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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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자위대를 선동했으나, 싸늘한 반응에 굴복하여 할복을 결정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어우러진 순수미학을 사랑했던 작가로서 꽤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가면의 고백』은 작가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자각해가는 과정을 담아냈다. 주인공 '나'는 성장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몇 가지 이미지를 접한다.

 

 

 

 

 

 

귀도 레니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1616년  / 세바스티아누스로 분한 유키오  

 

 

히르슈펠트가 성도착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회화 및 조각 1위로 ‘성 세바스티아누스 그림’을 꼽은 것은 나의 경우 흥미로운 우연이었다. 이것은 성도착자, 특히 선천적인 성도착자에게는 도착적 충동과 사디스틱한 충동이 구별하기 어렵게 착종되어 있는 경우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기에 아주 적합한 예다. (49쪽)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라는 그림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사정한다. 레니의 그림에서 묘사된 세바스티아누스는 주인공의 관능을 더욱 강조하는 이미지가 된다. 유키오에게 죽음이란 불완전한 삶의 보완양식으로서 기능하는 듯하다. 자신이 뜻을 품고 있는 가치가 훼손되거나 그 길이 어긋나 버릴 것 같은 경우, 그는 장렬한 죽음을 통해 그 유한한 삶의 완전함을 이루고 또한 그것에 완벽한 방점을 찍으며 자신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만의 은밀한 미학과 완벽한 죽음에의 동경을 꿈꾸어 왔던 그에게 죽음이란 바로 일생의 유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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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1 0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1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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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35]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Scene #1 초콜릿처럼 펄펄 끓는 이야기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날이었다. 거리의 제과점 앞에는 온갖 장식으로 포장된 초콜릿 선물이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창 사랑의 꽃을 피우는 청춘 남녀들에겐 더없이 행복하고 달콤 쌉싸름한 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같은 특별한 날에 읽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초콜릿이 끊는 물’과 같은 감동을 전하는 책이다. 제목만으로는 뭔가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겠지만 초콜릿 맛처럼 오묘하게, 사랑, 음식, 페미니즘, 역사가 한 통 속에서 펄펄 끓고 있는 이야기이다.

 

사랑에 빠진 이는 요리를 한다. 어설픈 칼질에 손을 벨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매운 양파의 향에 방울방울 눈물을 짓게 되더라도. 각기 다른 성향의 재료가 모여 조화로운 맛을 이룬다는 건, 마치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사랑을 이루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조리 과정 또한 사랑의 감정과 비슷한 맥을 가지므로 우리는 볶고, 끓이고, 은근한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

 

 

 Scene #2 티타의 러브 레시피

 

 

 

이 소설에서 초콜릿은 9월의 음식이다. 당시 초콜릿은 마시는 음료인데 물의 양과 끓이는 시간에 따라 달콤하고 쌉싸름한 정도가 달라진다. 작가는 초콜릿 만드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초콜릿을 타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서툴게 타면 최상급의 초콜릿도 맛없어질 수 있다. 덜 끓이거나 너무 오래 끓이면 걸쭉해지거나 탄 맛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84쪽)

 

소설에서 묘사하는 요리는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은유다. 이들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초콜릿 맛과 닮았다. 티타에게는 요리를 하는 부엌이야말로 자신의 세계이고 미래다. 그녀가 마음을 담아 요리하는 마법 같은 음식은 때로는 눈물을 일으키고, 때로는 최음제가 되며, 때로는 향수와 추억의 매개가 된다.

 

티타는 막내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야한다는 가문의 전통 아래 사랑을 잃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욕망하기에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만든다. 불에 닿은 옥수수 반죽은 토르티야가 되고, 불에 닿은 쌀은 밥이 된다. 토르티야가 다시 반죽으로 돌아갈 수 없고, 밥이 도로 생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불에 닿은 티타의 가슴을 돌려놓을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을 꼽자면 페드로가 선물한 장미를 가지고 티타가 요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바로 장미 꽃잎 소스를 곁들인 메추리 요리다.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열과 욕망을 억제할 수 없게 된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사실 자체로 한 권의 요리책이다. 달마다 바뀌는 요리는 낯선 재료들의 향연, 시끌벅적한 남미의 파티 분위기를 양념으로 끼얹으며 읽는 이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첫 번째 요리는 ‘1월 크리스마스 파이’. 파이는 달콤하거나, 기껏 상상력을 펼쳐봐야 고기가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1월 크리스마스 파이의 재료는 정어리 통조림, 초리소, 양파, 오레가노, 세라노 칠레고추 통조림, 페이스트리 반죽이 재료다. 어른어른 알 듯 말 듯한 맛이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한다. 읽을 때마다 이전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맛이 미뢰를 휘감는다.

 

 

 

 Scene #3 내 안의 사랑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중략) 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124~125쪽)

 

 

우리 모두가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상상해보자. 그 성냥불은 혼자 지필 수 없으며 불을 댕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하면 영혼의 양식인 불꽃이 사그라져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뜨거워야 할 우리 마음속에 매캐한 연기만 올라온다면 우리는 사랑을 꿈꿀 수 없다. 뜨거운 사랑이 한순간이라도 식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 안의 사랑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성냥갑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성냥개비에 불을 일으킬 수 있는 날은 많겠지만, 아무래도 오늘 같은 날은 특별하다. 카사노바가 최음제로 썼다는 초콜릿은 사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음식이었다. 사랑의 감정을 지속하고 상대가 활기찬 성욕을 유지하도록 돕고 싶을 때 초콜릿을 선물하곤 한다.

 

사람들은 밸런타인데이가 상업적이라고 욕하면서도 때가 되면 초콜릿과 선물을 산다. 기업의 뻔한 상술이지만, 그 상술이 얼어붙은 지갑을 열게 하고 식어버린 마음을 따스하게 데운다면 굳이 욕할 일 만은 아니다. 하루쯤 낭만을 부려도 좋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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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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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68]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스밀라가 없는 그린란드의 겨울은 시원한 얼음 한 조각 없는 속 빈 냉장고와 같다. 그린란드라는 이름처럼 녹색의 땅일뿐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눈의 황무지인 그린란드를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으로 각인시킨다. 눈이 내리는 코펜하겐과 얼어붙은 그린란드는 아주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독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 스밀라가 손을 내밀면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쓰다듬어 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고 생생하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간다.

 

스밀라는 특별하다. 그린란드인 어머니와 덴마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어린 시절을 그린란드에서 보내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덴마크에서 성장한 이력. 그녀는 추위와 고독과 과학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그녀는 경계의 삶과 운명을 산다. 때로는 거칠게 저항하며, 때로는 기꺼이 끌어안으며. 그녀의 몸속에는 야생 이누이트인과 서구 문명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그녀는 야생의 방식과 문명의 방식 모두를 알고 있다. 그 사이에서 스밀라는 자신만의 방식을 끝없이 찾아 헤맨다.

 

떨어져 죽은 아이의 사망 사건을 추적하는 장편추리극은, 단지 소설의 형식일 뿐이다. “사람들은 죽는다. 어떻게 죽느냐 또는 왜 죽느냐를 궁금해 해서 무엇을 얻겠는가?” 스밀라는 ‘문명비판’이든 ‘인간의 존엄’이든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린란드로 떠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가? 세부적인 것은 그렇지만, 큰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삶은 거짓으로 얽혀 있다. 그런데 세계는 진실도 담고 있다.

 

“수학의 기초가 뭔지 알아요?” 나는 물었다. “수학의 기초는 숫자예요. 누군가 내게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숫자라고 말할 거예요. 눈과 얼음과 숫자.” (157쪽)

 

 

스밀라는 좀체 사랑에 빠지지 않는 성격이다. 사랑보다 눈과 얼음을 더 높게 친다. 그녀의 말에 빌리자면, 이제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듯이 질병으로서의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가운 주인공에게도 사랑의 본능이 느껴진다.

 

스밀라는 자신이 아이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가졌을 뿐이다.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내 고집을 그 사람 처분에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애정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스밀라가 죽으면, 내가 스밀라의 가죽을 가져도 돼?” (70쪽)

 

이누이트들은 고래를 잡으면 가죽과 살을 발라낸 뒤, 먼 바다로 고래의 턱뼈를 돌려보내 영혼을 풀어준다고 한다. 고래는 죽지 않고 이듬해 살을 붙여 다시 돌아온다. 스밀라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이누이트 소년, 이사야는 이런 조화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박물관에서 본 물개와 들소가 사람에 의해 죽어 욕보이듯 전시된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착취 없이 공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이누이트 소년의 원시적인 사랑의 물음. 문명세계 야만의 징표가 사랑의 징표로 전복되는 순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사랑뿐이다. 스밀라라면 그 이유를 이 우주에 나란 존재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삶의 역경’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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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10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룬, 보기드문 완벽한 인간 스밀라.. 그때 물개가 다시 튀어올랐고, 어머니는 물개를 쏘았다....˝나는 남자만큼 강하지˝ 스밀라의 엄마도 멋지죠.

cyrus 2017-09-10 19:10   좋아요 0 | URL
네. 스밀라의 어머니가 사냥꾼이었죠. ^^

sprenown 2017-09-12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김연수작가의 스밀라에 대한 오글거리는 찬사가 없었다면 손대기 힘들 정도로 지루하고,지겨운 소설이더군요..문화차이뿐만 아니라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고... 김연수작가가 옛기억을 살려 윤문이라도 할 것이지.ㅋㅋ
 

 

 

  Puzzle #1 『호밀밭의 파수꾼』, 전 세계 청춘들을 위한 문학의 치유제

 

 

 

 

 

 

 

 

 

 

 

 

 

 

 

 

인간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소년은 아무도 '무사히' 자라지 않는다. 무난하게 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은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외로움과 좌절이,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움과 사랑이야기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어른들 세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 역시 심한 성장열병을 앓고 있다. 이미 세 번 퇴학 을 경험했고, 성적 불량이란 이유로 네 번째 퇴학을 앞두고 있는 홀든에게는 학교와 선생님들, 친구들, 아니 온 세상이 다 역겹고 한심하게만 느껴진다.

 

결국 네 번째 퇴학을 당한 소년은 홀가분한 맘으로 뉴욕 한복판으로 떠난다. 클럽과 바를 전전하며 술을 퍼마시고, 캑캑거리면서도 연신 담배를 피워댄다. 성인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섹스를 통과하기 위해 늙은 매춘부와 고통스런 경험도 맛본다. 어른이 되기란 정 말 이토록 힘든 걸까. 홀든은 인생 자체를 정답을 찾을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처럼 여긴다.  

 

1953년 헤르만 헤세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혐오스럽고 문제적인 동시대를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문학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황야의 늑대』를 읽은 미국 독자들의 편지로 샐린저의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홀든 콜필드의 일탈적 여정에 대한 헤세의 애정과 혜안적인 평가는 후에 1960년대 히피문화로 대변되는 젊은이들의 문화에 헤세의 작품과 함께 『호밀밭』이 끼친 막대한 영향을 통해 정당화 되었다.『호밀밭』에서 아버지 세대의 위선을 읽어내고 더 나아가 베트남전쟁의 부도덕성을 주창하던 68세대의 전염병과도 같은 젊은 열정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샐린저의 문학은 청춘의 방황을 치유하는 처방전이 되었다.

 

 

 

 Puzzle #2 『아홉가지 이야기』, 수수께끼 같은 작가가 쓴 수수께끼 같은 단편

 

 

 

 

 

 

 

 

 

 

 

 

 

 

 

 

샐린저가 많지 않은 분량의 장편인 『호밀밭』으로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면, 생전에 발표한 단 한권의 단편집『아홉가지 이야기』는 샐린저를 미국 현대 문학에서 가장 매혹적인 작가로 만들었다.

 

9편 중 우선 권하고 싶은 작품은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정신적 상처를 받았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소설을 쓰는 참전군인 X 하사가 우연히 만난 열세 살 소녀 에스메는 당돌한 소녀다. “아저씨는 미국인치고는 꽤 지적인 편인 것 같아요.” “아저씨도 날 지독하게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묻곤 한다. 그리고는 “아저씨의 모든 재능을 그대로 지닌 채 귀환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진다. 종전 직후, 환멸과 무기력에 빠진 X 하사에게 부친 지 1년 지난 에스메의 편지가 전달된다. “전쟁, 그리고 줄잡아 말해 우스꽝스러운 생존 방법의 조속한 근절을 가져다 주기를 바랄 뿐”이라는 글이 X 하사에게 희망을 품게 한다. X 하사는 전쟁 와중에 두 가지 부덕, 세계의 저속함과 환멸을 만나지만 어린 에스메의 순수를 통해 자신을 수습한다. 순수의 이 같은 힘을 드러내는 구도는 샐린저 소설의 한 원형을 이룬다.

 

에스메와 같은 당돌함과 영민함을 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 천재의 이야기를 다룬 ‘테디’나 ‘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 ‘웃는 남자’ ‘작은 보트에서’ 등의 작품을 권하고 싶다. 저속함이나 환멸을 읽어보고 싶다면 대학 동창인 두 여인의 술자리 이야기인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나 사랑이 낳는 집착을 다룬 ‘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가 있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도 샐린저는 시종 유머를 잃지 않는다.

 

 ‘유머를 모르는 자에게는 진정한 진지함도 없다’던 베르그송의 말이 떠오른다. 적절한 유머는 작품의 진정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독자들을 유인한다. 샐린저는 이에 대해 단연 최고랄 수 있다.

 

또 한 가지, 단편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샐린저에게 유명세를 안겨 주었으며 팬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소설이다. 한낮의 햇살만큼이나 강렬한 단편이다. 샐린저의 중편소설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의 주인공 시모어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샐린저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글래스가(家)의 한 인물인 시모어는 여름 휴양지의 해변에서 알게 된 시빌이라는 여자 아이와 바다에 들어가 바나나피시라는 상상 속 물고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시모어가 지어낸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며 시빌은 “방금 한 마리 봤어요”라고 말하고 시모어는 “그럴 리가”하면서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다. 둘은 마치 어떤 공모자들처럼 혹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태연하게 바나나피시가 실재하는 것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산 작가가 쓴 글답다.

 

‘바나나피시’는 먹이가 숨은 구멍에 고개를 들이밀고 탐식을 하다가 결국 몸이 빠져나올 수 없어서 죽는 물고기다. 왜 이 물고기가 제목으로 들어갔을까? 샐린저가 『호밀밭』다음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인 이 두 번째 수수께끼가 궁금한 독자들은 이 단편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단편이 주는 긴박감과 생략의 여운을 기대하는 독자들 역시.

 

 

 

 

 Puzzle #3 『프래니와 주이』, 허무한 일상을 넘어서 삶의 의미 찾기

 

 

 

 

 

 

 

 

 

 

 

 

 

 

『호밀밭』이 미국사회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과 미국중산층이 지닌 윤리관의 허위와 기만을 10대 소년 홀든 콜필드의 3박4일간의 방황을 통해서 질타하고 있다면, 『프래니와 주이』에서는 20대 남매 프래니와 주이의 허무적인 일상을 넘어서는 삶의 의미 찾기와정이 담담하게 묘사되어진다.

 

줄거리만 정리하면 너무나 단순하다. 여대생인 프래니는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에 실망하며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고, 오빠인 주이가 프래니 스스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내용이 이야기의 전부. 이밖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시간, 플롯 또한 매우 단순하다.

 

주인공인 프래니와 주이의 대화는 너무나 생생하여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읽게 되며, 군데군데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기 바쁠 것이다. 또한 『호밀밭』의 결말부에서 잠깐 엿보였던 ‘선(禪)’ 불교 사상이 기독교적인 바탕 위에 자연스럽게 펼쳐져 깊은 성찰의 시간으로 잠기게 해준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프래니는 죄의식을 씻고자 자연스럽게 연극을 버리고 ‘순례자의 길’이라는 기도책을 소중히 간직하며 열심히 ‘예수의 기도’를 하게 된다. 그녀가 애인인 레인 코텔을 처음에는 아주 반갑게 만났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순식간에 의사소통 단절을 경험하게 될 때도 기도책은 중요하게 다뤄진다. 기도야말로 프래니에게는 유일한 현실 극복 방안인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하라! 기도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오빠인 주이는 이러한 프래니에게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길을 가르쳐 준다. 주이는 프래니에게 글래스 집안의 맏이였던 죽은 시모어가 강조한 ‘팻 레이디(Fat Lady)’ 이야기를 해 준다. 여기서 패트 레이디란 일체의 중생이자 예수 그 자체를 뜻한다. 팻 레이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은 곧 에고(ego)라는 좁은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남을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대아의 세계, 대승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결국 『프래니와 주이』에서 샐린저는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욕망을 접고 끊임없이 신에게 기도하는 대신, 욕망을 최대한 실현하면서 남을 섬기며 열심히 사는 데 삶의 진리가 있다고 강조한다. 프래니가 연극의 길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TV 배우인 주이가 이를 되돌려 놓는 대목은 그래서 더욱 암시적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진리라는 것.

 

이처럼 샐린저의 초기 작품에서는 이런 애타적 사랑이 지배적으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으며 후기 작품에서는 에고이즘이 만연한 현대사회 속에서 탁월한 지성과 예민한 감성을 지닌 인물들이 겪는 불안과 소외로 인한 갈등을 통해 애타적 사랑의 필요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Puzzle #4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 시모어는 정체는?

 

 

 

 

 

 

 

 

 

 

 

 

 

 

 

『호밀밭』 이외에 샐린저가 펴낸 나머지 소설집 세 권은 모두 ‘글래스’라는 성을 지닌 뉴욕의 일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일종의 ‘글래스 가족사’라 할 텐데, 그중 한 권이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이다. 『목수들아』는 동명의 포제작과 ‘시모어, 서문(序文)’, 두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글래스 집안의 맏아들인 천재 시인 시모어 글래스. ‘목수들아’는 그가 자신의 결혼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손님들을 골탕 먹이는 이야기를 동생 버디의 시점으로 그렸다면, ‘시모어, 서문’은 그로부터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이제 중년의 교수가 된 버디가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자살한 형 시모어의 천재적 면모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두 편의 소설에서 주인공인 시모어는 정작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 셈이다. 대중들 앞에서 등장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은둔 본능(?)이 작품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 이 기묘한 소설들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시모어의 초상은 ‘괴짜 천재 시인’이라 요약할 만하다. 그 자신 4개의 사어(死語)를 포함해 9개 국어를 완벽히 구사한다고 소개한 버디라는 인물은 시모어를 “그는 분명 우리에게 진짜인 모든 것을 의미했다”며 숭배한다.

 

도대체 이 ‘시모어’라는 사람은 누구인 걸까. 그의 독특한 이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셈-켈트족 동양인”은 평생 한시(漢詩)와 일본 하이쿠를 쓰고 즐겼으며 물론 영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로도 시를 썼다.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인 그는 학위 과정을 어린 나이에 마치고 18살 무렵부터는 대학 교수로 봉직했다.

 

『호밀밭』은 읽은 독자라면 흥미로운 문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 화자 버디의 이런 진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출간한 유일한 장편의 젊은 주인공이 시모어를 많이 닮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시모어가 홀든 콜필드의 ‘성인 버전’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너무 행복해서”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이 인물은 아내와 함께 간 휴가지에서 홀연 자살하고 만다. 시모어는 갑자기 자살을 선택했는가? 궁금하면 방금 앞에서 소개한 단편집『아홉가지』에 수록된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읽어볼 것.

 

 

 

 Epilogue  네 가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한 권의 해답, 『샐린저 평전』

 

 

 

 

 

 

 

 

 

 

 

 

 

 

 

샐린저가 호밀밭이 아닌, 하늘의 파수꾼이 된 지 벌써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오늘이 바로 그의 기일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4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글쓰기를 사랑하지만 출판은 삶을 망치는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병적으로 외부 접촉을 싫어했으며, 작품을 영화로 만들려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문 앞에서 쫓아낸 적도 있다.

 

그리고 특유의 고집스런 은둔자답게 책표지와 구성에 대해서 세세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샐린저는 에이전트를 통해 자신의 책에 구성적인 삽화를 넣지 않고, 해설문은 붙이지 않으며, 작가 사진도 쓰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는 샐린저가 자신의 책을 출간할 때 전 세계 모든 출판사에 요구하는 정해진 조건으로 2001년, 『호밀밭』출간 50주년을 맞아 민음사에서 낼 때에도 역시 이와 같은 표지에 대한 세세한 조건을 요구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샐린저의 소설, 특히 그의 대표작인 『호밀밭』을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무척 당황스러울 것이다. 작가의 약력도, 그리고 소설에 대한 어떠한 설명 없이 그저 ‘소설’ 자체만 남아 있으니까. 우리에게 샐린저는 소설로만 남은 미지의 작가였던 것이다. 소설 텍스트 자체가 샐린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텍스트로 무궁무진한 해석을 할 수 있어도 작가의 정체나 진짜 문학적 의도를 읽어내기가 힘들다. 작가가 쓴 작품 하나만 가지고도 그 작가의 문학을 단번에 이해하기도 힘든데, 처음으로 출간된 1951년부터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해설문을 넣지 않은『호밀밭』이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국내에 번역된, 생전에 출간된 샐린저의 전 작품을 읽은 독자가 있더라도 샐린저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고는 있을까? 샐린저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서평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정체를 궁금해한 독자들의 생각을 몰래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세상 앞에서 드러내는 것 자체를 꺼려한 샐린저의 성격이라면 독자서평이나 자신에 대한 온갖 추측과 소문에 대해서 별 관심 없었을 것이다.『호밀밭』을 읽은 열렬한 독자, 심지어 그 소설을 읽고 존 레논을 암살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마크 채프먼이 자신을 찾아온다고 해도 절대로 만나려고 하지 않을지도. 그야말로 샐린저는 문장의 흔적으로 남겨진 자신의 사소한 편지글마저 공개하기를 꺼려하는 은둔의 파수꾼처럼 생활했으니까.

 

샐린저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샐린저 생전에 그의 평전이 공식적으로 출간되지 전에 법정 공방까지 갈 정도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샐린저는 저작권 및 사생활 보호 명목으로 자신의 평전에 인용된 개인적 편지, 신상 정보, 자신이 언급된 모든 인터뷰 기록을 삭제시킬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가 죽은 뒤인 2010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다.

 

이번에 나온 평전의 출간은 무척 반갑기만 하다. 샐린저의 미발표 소설이 처음으로 공개된다는 사실에 반가운 이유이기는 하지만, 드디어 그동안 수수께끼에 쌓인 샐린저라는 작가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샐린저의 열렬한 팬으로써 쌍수 들고 환영하고 싶다. 아, 물론 하늘에 있는 샐린저 입장에서는 기분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을 조망하면서 각각의 작품이 쓰인 맥락을 짚어내고, 동시에 연대순으로 샐린저의 전 작품을 살핌으로써 그의 인생을 심도 있게 관찰할 수 있다. 샐린저의 삶을 먼저 알고 난 뒤에 그의 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작품들을 먼저 읽은 뒤에 평전을 읽는 것이 흥미진진할 것이다. 네 개의 수수께끼, 즉 『호밀밭』『아홉가지 이야기』『프래니와 주이』『목수들아』에 도전하고 나서 그 다음에 ‘샐린저’라는 은둔의 파수꾼이 살고 있는 『샐린저 평전』에서 해답을 구해보자.

 

샐린저를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현대의 젊은이들을 위한 신화라고 말하고 싶다. 완성도 높은 문학성뿐만 아니라 은둔 생활로 그는 이미 전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신화’가 되었다. 완강한 기성 사회의 위선에 좌절하는 청춘의 고통,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꿈틀거리는 젊음의 열정, 섬세하면서도 치밀하게 펼쳐지는 일상적 언어의 축제. 그래서 샐린저의 신전은 늘 전 세계의 젊은 숭배자들로 북적거린다. 오늘도 인생의 수수께끼를 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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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01-2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글만 읽어도 샐린저에 대한 개략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겠어요. 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하나만 읽었는데 저자의 요청으로 사진이 표지에 없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생전에 노출되기 꺼려했던 것도요. cyrus님의 깊이 있는 글 잘 읽고 가요. 평전에 대해 더 듣고 싶군요^^

cyrus 2014-01-28 23:58   좋아요 0 | URL
요즘 샐린저 완독에 푹 빠져 있어요. 평전은 지금 읽고 있는 중입니다. 분량이 적지 않은데도 질리지가 않아요. 사실 그동안 샐린저의 소설을 읽고나면 작가의 정체가 너무너무 궁금했거든요. 다 읽고나면 샐린저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보고 싶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4-01-2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셀린저 단편 소개해 놓은 것을 읽으니 직접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특히 상처입은 군인 이야기...

cyrus 2014-01-29 00:02   좋아요 0 | URL
'에스메를 위하여'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오지 않아요. 그러다가 군인이 소녀를 만나면서부터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집니다.

낭만인생 2015-03-1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면서 이토록 완성도 높은 글이 가능한가요? 프린트해서 읽으니 화면보다 잘 읽혀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필스
어빈 웰시 지음, 김지선 옮김 / 단숨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증오한다.

더 나은 누군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509쪽)

 

 

 

 

 Scene #1  혐오스러운 악질 경찰 브루스의 일생

 

여기 부패하고 타락한 경찰이 있다. 그는 술과 마약에 중독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지만 진급을 위해 동료들을 모함하고 위기로 몰아넣는 데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변태적 도색(桃色)은 이미 정도를 넘어 동료의 아내들에게까지 뻗쳐 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망쳐 놓았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행복까지도 거리낌 없이 짓밟아 버리는 남자, ‘필스’(Filth, 오물)의 주인공 브루스 로버트슨은 동시대 인간 말종의 초상과도 같다.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독자들에게 브루스는 이해 불가한 주인공이다. 좀 모자라거나 괴짜스럽더라도 착하고 정의로운, 그래서 금방 애정을 갖게 되는 경찰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라이벌들을 이간질하고, 동료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처제와 은밀한 관계를 즐기고, 사건 해결을 위해 협박마저 일삼는 이 비도덕적인 삶이 브루스 자신은 멋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정작 사건 수사는 뒷전이고 진급 라이벌들에 대한 중상모략을 펼치고 그가 좋아하는 갈보들과의 난잡한 행위를 연출하는 장면을 본다면 혐오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브루스의 계속되는 악질을 보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중간에 등장하는 기다란 촌충의 독백은 이미 악으로 피폐해진 브루스의 상태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촌충은 오직 브루스가 음식을 많이 먹기를 바란다. 브루스 못지않게 탐욕스럽다.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브루스의 타락한 몸과 마음을 숙주 삼아 살아간다. 촌충이 브루스의 탐욕을 먹고 자란다면, 브루스는 권력 상승을 위해 '경찰'이라는 명함을 앞세워 사회에 기생한다.

 

책을 펼치기 시작하기 전부터 무려 500페이지에 달하는 스코틀랜드 아니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인물의 삶을 끝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지 망설이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이미 타락한 인간상의 전형을 보여준 어빈 웰시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트레인스포팅』의 원작과 영화를 본 사람이라도 이 충격적이고 더러운 묘사로 가득한 악질 경찰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망설일지도 모른다.

 

 

 

 Scene #2  권력을 위해 기생하는 탐욕덩어리

 

무엇이 브루스를 타락한 경찰이 되게 만들었는가? 성선설을 믿든 성악설을 믿든 고만고만한 영유아기의 인성을 비정상의 궤도로 밀쳐내는 것은 환경과 정신적 외상이라고 보는 것이 현대의 통념이다.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외면 받은 유년 시절 그리고 첫사랑을 죽음으로 몰았던 브루스의 경험은 그의 현재를 단단히 뒷받침한다.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또한 약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 것이다. 어린 브루스는 자신이 받은 멸시와 폭력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삼기 시작했다. 즉, 세상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고, 연약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권력과 폭력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행하기에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만다. 브루스는 그러한 자신이 원망하고 저주스러워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절망감에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주변에 분노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분노를 표출할 수 하기 위해서 권력으로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경찰이 되는 것이었다. 다른 생물체의 몸속에서 먹이와 환경에 의존하여 기생생활을 하는 기생충처럼 이미 비뚤어져버린 심성으로 변한 브루스는 경찰 조직에 들어와 숨겨왔던 탐욕을 드러낸다.

 

곧 경위가 될 자리에 있어도 브루스의 탐욕은 멈출 수 없다. 촌충이 브루스에게 음식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도록 명령하듯이 탐욕과 집착은 브루스의 뇌를 지배했다. 브루스가 직접 고백하듯이 그는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어 약과 섹스에 탐닉하고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를 확인한다. 승진을 위한 권모술수 역시 아내와 딸을 되찾게 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책감으로 인한 정신 분열은 점점 더 빈번하게 브루스를 옥죄어 오는데, 아픈 과거의 기억과 장면이 등장할수록 브루스에 대한 인간적 연민도 정점으로 치닫는다. 이윽고 가해지는 브루스에 대한 처벌들, 범죄자들에게 끌려가 린치를 당하고, 승진에 실패하며,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린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가혹한 것이다.

 

브루스와 같은 악한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뉠 것이다. 하나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 쓰레기’라는 것인데 대다수 보통 사람의 감정적 반응이 이것이다. 이에 반해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상황적 요인이 있을 것이란 입장이 맞선다. 악행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악행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동, 특히 악행의 주요 원인은 증오심, 기질과 같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 또는 사회적 구조인가라는 질문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속 편할지 모른다. 그저 나하곤 전혀 별개의 나쁜 놈, ‘인간 쓰레기’로 규정하면 끝이니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반복되는 인간의 잔혹한 행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Scene #3  더 많이 불편하고, 아파하시라

 

“악한 일은 스스로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브루스는 사나운 악마는 아니다. 생각이 이상할 뿐, 치유하지 못한 유년기의 상처를 안고 살다가 감정 조절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악(巨惡)’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미 근본적으로 잘못된 오류의 희생자일 뿐이다. 이렇듯 모든 악행은 인간의 악마적 속성이 아니라 사고력의 결여에서 나온다. 아렌트가 만난 아이히만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으로 뭉쳐진 기계적인 인간이었다면, 어빈 웰시가 만들어 낸 가상인물 브루스는 유혹, 본능, 상념과의 갈등에 정신이 게을러져 술과 코카인 그리고 악질에 의존하게 되는 ‘악의 평범성’에 쉽게 지배당하는 허약한 인간이다.

 

그가 악하게 만든 또 다른 요인에는 권력의 환상에 도취된 이상주의적 열정도 한몫하고 있다. 브루스에게 ‘사건’은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이다. 진급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진급 경쟁자들을 견제하며 성과를 얻어낸다. 진급을 위한 성과에 눈이 먼 나머지, 사건 해결에 유리하도록 거짓말과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이처럼 브루스의 왜곡된 이상주의적 열정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다. 그러니까 브루스는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집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옛말에 사필귀정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예견했던 대로 브루스는 용서와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몰락한다. 드디어 '인간 쓰레기'가 스스로 이 세상에 사라지게 되어서 속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존재는 마땅히 처벌받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브루스도 법의 손길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브루스는 법의 손길에 포위되는 대신에 죽음의 신이 뻗친 손길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기를 원했다.

 

장면 하나하나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악질로 가득한 500여 페이지를 참고 견뎌 읽어도, 여전히 불편하다. 왜 그럴까. 브루스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도덕성과 정신을 거의 회복불능 정도로 파괴시킨 '인간 쓰레기'를 복수하지 못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유년 시절에 자신과 첫사랑을 모욕한, 어디선가 평범하게 살지도 모르는 속이 시커먼 그들을 죽이든, 협박하든, 욕설을 하던 간에 똑같이 악랄한 방식으로 복수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용서치 못하는 범죄 행위라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악이 또 다른 악을 응징하는 안티 히어로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필스』를 끝까지 단숨에 읽었는데도 불편하고, 결말에 불만스럽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나왔는데도 무언가 개운치 않고, 찜찜한 느낌이 든다. 브루스는 심신을 망가뜨리는 약(藥, 코카인)을 해서 악해진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폭력에 연약한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이 악한 '괴물'으로 변하고 말았다. 일부 독자들 중에는 여전히 브루스를 절대로 용서와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 쓰레기'라고 손가락질해도 좋다. 무수한 악질로 가득찬 500페이지를 단숨에 끝까지 참고 읽을 수 있다면 더 많이 불편하고 아파해야 한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서 더 많이 불편하게 느끼고 몸속에 촌충이 꿈틀거려 위장을 괴롭힐 때마다 생기는 통증처럼 아프고 찜찜하게 느낀 독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작가 어빈 웰시는 상당히 고마워했을 것이다.

 

 

 

P.s 24시간 악질을 펼치는 주인공을 다룬 이야기답게 입에 담기 어려운 음란한 단어, 온갖 비속어가 줄줄이 나온다. 책의 분량도 적은 편도 아닌데 정신이 해로울 정도로 실감나게(?) 비속어 하나하나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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