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만시아.사기꾼 페드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3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선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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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는 극작가와 소설가를 겸했지만, 소설 《돈키호테》의 비중이 커서 극작가로서의 세르반테스는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극작가로서의 세르반테스는 고전주의의 대가들에게 영감을 얻기는 했으나, 제 작품의 속살을 스페인의 문학 전통이 스며든 강렬한 생명력으로 채웠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집필하기 전에 이미 여러 편의 희곡을 썼다. 그러나 생전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리지 못했고,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희곡 작품의 수도 많지 않다.

 

와인 좀 아는 사람이라면 스페인에서 제조된 와인 ‘베가 데 토로 누만시아(Vega de Toro Numanthia)’를 알 것이다. 이 와인 명의 유래가 세르반테스의 희곡 《누만시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누만시아는 고대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강렬하게 저항했던 스페인 내 지역명이다. 스페인은 카르타고를 이끈 한니발(Hannibal)의 본거지였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는 스페인을 기습 점령하여 카르타고군을 차례로 괴멸시켰다.

 

《누만시아》는 누만시아를 호시탐탐 노리는 스키피오와 그들과 맞서 끝까지 저항하는 누만시아 사람들의 갈등을 소재로 한 희곡이다. 역사는 간혹 뛰어난 적수를 상대한 덕분에 승리가 한층 돋보인 영웅의 예를 보여준다. 승자 스키피오는 영원히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 정복자)’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반면에 승자의 역사 서술은 모든 과거를 기록하지는 않는다. 승자의 잔인한 폭력의 역사, 타락 행위의 역사, 가혹한 지배의 역사와 무엇보다 패자의 저항 의지가 돋보인 역사가 묻힌다. 승패의 명암은 그렇게 뚜렷하지만,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비극의 이면에 숨어 있는 역사를 외면할 수 없다. 세르반테스는 승자의 과거가 아닌, 패자의 과거, 즉 피억압 민중의 과거가 역사의 동력으로 이해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은 역사를 굴러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민중을 상징하는 누만시아 사람들은 제국이 휘두르는 엄청난 억압과 파괴의 역능에 저항한다. 비록 강압적인 군사력 앞에서 저항하다 끝내 패배하지만, 이들의 투쟁은 스페인의 부활을 향한 기폭제가 된다. 실제로 《누만시아》는 한동안 잊히다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침략 이후로 재조명되었다. 《누만시아》가 일반 민중의 삶의 숨결을, 그 생생한 삶의 육성을 되살려낸 작품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것은 숱한 혼돈 속에 살아가던 스페인 민중을 위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밝혀줬다.

 

《사기꾼 페드로》는 ‘페드로 데 우르데말리스’라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사기꾼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영웅들의 위대한 활약상을 그리지 않는다. 이는 세르반테스가 16세기 스페인의 실상을 그리기 위해 당시 스페인에 유행했던 소설 양식인 피카레스크 기법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피카레스크 기법은 보잘것없는 주인공을 내세우며 진술이나 기록 형식을 빌려 사회를 풍자한다. 페드로는 미천한 신분이다. 그렇지만 신분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말과 행동은 현실의 한계를 헤쳐 나가며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기도 한다. 《사기꾼 페드로》의 매력은 나쁜 주인공을 대놓고 처벌하는 데에 있지 않다. 여기에 등장하는 위선자, 천박한 인간성을 가진 자들의 마음은 사기꾼의 속내보다 쉽게 읽힌다. 사기꾼은 마음에 돋아난 인간의 뾰족한 촉수를 알아본다.

 

사기꾼 페드로는 역경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긍정적, 희망적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공치사에는 관심이 없으며 자신은 그저 훨훨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자존심을 가지고 높은 이상을 설계하면서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거,
나는 좋다고 생각해.
나 역시, 머리는 둔하지만,
왕자나 교황, 황제나
군주가 되기를 꿈꾸지.
환상에서는 나도
이 세상의 주인이란 말이야.

 

(《사기꾼 페드로》 2막 207쪽, 페드로의 대사)

 

 

이 대사는 페드로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마치 도전을 멈추지 않는 돈키호테의 열정과 닮았다. 페드로는 꿈과 이상을 가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에 도전하고, 연속되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희망과 꿈을 꾸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가 조롱하는 세상은 민중을 괴롭히는 불의의 괴물을 상징한다. 《사기꾼 페드로》가 정확히 언제 써졌는지 연도가 불분명하다. 만약 이 작품이 《돈키호테》가 나오기 전에 집필되었다면, 세르반테스는 페드로를 통해 돈키호테의 근대적 모험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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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1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 없지만 누만시아 와인한잔 땡기는 밤이네요..ㄷㄷㄷㄷ

cyrus 2016-11-16 19:47   좋아요 1 | URL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생각하면 술이 당긴 신체 반응은 당연한 겁니다.. ㅠㅠ

동성로 시내에 집회 있던 날에 오랜만에 소주, 맥주를 마셨어요. 역시 힘들 때 마시는 술은 맛이 끝내주더군요. ^^;;

표맥(漂麥) 2016-11-1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여왕님은 돈키호테... 글읽기 싫어지는 세상을 만든 분이시라서... 쩝...

cyrus 2016-11-17 08:25   좋아요 0 | URL
여왕님도, 돈키호테도 아닌, 그냥 나라 망치려고 작정한 사기꾼입니다. 오늘 아침에 불쾌한 뉴스를 봤어요. 한일군사협정 추진을 박씨가 지시했다는군요..
 
이세 모노가타리
작자 미상 지음, 민병훈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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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이세 이야기’이다. 모노가타리는 일본 고대 및 중세시대 때 정형화된 문학 장르이다. 이 이야기 속에 ‘와카(和歌)’라는 노래도 실려 있다. 《이세 모노가타리》는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 794~1185년)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문헌인데, 이 시기에 와카나 하이쿠(俳句) 같은 시가문학이 한창 꽃을 피웠다. 헤이안 시대는 우아하고 섬세한 일본적 정서가 주를 이룬 귀족사회이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들은 와카로 연애편지를 보내 관계를 맺고, 능력만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정식으로 정부를 여러 명 둘 수 있었다. 그 시대에 와카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연애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세 모노가타리》는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와카가 실린 이야기 모음집이다.

 

《이세 모노가타리》에서 주로 등장하는 주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대부분은 이별이나 계급의 한계에 부딪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한다. 그들의 애틋하고도 서글픈 감정이 와카에 압축되어 있다. 《이세 모노가타리》 제23단 ‘우물 벽(筒井筒)’은 한 남자만 끝까지 사랑하여 홀로 기다리면서 사는 불행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우물 벽’ 이야기의 남녀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다. 두 사람은 서로 부부가 될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이들은 부모가 정해준 배우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자신의 감정을 와카로 써서 여자에게 보낸다.

 

 

우물의 벽에 키를 맞추며 놀던 나의 신장도
우물보다 컸겠죠 보지 않은 사이에

 

 

여자는 남자의 와카에 답한다. 자신도 여전히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전달한다.

 

 

같이 대 보던 가르마 탄 머리도 어깰 넘었소
그대 아니고 누가 올려 묶어 주리오

 

 

이렇게 연애편지를 주고받던 남녀는 드디어 결혼하게 됐다. 딱 여기까지만 이야기가 끝냈더라면, 가장 낭만적인 와카가 실린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이세 모노가타리》는 아름다운 사랑을 낭만적으로 미화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잔인하게도 우리가 사랑하면서 꼭 마주하게 될 현실의 장벽까지 언급한다. 부부는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게 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남편은 무기력한 현실을 잊기 위해 바람을 피웠다. 남편은 두 명의 아내를 두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의 바람을 알면서도 미워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가 딴 남자 만나러 다닌다고 의심했다. 누가 누구를 의심하는 건지, 참. 남편은 몰래 숨어서 아내를 지켜봤다. 남편의 의심은 틀렸다.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했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화장한 뒤,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내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한 남편은 두 번째 여자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남편은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그녀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두 번째 아내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혼자 밥을 푸고 있었다. 남편은 두 번째 아내의 모습에 실망하여 그 집을 다신 찾지 않았다. 남편은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두 번째 아내의 모습을 보자마자 사랑의 감정이 식어버렸다. 사실 두 번째 아내도 남편을 기다리면서 혼자 살고 있었다. 이 어리석은 남편은 아내로 맞이한 두 여자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다. 이미 결혼한 남자를 만난 두 번째 아내의 결정이 잘 한 거로 볼 수 없지만, 그녀가 만든 와카는 ‘해바라기 사랑’의 면모를 보여준다.

 

 

당신이 사시는 쪽을 바라보면서 살겠습니다
구름아 가리지 마 비가 내린다 해도

 

 

남편은 두 번째 아내에게 재회를 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두 번째 아내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남편을 기다린 두 번째 아내는 다시 한 번 와카를 읊어 보낸다.

 

 

그대 오신다 전해 주신 밤들이 지나쳐 가니
기대하지 않지만 그리며 지냅니다

 

 

상대방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받아들이지 않아 외롭고 슬픈 사랑을 가리켜 외사랑이라고 한다. ‘너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매몰차게 돌아서면 아픈 마음을 보듬으면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면서도 받아들일 듯 말 듯 해 외사랑의 애틋함을 더한다. 외사랑이 심화하면서 누구 먼저 거부할 수 없는 삼각관계가 연출됐다. 그러나 두 아내의 모습 경우 여성은 남성에게 보이는 수동적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아내는 오로지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여성이 아름다워지려면 화장을 해야 한다는 등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 고정관념이 드러나 있다.

 

제6단, 제12단 이야기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떠올리게 한다. 제6단의 남자 주인공은 황족의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야밤에 그녀를 납치하여 함께 도망친다. 제12단 이야기의 제목은 ‘도둑(盜人)’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한 남자는 어떤 집안의 딸을 훔친 도둑이다. 여자들은 ‘사랑의 인질’이 되어 자신을 납치한 남자들을 순순히 따른다. 제12단의 도둑은 훔친 여자를 풀숲에 두고, 도망쳤다. 그런데도 여자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남자를 잊지 못한다.

 

 

남자는 여자를 훔친 도둑이었기 때문에 풀숲에 두고 도망친 것이다. 뒤를 밟아 온 자들이 “이 들에 도둑이 숨어 있다고 한다”고 말하며 들에 불을 놓으려고 했다. 그때 여자가 슬퍼하며,

 

 

무사시노는 오늘만은 태우지 말아 주세요
낭군도 숨어 있고 나도 숨어 있으니

 

※ 무사시노 : 평야로 이루어진 지역 이름 (리뷰 작성자 주)

 

 

아주 극한 상황에서 약자가 강자의 논리나 주장에 동화돼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이상심리가 나타난다. 도둑이 붙잡혔어도 여자는 도둑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납치범과 납치 피해자 사이의 특이한 교감이 낭만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니까’라면서 뒤에 조건이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때론 이런 사랑이 듣는 사람, 혹은 제3자에게는 순수한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이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말하지만, 이게 지나치면 남녀 모두 불편하게 만드는 ‘족쇄’가 될 수 있다. 화려한 낭만으로 사랑을 아름답게 포장되는 시대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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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1-04 1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로에게 족쇄가 되는 사랑은
남보다 못한 거 같아요.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없다.
이 말도 한편으론
일방적 구속을 대변하는
폭력적인 언어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구속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욕심 채우는 거지요~

cyrus 2016-11-05 07:2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공감하는 부분이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라는 말의 함정입니다. 이성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의미가 느껴져서 좋아하지 않는 말입니다.

yureka01 2016-11-04 1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기사 100년도 못사는데 한사람만 사랑해야하는 것도 구속이긴해요.ㅎㅎㅎ

cyrus 2016-11-05 07:23   좋아요 1 | URL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과감히 포기하고, 더 좋은 인연을 만나야 합니다. ^^

stella.K 2016-11-05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난 일본의 저작물이 좋아지고 있는데
이건 별론가 보네.^^



cyrus 2016-11-05 16:16   좋아요 1 | URL
옛날 일본 사람들의 감수성이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어요. 그래도 읽다 보면 좋은 구절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겐지 모노가타리> 완독을 위해서 일본 고대 문학에 관심 가지기 시작했어요. ^^

 
여성들의 도시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10
크리스틴 드 피장 지음, 최애리 옮김 / 아카넷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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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거나 이해되지 못해왔다. 과거 천 년 대부분 시간에서 남성들의 세계라는 점은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가?”라는 문제는 유럽 중세시대 때부터 논쟁거리였다. 중세는 기독교와 떨어져 설명되기 어렵다. 중세의 역사는 곧 기독교와 사회, 즉 양자 관계설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의 신학자 중 일부는 여성이 조물주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기사는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특권이 허용된 젊은 남자다. 중세의 기사들은 명예롭지 못한 기습공격이나 약자나 패자에 대한 학대와 살해를 금했다. 기사도란 영웅이 갖춰야 할 이상적인 품성으로 성실, 명예, 예의, 약자 보호라는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이 기사도 정신에 의해 존중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철저하게 보호 대상에 머물렀을 뿐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오히려 중세 말 유럽의 여성들은 흑사병의 유행과 종교개혁이라는 대변혁의 시기에 희생양이 필요했던 권력자들의 마녀사냥에 휩쓸려 많은 수가 화형과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가 생가하는 중세의 이미지는 칙칙한 잿빛이다. 그러나 그 암울한 시대 속에 신념과 이상을 꿈꾸었던 여성이 있었다.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zan). 이름이 생소한 인물이다. 그녀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중세를 암흑시대로 치부해버리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하지 않고 글로써 생계를 꾸려간 최초의 전업 작가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성장기와 결혼생활, 문필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등 자기 삶의 기록을 자세히 남겨 중세 말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한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을 비하하는 풍조를 맞서기 위해 여성들만의 이상향을 책 속에 그려냈다. 그 책이 바로 《여인들의 도시》이다.

 

크리스틴은 여성의 본성과 행실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문헌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의 각성을 돕기 위해 이성 부인, 공정 부인, 정의 부인이 등장하여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누릴 만한 존재임을 천명한다. 세 명의 신들은 성경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고, 남성들에 의해 재생산되던 여성 비하 입장들을 반박한다. 신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크리스틴은 훌륭한 여성들만 모여 사는 요새 도시를 세운다.

 

《여인들의 도시》는 남성이 만들어 낸 중세의 권위에 도발하는 글쓰기를 보여주는 텍스트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다면 남성 중심적 시각을 완전히 해체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여인들의 도시》는 페미니즘 고전 도서 명단에 자주 거론되지 못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여인들의 도시》를 만들면서, 찾고 싶었던 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줬다. 그녀가 찾으려 했던 길은 남성중심시대의 문제의식을 인식하면서도 새로운 여권의 공간을 향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한 해체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새로운 구성’을 형성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하나로 형성된 사유의 집합체가 바로 《여인들의 도시》이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남성들의 텍스트를 선별하여 반박하는 작업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시도이다.

 

“시기심에서 여성을 헐뜯는 자들은 졸렬한 남자들로, 자기보다 더 뛰어난 지성과 훌륭한 품행을 갖춘 여성들을 만나보고 앙심을 품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란다. 그런 자들은 모든 여자들을 공격함으로써 자기보다 더 훌륭한 여성들의 명예와 평판마저 망가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이성 부인의 말, 제1부 8장 48쪽)

 

크리스틴은 글쓰기가 본질적 인간본성에 대한 보편적 발언이라는 믿음을 스스로 깨뜨렸다. 오히려 남성들의 글쓰기는 여성 자유의 파괴자로,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고안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여겨졌다. 그녀의 글쓰기는 기존의 낡은 남성의 권위를 지적하고, 성경과 신화 속에 은폐된 이데올로기적 전략들을 폭로했다. 그래도 크리스틴은 중세 남성들이 누려온 특권적 지위를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여성을 생각하는 남성에 대한 믿음을 고수한다.

 

“모든 남자들이 위에서 말한 견해(여성을 비하하는 남성들의 견해-리뷰 작성자 주)에 동조해 여자가 교육받는 것이 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단다. 좀 더 현명한 남자들일수록 그러지 않아. 하지만 현명하지 못한 남자들은 여자들이 교육받는 것이 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야. 왜냐하면 여자들이 자기들보다 더 많이 배우는 것이 못마땅하니까.” (공정 부인의 말, 제2부 36장 278쪽)

 

크리스틴은 글을 쓰고, 사고하는 확실한 방법으로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이상을 전파했다. 설사 그녀의 이상이 끝내 현실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해도 그 행위는 메아리가 되어 계속 울려 퍼졌다. 《여인들의 도시》야말로 지금의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만들게 해준 생명력 있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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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1-03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제 2의 중세 도래라고 볼 수도 있죠. 중세의 고딕 예술 풍조는 요즘 미니멀리즘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 문제로 여성을 통제하려는 속셈은 동일. 중세에 마녀로 몰린 여성들이 돈있는 과부가 많아 교회에서 그걸 뺏으려 기획한 경우가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페미니즘 전투상황은 중세 마녀사냥과 비슷한 구석도 있죠. 당신이 마녀도, 페미나치도 아닌 걸 증명해 보아라! 같은...
남녀라는 이분법이 아닌 인간의 본성 측면에서 종합해보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cyrus 2016-11-03 18:54   좋아요 0 | URL
크리스틴 드 피장이 살았던 시대에도 남녀 갈등이 첨예했고, 학자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피장이 지적했던 것들이 지금의 여혐 입장의 논리와 닮았습니다.

yureka01 2016-11-0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야말로 여성의 선구자였군요....^^.. 여성문제나 남성문제는 인간성, 즉 휴머니즘이라는 넓은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성별의 대결로는 해결안되는데 말이죠..

cyrus 2016-11-03 18:56   좋아요 0 | URL
네.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때 피장의 책도 같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과 신화가 남성중심적 시각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행복하자 2016-11-03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끔 생각합니다. 그나마 존중하는 척이라도 하는 사회가 나은건지 아니면 노골적으로 차별을 하는 사회가 더 나은건지.. 전투력향상을 위해서라도요~~
여자로 사는것이 좀 많이 고단한 사회입니다.. 그냥 인간이면 족 하지 않을까요? 남자나 여자나 돈과 권력앞엔 약자일수 밖에 없는데 말이에요~

cyrus 2016-11-03 18:59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을 내세워서 여자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남자들이 있어요. 이건 페미니즘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고, 페미니즘을 악용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들에게 잘해준다고 착각해요.
 

 

 

 

 

 

[1001-12] 오스 루시아다스

 

 

 

일반적으로 ‘대항해 시대’라면 ‘무적함대’라는 별명으로 위용을 떨친 스페인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포르투갈도 대항해시대의 주역이었다. 미지의 바닷길을 개척하고, 그 선상에 있는 섬과 대륙의 땅들을 점령하던 거친 시대의 문을 앞서 열었다. 1415년 엔히크 왕자(1394~1460)가 아프리카 경략에 나선다. 그가 파견한 탐험선은 서아프리카 해안을 하나둘 정복해 가면서 마침내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연다. 한 번도 항해에 나서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 앞에는 ‘항해 왕’이란 호칭이 붙는다. 인도항로를 연 바스쿠 다가마(1469~1524),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한 마젤란(1480?~1521),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처음 발견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1450?~1500)도 포르투갈 사람이다. 희망봉의 원래 명칭은 ‘폭풍의 곶’이다. 1497년 희망봉을 통과하여 인도에 도착한 가마의 항해를 기리기 위해 포르투갈 왕 주앙 2세(1455~1495)가 희망봉으로 바꿨다. 포르투갈은 개척한 항로를 통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인도양의 이슬람 세력을 제압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맞는다.

 

 

 

 

 

 

 

 

 

 

 

 

 

 

 

 

 

포르투갈은 한때 바다를 제패하여 세계를 호령한 만큼 화려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비록 최근엔 경제위기 등으로 과거의 영광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과거가 너무나도 찬란해서일까. 포르투갈인들은 찬란했던 과거 시절을 노래한 서사시에 자부심을 가진다. 그 서사시가 바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다. 루이스 디 카몽이스(Luís Vaz de Camões, 1524~1580)는 이 서사시 하나로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으로 칭송받는다.

 

 

 

 

 

카몽이스는 1547~1548년경에 아프리카의 세우타 항구에서 일어난 무어인(북아프리카에 거주한 이슬람교도)과의 전투에 참전하다가 오른쪽 눈이 실명했다. 그는 순탄하지 않은 생을 살았는데 옥살이를 한 적이 있고, 인도로 향하는 도중 배가 폭풍우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빈곤에 시달린 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우스 루지아다스》의 국내 번역본이 1988년에 나온 적이 있었으나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서사시는 총 10곡(曲)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석영, 최영수 공저의 《스페인. 포르투갈사》(대한교과서. 2005)에 요약한 《우스 루지아다스》의 줄거리가 있다. 이 내용은 ‘네이버 백과사전’ 항목으로도 만들어졌다.

 

 

 

 

 

 

 

 

 

 

 

 

 

 

※ [카몽이스의 ‘루지아다스’]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9392&cid=43036&categoryId=43036

 

 

 

카몽이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하여 포르투갈의 역사와 전성기를 이끈 인물들을 찬양한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와 작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텍스트에 기댔다. 고전의 새로운 해석은 역사를 이끌어갈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가는 기초다. 카몽이스는 신화의 세계를 소재로 포르투갈의 역사를 구현했다. 그래서 《우스 루지아다스》가 장편 서사시라기보다는 영웅 신화에 가깝다. 카몽이스는 가마를 로마의 건국 영웅보다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아이네이스의 명성을 능가한 저 유명한 가마도 있나이다.

 

(제1장 12연, 28쪽)

 

 

영웅은 언제나 악의 세력에 의해 고난을 겪다가 최후에 승리한다. 아이네이스나 오디세우스 등 신화 속 영웅들은 모험을 통해 스스로 고난을 극복하고 초자연적인 힘을 얻는다. 독자는 신화를 보면서 영웅의 탄생과 고난, 승리를 함께하는 즐거움을 찾는다. 주신(酒神) 바쿠스(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는 가마 일행의 항해가 신의 영역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가마 일행의 항해를 방해하는 음모를 꾸미지만, 비너스(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마르스(그리스 신화의 아레스)가 가마 일행을 보호한다. 비너스는 주피터(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게 찾아가 포르투갈에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우스 루지아다스》 2곡). 머큐리(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는 가마의 꿈에 나타나 위기 상황을 미리 알려준다. 신들의 비호를 받는 가마의 모습은 ‘완벽한 영웅상’과 거리가 멀다. 가마는 자신의 여정을 이야기하면서 장거리 항해의 어려움을 토로한다(《우스 루지아다스》 5곡). 카몽이스는 가마를 유약하게 그리기보다는 온몸으로 고난에 부딪히면서 한계를 겪는 인간적인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켰다.

 

 

 

 

 

 

 

 

 

 

 

 

 

 

 

 

 

카몽이스가 묘사한 가마의 항해 여정은 조셉 캠벨이 제시한 영웅 모험 단계 진행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 모험의 소명(인도 신항로 개척)을 받아 특별한 세계(아프리카)로 진입해 협력자(말린디의 왕)와 적대자(무어인, 몸바사의 왕, 말라바르의 재상 카투알)를 만나고 시련을 이겨낸다. 또 하나의 현실적인 관문(희망봉의 정령 아다마스토르)을 거쳐 부활을 경험하고 성공적으로 (포르투갈로) 귀환한다.

 

 

 

 

 

 

 

 

 

 

 

 

 

 

 

 

《우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을 넘어 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장편 서사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하면 카몽이스의 과장법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지리상의 발견’이 나 ‘세계탐험’이란 미명 아래 비참하게 죽어간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운명은 세계사에서 이 시대가 가진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럽의 식민주의의 양대 무기는 군대로 상징되는 총칼과 선교사가 대표하는 기독교다. 탐험가들은 벼락부자를 꿈꿨고, 선교사들은 기독교 전파라는 소명감이 높았다. 엔히크 왕자는 무력으로 아프리카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고, 노예무역을 정당화했다. 이슬람 국가들에 의해 동방으로 가는 육로가 막히자,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유럽 국가는 이슬람인들을 적대시했다. 세계의 승리를 가져오겠다는 기독교적 사명감이 이슬람과의 대립에 불을 지폈다. 유럽인들은 이슬람으로부터 오랫동안 위협의 공포에 떨었던 시절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앙금은 《우스 루지아다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카몽이스는 무슬림을 ‘오류투성이 종파의 신자’라고 표현하는 등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없는 주피터는 이교도를 물리친 기독교가 종국적으로 승리할 것으로 예언한다. 이 구절에 기독교 세계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카몽이스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딸(비너스)이여, 그들(루지타니아인 : 포트루갈인)에 의해서 요새와 도시들과

또 높은 성곽이 세워짐을 볼 것이요.

너무도 호전적이며 거친 터키족이 그들 손에서

영원히 괴멸됨을 볼 것이요. 인도의 제왕이

자유와 안전을 찾아서 강력한 대왕 앞에

복종함을 볼 것이다. 또 모든 것의 상전이 될

그들로 해서 종국엔 그 땅에 가장 좋은 율법(기독교)이

제공될 것이야.

 

(제2곡 46, 47연 주피터의 말 62~63쪽)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은 ‘강력한 대왕’이 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나타났다. 카몽이스와 유럽인들이 원하던 희망은 제국주의의 수탈을 알리는 폭풍이 되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 계몽주의의 신화로 식민지를 만들었다. 토인비는 ‘한번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자신의 능력과 방법론을 우상화하는 과오’를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신의 영역을 넘보는 오만함은 쇠퇴의 원인이다. 천년만년 영광을 누리며 번성할 것 같던 포르투갈은 현재 유럽 변방의 낙오자로 전락했다. 잃어버린 영광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포르투갈인들은 《우스 루지아다스》를 보며 위안으로 삼을 것이다. 허나 부질없는 일이다. 보르헤스는 ‘루이스 디 카몽이스에게’라는 제목의 시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상기시킨다. 영광은 종이 속에서만 영속되어 있을 뿐이다.

 

 

 

 

 

 

 

 

 

 

 

 

 

 

 

 

 

일말의 연민과 분노도 없이

시간이 영웅적 칼들을 갉아먹네.

아, 대위여, 당신은 슬픔에 잠겨

향수 어린 조국으로 가련히 돌아왔지.

조국에서 조국과 더불어 최후를 맞으려고.

마법의 사막에서 포르투갈의 꽃이 낙화하고

과거의 패배자였던 냉혹한 스페인 사람이

찢긴 그의 옆구리를 위협하였네.

나는 알고 싶네.

네가 최후의 강변인 그곳에서

겸허하게 깨달았는지.

모든 상실된 것, 서구와 동방, 창검과 깃발이

네 루시타이나판 아이네이스 속에서만

(인생사 우여곡절과는 무관하게) 영속하리라는 것을.

 

(보르헤스 「루이스 디 카몽이스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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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07 19:37   좋아요 1 | URL
인터넷에 `대항해시대`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뜨는 것이 게임입니다. ㅎㅎㅎ

저 말고도 매일 꾸준히 리뷰를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화제의 서재글`이 알라딘의 전부가 아니죠. `화제의 서재글` 밖을 둘러보면 묵묵히 리뷰를 쓰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

겨울호랑이 2016-10-0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몽이스의 애꾸눈을 보니 위나라 하후돈이 생각나네요 ㅋ

cyrus 2016-10-07 19:38   좋아요 1 | URL
눈깔 사탕으로 생각하면서 씹어드신 분이죠. ㅎㅎㅎ

비로그인 2016-10-25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항해시대에 관한 책들이 많군요.
관심이 갑니다.

cyrus 2016-10-25 18:40   좋아요 0 | URL
대항해 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의외로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를 정의해 달라는 물음에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시가 곧 삶인 시인들에게 시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만큼이나 난처한 질문임이 틀림없다. 에드거 앨런 포에게 시는 고독의 노래다. 비참한 삶을 살았던 포는 <애너벨 리>, <갈까마귀> 같은 우수와 연민으로 가득한 시를 남겼다. 포의 시를 읽는 것은 고독 속에 깊이 잠겨 서늘한 속살을 더듬는 것이다. 포는 육체에 각인된 고독을 고스란히 시화함으로써 서늘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하지만 싱거워 보이지 않는 포의 시적 언어를 읽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특히 시에 묘사된 감각의 깊이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시의 운율을 고스란히 구현해내는 일이 번역의 관건이다.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see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nd my bride,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ide of the sea.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애너벨 리중에서, 정규웅 역, 애너벨 리14)

 

    

 

 

달빛 비치면, 어김없이 예쁜

애너벨 리 꿈을 꾸고

별이 뜨기 무섭게, 어김없이 예쁜

애너벨 리의 밝은 눈 느끼네.

그렇게, 밤새도록 나는 누워 있네

내 사랑내 사랑내 목숨 내 신부 곁에

그 바닷가 그녀의 묘에서

파도치는 바닷가 그녀 무덤에서.

 

(김천봉 역, 19세기 미국명시 5 : 에드거 앨런 포79)

 

 

 

 

달빛은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면 따라오고

별들이 뜨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가

내 눈으로 들어오는 걸 느껴요.

그래서 이 밤에 나는나의 사랑이며, 내가 사랑하는,

내 생명인 내 신부 곁에 누워 있어요.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옆에

바닷가 옆, 내 여인이 누워 있는 곳에.

 

(김경주 역,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 애너벨 리)

 

 

 

 

왜냐면 달이 비추면 반드시, 가져다준다 내게 꿈,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그것들을;

그리고 별들이 뜨면 반드시, 내가 느낀다 그 밝은 눈,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그것을:

그리고 그래서, 밤 밀물 내내, 내가 누워 있다 곁,

나의 사랑하는나의 사랑하는나의 생명이자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돌무덤의

소리 나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의.

 

(김정환 역, 에드거 앨런 포 시선집124)

    

    

 

김정환 시인은 꾸밈 있는 시 번역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다. 어려운 문장을 쉽게 고치는 것을 틀린 번역이라고 주장한다. [참고] 나는 김정환 시인의 입장을 반대한다. 운율을 갖춘 문장의 본뜻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라면 의역도 필요하다고 본다. 김정환 시인은 원문에 충실히 하려고 직역을 시도했지만,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게 나왔다. 경우에 따라 직역과 의역, 이 두 가지를 적절히 버무릴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참고]검은 고양이의 우울하고 깜깜한 시편들 (한국일보 20163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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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름다운 애너벨 리
    from You're Yeah! 2016-10-05 16:57 
    #. 0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see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
 
 
yureka01 2016-10-0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단순히 문장 번역은 가능하겠지만 시의 메타포나 운율 등 이런건 어떻게 이입이 될 수 있게 번역이 가능한지 참 궁금했어요..

cyrus 2016-10-05 16:08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영시를 번역한 사람들은 운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우리말로 옮긴 시를 읽으면 운율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번역가 입장에서도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겁니다. ^^;;

시이소오 2016-10-05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정말 원문으로 읽어야지. 번역자들마다 제 멋대로 번역이라
지금 읽고 있는 <필립 라킨>시 역자가 김정환 씨인데,
이분 연세가 지긋해서인지 시 번역이 제게는 너무 올드하게 느껴지네요.
더군다나 문장을 만들지 않아서 문장 순서들이 다 엉망진창입니다.

외국 시는 정말이지 각자가 해석해서 읽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시 번역 잘 하는 거 정말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


cyrus 2016-10-05 16:14   좋아요 0 | URL
외래어 표기명도 오래된 느낌이 나죠. ㅎㅎㅎ 국내 시집이 많이 안 팔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외국 시집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도 많이 저조할 겁니다. 정말 아쉬워요. 많이 알려지지 못하고, 너무 일찍 절판되기도 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6-10-05 1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를 번역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봅니다. 우리말로도 너와나의 감성이 다른데...
그래도 좋은 시가 멋진 감성으로 많이 번역되면 좋겠어요~
어차피 원문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테니까요~

cyrus 2016-10-05 16:1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관심 받지 못한 번역 일을 하는 분들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안쓰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