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트럼프의 곁에는 아군이 없다. 음담패설 녹음 파일 공개 이후로 지지율 추락과 함께 당의 내분이란 악재를 만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이 녹음 파일에는 트럼프가 유부녀를 유혹한 경험담이 담겼고, 특히 여성의 신체 부위를 저속한 표현으로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대목도 들어 있다. 녹음 파일 파문으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를 보면서 딱 ‘그 사람’의 이름이 생각났다. 묘하게 ‘그 사람’은 트럼프와 닮은 인생을 살아왔다. 두 사람 다 한때 자신들이 종사한 분야에 최고의 정점에까지 올랐으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인기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테리 진 볼리아는 고교시절 레슬링에 빠진 뒤 본격적으로 레슬링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WWWF(WWE의 전신)의 프로모터 빈센트 제임스 맥마흔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프로레슬러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볼레아는 훗날 헐크 호건이란 예명으로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1987년 레슬매니아 3에서 열렸던 앙드레 더 자이언트와 치른 경기는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며 이날 역대 최다 관중을 기록했다. (현재 레슬매니아 32가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했다) 호건은 강력한 악역 선수들을 연신 격파하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선량한 영웅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존재 덕에 WWE는 소수 마니아 스포츠에서 주류 스포츠의 한가운데로 올라설 수 있었다. 호건은 한때 링을 떠나 할리우드를 기웃거리며 각종 TV쇼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건은 지천명을 넘긴 2000년대에 들어서도 젊은 선수들 못지않은 운동 실력을 보여주었다. 전성기가 완전히 지났어도 그의 등장음악이 경기장에 울려 퍼지면 관중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호건의 전성기인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트럼프는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사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무리한 투자로 인해 회사 두 개를 날려 먹기도 했지만, 부동산 사업에 수완을 발휘하여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는 NBC TV의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라는 리얼리티 쇼를 진행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어프렌티스>로 유명세를 얻은 트럼프는 2007년 WWE에 깜짝 출연한다. 과거에 할리우드 영화배우(아널드 슈워제네거)와 세계적인 운동선수(마이크 타이슨)가 WWE에 등장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트럼프는 억만장자답게 링 위에 돈을 뿌리면서 등장했고, WWE의 운영자 빈스 맨마흔(빈센트 제임스 맥마흔의 아들)과 신경전을 펼쳤다. 두 사람은 레슬매니아 23에서 각자 자신을 대신한 레슬링 선수를 내세워 경기한 뒤 이긴 쪽이 진 쪽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내기를 걸었다. 부동산 재벌과 프로레슬링 재벌의 대립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 당시에도 트럼프는 머리숱이 많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특이한 머리 모양으로 가발이란 의혹을 받았다. 그만큼 실제 머리카락이 잘리는 상황이 벌어질지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많았다. 맥마흔은 엔터테인먼트 대표답게 이 경기를 ‘억만장자들의 전쟁’으로 지칭하며 흥미를 유발했다. 하지만 WWE를 오랫동안 지켜본 팬들은 이미 내기의 결과를 예상하였다. WWE는 보통 스포츠와 달리 각본이 정해져 있다. WWE 팬들은 당연히 트럼프의 낙승을 예상했다. 역시나 충격적인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고, 트럼프가 승리하여 맥마흔은 삭발 굴욕을 당한다.
호건도 맥마흔과 레슬링 경기를 펼친 적이 있다. 2003년 호건은 더 락(The Rock)과의 경기에서 맥마흔의 방해로 패배했다. 두 사람의 대립 양상은 레슬매니아 19에서 이어졌다. 스트리트 파이트 룰(Street Fight Match, 무기 사용이 허용된 무규칙 경기)이 적용된 경기는 호건이 승리했다. 호건과 트럼프는 WWE에서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WWE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현재 WWE 내의 호건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졌다. 2012년 한 가십 전문 미디어 매체가 호건이 등장한 문제의 동영상을 공개했는데, 이 동영상은 호건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 호건은 2006년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나누면서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그리고 영상 속에서 호건은 자신의 딸이 흑인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인종차별 발언을 퍼부었다. 법원에 증거물로 제시됐던 영상이 언론을 통해 노출되며 파장이 일어났다.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선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그의 추잡한 스캔들은 엄청난 파장이 일으켰다. WWE는 호건에게 영구 퇴출 징계를 내렸다. 이에 따라 WWE 명예의 전당에 올라있는 호건은 모든 기록이 삭제됐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캐릭터 ‘헐크 호건’을 이용한 수입 일체를 받을 수 없게 됐다. 한순간의 말실수로 헐크 호건은 ‘인종차별주의자’ 테리 진 볼리아가 되어버렸다.
현재 호건에 향한 동정론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지만, 호건은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어렸을 적에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에서 자라다 보니 잘못된 언행이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고 해명했지만, 그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한 주민들의 분노만 불러일으켰다. 조용히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할 호건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공개 발언을 해서 또 한 번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인종차별주의자들끼리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나 보다. 현재 호건의 곁에는 열성 팬이 없다. 심지어 그를 존경했던 동료 선수들마저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의 현 상황을 비교하면서 느낀 점이 딱 하나 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엄청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명백한 진리를 강조하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는 도의에 어긋한 공인의 행동을 눈감아주지 않고, 직설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러웠다. 수십 년간 링 위에서 땀을 흘렸던 WWE 선수들과 보수적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해온 공화당 소속 정치인들에게도 ‘올바른 비판 의식’이 있었다. 물론, 공화당 입장에서는 당 전체 이미지 실추를 막으려고 부랴부랴 트럼프 지지를 철회하고 있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미온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우리나라 정당 정치인들의 모습과 많이 비교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미국 정치인들보다 운이 좋다. 국민의 분노를 유발한 실언을 뱉은 정치인은 슬그머니 자숙의 시간을 보낸 뒤에 다시 국회에 등장한다. 그와 같은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은 그의 복귀 소식에 쌍수 들고 환영한다. 악의 근원은 확실하게 잘라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