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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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변화 없는 삶에 지친 한 남자가 책상을 왜 항상 책상이라고 불러야하는지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책상은 양탄자로, 양탄자는 옷장으로, 옷장은 신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방에 틀어박혀 모든 것의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물과 언어의 짝짓기에 변화를 준 것이다. 그는 공책에 자신이 바꾼 새로운 단어들을 적어놓고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며 차츰 원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옛날에 쓰던 원래의 언어를 대부분 잊어버리게 되어 자기 공책에서 원래의 단어를 찾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 남자는 다른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남자는 누구와도 소통되지 않는 외국어를 만든 셈이다. 노인은 외계인이 됐다.

 

중학생 시절 이 슬픈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 공책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이 불쌍한 남자는 어떻게 될지 너무 걱정스러웠다. 모든 낱말을 바꾼 것이 그 남자 자신이며, 그이가 많은 것을 기억하려 노력할 것이지만, 기억이란 기록보다 불완전하고 미심쩍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터 빅셀의 단편집 속에는 사물의 이름을 바꾸는 남자 이외에도 정말 이상한 사내들로 가득하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확인한답시고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사내, 세상을 등지고 수십 년 발명에 전념해서 완성한 발명품이 이미 발명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명가, 요도크 아저씨 이야기만 되풀이하다가 모든 단어를 ‘요도크’로 바꿔 부르게 된 할아버지. 정말 읽다 보면 내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현대인의 소외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 속의 남자는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를 연상시키는 점도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때의 한없는 자유로움과 한없는 무의미함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에서 평소 감히 꿈꿔보지도 못했던 일탈을 실행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낯익은 이들 틈에 있어도 한없이 무의미하다. 그러면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한 때 우리의 대화를 끈끈하고 이끌어주던 종교적 믿음과 사상적 명분 등의 거대한 신념체계들은 허공으로 흩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나를 지탱하는 것은 내가 속한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나를 광고하고 나의 상품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나의 능력 있음과 나의 무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그리고 꾸준히 자본의 세계에 설득해서 그 세계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내가 도태되는 것, 내가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이라는 잘 포장된 진실 속에서 이제 나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다. 알 수 없는 밤의 불안을 각종 자기개발서로 덮어가면서 이렇게 서서히 ‘나’라는 인간은 소모되어 간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이 모든 대화는 실없는 농담이거나 가벼운 잡담이다. 겉도는 대화, 체면치레인 몇 마디 말, 외로움을 고립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들 끼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소음 같은 말. 그렇게 되지 않기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정도 ‘히키코모리’의 특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간결한 글이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함축적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언어로 택했을 뿐 언어의 굴레만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변화의 어려움을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개혁의 어려움이다. 개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동참, 뚜렷한 방향제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개혁을 꿈꾼 사람은 외톨이로 전락하고 만다는 이야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읽는 이의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다.

 

기존의 이름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사물들에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이 명명식은 남자에게 크나큰 즐거움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마치 옹알이를 하던 아이들이 한순간 말문을 트고 하나하나 단어를 익혀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개는 짖어도 개라는 낱말을 짖지 않는다. 이처럼 책상이 반드시 '책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소통을 위한 사회적인 약속일 뿐이다.

 

사람들의 말을 그는 그 식대로 바꿔 받아들인다. 결국 의사소통조차도 불가능해지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침묵했고 그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둘째의 말 배우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옹알이하던 때의 갇히지 않았던 그 말들이 이제 딱딱한 형식과 약속 속에 갇히고 있다. 책상은 역시 책상일까.

 

낱말을 자기식대로 바꾸어버려 소통이 불가능해져버린 한 남자는 실은 오래전부터 이미 소통불가능의 상태였다. 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분자적 형태의 이웃들 틈으로 난 균열을, 꾸역꾸역 올라오는 단절의 감정을 밀봉하려고 서로를 향해 배시시 웃는 가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 터였다. 그래서 비록 그가 선택한 방법이 어리석기 그지없더라도 달라지기를 바랐고 이를 직접 행동으로 옮긴 이 회색빛 주인공에게 나는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나만의 낱말을 만듦으로써 거짓 소통에서 멀어져보려 한 이 남자에게 어리석은 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경외의 마음을 품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낱말을 자기 식으로 바꿔 부른 남자는 낱말이 가진 강제성을 알고 있었을까? 낱말은 나의 사유를 돕는 매개이면서 동시에 나의 사유의 확장을 억압한다. 유교가 사회의 지배논리였던 시대에는 권력자에 의해 유교를 합리화하는 언어가 형성되고 널리 유포되었다. 일부종사니 상명하복이니 입신양명 등의 낱말이 그렇다. 물건을 만드는 기업인은 인간 욕망의 구조를 연구해 상품이 많이 팔릴만한 이름을 짓는다.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가는 인간의 욕망을 연구해 한 마디 슬로건을 만든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언어의 연구는 끝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포장되어 출시된 언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 차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정신없이 살아간다.

 

방금 했던 생각을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금 곱씹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성찰지능을 가졌다. 생각에 대해 생각하기, 느낌에 대해 느끼기.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다. 그런데 생각이 100% 타인에게 전달된다면 우리의 대화는 번복과 부정으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은 무릇 정리와 숙고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을 살짝 포장하여 완곡하게 표현하는 세련된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 의사소통의 불완전성에 축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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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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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과 만나는 일도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에 날려 온 홀씨가 바늘 끝에 내려앉는 말도 되지 않는, 그 기가 막힌 확률로 수많은 책 가운데 하나가 독자와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과장이 심한 걸까.

 

저자의 이름을 다른 책에서 우연히 자주 보게 된다거나 번역을 맡은 사람을 다른 매체에서 보게 되면 이내 그 책을 구하게 된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도 그렇게 만난 책이다.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미남미녀는 온데간데없고,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이지 못한 외모나 성격을 가진 채로 묘사되고 있다. 아밀리아는 사팔뜨기 회색 눈에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이며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다. 라이먼은 작은 키에다가 폐병까지 지닌 곱추등이다. 마빈 메이시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포악한 성격 때문에 멋진 외모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다.

 

어느 날 사료 창고로 쓰이던 카페에 지저분한 몰골의 라이먼이 찾아온다. 그 후 카페는 새 단장을 하여 고단하고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위안을 주고 마을에 유일한 사교 장소가 된다. 인색하기 이를 데 없던 아밀리아는 라이먼에게 새 옷을 입히고 정성껏 보살펴주는데, 이 같은 아밀리아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아밀리아는 보잘것없는 라이먼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돈 밖에 모르던 아밀리아는 이전에 없던 활력으로 세상을 대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어서 카페는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는 안락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게 4년 동안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어느 날 나타난 마빈 메이시로 인해 카페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된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의 전 남편이었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를 사랑했지만 아밀리아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고작 열흘간의 결혼 생활은 파탄을 맞았다. 마빈 메이시는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을 정도로 못된 짓만 하고 다녔으므로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으니 마을은 긴장할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라이먼은 마빈 메이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외로운 사람이 바로 아밀리아다. 라이먼 때문에 그토록 싫어하는 마빈 메이시를 쫓아낼 수도 없는 상황. 예전처럼 홀로 외롭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마빈 메이시와 같은 공간에서 지낼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결과는 라이먼과 마빈 메이시의 승리로 끝이나 그 둘은 마을을 떠나게 된다. 아밀리아에게 크나 큰 고통을 안겨준 채로.

 

그 후 카페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가엾은 아밀리아는 슬픈 카페에 홀로 갇혔다. 스스로 목수에게 부탁해서 모든 문을 판자로 막아버린 것이다. 더 이상 카페에서 예전의 평화로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 아무도 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 떠난 삭막한 아밀리아의 마음처럼 흉측하게 변한 카페로.

 

 

 

 

우리는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소설을 보면 그 모든 말에 수긍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그래서 세상이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제멋대로 생기더라도 성격적으로 장애가 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의미 없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마술 같은 사랑의 힘을, 사람을 변하게 하는 사랑의 존재를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의 덧없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짧은 사랑이 지나가면 영원한 고통만 남는다는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 작가의 사랑론을 인용해 본다.

 

“사랑이 신비로운 이유는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적 경험이 아니라 혼자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요, 외로움을 더욱 심화시키는 일이다.”

 

故 장영희 교수가 ‘그로테스크(grotesque)’하다고 표현했듯, 사랑에 고통 받는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하다. 그러나 작가는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신장에서 나온 돌로 장식한 시곗줄을 선물하거나 콜라 병에 꽂아놓은 백합처럼 등장인물의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지를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5쪽)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슬픈 카페의 노래』는 사랑 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의 사랑이야기다. 사랑하는 일이 사랑 받는 일보다 더 큰 괴로움을 안겨줄 지라도 기꺼이 사랑에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물음표 하나를 던져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은가?’라고.

 

 

사랑할 수 없는 여자, 사랑받을 수 없는 남자의 사랑이야기는 슬프기에, 그래서 더 아름다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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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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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나는 오늘을 위해 피를 팔면서 산다  

 

피는 생명의 증거이자 죽음을 부르는 신호다. 피가 매매의 대상일 때 삶은 잔인하고 비루해진다. 피를 파는 것은 목숨을 파는 것이며 자신을 파는 것이다.

 

매혈(賣血)은 헌혈과 다르다.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가 살기 위해 피를 뽑는 것이다. 매혈을 통해 번 돈으로 재산을 축적하겠는가. 최악의 생존 조건에 내몰린 사람이 선택한 마지막 연명 수단일 뿐이다.

 

허삼관은, 그래서 슬프다. 그가 피를 팔고자 했을 때는 늘 가족이 우선이었다. 자신을 위해 피를 팔아본 적이 없다. 동네 미녀 허옥란과 결혼하기 위해, 첫아들 일락이가 자기 핏줄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의 사고 처리를 위해, 가뭄 때문에 온 가족이 굶주릴 때, 문화대혁명으로 농촌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손에 돈을 쥐어주기 위해, 갑작스런 병으로 신음하는 일락이를 살리기 위해, 허삼관은 기꺼이 자신의 피를 판다. 중국에서 한번의 헌혈에 뽑는 피의 양은 4백밀리, 우리의 헌혈량과 같다. 그에게 피란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자 돈줄이며 배를 곯는 가족들에게 국수를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족들 앞에서 가장의 능력과 권위를 한껏 뽐내기 위한 비장의 무기이기도 하다.

 

병원에 피를 파는 허삼관은 나름대로 몇 가지 규칙을 가지고 있다. 피를 팔러가는 길 내내 오줌보가 터질 만큼 물을 마신다. 그래야 피가 묽어져 그 양이 곱절로 늘어날 것이란다. 피를 판 후에는 꼭 볶은 돼지 간 한 접시와 황주 두 냥을 챙겨 먹는다. 빠져나간 피를 보충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피를 팔며 연명하지만 허삼관의 삶이 고단하거나 비루하지는 않다. 큰 아들 일락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남의 집 아들을 9년 동안이나 키웠다며 동네 사람들이 ‘자라 대가리’라고 비웃었을 때도, 피 판 돈으로 아들의 상사에게 술을 따르고 담배를 권해야했을 때도 그는 당당하다. 일락이의 간염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사흘 단위로 피를 뽑을 때에도 행복하다. 피라도 팔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며 피를 뽑아도 괜찮은 자신의 건강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Scene #2  매혈의 웃음 뒤에 감춘 아버지의 눈물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맨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거 아냐. 널 11년이나 키워 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는 안 되는 것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1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야.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내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할란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일락이 눈에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들어오자 아주 조심스럽게 허삼관에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갑자기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187쪽)

 

집 나간 의붓자식 일락이를 찾은 허삼관이 아이를 등에 업고 걸어가며 퍼부어대는 욕에 자신의 처지가 다 들어 있다. 허삼관은 의붓자식 일락이를 차마 어쩌지 못한다. 미울 때는 욕을 퍼붓다가도 애써 친자식들과 웃을 때 닮았다며 자위한다. 허삼관은 늘 피를 팔아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라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 그래서 말로 음식을 만들어 먹이기도 하고, 일락이만 빼고 국수를 먹으러 가기도 한다. 일락이도 국수가 먹고 싶다. 그래서 친부를 찾아가 보지만 어림도 없다. 결국 허삼관이 그를 다시 품는다. 아이는 국수 먹으러 가는 거냐고 천진하게 묻는다. 아비는 ‘그래’라고 짧게 답한다. 짤막한 아비의 대답에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소설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독자들의 슬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이다. 홍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 자린고비를 능가하는 기지로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나, 문화대혁명이라는 혹독한 시간에 비판의 대상에 오른 아내의 자기비판회를 여는 모습은 역사와 한 개인의 삶과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허옥란이 마녀사냥을 당하는 장면과 소문이 진실이 되고 마는 혁명기의 인간 군상이 허허롭다.

 

허삼관의 피는 건강한 민중성이며 친근한 가부장성을 상징한다. 평생 가족을 위해 피를 팔았던 그가 육십을 넘긴 인생의 황혼 길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서, 오직 볶은 돼지 간과 황주를 먹고 싶어서 피를 팔고자 한다.

 

모두가 안정적인 삶의 자세를 잡아가는 어느 날 환갑이 다된 허삼관은 갑자기 피를 판 후에 먹는 고기와 술이 먹고 싶어서 피를 파는 병원에 간다. 하지만 피를 팔 수 있는 이를 고르는 혈두는 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를 팔 수 없다고 우긴다. 평생 가족과 다른 사람을 위해 피를 팔다가 오직 자신의 욕구에 따른 의지로 피를 팔려 했을 때, 그것이 안 된다고 했을 때의 허무감.

 

하지만 늙은 피는 가구 칠에나 쓰일 뿐이라며 병원에서 쫓겨났을 때 그의 곁에는 아내 허옥란이 있었다. 쓸쓸해진 남편에게 돼지 간과 황주를 먹이기 위해 승리반점으로 데려가는 아내의 모습에,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진한 페이소스가 배어있다. 늘 그렇듯 아버지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가정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일생을 살아온 남자, 어려웠던 시절에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냈던 우리의 아버지들, 집안에 닥쳐온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내다 팔고 허름한 장터 구석에서 돼지국밥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진다.

 

 

 

 Scene #3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 뜨겁고도 진한 생명력

 

 

 

마크 퀸  「Self」 2001년

 

 

‘매혈’하면 허삼관 말고도 생각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지금도 활동 중인 영국 출신 컨템포러리 예술가 마크 퀸.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만든 그의 작품 중에 ‘Self’라는 것이 있다. 이 작품은 미술 역사사상 가장 엽기적이다.

 

‘Self'는 5년마다 한 번씩 마크 퀸 자신의 혈액 4ℓ를 채혈해 만든 시뻘건 ‘피 두상’이다. 자신의 피로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예술작품을 만든 것이다. 일단 대부분 사람들은 마크 퀸의 피로 만든 두상을 끔찍하게 여긴다. 무엇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실은 두상을 만드는데 사용한 4ℓ의 혈액은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전체 피의 양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Self'는 일회적인 작품이 아니다. 놀랍게도 연작작품이다. 1991년 첫 작품을 제작한 후, 조금씩 자신의 피를 뽑아 모았다가 5년마다 한 개씩의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크 퀸의 작품은 간신히 혐오감을 누르고 보면 ‘인간 존재의 찰라성과 허무함’을 ‘핏속’까지 사무치게 느끼게 된다. 냉동장치를 통해 적절한 온도를 맞추어 주지 않으면 변색이 되거나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퀸은 왜 굳이 자신의 피를 뽑아서 자화상을 제작한 것일까.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정기적으로 채혈 작품을 만들어도 퀸은 생명에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허삼관처럼 퀸에게 피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인 것이다.

 

“설령 목숨을 파는 거라 해도 전 피를 팔아야 합니다.” (291쪽)

 

‘피’는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매혈은 목숨의 일부를 파는 일이다. 허삼관의 인생여정이 가장의 삶을 넘어 이타적 인간의 삶으로 비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허삼관의 매혈 인생은 자신이 누구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매혈은 ‘자라 대가리’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무식하고 어리석은 방법일 수 있으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한 뜨겁고도 진한 생명력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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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4-12-30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넘 근사한 글을 읽고갑니다. 새삼 북플에 감사라도 전해야하나 싶어지네요.인터넷였다면
이리 들여다 보진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하면 참.엄마,라는 그 무게만큼
복잡다단한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제 매혈기의 감상은 님처럼 진중하게 아버지를 똑바로 관통하지 못합니다.
대충 얼버무린 우스겟소리로 헤치워버리고
말았는데..덕분에 위로가 되서 따듯해졌어요.
실은 바라는 거죠..누군가는 책임있는 아버지가 좀 되어 이시대의 아버지를
보여줄 순 없는거냐고...무얼 원하는건지
알게 되서 기쁩니다.고맙습니다. 저는 님의
글로 선물을 받은 셈인데..cyrus님껜 딱히
드릴게 없어서 새해엔 그저 원하는 일들의 순탄함을 빌어 드리는 수밖에 없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cyrus 2014-12-30 18:26   좋아요 0 | URL
잡문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감상을 선물로 표현한 분은 장소님이 처음입니다. 칭찬보다 건설적 비판을 선호하는 성격이지만 장소님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필사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컴퓨터 글씨체로 된 문장을 읽다가 필사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읽게 됩니다. 이것이 필사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장소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일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

[그장소] 2014-12-30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도 내내 그럴 것이지만 이 첨단을 달리는 기계는 편리함은 주지만 오래도록 기억을 붙잡아주는데엔 영 아닌 것 같아
반편이 같이 저는 손글씨를 쓰고 사진을 찍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소통의 도구임에는 확실하단걸 알겠네요.
비판은 쓰고 칭찬은 달터인데..약이 뭔지..
가려 드시는걸 보니..늘 조심하여 글추렴 해야겠다..싶어집니다.그러나 좋은 선생은
가까이..그렇지요..?
못난 글씨 봐주셔서 감사하고 잠깐의 환기
정도 되었다면..기쁘게 여기겠습니다.
좋은글..자주 부탁 드립니다.많이 배우겠습니다.따듯한 저녁 되세요..(^-^)v

루쉰P 2015-01-17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많은 책을 읽고 계시네요 ㅎ 하정우의 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관심이 생겨 책은 어떤 건가 보러 왔는데 ㅋ 이렇게 잘 써주셨네요 ㅎ
대학은 졸업 하셨는지요? ㅎ 아직도 학생이신지 궁금합니다

cyrus 2015-01-18 14:52   좋아요 0 | URL
루쉰님!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저는 작년에 이미 졸업했고요, 취업 준비 중입니다. 루쉰님이 저를 학생으로 기억하시는 모습을 보니 물 흐르듯이 지나간 시간이 그리워지고, 그 때 그 시간의 기억에 딱 멈춰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루쉰P 2015-01-1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리 말씀하시니 지나간 시간이 그리워 지네요 ㅎ
전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살던 중 ㅎ 아예 모든 것을 접고 노무사가 되기 위해 대학동 고시촌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취업 준비 중 이시라니 여러가지 힘든 것과 싸우고 계시리라 여겨 지네요 전 제가 하고 싶기에 고시 중이지만 분명 원하시는 사회에서 자리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기 고시동네에는 20대의 수많은 청년들이 머물러 있습니다 바늘 구멍같은 합격을 위해 모든 걸 접고 들어와 있어요
어쩔 때는 강의를 듣기 위해 아침 7시부터 눈이 뻘건 채로 줄 서 있는 청년들을 보며 빨갛게 달궈진 쇠들 처럼 자신이 갈려고 하는 바에 대한 집중이 감탄 스럽더군요 ㅎㅎㅎ
남들은 왜 청춘을 고시에 바치냐는 비아냥을 할 수 있어도 뭐랄까 진지하게 시험에 도전하는 이 사람들을 보며 기회조차 주지 않는 사회에서 처절한 저항을 하는 자들 같아 경건해 집니다
저도 많이 느끼게 되구요 ㅎ
아무쪼록 진짜 힘든 취업의 시기 여태 읽으신 인문학적 재능으로 현명하게 뚫고 가시리라 여겨집니다
올 해는 우리의 승리의 한해로 만들어 가시자구요 ㅎ

cyrus 2015-01-18 19:14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우리 힘냅시다. 승자가 되어 서로 웃는 모습으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

 
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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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33] 테레즈 라캥

 

 

 

 

 

 

 Scene #1  피와 살이 뒤엉킨 욕정이 부른 파멸

 

불륜과 살인. 인간이 저지르는 행동 중 이보다 더 비윤리적인 게 있을까. 육체적 욕망과 본능에 휩싸인 존재는 영혼이 없는 인간, 한마디로 동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본성 깊은 곳에는 도덕과 양심 대신 피와 살이 뒤엉킨 욕정만이 이글거리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불과 28살의 나이에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을 참혹할 만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인류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르짖던 19세기 후반에 졸라의 작품 『테레즈 라캥』은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작가 혼자서 감내하기엔 쉽지 않았을 터.

 

오늘날이야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언론과 평단은 “에밀 졸라는 마치 포르노그라피를 펼쳐 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불쌍한 히스테리 환자”라며 연일 혹평을 쏟아냈다. 비판의 수위가 얼마나 거셌는지 저자 스스로 2판 서문에 열한 페이지에 걸쳐 자신을 옹호하는 반박문을 실었을 정도. 졸라는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해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해 행한 것 뿐”이라고 맞섰다.

 

평단의 비판에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대목에선 작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모티브가 됐을 정도로 줄거리와 상황 묘사가 파격적이다.

 

주인공은 의욕 없이 살아가던 여인 테레즈와 마초 느낌의 우락부락한 사내 로랑이다. 테레즈는 병약한 사촌 카미유와 결혼하고 파리 뒷골목 잡화점 어둠 속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카미유의 친구 로랑과 마주하고 속에 숨겨져 있던 욕망이 터져나온다. 욕망에 몸을 불태우던 테레즈와 로랑은 결국 카미유 살인을 공모하고 완전 범죄로 끝내버린다. 그리고 결혼. 이젠 행복만이 자신들을 기다릴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행복해야 할 첫날 밤. 그들 사이에는 죽은 카미유의 혼이 자리 잡는다. 기대했던 행복은 오간 데 없이 이제 그들 사이엔 공포와 서로에 대한 증오 뿐. 영혼을 보듬어줘야 할 결혼은 오히려 매일같이 영혼을 파괴하며 이어진다.

 

몸짓으로 절규하는 라캥 부인은 아들에 대한 상실감을 로랑의 존재로 대신 메운다. 로랑과 테레즈는 까미유의 부재로 인해 오히려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의 존재에 몸서리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들의 정욕은 연이어지는 암전 속에서 차갑게 식어간다. 그리고 끝내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낸다.

 

 

 Scene #2  죽음까지 파고드는 욕망의 에로티시즘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에로티시즘은 가장 신비하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엉뚱하며 나머지 삶과 분리해 이야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테레즈와 로랑의 불륜에서 느껴지는 욕망의 에로티시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 

 

금기와 위반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이며 테레즈와 로랑 이 둘 사이에서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 노동의 삶은 에로스의 삶을 제어하기 위해서 금기를 만들지만, 그 금기는 위반을 막을 수 없다.

 

테레즈는 어린 시절 고모에게 맡겨져 병약한 카미유와 함께 자란 탓에 원래 지니고 있던 야성적 기질을 억누른 채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란 인물이다. 그러자 로랑을 만난 순간부터 무료한 일상으로부터 억눌려진 야성적 욕망이 용솟음치게 된다. 때마침 로랑도 채울수록 허전한 자신의 쾌락의 부재를 해소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노동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변하면서 에로스의 바다로 빠져들게 되며, 그렇게 해서 범하게 되는 위반에서 오는 쾌락이야말로 에로티시즘의 원천이다.

 

그러나 사랑, 성욕, 쾌락과 고통, 살해욕, 죽음. 이 지극히 상반된 두 감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금기를 어긴 그들의 위험한 사랑은 결국 카미유를 살해하려는 무시무시한 감정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상대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망을 순식간에 식게 만드는 공포의 감정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건 결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자신이 한 인간을 죽였다는 죄책감, 공포심은 이미 세상에 존재치 않는 영혼을 그들 사이에 불러들이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해간다. 육체적 폭력이 오히려 위안이 될 정도의 극한 괴로움. 그걸 끝내는 건 결국 죽음뿐이다. 에로티시즘이 불러들이는 죽음이다.

 

 

 

 Scene #3 공포와 절망의 삶, 잠시라도 잊게 해다오

 

중독성 있는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탈출에서 시작해서 감금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중독되면 그것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테레즈와 로랑의 만남도 그렇다. 서로 욕망에 중독되어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결국 망자 카미유가 만든 공포와 절망의 방에 감금되고 말았다.

 

 

 

 

 

에드가 드가  「압생트」  1875~1876년

 

한 달 동안은 테레즈도 로랑과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카페 속에서 살았다. (중략) 그녀의 신경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방탕, 육체적 쾌락은 이미 망각을 가져다주는 치료제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입천장이 타버려 아무리 강한 술에도 무감각한 술주정꾼이 되었다. 음탕한 쾌락에도 무감각해져, 정부들에게서는 오직 권태와 피로를 얻을 뿐이었다. (337쪽)

 

위험한 사랑에 탐닉하게 만든 그들에게는 서로 ‘압생트’ 같은 존재이다. 압생트는 도취약물처럼 중독성이 강해서 ‘악마의 술’이라 부른다. 값은 싸지만 알코올 도수가 70도에 달해 취기를 빨리 느끼게 했다. 드가의 그림에서처럼 남녀 노동자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몸과 마음을 쉬는 시간이 곧 압생트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장기 음용하면 간질과 유사한 발작 증세와 근육마비 증상이 생기며 정신착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로랑은 쾌락을 간절히 요구하는 테레즈의 메마른 입술에, 테레즈는 로랑의 크고 건장한 체구에 뿜어져 나오는 짐승같은 욕정에 중독되었다.

 

살인의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두 사람은 육체적 쾌락에 집착했다. 상대만 달랐을 뿐이지 테레즈와 로랑은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무언가 잊고 싶어서 압생트를 마시는 것처럼. 그러나 이것마저도 자신들에게 죄어오는 공포에 벗어날 수 없었다. 테레즈와 로랑은 악몽일 거라고 믿어보지만 가위에 눌린 듯 깨어지지 않는다. 쾌락의 중독은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현실을 망각할 수 있어 좋았던 한나절의 욕망은 점점 깨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변하여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잊고 싶은 건 현실이었는데 정작 잃어버린 것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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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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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불행해졌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이 있다. 그는 버려진 것 같은 자신의 삶을 예수와 비교한다. 시골길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예수를 생각한다. 따뜻한 곳에 살았으며 십자가에 일찍 못 박힐 수 있었던 예수를 부러워한다. 살아갈 이유와 버틸 힘이 없음에도 목을 맬 노끈 하나 갖고 있지 않은 인생길에서 그가 하는 일은 한가지다. 바로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그는 고도를 기다린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서사는 오직 ‘기다림’뿐이다.

 

한 그루의 나무 밑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와 블라디미르는 낡은 옷과 해진 중절모 외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닳아가는 신발은 작아 불편하다. 낡은 넥타이는 생에 대한 마지막 격식과 예의인 듯 끝까지 풀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는 이들은 세상 위에 내던져진 인간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한다. 이들의 말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목적이나 대상이 없기에 이들의 말은 하나의 축으로 집결되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나 사방에 흩어진다. 고독한 인간의 말은 맺히는 곳 없이 허무하게 사라진다. 이들의 대화는 질문과 답의 구조를 취하나 시종일관 소통이 불가능하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그럼에도 엉뚱한 대답만을 이어간다. 소통의 부재는 이들만의 특징이 아니다. 극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 포조와 럭키 역시 자신의 말만을 뱉어내기에 바쁘다. 말을 하지 않던 럭키는 어느 순간 입을 연다. 그의 말은 해괴한 극의 상황을 패닉상태로 몰아넣는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힘으로 말리기 전까지 쏟아져 나온다. 결국 이들에게 완벽한 소통이란 불가능하며 더불어 자신과의 소통도 이루지 못한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고 꿈과 현실을 혼동한다.

 

고립되어 있는 고독한 인간이 세상과의 부조화 속에서 버티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뱉어낸다. 그 말은 무의미하고 그 무의미를 통해 의미를 이뤄나간다. 무의미와 의미는 끝까지 충돌한다.

 

이들이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끊임없이 기다리는 고도란 과연 무엇일까? 고도가 누구인지, 오기는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구원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한 가닥의 실마리가 있으나 그것 또한 확실치 않다. 독자(혹은 연극을 보는 관객)은 그들과 함께 고도를 기다린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가 끝나도 고도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릴까?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구원해줄 무언가, 이를테면 고도 같은 것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이들의 기다림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그러니 기다림의 시간과 장소가 확실한지조차 알 수 없다. 습관이 되어버린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반복하는 '말놀이'는 고도가 실제로 온다면 끝날 터이다.

 

그러나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전갈을 알리는 소년만이 등장한다. 소년의 등장으로 1막이 끝나면 새로운 기다림이 시작되고, 2막의 마지막 역시 유예되는 기다림을 알리는 소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소년 또한 현실의 인물인지 환상속의 기대가 만들어낸 허상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소년은 기다림의 절망 속에서 고도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찾기 위한 블라미디르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게 중요한 것은 기다림 자체가 아니라 기다리는 태도인 것이다. 이들은 어제를 잊고 꿈을 잊고 현실을 잊으면서도 자신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놓치지 않는다. 목을 매고 싶을 지라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고도를 기다리는 것, 그것은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대변한다.

 

어긋나는 이들의 대화와 망각은 관객들을 허무하게 만들면서도 웃음을 이끌어낸다.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알쏭달쏭하게 느껴지는 허소(虛笑). 그 웃음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든다.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결국 우리의 문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절망을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서 고도를 기다리는 독자나 관객들에게 그 기다림이 계속될 것이라는 무서운 메시지를 남긴다. 독자는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책을 붙들고 기다린다.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고서도 고도를 기다린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것을 모른다. 알고 있었다면 작품 속에 써 넣었을 것이다.” 작품을 매년 한번씩 또 읽어도 나는 고도를 모른다. 고도는 과연 올 것인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올 것인지. 때로 기다림은 기다림 자체로 아름답다고 하기도 한다. 전망도 없고 기대도 없는 상황에서 기다림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지만 기다리지 않으면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오기를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게 만드는 작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무하다고 해서 삶을 놓아서는 안 된다. 삶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할수록 삶은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이 ‘말장난’이라는 유희를 발견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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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4-05-0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7번째 단락에서 '디디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의 디디는 무엇을 말하는것인가요?!

cyrus 2014-05-05 09:31   좋아요 0 | URL
디디가 <고도를 기다리며> 우리나라 연극 버전의 블라디미르의 이름입니다. 예전에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공연의 감상까지 곁들이다보니 이름을 잘못 썼군요.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안나푸르나 2014-11-2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한동안 고도를 그렸던 기억이 있네요
아니 고도를 기다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요?

cyrus 2014-11-29 09:1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읽을 때마다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장소] 2015-01-2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그 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