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의 소설 원작으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일 것입니다. 19세기 말 미국 남북전쟁으로 인해 격동에 휘말린 여인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이죠.

 

 

 

 

 

 

 

 

 

 

 

 

 

 

 

 

 

 

 

* [안 읽었어요!]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열린책들, 2010)

 

 

 

 

이 영화에서 스칼렛의 하녀로 나왔던 해티 맥대니얼(Hattie McDaniel)은 흑인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제11회, 여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에서 그녀는 개성 넘치는 하녀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영화가 개봉된 1940년대에도 인종차별이 공공연히 존재했습니다. 그녀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Rhett Butler) 역을 맡은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은 맥대니얼이 시상식에 나오지 못한다면 자신도 시상식에 나오지 않겠다고 보이콧 선언을 했습니다. 결국, 논란 끝에 두 사람 모두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었고 사이좋게 여우조연상과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맥대니얼은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초로 참석한 흑인배우라는 기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맥대니얼은 할리우드에서 연기 활동을 펼치면서 하녀 역 위주로 캐스팅됐습니다. 일부 흑인들은 그녀가 하녀 연기만 한다면서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연기를 비판한 흑인들은 하녀 연기가 흑인에 대한 편견 낳을까 봐 염려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오스카상의 영예를 얻은 뒤에도 하녀 역할이나 단역 연기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소화했습니다.

 

 

 

 

 

 

 

 

 

 

 

 

 

 

 

 

 

 

* 강준만 《교양영어사전 2》(인물과사상사, 2013)

 

 

 

맥대니얼이 연기한 하녀의 애칭은 ‘매미(mammy)입니다. ‘mammy’는 ‘mommy(엄마)’의 남부 방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아주 좋지 않은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 단어의 의미를 기억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쓴 글[1]에 ‘mammy’의 의미를 소개했습니다. 미국 남부는 흑인차별이 극심했던 지역이고 아직도 흑백 인종차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mammy’는 미국 남부의 백인 가족 밑에서 일하는 흑인 하녀, 흑인 유모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혐오 표현입니다.

 

 

 

 

 

 

 

흑인 하녀, 유모 대부분은 뚱뚱한 흑인여성이었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장면 중 하나는 하녀(해티 맥대니얼 분)가 오하라(비비안 리 분)의 코르셋을 죄는 장면입니다. 코르셋은 허리를 가늘게 만들어 상대적으로 가슴을 더 풍만하게 보이기 위한 여성 전용 보정 속옷입니다. 흑인 하녀가 오하라의 코르셋을 죄는 장면은 날씬한 백인 여성의 몸을 우월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뚱뚱한 흑인 유모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읽고 있는 중이에요]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3장은 흑인여성의 한정적인 노동(하녀, 유모, 가모장[家母長])에 덧씌워진 백인 중심 시각과 분석을 해제하여 흑인여성의 노동을 재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장은 유모, 가모장,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통제적 이미지(controling images)의 사례들이 나옵니다. 앞서 언급했던 ‘mammy’가 바로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통제적 이미지가 만들어낸 단어라 볼 수 있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는 ‘제제벨(jezebel)‘후치(hoochie)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제제벨은 성경 열왕기 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Ahab)의 왕비입니다. 성경에서 제제벨은 성적으로 문란한 ‘악녀’로 묘사됩니다. 제제벨은 흑인 창녀,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흑인여성을 부르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제제벨이 가진 의미를 그대로 이어온 혐오 표현이 후치입니다.

 

 

 

 

 

 

 

 

 

 

 

 

 

 

 

 

 

 

* 장 메이에 《흑인노예와 노예상인》(시공사, 1998)

 

 

 

이성애 남녀의 결혼과 가족이 사회의 기반이라고 여기는 미국 백인 중심의 젠더 이데올로기는 흑인여성의 유급 가사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을 이해하는 데 불리한 분석 틀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녀와 유모는 가족을 위해 일을 하면서 임금을 받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하녀와 유모가 된 흑인여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흑인 하녀와 흑인 유모는 ‘백인 노예주’를 위해 일하는 ‘노예’였습니다. 슬프게도 흑인여성의 자식들은 부모처럼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백인 노예주, 특히 목화 농장을 경영하는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목화를 대규모로 재배해 많은 소득을 올렸습니다. 그러려면 값싼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고, 일하는 남성 노예를 사들이는 대신에 출산능력이 있는 여성 노예를 통제합니다. 미국은 1808년부터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어요. 이때부터 노예의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했고, 목화밭에서 일할 수 있는 흑인 노예를 구하기가 어려워졌어요. 흑인여성은 자신의 불행한 삶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출산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노예주들은 흑인여성의 출산을 독려하기 위한 유화책을 내세웁니다. 임신한 흑인여성에게 힘든 일을 부과하지 않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흑인여성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을 출산의 도구이자 통제,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 중심의 관점은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어왔습니다.

 

 

 

 

 

 

 

 

 

 

 

 

 

 

 

 

 

* 마커스 레디커 《노예선 : 인간의 역사》(갈무리, 2018)

 

 

 

흑인여성은 가족생활에 필요한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서 백인 가족 밑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하녀 연기를 많이 했다고 해서 흑인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을 때 해티 맥대니얼이 뭐라고 말했던가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녀 역할’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녀와 유모는 낮은 임금을 받는 직업이지만, 흑인여성들이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하는 불가피한 직업입니다. 하지만 흑인여성들도 집안일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닙니다. 백인 가족이 생물학적 결합(결혼)으로 형성된 혈연 중심의 공동체라면, 흑인 가족은 혈연을 초월한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흑인은 출신지가 다르고, 핏줄이 다른 동료도 ‘형제’이자 ‘자매’인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족의 범위를 확대한 흑인들의 유대감은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에 저항하는 집단의식입니다. ‘바다 위의 거대 감옥’이나 다름없는 노예선에 끌려 온 흑인 노예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비관했지만, 언젠가는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옆에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동료 노예가 있었습니다. 출신지와 언어는 달라도 흑인 노예들은 서로를 믿고 의지했고,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노예선의 역사를 연구한 마커스 레디커(Marcus Rediker)는 노예선에 갇힌 흑인 노예들이 ‘흑인 공동체’를 구성하여 자생력과 저항 의지를 키우는 과정을 주목했습니다. 그는 동료를 가족처럼 여기는 친밀한 관계를 ‘뱃동지(shipmat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동료애’가 강한 흑인여성들은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이웃 또는 친구의 자식들까지 함께 돌봅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육아 방식에서 흑인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그런데 백인 사회학자들은 흑인 공동체 속 흑인여성의 역할을 ‘가족 내 여성의 권력’으로 해석했고, 이를 ‘가모장’ 명제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가모장’을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가부장’과 동일하게 볼 수 없습니다. 가모장 명제는 흑인가족의 특징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한 개념입니다. ‘동료애’와 ‘가족애’가 결합된 흑인 가족에는 누군가가 가족 구성원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유모’와 ‘가모장’은 흑인여성을 이중으로 통제하는 이미지입니다. 유모는 백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착한’ 흑인여성을, 가모장은 남편의 권력을 거세하는 ‘나쁜’ 흑인여성을 상징합니다. 이 두 가지 통제적 이미지는 흑인여성의 주체성을 지워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흑인여성의 섹슈얼리티도 강력하게 통제됩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백인 가부장 및 이성애 중심 사회의 시선을 거부하고 흑인여성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힘 기르기’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다룬 흑인여성 문제들이 마치 ‘흑인여성만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 책에 나오는 흑인여성 억압의 문제는 ‘모두의 문제’입니다. ‘모두’라는 이 명사에는 우리나라 여성도 포함됩니다. 여성의 주체성을 지우는 여성 혐오는 여성을 ‘좋은 여자’와 ‘나쁜 년’의 이분법으로 구분합니다. 할 말 다 하는 여성,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 등은 어딘가 문제가 있고, 피하고 싶은 여자로 묘사됩니다. 대신 남성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수동적인 여성은 남성들로부터 사랑받는 여자로 묘사되고,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습니다. 이런 이분법적 편견에서 여성 혐오가 태동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기제들이 어떻게 여성의 삶과 권리를 실질적으로 제한하고 옥죄어 왔는가를 폭로하고 투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상이 바로 페미니즘입니다. 우리는 황인종, 즉 백인에 의해 유색인으로 분류되는 집단이면서도 흑인이나 동남아인을 백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차별합니다. 흑인과 동남아인을 무시하는 차가운 시선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유색인 여성들의 직업, 그리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복지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 이 모든 문제가 흑인여성의 억압의 양상과 얼마나 밀접히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흑인 페미니즘은 흑인여성에게만 한정되는 특정한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 [보이지 않는 사람들] 2018년 5월 17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10096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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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5-2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개념 클라크 게이블이네.
그러니 저 시대에 클라크가 적지 않은 파워를
가졌다는 말도 되겠네.
나중에 흑인을 비호했다고 구설수에 오를만도 하잖아.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난 중학교 때 책으로 읽고 영화로도 봤는데
재미는 있는데 책이나 영화나 흑인을 대변하기 위한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미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소설은 아닌가 해.
모르지.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관점이 보일런지.ㅋ

cyrus 2018-05-24 16:45   좋아요 1 | URL
클라크 게이블이 최고의 배우였다고 해요. 오스카상 보이콧 선언 이후에 KKK가 게이블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대요. 그런데 이 행적만 봐서는 그가 흑인 민권 운동에 관심 있는 배우라고 단정할 수 없어요. 확실한 건 게이블과 해티 맥대니얼은 정말 친한 사이였어요. 해티가 세상을 떠났을 때 게이블이 장례식에 참석했어요.

백인 여주인공이 나오는 백인 여성 작가의 소설과 흑인 여주인공이 나오는 흑인 여성 작가의 소설을 비교해보고 싶어요. 마거릿 미첼의 소설도 독서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데 과연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페크pek0501 2018-05-26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중2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하러 가서 처음 보았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몰랐음을 깨닫는 스칼렛에 대해 참 이상했어요. 어떻게 그걸 모를까 하고요. 그땐 제가 어렸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거죠.
지금은 모를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너무 잘 알지요.

예전에 페미니즘으로 본 소설, 이라는 제목 같은데(확실치 않네요.) 그 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뭐든 분석적으로 보면 다르게 보이는 걸 경험했거든요. 결국 역사라는 것도 승자(또는 강자)의 기록이라는 결론에 닿을 수 있는데... 우리는 패자(또는 약자)의 시각으로도 볼 필요가 있으므로 양쪽에서 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겠더라고요.

cyrus 2018-05-28 11:45   좋아요 1 | URL
요즘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제가 그동안 백인 중심의 시각으로 서양문학과 역사, 페미니즘 논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흑인여성의 목소리를 ‘피해자의 목소리’가 아닌 ‘생존자의 목소리’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됐어요. 흑인여성은 자신들을 통제하는 백인 중심 사회에 맞서서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백인 학자들은 단지 ‘흑인’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들의 주체적인 면모를 보지 못했어요.
 

 

 

 

 

 

 

지금 30대 이상 연령층은 <톰과 제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추억의 만화죠. <톰과 제리>는 잘 알려진 대로 쥐 제리를 잡아 먹어치우려는 고양이 톰의 실패담으로 구성됩니다. 제리는 먹이사슬 관계상 언제나 약자였고 그에 따라 꼬꼬마 시청자들은 늘 쫓기는 신세인 제리를 응원했죠. 어린 시절 저도 제리를 좋아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톰과 제리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리에게 당하기만 하는 톰이 불쌍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톰, 고길동, 로켓단 3인방은 ‘지금 보면 가장 불쌍한 3대 만화영화 빌런(나쁜 역할을 맡은 캐릭터)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과거에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접하면 부작용이 있었을 만화영화들이 많이 방영되곤 했습니다. <톰과 제리>도 어린이에게 권장할 만한 만화영화가 아니에요. <톰과 제리>는 1940년 미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 사회는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흑인을 대놓고 멸시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톰과 제리>에 흑인을 비하하는 묘사의 장면들은 그대로 텔레비전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혹시 <톰과 제리>에 팔과 다리만 나오던 흑인 하녀를 기억하시나요?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흑인 하녀는 톰에게 제리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톰이 제리를 못 잡거나 톰이 제리를 잡는 과정에서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으면 하녀는 톰을 집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런데 하녀의 얼굴을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만화를 보는 시청자는 까만 피부의 팔과 다리, 그리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몸만 볼 수 있습니다.

 

 

 

 

 

 

 

 

 

 

 

 

 

 

 

 

 

*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 《보이지 않는 고릴라》 (김영사, 2011)

 

 

 

어렸을 때 <톰과 제리>를 많이 봤는데, 흑인 하녀가 나온 장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요? 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흑인 하녀는 출연 분량이 적은 ‘단역’입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해요.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착각’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실험이 ‘보이지 않는 고릴라(Invisible Gorilla)’ 실험입니다. 흰 셔츠 입은 학생들이 공을 패스한 횟수를 세어보는 이 실험에서 참가자 절반은 고릴라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학생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봤던 것이죠. <톰과 제리> 시청자들은 톰과 제리가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보느라 흑인 하녀가 잠깐 나오는 장면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흑인 하녀의 얼굴이 잠깐 나오는 <톰과 제리> 에피소드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에피소드를 봤는데 기억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결과가 보여준 ‘주의력 착각’이죠. 아주 잠깐이지만 하녀의 얼굴이 나오는 <톰과 제리>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톰과 제리>의 흑인 하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씁쓸하게도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 사회에 살았던 흑인들은 백인의 차별과 멸시 속에 삭제되어 ‘투명한 존재’로 남았습니다.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정체성을 부여받는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톰과 제리>의 흑인 하녀의 이름이 뭔지 궁금하지 않나요? ‘매미 투슈(Mammy Two-shoes)’라고 하네요. 그런데 ‘매미 투슈’는 하녀가 태어났을 때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흑인 하녀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는 별칭입니다. ‘mammy’는 유모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흑인 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 지역에 가면 ‘mammy’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흑인 하녀를 비하하는 속어가 됩니다. 하녀의 성(姓)인 ‘shoes(구두)’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구두를 신은 다리만 나오는 하녀의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매미 투슈’는 함부로 호명해선 안 되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이름이 아니라 흑인 여성을 경멸하는 백인이 만든 ‘혐오 단어’입니다.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첫 장에 보면 ‘무쇠솥과 주전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흑인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마리아 스튜어트는 백인 가정의 하녀로 일한 흑인 노예였습니다. 그녀는 어느 연설에서 ‘무쇠솥과 주전자’에 억눌린 채 살아야 하는 흑인 여성의 실태를 알렸습니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우리 흑인 딸들의 마음과 재능이 무쇠솥과 주전자 아래에 억눌려야 합니까?” (마사 스튜어트, 《흑인 페미니즘 사상》 21쪽)

 

 

‘무쇠솥과 주전자’는 ‘매미 투슈’만큼 비하적인 의미의 단어는 아니지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흑인 여성의 노동 착취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지난 월요일(5월 14일)에 《흑인 페미니즘 사상》 첫 번째 독서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날, ‘소울트리’라는 분이 ‘무쇠솥과 주전자’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했습니다. 무쇠솥과 주전자를 화로에 오랫동안 올려놓으면 밑 부분이 새까맣게 그을립니다. 하녀는 부엌에 가면 무쇠솥과 주전자를 화로에 올려놓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소울트리 님은 ‘(검게 그을린) 무쇠솥과 주전자’가 흑인 하녀의 모습을 비유한 단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흑인 여성은 다중(多重)으로 억압받는 존재입니다. 흑인 여성을 억압하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본다면 ‘백인 남성’, ‘흑인 남성’ 그리고 ‘백인 여성’입니다. 그리고 이 성별 및 인종적 구분은 이성애라는 섹슈얼리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가 재생산과 생산의 기초 단위로 이성애에 기반을 둔 가족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성애 이외의 섹슈얼리티는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젠더, 인종, 계급뿐만 아니라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해체하는 사상입니다.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상세하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불과 오십 년 전만 해도 흑인은 백인 화장실을 쓸 수 없고, 버스에서 흑인은 맨 뒷좌석에만 앉아야 했고, 백인식당은 흑인에게 음식 서빙을 거부했고, 흑인은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흑인해방운동이 전개되자 진보를 ‘남성성’과 동일하게 인식하는 일부 흑인 남성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 지식인 중심의 미국 흑인 사상은 흑인 여성해방 문제를 소홀히 다뤘습니다. 서구 중산층 출신의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여성을 여성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동료로 보지 않았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문제를 구성하는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백인 여성(페미니스트)의 흑인 여성 차별 문제는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과 ‘흑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 문제만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집안의 노동자》 (갈무리, 2017)

* 하워드 진 《역사의 정치학》 (마인드큐브, 2018)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집안의 노동자》 (갈무리, 2017)여성을 ‘가사 노동자’로 기획한 미국 뉴딜 정책의 한계를 되짚은 책입니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의 긴 터널 속에 헤매는 ‘잊힌 사람들(The Forgotten Man)’을 위한 뉴딜 정책을 내세웁니다. 뉴딜 정책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긴 기존의 자유방임주의에서 벗어나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통제하여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는 복지 정책입니다. 그러나 뉴딜 정책은 경제 피라미드 구조에서 밑바닥에 위치했던 흑인들을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대다수 여성은 국가가 주도한 일자리 정책의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흑인은 더 심각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특히 남부에 사는 흑인들은 제대로 된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했으며 남부 백인들이 복지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분배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루스벨트 정부는 흑인차별 문제에서도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자신의 글에서 폭력과 살인을 부르는 흑인차별 문제를 방관한 루스벨트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뉴딜 시대는 백인들이 살만한 시절이었을 뿐입니다. ‘백인들에 의해 잊힌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20세기 초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식했지만, 그들은 가사노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여성을 ‘집안의 노동자’로 정의하기 시작한 시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뉴딜 정책이 도입되기 이전의 시기입니다. 미국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위한 ‘가정학 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정학’은 집안에서만 할 수 있는 기술, 즉 재봉과 바느질을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가정학을 배운 미국 주부들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여 가족의 기능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국가는 중산층 여성들에게 ‘무급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선전합니다. 그 시절에 주부가 가사노동을 하지 않으면 ‘나쁜 엄마’, ‘나쁜 아내’라는 부정적인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 [개정판]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갈라파고스, 2018)

* [구판 절판]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이매진, 2005)

 

 

 

국가는 여성을 가정(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로 ‘기획’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베티 프리단은 가사노동에 지친 백인 중산층 주부를 괴롭혔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 ‘문제’는 여성에게 주부로 살아가길 강요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입니다. 하지만 프리단도 ‘가정학 운동’을 주도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한계를 답습했습니다. 그녀 역시 여성의 삶에 주입된 가사노동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또 흑인 여성 문제를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보고 싶은 문제(백인 중산층 여성의 차별과 불평등)’만 봤고, 흑인 여성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받아 (중산층 백인 중심의) 여성 정책으로부터 소외받습니다. 이처럼 흑인 여성 문제에 소극적으로 반응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은 흑인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억압에 저항하는 것뿐만 아니라 억압을 정당화하는 관념에 도전하는 ‘비판 사회이론’입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포괄적인 목적억압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실천과 관념에 저항하는 것이다. 비판사회이론인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서로 교차하는 억압에 의해 지속되는 사회 부정의 상황에서 흑인여성의 힘 기르기를 그 목적으로 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55~56쪽)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교차하는 여성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은 복잡한 차별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도 고려해야 합니다. 여성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마치 여러 개의 실이 복잡하게 꼬인 상태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여성의 삶을 속박하는―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계급 등이 얽힌―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어나가기 위해선 ‘교차성’에 주목한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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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7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8 11:50   좋아요 0 | URL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라는 책에 보면 흑인 여성의 강간 피해 사례들이 나옵니다. 차마 눈으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콩고 민주 공화국은 정말 강간이 많이 일어나고, 강간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은 국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5-1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허투루 읽다가 나중에는 정색을 하고 읽게 하는 힘이 있는 글입니다. 이달의 추천작으로 추천합니다아..

cyrus 2018-05-18 11:51   좋아요 0 | URL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하라 2018-05-1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유없이 그런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랬던거라는 이유가 생겨버렸네요^^;

cyrus 2018-05-18 11:52   좋아요 0 | URL
사실 <톰과 제리>에 아이들이 해선 안 될 잔인한 행동들이 나오죠. 그리고 가학적인 묘사도 많이 나와요.. ^^;;

transient-guest 2018-05-18 04: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인종증오와 차별의 망령을 끄집어 낸 것이 지금의 미국입니다. 과거 법적으로 차별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 흑인여성이었죠. 영화, The Shape of Water에서 보면 잠깐 이런 모습이 나오죠. 저도 톰과 제리에서 가끔 등장하던 흑인여성의 얼굴이 나온 에피소드는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사실 톰과 제리의 톰보다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씨가 더 짠하게 기억됩니다. 장남으로 없는 집에 태어나 온 가족을 부양했다던 당시 아버지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모두 거둬먹이는 걸 보면 박애주의자 같습니다.ㅎㅎ 그 둘리가 좀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고나서입니다....

cyrus 2018-05-18 11:54   좋아요 1 | URL
어떤 유머게시판에 오른 글에서 본건데, 둘리보다 고길동이 더 불쌍하게 느껴지면 어른이 된 거래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8-05-18 12:43   좋아요 0 | URL
이미 늙갱이랍니다 ㅎㅎ

stella.K 2018-05-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롭고 진지한 시간이었겠구나.
톰과 제리는 나도 초등학교 때 봤는데
그때는 뭐 워낙 어리기도 하고, 흑인 여성 문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근데 문제가 참 많아.
그래도 요즘 흑인 영화들엔 흑인 여성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시도들이 있어보이는데.
<히든 피겨스>도 그렇고, <헬프>도 그렇고.
그런데 그건 또 제3자가 봤을 때 불온한 구석이 있더라고.

cyrus 2018-05-19 20:53   좋아요 0 | URL
이제 서구 백인 작가가 쓴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흑인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유심히 보려고 해요. ^^

페크pek0501 2018-05-20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두 권짜리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두껍진 않았어요.

독자를 어느 위치에 놓고 쓰느냐의 문제, 무엇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쓰느냐의 문제.
필자는 의식하지 못했으되 독자가 느껴지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글쓰기가 결코 쉽지 않은 작업 같습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걸 느껴질 때가 많아요. 특히 자기가 베푼 것만 생각하고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건 모르기 일쑤이고요.

cyrus 2018-05-23 15:39   좋아요 1 | URL
문제를 다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글 한 편으로 정리하는 일이 쉬운 작업이 아니죠. 그래서 저도 페크님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쉬운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글로 표현해야 합니다. 전문 작가이든 글 쓰는 사람이든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쓰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글 잘 쓰는 사람도 완벽할 수 없어요. 자신의 무지와 실수를 인정하고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쓴 글이야말로 훌륭하고 진실한 글입니다. ^^
 

 

 

 

 

 

 

레드스타킹은 지난 4월 한 달 동안 바쁘게 달려왔습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게 신기합니다. 430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두 번째 모임을 마지막으로 한 주간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인 514일부터 모임을 재개합니다.

 

지난주 일요일에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술 모임을 했습니다. 새로 문을 연 수제 맥줏집에 모였습니다. 그 날이 마침 레드스타킹 멤버 한 분의 생일이었습니다. 맥줏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게 됐습니다. 그 날에 저는 과학 혁명의 구조독서 모임에 참석했고, 독서 모임이 끝난 후에 맥줏집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멤버 네 명이 맥줏집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네 명이 모여서 나눈 대화의 주제 역시 페미니즘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술 모임도 월요일 정기 모임처럼 느껴졌습니다. 젠더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은님이 제가 작성한 나영 님 강연 후기[1]를 언급했습니다. 님은 제 글의 내용 일부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님의 지적을 받았을 때 매우 놀랐거나 기분 상하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지적이었거든요. 문제가 된 제 글의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성은 단순히 섹스(Sex)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중략] 젠더(Gender)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는 섹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젠더는 사회학적 성을 의미합니다. 유전자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 결정되는 것이 생물학적 성이라면, 사회학적 성은 생물학으로 타고난 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나 문화에 의해 수행된 역할을 의미합니다.

 

 

틀린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 나영 님은 섹스와 젠더의 의미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설명했어요. 그러니까 나영 님은 섹스는 생물학적 성, 젠더는 사회학적 성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교과서적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제가 그 내용을 후기에 쓰지 못했습니다.

 

나영 님이 강연했던 당시 그 날을 복기하면 이렇습니다. 나영 님이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섹스와 젠더, 이 두 개의 단어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페미니즘을 공부한 청중들은 당연히 섹스는 생물학적 성, 젠더는 사회학적 성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나영 님은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말씀하신 대로 상대방의 성별이 섹스인지 젠더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나요?”

    

 

아주 자신 있게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한 청중들은 나영 님의 두 번째 질문에는 침묵했습니다. 저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몰랐던 것이죠. 이 두 번째 질문은 (섹스와 젠더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구분할 수 없다라는 답변을 내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의 준말)’는 아닌 것이죠. 이 질문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하나는 섹스와 젠더는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이고, 또 하나는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교과서적 정의를 누가 정했는가?’입니다.

 

이미 나영 님은 작년에 나온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에 수록한 글을 통해 젠더 개념의 모호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 윤보라 외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

 

 

이제는 누구나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이고, 젠더는 사회적인 성이다라는 정의를 마치 답안지에 적어낼 정답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생물학적인 성으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는 어디까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성별을 구분하는 기준 중에서 생물학적으로 이미 결정된 것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나영, 여성을 사랑하는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131)

 

 

 

작년에 그럼에도 페미니즘을 읽었습니다. 강연에 나온 나영 님의 두 번째 질문은 처음 들어 본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그럼에도 페미니즘에 수록된 나영 님의 글을 다시 읽었을 때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그 책을 읽은 당시에 나영 님이 대단한 분인지 몰랐어요. 레드스타킹 모임 활동을 하면서 나영 님의 존재감을 알게 됐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과정, 즉 독서 방식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눈으로 페미니즘을 읽으면서여성학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고,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혼자 공부하면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특히 남자가 혼자서 책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정작 중요한 내용을 간과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

 

 

 

저는 지금도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은 세상(또는 나)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마주해야 하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공부하기 쉬운 학문이라 말할 수 없어요. 페미니즘은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학문이 아니에요. 그 반대입니다. 하나를 알아도 열은 모르는학문입니다.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의 저자 록산 게이는 페미니즘은 복수 명사이며 그 속에 다양한 페미니즘이 공존한다고 말했습니다. 페미니즘의 하나를 안다고 해서 페미니즘을 완벽히 이해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힘겨운 일이지만 열 개 이상의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의 페미니즘만으로는 늘 시시각각 변하고 복잡해지는 세상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세상을 읽고 해석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면 또 다른 차별이 생깁니다. 지나온 페미니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한 자유주의 페미니즘(1세대 페미니즘)기득권이라는 든든한 성(城)을 포기하지 못했고 인종과 계급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를 설립한 베티 프리단은 여성운동에 뛰어든 레즈비언을 끌어안지 않았고 페미니즘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차폐막으로 막아버렸습니다. 페미니스트도 인간입니다. 완전하지 않으며 때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의 실수나 한계를 근거로 페미니즘은 불완전하고 문제 있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듯이 이 세상에 완벽한 학문은 없습니다.

 

오늘 안나 님의 서재에 은유 작가의 인터뷰집 출판하는 마음(유유, 2018)에 나오는 문장을 봤습니다.[2] 그 문장이 지금 저의 상황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책을 만들어야 한다. 애정의 다함에 대해 나는 나를 자꾸만 의심해야 한다. 한순간의 안도가 한 권의 책을 망칠 수 있다. 어려운 이름, . 그렇다고 당신에게 내 싸다구를 후려쳐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내 귀싸대기는 내가 후려 치는 걸로. (25)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쓸 때면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글을 다 쓰고 나서도 내가 배운 지식을 올바르게 표현했는지 의심합니다. 나름대로 생각해본 끝에 글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피드백을 합니다. 저는 얼마든지 싸다구 맞을 각오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맞을 각오를 하고 레드스타킹에 들어갔습니다. 제 기준으로 볼 때 레드스타킹에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멤버들에게 세 번 넘게 맞았습니다. 젠더 무법자모임 첫날에 남녀평등이라고 말해서 얻어맞았고[3], 권김현영 님한테도 아주 세게 한 방 맞았어요.[4] ! 제가 맞았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레드스타킹을 남자 패는 남성 혐오자들의 모임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이 글에서 쓰고 있는 맞았다라는 표현은 건전한 비판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레드스타킹은 해치지 않아요!

 

 

 

 

 

 

 

[1] [“나도 고발한다”] 201852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10066052

 

[2] [출판하는 마음, 그 마음에 리스펙.]

http://blog.aladin.co.kr/hopeblossom_/10072261

 

[3] 2018213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9903117

 

[4] [페미니즘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2018417

http://blog.aladin.co.kr/haesung/1003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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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9 11:4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인간이니까 모르는 건 당연하고,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모든 걸 암기하는 인공지능처럼 모든 지식을 다 알 수 없어요.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8-05-08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만 맞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2번을 달고 있는 저같은 여자들도 책을 읽다보면 몇대 맞아야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어요. 생각보다 더 많이 이분법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더라고요~ 제자신이~

cyrus 2018-05-09 11:50   좋아요 0 | URL
내 스스로 따귀를 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열심히 책 읽고, 강연에 자주 참석해야겠어요.

blanca 2018-05-09 0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배우고 고칠 점이 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저는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더 이상 배울 것도 고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퇴보하는 거겠지요.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8-05-09 11:5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제가 글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말씀해주셨어요. 페미니스트도 인간입니다. 그들이 배움을 멈추고 독선적인 자세를 보인다면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stella.K 2018-05-09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수제 맥주집! 많이 괴로웠겠다.
요즘 수제 맥주가 대세라며?
그렇지 않아도 오늘 간만에 맥주를 샀는데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 어떤 걸 마셔야할지 모르겠더군.
근데 너무 싼 걸 산 것 같아. 자주 마시는 것도 아닌데
이왕 마시는 거 비싼 거 마실 걸. 후회하는 중.ㅠ

흑인 페미니즘이라... 재미있을 것 같다.

cyrus 2018-05-09 19:46   좋아요 0 | URL
편의점에 파는 외국 맥주를 자주 마셔도 좋은 맥주 맛이 뭔지 잘 몰아요. 그냥 맥주라는 술 자체가 좋아요.. ㅎㅎㅎ 수제 맥줏집에 갈 일이 없어서 평소에 먹을 수 없는 맥주를 골랐어요. 제가 고른 건 흑맥주였어요. 다크 초콜릿 향을 넣었다는데 마셔 봐도 잘 모르겠어요.. ^^;;

2018-05-10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0 12:33   좋아요 1 | URL
저는 이 분의 자유분방한 발언, 특히 자위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간혹 선을 넘는 발언과 행동에 대해선 저도 선뜻 찬성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100명의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다 같을 순 없죠. ^^;;
 

 

 

봄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습니다. 대구는 일찌감치 여름에 접어들었습니다.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인데도 ‘꽃보다 페미니즘’ 2강에 오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강연자 나영 선생님이 레드스타킹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주셨어요.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한 권이 아닌 무려 네 권이나 주셨어요. 선생님, 열심히 읽겠습니다!

 

 

 

 

 

 

 

2강 제목은 <성폭력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다섯 가지 키워드 : 성, 노동, 동의, 권력, 폭력>입니다. 다시 생각해야 할 다섯 가지 키워드라…‥ 무슨 의미인지 감이 잘 오지 않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알아보도록 해요.

 

‘성폭력’이란 무엇일까요? 성(性)과 폭력. 이 두 개의 단어를 따로따로 살펴보죠. 성은 단순히 섹스(Sex)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작년에 홍준표 자한당 대표가 “젠더 폭력이 뭐임?”이라고 말한 적 있어요. 젠더(Gender)도 ‘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는 섹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젠더는 사회학적 성을 의미합니다. 유전자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 결정되는 것이 생물학적 성이라면, 사회학적 성은 생물학으로 타고난 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나 문화에 의해 수행된 역할을 의미합니다. 섹슈얼리티(Sexuality)라는 단어도 있어요. 사실 섹스와 젠더에 비해 섹슈얼리티는 그 의미를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운 단어입니다.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섹슈얼리티는 앞서 언급한 섹스와 젠더의 의미 모두를 포함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성폭력의 의미를 알아볼까요? 성폭력은 ‘성을 매개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모든 가해행위’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설명만으로는 사회 전반의 성폭력 실태를 이해하기 어려워요. 성폭력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례가 아주 많아요. 전쟁 강간(일본 위안부), 직장 내 성희롱, 데이트 강간, 친족 성폭력 등이 있어요. 나영 선생님은 “성폭력은 성욕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성폭력은 단순히 성욕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해자가 권력 또는 권력적 위계를 용인하는 사회적 · 제도적 구조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강제적 폭력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입니다. 성폭력을 성욕의 문제로만 본다면 성폭력이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권력’은 은폐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성폭력은 협의적 의미(Sexual Violence)가 아닌 포괄적인 의미, 즉 젠더 폭력(Gender Violence)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홍준표 대표가 모른다던 젠더 폭력, 이제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 또는 성 문화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용인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저임금 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을 감당하고 있으며 경제 참여에 있어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서비스업 여성 노동자들은 감정노동과 성희롱에 많이 시달립니다. KTX, 항공사 여성 승무원은 고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여성 승무원들은 고객의 지위를 돋보이려고 친절 서비스까지 제공해야 하는 노동을 요구받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은 ‘권력형 성폭력’에 해당합니다. 직장 내 성희롱은 권력 있는 가해자가 여성 직장 동료를 ‘약자’로 보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입니다. 나영 선생님은 여성 노동에 대한 저평가와 여성 노동자를 직장 동료가 아닌 ‘약자’로 보는 성희롱 가해자의 사고가 남성 중심주의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이제 우리는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찾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성폭력 문제를 논의할 때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하며 무조건 피해자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의미가 희석된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를 ‘동정받는 대상’으로 한정시킵니다. 처음에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진술, 경험 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사건을 해결하려는 법적인 관점을 뜻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를 위해 무조건 편드는 입장으로 잘못 알려졌고, 성폭력 근절 운동은 피해자의 폭로만 알리는 데 그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됩니다. 나영 선생님은 가해자에 향한 분노를 ‘말하는’ 미투 운동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미투 운동을 “(이제) 나도 말할 수 있다”가 아닌 “나도 고발한다”라는 의미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곡된 피해자 중심주의에 벗어나야 미투 운동에 참여한 가해자의 주체적인 행동이 주목받게 되고, 미투 운동은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지고 노력해야 할 공적 담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레드스타킹이 야심차게 준비한 ‘꽃보다 페미니즘’ 2부작 강연이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레드스타킹은 이러한 행사를 준비해본 경험이 부족하고 매우 서툴러서 제대로 준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으샤 으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강연에 참석한 분들이 보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큰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페미니즘이 정착하기엔 여전히 척박한 대구를 위해 멀리서 오신 권김현영 선생님, 나영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아, 멀다고 말하면 안 되겠구나. 이미 두 분 모두 페미니즘으로 통하는 레드스타킹의 SNS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강좌를 위해 다 같이 준비한 레드스타킹 멤버들 모두 수고 많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강연에 호응을 해주시고, 강연에 참석하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레드스타킹은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함께 공부해요. 레드스타킹은 해치지 않아요. 레드스타킹은 어렵지 않아요. 모임에 와 보면 알아요.

 

 

 

 

 

 

 

레드스타킹은 다음 주 월요일(5월 7일, 대체공휴일)에 쉬고, 그 다음 주인 5월 14일 월요일부터 새 책 읽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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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3 14:26   좋아요 0 | URL
책 읽으려고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하게 되네요.. ㅎㅎㅎ
 

 

 

지난주는 4월 중 가장 바쁜 한 주였습니다. 월요일(23일)은 레드스타킹 정기 모임, 목요일(24일)은 우주지감 정기 모임, 금요일(25일)은 ‘치유의 전복적 대화’ 토론회, 토요일(26일)은 ‘꽃보다 페미니즘’ 2강이 있었습니다. 일요일(27일)은 《과학혁명의 구조》 읽기 두 번째 모임이 있는 날인데 책을 읽지 않아서 불참했어요. 써야 할 후기가 잔뜩 밀려 있습니다. 오늘 근로자의 날이라 쉴 수 있어서 좋네요. ^_^

 

 

 

 

 

 

 

 

 

 

 

 

 

 

 

* 김재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읽기’ 예순 한 번째 모임 선정도서는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입니다. 오전 모임은 4월 24일 화요일, 오후 모임은 4월 26일 목요일에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오후 모임만 참석했어요.

 

저는 이 책을 읽었을 때 ‘각주주검(刻舟求劍)’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어요. 물속에 떨어뜨린 칼을 찾으려고 그 위치를 뱃전에 표시해 놓았다가 나중에 그 표시를 보면서 칼을 찾는다는 뜻인데요, 변화하는 현실에 어둡고 낡은 것만 고집하는 상황을 비판할 때 인용됩니다. 《인공지능》은 서울대학교 공대생을 위한 교양 과목 강의 내용을 엮어 작년에 나온 책입니다. 저자가 몇 년 동안 강의를 하고,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나올 동안에 세상은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우리는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이뤄지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인공지능》을 읽었으면서도 미래의 인공지능 시대를 전망한 저자의 해석이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과연 내일의 문제(인공지능의 시대)를 어제의 해법(철학)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요? 이 책이 인공지능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갈 미래를 논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에드문트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한길사, 2016)

* 에드문트 후설 《현상학의 이념,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 (서광사, 1988)

 

 

 

 

 

 

 

 

 

 

 

 

 

 

 

 

* 피에르 아도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열린책들, 2017)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피론주의 개요 (천줄읽기)》 (지만지, 2012)

 

 

 

어떤 현상에 대한 분석, 특히 인공지능과 그 미래를 둘러싼 논의는 정확한 정보가 아닌 선입견 또는 잘못 알려진 정보에 의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한 논의 진행에 걸림돌이 되는 편견과 잘못된 정보에 벗어나려면 인공지능의 시대를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는 ‘판단 중지(epochē, 에포케)’해야 합니다. ‘판단 중지’라는 용어는 현상학을 발전시킨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이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활동한 회의주의자들이 즐겨 썼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회의주의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론입니다. 그래서 회의주의는 그의 이름을 따서 ‘피론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피론은 많은 탐구를 해도 그것이 최종 진리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판단해야 할 대상, 즉 인공지능은 기술 종류, 발전 상태와 조건 등이 워낙 다양합니다. 인공지능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일률적으로 판단하거나 설명할 수 없어요. 낙관적이면 낙관적인 것만 보이고, 비관적이면 비관적인 것만 보게 됩니다. ‘판단 중지’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자기중심적 마음을 경계합니다. 따라서 저는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김재인 씨의 입장(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초인공지능이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마주해야 할 인공지능 시대의 미래를 낙관적으로도, 비관적으로도 보지 않았습니다.

 

서론이 길어버렸네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인공지능》을 읽은 우주지감 멤버들의 의견 및 감상을 얘기해 보도록 하죠. 닷새가 지난 뒤에 후기를 쓰려고 하니까 어렵네요. 속기를 했습니다만 그 날 저녁 책방을 가득 채운 말들을 온전히 기억해내기가 힘드네요. 아무튼 생각나는 대로 써보겠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이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창식 쌤은 미래 사회에 ‘기계를 가진 자’와 ‘기계를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되는 빈부 격차 문제가 일어날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구도가 만들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돈과 자본입니다.

 

완진 쌤은 인공지능이 발달하는 세 가지 요인을 언급했는데요, 하드웨어와 CPU, 그리고 ‘실수’였습니다. 인공지능도 실수와 결함이 있습니다. 알파고이세돌과 대전할 때에도 4번째 대국에서는 엉뚱한 실수로 패배했죠. 그런데 인공지능은 시행착오를 스스로 학습하여 실수를 줄이면서 발전을 거듭합니다. 창식 쌤은 인공지능이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것, 즉 실수라는 경험도 학습하여 발전하는 인공지능의 향상이 때론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은 쌤은 인공지능 미래에 대한 논의 없이 인공지능의 향상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만 보고, 거기에 이끌려 따라가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를 염려했습니다. 성은 쌤은 지금 현 상황을 율곡 이이‘십만양병설’로 비유해서 설명했는데요, 우리 사회가 미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신 쌤은 인공지능의 시대를 사는 인간이 ‘기계의 노예’로 전락될 위기에 놓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신 쌤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영신 쌤도 성은 쌤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신 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미래 세대들은 ‘준비 없는 미래’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자는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 할 수 있는 활동이 ‘창조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정희 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일로 ‘독서’를 꼽았습니다. 반면 은경 쌤은 우리 사회는 여전히 ‘창조성’을 발현하기에 시간적으로, 환경적으로 모두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창조성의 발현을 억누릅니다.

 

인공지능 시대를 마냥 두려워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분이 있었어요. 호순 쌤은 이 책의 제일 마지막 문장(“이렇게 사는 건 재미있거든요.”, 367쪽)을 인용하면서 오히려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재미있는 삶이 펼쳐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동익 쌤은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하고 전개되는 세상 속에 다양한 삶을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잃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창식 쌤이 다음 달부터 베트남에 거주하면서 일을 하게 됐어요. 4월 독서 모임이 창식 쌤의 마지막 우주지감 모임이 되었네요. 토론을 마치고 난 후에 창식 쌤을 위한 송별회를 했습니다. 송별회 음식은 ‘야식 삼인방’이라 할 수 있는 치킨, 족발, 떡볶이였습니다. 새벽 12시까지 우주지감 멤버들은 음식들을 맛나게 먹으면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나를 관통하는 책읽기’ 5월 선정도서

 

 

 * 오전 모임 : 2018년 5월 29일

화요일 오전 11시

 

 * 저녁 모임 : 2018년 5월 31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 장소 : 책방 <읽다 익다>

       (오전 모임, 오후 모임)

 

 

 

 

 

 

다음 달 5월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읽기’ 선정도서는 움베르토 에코《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입니다. 이 ‘어려운 책’을 누가 고른 거죠? 이 책을 또 읽게 될 줄이야…‥. 에코가 이야기 위에 수놓은 《장미의 이름》 속 지식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4월 말부터 유럽 중세사 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이러다가 중세철학도 공부해야 할 판입니다. 저는 ‘계획 독서’를 하면 늘 실패했는데요, 다음 달 모임에 불참하면 《장미의 이름》 읽기에 실패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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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2 13:22   좋아요 0 | URL
제가 일찍 왔었으면 책방에서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었을 거예요.. 다음에 만날 땐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8-05-0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저는 술모임의 연속이 전부인데 사이러스 님 모임은 그야말로 인문학적 모임의 연속이군요. 부끄럽습니다아..

cyrus 2018-05-02 13:24   좋아요 0 | URL
레드스타킹 강연 끝나고 뒷풀이로 술 모임이 있었어요. 레드스타킹 멤버 중에 술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요.. ㅎㅎㅎ

AgalmA 2018-05-0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지만 철학적 견지에서만 보려는 저자가 강하게 느껴져서 저도 아쉬웠는데 cyrus님도 비슷하게 느끼셨네요^^;
cyrus님도 다독에 다리뷰자이신데 레드스타킹 모임까지....참으로 정신 없으실 듯ㅎ;
힘내십시오^^!

cyrus 2018-05-02 17:35   좋아요 0 | URL
4월에 강연이 많아서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어요.. ㅎㅎㅎ 독서모임 활동하기 전에는 퇴근 후 집이나 도서관에 가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카페나 강연장에 가는 일이 많아졌어요. ^^

stella.K 2018-05-0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바쁘구나. 난 레드 스타킹만 나가는 줄 알았더니.
나도 나의 정열을 바칠 독서 모임 하나 있었으면 좋겠군.ㅠ
그런데 세 군데 뛸려면 책 빡세게 읽어야 할 것 같다.ㅋ

cyrus 2018-05-02 17:40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살면서 이틀 연속(일요일, 월요일)으로 독서모임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에요.. ㅎㅎㅎ 일정이 빠듯하지만, 독서모임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독서에 대한 자극을 많이 받아서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