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언은 국어사전엔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실수로 잘못 말함, 또는 그 말”이요, 영어사전엔 “부적절한 말(an impropriety in speech) 혹은 혀의 미끌어짐(a slip of the tongue)”으로 풀이되어 있다. 정언(正言)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바른말을 함, 또는 그 말”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언보다는 실언을 헤아릴 수 없이 허다하게 하는 것을 보고 나 자신이 깜짝 놀란다. 그만큼 바른말하며 살아가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실은 나 역시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실언을 해서 곤혹을 치른 적이 꽤 있다.
바른말을 하려면 우선 양심이 정의롭게 서야 하고 그래야만 올바른 행동으로 귀결될 수 있다. ‘정언정행’이란 정(正)으로 ‘언행일치’이어야만 명분을 얻을 수 있으며 모든 길로의 소통이 가능한 법이다.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한 시원한 정직이다. 그것이 정도(正道)다.
그러나 실상, 현실을 놓고 볼 때 실언을 통한 자기 과오를 은근히 면하려고 한다. 영어로 ‘혀의 미끌어짐’이 아주 적절할 것이다. ‘혓바늘이 돋아서, 혀에 상처가 나서’ 등으로 핑계를 대면서 ‘말이 헛 나왔다, 미안하다’ 하면 실수에 따른 자신의 귀책사유치고는 빠져나갈 이유가 많다.
옛 선인들은 말을 함에 신중하게 말하고, 간략하게 말하고, 때에 맞게 말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말을 잘하고 못하고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행실에 맞게 말을 해 언행일치가 되도록 하는 것을 아주 중시했다. 자신의 행실은 엉망이면서 말만 뻔지르르하게 잘하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말을 늘어놓는 것을 못난 사람의 전형으로 보았다.
최근엔 실언을 넘어 망언을 일삼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착잡하기 그지없다. 특히 세월호 사건에서 개탄스러운 일은 몰지각한 사람들과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일부가 깊은 생각 없이, 아니 현상에 대한 부정적 해석으로만 무장하여 실수 차원을 넘어 망동과 망언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사고 초기에 한 망동꾼이 “해경이 민간 잠수부를 막았다”는 허위 사실 유포로 놀라게 한 것서부터 어느 청년의 ‘국민 정서 미개’ 발언이 또한 그러하다. 심지어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비난하는 발언을 페이스북에 게재하는 경솔한 행동을 저질렀다. 결국 문제의 교수는 문제의 글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고,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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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교수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문제의 글을 볼 수 없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발언 외에도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너무 비정상적인 글들이 많았다. 특히 가관인 것은 교수의 글에 대한 ‘페친’(페이스북에서 친구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댓글 반응이다. 문제의 글이 페이스북에 게재되었을 때 유가족을 비하하는 발언에 동조하는 내용의 댓글이 있을뿐더러 교수의 사과문에도 여전히 그의 발언을 옹호하는 페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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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언을 한 사람은 사과 한 마디 하면 책임을 질 수도 있지만, 그 실언의 내용에 동조하거나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지적을 하지 않은 주변 사람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친밀한 관계가 높은 상대방일수록 우리는 그 사람의 단점과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쉽지 않다. 괜히 상대방의 행동에 시시비비를 따지다가 한순간에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친밀한 진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잘못을 알려주고 바로잡아주는 것이 진정한 예의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논어』술이(述而)편에 노나라 임금에 대한 공자의 태도를 지적하는 무마기의 일화가 있다.
진나라의 사패(법을 관장하는 벼슬)가 물었다.
“(노나라 임금) 소공은 예를 아는 자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를 아는 자입니다.”
공자께서 물러나시자 (사패가) 무마기(공자보다 서른 살 연하의 제자)에게 예를 표하며 들어오게 하고는 말했다.
“나는 군자는 편을 가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군자도 편을 가릅니까? 소공은 오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같은 성이기 때문에 그녀를 오맹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임금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습니까?
무마기가 그 말을 알려주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운이 있구나. 만약 허물이 있어도 남이 그러한 점을 반드시 알려준다.”
陳司敗問. “昭公知禮乎.” 孔子曰 “知禮.”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 曰 “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君取於吳爲同姓, 謂之吳孟子. 君而知禮, 孰不知禮. 巫馬期以告.” 子曰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김원중 역, 145~146쪽)
오나라는 주왕조의 희성(姬姓) 중의 한 사람인 태백(泰伯)이 세운 나라로, 노나라와 함께 같은 희성의 나라였다. 진나라 사패가 공자를 비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소공이 같은 성의 오나라 여인과 결혼한 사실은 비난받을만한 일이지만 공자는 소공의 잘못은 말하지 않으면서 소공 편을 든다는 것이다. 후에 진사패가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사실을 듣고, 공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오히려 남이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다행이라 말하고 있다. 내나라 임금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던 자신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눈은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남의 눈에 티끌을 보지 말고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는 교훈의 말이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누구나 남의 허물이나 단점은 잘 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허물이나 단점은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에 이런 우화가 나온다. 두 사람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내려와 보니 한 사람은 얼굴에 검댕이 묻었고 한사람은 깨끗했다. 과연 누가 얼굴을 씻었을까? 답은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상대방 얼굴에 검댕이 묻은 것을 보고 자기 얼굴도 검댕이 묻었을 거라 여기고 씻었다.
하지만 검댕이 묻은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이 깨끗 하자 자기 얼굴도 검댕이 묻지 않았을 거라 여기고 얼굴을 씻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남의 얼굴에 묻은 검댕은 잘 보이지만 자기 얼굴에 묻은 검댕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남의 허물은 잘 보면서 자기 허물을 잘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허물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나 남의 허물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아주 야박한 속성을 지녔다. 시체말로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과 같다.
상대방의 허물이나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도 덕이 있는 사람으로서 누구와도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포용이 상대방의 허물을 용인하고 치부를 숨길 정도로 관대하게 대한다면 옳은 대인관계라고 할 수 없다.
상대방의 실언에 관대하고 묵인하는 잘못 또한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과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 혹은 유명인사의 실언에 지적하고 발끈한다면 자기 편 사람만 편드는 당동벌이(黨同伐異)에 가깝다. 공자는 그런 태도를 경계했다. 친하든 안 친하든 상대방의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으면 얼굴을 씻을 수 있도록 알려주거나 서로 닦아주면 좋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엄격하게 허물을 꾸짖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 발언 때문에 곤혹을 치른 문제의 교수는 자신의 사과문에 달린 페친의 위로와 응원의 댓글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교수가 깊이 반성하면 좋겠지만, 친구의 허물을 너무 관대하게 대하는 페친의 행동 때문에 괜한 자기위안을 할까봐 걱정된다. 그 교수는 자신을 지지하는 페친은 많겠지만, 그 중에 교수의 단점을 헤아리고 고쳐줄 수 있는 훌륭한 벗은 단 한 명도 없을 것 같다. 공자의 표현처럼 교수는 관계 운이 없다고 해야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