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열 달 넘게 엄마 뱃속에서 준비를 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오면 1년이 넘도록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뿐이랴. ‘아기’라고 불리는 동안은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 아기들이 사랑을 받으며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무기는 우는 것이다. 배가 고플 때, 어디가 아플 때,'응가'를 해서 뒤가 축축할 때, 심지어는 익숙지 않은 환경에 처하면 어김없이 운다. 사실 이것 하나로도 아기가 원하는 ‘응급한’ 것들은 거의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비장의 무기는 웃음이다.  필요한 게 없어 울지 않는데도 식구들이 시간 나는 대로 들여다보고 시간이 나면 ‘까꿍’하면서 놀아주는 것은 아기가 방긋거리는 것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꾸뻬 씨의 행복여행』을 읽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다. 정신과 의사인 꾸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찾은 환자들에게 늘 ‘왜 아기들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침묵이 흐른다. 그것은 아기들은 잘 알지만 어른들은 잊어버리고 사는 그 무엇이었다. 잠시 후 꾸뻬가 일러주는 답은 너무나 평범했다.  

 

‘사람들이 웃은 아이에게 더 다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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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수록 더하는 ‘빈익빈 부익부’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 중 최상위 1% 부자들의 부의 총합은 하위 50%에 속한 이들의 2000배가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20대 80’을 넘어 ‘0.1대 99.9’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위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최하위 빈자들이 더 가난해지는 상황을 “협력, 상호 신뢰, 공유, 인정, 존중 등을 토대로 하는, 공생에 대한 인간적인 갈망을 경쟁과 경합으로 대체한데서 비롯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플루토크라트(Plutocrat)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다. 그리스어로 부를 의미하는 plutos와 권력을 의미하는 kratos가 합쳐진 말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부유층’을 뜻한다. 전 세계 상위 0.1%를 차지하는 글로벌 슈퍼리치(Super rich)가 플루토크라트다. 그들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있고, 점점 더 끼리끼리 뭉치며, 갈수록 그 나머지 사람들과 동떨어진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점점 이들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로 나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격차를 통해 슈퍼리치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더욱 커진 파이로부터 이익을 얻을 뿐 아니라 그 파이에서 다른 동료들에 비해 더욱 큰 조각을 차지한다. 문제는 나머지 사람들이 이런 현실에 별 불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인데, 왜냐면 그들도 슈퍼리치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 개인화된 희망과 욕망 그리고 야망

 

 

 

 

 

 

 

극심한 불평등의 현장, 인도 뭄바이의 빈민촌 안나와디에 사는 주민들도 그렇다. 안나와디는 새로운 부의 상징이 된 뭄바이 사하르 공항 인근, 초특급 호텔 5개가 에워싸고 있는 빈민촌이다. 이곳에 사는 누군가는 “우리 주변은 온통 장미 꽃밭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 있는 똥 같은 존재”라고 자조한다. 대부분은 넝마주의로 생계를 이어간다.

 

아침마다 공항 일대에 넓게 흩어져, 내다팔 만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넝마주이는 수천 명에 달했다. 그들은 뭄바이에서 매일 쏟아지는 8000톤의 쓰레기에서 다만 몇 킬로그램을 건지려고 돌아다닌다. 까만 차장 안에서 내던지는 구겨진 담뱃갑을 주우러 달려가고, 물통과 맥주병을 찾아 하수구를 훑고 쓰레기 하치장을 뒤진다. 저녁이 되어 폐품을 담은 삼베 포대를 짊어지고 빈민촌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흡사 돈벌이에 이가 다 빠지도록 혈안이 된 산타 행렬 같았다. (캐서린 부 『안나와디의 아이들』반비, 15쪽)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이자 그만큼 불평등도 심각한 도시, 인도의 뭄바이. 뭄바이의 화려한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공항과 특급 호텔들의 그림자 뒤에는 그 성장과 발전에서 비껴난 사람들이 살고 있다. 토착민과 이주민, 무슬림과 힌두교도 간의 갈등이 곳곳에 도사리고, 전통과 현대 사이에 낀 여성들의 젠더 갈등도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고속 성장시대 특유의 한탕주의와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신분 승상을 위해 극우 정당의 하수인이 된 여성 아샤, 폐품 분류에 대한 천부적 재능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무슬림 소년 압둘,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인재가 되고자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대학생 만주 등 안나와디 사람들은 각자의 앞에 놓인 삶을 버티기 위해 모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빈곤의 고통에 벗어나 '중산층'이 되길 바라는 '야망'도 있다.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쓰레기를 줍는 생활로 연명하는 것도 버거운데 신분 상승까지는 힘들다.

 

그 곳은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희망’과 ‘욕망’ 그리고 '야망'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집단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면서, 안나와디 사람들의 공통된 ‘희망’과 ‘욕망’이 개인화되었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타인에게 무심할 정도로 고통에 공감할 여지가 없을 만큼 참혹한 삶이 빈민촌 사람들의 도덕관념을 위축시켰다.

 

 

  

 ♣ 낯익은 세상

 

 

 

 

 

 

 

 

 

 

 

 

 

못 쓰는 물건들과 못 쓰는 물건을 수집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인도 안나와디 사람들의 삶은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니다. 흉물스러운 쓰레기매립지 ‘꽃섬’에도 자본주의 욕망과 그로 인한 희생의 현실을 볼 수 있다. 정말 ‘낯익은 세상’이다.

 

인도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대한민국, 그것도 쓰레기매립지 그곳에서도 사람이 산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 주워 먹을 것을 찾아 달려드는 사람들이다. 반입되는 쓰레기차에 따라 구획이 나뉘어져 있어 권리금을 내야하고 등록증도 갖춰야 한다. 치열한 경쟁은 물론이고 권력의 질서마저 존재한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

 

쓰레기를 뒤져본 적이 있는 자는 안다. 악취 나는 오물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꽃섬’ 오두막 동네는 버려진 각목과 판자, 깔판으로 만든 집이 많다. ‘꽃섬’ 사람들은 구역별로 나눠 쓰레기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활용품을 모아, 이를 되판다. 그 돈으로 하루를 일하고 하루를 먹고 산다.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모든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여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그렇다. 자본주의의 참혹한 풍경은 인도 안나와디에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황석영 작가의 말처럼 『낯익은 세상』을 읽는 동안 우리는 지속적으로 ‘낯익은 세상’과 만난다. 단지, 그 불편한 세상을 일부러 외면해서 못 보고 있을 뿐이다. 난지도와 같은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가 없어졌지만 지금도 우리는 쓰고 버리고, 재생하고, 쓰고 버리고 또 재생하고. '꽃섬'에는 꽃이 없다. 그 주변에만 온통 장미 꽃밭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가 만들어 낸 영양분으로 '행복'이라는 장미가 자라나고 있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자주 입에 꺼내기가 쉽지 않은 ‘쓰레기’ 얘기. 새로운 제품 광고와 소비 욕구가 판을 치는 환락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바로 우리들 얘기다. 우리 주변의 낯익은 세상이다.

 

쓸모 때문에 생겨난 게 쓰레기다. 당초에는 긴요한 물건이었을 테고 사랑도 받았을 것이다. 버려지기 전까지 최적의 효용을 자랑했겠지만 쓸모를 잃어버린 순간, 쓰레기가 되고 만다. 쓰레기 없는 세상이 있겠는가. 문명은 풍요를 가져다주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폐기물 더미에 인간을 몰아넣고 운명처럼 살아가도록 했다.

 

종전까지 인간은 쓰레기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이 쓰레기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간 자체가 쓰레기화되고 있다. 모든 상품이 1회용으로 둔갑하면서 1회용 사랑과 1회용 만남이 끊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입양한 아이조차 버리는 일도 발생한다.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못한 채 과잉, 잉여, 초과 인구가 되는 인간이 늘고 있다. 말 그대로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버려지는 쓰레기화되는 인간들’이 생겨나는 것은 디지털 첨단화와 자본주의로 인한 지구화의 필연적 결과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자본의 눈에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은 불량품이나 쓰레기로 비친다. 쓰레기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 점차 배제되고 격리된다.

 

저자에 따르면 심각한 문제는 또 있다. ‘쓰레기화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한 국가의 난민들이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향해 합법적 혹은 불법적으로 몰려들고 있지만, 국가는 이 이주민들을 이른바 게토(Getto)로 몰아내거나 통제하는 등 영토를 요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안나와디와 한국의 꽃섬과 같은 빈민촌이 늘어난다. 반면 자국민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저렴한 노동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 아이러니다.

 

자본주의는 빈민촌이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으며 전 세계적 불황과 비정규직화, 무한 경쟁은 안 그래도 불안한 빈민들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인간마저 쓰레기가 되는 이 낯익은 세상에 인간은 뒷전으로 물러난 채 물질이 주체의 자리에 올라서 있다. 극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여겨졌던 이와 같은 현상은 이제 ‘일상’이 돼버린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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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모지상주의에 집착하는 사회

 

 

 

 

 

 

 

최근 외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면서 많은 사람이 피부나 몸매 관리에 정성을 쏟고 성형수술도 쉽게 한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의 75% 이상이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라고 답했다.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만족도는 떨어진다.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맑고 하얀 피부, 즉 피부미인이라면 아름다움의 70%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자극 천연소재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유기농화장품을 사용하는 등 곱고 맑은 피부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남성도 이제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 여성 못지않다. 주름과 여드름과 기미가 있는 피부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불성실한 자기 관리의 표본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성이 자신의 외모에 투자하는 것은 이미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 보니 화장품 회사도 각양각색의 남성화장품을 출시하고 있다. 얼굴이 하얘진다는 화이트 스킨로션이 있는가 하면 색조화장품까지 있다. 얼굴에서 남성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꽃미남 열풍과도 관련이 깊다. 과거 남성은 근육질을 남성미로 생각했다. 최근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서 다양한 남성성이 출현을 하고 있다. 요즘은 멋진 근육에 남성스러운 이미지의 ‘짐승남’ 열풍이 있긴 하지만, 꽃미남(또는 얼짱)과 같은 고운 남성에 대한 선망은 지금도 여전하다.

 

 

 

 

 

 

 

 

 

 

 

 

 

 

 

 

얼굴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외모지상주의 즉, 루키즘(Lookism)이란 것이 있다.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주의를 일컫는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인종·성별·종교·이념 등에 이어 새롭게 등장시킨 외모지상주의는 차별 요소로 지목되면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제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외모가 곧 처세, 사교, 결혼과 같은 사생활은 물론, 취업·승진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돼 일상생활에서도 외모를 가꾸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다.

 

 

 

 ♣ 하얀 피부에 대한 인류의 열망

 

과거에는 얼굴을 하얗게 만들기 위해 수은이나 납 성분이 포함된 화장품을 장기적으로 피부에 도포해 중독되는 일이 흔했다. 지금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무허가로 시판되는 화장품의 상당수가 이러한 성분들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17~18세기 유럽의 귀족층에선 창백한 얼굴이 인기였다. 핏기 없는 얼굴의 결핵 환자가 ‘낭만의 징표’로 여겨졌을 정도다.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하얀 피부로 ‘상류층’과 ‘평민’이 구분됐다. 대부분의 평민은 돈을 벌기 위해 야외에서 육체노동을 해야 했고, 얼굴이 까맣게 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상류층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은 태양아래서 해야 하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타고난 피부의 색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람들은 대개 하얀 피부를 타고난 이를 부러워한다. 피부가 하얗고 깨끗하면 좀 더 밝고 환한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타고난 피부색은 멜라닌의 종류가 다르고 양이 많고 적음 때문이지, 미(美)의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특히 피부색에 따른 인종의 구분은 생물학적 차이일 뿐, 그것이 사회적인 차별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하얀 피부에 대한 동경은 백인이 우월하다는 잘못된 통념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작품 #1  반(反) 자화상 1 : 하얀 마스크 팩과 함께 있는 미끌미끌한 자화상

 

 

 

 

(왼쪽) 살바도르 달리 『구운 베이컨 조각과 함께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 (1941년 작)

(오른쪽) 『하얀 마스크 팩과 함께 있는 미끌미끌한 자화상』 (그림 대체 사진 이미지 차용)

 

 

 

 

 

자화상은 흔히 자아의식의 발로라는 지표 아래 화가 자신이 인식하는 자아라는 차원에서 개성이나 내면의 성격의 입증과 함께 서양 예술의 흐름에서 흥미 있는 장르로서 계속 그려져 왔다. 그림의 수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화면에 자기 자신의 내심(內心)을 표현함으로써 반성하고 고독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는 자신의 영혼을 반영코자한 반면, 표현에 있어서는 실제의 구체적 형상으로 겉모양만 표현한 ‘반(反) (심리학적) 자화상’을 그리고 싶어 했다. 긴 상자 위에는 잘 구워진 베이컨을 올려놓고 지팡이로 세워져 부드럽게 늘어진 모습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내가 생각한 자화상 역시 ‘반(反) 자화상’에 가깝다. 내 얼굴에는 하얀 마스크 팩을 씌운다. 피부의 잡티를 제거하고, 하얀 피부를 위한 미용을 위해서 하루에 한 장씩 마스크 팩을 사용한다. 마스크 팩을 한 나의 얼굴은 잡티가 없고, 깨끗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피부 미남’이 되기 위한 외모의 열망을 상징한다.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는, 포토샵으로 하얀 피부색으로 처리된 미남 연예인의 얼굴처럼 되고 싶어한다. 멋진 '가면'이 되기 위해 하얀 가면인 마스크 팩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스크 팩을 한 얼굴을 표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내면에 있는 자아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자화상 형식과는 다르다. 마스크 팩은 외모에 집착하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하얀 피부’로 대체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하얀 피부를 선호하는(외모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외부의 시선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이 그림을 보고 있는(하얀 피부를 선호하고 피부미용에 집착하는) 관객의 얼굴이 될 수도 있다. 즉, ‘하얀 피부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마스크 팩은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외모지상주의자가 지향하는 미(美)의 외적 기준인 것이다.

 

 

 

 작품 #2  반(反) 자화상 2 : 하얀 가면

 

 

 

 

피부가 좋고, 하얗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상이 좋을지 몰라도 인품과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겉모습으로만 사람의 인품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면이 아닌 겉으로만 드러나는 하얀 피부를 선호하는 잘못된 외모지상주의를 비꼬기 위해서 오브제(objet) 형식으로 ‘하얀 가면’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 작품 #3  반 자화상 3 : 가면의 최후

 

 

 

(왼쪽)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세부 (1536~1541년 작) 

(오른쪽) 『가면의 최후』

 

 

 

 

 

 

 

 

 

 

 

 

 

 

미켈란젤로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내적인 영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온전히 사람의 얼굴을 모방하는 것과 다름없는 초상화나 자화상을 경멸했다. 그래서 육체에 담겨진 외적 아름다움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듯한 자신의 자화상을 『최후의 심판』의 한부분에 그려 넣는다. 사실 그것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인 성 바르톨로메오가 손에 들고 있는, 순교할 때 벗겨진 자신의 살가죽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열흘 동안 붉은 빛깔을 띠는 꽃은 없다. 한번 성한 것은 언젠가 쇠락하고 만다. 아름다운 미모 또한 그렇다. 아름다움은 모진 세월의 풍파 속에 무너지고 망가지게 되어 있다.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기 위해 외모만 가꾸는 데 치중한다면 시간 낭비이며 집착의 형태이기도 하다. 특히, 삶이 완전히 소진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육신은 썩게 되고 아름다움은 ‘추(醜)함’이 된다.

 

‘반 자화상’ 연작 세 번째인 『가면의 최후』의 오브제는 이미 얼굴 마사지로 사용한 마스크 팩이다. 사용하기 전 마스크 팩에는 촉촉하고 미끌미끌한 수분 성분이 묻어 있다. 그러나 마사지로 얼굴에 붙이는 순간, 팩에 머금은 수분 성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5~10분 정도 지나면 수분 성분은 피부로 흡수되고, 마스크 팩은 촉촉한 수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조된다. 하얀 피부를 만들기 위해 우리 얼굴에 희생되는 마스크 팩의 일생은 너무나도 짧다. 길지 않은 하얀 가면의 최후는 아름다움의 유한성을, 축 늘어진 마스크 팩의 형상은 일시적인 아름다움이 죽음으로 인해 ‘추’(醜)로 변화되는 인생무상(Vanitas)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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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 대금업자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항해 중인 안토니오의 상선 대신 그의 가슴살 1파운드를 담보로 잡는다. 해적이 들끓던 16세기, 무역선이 못 돌아오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뱃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한 동인(動因)은 ‘원금의 수백 배에 이르는 고수익’이었다. 투자가들은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여럿이 돈을 모아 자본금을 마련하곤 했다. 이것이 주식회사의 시작이다.

 

 

 

 

 

이익 앞에서 투자가들은 초인적 용기를 보여 준다. 이를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 정신’이라 했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야성적 충동’이라고 불렀다. 야성적 충동은 케인스가 경기변동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만들어 낸 말이다. 케인스는 “투자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가의 직감에 의존해 결정되며 투자의 이 같은 불안정성 때문에 경기가 변동한다”고 설명했다.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기업가의 직감이 바로 야성적 충동이다.

 

 

 

 

 

기업가의 야성적 충동이 잘 발휘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불확실한 상황 속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작정 투자를 감행한다는 건 쉽지 않다. 오히려 무모한 투자는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01년 레몬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던 조지 애커로프 교수와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되는 로버트 쉴러 예일대 경제학 교수는 공동 출간한 『야성적 충동』에서 금융위기로 파탄 난 세계 경제를 비유하는데 ‘험프티 덤프티’를 사용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달걀이다. 영국 자장가에 나오는 원래 고집불통에 유식한 체를 잘하는 캐릭터로 소설에 등장하는 험프티 덤프티는 높은 담장 위에 위태로운 자세로 앉아 있다가 떨어져 깨져 버리는 인물이다. 험프티 덤프티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담장 위에 앉아 있지만, 권위 의식과 자만심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야성적 충동』의 저자들은 현재의 금융 위기도 지나친 자신감 때문이었다며 금융 시장의 달걀은 이미 깨져버렸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애초에 험프티 덤프티가 세계의 작동 방식에 대해 정확한 시각을 가졌더라면 담장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처럼 사람들이 경제의 진정한 작동 방식을 깨달았더라면 자산을 구매할 때 좀 더 신중했을 것이며 결국 경제는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케인즈가 맨 처음에 ‘야성적 충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 경제적 상황 또한 무관하지 않다. 1930년대 대공황도 ‘야성적 충동’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 시장의 낙관론에 도취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과열 상태로 돌진한 시장은 결국 거품이 꺼지면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극도의 침체를 경험했다. 지나친 오만과 자신감과 같은 야성적 충동은 또 한 번 경제를 큰 위기로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야성적 충동으로 인해 이미 깨진 ‘경제’라는 달걀을 원상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새로운 달걀로 교체해야 한다. 어떻게 교체해야 하는가?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는 최선의 방법은 정부의 개입이라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 개입은 언제나 야성적 충동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최우선의 요인으로 파악한 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서서 적절히 관리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선 정부밖에 없는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시장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 인식의 교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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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10-17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익고 갑니다.그나저나 경제이야기에 베니스의 상인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을 함께 쓰시다니 내공이 대단하심니당^^

cyrus 2013-10-17 21:29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잘 지내시죠? 오랜만입니다. '험프티 덤프티' 이야기는 로버트 쉴러의 <야성적 충동>에 인용되어 있어요. 그냥 잘 아는 이야기가 있길래 다시 한 번 기억해볼 겸 글로 정리해봤습니다. ^^
 

 

 

 ♣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영원한 행복이 없듯

영원한 불행도 없는 거야.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고,

또 언젠가 만남이 찾아오느니

인간은 죽을 때,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과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일본 작가 쓰지 히토나리가 쓴 연애 소설 『안녕, 언젠가』한 대목이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면 과연 나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 중 어느 쪽의 인생을 마주하게 될까.

 

 

 

 

 

 

얼마 전 SNS에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게 됐다. ‘노부부의 동심’이라는 제목이 달린 여러 장의 사진이다. 사진 속,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는 놀이터에서 그네와 회전 뱅뱅이 등 놀이기구를 함께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노부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사진 속 상황만으로도 이들의 즐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노부부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그 때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노부부만의 행복한 시간을 몰래 촬영하는 건 좋지 않지만, 이 장면을 우연히 발견한 익명의 촬영자는 멀리서 지켜보는 내내 흐뭇했을 거다. 이런 아름다운 장면의 사진이라면 여러 사람이 보면 좋다. 노년의 사랑을 조명한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한 심리학자는 말한다. “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그 차이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의 거리이기도 하다.

 

 

 

 

 ♣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황혼’에는 자연의 황혼과 인생의 황혼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1.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때, 2. 사람의 생애나 나라의 운명 따위가 한창인 고비를 지나 쇠퇴하여 종말에 이른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이육사의 「황혼」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오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그가 노래하는 것은 인생의 황혼이다. 비록 한창 고비를 지났지만 아직도 정성된 마음으로 맞아들일 대상이 남아있다. 황혼이 곧 종말이라는 부정적인 관념, 특히 외로움으로 대표되는 골방의 커튼을 걷고 인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삶이라는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다.

 

딱히 몇 살부터를 황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인생은 60부터’라는 말과 상관이 있어 보인다. 황혼기에 기죽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는 뜻에서 생겨난 말일 것 같다. 이 황혼기가 머지않아 거의 30년 기간이 될 것인데 “이처럼 긴 시간들을 어떻게 아름답고 의욕적으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질문이다.

 

 

 

 

 

 

 

 

 

정두영 목사 작곡의 성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는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에 곡을 붙인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 내일을 향한 소망, 그리고 서로를 아끼고 베풀며 따뜻하게 보듬는 사랑이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며 특히 황혼기에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랑이다.

 

 

 

 

 ♣ 사랑하면서 함께 늙어가기

 

 

 

청춘의 사랑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라면 황혼의 사랑은 화롯불같이 불씨를 품고 안으로 타오르는 열정이다. 후반부에서의 사랑은 그저 만화나 소설에서 꾸며 낸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이라면 앙드레 고르가 쓴 『D에게 보낸 편지』가 시각 교정에 도움이 된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9월에 불치병으로 고통 받아 온 아내와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해 전 세계를 울렸다. 죽을 때조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쇼’를 했다는 냉소적인 시각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삶이라는 무대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출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감동의 드라마 아닌가. 83세의 앙드레 고르는 자다가 깨어나 82세의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 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저무는 세밑의 끝자락, 다들 아쉽고 뜻대로 안 된 일도 많을 터다. 그래도 곰곰 생각해 보면 숨이 남아 있는 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영혼이 굳어지지 않고 사랑하며 늙어 간다면 나이 먹는 것도 그다지 불평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꼭 늙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젊은 연인들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유치환 「행복」)는 시 구절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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