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은 역사 - 한국 시각장애인들의 저항과 연대
주윤정 지음 / 들녘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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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장애 역사(disability history)는 비장애인에게 생소한 분야이다. 장애 역사에 대한 생소함을 풀어줄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비장애인들은 장애 역사를 다룬 책이 단 한 권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보지 못한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책’, 즉 미출간된 책이라는 의미로 귀결된.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다른 나라에 비해 늦은 편이지만, 우리나라도 장애 역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연구 성과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비장애인은 이런 자료를 접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비장애인들의 눈에는 장애 역사를 정리한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책이 보이지 않으니까 역사 속에 있는 장애인들의 삶마저 보지 못한다.


보이지 않은 역사는 비장애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보이지 않은 역사의 저자는 시각장애인 구술사 조사를 하기 위해 다양한 집단에 속한 시각장애인들을 만났다안마 일에 종사하는 시각장애인(안마 맹인), 점을 보는 시각장애인(점복 맹인), 구걸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시각장애인(구걸 맹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맹인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승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저자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어떻게 역사를 기록했고, 대대로 전승해왔는지를 살핀다.


시각장애인의 역사에 차별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속에 저항연대도 있다. 차별, 저항, 연대. 이 세 개의 단어는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어느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된 주류 역사에 사회적 약자들의 역사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사회를 재편한 근대화를 중요하게 보는 역사학자들은 장애인을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집단으로 인식했다이러한 인식이 반영된 단어가 바로 문맹이다글자를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은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 되었. 


근대화는 계몽(enlightenment)과 궤를 같이 한다근대성이 시작되자 눈뜬 채 잠든 무지몽매한 대중을 깨워주는 시각 매체와 활자 매체(신문, 영화, 신식 문화를 소개한 인쇄물)가 보급되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시각 매체와 활자 매체에서 나오는 빛을 볼 수 없었다.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선 학자와 서구 선교사들은 시각장애인을 불쌍하고, 무능한 존재로 인식했다. 이때부터 시각장애인을 돕는 선교사들의 자선 활동과 조선을 통치한 일제의 시혜 정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을 통치한 일제의 시각장애인 보호 정책은 자신들의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을 알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포섭당한 시각장애인들은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는 존재’ 또는 근대화에 맞춰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식민화, 탈식민화, 근대화의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독자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차별에 맞서 저항해왔으며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안마 사업권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몸을 줄로 묶어 다니면서 투쟁했다. 시각장애인의 구술 문화는 시각장애인 공동체를 설명해주는 집단 기억을 형성하게 했고, 공동체의 유산이 대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면서 역사가 되었다. 역사 속에 남은 시각장애인들의 모습은 무능한 사회적 약자가 아닌 사회 변화와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주체적 인간이다보이지 않은 역사는 주류 역사 서술 방식에 익숙한 독자와 다양하고 역동적인 장애인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비장애인의 눈을 트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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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게레멕 브로니슬라프 브로니슬라프 게레멕(Bronisław Geremek)

* 21

 

엘레나 그로스 노라 엘렌 그로스(Nora Ellen Groce)

* 71각주

 

거대한 변혁』 →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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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1-03-02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의 폭넓은 독서에 감탄합니다!
이런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드네요.

cyrus 2021-03-03 11:24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책입니다. 책을 만든 출판사가 나름 인지도가 높은 편인데, 독자들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앤드루 포터(Andrew Porter)의 소설집을 읽은 김영하 작가와 달궁인들은 포터의 대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약칭 빛과 물질’)에 찬사를 보냈지만, 나는 호평 일색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달의 궁전 2월의 책]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문학동네, 2019)





빛과 물질의 화자인 헤더는 대학생이다. 헤더는 서른 살 연상인 물리학과 교수 로버트의 초대를 받아 그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한다. 헤더는 로버트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로버트를 의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나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 듯 보였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래쪽을 흘끗 내려다보는 살짝 불안한 습관이 이상하게도 내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농담을 주고받기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중에서, 90~91쪽)



타인을 쉽게 믿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호의를 의심할 정도로 각박해진 요즘 현실을 생각하면 로버트의 초대에 선뜻 응하는 헤더의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다내가 헤더의 정서적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지난달에 읽은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의 단편소설 어린 가정교사』(The Little Governess)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파티(궁리, 2021)




맨스필드의 소설에 나온 영국인 가정교사는 독일에서 일하게 되어 그곳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다. 그런데 가정교사는 혼자 외국에 가본 적이 없고, 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정교사 소개소에 일하는 여자가 독일에 가려는 가정교사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에게 충고한다.



 “나는 항상 여자들에게 누군가를 믿기보다는 처음에는 의심하는 게 낫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악의를 품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게 선의를 품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말해주곤 해요좀 너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린 영악하게 세상물정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렇죠?”

 

(어린 가정교사중에서, 55~56)



가정교사는 자신이 난감한 상황에 부닥쳐 있을 때 도움을 준 친절한 노인에게 호감을 느낀다. 노인은 자신의 명함을 가정교사에게 건네준다. 명함에 적힌 노인의 직업은 참사관(Regierungsrat, 공무원)이다. 노인의 정체를 파악한 그녀는 그가 문제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노인의 초대를 받아 그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간다. 집안일을 하는 가정부를 제외하면 노인도 로버트 교수처럼 혼자 사는 남자다. 노인은 가정교사 앞에서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가정교사에게 키스 한 번 해달라고 요구한다. “나이 든 남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린 가정교사중에서, 74) 노인은 강제로 가정교사에게 입맞춤하고, 깜짝 놀란 그녀는 밖으로 도망친다.


누군가를 믿기 보다는 의심하라. 가정교사 소개소 직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타인에 향한 의심의 눈길이 그 사람의 참된 모습과 진심을 훼손하는 흉기가 돼선 안 된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영악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 그중 몇몇은 본심을 숨긴 채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다닌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영악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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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3-02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리뷰는 여러모로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는구려

cyrus 2021-03-02 17:12   좋아요 0 | URL
타인을 언제까지 의심해야 하고, 그 의심을 언제 거둬야할지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계속 의심만 하다가는 타인의 진심을 못 볼 수 있거든요. 그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야 진심을 뒤늦게 확인할 때가 있어요. 아무튼 사람을 만나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아요. ^^;;

수이 2021-03-02 17:14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 마음이 제 마음입니다

stella.K 2021-03-02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앤드루 포터는 좀 호불호가 있는 것 같아.
나의 경우 몇몇 단편은 나름 괜찮았는데
나머지는 지루해서 걍 중고샵에 팔아버렸지.ㅋ

cyrus 2021-03-02 17:1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제가 괜찮게 본 앤드루 포터의 소설은 <구멍>, <피부>, <코네티컷>이었어요. ^^
 
도시를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과학 - 거대한 도시의 숨은 원리와 공학 기술
로리 윙클리스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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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도시는 끊임없이 변하는 거대한 유기체다. 사람의 온기가 없는 건물 한 채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땅에서 태어난다. 인간이 도시를 만들었지만, 도시는 그곳에 거주하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다아일랜드 출신의 물리학자이자 과학 저술가인 로리 윙클리스(Laurie Winkless)는 도시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그는 2년 동안 모험가처럼 도시 구석구석을 누볐고공학자들을 만났다. 로리 윙클리스의 도시를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과학(Science and the City, 2016)은 도시의 생명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시 본격 해부서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도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공학 기술과 과학 원리들을 알려준다이 책은 2017년에 번역된 사이언스 앤 더 시티의 개정판이다.


초고층 빌딩은 도시를 지탱하는 골격이다. 빌딩 없는 도시는 속 빈 강정과 같다. 이 책의 첫 장에 빌딩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도시공학 전문가들이 알 법한 전문 용어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공학 비전공 독자는 첫 장부터 진도를 나가지 못해 난감할 수 있다그렇다면 1장을 과감히 포기해도 된다저자는 본인이 직접 확인한 시시콜콜한 정보들을 설명하는 데 열을 올린다저자도 정확한 사실을 알려고 하는 자신의 열정이 인간적으로 정나미 떨어지게 한다고 인정했다. 소화하기 힘든 내용이 있으면 넘어가도 좋다.


2장부터 읽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흥미가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2장(전기), 3장(상하수도), 5장(자동차)을 주목하라. 전기가 없으면 도시 전체는 마비된다. 하지만 전 세계의 모든 도시가 화석연료를 태워서 전력을 얻는 방식에만 의존하면 하나뿐인 지구는 마비된다. 저자는 지속가능한 도시를 꿈꾼다. 그래서 과학자와 도시공학자들이 생각하는 도시의 미래상과 도시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그는 도시 발전에 기여한 과학적 성과들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전문가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분석한다.


저자는 친환경 대안 기술로 주목받는 재생에너지(풍력에너지, 태양에너지, 바이오 연료)와 친환경 전기 자동차에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재생에너지와 전기 자동차가 도시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풍력 터빈에 나오는 소음과 건강 문제의 상관성을 알아보려면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여 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전기 자동차 한 대가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부품의 재료는 희토류 원소이다. 희토류 원소는 주로 아프리카 국가의 토양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것을 얻으려면 땅을 파헤쳐야 한다. 전기 자동차가 움직일 때 필요한 전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알고 보면 전기 자동차는 친환경적이지 않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시시콜콜하게 정확한 것을 사랑한다고 밝혔다(178쪽). 하지만 좀 더 보충해야 할 내용들이 있다. 독자도 그가 제시한 내용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살펴봐야 한다. 그는 이산화티타늄(이산화타이타늄)이 오염 물질 분해에 유용한 물질이라고 주장한다(44~45, 56). 이산화티타늄이 햇빛과 산소에 노출되면 공기를 정화하는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저자는 이산화티타늄을 묻힌 거대한 공기 정화 시설이 설치되면 도시의 하늘이 맑아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산화티타늄의 단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산화티타늄을 장기간 흡입하면 기침, 호흡 곤란, 폐 기능 저하를 유발할 수 있다. 이산화티타늄 분진이 폐에 축적된 사례가 보고되었다. 염색공정에서 이산화티타늄을 매염제로 사용한 핀란드 노동자들의 폐에 부작용이 나타났다(이산화티타늄의 유해 사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이 제공하는 독성 정보를 참고하길 바란다).


상하수도의 오존 소독법에 대한 저자의 설명 역시 장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132~133). 오존 소독 방식에도 단점이 있다. 오존 소독은 염소 소독보다 설치비용과 유지비가 많이 나온다. 수온이 높아지면 오존 소비량도 많아지는데, 대기로 방출된 오존은 호흡기에 유해한 독성이 있다. 저자는 또 물에 남은 오존은 제거된다라고 간단하게 언급했다. 물에 남은 오존은 빠른 속도로 분해되지 않는다. 서서히 분해된다.


저자는 4장에서 도시의 교통 취약 계층’, 즉 엔진 없이 다니는 사람들을 도울 교통 기술을 소개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도시의 교통 취약 계층보행자, 고령자,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비장애인이 간과하기 쉬운 도시의 교통 취약 계층은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한 장애인이다. 혹자는 보행자와 고령자에 장애인도 포함되어 있다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보행자와 고령자는 비장애인이다.


원서는 2016년에 나왔다그는 한국도 자기부상 열차를 운행한 아시아 국가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저자는 중국과 일본이 자기부상 열차를 상용화해서 운행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라고 언급했다(297). 내가 번역자였으면 여기에 한국의 자기부상 열차를 언급한 주석을 달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용 자기부상열차는 201623일 인천에 개통했다. 기점은 인천공항1터미널역이고, 종점은 용유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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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은 2020년 11월 18일에 발행된 3쇄다. 



* 262쪽: 니산 닛산(Nissan)

 

* 286, 308쪽: 토튼햄 토트넘(Totten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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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마지막 일요일은 달의 궁전(약칭 달궁’)비대면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다‘zoom’ 프로그램을 이용하며 오후 2시부터 화상 채팅이 시작된다. 나는 독서 모임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서 책방 읽다 익다에 갔다. 읽다 익다는 건물을 확장 이전하여 올해 21일에 문을 열었다. 책방에 갈 땐 버스를 타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하지만 그 한 시간도 소중하다. 버스 안에서 책 50쪽 분량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책방에 자주 못 가지만, 생각날 때마다 그곳에 간다














 

새로 문을 연 읽다 익다는 넓고 쾌적하다. 과거의 읽다 익다의 내부 공간이 아주 좁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이 책방지기가 운영하는 여러 모임 장소로 이용되다 보니 나 같이 혼자 오는 손님은 책방 내부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새로운 읽다 익다에 방음문이 있는 다인용 회의실이 생겼다. 이제 이곳에서 모임과 강연을 진행할 수 있다. 차와 커피를 마시러 오는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탁자도 마련되어 있다. 읽다 익다는 책방에 처음 오는 손님과 책방 모임 참석자 모두를 위한 슈필라움(Spielraum: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면서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새로운 읽다 익다를 열기 위해 책방지기는 커피 만드는 법을 다시 배웠다. 읽다 익다의 시그니처(signature) 음료는 아인슈페너(Einspänner).


















[달의 궁전 2월의 책]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문학동네, 2019)


3.5점  ★★★☆  B+




 

책방 소개는 이 정도까지만 하고, 본격적으로 달궁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월의 달궁 도서는 앤드루 포터(Andrew Porter)의 단편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약칭 빛과 물질’)이다십 년 전에 21세기북스 출판사빛과 물질을 출간했지만, 책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절판되었다. 김영하 작가가 이 책을 언급하면서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문학동네 출판사가 재출간했다.


빛과 물질총 열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었다. 달궁인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작품은 당연히 표제작 빛과 물질이었고, 그 다음으로 구멍강가의 개였다빛과 물질은 물리학과 종신 교수와 서른 살 연하인 제자의 만남을 그린 이야기다. 소설의 화자인 헤더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약혼자가 있지만, 로버트 교수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교수와 제자 간의 만남은 호불호가 엇갈리는 주제이다. 로버트와 헤더의 모습은 한 쌍의 연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에 묘사된 두 사람의 행동과 대화 장면만 가지고 연인 관계로 단정할 수 없다. 달궁인은 소설 문장을 톺아보면서 두 사람의 관계(‘로버트는 정말 헤더를 사랑했을까?’, 로버트와 헤더를 무조건 섹슈얼한 연인 관계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나눴다달궁인 한 분은 빛과 물질이 인상적이어서 열 번이나 읽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본인이 갱년기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빛과 물질결말이 슬프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달궁의 터줏대감 헤르메스님(알라딘 서재에 활동한 분이다. 여러 리뷰 대회에 수상한 이력이 있는 서평의 고수이다)은 앤드루 포터의 글에서 간결한 문체로 작중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제임스 설터(James Salter)와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의 작문 스타일이 느껴졌다고 했다.




[달의 궁전 3월의 책]

* 디노 부차티 타타르인의 사막(문학동네, 2021)




이번 달의 달궁 도서는 이탈리아의 작가 디노 부차티(Dino Buzzati)타타르인의 사막이다. 최근에 레삭매냐님이 샀던 그 책이다. 내가 이 사실을 언급하자 달궁인들이 레삭매냐님을 보고 싶어 했다. 레삭매냐님, 달궁은 당신을 잊지 않았다. 달궁은 당신을 위해 판을 깔아 놨다.

 

이번 달 모임도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한다면 참석할 수 있다. 그러나 방역 조치가 풀리고 ‘5인 이상 모임 금지도 해제되면 대면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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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3-01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키루스 통신원을 통해 달궁 소식
을 전해 듣게 되네요 :>

달궁인들은 키루스 통신원을 통해 저
의 소식을 전해 듣고요~

<타타르인의 사막>은 결국 못 참고
미리보기로 보면서 리뷰도 조금 써
두었습니다. 너무 만나 보고 싶은 책
이 아닐 수 없습니다.

cyrus 2021-03-01 12:27   좋아요 1 | URL
어제 삽하나님, 헤르메스님, 마욤님이 참석했어요. 세 분 모두 달궁 베테랑들이죠. <타타르인의 사막>을 추천한 분이 마욤님 아니면 헤르메스님이였어요. ^^

미미 2021-03-0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하철에서는 잘 읽는데 버스에선 책을 읽음 멀미가 나요.ㅋ ‘읽다 익다‘ 내부가 참 아늑하고 당장 달려가 책 읽으면서 아인슈페너 마셔보고 싶네요!
( ⁎ ᵕᴗᵕ ⁎ )

cyrus 2021-03-01 12:28   좋아요 1 | URL
진동이 일어나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 습관은 시력을 떨어지게 만들어요. 눈이 금방 피곤해져요. 확실히 버스 안에서 책을 펴면 잠이 잘 옵니다. ^^

바람돌이 2021-03-01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점도 예뻐서 당장 가보고싶고 독서모임 이름도 제가 좋아하는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이네요. 빨리 코로나가 물러가고 저 예쁜 서점에서 달궁모임 하실수 있기를요

cyrus 2021-03-01 12:37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달궁인들이 폴 오스터의 소설을 좋아해요. ^^

얄라알라 2021-03-01 1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서재 대문사진의 모습과 느낌까지 비슷하시네요.
cyrus님은 활자 밖에서 사람들 만나 살아있는 에너지로 책의 여백, 채워가시는 게 넘 멋지십니다!
헤르메스님을 찾아봐야겠어요. 못 뵌거 같아요^^ 서재에서

레삭매냐 2021-03-01 12:46   좋아요 2 | URL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헤르메스님은 자신을 홀대하는
램프의 요정 생태계를 떠나
그래24로 바꿔 타셨다는 전언이...

뭐 그랬다고 합니다.

cyrus 2021-03-01 16:30   좋아요 2 | URL
레삭매냐님이 저 대신 답변을 해주셨군요. 헤르메스님이 알라딘 활동을 안 하는 이유를 한 번 묻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헤르메스님의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북플은 헤르메스님의 글을 돋보이게 해주는 시스템이 아니거든요. 북플이 나오면서 사람들이 사진이 많고, 분량이 짧은 글을 선호하기 시작했어요.

얄라알라 2021-03-01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요새 별로 웃을 일이 없는데 ˝그래 24˝에 혼자 킥킥거리는 저는 ㅋㅋ레삭매냐님 덕분입니다^^

stella.K 2021-03-0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궁 모임하는구나.
카페가 변함이 없어서 하나 싶었는데...ㅋ

와, 버스에서 50페이지...! 난 차 안에서 책 못 읽는데
토할 것 같아서. 지하철을 가능한데.
넌 역시 책방 마니아야.인정!!

cyrus 2021-03-02 07:58   좋아요 0 | URL
컨디션이 정말 좋으면 책이 눈에 확 들어와요.. ㅎㅎㅎ 그런데 버스 탈 땐 사진과 도판이 많은 책을 읽는 편이에요. 글자만 있는 책을 읽으면 눈이 금방 피로해져요. 손에 든 수면제나 다름없어요. ^^;;
 
화석이 되고 싶어 - 한눈에 보는 화석 생성 과정
츠치야 켄 지음, 에루시마 사쿠 그림, 조민정 옮김, 백두성 외 감수 / 이김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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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화석이 되고 싶어는 제목 그대로 화석이 되는 조건과 과정들을 알려주는 책이다. 화석이 어떻게 생기는지 연구하는 학문을 화석화과정학(taphonomy)’이라 한다. 이 책을 쓴 츠치야 켄(土屋 健)은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전공한 일본의 과학 저술가이다그는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한 화석화과정학을 도판과 일러스트를 함께 보여주면서 설명한다.


저자는 기상천외한 사고실험을 언급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화석이 될 수 있을까?” 그는 화석이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화석의 다양한 형태와 생성 과정을 알려준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이 화석이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화석이 되려면 일단 죽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특이한 방법으로 죽을 수 있는) 실천서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당부한다.


화석의 형태는 다양하다. 우리가 잘 아는 화석은 생물의 뼈나 배설물, 발자국, 식물 등이 단단한 돌로 변한 형태이다. 그러나 화석은 꼭 단단한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 <쥐라기 공원>에 나온 호박(琥珀) 속에 갇힌 모기를 기억하시는가. 그것도 화석이다.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에 피부와 장기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화석이 많이 나온다.


화석은 최대한 빨리 발견될수록 좋다. 왜냐하면 지층에 노출된 화석은 비바람을 맞게 되고, 풍화 작용으로 인해 부서지기 쉽다. 몸집이 큰 생물의 유해일수록 전신 화석으로 남을 확률이 낮다. 근육과 내장과 같은 연조직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사라진다. 그렇다면 살아생전 모습 그대로 화석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한 가지 방법이 있다단괴(nodule)라고 부르기도 하는 결핵체 속에 들어가 죽으면 된다. 결핵체는 쉽게 말하면 안은 비어 있고, 겉은 단단한 바윗덩어리다결핵체 속에 있는 화석은 비바람을 맞을 일이 없어서 유해의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 저자는 안경이나 액세서리를 찬 유해를 결핵체로 보존하면 멋스러운 화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결핵체 화석이 되면 죽어서도 셀럽이 될 수 있다미래의 고생물학자가 블링블링한장신구를 찬 과거 인류의 화석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돌이 된 장신구는 빛나지 않지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미래의 인류는 화석 인류가 차고 있던 장신구에 주목할 것이다. 화석 인류는 셀럽이 되어 재평가받고, 장신구가 유행한다. 유행은 돌고 돈다. 유해를 화석으로 만들어주는 장례 서비스업이 생긴다면 인간은 죽어서 이름과 가죽(피부) 모두를 남길 수 있다이러면 비석이나 동상을 만들 필요가 없겠는데.






Mini 미주알고주알

 


* 참고자료 편214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삼엽충(뿌리와이파리)2007에 번역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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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1-02-27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화석이 되는 법이라니. 이런 책 독특하고 좋네요. 출간년도 오류는 어떻게 찾아내시나요? 일일이 대조해보시는건가요?

cyrus 2021-02-27 11:37   좋아요 1 | URL
제가 참고문헌을 보는 편이에요. 국내에 번역된 참고문헌이 있으면 그 책을 읽어요. 잘못 적힌 출간연도를 발견하면 알라딘에 번역본 제목을 검색해요.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

붕붕툐툐 2021-02-27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고 사이러스님은 이미 셀럽이시잖아요!라고 말하려는데... 내용 보고, 화석 셀럽은 되지 말아 주세요~ㅎㅎㅎㅎ

cyrus 2021-02-28 10:01   좋아요 0 | URL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셀럽이 되고 싶어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