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조이스의 소설이 난해하다고 혹평한 비평가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조이스는 작가다, 이 장님들아. 조이스는 작가라고!” 파운드가 조이스의 소설을 읽고 나서 당최 무슨 말인지 1도 모르겠다는 독자의 불평을 들었다면 혀를 차면서 그 독자를 한심하게 쳐다봤을 것이다. 조이스가 세계적으로 훌륭한 작가임은 분명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독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문학적 실험을 감행했다. 의식의 흐름 묘사와 신비로움이 더해지는 다양한 문체 속에는 수많은 수수께끼 혹은 의미심장한 실험적 의도가 감춰져 있다. 배경 지식 없이는 조이스의 문장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무턱대고 읽었다가는 조이스가 완벽하게 설치한 이야기의 함정 속에 허우적거리기 쉽다. 조이스의 소설은 솔직히 어렵다. 여러 번 읽어도 불명확한 문장이 자꾸 눈에 걸린다.

 

 

 

 

 

 

 

 

 

 

 

 

 

 

 

 

 

 

조이스의 더블린 삼부작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는 더블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롤플레잉 게임과 같다. 독자는 소설에 나오는 더블린 사람이 되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스티븐 디덜러스가 된다면 독자는 넓은 예수회 학교 교정을 거닐면서 친구와 함께 예술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왠지 모범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주인공을 괴롭히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독자는 스티븐처럼 이를 참고 넘어서야 한다. 강경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인 아버지와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는 어머니의 잔소리 종합 세트를 듣게 되면 집에 오랫동안 머물기 싫어진다. 이러한 간접적 경험을 통해 독자는 어린 시절 조이스의 내적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외톨이 모범생을 그냥 가만히 놔두지 않는 친구들의 놀림감에 맞서야 한다. 학교도 스티븐을 피곤하게 만드는 곳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3장에 지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교하는 신부의 목소리를 끝까지 참고 들어야 한다. 엄청나게 긴 장면이라서 비기독교인 독자에게는 무척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클리어 리드(Clear read)했다면 다음 스테이지 《율리시스》가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조이스가 제작한 ‘더블린 삼부작’ 게임의 끝판왕이다.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 스티븐, 레오폴드 블룸이 되어 더블린 시가지 전체를 둘러본다면 클리어 리드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달리 《율리시스》 속에는 언어의 고어, 폐어, 속어, 비어, 은어 등 무려 3만 개의 어휘가 뒤섞여 있고, 동서고금의 문학, 철학, 역사, 신학, 예술 등에서 축적된 지식이 모자이크처럼 교묘하면서도 치밀하게 얽혀 있다. 《율리시스》의 주석은 독자가 미궁 같은 소설에 헤매지 않게 하려고 역자가 친절히 건네주는 실타래다. 《율리시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타래 같은 주석이 너무 많은 게 흠이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역자의 실타래를 잘 잡는다면 스티븐과 블룸의 여정을 쫓아갈 수 있다.  

 

《율리시스》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독서일지도 모르겠다. 이 어렵고도 분량이 만만치 않은 소설을 읽어서 무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율리시스》가 오늘날 현대의 고전으로서 떳떳한 대우를 받고 있지만, 단순하게 ‘고전’이라는 이름을 믿고 이 책을 읽었다가는 실패와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율리시스》를 죽기 전에 한 번 읽어볼 만한 고전이라고 생각해서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3장을 읽었다. 《율리시스》 1장부터 3장까지는 스티븐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인데 다음 장부터 레오폴드 블룸이 등장한다. 앞으로 읽어야 할 장은 총 15장. 이제 고작 3장을 읽었을 뿐인데 후회가 밀려온다. ‘고전’이라고 해서 함부로 덤벼들면서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한독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맨 처음에는 김종건 선생의 번역본(생각의나무, 2011)으로 시작했다. 이 책을 직접 실물로 보게 된다면, ‘이런 책을 누가 읽겠냐?’고 생각하게 된다. 전체 쪽수가 1300쪽을 족히 넘는다. 책도 쓸데없이 크게 만들었다. 독자가 읽으라고 만든 건지 아니면 책 베개로 삼아서 독자의 수면을 유도하려고 만든 건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조이스 작품에 평생 연구와 번역에 열정을 바친 선생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책의 크기에 경외감이 느껴진다. 책 뒤편에 등장인물 소개, 줄거리, 작품 해석 그리고 1933년 《율리시스》 해금 조치에 결정적 영향을 준 울지 판사의 판결문도 실려 있다. 아쉽게도 생각의나무 출판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율리시스》는 서점에 구할 수 없다. 어문학사에서 나온 《제임스 조이스 전집》은 특별 한정판이라서 구입하고 싶어도 가격이 부담스럽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범우사 《율리시스》(1997)는 여전히 구할 수 있지만, 출판연도가 꽤 오래됐고 세 번째 개정 번역본인 생각의나무 《율리시스》와 비교하면 번역상 큰 차이가 있다. 김종건 선생은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아 개정판을 내놓았다. (첫 번째 번역본은 1968년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비록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조이스의 문장을 우리말로 꼼꼼하게 번역한 선생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우리말에 없는, 원문의 구두점(:)까지 그대로 살려서 번역했다. 

 

 

 

 

 

 

 

 

 

 

 

 

 

 

 

 

김성숙 선생이 번역한 《율리시스》(동서문화사, 2011)는 가독성이 좋다. 김종건 교수의 명성을 믿고 그의 번역본을 무조건 읽으라는 법은 없다. 책 소개에 의하면 김성숙 선생은 ‘율리시스 학회’ 창학에 참여했으며, 김종건 선생과 마찬가지로 《율리시스》 번역과 연구에 인생의 절반을 바쳤다고 한다. 나는 사소한 것마저 궁금하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성격인데 ‘율리시스 학회’가 어떤 단체인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그런데 김성숙 선생 프로필과 마찬가지로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김종건 선생은 한국 조이스학회 명예회장이다. 율리시스 학회와 한국 조이스학회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율리시스》를 이렇게 읽는다. 물론 내 독서 방식이 옳다는 건 아니다. 각자 편한대로  《율리시스》를 읽으면 된다. 일단 김성숙 선생의 번역본으로 하루에 한 장씩 읽는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다음 장도 읽는다. 한 장을 다 읽었으면 김종건 선생의 번역본으로 주석만 따로 읽는다. 두 가지 번역본을 번갈아서 다 읽은 뒤에 참고서 격으로 《제임스 조이스 문학 읽기》(어문학사, 2015)의 상세한 해설도 읽는다. 해설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있으면 다시 김성숙 선생의 번역본을 훑어본다. 번거롭지만 이렇게 읽어야 반복적인 독서가 이루어진다. 여러 번 읽으면 어느 정도 텍스트 속에 숨겨진 조이스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고,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김종건 선생은 책의 머리말에서 지나치게 어려운 문장이나 추상적인 해석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상황도 복잡하게 진행되듯이 《율리시스》가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읽게 되면 진짜 어렵게 느껴진다.

 

사실 조이스의 소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읽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조이스의 소설을 어렵게 생각하는 작가의 지인과 후원자들의 불만이 폭주하자 조이스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소리 내서 읽으라고 당부했다. 특히 아일랜드 악센트로 읽을 것을 권했다. 그러므로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으려고, 아니 속는 셈 치고 조이스의 당부대로 문장을 듣기 위해서는 원서도 챙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율리시스》를 이제 막 읽는 사람으로서 당부하건대 《율리시스》를 읽을 땐 혼자서 읽지 마시길. 정말 힘든 일이다. 《율리시스》를 읽기 시작한 나 또한 《율리시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장님이나 다름없다. 혼자 읽기보다는 원서, 해설서를 갖추고 조이스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율리시스》를 읽는 것이 편하다. 단, 《율리시스》 완독 목표가 뚜렷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한 두 명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율리시스》 독서에 좌절감을 느끼는 동료들을 도와줄 수 있다. 한 사람이 독서를 포기하면 다른 사람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포기하고 만다. 그래서 인내심 많은 사람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멱살을 잡아서라도 《율리시스》 완독을 달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아무리 《율리시스》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인내심이 부족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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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5-01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히 읽기가 두려운 책이군요 ㅠㅠ
하지만 고행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의도적이고 자발적 고행은 더욱...
분명 득도하시는 부분 있으실걸로 짐작됩니다.
머리 식히시기 위해 요즘 베스트셀러도 읽고 서평 남겨 주세요.

cyrus 2015-05-02 13:03   좋아요 0 | URL
요즘 제가 신간보다는 예전에 사놓고 안 읽은 책들 위주로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신간도서정보는 북다이제스트님을 포함한 이웃님들의 서평이나 책 소개 글을 통해서 참고하고 있습니다. ^^

수이 2015-05-01 1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께가-.-;;;;;;

cyrus 2015-05-02 13:04   좋아요 0 | URL
책 읽다가 잠이 오면 책 베개로 사용할 수 있어요 ㅋㅋㅋ

fledgling 2015-05-01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 독서 스터디를 꾸려야할까봐요ㅋ 강신주는 프루스트와 같이 10번 넘게 읽었다더군요... 더블린 사람들이랑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나서 슬슬 도전해봐야겠다는!

cyrus 2015-05-02 13:08   좋아요 0 | URL
<더블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조이스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과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종건 선생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원형인 미완성 작품 <영웅 스티븐>은 <젊은 예술가>를 먼저 읽고 난 뒤에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그나저나 강신주의 프루스트 읽기는 정말 대단해요. 저는 1권만 10번 넘게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적이 많아요. ㅎㅎㅎ

표맥(漂麥) 2015-05-0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요즘의 저로서는 엄두도 못내는... 의미있는 독서행 이군요. 부럽습니다.^^

cyrus 2015-05-02 13:09   좋아요 0 | URL
정말 고행에 가까운 독서입니다. 줄거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딱 한 번이라도 완독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

해피북 2015-05-0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독서편력이세요 같은 주제의 다양한 책을 읽으며 꼼꼼하게 비교와 이해과정을 거치시니 올리시는 페이퍼마다 깊이가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거 같아요 화이팅하시구 꼭 원하는 목표까지 도달하셔서 성과있으시길 바랄께욧 파이팅입니닷^~^

cyrus 2015-05-02 13:1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율리시스>를 다시 읽게 되는 날이 없다는 마음으로 완독해야겠습니다. ^^

붉은돼지 2015-05-01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즈`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정말 필생의 숙제입니다요^^

cyrus 2015-05-02 13:14   좋아요 0 | URL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필생의 과제가 바로 <잃어버린 시간>과 <율리시스>일 것 같습니다. 하필 두 작품의 표현 방식이 읽으면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의식의 기법이네요. 또 분량도 많고요. 죽기 전에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하나 2015-05-0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작가들이 율리시즈 언급 굉장히 많이 하더라구요. 판본을 뭘 골라야 하나 고민했는데 조언 감사합니다 ^^

cyrus 2015-05-02 13:15   좋아요 0 | URL
김종건 선생의 번역본은 워낙 유명해서 많은 독자분들이 찾긴 한데, 이미 단행본으로 나온 생각의나무 판본은 절판이라서 구하기 어려울 겁니다. 지금으로선 시중에 구해서 읽을 수 있는 판본이 동화문화사 판본이 유일합니다.

AgalmA 2015-05-01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무엇인가에서도 누누히 얘기되고 있듯이, 혁신적인 소설들은 스타일이 주제며, 형식이 곧 내용이지요.
화이팅 안해도 잘 하시고 계시니ㅎ...그나저나 올해 제 목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였는데....흠. 이번 달 정리 좀 되면 남은 반년 노력해봐야겠어요^^

cyrus 2015-05-02 13:16   좋아요 0 | URL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몇 년 전부터 시도했다가 중도에 포기했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독서를 시도하면 마치 <수학의 정석> 1장만 푸는 느낌이에요. ㅎㅎㅎ

에이바 2015-05-0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율리시스> 읽으려고 다른 작품들부터 조금씩 읽고 있는데요, 생각의 나무 판은 중고도 고가라;; 동서문화사 걸로 찜해뒀습니다. <피네간의 경야>는 더 아스트랄해서 버킷리스트로... 우리나라가 4번째 번역국가래요. 한자어까지 동원해 번역에 수고하신 김종건 선생님께 감사드릴뿐입니다.ㅎㅎ <율리시스> 읽기 전에 아일랜드 역사랑 그리스 고전도 한 번 더 보려고 했는데 어쩌면 cyrus님처럼 하루에 한 두장씩 꾸준히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래도 일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부터 읽고 도전해야겠습니다. 이쪽은 1권은 읽었거든요.

cyrus 2015-05-02 13:18   좋아요 0 | URL
<피네간의 경야> 주석본 가격이 원작의 가격보다 조금 더 비싼 게 함정이에요... ^^;; 생각보다 프루스트 읽기를 시작하시는 이웃님들이 많군요. 저도 얼른 재도전하고 싶습니다. ㅎㅎㅎ

stella.K 2015-05-0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존경한다 시루스!
처음엔 다른 읽을 책도 많은데 이런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냐고
말하고 싶었어. 하지만 니 마음 알 것도 같다.
더블린은 매년 더블린 사람들을 읽은 축제를 한다고 들었어.
지금도 하고 있겠지? 조이스는 확실히 대단한 사람 같아.
부디 이 극한의 독서를 잘 마무리하길 바래.
저 김성숙 번역 나도 참고할게. 읽을지는 모르겠지만...ㅋ

cyrus 2015-05-02 13:26   좋아요 0 | URL
집에 있는 책들 절반은 한 번도 안 읽은 것인데 <율리시스>도 그 중의 한 권이에요. 그래서 조이스를 읽게 됐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감이 듭니다. ㅎㅎㅎ

매년 6월 16일에 `블룸즈데이`라는 이름으로 더블린에 조이스를 기념하는 행사가 펼쳐져요. 조이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블린은 평범한 도시로 남았을거예요.

단발머리 2015-05-03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헉!` 소리가 절로나는 두께예요.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 읽기로 마음속에 다짐을 했는데, 그 다짐이 언제 현실이 될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cyrus님께서 읽으시는대로 페이퍼 올려주시면 그걸로 <율리시스>는 살짝쿵 넘어가고 싶군요.
앞으로도 리뷰 계속 올려주시어요~~~~~~``

cyrus 2015-05-03 21:22   좋아요 1 | URL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이 있으면 소개할께요. 《율리시스》에 대한 편견을 깨보고 싶습니다. ㅎㅎㅎ

단발머리 2015-05-03 21:26   좋아요 1 | URL
<율리시스>에서 재미있는 내용 찾기와 편견 깨기라는 중대한 임무가 cyrus님 어깨에 달려있음을... 기억해주세요^^

cyrus 2015-05-03 21:31   좋아요 1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배경지식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혼자 읽는 상황이라서 전문적인 수준의 내용은 아니지만 언젠가 《율리시스》를 읽으려는 독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단발머리 2015-05-03 21:37   좋아요 1 | URL
저는 언젠가 <율리시스>를 읽어야겠다는 야무진 꿈은 없지만 cyrus님의 페이퍼를 읽으며 따라가다 보면 혹시 제게도...!?! 하는 생각이예요~ 저와 같은 소박한 사람들을 대표해 cyrus님 응원합니다!

Bibliotheca 2015-05-25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더블린부터 도전해야겠네요
 
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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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60] 젊은 예술가의 초상

 

 

 

‘중2병’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반항적인 심리 상태를 빗댄 신조어다. 일본에서는 1999년쯤 만들어진 속어로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란 애니메이션이 제작돼 인기리에 방영됐다. 중2병은 꼭 중학교 2학년에게만 해당하진 않는다. 이르면 초등학교 5학년부터 늦게는 고등학교 1학년까지 증상이 나타난다. 중2병의 증상 유형은 반항아, 고집불통, 공부 스트레스, 진로 고민, 가정불화, 성 탐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아이들은 자아가 더욱 강해지고 자기 의견대로, 생각대로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상황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미성숙한 자아는 그것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 이때 아이들이 나타내는 성향은 여러 가지다. 쥐뿔도 없으면서 실제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기는 다 컸고, 잘나서, 제 일을 스스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의 타카나시 릿카는 겉으로는 평범한 고등학생 같지만, 오른쪽 눈에 늘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 눈이 아픈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오른쪽 눈은 “사왕진안”이라는 강력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안대로 가리고 생활을 한다. 한쪽 눈에 컬러 렌즈를 한 채 24시간을 지내는 릿카는 중2병이 만들어낸 상상 속 마법 세계에서 살아간다. 릿카의 모습을 보면 심한 눈병에 시달려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했던 제임스 조이스가 떠올린다. 조이스도 젊은 시절, 중2병에 가까운 극심한 증세와 행동 때문에 고생했다.

 

조이스는 글쓰기 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할 정도로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갖췄고,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던 모범생이었다. 그렇지만 조이스에게 유년 시절은 정신적으로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집안의 가세가 급격히 줄어들면서부터 아버지의 음주벽은 심해지고, 어머니는 신앙심으로 가정의 혼란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이런 모습을 매일 지켜봐야 했던 조이스는 답답하고 괴로웠다. 예수회 소속 학교에 다니던 조이스는 종교에 점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조이스는 열네 살에 처음으로 사창가를 가게 되었고, 쾌락의 눈을 떴다. 사창가를 드나든다는 것은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죄악에 가까운 행동이다. 과감한 일탈도 조이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지 못했다. 엄격한 종교적 규율이 지배하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조이스의 마음속에는 신앙심을 져버린 것에 대한 죄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신앙심을 버리기 위해 조이스는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게 된다. 조이스의 반항아 기질은 본인도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만 갔다. 결국, 조이스는 후회로 남을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병으로 몸져누운 조이스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미사에 참여해서 기도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런데 조이스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심지어 어머니가 임종을 맞이할 때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극단적 행동은 예민한 성격의 조이스에게 독이 되었다. 조이스는 더블린을 떠나 그토록 원했던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데 성공했지만, 이 사건은 평생 조이스를 따라다녔고 그를 괴롭혔다. 종교의 신앙심을 온몸으로 거부했던 청년시절의 시간은 조이스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에서 읽을 수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정치와 종교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는 더블린에 탈출하고 싶어 했던 조이스의 과거 분신이다. 스티븐은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다. 그렇지만 모순적인 교리를 강요하는 경직된 예수회 학교와 부조리한 사회가 그의 감수성을 억압한다. 외견상 엉뚱해 보이지만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질문은 점점 그의 내면을 파고든다. 결국, 그는 인생의 가치를 예술에서 찾아내고 신앙과 학교, 심지어 가족까지 버린 채 예술가가 된다. 예술은 위태롭고 허약한 스티븐의 삶을 지탱해주는 튼튼한 신조다. 스티븐은 예술에 관한 자신만의 지론을 꿋꿋하게 펼친다. 제2장에 친구들 앞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영국 출신의 바이런이라고 주장하다가 무시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이런은 자유와 반항으로 상징되는 삶을 살았으며 스티븐이 갈망했던 예술가의 삶과 유사하다. 친구들이 바이런을 옹호하는 스티븐을 향해 ‘이단자’라고 비웃어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제5장에서 스티븐은 친구 데이빈과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아름다움’의 정의가 무엇인지 토론을 한다. 데이빈은 스티븐의 예술론에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따진다. 그럴수록 스티븐의 토론 전투력(?)은 향상된다. 스티븐은 자신의 지적 편력을 마음껏 드러낸다. 평소에 개인적으로 심취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친구를 설득시키려고 한다.

 

스티븐에게 아퀴나스는 자신이 예술가가 되면서 맡게 될 예술적 소임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자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보이거나 인식됨으로써 쾌감이나 기쁨을 준다고 생각했다.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미의 결정체로서 궁극의 완전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미적 창조의 신비가 주는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을 읽게 된다면 아퀴나스가 언급되는 내용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븐은 한쪽 눈에 ‘아퀴나스’이라는 이름의 안대를 착용한 채 세상을 바라봤다. 릿카의 ‘사왕진안’처럼 스티븐의 한쪽 눈에 자리 잡은 아퀴나스의 존재감은 스티븐의 비상(飛上)을 유도하게 한 강력한 마법이 되었다. 스티븐은 질식할 것처럼 음울하던 더블린을 떠나는 순간, 예술가가 될 것을 선언한다.

 

스티븐의 성 디덜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장인 다이달로스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자신이 만든 미궁에 갇히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미궁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었는데 그 당시로써는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날개를 등에 달아 공중으로 날아다녀 미궁을 탈출하는 것은 마법 같은 일이다. 스티븐은 미궁 같은 더블린을 탈출하기 위해 아퀴나스의 사상을 밀랍으로 삼아 지성의 날개를 만들었다. 지나치게 조숙하고, 기성 사회에 반발했던 스티븐은 스스로 중2병을 극복하여 자신이 원했던 예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스티븐이 예술가로서의 포부를 강력하게 드러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해피엔딩이다. 그렇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열린 결말이다. 이제 막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기 위해 고작 몇 차례 날갯짓을 한 것뿐이다. 스티븐은 오랫동안 한쪽 눈에 착용했던 ‘아퀴나스 안대’를 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해 힘차게 도약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스티븐은 다이달로스가 아니라 이카루스가 된다. 이카루스는 자만심에 도취하여 바다로 추락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여전히 그의 날갯짓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다. 스티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율리시스》에서 예술가가 되기 위한 스티븐의 여정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스티븐의 친구 벅 멀리건은 스티븐의 예술관에 대립하는 인물이다. 그는 마텔로 탑 전경에 펼쳐진 거대한 바다를 향해 ‘위대한 어머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티븐에게 바다를 바라보라고 부탁한다.

 

 

- 우리의 힘찬 어머니야! 벅 멀리건이 말했다.
그는 갑자기 무언인가 살피는 듯한 눈을 바다로부터 스티븐에게 돌렸다.
- 우리 숙모는 자네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숙모는 내가 자네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싫어해.
- 누군가가 어머니를 죽였어. 스티븐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율리시스》 제1장 텔레마코스 중에서, 동서문화사, 16쪽)

 

 

멀리건은 얄밉게도 스티븐 내면에 자리 잡은 상처를 건드린다. 더블린의 바다를 ‘어머니’라고 지칭하다가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스티븐의 어머니로 돌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기도를 하지 않은 스티븐의 행동을 언급한다. 멀리건은 스티븐의 행동을 ‘힘차고 위대한 어머니’를 죽인 배은망덕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스티븐은 마음껏 지성의 날갯짓을 할 수 있지만, 조이스의 정신을 짓누르는 딱 한 가지 짐이 그의 도약을 방해한다. 그 짐이 바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이스를 위해 남긴 것, 그 짐 속에 조이스가 떨쳐내고 싶었던 '종교'가 들어 있다. 스티븐은 멀리건의 말처럼 ‘힘찬 어머니’와 연결되는 바다 앞에서 두려움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마치 이카로스가 바다 한가운데로 추락하기 직전에 느꼈을 공포감처럼 말이다. 숨을 거두기 직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신앙심을 져버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죄책감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예민한 조이스의 심장에 밀려온다. 스티븐은 《율리시스》 1~3장에 비중 있게 등장한다. 그런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결말에서 예술가로서의 당찬 포부를 보여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스티븐은 학교 교사가 되었고, 무기력하게 더블린을 배회하고 있다. 독자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를 통해서 조이스가 어린 시절 겪었던 치열한 내적 고민과 방황의 흔적에 공감할 수 있다. 스티븐의 모습은 자유로운 삶을 원하지만, 현실의 벽에 막혀 그것을 뛰어넘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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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4-30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임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방인-뫼르소가 생각나네요. 뫼르소는 그 강요된 윤리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려했죠. 역시 조이스와 까뮈의 차이일까요.
뉴스보니 욕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기가 중학생이라고 하고, 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때니 중2병은 그럴수밖에 없는 형국이랄까요...

cyrus 2015-04-30 21:50   좋아요 0 | URL
나중에 카뮈의 <이방인>과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비교해서 읽어보고 싶군요.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것 같습니다.

stella.K 2015-04-30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이2병이 일본의 만화영화에서 나온 말이었어?
정말 제임스 조이스와 절묘한 조합이로군!
제임스 조이스 당시론 꽤 조숙했나 봐.ㅎ

그의 책이라면 무조건 어려워 읽을 엄두를 못 내겠던데
너의 친절한 해설을 들으니 읽고 싶기도 하네.
잘 읽었어.^^

cyrus 2015-04-30 21:53   좋아요 0 | URL
조이스가 기억력도 엄청 좋고, 모범생이었어요. 개인적인 생각이 많은 저의 해설을 믿고 읽다간 당혹감을 느낄 수 있어요.. 정말 읽기가 쉽지 않아요. 중간에 읽다가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ㅎㅎㅎ

에이바 2015-05-02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2병을 건강하게(?) 발산할 수도 있겠죠. 사실 전 이 용어가 싫어요. 그 무렵의 폭발적 감수성과 고민과 다른 성격의 비행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니까요. 대부분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고... 이후에 당사자가 이불 안에서 하이킥을 좀 할지라도 그 감성은 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서요 ㅎㅎ

cyrus 2015-05-02 21:31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사실 중2병은 사춘기를 부정적으로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에요. 부모님은 아이들의 사춘기를 그냥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춘기 아이들 심리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해줘야 합니다. ^^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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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귀소(歸巢). 동물이 자기 서식처로 되돌아오는 성질을 뜻한다. 우리는 귀소본능의 상징으로 연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멀리는 수천떨어진 바다에서 모천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면, 미물의 귀소성에 경탄할 정도다. 그런데 연어의 행동요소를 동물학적 접근으로 설명한다면, 회귀본능이라고 해야 맞다. 귀소와 마찬가지로 회귀도 서식처로 향하는 본능을 의미한다. 두 용어는 비슷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선 차이가 난다. 둥지와 같은 특별한 서식처는 없지만 태어난 곳에서 일정 시기를 보내고 이곳을 떠나 청장년 시기를 타지에서 보낸 후 다시 영유아 시기의 기억이 있는 장소로 돌아오는 행동이 회귀본능이다. 그래서 연어는 민물에서 산란 후 바다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생의 마지막 순간 산란을 위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회귀본능을 지니고 있다. 연어에게 있어 자신이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게 하는 모천은 인생 한살이 고리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회귀본능은 인생의 의미와 깊고 넓게 연관된다. 수구초심(首邱初心), 여우가 죽을 땐 자기가 살던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이 사자성어도 회귀본능의 또 다른 심미적 의미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회귀본능은 단순히 특정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의 의미를 되짚는 본능의 구현이다. 망향에 대한 인간의 마음, 아니 본능적으로 각인된 회귀적 행동이야말로 일상의 압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좋은 의미의 회귀본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2001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비디아다르 수라즈프라사드 나이폴은 귀소본능을 스스로 거부하는 중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두산백과 (수도는 포트오브스페인)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서인도제도에 있는 트리니다드 섬. 트리니다드 섬 기준으로 북동쪽에 토바고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두 섬의 이름을 합친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정식 국가 명칭이다. 트리니다드 섬은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62년에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나이폴은 1932년에 인도계 브라만 계급 출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16살에 해외 유학 장학금을 받게 되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나이폴은 영국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트리니다드 섬을 떠난 지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나이폴이 트리니다드에서 보낸 시간은 영국과 그 밖의 지역에 머물렀던 시간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다. 나이폴은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트리니다드 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현재 여든을 넘은 나이에 이른 네이폴은 영국 서부의 작은 마을에 아내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고령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나이폴도 귄터 그라스가 향했던 천국으로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과연 나이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트리니다드 땅을 밟을 것인가. 그는 언론에 나서는 것을 피하는 성격이라서 트리니다드를 자주 방문하지 않는 이유를 공식 석상에서 분명하게 밝힌 적이 없다.

 

 

 

 Scene #2  실패자들이 사는 섬  

 

나이폴을 서인도제도 출신의 작가로 분류하지만, 혈통을 따져보면 트리니다드 섬에 태어나고 자란 인도인이다. 2001년에 나이폴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발표를 들은 후,내 나라 영국과 내 선조의 조국 인도에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폴은 인도와 트리니다드 섬을 지배했던 종주국인 영국도 자신의 조국이라고 밝혔다. 사실 노벨상을 받기 전에도 나이폴은 영국에서 승승장구하던 작가였다. 부커상을 비롯한 영국 내 중요한 문학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1990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아마도 나이폴은 성공의 길이 보장되는 땅을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에 살면서 카리브 해 일대를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1962년에 대서양 중간 항로라는 여행기를 발표했다. 트리니다드 섬에 대한 나이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이 작은 섬나라를 냉소적으로 묘사한 내용이 눈에 띈다.

 

그곳에서는 성공담이라고는 들어볼 수 없고 오직 실패담만 들을 수 있었다. 재기발랄한 사람들이라든가 장학금 취급자들은 어려서 죽거나, 미쳐버리거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중략) 트리니다드에서는 개인적 재능이 한갓 쓸모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능보다도 음모를 앞세웠다. 트리니다드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음모를 꾸미고 실천하는 데 아주 숙달되어 있었다. (미겔 스트리트작품해설 중에서, 294~295)

 

나이폴의 눈에 비친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의 모습은 장자에 나오는 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이었다. 트리니다드 섬에는 인생에 실패하는 자들이 가득했고, 더 이상 성공할 기회가 보장되어 있지 못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탓에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한층 떨어졌다. 섬 주민들은 노력이 가져다주는 성공이라는 행복한 열매의 맛을 느끼지 못했고, 치졸한 방법으로 단기간에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싶었다. 이러한 패습이 굳어진 채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은 코딱지만 한 땅 위에 다투었다.

 

와우각상지쟁의 이야기는 대서양 중간 항로가 발표되었던 해 이전에 나온 그의 세번째 소설 미겔 스트리트에 확인할 수 있다. 트리니다드 섬에서 생활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자서전적 요소가 있는 소설이다. 1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 1(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을 제외하고는 어린 시절 나이폴이라고 볼 수 있는 화자 의 시점으로 영국령 트리니다드 섬의 현실을 바라본다. 얼핏 그가 소설에서 묘사한 트리니다드 섬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하면서도 소박해 보이지만,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사회적 한계에 부닥쳐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되며 현실에 썩 만족스러워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그들이 마주치게 되는 미래 또한 썩 유쾌하지 않다.

 

그가 선택한 직업의 주인공 엘리아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시행하는 고교 과정 자격시험 3급에 합격할 정도로 똑똑한 머리를 자랑하지만, 그다음 시험에서 빈번히 낙방하여 고배를 마신다. 취업이 어려워진 엘리아스는 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의사가 아닌 위생 검시관이 된다. 섬을 떠나 영국에서 시험을 치르는 엘리아스의 모습은 영국 대학 입학에 도전했던 나이폴의 학창 시절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나이폴과 정반대로 엘리아스는 영국 사회로 향하는 신분적 상승으로의 진입에 실패한다. 엘리아스에게 영국은 식민지 주민의 성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었고, 나이폴 또한 마찬가지였다. ‘실패자들의 섬을 떠나기에 앞서 영국이라는 장벽을 넘어서야 그토록 갈망하던 성공의 길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B. 워즈워스는 자신이 직접 쓴 시를 싸구려 가격으로 파는 불쌍한 시인의 이야기다. 퍼스트 네임의 'B'는 '블랙'의 약자다. 이름만 들어도 거창하다. 영국에서 이름을 날렸던 계관 시인의 이름과 비슷해서 그런지 블랙 워즈워스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현실은 너무 어둡다. 워즈워스는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지 않았고, 섬 주민들은 그의 시 쓰기에 관심이 없다. 유일하게 화자 만 괴짜 시인의 행보를 지켜본다. 하지만 워즈워스의 삶은 절망적이다. 애초에 그는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해 실패한 삶을 사는 섬 주민일 뿐이다. 워즈워스에게 시는 문학적 낭만의 소산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하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망상적 문장에 불과하다.

 

 

 

 Scene #3  나이폴이 트리니다드 섬을 떠난 경위

    

제 능력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많을수록 트리니다드 섬에서 도덕은 개나 줘야 할 무의미한 단어가 된다. 열심히 물건을 만들었던 성실한 목수 포포는 절도범이 되고(이름 없는 물건), 이밖에도 각각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기, 뇌물, 직무 유기 등 크고 작은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가 사라지고, 사회적 결속력도 떨어진다. 미겔 스트리트의 트리니다드 섬은 평화로운 작은 섬나라가 아니다. 미겔 스트리트 주변에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펼쳐지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이 생긴다. 섬 내부에는 도덕과 정신을 병들게 하는 기운이 가득하다. 희망을 향한 탈출구마저 보이지 않는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섬을 나이폴은 탈출하고 싶었고, 기어이 성공하게 된다. 나이폴과 마찬가지로 화자도 주변 사람들처럼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약학 공부를 하러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

 

미겔 스트리트는 나이폴을 세계적인 작가로 알리게 해준 소설이다. 하지만 나이폴 본인에게 이 소설은 트리니다드에 대한 안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개인적 악몽을 기록한 암울한 자서전이다. 나이폴은 대서양 중간 항로에서 영국에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악몽이 바로 트리니다드 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비록 나이폴의 몸은 고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머리만은 회소본능을 거스를 수 없었다. 나이폴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남아있는 트리니다드 섬으로 회귀하여 미겔 스트리트를 통해 전통과 도덕 그리고 사회 전체가 무너져가는 섬에 사는 군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런데 암울한 미겔 스트리트를 읽다 보면, 작가의 행보가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나이폴의 문학을 세계의 어떤 문명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 고독한 이방인의 글쓰기로 평가하는데 노벨상 수상 발표 소식 이후에 언급한 소감과 영국에 정착한 생활 등은 그의 문학적 입지와 상당히 동떨어져 보인다. 나이폴의 또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지만, 나이폴이 3세계 문학의 기수’로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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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독서가 2015-04-14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V.S 나이폴은 영어권에서 정말 유명한 작가죠. 작가에 대해 cyrus 님이 쓰신 `스스로 귀소본능을 거부하는` 이란 표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좋은 글 잘 보고 가요.

cyrus 2015-04-16 15:20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 이제야 댓글을 확인했습니다. 이제부터 나이폴의 소설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직 나이폴의 문학에 대해서 고작 10%만 알았을 뿐인데요. 긴 내용의 잡문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ocomi 2015-04-15 0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나이폴 작품읽을 때마다 비슷한 느낌을 받아요. 제3세계 작가라고 하면 작품에 제3세계의 문제의식이 담겨있어야 하지만 나이폴은 어쩐지 정말 문제점만을 부각시키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나이폴이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원래 인도에서 도제계약 노동자로 이민온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트리니다드를 얼만큼 자신의 고향으로 느끼며 살았을지 모르겠고 또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삼중적으로 문화적 지리적 이주를 한 셈이다 보니 토착민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닌 애매한 중간자적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거리감이 오히려 나이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The Mimic Men에서 보면 영국도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공간으로 등장하지 않거든요. 나이폴의 망향의식은 트리니다드를 향한/관한 게 아니라 어떤 부재하는 대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cyrus 2015-04-16 15:2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코코미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안 그래도 나이폴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을 찾지 못한 상황인데 코코미님의 말씀이 제가 느꼈던 나이폴에 관한 의문을 푸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절판된 <흉내>를 중고서점에서 운 좋게 구입했습니다. 이제 고작 나이폴의 소설 한 편 읽었을 뿐이니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
 
더블린 사람들 마카롱 에디션
제임스 조이스 지음, 한일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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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조이스의 패기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를 만나는 것이 드물다. 조이스의 소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많다. 조이스는 매우 실험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모더니스트다. 의식의 흐름, 환상과 무의식의 경계, 에피파니(Epiphany) 등 낯선 서술기법과 말장난을 버무려낸 조이스의 끝없는 실험에 독자들은 당황했고, 비평가들은 분노했다. 《율리시스》는 외설 시비에 휘말려 영국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출간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었다. 《율리시스》의 등장을 예고하는 ‘더블린 삼부작’ 첫 번째 작품 《더블린 사람들》 역시 정식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의 사연이 있었다.

 

조이스는 22세 때 《더블린 사람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더블린 사람들》은 총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작품집인데 조이스가 처음으로 출판계약을 맺었을 때만 해도 《더블린 사람들》은 열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더블린 사람들》 형태로 갖춰지기까지 조이스는 3년이라는 세월을 써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네 편의 단편소설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출판업자는 청년 작가의 집필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조이스가 추가로 쓴 소설이 문제였다. 출판업자는 소설 속에 문제가 될법한 구절을 지적했고,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책을 출판하지 않을 거라고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작가 지망생은 첫 소설의 출판 결에 난항을 겪으면 출판업자의 입김에 쉽게 기가 죽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이스는 뻔뻔할 정도로 출판업자와 맞선다. 출판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꽤 오랫동안 서신 왕래가 이루어졌는데 한창 열심히 활동해야 할 젊은 조이스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이로 인해 책의 출판은 8년이나 미뤄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조이스는 처녀작 출간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았다.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이미 그는 ‘더블린 삼부작’ 두 번째 작품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집필하고 있었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성공으로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원고지 뭉치들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워낙 많아서 《더블린 사람들》은 ‘더블린 삼부작’ 첫 번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어정쩡한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Scene #2  우리는 왜 《더블린 사람들》을 읽어야 하는가

 

《더블린 사람들》은 미국 대학 위원회가 선정한 SAT 추천도서에 서울대가 권장한 100선 도서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도 요즘 우리가 입으로만 흔히 말하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억양에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은 아일랜드처럼 영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블린 사람들》을 추천도서 목록에 넣어도 무방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왜 조이스의 소설을 추천도서 목록에 포함했고, 왜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일까. 아일랜드를 빛낸 세계적 작가로는 조이스뿐만 아니라 예이츠, 베케트,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등이 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독자에게 아일랜드 문학은 생소하다. 이렇다 보니 아일랜드 문학을 영국문학처럼 유사하게 보거나 아예 영국문학에 포함시켜서 보는 경향이 있다. 조이스나 쇼 등은 아일랜드 밖으로 나와서 영국이나 세계 등지에 작품 활동을 했고, 영어로 글을 썼으나 정서적인 면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일랜드 문학의 근간을 살펴보면 아이리시 특유의 문화와 역사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블린 사람들》을 처음 읽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봄 직하다. 세계문학, 특히 영문학을 우수하게 여기는 우리나라의 독서 풍토는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방해될 수 있다. 만약에 당신이 고전 목록 안에 조이스의 소설이 ‘영문학’에 포함된 것을 봤다면, 분명히 조이스의 소설은 영어로 쓴 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조이스의 소설 속에 영어 이전에 아이리시가 썼던 켈트계 언어인 게일어도 등장한다. 아일랜드가 지리적으로 영국과 무척 가까워서 공용어를 영어라고 착각하기 쉽다. 영국 식민지 시절의 문화적 잔재를 잊기 위해 아일랜드 정부 차원에서 게일어 보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처럼 기본적 배경 지식을 충분히 알려주지 않고 쓸데없이 고전 목록을 양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래 봤자 고전은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만 읽게 된다.

 

아무튼, 조이스의 소설을 읽으려면 아일랜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 이야기 속에 아일랜드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장면과 인물 간 대화가 많다.《율리시스》를 제외하면 《더블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수많은 번역본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중에 옮긴이의 주석이 없는 번역본은 안 읽는 것이 낫다. 조이스의 소설을 우리말로 옮기려면 옮긴이는 독자를 위해서 아일랜드 문화와 역사를 언급하는 문장을 보충 설명할 수 있는 주석을 반드시 달아야 한다. 《더블린 사람들》의 열두 번째 단편소설 제목은 「위원회의 담쟁이 날」이다. 아일랜드 풍속에 생소한 독자는 ‘담쟁이 날’의 의미를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아일랜드의 애국지사 찰스 파넬의 사망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일이다. 아이리시는 이날에 파넬을 기리기 위해서 담쟁이 잎을 옷깃에 다는 전통을 지킨다.

 

 


 Scene #3  마비의 영혼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소설

 

글이 조금 옆으로 새고 말았는데 이전에 언급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렇다. 비록 우리나라에서 조이스에 대한 독자의 대접은 형편없지만, 읽어볼 만한 가치가 많은 고전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말할 수 있다. 일단 《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에서 보여준 조이스의 난해한 말장난이 없으니 부담 갖지 마시라. 조이스는 더블린의 인간 군상을 어떠한 과장이나 꾸밈없이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 그려진 더블린 사람들의 삶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면 이 소설을 제대로 읽고 있다고 보면 된다. 더블린은 무언가로 사방에 꽉 막아버린 한정된 공간이다. 이곳에 자본주의 바람에 잘 적응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프티 부르주아가 있고, 반면에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궁핍하게 생활하는 하층민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은 그렇게 썩 행복하지 않다. 똑같이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일상과 부조리한 주변 환경에 불만을 표출해보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애러비」의 어린 화자는 이웃 친구의 누나를 위한 선물을 사려고 혼자서 바자가 열리는 곳으로 향한다. 소년의 눈에는 더블린은 누나와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일종의 모험 장소다. 하지만 소년의 환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미 바자는 끝나버려 인적이 드문 더블린 거리를 바라본다. 소년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주시하면서 자신을 ‘허영에 쫓겨 농락당하는 한 마리 짐승’이라고 생각한다. 더블린은 모험 장소가 아니라 온정이 금방 식어 사라져버리는 무정한 도시였다. 「이블린」은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에 나오는 도시 생활에 안주하여 타성에 젖은 사람들을 통틀어 ‘마비의 영혼’이라고 말했다. 이블린은 더블린을 떠나지 못하는 ‘마비의 영혼’이다. 여자의 몸으로 가족을 홀로 부양하는 이블린은 반복되는 일상을 혐오한다. 자신의 약혼자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날 수만 있다면 이블린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더블린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 더블린에서의 삶과 더블린 밖에서의 삶 한가운데서 내적 갈등을 하는 이블린은 결정적인 순간에 에피파니를 경험한다. 도시의 타성은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았고, 이블린은 약혼자와 함께해야 할 새로운 삶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배를 타서 약혼자와 도망쳐보지만, 이블린은 손으로 쇠 난간을 붙잡은 채 전혀 미동도 않는다. 약혼자는 이블린을 애절하게 불러보지만 배는 점점 항구에서 멀어진다. 「작은 구름 한 점」에 나오는 주인공 챈들러도 이블린처럼 자유를 갈망하나 끝내 더블린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마비의 영혼이다. 조이스는 챈들러를 영국 생활이 익숙한 친구 갤러허의 삶과 대비되도록 설정하여 암울한 더블린의 영혼을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해 아내에게 꾸지람 듣게 된 챈들러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한심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흘리는 자책의 눈물은 절망적 에피파니를 상징한다. 시인을 꿈꾸었던 챈들러는 가정이라는 좁은 무덤 속에 누워야 하는 더블린의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더블린 사람들》 출판 기회가 번번이 막히자 조이스는 출판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글은 ‘말끔히 닦아놓은 거울’이라고 표현했다. 조이스는 소설가의 사명을 세상을 진실 되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자신의 소설이 아이리시가 제대로 바라보고 공감할 수 있는 ‘말끔히 닦아놓은 거울’이 되기를 갈망했다. 젊은 조이스가 3년 내내 《더블린 사람들》 집필에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가 있었다. 조이스가 이 소설을 쓰고 있을 당시에 예이츠를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문단은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작가와 지식인들은 조국의 자유를 되찾으려면 아일랜드 언어와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조이스의 고양 더블린은 문예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아일랜드 전역을 휩쓸고 다닌 문화적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지만 조이스는 민족주의적 감정이 다분히 섞인 문화적 태풍 속으로 휘말리지 않았다. 아일랜드 사회를 똑바로 비춰주는 거울 같은 소설에 문예부흥 태풍으로 인한 습기가 조금이라도 묻지 않으려고 열심히 닦았다. 거울 같은 소설, 《더블린 사람들》은 오늘날 아이리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젊은 소설가의 거울 속에는 도시의 타성에 마비된 현대인의 영혼이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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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4-11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언급처럼 <더블린사람들>이 조이스 소설 중 가장 접근하기 쉬운 소설이죠. 어떻게보면 그답지 않은 심심한 전개일 수 있는데, 그 속의 아일랜드 상황을 간파하지 못하면, 평범한 고전처럼 읽고 말 수도 있죠. 저도 놓친 게 있지 않나 늘 다시 읽어봐야지 하는 작품^^
이언 매큐언이 <속죄> 앞부분 쓸 때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앞부분 아이 시점을 엄청 신경썼다고 하듯이, 조이스 작품은 두루두루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죠^^

cyrus 2015-04-11 22:55   좋아요 0 | URL
이언 매큐언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아직 안 읽어봤어요. <더블린 사람들>을 통해서 이제야 조이스가 대단한 작가임을 알게 됐어요. ^^

AgalmA 2015-04-11 22:58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작가란 무엇인가 읽고 있잖습니까. 거기서 이언 매큐언이 직접 그렇게 말하더군요.
cyrus님도 이제 작가란 무엇인가 읽게 되는 마수에 빠지시는 겁니다! ㅎㅎ
이거 읽으면서 읽을 책이 또 산더미로ㅠㅠ

cyrus 2015-04-11 23:01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아셨죠? 사실 아갈마님이 이언 매큐언을 언급하셨길래 `매큐언의 소설도 읽어봐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ㅎㅎㅎ

만병통치약 2015-04-1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고전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몰라서 안 읽는 거군요. 꼭 도전해 보겠습니다.

cyrus 2015-04-11 22:58   좋아요 0 | URL
만병통치약님이 제가 서평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제대로 정리하셨군요. 맞습니다. 저도 조이스를 이름만 들었지 그의 소설에 대해선 잘 몰랐어요. 그냥 <율리시스>의 분량만 보고, 조이스의 소설을 어렵다고만 생각했어요. ^^;;

에이바 2015-04-1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펭귄 판도 읽을만 한가요? 전 문동 진선주 선생님 버전으로 읽었는데 참 좋았어요.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좀 오래 걸리네요. 열린책들 판으로 읽을까 생각중이에요. <율리시스>는 감히 도전도 못하겠지만 동서에서 나온거 점찍어놨어요. 차근차근 시도해가다보면 언젠간 읽을 수 있겠죠... 아일랜드 역사 관련한 책은 <슬픈 아일랜드>가 좋더라고요.

cyrus 2015-04-13 09:38   좋아요 0 | URL
저는 읽어나가는데 괜찮았습니다. 김종건 교수 번역본도 읽어보려고 해요. 아일랜드 역사에 관한 책을 알아보는 중이었는데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stella.K 2015-04-12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작에 알았다만 너는 책읽기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
그만 하산을 하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ㅋㅋㅋ
어쨌든 제임스 조이스를 읽을 정도라면 뭐 상당한 경지지.
난 이걸 10대 말에 도전했다 깨졌는데 말야.
지금쯤 읽으면 좀 읽혀지려나?
책 어렵게 쓰면 독자가 안 읽을텐데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빵의 문제가 해결이 됐나 봐. 그지?ㅋ

cyrus 2015-04-13 09:45   좋아요 0 | URL
<더블린 사람들>은 여러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서 어렵지 않을거예요. 제목 그대로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조이스가 작가로 성공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정부 지원금과 후원금을 여러 번 받았어요. 누님 말씀처럼 조이스는 본인이 쓰고 싶은대로 글을 쓸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좋았어요. ^^

transient-guest 2015-04-16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스가 위대한건 서양의 거의 모든 신화/철학/설화와 문화적인 것을 짧은 이야기에 함축했다는 점을 강조하던 교수님이 생각나네요.

cyrus 2015-04-16 15:29   좋아요 0 | URL
알고 보니 조이스가 박식한 사람이더군요. 언어 구조에 대해서도 유별나게 관심을 많이 가졌고요. 기억력도 좋다고 합니다. 기억력 덕분에 자신이 겪은 체험을 소설 속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 조이스의 소설은 어렵지만, 계속 읽을수록 그의 생각이 알고 싶어집니다. ^^
 
기구를 타고 5주간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2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먼족 마을 상공을 날던 비행기 조종사가 빈 콜라병을 던진다. 난생처음 보는 병을 보고 부시먼들은 고민한다. 신의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추장은 땅 끝에 가서 신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길을 떠난다. 부시먼은 영화(1980년에 개봉된 영화의 원제는 ‘The Gods Must Be Crazy’, 국내에 처음 개봉되었을 당시 제목은 ‘부시맨’이었다.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부기먼’이라 써야 한다) 속에서 콜라병을 들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미개인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콜라병을 든 부시먼은 추억의 영화에 나오는 장면일 뿐이다. 하늘에 떨어진 콜라병에 놀라는 부시먼은 없으니까. 무분별한 자연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에 쫓겨나다시피 사는 부시먼들은 칼라하리 사막에 찾아오는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맞아 전통춤을 추고, 사냥하는 장면을 재현하면서 살아간다.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 이 말은 문명을 인간의 오염원으로 간주하면서 그에 물들지 않은 순수 자연의 인간을 찬탄하는 문구 정도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이 말 속엔 이웃 부족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폭력적인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원시사회는 평화롭지 않다. 미국의 인류학자 니콜리언 섀그넌은 순수하고 서정적인 ‘고결한 야만인’ 통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섀그넌은 최후의 원시 부족으로 알려진 아마존에 사는 야노마뫼족을 35년간 현지 조사를 했는데, 그가 목격한 야노마뫼 족은 이웃 부족과의 전쟁과 약탈이 만연한 삶을 살고 있었다. 원시사회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섀그넌의 책(《고결한 야만인》, 생각의힘, 2014)은 출간 당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명의 얼룩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원시 부족을 공개한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인상 깊게 본 사람이라면 섀그넌의 책에 반감을 보일 것이다.

 

지역적 환경에 따라 평화롭게 사는 부족이 있을 것이며 반대로 척박한 환경 속에 생존하기 위해서 폭력과 약탈이 불가피한 부족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야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점이 불편하다. 이 세 글자 속엔 세계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한 제국주의적 시선이 남아 있다. 고귀하고 야만적이라는 기준은 지극히 서구적인 개념이다. 쥘 베른의 처녀작이자 ‘경이의 여행’ 시리즈의 첫 작품인 《기구를 타고 5주간》은 19세기 문명인의 눈으로 바라본 아프리카가 펼쳐진다. 베른은 아프리카 원시사회의 양면적 세계를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지리학자 새뮤얼 퍼거슨 박사와 그의 친구 딕 케네디 그리고 하인인 조 윌슨은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는 아프리카 중앙부를 기구로 횡단하는 무모한 탐험에 나선다. 수많은 유럽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디뎠지만,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가까이 가보지 못했다. 야생에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부족들의 공격이나 풍토병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다. 기구를 처음 보는 부족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아프리카 특유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기구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아프리카 탐험 중에서 가장 큰 위기는 식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른의 소설이 늘 그랬듯이, 과학의 혜택(기구, 총)으로 무장한 인간은 자연(아프리카)의 무시무시한 위력 앞에 굴하지 않는다.

 

‘고결한 야만인’은 원시사회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면서도, 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여 문명인으로 교화시키려는 서양식 진보를 그럴싸하게 미화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조는 진보의 무한한 발전을 믿고, 문명과 야만을 구분한다. 아름다운 자연이 야만적인 아프리카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또 부족들의 미개함을 무시하기도 한다. 조는 빈 병을 땅으로 던지면 부족들이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에 놀라는 영화 속 부시먼의 모습이 연상된다.

 

어떤 마을을 120미터 높이에서 지나가고 있을 때 조가 말했다. “이 빈 병을 놈들에게 던져도 될까요? 병이 깨지지 않으면 놈들은 이 병을 숭배할 겁니다. 깨져도 이 유리조각을 부적으로 삼겠지요.”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병을 던졌다. 병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오두막으로 달아났다. (198쪽)

 

퍼거슨 박사 일은 기구를 타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내려다본다. 세계를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은 원시 부족을 제압한다.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기구를 처음 본 원주민들은 도망가기에 바쁘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주술사가 기구의 닻에 걸려 공중에 매달리는 장면은 문명의 과학 앞에서 힘 한 번 제대로 못 쓰는 ‘고결한 야만인’을 보여준다. 그들의 순수함은 고결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문명의 혜택이 필요한 어수룩한 존재로 전락한다. 하지만 베른은 조처럼 진보의 힘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다. 퍼거슨 박사만이 ‘고결한 야만인’을 ‘고결한 문명인’로 만들려는 진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원시사회 그 자체를 보려고 한다. 퍼거슨 박사 일행은 식인 풍습이 있는 부족들의 학살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케네디와 조는 역겹다고 말한다. 이들은 잔인한 파괴를 일삼는 부족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불쾌하고 야만스럽게 느낀 것이다. 반면 퍼거슨은 잔인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야만적인 문화로 규정하는 인식을 지적한다. 케네디가 부족들의 싸움을 멈추기 위해 총을 꺼내들자 이를 퍼거슨이 막는다. 아무리 잔인한 풍습이라도 문명인이 개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구를 타고 5주간》은 선천적으로 착한 본성을 의미하는 ‘고결한 야만인’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련된 수사가 만들어 낸 문화적 환상에 도취한 제국주의는 ‘유럽의 의무’라는 자신들만의 사명감을 내걸고 식민지 정복을 원한다. 베른이 묘사한 아프리카 탐험은 낭만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담보로 내건 탐험가들의 ‘아프리카 러쉬’는 멈추지 않았다. 아프리카 탐험을 꿈꾸던 독자들은 아프리카로 떠나는 ‘경이의 여행’에 열광했다. 제국주의의 야욕을 경계하는 퍼거슨 박사의 걱정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기구를 타고 5주간》이 발표된 지 20여 년 후에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로 아프리카 종단 철도를 구상한 영국인 광산업자 세실 로즈는 케이프주 식민지 총독이 되어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을 착취했다.

 

 

 

※ 퍼거슨 박사의 모험 과제는 버턴과 스피크가 탐험한 아프리카 지역을 조사하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버턴을 빅토리아 호를 발견한 탐험가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는 번역가로서의 명성이 더 알려져 있다. 1885년에《아바리안나이트》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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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3-0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소설 맞나요? 논픽션처럼 보이네요. 고결한 야만인과 함께 꼭 읽겠습니다. ^^

cyrus 2015-03-02 10:52   좋아요 0 | URL
베른은 평생 영국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는데 오직 상상력으로만 여행 장소를 묘사했어요. 현실과 공상을 적절하게 조합한 이야기가 베른 소설의 특징이에요. 만병통치약님은 요즘 인류학 분야 책을 읽고 계시니 <고결한 야만인>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