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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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5월의 책


(모임 날짜: 525일 토요일)





모든 것은 변한다이 자명한 진실은 동서양 곳곳에 있다석가모니 부처(佛陀)는 열반(涅槃모든 괴로움에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른 상태)에 가까워지자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한다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라는 불교 경전에 부처의 마지막 말 자취가 있다.



 是故比丘無爲放逸我以不放逸故自致正覺無量衆善亦由不放逸得一切萬物無常存者此是如來末後所說.

 

 “그럼 비구들이여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라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니라게으름 피우지 말라나는 오직 게으르지 않음으로써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래의 최후의 말이었다.

 

(도올 김용옥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1》 180)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만물이 변한다는 뜻을 가진 판타 레이(panta rhei)’를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로 비유하면서 설명한다. 



 어디에선가 헤라클레이토스모든 것은 나아가고 아무 것도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을 강의 흐름에 비유하면서 너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플라톤, 크라튈로스402a,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243쪽 재인용)



우리는 생각보다 변화를 낯설어한다.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영원한 안식처를 갖고 싶어 하고, 변치 않는 사랑과 우정을 갈망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영원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존 윌리엄스(John Edward Williams)의 소설 부처스 크로싱(Butcher’s Crossing)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삶의 본질을 떠올리게 해준다. 윌 앤드루스(Will Andrews)는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자연주의 사상에 심취한 청년이다. 앤드루스는 인간의 발길이 아직 생기지 않은 자연을 직접 보고 느끼기 위해 하버드대학을 중퇴하고 서부로 향한다.


앤드루스는 부처스 크로싱이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에 들소를 잡는 사냥꾼들이 주로 거주한다. 들소 사냥꾼들의 목표는 들소 가죽이다. 들소를 잡아서 얻은 가죽을 상인에게 판매한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높은 사냥꾼 밀러(Miller)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들소를 잡는다. 과거에 그는 희귀한 들소 무리가 사는 평원을 우연히 발견한다. 평원을 잊지 못한 밀러는 그곳에 가기 위해 자신과 함께 사냥할 대원을 직접 모집한다. 그는 서부 자연을 궁금해하는 앤드루스에게 들소 사냥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한쪽 팔이 없는 찰리 호지(Charley Hoge)는 예전에 밀러와 함께 들소를 사냥했던 동료다. 그는 항상 성경을 품속에 들고 다닌다. 쉬고 있으면 성경을 펼쳐서 소리 내서 읽는다. 프레드 슈나이더(Fred Schneider)는 가죽을 벗기는 일에 능숙하다. 프레드 역시 개인주의자라서 종종 밀러의 의견에 직설적으로 반대한다.


밀러 일행은 강인한 인내심으로 물이 금방 바짝 말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 무더위를 뚫고 지나가는 데 성공한다. 평원에 도착한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들소 떼를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선다. 이날을 오랫동안 고대한 밀러는 마치 같은 일만 반복하는 기계가 된 것처럼 들소를 학살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모든 들소를 전멸하겠다는 일념만 가득 차 있다. 들소 사냥에 눈이 먼 밀러의 과욕은 점점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밀러의 사냥 집착은 결국 본인과 다른 사람들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다. 들소의 피가 물든 평원은 들소들을 무참히 살해한 인간들을 순순히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화가 난 자연은 눈을 퍼부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 밀러 일행의 야영지는 폭설로 고립된다. 밀러 일행은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겨울을 버틴다.


밀러는 팔 수 있는 양의 들소 가죽만 챙기고, 나머지는 봄에 다시 와서 가져가기로 기약한다. 밀러 일행은 일 년 만에 부처스 크로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 년 사이에 확 달라진 세상이다. 밀러 일행이 열심히 들소를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있었을 때 들소 가죽 사업은 죽어가고 있었다. 어렵게 가지고 온 가죽을 팔지 못한 밀러는 큰 허탈감과 분노에 빠진다.


만약에 찰리 호지가 성경책 대신에 불교 경전이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어록을 모아놓은 책을 들고 있었다면 과연 밀러는 평원으로 가는 여정을 멈췄을까? 부처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모르더라도 세상이 언젠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했다밀러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판타 레이의 흐름을 읽지 못한 인물이다. 가죽 상인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들소를 사냥하겠다는 그의 자신감은 지나치게 부풀어진 오만이다. 스스로 과장한 오만은 욕심까지 커지도록 부추긴다오만과 욕심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밀러는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환상에 갇힌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환상(fantasy)을 현실이라고 착각한다. 들소 사냥을 영원히 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들소 가죽을 전부 가지겠다는 환상. 밀러를 제대로 속인 판타지가 만들어 낸 현실에 판타 레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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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강명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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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잃어버린 사람이에요.

당신도 그렇네요.

 

(고연옥, 희곡 <인간이든 신이든> 중에서

고연옥 희곡집 3316쪽)





체호프(Anton Chekhov)4대 장막극에 속한 갈매기는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사로 시작된다.

 





메드베덴코: 당신은 왜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다니죠?

마샤: 이건 내 인생의 상복이에요. 난 불행하거든요.

 


마샤는 극작가가 되고 싶은 가브릴리치를 좋아한다. 그러나 가브릴리치는 대지주의 딸 니나를 좋아한다. 니나도 가브릴리치를 좋아하고 있으며 그녀의 꿈은 연극 배우다. 가브릴리치는 새로운 형식의 희곡을 써서 소린 영지에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연극의 주연 배우는 니나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 가브릴리치의 재능을 유일하게 알아보는 사람은 소린의 주치의 도른이다. 유명한 연극 배우인 가브릴리치의 어머니 이리나는 일하지 않고 글만 쓰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미망인 이리나는 소설가 트리고린과 연인 관계다. 가브릴리치는 명성과 사랑을 동시에 얻은 트리고린을 싫어한다.


낙심에 빠진 가브릴리치는 갈매기를 사냥한다. 그는 니나 앞에 죽은 갈매기를 보여주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자살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니나는 가브릴리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니나의 마음은 기브릴리치가 아닌 트리고린으로 향해 있다. 니나는 가브릴리치의 희곡보다 트리고린의 소설 <낮과 밤>을 좋아한다. 트리고린은 자신이 쓴 소설에 큰 관심을 보인 니나에 이끌린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체호프는 의욕적으로 글을 쓴 작가. 젊은 시절 체호프는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짤막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당시 체혼테가 쓴 소설들은 권위 있는 문학잡지가 아닌 유머 잡지에 실린다. 그에게 글쓰기는 부업이었다. 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때까지 체호프는 생계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다. 일 년 동안 백 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썼다.


체호프는 두 번째 장막극 <숲의 정령>이 상업적으로 실패한 이후로 7년 동안 장막극을 쓰지 않았다. 체호프가 절치부심 끝에 쓴 장막극이 바로 갈매기체호프는 7년 전에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싶은 마음에 의욕적으로 갈매기를 썼다. 그는 극작가이자 의사인 체호프 본인 모습뿐만 아니라 화가, 작가, 연극 배우로 활동하는 지인들의 삶까지 녹여서 새로운 인물들을 만들었다가브릴리치는 대중성이 있으나 틀에 박힌 주류 문학(또는 예술)과 파격적인 형식의 새로운 문학이라는 갈림길에 선 체호프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작가로서의 명성과 경제력을 동시에 얻으려면 대중과 비평가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써야 한다. 그러나 가브릴리치의 머릿속에 새로운 형식이 자꾸만 나타난다. 그것이 글을 쓰려는 가브릴리치의 손목을 여러 번 잡는다글을 제대로 쓰지 못할수록 가브릴리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가브릴리치가 잃어버린 것이 하나씩 늘어난다공교롭게도 가브릴리치는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잃어버린다. 새로운 형식의 문학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젊은 자신감, 니나 그리고 어머니 이리나.


니나는 문학 청년 가브릴리치를 좋아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찾으려고만 하는 그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 니나는 가브릴리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트리고린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다. 트리고린과 함께 모스크바에 살면 연극 배우가 되는 꿈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줄어든다. 결국 니나는 자신의 꿈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소린 영지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브릴리치를 포기한다. 하지만 트리고린과의 사랑은 실패로 끝나고, 불행한 일들을 연이어 겪은 이후로 연극 배우의 꿈이 시들어져서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는다. 니나는 한순간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존재들을 잃어버린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하나는 자신을 외면한 니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가브릴리치, 또 하나는 가브릴리치를 사랑했고 화려했던 과거의 본인 모습이다.


갈매기에서 처음으로 대사를 주고받은 마샤와 메드베덴코도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려서 불행해진 사람들이다. 인생의 상복을 입는다는 마샤의 대사는 희곡의 첫인상이자 희곡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것은 극 중 인물들 모두가 마주하게 되는 비극적인 진실이다갈매기》에 느닷없이 일어난 비극적인 결말을 생각하면 마샤의 대사가 더욱 애잔하게 느껴진다. 갈매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복장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들이 언젠가 입어야 할 옷은 검은 옷이다. 그들은 인생의 상복이 어울리는 사람들[주]이다



(사이)


:

지금 우연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그렇네요. 

당신도 제법 인생의 상복이 잘 어울려요.

아니라고 부정해봐도 소용 없어요.

살면서 언젠가는 인생의 상복을 입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요. 

아니라고?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이미 상복을 입은 채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어요.





[]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희곡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이형식 옮김, 지만지드라마, 2019)에서 따온 표현이다. 이 작품 역시 불행한 사람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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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샷 뒤의 여자들 - 피드 안팎에서 마주한 얼굴
김지효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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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아홉 번째 선정 도서


(모임 날짜: 2024년 4월 27일 토요일)





세상에 처음 나오자마자 혁명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된 책이 있다. 이런 책은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해 온 관습과 도덕을 파괴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책은 엄청 뜨겁다. 그 책을 펼치자마자 확 퍼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는 독자들의 눈빛을 달군다. 종이 위에 펼쳐진 혁명을 느낀 독자의 눈은 뻘겋게 달아오른다. 책의 열기에 흥분한 독자는 혁명가가 된다하지만 책에서 뿜어나오던 혁명의 불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뜨겁게 활짝 핀 혁명의 불꽃은 점점 시들어 간다. 불꽃이 완전히 사라진 책은 한 줌의 재가 된다. 햐안 재 속에 뜨겁지 않은 과거가 된 단어, 혁명이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은 수많은 혁명가를 키운 책을 기억하거나 칭송하기 위해 고전이라고 부른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세상을 다시 한번 흔들 만한 열기와 힘을 여전히 품고 있는 책도 있다. 이런 책은 휴화산과 같다. 과거에 세상을 요동칠 정도로 크게 한 번 혁명을 분출했지만, 지금은 멈춘상태다책 속의 혁명은 완전히 죽지도 않았고, 케케묵은 과거도 되지 않았다휴화산 같은 책은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언젠가는 다시 터진다. 다시 한번 혁명을 일으킬 만한 힘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래서 과거에 혁명이라 불리던 책들은 지금 다시 봐도 새롭다







[대구 페미니즘 독서모임 <레드스타킹> 첫 번째 선정 도서, 2017년 10~11월 총 6주 모임 진행]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민예숙 · 유숙열 함께 옮김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


* 한우리 기획 · 옮김 페미니즘 선언: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현실문화, 2016)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 스물다섯 살에 쓴 성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Sex)1970에 나온 책이다. 이 책을 읽고 페미니스트가 된 여성이 많다. 성의 변증법은 가히 혁명적인 책이라 할 만하다파이어스톤은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가족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비혼과 비출산을 제안한다. 파이어스톤은 1970년대 초반 당시에 현실성 없는 공상과학 기술로만 알려진 인공 생식(artificial reproduction)을 진지하게 논의한다. 그녀는 인공 생식이 가능해지면 여성은 고통스러운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남성 또한 출산하고 양육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시대를 앞서간 이 책을 고전이라고 부르는 독자들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성의 변증법을 고전이라는 진부한 단어 대신에 휴화산 같은 책이라 부르고 싶다.






2018년에 만들어진 <레드스타킹> 책갈피.


책갈피 뒷면에 모임 때 읽은 책들과 다음에 읽을 책 제목이 나열되어 있다나는 2018212일 월요일에 처음으로 <레드스타킹> 모임에 참여했다이때 네 번째 선정 도서인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젠더 무법자: 남자, 여자 그리고 우리에 관하여(바다출판사, 2015, 절판)를 읽었다.




파이어스톤의 생각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또 한 번 혁명의 불꽃이 되어 피어올랐다. 국내의 젊은 급진적 페미니스트(Radical feminist)들은 SNS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비혼과 비출산을 생물학적 여성을 위한 삶의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여성의 몸을 통제해서 남성의 욕망만 충족시키는 연애를 거부하기 위해 비연애와 비 섹스를 주장했다. 파이어스톤은 출산과 가족 제도를 비판했지만, 연애와 섹스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나는 에로티시즘(성의 변증법225)’을 옹호했으며 에로틱한 불꽃이 없는 삶은 지루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여성과 아이들에게 성적 자유를 허용하는 세상을 꿈꿨다(같은 책, 297).


파이어스톤은 사랑을 다루지 않은 급진적 페미니즘 책은 정치적으로 실패작이라고 했다(같은 책, 183). 그녀는 출산보다 훨씬 더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요인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비판하는 여성의 사랑은 남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승인(approval)받기 위해 헌신하고,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의존하는 형태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 여성은 절박한 심정으로 연애에 매달린다. 좋은 남자를 만나 연애하면 결혼할 수 있고, 한 남자로부터 사랑받는 행복한 여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성은 남성의 승인을 받지 못한 여성이 된다. 여성은 자신들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사랑을 한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가 만든 연애를 끊지 못한 여성은 진짜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이 여성은 언젠가 남편이 될 사랑꾼을 잘 만나서 잘살고 있다고 만족하지만, 그녀의 삶은 남성의 감정과 욕망에 끼워서 맞춰져 있다.


인생샷 뒤의 여자들: 피드 안팎에서 마주한 얼굴은 소위 인생샷이라고 부르는 셀카를 자주 찍는 여성들의 감정 상태와 생각들을 다각도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젊은 여성들이 왜 인생샷 찍기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싶어서 열두 명의 20대 여성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한다기성세대는 셀카 문화를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일로 치부한다. 어른들이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한참 멋 부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철부지다. 하지만 인생샷 뒤의 여자들은 셀카를 단순히 보여주기식 문화로만 바라보는 기존 분석을 거부한다. 이 책의 저자가 만난 여성들이 셀카를 즐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딱 한 가지 이유만 집어서 셀카 찍는 여성들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녀들도 셀카 문화의 부작용을 안다. 그러면서도 인터넷 세상에서 만난 익명의 타인에게, 또는 인터넷 세상 밖에 만나는 실제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셀카를 찍는다. 비록 실제 모습과 다르지만, 그녀들은 셀카를 여러 번 보정하면서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SNS는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음’, ‘존중받음’, ‘인정받음을 확인해야지 관계가 맺어지는 만남의 장소. SNS에 접속한 여성들은 익명의 타인들이 좋아할 만한 셀카를 찍어서 온라인 인맥을 넓힌다. 내가 찍은 셀카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은 ‘SNS 친구가 된다. SNS 친구의 수를 많이 늘리려고 타인의 셀카에 좋아요를 눌러준다반면 셀카를 찍되 보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타인의 시선에 의식하지 않으며 최대한 자신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려고 한다.








인생샷 뒤의 여자들사랑과 인정 욕구를 모두 다룬 페미니즘 책이다. 만약 저자가 럽스타그램’ 관련 사진(연애하는 이성과 같이 찍은 사진 또는 남자/여자친구가 여자/남자친구를 찍어준 사진)을 찍는 여성페미니스트로 인정받기 위해 SNS 계정에 탈코르셋사진을 찍어서 공개한 여성을 만나지 않았으면, 이 책은 ‘2% 부족한 실패작이 되었을 것이다저자는 연애하는 여성들이 사랑꾼남자친구의 선택을 받은 행복한 여성임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럽스타그램 사진을 남긴다고 분석한다. 결국 여성들은 한 남자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 사랑을 하고 사진을 찍어서 모두에게 공개한다. 저자는 연애하는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는 럽스타그램에서 불평등한 이성애 중심 성별 권력 구조를 읽는다. 파이어스톤이 지금 살아 있었으면 럽스타그램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분석에 동의할 것이다.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SNS에서 남성 중심 문화를 향해 줄기차게 비판해 왔다. 그녀들의 공개 발언은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저자는 SNS 여성 운동이 페미니스트가 된 나를 전시하는 기능으로 사용되는 점을 비판한다. 페미니스트는 동료 페미니스트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페미니즘적 발언을 하고, 페미니즘에 반하는 발언과 이미지를 되도록 SNS에 공개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검열한다.


모든 남성이 선호하는 ‘완벽한 여성이 없듯이 이 세상 모든 페미니스트로부터 인정받는 완벽한 페미니스트도 없다. 페미니스트도 연애할 수 있으며 결혼도 할 수 있다. 예전부터 비혼, 비연애, 비 섹스를 줄기차게 주장해 오던 페미니스트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면 그녀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면서 조롱해야 할까? 페미니즘과 연애/결혼이라는 갈림길 앞에 선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부딪힐 때 어떤 삶이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삶의 길을 동시에 가기로 결정했다.[주1] 힘든 결정을 내린 그녀들을 응원해줘야 한. 어떤 페미니스트는 죽을 때까지 일상생활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녀의 결정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서 당연히 응원해줘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인정받으려고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 인생길들을 하나둘씩 제거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지루하고 때로는 위태롭다. 인생의 재미만 놓치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될 자신의 한계를 애써 외면한다SNS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면 자신의 단점을 끝까지 숨겨야 한다. 자신의 진짜 삶을 스스로 갉아먹으면서까지 여성 운동을 하고, 페미니스트로 승인받기 위해 애쓰면서 산다면 진짜 나는 사라지고 없다.





[주1] 페미니스트의 삶을 포기하고 연애와 결혼을 선택하는 여성도 있다.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는 결혼을 했는데, 과거에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페미니즘 관련 글들을 모조리 지웠다(비공개로 전환한 것일 수도 있다).




* 33



 



 얼짱 1기였던 구혜선은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MBC 시트콤 <논스톱 5>의 주인공이 되었고, 박한별은 영화 <여고괴담>에 캐스팅되었다. [2]


[2] 박한별이 주연으로 데뷔한 첫 영화는 2003년에 개봉된 <여고괴담 3-여우 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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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5-16 1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 중에 페미니즘 문학이라 볼 수 있는 책은 부끄럽게도 82년생 김지영이 다인 것 같습니다. 좀 더 분발해야겠어요. 공교롭게도 저는 어제까지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한방에 몰아보고 (장장 6시간의 편집영상이에요!) 오늘부터는 아들과 딸을 보고 있는데요. 재미는 있는데 아들과 딸은... 혈압 오르네요. 이 두 드라마가 모두 90년대에 방영된 작품인데 (저는 당시 초등학생), 지금 다시 보면서 아니 미친거 아님?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걸 보니 그래도 지난 30년간 장족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cyrus 2024-05-20 05:44   좋아요 1 | URL
두 편의 드라마가 했던 시기에 저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드라마를 몇 년 후에 다시 보면 ‘이건 좀 아니다 싶은’, 그런 감정을 느낄 거예요. ^^

stella.K 2024-05-1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횡무진이군. 건강 잘 챙겨라.

cyrus 2024-05-20 05:46   좋아요 0 | URL
저의 관심사와 취향과 관련되어 있고, 그걸 드러낼 수 있는 모임이라면 꼭 가보려고 해요. ^^

공쟝쟝 2024-05-20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의 변증법>이 휴화산 같다는 말에 동의해요.
<인생샷>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눈여겨보고 있었거든요. 시간내서 읽어봐야지 싶은 데, (이미 독후감으로 배불렀다 ㅋㅋㅋ) 인정과 승인의 욕구를 좀처럼 포기할 수는 없지요. 그리고 그 욕구가 대단히 질긴 것은 여성이 사회화되는 과정과도 긴밀하고요. 페미니스트도 각성한대도 저 밑바닥 무의식까지 후벼판 뒤, 그런 욕구에 대해서는 돌봐주고 살펴봐주고 인정 해주는 과정까지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여성이 마주보는 것은 수천년의 규범이니까. 그리고 그건 평생해야죠. 한번에 안됨. 선언 만으로 해방이 온다면 해방은 진즉에 끝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페미니즘을 읽는 건 매번 긴장하게 되는 독서인 것 같아요.
독후감 잘 읽었고 인생샷 책은 계속해서 ㅋㅋㅋ 눈여겨 두도록 하겠습니다. (바쁘다 바빠) 읽지는 않았지만, 읽을 예정이며, 이른 댓글로나마 지금을 사는 여성들에게 필요하고 좋은 연구와 그 노고에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cyrus 2024-05-21 06: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긴장하게 되는 페미니즘 독서’라는 표현에 공감해요.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쓸 때도, <인생샷 뒤의 여자들> 리뷰를 쓰면서도 긴장했어요. 섣불리 생각하면서 쓰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하고, 단어와 문장을 여러 번 쓰다가 지우고를 반복했거든요. 그렇게 쓰다 보니 글의 분량이 길어졌어요.. ^^;;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들 - 다중우주의 비밀을 양자역학으로 파헤치다
로라 머시니-호턴 지음, 박초월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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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  ★★★★☆  A





우주는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든 과학에 별 흥미 없는 사람이든 이구동성으로 우주는 빅뱅(Big Bang)’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빅뱅, 즉 대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우주의 모습은 특이점(singularity)이었다. 모든 물질이 모여 있는 특이점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우주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우주는 지금도 커지는 중이다.


그런데 우주의 시작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견해들이 주목받고 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빅뱅이 일어나서 현재 우주가 될 확률을 계산했다. 그가 내놓은 확률값은 놀랍게도 거의 0에 가깝다! 펜로즈는 우주가 태어나면서 점점 커지는 상태가 과거에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정말로 운좋게 우주가 생겼어도 결국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우주의 기원을 확인하기가 어려워도 여전히 과학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철저히 숨기는 우주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기존 견해를 회의적으로 접근하며 그것이 타당한지 검증한다.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는 일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료 과학자들의 반박과 비판을 받아들이는 일을 선호한다. 과학자들도 인간인지라 익숙한 것과 거리를 두면서 연구하는 것을 낯설어한다. 이미 검증된 이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안정적인 우주론을 선호한다. ‘안정적인 우주론은 모든 과학자가 옳다고 인정한 법칙만으로 우주의 기원과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을 뜻한다. 안정적인 우주론의 대표적인 예가 단일우주론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는 단 하나뿐이다반면 다중우주론은 불안정한 우주론이다. 단일우주론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과학자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이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주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단일우주론 지지자는 다중우주론을 SF에 나올법한 이야기로 치부한다.


알바니아 출신의 이론물리학자 로라 머시니-호턴(Laura Mersini Houghton)은 다중우주론 지지자다. 그녀는 양자역학을 이용해 현재 우주가 다중우주의 일부인지를 설명한다우주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을 보여준 그녀의 책 ‘Before The Big Bang(원서는 2022년 출간)’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호턴은 우주론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뿐만 아니라 단일우주론을 지지하는 독자 또는 과학자들에게 자신이 왜 다중우주론을 주장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들은 정말로 보기 드문 친절한 과학책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다중우주론을 설명하지 않는다. 먼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준 이론이다. 그동안 중력은 물질을 움직이게 만드는 으로만 인식됐는데, 일반상대성이론이 알려준 중력은 휘어진 공간이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양자는 입자와 파동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 심지어 입자였다가 파동으로, 또 파동이었다가 입자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면 아무리 뛰어난 관측 기술이 있다고 해도 양자 상태를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양자의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또 양자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덕분에 과학자들은 우주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고, 우주론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저자는 끈 이론(string theory)평행우주론(Parallel Universe)과 같은 불안정한 우주론의 특징과 한계를 설명한다. 과거에 주목받은 여러 우주론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 바로 저자가 제안한 양자 경관 다중우주론이다저자가 생각하는 양자 다중우주는 여러 갈래로 된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파동을 함수로 표현하면 여러 우주가 탄생할 확률은 모두 0이 아니라 제각각 다른 확률이 나온다. 양자 다중우주 속에 우주가 탄생할 확률이 0인 우주와, 0이 아닌 우주가 있는 것이다이 우주론 역시 완벽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불안정한 우주론에 속한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만만하다. 양자 다중우주론의 단점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유를 알려준다. 저자는 계산과 관측 자료를 근거로 내세워 다중우주론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양자 다중우주론의 타당성을 근거로 내세워 우주의 탄생을 불가능하다고 본 펜로즈의 계산 결과가 틀렸음을 밝힌다.


불안정한 우주론은 연구할 가치가 없는 이론이 아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계속 연구해야 할 이론이다. 안정적인 우주론은 완전히 닫힌 상태. 닫힌 상태를 유지하는 이론은 겉으로 보기에 편안해 보여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를 설명하지도 못한다. 닫힌 마음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 불안정한 우주론은 열린 상태. 열린 상태의 이론을 연구하는 열린 마음의 과학자들은 검증받는 일을 좋아한다. 동료 과학자들의 외면과 무관심은 가설이 이론으로 발전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가설이 이론이 되지 못한 것을 실패한 결과가 아닌 배우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열린 마음의 과학자는 넘어져도 아쉬움을 툴툴 털어 버리고 다시 연구를 시작한다.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도 사실 세상에 처음 공개될 당시에 불안정한 이론이었다. 두 이론을 지지한 과학자들은 주류 이론에 과감히 도전한 열린 마음의 과학자였다재미있게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오랫동안 과학계를 군림해 온 뉴턴(Isaac Newton) 고전역학을 뒤집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주장한 열린 마음의 과학자였다. 하지만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예측할 수 없다고 보는 양자역학 앞에서는 닫힌 마음의 과학자가 되었다아인슈타인을 모순적인 과학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게 우리가 알아야 할 진짜 과학자의 모습이다. 과학자는 세상의 이치를 완벽하게 설명할 줄 아는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과학자는 모순적이라서 친근하다. 과학자는 끈질기게 연구해서 기존 이론에 도전하는 용기를 가졌으면서도 때로는 친숙한 이론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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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브 뉴 휴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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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e New Human》,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 소설, 정지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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