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 개정판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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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펌프 우화  


하루 종일 햇볕이 내리쬐는, 살아 숨 쉬는 생물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죽음의 땅인 사하라 사막에는 물을 퍼다 마실 수 있게 설치한 펌프 하나가 있었다. 광대한 사막을 건너는 카라반(Caravan)들에게는 그 펌프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의 오아시스이다. 그런데 펌프 옆에는 다음과 같은 푯말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이 펌프에 물을 붓고서 펌프질을 하면 그대가 간절히 원했던 시원한 물이 틀림없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위 밑을 파면 물이 가득 담겨진 병이 있을 겁니다. 
 그 병을 꺼내어 펌프에 물을 채우십시오. 
 만약에 병에 든 물을 한 모금이라도 먼저 마시게 되면 물은 모자랍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물은 틀림없이 그대가 충분히 마시고도 남을 만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물을 다 쓴 후에는 그 병에다 다음에 오는 카라반들을 위해 물을 채우고 마개를  

 꼭 닫아주십시오. 

 추신: 병에 든 물을 급하다고 먼저 마시면 안 됩니다.

만약에 자신이 뜨거운 햇살 아래 사막을 건너고 있는 카라반이나 여행자라고 생각해보자. 물 펌프의 우화처럼 이런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일부는 푯말대로 다음 사람을 위해서 병에 물을 채워 놓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펌프질하는 것보다는 바위 밑에 있는 병에 담겨진 물을 마셔버린다. 너무나 목이 말라서 죽을 것만 같은데 펌프질 여러 번 해대는 것보다는 간단히 병에 든 물을 마시는 것이 쉽고 간편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물 펌프에 거쳐 가는 카라반들이 푯말대로 양심을 지켜지지 않으면 뒤에 오게 될 카라반들도 후자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서 되레 손해를 받게 되면 괜히 또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꼴을 못 본다. ‘나도 손해를 봤으니 너도 나처럼 당해봐라’는 식이다. 결국 본인도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며 마음속에 담아둔 피해 의식은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지게 된다.  

 

 

  

 

우화 같은 상황에 처한 우리나라 현실  


비록 짤막한 우화이지만, 우리 삶에는 사막의 물 펌프를 마주한 것처럼 이런 유사한 경우가 일어나고 있다. 8.15 광복절 행사에 언급된 이후에 불거진 통일세 도입 논란, 무상교육 찬반 논쟁 등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떠오르고 있는 두 쟁점은 다음 세대들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정책이다. 그러나 크게 갈라져버린 여야당의 찬반 의견을 정부는 쉽게 조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현 세대에게는 손해 볼 일은 없다지만, 나중에 미래의 세대들에게는 치명적인 손해를 부담을 주게 된다.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찬반 의견 양상에도 세대 간의 갈등 및 불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 세대인 유신 세대부터 386 세대까지 이어져 온 승자 독식 체제로 인해서 세대 내 경쟁이 불가피해진 현 20대들을 ‘88만원 세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성세대에게 저임금노동으로 착취당하며,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서 직업 시장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20대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가 20대들에게는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좁은 취업의 문을 넓혀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안들을 내놓지만 우리나라 20대 취업률은 제자리걸음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개인의 이익 추구가 인류 전체의 이익으로 연결해준다고 말하지만, 모든 인류 전체가 이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빈부 격차의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자본주의 경제의 과제이다. 결국에는 인류는 분배의 불평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혹은 가지지 못한 자들끼리 경쟁을 하게 되어 그 경쟁 속에 밀려나면 평생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한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한창 자본주의의 나무가 자라고 있던 19세기 중엽 영국 역시 빈부 격차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에서 개인의 이익을 최선으로 치고 있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는 모든 이들이 이익이 될 수 있는 인간적인 경제학을 제창하였다. 그 인간적인 경제학에는 ‘정직’이 존재하는 믿음이 바탕 되어 있다. 그리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를 고용주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잘못된 노사 관계 시스템이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러스킨은 노동다운 노동을 위해서는 고용주는 자신이 부여한 임무에 걸맞은 보수를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지급해줘야 하고,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이끌고 있는 고용주를 믿고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Win-Win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노사 관계가 이룩되기 위해서는 서로 위하여 아껴주는 애정과 그 애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고용주가 24시간 열심히 일 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쥐꼬리만 한 급여에다가 쉬지도 않고 노동자를 부려먹는다면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일 할 맛이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돈을 벌어도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푸어(Working poor)의 삶을 살게 된다. 
 

러스킨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폐해가 지배당하고 만 현재 사회에서는 진부하지만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가 않다.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합리적으로 임무를 부여하여 합당한 급여를 지급해준다면 노동자들도 좋은 노동 환경 속에서 일을 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공장 전체의 운영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지듯이 윗사람이 잘하면 아랫사람도 따라서 잘하게 되는 법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직에 기초한 정책 
 

하나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수식과 용어로 가득 찬 경제학 지식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진 경제학자 출신 정치인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사회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자나 정치인들에게는 믿음과 정직이라는 정신적인 가치가 구축되어야 한다.  러스킨은 정직이 정책에 기초해서는 안 되며 정책이 정직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깊어지는 마당에 국민들의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 정부는 ‘공정한 사회’ 만들기를 내세우고 있다.  ‘정직’이라는 단어의 뜻에는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바른 미덕을 내포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취업률이 상승하는 사회, 세대 간의 갈등과 불신을 벗어나 화해의 장을 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공정한 사회’ 만들기가 정직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정책에 기초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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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인들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 한길인문학문고 생각하는 사람 2
박석무 지음, 황헌만 사진 / 한길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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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무총리는 언제. . .?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공식 사퇴를 밝힌 지 한 달 만에 9월 16일에 김황식 감사원장이 새 국무총리 후보에 내정되었다. 이번 주부터 추석 연휴로 인해서 김황식 총리 후보자의 청문회는 다음 주인 28~29일로 확정되었다. 김황식 총리 후보자가 내정되기 전까지 여러 명의 총리 후보자들이 거론되었지만 줄줄이 낙마한 이후 국정 운영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정운찬 전 총리는 공식 사퇴 입장을 언급하기 전부터 이미 여당의 6.2 지방선거 패배, 국회에서의 세종시 수정안 부결 결과에 대한 책임론을 운운하며 스스로 물러날 것임을 밝혔다. 이에 대해 이전부터 정 총리의 사의 결정에 대해서 고심하고 있던 이명박 대통령은 정 총리의 사퇴서를 수리하였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정치 실무 감각이 뛰어나며 ‘세대교체’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차기 총리 후보를 내정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그 후로 후보 물색 작업 끝에 김태호 후보와 장관 후보 2명 등이 거론되었으나 오히려 이명박 정부의 국정 이미지에 손상만 입었다. 청문회를 통해서 총리 후보 내정자들의 과거에 있었던 부정적 의혹들이 불거진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 국정이념으로 내세운 '공정한 사회'에 부합하지 못한 채 유력한 후임 총리로 떠올랐던 김태호 후보는 스스로 중도포기하고 말았다. 후임 총리 인선에 난항을 겪고 있는 정부로서는 ‘공정한 사회’에 적합한 총리를 찾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총리 인선의 기간이 가면 갈수록 길어졌다. 그리고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외교통상부 특채 의혹까지 드러나게 되어서 정부에 대한 국내 여론의 시선이 곱지 않게 되자, 여러 명의 정치인들이 총리직 제의를 고사하기에 이른다. 정부의 오랜 고심 끝에 김황식 감사원장이 총리 후보자로 결정되었다.

짧으면서도 기나긴 총리 인선 기간 동안 민심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거 같다. 정부는 여러 명의 총리 후보 카드를 자신 있게 내밀었건만 인사청문회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가 지향하는 ‘공정한 사회’ 실현에 부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황식 감사원장 역시 과거에 부동시(不同視)로 인한 병역 면제가 대두되면서 야당이 총리 임명의 동의 여부와 국민들의 냉담한 민심을 다시 얻을 수 있을지 추석 연휴가 지나고 지켜봐야할 일이다. 총리 인선에 관한 논쟁이 길면 길수록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커질 우려가 있다. 
 

  

한국인이라면 기억해야 할 조선의 의인들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거느리고 관할하는 아주 중요한 직책이다. 조선 시대의 국무총리와 유사한 직책을 꼽으라면 영의정(領議政)이 있다. 역대 조선 왕조의 영의정 중에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한 위인들이 거쳐 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희, 한명회, 신숙주, 유성룡, 이항복 & 이덕형(舊 오성과 한음) 등이 있다. 이들 중에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은 박석무 교수가 펴낸 『조선의 의인들: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에 소개되어 있다. 조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24명의 의인(義人)들에 대한 기록물이다. 늘그막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 수양을 게을리지 않았던 퇴계 이황부터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현실에 대한 울분을 자결로써 생을 마감한 매천 황현까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다. 
  

 


서애의 소프트 파워, 영재의 하드 파워

22명의 학자들 중에서 정부가 원했던 실무 처리 능력이 뛰어난 국무총리의 모습과 비슷했던 인물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있다. 벼슬 생활하는 동안 쌓은 국정 운영의 경험을 통해서 국난들을 처리해나갔다. 특히, 서애가 51세였을 때 발발한 임진왜란 기간 동안 그의 뛰어난 국정 운영 능력이 빛을 발휘하였다. 특히, 서애는 화합의 달인이었다. 그가 주장한 인재 발굴의 10대 원칙에서는 신분이나 가문과 같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조건들을 따지지 않았다. 오직 학식이 있고, 임무 수행 능력이 뛰어난 호기 있는 인재를 등용할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천한 신분 상태이거나 아직까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인재들을 발굴하여 등용하는데 노력하였다. 서애의 안목에서 고른 옥석의 인재는 권율과 이순신 등이 있다. 서애의 탁월한 안목이 이 두 사람을 천거하게 함으로써 전란에 휩싸였던 조선을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애는 뛰어난 학식과 국정 운영 능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옥의 티가 있었다.   

 

 

   서애는 재주나 식견이 높아 임금께 올려 바치는 건의를 잘했다. 더욱이 경연에서  

  아뢰는 내용은 모두가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때로는 일관된 마음으로  

  봉직하지 못하고 이롭고 해로운 점만 따지려는 부분이 있어 식자 들이 단점으로  

  여기기도 했다.

   - 박석무 『조선의 의인들』‘유성룡 편’ p 124, 서애에 관한 율곡 이이의 평 -

율곡 이이는 조선의 ‘미스터 쓴소리’가 못마땅했는가 보다. 서애 본인 입장에서는 간언(諫言)했을 뿐인데 그와 당시 활동했던 학자와 관리들에게 서애의 따끔한 지적이 무서웠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단점으로는 성격이 너무 온화한 나머지 굳센 성품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점보다 장점이 컸었기에 서애가 활동했던 시기부터 지금까지도 조선의 위대한 학자로 명망이 높다.    

 

 반면에 유성룡이 성품이 온화한 스마트 파워(Soft Power)형 정치인이었다면, 영재 이건창(1852∼1898)은 서애보다 뜨거운 애국심이 가득 찬 호기 있는 하드 파워(Hard Power)형 정치인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부터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재야의 학자였지만, 한창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을 때에는 암행어사로 활약했다. 영재는 자신보다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탐관오리일지라도 옳고 그름을 냉정하게 따져 판결을 냈다. 그의 날카로운 암행어사 실행 능력과 명성은 당시 고종황제의 귀에도 알려져 있었다. 고종황제가 지방의 관리들을 임명하면서 그들에게 ‘만약 잘못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이건창을 암행어사로 파견하겠다.’라고 당부했을 정도이다. (『조선의 의인들』‘이건창 편’ p 472) 그의 냉철한 비판 능력은 서양 열강과 일본의 조선 개입에 대해 조정을 향해 강력한 비판을 할 수 있었다. 영재의 지나친 쓴 소리는 고종황제에게 눈 밖에 나서 2년의 유배생활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소론이면서도 반대파였던 노론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실학자들과도 교류를 하였다. 조선의 당쟁관계사를 기록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어느 당론에도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공정하게 서술되어 있어, 당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원하는 국무총리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자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국무총리가 서애 유성룡의 소프트 파워와 영재 이건창의 하드 파워가 조합되어 있는 정치를 펼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국민들이 바라는 훌륭한 국무총리를 임명하기 위해서 정부가 고심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국무총리라는 직함 자체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의 이익 실현에 급급해 국무총리 자리 하나 가지고 여당과 야당이 논쟁을 질질 끌고 나가면 곤란하다. 국무총리 자리 하나 때문에 시끌벅적한 나라 분위기를 이어가서는 안된다. 혼란의 정세 속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최고 통솔자답게 서애처럼 화합과 조정의 리더십이 발휘해야할 때이다. 정부는 자신들이 천명했던 ‘공정한 사회’라는 모토에 끼워 맞출 수 있는 총리 후보자보다는 ‘공정한 사회’를 원하고 있는 국민들의 민심에 맞출 수 있는 총리 후보자를 선택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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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9
박경태 지음 / 책세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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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들의 수난

요즘 프랑스가 유럽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 정착하고 있던 집시(Gipsy)들을 강제 추방하는 정책이 화근이었다. 집시는 일정한 거주지 없이 항상 이동하면서 생활하는 소수 유랑 민족이다. 미신적이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져 이들이 가지는 직업이 대부분 점쟁이나 가수, 춤꾼이 많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키는 호칭이 많은데 일반적으로 그들을 보헤미안(Bohemi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 따위를 무시하고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예술가나 그런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어원의 유래는 15세기경 프랑스 사람들이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사는 집시들을 가리켜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보헤미안이라는 단어를 알려지게 만든 프랑스가 왜 집시들을 추방하려는 것일까?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국가 내 치안 안정 및 범죄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써 집시들을 강제 추방하기로 결정했음을 밝혔다. 정부는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집시들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이주해왔었으며, 주로 빈민가에서 불법 행위를 저지른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자, 프랑스 내 인권단체 측에서는 사르코지의 정책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반발하며 나섰다. 사르코지의 집시 추방은 유럽 국가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졸지에 집시를 프랑스로 이주하는 것을 방조(傍助)한 국가가 되어버린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사르코지의 발언에 언짢아하였으며, 유럽 연합(EU)과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프랑스의 정책에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심지어 비비안 레딩 EU 사법·기본권 담당 집행위원은 프랑스의 집시 추방은 과거 독일 나치의 유대인 추방을 상기시킨다는 발언까지 함으로써 사르코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내 집시 추방 정책은 계속 되고 있으며 올해 들어 추방된 집시들의 수는 7천 명 이상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금도 집시 추방 정책으로 인해서 프랑스에서 만개했던 관용(Tolerance)의 꽃들은 점점 시들고 있으며, 수백 명의 집시들은 떠돌이 민족이라는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면서 프랑스 국경을 넘고 있다.   

  

 

  

인종주의의 진화, 신 인종주의 
 

앞에서 언급했던 집시 추방에 대한 글 중에서 프랑스 인권 단체가 사르코지 정부를 비난하는 근거를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인권 단체가 표현하고 있는 ‘인종차별적’이라는 단어에는 ‘인종주의(Racism)’라는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 인종주의는 인종의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사고방식이다. ‘흑인은 머리가 나쁘니, 머리가 좋은 백인들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합당하다’라는 식의 주장이 구시대적 인종주의다. 최근에는 생물학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인종주의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나옴으로써 인종주의는 사실상 폐기되었다. 그런데, 사르코지 대통령은 집시들이 머리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쫓아낸 것이 아닌데 인권 단체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구시대적 인종주의는 사라졌다 한들,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종주의로 진화하였다. 구시대적 인종주의의 뜻과 차이를 두기 위해서 ‘신 인종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신 인종주의자들은 구시대적 인종주의에 대해 확실히 선을 그으면서, 생물학적 차이를 강조하는 구시대적 인종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인종의 ‘문화’에 차이를 두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며, 철저히 자문화의 가치와 습관으로 타 민족의 문화를 바라보고 평가한다. 그래서 자민족 중심주의의 영향으로 신 인종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집시라는 민족의 문화는 방랑과 미신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진보적인 문화를 영위하는 선진국 사람들은 집시 문화를 근본 없고 미천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집시 족의 인류학적 뿌리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집시들을 온갖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범죄만 일으키는 민폐 끼치는 민족이라고 자연스럽게 결부하게 된다.   

 

 

 

신 인종주의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이유

인종주의가 한 단계 진화된 신 인종주의가 하나의 사회 집단에 자리 잡게 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타 민족에 대한 편견이 만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인종주의를 낳게 한 뿌리이다. 신 인종주의론자들은 ‘집시는 범죄를 일으키는 나쁜 민족이니깐, 집시가 싫다’라는 식의 잘못된 논리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집시가 ‘나쁜 민족’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이 대중매체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집시가 범죄 행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추측성 언급을 하게 되면 대중매체는 이를 부풀려 왜곡되게 한다. 한순간에 집시가 범죄인 민족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대중매체의 왜곡된 정보를 대중들은 무비판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대중매체와 신 인종주의, 이들의 잘못된 만남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요즘 미국 내 정세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 미국의 언론매체는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을 습격한 테러리스트를 이슬람 국가로 규정하였으며 이를 반 인륜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전 세계 곳곳에 전파하는 이런 언론매체의 소식은 미국 내 여론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론은 이슬람 국가에 대한 편견을 형성 하는데 일조했다. 최근에 9.11 테러 기념일에 맞춰 광신적 기독교 목사가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불태우겠다는 엄포의 해프닝을 일으켰던 것과 아직까지도 논란 중인 모스크 사원 건립 반대는 신 인종주의 앞에 눈이 먼 미국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왜곡된 대중매체의 정보와 오류가 가득한 신 인종주의는 사회화된다. 사회화는 사회 집단에 속하는 인원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그 사회 고유의 문화를 습득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 집단에 내려져오는 인종주의적 논리는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계승하게 된다. 인종에 대한 잘못된 편견, 대중매체, 그리고 두 개념이 잘 버무려져 사회화되어 탄생된 신 인종주의는 사회 내의 악습관으로 쉽게 자리 잡게 되지만 그 과정이 순환 되다보니 신 인종주의가 죽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성숙된 다문화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도 건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하다. 회사 지배인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열심히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하루 동안 일반인들도 하기 힘든 중노동 일을 부여한다. 하루 동안 고된 중노동 작업 끝에 손에 쥐어지는 것은 쥐꼬리만 한 월급. 이들이 원하는 안정된 생활은 언제 올지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친정 가족들이 굶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먼 낯선 땅, 한국으로 건너 와 한국 남자와 결혼한 베트남 처녀는 ‘외국인’이라는 주위 한국인의 시선이 따갑기만 하다. 타국의 생활을 적응하기 위해서 고생해서 배워 서툴지만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녀를 단지 외국인으로만 보고 있다. 자신의 뱃속에서 태어난 혼혈 자녀들에게도 이방인에 대한 시선을 피할 수 없다. 학교 친구들은 ‘깜둥이’, ‘왕눈이’ 등 피부색과 신체를 이유로 놀림감을 당하기 일쑤이다. 어느 베트남 신부는 속궁합도 제대로 맞춰 보지 못한 채 한국인 신랑을 만난 지 8일 만에 살해되었다. 살인죄로 구속된 신랑은 정신병 증세가 있는 걸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국내 여론은 억울한 베트남 신부의 죽음을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단지, 이전에 시행하지 않았던 정부의 국제결혼에 대한 법적 규정 개정에만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나마 부산에서 베트남 신부의 죽음을 추모하고,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작은 행사가 열렸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를 수수방관(袖手傍觀)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는 다문화주의로 향하고 있으며, 외국인과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다문화가정도 늘어나고 있다. 다문화사회의 발전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수용한 서구의 인종주의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에 유입된 세계화가 거름이 되어 자란 신 인종주의라는 나무 그늘 때문에 이제 막 움튼 다문화 사회의 새싹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민족 중심주의를 탈피하고 타 문화의 차이를 인식하려는 관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 타 민족들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 

 

최근에는 밝은 다문화가정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모 기업의 광고가 대중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가 열심히 노력하여 장원급제하는 내용, 피부색이 각기 다른 나라의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아 강강술래를 하는 장면은 기업 이미지 자체를 떠나서 보는 이로 하여금 훈훈함이 느껴진다. 단순히 광고 속 내용 자체가 참신하다고 여기지만 말아야 할 것이다. 곧 다가올 다문화사회가 된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다문화사회로 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청사진에 대해서 한 번쯤은 재고해봐야할 것이다. 

  

 

 

* 관련 기사 인용 및 링크

[프랑스, 집시 추방 논란] 경향신문, 2010년 7월 30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301802385&code=970205

[佛 집시 추방에 교황도 '한 마디'] 연합뉴스, 2010년 8월 23일자 입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617866

["집시 추방을 나치의 유대인 추방에 비유?" 佛 사르코지, EU 정상회담서 발끈]  

조선일보, 2010년 9월 18일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18/20100918001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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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고 장가가고 송기호 교수의 우리 역사 읽기 2
송기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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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죽는 조선의 신부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었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보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신부] 원문,『미당 시전집 1』민음사 - 
 

이 시는 신랑이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달아나버리는데, 40~50년이 경과한 뒤, 신부가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매운 재’가 되어 버렸다는 민중 설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신부의 죽음은 일부종사(一夫從事)하는 열녀(烈女)로서의 매서운 신념을 암시하면서, 유교적 이념의 정신세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초록 재’, '다홍 재‘는 그 현세적 가치를 뛰어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있다.

시가 설화적인 내용이다 보니 신부의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신부가 재가 되기 전까지 평생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은 조선 시대의 여성의 모습이라서 낯설지가 않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결혼은 단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필수적인 예식이다.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신랑이 누군지도 모른 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얼굴을 모르는 신랑이 올 때까지 사랑방에 기다린다. 간혹 사극을 보면 신랑이 신부의 얼굴이 못 생긴 것을 알고, 합방을 거부하고 줄행랑 치고 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신부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신랑은 씨받이라는 명목으로 첩을 두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이니 만큼 남성 중심주의의 조선 사회에서는 도망가는 신랑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처한 신부로서는 어쩔 수 없이 평생 시집살이의 서러움 속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미당은 자신의 시에서 신부의 비극적 죽음을 정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있고, 평생 자신을 기다리다가 죽은 신부에 대한 신랑의 미안함도 드러나 있지 않다.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조했던 남성 중심적이며 폐쇄적인 유교 사상의 뉘앙스가 풍기고 있다. 자신들에게 부당했을 유교 사회를 원망하면서 죽었을 조선 여인들에게, 미당은 이들의 죽음을 유교 사회에 걸맞은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함으로써 조선의 신부들을 두 번 죽이고 말았다.        

 

 

위기의 조선의 주부들   

조선 사회에는 여성들에게 삼종칠거(三從七去)를 강조하였다. 시집 가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시집 가서는 남편에게,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복종한다고 했다(삼종). 그리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아들을 못 낳는 것, 음란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남의 물건을 훔치게 되면 버림받는다고 했다(칠거). 삼종칠거 중에서 여성들이 갖춰야 할 유교적 소양은 남편에 대한 복종이다. 결국에는 남성의 지위를 정립해주고 있는, 남성들을 위한 사상인 셈이다.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개가를 할 수 없었으며 한 남편을 향한 수절을 죽을 때까지 지켜야 했다.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면 남편이 죽으면 조선의 부인도 따라 죽었다. 심지어 남편과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부인이 먼저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여성들의 이런 행동이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사회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며 전란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여성들은 열녀로 추앙받았다. 

지금은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여자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서 부르는 미망인은 지금의 뜻과 차이가 있다. 원래는 남편 따라 죽지 못한 여자, 혹은 남편이 죽었는데도 죽지 않은 부인들을 가리킬 때 불렀다. 병자호란 때 어쩔 수 없이 공녀(貢女)로 청나라에 가야만 했던 여성들은 전란이 끝난 뒤,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는 그들을 매정하게 돌아서버렸다. 
 

  잡혀갔던 여인은 비록 그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란을 만나 죽지 못했 

 으니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 인조실록 16년(1638) 3월 11일, 송기호『시집가고 장가가고』 

  「처와 첩」에 재인용, p 121 - 
 

‘화냥년’이라는 주위에 멸시의 시선을 받아서 서러운 마당에 조정에서는 유교적 의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쌀쌀하게 대하고 있으니 공녀들에게는 하루하루를 사는데 고역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내가 적에게 잡혀 오면 남편은 무정하게 쫒아내 버렸으며, 새로이 처를 맞아들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칠거에는 적에게 포로로 잡힌 아내를 쫓아내라는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들은 유교와 권위를 앞세워 횡포를 부렸다. 
  

    

남편을 위해서 먼저 죽는 ‘레이디퍼스트’ 

 

나라에서는 열녀의 행적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열녀가 살았던 마을에 열녀문을 세웠다. 그러나 열녀문을 세운 의도 뒤에는 조선의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조하려는 암묵적인 강조가 숨어 있다. 그리고 강조의 근원에는 남성이 우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 열녀문이 열녀를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기보다는 조선의 유교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의 권위를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성을 위한 남성의 정중한 매너와 태도를 ‘레이디퍼스트(Lady-first)'라고 부른다. 여성들은 이런 매너를 갖추지 않은 남성들을 보면 우습게 여긴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는 반대로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해서 예의와 도리를 지켜야했으며 그런 태도를 보이지 못한 여성들은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만약 조선 사회에서 ’레이디퍼스트’라는 단어가 통용되었다면 남편보다 먼저 죽는 열녀를 지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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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질병 한길그레이트북스 97
헨리 지거리스트 지음, 황상익 옮김 / 한길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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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더 센 놈이 온다. 슈퍼박테리아

작년에 전 세계를 강타했던 신종 플루가 남기고 간 공포가 사람들의 기억에 사라지고 있어가고 있는 즈음에 이번에는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슈퍼박테리아의 등장으로 열도가 공포로 떨고 있다. 특히, 발병의 근원지가 병원이라는 점과 이를 은폐하고 있었던 병원 관계자의 대처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지난 2월에 문제의 병원 환자 8명이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되어 그 중 4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감염자와 사망자 수도 늘어나서 현재는 집계된 감염자 수가 46명이며 사망자는 27명이다. 여론에서 언급되고 있는 슈퍼박테리아의 정식 병명은 '아시네토박터 바우마니'이다. 증상은 패혈증, 폐렴 증세가 나타나며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항생제에 강한 내성을 보이고 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될 우려는 낮지만 면역력이 낮은 중병 환자들에게는 치명적이다. 현재로서는 슈퍼박테리아에 대항할만한 항생제가 없다. 슈퍼박테리아의 등장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대책만이 그나마 슈퍼박테리아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수 있는 최우선적이며 현실적인 방법일 뿐이다. 
      

인류 질병 잔혹사 

역사를 되돌아보면 강력한 질병들이 등장하여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헨리 지거리스트의『문명과 질병』에는 역사 속에서 맹위를 떨쳤던 악명 높은 질병들을 소개하고 있다.

14세기 중세부터 17세기 절대왕정 시기까지 페스트가 전 유럽에 창궐하였으며, 그 당시 취약했던 위생 환경과 미숙한 의학 기술 덕분에 페스트 이외에도 콜레라, 결핵 등과 같은 전염병도 유행하여 많은 유럽 시민들의 사망자수를 늘리는 데 일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피바람이 전 세계에 불고 난 뒤인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였다. 2년 동안 2500만~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중세 시기 때 유행했던 페스트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수이다. 이 책이 1943년에 발표한 것이라서 질병의 역사는 여기까지 소개되어 있지만, 세계적 질병의 유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산업화의 발전과 동시에 보다 높은 의학기술이 보유하게 된 선진국은 과거에 치료할 수 없었던 병들과 종말을 고했지만 개발도상국이나 빈곤 국가에서는 아직도 말라리아, 콜레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의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세균들은 항생제의 내성에 강하도록 스스로 계통번식을 하였다. 이후로 에볼라 바이러스, 에이즈가 등장하였으며 2003년에는 사스(SARS,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2009년에는 신종 플루의 등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판데믹포비아 

역사 속에서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한 불치병들은 의학기술로 인해 지구상에서 떠났지만, 인간들이 느끼는 질병에 대한 공포는 아직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전 병들보다 더 강력한 질병이 지구를 찾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총 6단계로 지정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최고 위험 등급을 판데믹(Pandemic)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어로 ‘pan’은 ‘모두’, ‘demic’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전염병의 대유행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까지 판데믹 경보를 내린 사례는 1918년 스페인 독감과 최근 신종 플루를 포함해서 단, 4번뿐이다. 사람들 사이의 전염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하여 세계적인 유행병이 발생할 수 있는 초기 상태를 4단계로 두고 있으며 5단계는 병의 유행이 임박했다는 상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병의 유행이 심각하면 6단계 판데믹으로 등급이 상승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론에서 언급되는 전염병 경보 단계 가지고 지나치게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공포의 감정이 너무 지나치면 판데믹포비아(Pandemicphobia)까지 이르게 되어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게 된다. 자신의 몸에서 조금이라도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거나 발견된다면 곧 죽을 병 걸린 것 마냥 착각하기 쉽다. 신종 플루가 한창 유행했을 때 마스크와 손 소독제의 매출이 증가했으며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공공기관에서는 손 소독기를 설치하여야만 했다. 이전에 설치되었던 손 소독기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혹시나 자신도 병에 걸릴 우려 때문에 손 소독기를 사용에 의존하게 된다. 이번에 발생한 슈퍼박테리아의 경우에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무해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 사이에 병에 대한 불필요한 공포감이 확산된다고 대한의사협회가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판데믹포비아는 과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지금과 같은 의학기술이 본격적으로 갖춰진 시기는 20세기부터이다. 유럽 중세부터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까지는 의학 기술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아 전염병과 각종 질병의 유행 앞에 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유럽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독교가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타개책이었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은 자신이 살면서 큰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신이 큰 벌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페스트 환자들은 신 앞에서 면죄와 동시에 자신의 병을 낫기 위해서 자해를 가하였다. 지금으로 보면 비현실적인 방법이지만 사람들은 어떻게든 질병의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하였다.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은 황당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정신병 환자들을 신을 반하는 악마나 마녀로 규정하였다. 무고한 특정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대중의 행동을 뜻하는 ‘마녀사냥’ 도 신이 내린 벌이었던 질병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두려움 속에서 탄생되었다.  

그리고 성서에는 병을 낫게 하는 예수의 존재가 언급되다보니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숭배되는 성인(聖人)이 그려져 있는 이콘화(Icon)라든가 소유하고 있었던 소지품을 가지고 있으면 병을 낫는다고 믿었다. 심지어 성인이 죽은 뒤에라도 손가락, 귀, 코와 같은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일도 발생하기도 했다. 기독교 성인에 대한 사람들의 치유 의식은 왕의 안수(按手) 의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막강한 종교의 힘 덕분에 나라를 지배하는 왕도 신적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왕이 직접 병든 시민들을 치료하게 해주는 안수 의식이 생겨났다. 중세 때부터 시작되었던 안수 의식은 18세기에 이르러 샤를 10세까지도 이어졌다. 하지만 안수 의식은 치료술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성격이 강한 치료를 위한 의식일 뿐이었다. 단순히 왕이 직접 병자의 몸에 살짝 손으로 접촉하고 마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안수 능력을 믿었다. 영국의 찰스 1세가 처형당하였을 때, 처형식에 있었던 영국 시민들이 처형대로 몰려와 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수건에 묻히려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처형당한 찰스 1세는 한낱 권력에서 밀려나 죽은 사람이 되었지만 이전에 왕이라는 신성한 존재였기에 시민들은 찰스 1세의 피가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질병의 힘을 극복하지 못한 문명의 진보

『문명과 질병』을 번역한 황상익 서울대 교수는 서론에서 문명의 진보가 어느 정도 질병을 극복해왔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문명의 진보가 질병을 극복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무시무시한 질병의 파급 효과를 어떻게 대처했으며 적용했다고 생각된다. ‘극복’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악조건이나 적을 이겨 내 굴복시킨다는 사전적 의미가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던 질병 유행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문명의 진보가 질병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발달된 의학기술로 통해 악명 높았던 질병을 지구상에 퇴치했다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의학기술로도 소용없는 강력한 질병들이 등장하였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슈퍼박테리아 때문에 떨고 있는만큼 우리나라도 슈퍼박테리아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헨리 지거리스트는 질병 역사의 순환성을 이해하고 앞으로 발생할 강력한 질병 퇴치를 위해서 국제적인 문제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그는 보건정책의 권위자로서 보건의료 서비스 구축론자이다. 전 세계적으로 판데믹이 유행하게 되면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신약 개발에 시동을 건다. 그러나 일부 음모론자들 사이에서는 개발도상국들은 거대 제약회사의 독점에 휘둘려서 그들의 배만 부르게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약 개발이 질병에 맞서야하는 인류 생존에 걸린 일이니 만큼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 투자를 제한하는 것은 억측이다. 오히려 질병에 대한 안일한 대처가 후에 더 많은 질병의 희생자가 늘어지고, 보건 대책에 대한 경제적 비용을 더 부담할 우려가 있다. 헨리 지거리스트의 주장처럼 세계 문제를 주관하는 국제 사회단체와 다국적 제약회사가 서로 손을 맞잡아 질병 퇴치에 앞장서야 한다. 질병 역사의 순환성 속의 질병 vs 문명의 대결 결과는 장군 멍군이다. 항상 질병이 발생하면 그 질병을 이길 수 있는 의학기술이 등장하곤 하였다. 비록 점점 발달되어가는 문명의 진보가 질병의 힘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인류는 스스로 질병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강한 생존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검증된 의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앞으로의 세계적인 환난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희망을 가져본다.

  


* 인용 관련 기사 출처 및 링크

[일본 ‘슈퍼박테리아’ 파문 확산] YTN, 2010년 9월 8일 입력
http://www.ytn.co.kr/_ln/0104_201009080653364349  

[의협, 슈퍼박테리아 "불필요한 공포감 확산"] 머니투데이, 2010년 9월 10일 입력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91011125658272&outlink=1

[슈퍼 박테리아, "더이상 치료제가 없다!"] 뉴스한국, 2010년 9월 11일 입력
http://www.newshankuk.com/tv/nhtv_view.asp?articleno=s2010091100301819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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