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러두기

    

 

* GBLA(Good Bad Literature Archive)

영국의 작가 G. K.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문학성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읽어볼 만한 재미있는 책을 가리켜 좋으면서 나쁜 책(good bad book)이라는 표현을 썼다. 나는 세계문학(고전)의 주류에 속하지 않지만, 읽어 보면 재미있는 공포 문학좋으면서 나쁜 문학(good bad literature)이라 부르고 싶다(다만, 모든 공포 문학 작품이 다 재미있는 건 아니다). 내 목표는 국내에 번역되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공포 문학 작품을 정리한 온라인 아카이브(Archive, 기록 보관소)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온라인 아카이브 이름을 ‘GBLA(Good Bad Literature Archive)로 정했다.

    

 

 

* 작품 평가 기준

엘러리 퀸(Ellery Queen)은 탐정소설을 평가할 때 세 가지 기준을 사용했다. 나도 공포 소설을 평가할 때 이 평가 기준을 사용하겠다.

 

1. H: 역사적 중요성(Historical Significance)

이 작품이 문학사적으로 중요한가?, 문학사적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

 

2. Q: 작품의 우수성(Quality)

이 작품이 문학적으로 우수한가?

 

3. R: 초판본의 희소가치(Rarity)

GBLA에서는 번역본의 희소가치를 뜻한다. 번역된 횟수가 적은 작품 또는 번역본이 절판되는 바람에 해당 작품을 보기 어려울 경우 R를 부여한다.

 

 

 

 

 

 

 

 

 

E. F. 벤슨은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Edward White Benson, 1829~1896)의 아들이다. 그녀의 어머니 메리 시지윅(Mary Sidgwick, 1841~1918)은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명사였다. 영국 총리 글래드스턴(Gladstone)은 그녀를 유럽에서 가장 영리한 여성(cleverest woman in Europe)이라고 평가했다.

 

E. W. 벤슨과 메리 시지윅 사이에 6남매가 태어났다. 장남 마틴 벤슨(Martin Benson)은 6남매 중 가장 영리해서 촉망받는 인물이었으나 18세에 요절했다. 차남 아서 크리스토퍼 벤슨(Arthur Christopher Benson, 1862~1925)은 시인 겸 수필가다. 그는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가 작곡한 <Land of Hope and Glory>의 노랫말을 썼다. 지금도 이 곡은 영국의 제2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랑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알려졌다(이 곡은 총 다섯 곡으로 구성된 관현악곡집이다. 이 다섯 곡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1번 곡 선율이 바로 ‘Land of Hope and Glory’이다).

 

6남매 중에 세 번째로 태어난 마거릿 벤슨(Margaret Benson, 1865~1916)은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 최초의 여학생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되어 이집트에서 유물을 발굴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이 활동으로 마거릿 벤슨은 이집트 정부로부터 유물 발굴 허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말년은 좋지 못했는데 1907년부터 정신병원에서 생활했다.

 

오늘 소개할 E. F. 벤슨은 네 번째로 태어난 삼남이다. 다섯 번째로 태어난 넬리 벤슨(Nellie Benson, 성별을 확인하지 못했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넬리 벤슨의 삶을 소개한 항목이 없다. 장남 마틴도 별도의 위키피디아 항목이 없는 벤슨 가 사람이다)은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26세에 요절했다. 막내 로버트 휴 벤슨(Robert Hugh Benson, 1871~1914)은 가끔 소설을 쓰는 가톨릭 신부였다.  

 

E. F. 벤슨 역시 고고학자로 활동하여 5년 동안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살았다. 고고학 발굴 작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영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지내며 글을 썼다. 그는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썼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벤슨의 글은 공포 소설과 유령 소설이다. E. F. 벤슨은 운동 신경이 매우 뛰어나서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활동했으며 영국 대표로 세계 대회에 출전했다.

 

 

 

 

 

 

 

버스 차장

The Bus-Conductor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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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단편 100(책세상, 2005)

 

 

 

어느 날 휴 그레인저(Hugh Grainger)의 집 앞에 검은색 마차 한 대가 선다. 그는 창문으로 마차를 내려다본다. 그런데 마차꾼의 옷차림이 이상하다. 그는 검은색 외투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다. 마차꾼은 자신을 관찰하고 있던 휴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안에 딱 한 자리 남았습니다. 선생님(Just room for one inside, sir)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불쾌해진 휴는 창문 블라인드를 내린다. 정확히 한 달 후에 휴는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린다. 그의 앞에 버스 한 대가 서는데, 버스 차장의 모습이 예전에 봤던 마차꾼과 닮았다. 버스 차장은 휴에게 안에 딱 한 자리 남았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휴는 버스를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다.

 

이 소설이 수록된 세계 호러 단편 100(책세상) 233오역 문장이 있다.

 

 

 내 방은 삼층 정면에 있어.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방으로, 평소에는 자네가 사용하던 곳일 거라고 짐작했지.”

 

 You had put me in the front room, on the third floor, overlooking the street, a room which I thought you generally occupied yourself.

 

 

영국과 미국 층수의 개념이 다르다. 예전에 이 내용을 표로 만들어 정리한 적이 있다. 미국인들은 1층을 ‘First floor’라고 쓰지만, 영국인들은 ‘Ground Floor’로 쓴다. 미국에서 2층을 의미하는 ‘Second floor’가 영국에서 사용하면 3층에 해당한다. 미국의 ‘third floor’는 삼층이지만, 영국에서는 사층이다. 벤슨은 영국 작가이다. 그러므로 층수의 의미를 우리말로 옮길 때 영국식으로 쓰는 게 맞다.

 

 

 

 

 

 

 

쐐기벌레

Caterpillars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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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걸작선(책세상, 2004)

* [절판] 윤효송 옮김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자유문학사, 2004)

 

    

 

화자는 예전에 머물렀던 이탈리아의 카스카나 별장(Villa Cascana)이 헐린다는 소식을 접한다. 별장이 헐린 그 자리에 공장이 들어선다. 그는 사라진 별장과 관련된 불쾌한 추억을 떠올린다.

 

그는 별장에서 괴상한 형태의 벌레를 목격한다. 다음 인용문은 화자가 벌레를 묘사한 내용이다.

 

 

 방 안의 희끄무레한 빛이 침대에서,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침대 위의 어떤 것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길이가 삼십 센티미터가 넘는 거대한 쐐기벌레들이 침대를 뒤덮은 채 기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쐐기벌레들은 희미하게 빛을 발했으며 침실 쪽으로 내 시선을 끈 것도 그 빛이었다. 보통의 쐐기벌레의 배다리 대신에 게처럼 집게발이 달려서 그것으로 표면을 움켜잡으며 움직거리다 앞쪽으로 몸을 미끄러뜨렸다. 그 오싹한 곤충은 노르스름한 회색빛에, 울퉁불퉁한 혹과 종기로 뒤덮여 있었다 (세계 호러 걸작선374)

 

 

별장에서 지내고 있던 화가 아서 잉글리스(Arthur Inglis)는 쐐기벌레에 흥미를 느낀다. 그는 집게발을 뜻하는 라틴어 ‘Cancer’와 자신의 성()을 합쳐 쐐기벌레의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은 캔서 잉글리센시스(Cancer Inglisensis).

 

쐐기벌레는 벤슨의 대표작이다. 내용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과 찝찝한 여운을 주는 매력적인 공포소설이다.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자유문학사)에도 수록되었는데 제목이 유충이다. 제목부터 오역이다‥…. ‘쐐기벌레가 맞다.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세계 호러 걸작선(책세상)2004년에 나온 책이다. 그런데 두 권 모두 오역 문장이 있다.

 

 

 이윽고 그녀는 내게 말했다. 일 년 전에 그 빈 방에서 치명적인 종양이 발견되었다 (세계 호러 걸작선380)

 

 

  스탠리 부인은 그때 처음으로 나에게 그 방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1년 전쯤, 그 침실을 암 환자가 잠시 사용했다고 한다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235)

 

 

  Then she told me. In the unoccupied bedroom a year before there had been a fatal case of cancer.

 

 

소설의 결말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그래도 번역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스포일러가 있더라도 인용하겠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라.

 

사실 원문의 ‘a fatal case of cancer’는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표현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case’환자 또는 상자로 해석할 수 있다. ‘상자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소설 중반부에 아서 잉그리스가 쐐기벌레를 담은 상자를 화자에게 보여준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상자가 맥거핀이 아니라면 아서가 들고 있던 상자가 쐐기벌레의 개체 수를 늘리게 한 가장 큰 원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환자’로 해석해도 문장이 어색하지 않다. ‘a fatal case of cancer’ 앞에 있는 ‘had been’‘have been(방문하다)의 과거형이라면 치명적인 암에 걸린 환자가 침실에 잠시 들렀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종양’인데 과연 ‘a fatal case of cancer’종양으로 해석이 가능한가. 원문과 다른 표현이긴 한데 오역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겠. ‘종양’이 개체 수가 기하학적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뭉쳐진 채 서식하는 쐐기벌레들을 묘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a fatal case of cancer’의 의미가 모호해서 결말을 본 독자들은 찝찝한 여운을 느끼게 된다.

 

 

 

 

 

 

 

탑 실

Room in the tower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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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영 옮김 뱀파이어 걸작선(책세상, 2006)

* [절판, No Image] 이동진 옮김 괴기 X-파일(문학수첩, 1995)

 

 

 

화자는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 꿈을 자주 꾼다. 그는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일정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꿈에 붉은 벽돌의 저택이 나오고, 저택의 정원에 친구 잭 스톤(Jack Stone)과 그의 가족들(잭 스톤의 부모와 두 누이)이 모여 있다. 스톤 부인(Mrs. Stone)은 매번 꿈에 나올 때마다 화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잭이 네 방을 안내해줄 거야. 탑 실을 골라두었단다.”(Jack will show you your room. I have given you the room in the tower)

 

화자는 잭의 안내를 받으면서 탑 실에 간다. 탑 실 안에 들어간 화자는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이런 악몽을 화자는 반복적으로 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꿈이 되풀이될수록 꿈속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면서 꿈속에 나타나는 잭 스톤 가족의 외형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한다.

 

꿈을 꾼 당시에 화자는 잭 스톤을 만나지 않았고, 꿈에 나온 저택과 비슷한 건물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친구 존 클린턴(John Clinton)과 함께 숲속에 있는 어느 저택에 지내게 되는데, 그곳은 화자의 꿈에 보던 저택과 흡사하다. 그리고 두 사람을 맞이하는 저택의 주인은 꿈속에서 본 스톤 부인의 모습과 닮았다. 드디어 화자는 악몽에서만 보던 탑 실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탑 실은 탑과 집 실()과 합쳐진 단어다. 탑 속의 방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탑 실과 다음에 소개할 앰워스 부인뱀파이어(Vampire)가 나오는 벤슨의 소설이다. 그래서 탑 실은 뱀파이어 소설의 역사를 논할 때 꼭 언급되는 작품이다.

 

탑 실이 수록된 뱀파이어 걸작선(책세상)정진영 씨가 번역했다. 이미 오역을 지적하면서 언급한 세계 호러 걸작선세계 호러 단편 100의 역자도 정진영 씨다. 이분 때문에 내 글의 분량이 길어졌다. 여러분, 글이 길다고 해서 나를 탓하지 마시라.

 

 

 지난주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이층으로 향할 때였다. 자주 그래왔듯 우편배달부의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다시 아래층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때부터 꿈에 환상이 섞여들었고, 편지를 뜯어보니 최상품 다이아몬드와 함께 아주 익숙한 필체가 나타났다. 편지 내용은 이랬다.

  “이걸 안전하게 보관해주게. 이탈리아에서 이걸 지니고 있는 건 위험하니까.”  (155~156)

 

  One night last week I dreamed that as I was going upstairs to dress for dinner I heard, as I often heard, the sound of the postman’s knock on my front door, and diverted my direction downstairs instead. There, among other correspondence, was a letter from him. Thereafter the fantastic entered, for on opening it I found inside the ace of diamonds, and scribbled across it in his well-known handwriting, “I am sending you this for safe custody, as you know it is running an unreasonable risk to keep aces in Italy.”

 

 

‘ace of diamonds’다이아몬드가 그려진 트럼프 카드를 뜻한다.

 

 

 

 

 

 

 

 

사형수의 고백

The Confession of Charles Linkworth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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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길환 옮김 영국의 괴담(명문당, 2000)

 

 

 

약간 감동을 주는 결말이 있는 유령소설이다.

 

티스데일(Dr. Teesdale)은 처형 직전의 사형수를 1주에 한두 번씩 진찰하는 의사다. 그의 취미는 심령술 연구이다. 티스데일이 만난 사형수 찰스 링크워스(Charles Linkworth)는 문방구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부채 때문에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찰스 링크워스는 돈을 차지하기 위해 어머니를 교살하고 시체를 유기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티스데일은 찰스 링크워스의 교수형을 참관한다. 그는 찰스가 즉사했음을 확인한다. 그 순간 티스데일은 찰스의 영혼이 자신 옆에 있는 듯한 오싹한 기분을 느낀다. 찰스가 죽은 지 한 시간 지난 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찰스를 사형할 때 사용한 밧줄이 사라진 것이다.

 

티스데일의 방에 전화기가 있다. 저녁에 전화벨이 울리고, 티스데일은 수화기를 든다. 하지만 수화기에 전화를 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그는 전화 교환국에 가서 자신의 집에 전화를 건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확인한다. 전화번호의 위치는 교도소였다. 그러나 교도소의 당직 근무자는 티스데일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고 말한다. 티스데일은 교도소에 떠도는 찰스의 영혼이 자신에게 무언가 얘기하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한다.

 

티스데일의 예상대로 다음 날 저녁에도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에 흐느끼는 찰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티스데일에게 교화사(敎化師)와 직접 통화하고 싶다고 말한다. 티스데일은 영혼의 요구를 들어준다.

 

원제에 있는 ‘Confession’고해성사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앰워스 부인

Mrs. Amworth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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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1(한즈미디어, 2014)

* [품절] 이수현 옮김 세계 공포문학 걸작선: 고전 편(황금가지, 2003)

 

 

 

서섹스(Sussex) 주 고지대에 있는 마을 맥슬리(Maxley).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이지만, 삼백 년 전에 뱀파이어가 창궐했던  곳이다. 심리학 교수 프랜시스 어컴브(Francis Urcombe)는 지금도 맥슬리에 뱀파이어가 있다고 주장한다. 맥슬리의 유명 인사는 미망인 앰워스 부인이다. 인도에 파견된 남편과 함께 살다가 남편이 죽자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와 맥슬리에 정착한다. 맥슬리는 부인의 조상이 살고 있던 곳이다. 부인은 마을 주민과 잘 어울리는 사교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그러나 프랜시스 어컴브는 부인의 정체를 의심한다.

    

사실 앰워스 부인은 추리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 프랜시스 어컴브는 자신이 수집한 정보와 단서들을 가지고 앰워스 부인의 정체를 밝혀낸다. 그런데 그 단서라는 것들이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만약 작가가 앰워스 부인을 쓰면서 독자를 속일 수 있는 정교한 트릭을 설정했다면 코난 도일(Conan Doyle)서섹스의 뱀파이어에 견줄 만한 추리소설이 되었을 거로 생각한다. 서섹스의 뱀파이어에서 셜록 홈스(Sherlock Holmes)는 뱀파이어로 잘못 알려진 부인의 이상 행동을 추리하여 부인의 억울한 오해를 풀어준다.

 

 

 

 

Trivia

 

* 세계 호러 단편 100아서 크리스토퍼 벤슨의 막힌 창로버트 휴 벤슨의 감시자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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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리고 죽은 자가 말했다 Mystr 컬렉션 140
에드워드 프레더릭 벤슨 / 위즈덤커넥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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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소설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은 과학을 연구하는 대학생이다. 그는 창조물(creature)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얻기 위해 묘지에서 시체를 도굴한다. 자만심에 빠진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서 창조물을 만든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과학을 악용하는 이런 인물을 매드 사이언티스트(Mad scientist)라 부른다.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프레더릭 벤슨(Edward Frederick Benson)그리고 죽은 자가 말했다(And The Dead Speak)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공포소설이다. 제임스 호튼 경(Sir James Horton)은 매일 실험실에서 생활하는 물리학자다. 그는 인간의 두뇌에 모든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두뇌 조직에 축음기 바늘을 꽂아 그 뇌에 저장된 기억을 읽어내는 실험을 한다. 이 소설의 화자는 친구 호튼 경의 괴상한 실험을 지켜본 증인이다. 놀랍게도 축음기에 죽은 자의 목소리가 나온다. 호튼 경은 그 목소리가 살아있을 때 죽은 자의 뇌에 저장된 기억이라고 확신한다.

 

실험이 성공하자 호튼 경은 축음기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작업에 매진한다. 그는 다음 실험 대상으로 가정부 가브리엘 부인(Mrs. Gabriel)을 주시한다. 가브리엘 부인은 6개월 전에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한때 언론에서 주목받은 인물이었다. 호튼 경이 특이한 이력이 있는 여성을 가정부로 고용한 이유가 있다. 그는 그녀의 뇌에 남편의 죽음과 관련된 정보가 있을 거로 생각한다. 마침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다. 가브리엘 부인은 간질을 앓고 있는데 발작 증상이 일어나는 바람에 계단에서 넘어진다. 호튼 경은 다친 부인을 병원이 아닌 실험실에 데려간다. 그는 부인의 이마에 난 상처에 축음기 바늘을 넣는다. 화자는 부인이 죽지 않았다면서 호튼 경을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인간의 오만이 하늘을 찌르면, 나중에 그 오만이 인간을 찌르는 결과가 나온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최후는 늘 이렇다. 그런데 호튼 경이 최후를 맞는 과정이 허무하다.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결말이 무척 아쉽다.

 

그리고 죽은 자가 말했다와 비교할 수 있는 소설이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터(Herbert WestReanimator). 확인해 보니 두 편의 소설 모두 같은 해(1922)에 나왔다. 허버트 웨스트는 호튼 경이 오히려 점잖게 보여질 정도로 광기가 심한 매드 사이언티스트다. 의대생 허버트 웨스트는 죽은 생물을 되살리는 실험을 한다. 이 소설의 설정과 구성이 그리고 죽은 자가 말했다와 비슷하다. 두 소설의 화자 모두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친구다. 그들은 제정신이 아닌 친구의 실험을 목격한 증인이며 끔찍한 실험에 간접적으로 동참한다. 그렇지만 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터의 결말이 벤슨의 소설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터의 결말은 피도 눈물도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회가 된다면 두 편의 소설을 꼭 읽어보시라. 그러면 내가 결말을 지적한 이유를 알 것이다.

 

 

 

 

 

 

 

Trivia

 

 

* 7

     

 

 

 I well remember his coming in to see me on the evening of the 4th of August, 1914.

  “So the war has broken out,” he said, “and the streets are impassable with excited crowds. Odd, isn’t it? Just as if each of us already was not a far more murderous battlefield than any which can be conceived between warring nations.”

  “How’s that?” said I.

 

 

거리가 흥분한 군중으로 꽉 막혀 있었다라는 문장은 화자의 말이 아니라 호튼 경이 한 말의 일부다. 그리고 내가 형광펜 색으로 줄을 친 문장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서 계속 봐도 이상하다. 오히려 내가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역자에게 물어보고 싶다.

    

 

 

 

* 13

    

 

 

 

작음작은의 오식이다.

 

    

 

 

* 22

 

 

 

티페레리의 노래오역이다. 티페레리(Tipperary, 티퍼레리)는 아일랜드 남부에 있는 도시 지명이다. 제목과 가사에 티페레리가 들어간 노래가 여러 곡이 있는데, ‘티페레리의 노래라는 제목의 곡은 없다. 이 소설 본문에 언급된 티페레리의 노래’의 정체1907년에 나온 <Tipperary>.

 

    

 

 

*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알라딘에 그리고 죽은 자가 말했다를 검색하면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Book Lover’라는 닉네임의 아마존(Amazon) 회원이 남긴 추천평이 인용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글에 어이없는 내용이 보인다.

 

 이 작품은 샬롯 브론테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이 자신의 수필집과 자서전 등에서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ë)19세기에 활동한 작가다. 그녀는 벤슨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샬롯이 1922년에 나온 그리고 죽은 자가 말했다를 읽었을 리가 없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Book Lover)이 치명적인 실언을 하다니‥…. 그리고 벤슨의 소설은 고딕 공포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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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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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떤 사람이냐고. 나는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도 그렇다. 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내 문제점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부터 먼저 한다. 마치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기 위해 물을 묻힌 손수건으로 벅벅 문지르듯이 나는 내 문제점을 얼른 찾아내서 고치려고 애쓴다. 손수건으로 세게 문지를수록 얼룩은 점점 더 번진다. 안 그래도 보기 싫은데 점점 뚜렷해지는 문제점을 보면 더 싫어진다. 여기서부터 내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니까 일에 진척이 없다.

 

내 속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비판하는 제2의 자아가 살고 있다. “넌 왜 이렇게 못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가 왜 이러냐?” “좀 더 잘할 수 없었니?” 주변에서 괜찮아”, “잘했어라고 말해줘도 나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내가 검열관으로 임명한 제2의 자아의 지적을 피하려고 애쓴다. 아무래도 나는 자아비판이 지나쳐서 내 장점보다는 문제점을 더 보려는 습관이 몸에 뱄다. 그래서 피곤하고 지친다. 무엇보다 자존감이 떨어져 있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책 제목이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에세이를 읽었다. 작가는 심리학과 정신분석 이론을 공부하면서 왜 그렇게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면서 살아왔는지 살핀다. 그러면서 독학과 글쓰기를 토대로 자기혐오의 원인과 과정을 찾아내어 더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나를 돌보는 방식을 발견한다. 작가는 심리학을 내 문제를 비춰보는 유용한 프리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심리학자의 분석에 의존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내면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주는 학문이 아니다. 작가는 심리학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힌트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본인의 내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견한 힌트는 (Carl Gustav Jung)의 그림자 이론이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자아, 즉 인간의 어두운 면이다. 이 그림자는 자신의 일부이면서도 스스로 거부해온 콤플렉스와 정신적 외상(trauma)이다. 나를 돌보려면 내면의 그림자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정하면서 만나야 한다.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그림자를 대면했다. 처음에 쓴 글의 주제는 내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썼고, 다음 주제는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아껴야 하는 이유였다.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서 그림자를 돌보면서 어루만져준다. 이것이 작가가 강조하는 마음 챙김이다. 그러면 그림자도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기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안에 있는 검열관 이 녀석의 정체는 그림자다. 나는 그림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 책의 1장 제목은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림자를 사랑하지 않았다.[1] 그림자를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듯이 심리학은 우리의 내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림자를 따뜻하게 안아줘도 언젠가는 다시 내 포옹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작가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내 안의 그림자와 상처 둘 다 없이 산다면 정말 행복한 삶일까.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내면은 건강할 것일까. 나는 그림자와 내면의 상처 없이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내면의 상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면의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살려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세상과 타인을 내면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하면서 극단적인 고독을 선택하는 삶은 고통스럽다.[2] 오히려 그런 삶이 내면을 병들게 한다. 결국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림자를 안으면서 내면에 상처를 달고 살아야 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그림자의 괴롭힘에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내면에 상처 입은 사람도 다른 사람의 내면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차츰차츰 각자의 아픔을 치유해간다.

 

나로 살아간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살아야 할 시간이 아직 남았는데 벌써 남에게 인정받지 못해, 남에게 사랑받지 못해, 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자책만 할 수 없다. 그냥 그럭저럭 그런 삶이어도 괜찮다. 나를 사랑하자. 젊은 나를 위하여.[주3]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리라. ‘마음 챙김은 내 삶의 밝음을 확장하는 즐거운 놀이다. 이 즐거움으로부터 긍정적인 기운을 받는다면 내 안의 그림자까지 챙길 수 있다.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신문기자>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심은경은 인터뷰에서 앞으로 연기 활동에 대해 소박하면서도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저 지금처럼 즐겁게, 저 자신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으면 싶다. 묵묵히 내 길을 가고 싶다.”

 

 

나도 그녀의 말처럼 어떤 신경도 쓰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1]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마지막에 있는 시구를 차용했다.

 

[2] 라르스 스벤젠 외로움의 철학, 청미, 2019.

 

[주3] 잼(ZAM)의 노래 <우리 모두 사랑하자>에 나오는 노랫말(우리 모두 사랑하자. 우리의 젊은 날을 위하여)을 변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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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20-03-1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완벽주의자시네요~

cyrus 2020-03-15 18:19   좋아요 0 | URL
칭찬인가요, 비판인가요? ㅎㅎㅎㅎ 네, 맞아요. 제가 사소한 결졈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문장은 알고 있는 당신은 분명 미술과 예술작품을 보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연배가 꽤 있는 옛날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오픈하우스)는 미술평론가 손철주1998년에 펴낸 책이다(초판을 만든 출판사는 도산되어 사라진 생각의 나무).

    

 

 

 

 

 

 

 

 

 

 

 

 

 

 

 

 

* 손철주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오픈하우스, 2017)

 

 

 

이 책은 22년 동안 세 번의 개정을 거친 미술 교양서의 스테디셀러다. 이 책을 잘 모르는 젊은 독자들이 있을 것 같지만,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제목은 그림 읽기의 공식처럼 알려졌다. 그런데 그림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서 밑줄을 쳐가며 공부하듯이 미술책을 정독할 수 없는 노릇이다. 미술평론가나 미술사학자들의 작품 해석을 참고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감상 방식만 알면 그림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그림 볼 때 제일 간과하기 쉬운 것은 내 마음을 믿는 일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만약 당신이 그림을 보다가 마음에서 무언가 느껴졌다면 그림을 제대로 보고 있다. 대부분 사람은 과연 내가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이 화가의 의도에 맞는지 스스로 의심한다. 나도 한때 그랬다. 이런 생각은 그림을 안 보이게 만든다. 이러면 미술은 어렵다라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손철주는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에서 모든 예술작품 감상이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림 감상에 정답은 없다. 그림 감상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림을 보면서 느끼고 생각하면 되는 거다. 그림 (내가) 느낀 만큼 보인다.

 

    

 

 

 

 

 

 

 

 

 

 

 

 

 

 

 

*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

* [품절] 오시안 워드 TABULA: 현대미술의 여섯 가지 키워드(그레파이트온핑크, 2017)

* 오시안 워드 혼자 보는 미술관(RHK, 2019)

 

    

 

 

사실 오래전에 주관적인 예술작품 감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미술 전문가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를 쓴 존 버거(John Berger). 이 책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9)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핵심을 함축한 문장이다. 이 책에서 버거는 회화를 비롯해 사진 · 광고 등 우리를 둘러싼 이미지를 다르게 보는 방식에 주목한다. 그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이 하나의 정형화된 상식으로 알려지는 것에 경계한다. 그러면서 상식으로 굳어진 예술작품을 보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상식은 우리가 그림을 보면서 느낀 것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림 한 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느낌은 제각각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과의 관계는 항상 변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을 보려면 그것(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관련된 상식과 전문가의 의견들(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분리해야 한다. 그 순간에 우리는 말(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가 되어 예술작품을 본다.

 

오시안 워드(Ossian Word)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핵심을 이어받아 현대미술 작품과 고전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그는 TABULA: 현대미술의 여섯 가지 키워드(그레파이트온핑크) 혼자 보는 미술관(RHK)을 썼다. 이 두 권의 책에 나오는 핵심 키워드는 백지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인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예술작품을 감상하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 타인의 견해에 눈치 보거나 비교하지 않고 내 시선과 감각을 믿으면서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다.

    

 

    

 

 

 

 

 

 

 

 

 

 

 

 

* 케네스 클라크 그림을 본다는 것(엑스오북스, 2012)

 

  

 

모든 미술 전문가가 주관적 작품 감상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자신의 책 그림을 본다는 것(엑스오북스)에서 미술을 막대사탕처럼 한순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림이 주는 기쁨을 오랫동안 느끼려면 그림에 관해 배우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케네스 클라크의 그림 감상 방식은 처음에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오시안 워드의 그림 감상 방식의 시작 단계와 비슷하다.

 

그림 전체와 세밀한 부분까지 다 살펴봤으면 그림에 대한 약간의 정보(화가의 생애, 그림이 화가의 생애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는 정보 등)를 찾아본다. 이런 지식을 참고하면서 다시 한 번 그림을 본다. 그러면 혼자 그림을 보면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케네스 클라크가 제시한 그림 감상 방식은 나쁘진 않다. 하지만 그림을 제대로 보면서 즐기려면 그림에 대한 정보가 꼭 있어야 하는가. 이것은 마치 그림이라는 문제를 보다가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답(정보)을 찾아보는 상황이다. 예술작품을 실컷 보다가 전문가의 작품 해설을 접하고 나면 허탈감이 느껴져서 그림을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을 것이다. 케네스 클라크의 그림 감상 방식은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다.

  

미술 교육의 단점은 예술작품을 내 방식대로 보고 즐기는 방식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그림을 눈으로 보기에 앞서 교과서에 나온 그림 감상법을 배운다(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첫 문장을 변형했다). 이러면 그림 보는 일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틀려도 좋으니 즐겁게 논다는 생각으로 편안하게 그림을 보자. 그림을 보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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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20-03-1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맞히셨어욥! 저, 연배가 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옛날 사람은 맞아요. 심지어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구판 책으로 수업도 했었고 페이퍼도 작성했던 것 같아요. 사이러스 님이 짚어주신대로 그림은 느낀만큼 보인다고 저도 동감해요^^

cyrus 2020-03-14 23:46   좋아요 0 | URL
저는 나이만 젊은 ‘애늙은이’입니다. 저랑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요. 그래서 나쁘게 말하면 시대와 유행에 뒤쳐진 사람이에요. 이래서 저도 ‘옛날 사람’이죠. ^^;;
 
아주 특별한 사랑
루이자 메이 올콧 / 창작시대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1997년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 열람실에 붉은색 노트가 발견되었다. 그 노트 표지 안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힌 쪽지가 붙여져 있었다.

 

17세에 쓴 내 최초의 소설, 하이 세인트 보스턴에서.

 

노트 제목은 ‘The Inheritance(상속)이다. 이 노트를 쓴 사람은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이다. 노트의 정체는 올컷이 열일곱 살이었던 1849년에 쓴 첫 번째 소설의 원고였다. 이 소설은 아주 특별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었다. 번역자는 현재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공동 대표로 활동 중인 여성학자 임옥희.

 

 

 

 

 

 

 

 

 

아주 특별한 사랑17세기 소녀가 썼다고 믿을 수 없으리만치

훌륭한 성공작이다.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은, 상큼하기 그지없는 소설!

(Publisher’s Weekly)

 

 

작은 아씨들과 같은 성인 소설적 요소는 물론,

고딕풍의 세기말적 우수까지 묻어나는 감동적인 소설!

(New York Times)

 

 

 

 

아주 특별한 사랑의 여성 주인공 에디스 애들런은 가난한 가정교사다. 그녀는 해밀턴 부인의 저택에 살면서 일을 하는데, 부인의 조카 아이다 해밀턴은 귀족 남성들로부터 사랑받는 에디스를 미워한다. 하지만 에디스는 귀족 남성과의 연애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아이다의 계략에 빠져 절도범으로 오해받아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아이다가 에디스에게 누명을 씌운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밀턴 부인은 해고 결정을 취소하고 에디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에디스를 둘러싼 출생의 비밀도 밝혀진다. 에디스는 해밀턴 가의 상속자라였다. 그리하여 에디스는 해밀턴 가의 혈육이 된다. 에디스가 친구로 지내온 월터 퍼시 경의 구애를 받아들이면서 소설은 행복한 장면으로 끝난다.

 

아주 특별한 사랑은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의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에디스는 가부장적인 남성과 젠더 위계에 순응하는 로맨스 소설의 여성 주인공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그녀는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남자의 구애를 거절하는 이유를 소신 있게 밝힌다. 그러자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퍼시는 자신이 차라리 농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에디스는 남성들에게 늘 보호받는 아리땁고 연약한 여성이 아니다. 산책하다가 절벽에 떨어질 위기에 처한 해밀턴 부인의 딸 에이미를 구한 사람이 에디스다. 재미있는 점은 그녀들과 동행한 남자들의 반응이다. 퍼시와 함께 산책한 아서는 에이미의 친오빠다.

 

 

  그들은 황급히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뛰어갔다. 에디스가 시체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절벽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벼랑 아래로 내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파른 절벽의 옆구리는 강물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쪽에 에이미가 가느다란 넝쿨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중략]

  “어떻게 에이미를 구하지?”

  아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절망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저기까지 어떻게 내려가지? , 맙소사, 퍼시! 손놓고 앉아 죽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진정해, 아서. 에이미를 겁먹게 해서는 안 돼.”

  퍼시 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위아래로 열심히 살펴보면서 친구를 달랬다.

  “저 넝쿨에 의지해서 아래로 기어 내려갈 수도 있을 거야. 아니야, 에이미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기는 힘들어. 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나? 별다른 방법이 없을까?”

  “있어요.”

  에디스가 벌떡 일어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제4장 41)

 

 

남자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에디스는 내면에 숨겨진 용기와 번뜩이는 기지로 에이미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퍼시는 용감한 에디스에게 한눈에 반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통쾌함이 느껴지지 않는 페미니스트가 있을까. 열일곱 살 올컷은 남성 주인공이 위험에 빠진 여성 인물을 구출하는 기존 로맨스 소설의 통념을 비튼다. 남성 주인공보다 용감한 여성 주인공. 그리고 남성 주인공은 여성 주인공의 외모가 아닌 용감한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올컷은 청빈하고 엄격한 청교도 집안에서 자란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아주 특별한 사랑에서도 청교도적 가치를 강조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 소설은 올컷의 습작기에 나온 작품이다. 기존의 유명한 문학 작품을 참고하면서 글 쓴 작가의 흔적이 역력하다. 출생의 비밀, 청교도적 가치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 죽음의 위기에 처한 인물을 구해내는 용기, 부유한 남성과 결혼한 가정교사. 에디스의 이런 행적은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ë)가 창조한 제인 에어(Jane Eyre)와 흡사하다. 어린 올컷은 처음 써본 중편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원고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던 것일까. 첫 번째 소설이 되어야 할 아주 특별한 사랑148년 동안 올컷의 책상 서랍과 도서관에 잠들게 된 이유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올컷은 자신의 소중한 첫 작품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녀는 중편 가면 뒤에서(Behind a Mask, 1866)를 쓸 때 아주 특별한 사랑의 뼈대를 가져왔다.

 

 

 

 

 

Trivia

 

* 125

피그맬리언갈라티아

피그말리온(Pygmalion)갈라테이아(Gala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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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20-03-15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작은 아씨들> 신판이 나와서 구입했는데, 이 책도 구하고 싶네요.^^

cyrus 2020-03-15 18:17   좋아요 0 | URL
이 책 두 권이 알라딘 중고서점에 있어요. 그곳에 직접 가지 않고도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어요. 가격이 정말 싸요. ^^

비로그인 2020-05-15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렴한 중고는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택배비가 더 나가는 게 흠이죠. 그건 그렇고 이 작품이 별 3개정도 밖에(6점 정도?) 안 되나요? 치명적 사랑도 그리 높은 평점이 아니던데.. 작은 아씨들이야 어떤 출판사에서 나온 것과 관계 없이 8점대 이상은 기본인데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