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격세지감이다. 이 책이 아직까지 판매되고 있었다니. 미셸 깽의『처절한 정원』을 처음 읽었을 때가 10년 전이다. 한창 히딩크의 월드컵 대표팀이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붉은 악마'가 되어 열띤 거리 응원전을 펼치던 그야말로 행복한 시절이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책은 2005년에 출판된 것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3년 전에 처음 출판되었던 걸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 기억이 강하게 자리잡은 이유에는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났고 이 책을 읽고난 뒤에 학교 내에서 만들어진 독서기록장에 감상문을 썼기 때문이다. (가끔 창고를 정리하면 옛날에 기록한 것들(예를 들어 초등학생 때부터 쓴 일기장, 알림장)을 발견하곤 하는데 정작 중학생 시절 때 쓴 독서기록장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불가사의다. 어디로 사라진걸까? 버리지 않았을텐데... 언젠가 꼭 찾고 싶은 물건이다)

 

사실 처음 이 책 읽었을 당시, 생전 처음 접해 본 프랑스 작가의 짧은 이야기를 읽고난 뒤에 큰 감동을 받았다. 여기서 문자로만 '감동을 받았다'라고 적기에는 그 때 그 시절, 독서의 감동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광기에 휘말려야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그와 관련한 추억들을 아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모리스 나치 협력자 모리스 파퐁의 재판이 진행될 때 아들이 생전에 아버지가 입었던 광대 복장을 입고 참석한 장면 등이 인상 깊었다. 분명 이러한 이야기라면 나름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프랑스에서 출판했던 당시에 영화로 만들기에 좋은 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았을 정도니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에 등극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미셸 깽의 소설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지금도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는지 수긍이 가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프랑스 작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였다. 하필 이 해에 『뇌』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얇은 미셸 꺵의 소설이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책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만 가고 있었고 최근에 우연히 알라딘 검색하던 도중에 이 책이 지금도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앍게 되었다. 내가 좋았했던 책이 십년이 지난 지금도 절판되지 않은 채 팔리고 있다는 게 내심 뿌듯했다. 그리고 이 책이 중학생(중1)들을 위한 서울시교육청 선정 추천도서란다. 나 역시 중학생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는데 그 때 나이 또래 지금의 중학생들도 이 책을 읽고 있는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하다.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최근에 다시 미셸 꺵이 들려주는 '처절한 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내가 읽었던 2002년에 출판된 책이 도서관 서가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워낙에 얇은 책이라 자신보다 커다란 책 틈 사이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한 손에 쉽게 쥘 수 있도록 작은 판형은 여전했다. 하지만 작은 책도 무시 못한다. 짧지만 감동적인 한 편의 드라마로, 극한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모리스 파퐁 (1910~2007)

 

 

사망 당시, 그는 자신의 나치 협력 전력이 밝혀지기 전에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자신의 무덤에 함께 매장한 점에 대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변절'로 점철된 나치 협력자가 죽은 넋이 되었다하더라도 과연 떳떳하게 훈장과 함께 묻힐 자격이 있을까?

 

 

 

소설의 중심 모티프는 지난 20여년간 프랑스뿐 아니라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모리스 파퐁 재판'이다. 파퐁은 2차대전때 레지스탕스 대원이었다는 경력을 내세워 드골 정권하에서 예산장관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시 정권하에서 수많은 유태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나치 협력자였다. 그의 치부는 한 역사학자의 추적에 의해 폭로됐으며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파퐁은 1997년에 10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소설은 파퐁 재판이 열리던 법정에 어릿광대 복장의 한 남자가 입장하려다 저지당하는 광경으로 시작된다. 결국 분장을 지우고 재판을 지켜본 기이한 행동의 주인공 '나'는 작고한 아버지와 삼촌, 숙모를 회상하며 이런 행동이 나오게 된 배경을서술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틈나는대로 어릿광대 복장으로 차리고 사람들을 웃기는 일을 자청하던 괴짜였다. 나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창피하게 여겼지만 기행 뒤에 가슴을 울리는 일화가 숨겨져 있음을 삼촌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다.

아버지와 삼촌은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하다 독일군에 잡혀 흙 구덩이에 갇히게 됐는데 당시 그들을 감시하던 독일군 초병이 익살과 묘기로 추위와 공포로 떨던 그들을 안심시키고 삶의 희망을 준 적이 있다. 총은 들었지만 인간미로 가득했던 보초병은 뒤에 자신의 전직이 어릿광대라고 그들에게 전한다.

소설의 진가는 막판의 대반전에서도 발휘된다. 주인공의 눈에 촌스럽게만 보였던 숙모에게 슬프면서도 장엄함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삼촌이 독일군에게 잡혀 구덩이에 갇힌 것은 열차역 변압기를 폭파하는 임무 때문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끝낸 뒤 독일군에 잡힘으로써 처형될 위기에 처해진다. 하지만 그들은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폭파범이라고 자수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버지와 삼촌의 목숨을 부지하게 만든 '그'는 누구일까?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겠다. 리뷰가 자칫 스포일러가 될 우려가 있고 아직까지 이 감동적인 소설을 접해보지 못한 무언의 독자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

 

 

아직도 삼촌이 말하는 모습과 문장들이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 삼촌의 이야기는 자신이 겪었던 잔인한 순간들의 그림자에 불과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의 문을 나에게 열어 준 것이다. 삼촌은 내면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던 전부를, 잔인한 발자국들로 짓밟혀 피범벅이 된 처절한 정원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 삼촌이 전해준 그 생생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

 

 - 미셸 깽『처절한 정원』중에서, 문학세계사, pp 40 -

 

 

 

 '삼촌은 내면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던 전부를, 잔인한 발자국들로 짓밟혀 피범벅이 된 처절한 정원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는 주인공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처절한 정원'은 독일 나치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변절자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수많은 프랑스인들의 터전이며,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가족의 희생적인 삶의 기억이 남아 있는 역사을 의미한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광대 복장을 하고 파퐁 재판의 방청석에 들어간다.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주인공은 아버지가 그토록 부활시키고 싶어 했던, 전쟁의 고통을 안고 간 영혼들의 이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조용히 되뇐다.

 

 

 

 

범죄자가 아닌 자의 속죄 (사진출처: 한겨레)

 

반인륜적인 전쟁이 할퀴고 간 역사의 상처는 비단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남아 있다. 그러한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약자들이 있는 반면에 모리스 파퐁처럼 자신의 행위에 반성하지 않은 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회개와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며 무릎을 꿇은 채 참회하고 있다. 그는 위안부에 대해서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반성했다. 이러한 분들이 있기에 지금도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고자 하는 '진실'이 존재하며 더 나은 역사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원래 광대였던 독일군 보초가, 훗날 광대가 된 화자의 아버지가 선택한 우스꽝스러운 몸짓은 '자신의 편' 때문에 죽어가야 했던 숱한 희생자들에 대한 속죄의 몸짓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왜 진정한 범죄자들이 아닌 그들이 속죄의 짐을 져야 하는가. 반대로 속죄해야 할 누구는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지 않은 채 죽어서도 끝까지 허울뿐인 '명예'를 무덤까지 가지고 갈려고 한다. 그와 같은 질문을 숨겨둠으로써 소설 속의 화자 그리고 작가는 역사 앞에서의 철저한 반성의 연대를 촉구하는 것이다.

 

비중이 작지만 소설 속에 독일 병사 베른이 보여 준 포로에 대한 친절은 시대의 잔혹함에 고뇌하는 인간의 '양심'을 느끼게 해 준다. 양심과 용기만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가능케 하는 실마리가 된다. 모든 것을 참혹하게 무너뜨리는 전쟁의 비극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전쟁은 수많은 인간관계를 본의 아니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중첩시킨다. 프랑스인들이 독일 나치에 의해 시련과 고통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나라 잃은 슬픔과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아픈 기억이 치유되지 못한 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남아 있는 역사의 아픔을 무조건 묻어두기보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 치유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겐 곧 역사를 바로 알고 가슴에 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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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0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나도 몇년 전에 읽었는데.
얇은데도 참 잘 쓴 것 같아.
그런데 감동스럽고 처절하고 이러진 않았던 것 같아.
아무래도 내 현실이 아니라고 느껴서 그럴까?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싶네.

cyrus 2012-02-21 19:11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랜만에 읽으니깐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이 나지 않더라고요.
정확하지 않지만 이 소설, 영화로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영화로 본다면 정말 감동적일거 같아요. ^^
 
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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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728] 장미의 이름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성이 잠들면 괴물을 낳는다>  판화집 '카프리초스' No. 43,  1799년 

 

 

 

 

 

 

 

 

 5년 만에 완독 성공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두 권짜리를 처음 구입했을 시기가 이제 막 대학생이 된 2007년,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다. 에코의 소설이 유명한데다 어느 일간지에서 선정한 대학생 새내기 추천도서목록을 본 뒤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이맘때가 되면 일간지의 북섹션마다 2012학번 대학생들을 위한 추천도서를 소개한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이제는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될 정도로 어엿한 '세계문학'으로 자리잡았지만 5년 전만 해도 『장미의 이름』은 전집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장미의 이름』 은 회색 사철 양장본이다. 회색 사철로 된 『장미의 이름』은 온, 오프라인 서점에서 찾기가 드물어졌다. 알라딘에서는 절판 상태다. 지금 세계문학전집의 『장미의 이름』은 노란색 사철 양장본으로 나오고 있다. 요한묵시록의 주석서에 실린 삽화를 차용한 표지는 여전하다. 간혹 헌책방에 들리면 국내에 처음 소개된 1986년판 『장미의 이름』이 굴러다니긴 한데 세월이 조금 지나면 개정판인 회색 사철 양장본도 헌책방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5년 전에 구입해놓고선 여러 차례 완독의 실패를 고배를 마신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읽기 시작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횟수만 해도 수십번 정도다. 중세와 관련한 방대한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낸 스토리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장미의 이름』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 것이다. 개정을 거듭하면서까지 내용을 보충한  故  이윤기 씨의 상세한 역주가 있어도 중세 사상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자신의 눈에는 그저 어렵고 빽빽한 문자로만 보일 뿐이다.    

 

본의 아니게 소설의 결말을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1권 때문에 알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 소설만큼은 완독하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오히려 작년에 숀 코너리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소설을 읽어보려고 한 번 뒤적거려보기도 했다. 비록 이 도전 역시 실패했지만.

 

결말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장미의 이름』을 완독하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을 보자하니  내 자신이『장미의 이름』에 아리스토텔레스『시학』 2권을 읽으려고 한 수도원들이 떠올려졌다. 이들은 금지된 책에 담겨진 금지된 지식을 알려고 하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사람이 쓴 어렵기로 유명한 소설을 읽으려고 하다가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한 셈이다. 

 

굳이 결말을 알고 있는 책을 완독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장미의 이름』 독서의 목적은 스토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맞추기 보다는 소설 속에 소개된 중세의 사상 그리고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배경을 알고 싶었다. 시지프스가 죽어서도 영원히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 것처럼 나는 도전, 중간에 포기를 반복해야 했다. 1권짜리 완독은커녕 1권 반 페이지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중간에 읽다가 포기한 책은 꼭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첫 장부터 다시 읽었다. 결국에는 한 달동안 틈틈이 읽은 끝에 두 권짜리를 완독할 수 있었다.

 

 

 

 

 역사의 회색시대라기엔 너무나 어두웠던 중세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독자는 중세라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중세'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거나  그저 막연하게 알고 있어도 에코의 소설을 읽기가 수월하지가 않다. 중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암흑시대가 아니라 신앙과 이성,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시대다. 중세적 삶의 문법과 근대적 삶의 문법 가운데 무엇이 더 옳으며 무엇이 더 좋은가를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에코가 재현한 중세는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도서관을 미로처럼 설계할 수 있는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지성의 시대였다.

 

하지만 지성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인들은 지식을 누리는 데 있어서 적잖이 한계가 있었다. 중세의 도서관은 오늘날처럼 누구나 마음대로 책을 빌려가면서 읽지 못했다. 특정한 시간만 도서관의 책을 열람할 수 있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열람'은 책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읽는 것이었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교회 도서관에 보관된 책을 읽거나 필사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으며, 심지어 목숨을 바칠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단적인 사상으로 규정되어 금지된 책을 읽으려고 했다.

 

소설은 종교의 맹신적 믿음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시절의 이야기다. 종교와 교회의 입장에서는 화려했던 장미가 꺾이는 시기였던 것이다. 종교적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맹목적인 신앙을 내보이는 구 세력과 철학적 이성을 중시하는 젊은 수도사들 간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 관리륻 담당했던 원장 수도승은 그리스 철학에 관한 책들이 보관된 장서관의 출입을 철저히 막는다. 아울러 일반인의 경우 조금이라도 부도덕하다고 판단되면 마녀사냥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로 인한 억압과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는 지식에 대한 갈구를 불러일으켰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교리로부터의 깨달음보다는 진리 그 자체, 곧 삶의 비밀을 추구하기 위해 책을 보고자 했다. 에코는 책의 서문에서 이런 중세인들의 인생관을 라틴어 명언을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수도승이 찾고자 했던 지식의 근원은 도서관에서 숨겨져 있었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pp 23)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의 원인은 단 한권의 책 아리스토텔레스『시학』 2권 때문이었다.  『시학』2권은 희극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뿐 아니라 웃음도 우리 삶에 유용하다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르헤 신부는 웃음은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마의 선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웃는 순간 자신이 원죄를 진 존재라는 것을 잊고,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 교리에 집착했던 호르헤 신부의 눈에는 야밤에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으려고 한 수도원들이 위험천만한 이단자로만 보였던 것이다.

 

 

 

 

 지식의 권력화의 위험성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그 이름뿐이다. 호르헤 신부가 예수와 기독교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었다면, 월리엄 수도사는 그 진리란 이름뿐이라고 말했다.『장미의 이름』은 월리엄과 호르헤의 대결을 통해 독자들에게 깨우쳐 준 교훈은 진리란 알고 보면 이름뿐인 데, 그 진리라는 허상에 얽매이면 자신이 '악마의 책'이라고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처럼 자신도 남을 파멸시키는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악마로 만드는 것은 호르헤 신부가 휘둘렀던 권력이다.

 

진리의 권력화는 근대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서양 열강은 기독교 사상을 내세워 자신들보다 미개한 문화를 지닌 식민지를 '종교 전파'라는 명목 하에 지배 헤게모니로 사용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수천 년 전에 등장한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절대적인 지식이 권력이 될 때, 그 지식 권력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사탄이 된다. 에코는 이러한 문명사적인 비극을 중세 말의 신앙과 학문의 대립을 통해서 그려냈다. 중세의 악마는 호르헤 신부처럼 역설적이게도 교회에서 생겨났다.

 

이단에 대한 탄압과 신학적 독단, 마녀사냥,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중세의 지배질서는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면 '동지', 그 반대는 '적'이라고 여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권력과 야합한 진리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위험한 우상이 된다. 이러한 우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윌리엄 수사가 추구했던 인간 자신에 대한 진지한 반성,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열린 자세, 독단에 빠지지 않는 합리적 탐구가 필요하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윌리엄의 제자였던 아드소가 수도원의 폐허 위에서 내뱉는 독백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라져 버린 과거의 아름다웠던 장미의 '이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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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어려운 책을 읽었구나.
난 영화로 봤는데. 영화로 잘 봐서 책으로는 볼 맛이
안 나더라.ㅋㅋ

cyrus 2012-02-20 18:41   좋아요 0 | URL
영화는 살인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과 미로 도서관 장면이
일품이죠. 그래서 저 역시 소설보다는 영화로 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

차트랑 2012-02-2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머리를 쥐어짜며 읽는다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는 제게 마치 세트처럼 다가왔답니다 ㅠ.ㅠ
장미의 이름을 대하니 무착 반갑군요
저는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포기한 상태인데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12-02-21 19:07   좋아요 0 | URL
역시 소설보다는 영화로 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영화로 보면 내용이 금방 이해가 가더라고요.
 
우울과 몽상 -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홍성영 옮김 / 하늘연못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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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001-91] 어셔 가의 몰락

[1001-96] 갱과 추 (저승과 진자)

 

 

 

 

 가장 오래되고 강렬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다.

 

 - H.P. 러브크래프트 -

 

 

 

 

 공포문학의 효시, 에드거 앨런 포

 

공포문학은 오싹하고 음산하지만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녔기에 시대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주, 재생산되며 읽혀지고 있다. 괴기스럽고도 공포스러운 이 이야기의 근저를 이루는 초자연적인 공포는 인류의 출연과 함께 시작됐으며 그 자체로 문학 형식이 되기도 했다. '공포'라는 감정을 주제로 또 하나의 문학 장르를 구축한 에드거 앨런 포야말로 공포문학의 효시로 보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포가 태어나기 이전에 유럽에서는 이미 공포와 초현상을 주제로 한 고딕소설이 유행했기 때문에 포를 '공포문학의 원조'라고 평가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것이다. 그런 포 역시 고딕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어셔 가의 몰락」이다) 

 

하지만 포의 소설은 현실을 벗어난 독특한 환상의 세계를 창조했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적 공포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포는 세속적인 주제에 사로잡힌 예술과 문학을 경멸하였으며, 그 자체로 새롭고도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의 문학적 평가는 죽은 지 1세기가 지난 뒤에서야 이뤄졌다. 혹자의 비평가는 포를 미국 문학사에 크게 이바지한 영향이 없다고 저평가할 정도로 포는 자신이 태어난 미국에서도 후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해 준 사람들은 저 바다 건너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뿐이었다.

 

국내에서도 포의 작품, 특히 너무나도 유명한 「검은 고양이」, 「어셔 가의 몰락」등은 단편소설 모음집을 통해 심심찮게 만나 볼 수 있지만 단순히 아동 대상의 독자들을 위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두 단편소설만으로 포 특유의 그로테스크를 느낄 수가 없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포가 남긴 수많은 단편소설들을 수록한 책이 『우울과 몽상』이다. 공포를 주제로 한 소설뿐만 아니라 '명탐정의 원조'인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하는 유명한 추리소설까지 포의 모든 단편소설들이 실려 있는 유일한 소설전집이기도 하다. 단, 소설의 분위기를 흐트리게 만드는 오자에다가 독자들 사이에서는 역자가 원전의 일부를 일부러 훼손한 채 발췌 번역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리는 게 옥의 티이다.

 

에드거 앨런 포가 공포를 주제로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정말 불행하기 짝이 없었던 일생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불우한 삶을 살았다. 젊어서부터 술과 도박, 아편에 탐닉했다.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과 정신을 본인 스스로 망가뜨리고 말았으며 번번히 연애에서도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포는 너무나도 가난했다.

 

그는 지독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글을 썼는데, 소설 대부분은 공포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분위기가 음울하면서도 환상적이다. 그가 표방하는 주제는 공포이며, 그 공포는 영혼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했다. 「검은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는 초자연적인 괴물의 형상이며,「어셔 가의 몰락」의 초반부에 그려진 늦가을 저물녘 늪가의 황폐한 옛 집은 바로 괴물의 집이다. 검은 고양이와 그 기괴한 분위기는 유년기에 포의 마음 깊은 곳에 축적된 공포감에서 나온 것이다.

 

 

 

 

 

 공포 앞에서 굴복하고 마는 인간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마로니에북스, 2007)는 수백명의 국제적인 문학 관편 필자들이 선정한 작품들이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 소개된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은 두 편이다. 그 두 편이 바로 「어셔 가의 몰락」「저승과 진자」(국내에 번역된 박스올의 책에서는 '갱과 추'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다. 포의 대표작인「검은 고양이」가 아닌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단편소설인「저승과 진자」가 소개된 점은 이례적이다.

 

하지만 「저승과 진자」에서도 절망적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공포적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공포로 인해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린 절망적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음산한 분위가 흘러나오는 어둡고 폐쇄적인 방, 먹이에 굶주린 채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는 쥐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진자의 날카로운 거대한 칼날을 보면서 공포에 질린 소설의 주인공. 「저승과 진자」속 주인공은 소설 시작부터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강력한 공포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다. 포는 밀폐된 공간 그리고 '끔찍한 죽음의 선고'(「저승과 진자」pp 734)를 내리려고 하는 진자의 칼날이라는 공포스러운 공간을 만듬으로써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공포감에 의해 피폐해져만가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   

 

나는 눈을 떠 내 앞에 펼쳐진 환영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물을 최초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 끔찍한 것을 보게 될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결국 강렬한 마음의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눈을 떴다. 그러자 상상했던 최악의 상태가 나타났다.

 

 - 에드거 앨런 포 「저승과 진자」중에서 (pp 737) 『우울과 몽상』홍성영 역 -

 

 

「어셔 가의 몰락」에셔는 우울증에 사로잡힌 채 알 수 없는 공포감에 괴로워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혼란스러운 정신 이상 증세를 가진 주인공 어셔와 음습한 분위기로 가득 찬 어셔 가의 저택에 대한 고딕소설풍 묘사는 아편 중독으로 인한 후유증을 경험한 포였기에 가능했다.

 

 

나는 내 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단 한 채의 저택과 그 주변의 단조로운 풍경, 황폐한 담, 공허하게 뜬 눈 같은 창, 몇몇 사초 더미, 그리고 뒤섞인 나무의 흰 둥치들. 나는 그것들을 극도로 침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감정은 아편 중독자가 꿈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베일을 벗겨내는 끔찍함 이외에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었다. 마음속이 싸늘해지고, 기운이 빠지고, 매스꺼웠다. 어떤 상상을 해보아도 적막감을 누그러뜨릴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음울함이었다.

 

 - 에드거 앨런 포「어셔 가의 몰락」중에서 (pp 675) -  

 

 

그래도 포라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 바로 「검은 고양이」다. 온순했던 인물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으면서 무시무시한 살인자로 변하는 모습은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악마'스러운 본성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아내를 살해하게 되자 아내의 시신을 지하실 벽 속에 감쪽같이 숨긴다. 하지만 완전범죄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끔찍한 살인의 내막은 들통난다. 시신이 숨긴 벽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게 되고 그 곳을 허문 순간, 부패된 아내의 시체와 시체 옆에서 외눈의 검은 고양이가 흉칙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면서 앉아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괴물'이 벽 안쪽에 시신과 함께 있는 그 '괴물' 검은 고양이를 벽에 발랐던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거나 특정한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되면 주위에 평범한 대상들도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살인자는 자신의 살인 행위를 유발하게 했으며 그 장면을 목격했을 고양이를 무서워한다.

 

 

처음에는 끊어질 듯한 어린아이의 흐느낌 같은 울음소리였는데, 곧 너무나 괴기하고 사람 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끊임없이 울리는 큰 비명 소리로 바뀌었다. 그것은 비탄에 잠긴 저주받은 이와 그 저주에 기뻐 날뛰는 악마의 목구멍에서 함께 나오는, 지옥에서만 솟아오르는 공포와 승리감이 섞인 울부짖는 비명 소리였다.

 

 - 에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중에서 (pp 654) -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고양이가 우는 소리로만 들렸겠지만 살인자의 귀에서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자신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던 아내가 벽 속에서 외쳐대는 절규에 찬 비명 소리였던 것이다.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포의 이야기

 

포가 썼던 단편소설들을 모은 첫 번째 소설집 제목이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다. 첫 번째 소설집 출간 이후에도 포는 제2의 소설집을 출간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첫 번째 소설집의 제목이아말로 포가 추구했던 문학적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로테스크'라는 단어의 뜻처럼 포의 소설에는 괴기스럽고, 흉측스럽고, 현실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존재와 세계가 있다. 그런 형식을 지는 포의 소설이 자칫 우울하고 비이성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일종의 기피감을 가질 수 있겠다. 그의 문학을 칭찬하고 프랑스에 소개했던 보들레르의 문학처럼 포의 문학 역시 단지 '우울하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포는 문학의 목적이 도덕이나 교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美)의 창조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꿈과 상상의 세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고 그 곳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짧은 소설마다 소재의 창발성에 놀라고, 때론 광기어린 감정 묘사에 혀를 내두르고, 때로는 기발함에 멈칫하게 된다. 몽상적인 소재들이 많아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무엇보다고 그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마주할 때 가지게 되는 인간의 무의식 속 감정, 즉 '공포'에 질리면서 나타나게 되는 감정의 급격한 변화도 묘사하고 있다. 

 

다독가인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젋은 시절에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문학의 상상력이 실제 현실과 비교할 때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소설과 같은 픽션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했다. 다치바나 다카시 입장에서는 단순히 시간낭비일지 몰라도 포의 상상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까?  더욱이 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는 현실에 벗어난 건 사실이지만 낯설고도 비현실적인 세계 앞에 공포감을 느끼는 감정만큼은 '실재'의 경험이다. 

 

이렇듯 포의 소설은 단순히 호기심 많은 아동들을 겨냥한, 순순한 동심으로 가득한 어린 독자들에게 겁을 주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게 만드는 싸구려 공포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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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2-18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잖아도 샤이닝님도 그러고 시루스님도 쓰시고 할인도 많이 돼서 이 책 살까 해요!^^

cyrus 2012-02-18 14:08   좋아요 0 | URL
요즘엔 이 책 싸게 팔더군요, 책이 두꺼워서 심심할 때 읽으시면
좋을듯해요 ^^

꽃도둑 2012-02-1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는 구체적 대상이 있을 때보다 막연하거나 형체가 없을 때 더 증폭된다고 합니다..
포의 공포는 분명 내적불안에 기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쏘우 인가요?,..보는 내내 기분나쁘고 섬뜩했어요, 그 팽팽한 긴장감의 줄을 탁! 끊어버리던 반점의 묘미도 있었지만...
암튼 공포 영화 호러 영화 소설 등...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cyrus 2012-02-18 14:10   좋아요 0 | URL
쏘우, 완전 최고죠! 저는 공포영화 한 편 보면 영화에서 봤던
영상들이 머릿속에 남아도는 편이라서 되도록이면 잘 안 보는 편이에요.
공포영화 무서워서 안 보는게 아니랍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2-02-1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우...좋죠.저는 '어셔가의 몰락'이 좋았어요.이 집의 정체는 뭘까...의문의 여인은...그러다 마지막에 저택이 와르르...기묘한 매력이죠.

그리고 포우의 유일한 장편인 <아더 고든 핌의 모험>이 몇 년 전 다시 번역되었으니 관심있으면 구해 읽으세요.

cyrus 2012-02-20 18:43   좋아요 0 | URL
저도요. 소설 중간에 삽입된 시도 좋았어요. '애너벨 리'가 연상되더라고요.

사실 포를 읽으면서 장편도 구입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절판이더군요.
그나마 중고샵에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게 비싼 가격에 팔고 있고요..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네요 ^^

휘오름 2012-02-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전에 포우 단편집 조그만한건 한번 봤는데 제대로 나온 책은 한번도 못봐서 고민중이었네요. 이기회에 한번 도전해 바야겠궁요..ㅎ
 
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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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15] 보바리 부인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바다와 나비」-

 

 

 

 

 

『마담 보바리』가 출간된 1857년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현대'가 시작된 시기다. 마담 보바리는 사랑의 현대적 의미를 묻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결혼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주제와 소재가 통속적일 수도 있지만 일상의 지루함, 즉 '권태' 앞에서 무력해지는 군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이다. 중세적 전통에서 시작한 시민적 결혼의 이상이 결코 소시민적 이상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소설은 출발한다.

 

엠마는 여느 귀족이나 부르주아 가정의 딸처럼 사춘기를 수녀원에서 지내면서 정숙한 가정 생활이 행복의 원천이라는 교육을 받는다. 그 당시 여성들에게 유일하게 배울 수 있는 교육이 정숙한 부인이 되는 방법 또는 예절이었다.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샤를 보바리라는 의사가 농장으로 왕진을 오고 엠마의 평범한 일상에는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엠마는 사를 보바리와 결혼을 하지만 시골 구석에서 앞날 없는 왕진 생활에 만족해 하는 그는 아내의 욕구를 채워줄 수도, 소설적 환상을 함께 나눌 수도 없는 인물로 무력감으로 가녀린 비상을 꿈꾸는 나비를 또다시 권태의 거미줄에 옭아매고 만다. 그러던 중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멋진 청년 레옹을 만나며 그가 열정적인 사랑을 고백해오기를 기대하고, 세련된 바람둥이 로돌프가 자신을 데리고 먼 곳으로 떠나주기를 바라지만 엠마를 기다리는 것은 일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배신과 환멸로 가득찬 현실이었고, 환상을 채우기 위한 애정 행각으로 생긴 엄청난 경비 목록과 고리대금 업자로부터의 빚 독촉뿐이었다. 환상을 좇다 날개가 찢긴 나비, 엠마 보바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자신에게 환상의 날갯질에 대한 불먕을 불러일으켰으면서 그 날갯질을 허용하지 않는 삶을 저주하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땅에 묻히는 것뿐이었다.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  <무도회 이후>  1895년

 

 

 

 

그녀의 일탈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었고, 그녀의 순수한 갈망은 그녀가 탐독하던 낭만적인 삼류소설 속에서만 읽혀질 수 있었다. 자유분방한 애정행각이 수반한 과소비로 인해 경제적 파탄에 이른 엠마 보바리가 택한 해결책은 음독자살이었다. '소설'과 같은 낭만적인 삶을 동경하고, 일상의 단조로움을 떨쳐버리는 사랑을 항시 찾아헤매던 에마는 죽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교정하고 있는 셈이다.

 

『마담 보바리』가 출간될 무렵에는 중세적인 계약 결혼의 풍속이 사라지고 남녀의 사랑에 기반한 결혼 풍속이 이미 자리잡은 시기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일상이 낭만과 명확하게 구분되어지는 시기였다. 낭만적인 결혼관을 키워온 엠마 보바리에게 샤를과의 결혼생활은 현실이었고, 그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였던 엠마가 저지른 불륜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도덕적인 시민사회에서 그녀가 서 있을 자리를 빼앗아갔다.

 

이 소설로 인해 그 유명한 '보바리즘'(bovarysme)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과거에 대한 추억, 미래에 대한 꿈이 현재를 지배하는 심리적 성향으로, 과거에 대한 추억 때문에 미래가 이상화되어 현재란 끝없는 환멸과 기쁨의 연속이며 현실 도피의 세계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현실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동시에 인간의 비극이다. 보바리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바리즘'이 일정 정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해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선 보바리 부인 그리고 그녀가 권태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것과 반대로, 권태를 그대로 받아 안고 있는 샤를 보바리처럼 '권태'라는 것을 누구나 경험한다.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마담 보바리의 자유로운 삶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현실의 냉엄함에 너무 무능한 현대인의 자기연민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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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14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어봐야 할 것 같네.
나이 들수록 권태가 문젠 거 같아.
예전에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씨였나? 배삼룡 씨였나,
하루는 너무 빨리 가는데 세월은 너무 지루하고 했는데
그말 참 이해해.
그런데 책이 좀 지루하다고 해서 읽어줄 자신이 없더라구.
이거 읽다 권태로워 엎어버리면 어쩌지?ㅋ

cyrus 2012-02-15 22:46   좋아요 0 | URL
그러면 읽지 마세요. 위험해요 ^^;;
저는 플로베르의 사실적인 문장 때문에 조금은 지루했어요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2-1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보바리즘. 그러면 저도 가끔 보바리즘에 시달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책을 읽으면 가끔 모든 현실에 심드렁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해요. 요즘 좀 나아졌는데 한때는 재미 없으면 읽다 던져놓고 읽다 던져놓고 그런 적도 있도 이제는 끝내는 거에 강박관념이 생겨가지고 끝까지 붙잡고 읽기도 하고. 파멸로 가면 문제겠지만 권태를 이겨보려고 책이든 뭐든 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요. 보바리 부인이 살던 시기는 참 그렇기도 했고요^^

cyrus 2012-02-15 22:48   좋아요 0 | URL
앙드레 지드가 말했듯이 가끔은 읽고 있는 책을 내던질 필요가 있어요 ^^
이제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 여행이라도 가고 싶어요.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네요 ^^;;
 
절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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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한 작가의 흔치 않은 소설

 

나는『절망』에서 나의 다른 책들에서처럼 어떠한 사회적 논평도 제시하지 않고, 어떠한 교훈도 입에 담지 않는다. 이 책은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지도 않고, 인류에게 올바른 출구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 V. 나보코프,『절망』1965년 영문판 서문 중에서 (최종술 역, 문학동네, pp 239)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단 한 권의 소설로 문학사에 기록되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롤리타 콤플렉스'로 알려진 ,『롤리타』의 성공을 통해 문학사에 기록된다. 그러나 소설뿐만 아니라 시, 희곡, 비평 등을 남길 정도로 엄청난 다작 능력을 지닌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번역된 나보코프의 소설들은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널리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출세작인『롤리타』가 영화로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커다란 인기를 누리게 되는 바람에 그의 다른 작품들의 문학적 가치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최근에 출간된 나보코프의『절망』은 국내에 번역된 그의 소설들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집필된 것이다. 그동안 소개되지 못했으며 흔하게 잘 알려진 작가의 또 다른 작품 그리고 이제 막 작가적 재능을 펼치기 시작하려던 그의 초창기 문학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보코프의『절망』은 읽혀질 가치가 있다.

 

하지만 흔한 작가의 소설치고는 『절망』의 문장과 줄거리 전개 방식은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흔하지 않다. 나보코프 특유의 서사 구조적 치밀함과 언어적 유희가 텍스트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데다 주인공 화자와 그를 닮은 또 다른 분신이 등장하여 사건을 전개해나가는 줄거리라서 이 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는 작품 속 서사의 흐름이 더욱 복잡하게 느껴질 것이다. 소설 속 주주인공인 게르만 카를로비치가 자신과 닯은 분신 펠릭스를 살해하는 과정을 고백 형식으로 서술하는 방식은 서로 닮은 게르만과 펠릭스의 실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얇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난해한 서사 구조 때문에 읽을 때 집중력을 요하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나보코프'를 패러디를 한 블라디미르 시린  

 

나보코프는『절망』영문판 서문에서 이 소설은 어떠한 교훈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다.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유희적 텍스트 읽기의 재미를 선사하고 있으며 이러한 서사 구조 때문에 독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명망 있는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조차도 나보코프의 문학적 유희에 된통 당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나보코프는 이 소설을 그저 재미있게 읽혀지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잘못된 해석으로 망신을 산 사르트르의 경우만 가지고 이 소설을 더욱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유희적 텍스트는 독자들마다 각기 다른 의미의 해석을 만들 수 있다. 독자들은 자신만의 관점으로 텍스르를 이해함으로써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절망』의 '분신' 주제는 게르만과 펠릭스라는 서로 닮으면서도 다른 양면적인 인물를 통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게르만과 펠릭스의 실체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는 것처럼 게르만이 직접 서술하고 있는 모든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현실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게르만은 자신이 일으킨 행동과 생각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일어난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지만 그의 행동들, 즉 분신 펠릭스를 살해하는 행위를 실행하고 마는 과정과 그에 대한 결과들은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 아닌 상상 속의 현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펠릭스를 살해함으로써 불행했던 이전의 인생의 굴레를 벗어나 또다른 제2의 인생을 살아보려고 한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어떻게 그들은 자신을 만났는가?』 1864년

 

 

 

서양에서의 분신의 출현, 즉 도플갱어는 실제적 존재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고 있다. 게르만의 입장에서는 분신 펠릭스는 행복한 삶을 원하는 자신의 소원을 방해되는 존재이다. 게르만은 도플갱어의 저주를 극복하는 것, 즉 펠릭스를 살해하는 것만이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인식하게 된다. 부질 없는 자기합리화적 몽상의 늪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펠릭스는 예술가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창조적이면서도 허구적인 자아와 현실적 자아 간의 갈등에서 야기되는 괴리감을 상징하고 있다. 펠릭스를 살해하고 난 뒤에도 게르만은 자신의 존재을 끊임없이 부정적으로 여김으로써 본인 스스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분신 살해에 의한 도플갱어의 무서운 저주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분신을 주제로 하는 한 편의 우화 소설로 볼 수도 있겠지만『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에는 절망적 인물을 창조시킨 장본인, 작가 나보코프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나보코프는 초창기 창작 활동 당시, 잘 알려져 있는 본명 대신에 '블라디미르 시린'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시린'이라는 필명 속에는 나보코프의 인생과 연관된 두 가지의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전자는 귀족 정치인이었던 아버지의 이름과 혼동을 피하기 위한 것과 후자는 정착하지 못한 채 방랑 생활을 하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고대 러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시린을 의미한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낸 18년 간의 러시아에서의 유년 시절은 나보코프에게는 행복한 삶의 기억이었다. 유복한 귀족 집안에서 자랐기에 부족할 것이 없었던 화려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의 귀족들은 몰락하게 되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마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나보코프의 인생에 있어서 일대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생활고가 찾아오는 동시에 나보코프는 행복한 유년 시절의 추억을 뒤로 한 채 조국 러시아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로 나보코프는 유럽과 미국을 전전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고 다시는 러시아로 돌아갈 의향도 없었다.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갑작스런 시대의 변화에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그러한 정신적 상처로 인해 고국 러시아를 외면한 채 나보코프는 스스로 '문학적 경계인'으로서 삶을 선택했다.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는 시린이라는 상상 속 동물의 이름으로 필명을 정함으로써 나보코프는 또다른 분신을 만들어 '문학'을 통해서 과거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경계인으로 겪어야 할 양면적인 정체성의 갈등을 극복하고자 했다.

 

'블라디미르 시린'이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시작된 작가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러시아 문학 비평가들로부터 '러시아적이지 않다'는 비난을 받아야했다. 그러한 비난을 맞서기 위해서는 나보코프가 택한 방식은 아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서의 고독을 문학 창작의 필요조건으로 내세운다.

 

행복한 삶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비도덕적 행위마저 '예술'로 승화시키며 자기합리화하는 게르만의 행위과 그가 겪는 절망은 결국에는 고독한 문학적 경계인이 되어 작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던 나보코프 아니, 블라디미르 시린이 만들어 낸 절망적 분신이었다. 자신의 불행했던 삶의 경험을『절망』을 통해 '시린' 그리고 '나보코프'를 패러디하고 있는 것이다. 또는 자신이 직접 분신이 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소설가 그리고 실존적인 존재 '나보코프'가 되고 싶었다. 그러한 창작 의도가 만들어 낸 성공의 결과물이 바로 『절망』이었다. 결국 그는 이 소설을 통해서 이전에 그를 비난했던 러시아의 문학 비평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절망』,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고자 한 문학적 경계인의 수기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젊은 시절, 자신에게 실연의 아픔을 남겨 준 샤를로테로 인해 정신적인 절망에 사로잡혀 혼자서 거리를 방황하던 도중에 자신과 닮은 분신을 목격했다. 그야말로 도플갱어를 체험한 것이다. 세월이 지나 유명한 소설가로 성공한 괴테는 젋은 시절에 살았던 고향의 거리를 다시 찾게 되는데 그 곳에서 그동안 잊혀지고 있었던 젊은 시절의 도플갱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젋은 시절, 자신과 빼닮은 분신이 입었던 복장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괴테의 경험담은 실제로 일어난 사례인지 출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도플갱어를 소개할 때 자주 소개하는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양에서의 도플갱어는 죽음의 징조로 여겨지고 있지만 반대로 유대인들은 이러한 신비한 체험을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길운의 징조로 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분신을 '또 다른 나라고 할 수 있는 친구'와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괴테의 일화를 비추어 볼 때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나보코프는『절망』의 성공 덕분에 소설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그는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가수는 노래제목 따라 간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가수가 부른 노래제목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 노래를 부른 가수도 제목처럼 부정적인 운명을 맞이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나보코프는 '절망'이라는 소설 제목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 게르만처럼 절망적인 삶의 운명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게 되었고 그 후부터 성공의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절망』에는 현실과 상상을 분간하지 못하는 게르만의 자아 분열 양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숨긴 '블라디미르 시린'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두 자아의 정체성이 숨겨져 있다. 전자는 소설가로서의 제2의 인생을 꿈꾸는 현실적이면서도 예술가적 정체성이며 후자는 러시아에서의 행복한 유년 시절의 기억이 간직하고 있는 내면적 정체성이다. 

 

나보코프는 이 소설을 통해서 문학적인 성공을 얻을 수 있었지만 러시아에서 남겨 둔 잃어버린 행복의 추억들 그리고 러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게르만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듯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소설가 나보코프'가 되지 못했으며 그러한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절망』은 아무런 의미도, 교훈도 없는 흥미진진한 소설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난해한 소설을 작가 스스로 어떠한 교훈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가볍게 치부하기에는 작가의 평가가 진중하지 않다. 현실과 상상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 게르만의 이중적인 속임수와 분신 모티브는 자신의 의도대로 독자와 사르트르를 혼란케 만드는 데 성공했겠지만 '시닌'과 '나보코프'로 구분되는 정체성의 실존적 고뇌 그리고 러시아의 추억에 대한 향수를 숨길 수가 없었다. 소설의 문맥 곳곳에는 러시아 문학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고, 소설 속의 소설은 게르만이 쓴 미친 일기가 아니라 '문학적 경계인' 나보코프가 쓴 수기(手記)다. 

 

 

 그래요, 난 전부 의심하게 되었소. 핵심을 의심하게 된 거요. 그리고 길지 않은 여생을 온전히 단 하나, 이 의심과는 헛된 싸움에만 쏟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소. 나는 사형수의 미소를 지었소. 그리고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러대는 뭉특한 연필로 첫 페이지에 재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썼소. 이보다 나은 제목은 찾을 수 없소.

 

 - V. 나보코프 『절망』중에서, pp 226 -

 

 

 

나보코프는 양면적인 정체성의 자기 모순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했지만 결국에는 헛된 싸움이라는 것을 인식했던 것일까?  완전히 분리된 자아 정체성에 대한 합일의 시도를 하지 못한 채『절망』 이라는 제목처럼 '절망'이라는 단어로 성급하게 결론을 짓고 만다. 그리워했을 러시아의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미국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로 남게 되었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은 나보코프가 세상을 떠난지 9년 뒤에 그가 남기고 간 문학적 결과물들만이 러시아에 갈 수 있었다. 물론 '블라디미르 시린'이라는 이름으로 쓴『절망』도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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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2-11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글을 읽고 책꽂이에 있는 <절망>을 다시 흘겨보고 있습니다^^
선물받은 책인데 그대로 있네요.
여튼 롤리타,에 가려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 볼 생각을 못했던 것 아닌가 싶네요.
주말에 이책을 슬쩍 읽어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2-02-11 19:38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 <롤리타>를 읽어보려고 해요. 유명한 소설을 드디어
읽어보게 되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굿바이님 ^^

stella.K 2012-02-1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끌렸는데 난해하다니 역시 망설여지는군.ㅠ

cyrus 2012-02-11 19:41   좋아요 0 | URL
현실과 상상을 복잡하게 설정하고 있는 내용이라 읽는 내내 어려웠어요.
누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꼬마요정 2012-02-1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어려워서 혼났더랬죠... 하지만 표현력이 너무 대단해서 열심히 읽었구요, 읽다보니 저도 모르게 다 읽었더라구요... 50페이지만 지나면 흡입력 대단한 소설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게르만이 펠릭스를 살해하는 과정이 망상이었던거에요? 왜 저는 몰랐을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