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다이어트를 성공하는 방법

 

 

 

 

 

 

 

 

 

 

 

 

 

 

 

‘극기’란 자신을 이긴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기 통제력은 지능과 더불어 성공적인 인생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다. 자기 통제력이 있어야 학업과 사회생활 등 개인의 노력과 의지가 요구되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누구나 꾸준히 훈련하면 능숙하게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다스릴 수 있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온 기간만큼이나 오랫동안 사람들은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애를 써왔다. 현대 사회에서 자제력은 더더욱 중요한 것이다. 자제력이 없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먹고 마시며 너무 많은 돈을 쓰고 비디오 게임에 중독될 것이다.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의 4분의 1을 욕망과 싸운다. 가장 보편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욕망은 식욕, 수면욕, 쉬고자 하는 욕망, 성욕의 순서다. 특히 체중 조절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식욕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 다이어트 목표를 세우면 당분간 기름진 야식과 술, 과자를 멀리 해야 한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한다. 첫째 절대로 다이어트를 하지 말 것, 둘째 절대 초콜릿이나 다른 음식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지 말 것, 셋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과체중과 의지력 부족을 절대 동일시하지 말 것. ‘말이 되는 소리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를 ‘아무렴, 어때 효과’로 정리한다. 전문용어로는 ‘역규제적 섭식 경향’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섭취하는 최대 칼로리에 대한 일정한 목표가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목표치를 초과할 경우 그날의 다이어트를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며 평소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이다.

 

잠이나 섹스, 그리고 소비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는 데는 비교적 성공했지만 TV를 보거나 웹사이트를 둘러보는 것처럼 일하는 시간에 휴식하고자 하는 욕구를 억누르는 데는 약했다. 평균적으로 의지력을 동원해 유혹을 이겨내는 정도는 절반 정도였다.

 

개인과 사회를 통틀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기 절제를 못한 데에서 비롯된다. 강박적 소비와 대출, 충동적 폭력과 학업성적 부진, 직장에서의 게으름, 술과 마약의 남용,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과 운동 부족, 만성적 불안과 폭발적 분노가 바로 그러한 예다.

 

인간은 영장류 중에서 전두엽이 가장 큰 동물인데 인간에게 자기 조절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전두엽을 통해 자기 조절의 의지력이 강화된다. 이것을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생각의 조절’이 그 첫째다. 우리는 훈련을 통해 집중하는 법을 배우며, 특히 동기가 강할 때 그 효과는 커진다. 둘째는 ‘감정 조절’을 들 수 있다. 기분에 특히 집중하는 것을 심리학자들은 정서 조절이라고 부른다. 셋째는 ‘충동 조절’로 사람들이 의지력과 가장 많이 연관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행 조절’이라는 범주가 있다. 현재의 일에 에너지를 집중해 속도와 정확성을 기하고, 시간 관리를 잘하며, 그만두고 싶을 때도 강한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다.

 

 

 

 Scene #2  욕망을 이겨내기 위한 에너지, 의지력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의지력도 근육과 마찬가지로 너무 한꺼번에 사용하면 지친다는 것. 우리에겐 사용함에 따라 소진되는 일정한 양의 의지력이 있으며, 모든 종류의 과제를 수행할 때 똑같은 양의 의지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직장에서 너무 의지력을 소모하면 집에 돌아와 자신의 감정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분노를 폭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력을 연구한 로이 바우마이스터 교수는 '자아고갈'이라 명명했다. 욕망을 이겨내는 데는 에너지가 소모되며,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의지력은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이다. 결국 하루 종일 수많은 유혹에 '안 돼'라고 외치다 보면 나중에는 저항하는 힘이 점점 약해져 결국 항복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정하게 의지력을 소진하고 나면 자기 절제력이 약화된다. 또한 의지력이 고갈되면 평소보다 더욱 강한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한편으로 자아 고갈은 간혹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흐려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 할 판사나 환자의 건강, 나아가 생명까지 다뤄야 할 의사들도 성급한 판단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성보다는 직관에 따랐던 탓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의사결정 인자를 두 개로 나눈다. 빠른 직관으로 구성된 시스템 1과 정확하지만 느리고 게으른 이성이 지배하는 시스템 2가 우리의 두뇌 속에서 상호 작용한다는 것이다. 시스템 2를 작동해 시스템 1를 자제하는 과정은 ‘자아고갈’에 이르게 할 만큼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한 과정이 된다.

 

 

 

 Scene #3  자기통제의 관건은 감정 조절

 

 

 

 

 

 

 

 

 

 

 

 

 

 

 

 

의지력이란 곧 정신력이다. 우리는 살면서 감정을 제어하는 자기통제도 정신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나태함만으로 의지력과 자기통제력이 떨어지는 원인으로 볼 수 없다.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면 의지력이 소모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너무 중요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면서 사는 동물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이 바람직하게 여길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자아에 간극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사적자아’와 ‘공적자아’라고 한다. 사적자아란 '있는 그대로의 편한 내 모습', 예컨대 집에서 뒹굴뒹굴 거리는 내 모습이고 공적자아란 '사람들 앞에서의 내 모습', 예컨대 사회집단(직장, 학교 등)에서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이런 사적자아와 공적자아의 간극이 클 경우 심리적으로 상당한 괴로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있다. 사적자아와 공적자아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작업은 에너지 소모가 많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들로 하여금 '원래의 모습'을 가리고 살도록 하는 각종 사회적 제약이 존재하는 경우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사적자아와 공적자아의 간극은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정신을 집중하게 되면 정신적인 에너지, 즉 의지력도 감소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편한 감정을 꾹 참고 마는 ‘억제’보다는 스스로 감정을 발산하면서 동시에 그 감정을 발생한 원인을 알고, 추스르는 ‘재평가’의 조절법이 중요하다. 감정을 발산하지 못한 채 강압적으로 억제한다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자아 고갈로 이어지게 된다.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에서 자기통제력을 발휘하기가 무척 힘들다.

 

우리 정신에 활력을 불어넣는 의지력, 자기통제력은 건강한 삶을 위한 기초체력이다. 주말이 끝나자마자 두려움이 찾아오는 그 ‘월요병’은 정신 에너지의 부족 상태를 보여주는 증상이다. 피곤함, 무기력함, 우울함에 정신이 지쳐버리면 자기통제력, 의지력 또한 상실된다. 이러면 눈앞에 유혹하는 욕망 앞에서 쉽게 무너져버리고 만다. 결국 월요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말에 에너지 충전을 잘 해야 한다. 무조건 주말 내내 잠을 자거나 집에 틀어박혀 뒹굴어도 월요병을 쉽게 나을 수 없다. 몸만 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쉬게 만들어야 한다. 한 주 내내 지쳐서 에너지가 바닥난 감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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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은 감정이라는 액체에 사려분별력이 떠다니는 용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동시에 작용하는 영혼의 샘이랄까. ‘센스(Sense)’라는 말이 그렇다. 이 말이 형용사로 바뀌면 가슴으로 느끼는 ‘민감한(sensitive)’이라는 뜻과 머리로 생각하는 ‘영민한(sensible)’이라는 의미로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 마음은 이에 더하여 영혼(spirit)까지 담고 있는 듯하다.

 

칸트에 따르면 진리의 인식은 감성과 오성(悟性, 사고능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주변의 다양하고 무질서한 감각자료(sense data)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질료(質料)’를 내 주관기능인 ‘형식’이 나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여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그 대상이 ‘인식’되고 ‘존재’하게 된다. 순수이성을 선험적 오성이라 부르며 이 오성에 의해 우리는 밖에 있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했다. 이 명제가 가능하려면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식하므로 생각이 가능하다. 우리에게 인식하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의 숫자, 양, 인과관계를 설정하거나 현상을 종합하며, 공간이나 시간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칸트와 같이 순수이성의 혜안을 갖지 못한 나도 청결한 마음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볼 때는 나름대로의 이치랄까, 그런 걸 터득하기도 한다. 마음이 탁해졌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주위가 캄캄하게 느껴질 때는, 고교 2학년 때이던가, 복잡한 고등수학문제를 풀고 이해했을 때의 어둠에서 빛을 본 듯한 경험을 떠올리곤 한다.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수식이라도 그 원리를 깨쳤을 때는 그것은 매우 쉬운 보편적인 것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나 꽤 복잡한 경제문제도 깨끗한 마음의 창에는 굴절되지 않고 올바로 비춰지는 법이다. 이기적 욕망이랄지, 편견이랄지, 증오랄지, 그런 것들이 오물이 되어 마음을 뒤덮을 때는 보편적이지도 못하고, 상식적이지도 못하는 생각과 판단을 하게도 된다.

 

우리 사회에 불신이 만연하는 것은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인데, 사실은 개개인이 자신도 믿지 못하니 남도 믿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무슨 사회문제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정치인, 고위 공직자, 기업인과 종교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불신하는 정도가 매우 심하다는 결과를 내놓은 걸 보면서 그들을 지도층으로 선출했거나 묵인한 장삼이사(張三李四)는 그럼 스스로를 정의롭고 정직한 인간으로 치부하는지 의심스럽다. ‘인간의 행위란 결과적으로 이기심과 그로 인한 위선에서 비롯된다’고 17세기 프랑스의 잠언작가 라 로슈푸코가 말한 대로 사람들은 가면을 쓴 채 목소리를 높이며 뭘 갈취코자 가면 뒤의 눈을 두리번거리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옷가지들은 더러워지면 깨끗이 세탁하여 입는다. 오늘날엔 빨랫감에 대한 방망이질 대신에 그냥 주기적으로 전기세탁기에 집어넣어 세탁한다. 더러운 때가 빠지는 걸 손수 보지 못해서 그런지 지난날보다도 마음의 때를 벗기는 데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혼탁하고 불공정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마음을 정화하는 빨래방망이에 의한 성찰의 아픔을 스스로 겪어야 한다. 옛날 마을 건너 호젓한 개울가에 앉아 빨랫감을 방망이질하는 아낙들처럼 세파에 시달려 우리 마음에 잔뜩 끼어있는 오물들을 종종 깨끗이 닦아내면 사회가 좀 더 정의롭고 공정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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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노코미스 지역에 사는 아메리칸 인디언 히어와서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은 고아였다. 어머니가 죽고 난 뒤 그는 아버지 손에 자라게 된다. 청년이 될 무렵 어느 날 숲을 거닐고 있을 때 나무가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무는 그에게 ‘안녕, 히어와서!’라고 인사를 했다. 자연에서 생활하고 자연에서 지혜를 얻는 그는 나무뿐만 아니라 숲속에 사는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숲속의 동물들은 그를 ‘나의 형제’라고 불렀다. 위의 이야기는 미국의 시인인 롱펠로가 쓴 ‘히어와서의 노래’라는 장편 서사시에 나오는 내용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솔로몬은 통일 이스라엘 시대의 왕으로 다윗의 아들이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왕이었으며 그의 지혜는 당시의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의 지혜는 대단하여 자연에 사는 동물들과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솔로몬 왕이 짐승과 새와 물고기뿐만 아니라 식물, 곤충 등과 대화를 나누었다니, 그의 지혜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아픈 물고기들을 치료하려고 물에다 귀를 대요. 물고기의 말을 듣고 치료해주는 거죠."

 

휴 로프팅의 동화 『돌리틀 선생 항해기』 에 나오는 대사다. 물에다 귀를 대고 물고기들의 말을 들으려는 수의사의 마음을 어떻게 신기한 몽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

 

영국에 동물을 좋아하는 존 돌리틀이라는 의학박사가 살고 있었다. 돌리틀 선생은 동물들을 끔찍이 사랑한 나머지 동물들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솔로몬처럼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제비들로부터 전염병에 걸린 원숭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들을 치료해주려 아프리카로 떠난다. 천신만고 끝에 원숭이 나라에 도착한 돌리틀 선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원숭이들의 병을 고친다. 돌리틀 선생의 집에는 서커스단에서 탈출한 악어 엘리게이트, 원숭이 치치, 앵무새 폴리네시아, 집오리 대브대브, 새끼돼지 거브거브, 이 밖에도 개, 쥐, 소, 말, 당나귀들이 한 식구가 되어 살아간다.

 

동화 ‘돌리틀 선생 시리즈’는 1920년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사랑을 받아왔고, 아이들은 돌리틀을 실존인물로 믿었다. 매년 1편씩 내놓다가 싫증을 느껴 1927년 ‘달에 간 돌리틀 선생’으로 돌리틀을 달에 보내 사라지게 했다. 그러나 독자들의 요청에 못 이겨 1933년 ‘돌리틀 선생의 귀환’으로 복귀했지만 재미가 예전만 못했다. ‘동화작가’라는 타이틀을 그렇게 싫어해 다른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돌리틀’ 하나만으로도 그의 삶은 충분히 행복했다. 돌리틀 선생은 60여 년 뒤에 영화로 재등장한다. 에디 머피가 돌리틀 선생으로 분한, 우리나라에서는 ‘닥터 두리틀’이라는 이름으로.

 

 

 

 

 

 

 

 

 

 

 

 

 

 

 

비록 돌리틀 선생은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동물을 정말 좋아하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는 진짜 박사가 있었느니 그가 바로 콘라트 로렌츠다. 콘라트 로렌츠 박사는 오스트리아인으로 동물행동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1973년에 동물행동 분야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또 비교행동학의 창시자이며, 동물행동학과 동물심리학의 세계적 권위자다.

 

그는 또 기러기의 새끼가 알에서 처음 깨어나게 되면 그 때 본 첫 사물이 자신의 어머니로 생각한다는 이른바 ‘각인’(imprinting)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실제로 야외에서 기러기 둥지에 알을 품고 먹이를 먹이고 함께 먹고 자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 중 『솔로몬의 반지』라는 것이 있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유래되었다. ‘솔로몬의 반지’는 로렌츠 박사가 기러기 연구를 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제목이었다. 자연에서 생활하는 생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기 위해 솔로몬의 반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제목인 솔로몬의 반지를 생각하며,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다니 정말 부러운 능력이다.

 

 

 

 

 

 

 

 

 

 

 

 

 

 

 

그런데 만약에 솔로몬왕, 돌리틀 선생 그리고 로렌츠에게 동물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렸을까? 도통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러나 동물은 소리로만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소리뿐만 아니라 시각 신호, 진동, 전기, 접촉, 속임수 등 동물들은 놀랄 만큼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을 갖고 있다. 동물들은 짝을 발견하고, 새끼를 보살피고, 경쟁자를 물리치고, 먹이가 있는 곳을 알아내거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소리를 이용한다. 시각적 신호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에게도 자신을 드러내는 믿을 만한 가장 빠른 방법이다.

 

공작새 꼬리의 화려한 부채형 날개나 붉은 사슴 수컷의 우아한 뿔은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다. 참새 수컷의 검은 가슴털은 지위의 상징이다. 검은 털이 클수록 계급이 높다. 참새들은 이렇게 해서 암컷이나 먹이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을 피한다.

 

신체 접촉도 효과적인 의사소통 방법이다. 새끼의 몸을 핥고 단정하게 손질해 주는 것은 새끼를 깨끗하게 해주려는 이유도 있지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동물들이 서로 코를 비비고, 몸을 문지르고, 치장해주고, 쓰다듬는 것은 서로 인사하거나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공격적인 대상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의사소통은 생존을 삶으로 바꿔놓는다. 인간의 눈에는 기계적 행동이나 해부학적 구조로만 보이는 동물들의 의사소통 체계는 의외로 역동적이며 신호와 의미도 계속 진화한다. 단지 생존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놀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신호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동물과 식물은 스스로의 언어로 인간과 대화할 수 없다. 이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생태학자인 우리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서 설명해 주어야 한다. 동물,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은 많은 시간을 들에서 혹은 산에서 보낸다. 이들이 연구하며 알고자 하는 것은 동식물들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그들의 언어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나 표로 나타내기 위함이다. 자연계의 동식물은 자신의 서식처가 훼손되며 오염돼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하고 있다. 결국 우리 행동의 뿌리는 주변의 많은 동물들에게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더 큰 자연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들과 공생해야 한다.

 

자연 파괴는 이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물과 식물이 말 못하는 생물이라고 해서 이들의 존재가치가 위협받아선 안 된다. 모든 생물은 그 종류대로 장구한 세월을 견디며 생존해 왔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들의 언어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야외로 조사를 나간다. 썩어져 가는 강물에 살고 있는 물고기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솔로몬의 반지’를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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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아니 어쩌면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한 것’이라고 자부했듯이 실제 조선이라는 새 국가 건설의 최고 주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건국 후 7년이 채 못 되어 이성계의 아들이자 정적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후 그에게는 ‘역적’이라는 불명예가 따랐고 조선의 역사에서 한동안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정도전이 조선의 국정방향을 제시한 『조선경국전』에 피력된 정치사상은 그의 비참한 죽음의 단서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총재가 훌륭한 사람이 등용되면 육전(六典)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인주(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총재라는 것은 위로는 군부(君父)를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자이니, 그 직책이 매우 크다. 또한 인주에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현명한 이도 있으며, 강력한 이도 있고 유약한 이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총재는 인주의 장점(美)을 살리고  단점(惡)은 고쳐야 하며, 옳은 일은 받들어 봉행하고, 옳지 않은 일은 바꾸도록 해야 한다.” (46쪽)

 

정도전이『조선경국전』에서 밝힌 재상의 역할 부분이다. 군주는 현명함과 무능함의 차이가 있지만 재상은 가장 능력 있는 자가 선발될 수 있기 때문에 재상 중심으로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1394년에 편찬된 『조선경국전』은 조선 건국의 이념과 통치방향을 제시한 대표적인 책. 훗날 조선의 헌법이 되는 『경국대전』의 모태가 되었다.

 

중국 ‘주례(周禮)’에 바탕을 두고 치(治), 부(賦), 예(禮), 정(政), 헌(憲), 공전(工典)의 6전 체제로 정리하였으며, 6전의 앞부분에는 치국의 기본이 되는 정보위(定寶位), 국호, 국본, 세계(世系) 등의 내용을 기술하였다. 6전에서는 능력본위의 시험제도에 의한 관리 선발, 국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군현제도와 호적제도의 정비, 언로의 개방, 사대외교의 중요성, 인(仁)에 바탕을 둔 도덕정치의 지양 등 고려 말의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건국한 조선사회가 가야 할 방향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도전은 새로운 조선을 이끌 중심은 왕이 아닌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점, 즉 왕권보다는 재상권 강화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확보를 위해 정도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연합하여 그녀의 소생인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다. 태조의 적자 소생의 아들보다는 계비 소생의 어리고 허약한 왕자가 그의 구미에 맞았을지 모른다.

 

이러한 재상권 강화 시도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인이 된다. 왕자들의 병권약화를 위해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추진하자, 1398년 왕권 강화론의 대표주자 이방원은 그가 지휘한 군사들을 보내 송현(松峴)의 남은의 첩 집에서 방심하고 있던 정도전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재상 중심의 조선을 꿈꿨던 정도전에 대한 왕실의 대반격이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정도전은 단지 시운을 타고난 정치가이자 야심가가 아니라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었던 개혁가이자 국가 경영에 필요한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절세의 경륜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인사, 총무, 예산, 의전, 국방, 법무, 건설 부문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규정하고 방향성을 제시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또한 태조 이성계에 대한 충성뿐 아니라 각 조항 곳곳에서 느껴지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깊이 느끼면서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정치가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그가 그린 이상국가의 모습은 수도 서울의 사대문 이름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과 종각역에 있는 보신각의 이름을 모두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한다. 숙정문의 정자가 지(智)와 매한가지라 하니 사대문 이름 속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들어있고, 보신각의 신자가 ‘믿을 신’(信)이니 수도 서울을 인의예지신의 본향으로 삼고자 했던 그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하겠다.

 

민유방본(民惟邦本). 조선시대 부흥을 이끌었던 세종, 정조를 비롯한 대다수 제왕들의 통치이념, 리더십을 관통하는 정치사상이다. '백성이 근본'이라는 정신을 담고 있다. 그 핵심 덕목은 위민(爲民), 백성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경외(敬畏)에 있다.

 

정도전은 백성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낙생(樂生)에 있다 했다. 즉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북돋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도자를 부모처럼 따르고 나라를 뒤엎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민유방본에 녹아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목표는 민본에 있다. 민본정치를 위해 정치의 틀부터 바꾸자는 것이다. 이것이 시대적 요구라면 독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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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20대에 대한 갖가지 정의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20대가 어떤 세대인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증거일 것이다.

 

그럼에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 20대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그 누구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88만원세대’도 그네들이 처한 경제적 고통으로 세대의 특성을 규정했으며, ‘20대XXX’론도 정치사회적 역할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한 채 개인적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20대들을 비아냥거릴 뿐이다. 20대 ‘청년학도’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소설 『표백』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2011년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장강명의 『표백』이 결정된 순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표백 세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떤 것도 보탤 수도, 보탤 것도 없는 사회에서 단지 ‘표백’될 뿐이다. 그에 대한 극단적인 대응책으로 주인공들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것은 의도적이며 사회적인 자살이다. 표백 세대는 자살을 통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완전히 지워버리면서 자신들의 상실감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기성세대가 고달프지만 내일을 향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면, 젊은 후배세대들은 안온하지만 희망 없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는 절규인 셈이다.

 

암울한 미래에 별다른 희망을 갖지 않는 ‘나’는 아버지처럼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나는 대학 동기인 휘영, 후배 병권, 여자친구인 세연과 추윤영 등과 어울리며 대학생활을 끝내 간다. 이 중 몇 년 전부터 자살을 준비해온 세연은 친구들을 설득, 자신이 자살한 5년 후에 자살할 것을 다짐받는다.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성공했을 때 사회에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는 흰 그림이야. (중략)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77~78쪽)

 

 

과연 이 시대의 청춘들은 아무것도 보탤 수 없고 보탤 것도 없는 표백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시대가 낳은 청춘들의 슬픈 비망록 ‘표백’은 독자들에게 이 같은 물음을 남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작가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지금의 세상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하다는 사회라는 점에서 20대들은 변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정도로 강하게 반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표백』이 나온 지 3년도 채 안 되어 제2회 한국경제신문 청년신춘문예에 김의경의 『청춘 파산』이 당선되었다. 『표백』보다 제목이 인상적이면서 너무나 절망적인 느낌을 든다. 이제 청춘은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산되었음을 보여준다.

 

김의경이 묘사한 파산 선고 받은 청춘의 모습은 예전에 ‘88만원 세대’와 더불어 20대의 현실을 어둡게 표현했던 ‘삼포(三抛) 세대’를 상기시킨다.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하는 세대. 바늘구멍 같은 취업의 길, 불어나는 학자금 대출 빚, 치솟는 집값 등의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만다.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인 만큼 『청춘 파산』은 자전적 성격이 짙은 소설이다. 인간 CCTV, 위장 손님, 두상 모델 등 발 닿는 곳마다 이어지는 지난날 아르바이트의 추억과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채권추심 서류, 사채업자들의 예측 불가능한 독촉 방식과 그들을 따돌리기 위한 주인공의 절박한 위장술에는 빚 독촉을 피해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로 일관했던 작가의 한 시절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올해 나이 서른셋. 아르바이트라면 안 해 본 일이 없다. 하루에 세 번 취직하고 세 번 잘린 적도 있으니 이 정도면 알바 계의 고수. 그녀는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신용 불량자에다 개인 파산자다.

 

인주의 아르바이트 인생은 엄마의 사업 부도와 함께 시작됐다. 신용카드는커녕 한 달에 30만 원 이상은 써 본 적도 없건만 자고 일어나니 빚더미 위. 귀신같이 알고 직장으로 몰려드는 사채업자들 탓에 웬만한 일자리는 엄두도 못 내던 그녀는 아르바이트 인생, 즉 프리터 족이 되어 간다. 불행 중 다행으로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져 억울하게 상속받은 빚의 그늘에서 벗어나는가 싶던 찰나, 이상한 공문서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저는 현재 직장을 구하지 못한 취업준비생입니다. 최정현은 제가 얹혀살고 있는 친구 집에 압류를 하여 가구와 가전제품에 딱지를 붙였고, 또 친구에게 전화하여 돈을 갚으라고 괴롭히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나중에 취업이 된다고 해도 계속 괴롭힘을 당할 걸 생각하면 차라리 취업 준비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불안합니다. 이러한 저의 사정을 참작하시어서 귀 법원의 채권압류 및 집행취소 신청을 허락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62쪽)

 

빚이 대물림 되어 갈 길 바쁜 청춘의 발목을 잡는 세상. 작가는 쳇바퀴처럼 돌기만하는 아르바이트 인생과 법 관련 전문용어로 가득한-아직 빚 독촉에 시달리는 경험을 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머리 아픈-수많은 공문서의 기록을 통해 파산당한 청춘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장강명의 소설처럼 어려운 시절을 겪는 청춘을 등장인물로 설정하고 있지만, 세상을 대응하는 인물의 방식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장강명은 절망적 처지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일련의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김의경은 숨 막힐 정도로 절박한 청춘의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운명의 횡포에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의 의지가 사채업자의 빚 독촉보다 끈질기게 그려냈다. ‘표백 세대’는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무기력에 빠진 울분과 저항을 부각시켰다면 ‘파산 세대’는 맨몸으로 현실의 벽을 스스로 뚫고 가려는 분투의 의지가 돋보인다. 김의경의 당선 소감에서 언급된 표현대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은 운명에 저항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운명에 저항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파산 시대의 청춘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된다. 『청춘 파산』의 주인공 인주는 자신을 괴롭히는 빚쟁이들과 맞서기 위해서 혼자 채무, 파산과 관련된 법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회생절차’를 밟는다.

 

다만, 운명에 저항하는 인주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씁쓸한 뒷맛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에게 빚을 잔뜩 안긴 기성세대를 믿지 못한 채 혼자 회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주의 모습은 더욱 힘겨운 현실을 상기시켜 줄 뿐이다. 작가는 인주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청춘이 겪은 어두운 현실을 공유하는데 성공했으나 과연 이것을 작가의 의도대로 희망적인 위로 차원으로 독자들이 공감했는지 의문이다. 빚갚는데 신경 쓰다보면 연애며 결혼은 언제 할 수 있을까. 취업은 제대로 할 수 있을라나. ‘빚에 시달리더라도 같이 시달리면 좀 나을 거야’(365쪽)라는 위로를 받으면서 인주가 개인회생을 위한 진술서를 쓰는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결론을 보면서 앞으로 더 고생해야 하는 청춘의 가시밭길이 불현듯이 떠오른다. 

 

작가들은 심사평에서 『청춘 파산』은 ‘프리터의 삶은 힘겨운 현실’임을 상기시킨 대목이 좋다고 썼으나, 이미 힘겨운 현실을 다 겪어 본 젊은 독자 입장에서는 썩 좋아할 만한 대목은 아닐 것이다. 소설이 오랫동안 아파왔던 독자, 특히 오늘날의 청춘의 환부를 다시 찌른 격이다.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 거기에 불행한 우리들에게 위로의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등장했던 슬로건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등 우리 현실을 반영한 또 다른 청춘의 이름이 나왔으나 문제의식만 부각될 뿐이지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전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의 소설도 더 이상 청춘에게 어떠한 위로도,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래나 저래나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은 뭐하나 마음 편할 일 없고 아픈 상처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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