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Sherlock Holmes she is always the woman.” 코난 도일(Conan Doyle)의 단편소설 보헤미아 스캔들(A Scandal in Bohemia)의 첫 문장이다.

 

 

 

 

 

 

 

 

 

 

 

 

 

 

 

 

     

* 셜록 홈즈 전집 5 : 셜록 홈즈의 모험(황금가지, 2002)

* 셜록 홈즈 전집 4 : 셜록 홈즈의 모험(시간과 공간사, 2002)

* 셜록 홈즈의 모험(동서문화사, 2003)

* 셜록 홈즈의 모험(문예춘추사, 2012)

* 주석 달린 셜록 홈즈 1 : 셜록 홈즈의 모험(현대문학, 2013)

* 셜록 홈즈의 모험(더클래식, 2014)

* 셜록 홈즈의 모험(코너스톤, 2016)

* 셜록 홈스의 모험(엘릭시르, 2016)

    

 

이 작품에서 홈즈는 보헤미아 국왕으로부터 그의 연인이었던 아이린 애들러(Irene Adler)가 가진 문제의 사진(국왕과 애들러가 같이 찍은 것)을 되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홈즈는 애들러가 사진을 어디에 숨겼는지 알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눈치를 챈 애들러는 다른 사진만을 남겨두고 해외로 떠난다. 콧대 높은 남성 우월주의자 홈즈가 유일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여성이 애들러다. 그래서 홈즈는 그녀를 세계에서 유일한 여성(the woman)’이라고 부른다.

 

 

 

 

 

 

 

 

 

 

 

 

 

 

 

 

 

 

* 셜록 홈즈 전집 6 : 셜록 홈즈의 회상(황금가지, 2002)

* 셜록 홈즈 전집 6 : 셜록 홈즈의 회상(시간과 공간사, 2002)

* 셜록 홈즈의 회상록(문예춘추사, 2012)

* 주석 달린 셜록 홈즈 2 : 셜록 홈즈 회고록(현대문학, 2013)

* 셜록 홈즈의 회상(더클래식, 2014)

* 셜록 홈즈의 회고록(코너스톤, 2016)

* 셜록 홈스의 회상록(엘릭시르, 2016)

    

 

 

홈즈가 존경할 정도로 영리하고 대담한 여성이 있는가 하면, 홈즈에게 외면 받은 비운의 여인도 있다. 이 비운의 여인은 머스그레이브 가 의식문(The Musgrave Ritual)에 등장하는 레이첼 하웰즈(Rachel Howells).

 

다음 내용은 작품의 줄거리 및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첼은 머스그레이브 가문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이다. 그녀는 저택의 집사 리처드 브런튼(Richard Brunton)과 약혼한다. 그러나 브런튼은 그녀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다른 여자를 만난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레이첼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척추 뇌막염에 걸린다. 브런튼은 저택 주인 레지날드 머스그레이브(Reginald Musgrave)가 잠든 줄 알고, 늦은 밤 주인의 서재에 들어와 가문의 의식문을 훔쳐본다. 그 날 레지날드는 서재에 가게 되고, 집사의 수상한 행동을 목격한다. 화가 난 레지날드는 집사를 해고하지만, 브런튼은 2주일만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레지날드는 집사의 사정을 들어준다. 집사는 그날 밤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소동이 일어난 지 3일 후에 집사가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다. 투병 생활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레이첼은 정신에 이상을 일으키게 되고, 그녀도 사라져버린다. 저택 안의 연못 주변에 레이첼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연못 속을 수색해보지만, 그녀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형체를 알 수 없는 녹슨 쇠붙이가 든 자루를 발견한다. 레지날드는 대학 동창 홈즈에게 집사와 하녀 실종사건을 의뢰한다. 홈즈는 암호 같은 의식문을 해독하여 특별한 것을 숨겨놓은 장소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 장소는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뜸했던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서 브런튼의 시체를 발견한다. 브런튼은 의식문을 해독하여 지하실에 보관된 찰스 1세의 왕관을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레이첼과 함께 지하실에 내려가지만, 브런튼은 보물이 보관된 좁은 공간에 갇히고 만다. 브런튼은 레이첼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녀는 보물을 들고 지하실 밖으로 나간다. 레이첼은 집사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보물을 연못에 던졌고, 연못 주변에 그녀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다.

 

사건은 해결되었으나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여러 개 있다. 첫 번째 수수께끼. 브런튼의 죽음은 예기치 못한 돌발 사고인가 아니면 우발적인 사고로 가장한 레이첼의 복수극일까. 홈즈는 후자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지하실에 있었던 일을 추리한다. 그는 레이첼이 흥분하기 쉬운 켈트(Celts, 아일랜드와 웨일스에 거주한 고대 민족) 여자라서 브런튼이 방심한 사이에 복수했을 거로 생각한다. 두 번째 수수께끼. 끝내 알려지지 않은 레이첼의 행방이다. 홈즈는 레이첼이 죄의 기억을 간직하고서 영국을 탈출해 도피했다고 추측한다. 홈즈는 레이첼의 행방에 무관심하다. 그의 여성관을 생각해볼 때 레이첼은 홈즈가 기피하는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홈즈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를 복수하려고 죄를 지은 히스테릭한 여성으로 인식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히스테리를 감정에 치우친 여성에게 나타나는 정신적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히스테리를 여성만 겪는 병으로 이해하는 편견이 남아 있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은 이러한 편견을 근거로 정상적이지 않은 여자들은 히스테리 환자 아니면 미친 여자로 규정했다.

 

80년대 아동용 축약본으로 나온 계림문고 셔얼록 호움즈’(80년대에 '셜록 홈즈'를 이렇게 표기했다) 시리즈에서는 원작을 무시한 결말이 나온다. 번역본의 제목은 <저주받은 왕관>. 이 책에서 레이첼은 미쳐버린 상태에서 홀로 돌아다니다가 늪지에 빠져 죽은 것으로 나온다.

 

 

 

 

 

 

<저주받은 왕관>의 번역자는 하웰즈의 모습에서 오필리아(Ophelia)를 연상했던가 보다. 오필리아는 물에 빠져 죽은 미친 여자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화가들은 오필리아의 죽음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 많은 오필리아를 묘사한 그림 중에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가 그린 것이 오필리아의 슬픈 삶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민음사, 1998)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 1사절파본(동인, 2007)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펭귄클래식코리아, 2014)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문학동네, 2016)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창비, 2016)

* 디트리히 슈바니츠 슈바니츠의 햄릿(들녘, 2008)

    

 

디트리히 슈바니츠(Dietrich schwanitz)는 오필리아를 미치게 만든 원인을 햄릿(Hamlet)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오필리아는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햄릿이 아버지 폴로니우스(Polonius)를 죽인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 속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햄릿45) 한때 저질 사절판으로 알려져 연구가들이 무시했던 1사절판 햄릿에 미친 오필리아의 모습을 알려주는 무대 지시문 한 줄이 적혀 있다. 번역으로 활용된 판본에는 무대 지시문이 없다.

    

 

오필리아가 류트를 연주하고, 머리는 아래로 풀어헤친 채 노래하며 등장한다.

 

(이현우 역, 동인 햄릿 : 제1사절판142)

    

 

신하는 오필리아가 온통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말을 떠들고 다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오필리아가 잃은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다. 그녀가 사랑했던 연인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되었다. 오필리아의 친오빠 레어티스(Laertes)는 복수의 칼날을 햄릿의 가슴에 겨눈다. 오빠가 아버지의 원수를 거론했으니 복수의 피바람 예감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그녀는 햄릿 근처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했는지 의미심장한 노래를 부른다.

 

 

당신의 참사랑이 남다른 줄

어떻게 아냐구요?

조가비 모자와 지팡이에

가죽신 때문이죠.

 

그분은 가셨어요, 아씨,

돌아가셨다고요.

머리맡엔 새파란 잔디요

발치엔 비석이죠.

 

(최종철 역, 민음사 햄릿151~152) 

 

당신 진실한 사랑 남다른 줄

어찌 알까요?

조가비 모자에 지팡이,

가죽 신발 모양 보고 알지요.

 

그분은 죽었어요, 가셨어요, 아가씨,

그분은 죽었어요, 가셨어요.

머리맡엔 초록 풀잎이 자라고,

발치엔 돌비석 하나.

 

(이현우 역, 동인 햄릿 : 1사절판142)

      

그대 진정한 사랑인 줄

내 어찌 알까요?

조가비 단 모자에 지팡이

샌들 신은 모습일 테죠.

 

그 사람은 죽었다오, 아가씨.

죽어 떠나갔다오.

머리에 푸른 잔디 덮이고

발치에는 비석이 서 있다오.

 

(노승희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년 초판 햄릿239~240,

펭귄북스 오리지널 디자인 특별판 햄릿185)

      

내가 당신의 애인을

다른 이와 어떻게 구별하느냐구요?

그의 새조개모와 죽장

그리고 그의 가죽신을 보고서.

 

그이는 죽어서 사라졌어요. 마님.

그이는 죽어서 사라졌어요.

그의 머리맡에는 잔디 풀 한 개

그의 발치에는 돌멩이 한 개.

 

(이경식 역, 문학동네 햄릿162)

     

그대 임 어찌 아나

누가 내게 물으면

순례자 가리비 모자,

지팡이와 가죽 신.

 

죽고 없어요, 아씨,

죽고 영영 없어요,

머리엔 푸른 뗏장,

발치엔 묘석 하나.

 

(설준규 역, 창비 햄릿146~147)

 

 

조가비 모자를 쓴 순례자는 사랑하는 연인을 상징한다. 오필리아는 미래에 다다르게 될 순례자, 즉 햄릿의 비극을 걱정한다. 셰익스피어 연구가와 독자 들은 햄릿의 광기가 실제인지 아닌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한다. 45장에 등장한 오필리아가 정말로 미쳤는지 아닌지 분석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슈바니츠는 오필리아의 광기가 진짜라고 주장한다. (슈바니츠의 햄릿144) 나는 그의 의견에 반대한다. 오필리아는 미치지 않았다. 헛소리에 가까운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오필리아의 행동을 광기 어린 발작의 증상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녀는 미친 것이 아니라 고민했다. 오필리아는 햄릿처럼 존재론적 고민 속에 빠진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데, 햄릿마저 포기해야 하는 세상을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야.’ 그녀는 분명한 결정을 취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닥쳤다.

 

레이첼 하웰즈와 오필리아. 이 두 사람은 정상안정을 유지하는 사회가 낙인찍은 비정상적 인물이다. 가부장제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심각한 정신장애를 가진 여성은 결혼할 기회가 없다.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편견은 여성의 광기를 비장상적’, ‘합리적 이성이 불가능한 상태로 인식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여성 광기의 원인을 가부장이 될 연인을 잃은 상실감에서 찾는다. 그것을 내면화한 독자는 레이첼과 오필리아의 복잡한 감정 상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그냥 그녀들을 미친 여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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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4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24 16:41   좋아요 0 | URL
좀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홈즈 소설에 나오는 여성의 모습이 오필리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AgalmA 2017-06-26 0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요. 부모나 연인이 죽어서 혼란한 상태인 인물들이 나왔을 때 여자는 항상 미치고 남자는 미친 척을 하는 거로 설정하죠. 비평가도 작가도 이걸 일반화하고 경향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잘 짚어 주셨어요.
그에 비하면 도선생은 남녀 구분두지 않고 병적인 개인을 다뤄서 좋아요ㅋ 다들 이 구역에선 내가 더 미쳤어 하는ㅋㅋ;;

cyrus 2017-06-27 08:02   좋아요 1 | URL
도끼 선생, 당신은 대체... ㅎㅎㅎ

여성의 광기는 여성이 남성보다 하등하다는 편견을 강화하기 위한 근거가 되었어요. 남성의 광기를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금병매》는 그 면목은 호색본(好色本)이지만, 실질에 있어서는 풍자, 풍속소설의 성격을 띤다. 방탕무뢰한 사나이의 생활을 거침없이 표현해서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를 둘러싼 자녀들의 음욕생활 속에 부각된 타산과 질투, 색과 욕(慾)의 발악을 그려 인간의 현실을 고발한 자연주의 문학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이병주, 《이병주의 에로스 문화 탐사 2》 20쪽)

 

 

 

중국의 4대 기서(奇書) 중 하나인 《금병매》가 내일부터 정식 출간된다. ‘금병매’는 등장인물인 반금련, 이병아, 춘매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서 지은 제목이다. 《금병매》는 에로틱한 표현 때문에 민간의 풍속을 해치는 ‘음서’로 낙인 찍혀 세 차례나 판금 조치를 당했다. 그러나 중국의 나머지 기서인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와 달리 평범한 삶의 일상에서 소재를 취해 인간의 욕망과 현실에 천착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원래 《금병매》는 작가 미상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1933년에 『금병매사화(金甁梅詞話)』라는 책이 발견되어 이를 근거로 ‘난릉 소소생(蘭陵 笑笑生)’이라는 필명을 가진 작가로 밝혀졌다. ‘난릉’은 현재의 산동성 봉현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금병매》의 시대적 배경은 12세기 초의 송나라 휘종 시대이다. 작가가 16세기 말 명대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시대상을 앞당겨서 설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작품의 전체적 줄거리는 반금련과 서문경의 음탕한 놀음, 거기에 얽힌 음모와 배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에는 노골적인 성 묘사를 이유로 유교 사상가들은 《금병매》를 ‘불량 서적’으로 규정했다. 루쉰(魯迅)은 자신의 책 《중국소설사략 : 루쉰 전집 11》(그린비, 2015)에서 《금병매》를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했다.

 

 

 

 

 

 

 

 

 

 

 

 

 

 

2002년 ‘술 출판사’에서 펴낸 《금병매》 완역본은 절판되었다. 10권의 책을 모두 구하려면 거금이 필요하다. 원작의 줄거리 일부를 손질한 요약본들이 출간되었지만, 원작의 묘미를 그대로 살려내지 못한 단점이 있다. 이로써 ‘사단법인 올재’의 《금병매》는 ‘가장 독보적인 번역본’이다. 다만, 이 책이 ‘한정판’이라서 며칠 만에 ‘절판’된다.

 

 

 

 

그동안 ‘사단법인 올재’는 《수호전》(2014년 11차, 도서명은 ‘수호지’), 《서유기》(2015년 15차), 그리고 ‘5대 기서’를 논할 때 언급되는 《홍루몽》(2016년 19차)을 출간했다. ‘사단법인 올재’가 번역하지 않은 4대 기서가 바로 《삼국지연의》다. 올재 관계자 측에 따르면 《삼국지연의》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2015에 《서유기》를 샀을 때만 해도 《금병매》와 《삼국지연의》도 나오길 바랐던 적이 있다. 상상했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될 줄이야... 정말 지금도 생각하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 절판된 《이병주의 에로스 문화 탐사》 2권(생각의 나무, 2002)은 《금병매》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이 글을 작성할 때 참고한 책이다. 이 책에 서문경과 반금련이 섹스하는 장면을 묘사한 춘화도 실려 있다. 이병주는 루쉰이 《금병매》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중국소설사략》의 내용 일부를 인용했다. 그런데 그는 《금병매》의 작가 소소생을 ‘소소자(笑笑子)’로 잘못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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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4-2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이네요...

그런데 지난 번에 사둔 책상자를 아직도 까보지
않고 있어서 부담이.

일단 가격 부담이 적으니 그래도 일단 질러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어쩌면 온라인 판은 금세
품절이 되지 않을까요. 금병매고!

서문경과 반금련, 떡장수 무대 그리고 타호무송
이 등장하는 수호전이 떠오르네요.

cyrus 2017-04-20 22:57   좋아요 0 | URL
올재 시리즈가 3개월 간격으로 나옵니다. 계속 사다보면 올재 시리즈가 나오는 달이 언젠지 짐작할 수 있어요. 그 달에는 일부러 책을 사지 않습니다. 잔뜩 사놓으면 못 읽거든요.. ^^;;

syo 2017-04-2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날 사놓고 안읽어요.... 싸서 좋긴 한데 싸서 안 읽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cyrus 2017-04-20 22:58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까지 산 올재 시리즈 중에 읽은 것보다 안 읽은 것, 읽다가 포기한 것이 더 많아요. ^^;;

dellarosa 2017-04-20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 놓친 홍루몽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ㅠㅜ

cyrus 2017-04-20 23:00   좋아요 1 | URL
내일 11시 되기 전에 미리 교보문고 사이트에 접속해서 주문 준비를 해야 됩니다. ^^;;

돌궐 2017-04-20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사놓고 시간 날 때 식구들 몰래 읽어야겠네요.

cyrus 2017-04-20 23:01   좋아요 0 | URL
우리 집에는 책 읽는 사람이 저와 동생뿐인데, 동생은 이 소설을 모를 거예요. 저는 잘 보이는 책장 칸에 꽂으려고 합니다. ^^

니페딘1T 2017-05-2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재고 남은 것을 알아내어 구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무 늦게 알아버렸네요. 좋은 작품들이 이미 나왔었군요, 아.. 아깝다 ㅠㅠㅠㅠㅠ

지금부터라도 수집해야겠습니다. ㅎㅎㅎㅎ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cyrus 2017-05-27 18:55   좋아요 0 | URL
종이책으로 나온 것들 중에 일부는 몇 개월 간 무료로 전자책으로 제공합니다. 그리고 ‘올재 셀랙션’이라고 해서 책값을 조금 올려서 재출간하는 것도 있습니다. ‘사단법인 올재’ 홈페이지에 가입하면 출간 소식을 문자로 받을 수 있습니다. ^^

니페딘1T 2017-06-09 10:24   좋아요 0 | URL
친절한 추가 답변..감사합니다. ^^
 

 

 

 

 

 

 

 

 

 

 

 

 

 

 

 

 

 

 

 

지난 화요일에 프랑수아 비용의 《유언의 노래》(민음사, 2016년)와 《유언시》(문학과지성사, 1980년)에 공통으로 발견된 오류를 언급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두 책은 『유증시』의 14연 8행시를 13연으로 잘못 소개했다. 그러나 번역자들의 실수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조금 부족했다. 어젯밤에 《유언시》를 다시 읽고 나서야 드디어 의문점이 풀렸다.

 

내 글에 인용된 원문의 출처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다.

※ 링크 : http://www.gutenberg.org/files/12246/12246-h/12246-h.htm

 

 

XIII(13연)

 

Item, à Jehan Trouvé, bouchier,

Laisse le mouton franc et tendre,

Et ung tachon pour esmoucher

Le boeuf couronné qu‘on veult vendre,

Et la vache qu‘on ne peult prendre.

Le vilain qui la trousse au col,

S‘il ne la rend, qu‘on le puist pendre

Ou estrangler d‘un bon licol!

 

 

《유언시》를 번역한 송면 교수는 이 13연 8행시를 ‘22연’이라고 썼다. 프랑스어를 잘 모르는 분을 위해 번역문 중간에 원어를 표시했다.

 

 

또 하나, 푸주한 장 투르베(Jehan Trouvé)에게는

질이 좋은 부드러운 양과

팔려 내놓은 관을 쓴 황소(boeuf couronné)의

파리를 쫓는(esmoucher) 채찍 한 개와

그리고 암소(vache)를 남겨 준다.

이 암소를 어깨에 메는 나쁜 놈(vilain)이 있거든 잡아도 좋고

그리하여 돌려주지 아니하거든 단단한 고삐(licol)로

그 놈의 목을 졸라도(estrangler) 좋으리라.

 

(《유언시》 58쪽)

 

 

 

이제 남은 건 송 교수가 ‘19연’으로 잘못 소개한 8행시다. 이 구절은 19연이 아니라 22연이다.

 

 

XXII(22연)

 

Item, au chevalier du guet,

Le heaulme luy establis;

Et aux pietons qui vont d'aguet

Tastonnant par ces establis,

Je leur laisse deux beaulx rubis,

La lenterne à la Pierre-au-Let.,

Voire-mais, j'auray les Troys licts,

S'ilz me meinent en Chastellet.

 

 

또 하나, 야경대장(夜警隊長, au chevalier du guet)에게는

투구를 주기로 정해 두고

가게의 대를 어루만지며 야경을 도는

사보(徙步)의 야경 대원들(pietons)에게는

훔친 멋있는 물건(rubis)

피에르 오 레(Pierre-au-Let) 가(街)의 초롱(lenterne)을 남겨 준다.

그리하여 만약(Voire-mais) 그들이 나를 샤틀레 감옥(Chastellet)으로 연행하면

나는 세 개의 백합 무늬의 방을 차지하리로다.

 

(《유언시》 56쪽)

 

 

 

정말 희한한 일이다. 어떻게 비용을 전공한 두 명의 불문학자가 똑같이 8행시의 머릿수를 잘못 적는 실수를 저질렀을까? 두 사람이 번역을 위해 참고한 원서는 같은 책이 아니다. 8행시 순서를 잘못 적은 원서를 그대로 옮기는 바람에 불문학자들이 그 오류를 발견하지 못할 수 있고, 아니면 내가 참고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에 입력된 원문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

 

 

 

 

 

 

 

※ 수정 · 첨언합니다 (2017년 2월 10일 작성)

 

 

제가 2월 7일, 그리고 오늘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유언의 노래》 13연 8행시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썼습니다. 오늘 오전에 ***님(의 댓글이 ‘비밀’로 되어 있어서 실제 닉네임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께서 제 의견에 대한 이견을 내놓았습니다. ***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참고했던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원문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원문은 1860년대에 나온 것이고, 그 후로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반영된 시의 순서와 머릿수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유언시》의 송면 교수와 《유언의 노래》의 김준현 교수는 새롭게 정리된 원본 시집을 참고해서 번역했을 겁니다. ***님이 2012년에 나온 불영 대역본 시집의 시의 순서와 머릿수가 두 권의 번역본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는 과거 자료를 디지털화해서 옮겼기 때문에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글므로 제가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원문을 가지고 두 권의 번역본에 대해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한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밝힙니다. 잘못 전달될 소지가 있는 내용은 '취소선'으로 그었습니다. 좋은 의견을 주신 ***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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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10 12:43   좋아요 1 | URL
그래도 모국어의 시가 더 좋습니다. ^^

레삭매냐 2017-02-13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를 이용해서
불어 번역에 대해 의문점을 제시했었는데,
번역판이 다르다는 그런 대답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출판사 내부 사정을 자세히 모르고, 또 언어
에 대해서는 영어 정도 밖에 모르니 이견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저자의 이름 건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존 버저의 경우도 자신의 이름도
자신이 버저라고 하는데 왜 굳이 우리나라
출판사에서는 꾸역꾸역 존 버거라고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틀렸으면 고치는 게 정상인데 말이죠.

cyrus 2017-02-13 15:27   좋아요 0 | URL
번역 문제는 번역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저처럼 어설프게 구글 번역기 돌리면서 하면 전문가에게 제대로 털리기 마련입니다.. ㅎㅎㅎ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사용된 명칭, 작가 이름 같은 고유명사가 고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베르테르’의 표기가 잘못 돼서 ‘베르터’로 고쳐 쓰는 사람이 있어도 대부분 사람들은 익숙한 ‘베르테르’를 씁니다. ^^;;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읽으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그 날이 생각난다. 4, 5년 전이었을 것이다. 조금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정확하게 묘사하기 힘들지만,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페이스북에서 여성 시인 ‘임 씨’를 알게 됐다. 임 시인은 나에게 ‘친구 신청’을 하게 된 것을 수락한 계기로 서로 알기 시작했고,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한 번은 임 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장문에 가까운 글을 남겼다. 임 시인은 ‘문학 작품에 드러난 악(惡)’이 문학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의견을 밝혔고, 자신은 ‘악’이 하나의 문학적 소재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못된 버릇은 여전한가 보다. 나는 그 글을 보는 순간, 임 시인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문학 작품에 드러난 악’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언급했다. 아니, 그런데 내 댓글에 시인의 ‘페이스북 친구’ A가 답글을 달았다. 나는 A와는 일면이 없었다. 프로필 사진으로 봐서는 A는 중년층 남성이었다. A는 내 의견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내가 시집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면서, 보들레르가 악에 탐닉했다기보다는 기독교 정신도 수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보들레르의 시 제목 하나를 언급했는데, 지금은 그게 제목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A의 답글 하나로 인해 임 시인의 글을 지적했다가 도리어 제3자에게 지적당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시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줘서 감사하다는 식으로 좋게 답글을 남겼다. A의 반박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지만, 남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논쟁을 해봤자 어차피 내가 불리한 입장이 된다. 그때 나는 임 시인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고, A와 임 시인은 서로 페이스북 글에 ‘좋아요’를 많이 눌러줄 정도로 오랫동안 친한 사이였다. 임 시인이 내 의견을 옹호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임 시인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답글을 달았는데, 역시 내 의견에 동의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날 이후로 시집을 다시 읽었다. 시집은 윤영애 교수가 번역한 ‘문학과지성사’ 판본이다. 내가 잘못 안 건지, 아니면 A가 잘못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시집을 정독했다. 그런데 몇 번 읽어봐도 A가 알려준 시 제목이 ‘문학과지성사’ 판본에 없었다. 만약 A가 프랑스어로 된 시 제목이나 그 시가 수록된 시집을 알려줬으면 그게 무슨 시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A가 알려준 시를 찾아내지 못했다. 복수(?)의 기회는 그렇게 물 건너 가버렸다.

 

몇 년 지나고 나서야 여기서 A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나 자신이 쪼잔해 보인다. 그래도 이번에 보들레르의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이 알게 된 생각만큼은 꼭 밝히고 싶다.

 

 

 

 

 

 

 

 

 

 

 

 

 

 

* 《악의 꽃》 (김붕구 역, 민음사, 1974년)

* 《악의 꽃》 (윤영애 역, 문학과지성사, 2003년)

* 《악의 꽃》 (황현산 역, 민음사, 2016년)

 

 

나는 지금까지 읽었던 보들레르의 《악의 꽃》 번역본은 ‘문학과지성사’ 판본(윤영애 역), ‘민음사’ 구판(김붕구 역), 그리고 구판을 절판시키고, 작년에 새롭게 선보인 ‘리뉴얼판(황현산 역)’이다. ‘문학과지성사’ 판본은 1857년 초판 출간 당시 윤리성 논란으로 삭제된 6편의 시뿐만 아니라 《악의 꽃》 2판에 실을 예정이었던 에필로그의 초고도 수록되었다. ‘민음사’ 구판과 ‘리뉴얼판’은 선집 형태이다. 한 권에 수록된 시의 편수가 적지만, 프랑스어 원문이 있어서 번역문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혹자는 번역이 다른 세 권의 시집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냐고 생각할 것이다. 세 권의 번역본마다 약간씩 번역 어휘의 차이점은 있다. 다만 그걸 비교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복수의 번역본을 읽은 진짜 이유가 보들레르의 시를 바라보는 번역자들의 관점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수』(L’Ennemi)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 시는 세 권의 번역본 모두 수록되었다.

 

 

내 청춘 한갓 캄캄한 뇌우였을 뿐,

여기저기 눈부신 햇살이 뚫고 비쳤네.

천둥과 비가 하도 휘몰아쳐 내 정원에는

빠알간 열매 몇 안 남았네.

나 지금 사상(思想)의 가을에 닿았으니,

삽과 갈퀴를 들고 다시 긁어 모아야지,

홍수가 지나며 묘혈처럼 곳곳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놓았으니.

누가 알리, 내가 꿈꾸는 새로운 꽃들이

모래톱처럼 씻긴 이 흙 속에서

활력이 될 신비의 양분을 얻을지를?

― 오 괴로워라! 괴로워라! 시간은

생명을 파먹고, 심장을 갉는 정체모를 원수는

우리 흘리는 피로 자라며 강대해지는구나!

 

(『원수』, 김붕구 역)

 

 

이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들레르 연구가와 번역가들은 이 시의 제목인 ‘원수’의 정체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보들레르는 늘 ‘권태’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시인은 헤어날 수 없는 권태와 지루함, 그리고 가슴속에 가득한 환멸을 떨쳐내려고 상상의 낙원을 설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공상은 일시적인 도피처에 불과했고, 그는 시를 통해 증오와 환멸을 드러내며 폭력과 악의(惡意)를 언어로 표출했다. 시인은 자기 회한과 허무를 곱씹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길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는 과정이 시인의 입장에서는 ‘지옥의 시간’이었을 터. 윤영애 교수는 ‘원수’의 정체가 ‘생명을 파먹는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붕구 씨는 다른 견해를 밝혔는데, ‘권태’ 또는 ‘회한’이라고 했다. 리뉴얼판의 번역을 맡은 황현산 교수는 ‘원수’를 단수의 의미가 아닌 복수의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보들레르가 다른 시에서 두려운 존재로 언급된 ‘시간’, ‘죽음’, ‘권태’는 물론이고, 시인을 괴롭힌 질병인 ‘매독’까지 거론된다.

 

 

 

 

 

 

 

 

 

 

 

 

 

 

 

*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소나무, 2000년)

 

 

보들레르의 시 한 편을 바라보는 번역가의 시선이 다르듯이 《악의 꽃》을 딱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렵다. 내가 보들레르를 ‘추(醜)와 악의 미학을 발견한 시인’이라고 평가해도 맞다. A처럼 시에서 기독교 정신과 유사하다고 느꼈다면 그 의견 또한 맞다. 사실 보들레르는 어떤 시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방해하는 신에 반항하고 모독하는 한편, 또 다른 시에서는 신을 찬양한다. 어느 불문학자는 보들레르의 시에서 마니교(Manichaeism)의 교리를 읽어내기도 한다.[1] 시집 전체의 일부를 말해도 좋으나, 그 일부를 전체로 말하는 것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아집에 가깝다. 자신의 의견만 믿고, 상대방의 의견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이다. 《악의 꽃》 한 번 제대로 읽었다고해서 그 시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고 볼 수 없다. 시를 읽을 때마다 '악의 꽃'에서 나는 향기가 달라진다.

 

 

[1] 김기봉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보들레르의 명증(明證)’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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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2-10 0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면 cyrus님 같은 상황은 늘 마주치게 되는 거 같습니다.
해석의 옹호보다 해석의 다양성을 위해 노력하시는 것에 늘 응원보내요 :)

cyrus 2017-02-10 10:45   좋아요 1 | URL
해석의 옹호에 매달리면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똑똑하다고 해도 독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경계하려고 합니다. ^^

마립간 2017-02-10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읽어지만 이해를 못해서,) 가지고 있지만,

cyrus 님이 제시한 반례로서 문학을 확장한 예술의 경우로 뭉크와 같은 악마파 그림이 어떠하였을까 생각합니다.

cyrus 2017-02-10 10:48   좋아요 0 | URL
보들레르와 뭉크는 상징주의에 분류됩니다. 여기에 마립간님이 말씀하신 악마파, 혹은 악마주의로 상징주의 문학 · 예술에 포함됩니다. ‘예술 작품에 드러난 악’에 대해서 논한다면, 뭉크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

잠자냥 2017-02-10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쪼잔함이라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싶은 지적 호기심 아닐까요? ㅎㅎ

cyrus 2017-02-10 10:50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번역본 한 권만 다 읽으면 그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착각했어요. 여러 권의 번역본을 읽어보니까 예전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
 

 

 

 

 

 

 

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하여 쓰는 편이 나은 법이라오.

웃음이 인간의 본성일지니.

 

(프랑수아 라블레, 유석호 역 《가르강튀아》 14쪽)

 

 

 

 

 

 

 

 

 

 

 

 

 

 

 

 

 

 

 

 

중세 유럽은 극단의 시대였다. 중세인들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모든 인간의 영광과 찬란함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 즉 이름뿐이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저 날카로운 전율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슬픈 생각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따라서 그 시대는 가시적 공포의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에서 부패하는 시체의 이미지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사라져 버리고 없음’이라는 관념을 좀 더 짧은 시간의 틀 속에서 응축시켜 놓은 것이다.

 

(《중세의 가을》 269쪽)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전도서 문구처럼, 기독교의 교훈적인 성격과 연관된 바니타스(vanitas)의 기원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말 죽음과 관련된 마카브르(macabre) 도상에서 세밀하게 묘사된 시체를 대신해서 해골이 죽음의 역할을 맡게 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여 부나 명예의 덧없음, 쾌락의 무의미함을 상징하는 소재들을 다루었던 바니타스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위징아는 중세의 분위기가 잿빛 구름이 드리워진 고즈넉한 가을 풍경과 같다고 이해했다. 즉, 중세는 시들고 쇠퇴해간 가을이었다. 하지만 중세인들에게도 강렬한 열망을 품은 채 뜨겁게 살아온 ‘여름’ 같은 시절이 있었다.

 

 

중세의 생활은 너무나 강렬하고 다채로웠기 때문에 피 냄새와 장미 냄새의 뒤섞임을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은 어린애의 머리를 가진 거인 같았다. 모든 세속적 즐거움에 대한 절대적 부정과, 부유함과 즐거움에 대한 광적인 열망, 이런 두 양극단 사이에서 그들은 살았다. 중세인의 삶 중에서 다른 한 극단을 차지하는 밝은 반쪽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 세대의 웃음은 죽어 버렸고, 중세인의 걱정 없는 즐거움과 생애에 대한 자연스러운 열망은 민요와 소극에서만 살아 있는 듯하다. (《중세의 가을》 73쪽)

 

 

중세의 밝은 반쪽이 완전히 잊히는 바람에 후대의 역사가들은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이제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만 정의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하위징아는 중세인들이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선택한 세 가지 길을 정리했다. 세계를 온몸으로 저항하며 거부하든가, 모순의 세계를 변혁하든가, 아니면 공상의 세계를 꿈꾸는 길. 15세기 프랑스의 민중들은 즐거움에 대한 광적인 열망을 표현하려고 ‘첫 번째 길’ 또는 ‘세 번째 길’을 택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어린애의 머리를 가진 거인’이다. 두 거인의 이야기는 원래 프랑스의 민담에서 유래한다. 두 거인은 중세적 금욕과 규율마저 씹어 삼킬 정도로 쾌락을 즐긴다. 가혹한 현실에 진저리를 친 민중들에게는 두 거인의 걱정 없는 즐거움이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라블레의 문학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바흐친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아카넷, 2001)는 단언 최고다. 그런데 이 책은 절판되어 도서관에서 구해야 한다.

 

다행히 라블레 전공자인 유석호 교수의 《라블레, 새로운 글쓰기의 모험》(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이 나옴으로써 그동안 주류 고전문학으로부터 멀어진 라블레 문학이 재조명받을 기회가 마련되었다. 이 책에 당연히 바흐친의 라블레 연구서의 주요 내용도 나온다. 600쪽 넘는 바흐친의 책이 부담스러우면 유석호 교수의 책을 참고해도 된다. 그런데 이 책에 오자가 눈에 띈다. 책 199쪽 주석에 ‘디드로(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소설가)’를 ‘디디로’로 표기되었다.

 

 

미하일 바흐친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를 중세 민중문화의 실체를 증명해줄 수 있는 문헌으로 봤다. 라블레의 소설은 음담패설, 욕설 등 상스러운 말들로 가득하다. 이에 대해 바흐친은 천박한 표현들이 민중이 자주 모이는 장터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석했다. 장터에는 민중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 즉 ‘카니발(Carnival)’이 펼쳐진다. 카니발은 왕족과 귀족이 참여하는 공식적 축제와 거리가 멀다. 계급 초월, 해학과 풍자, 질서를 파괴하는 카니발 속에 억압된 욕구와 권력에 대한 저항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카니발은 중세의 비공식적 민중 문화이며 장터는 서민들만의 놀이터라 할 수 있는 특별한 광장이다. 바흐친은 라블레의 소설이야말로 ‘광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241쪽)

 

인류 전체의 문화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원초적 감정과 욕망이 축제를 통해 표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데서 유래한 축제 내내 음주 가무를 즐겼고,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콩 임금의 축연’이 전통적인 민중 축제로 자리 잡았다. (‘콩 임금의 축연’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미야시타 기쿠로의 《맛있는 그림》을 참고할 것)

 

 

 

 

 

 

 

 

 

 

 

 

 

 

 

 

 

그러나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서민들은 카니발을 정기적으로 열기가 불가능했다. 카니발의 의미가 역사의 기억 속에 희미해지기 시작한 가장 큰 원인이 최악의 기근으로 인해 생긴 식량 부족일 수도 있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서민들은 술과 음식이 가득한 정물화나 축제를 묘사한 그림을 걸어 놓고, 굶주림에 대한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서민들이 풍족한 공상의 세계를 꿈꾸고 있을 때, 부유한 왕족과 귀족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하위징아는 중세 궁정의 화려한 식탁 정경을 ‘라블레적 풍성함’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했다.

 

 

궁정의 위계적 배열은 식사와 주방과 관련해서는 라블레적 풍성함을 갖추었다. 대담공 샤를의 궁정 식탁은 빵 담당, 고기 담당, 와인 담당, 요리장이 늘 대기했고 그들의 서비스는 거의 의전 절차 비슷한 위엄으로 규제했다. 식사 과정은 장엄하고 엄숙한 연극과 비슷했다. 식사의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통제되었고 엄격한 격식에 맞추어 시중을 받았다. (《중세의 가을》 101쪽)

 

 

하위징아는 대식가의 면모를 드러낸 두 거인의 식탐이 생각나서 궁정 식탁을 ‘라블레적 풍성함’이라고 표현한 것 같은데, 바흐친의 관점에서 본다면 틀린 내용이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배고픈 민중을 대변하는 영웅이다. 라블레는 위계질서를 무시하는 두 거인을 등장시켜 민중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을 썼다. 그러므로 라블레는 ‘민중 친화적’ 문학을 상징하는 작가다. 엄격한 격식이 지배하는 궁정 문화와 라블레는 상극이다.

 

민중 축제는 권력의 억압에 밀려 사라졌고, ‘축제’의 의미가 그 권력의 축인 기득권층이 즐기는 사치스러운 문화 유형으로 변질하였다. 이는 종교가 라블레의 소설을 금서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혹자는 ‘광화문 광장의 촛불 집회’가 ‘축제 같은 시위’로 비치는 것을 꺼린다. 나도 촛불 집회가 ‘평화’라는 단순한 프레임 속에서만 갇혀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축제의 원래 의미를 탐색해보면 촛불 집회를 ‘축제 같은 시위’로 보는 것도 옳다고 생각한다.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촛불을 밝힘으로써 지금까지 X 같은 현실에 짓눌린 압박에 해방감을 느끼고, 썩어빠진 권력이 만든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마음껏 표출하고 있다. 정말 제대로 된 ‘축제 같은 시위’가 되려면 가수들의 공연 시간과 집회를 주도하는 주요 시민단체들의 연설 시간을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다. 시민은 광장을 지배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중이 즐기는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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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1-25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말씀따라 내일 즐기려면 일찍 자야겠네요 ㅋㅋ 편한 밤 되시고 원기를 모으시길.

cyrus 2016-11-25 22:17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울이 대구보다 많이 추울텐데 내일 그곳에 집회 인원이 많이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2016-11-26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6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6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6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6-11-29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

서평도서로 받아 두기만 하고 여적도 못 읽고
있는 책이네요. 왜 이렇게 죄책감이 드는지 -
카오

cyrus 2016-11-29 15:07   좋아요 0 | URL
<중세의 가을>에 꼭 알아두어야 할 중세 시대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은 거의 다 있습니다. 중세 역사를 다룬 고전을 천천히 읽고 나서 에코의 <중세> 시리즈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