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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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93] 위대한 개츠비

 

 

  삶은 풍요로웠지만 정신적으로 부족했던 남자, 개츠비

올해 읽은 소설 중에서 다양하면서도 개성있는 성격을 가진 소설 속 인물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묘한 매력을 가진 인물들도 종종 발견하곤 한다.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같은 경우에는 올해만 해도 여러번 읽었다.  특히 <위대한 개츠비> 같은 경우에는 각각 민음사와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출간한 번역본을 가지고 있어서 개츠비라는 인물이 낯설지가 않다.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한 문학동네와 올해 최근에 나온 열린책들 번역본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두 소설의 작가는 미국 출신이며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고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책을 읽기 위해서 몇 페이지를 펼처보는 순간, 처음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에 대해 별로 호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사회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욕설만 내뱉는 홀든의 그런 모습이 싫은 것처럼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부를 축적하여 아메라카 드림을 꿈꾸었지만 한 순간의 오해로 인해 허망하게 죽음을 맞게 된 개츠비가 그렇게 위대해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냥 그의 죽음이 너무 허무할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가면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습을 보는 시각과 생각이 달라지듯이 피츠제럴드의 소설 역시 그랬다.   여러 번 읽고나니 개츠비라는 남자에 대해 연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알량하고 경솔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부르주아, 그러나 모든 걸 가진 척했지만 결핍으로 가득했던 남자,  그가 바로 제이 개츠비였다. 

 

 

 어두운 재즈 시대에 자란 한 송이 민들레꽃, 개츠비

중서부 출신의 가난한 청년 제이 개츠비는 군 복무 중 미모의 데이지 페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 그는 유럽 전선으로 떠나고 기다린다던 데이지는 곧 시카고 출신의 부자 톰 뷰캐넌과 결혼한다. 종전 후 귀국한 개츠비는 데이지의 결혼 사실을 알고 그녀를 되찾고자 롱아일랜드에 대저택을 산다. 여성관계가 복잡한 톰에게는 머틀 윌슨이라는 정부가 있고, 데이지도 알고 있으나 풍족한 생활이 주는 안락함 때문에 톰의 곁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 개츠비가 나타난 것이다.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된 머틀의 남편 윌슨이 서부로 가자고 채근하자 광란 상태에 빠진 머틀은 거리로 뛰쳐나가다 데이지가 운전하는 차에 치어 사망하고 윌슨은 아내를 죽인 사람을 찾아 나선다. 머틀을 죽게 한 것이 개츠비라고 알고 있는 톰은 윌슨에게 개츠비의 집을 가르쳐 줌으로써 자기 가정의 위험분자를 제거할 기회로 삼는다. 윌슨의 총을 맞고 개츠비는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고 만다.  

개츠비는 3년 동안 번 돈으로 큰 저택을 사고 호사 주말파티를 열어 손님들을 모은다. 단지 첫사랑을 만나보려는 일편단심에서다. 혹 데이지가 들르지 않나 기다리다 결국 그녀의 사촌 닉 갤러웨이 집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아주 극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닉은 두 사람을 소개하지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자 개츠비는 우리는 전에 만났다고 말하고, 데이지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다고 받는다. 개츠비는 5년 만에 보는 것이라 말하고 오는 11월이면 꼭 5년이 된다고 덧붙인다. 데이지와 헤어진 후의 날짜를 꼬박꼬박 세고 있었던 것이다.    

한평생 데이지라는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그는 청교도적 경건함과 도덕적 가치가 무너지기 시작한,  20세기 초 미국의 재즈 시대 속에서 유일하게 자라난 '일편단심' 민들레였다.  그러나 꽃이파리를 펼치기에는 거대한 재즈 시대의 사회는 늘 어두웠고 너무나 감정이 메마른 지대였다.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

데이지의 사랑을 다시 얻고자 고군분투하는 개츠비. 그러나 상류사회의 이기주의에 희생되는 것은 낭만주의자 개츠비다.  그의 대저택의 불은 꺼지고, 작품 속의 사랑은 모두 막을 내린다.  꿈의 완결편인 데이지를 차지하겠다는 개츠비의 순정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부르짖는 사회와는 맞지 않았다.  이 점을 피츠제럴드는 개츠비는 '위대한' 이라는 반어적인 의미의 수식어를 붙였던 것일까?  

<위대한 개츠비>가 집필되었던 20세기 초 미국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누구나 부자가 되고 미인을 차지하고, 밤마다 파티를 여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다. 개츠비는 재즈 시대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빼어닮은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개츠비가 단지 20세기 초 미국 사회의 젊은 세대들의 자화상인 것만은 아니다.  개츠비의 모습에는 불안정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비정규직으로 근근이 살아가야하는 '88만원 세대' 그리고 이제는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해야하는 '삼포세대' 라는 암울한 명함 한 장을 받게 된 우리나라 젊은 세대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개츠비의 어이없는 죽음 못지 않게 더욱 불운한 사실은 우리나라 젊은 세대들은 개츠비처럼 경쟁과 이기심으로만 가득찬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 '사랑' 이라는 낭만이라는 감정마저도 느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노력 끝에 거부가 된 개츠비의 아메리칸 드림이 위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불의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지만 평생 부와 명예를 추구하면서도 낭만과 순정을 버릴 수 없었던 그의 원대한 꿈은 소설이 출간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모든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포부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 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맑게 갠 아침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pp 255)

 

이것은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동시대 사람들 그리고 우리나라 '88만원 세대' , '삼포세대' 를 향한 각성의 외침이기도 하다. 허무를 딛고 일어서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야 한다고.

안개 너머 비치는 희미한 초록색 불빛,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 있었던 개츠비의 삶. 그 위대함을 가슴에 품은 채 말이다.    꿈과 환상을 간직하고 그것을 찾아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결국 자신의 파멸로 나아간 개츠비의 인생은 그럼에도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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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10-03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시루스님의 리뷰를 스마트폰으로 접하네요. ^^전 내가 읽은 책을 다른 사람이 읽고 글을 써주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제 시선이라는 것이 웃겨서 다양하게 보고자 하지만 어딘가에 고정돼 책을 바라 본다고 생각들거든요.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에 읽게 됐는데 전 그닥 느낌을 받지 못 했어요. 삼류드라마를 본다도 느꼈던 것 같아요. 이제와서 시루스님의 리뷰를 보니 그런 오해를 싹 사라지게 하네요. ^^ 전 참 시루스님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쉬운 책을 읽는 요즘 세태에 시루스님의 독서는 그야말로 제가 20대 때 그토록 원하던 청년상이에요. ㅋㅋ 완전 멋져!

cyrus 2011-10-05 00:03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읽었을 때는 그랬어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요.
사실 피츠제럴드의 이 소설 역시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는 통속소설처럼
반응이 냉담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암울했던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는
점에서는 고전이라고 불릴 이유가 있더군요. ^^
 
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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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판결' 만 기억되는 <베니스의 상인> 

고전이란 누구나 내용은 알지만 읽어보지는 않는 작품이라고 했던가?   

<베니스의 상인>은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내용은 대충 안다.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인 샤일록에게 '1파운드의 살점을 가져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 는 명판결만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앤토니오는 그의 이름만 대면 무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을 정도로 신용이 높은 상인이었다. 자신의 친구인 바싸니오포오셔에게 구혼하러 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해주기 위해 샤일록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는 앤토니오에게 상당한 금액의 이자를 요구한다.  앤토니오는 샤일록의 부당한 제안에 경멸로 가득찬 비난을 하게 되지만 결국 그는 샤일록이 원하는 대로 원금을 제때에 갚지 못할 경우에는 '심장에서 가까운 살 1파운드' 를 주겠다는 계약을 체결하고 돈을 빌린다. 그런데 공교롭게 상선의 사고로 원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게 되었고, 샤일록은 계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살 1파운드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앤토니오와 샤일록 간의 '살 1파운드' 논쟁은 법정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앤토니오 측이 불리한 입장에 놓여지게 되었지만 판결 결과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법학 박사들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된다.   바싸니오의 연인 포오셔와 그녀의 시녀 니리서가 법학 박사로 변장하여 재판장에 나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포오셔는 계약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1파운드의 살을 떼어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도려내라" 고 판결한다.  이것은 계약서의 내용이나 샤일록의 요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므로 법률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하지만 내심 앤토니오의 죽음을 원한 샤일록에게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살을 도려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막판에 궁지에 몰린 샤일록은 오히려 '계약 내용에 베니스 인을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 는 죄목으로 결국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는데다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명령받는 처지에 놓인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억울하게 죽을 위기에 처한 선한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를 살려낸 재치 있는 판결 정도만으로 알려져 있다.  샤일록이라는 이름은 사회적 약자에 횡포를 부리는 악덕 고리대급업자의 상징으로만 된 것이 아니다.  그가 '유대인 출신' 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대인은 오랫동안 '돈만 밝히는 민족' 으로 왜곡, 폄하되기도 하였다.    큰 맥락으로 보면 기독교와 이교도인 '유대교' 와의 싸움에서 기독교의 일방적 승리를 상징하는 작품으로도 볼 수도 있다.  

 

 

 샤일록은 왜 법정에서 칼을 갈았을까?

샤일록이 법정에서 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에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교도인 유대인이라는 점과 그 당시 중세 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고리대금업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샤일록은 중세 유럽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스테레오 타입인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채권자로 그려질 수가 있었다. 

반면 앤토니오는 부자지만 친절하고 자기희생적인 한 마디로 말해 '선한 기독교인' 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는 이교도에 대해서는 비관용적이고 비타협적이다.   

 

샤일록, 나는 이자를 수수하는 금전거래를  

해본 적이 없지만 내 친구의 시급한 필요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관행을 깨려 하오.  

- 제1막 3장 중 앤토니오의 대사 (pp 26) -

 


그는 샤일록에게 빚을 청하면서도 고리대금업을 일종의 '투기' 로 인식하면서 이자수취를 경멸하는 기독교도로서의 도덕관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샤일록은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에 제법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라도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을 했는데도 그것 때문에 기독교로부터 멸시받고 조롱받고 증오를 받았기에 샤일록은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계약서를 흔들며 앤토니오에게 이자를 요구하는 것만 아니라 기독교에게 핍박받았던 '유대인' 민족으로서의 힘을 당당하게 과시한다.  

 

난 차용증서대로만 하겠고, 당신 말은 듣지 않겠소. 

난 차용증서대로만 할 작정이니까 말일랑 더 이상 마오. 

난 머리를 흔든다든가, 측은하게 여긴다든가, 한숨을 쉰다든가,  

기독교인 중재자들에게 주장을 굽히는 등의 우유부단하고 

멍청한 눈을 한 바보는 되지 않겠단 말이오. 따라오지 마시오. 

말하기 싫소이다.  난 차용증서대로 할 것이오. 

- 제3막 3장 중 샤일록의 대사 (pp 95) -

  

"계약대로 하겠다" 고 큰소리치며 법정 안에서 칼을 가는 샤일록의 모습은 이자에 집착하는 사악한 고리대금업자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박해에 대한 복수심에 불 탄 유대인의 모습이다.   

 

바싸니오   무슨 이유로 당신은 칼을 그처럼 열심히 갈고 있소. 

샤일록      저기 저 파산자에게서 벌금을 베어내기 위해서요.  

- 제4막 1장 중에서 (pp 115) -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정당한 이론을 펼쳐도 결론은 KO패로 정해져 있다.  앤토니오를 신뢰하지 못하고, 계약서만 굳게 믿었던 샤일록은 크게 참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샤일록은 유대인으로서의 서러움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는 민족의 위력을 보여주고 싶어했지만 결국 신뢰보다 취약한 계약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악인' 샤일록의 외로운 최후

'악인' 샤일록과 '선인' 앤토니오의 대결구도로 인식되어 온 <베니스의 상인>은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읽게 된다면 오로지 악하기만 한 악인과 선하기만 한 선인이 없으며 다만 '악의가 선의를 넘어서는 그 순간들' 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샤일록은 그동안 대부분 파렴치한 악인으로 그려졌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받고 난 뒤의 그의 모습은 동점심을 유발할 정도로 처량하다.   오랫동안 모은 재산의 절반은 한순간에 국가로 귀속되어지고 자신의 딸 제시커는 기독교인 청년 로렌조와 결혼하게 되어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된다.  샤일록은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받아야하는 외로운 민족의 전형이면서도 딸에게서도 버림받는 외로운 아버지의 모습이다.   

법정 판결 이후 샤일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최후마저도 언급되지도 않는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두 딸이 아버지인 고리오 영감의 임종을 지키지 않는 것은 영감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파산 직전으로 몰리게 된 샤일록도 고리오 영감처럼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돈' 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돈' 때문에 자신도 상처를 입고 몰락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돈' 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법대로' 를 외치는 샤일록이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종국엔 몰락을 겪는 모습을 통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만 샤일록은 돈만 밝히는 전형적인 수전노가 아니다.   유대인들의 사회적 진출이 막혀 있었던 그 당시 유럽의 사회가 '샤일록' 이라는 악명 높은 유대인 고리 대금업자를 만들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돈 많은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는다. 그만큼  부(副)의 위력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와 평가도 달라진다.  인간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 재물을 늘리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은 원초적 욕망도 무시할 수 없다.  물질만능 시대의 사회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앤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삼겠다는 샤일록의 욕망은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정직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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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2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의 악인은 사회가 만든 부조리와 악행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물론 예나지금이나 본인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는생각해요. 글쎄....써놓고보니 어려운 주제같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cyrus 2011-10-01 11:36   좋아요 0 | URL
현맘님 말씀이 맞아요. 우리가 나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무조건 성격만 가지고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잘못된 사회 때문에 그 사람의 성격과 사고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아이리시스 2011-10-0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밤 읽을 책, <베니스의 상인> 당첨! 시루스님 덕분.^^

cyrus 2011-10-01 11:41   좋아요 0 | URL
ㅎㅎ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하네요. 참고로 베니스의 상인은
민음사에서도 나왔는데 개인적으로는 문학동네판을 추천하고 싶어요.
민음사에서 나오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최종철 교수가 번역을 맡고 있는데
이 분의 번역한 문장이 문어체라.. 간혹 대사 중에 한문으로 이루어진 단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0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또래의 극작가로 크리스토퍼 말로가 있었는데 라이벌이었다네요.말로는 <베니스의 상인>에 맞서 역시 유대인이 주인공인 <말타의 유대인>을 썼답니다.이 두 작가의 관계는 상당히 재밌어서 역사가나 문학애호가들에게 회자되었죠.우리나라에도 말로의 작품이 몇 개 번역되어 있더군요.유대인이 당시의 기독교권 국가의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고 싶은 연구자들에겐 이 두 작품이 흥미로운 비교연구대상이 될 것 같아요.

cyrus 2011-10-02 20:58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 번역본 해설을 보게 되면 크리스토퍼 말로는 꼭 언급하더라고요.
노자님 말씀대로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에 말로의 희곡작품이 번역된
걸로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셰익스피어 읽기에는 말로의 작품을
무시할 수 없을거 같아요. 시간이 된다면 말로의 작품을 비교하여
읽으면서 노자님이 제시한 주제(?)에 대해서 탐구해봐야겠습니다. ^^;;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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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68] 호밀밭의 파수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불안감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중략)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이 상 <오감도 제1호> 중에서 -

 

이상의 '오감도' 는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시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시적 상황은 단순하면서도 작가가 독자드에게 무엇을 알리고자하는지 의도가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시인이 독자들을 향해 아무런 의미 없는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시에서 등장하는 '아해'(兒孩)는 아이의 옛 말이다.  13명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는 화자는 무섭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 무섭게 느껴지는 독자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골목이 막혔건 뚫렸건, 아이들이 질주를 하지 않아도 화자는 어떠한 상황에 상관없이 막연하게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고 있다.  이상이 일제 강점기 시대에 활동한 시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암울한 시대 속에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시인 자신이 느끼고 있는 정신적 불안을 상징하고 있다.    

 

독특한 내용의 시 '오감도' 속에서 볼 수 있는 시인의 정서적 불안감은 절망적 모더니즘 시대를 산 당대 식민지인들의 자화상이면서도 반면에 오늘날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 관계의 단절이 심화되어가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이나 세상을 대할 때 마음 속에는 극심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특히나 인간이 나이를 먹어감으로써 성장하면 할수록 곧 마주하게 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극대화된다.   특히 청소년기 때는 주변적 상황과 위치에 따른 갈등과 방황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절정의 시기이다.

누구는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고 누구는 또래보다 먼저 사회로 나가 돈을 번다. 또 누군가는 제도권을 벗어나 울타리 없는 세상에 던져지기도 한다. 각자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르고 가슴 속의 꿈과 좌절의 비율도 다르겠지만 모든 젊음에 깃든 공통점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다. 기성사회의 벽은 높기만 하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와 가치관은 반항의 대상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어떤 운명을 가진 존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혼란스럽다. 

 

 

  홀든 콜필드의 이유 없는 반항  

 

"인생은 시합이지, 맞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단다." 

"예, 선생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측에 끼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    (pp 19)

 

감수성이 예민한 홀든 콜필드에게는 학교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 모두 바보들의 세계이다. 깊은 마음의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쌓아야 할 학교 기숙사는 겁주고 싸우는 공간이었고, 가정은 마음의 안식처가 아니라 숨어서 들어가거나 도망쳐야 할 대상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운동 경기에서 볼 수 있는 '게임의 법칙'을 가르치는 비인간적인 교과목이었다.  운동 경기는 경쟁을 통해 승패를 가려야한다.  역사가 게임이라면 처음부터 보잘 것 없는 쪽에 선 경우에도 게임으로 성립될 수 있는지, 과연 게임에서 진 패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홀든은 세상에 강한 의문을 던진다.  부정적인 의문 속에는 불합리하게 움직이는 인생에 대한 내면적인 두려움이 작용되고 있다.

홀든에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거짓과 위선, 불의와 폭력, 모순이 가득한 곳이다. 엄격하고 무관심한 아버지와 날카로운 성격의 어머니, 옷차림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교장, 유일하게 의지했던 앤톨리니 선생에게 겪는 '기분 나쁜 경험' 등은 홀든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냉소적인 반항아로 만든다. 그리고 세상은 다른 존재의 상처에 대해 눈길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냉소적이다. 센트럴 파크 남쪽에 있는 연못이 얼어붙으면 그곳에 살던 오리들은 어디로 가게 될지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듯이.  

홀든이 왜 그렇게 반항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 작가는 독자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공한 유대인 아버지, 교양 있고 예민한 어머니 사이에서 부유하게 자라면서 주류사회를 지향하는 청소년이 겪는 정신적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홀든이 속한 계급의 아이들은 사립 기숙사학교를 다니면서 좋은 집안 출신의 친구를 사귀고, 아름답고 자존심 강한 여학생과 사랑을 속삭이며,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다음 전문직에 안착함으로써 부모 세대의 안정된 삶을 이어가도록 강요받는 것이다.  그런 삶이 홀든의 정신을 속박하는 요소로 작용했고 이를 잠시나마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이었다.

끊임없이 투덜대고 반항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세상을 욕하는 그가 언뜻언뜻 보이는 순수함, 세상의 얼토당토 않은 폭력 앞에서 겁을 먹는 장면, 학교와 집을 멀리 하면서도 한때 미워한 친구들을 떠올리고 먼저 죽은 남동생 앨리와 집에 남은 꼬마 여동생 피비를 그리워하는 모습 등은 겉으로는 거칠게 굴 망정 속은 어떻게든 세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홀든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홀든이 '호밀밭의 파수꾼' 이 되고 싶은 이유   

하지만 홀든은 삶에 대한, 세상에 대한 의욕을 결국 놓지 못한다. 역겨운 세상을 도피하고 싶지만 결국은 살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가끔씩은 자신도 모르게 '잘 살아보자' 라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다는 점, 결국은 어른이 되고, 또 다음 세대를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을꺼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거야. 애들이란 앞 뒤 생각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야. 그럴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건 그거야. 바보같겠지만 말이야.  

(pp 229~230)

  

<호빌밭의 파수꾼>에서 제일 유명한 홀든의 대사이면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홀든은 '파수꾼' 이 되고 싶어하는 생각을 본인 스스로 '바보같은 일'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홀든의 생각이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나 할 줄 아는 단순한 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인간이 미지의 대상과 세계와 대면하는 순간이 오게 되면 '뜻밖의 현상' 이 벌어진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현상' 이란 인간은 주의 깊고 명민해지며, 자신의 모든 감각 능력을 발휘하여 미지의 대상과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pp 6) 

홀든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위협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생각없이 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호밀밭의 파수꾼' 이 되는 것이다.   이상은 그저 질주하고 있는 13명의 아해들을 무서워할뿐 방관하고 있는 반면에 홀든은 자신과 같은 동등한 상황을 겪게 될 호밀밭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을 지켜내고자 한다.   '파수꾼' 으로서의 임무는 홀든에게는 적대적인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면서도 더욱 더 성장해나가기 위한 '홀든 콜필드' 라는 주체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새로운 도전 과정이다.   그래서 홀든 콜필드라는 소년의 성장통은 소설이 발표된 지 50년이 된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샐린저의 소설이 미국 고등학교와 도서관에서 최고의 금기도서와 최고의 권장도서가 된 것은 역설적이다. 작가는 당초 성인들을 위해 이 소설을 썼지만 전 세계 10대들이 홀든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열광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성장한다는 것은 흔히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으로 말한다. 세상살이를 잘 모르는 사람을 철이 없는 어린아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곧 다가오게 될 '어른' 들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이유 없는 반항과 냉소가 철없던 행동과 생각으로 느껴지면서 어느덧 우리는 나이를 먹어 가는 것이 아닐까?     굳이 홀든처럼 '파수꾼' 이 될 생각은 하지 못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미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잊은 채 성장하고 있는 점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마음 속에는 공포와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기 위한 삶의 의욕과 도전 정신이 우리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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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9-2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년 전에 토론 모임에서 읽었던 건데...많은 주제로 열띤 토론을 했던 기억이 있네요. 기억에 남는 건, 홀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낭떠러지 옆에서 사람이 떨어지지 못하도록 하는 캐쳐가 되고 싶다는 거하고....센트럴파크 오리 얘기가 무척 인상적입니다. 택시 운전사에게 홀든이 얘기하던 오리 말이지요..ㅎㅎ
이 책 재밌죠?^^

cyrus 2011-09-23 19:05   좋아요 0 | URL
네, 언제나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어서 좋은 소설인거 같아요.
처음 읽었을 때는 홀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반복해서 읽게 되니깐
홀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몇 몇 문장들 중에는 감명 깊게 읽었던 것도
있었어요. ^^

아이리시스 2011-09-2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은 속독하는 거예요?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도권에 반박할 용기도 없던 나는 지독하게 홀든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와 비슷한 문장으로 예전에 책에 썼었는데. 저도 야무님처럼 학교 때 토론했었어요. 그때 대충 읽고 유럽여행 때 기차와 공원에서 읽는데, 진지하게 읽을 때의 나는 더이상 학생이 아니어서, 딱 한번쯤은 다시 학생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홀든은 부조리한 학교를 벗어났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절망적이긴 해도, 파수꾼을 꿈꾸는 일이 여전히 어렵긴 해도, 살아가는 한 방법인 건 맞아요. 그죠?

cyrus 2011-09-23 19:10   좋아요 0 | URL
소설 같은 경우에는 속독하는 편이고요,, 인문사회 역사 같은 경우에는
일주일 정도 걸리더라도 천천히 읽는 편이에요. 아니면 알고 싶은 주제의
내용을 읽을 때는 발췌해서 읽고요. 결국에는 책의 장르에 따라
읽는 속도가 다른거 같아요 ^^;;

아이리시스님도 이 소설을 두 번 이상 읽으셨군요. 저 역시 처음 읽을 때랑
또 다시 읽을 때의 느낌이 달랐어요, 비록 힘들고 절망적인 세상이지만
자신 나름대로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거 같아요.
며칠 전에 이 소설을 등굣길 버스 안에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어요. '파수꾼' 정도는 아니더라도 절망적인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서요 ^^

루쉰P 2011-09-2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고 싶어지네여 ^^ 시루스님의 리뷰를 읽으니 내가 여태껏 호밀밭의 파수꾼을 제대로 안 읽었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오늘 지친 일상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리뷰를 보는데 시루스님의 리뷰를 읽으며 대 감동에 빠져 스마트폰으로 미친 듯이 댓글을 남기고 있어요. 정말 다시 읽고 싶네요. 전 주인공이 방황 끝에 신뢰한다고 믿을 수 있던 선생님이 그를 성추행하는 장면에서 너무 소름이 끼쳐 이 책을 깊이 보지 못 했거든요. 아 잠자리에 누워 정말 마음 속 깊이 읽었어요

cyrus 2011-09-23 19:12   좋아요 0 | URL
꼭 읽어보셔요. 이 소설은 학생부터 시작해서 어른들까지 세대를 불문하고
많이 읽혀지는 고전이니까요. ^^

사실 저도 처음에는 루쉰님이 언급하신 장면뿐만 아니라 홀든이 욕을 하는
서술 방식에 대해서 거리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반복해서 읽어보니깐
홀든의 모습이 어느새 저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

비로그인 2011-09-25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대학다닐때 일요일마다 책 읽고 얘기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다른 생각도 좀 말해보고, 이렇게 인터넷 공간도 좋지만 서로 얘기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참 매력이 있다 싶어집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길 위에서 같은 소설을 볼 때마다 그 때 생각이 나네요.

요즘 대학가는 더 그런 여유가 없겠죠??

cyrus 2011-09-26 12:55   좋아요 0 | URL
네, 강의실에 만나면 여자 이야기에서부터(^^;;) 연예 뉴스까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거 같은데,, 막상 생각해보면 살아가는데 도움이 안 되는
대화만 하고 있더라고요 ㅎㅎ 한편으로는 친한 친구들 간에 만남을 통해서
대화를 나눈다는 시간이 즐겁기도 합니다. 그런 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여유가 되거든요 ^^
 
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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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밤, 마법의 숲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판타지

<한여름 밤의 꿈>은 그동안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으로 너무나 많이 만들어져 조금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오래전에 쓰여진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이 만들어낸 유쾌한 '판타지' 때문일 것이다. 

허미아와 라이샌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허미아의 아버지 이지우스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은 밤중에 몰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로 하는데, 바로 이 계획을 헬레나가 알게 된다. 헬레나는 허미아를 짝사랑하는 드미트리어스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 하지의 전날 밤, 라이샌더와 함께 도망가는 허미아를 찾기 위해 드미트리어스가 숲으로 들어오고, 이 드미트리어스를 찾아 헬레나도 숲으로 들어온다.  3쌍의 연인이 숲으로 모이게 되면서 사랑의 백일몽이 시작된다.

그들의 꿈이 단지 백일몽이었던 건 요정들의 장난스러운 마법으로 인해 연인들의 사랑싸움을 한층 소란스럽고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헨리 퓨젤리 <요정들에게 둘러싸인 티타니아가 깨어나다> 1793년  

 

티타니아:  주무세요. 내 팔로 감아 안아 드릴께요.  요정들은 물러가라.  사방으로 멀어져라. 

               (요정들 함께 퇴장)  

               담쟁이도 아름다운 인동 덩굴 이렇게 부드럽게 감으며, 암송악도 껍질 덮인  

               느티나무 가지를 이렇게 둘러싸요.  오. 정말 그대 사랑해요!  

               난 정말 혹했어요! 

- 4막 1장 중에서, pp 79~80 -

                 

이 야단법석은 숲을 지배하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의 부부싸움에서 시작된다. 잠깐의 다툼에 약이 오른 오베론은 티타니아를 골탕 먹이려고 요정 에게 마법의 꽃을 구해 오라고 명했다.  마법의 꽃으로 만든 즙을 눈에 바르면 눈을 뜨고 나서 맨 처음으로 보는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꽃의 즙이 눈에 닿은 요정의 여왕은 하필 못생긴 얼굴의 당나귀 인간 바틈을 처음 바라보게 되고, 순식간에 사랑의 마법에 빠져들고 만다.

퍽의 깨알같은 실수 연발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재미가 더욱 배가된다.  드미트리어스를 향해 열렬하게 구애하는 헬레나를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오베론은 퍽에게 마법의 꽃즙을 드미트리어스의 눈에 뿌려주라고 한다. 하지만 퍽은 드미트리어스의 눈에 뿌려야 할 꽃즙을 라이샌더의 눈에 뿌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만다.

어긋난 큐피드의 화살처럼 연인들의 마음은 갑자기 행로를 바꾸어 꽂히게 되고, 결혼 준비로 흥겹게 달아오른 숲은 세 커플들로 대혼란에 휩싸인다.  퍽은 자신 때문에 꼬여버린 연인들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모두를 잠재우고 꿈 같은 하룻밤을 정리한다. 마법이 풀린 여왕은 잠에서 깨어나고나서야 여태까지 당나귀 인간에 사랑에 빠져 있었던 사실에 황당해한다.   

그리고 문제의 3쌍의 연인들이 잠든 사이에 오베론은 다시 마법을 부려 라이샌더는 허미아를, 드미트리어스는 헬레나를 사랑하도록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뒤죽박죽이 되었던 연인관계가 정상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써 서로의 짝을 찾은 두 쌍의 남녀가 아테네의 공작 테세우스 집에서 공작 부부와 함께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하룻밤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히다

<한여름 밤의 꿈>을 원작으로 읽어본다거나 또는 연극, 영화를 보게 되면 희곡에 등장하연 연인들이 겪게 되는 상황과 장면들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속에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고대 신화 속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고나 인용되고 있다.

사랑에 빠진 3쌍의 연인들 그리고 요정들 이외에도 <한여름 밤의 꿈>에는 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인 목수 퀸스, 풀무장이 플루트, 땜장이 스타우트, 가구장이 스넉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일행과 어울리는 바틈은 원래 직업이 베틀장이다.    그들은 나흘 앞으로 다가온 테세우스 공작의 결혼식에서 선보일 연극을 연습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온다.  일행 중 한 명인 바틈이 오베론의 마법에 걸려든 것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티스베>   1909년 

   
 

퓌라모스와 티스베는 집안의 반대로 인해서 이웃지간임에도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들 사랑의 장애물이 될 수가 없았다.   

갈라진 벽의 작은 구멍을 통해서나마 대화를 나눔으로써  

두 남녀는 불 타오는 사랑의 감정을 더욱 지펴나갔다.

 
   

 

그런데 마을 일행들이 선보이는 연극의 제목은 '피라무스와 디스비의 가장 구슬픈 코미디와 가장 비참한 죽음' 이다.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벌써 눈치를 챘을 것이다.   '피라무스와 디스비' 는 신화 속 비극적인 사랑의 연인인 퓌라모스와 티스베를 패러디한 것이다.   

여전히 이들의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고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퓌라모스와 티스베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양쪽 가문에서 서로 반대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게 되지만 불행한 사고로 인해 두 사람 다 서로 목숨을 끊게 된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퓌라모스와 티스베 신화가 이야기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토대로 한 연극을 마을 일행들이 연습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바틈은 연극 속 비극적인 남자 주인공 퓌라모스 역을 맡게 된다.    무식한 바틈은 자신이 맡게 된 퓌라모스 역이 어떤 역할인지 모르고 있지만 비록 오베론의 마법에 의한 것이지만 바틈 역시 퓌라모스처럼 티타니아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에는 당나귀 머리를 사랑하는 티타니아는 티스베인 것이다.   

두 사람의 가슴을 태운 사랑의 불꽃은 그 뜨겁기가 같았을까, 달랐을까?  아마 같았겠지. (중략)  감추면 감출수록 깊어가는 게 사랑이잖아?   속으로 속으로 타들어가는 섶 속의 불씨 같은 게 사랑이잖아?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1> '퓌라모스와 티스베' 편, 민음사 pp 156~157 -  

   

퓌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는 단지 바틈과 티타니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마법에 걸린 허미아와 라이샌더 역시 집안의 반대로 인해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할뻔한 연인이기 때문이다.  

마냥 희곡 속의 코믹한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인간은 사랑에 빠지면 3쌍의 연인들 그리고 티타니아와 바틈처럼 맹목적으로 상대방만 보게 된다.   이와 관련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재미난 실험을 소개하자면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성의 사진을 보여준 후 주의력을 테스트한 결과, 대부분 주의력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참 사랑에 빠져 온통 상대방의 생각뿐인 사람들은 멋진 이성을 보고도 대부분 한눈을 팔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표현대로 한 번 지핀 불씨가 겊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듯이 사랑 역시 심장 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면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감정이다.





  '사랑' 판타지의 마력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해프닝이었지만, 희곡 속에서는 모두가 결국 자신의 짝을 바로 찾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마법을 사용한 유혹은 결국 일탈이자 공상으로 끝난다는 교훈도 덧붙여서 말이다. 작품 말미에서 소동의 장본인인 퍽은 익살스럽게 관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있다.  

 

저희 그림자들이 언짢으셨다면 / 이러한 영상들이 보였을 때 / 잠들어 있었을 뿐이라고 /  

생각만 고치시면 다 괜찮죠. / 그리고 가볍고 시시하며 꿈처럼 헛것 같은 이 주제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 용서해 주시면 잘해보겠습니다.   

- 5막 1장 중에서, pp 110 -

 

셰익스피어만의 유머가 묻어나 있는 희곡답게 결말 역시 유머스럽고 재치가 있다.  희곡 속 인물들만 마법의 장난에 농락당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 또는 연극을 보고 있는 독자/관객들 역시 지금까지 지켜본 사건들이 그저 작품 속의 한여름 밤의 꿈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만들어낸 판타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혼동하게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한여름 밤의 꿈>이 널리 읽혀지고 자주 무대에 오르는 이유가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사랑 판타지의 마력이 현대인들의 감성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여름 밤의 꿈>에서 펼쳐치는 사랑의 판타지들은 어떤 이들에게는 여름날 밤에 이루어졌던 꿈 같은 사랑의 추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비록 한낱 꿈으로 남게 되지만 허미아와 라이샌더처럼 더욱 해피엔드로 끝날 사랑의 결실이 맺어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판타지의 마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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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9-0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올핸 시루스님 세익스피어를 올킬하실 모양이시군요!
좋습니다.^^

cyrus 2011-09-05 16:22   좋아요 0 | URL
이 계획이 과연 언제 끝날까요? ㅎㅎ
아마도 내년까지 갈거 같네요 ^^;;
 
어둠의 심연 을유세계문학전집 9
조셉 콘라드 지음, 이석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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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18] 어둠의 속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폐쇄적인 서구인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며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드는 제국주의적 태도를 이야기 하고자 할 때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은 자주 인용되는 소설 중의 하나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말론 브란도 주연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으로 알려진 소설이기도 하는데 자랑할 수준은 아니지만 평생 독서를 하면서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작가를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원제는 Heart of darkness 인데 국내에서는 '암흑의 핵심' (민음사 판), '어둠의 심연' (을유문화사 판 외 그 밖의 출판사) 등으로 소개되어 있다. 사실 을유문화사판을 읽기 전에 처음에는 '암흑의 핵심' 으로 소개된 민음사 판본을 읽었는데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작품을 읽는데 몰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아무래도 콘래드 특유의 본연의 의미를 드러나지 않게 암시적으로 풀어낸 문체가 나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을유문화사 판에 수록된 콘래드의 또 다른 단편 <진보의 전초 기지> 역시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읽어야했을 정도였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화자인 말로가 템즈 강가에 정박한 어느 상선의 갑판 위에서 들려주는 체험담에 근거하고 있다. 젊은 시절 아프리카 벨기에령 콩고의 어느 회사 소속 기선의 선장으로 취직한 말로가 우여곡절 끝에 콩고 강 상류의 오지로 가서 커츠라는 일급 교역상을 만나게 된다.   

커츠는 현지인들 위에 초법적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다이아몬드 채취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면서 승승장구하는 교역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끊임없는 무장경계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신처럼 대접받으면서도 순간순간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 같은 분열적 상태 속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황폐해져만 갔고 이는 신체까지 좀먹었다. 커츠는 결국 귀국하지 못한 채 “ 끔찍하다, 끔찍해. ” (pp 151) 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커츠로 대표되는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은 세계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하였으며
야만인들을 문명화하는 것은 “백인들의 의무” 라는 명분까지 내걸고 식민지 정복의 길에 뛰어들었다.   제국주의가 판을 치고 있던 서구 문명에서는 커츠의 입장은 그 당시로서는 통용되고 있는 일반적인 수사였다. 커츠도 자기 딴에는 고귀한 사명감에 넘치는 인물이어서, ‘아프리카에서 무한한 선을 행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활동 계획서로 정리하여  ‘야만적 악습 억제 협회’ 에 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관습과 문화를 가진 인간들을 비인간화하고 자신을 신격화했던 왜곡된 환상의 결과는 자기파괴였다.

검은 아프리카 대륙으로 상징되어지는 ‘어둠의 심연’ 으로의 항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화자인 말로는 궁극적으로는 커츠의 아프리카 경험이 주는 인간적 가치의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말로의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 속에서 ‘어둠’  , '암흑' 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사명감이 지닌 헛됨과 그러한 헛된 사명감의 정신적 기조를 이루는 정신적 황폐함을 상징화시키고 있다.  암흑의 대륙에 문명의 빛을 전달한다라는 사명감에 투철한 유럽인들의 우월주의적 시각이란 결국은 아프리카인들과 그들의 상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배와 원시적 암흑 대륙에 대한 문명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관념’ 에 불과 하며, 실제 아프리카의 현실과는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관점의 비평이 소개되면서 재해석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식민주의를 찬양하고 있다는 비평도 있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현재까지도 조지프 콘래드를 '제국주의자' 라는 평단의 오해가 존재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징적이면서도 갈팡질팡하는 문체로 인한 해석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길 법도 하다.    텍스트를 읽는 독자마다 이해의 방식이 확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콘래드가 서구의 식민주의를 막연히 '찬양'하는 수준은 아니다고 생각이 든다.   

서구의 이중성과 제국주의의 유령은 지금도 아프리카나 제3세계 국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와 남미 등 남반구에  깊고 큰 상처를 남겼으며 다국적기업의 횡포 탓에 만성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다국적기업은 온갖 불법을 자행하고 부패한 권력과 결탁해 한 국가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가 씌워놓은 그 굴레를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던지지 못한 채 지금 아프리카와 제3세계의 현실은 너무 어둡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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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3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흑의 핵심이군요...이거 매력적인 작품인데...전 예전에 원서로 읽다가(중간도 못 넘겼음)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번역본을 구해놓고는 아직도 완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리뷰를 보니, 8월이 가기전에 완독하고 싶네요..

cyrus 2011-08-25 19:42   좋아요 1 | URL
짧은 분량인데도 읽는데 힘들었어요, 저만 그러는지 모르겠지만요 ^^;;

노이에자이트 2011-08-2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흑의 핵심'도 '문명의 전초지'도 결국 주인공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납니다.제국주의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요.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사고방식에 굉장히 비판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로 보고 싶습니다.저는 이 두 작품이 콘라드의 다른 작품보다는 반제국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봅니다.

저는 '문명의 전초지'가 '암흑의 핵심'보다 읽기 쉽던데요.더 짧기도 하지만...마지막 시체 장면이 압권이죠.

cyrus 2011-08-25 19:43   좋아요 0 | URL
다음 작품으로 <로드 짐>을 읽어보려고 해요, 민음사에서 두 권짜리로
나왔는데,, 읽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1-08-26 16:54   좋아요 0 | URL
로드 짐 읽기 전에 문명의 전초지를 한 번 더 읽으라고 권하고 싶네요.정독하면 할수록 맛이 나는 단편입니다.

'청춘'을 구할 수 있다면 읽어도 좋아요.로드 짐처럼 해양소설이면서 분량도 짧으니까요.

에드워드 사이드의 콘라드 평가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콘라드를 평가해 보시길 바랍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4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지옥의 묵시록은 정말 매니아가 많은 영화잖아요. 그런데 드디어
시루스님의 취향과 맞지 않는 작가를 만났다는 부분에서 그만 폭소를. ^^

저한테도 읽지 못 한 조셉 콘라드의 작품이 틀림없이 있는데, 어디있는지 찾지 못 하겠어요. 아하하......... 자기 서재의 책도 못 찾다니, 비극이예요, 증말.

cyrus 2011-08-25 19:44   좋아요 1 | URL
그 유명한 영화,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어요.
마고님 댁에 책이 얼마나 많길래 못 찾으시나요? 저도 한 번
그런 경험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

네오 2011-08-24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글을 읽으면서 '아하~ 그렇구나'라며 나지막히 탄식했습니다. 조셉 콘라드는 제가 허빈 멜빌과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영미소설가이지만 그렇게 제대로 이해하는 작가는 아니네요~ 그의 소설이 나오는대로 무작정 모아놓고 읽어보는 저로서는 ㅋㅋ <지옥의 묵시록>도 제가 전쟁영화라는 장르만을 한정짓고 놓고 봤을때 거의 베스트10에 껴들만한 작품인데 원래는 이 소설을 맨처음 영화화하고 싶었던 감독은 프란시스 f 코폴라가 아니라 <시민 케인>의 오손 웰즈라고 하더군요~ 이 두 감독이 황홀한 정도로 스타일리쉬했던 감독으로써 이 <암흑의 핵심>에 빠져들었던 감정이 어떤 마음이었을라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몸서리치게 만들던군요~ 아무튼 <암흑의 핵심>도 좋아하고 <지옥의 묵시록>도 좋아해요^^ 아~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나오는 그 장면만 수십번 본거 같네요~

cyrus 2011-08-25 19:45   좋아요 1 | URL
원래는 허먼 멜빌을 읽으려다가 어쩌하다 보니 콘래드의 소설을 집어
들었어요, 콘래드 역시 항해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죠.
정말 그 유명한 영화, 꼭 보고 싶네요. ^^

2011-08-24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