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이 올해로 2년째다. 지난해는 고대 그리스 고전 문학을 읽었다면, 이번 해는 고대 서양 철학을 본격적으로 읽어 나간다. 첫 번째 텍스트는 플라톤(Plato)의 대화 편 소크라테스의 변명(또는 변론)이다. 1월 6일 올해 첫 번째 토요일이 바로 올해 첫 모임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서울에 가야 해서 모임에 나오지 못했다.


















[대구 책방 <일글책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2년 차]

* 플라톤, 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도서출판 숲, 2012)

 

* 플라톤, 강철웅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명(아카넷, 2020)

 



독서 모임을 위해 읽어야 할 『소크라테스의 변명번역본은 천병희 교수의 책(이하 변론’)으로 정해졌다다른 후보 번역본은 정암학당 소속 연구자들이 번역한 아카넷 판본(이하 ‘변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추천했다.


아카넷 판본의 플라톤 전집본문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옮긴이의 각주가 많은 편이다옮긴이는 변명』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뿐만 아니라 당시 아테네의 모습과 사회적 분위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나처럼 텍스트를 깊이 읽는 독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석 읽기를 즐긴다. 하지만 친절한 주석이 너무 많아도 문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주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천 교수의 변론은 각주의 양이 적다. 그래서 주석의 유혹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본문 읽기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런데 변론의 각주 중에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

 


* 각주 9, 25쪽

 

 Leontinoi, Gorgias, Keos, Prodikos, Elis, Hippias. 이들은 이 무렵 아테나이에 와서 활동한 이름난 소피스트들이다.



출신지와 고대 철학자 이름을 같이 쓸 땐 중간에 쉼표를 넣지 않는다출신지 of 철학자 이름식으로 써야 한다. 따라서 각각 ‘Gorgias of Leontinoi’, ‘Prodikos of Keos’, ‘Hippias of Elis’로 표기해야 한다. 



















강철웅 옮김 소피스트 단편 선집》 (전 2권, 아카넷, 2023)

* 루이-앙드레 도리옹, 김유석 옮김 소크라테스》 (소요서가, 2023)




각주 10번 소피스트에 대한 천 교수의 설명은 소크라테스(Socrates)와 소피스트를 철저히 구분하는 기존의 견해를 답습하고 있다.



* 각주 10, 25

 

 소피스트는 원래 특수한 기술이 있는 지자(知者)라는 뜻인데, 기원전 5세기에 이 말은 보수를 받고 지식을 전수하는 순회 교사들을 지칭했다. 그들은 지리, 수학, 문법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으나 출세를 위하여 젊은이들에게 주로 수사학을 가르쳤다.



수사학의 핵심은 로고스(logos)’, 이다. 로고스의 중요성을 강조한 소크라테스는 직접 글을 쓰지 않았다. 고르기아스는 말이 가진 설득의 힘이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신적인 힘과 맞먹는 것으로 이해했다. 당시 그리스인은 설득의 힘을 신령스러운 능력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고르기아스는 설득의 힘을 가진 로고스를 (arete)보다 중요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모든 소피스트를 덕의 기능에 무관심한 수사학 전문 교사로 규정할 수 없다. ‘첫 번째(최초의) 소피스트로 알려진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말과 덕의 기능 모두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고르기아스와 다르게 덕의 교사임을 자처했다.


천 교수의 각주 10번은 소피스트를 소크라테스와 대비되는 비 철학적 학파로 보는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소크라테스 대 소피스트는 고대 철학의 주류 견해로 오랫동안 자리 잡았으나 소피스트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거의 밀려난 상태다. 소크라테스를 묘사한 고대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을 연구한 루이 앙드레 도리옹(Louis-Andre Dorion)은 자신의 책 소크라테스(소요서가, 2023)소피스트들도 소크라테스처럼 철학적 질문을 성찰의 특별한 대상으로 삼았음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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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묘사된 아테나(Athena)지혜의 신이다. 아테나는 호메로스(Homers)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주인공 오디세우스(Odysseus)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위해 여러 차례 도와준다.














 

 

* 호메로스, 김기영 옮김 오뒷세이아(민음사, 2022)

 

[대구 인문학 책방 일글책 - 고전 읽기 모임 두 번째 도서]

*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도서출판 숲, 2015)

 

 


멘토의 어원으로 알려진 나이 많은 현자 멘토르(Mentor)의 정체는 아테네다. 지혜의 신은 멘토르로 변신하여 방황하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us)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해준다.


한 권의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모험가가 된다독자는 글자들이 헤엄치고, 출렁이는 종이 바다를 항해한다. 모험의 목적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찾는 것그 보물은 바로 독자 본인의 진짜 모습이다그 보물을 얻으면 본인의 취향을 알게 된다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면서 책을 읽는 독자는 해일처럼 거칠게 다가오는 수많은 책에 휩쓸리지 않는다또 지식인들이 만든 에 들어갈 수 있다.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 4, 5월의 책]

/성이론 통권 제47》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22)




4월 한 달 동안 /성이론 통권 제47를 읽었다. 내겐 너무 힘든 모험이었다이 책에 나오는 지식인들의 섬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섬들에 사는 지식인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지적 영토를 구축하고 있는 섬의 지배자들은 다음과 같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캐런 바라드(Karen Barad),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 등이 있다. 버틀러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들이다/성이론 통권 제47의 기획 특집으로 분류된 글들의 주제는 신유물론과 페미니즘이다. 기획 특집 첫 번째 글 신유물론()과 페미니즘, 그리고 버틀러 비판은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사상을 소개하고, 이들이 어떻게 버틀러를 비판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방 <직립보행>의 부부 책방지기는 내겐 아테나와 같은 존재이다. 특히 보행님은 버틀러, 들뢰즈(Deleuze),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로저 브라이도티 등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책을 섭렵한 분이다. 그분께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책방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 4월 마지막 주말은 <직립보행> 휴무일이었다. 진작에 제대로 물어볼 걸 그랬어.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들의 섬 주변을 마냥 혼자 배회할 수 없다. 모험이 실패했으면 다음 여정을 위해 노선을 변경해야 한다/성이론 통권 제47제일 마지막에 실린 성평등 전주 예술인 전시 퇴출 사건의 쟁점들: 검열과 차별의 기준점이 된 페미니즘페미니스트들의 과도한 검열을 비판한 글이다.


소녀, 농약, 좀비는 요절한 소녀의 삶을 신유물론적 관점으로 분석한 글이다. 소녀는 경제발전이 국가 생존의 문제로 강조하던 1970~1980년대를 살았다. 10년 동안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산업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은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쓰러지게 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자, 박정희 정권은 식량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농업 정책을 내세운다. 정부는 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전국 농촌에 통일 벼를 보급했고, 농약과 제초제 사용량이 늘어났다. 일찍 노동 현장에 뛰어들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소녀는 1988년에 제초제를 마시고 자살한다


이 글에 언급된 좀비는 자본주의 체제에 밀려나거나 소외된 하층민 또는 노동자다. 그들은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여 피와 땀을 흘리면서 노동력을 제공했지만,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파업에 돌입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국민 대다수는 경제가 성장해야 내가 더 잘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부르주아는 자신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가난에 벗어났다고 확신한다. 그들의 눈에는 일하지 않고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위험한 좀비로 보였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건강한 부르주아는 가난한 좀비가 되고 싶지 않다.


소녀, 농약, 좀비고쳐야 할 곳이 있다.

 

 

* 63쪽 주 43

 

 DDT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에탄의 약자이며 [중략] 1874년 독일에서 처음 합성된 DDT가 살충 작용이 있다는 사실이 1939년 스위스 화학자 파울 헤르만 뮐러에 의해 밝혀진 후 2차대전 중 말라리아와 장티푸스를 예방하는 목적으로 대거 사용되었고 194510월 미국에서는 살충제로 일반인들에게 시판이 되기도 했다.



DDT의 정확한 명칭은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이다. ‘한 글자가 빠졌다.

















* [절판] 로버트 E. 하워드 외, 정진영 엮음, 좀비 연대기(책세상, 2017)



* 64


 ‘좀비는 원래 (god)’이라는 뜻의 니제트어와 콩고어인 ‘nzambi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아이티의 민속종교인 부두교 전설에 등장하는 비약 노예이야기가 보태져 오늘날 회자되는 좀비 이미지가 탄생하였다. 부두교의 전설에 따르면 사람에게 약물을 써서 가사 상태로 만든 후 장례를 치르고 매장한 뒤 그 무덤을 파서 다시 살려내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상태지만 인지능력이 이전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 상태가 되는데 그렇게 된 사람을 농장 노예로 팔아 노예노동을 하게 만들 수가 있다. 이 이야기는 1929년에 마법의 섬(Magic Island)(윌리엄 브룩)이라는 소설에 등장했고 [생략]



작가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 윌리엄 시브룩(William Seabrook)’이다. 번역된 마법의 섬은 좀비를 소재로 한 단편 공포소설 선집 좀비 연대기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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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5-02 2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후.. 어려울 건 알지만 47호 땡투하겠습니다!!!! 사놓고 안 읽겠지만 ㅋㅋㅋ 현시점의 제가 가장 읽고 싶은 사람들은 앨러이모 / 버라드 / 그로츠 거덩요 ㅋㅋㅋ 알려쥬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23-05-05 09:00   좋아요 1 | URL
땡스투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여/성이론> 읽다가 어려워서 내용 정리를 하지 못했어요. 신유물론 관련 글 본문 바로 밑에 참고문헌이 언급된 주석이 있어요. 읽어야 할 책이 많던데 살까 말까 고민 중이에요. 저는 캐런 버라드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일단 양자역학부터 다시 공부해야겠어요... ^^;;

공쟝쟝 2023-05-05 11:01   좋아요 1 | URL
버라드 관련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양자역학 ㅋㅋㅋ 저는 김상욱 박사님 좋아해서 그냥 그 정도 수준으로 이해하고 읽어도 무리는 없었습니다. 벵하민 라바투트의 지적인 소설 <우리가 세상을…>도 재밌게 읽었던 터라 도움되었는데, 다 버라드 읽으려고 과거의 내가 한 거구나 해서 뿌듯함!!!

레삭매냐 2023-05-05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빡신 독서모임 중독자!

대단하십니다 고저.

cyrus 2023-05-05 09:01   좋아요 1 | URL
이번 달에 달궁 모임 하면 참석하겠습니다! ^^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대표작이다.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신들>, <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 인문학 책방 일글책 - 고전 읽기 모임 세 번째 도서]

* 아이스킬로스, 천병희 옮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도서출판 숲, 2008)

 


[대구 책방 서재를 탐하다 & 읽다익다 -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219월 도서]

* 천병희 옮김 그리스 비극 걸작선: <오이디푸스 왕> 3대 비극 작가 대표 선집(도서출판 숲, 2010)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만 수록되었음


 
















* 아이스킬로스, 두행숙 옮김 오레스테이아(열린책들, 2012)

* 아이스킬로스, 김기영 옮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유문화사, 2015)




오레스테이아는 오레스테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오레스테스(Orestes)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 미케네(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Agamemnon)의 아들이다. 고대 그리스는 여러 개의 도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모든 도시 국가들의 병력을 결집한다. 수많은 부대를 이끌고 출항하려는 순간 뜻밖의 문제가 생긴다. 함선들을 움직여 줄 바람이 불지 않은 것이다. 예언자 칼카스(Kalchas)아르테미스(Artemis)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제물을 바치면 출항할 수 있다고 예언한다. 그런데 칼카스가 지목한 제물은 바로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Iphigeneia). 결국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전쟁터로 향한다.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는 딸을 죽인 남편에 앙심을 품는다. 그녀는 아이기스토스(Aegisthus)를 정부(情夫)로 삼아 아가멤논을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아이기스토스의 아버지 티에스테스(Thyestes)는 미케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복형 아트레우스(Atreus)와 다툰다. 아트레우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다. 아트레우스의 아내 아에로페(Aerope)와 티에스테스의 간통 관계가 발각되면서 아트레우스는 끔찍한 복수를 실행한다. 그는 티에스테스의 세 아들을 죽인 다음 그들의 신체 일부를 음식으로 만든다. 그리고 동생을 초대해 그에게 음식을 내놓는다. 아들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 티에스테스는 인육으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이때 아트레우스는 티에스테스의 눈앞에 잘려 나간 시신 일부를 내밀면서 음식 재료를 밝힌다. 티에스테스를 추방하면서 아트레우스의 복수는 성공한다


하지만 두 형제의 복수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티에스테스의 열세 번째 아들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을 죽여서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로 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십 년 만에 미케네로 돌아온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1부인 <아가멤논>은 두 사람이 아가멤논을 복수하게 된 계기를 보여준다2부부터 오레스테스의 복수극이 시작된다.


코로스(khoros, 노래를 부르면서 극의 전체적인 내용을 알려주는 사람들)의 우두머리인 코로스 장()은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자신의 복수가 정의로운 살인이라고 강조하면서 코로스 장의 비난에 떳떳하게 맞선다살인은 비윤리적 행위다. 이 자명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독자는 코로스 장의 편에 서게 된다. 그래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는 과연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마주한 몇몇 독자라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살인 행위를 꾸짖는 코로스 장처럼 말을 할 것이다. 나는 이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 행위를 원한과 복수, 이 두 개의 단어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결국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꼭 잔인하게 죽였어야 했냐?’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우선 1부 복수극의 발단인 아가멤논의 살인 행위에 무엇이 문제인지 따져 보자. 그러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는 단순 살인이 아닌 국가 권력에 저항한 단독 행위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아가멤논은 제단 옆에서 직접 딸을 죽여야 하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 참전을 위한 그리스 동맹의 서약을 저버릴 수 없다고 고집한다. 그러면서 딸의 희생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일이니 결코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윽고 손위 왕이 이렇게 말했다네.

복종치 않는다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오.

하나 내 집안의 작은 자식을 죽임으로써

제단 옆에서 이 아비의 손을

딸의 피로 더럽힌다면,

이 또한 괴로운 일이오.

그 어느 것인들 불행이 아니겠소?

하나 어찌 동맹의 서약을 저버리고

함대를 이탈할 수 있단 말이오?

처녀의 피를 제물로 바치기를 그토록

열망하는 것도 바람을 잠재우기 위함이니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나는 만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오.”


 

(<아가멤논> 205~217, 천병희 옮김, 37)




아가멤논은 도시 국가들의 군주 앞에서 내건 약속을 지켜야 한다. 전쟁에 승리해서 평화가 찾아오면 만사(萬事)가 잘될 것이다. 아가멤논은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정당하다라고 인식하는 동시에 딸을 죽인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낸다. 그런데 아가멤논의 진짜 문제는 이피게네이아의 죽음 이후의 행보에 있다.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기리는 만사(輓詞: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를 공표하지 않았다. 또 그녀를 공적으로 애도할 수 있는 어떠한 장도 마련하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은 점차 미케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간. 그들은 그리스군의 승리를 간절히 염원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한밤중에 사자(使者)가 불을 피운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불이 승전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환성을 지를 정도로 크게 기뻐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군의 승리라고 확신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반응에 비웃는다.




얼마 전 불의 첫 사자(使者)가 밤중에 와서

일리온이 함락되고 파괴되었음을 알렸을 때

나는 기뻐서 크게 환성을 질렀어요.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로 나를 나무랐지요. “불의 신호를

믿고 트로이아가 이제 폐허가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쉽게 감격하는 게 여자에게 어울리는 일이긴 하죠.”

이런 말은 나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게 했죠.

그래도 나는 제물을 바쳤고, 그들도 여자인

나를 따라 시내 곳곳에서 기쁨의 환성을 질렸어요.

신전마다 향은 머금은 불을 피우고

향기로운 그 불꽃 위에 술을 부으며 말이오.

 


(<아가멤논> 586~595, 천병희 옮김, 52)

 


미케네 사람들은 불의 신호가 정말 그리스군의 승리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의 속임수인지 의심한다(<아가멤논> 종가, 475~478). 이 사람들은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쉽게 감격해서 섣불리 판단하는 어리석은 여자(두행숙 옮김, 열린책들)’라고 생각한다. 어떤 현상을 이해할 때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판단하는 행위를 중시하는 미케네 사람들이 분별력이 없는 어리석은 왕비를 따르겠는가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 16번째 도서(2019년에 완독)]

* 주디스 버틀러, 윤조원 옮김 위태로운 삶: 애도의 힘과 폭력(필로소픽, 2018)




만약 아가멤논이 없었던 기간에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통치력이 생겼더라면왕비는 이피게네이아를 애도했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폭력, 애도, 정치라는 글에서 국가가 애도해야 하는 대상을 알리는 공적 부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공적 부고에 속한 고인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했거나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반면 공적 부고 명단에 없는 이름들은 애도 불가능한 대상으로 돼버린다. 심지어 국가는 그들을 애도하는 시간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애도할 수 있는 공간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버틀러는 애도 대상을 차등적으로 분류하는 기준이 슬픔의 위계질서까지 만든다고 비판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난 군인, 테러로 목숨을 잃은 무고한 시민, 일면식도 없는 타지 사람을 구하다가 세상을 떠난 외국인 등의 소식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함께 슬퍼한다. 하지만 성전환 수술 이후 강제 전역 처분을 받은 군인의 죽음, 국가가 미리 대처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재난을 피하지 못한 시민, 제대로 된 작업복을 입지 않은 채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뿐. 국가와 국민은 합심해서 그들만의 공적 부고 명단을 작성하고, 명단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배제한다평범한 우리도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상을 규제하는 국가 권력의 공모자가 될 수 있다. 버틀러는 개인 또는 집단을 위한 애도와 슬픔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에 끊임없이 문제 제기해야 한다면서 재차 강조한다.



 우리는 어떤 조건하에서, 어떤 배제의 논리에 따라, 어떤 삭제와 이름 지우기를 통해서 애도가능한 삶이 결정되고 유지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폭력, 애도, 정치중에서, 위태로운 삶71)

 



이피게네이아는 잊힌 것이 아니라 지워졌다. 전쟁이 끝나면 살아남은 자들은 전사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아가멤논과 미케네 사람들은 공적 부고에 전사자들의 이름만 빼곡히 적는다. 명단에 이피게네이아의 이름을 적을 여백이 없다. 그러는 사이 이피게네이아 단 한 사람의 희생은 애도할 수 있는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클리타임네스트라는 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분노했다그녀의 살인 행위는 단순히 딸을 죽인 남편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아가멤논은 불평등한 애도 분위기를 조성한 국가 권력 그 자체다. 국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가볍게 보는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클리타임네스트라였다그렇지만 미케네 사람들은 그녀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 허망하게 죽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아가멤논을 애도한다. 아이기스토스는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피의 복수에 동참했다. 이런 그가 원수의 딸을 알기나 할까? 만약 이피게네이아가 아들이었다면? 과연 아가멤논은 자신이 죽인 아들을 어떤 방식으로 애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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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세 번 알라딘 동성로점에 간다. 한 번 서점에 방문하면 책을 잔뜩 구매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적게 주문하면 여섯 권, 많이 주문하면 열 권)을 받으러 서점에 간 것뿐인데 2, 30분 지나고 나오면 구매한 책은 곱절이 넘는다. 이렇다 보니 차마 손을 뻗지 못하고, 눈길만 주는 책들이 많다. 이런 책들은 내 마음속 장바구니에 꽤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다. 3월의 장바구니를 채운 많은 책 중 한 권이 요네자와 호노부의 역사 추리 장편소설 흑뢰성이었다.
















* 요네자와 호노부, 김선영 옮김 흑뢰성(리드비, 2022)



 

지난달 중순에 대구 장르문학 전문 서점 <환상 문학>이 첫 독서 모임 공지를 올렸다. 모임 일정은 한 달 격주 금요일이었고, 47, 421일 일정과 414, 428일 일정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대구 최초의 장르문학 전문 서점에서 열리는 역사적인 첫 번째 독서 모임에 참석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평일 저녁에 진행되는 독서 모임에 꾸준히 참석할 자신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잔업으로 인해 목요일 저녁에 진행되었던 독서 모임 <우주지감>에 불참하거나 늦게 출석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네자와 호노부를 좋아하는 장르문학 마니아들이 많이 신청하길 바라면서 책 읽고 글 쓰는 일상에 충실히 살기로 했다.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에 나를 포함해서 총 일곱 명의 정기 회원이 참석하고 있다. 그중에 향기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회원이 있다. 향기님은 장르문학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역시 장르문학 마니아답게 그분은 <환상 문학> 독서 모임에 신청했다. 3월 말에 <환상 문학> 독서 모임 공지가 다시 떴다. 모임 신청자 수가 적어서 그런지 모임 일정이 47일과 421일로 변경되었다. 43일까지 신청자가 없으면 독서 모임이 취소된다고 했다. 대구에 흔하지 않은 장르문학 독서 모임이 시작도 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게 너무 아쉬웠다. 조금의 망설임 없이 신청 링크를 눌렀다.

 

모임 신청한 당일 흑뢰성를 받으러 <환상 문학>에 방문했다. 흑뢰성은 일본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서 내겐 무척 낯설었다. 흑뢰성을 다 읽은 책방지기한테 흑뢰성을 쉽게 읽는 방법이 있는지 조언을 구했다. 책방지기는 흑뢰성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시대적 배경과 관련된 지식을 알아가면서 읽으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만 읽어보라고 하셨다. 시키는 대로 읽으니까 생각보다 소설이 술술 읽혔다.

 

47일에 <환상 문학> 첫 번째 독서 모임이 진행되었다. 그날 30분 정도 잔업을 하게 되었고, 결국 내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서점으로 향했지만, 모임 시작 전까지 서점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했다. 피로가 쌓이면 입 안에 염증이 생긴다. 말을 할수록 통증이 느껴져서 발언보다는 경청에 집중하려고 했다. 헐레벌떡 서점에 와보니 책방지기와 향기님, 딱 두 분만 계셨다. 말을 안 할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책방지기는 흑뢰성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들려줬다. 그런 다음에 책 속의 주요 장면들을 짚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모임 때 주고받은 대화 내용은 생략하겠다. 지금 모임 후기를 쓰려고 하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모임 때 한 발언은 흑뢰성서평을 쓸 때 언급되는 내용이라서 여기서 밝힐 수 없다. 장르문학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원인은 스포일러다. 그러므로 장르문학 전문 독서 모임만큼은 그날 나온 대화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책과 모임 분위기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까.

 

<환상 문학> 첫 번째 독서 모임 후기가 용두사미로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참석하려는 다른 독서 모임 일정을 소개하겠다. 내 근황에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1. 대구 인문학 서점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422일 토요일 오전 10















* 아이스킬로스, 천병희 옮김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 (도서출판 숲, 2008) 『아가멤논

 




2.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 스타킹>: 430일 일요일 오후 2

장소: 카페 스몰토크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성이론 통권 제47》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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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4-12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왜 너의 근황이야 항상 궁금하지. 네가 안 알려주니까 모르는거지. ㅋ
아쉽게 됐다. 처음엔 다 그렇지. 울나라가 독서인구가 워낙 저조해서 그렇긴 하지만 잘 되리라 응원한다.
근데 입 아파서 어쩌나. 몸 잘 돌보래이.^^

cyrus 2023-04-16 09:44   좋아요 1 | URL
음, 생각해보니 제가 개인적인 이야기나 감정을 알라딘 블로그에 자주 표현하지 않았네요.. ㅎㅎㅎ 주로 책 이야기만 했죠.

장르문학 독서 모임은 책방지기, 저, 그리고 저랑 같이 고전 읽기 모임에 참석하는 분 딱 세 명이 모여서 진행했어요. 살면서 삼자대면 독서 모임을 하게 될 줄이야.. ㅎㅎㅎ 정말 재미있었어요. ^^

지금은 구내염 다 나았어요. :)

기억의집 2023-04-12 1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흑뢰성 빌려서 읽었어요. 처음에는 인물 파악하기 힘들어서 애 먹었는데 읽다보니 적응이 돼서 술술 읽히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이 이 작가의 최고작이다라는 세간의 평에는 글쎄 싶었어요.

점점 책 읽는 인구가 줄긴 하는가 봅니다. 취소가 돼서 아쉬움이 크겠어요 ㅠㅠ

cyrus 2023-04-16 09:47   좋아요 0 | URL
저는 결말까지 읽어보고 평점을 주려고 해요. <흑뢰성> 중간까지 읽었는데요, 일단 좋습니다.. ^^

장르문학 독서 모임은 취소되지 않았어요. 저 포함해서 세 명이 모여서 진행했어요. 이번 주 금요일은 <흑뢰성> 두 번째 모임이 있는 날이에요. 뭐 그날도 변함없이 세 명이 모일 것 같아요.. ^^;;

blanca 2023-04-12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뢰성 궁금하네요. 한번 읽어볼까요. 일본 중세시대 배경이라니...관심 가네요. 저도 피곤하면 구내염 작렬입니다. 지금도 나아가고 있는 단계고요.

cyrus 2023-04-16 09:48   좋아요 0 | URL
다 나았다 싶으면 또 생기는 게 구내염이죠.. ㅎㅎㅎ
 




내 주말은 오전 10, 책방 <일글책>에서 시작한다. 서양 인문 고전 읽기모임<일글책>에서 진행된다









<일글책> 공식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w_book/




<일글책> 책방지기는 고전 읽기 모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파이데이아 회원이다. 파이데이아(paideia)고대 그리스식 교육을 뜻한다. 고전 읽기 모임 명칭은 위대한 저서(great books) 읽기 프로그램이다. 미국 시카고 대학은 학생들의 교양 교육을 위해 읽어야 할 위대한 저서100권의 서양 고전 도서 목록을 만들었다. 도서는 연차별로 나누어져 있으며 12년에 걸쳐 읽어야 한다. 학생들은 위대한 저서에 포함된 모든 책을 전부 읽어야 졸업할 수 있다. 독서와 토론을 병행한 시카고 대학의 커리큘럼은 오늘날 시카고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일리아스(도서출판 숲, 2015)

*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도서출판 숲, 2015)




<일글책> ‘서양 인문 고전 읽기모임은 파이데이아 독서 토론 프로그램 방식과 같다. 위대한 저서’ 1년 차에 포함된 도서를 읽는 중이다. 올해 1, 2월에 호메로스일리아스를 완독했다. 3월부터 오뒷세이아를 읽기 시작했다.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 서사시다. 오디세우스는 귀향하는 과정에서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겪는다. 오뒷세이아9에 오디세우스 일행은 로토스라는 열매를 먹는 부족이 사는 섬에 닿는다. 부족은 오디세우스 일행에게 자신들이 먹고 있던 열매를 먹어보라고 권한다. 열매를 먹은 부하들은 꿀처럼 달콤한 맛에 중독되어 귀향하기를 잊어버리고 만다. 오디세우스가 억지로 부하들을 함선으로 데려오면서 일행은 다시 바닷길에 오른다.


나는 로토스와 관련해서 발제문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반복적인 쾌락에 빠지게 만드는 로토스가 있었나요? 실제로 그런 로토스가 있었으면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쾌락 중독에 벗어나는 비결이 있나요? 아니면 오디세우스처럼 로토스를 먹지 못하도록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새벽에 발제문을 만들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이라는 로토스를 10대부터 먹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 먹고 있다. 책을 너무 많이 샀고, 너무 많이 읽는 바람에 독서보다 재미있는 다양한 경험(영화 보기, 여행, 연애 등)을 하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에 외골수 같은 내 삶이 단조롭고 지루하게 보였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책만 보는 나랑 대화하기가 쉽지 않고, 친해지기가 어려운 특이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서글픈 내 과거가 묻은 발제문을 가슴에 품은 채 <일글책>으로 갔다. 내 이야기를 모임을 통해 풀어헤치려고 했다. 아니, 그런데 모임에 참석한 분들 모두가 자신들의 로토스가 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책을 너무 좋아하면서 느꼈던 고충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분들이 꺼내놓은 이야기가 다 내 이야기라서 내 발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대화가 옆길로 샜는데, 어느새 자신들이 가본 책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20여 분 동안 책방 이야기만 계속했다. 역시‥…. 애서가는 독서가 힘들고 괴롭다고 투정 부려도 책을 손에 놓지 못하며 책을 더 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뭔가에 홀리듯이 책방으로 향한다. 나는 발제문에 관련된 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고, 딱 이 말 한마디만 했다. “우리 언젠가는 알라딘 서점이나 다른 책방에서 만날 거예요.”


주말이면 꼭 가는 책방이 <직립 보행>이다. <직립 보행> 부부 책방지기는 내 주말 친구다. 정말 이 두 분이 없으면 내 일요일은 책만 읽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대구의 인문학 전문 책방을 꼽으라면 나는 <일글책><직립 보행>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글책>이 있어서 나는 고대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직립 보행> 덕분에 근현대 철학을 접할 수 있었다.
















* [절판] 오에 겐자부로, 정수윤 옮김 읽는 인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위즈덤하우스, 2015)




<직립 보행>에 가면 무조건 세 권의 책을 산다. 그런데 가방 안에 이미 알라딘 서점과 다른 책방에 구매한 책들이 있어서 딱 한 권만 샀다그 책은 바로 오에 겐자부로읽는 인간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이 마크 트웨인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고 했다. 이 소설 속 주인공 (허클베리 핀의 애칭)흑인 노예 짐을 그의 주인 노부인에게 돌려주려고 생각했다. 짐은 노부인의 재산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헉은 짐을 돕기 위해 남의 재산을 훔치면 지옥에 간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한다. 그 순간 헉은 마음속에 되뇌던 말을 내뱉는다. 그래,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All light, then, I’ll go to hell).”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던 오에는 그 구절을 읽은 이후로 지옥으로 가겠다라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2년 전부터 나는 책만 사는 인간으로 살아오고 있다. 진짜 내 모습, ‘읽고 쓰는 인간이 그리워졌다. 무의미한 일상을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을 때, 어느 분이 내 알라딘 블로그에 댓글을 남겼다. 그분은 책을 비판한 서평을 쓴 내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 댓글을 보면서 마음속에 했던 말을 내뱉었다. “그래, 나는 로토스를 먹겠다.” 


내 곁에 책 읽는 내 욕망을 벗어나게 해줄 오디세우스 같은 구원자는 없다. 그러면 내가 만든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나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써야 한다. 독서가 욕망이라면, 서평 쓰기는 의무다. 좋은 책을 고르고 싶은 독자를 위해서 내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독서는 중독이 아니다. 중대한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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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23-04-01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파이데이아 모임을 몇 번 해봤습니다. 해보고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 혼자서 고전 읽기를 계속 하게 됐죠.^^;; 지극히 제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저 시카고 플랜 자체가 너무 서양 고전 책들만 가득하다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고전은 한 권도 포함되지 않았죠. 그래서 저 혼자서 동양고전도 찾아 읽어봤습니다. 읽어보고 나서 깨달은 건데, 동양고전이 서양고전보다 제게 훨씬 더 익숙하고 제 지금까지의 삶에 더 친근하더군요. 다른 말로 하면 더 와 닿는다고 해야할까요? 서양고전은 낯설고 이해하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어쨌든 파이데이아 모임을 하신다니 부디 잘 읽어나가시를..

cyrus 2023-04-02 08:25   좋아요 0 | URL
맞아요. 파이데이아에 오랫동안 활동하신 분들이 읽기 프로그램에 변화를 꾀해보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예를 들어서 동양고전이 포함된 목록을 만드는 거죠. 그리고 여성 저자와 작가들이 쓴 책도 더 추가해야 해요. 그래서 책 읽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과 독서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

blanca 2023-04-01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마음입니다. 저도 쓰는 일을 게을리했는데 읽지만 말고 쓰기도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책이 로토스인 사람들의 모임 저도 관심 가네요. 저는 주변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좀 쓸쓸할 데가 있더라고요. 저는 책이 있어 삶의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어요. 글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23-04-02 08:31   좋아요 0 | URL
주변에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독서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이 꽤 많아요. 그렇지만 오히려 독서 모임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들도 있어요. 독서 모임을 통해 만나는 분들이 정말 성품이 좋아야 해요. 성품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가 무조건 옳다면서 고집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아요. 게다가 다른 사람의 독서 취향을 가볍게 보거나 무시하기도 해요.

레삭매냐 2023-04-01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welcome back bro~

cyrus 2023-04-02 08:32   좋아요 1 | URL
인스타에서도 만나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3-04-02 09:02   좋아요 1 | URL
책만 사는 닝겡, 여기 1인 추가요 ~~~

바람돌이 2023-04-01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읽기 모임에 매주 서점에 가시는 cyrus님
와 진짜 진정한 독서가이자 애서가이십니다. cyrus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 꼼꼼한 읽기에 감탄하는데 오늘 글에서 그런 꼼꼼하고 세심한 글이 나오게 되는 이유를 살짝 엿본거 같네요.
저는 뭐든지 좀 대충대충인 사람이라 이런 자세를 보면 막 반성하게 됩니다.

cyrus 2023-04-02 08:37   좋아요 1 | URL
반성하지 않으셔도 돼요. 너무 꼼꼼하게 책 읽으면 피곤해요. 책 읽을 때 집중하다 보면 느끼지 못하다가, 책 다 읽고 나면 피곤함이 확 몰려와요.. ㅎㅎㅎ 제가 책 읽는 방식이 피곤한 스타일이라서 서평 한 편 쓰는 데 오래 걸릴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한동안 서평을 안 쓰고 책만 읽었어요. 그런데 서평을 쓰긴 써야겠더라고요. 요즘 엉터리로 만든 책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이렇다 보니 정작 좋은 책들을 독자들의 관심을 못 받고 있어요. 이런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 없어서 다시 글을 쓰기로 했어요. ^^

페넬로페 2023-04-02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참가하고 있는 도서관 동아리 모임 이름이 ‘클래식‘인데 거의 5년동안 고전을 읽어 와 올려주신 책들이 반가워요. 코로나 시국에도 1년동안 줌으로 만나 지금까지 한번도 빼먹지 않고 만나고 있어요.
책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나 봅니다.
든든하네요^^

cyrus 2023-04-03 05:07   좋아요 1 | URL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독서 공동체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이런 독서 공동체 속에서 생활하다 보면 책을 더 잘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생기고요, 같이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 좁았던 제 생각의 폭과 식견이 조금씩 넓혀질 수 있어서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