들에게 건내주지 못했다.  

경제를 걱정하기에 앞서 한없이 커져만 가는 우리의 욕심부터 경계할 일이다.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그것이야말로 지금 사치와 욕망으로 채워진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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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8-09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멋지게 페이퍼나 리뷰 뚝딱 써주시니 저야말로 고마울 따름! 그렇잖아도 민음사,펭귄,열린책들 다 검색중인데 이거 신간이네요. 발빠르신 시루스님.ㅎㅎ 주제가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의 병폐를 되돌아보게 하네요. 욕심과 사치 때문에 정말 지켜야 할 행복을 많이 놓치고 사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공감!!!^^

cyrus 2011-08-10 21:18   좋아요 0 | URL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작품해설에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아니래요, 오히려 페렉은 자신의 소설이 그런 쪽으로 해석되는 것에 대해
반발했다고 하네요,, ^^;; 저는 해설을 읽기 전에 소설을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해설을 읽으면서 약간 김이 샜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8-1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강남 좌파'가 문제가 아니고
'강남 좌파'와 비교하는 '나'라는 존재의 생각이 잘못된거군요... 맞네요 맞아.

cyrus 2011-08-10 21:19   좋아요 0 | URL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강준만의 <강남 좌파>를 말하는거죠?
마고님 서재에 쓴 리뷰 안 읽어봤는데 읽어봐야겠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작가 본인은 자신의 소설이 좌파 성향으로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하네요 ^^;;
 
오셀로 펭귄클래식 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석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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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유가 있어서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질투심이 있어서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는 저절로 잉태되고 저절로 태어나는 괴물이거든요.  

 

- 셰익스피어 <오셀로> 제3막 4장, 에밀리아의 대사 중에서, 펭귄클래식코리아, pp 208 -

 

 

 

  질투심 많은 사내의 슬픈 사연 

 

   
 

" 밥을 빌어서 죽을 쓸지라도 / 제발 덕분에 뱃놈 노릇은 하지 마라 / 에 - 야, 어그여지야 - " 

 
   

 

김동인의 단편소설 <배따라기>에 나오는 노랫말이다.  '배따라기' 는 평안도 민요의 하나이며 뱃사람들의 고달프고 덧없는 생활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아내를 사랑했지만 충동적인 감정과 본능 때문에 아내과 자신의 동생을 잃게 된 소석 속 무명의 인물이 20년 동안이나 정처 없이 헤매면서 부르는 것이 바로 배따라기다.    

독자는 김동인의 소설 속에서 흘러나오는 배따라기의 구슬픈 어조를 들을 수 없지만 배따라기를 부르는 주인공의 슬픈 사연은 들을 수 있다.

배따라기를 부르는 그는 원래 영유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 자신의 아내랑 아우와 함께 살고 있었다.  부부의 금실도 좋았고 형수와 시동생의 사이도 원만할 정도로 그는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질투심이라는 마음 속에 생긴 불씨 하나가 행복한 시간을 한순간에 파괴해버렸다.  그는 평소에 친절하고 성품이 쾌활한 아내가 미남인 동생에게 친절한 것을 보고 이를 질투하게 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아내와 동생 사이를 의심하게 되어 자주 부부싸움을 일으켰다.  

어느 날 장에 가서 아내에게 줄 거울을 사 가지고 돌아온 그는 아내와 동생이 방 안에 든 쥐를 잡느라고 옷매무새를 흐트린 것을 보고는 결정적으로 오해하여 아내를 내쫓고 만다. 며칠 뒤 아내는 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동생은 형의 곁을 떠나버린다.  그후 형은 동생의 종적을 찾기 위해 배따라기를 부르면서 기나긴 유랑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질투심이 만들어낸 한 순간의 오해 때문에 평생동안 비극적인 운명을 짊어져야 했다.  

 

 

  질투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

질투심이 많아 비극을 초래한 이야기는 비단 김동인의 소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문학사에서 유명한 질투의 화신에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가 있다.

500여 년이 지났지만 <오셀로>가 여전히 널리 읽히는 것은 질투심이 단지 그만의 옹졸한 성격이 자초한 불행하면서도 극적인 결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질투심이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고 어느 누구도 이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배우자의 정조를 의심하는 '부정망상(不貞妄想)' 을 일컫는 '오셀로 증후군' 은 질투의 화신인 오셀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질투는 분노와 연결이 되고, 질투는 살인적인 속성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 된다.  질투 본능은 작품 주인공 오셀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아고 한 사람이 오셀로를 파멸의 궁지로 몰아 넣을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오셀로를 향한 질투가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아고는 흑인인 주제에 아름다운 귀족의 딸인 데스데모나를 아내로 맞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명장으로 칭송받는 오셀로를 인정할 수 없다.  질투란 그런 감정이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내 논리 안에서 인정할 수 없는 것, 바로 그 불편한 감정 말이다. 

이아고는 사람들이 칭송하는 오셀로의 인품을 믿지 않는다. 그는 이 칭송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의 화약고, 질투를 자극한다. 아무리 위대한 인격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누구나에게 질투는 있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이아고의 추측이 옳았다. 질투는 의심과 짝을 이룬다. 의심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할 때 더 치명적이다. 의심이란 함께 있지 않았던 시간이 만들어낸 궁금증의 그늘이다. 언제나 함께 할 수는 없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허감의 거리가 의심과 질투를 부추기게 된다.

  

   

  대화가 필요해  

 

 

데오도르 샤세리오 <데스데모나의 잠>  19세기경 

 

   
 

자신에게 곧 닥쳐 올 죽음의 운명을 데스데모나는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표졍이 애처롭게 느껴지면서도  

'순결' 을 상징하는 흰 색 드레스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창녀' 로 오해받아야하는 그녀의 서글픈 처지를 더욱 강조되고 있다

 
   

  

데스데모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목이 졸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오셀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반면 출신 성분과 피부색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오셀로는 이아고의 간계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 아내를 의심하고 만다.  결국 일방통행적 사랑은 살인이라는 충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고(事故)를 일으키고 말았다. 

좀 더 데스데모나를 존중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러한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셀로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일방적이었고 비록 이아고의 계락이었지만 이미 아내의 부정에 대한 확고한 심증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였기에 아내의 변론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그 어떠한 변명도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방적인 사랑 방법으로 인한 문제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충분한 대화를 가진다면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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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8-0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엔 데이트도 맘놓고 못하는 세상이 된 것 같아요.
데이트 폭력이 그렇게도 많고 맘대로 헤어지지도 못하고.
누구를 만나기 전에 내가 이 사람을 만나도 될만큼 성숙한가?
그런 것도 좀 생각해 봐야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셀로는 너무 우아한데가 있어요. 그죠?ㅠ

cyrus 2011-08-03 17:16   좋아요 0 | URL
1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가정폭력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는데
데이트 폭력 피해자로 여성이 많은 이유가 여전히 여성의 마음
속에는 남자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얻어맞으면서도 쉽게 헤어지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오셀로는 아무래도 장르가 비극이다보니 잔인한 인간의 파멸을
참 우아하게 표현되고 있는거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연극으로도
나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겠죠. ^^

마녀고양이 2011-08-0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완전 말되는걸요, 역시 고전이예요.
'원래 질투심이 있어서 질투하는 거예요.' 라는 말. 저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분노하고 짜증내고 질투한다면, 그것은 상대의 영향이 절반, 제 속에 넘치는 무엇이 절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어떤 때는 제 속에 넘치는 무엇이 절반도 넘을지 모르겠어요.

사랑이라,,, 저는 가끔 사랑은 자기애의 투사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사랑이란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나 봐요. 애정이란 단어가 더 좋아요.

cyrus 2011-08-03 17:17   좋아요 0 | URL
저는 저 대사 몇 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어요 ^^;;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게 되면 정말 삶의 진리들이
담겨져 있거든요.

아이리시스 2011-08-07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셀로에 저런 멋진 대사가 나오는군요. 읽은 것 같은데 안 읽은 듯한 이 느낌은 뭐지?ㅎㅎ 질투심은 적이예요. 나를 발전시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망가뜨리는. 그 질투심으로 차라리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게 나아요. 힘든 얘기지만요.

cyrus 2011-08-07 00:52   좋아요 0 | URL
<오셀로>는 아직 안 읽어봤는데 <햄릿>을 민음사랑 펭귄클래식 판본
다 같이 읽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조금은 번역이 다른 부분이 있었어요.
나중에 민음사판 <오셀로>로 읽어보려고 하는데,, 제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펭귄 번역이 독서하는데 나았어요. 주석도 많았고요.

아이리시스 2011-08-07 01:18   좋아요 0 | URL
저는 번역까지는 안 따지지만 고전은 다른가 보더라구요. 꼭 참고할게요.^^ 오셀로랑 햄릿 끌려요. 셰익스피어 읽는 시루스님도 넘 멋있구요.^^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 지만지고전천줄 32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태경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엔 이 때 아닌 비극의 음모가 모두 적혀 있어요. 

만면에 웃음을 띤 인간의 얼굴이 살인의 악행을  

감춰두고 있다니 저는 경악스러울 뿐입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제2막 3장 중에서, 지만지 pp 94 -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잔인한 작품     

 

14번의 살인. 성폭행과 생매장. 신체 절단과 인육 먹기. 

잔혹하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이런 장면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온다고 한다면 믿어지겠는가?   

1590년대 초반에 쓴 걸로 추정되는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는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의 하나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무척 거칠고 잔인한 장면이 많다는 점 그리고 조지 필이라는 작가와 공동으로 집필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로 인해 <타이터스>의 작품성은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타이터스>는 ‘고매한’ 셰익스피어가 썼다고 보기엔 너무 심한 잔혹한 묘사가 많다보니 T. S. 엘리엇'지금까지 나온 희곡 중 최악' 이라고 악평을 하였으며 '복수 3부작' 으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한 복수극' 이라고 평가했다.   

도대체 내용이 얼마나 잔인하길래 복수를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든 박 감독마저도 혀를 내두르는 것일까?  

  

 

  핏빛 복수가 만연한 로마

<타이터스>는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작품 제목은 작품 속 주인공의 이름이다.  

고대 로마는 제국주의 국가처럼 해외 정복을 해온 나라이다. 타이터스 앤트로니커스 장군이 국력신장을 위해 몇 십 년 동안 영토 확장을 하고 개선을 하는 데서 연극은 시작된다.  그 사이에 로마의 두 왕자 새터나이너스와 그의 동생 배셔너스가 서로 왕권 다툼을 하게 되는데 한 명은 자기가 장자니까 황제 계승권을 가져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한쪽은 자유로운 국민의 선택에 의해서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에는 로마의 영웅 타이터스가 왕권 대립에 중재를 하게 됨으로써 새터나이더스와 로마의 새로운 황제에 오르게 된다.  새터나이더스는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타이터스의 공을 기리기 위해서 그의 딸 러비니아를 자신의 아내로 삼지만 왕권 타툼에 밀린 동생 배셔니스는 자신이야말로 예전부터 러비니아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녀를 탈취하고 만다.  

러비니아를 둘러썬 두 왕자의 갈등으로 인해 혼전의 양상이 빚어지게 되었지만 황제 새터나이너스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한때 적국이었으나 포로로 잡혀온 고트 족의 여왕 태모라와 결혼하게 된다.   포로이면서 적국의 여왕이 로마 황제와 결혼하게 되는 갑작스런 전개 장면은 수긍이 안 가는 장면이지만 이 때부터 본격적인 복수극 무대의 막이 오르게 된다.

태모라의 마음 속에는 타이터스로 인해 잔혹하게 희생을 당한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분노와 이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로마에서는 전쟁에 승리하게 되면 그들이 추앙하는 신을 기리거나 전쟁에서 희생된 동료의 원혼을 추모하는 뜻에서 적국의 포로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다.  태모라의 아들들은 사지절단을 당하여 희생 제물이 되어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로마의 포로에서 한순간으로 로마 제국 황제의 아내가 된 태모라는 이를 기회삼아 타이터스 가문을 복수하기로 마음 먹는다.  

비밀리에 사귀고 있었던 태모라의 인연 무어인 애런도 핏빛으로 물들이게 될 복수의 무대에 동참하게 된다.  태모라의 두 아들은 자신들의 어머니와 같은 복수심으로 배셔니스를 암살하고 러비아니를 사냥터에서 납치하여 강간하고 손도 자르고 일부러 증언을 할 수 없게 혀도 잘라내는 만행을 저지른다.  또한 태모라와 애런이 꾸민 간계에 휘말려 타이터스의 아들 두 명은 배셔니스의 암살과 관련된 모함을 쓰고 죽게 된다. 타이터스도 모함에 연루되어 자신의 손목을 자르게 된다.  

무서운 음모에 휘말려 아들들은 처형당하고 하나뿐인 고귀한 딸은 불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타이터스 자신 역시 한쪽 손목이 사라지게 되어 로마의 영웅에서 한순간에 로마 내에서 치욕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다.   가문의 몰락을 두 눈으로 목격한 외팔이 타이터스는 복수의 화살을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한 새터나이너스와 태모라에게 겨낭한다.  작품 초반에는 태모라의 복수가 전개되고 있다면 작품 중, 후반에는 이를 반격하기 위한 타이터스의 복수가 시작된다.  타이터스와 태모라가 펼치는 복수극은 더욱 극단적이면서도 잔인한 결말로 치닫게 된다.   

    

    

  작가의 문학적 미성숙함을 엿볼 수 있는 <타이터스>   

<타이터스>에는 초기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미성숙함을 볼 수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로마와 고트 족 간의 대립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지만 1막에서 전개되는 적국의 포로를 신의 제물로 바치는 잔인한 제사 의식 장면은 작품에 드러나는 잔혹한 복수극의 특징을 부각시켜주기 위해서 셰익스피어가 비약적으로 표현한 면이 있다.   그 밖에도 러비니아와 배셔너스의 결혼을 옹호하는 자신의 아들을 고민할 여지 없이 단칼에 베어버리는 아버지 타이터스의 모습은 셰익스피어가 (혹은 공동 저자인 조지 필이) 복수극 장르에 치중한 나머지 지나치게 유혈이 낭자한 장면 설정을 삽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광대가 깜짝 출연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광대의 역할은 비극적이고 암울한 이야기 전개 속에서도 코믹하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간혹 사건 전개와 관련된 단초 또는 중요한 요인을 등장인물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도 하고 있다. 

<타이터스>에서 광대는 4막에서 잠깐 등장하여 새터나이너스와 태모라에게 타이터스 가문이 보낸 편지를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훗날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광대의 역할에 비하면 이야기 전개 도중에 뜬금없이 등장하고 있으며 굳이 광대의 등장을 설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느끼는 대목이다.    

   

(광대 등장) 

태모라     이건 또 누구지!  내게 할 말이 있느냐? 

광대        그럼요,  아줌마가 황제라면. 

태모라     난 황후다.  저기 앉아 계신 분이 황제 폐하시지. 

광대        오, 저 사람이구만.  폐하께 신들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여기 편지 한 장과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왔나이다.  

(새터나이너스, 편지를 읽는다)  

새터나이너스     이놈을 데려가서 당장 목을 매달아라! 

광대        수고비는 얼마나 주시려나? 

태모라     이놈아, 넌 교수형을 받는 거야.  

광대        교수형이라고요!   그게 내가 이 목을 달고 여기까지 온 이유였군. 

(광대, 군사들에 이끌려 퇴장) 

 

- 윌리엄 셰익스피어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제4먹 4장 중에서,  지만지 pp 164~165 -

 

새터나이너스가 읽은 편지에는 타이터스 집안이 반역을 꾸밀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광대의 무례없는 행동이 자신의 묘를 파게 된 원인이 되었지만 편지의 내용이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다고해도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 광대를 교수형으로 처하는 황제의 행위는 작품에 비중이 없는 광대마저도 복수의 분노가 만들어낸 살육의 피바람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광대의 익살스러운 행동은 살육과 광기로 가득찬 희곡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는커녕 더욱 잔혹한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작품 속 미친 존재감, 무어인 에런   

로마의 위대한 영웅 타이터스와 고트 족의 여왕이었던 태모나의 모습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이 사랑했던 자식들의 잔인한 죽음이 원인이 되어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방법으로 통해서 복수의 칼날을 휘두른다.  두 인물의 모습은 후대에 나오게 될 <햄릿><오셀로><리어 왕><맥베스>에서도 이어지는 복수로 점칠된 비극적인 환경 속에서 서서히 이성과 인간성이 파괴되는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주연보다 뛰어난 조연을 뜻하는 씬 스틸러(Scene Stealer)가 있기 마련인데 <타이터스>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한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무어인 에런이다.  

작품 속 무어인 애런의 역할은 흡사 고대 로마판 <오셀로>의 이아고를 보고 있는 듯하다. 두 인물 다 공통적으로 개인적인 불만과 질투를 해소하기 위해서 간악한 음모를 꾸며냄으로써 작품 전반적으로 비극적인 갈등을 유발시키는 장본인들이다.   

하지만 <오셀로>의 이아고보다는 에런이야말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끝까지 복수심의 끈을 놓지 않는 집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 때 사랑했던 태모라를 되찾기 위해서 독자적으로 새터나이너스와 타이터스 간의 갈등을 조장하게 만드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리고 러비니아를 태모라의 두 아들들에게 강간하게 만든 것도 에런의 머리속에서 나온 또 하나의 계획된 음모 중의 일부이다.

그리고 태모라가 낳은 흑인 아기가 자신의 핏줄이라는 것을 상키시킴으로써 작품 후반부에 이를수록 권력욕에 눈이 먼 광기어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로마 황후가 흑인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죄 없는 유모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고트족의 부활을 염원하게 된다.   

 

나는 고트족에게로 돌아간다.  제비처럼 빨리 날아서 말이다.  거기에 이 팔 안의 보물을 마틱고 비밀리에 황후의 옛 친구들을 규합해야지.  어서 가자, 입술이 두꺼운 아가야.  그곳으로 데려가마.  네 녀석이 이 아비의 갈 길을 바꿔버렸다.  야생의 열매와 풀뿌리로 널 먹여주고 염소의 젖을 빨게 해주마.  깊은 동굴 속에서 널 키워 떠나간 전사가 되게 하고 큰 군대를 이끌 장군으로 길러내겠다.     


  - 같은 책, 제4막 2장, 에런의 대사, pp 153 -

 

그러나 자신의 당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실행되었던 음모는 타이터스의 아들 루셔스에게 발각된다.   포박당하여 곧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될 에런은 루셔스의 험학한 욕설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음모에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에런이 스스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정말 작품 속에서 단언 돋보이는 '악마' 같은 존재이다.

 

악마라는 게 정말 있다면 나는 악마가 되어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의 불 속에 살고 싶다. 

그러다가 너희가 지옥에 오게 되면 이 독 묻은 혀로  

너희에게 영원한 고통을 맛보게 할 수 있을 테니까!  

 

 - 제5막 1장 에런의 대사, pp 181  - 

 

   

  잔혹한 복수극 뒤에 남는 것은,,, 

이 글에서 최대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잔혹하거나 살육 장면의 일부를 살짝 언급했지만 <타이터스>를 직접 읽어보게 되면 셰익스피어 특유의 잔혹한 묘사를 실감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후반부에 이를수록 잔인한 묘사는 극에 달한다. (특히 결말부에서는,,,)  이 복수극을 실제로 무대로 오르게 된다면 이전에 나왔던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에 견줄만한 복수로 시작된 유혈이 낭자한 장면들이 연출될 것이다. 

무더운 여름에 장르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지만 잔혹한 내용의 고전을 원한다면 셰익스피어의 <타이터스>를 강력 추천한다.  오래 전에 나온 내용치고는 읽는데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글로 묘사되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 임산부와 노약자에게는 권하고 싶지는 않다. 

    


 

프란시스코 고야 <싸움> 1820~1823

 

' 잔혹극 ' 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프랑스의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는 잔혹함의 인식을 통해 인간성 회복과 치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극에 달한 잔혹함을 경험할 때 영혼의 정화작용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관람자는 잔혹한 장면을 통해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비애를 느끼게 된다.

<타이터스>는 줄거리보다는 잔혹한 살육 장면이 많이 부각되는 바람에 이 작품이 과연 문학적 가치와 작품성을 부여할 수 있는지 독자들마다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잔혹함이 잔혹함만으로 그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타이터스와 태모라 그리고 에런이 연출한 잔혹한 복수극 뒤에 남는 것은 복수에 눈이 먼 나머지 인간성을 상실한 채 '악마' 가 되어야했던 그들의 비참한 최후뿐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복수의 무대에서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복수의 광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순수한 인간성뿐만 아니라 자신 자신의 삶과 인생마저 산산히 파괴시켜버리는 무시무시한 감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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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7-17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역시나 대학생의 열렬한 방학의 탐구심은 리뷰를 읽는 내내 숙연하게 만드네요. ^^ 밑에 있는 학점 역시 숙연하게 감상했습니다. ^^ 지존이신 듯 ㅋ

마지막 줄에 있는 복수의 광기에 대한 정의가 참으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렇죠. 어떤 감정이 극단까지 올라가 치우친 다는 것은 인간의 균형을 상실하게 만들죠.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극단으로 올라가면 정말 좋은 것이 없습니다.

전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제대로 한 권도 읽지를 못 했어요. ^^ 게다가 악인들은 모두 흑인으로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호감도 가지 않구요.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호불호이기는 하지만요. ^^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에서 이런 셰익스피어의 시각에 대해 분석한 내용이 있었다고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때 당시 시대의 통념상 그것은 받아 들일 수 밖에는 없었겠죠.

암튼 위대한 작가인데 그다지 손이 안 가는 작가이니 저도 참 좀 극단적인 독서가에요.

비 많이 오는 데 시루스님의 집이 좀 걱정입니다. 독서에 집중하시게 비가 안 새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

cyrus 2011-07-18 15:33   좋아요 0 | URL
아직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많이 읽은건 아니지만 복수에 사로잡힌
인물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묘사하는 작가의 능력이 대단해요.
특히 <햄릿>은 다시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한 번 읽어보셔요 ^^

제가 사는 대구, 특히 저희 동네는 비 걱정 안 해도 됩니다. ㅎㅎ
항상 무덥거든요. 오늘도 무척 더워요.
서울 경기도 쪽에도 이제 더워지기 시작한다죠?
열심히 일하시더라도 이제 본격적으로 혹서기에 들어사게 되니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

양철나무꾼 2011-07-1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만지 책들 좀 좋아해서 하나 씩 사모으고 있는데,
세익스피어의 이 책은 아직이네요~ㅠ.ㅠ

오랜만에 고야의 그림을 보내요~^^

cyrus 2011-07-19 20:28   좋아요 0 | URL
저도 지만지 책을 구입해보려고 하는데,, 축약본이 좀 있는지라
왠만하면 완역본을 구입하려고 해요.

제가 읽은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완역본이에요.
내용이 좀 잔인하죠? ^^;;

마녀고양이 2011-07-2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현대 사회가 더 발전된 사회일지 모른다는,
적어도 몇가지 점에서는 더욱 좋아진 사회일지 모른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특히........ 형벌 측면에서는요. 아우, 몸서리쳐져요.
갑자기 조선 시대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 생각나서요. ㅠ

cyrus 2011-07-21 20:47   좋아요 0 | URL
능지처참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서양에도 유사한 형벌이 있어요.
정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예전보다 좋은건 사실인거 같아요.
 
벚꽃동산 열린책들 세계문학 22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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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장님의 썰렁한 농담

예전에 어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의 재미있는 사연을 듣게 되었다.  

사연을 보낸 사람이 평범한 회사원인데 회사 과장님의 하이 개그(?)에 맞춰 억지로 웃는 게 힘들다는 것이었다.  부장님 입장에서는 회사원들에게 친숙함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거좋은 경영 분위기 형성을 위해서는 유머가 필수이다. 그래서 유머도 경영 리더들이 갖추어야하는 능력중 하나이다.  

그런데 부장님 개그가 얼마나 재미 없고 유치하길래 이런 사연까지 보내게 된 것일까?  만약에 부장님이 이 사연을 라디오로 듣고 계신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나,,,

사연 내용에 의하면 부장님의 유머가 더 이상 못 봐주겠다면서 하소연을 하였다. 과장님의 유머 실력에 대해서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지 않은채 재미있지 않은 유머를 막 던진다고 표현하였다.  대놓고 지적과 비난은 하고 싶지만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분이기에 욕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웃을 수도 없다.  정말 나라면 청취자와 같은 곤란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부장님 비위 맞추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최근에 어느 캔커피 광고에도 이런 유사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은가.  회사 과장이 차태현에게 ' 커피를 자주 마시면 코피 나 ' 라고 썰렁한 농담을 날려주신다.  그러자 차태현은 과장님의 어이없는 유머에 재미있다는듯이 웃어대지만 과장이 사라지자 얼마 안 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만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지금도 부장님 앞에서 억지로 웃어야 하는 회사원 청취자 말고도 현대인들도 가끔 이런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다. 백화점이나 호텔, 레스토랑에 일하는 종업원들은 그 회사의 얼굴이기도 하다. 고객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항상 얼굴에 웃음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만약 오늘따라 몸이 너무 안 좋다거나 자신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하고난다면 종업원들 입장에서는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다. 마음이 뒤숭숭하고 절망적인데도 직업의 특성상 그들은 많은 고객 앞에서 밝은 웃음을 유지해야 한다.  

 

비단 서비스에 종사하는 종업원들만 힘든 것이 아니다. 요즘에는 쿨(cool) 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선호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져도 실연의 아픔에 절망하지 않고 아무 일 없다 듯이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쿨하다고 말한다.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리다보면 마음속으로 불편하고 힘들다고 느껴졌던 것들이 상대방에게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둔다.  

 

남들에게 그런 모습을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태연한 척 하는 것은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물론 방어 기제는 부정적인 심리 상태를 긍정적으로 바꾸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되면 오히려 병이 되고 만다.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억지로 웃어야하는 ‘스마일마스크 증후군’ 으로 발전하게 된다. 증상이 심해지면 식욕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두통, 불면증이 나타난다. 더욱 안 좋은 것은 정신적으로는 삶에 대한 의욕감이 떨어져 결국에는 우울증에 걸리게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것이다. 
  

 

  쿨 하지 못해 미안해

체호프의 희곡에서도 정신적인 외상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벚꽃동산』에 나오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막다른 골목에 있으면서도 쿨한 척하는 모습을 보인다.  

 

과거에는 부유한 재력을 자랑했지만 낭비벽 때문에 궁핍해진 벚꽃동산의 지주인 라네프스까야
부인은 돈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파티를 벌이거나 구걸하는 농부에게 금화를 주는 등 허영심 가득한 생활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그녀의 오빠 가예프 역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자립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으며 벚꽃 동산의 부가 가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인간이다. 상인 로빠힌이 이 동산이 경매를 통해서 소유권이 자신에게 넘어간다고 말을 하자, 가예프는 이 곳이 백과사전에도 등재된 곳이라고 내세우면서 끝까지 땅을 파는 것을 거부한다.  여동생은 오빠의 말을 철썩같이 믿으며 동산을 팔아넘기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다. 역시 그 여동생의 그 오빠이다.  

 

두 자매에게는 벚꽃동산은 과거의 화려한 시절로 상징되는 공간이기도 하면서도 궁핍한 현실로부터 피폐된 심리 상태를 안정시켜주는 그들만의 세계다. 그러나 결국 벚꽃동산이 로빠힌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자매와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은 동산을 떠나게 된다.  

 

이들은 동산을 떠나면서도 쿨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뜨로피모프라는 인물의 대사를 보면 그가 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기 보다는 그에게 동전 한 푼이라도 주고 싶은 동정심이 들게 된다. 

 


  로빠힌  (그를 껴안는다) 잘 가시오. 여러 가지로 고마웠소.  

               필요하다면 여비를 줄 수도 있는데.

  뜨로피모프 뭐 하러? 필요 없습니다.

  로빠힌  동전 한 푼 없을 텐데.

  뜨로피모프  고맙지만, 있습니다. 번역료 받은 게 있죠. 여기 이 주머니 안에.  

                    (걱정스러운 듯) 그런데 내 덧신은 어디에 있지!  

 


  (중략) 
  

 

   로빠힌, 지갑을 꺼낸다.  

 

 

  뜨로피모프  그만두시오. 그만두라니까..... 나에게 2만 루블을 준다고 해도 받지 않을 것이오.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오. 당신들, 부유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당신들 모두가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나에게는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솜털같이 하찮을 뿐이요. 당신네들 없이도 나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네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이오. 그렇게 나는 강하고 당당합니다. (하략)

 

  - 체호프『벚꽃동산』(구판, 미스터 노 세계문학) 4막 p 256~257 -

 

뜨로피모프는 자신의 덧신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는 자기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물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인생의 루저(loser)임에도 불구하고 처량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알량한 자존심만 내세우고 있다.  

 

더욱 더 가관인 것은 자매의 모습이다.  동산을 팔고 난 뒤에 반응이 180도 달라진 문제투성자매들은 너무 쿨 한 나머지 희망에 고무찬 '자뻑' 에 빠지고 있다.  예전에 동산이 파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던 가예프는 동산을 팔고 나자 모든 것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동생은 오빠의 말에 옆에서 장단을 맞춰 준다.  라네프스까야 부인은 이번에 동산을 팔게 됨으로써 과거에 화려했던 행복한 시절이 다시 올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다가 희곡이 결말에 이르게 되면 무대 위에는 '자뻑' 자매만 남게 되는데 방금 희망에 한껏 고무되었던 활기찬 모습은 사라진다.  자매는 서로 껴안고 조용히 흐느낀다.  자매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엔딩 장면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마음껏 울어보지도 못하고 겉으로는 쿨 한 성격의 스마일 맨이 되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비극배우

이 책은『벚꽃동산』이외에도 체호프의 다른 희곡 작품들도 수록되고 있다. 특히 책 속의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도『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라는 짤막한 단막극이 있다.  

 

내용은 간단하다. 똘까초프라는 어느 가장과 그의 친구 무라슈낀이라는 두 인물만 등장한다. 똘까초프라는 사람은 관리라는 직업 생활과 가정생활에 너무 지쳐서 우울증에 걸린 나머지 미쳐버리는 인물이다. 똘까초프는 무려 5페이지에 걸쳐서 친구 무라슈낀에게 자신의 힘든 것들을 하소연한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런 비극적인 생활을 동정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똘까초프의 긴 사연을 들은 무라슈낀의 반응은 시답잖다.  똘까초프의 말에 대답해주는 말은 고작 ‘동정하네’. 단 한 마디였다.  

 

똘까초프가 진짜로 미쳐버리게 되자 겁에 질린 무라슈낀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절망적인 단막 웃음극은 막을 내린다. 일상생활이 쪼들리다가 결국엔 미쳐버린 똘까초프가 불쌍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해결해줄 거 같은 쿨 한 모습을 보이다가 마지막에 겁에 질리고 마는 무라슈낀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엔딩이다.  불행하고 슬픔에 빠진 똘까초프 코믹한 무라슈낀이나 결론은 두 명 다 어쩔 수 없이 비극배우였던 것이다.  

 

 

체호프의 희극 제목대로 어쩌면 인간은 삶이라는 커다란 연극 무대 위에서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 웃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비극 배우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긴채 스마일 맨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처럼.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웃음의 가면을 벗어 던져야 한다. 이제 힘든 일에 대해서 쿨 하지 못하다고 해서 더 이상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 혼자서 끙끙 앓기보다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함께 치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과 친구들이 당사자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모습도 중요하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마음의 고통을 견디면서 항상 슬퍼야만 하는 비(悲)극 배우가 되지 말자.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지인들과 함께 해결해나가면서 활기찬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희(喜)극 배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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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회사에서 너무 웃는 표정을 짓느라
볼 근육이 뭉쳤던게 생각나는데, 대체 제가 그렇게 웃을 일이 없을텐데 언제 그랬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웃느라 볼 근육 뭉치는거 너무 아프잖아요.. 그때는 정말 가식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구요. ^^

제 친구는 'cool' 이라는 용어를 너무 싫어했습니다. 한국인같지 않고 인정머리 없다나 머라나 그러더군요. 우리 민족은 욱 하지만, 속내를 제대로 표현하거나 상대에게 알려주거나 이해시키지 못 하는 면이 더 강한 듯 합니다. 저만 해도, 제 속내를 너무 많이 비추면 엄청나게 창피하고 화끈하거든요, 그게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말이죠. ㅎㅎ

cyrus 2011-07-13 20:54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는 쿨하다는게 좋은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것도바도 더 힘든게
쿨한 척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저도 왠만하면 저의 속마음을
남에게 표현하려고 고치는 중이에요. 예전에는 남에게 잘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 쌓아두는 편이었거든요. ^^;;

비로그인 2011-07-12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싫은걸 억지로 해야 되고,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거기에 어쩔수 없이 맞춰가야 하는 사람들. 현대인의 몸과 마음은 어쩌면 조금씩 그렇게 병들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런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을까요..

며칠 전, 오전 7시 40분쯤. 몸을 구부리고 어느 편의점 옆에서 빵을 급하게 먹던 한 젊은 남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에게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었음 좋겠고, 스스로 웃는 일이 많았으면 합니다. 그 남자를 보던 제 모습이 투영되어 조금은 서글픈 저녁입니다.

cyrus 2011-07-13 20:56   좋아요 0 | URL
저는 남에게 비위 맞추는게 불편하던데,, 사회생활할 때 걱정이에요.
특히 싫은 사람 비위 맞춰주고나면 나중에는 혼자서 속앓이를 하곤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