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쿠바드 증후군(Couvade syndrome)을 알고 싶어서 도서관 몇 군데 들락날락했다. 출산과 육아 관련 책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그중 한 권이 출산, 그 놀라운 역사이 책은 절판되었다. 진작 이 책을 알았으면 미리 샀을 텐데.
















* [절판] 티나 캐시디 출산, 그 놀라운 역사(후마니타스, 2015)




이 책의 저자는 기자다. 그녀는 처음 임신했을 때 자연 출산을 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왕절개를 하게 되었고, 이때 경험을 토대로 출산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책의 번역에 참여한 역자가 총 다섯 명이다. 이들은 2002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보건정책 관리 전공 입학 동기다. 책이 출간된 당시(2015)에 다섯 명의 역자 모두 보건정책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출산, 그 놀라운 역사는 주제와 내용 면에서는 좋은 책이다. 하지만 책 곳곳에 잘못 알려진 상식과 오해의 여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이 있다저자는 같이 사는 여성들의 월경 주기가 비슷해지는 현상인 생리 동기화를 언급했다



 자매, 수녀, 친한 동료처럼 매일매일을 함께하는 여성들이 매달 거의 비슷한 시기에 월경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379)



하지만 오래전부터 생리 동기화 연구 방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생리 동기화를 우연의 일치로 결론 내린 연구 결과들이 나왔다.


저자는 정자 속에 있는 호르몬인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이 자궁경관을 열어주게 만드는(자궁 이완) 물질이라고 말한다.



 사실, 성관계가 출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도 한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정자는 자궁경관이 열리도록 도와주는 프로스타글란딘이라는 호르몬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362)



프로스타글란딘의 종류가 많다. A~H까지의 8으로 분류되며 작용도 다양하다. 특히 E, F족은 자궁을 수축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프로스타글란딘은 자궁 이완뿐만 아니라 자궁 수축도 유발한다생리 날이 가까워지면 프로스타글란딘 분비가 많아진다자궁이 수축하면 불필요한 점막과 혈액이 체외로 배출되는데 이 현상이 바로 생리다. 그렇지만 자궁 내막에 프로스타글란딘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자궁 수축이 강해져서 생리통을 유발한다


출산, 그 놀라운 역사의 저자는 성관계가 출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임신한 아내를 위해 성관계를 금해야 하는 남편으로선 임신 중 성관계의 순기능이 듣기 좋은 말일 수 있겠다하지만 전문가 한 사람의 말만 믿고 너무 뜰떠선 안 된다. 임신 중 성관계가 좋은지 나쁜지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미국의 아빠 육아 전문가 아민 A. 브롯(Armin A. Brott)임신 중 성관계를 하기 전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아민 A. 브롯제니퍼 애쉬 공저 진짜 아빠 백과사전초보 아빠를 위한 세상의 모든 지식》 (보물창고, 2018)



 파트너가 조산, 전치태반, 자궁경부무력증(자궁경부가 태아를 안에 품고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한 것) 등의 위험이나 병력이 있다면, 함께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먼저 의사와 상의하자. 유두 자극과 오르가슴은 자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약간의 수축을 유발할 수도 있다. 파트너에게 이런 증상이 있거나 조산의 위험이 있다면, 섹스할 때 콘돔을 사용하도록 하자. 물론 피임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정액에 있는 프로스타글란딘이라는 호르몬이 자궁 수축을 유발할 약간의 가능성이 있다


(진짜 아빠 백과사전》 중에서, 147쪽)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출산, 그 놀라운 역사진짜 아빠 백과사전을 동시에 만나지 않았다면 한쪽으로 쏠린 정보만 봤을 테니까비록 지금은 미혼이고 내 인생 계획에 결혼은 없지만, 임신과 출산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서 공부하려고 한다. 내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에게 잘난 척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싶지 않다. 내가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정보를 상대방에게 말했다간 그 과정에서 정보가 와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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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기숙사에서 합숙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생리(월경) 주기는 같아질까? 이 말이 사실이라면 A라는 여성이 생리를 하면 그녀와 같이 사는 A의 친구 B도 생리를 한다. 1971년 미국의 생물학자 마사 매클린톡(Martha McClintock)과 캐서린 스턴(Catherine Stern)은 학술지 <네이처>(Nature)여자들이 함께 살면 생리 주기가 비슷해진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두 학자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135명의 여학생의 생리 주기를 조사한 결과 이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생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사 매클린톡은 여성들의 생리 주기를 일치하게 만든 원인이 페로몬(pheromone)이라고 주장했다. 땀 속에 페로몬이 있는데, 이 화학 물질이 공기 중으로 퍼지면 같이 사는 여자의 코로 향한다. 코는 페로몬을 화학적 신호로 받아들인 다음, 그 신호를 해독해서 생리를 일으키는 정보를 확인한. 페로몬 속에 있는 정보를 인식한 여자의 몸은 페로몬을 발산한 여성의 생리 주기에 맞추려고 한다. 이 현상을 생리 동기화(Menstrual synchrony, 또는 월경 동기화)’라고 한다동기화(同期化)란 두 개의 개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같은 주기로 운동하는 현상이다. 생리 동기화는 발견자의 이름이 붙여진 매클린톡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복잡한 세상 명쾌한 과학(개정 증보 2, 2020, 어크로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4악장’ 편에 <박수의 물리학>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의 주제는 동기화(synchronization). 책의 저자 정재승 교수는 이 글의 초반부에 매클린톡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동기화 현상에 관해 설명한다저자의 말에 따르면 여성의 생리 주기는 일정한 주기를 가진 운동이다. 여성들의 겨드랑이에 나온 땀에 호르몬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이 생리 동기화를 일으키는 매개체다.
















* [절판] 스티븐 스트로가츠 동시성의 과학, 싱크 Sync: 혼돈스런 자연과 일상에서 어떻게 질서가 발생하는가?(김영사, 2005)




이 글에 동기화 현상을 컴퓨터로 확인한 스티븐 스트로가츠(Steven Strogatz)가 언급된다. 동시성의 과학, 싱크 Sync(Sync: the emerging science of spontaneous order, 2003)는 국내에 처음 선보인 그의 책이다. 스트로가츠는 이 책에서 우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동기화 현상을 제시하는데, 여기에 매클린톡 효과도 포함되어 있다.
















* [절판] 티나 캐시디 출산, 그 놀라운 역사(후마니타스, 2015)

 



출산 문화의 역사라는 주제를 다룬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출산, 그 놀라운 역사는 좋든 나쁘든 인류 탄생과 아주 밀접한 출산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는 쿠바드 증후군(Couvade syndrome)의 여러 가지 원인 중 하나로 친밀한 부부의 호르몬 수치 변화가 같아지는 현상을 제시한다. 그는 이 현상이 매클린톡 효과가 유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자매, 수녀, 친한 동료처럼 매일매일 함께하는 여성들이 매달 거의 비슷한 시기에 월경을 한다고 주장한다(379).


대다수 여성은 매클린톡 효과라든가 생리 동기화를 들어본 적이 없어도, 함께 생활하는 친구와 생리 주기가 비슷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신기한 경험을 잊지 못한 여성들은 매클린톡 효과를 여성의 우정과 연대감을 보여주는 생리적 징표로 여기고 싶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성차별적 관용어 여자의 적은 여자에 반박하기 위해 매클린톡 효과를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매클린톡 효과는 과학적 회의주의라는 필터를 거쳐야 하는 가설로 남아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매클린톡 효과의 인과관계를 증명할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1980년대부터 여러 과학자가 매클린톡 효과를 재현하는 실험을 수행했고, 페로몬과 생리 동기화의 연관성에 반박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매클린톡 효과를 비판하는 과학자들은 생리 동기화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마르탱 뱅클레르 나는 여자고, 이건 내 몸입니다: 여성의 몸과 건강에 관한 사소하지만 절실한 질문과 답변(교양인, 2022)

 

* 프랑스 카르프, 카트린 조르주와이오 완경기, 그게 뭐가 어때서?: 초경에서 완경까지 내 몸으로 쓰는 일기(도서출판 , 2019)

 

* 엘리즈 티에보 이것은 나의 피: 익숙하고 낯선 생리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 2018)




페미니스트와 여성의학 전문가들은 월경을 부정적인 편견(생리혈은 더럽다)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이를 금기하는 사회적 분위기(생리하는 날을 그날이라고 부르는 것)에 꾸준히 문제 제기해왔다. 그들도 과학적 증거가 빈약한 매클린톡 효과를 부정한다


페미니스트 기자 엘리즈 티에보(Élise Thiébaut)는 생리에 관한 부정적 편견과 잘못된 인식을 깨뜨리기 위해 이것은 나의 피를 썼다. 이 책에 그녀는 매클린톡 효과를 소개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과학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194~195)’라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매클린톡 효과와 상반되는 연구 결과들도 언급한다. 1992년 미국의 인류학자 H. 클라이드 윌슨 주니어(H. Clyde Wilson Jr.)매클린톡의 연구 방법이 잘못되었으며 생리 주기가 예측 불가능하게 나타난다고 밝혔다.


완경기, 그게 뭐가 어때서?는 두 명의 프랑스 출신 기자가 함께 쓴 책이다. 두 저자는 여성 언론지에 여성의 몸과 건강을 주제로 한 글을 써왔다. 이 둘 중 한 명이 매클린톡 효과에 관한 내용을 썼을 텐데, (누군지 알 수 없는) 저자에 따르면 여성을 포함한 인간에게는 생리 동기화와 관련된 화학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것을 해독할 능력도 없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인 나는 여자고, 이건 내 몸입니다는 올해에 나온 책이다. 책의 저자 마르탱 뱅클레르(Martin Winckler)는 의사다. 그는 25년 동안 병원에 일하면서 수많은 여성 환자를 만났는데, 이를 계기로 여성의 건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매클린톡 효과가 낭설이라고 말한다(54).


매클린톡 효과는 과학적 회의주의 필터를 여전히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50여 년 전에 나온 연구 결과를 폐기해야 할까? 생리 동기화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과학계의 시선이 상식이 된 이상, 낡은 지식에 이별을 고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매클린톡 효과는 버려야 할 지식이 아니라 더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한 가설이다.


정재승 교수의 <박수의 물리학>과학 콘서트에 연주된 4악장에서 생긴 음 이탈(삑사리)’이. 지금으로선 이 음 이탈(글 이탈?)이 거슬리긴 하지만, 개정 증보 3판이 나올 때까지 10년을 참아야 한다.[주] 10년 후에 나올 개정 증보 3판에 음 이탈이 나지 않은 글이 수록되길 고대한다.






[] 10년 후에 다시 쓰게 될 과학 콘서트‘20년 늦은 커튼콜에는 다시 10년의 성과가 덧붙여질 것이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10년 늦은 커튼콜’ 중에서,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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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학자 임소연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여성과 과학 탐구를 출간하기 전에 이 책에 포함된 내용을 소개하는 발표회에 발표자로 나섰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책 4장에 나올 입덧과 태반 형성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그러자 청중 한 명이 질문했다.





















[레드스타킹 7월에 읽은 책]

* 임소연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여성과 과학 탐구(민음사, 2022)

 


남편도 입덧한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 입덧의 원인은 사랑인가요?”

대답은 “그것은 입덧이 아닙니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72)




이 일화는 저자의 책 4장 후반부에 나온다저자에 따르면 입덧은 임신한 여성의 태반에서 비롯되는 물질적 현상이다. 음식물을 섭취하면 호르몬인 인슐린이 혈중 포도당 농도를 낮춰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일을 한다. 인슐린은 태반에서 융모성 생식샘자극 호르몬(hCG)이 생성되는 것을 억제하기도 한다. 인슐린 수치가 줄어들고 hCG 분비가 늘어나면 입덧이 일어난다. 입덧이 잦은 임신 3~4개월에 태반이 형성된다.


청중은 쿠바드 증후군(Couvade syndrome)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쿠바드 증후군이란 아내가 임신했을 때 남편도 아내와 똑같이 신체적 증상과 정서적 반응을 겪는 현상을 말한다주로 메스꺼움, 두통, 감정 기복, 근육통 등 여러 증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증상은 대개 임신 3개월에 나타나 몇 달 만에 사라졌다가, 아기가 태어나기 한두 달 전에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 아민 A. 브롯, 제니퍼 애쉬 진짜 아빠 백과사전: 초보 아빠를 위한 세상의 모든 지식(보물창고, 2018)




쿠바드는 프랑스어로 부화를 뜻하는 쿠베르(couver)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쿠바드 증후군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아빠들의 아빠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 최고의 아빠 육아 전문가 아민 A. 브롯(Armin A. Brott)은 칼럼니스트 제니퍼 애쉬(Jennifer Ash)와 함께 쓴 진짜 아빠 백과사전에 여러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쿠바드 증상이 나타나는 다섯 가지 원인을 제시했다.



1. 임신한 아내에 대한 동정 혹은 죄책감


임신한 아내가 입덧으로 고생하면 그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은 자기 때문에 아내가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무의식적 죄책감이 메스꺼움과 진통 등을 유발한다.



2. 질투


임산부는 남편보다 훨씬 더 많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쿠바드 증후군을 겪는 남편은 부성을 과시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수 있다.



3. 호르몬 생성


임산부의 몸속에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옥시토신은 엄마와 자녀의 친밀감 형성을 높여준다. 임산부와 같이 사는 남편의 몸속에서도 옥시토신이 생긴다. 그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조절해주는 코르티솔과 모유 분비를 유도하는 프로락틴도 형성된다.



4.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결혼한 남자는 가정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배운다. 경제적 걱정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동 계급의 남성이 중산층 남성보다 쿠바드 증후군이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5. 아내와 태어날 아이에게 보내는 남편의 메시지


남편 자신이 가족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임신한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학 반응이다. 쿠바드 증후군은 아내와 아이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 남성이 훌륭한 부양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일 수 있다.
















* [절판] 티나 캐시디 출산, 그 놀라운 역사(후마니타스, 2015)




아주 오래전부터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경험으로만 인식되어왔다.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은 산파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남편들은 아내가 힘겹게 출산하고 있을 때 뭐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분만실 밖에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길 바라면서 기다려야 했다. 당시에 남성이 출산을 지켜보는 행동은 부도덕한 일로 여겨졌다. 놀랍게도 이 금기를 깬 남자들이 있었다1522년 독일의 의사 베르트(Wertt)와 몇몇 의사들은 출산 과정을 알고 싶어서 여장을 한 채 분만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베르트의 무모한 속임수는 발각되었고, 분만실 잠입에 가담한 의사들과 함께 화형당했다임신과 출산을 여성의 영역으로만 규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남성은 출산과 무관하다는 성 역할 고정관념(gender role stereotype)을 단단하게 만들어놓았다.


미국의 기자 티나 캐시디(Tina Cassidy)가 쓴 출산, 그 놀라운 역사에 남편을 출산에 배제하는 문화 속에서 묻힌 분만실 안의 남편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소수의 비서구권 원주민 사회에 남편이 아내 출산에 관여하는 문화가 있다분만실에 남편이 들어와서 안 된다고 믿은 서구인은 아내의 출산을 지켜보는 남편을 용인하는 원주민 사회가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원주민의 생활상을 연구한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브라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는 남편이 아내의 산고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의식의 순기능에 주목했다.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야만 사회의 섹스와 억압 (비천당, 2017)




말리노프스키는 1927년에 발표한 야만 사회의 섹스와 억압에서 남자에게 출산의 고통을 체험하게 하는 전통 의식이 사회 유지에 필수적 기능을 작용한다고 썼다. 그는 쿠바드 증후군을 유발하는 전통 의식이 서구인들의 눈에는 터무니없어 보이겠지만,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도덕적 유대를 강조하는 부족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19년 7월에 읽은 책]

* 웬다 트레바탄 여성의 진화: , 생애사 그리고 건강(에이도스, 2017)




쿠바드 증후군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학자들은 분만실 안의 남편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국내에 여성의 진화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책의 저자인 진화인류학자 웬다 트레바탄(Wenda Trevathan)[주]분만실 안의 남편옹호론자다. 그녀는 자신의 책 <Human Birth: An Evolutionary Perspective>(1987)에서 남편에게 출산 과정에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몇몇 문화권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남편이 분만실에 들어가서 아내의 출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부부 모두가 정서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분만실 안의 남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분만실 안의 남편문화가 임신에 대한 남성의 관음증적 호기심을 부추기며 임산부의 몸을 성적 대상화로 보는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여성의 출산 과정을 가까이서 본 남편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을 수 있다. 이러면 아내와의 성생활이 불가능해지며 아기와 유대감을 형성하거나 아내를 곁에서 지원하는 데 어려워한다.


쿠바드 증후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평소에 눈길을 주지 않은 육아 및 출산과 관련된 책을 몇 권 집어 들게 되었다. 책을 보다가 확실한 생각이 들었다. 임신과 출산을 막연하게 알아선 안 된다는 점. 쿠바드 증후군의 실체를 인정하지만, 과학적으로 접근할 땐 회의주의적 시선을 유지하면서 바라볼 것.






[] 출산, 그 놀라운 역사에서는 웬다 트레버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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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01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입덧이 아니라 쿠바드 증후군이군요. 저 원인을 설명해놓은거 보니싸 진따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고도 오묘한 존재인지 싶네요.

cyrus 2022-08-02 18:57   좋아요 1 | URL
네, 임산부가 하는 입덧과 쿠바드 증후군의 증상인 메스꺼움은 달라요. ^^

mini74 2022-08-01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어요. 쿠바드 증후군, 남자입덧은 없는거군요.

cyrus 2022-08-02 18:59   좋아요 1 | URL
사실 쿠바드 증후군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는 저도 임산부의 남편은 입덧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입덧이 생기는 원인을 자세히 알고 나니 ‘남편 입덧’이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

파이버 2022-08-02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임산부의 남편이 하는건 입덧이 아니었군요;; 쿠바드 증후군이라니 인간의 몸과 마음은 정말 연결되어있는 것 같아요 신기하네요

cyrus 2022-08-03 07:01   좋아요 1 | URL
입덧의 원인을 잘 모르면 이게 메스꺼움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예전에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여성과 과학 탐구두 번째 읽기 모임(2022723, 카페 스몰토크) 후기


















[레드스타킹 7월에 읽은 책] 

* 임소연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여성과 과학 탐구》 (민음사, 2022)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여성과 과학 탐구두 번째 읽기 모임이 한 주 연기되는 바람에 독서 분량이 늘어났어요. 원래 읽어야 할 범위는 4~6장이었어요. 여기에 세 장이 더 추가되어 9장까지 읽어야 했습니다. 4장은 한때 과학이 주목하지 못한 태반의 역할을 중심으로 임신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5장은 임신과 태아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아버지의 역할을 살펴봅니다. 6장은 난자 냉동 기술의 실태와 한계를 소개합니다. 7장과 8장은 여성 차별을 조장하는 인공지능 기술과 로봇 기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논합니다. 9장은 진화론을 옹호하면서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비판해온 페미니스트 진화론자들의 업적을 보여줍니다.

















* 찰스 로버트 다윈, 장대익 옮김 종의 기원(사이언스북스, 2019)

* 찰스 로버트 다윈, 김관선 옮김 종의 기원(한길사, 2014)

* 장바티스트 드 파나피외 가볍게 꺼내 읽는 찰스 다윈(북스힐, 2020)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들고 다니기 편한 책이라서 저는 틈만 나면 이 책을 여러 번 읽었어요. 계속 읽어 보니 아쉬운 대목이 한두 개 보였어요. 저자는 9장에서 진화론에 호의적이지 않은 페미니스트라는 통념을 반박하기 위해 ‘1세대 다윈주의 페미니스트를 언급합니다(134~136). 1세대 다윈주의 페미니스트는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의 저서 종의 기원에 나온 진화론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 편은 신이 7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최초의 인간 아담(Adam)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은 외로운 아담을 위해 그의 갈비뼈로 최초의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름 없는 여자는 선악과를 먹은 죄로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나기 직전에 아담은 여자에게 하와(Ḥawwāh)’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하와는 생명을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유럽인들은 세상과 인간을 신의 창조물로 보는 성경 속 내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오래된 믿음을 뒤흔들어놓은 책이 바로 종의 기원입니다다윈은 이 책에서 인간과 동물이 하나의 조상 종에게 나와서 어떻게 진화했는지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면서 설명합니다.


종의 기원을 읽은 페미니스트들은 진화론을,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성경의 권위에 맞설 수 있는 지적 무기로 받아들였습니다프랑스의 페미니스트 클레망스 루아예(Clémence Royer)는 종의 기원》을 자국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루아예는 진화의 개념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진화론에 열광한 남성 지식인들처럼 진화를 진보와 같은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4월에 읽은 책]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공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디플롯, 2021)

 

* 다니엘 S. 밀로, 이충호 옮김 굿 이너프: 평범한 종을 위한 진화론(다산사이언스, 2021)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 앤 커, 톰 셰익스피어 공저, 김도현 옮김 《장애와 유전자 정치: 우생학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그린비, 2021)


* 김호연 《유전의 정치학: 강제 불임에서 나치의 대학살까지》 (단비, 2020)


* [품절] 앙드레 피쇼 《우생학: 유전학의 숨겨진 역사》 (아침이슬, 2009)





다윈이 생각한 진화는 모든 종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종은 다른 종과 협력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공진화). 그는 자연이 점점 더 좋아지는 쪽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루아예를 비롯한 일부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강한 자만 살아남도록’ 작동된다고 믿었습니다. 다윈의 의도와 완전히 다른 적자생존 진화론을 강조하면서 사회 전체에 적응하려고 했습니다. 진화에 잘 적응한 강한 자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거죠. 그들은 진화에 적응하지 못해 밀려난 존재를 ‘신체적으로 약하고 열등한 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런 존재의 등장을 막거나 제거하는 사회 정책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진화의 개념을 오용한 진화론자들은 우생학 전파에 동참했습니다.


루아예는 우생학적 관점으로 종의 기원을 해석했고, 자신만의 견해를 종의 기원프랑스어 번역본에 추가했습니다. 다윈은 루아예가 번역한 종의 기원을 읽다가 크게 실망했습니다. 루아예는 우생학과 관련된 구절과 참고문헌이 삭제된 2판 번역본을 내놓았지만, 다윈의 분노를 달래지 못했습니다. 다윈은 다른 프랑스인 번역가에게 종의 기원번역을 맡겼습니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의 저자 임소연여성이 진화론의 오랜 친구이자 비판자’였다고 주장합니다(134쪽). 글쎄요, 저는 우생학에 열광한 페미니스트들은 진화론의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읽기 모임에 꾸준히 참석한 분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책의 한계가 하나둘씩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저자가 각 장의 글에서 다룬 주제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아서 아쉽다는 평이 있었습니다. 책은 총 열두 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열두 편의 글은 원래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아무래도 지면상 한계 때문에 저자가 길게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저자는 과학은 여성의 친구임을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글에서 드러난 저자의 태도가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가르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느껴졌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과학과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방대한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한 책이긴 합니다만, 이 책 한 권만 읽고 주제를 갈무리할 수 없습니다. 이 책에 다루지 못한 내용이 남아 있거든요. 따라서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비판적인 읽기가 필요한 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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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22-07-25 0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슨 인 케미스트리,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뭔가 과학에 대한 우상화,가 느껴졌어요^^;;

cyrus 2022-08-01 08:45   좋아요 0 | URL
별족님이 언급한 그 책, 제가 좋아하는 책일 수 있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책이란 까야 할 게 많은 책입니다. ^^

별족 2022-08-01 09:29   좋아요 0 | URL
음, 이 책은, 음. 로맨스 소설이라서 못 읽으시지 않을까.

cyrus 2022-08-02 19:01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제가 로맨스 소설 안 읽는 거 잘 아시네요. ㅎㅎㅎ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1957년 서독에서 개발된 수면제다. 이 약을 개발한 제약 회사 그뤼넨탈(Grünenthal)은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그뤼넨탈은 수면제를 투여한 흰쥐를 대상으로 한 동물 실험에서 치사량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실험 결과에 흡족한 제약 회사는 인체에 해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세계산부인과학회에 참석한 어느 산부인과 의사는 수면제가 입덧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 세계 산부인과 의사들은 입덧이 심한 임신부에게 탈리도마이드를 처방했다.

 

제약 회사의 안이한 판단으로 인해 탈리도마이드는 부작용이 없는 약으로 알려진 채 전 세계에 판매되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세계산부인과학회에서 처음 보고된 수면제의 또 다른 효과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들은 회의적인 의심을 하지 않았고, 철저한 과학적 검증도 요구하지 않았다.


결국 제약 회사와 산부인과 의사들이 예상하지 못한 수면제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산모에게서 팔다리가 짧거나 아예 없는 신생아들이 태어났다.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일본 등에서도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을 겪은 신생아들이 태어난 사실이 알려졌다. 그뤼넨탈은 처음에 수면제의 부작용을 부인했으나 1961년에 판매 금지 및 수입 중단을 결정했다.

















* 막달레나 허기타이 내가 만난 여성 과학자들: 직접 만나서 들은 여성 과학자들의 생생하고 특별한 도전 이야기(해나무, 2019)





유럽이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으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미국에서 단 17명의 기형아가 태어났다.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근무한 프랜시스 올덤 켈시(Frances Kathleen Oldham Kelsey)는 탈리도마이드가 임산부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대다수 의학자와 산부인과 의사는 태반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태반이 모체와 태아 사이에 있는 장벽이라고 생각했다. 장벽과 같은 태반은 모체로부터 오는 위험물질을 통과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태반은 태아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어서 임산부는 의약품을 복용해도 괜찮다고 믿었다.


하지만 켈시는 산부인과 의사들 사이에서 유행한 태반의 잘못된 통념을 반박하는 실험을 했다. 그녀는 태반이 모체와 태아 모두를 위한 영양분을 교환하는 통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험물질 역시 태반을 통과할 수 있다. 태반의 기능을 잘 알았던 켈시는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을 의심했다. 그리고 탈리도마이드의 안전성을 확실히 밝히기 위해 수면제를 수입 제조하는 미국 제약 회사에 임상 실험 결과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다. FDA의 일부 고위층 인사와 그들에게 로비를 펼친 제약 회사는 켈시를 압박했다. 그러나 켈시는 반복된 실험을 통한 검증을 중시하는 회의주의적 자세로 일관했고, 판매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이 공로로 J. K. 케네디(J. F. Kennedy)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내가 만난 여성 과학자들은 약리학자인 켈시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 로얼드 호프만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까치, 2018)




탈리도마이드 사건또는 그뤼넨탈 스캔들로 알려진 탈리도마이드 부작용 사례는 과학자의 윤리적 및 사회적 책임을 강조할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과학적 재난이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화학자 로얼드 호프만(Roald Hoffmann)은 화학의 양면성을 균형 있게 서술한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The Same and Not the Same, 1995)라는 책에서 탈리도마이드 사건의 경과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하면서 분석한다. 탈리도마이드는 의약품이기 전에 화학 물질이다. 호프만은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과학 윤리가 명백하게 깨진 사례로 평가한다. 그는 또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이 있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로 검증을 소홀히 한 당시 엉터리 과학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탈리도마이드에 노출된 신생아뿐만 아니라 신약 개발에 뛰어든 과학자들에게도 커다란 후유증을 안겨주었다. 호프만은 탈리도마이드 사건 이후로 신약 개발에 필요한 창조성이 짓눌러버렸다고 지적한다.


















[레드스타킹 7월에 읽은 책] 

임소연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여성과 과학 탐구》 (민음사, 2022)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을 쓴 과학기술학자 임소연은 여성을 몰이해한 과학을 비판하기 위해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언급한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기점으로 태반은 장벽이라는 통념이 깨지기 시작했고, 과학자들은 태반의 실질적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앞서 소개한 로얼드 호프만과 임소연처럼 대부분 과학 전문 저술가는 의약품의 부작용을 외면한 과학의 문제점을 강조하기 위해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예시로 든다이러한 서술 방식에 문제점이 있다독자들은 탈리도마이드에 관한 또 다른 진실을 보지 못한다탈리도마이드가 FDA 승인을 거쳐 혈액암 치료제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 정진호 위대하고 위험한 약 이야기: 질병과 맞서 싸워온 인류의 열망과 과학(푸른숲, 2017)


* 박종현 과학을 쉽게 썼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평범한 일상 변화하는 사회 속 유쾌한 과학(북적임, 2020)





탈리도마이드는 혈관 생성을 억제한다. 태아의 몸에 혈관이 생겨야 팔다리가 형성된다. 태아는 신체 부위가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혈관으로 공급받는다. 탈리도마이드에 노출되면 몸속에 혈관이 생기지 않게 되고, 신체 부위가 자라지 않는다암세포는 직접 혈관을 만들어 영양소를 흡수한다. 이러면 혈관 주변에 암 덩어리가 생긴다. 탈리도마이드는 혈관 생성을 막을 뿐만 아니라 암세포 활동까지도 억제한다.


브라질에서는 탈리도마이드가 한센병(나병) 환자의 통증을 줄이는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다. 그로 인해 브라질에서도 팔다리 없는 신생아가 태어나는 부작용 사례가 보고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탈리도마이드를 한센병 치료제로 쓰는 남미와 아프리카에 약품의 부작용을 강조하면서 임산부에게 처방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남성에게 피임을 권장하기도 했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에 대한 분석과 한때 금지 약물이었던 탈리도마이드가 한센병과 암 치료제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설명한 저자의 책이 많지 않다위대하고 위험한 약 이야기과학을 쉽게 썼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이 두 권의 책을 쓴 저자는 탈리도마이드의 새로운 효과를 언급했다. 찾아보면 더 나올 수 있다.


과학을 쉽게 썼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의 저자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을 응용해서 새로 개발된 항암제 레날리도마이드(lenalidomide)를 소개한다. 레날리도마이드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치료제로 사용된다. 저자는 레날리도마이드가 다른 약과 같이 먹으면 다발성 골수종 치료 성공률이 올라간다고 주장한다(195). 사실 레날리도마이드도 부작용의 위험성이 크다. 당연히 임산부에게 처방하면 안 된다. 게다가 레날리도마이드를 적혈구 조혈(적혈구를 만들어내는 것) 촉진제나 심장약을 함께 투여하면 부작용이 일어난다.[주] 


과학을 쉽게 썼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래, 문제 있다! 독자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정확하게 알리지 않은 채 과학을 너무 쉽게 쓰면 안 된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라는 저자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과학적 검증이 좀 더 필요해 보이는 실험 결과나 유사 과학을 확실한 정보인 것처럼 전달하는 블로거와 다를 바가 없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다룬 글에 또 하나의 공통된 문제점이 있다. 팔다리 없는 신생아의 몸을 찍은 사진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로얼드 호프만은 자신의 책에 사진 대신에 팔다리 없는 아기가 그려진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의 그림을 실었다팔다리 없는 사람은 장애인이다. 비장애인 저자는 팔다리 없는 아기를 피해자의 틀에 가둬 놓는다. 여기에 기형아라는 단어를 여러 번 붙인다. 장애인의 몸은 의약품의 부작용이 낳은 사건의 심각성과 부실한 과학의 문제점을 거론할 때마다 책과 인터넷에서 전시된다(인터넷에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로 검색하면 관련 사진이 나온다). 장애인 사진을 동원하면서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설명하는 글쓰기 방식 속에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 남아 있다. 장애인은 건강하지 않다. 그렇기에 그들은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편견이이런 편견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글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러면서 그 글을 읽는 독자의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부실한 과학이 초래한 최악의 사례로만 언급되어야 하는 주제가 아니다. 여기에 과학적 회의주의(프랜시스 켈시)과학자의 사회적 책임(로얼드 호프만), 여성을 몰이해한 과학 비판하기(임소연), 동물권(탈리도마이드 개발을 위해 실험실에서 죽어간 흰쥐는 몇 마리일까?), 장애학(의약품 부작용으로 인해 태어난 장애인은 정말 불행한가? 그들이 건강하지 않다고 해서 낙태시켜야 하는가?) 등과 관련된 주제가 섞여 있다.





 

[] 네이버 <약학 용어 사전> 레날리도마이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817200&cid=59913&categoryId=5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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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2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리도마이드 사건 ebs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동물실험이 정확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들로도 많이 나오더라고요. 부모에게 아이들을 빼앗아 치료한다는 목적으로 강제수용당하기도 했더라고요. 이렇게 언급된 책들 소개에 연관된 주제들까지! 참 좋습니다 *^^*

cyrus 2022-07-24 15:47   좋아요 1 | URL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장님들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보기 쉬운 사례입니다. 예전에 저는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만 알고 있었고, 이 약이 암 치료제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

윤희권 2023-07-2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윤희권 2023-07-2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녀 화학도서 찾아보다 읽게되었습니다.

윤희권 2023-07-2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