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글은 [가이아에서 팔척 귀신까지]라는 제목의 글에 포함될 내용이었다. [가이아에서 팔척 귀신까지]가 긴 분량의 글이 될 것 같아서 핵심에서 조금 벗어난 글감을 쳐냈다. 이 과정에서 탈락한 글감이 공개되지 못한 게 아쉬워서 따로 제목을 붙여서 한 편의 글로 정리했다.

 

 

 

 

 

 

 

 

 

 

 

 

 

 

 

 

 

 

 

 

 

 

 

 

 

 

 

 

 

 

 

 

 

 

 

 

      

* 루이스 캐럴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만나다(시공사, 2001)

* Alice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나라의 앨리스(북폴리오, 2005)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열린책들, 2009)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오월의봄, 2015)

 

    

 

앨리스 증후군(Alice in Wonderland Syndrome)’이라는 게 있다.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앨리스가 작품 속에서 겪었던 것처럼 신체 형상이 왜곡돼 보이는 증상이다.

 

 

 

 

 

 

 

 

 

 

 

앨리스는 나를 마셔요!’라는 문장이 적힌 라벨이 붙은 물약을 마시면서 생쥐만큼 작아진다. 작아진 앨리스는 조그만 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지만, 과자를 집어 먹고 커지게 된다. 그 이후로 앨리스는 몸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반복한다.

 

캐럴은 소설 속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앨리스 리들(Alice Liddell)을 무척 좋아했다. 캐럴과 앨리스 리들과의 관계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앨리스 리들에 향한 캐럴의 감정은 어른이 아이를 좋아하는 차원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캐럴을 롤리타 증후군(Lolita syndrome)’이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어떤 이는 캐럴이 앨리스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 올리버 색스 편두통(알마, 2011)

* 이동귀 너 이런 심리법칙 알아?(21세기북스, 2016)

* 김개미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문학동네, 2017)

    

 

 

앨리스 증후군을 겪으면 보통 편두통을 동반하는 경우가 있다. 캐럴도 편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앨리스 증후군은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눈앞에 있는 대상의 형체가 변형 또는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시각적 환영을 겪는다. 편두통 증상은 무척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한쪽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통증이 간헐적으로 일어나거나 긴 시간 동안 지속한다. 발작이 한 번 일어나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욕지기(nausea, 메스꺼운 느낌)를 느낀다. 편두통 환자는 시각적 환각도 경험하게 되는데 이 환각은 환자 스스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다. 김개미 시인의 시는 삶을 황폐화하는 편두통의 강도(強度)를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야 배고픈 딱따구리지

당신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지

당신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지

상처투성이 당신을 쪼아먹고 있지

당신 머리통에 정 끝을 대고

망치를 두드리고 있지

나는야 부리가 무거워 고개를 들지 못하지

내 부리가 닿은 곳에 당신 눈동자가 있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당신

나는야 당신 눈동자를 파먹고 있지

당신 눈동자가 너무 굳어 한번에 삼킬 수 없지

나는야 날개가 굳은 딱따구리지

쪼아먹을 것도 없는 당신을 떠나지 못하지

당신의 퀭한 눈 어둠의 통로를 들여다보는

나는야 배고픈 딱따구리지

당산의 눈동자 하나로는 너무나 배고픈

나는야 당신의 딱따구리지

    

 

(김개미 편두통,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21)

 

 

 

캐럴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아이들을 위해 글을 썼다. 그런데 유독 소녀들만 편애했다. 그의 일기에 보면 남자아이만 빼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문장이 있다. 전기 작가들은 이 일기 구절을 근거로 캐럴의 롤리타 증후군을 의심한다. 하지만 캐럴의 소심한 성격은 다소 거칠고 활동적인 소년들과 맞지 않았고, 쉽게 다가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자아이를 부담스러워하는 캐럴의 대인관계 스트레스가 편두통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편두통의 고통에 벗어나고자 시작한 캐럴의 글쓰기는 병들고 외로운 영혼을 달래는 치유의 글쓰기로 발전했다.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에 재미 붙인 캐럴은 앨리스 리들에 향한 내밀한 애정의 상징들을 동화 속에 꼭꼭 숨겨 놨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몸이 커진 앨리스. 고독과 어깨동무한 자는 시간의 무상함을 일찍이 깨닫고 있다. 캐럴은 앨리스 리들이 숙녀로 성장하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소녀가 숙녀로 자라면서 어린 시절 자신과 함께한 소중한 추억들이 잊힐 거로 생각했다. 또 예전의 밝고 앳된 소녀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캐럴의 편지에는 성장하는 아이들이 변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드러낸 구절이 있다.

    

 

어떤 아이들은 커가면서 너무 보기 흉하게 변하기도 하죠.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나기 전에 부디 당신이 그런 식으로 변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Alice76)

    

 

캐럴은 얼굴은 그대로이고 몸만 커진 숙녀 앨리스를 만나길 원했고, 자신의 욕망을 몸이 커진 앨리스에 투영했다. 편두통을 동반한 환각 증상이 신체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설정에 결정적인 영감을 준 것이다. 몸이 커진 앨리스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작아지는 설정은 캐럴의 일시적인 환각 증세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편두통(알마, 2011)을 집필한 올리버 색스(Oliver Sacks)는 편두통을 뚜렷한 절망과 은밀한 위로라고 표현했고, 책의 부제로 삼았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과 글쓰기를 통해 고독과 질병의 고통을 치유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던 편두통 환자캐럴의 삶과 제법 어울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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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9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29 21:32   좋아요 1 | URL
일상생활에 지장이 줄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신체 일부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하면 정말 움직일 힘이 나지 않아요. 답답해요.
 

 

 

 

키는 체중과 달리 인간으로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운명이다. 몸무게는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키는 유전적으로 결정된 요소인 만큼 싫든 좋든 자신의 타고난 키를 그대로 안고 살아야 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거인이 나타나길 기대해보기도 하고, 때론 자신이 거인이 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우리의 의식 속에 거대한 체형을 원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 세계 곳곳의 전설 및 신화, 문학 텍스트, 그림 등을 살펴보면 심심찮게 거인의 등장을 엿볼 수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거인은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있었다.

 

거인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여자 거인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이다. 남성 주체의 시선으로 기술하는 불균형을 해소해 왜곡된 문화 속 여성을 복원하는 것이 이 글을 작성한 의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자 거인은 다중적 여성의 이미지. 고대 전설에 등장하는 여자 거인은 생명의 창조자였다. 그러나 남성의 시선이 개입되면서 여자 거인의 위상이 달라졌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여자 거인은 남성의 성적 대상이자 구원의 여신상이며 공포의 근원을 상징하여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신화는 전승 과정에서 각종 의식을 동반하면서, 그 신성화의 면모가 강화된다. 따라서 전승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내용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정신을 통해서 신화의 존재 의미를 찾게 된다. 신은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 상징의 의미를 해석해냄으로써 우리는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 여신은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남신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해주는 병풍이었다. 그래서 신화 속 여신의 이면을 살펴보면 인류가 여성에게 부여했던 신성한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도서출판 숲, 2009)

* 아폴로도로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도서출판 숲, 2004)

* 아폴로도로스 아폴로도로스 신화집(민음사, 2005)

* 게르하르트 핑크 WHO :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예경, 2012)

* 다케루베 노부아키 《판타지의 주인공들(들녘, 2000)

    

 

 

가이아(Gai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다.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는 그녀를 (Ge)’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이 대지’, ‘지구를 의미하는 어원이다. 헤시오도스(Hesiodos)의 묘사에 따르면 가이아는 태초부터 존재한 신이라고 한다. 그녀는 처녀생식을 통해 하늘의 지배자 우라노스(Uranus)를 낳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여러 명의 자식을 얻는다. 따라서 가이아는 크고 작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비롯해 바람, 토양, , 햇빛 등 자연의 근원을 어루만져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 조현설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한겨레출판, 2006)

* 김화경 한국의 신화 세계의 신화(새문사, 2015)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창조여신에 관한 신화가 있다. 마고할미 이야기와 제주도에 전해지는 선문대 할망 이야기. 할미는 큰 어머니의 순우리말이다. 할망은 할머니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마고할미는 하늘에 닿을 만큼 키가 크고, 산을 들어 옮길 만큼 힘이 센 창조의 여신이다. 옛 문헌 기록에 따르면 선문대 할망은 마고(麻姑)’로도 불렸다. 그래서 마고할미를 선문대 할망의 다른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선문대 할망은 몸집이 매우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다리가 제주 앞바다 섬에 걸쳐질 정도였다고 한다. 잠을 자던 할망이 일어나 방귀를 뀌더니 천지가 만들어졌다. 제주의 수많은 오름은 선문대 할망이 치마폭에 흙을 담아 바다에 뿌려 제주 섬을 만들 때 치마의 터진 구멍 사이로 조금씩 떨어진 흙이 쌓인 것이다. 한라산은 마지막으로 날라다 부은 흙이다. 선문대 할망은 자신의 키에서 나오는 장점을 과신해서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한다. 한라산 물장오리 못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심이 깊어서 터진물이라고 불렀다. 선문대 할망은 이 못에 들어갔다 빠져 죽는다. 신화학자들은 선문대 할망의 최후를 창조신의 지위가 여신에서 남신으로 넘어가는 변화의 결과로 해석한다. 신성성(神聖性)을 상실한 마고할미는 악행을 일삼는 존재(강원도 삼척의 서구할미)로 변형되었다.

 

 

 

 

 

 

 

 

 

 

 

 

 

 

* 문국진 법의학자의 눈으로 본 그림 속 나체(예담, 2004)

* 앵그르(재원, 2005)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앵그르의 예술한담(북노마드, 2014)

 

 

 

근대 서구의 남성 작가와 예술가들은 여성에게 거인성(巨人性)을 부여하여 남성 앞에서 전시하는 대상로 설정했다. 여자 거인의 영혼에 신성한 능력’이 제거되고, 그 자리에 남성의 시각과 상상력이 채워졌다.

 

 

    

 

 

앵그르(Ingres)그랑 오달리스크 좀 더 자세히 보면 이 그림 속 여성이 비정상적인 자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녀의 허리와 한쪽 팔이 지나치게 길다. 그림을 분석한 학자들은 그림 속 여성이 정상인보다 척추 세 마디 더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앵그르는 정교한 소묘를 통해 완성된 선()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선이 주는 아름다움을 돋보이려고 의도적으로 해부학적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그림 속 여성이 일어나 서 있는 자세로 그려졌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그녀는 한쪽 팔과 한쪽 다리, 허리만 비정상적으로 길어진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 보들레르 악의 꽃(문학과지성사, 2003)

*롭스와 뭉크 - 남자와 여자(컬처북스, 2006)

* 이명옥 팜므 파탈(시공아트, 2008)

    

 

 

보들레르의 시 거녀(巨女)젊은 거녀를 예찬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시에 묘사되는 여자 거인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풍요로움과 편안함을 상징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녀가 검은 열정을 품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자연이 힘찬 기운에 넘쳐

날마다 괴물 같은 아이를 배던 그 시절

나는 젊은 거녀 곁에 살았으면 좋았으리,

여왕 발 밑에서 사는 음탕한 고양이처럼.

 

그녀의 몸이 그 넋과 더불어 피어나

끔찍한 희롱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고

그녀의 가슴 검은 열정 품고 있는지

그녀의 눈에 서린 젖은 안개로 짐작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으리.

 

그녀의 웅대한 형체 위로 한가로이 노닐며

그녀의 거대한 무릎을 비탈인 양 기어오르고,

또 때로는 여름날 몸에 해로운 뙤약볕에 지쳐

 

그녀가 들판을 가로질러 드러누울 때,

나는 그 젖가슴 그늘에서 한가로이 잘 수 있었더라면 좋았으리,

평화로운 마을이 산기슭에 잠들 듯이.

 

(윤영애 역, 70)

    

 

     

보들레르는 '정복자'의 입장에 되어 그녀의 거대한 신체 이곳저곳 마음껏 탐하고 싶지만(그녀의 웅대한 형체 위로 한가로이 노닐며 / 그녀의 거대한 무릎을 비탈인 양 기어오르고), 여성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그녀의 가슴 검은 열정 품고 있는지 / 그녀의 눈에 서린 젖은 안개로 짐작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으리). 보들레르를 비롯한 19세기 중반 상징주의 예술가들이 팜므 파탈을 대할 때 느끼는 딜레마다. 팜므 파탈은 남성에게 여성이 어떻게 동경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보들레르의 거인 여자는 대지의 어머니가 아닌 근대적 팜므 파탈이다. 보들레르는 검은 열정이 품고 있는 여자 거인을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상대를 매혹하고 이내 파멸로 이끄는 위험한 존재로 본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으로 벌거벗은 여성의 신체 크기를 왜곡하여 보들레르의 거녀를 시각화했다. 그림 옆에 있는 시는 보들레르의 거녀원문이다. 방 한가운데 떡하니 서 있는 여자 거인은 왠지 모를 무시무시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뒷모습만 보인 신사는 여자 거인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보들레르다. 거인 여성의 존재에 압도당하는 신사의 뒷모습은 자신보다 훨씬 큰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마크로필리아(Macrophilia)를 암시하기도 한다.

 

 

 

                    

 

 

구스타브 아돌프 모사(Gustav Adolf Mossa)그녀유혹하는 팜므 파탈유혹당한 남자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모사의 여자 거인은 커다란 젖가슴으로 남성 관객을 유혹한다. 그녀의 유혹에 굴복당한 남성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녀의 머리에 해골로 만들어진 핀이 보인다. 뜯어보자면 그림은 여색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벌거벗은 거인 여자는 남성 관객들을 위한 눈요기 대상일 뿐이다. 남성 화가들은 여성 누드를 선호하는 남성 관객들을 위한 맞춤 전략을 내세웠다. ‘현실 속 여성이 아닌 여신이나 상상 속 여성의 누드를 그림으로써 외설 시비에 벗어날 수 있었다.

 

 

 

                        

 

 

펠리시앙 롭스(Félicien Rops)는 보들레르에게 영향을 받은 화가다. 그가 묘사한 거대한 사탄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기 모호하다. 나는 사탄이 쓰고 있는 챙이 넓은 모자를 보고 사탄을 여성이라고 유추했다. (혹자는 사탄의 모자가 농부들이 쓰는 밀짚모자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남성 농부만 밀짚모자를 쓰는 건 아니잖은가.) 사탄이 여성이라는 설정 하에 롭스의 그림을 살펴보면 사탄에게서 남성상징주의자들을 매료시켰던 고혹적인 팜므 파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롭스는 악마적인 여성의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지의 어머니‘질병과 고통의 천사를 잉태하는 악마로 변형시켰다.

 

 

 

              

 

 

게라케라온나(倩兮女)는 기모노를 입은 중년 여자의 모습을 한 거대한 요괴다. 킬킬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사람들 앞에 불쑥 나타난다. 일본인들은 게라케라온나가 음탕한 여자의 혼이라고 생각했다.

 

 

 

 

 

 

 

 

 

 

 

 

 

 

* 구사노 다쿠미 《환상동물사전(들녘, 2001)

 

 

 

롭스의 그림을 보면서 일본 괴담에 등장하는 팔척 귀신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심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팔척 귀신 이미지를 공개하지 않았다. 포털사이트에 팔척 귀신이라고 검색하면 기괴한 모습의 이미지가 나온다.) 팔척 귀신은 약 2m 50cm의 큰 키를 가진 여성의 모습이며 팔과 다리가 굉장히 길다. 그리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다. 2차 창작에서의 팔척 귀신은 어린 남자아이를 좋아하는 쇼타콘(쇼타 콤플렉스의 준말.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년에게 호감을 느끼는 여성)으로 설정된다. 이렇다 보니 쇼타콘이 된 팔척 귀신은 남성들이 선호하는 예쁘장한 외모에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남자아이를 유혹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지금까지 남성 중심적 시선으로 묘사된 여자 거인들을 살펴봤다. 생각보다 글의 분량이 길어져서 어쩔 수 없이 포함되지 못한 내용이 있고,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다루지 못한 것도 있다. 그래서 필자가 소개한 내용만 가지고 역사라고하기에 다소 미흡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여자 거인 이미지들을 짚어보면서 제 입맛대로 여성의 신체를 소유하고 즐기는 남성들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관점으로 미술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대가 온 시점에서 남성의 편견이 반영된 작품들을 수준 이하로 보는 우를 범하지 것이 좋다. 비판과 비난은 엄연히 다르다. 예술의 기본은 다양한 눈을 허용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롭스나 모사의 그림은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이지만, 그 그림들을 통해 시대적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근대미술 작품들은 인류의 내밀한 욕망이 화석처럼 남아있는 중요한 기록들이다. 우리는 화석이 되어버린 근대 그림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지금도 여전한 시대적 한계(남성 중심의 근현대 미술)를 규명하고,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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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8-28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더왕 이야기에서도 대지모신인 귀네비어가 하급신으로 추락하는 모습과 많은 여신들이 몰락하는 모습들이 참 가슴 아팠습니다.

그런데 정말 남자들에게 여자는 엄마 아니면 창녀인건가요??

cyrus 2017-08-29 13:35   좋아요 1 | URL
북유럽 신화에도 여자 거인이 나오는군요. 남성중심사회가 되니까 모신의 입지가 줄어들고, 신화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모신은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 같습니다.

sprenown 2017-08-29 0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계중심사회에서 부계중심사회로 오면서 남자들의 희번덕 거리던 눈동자가 더욱더 야비해 졌군요..이젠 성평등의식이 확산되어 덜하지 않을까 싶지만, 상품판매,시청률올리기 등 영화 또는 tv 대중매체 때문에 더욱 더 교묘해 진 것도 같습니다.(역사,환타지)소설이나 드라마,게임,만화 등이 이러한 문화전승에 앞장서고 있지 않은지..그렇다고 막 태어나 사내아이에게 여성학강의를 해 줄수는 없을 것이고, 문명발달의 추이를 보면 다시 모계사회로 회귀할 수도 없을 터, 인류의 진화과정이 돌연변이의 역사였던 사실에 주목하여,언젠가 자웅동체의 신인류가 탄생되는 날! 진정한 성평등은 이루어 질것입니다.

cyrus 2017-08-29 13:41   좋아요 0 | URL
남자들이 벌거벗은 여체를 그리고 싶어서 여신을 이용했습니다. ‘벌거벗은 여신‘은 아름다우니까 예술로 인정했지만, 그냥 ‘벌거벗은 여자‘는 음란한 여자로 봤죠. ‘희번덕 거리던 눈동자‘가 문제입니다. 남자들은 여자에 대해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습니다. 여자가 마음에 안 들면 욕을 했죠. ^^;;

2017-08-28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29 13:43   좋아요 1 | URL
<진격의 거인>을 본 적이 없어서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만 하면 인물에 대한 정보가 다 나옵니다. 그런데 인터넷 정보를 긁어 모아서 언급하고 싶지 않았어요. ^^
 

 

 

작년 11월에 북플 하이퍼링크 기능의 오류를 확인해서 서재지기님에게 알린 적이 있었습니다. (http://blog.aladin.co.kr/zigi/8880232)

 

북플 앱이 업데이트되면 오류가 사라질 줄 알았는데, 문제점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링크 주소 끝 부분의 괄호 표시와 글자를 붙여 썼습니다. 링크 주소를 잘못 적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로 알라딘 서재에 접속해서 제 글을 보면 링크 기능이 됩니다.

 

 

 

 

 

그런데 북플 앱에서는 링크 기능이 되지 않습니다. 링크 드래그 범위가 ‘~까지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난감합니다. 북플의 오류를 수정하려면 컴퓨터로 알라딘에 로그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링크 주소 끝 부분과 글자를 띄어 써야 북플의 링크 기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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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7-08-16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북플 없이 서재시절로 돌아가고 싶네요

cyrus 2017-08-16 10:32   좋아요 0 | URL
북플을 매일 접속하다 보면 정신이 산만해집니다. 책뿐만 아니라 북플에서 공개되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집중력이 흐려져요. 사실 A4 용지 한 장 반 분량의 글이라면 그렇게 많은 거 아니에요. 그런데 북플에서는 글이 많아 보여요. 그래서 길게 느껴지는 글은 컴퓨터로 접속해서 읽습니다. 컴퓨터로 읽어도 정독은 불가능하지만, 글쓴이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읽으려고 합니다.
 

 

 

 

 

 

 

 

 

옛말에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처럼 책도 짝이 있다. 책을 살 때 1, 2권 세트 혹은 상, 하권 세트를 사는 일은 장서가의 참된 도리라 할 수 있다. 낱권만 있으면 뭔가 허전해 보인다. 그러나 간혹 부득이한 상황으로 인해 낱권을 사야할 때가 있다. 특히 세트로 나온 절판본 중에 낱권을 구할 때가 난감하다. 절판본 세트를 구하는 일이 제일 어렵다. 마음에 차는 책을 찾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사람이든 책이든 사랑이 마음대로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열린책들 출판사 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openbooks21)에 재미있는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다. 세트 중 1권만 가지고 있는 열린책들 출판사 책을 사진으로 찍어 출판사 블로그 댓글에 남기면 된다. 아쉬운 점은 이벤트 기간이 짧다. 이벤트 마감일이 오늘(!)이다.

 

자세한 이벤트 응모 방법을 알고 싶으면 여기 링크 주소를 클릭해서 확인하면 된다. 응모 방법이 정말 간단하다. 인증사진이 있는 개인 블로그 주소를 댓글에 남기면 끝. (http://blog.naver.com/openbooks21/221068687440)

 

 

 

 

 

 

 

《미성년》 상권은 절대로 잊지 못할 책이자 선물이다. 이 책은 내가 2010년 열린책들 공식 카페(http://cafe.naver.com/openbooks21)에서 활동했을 때 ‘내마음이’님이라는 분에게 받은 것이다. ‘내마음이’님은 ‘사다리 타기 게임’에 걸린 1명에게 《미성년》 상권을 선물로 주는 소소한 이벤트를 진행했다. 나를 포함해 총 7명이 사다리 타기 게임 이벤트를 신청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내가 행운의 1인이 되었다. 《미성년》 상권을 받았을 때 하권을 꼭 사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을 7년째하고 있다. 《미성년》 상권은 책 주인 잘못 만나서 7년째 솔로로 지내고 있다.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미성년》 하권이다!

 

《러시아 희곡》 1권은 폰비진(『미성년』),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지혜의 슬픔』), 푸시킨(『보리스 고두노프』), 레르몬토프(『가면무도회』), 고골(『검찰관』)의 작품이 수록되었고, 2권은 투르게네프(『시골에서 한 달』), 오스트롭스키(『뇌우』), 톨스토이(『어둠의 힘』), 체호프(『벚꽃 동산』)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90년대에 러시아 작가의 희곡이 정식 출판물을 통해 소개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보예도프, 투르게네프, 오스트롭스키의 작품은 《러시아 희곡》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작품들은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 폰비진 《미성년》 (조주관 역 · 지만지, 2014)

* 푸시킨 《보리스 고두노프》 (최선 역 · 민음사, 2011)

* 레르몬토프 《레르몬토프 희곡 전집》 (신영선 역 · 연극과인간, 2015)

* 고골 《검찰관》 (조주관 역 · 민음사, 2005)

*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3》 (김근식 역 · 동서문화사, 2004)

* 체호프 《벚꽃동산》 (오종우 역 · 열린책들, 2009)

 

 

《러시아 현대소설 선집》 1권은 1997년에, 2권은 1999년에 《매일 다샤 언덕을 지나며》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러시아 현대소설 선집’을 입력하면 1권만 나온다. 그래서 1권만 출간됐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나도 처음에 그랬다. 《러시아 현대소설 선집》 2권을 확인하려면 ‘매일 다샤 언덕을 지나며’라는 제목을 입력해야 한다. 아니, 이럴 거면 1권을 출간했을 때 이름을 붙여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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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7-08-13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 맞추기는 헌책 수집가의 놀이죠..ㅎ

cyrus 2017-08-13 16:19   좋아요 1 | URL
네, ‘즐거운 고통’입니다. 지금 짝을 못 맞춘 책이 더 있습니다. ^^;;

꼬마요정 2017-08-13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에밀 졸라의 <살림> 상 권만 있어요. 그래서 읽지를 못해요ㅜㅜ

cyrus 2017-08-13 16:22   좋아요 0 | URL
창비에서 나온 책이죠? 저는 <살림> 하 권을 중고매장에서 구입한 다음에 품절되지 않은 상권을 바로 주문했습니다. 지금 확인해보니까 상, 하권 모두 품절되었군요. ^^;;

겨울호랑이 2017-08-13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께서 연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는 줄 알았네요^^:

clavis 2017-08-13 15:23   좋아요 1 | URL
하하하 저도요♡♡♡

cyrus 2017-08-13 16:25   좋아요 2 | URL
제목이 오해를 부를 수 있겠군요. 의도는 없었습니다. ^^;; 제가 여기 책 리뷰 올리는 블로그에서 연애한다고 자랑하겠습니까? 한 달 이상 서재 활동이 뜸해지면 제가 연애하고 있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ㅎㅎㅎ

2017-08-13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14 19:29   좋아요 0 | URL
미완성한 음악을 다른 음악가가 완성한 사례는 알고 있지만, 작가의 경우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궁금합니다. ^^

나비종 2017-08-14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희곡 2>에 마음에 드시는 작품들이 더 많았나봅니다~^^

cyrus 2017-08-15 22:23   좋아요 0 | URL
투르게네프와 오스트롭스키의 희곡이 있는 유일한 번역본이라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

에디터D 2017-08-14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목보고 잠깐 오해할 뻔 했어요^^;; 그나저나 이벤트가 벌써 끝났군요.

cyrus 2017-08-15 22:24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벤트를 모르고 주말을 보낼 뻔했습니다. 토요일 밤에 이벤트 사실을 알았습니다. ^^;;

transient-guest 2017-08-15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성자 프란치스코 1권이 품절이라서 못 사고 있죠. 시리즈를 따로 빼서 만들었으면 이런 건 좀 지양해야할 듯...이벤트가 있는걸 이제야 봤네요.ㅎ

cyrus 2017-08-15 22:25   좋아요 0 | URL
검색해보니까 정말 1권만 품절이군요. 진짜 저런 상황이면 난감합니다.. ^^;;
 

 

 

 

지난주 일요일 하루에 잡은 벌레는 총 다섯 마리. 집게벌레 두 마리, 그리마 한 마리, 그리고 모기 두 마리. 바퀴벌레 한 마리만 잡았으면 ‘벌레 퇴치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집에 있으면서 이렇게나 벌레를 많이 잡은 경우는 처음이다. 내가 잡은 벌레들은 흔히 ‘해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들 중에 해충이라고 부르기에 애매한 녀석이 있다. 그가 바로 그리마다. 이 녀석의 별명은 ‘돈벌레’다. 돈 많은 부잣집에서만 산다고 해서 돈벌레라고 불렸다. 옛날에는 이 벌레가 집안에서 발견하면 부자가 될 길조로 여겼다. 그런데 그리마가 기어가는 모습이 마치 지네와 같아서 혐오스럽게 생겼다. 돈벌레라고 반기기는커녕 일단 잡아야 하는 곤충으로 낙인 찍혔다. 이 녀석, 기어가는 속도가 장난 아니다. 잡으려고 하면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져 어둡고 비좁은 곳으로 숨는다. 이런 녀석이 재수 없게 나한테 걸리고 말았다…‥ 당분간 돈복이 들어오기가 힘들겠군.

 

그리마가 해충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녀석의 식성 때문이다. 그리마는 바퀴벌레의 알을 먹는다. 바퀴벌레의 번식력은 엄청나다. 최근에 나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암컷 바퀴벌레의 무성생식으로 번식한 사례가 발견되었다. 즉, 바퀴벌레는 수컷 없이도 번식이 가능한 셈이다. 그리마가 바퀴벌레의 알을 잡아먹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집에 그리마의 출몰이 잦다면, 녀석이 좋아하는 먹잇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 조슈아 아바바넬, 제프 스위머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함께읽는책 · 2011)

    

 

     

집게벌레의 별명은 ‘꼬집는 벌레’다. 집게벌레에 물려본 적이 없는데, 한 번 물리면 아프다고 한다. 옛날 유럽인들은 집게벌레가 잠들 때 귀로 들어가 고막을 찢고, 뇌에 침투하여 알을 낳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가끔 사람을 무는 것만 빼면 이 녀석도 양호한 편이다. 집게벌레의 먹이는 살아 있거나 죽은 벌레, 초목(草木)이다. 결벽에 가까운 집게벌레의 청결함은 ‘곤충계의 서장훈’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집게벌레는 온종일 혀(!)로 자기 온몸 구석구석 핥는단다. 어떻게 보면 고양이의 그루밍과 같다. 그러므로 집게벌레를 ‘반려 곤충’으로 추천한다.

 

내가 집에 있을 때 잡지 않는 유일한 벌레가 있다. 바로 거미다. 이 녀석은 나의 동반자다. 내가 바닥에 엎드려 배를 깔고, 책을 읽으면 바닥을 기어 다니는 거미를 만난다. 거미의 크기는 아주 작다. 손으로 살짝 건드려도 죽는다. 거미가 사람을 물지 않아서 좋은데, 단 한 가지 불편한 점이라면 구석진 곳에 치는 거미줄이다. 창틀이나 책장에 가느다란 거미줄이 붙어 있다. 거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모조리 제거한다. 퇴근하고 나면 방 청소를 한다. 먼지떨이로 책장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다음에 밀대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청소하다 거미줄이 보이면 걸레로 닦아낸다. 거미줄 없어도 거미들이 알아서 잘 살 거로 믿는다.

 

거미 공포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공포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거미의 해로운 면이 강조되는 미신 또는 도시전설이 나오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인간이 자면서 1년 동안 8마리의 거미를 삼킨다는 도시 전설이 있다. 이 내용은 나무위키 항목으로 나와 있다. 말 그대로 ‘도시 전설’이니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거미 연구가들은 거미가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일이 절대로 없다고 말한다.

 

 

 

 

 

 

 

 

 

 

 

 

 

 

 

 

 

* 백석, 김재용 역 《백석 전집》 (실천문학사 · 2012)

 

 

 

작은 거미를 만나면 죽이지 않고, 창밖으로 보낸다. 거미가 연약해서 살살 건드려서 손가락이나 종이 위로 올린다. 거미를 올려놓은 손가락이나 종이를 창틀 벽에 갖다 댄다. 그러면 거미가 알아서 창틀 벽으로 향해 기어간다. 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느냐고. 작은 거미를 보면 볼수록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거대한 바닥 한가운데서 기어가는 거미를 보면 마치 정처 없이 떠도는 외로운 나그네, 또는 길을 잃어 혼자서 아무 데나 걷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작고 연약한 거미에게 각별한 관심을 주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백석의 시에 있다. 이 시를 읽고 난 후로 작은 거미만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백석, 『수라(修羅)』, 실천문학사, 3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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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8-09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의 거미에 대한 태도·처리 방법은 저와 아주 비슷하군요. 시인 백석의 거미에 대한 연민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cyrus 님이나 백석의 거미에 대한 연민을 거의 동일하게 느끼리라고 봅니다. 집안/집밖 곤충 가운데 거미처럼 인간과 친근한(?) 곤충도 없을 테니까요(정확히는 곤충이 아니라 절지동물이라고 하지만요). 거미처럼 인간의 상상력과 과학적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곤충이 있을까요? SF 영화 스파이더맨, 강철보다 강한 거미줄, 생체모방공학, 거미줄의 기하학, 방적돌기의 정교한 미세구조 등등은 거미가 인간한테 베풀어준 상상력의 결과이자 첨단 과학기술의 원천이라 할 수 있죠. 정말 흥미진진하고 친근한 동물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8-10 12:18   좋아요 0 | URL
과거에는 거미와 요부를 결합시킨 ‘위험한 괴물’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거미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공포의 존재였던 거미가 사랑하는 여인과 도시 전체를 구하는 스파이더맨의 탄생에 영향을 준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2017-08-10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10 12:22   좋아요 1 | URL
자세한 설명 없이 들으면 ‘권연이’가 사람 이름인 줄로만 압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