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일글책> 평일 독서 모임 선정 도서는 정지돈의 소설집 인생 연구. 대구 책방 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아주 따끈따끈한) 정지돈 작가의 신작 소설을 읽고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유일한 책방이 <일글책>이다. 나는 금요일 반을 신청했고, 9일과 23일 금요일 두 번 참석한다. 인생 연구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모임이 두 번 진행되므로 소설을 네 편씩 나누어 읽는다.
















[대구 서점 <일글책> 6월 독서 모임 선정 도서]

* 정지돈 인생 연구(창비, 2023)




어제 토요일 오전에 진행된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이 끝난 후에 인생 연구를 읽기 시작했다. 인생 연구의 첫 번째 소설은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 첫 소설 중반을 읽으면서부터 당혹감이 엄습했다. 도대체 작가가 평범하지 않은 인물의 특이한 삶을 묘사하면서 독자인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너도 쉽지 않네.” 안젤라가 말했다.


(정지돈,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 중에서, 17쪽)



정 작가의 글도 쉽지 않네.’ 정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은 나는 말했다세 번째 소설 B! D! F! W!는 처음부터 끝까지 난해의 극치를 보여준다정 작가의 글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B! D! F! W!를 읽는 순간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씨발, 이게 뭐야.

 

(정지돈, , 슈프림중에서, 144)



나뿐만 아니라 인생 연구독서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다른 분들도 B! D! F! W!를 읽는 내내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일글책> 책방지기는 인생 연구독서 모임 발제를 어떻게 내면 좋을지 엄청 고민했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그런데 다음 소설을 계속 읽어나갈수록 이상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해석하고 생각하기를 멈춘 채 그냥 쭉 읽었다어쩌면 정 작가의 소설에 익숙해지려면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스크린은...의 주인공은 안젤라. 소설 속 화자는 안젤라의 전 연인이다. 그는 안젤라의 괴팍한 행동과 자유분방한 연애 편력(양성애)을 관찰하듯이 서술한다. 그리고 안젤라의 전 남자친구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성적 도착증(신체 절단 애호증)도 언급한다안젤라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다. 안젤라는 퀴어(queer)’하다현재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퀴어는 원래 기이한’, ‘이상한을 뜻하는 단어다정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독자는 인생 연구를 읽으면서 익숙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비인간적으로 생각되는존재를 만난다.

















* B. 프레시아도 대항성 선언(포이에시스, 2022)




안젤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자가 B. 프레시아도(Paul B. Preciado)라고 말한다(우리의 스크린은..., 30). B. 프레시아도는 스페인 출신의 철학자로 퀴어 FTM 트랜스젠더(여성남성으로 성전환)원래 이름은 베아트리즈 프레시아도였다. 남성 호르몬 요법을 통한 성전환 이후로 폴 베아트리즈 프레시아도로 개명했다작년에 프레시아도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대항성 선언(Manifiesto contrasexual)이 번역 출간되었다원서가 2002년에 출간되었으니 20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여전히 성적으로 보수적이고 성소수자들이 살기에 척박한’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 [절판]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이매진, 2015)

*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




잭 핼버스탬(Jack Halberstam, 그도 FTM 트랜스젠더다)이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처럼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며 퀴어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철학자들처럼 폴 B. 프레시아도는 이분법적 생물학적 성별(남성/여성)과 이성애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그생물학적 남성중심주의의 상징이자 남성의 성적 기관인 음경과 여기에 대조되거나(또는 대항하거나) 음경에 비해 평가절하된 여성의 성적 기관 질이 중심이 되는 섹슈얼리티 모두 거부한다. 그는 성별 이분법을 거부하고, N개의 젠더 모두가 선호하는 섹슈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해 항문을 주목한다남자도, 여자도,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닌, 그야말로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sex)와 사회적으로 정의된 젠더조차도 의미 없는 대항성의 성 기관은 항문이다. 섹스(생식 행위)의 대안은 항문에 삽입하는 자위 기구 딜도대항성은 늘 변하며 유동적이다. 그래서 자유롭다.


B. 프레시아도를 좋아하는 안젤라는 대항성으로 살아가고 싶은 존재. 화자는 안젤라를 그녀라고 지칭하지만, 안젤라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다. 화자는 안젤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우리의 스크린은..., 14).’ 

















* 김멜라 제 꿈 꾸세요(문학동네, 2022)


* 전하영, 김멜라, 김지영, 김혜진, 박서련, 서이제, 한정현 2021 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1)


* 사드, 성귀수 옮김 사드 전집 2: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워크룸프레스, 2018)

 

* [절판] 사드 소돔 120(고도, 2000)




B. 프레시아도는 대항성 선언딜도 그 자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에 영감을 준 작가가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이 적대하는 사드(Sade)실제로 사드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딜도로 성욕을 충족했고, 감옥에서 쓴 소설 소돔 120 원고를 지키기 위해 딜도 안에 숨겼다고 한다여담으로, 김멜라의 소설집 제 꿈 꾸세요에 수록된 나뭇잎에 마르고(12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대니라는 이름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학교 수업에 가기 전에 소돔 120을 세 페이지씩 읽는다(제 꿈 꾸세요, 71).


이 글이 거의 완성되고 있을 때, 갑자기 인생 연구독서 모임을 위한 발제가 될만한 질문이 생각났다. 당신 곁에 있는 가족, 친구, 친한 이웃이 익숙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비인간적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그다음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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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용 씨는 서울에 사는 친한 애서가다. 작년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된 분이다. 그분은 본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구매한 책들을 찍은 사진과 간단한 책 소개 글, 서평을 올린다. 웬만하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을 팔로우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책과 관련한 서 씨의 글 몇 편 읽고 난 후 이분의 독서 편력에 몹시 흥미를 느꼈고 서 씨의 팔로우 신청을 수락했다. 나는 한 주에 많아야 책을 10권을 사는데, 서 씨의 책 구매량이 나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 씨의 구매한 책 중에 내가 산 책이 한두 권 포함되어 있었다.

 

서 씨의 책 사랑이 얼마나 심각한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린 6월 4일 토요일에 만나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솔직히 서 씨를 만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첫 만남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제도서전이 열리는 코엑스 근처에 만났다. 만나자마자 책과 관련된 대화가 시작되었다.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본명은 최해성이다나는 재미 삼아 서 씨에게 서울의 최해성(서해성)’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반대로 내 별명은 대구의 서한용(대한용)’이 되었다. 서해성, 대한용. 별명 한번 참 찰지구먼. 서해성과 대한용이 장거리 연애, 아니 장거리 우정이 맺어진 지 딱 1년이 지났다. 마침 서해성의 생일이 61일이었다. 그래서 그분의 생일을 축하할 겸 1주년 우정을 기념하고 싶어서 알라딘 기프티콘으로 책 선물을 보냈다. 선물할 책을 고르기 전에 우선 내 책을 먼저 주문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은 소중하니까.

 

예전에 책 좋아하는 분들한테 책 한 권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서해성을 위한 책 선물은 특별하다. 해성이 해성한테 책 선물을 주는 건데 대충 막 고르면 안 되지. 나는 서해성 한 사람을 위한 북 큐레이션을 하는 마음으로 세 권의 책을 골랐다.
















* 이레네 바예호, 이경민 옮김 갈대 속의 영원: 저항하고 꿈꾸고 연결하는 발명품, 책의 모험(반니, 2023)




서해성이 구매한 수많은 책 중에 내가 샀거나 읽은 책은 기억하고 있다. 그분은 갈대 속의 영원을 구매했는데, 올해 내가 사서 읽은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다. 그래서 갈대 속의 영원과 비슷한 느낌이 날법한 책을 고르기로 했다. 그리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간 도서는 고르지 않았다. 완독하고 서평으로 주요 내용을 요약한 책을 골랐다. 그래서 책 선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 마리엘라 구쪼니, 김한영 옮김 빈센트가 사랑한 책(이유출판, 2020)

 



애서가 지인에게 책 선물을 줄 때 반드시 고르는 책이 바로 빈센트가 사랑한 책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반 고흐(그다음으로 좋아하는 화가는 르네 마그리트). 사실 반 고흐가 생전에 책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독서 욕구가 얼마나 컸던 사람인지 아는 이가 드물다. 책과 독서에 대한 열정은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게는 책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열정이 있다. 끊임없이 깨우치고,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있지. 마치 하루하루 빵을 먹어야만 하는 것과 같아.’ (6)

 


반 고흐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가의 역할은 진실하고 정직하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진실하고 정직하게 서평을 쓰는 것이 내가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이유. 빈센트가 사랑한 책해성이 사랑한 책이다.

















* 제이미 캄플린, 마리아 라나우로 공저, 이연식 옮김 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 예술에서 일상으로, 그리고 위안이 된 책들(시공아트, 2019)

 



빈센트가 사랑한 책과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반 고흐와 같이 책을 엄청나게 좋아했던 예술가들은 책 사랑을 숨기지 않았고, 예술 작품으로 표현했다. 서해성이 구매한 책 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분이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예술 관련 책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글보다는 도판이 많이 실려 있는 예술 분야의 책 두 권을 선택했다.

















* 마틴 푸크너, 최파일 옮김 글이 만든 세계: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까치, 2019)



 

말하기와 쓰기가 하나가 되면 한 편의 텍스트(), 또는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다. 더 나아가 책이 읽히는 순간 인간과 세계가 만들어진다. 글이 만든 세계16편의 유명한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보급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텍스트들이 어떻게 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갈대 속의 영원과 잘 어울려서 골랐는데, 서해성이 이미 산 책이었다. 역시 서해성답다. 두 사람의 독서 편력이 거의 비슷하면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이럴 줄 알고 앞에 언급한 책 두 권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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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6-08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그러니까 서한용 씨가 너한테 먼저 팔로우 하자고 했단 말이지? 대단한데? 그러니 나는 얼마나 대단하냐 이렇게 대단하신 분과 팔로우를 하고 있으니. ㅋㅋㅋ
앞으로 잘 알아 모시겠슴다. 서해성 씨!^^
서해성 씨와 대한용 씨의 우정도 더욱 짙어지길!

cyrus 2023-06-12 06:40   좋아요 1 | URL
독서 취향과 관심사가 거의 비슷한 분 만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한용 씨가 저보다 대단한 점은 매일 아침 운동하는 루틴을 지키고요, 독서뿐만 아니라 취미가 많은 분이에요. 저는 여전히 내향적 성격이라서 책 읽는 일상이 편하고 익숙해요. ^^;;

새파랑 2023-06-09 0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이 극찬하는 책이라니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서울과 대구의 책쟁이의 만남이라니 멋지십니다~!!

cyrus 2023-06-12 06:41   좋아요 1 | URL
제가 소개한 책들이 ‘책에 관한 책’이라서 오히려 책 속에 언급된 책들까지도 읽고 싶어질 수 있어요. 조심하세요. 책임 못집니다! ^^;;

꼬마요정 2023-06-09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세요!! 두 분 우정도, 책을 사랑하는 마음도, 모두 다요^^ 두 분 우정 늘 책과 함께 깊어지길 바랍니다. 전 옆에서 이렇게 cyrus 님이 추천하는 책 읽을게요. 아, 다는 못 읽을 거 같아요. 어려워요 ㅎㅎㅎ

cyrus 2023-06-12 06:42   좋아요 1 | URL
제가 추천한 책보다는 꼬마요정님이 읽고 싶은 책을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

감은빛 2023-06-09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명이 무척 인상적이네요. 서로의 본명이 별명 되다니. 이렇게 마음이 맞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두 분의 우정을 응원합니다.

cyrus 2023-06-12 06:45   좋아요 0 | URL
한용 님 성격이 쾌활하고 낙천적이라서 같이 있으면 제가 좋은 기운을 많이 얻고 갑니다. 이런 분들을 자주 만나면 내항적 성격인 저도 알게 모르게 외향적으로 행동하게 되더라고요. ^^
 
나노화학 - 10억 분의 1미터에서 찾은 현대 과학의 신세계
장홍제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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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어린 시절에 반복하다시피 읽은 책이 교양 과학 만화책 시리즈. 그 시리즈 첫 번째 책의 주제가 인체였다. 그런데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인체의 신비였던가? 출판사 이름은 기억난다. 삼성당이다. 무자비하게 흘러간 시간이 책 제목을 지웠다. 그 책에 임시로 제목을 붙인다면 인체 탐험이다. 그렇게 제목을 정한 이유는 SF에 나올 법한 줄거리 때문이다. <인체 탐험>의 등장인물은 흰 수염의 의학 박사와 그를 따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다. 의학 박사는 발명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다. 비행기와 흡사한 잠수함을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버튼 하나 누르면 잠수함 크기를 줄일 수 있다. 박사와 아이들은 확 줄어든 잠수함을 타고 어떤 남자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세 사람이 탄 잠수함은 남자 몸속 구석구석 누빈다. 남자는 자신의 몸속에 아주 작은 잠수함이 들어갔는지 모른 채 살아있는 교본이 된다. 박사는 몸속에 거주하는 세포와 세균이 하는 일과 몸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리 현상의 원인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준다. 잠수함이 남자의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장면이 가관인데, 남자가 재채기하는 순간 콧구멍을 통해 탈출한다. 만화가는 이 황당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는지 콧구멍으로 빠져나온 잠수함을 콧물과 코딱지가 잔뜩 묻혀 있는 상태로 묘사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박사와 아이들은 모험심과 앎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그들은 다시 잠수함을 타고 그 남자의 몸속으로 들어가 과학 수업을 재개한다. 

 

지금까지 내가 요약한 <인체 탐험> 줄거리는 100% 정확하지 않다. <인체 탐험> 줄거리는 나의 뇌가 조그마한 기억 조각들을 열심히 주워 모아 제멋대로 편집하고 각색한 것이다. 사람이 잠수함을 타고 몸 내부 곳곳을 여행하는 설정은 현실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이상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아져 버린 잠수함을 나노 기술로 만들 수 있다나노(nano)’는 소인(小人)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만화에 묘사된 소인들이 탄 잠수함은 인간의 몸에 들어가 병균을 퇴치하는 초미세 의료용 나노로봇으로 실현되었다


나노는 말 그대로 아주 작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노 세계는 아주 작은 세계를 의미하게 된다. 아주 작은 세계를 이해하려면 제일 먼저 원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나노 기술은 최소 1mm부터 최대 1,000nm(나노미터) 크기의 원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일어난 화학 반응을 응용하는 기술이다화학 관련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저자가 쓴 나노 화학나노 기술의 현주소와 미래를 과학 지식과 곁들어서 풀어 쓴 책이다책 제목에 화학이 들어가 있지만, 나노 기술의 학문적 배경에 물리학도 포함된다원자나 분자 같은 미시 물질을 다루는 나노 기술에 양자역학이 적용된다원자는 모든 물질의 기본단위다. 물리학과 화학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실체를 밝혀내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학문이다.


우리는 나노 세계를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체감할 수 없다. 그래서 아주 작은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우리 삶에 얼마나 이로운지 알지 못한다나노 세계의 물질, 즉 나노입자는 작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나노입자 크기가 작아지면 물질의 특성 자체가 달라지고, 같은 나노입자들끼리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화학 반응 속도가 빨라진다나노 물질들끼리 조합하면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을 응용한 나노 기술은 실생활에 유용한 생성물을 효율적으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노 기술의 실현 전망이 그렇게 밝은 것만은 아니다. 현실적인 과제들이 산적하다. 나노 물질의 잠재적인 독성을 검증해야 한다. 그래핀(graphene)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나노 물질이다. ‘꿈의 신소재라는 수식어가 붙여질 정도로 디스플레이 · 반도체 · 태양전지 · 자동차 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언론의 장밋빛 전망과 달리 그래핀이 완전한 상용화가 이루어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린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는 생소하고 어려운 과학 용어나 이론을 과학 비전공자들을 위해 좀 더 쉽게 설명하는 전문가다. 나노 화학의 저자는 화학 전문 커뮤니케이터다. 저자는 자신의 본업을 살려 자신만의 방식으로 과학 상식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특히 화학 반응의 경로와 촉매를 등산으로 비유해서 설명한 대목(280~282)은 압권이다.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은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반드시 있어야 할 자질은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다. 책에 부연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 내용들이 있다. 책 내용에 주석으로 단 내 의견 역시 사실과 다르거나 틀릴 수 있다.



* 24~25

 

 오늘날 모든 전자기기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전기(electricity)는 전자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지금은 화석연료나 태양광, 지열, 조력 등 온갖 원천에서 전기를 얻으려고 발전이 이루어지지만, 전기의 확인과 관찰은 폭풍우 속에서 하늘에 연을 띄워 벼락에서 전기를 포집했다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에 의해 처음 이뤄진다. [1]

 


[1] 프랭클린보다 훨씬 먼저 전기의 성질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과학자는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 그는 자석을 이용한 실험을 진행하면서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1600년에 발표된 길버트의 저서 자석에 관하여에서 호박(琥珀)으로 마찰을 일으켜서 생기는 정전기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길버트는 정전기가 호박에서 나온 힘이라 생각했고, 호박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electricity’로 명명했다. 자석에 관하여자석 이야기(서해문집, 1995년)’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절판되었다.




* 163


 현재 통용되는 원자의 모형을 만들어내고 양자역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에르빈 슈뢰딩거[2][생략]

 


[2] 양자역학을 언급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사실 닐스 보어(Niels Bohr)코펜하겐 해석에서 드러난 양자역학의 허점을 비판하기 위해 슈뢰딩거가 고안한 사고실험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다르게 죽어 있고 동시에 살아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양자역학에서만 가능한 중첩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사고실험으로 알려지게 된다고양이 한 마리가 유명해지는 바람에 생전에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슈뢰딩거는 오늘날 양자역학 발전에 기여한 과학자로도 평가받는다. 슈뢰딩거 본인은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겠지만.




* 181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남아 있으나[3]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냈던 프랜시스 크릭은 사실 이보다 더 거대한 발견을 이룩했다.

 


[3] 노벨상 수상과 관련한 약간의 논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논란이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X선을 이용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의 연구 자료를 참고한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 구조 연구 결과를 정리한 논문을 먼저 발표하는 바람에 그녀의 업적이 묻혀버렸다. 브렌다 매독스의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양문, 2004, 절판) 하워드 마르켈의 생명의 비밀: 차별과 욕망에 파묻힌 진실(늘봄, 2023)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생애와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로서의 업적을 소개한 책이다.




* 190

 

 영화 속 장면처럼 뜨거운 열을 폭발시켜 모든 것을 태우는 광열 치료나 피라냐 떼 같은 라디칼을 풀어 주위의 모든 걸 먹어버리도록 만드는[4] 광역학 치료가 탄생했다.



[4] 공포영화에 묘사된 피라냐는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공격하고, 날카로운 이빨로 뜯어먹는 난폭한 물고기다. 하지만 피라냐의 공격성과 먹성이 사실과 다르게 과장되어 있다. 피라냐는 죽은 물고기의 살도 먹는다. 피라냐 떼에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다. (참고문헌: 매트 브라운, 개가 보는 세상이 흑백이라고?: 동물 상식 바로잡기, 동녘, 2023, 피라냐가 사람을 물어뜯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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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텔레스크린이라는 영상 장치가 나온다. 오세아니아의 지배자 빅 브라더(Big Brother)는 텔레스크린으로 국민을 감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텔레스크린은 국민에게 영상과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선동 도구이기도 하다. 소설 초반부에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Winston Smith)는 고문당하는 여성이 나오는 텔레스크린 화면을 상상한다.


















* 조지 오웰, 한기찬 옮김 1984(소담출판사, 2021)



 그는 그녀를 고무 봉으로 죽도록 매질할 것이다. 그녀를 발가벗겨 기둥에 묶어 놓고 성 세바스찬[비밀리에 기독교를 믿다가 화살을 맞고 순교한 로마의 장교-역주]을 처형할 때처럼 화살을 있는 대로 쏠 것이다


(1984중에서, 26~27)



1984역자는 성 세바스찬(St. Sebastian, 라틴어: 세바스티아누스, 이탈리아어: 세바스티아노)화살을 맞고 순교했다는 내용의 주석을 달았다세바스찬이 화살을 맞은 건 사실이지만, 순교하지는 않았다.


세바스찬은 갈리아 출신의 로마 군인이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의 친위 대원이 되었다. 황제는 이교도 금지 정책으로 기독교 박해를 단행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세바스찬은 황제 몰래 감옥에 갇힌 기독교인들을 풀어주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황제는 기독교인 세바스찬에게 활로 쏘아 죽이는 사형을 명했다. 세바스찬은 기둥에 묶인 채 군인들이 쏜 수십 발의 화살을 맞았다. 화살들이 그의 몸을 관통했지만, 세바스찬은 죽지 않았다. 이레네(Irene)라는 과부가 치명상을 입은 채 버려진 세바스찬을 치료해주었다. 회복된 세바스찬은 황제를 직접 만나 기독교 박해 정책을 비판한다. 결국 세바스찬은 군인들이 휘두른 몽둥이(곤봉)에 맞아 순교했다.
















* 보라기네의 야코부스 황금 전설(크리스천 다이제스트, 2007)

 

* [품절] 로사 조르지 성인 이야기, 명화를 만나다(예경, 2006)




세바스찬의 처형 장면은 르네상스 화가들이 선호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 성 세바스찬의 일대기를 언급한 황금 전설에 따르면, 화살로 뒤덮은 세바스찬의 모습을 고슴도치로 비유한다. 화가들은 남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온몸에 화살을 맞은 세바스찬을 반나체 모습으로 그렸다. 이러한 그림들이 많아서 세바스찬이 화살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오인하기 쉽다.


황금 전설은 유럽 중세에 전해 내려온 가톨릭 성인들의 전설을 집대성한 문헌이다. 이 책의 유일한 번역본은 크리스천 다이제스트라는 출판사가 펴냈다. 크리스천 다이제스트는 현대지성출판사의 전신이며 현재 ‘CH북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CH 북스는 현재 현대지성 출판사의 독립 브랜드(임프린트)로 운영 중이다CH북스는 기독교(개신교) 서적을 펴내는 출판사인데, 가톨릭 교리가 반영된 황금 전설을 펴낸 점이 이채롭다. 종교 개혁 이후 기독교인들은 구교가 된 가톨릭교 성인들의 기적을 미신으로 여겨 비판했다. 황금 전설의 기독교인 역자는 황금 전설에 나온 모든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명시한다. 그렇지만 중세 미술과 신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준 황금 전설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다.

 

황금 전설번역본에는 세바스찬이 곤장에 맞아 순교했다고 나와 있다(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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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6-0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 두껍네. 읽을 것 같지않다.ㅠ

cyrus 2023-06-07 06:18   좋아요 0 | URL
네, 벽돌 책이에요.. ㅋㅋㅋㅋ

ozzy2012 2023-06-0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미디어가 텔레스크린이네요...

cyrus 2023-06-07 06: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진실을 말하려는 훌륭한 언론인도 있지만, 대부분 언론인은 사명감 없이 일하고 있어요.
 




절판된 책이 다시 나왔다. 책 제목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Grotesque)의 정의는 다양하다. 우리말로 쉽게 표현하면 괴상한’, ‘끔찍한’, ‘불쾌한’, ‘기묘한’, ‘으스스한 등이 있다. 흔히 그로테스크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정의는 괴상한이다. 그렇지만 시대와 당대에 유행한 문화 양식에 따라 그로테스크의 정의가 조금씩 달라졌고, 여기에 새로운 의미들이 부여되었다. 미술 및 문학 작품 속에 반영된 그로테스크의 풍부한 정의를 분석한 책이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 볼프강 카이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아모르문디, 2023)

 



이 책의 저자인 독일의 문학비평가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yser)는 그로테스크의 핵심을 생경해진 세계라고 주장한다. 생경하다,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라서 생소하다. 국어사전에 기재된 생경하다의 뜻은 다음과 같다. ‘글의 표현이 세련되지 못하고 어설프다’,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다.’ 즉 카이저가 말한 생경해진 세계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한 세계. 불합리하고, 비일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

 

*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의 작중 화자인 아드소는 그로테스크에 매료된 인물이다. 그는 젊은 수련사 시절에 성서를 처음 읽고 난 후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아드소는 <요한 묵시록> 119(‘지금 본 것을 기록하여라.’)을 떠올리면서 교회의 벽과 기둥에 있는 장식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한다. 아드소는 무엇을 보았을까? 지옥에 나타날 법한 기이한 형상의 괴물과 악마를 묘사한 장식인데, 여기에 탄복한 아드소는 장식된 그로테스크한 존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한다(장미의 이름상권, 16시과). 



 악마의 우화집에 등장하는 모든 짐승들이 추기경 회의를 위해 모인 듯, 옥좌를 향해 영광의 노래(자신들에게는 패배를 뜻하는)를 부르며 옥좌를 보호하고 있다. 판 무리, 양성 동물들, 손가락이 여섯인 축생들, 세이네레스 무리, 켄타우로스 무리, 고르곤 세 자매, 하르피아이, 인쿠부스, 용어(龍漁) 무리, 미노타우로스, 스라소니, 표범, 키마이라, 콧구멍으로 불을 뿜는 카이노팔레스, 악어, 꼬리가 여럿이고 몸에 털이 난 도마뱀 무리, 도롱뇽, 뿔 달린 살모사, 거북이, 구렁이, 등에 이빨이 나 있는 양두수(兩頭數), 하이에나, 수달, 까마귀, 톱니 뿔이 달린 물 파리, 개구리, 그리폰, 원숭이, 루크로타, 만티코라, 독수리, 파란드로스, 족제비, , 후투티, 올빼미, 바실리스크, 최면충(催眠蟲), 긴귀곰, 지네, 전갈, 도마뱀, 고래, 두더지, 올빼미도마뱀, 쌍동(雙胴) 오징어, 디프사스, 녹색 도마뱀, 방어, 문어, 곰치, 바다거북. 이 모든 동물의 무리가 한 동아리가 되어 득실거리고 있었다.



장미의 이름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난 뒤에 에코는 그로테스크 백과사전이라 불릴만한 책을 썼다. 그 책이 바로 추의 역사. 에코는 이 책에서 아드소의 정신을 마비시킨 그로테스크 미학의 특징을 시대별로 분류했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로테스크 미학에 부합되는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들을 모조리 소개하는 등 애서가다운 면모까지 보여준다. 도판이 많이 실려 있지 않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를 먼저 읽은 다음에 추의 역사를 읽기를 권한다. , 고어 장르를 좋아하지 않거나 잔인하거나 징그러운 것을 한 번 보면 시각적 여운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독자는 추의 역사를 펼치지 마시라. 깜놀 주의!

 




















* 이미상 외 2023 14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문학동네, 2023)




2023 14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읽은 독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고, 대상작보다 더 많이 거론한 소설이라면 아마도 현호정<연필 샌드위치>일 것이다. <연필 샌드위치> 초반부에 묘사된 연필로 샌드위치를 만드는꿈속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이다. 꿈속 세계는 생경하다. 왜 꿈에서 연필로 샌드위치를 만들려고 하는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자. 여기에 의미를 찾으려고 하거나 억지로 꿈의 상징을 해석하려는 순간 그로테스크한 매력이 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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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0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의 <추의 역사>는
오래 전에 사두기만 하고
역시 쓰담쓰담만 하네요.

<장미의 이름>은 정말
읽을수록 진국이라는.

cyrus 2023-06-06 09:22   좋아요 1 | URL
요즘 <장미의 이름>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가톨릭 성인과 신학자들에 관심이 생겼어요. 이들 중 몇 사람은 중세 철학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추의 역사>도 언젠가는 절판될 수 있으니 소장하고 있으세요. ^^

삽하나 2023-07-09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 특집 도서로 딱이네요!! >ㅅ < 잘 읽었어요 :) 어서 장바구니에 주섬주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