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82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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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는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코끝을 스쳐 지나갈 뿐, 콧속에 가둬둘 수가 없다. 기억 저편에 살짝 묻어뒀다가, 어느 순간 다시 불러내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천부적인 후각을 가졌더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황홀한 향기들 전부 맡아볼 수 있을까. 후각을 새롭게 일깨워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는 그동안 살면서 잊고 있었던 우리의 코를 확 뚫어준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사랑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지상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소녀들을 스물다섯 명이나 죽인다. 바람에 실려 온 소녀들의 향기에 취한 그르누이가 망설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는 광기로 치닫는 인간의 섬뜩한 탐미 본능을 보여준다.

 

그르누이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 냄새조차 맡아본 적 없는 고독한 존재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서식하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향기로 만들어내는 일로 대신한다.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는 고독한 주인공은 말한다. 존재의 영혼은 향기라고. 《향수》가 독자에게 호기심과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냄새를 표현한 활자 이미지를 실제의 영상 이미지로 바꾼 톰 튀크베어 감독의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소설을 꼭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소설은 수억 개의 후각세포가 엉켜 있는 듯한 생생한 후각적 묘사로 뒤덮여 있다. 그것은 후각의 제국으로 가는 초대장이며, 어두컴컴한 18세기 파리의 뒷골목으로 스며들어 가는 입구이다.

 

인간은 오늘날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 ‘보는 것’은 곧 안다는 것, 증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오페라 공연은 대사로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연극 공연은 화려한 무대 위에 연기하는 배우의 몸짓을 본다. 물론 음악을 듣고, 대사를 듣지만, 그것은 시각의 보충 감각에 불과하다. 일상생활에서도 시각 위주의 감각 체계는 강력하게 통용되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각적 조화와 균형에 따라 결정된다. 뛰어난 후각을 가진 그르누이는 시각 위주의 문명을 거스르는 안티 히어로다.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소통하고 역시 창조하는 중요한 감각 중 하나가 후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원작에서 냄새나는 문장을 따라가지 못했고, 관객들은 그르누이의 살인 행위와 향수 한 방울로 750명의 군중을 조종하는 마지막 장면만 기억할 뿐이다. 영화의 충격적인 영상미가 시각 문명을 거스르는 후각 천재 그르누이를 엽기적인 살인마로 만들어버렸다. 원작을 먼저 읽고 난 뒤에 영화를 본다면 당신은 쥐스킨트가 《향수》의 영화화에 무려 15년 동안 반대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후각은 오감 중에서도 가장 평가절하 받는 감각이다. 우리는 냄새 맡는 것을 하찮게 여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진화의 역사에서 냄새야말로 생존과 생식에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우리가 동물의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물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를 피하고 잘 요리된 음식과 매력적인 이성에게서 나는 냄새에 끌리는 것은 축적된 경험적 지식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진화된 본능에 가깝다.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인류는 향수를 만들었다. 오늘날 초호화 건물로 알려진 베르사유 궁전에 왕족과 귀족 들이 살았을 때 불결한 악취가 심했다고 한다. 궁전에 화장실이 없어서 귀족들이 궁전의 넓은 정원이나 실내 커튼 뒤에서 볼일을 봤다. 그래서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다양한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결국, 향수는 인류의 마음을 정화해주는 귀중품이 아니라 악취 나는 인류의 본성을 가리려고 몸에 입는 얄팍한 가면이다. 향수의 역사 속에 고귀한 냄새만 쫓아 청결한 척하는 추악한 인간의 이중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향수》는 아름다움 속에 가려진 추악한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역설이 들어 있다. 살인으로 빚어낸 향수는 귀족, 성직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매료시켜 그르누이의 죄를 잊어버리게 한다.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고약한 치부를 망각하는 인간의 모순을 의미한다. 마치 겉은 화려하나 건물 내부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던 베르사유 궁전처럼 말이다.

 

최상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그르누이는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 사회가 만들어 낸 불행한 사생아다. 냄새가 없다는 이유로 더러운 냄새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그르누이를 인간 대접하지 않은 그들도 선하다고 볼 수 없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꾸짖는 격이다. 결국, 《향수》에서 주인공의 삶을 판단하는 독자의 감상적 역할은 무의미해진다. 부처는 향을 가까이하면 성품이 향기로워지고 악을 가까이하면 악취를 풍기게 된다고 가르쳤다. 독자들 가운데 마음속에 품고 있는 향기가 아름다운 자는 그르누이에게 돌을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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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6-3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수>를 읽고 신선한 충격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죠. 튀크베어의 영화도 아름답지만 cyrus님 말씀대로 원작을 못 따라와요. 연기 천재 벤 위쇼가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그루누이의 존재감이 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에선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사랑받고싶은 욕망과 존재 이유를 찾는 그루누이...

cyrus 2015-07-01 18:07   좋아요 0 | URL
원작을 읽을 때 그르누이의 향수에 취한 사람들이 집단 섹스를 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영화에서 그 장면을 봤을 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이 충격적인 장면 하나 때문에 원작을 보지 않고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 원작이 야하다는 생각했을 겁니다. ^^;;

초딩 2015-07-0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두를 읽다가 어느 영화가 생각났는데, 15년을 반대했던 그 영화가 맞는 모양이네요 :)
크게 잊고 있었던 것인만큼 더 신선항 충격일 것 같아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

cyrus 2015-07-01 18:11   좋아요 0 | URL
초반에 그르누이가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 이야기가 지루할 겁니다. 이 부분만 지나면 흥미진진할 겁니다. ^^

해피북 2015-07-01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같은 책을 읽고 생각의 뿌리가 다른지 많이 배우고 생각하게 되네요 ㅋ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단순히 살인과 냄새에만 초점을 맞춰 좀 짜증냈던 기억이 납니다(원체 이런 소설을 읽지 않아서요ㅋ) 이 글을 읽으니 오래된 기억 속의 향수를 다시 꺼내보고 싶어지네요 ㅎ

cyrus 2015-07-01 18:16   좋아요 0 | URL
제가 <향수>를 처음 읽었던 때가 10년 전이었어요. 그 때 고등학생이었는데, 친구들이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만 보고 이상한 책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향수>를 읽는 10, 20대 독자들이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

서니데이 2015-07-0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수>가 처음 우리나라에 출간 되었을 시기에 이 책에 대해서 소개를 읽고는 그후로 제대로는 읽진 않았네요. 향수와 향기라는 것이 그 때는 조금 독특하다 느껴졌던 것 같긴 해요. 그 사이 영화로도 나왔고, 많이 알려져서 아는 책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 기회되면 읽어봐야겠어요.
cyrus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cyrus 2015-07-02 21:33   좋아요 1 | URL
영화도 나와서 이 책을 안 읽어도 대략 줄거리를 알 수 있게 되었죠. 그래도 읽어보는 것을 권합니다. 원작의 묘사가 좋습니다. ^^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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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인간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인간의 행동 기저에는 욕망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욕망은 인간에게 본능적인 것으로,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원리에서 이해된다.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는 무의식은 대개 역동성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욕망에 심각한 결핍이 생기면 병리적 차원으로 이행돼 삶이 짓눌릴 뿐 아니라 거기에 압도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속 주인공은 욕구 결핍을 채우려다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낙담해 사방이 완전히 차단된 밀폐된 방에서 혼자 음악을 듣고, 멀리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 것이다. 그는 욕망의 빈 곳을 채우려는 동경에서 실패해 음악으로 달랜다. 욕망의 빈 곳이란 일종의 심리적 결핍, 애정 결핍을 의미한다. 여기서 콘트라베이스는 주인공이 욕망의 결핍을 없애고, 심리적·정신적 안정을 받으려고 정복하는 대상이다. 주인공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신의 상황을 콘트라베이스와 동일화한다.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큰 몸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악기다. 주인공은 콘트라베이스를 세상에 있는 모든 악기 중에서 제일 못생기고, 우아하지 못한 악기라고 말한다. 오케스트라 악단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고,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현실을 스스로 잘 알기에 괜히 애꿎은 콘트라베이스를 경멸한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바라는 인정과 사랑의 욕망은 간단하게 충족되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오페라의 단역배우 세라는 유명한 성악가의 식사초대를 받아 값비싼 생선요리를 먹으러 다니는 도도한 여자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그녀에게 알리기 위한 고육지책을 마련한다. 유명 인사들이 지켜보는 연주 무대에서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는 것이다. 주인공은 용기만 있다면 무모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얼핏 보면 세상 언저리에 맴돌기만 했던 주인공이 희망을 원하는 몸부림을 펼칠 거라는 기대감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과 세라와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도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주인공은 더블베이스와 음악을 사랑했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불행하게도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욕망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다고 착각한다. 충족에 집착하는 욕망의 원인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한 번 주인공의 정상적인 생활을 흐트러뜨리고 삶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과거에서 겪었던 절망이나 좌절 때문에 과도한 욕망은 제 생각 이상으로 변환되거나 변질해 혼란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 생각하면 욕망과 결핍의 상관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원인을 누가 쉽게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더욱이 욕망의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매우 잔인한 법칙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현실과 동떨어진 욕망에 더욱 이끌린다. 위험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신의 무의식에서 약동하는 욕망을 잘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욕망에 압도돼 욕망에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자신도 모르게 소외감의 원인을 남 탓 또는 콘트라베이스로 돌리는 주인공의 투사적 행동이나 태도가 바로 주인공의 내면에서 약동하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세력으로서의 욕망이다.

 

욕망이 결핍을 부르고 결핍이 다시 욕망을 부추긴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경험하고 계속 반복해서 느끼는 욕망의 결핍은 배고픔과 갈증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음보다 몸에서 먼저 느끼기 때문인데, 이런 시각에 어머니와의 관계를 지나칠 수 없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음악 애호가였지만, 주인공 본인은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술회한다.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은 가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주인공은 공무원이 아닌 예술가가 되리라 결심했고, 독주가 흔하지 않은 악기로 콘트라베이스를 선택했다. 콘트라베이스의 형상은 허리가 잘록한 여성의 신체와 흡사해서 여성스러운 악기로 인식한다. 주인공은 콘트라베이스의 형상에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상상한다. 어린 시기와 관련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은 명쾌하지 않은 점이 문제지만, 어머니의 가슴과 그 대체물이 아이를 안심시키고 쾌락을 가져다준 최초의 대상으로 본다. 적어도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어머니와의 접촉을 통해 충족을 원하는 심리적 특성이 충족으로 지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학 외에도 일반심리학조차 성장하는 아동기의 신체접촉 결핍이 정신적인 결핍으로 이어진다고 인정한다. 성장기에 어머니와의 친밀한 접촉이 부족한 경우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는 문제가 생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제공한 애착이란 대개 안전함, 따뜻한 사랑의 열기, 다른 사람이 그를 맞아줄 때 느끼는 자기애에서 나오는 확증함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안정감이다. 칼 융은 술을 많이 마시는 행동이 모성애의 그리움을 반영하는 것이라 했다. 주인공이 말하는 도중에 맥주를 마시는 모습은 그가 모성 결핍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들려주면서 독자들 앞에서 넋두리를 늘어놓는 주인공의 모습은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만 울리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요즘 자신의 신체 부위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SNS에서 감상평을 주고받는 몸매품평 놀이가 유행이라고 한다. 자존감이 낮거나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해 이 놀이에 더 잘, 더 깊숙이 빠져들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자신의 신체 일부나 다름없는 콘트라베이스 선율을 독자들 앞에서 들려주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호소한다. 주인공은 이 세상에서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준 유일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애정결핍 증세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건강한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블랙홀처럼 뻥 뚫려 있는 욕망의 빈 곳을 사랑으로 채우기 전에 먼저 아직 남아 있는 상처와 결핍의 문제를 진실하게 인정하고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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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6-23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작품으론 <콘트라베이스>와 <좀머씨 이야기>, 두 작품을 읽었어요.
님의 서재에서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댓글 남깁니다. 오래된 책이라...

<콘트라베이스>는 어느 부분에서 꽤 감동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보잘 것 없음의 승리? 뭐 그런 메시지를 받었던 기억이 있어요. 맞나요?
정리를 해 놓지 않으니 제 기억력을 믿을 수 없지만... 아, 이래서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그랬던 기억은 확실히 있어요.

cyrus 2015-06-24 20:32   좋아요 0 | URL
저는 <콘트라베이스>를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마도 페크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제가 생각한 것과 같을 겁니다. 주인공이 무대 위에서 세라의 이름을 외칠 거라고 다짐하면서 모노드라마가 끝이 납니다. 저는 그 부분이 희망을 암시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까 주인공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불쌍했습니다. ^^;;

qualia 2015-06-23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욕망과 결핍의 문제는 현대 신경과학과 뇌과학적 설명을 곁들이면 더욱 흥미로워질 듯합니다. 프로이트/융 학설도 신경정신분석학으로 (일부) 증명이 되고 있다고 하던데요. 앞으로 cyrus 님의 글쓰기에 신경과학/뇌과학적 지식이 접목되리라 예상되는군요~.

cyrus 2015-06-24 20:33   좋아요 0 | URL
제가 신경과학, 뇌과학에 박식하지 못해서 수준 높은 글을 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qualia님의 말씀 덕분에 이번 기회에 뇌과학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슬비 2015-06-24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시사인을 읽고 있는 부분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에 관한 내용을 읽고 다시 읽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cyrus님 페이퍼를 보니 더 반갑네요.^^

cyrus 2015-06-24 20:37   좋아요 0 | URL
<콘트라베이스>가 쥐스킨트의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향수>와 <좀머씨 이야기>보다 대중적 인지도가 낮고, 쥐스킨트의 소설 중에서 재미없는 이야기로 평가받습니다. 사실 모노드라마 같은 무대극은 직접 공연으로 봐야 재미있습니다. 몇 년 전에 명계남 씨가 <콘트라베이스>의 주인공 역을 맡아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공연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만약에 다시 공연할 기회가 있으면 꼭 보고 싶습니다. ^^
 

 

 

간단한 퀴즈. 두 사람 중에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누구일까?

 

 

A: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정말 대단한 소설이에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 이야기를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옮긴 조이스의 치밀한 이야기 구성에 감탄했어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더블린의 레오폴드 블룸의 동선과 평행하게 놓고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어보시면 《율리시스》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B: 이봐요, A씨! 당신은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것 같군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 읽는다고 해서 《율리시스》를 이해할 수 없어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어야 해요. 스티븐 디덜러스는 햄릿형 인간이니까요.  

 

 

 

 

 

 

 

 

 

 

 

 

 

 

 

 

 

 

 

아마도 이 글을 읽은 사람 중 대다수는 A를 선택했을 것이다. 《율리시스》를 한 번도 안 읽은 사람도 이 소설이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모델로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으니까. A씨는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도 될 수 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겠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율리시스》를 읽지 않아도 누구나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찾은 《율리시스》의 작품 해설을 그럴싸하게 있게 말하면 된다.

 

그렇다면 B는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었을까? 《율리시스》가 《오뒷세이아》를 모티프로 만든 소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B의 의견을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으로 A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B도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었다고 볼 수 있다. 디덜러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햄릿과 동등하게 인식하고 있다. 《햄릿》의 줄거리를 안다면 《율리시스》 9장 '스킬라와 카립디스' 편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스킬라와 카립디스'의 무대는 더블린 국립도서관이다. 여기서 디덜러스는 평론가인 존 이글링턴, 시인 조지 러셀(A.E), 도서관 관장 리스터와 함께 셰익스피어에 관한 토론에 참여한다. 스티븐은 《햄릿》을 포함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토대로 독특한 의견을 내세운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죽은 아들 햄넷, 독살당한 부왕은 셰익스피어, 햄릿의 어머니인 왕비는 셰익스피어의 아내 앤 해서웨이를 의미하는데 앤이 셰익스피어의 동생 리처드와 간통했을 거로 추정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앤의 관계에 대해서도 재조명한다. 스티븐은 여덟 살 연상의 앤이 20살 되지 않은 숫총각 셰익스피어를 유혹하여 강제로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셰익스피어의 정체에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소네트집》에 나오는 흑부인의 정체까지 증명한다. 그러나 존 이글링턴과 조지 러셀은 스티븐의 셰익스피어론을 동의하지 않는다.

 

'스킬라와 카립디스'가 셰익스피어를 위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되거나 언급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만 해도 스무 편 이상이나 된다. 《율리시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햄릿》이다. 현재 《율리시스》를 9장까지 읽은 상황인데 《율리시스》에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지금까지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몇 편이냐 있는지 한 번 세어보시라.

 

 

* 《베로나의 두 신사》
* 《말괄량이 길들이기》
* 《리처드 3세》
* 《실수연발》(전예원) / 《헷갈려 코미디》(아침이슬)
* 《사랑의 헛수고》
* 《리처드 2세》
* 《로미오와 줄리엣》
* 《한여름 밤의 꿈》
* 《존 왕》
* 《베니스의 상인》
* 《헨리 4세》
*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 《헨리 5세》
* 《줄리어스 씨저》
* 《뜻대로 하세요》(전예원) / 《좋을 대로 하시든지》(아침이슬)
* 《십이야》
*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 《자에는 자로》(지만지)
* 《오셀로》
* 《리어 왕》
* 《맥베스》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페리클리스》/ 《타이어의 공작 페리클리스》
* 《코리올라누스》
* 《겨울 이야기》
* 《심벨린》
* 《템페스트》/ 《폭풍우》
* 《헨리 8세》
* 《비너스와 아도니스》(서사시)
* 《루크리스의 능욕》(서사시)
* 《소네트집》

 

 

※ 괄호명은 출판사명, 작품은 발표 연대순으로 나열함.

 

 

'스킬라와 카립디스'를 집필하기 위해 조이스는 총 31편이나 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언급했다. 기억력이 비상해서 줄거리도 거의 다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스킬라와 카립디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 전집 정도는 읽어줘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세계문학사의 최고봉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그의 생애에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늘 셰익스피어를 언급할 때 항상 따라오는 것이 그의 정체에 관한 논란이다. 아시다시피 셰익스피어가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만들어 낸 가공 작가라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조이스가 《율리시스》를 집필했던 20세기 초에도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둘러싼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실제로 '스킬라와 카립디스'에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추정한 여러 비평가의 의견이 언급된다. 델리어 베이컨이라는 미국의 여류 소설가는 자신을 베이컨의 후손이라고 밝히면서 베이컨이 셰익스피어라는 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미국의 수필가인 이그너티우스 도넬리는 베이컨의 편지 속에 있는 암호 문구를 해석하여 델리어 베이컨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학계는 두 사람의 의견을 동의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베이컨 가설'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이스는 '스킬라와 카립디스'를 통해 셰익스피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더 나아가서 셰익스피어의 정체와 수수께끼 같은 생애에 대해서 과감한 주장을 선보인다. 그래서 《율리시스》 9장은 앞 이야기보다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특히 열띤 토론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스티븐의 친구이자 원수 같은 존재인 벅 멀리건이 갑자기 등장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고 9장을 읽게 된다면, 독자는 흥미진진한 토론을 제대로 관람할 수 없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셰익스피어 학회 토론이 될 수 있다. 또 셰익스피어의 모든 것을 《율리시스》 안에 담아낸 조이스의 천재성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디 가서 《율리시스》를 읽은 척하고 싶으면 이제부터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를 함께 언급하면 된다. 그나저나 《율리시스》 때문에 셰익스피어 작품도 읽어야 하다니. 거 조이스 형님,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 Re) 조이스 // 갈 땐 가더라도 셰익스피어 하나쯤은 읽어도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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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p 2015-05-24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언급하신 셰익스피어 작품 중 제대로 읽은 것은 채 여덟권 뿐이네요. 여기저기 이름은 많이 들었으나 만만치 않은 책이라는 새각이 들어 <율리시스>읽기는 먼 훗날로 미뤄놓고만 있습니다..

cyrus 2015-05-24 20:23   좋아요 0 | URL
저보다 많이 읽으셨는데요. 저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만 읽었습니다. ㅎㅎㅎ

연어덮밥 2015-05-24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이 재미있네요. 사놓고 쟁여놓고 감히 읽을 엄두를 못냈는데.. 용기를 내보게 하네요 :)

cyrus 2015-05-24 20:27   좋아요 1 | URL
인내심이 많다면 <율리시스> 읽기를 도전하셔도 좋습니다. ^^

2015-05-24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4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5-2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뒷세우스를 읽으면서 조이스의 율리시스랑 니진스키의 오디세우스를 생각했어요.... 읽어야 하나... 그냥 모르고 있을걸~~ ㅎㅎ

저는 b를 골랐어요.
세익스피어는 세보니까 13편 읽은것 같은데 제목이 낯선것도 있어 잘 모르겠어요~

cyrus 2015-05-26 22:38   좋아요 0 | URL
오뒷세우스를 율리시스와 같이 읽으면 좋은데 두 권 다 완독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햄릿을 읽을 수 있습니다. ㅎㅎㅎ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다양한 해석과 해설을 할 수 있는 많은 알레고리들을 구석구석에 숨기고 있다. 교회, 악마, 이단, 기적. 하나하나가 이 소설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중세 유럽을 해석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소설 속 여러 공간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소는 수도원의 장서각이다. 이곳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에 관해 논한 《시학》 제2권의 필사본이 숨겨져 있고, 필사본의 실체를 궁금하게 여긴 수도사들이 연속적으로 살해당한다.

 

어느 체제이든 그 체제가 꺼리는 지식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심한 경우, 힘을 가진 자가 그 지식의 유포를 금지하기도 한다. 중세의 대변자인 호르헤 수도사에게 웃음은 악마의 유혹이고 신성모독에 가까운 행동이다. 결국, 사탄의 마약인 웃음을 인간이 찬미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를 능멸하는 행위다. 그래서 호르헤 수도사는 《시학》 제2권을 금서로 규정한다. 그러나 금기가 영원한 법은 없다. 언젠가는 해제되고, 아니 세상을 지배하는 견고한 체제가 갈라지는 틈 사이에 성경 외의 지식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아델모는 이단으로 규정되는 성경 외의 지식에 일찌감치 눈 뜬 인물이다. 그는 양피지 사본을 제작하는 채식가(彩飾家)였는데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는 아델모의 죽음으로 미완성이 된 아델모의 성경 「시편」 채식사본을 확인한다. 그런데 윌리엄과 아드소는 아델모의 채식사본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왜냐하면, 사본에는 정체불명의 괴물 그림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뱀 모가지의 네 발 짐승, 사지가 없는 인간, 말 대가리 인간,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인 괴물. 성스러운 기도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물 그림을 아드소는 ‘거꾸로 뒤집어진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거꾸로 뒤집어진 세계’는 현실의 경계를 뛰어넘은 상상력과 웃음을 유발하는 풍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괴물은 하느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형상이다. 아델모의 채식사본은 호르헤 수사가 싫어할 만한 ‘공허한 그림’이다.

 

 

 

 

 

 

 

 

 

 

 

 

 

 

 

 

 

호르헤 같은 중세 사람들이 ‘거꾸로 뒤집어진 세계’를 부정적으로 봤다면, 동양은 상상의 동식물을 해학적이고 비유적으로 기록하는 문화를 오래전부터 선호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문헌이 바로 《산해경》이다. 《산해경》은 가장 오래된 동양 신화집으로 보는 편이지만, 사실은 분류하기가 어려운 문헌이다. 머리는 동물이고 몸통은 사람이니 하는 괴물들에 관한 내용이 많아서 판타지 문학의 특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지리서와 의학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세계를 방향별로 나누어 그 해당 구역별로 제목처럼 산과 바다, 나아가 신비한 효능이 있는 식물 및 광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산해경》에 우스꽝스러운 내용은 많아도 고대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하늘·땅·물 세 개의 주요 공간과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두 가지 존재 즉 초자연적 존재(신, 괴물)와 인간에 대한 인식으로 이뤄져 있다.

 

상상력은 이미지로 살아나고 이미지는 다시 상상력을 환기한다. 《산해경》은 텍스트와 함께 있는 강렬한 이미지들로 인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많은 지식인이 이 책에 등장하는 괴물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박지원과 이덕무는 《산해경》을 흉내 내는 글을 남겼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지배하는 중세와 마찬가지로 유학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 상상력의 보고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유학을 집대성한 주희는 《산해경》이 《초사》라는 역사서에 환상적인 이야기를 덧붙여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사실을 다룬 문헌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종교 및 학문 헤게모니의 사슬에 묶였던 금지된 지식은 상상력의 날개를 다는 순간 급작스레 해방된다. 성경 이외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던 중세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 시대처럼 다시 자연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어서 하나의 답으로 설명하긴 힘들다. 분명한 것은 12, 13세기 무렵부터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델모와 같은 채식사들은 금지된 지식을 유포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중세에 드리워진 기독교의 장막이 걷어지게 되자 세계를 이해하려는 호기심이 발동되었고, ‘대항해 시대’의 등장을 알리는 인식의 씨앗이 발아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도 《산해경》처럼 상상력과 자연 세계를 결합한 서적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존 맨더빌의 여행기다. 《맨더빌 여행기》(오롯, 2014)는 동방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의 등장으로 인해 콜럼버스와 같은 대항해 시대의 탐험가들이 신비의 세계로 알려진 동방을 찾으러 모험을 감행했다.

 

《맨더빌 여행기》와 《산해경》은 서양과 동양을 대표하는 상상력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백과사전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신기한 괴물이 나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소개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두 권의 책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서로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산해경》 해외서경(海外西經)편에 여자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자국은 이름 그대로 온통 여자만 사는 나라다. 여자국에는 들여다보기만 하면 임신이 된다는 신비한 우물이 있다고 한다. 또 여자가 목욕하고 나오면 저절로 임신이 되는 못도 있다. 만약에 여자국에 남자가 태어난다면 세 살이 될 때 죽여 버린다. 《맨더빌 여행기》도 여자들만 사는 나라를 소개하고 있다. 아마조니아는 여성 전사들이 살고 있으며 남자의 지배권을 부정한다. 아마조니아 사람들은 가끔 다른 나라를 침입하여 남자와 짧은 기간 동안 사귀기도 하는데 임신해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면 부친에게 보내거나 죽였다. 신분이 낮은 여자는 오른쪽 유방을 잘라 궁수가 되고, 신분이 높은 여자는 반대로 왼쪽 유방을 잘라 방패를 드는 전사가 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여성 부족 아마조네스 이야기와 거의 일치한다.

 

 

 

 

 

《산해경》에 언급되는 목이 없는 거인 형천은 중국 신화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형천이라는 이름에 ‘머리를 베어내다’라는 의미가 있다. 중국의 선조 황제(黃帝)와 맞짱 뜨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그 벌로 머리가 잘렸다. 잘려나간 머리는 상양(常羊)산에 묻혔는데 형천은 포기하지 않고 젖가슴을 눈으로, 배꼽을 입으로 삼아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춤추고 있다고 전해진다. 머리는 없고 몸통에 눈, 코, 입이 달린 형체는 《맨더빌 여행기》에도 나온다. 《산해경》과 《맨더빌 여행기》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의 유사함을 그냥 우연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르다. 맨더빌이라고 알려진 수수께끼의 유럽인은 1322년부터 1356년까지 바다 건너 세계를 여행하고 난 뒤에 이 여행기를 썼다고 알려졌다. 그가 정말로 여행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여행하는 도중에 동양에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접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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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크래커 2015-05-05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하의 박학다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재미있습니다.

cyrus 2015-05-06 19:14   좋아요 0 | URL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내용을 우연히 발견하고 글로 정리했을 뿐입니다. 늘 모자람이 많아서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해피북 2015-05-0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목의 뜻대루 대단하세요 어쩜 소개하시는 책들을 관통해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막힘없이 술술하실 수 있으신지!
읽는동안 오~~아~~하는 감탄사만이 ㅋㅡㅋ,, 특히 이덕무, 박지원 이야기에선 띠용~~ >~< 동서양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낼수 있는 글 솜씨에 빠져 재밌게 읽었습니다

옛날에 `여인국`을 소재로 했던 단막극도 있었고 제주도 쪽을 그런 나라로 인식했던 글도 본 적있는거 같은데 이런 문헌에서 시작된거군요 참 재밌어요^~^

cyrus 2015-05-06 19:17   좋아요 0 | URL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이라서 `여인국`에 대한 문헌들을 모아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5-05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국 하니 갑자기 엉덩국`이 생각나네요..ㅎㅎ

cyrus 2015-05-06 19:20   좋아요 0 | URL
곰발님도 엉덩국의 만화를 아시는군요. ㅎㅎㅎ

돌궐 2015-05-0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cyrus님 덕분에 이번에 장수철역 산해경을 샀는데요. 정재서 역 산해경보다 삽화가 많아서 좋습니다. 저도 형천 이야기 좋아해요. 형천 그림을 비교해 봤는데 두 번역서에 사용된 그림이 다르더라구요.

cyrus 2015-05-06 19:23   좋아요 0 | URL
저는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로 복간된 장수철 역 <산해경>을 읽었어요. 산해경 삽화가 여러 가지 판본이 많은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누락된 것도 있어서 원본 그대로 보는 게 쉽지 않을거예요.

AgalmA 2015-05-0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해경 그림들이 책마다 수록된 게 다른가봐요. 제 산해경도 예전 cyrus님 소개한 산해경과 좀 다르더라고요. 출판사마다 수록과 누락이 있나 싶어 그림이 전부 원형으로 다 있는 걸 갖고 싶고 그러네요

cyrus 2015-05-06 19:29   좋아요 0 | URL
산해경 삽화는 여러 가지 판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삽화를 비교해보면 묘사 방식에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아갈마님 말씀처럼 책을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 그림은 누락되었을 것으로 추측해요.

transient-guest 2015-05-06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부터 reference로 나오는 것을 봤는데, 책이 있네요. 나중에 구할 책이 또 늘어났네요.ㅎㅎ

cyrus 2015-05-06 19:31   좋아요 0 | URL
guest님이 구하고 싶은 책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 글에 소개된 <산해경>은 절판되었어요. 그래도 정재서 교수 번역본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극심한 녹내장에 시달렸는데 평생 열두 차례의 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한 왼쪽 눈을 보호하는 차원으로 안대를 착용한 채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실명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절망감 속에서도 조이스는 펜을 손에 놓지 않았고 《피네간의 경야》를 완성할 수 있었다. 오감 중의 하나가 발달하지 않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다른 감각이 일반 사람의 감각보다 훨씬 뛰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시각장애인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청각과 촉각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물체를 시각화할 수 없어도 감촉만으로 물체 모양이나 사람을 인지할 수 있다. 조이스는 청각이 뛰어났다. 그의 소설을 유심히 읽어본 독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이스는 청각으로 세상을 느끼고자 했고, 청각에 의지하여 추상적이면서도 관념적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율리시스》에는 아일랜드 민요, 오페라, 유행가, 성가(聖歌) 등 노랫말을 인용한 대사가 많다. 이러한 조이스의 서술 방법은 이야기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 텍스트를 읽는 것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어떤 노랫말은 소설에서 진행되는 특정 상황이나 주인공의 내적 심리를 암시하고 있지만, 그 외 나머지는 이야기 진행과 상관없다. 그러므로 독자는 노랫말이 삽입된 텍스트에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집착할 필요가 없다.

 

조이스는 사물, 인물의 움직임이나 모습을 의성어와 의태어로 묘사하는 표현도 즐겨 사용했다. 의성어와 의태어가 들어간 텍스트를 읽노라면 사실감과 현장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조이스는 자신의 소설은 단순히 눈으로만 읽지 말고, 소리 내서 읽어보라고 말한다. 조이스가 시키는 대로 하면 《율리시스》는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귀로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된다. 청각이 발달한 조이스다운 독특한 발상이다. 어쩌면 조이스는 《율리시스》처럼 귀로 읽는 소설 혹은 귀로 듣는 소설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을 했을 것이다. 이는 곧 오디오북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율리시스》는 분량이 많은데다가 방대한 지식이 함축되었고, 독자의 기를 빠지게 만드는 ‘의식의 기법’ 방식으로 인해 읽으면 지루하고 어렵다는 평이 많다. 그렇지만 끝까지 참고 읽다보면 재미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조이스가 당부했던 대로 아일랜드 어가 그대로 실려 있는 원문을 낭독한다면 조이스가 구사한 언어유희가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다. 원문은 아니지만, 원문에 있는 의성어를 우리말로 옮겨진 조이스의 문장을 인용해서 소개해본다. 

 

 

코크 호반으로부터 긴 올가미를 이루며 물이 넘쳐흘렀다. 모래의 푸른 황금 빛 개펄을 덮으며, 솟으면서, 흐르는 것이다. 나의 물푸레나무 지팡이도 떠내려가겠지. 나는 기다리리라. 아니야. 그들은 계속 흘러 갈 거야. 통과하며, 낮은 바위에 부딪치며,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것이다. 이 일은 재빨리 해치워야겠다는 듯이. 귀를 기울어봐요: 네 마디 파도의 언어를: 쉽슈, 허스, 르세이스, 우우즈. 바다뱀들, 뒷발을 디딘 말(馬). 바위 사이의 파도의 격렬한 숨결. 바위 컵 속에 물이 쏴 쏟아진다: 풍덩 인다. 쏟아진다. 찰싹인다: 통 속에서 출렁인 채. 그리하여, 지쳐, 그의 언어가 멈춘다. 물은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넓게 흐르며, 웅덩이 거품일게 하며, 꽃 펼치면서. (《율리시스》 제3장 프로테우스 중에서, 김종건 역, 122쪽)

 

 

코크 호로부터 긴 올가미 모양을 이루는 물줄기가 황록색 모래늪 위로 굽이치며 힘차게 흘러갔다. 나의 물푸레나무 지팡이가 떠내려갈 것이다. 나는 기다리리라. 아냐, 물은 지나갈 것이다. 낮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고 소용돌이치며. 어서 일을 끝내는 편이 좋겠다는 듯이. 저 소리를 들어 봐. 네 단어로 된 물결의 언어. 시이슈우-, 스스스스-, 크르르르-, 우우우 - 바다뱀, 뒷발로 선 말들, 바위 틈에서 나는 격렬한 물의 숨결. 바위의 잔에 물이 넘친다. 철벅, 철벅, 철벅 하고. 술통 안에서 술이 출렁이듯이. 그러고 나서 물은 피곤해져 지껄이기를 그만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잔물결을 이루며 넓게 흐르고 웅덩이처럼 펼쳐진 꽃 같은 거품을 부글거린다. (김성숙 역, 93쪽)

 

 

 

《율리시스》 3장에서 스티븐 디덜러스는 샌디마운트 해변을 혼자 거닐면서 자유로운 명상에 빠진다. ‘율리시스’는 그리스어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영어식 표기다.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모델로 한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19년 동안의 방랑 끝에 귀향하는데 조이스는 블룸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하루 동안 더블린 시내를 걷는 것으로 압축했다. 프로테우스는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변신에 능한 신이다. 여러 가지 짐승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프로테우스처럼 스티븐의 명상은 쉴 틈 없이 다양한 주제와 관념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가 이야기 종반부에 스티븐은 파도 소리를 듣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조이스는 스티븐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를 단, 네 마디의 언어로 묘사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은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속에 나오는 거친 파도 소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청각을 중시하는 성격답게 조이스는 독자에게 파도 소리에 귀 기울어보라고 말한다. 조이스가 묘사한 파도 소리는 큰 바위를 부술 듯한 거친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격렬한 숨결’이 느껴지지만, 파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물은 바위 웅덩이 안에 고여 물거품만 잔뜩 쏟아내고 있을 뿐이다.

 

코크 호숫가의 ‘코크(cock)’를 주목해보자. ‘cock’가 얼핏 지명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남성 성기를 뜻하는 속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cock’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면, 바위 사이에 흐르는 파도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파도 소리라고 이해한 독자가 있다면 조이스의 장난을 알고 나면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당신이 문장으로 들은 파도 소리는 사실 소변이 볼 때 나오는 소리였으니까. 바위 웅덩이에 거품을 일면서 흐르는 물이 스티븐의 소변이다. 《율리시스》는 내용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외설 판정을 받아 출판이 지연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율리시스》 읽기의 또 다른 재미가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는 조이스의 성적 농담이다. 레오폴드 블룸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콩팥을 사러 밖으로 나가다가 하숙집 처녀의 엉덩이를 보고 성적 충동을 느끼는 장면(《율리시스》 4장 칼립소)처럼 노골적으로 표현한 대사도 있고, 별것 아닌 문장 속에 성적 의미를 은밀하게 숨겨 놓기도 했다. 내용이 어렵고, 엄청 지루해도 《율리시스》 속에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이래서 《율리시스》 를 안 읽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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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5-0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아는 만큼만 보이고 느낄 수 있다고 하던데... 딱 그런 책이군요.

cyrus 2015-05-03 21:04   좋아요 0 | URL
율리시스를 완독했다면 다이제스터님이 남기신 댓글 내용처럼 한줄평으로 썼을 겁니다. ^^

붉은돼지 2015-05-0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cyrus님 덕분에 공부 많이합니다.
감사합니다^^

cyrus 2015-05-03 21:04   좋아요 0 | URL
맨땅에 헤딩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

수이 2015-05-0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프로젝트는 뭐야?

cyrus 2015-05-03 21:10   좋아요 0 | URL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나오는 작품들을 다 읽어보기 위한 제 개인적인 독서 계획이에요. ^^

blanca 2015-05-0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무려 율리시스를 완독하신 겁니까. 소리 위주의 표현 기법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어요. 흥미롭네요. 안 그래도 제임스 조이스의 눈 관련 문제가 간혹 나오더라고요. 의외로 작가들 중에 시력을 잃은 경우가 많더라고요.

cyrus 2015-05-03 21:14   좋아요 0 | URL
아니요. 7장까지 읽었어요. ㅎㅎㅎ 《율리시스》를 그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한번 읽어보면 기존에 나왔던 소설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 나와요. 그래서 줄거리를 알면서도 다음 장이 궁금해져요. 조이스의 글쓰기에 감탄합니다. ^^

stella.K 2015-05-0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런 게 숨겨져 있었구나. 이걸 발견하다닛! 대단하다 시루스.
너의 글을 읽으니까 나도 제임스 조이스에 도전해 볼까?
그런 무모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ㅋ

청각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요즘 종편에서 방영하고 있는
<실종느와르 M>이란 드라마가 있는데 어제 재방송을 보니
박희순이 소리 식별하는 장면이 나오드라.
저건 남자가 소변 보는 소리라고 그러더라. 낙차가 (여자에 비해) 크다나?
그리고 이 소린 여자가 브래지어 내리는 소리래.ㅋㅋㅋ
어떻게 소리만 듣고 그런 상상이 가능한지 드라마니까 저렇게 썼겠지
하다가도 그렇게 쓸 생각을 한 작가가 새삼 대단하다 싶기도 하더군.
혹시 안 봤으면 한 번 봐. 나름 꽤 잘 만든 드라마 같드라구.^^

cyrus 2015-05-03 21:21   좋아요 0 | URL
조이스는 《율리시스》에 수수께끼를 감추어서 앞으로 대학교수들이 이 소설을 거론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율리시스》를 조이스가 만든 방대한 문장 암호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율리시스》가 어려워요. ㅎㅎㅎ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소리를 식별하려면 동물적 청각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아요. 드라마 한 번 봐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