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에 친구들과 식사한 이후로 식당이나 술집에 가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간 날은 대구에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을 때였다. 식당에 간 지 한 달 지났지만, 식당에서 친구들과 주고받은 대화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날 AB라는 친구와 함께 식당에 갔다. 밥 먹고 있다가 A가 사래에 걸려 기침을 했다. B는 기침한 A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 너 코로나에 걸린 거 아니야? 너 이제 가까이 오지 마.” B는 장난으로 A를 피하는 시늉을 했다. A는 웃으면서 밥 먹다가 기침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B“A가 중국에 간 적이 없는데 코로나에 걸렸겠냐? 농담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고 말했다. 다행히 B의 말은 씨가 되지 않았다. 현재 AB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잔기침하거나 가벼운 발열 증상만 느낀 사람들은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마음이 아찔했을 것이다. 코로나19에 걸리면 확진 환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본인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외출을 꺼리게 된다. 외출을 꼭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마스크를 쓰면 된다. 그렇지만 마스크는 연이어 나오는 기침 소리를 막지 못한다. 감기 환자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가 두렵다. 버스 안에서 기침하면 버스를 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받는다. 이런 상황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김영철 분)가 했던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궁예는 기침한 관료에게 네 머릿속에 마군(魔軍: 불도를 방해하는 악을 비유한 말)이 가득 찼다면서 호통을 친다. 그런 다음 관료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모든 사람이 코로나19에 상당히 예민해진 시기에 잔기침 한 번 했다가는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 쉽다. 누군가가 낸 기침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 모두 궁예가 된다. ‘이 시국에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저 사람의 몸에 코로나19가 있다.’ 궁예가 된 사람들은 잔기침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다만 눈빛으로 잔기침한 사람을 쏘아붙인다. ‘집에나 있지 왜 밖에 나온 거야?’

    

 

 

 

 

 

 

 

 

 

 

 

 

 

 

* 장 자크 상뻬 얼굴 빨개지는 아이(열린책들, 2018)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이 시선이 낙인을 찍기 위한 용도가 돼선 안 된다. 기침과 재채기를 코로나19와 관련된 위험 신호로 단정할 수 없다. 사소한 오해는 타인과의 정서적 거리를 멀게 만든다.

 

장 자크 상뻬(Jean Jacques Sempe)의 그림책 얼굴 빨개지는 아이(열린책들)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외톨이가 된 두 소년이 나온다. 마르슬랭 카이유는 시도 때도 없이 얼굴에 빨개진다. 그의 친구 르네 라토는 계속 재채기를 한다. 사람들은 얼굴 빨개진 마르슬랭을 볼 때마다 한마디씩 한다. 저 아이는 병에 걸린 게 틀림없어요.’ 마르슬랭은 남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늘 혼자 다닌다. 그는 자신과 똑같이 남들과 구별되는 아픔을 안고 사는 르네를 만나게 된다. 두 소년은 서로에게 연대감을 느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 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을만큼 친해진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편견을 그림과 텍스트로 보여준다. 코로나19가 언제 사그라질지 알 수 없지만, 코로나19가 만들어 낸 정서적 거리 두기는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코로나19의 증상인지 스스로 의심해야 하고, 확진 판정을 받기도 전에 자신의 몸 상태를 주위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날카로운 편견의 시선은 생각보다 아프고, 무섭다. ‘낙인이 된 편견은 상당히 오래 간다. 그것은 한 사람을 외톨이로 만들어 가두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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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8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3-18 22:26   좋아요 0 | URL
저는 손님이 많이 없는 식당에 가려고 해요. 오늘 시내에 가야 할 일이 있어서 제가 아는 식당에 갔어요. 역시 가보니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진주 2020-03-18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월초에 모임을 가진 후론 아무도 못 만났어요.
사람을 안 만나니 식당도 커피가게도 갈 일도 없군요.
뿐만 아니라 출근도 3주째 못 하고 있어요.
확진자도 아니고, 유증상자, 확진자와 접촉자도 아닌데 말이죠.
제 일이 그래요.
간간이 집 앞 언덕배기로 산책을 나갈 뿐이죠.
거리두기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저를 발견해요.....


cyrus 2020-03-18 22:27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장소에만 가지 않으면 돼요. 사람은 햇볕을 받아야 해요. ^^

레삭매냐 2020-03-1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구니가 아니라 ‘마군‘이었군요...

지금까지 마구니가 끼었어라고 알고
있었네요 ㅋㅋㅋ

코로나 때문에 유일한 낙인 달궁 모
임도 계속 연기되고 있네요 내 참~~

cyrus 2020-03-18 22:30   좋아요 0 | URL
제가 참석하는 우주지감, 레드스타킹 모임 모두 연기되었어요. 확정된 건 아니지만, 이번 달도 독서 모임은 없어요. ^^;;

moonnight 2020-03-1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저녁 술자리가 2월 17일이었네요. 오늘 퇴근하는데 술집으로 젊은이들 서너명이 들어가더군요. 젊음은 바이러스도 무섭지 않은 것인가 감탄했어요@_@;;;

cyrus 2020-03-19 16:56   좋아요 0 | URL
아마도 식당에 가는 사람들은 ‘무증상 전염’의 위력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
 
여성화가들이 그린 나체화의 역사
살레안 마이발트 지음, 이수영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누드화는 뜨거운 감자다. 예전에는 유명 화가나 사진작가가 누드화를 그리거나 누드사진을 찍으면 예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외설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196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영향이 커지면서 예술계에서 여성의 누드는 논쟁적인 주제로 떠올랐다. 나체 또는 누드 하면 여성 누드모델과 남성 화가를 제일 먼저 떠올리기 쉽다. 페미니즘 미술 비평가들은 걸작으로 알려진 누드화와 누드사진 속에 남성의 음란한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남성 중심 미술사를 페미니즘 시각으로 다시 쓰면서 역사의 뒤로 사라진 여성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여성 화가들이 그린 나체화의 역사는 여성 예술가(화가, 조각가)들의 손에서 탄생한 누드화와 누드 조각상을 역사적 및 사회적 맥락을 통해 살펴본다. 왜 우리는 누드(남성, 여성)를 소재로 한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여성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막아 버린 시대적 분위기와 여성 예술가에 대한 차디찬 편견이다. 여성 화가들이 그린 나체화의 역사누드화와 누드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기록이다.

 

고대 사회부터 남성의 몸은 이성, (),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여성의 몸은 철저히 열등한 몸으로 취급받았다. 사회의 기득권이 된 남성들은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남성 신학자들은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Eve)의 죄를 잊지 않았고, 그들은 여성의 몸을 욕망과 타락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남성 예술가들은 남성과 여성 누드 모두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타락하기 쉬운 여성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낀 국가와 교회는 여성이 누드를 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화가나 조각가가 되려면 제일 먼저 누드를 관찰하면서 습작을 해야 한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여성들은 누드를 참관할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그림을 배우고 그리는 길이 완전히 막혀버린 셈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누드를 그리려는 여성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누드를 보고 그린 여성을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비난했고, 해부학 지식이 반영되지 않은 어설픈 누드화를 보면서 비웃었다.

 

여성 화가들이 누드를 그리는 일은 가십거리였다. 남성 화가들만 독점하고 있던 누드화 열풍에 여성 예술가들이 설 자리는 적었다. 남성 화가들은 그녀들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들의 실험 정신까지 비난했다. 18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화가 줄리아 라마(Giulia Lama)는 그림 속 남성의 페니스를 정면으로 향한 상태로 그렸다. 남성 화가들은 그녀가 누드화 제작의 금기를 깨뜨렸다고 비난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시대에 활동한 안젤리카 카우프만(Angelica Kauffmann)은 초상화 제작으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화가였다. 그런 그녀도 누드화 제작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인기 있는 여성 화가를 바라보는 사교계의 따가운 시선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성 화가들은 누드화를 그리려면 온갖 비난과 추문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 책은 중세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누드화 및 누드 조각을 남긴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업적을 소개한다. 여기에 페미니즘 미술 비평가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면서 유명해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등이 나온다. 이 책은 서양미술사에 잘 언급되지 않은 일화까지 공개한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가 누드모델이 된 이유가 흥미롭고, 독일의 대문호 괴테(Goethe)가 여성을 위한 누드화 수업이 개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도 이채롭다.

 

이 책의 분량은 적다. 그러나 여성이 누드화를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너무나도 길다. 다행히 그녀들의 도전과 인고의 시간은 역사가 되어 이 한 권의 책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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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에 대구 시장은 시민 담화문을 통해 ‘328운동을 제안했다. 그는 코로나19의 조기 종식을 위해 모든 대구 시민에게 328일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과연 자가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할. 대구의 코로나19 확진 환자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자 집에만 있던 사람들이 슬슬 밖으로 나와 식당이나 카페에 간다. 식당과 카페도 밀폐된 공간, 사람이 밀집하기 쉬운 공간이라서 그곳도 안전지대라고 장담할 수 없다.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 2016)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한밤중,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 2016)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청미래, 2011)

 

 

 

혼자 사는 사람들은 2주를 어떻게 버틸까. 그들은 나름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지루해진다. 그렇다고 다시 재미있는 것을 찾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집도 여행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무슨 소리 하냐고 비웃을 게 뻔하다. 그런데 300년 전에 집, 그것도 자기 방에서 여행을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작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Xavier de Maistre).

 

메스트르는 결투를 벌이다가 체포되어 가택 감금형을 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가택 감금 기간은 총 42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메스트르는 집에서 한걸음도 나갈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는 대신 자신의 방에서 값싸고 알찬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이라는 여행기를 썼다. 이 젊은 여행자는 가택 감금형을 받기 전에 이미 내 방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면서 여유를 보인다. 그러면서 방 여행이 돈 한 푼 들지 않아서 좋다고 말한다. 여행을 위해 따로 옷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집에서 입는 파자마면 충분하다. 그는 방 여행을 소심한 사람에게 추천한다. 방 여행을 하면 강도를 만날 일도 없으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사고도 만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메스트르가 추천한 여행 코스는 방 안에서 마음대로 누비고 다니는 것이 전부다. 처음에 탁자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방 구석구석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방에 있는 모든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한정된 공간 속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면 평범한 사물들이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다. 계속 걸으면 지친다. 이럴 때 잠시 의자에 앉아 사색한다. 이것은 휴식이 아니다. 메스트르에게는 사색도 내 방 여행의 일부다.

 

42일간의 방 여행을 한 지 8년이 지나서 메스트르는 정든 방을 떠나 러시아로 가게 된다. 그는 러시아로 가기 전날 밤, 그것도 단 네 시간 동안 방 여행을 한다. 역시 괴짜답게 그는 창틀을 여행의 동반자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여행한다. 고요한 밤은 사색 여행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그는 밤의 어둠과 고요가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음성을 언어로 옮겨주는 통역사라고 한다. 그래서 속편 한밤중,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은 여행기라기보다는 명상록에 가깝다. 이 글은 메스트르가 네 시간 동안 방에 있으면서 생각한 것들에 대한 잡다한 기록이다.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여행의 기술(청미래)에 메스트르의 방 여행을 언급했다. 우리는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여행을 갈망한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메스트르의 방 여행이 야외 여행에 대한 편견을 깨뜨렸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방은 가깝고도 먼 여행 장소.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을 여행 장소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은 늘 야외로 향해 있다. 야외 여행만 생각하는 우리는 너무나도 가까운 방이 멀게만 느껴진다. 누군가는 방을 여행할 수 있다는 발상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방 여행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익숙한 것들에 대한 특별함과 소중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일이다. 몇 시간이든 며칠이든 내 방을 관찰하면 새롭게 느껴지는 사물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살면서 잊고 있었던 추억의 보물을 방에서 찾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방에서 발견한 보물이 예전에 숨겨둔 돈이라면 방 여행은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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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7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3-17 23:48   좋아요 0 | URL
요즘 산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요? 밀폐된 장소는 아니지만, 산길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니까 아무래도 접촉 감염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

moonnight 2020-03-18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동료들이 요즘 저를 부러워하네요. 원래 틀어박혀서 책읽는 것만 좋아했으니 답답하지 않겠다며^^;

cyrus 2020-03-18 22:35   좋아요 0 | URL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재택 근무하는 사람이나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거예요. ^^;;
 

 

 

스페인의 한 성당에 에케 호모(Ecce Homo)라는 제목의 오래된 벽화가 있었다. 에케 모호는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의 라틴어. 이 벽화에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성당 신도(그녀는 복원 작업을 해본 적이 없는 수공예 교사였다)는 벽화 복원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벽화를 복원하는 데 실패한다.

 

 

 

 

    

 

 

예수의 얼굴은 사라지고 원숭이처럼 생긴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남게 된 것이다. 스페인 언론은 이 벽화를 공개하면서 역사상 최악의 복원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벽화는 명성을 얻었다. 외국 네티즌들은 복원에 실패한 벽화를 이 원숭이를 보라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벽화를 보려고 성당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뜨거운 반응에도 예수를 존경하는 종교인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미술 전문가들은 예수의 얼굴이 사라진 벽화를 실패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치렁치렁한 긴 머리와 수염 없는 예수의 얼굴에 위엄이 사라졌으며 아름답지 않다고 느낀다. 머리카락 잘린 삼손(Samson)이 힘을 잃은 것처럼 수염 없는 예수는 영적인 권위를 잃어버린다.

    

 

 

 

 

 

 

 

 

 

 

 

 

 

 

 

* [절판] 다니엘라 마이어, 클라우스 마이어 (작가정신, 2004)

 

 

 

남자의 인상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 모양과 수염이다. 그러나 털의 중요성은 그 정도로 단순하지만 않다. 남성의 털은 남성성의 상징으로, 남성성은 힘의 상징으로, 그 힘은 권위의 상징으로 점점 복합된 이미지를 형성한다. ‘체모의 문화사라는 부제가 달린 (작가정신)은 털에 얽힌 인간의 문화와 미적 가치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준다.

 

수염은 단순히 인상을 만들어주는 털에 그치지 않는다. 수염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남자들의 체면과 권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수염 옹호론자면도 옹호론자는 오랜 기간 동안 서로 힘을 겨뤄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수염이 권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파라오(Pharaoh)만이 수염을 기를 수 있었다. 남성 종교인들은 예수의 남성성과 권위를 향상하기 위해 수염을 예찬했으며 자신들도 수염을 길렀다. 반면 면도를 지향하는 종교인들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 사제들은 털을 세속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머리카락과 눈썹을 밀었다고 한다. 그들은 신의 몸에 털 한 올이 없다고 믿었다. 학자들도 수염 대 면도의 대립에 동참했다. 수염을 지성의 상징으로 보는 학자들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한때 수염 기르기를 거부하는 학자들의 주장도 인기를 얻었다.

    

 

 

 

 

 

 

 

 

 

 

 

 

 

 

 

* 크리스토퍼 올드스톤-모어 수염과 남자에 관하여(사일런스북, 2019)

 

 

 

은 현재 절판된 책이다. 체모에 관한 흥미로운 역사를 보여준 의 빈자리를 채운 책이 수염과 남자에 관하여(사일런스북)이다. 수염과 남자에 관하여도 체모의 문화사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수염과 면도에 중점을 맞춘다. 수염과 남자에 관하여보다 분량이 작다. 하지만 의 공동 저자는 주류 역사가 외면한 여성의 체모, 머리카락, 대머리에 관심을 보인 옛사람들의 기록에 주목한다.

    

 

 

 

 

 

 

 

 

 

 

 

 

 

 

* [절판] 베아트리스 퐁타넬 치장의 역사(김영사, 2004)

 

 

 

남자들은 자신의 얼굴에 기른 수염을 과시했지만, 여성이 수염을 기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들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위해 수염뿐만 아니라 체모를 기르지 않는 것을 권장했다. 이로 인해 여성은 체모를 언제나 수치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인식했다. 치장의 역사는 여성의 체모 제거가 가장 오래된 화장 문화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로마 귀부인들은 온 몸과 얼굴에 난 털은 물론 콧구멍에 난 털까지도 모조리 뽑았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부인들은 고귀함의 상징이었던 넓은 이마를 만들고자 눈썹과 두개골 상부 머리카락을 뽑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 <모나리자>를 보면 르네상스 시대의 미인상을 확인할 수 있다. 여인의 입가에 띤 은은한 미소를 주목한 사람들은 여인의 얼굴에 눈썹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 쉴라 제프리스 코르셋(열다북스, 2018)

    

 

 

의 공동 저자는 모든 문화권에 나타난 여성의 제모 제거 풍습을 고문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제모는 길고 긴 여성 억압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탈 코르셋을 지향하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고 있다. 국내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선호하는 호주의 여성학자 쉴라 제프리스(Sheila Jeffreys)는 미용 관습이 여자의 순종을 표시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녀가 말한 순종은 여자가 남자를 위해 성적으로 복무하려는 의지와 성적 복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 모두를 의미한다. 대부분 남자는 여성의 매끄러운 피부를 선호한다. 그리고 털이 없는 여성 겨드랑이와 음부 페티쉬(fetish)가 있는 남자들이 있다. 쉴라 제프리스를 포함한 탈 코르셋 지지자들은 여자는 이런 남자들을 위해 제모를 하게 되고,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성성을 실천할 것을 강요받는다고 주장한다.

 

 

 

 

 

 

 

 

 

 

 

 

 

 

 

 

 

 

 

* [품절] 키레네의 시네시오스 《대머리 예찬(21세기북스, 2005)

 

   

 

수염 대 면도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돼서 그런지 머리카락 대 대머리의 역사가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국내 네티즌들의 키보드 배틀(온라인 언쟁)을 부추기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대머리 또는 탈모 인에 대한 차별 문제이다. 대머리와 탈모 인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탈모를 희화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머리카락 없는 사람의 심리를 위축시킨다고 주장한다. 사실 머리카락 대 대머리논쟁은 탈모 환자가 급격히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머리카락 대 대머리의 역사도 수염 대 면도의 역사만큼 오래 됐다. 고대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키레네의 시네시오스(Synesios of Cyrene)는 탈모와 대머리를 예찬한 최초의 인물이다.

 

시네시오스는 대머리였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자 경쟁자인 황금 입의 디온(golden-mouthed, ‘황금 입은 별명이고, 본명은 ‘Dio Chrysostom’이다)이 쓴 글인 <머리카락 예찬>을 보자 분노한다. <머리카락 예찬>은 말 그대로 머리카락이 풍성한 사람을 예찬한 글이다. 시네시오스는 <머리카락 예찬>에 대한 반론으로 대머리 예찬(21세기북스)을 쓴다. 그는 이 글에서 대머리가 지성의 상징인 이유를 열거한다. 그런데 그가 내세운 몇 가지 이유를 지금 보면 억지스럽고 논리적이지 않다. 시네시오스는 일 년 내내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쬔 대머리는 강철 같이 단단해져서 모든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태양 자외선 때문에 피부가 상할 수 있어서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다.

 

강철 대머리의 우수성을 주장한 시네시오스의 주장을 재반박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비록 구전된 일화이지만,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스킬로스는 하늘에 떨어진 거북 등껍질에 맞아 죽었다. 독수리는 포획한 거북의 딱딱한 등껍질을 깨기 위해 거북을 바위에 떨어뜨렸고, 하필 거북이 아이스킬로스의 머리를 명중한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는 햇볕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였다고 한다. 아마도 독수리는 아이스킬로스의 대머리를 단단한 바위로 보였던 것 같다. 위대한 비극 작가답게 그는 최후의 작품인 대머리의 비극을 만들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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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20-03-17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날짜에 저도 털에 대한 페이퍼를 쓴거로군요~저는 머리털^^
그런데 성당 벽화는 종교를 떠나서 봐도 복원 너무 못 한 거 아닌가요? ㅎㅎ
복원이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켜 버렸네요..화풍은 앤서니 브라운 풍?

cyrus 2020-03-17 18:06   좋아요 0 | URL
저는 예수를 남성도, 여성도 아닌 무성의 존재로 묘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남성 종교인들은 예수가 남성이라는 근거를 내세워 권위를 획득했어요. 물론 기독교인들은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
 
괴기X-파일
이반 투르게네프 외 / 문학수첩 / 1995년 7월
평점 :
절판


 

 

 

공포 X파일괴기 X파일1995년에 나온 책이다. 부제는 세계의 대작가가 쓴 공포 · 괴기 걸작선이다. 두 권의 책 모두 부제가 같다. 1995년에 나는 국민 학생이었다. 미국 드라마 <The X File>199410월부터 KBS에서 방영되었다.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후부터 방송, 언론, 출판 모든 업계에 ‘X 파일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괴기 X파일이다. 짝을 맞추려면 공포 X파일도 있어야 하겠지만, 공포 X파일에 있는 작품 대부분은 다른 번역본에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공포 X파일을 당장 구매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내가 처음 보는 단편소설 서너 편이 공포 X파일에 포함되어 있어서 사지 않을 수가 없다.

 

 

 

 

 

 

대작가다운 기상천외한 발상, 치밀한 구성

세계 전통 호로물(...)의 진수!

 

 

 

    

 

괴기 X파일에 총 열두 편의 이야기가 있다. 이 중에서 한 편은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괴담(‘유령의 구두’)이다. 괴기 X파일수록작 중에 새로 번역되어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

 

    

 

* 탑 속의 방(Room in the tower, 1912)

에드워드 프레더릭 벤슨(Edward Frederic Benson)

탑 실 (뱀파이어 걸작선)

 

 

* 저주받은 일가(The Old Nurse’s Story, 1852)

엘리자베스 개스켈(Elizabeth Gaskell)

늙은 보모 이야기 (세계 호러 걸작선 2)

 

 

* 복수의 불(The Cone, 1895)

원뿔 (허버트 조지 웰스: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

솔방울 (세계 호러 걸작선 2

 

 

* 이상한 인형(The Dancing Partner, 1928)

제롬 K. 제롬(Jerome Klapka Jerome)

댄싱 파트너 (세계 호러 단편 100)

 

 

* 보이지 않는 지배자 호를라(Le Horla, 1885)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오를라 (기 드 모파상: 비곗덩어리 외 62)

 

 

 

괴기 X파일의 번역자는 작품 원제와 발표 연도를 표기하지 않았다. 이러면 공포 소설을 수집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특히 우리말 제목만 보고 이 작품이 국내 초역인지 아닌지 단번에 확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제와 다른 우리말 제목이 붙여진 번역작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 나는 새벽에 구글(Google)을 이용해서 작품 원제와 발표 연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영국 괴담 유령의 구두출처는 확인하지 못했다.

 

 

 

 

 

 

 

악마의 유혹

러시아어 원제: Pokhozhdeniya podporuchika Bubnova (1842)

The Adventures of Second Lieutenant Bubnov

Bubnoff and the Devil

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국내 초역. 투르게네프의 초기 작품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악마는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익살스럽다.

 

이반 안드레비치 부브노프 중위(번역본에는 소위라고 적혀 있는데, 오역이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 없는 평범한 인물이다. 어느 날 부브노프는 악마를 만난다. 악마는 생긴 건 무서워도 성격이 유쾌하다. 악마는 부브노프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그 집에 악마의 할머니와 악마의 손녀가 살고 있다. 손녀의 이름은 바베비보부. 손녀는 부브노프에게 사랑한다면서 고백한다. 하지만 부브노프는 손녀의 고백을 거부한다.

 

할머니는 부브노프와 바베비보부를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 여기에 악마도 껴서 결혼을 부추긴다. 그 와중에 바베이보부는 부르노프를 잡아먹고 싶어서 입맛을 다시고, 부프노프는 자신이 악마와 결혼한 이후의 일을 상상한다. 그는 한가하게 악마와 결혼해서 태어난 자녀의 사회적 신분이 어떻게 될지 생각한다. 악마에게 잡아먹을 위기가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부브노프는 속물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이제야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부브노프는 악마의 집을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덫에 걸린 먹잇감을 그냥 보내줄 악마들이 아니다. 악마들은 소위의 몸을 갈가리 찢어서 잡아먹는다.

 

다음 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은 길에 누워 있는 부브노프를 발견한다. 의식을 회복한 부브노프는 악마와 만났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는 내가 만일 나폴레옹이라면, 악마를 모조리 없애 버리겠어!”라고 큰소리친다. 여기까지만 보면 해피엔딩이지만, 소설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는 장수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의 계급은 중위였다.

 

 

 

 

 

 

 

죽은 자의 약속

Keeping His Promise (1906)

앨저넌 블랙우드(Algernon Blackwood)

    

 

 

국내 초역.

 

에든버러 대학교 만년 4학년생 마리오트(Marriott)는 졸업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열심히 공부한다. 어느 날 마리오트의 하숙집에 필드(Field)라는 친구가 불쑥 찾아온다. 필드는 마리오트와 어렸을 적에 사립학교에 같이 다닌 사이였다. 마리오트는 반가운 마음에 시험공부를 제쳐두고 필드를 위해 음식을 차린다.

 

마리오트는 먼 길 오느라 피곤한 필드를 방에 재운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런데 팔에 통증을 느낀다. 마리오트는 피곤해서 눈 좀 붙이려고 방에 들어간다. 그 순간 마리오트는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방에 자고 있어야 할 필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필드가 누운 침대에서 숨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마리오트는 방 구석구석 살펴보지만, 아무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은 마리오트는 흥분한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잠깐 외출한다. 마리오트가 다시 하숙집에 돌아가 보니 마리오트의 대학 친구 그린(Greene)이 있었다. 그린은 통증이 있는 마리오트의 팔을 살펴보다가 팔뚝에 난 상처를 발견한다. 마리오트는 상처와 관련된 과거의 일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에 마리오트와 그린은 우정의 서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팔뚝에 상처를 냈고, 상처에 난 피를 서로 교환했다. 그 과정이 상당히 위험한데, 마리오트가 자기 피 한 방울을 필드의 상처에 떨어뜨리고, 필드도 자신의 피 한 방울을 마리오트의 상처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린: 도대체 그런 짓은 뭣 때문에 했지?) 두 사람은 먼저 죽는 사람이 살아 있는 친구에게 나타나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리오트는 어린 시절의 서약을 잊고 있었다.

 

마리오트는 누이에게 편지를 보내 그린의 근황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일주일 후에 마리오트는 누이의 답장을 받았다. 답장에 있는 내용에 따르면, 필드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에게 쫓겨난다. 한순간에 무일푼 신세가 된 필드는 집을 떠나지 않고 지하실로 내려간다. 필드는 지하실에서 지내다가 굶어 죽는다. 답장을 읽은 그린은 필드가 죽은 날짜가 13일이었고, 필드가 마리오트를 만나러 온 날도 13일이었다고 말한다. (알고 보니, 13일은 금요일이었다하더라‥….)

 

 

 

 

 

 

 

노퍽에서 겪은 기이한 사건

My Adventure in Norfolk (1924)

A. J. 앨런(A. J. Alan)

    

 

 

번역본의 작가 소개에는 영국의 작가, 약력 미상이라고 달랑 아홉 글자로 된 문장이 적혀 있다.

    

본명은 레슬리 해리슨 램버트(Leslie Harrison Lambert, 1883~1941). A. J. 앨런은 필명이다. 2차 세계 대전에 해군 정보부에 근무했다. 램버트는 자신이 직접 라디오에 출연하여 완성된 단편소설을 낭독하면서 공개했다. 사후에 단편 선집 <The Best of A. J. Alan>이 출간되었으나 현재는 잊힌 작가가 되었다.

    

화자는 노퍽에 있는 별장에서 겨울 휴가를 보낸다. 별장은 너무 조용하고 외딴곳에 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밤, 자동차 한 대가 별장 근처에 선다.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시동이 멈춘 것이다. 운전자는 젊은 여자다. 그때 마침 멀리서 우유 통을 가득 실은 화물차가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화물차 운전자도 여자를 돕겠다고 나선다. 화자와 화물차 운전자는 여자의 차를 별장 차고에 넣는다. 화물차 운전자는 여자가 원한다면 화물차에 태워주겠다고 말한다.

 

날씨가 풀릴 때까지 두 남자는 별장 안에 들어가 몸을 녹이면서 위스키를 마신다. 그러나 여자는 화물차 운전사에게 얼른 가자고 재촉한다. 결국 운전사는 바깥에 나가서 시동을 건다(음주 운전을 해서 사람을 상해에 이르게 하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 원 이상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화자는 여자에게 돈이 충분한지 묻는다. 여자는 문제없다고 대꾸한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난 후에 화자는 여자가 탄 차를 확인한다. 화자는 차 안에 총상을 입어 죽은 남자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는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옷을 뒤져보지만, 건진 건 지갑에 있는 9파운드 지폐다.

 

다음 날 아침에 화자는 차고로 들어간다. 그런데 차고에 있어야 할 여자의 차와 시체 모두 사라졌다. 화자는 경찰에 신고하고, 여자가 손댄 유리잔은 자신이 따로 챙긴다. 그는 유리잔을 가지고 지문과에 가서 유리잔에 남아 있는 지문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한다. 3분 만에 여자의 정체가 밝혀진다.

 

여자는 절도 전과가 있는 조직 폭력단의 일원이었다. 두 폭력단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여자의 남자 친구가 총에 맞았다(여자의 남자 친구도 조직 폭력단의 일원인지 아니면 폭력단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여자를 잘못 만나 억울하게 죽은 건지 소설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여자는 남자 친구의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자기 차에 실었고, 노퍽을 지나다가 엔진 고장을 일으켰다. 여자는 차와 시체를 남의 차고에 맡겨 두고는 화물차를 타고 도망쳤다. 그러나 그녀가 탄 화물차는 사고가 났고, 운전사와 여자 모두 사망했다.

 

화자는 운전수과 여자를 만난 일이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자 여자의 사망 소식을 알려준 친구는 반문한다.

    

 

 어젯밤 사건? 미쳤어? 19192월에 일어난 일이야. 자네가 말하는 그 사람들은 죽은 지가 벌써 수십 년은 된다고!”

  “뭐라고?”

  그럼 지갑에 들었던 9파운드 지폐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백지 명함의 비밀

 

The Most Maddening Story in the World (1920)

랠프 스트라우스(Ralph Straus)

 

    

 

 

번역본에 사망 연도가 ‘?’로 되어 있다. 랠프 스트라우스는 1882년에 태어나 1950년에 사망했다. 그는 1928년에 찰스 디킨스 전기를 발표했다.

 

 

 

 

 

 

 

 

 

야수

The Brute (1906)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유령 우편마차

The Ghosts of the Mail (1837)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두 편 모두 국내 초역이다. 글의 분량이 길어지는 관계로 줄거리 요약을 생략한다.

 

조셉 콘래드는 항해와 창작 활동을 병행한 바다 사나이. 야수에 나오는 인물들도 항해와 관련된 일을 한다. 조셉 콘래드의 소설을 안 읽은 지 오래됐고(유일하게 읽은 그의 소설이 암흑의 핵심이다),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모른다. 나중에 콘래드의 소설을 읽는 날이 오면 좀 더 자세하게 야수를 다시 소개하겠다.

 

찰스 디킨스는 ‘GALA’에 포함될 후보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단편으로 된 디킨스의 유령 소설과 공포 소설들(국내에 번역된 것)을 한 번에 모아서 소개할 예정이다.

 

 

 

 

 

Trivia

 

작가 소개E. F. 벤슨을 캔터베리 대주교 아서 크리스토퍼 벤슨의 동생이라고 잘못 언급된 내용이 있다. 아버지 E. W. 벤슨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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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3-16 22:01   좋아요 0 | URL
노스트라다무스... 추억의 이름이네요. 옛날에 나온 문제집 이름이 노스트라다무스였어요. ^^;;

카스피 2020-03-16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옛날에 본 기억이 나는 책인데 아마 시골집 박스 어딘가에 있을것 같군요^^;;;

cyrus 2020-03-16 22:02   좋아요 0 | URL
구하기도 힘들고, 찾기도 힘든 책이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