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4월 4일

 

어젯밤에 영화관에 갔다. 모두 전쟁 영화였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가 지중해 근처에서 폭격을 당하는 장면이 가장 볼만했다. 크고 뚱뚱한 사내가 그를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헤엄쳐 도망가다가 사살되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18쪽)

 

윈스턴은 자신의 일기에서 잔인한 장면이 넘치는 전쟁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오늘날 세상은 폭력이나 잔인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더욱 더 차고 넘친다. 기술 발달 덕분에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재앙이나 참혹한 전쟁도 TV와 인터넷 그리고 SNS을 통해 바로 알 수 있다. 그런 이미지가 워낙 홍수를 이루다 보니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장면조차 스펙터클한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그것이 시신경을 통하여 심장을 두들길 때 우리는 관음증적인 가학적 쾌감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남의 고통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틀림없이 윤리적 문제를 동반하는 일이지만, 때때로 그것은 자극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되어 쾌락의 썩은 내를 풍기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의 의미는 무색해진다.

 

 

 

 

케빈 카터  「수단의 굶주리는 소녀」  1993년

 

 

타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은 온갖 시각적 이미지는 윤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고통에 대한 공감마저도 잊게 만든다. 남아공 출신의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인간의 윤리적 본능인 공감을 사진 작품과 맞바꿨다. 그 결과, 셔터를 누른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케빈 카터는 명예와 죽음을 동시에 안고 말았다.

 

수단의 식량센터에서 보급을 받기 위해 걷다가 지쳐 쓰러진 소녀, 그 뒤로 독수리가 호시탐탐 때를 기다리던 순간에 카터는 셔터를 눌렀고 케빈 카터는 이 사진으로 1994년에 보도사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상의 기쁨도 잠시, 그 순간의 상황에 셔터를 누를 게 아니라 독수리를 쫓았어야 했다는 여론의 비난 포격을 맞아야 했다. 카터는 사진을 촬영하고 난 후 당장 독수리를 내쫓았다고 항변했지만, 그의 내면은 종잡을 수 없는 혼란과 고통 속으로 사로잡혔다.

 

케빈 카터의 죽음은 시각적 이미지 생산과 윤리적 의무 사이의 딜레마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사례로 회자된다. 하지만 케빈 카터가 겪은 딜레마는 비단 세상 속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몸담고 있는 사람들만의 경험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사진을 찍어 일상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우리 또한 그 딜레마를 피할 수 없으며 이를 무시한다면 심각한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사진출처: 위키트리 (2014년 5월 22일 기사)

 

 

여성 응급구조사는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의 환부 상태를 직접 사진을 찍는다. 의료인 동료들끼리 공유하면서 공부하는 차원으로 그 사진을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다. 과연 응급구조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그녀의 행동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사진을 찍고 공개했다면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찍은 사진 속 환자의 환부 상태는 미미한 정도가 아니다.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할 정도로 두 눈으로 직접 보기 힘든 끔찍한 상태다. 당연히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응급구조사는 페이스북 사진에 대한 비난이 일파만파 커지게 되자, 해당 병원에 사과문을 올렸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정상적인 사람도 차마 보기 힘든 환자의 환부를 많이 목격했다. 그러한 환경이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고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동료 응급구조사를 위해서, 그리고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공개 설정으로 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공부의 목적으로 사진을 찍었다하더라도 윤리에 어긋난 잘못된 행동이다.

 

사실 페이스북에는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고, 공유되고 있다. 일부러 ‘좋아요’ 수를 늘리기 위해서 자극적인 사진만 올리는 특정 페이스북 페이지도 있다. 영화배우 찰리 쉰이 우연히 페이스북에 접속하다가 신체의 일부가 절단된 사람의 사진을 보는 순간, ‘스너프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다. SNS에서 공유되는 끔찍하고 잔인한 사진들은 스너프 영화 못지않을 정도로 불쾌감을 느낄 정도다.

 

페이스북에서는 가끔 반려견이나 동물이 사람의 폭력에 의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은 사진이 오르기도 한다. 사진의 게시자는 동물학대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공개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합당한 목적을 위해 찍은 사진이라도 윤리적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상처 입은 동물을 얼른 동물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는 것이 우선이다. 결국 이러한 사진 또한 일시적인 구경거리로 전략하고 만다.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일이 아닌 탓에 안도하며 그것을 보고, 즐기고, 연민을 갖는다. 그걸로 끝이다.

 

그러나 그걸로 부족하다. 고통 속의 타인과 우리가 같은 지구상에 살고 있다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고통과 연결돼 있을지 모른다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잔혹한 이미지 속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세계를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구 저 편에서 누군가 전쟁이나 기아, 고문 등 부당한 폭력에 짓밟히고 있음을 전하는 뉴스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내가 당한 일이 아니므로. 희생자에 대한 연민이나 가해자를 향한 분노가 솟구치는 것도 잠시, 우리는 곧 잊는다.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우리는 남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눌 힘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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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중2병'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중2병이란 사춘기 청소년이 흔히 겪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자신은 남과 다를 뿐 아니라 우월하다는 사고방식,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행동을 한다. 청소년을 가리키는 '사춘기' 또는 '질풍노도'와 유사한 의미로도 볼 수 있으나 보통은 그들을 얕잡거나 비꼬아 이르는 말로 쓰인다. 북한의 김정은도 '중2'이 무서워 남침을 못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다. 심지어 중2는 그 누구도 다루기 힘들다는 '초딩'보다 무섭다고 한다.

 

건드리면 폭발할 듯 불안한 존재인 대한민국의 열다섯 살들. 우리 사회는 그들을 ‘중2병’이라는 사회병리적 현상의 굴레에 가두었다. 누구나 다 자신을 떠받들어 주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러한 말이 그들만의 유행어가 아니라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 잡았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8~1599년경

 

 

남보다 우월하다고 자뻑에 빠지는 모습은 흡사 자기애적 병리 현상인 나르시시즘과 유사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모의 소년 나르키소스에 어원을 두고 있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따르고 연모하는 이들에게 늘 냉담했으며 아무에게도 사랑을 돌려주지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마는데, 지하 세계에서도 스틱스 강가에서 수면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르키소스를 화가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는 점이다.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수면에 비친 환영을 현실보다도 더 생생하게 갈구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세계에 침잠한 나머지 타인이나 외부 세계에 무관심하기까지 한 이러한 태도는 후대에 와서 예술가의 초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술가들에게는 누구나 이러한 기질이 잠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렘브란트가 노년에 이르러 자화상에 매진한 데 대해서 일부 미술사가는 그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가 화가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에 보다 초점을 맞추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 자신의 초상화에 다름 아니다. 중2병처럼 자기애가 심각한 정신 장애로 악화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0대의 불안한 심리를 ‘중2병’이라 부르지만 그 시기는 감정 과잉을 거쳐 감정 조절과 배려심을 배우는 자연스런 뇌 발달 과정이다.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정서적인 변화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면 아이가 힘들어진다.

 

이미 많은 청소년의 사춘기가 어른들의 조급함으로 왜곡되고 있다. 시대와 어른을 닮아 청소년들도 점점 더 냉소적이고, 거칠어졌다. 아이들을 끝없는 경쟁사회로 내몰면서 아이들의 소리 없는 절규에 귀 기울여주지 않은 어른들에게 잘못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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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빼곡하게 쌓은 책 무더기 사이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할 때 그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특히 그 책이 대형서점에서도 팔지 않는 책이라면 더욱 뿌듯하다. 그럴 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척 가볍게 느껴진다. 집에 도착하면 책에 오랫동안 묻어있는 테이프 자국과 먼지를 말끔히 제거한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부분은 사포 조각으로 긁어낸다.

 

내가 태어난 연도에 나왔거나 이미 그 전부터 나온 책의 종이는 변색되기 쉽다. 게다가 헌책방 내부 상 눅눅한 습기로 인해 종이에 곰팡이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책을 보게 되면 내 방에 꽂혀 있는 책들은 과연 세월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뜬금없이 책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집에 보관된 책이라도 10년, 20년이 지날수록 책의 상태가 온전치 못할 것이다. 방의 습기 때문에 책을 햇볕에 건조시키면서 관리한다면 변색을 피할 수 있지만 꾸준하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책의 운명도 사람의 운명 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탄생, 성장, 성숙, 쇠퇴. 깔끔한 표지로 초판이 등장하고, 책의 반응이 높아지면 몇 부 더 찍어 낸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처럼 부수가 많고, 많이 팔린다. 그 책은 스테디셀러가 되어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반면 독자의 관심이 적은 책은 많이 찍어 봐야 10쇄를 넘기지만, 초판만 찍고 일찍 절판의 운명을 맞기도 한다. 무명 시절이 너무나도 긴 책 중에 갑작스러운 독자의 관심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인기는 한 순간이다. 책의 번역이 시원찮다거나 책이 대필이거나 표절로 만든 사실이 밝혀지면 절판될 수도 있다. 특히 책의 운명 주기 중에서 가장 불행한 상황이라면 출판사의 부도다. 아무리 인기 좋은 스테디셀러라도 자신을 만들어 준 출판사가 망하면 더 이상 책을 찍어낼 수 없다. 그나마 책의 운명 주기는 인간의 운명 주기와 비교해서 큰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죽음을 맞는 순간 끝이지만, 절판본도 독자의 관심을 받게 되는 시점을 맞이하면 다시 살아난다. 새로운 출판사, 새로운 표지 또는 새로운 편집자를 만나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책 한 권이 오래 살고(스테디셀러), 일찍 죽는(절판) 과정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요인 중에 독자의 영향력과 출판사의 부도는 제일 크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책이라도 독자의 관심이 없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절판되기 일쑤다. 출판사는 책의 번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자궁이 없으면 책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사라진다.

 

자궁이 상실된, 몇 권 안 되는 절판본 초판 혹은 후손이 향하는 최후의 장소는 헌책방이다. 조금은 슬픈 표현이지만 헌책방은 책의 공동무덤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헌책방 마니아는 먼지와 세월 속에 죽어가는 책을 찾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절판본의 가치를 알고 있는 헌책방 마니아는 그를 만나기 위해 먼지 쌓인 책의 지층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가끔 절판본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서점에서 몇 권 꽂혀 있기도 하다. 헌책방에 비해 발견 확률이 희박하지만 재고가 남을 때도 있다. 그 다음은 동네 서점.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경험상 동네 서점이 절판본이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단 동네 서점에서 헌책방에 책 찾듯이 하는 손님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형서점의 유통에 밀려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고 있는 상황에 장사가 워낙 안 되다보니 서점이 문제집 파는 문구점으로 사업을 전환하거나 서점과 겸업하기도 한다. 초중고생들은 문제집만 구입하지 그 곳에서 읽고 싶은 책을 살 일이 많지 않다. 책을 사려면 번화가에 위치한 대형서점에 찾아갈 뿐이다. 문구점인데도 대형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을 팔긴 한다. 재고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나름 베스트셀러 책은 문구점에 가면 꽂혀 있다.

 

동네 서점과 문구점이 헌책방보다 절판본을 발견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오늘 평소에 공부하던 독서실 근처에 위치한 문구점에서 절판본 몇 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운이 좋았다. 내가 사는 곳은 이제 동네 서점도 찾아보기 힘들다. 장사가 안 돼서 문을 닫거나 문구점으로 업종을 변경하는 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학교나 독서실 주변에 문구점이 많은 편인데 지우개를 사야해서 점심시간에 문구점 한 곳으로 가게 됐다.

 

단지 지우개만 사려고 문구점에 들렀는데 그 곳은 다른 문구점에 비해서 건물 평수가 넓었다. 한 쪽에 문구물품이 있고, 또 다른 한 쪽에는 문제집이 천장까지 잔뜩 꽂혀 있었다. 그런데 문제집이 꽂혀 있는 책장 옆에는 유독 텅 빈 부분이 있었다. 거기는 문제집보다는 서점에서 파는 책들이 수십 권 정도 꽂혀 있었다. 여기 문구점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궁금했다. 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텅텅 비어있는 책장은 손님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무척 비좁은 곳에 위치했다. 발밑에 꽂혀 있는 책을 확인하기 위해서 쪼그려 앉아야했는데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그래도 먼지가 잔뜩 쌓이기 쉬운 바닥에 놓인 헌책도 꼼꼼히 확인하는 버릇이 있어서 좁은 공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구점에 남아 있는 재고의 책들이 놀랍게도 출판된 지 좀 오래된 것들이었다. 여기 문구점에 오는 손님들도 구입하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이 대다수였다. 스테디셀러 몇 권 있었지만 헌책방에 있는 책처럼 새까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책이 꽂혀 있는 책장 근처에 한 발짝이라도 온 옮긴 손님은 과연 몇 명 있었을까. 혹시 그곳에 손길을 남긴 사람이 아마도 내가 처음일 것이다. 먼지가 얼마나 심했으면 책을 뺏다 꽂는데 손이 시커멓게 변했다.

 

 

 

 

 

* 종이와 마찬가지로 책 표지도 세월을 이길 수 없는가 보다.

종이가 변색되는 것처럼 책등 또한 변색되어서 책의 제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그 곳을 한 10분 동안 찬찬히 살펴본 끝에 뜻밖의 책을 발견했다. 절판된 김훈의『자전거 여행 2』(생각의나무, 2004년 초판)과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철학소설 3부작 『호르두발』 『유성』『평범한 인생』(리브로, 1998년 초판)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누림, 1998년)이다.

 

 

 

 

 

 

 

 

 

 

 

 

 

 

 

 

동네 서점도 아닌 문구점에서 김훈의 『자전거 여행 2』를 발견할 줄이야.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무려 10년 전에 나온 상태로 말이다. 알라딘 중고샵에서 한정판 양장본으로 된 『자전거 여행』 1권을 구입한 지 4개월 만이다. 드디어 소중한 짝을 찾게 됐다.

 

 

 

 

 

 

 

 

 

 

 

 

 

 

 

 

 

 

 

 

 

 

 

 

 

 

 


카렐 차페크의 3부작 소설 중에 『호르두발』 『유성』(‘별똥별’로 이름이 고쳐서 나옴)만이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사에서 복간되었다. 역자는 리브로판과 마찬가지로 같은 사람이다. 아직 리브로판과 지만지판을 읽어보지 않아서 리브로판 내용을 그대로 옮겼는지 아니면 번역을 새롭게 수정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3부작 중 마지막인 『평범한 인생』은 아직 복간되지 않았다. 이 책 또한 언젠가는 지만지에서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사실 리브로판 3부작을 구입할까 고민했다. 당시 책을 구입 가능한 비용을 고려한 것도 있지만, 3부작 중 두 권은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세 권을 지를까 말까 스스로 따져봤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지우개 하나 사러 문구점에 들렀는데 책 때문에 30분 정도 걸렸다) 김훈과 차페크의 책, 총 4권만 구입하기로 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는 범우사의 범우문고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누림출판사가 제일 먼저 나온 판본인데 역시 절판되었다. 그래서 굳이 누림판을 구입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지우개 하나에 책 네 권을 문구점에서 구입했다. 문구점 주인은 책을 사는 내 모습에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던데 내심 흐뭇했을 것이다. 문구점이 망할 때까지 절대로 팔리지 않을 책을 팔게 되었으니 주인 입장에서는 기분 좋을 수밖에. 만약에 영영 못 판다면 일부는 헌책방으로 가게 될 것이다. 결국 오늘은 나와 문구점 주인이 서로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동네 서점이나 문구점에 팔고 있는 책들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한 번 문구점에 가게 되면 책이 꽂혀 있는가 확인해야겠다. 또 다른 행운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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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2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페크 3부작 득템 부럽네요! 요즘 뒤늦게 차페크에 꽂혀서 차페크 책을 다 구하고 싶은데, 지만지 책은 왠지 사기 싫고 ㅠㅠ (책값 쓸데없이 비싸고, 가끔 보니 축약본도 많고... -_-) 암튼 부럽습니다;

cyrus 2017-01-25 10:50   좋아요 0 | URL
저도 잠자냥님처럼 차페크의 소설에 푹 빠진 적이 있었는데, 정작 3부작은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
 

 

 

 

1.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버려라. 어떤 책이든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한두 개로 모아 진다. 책의 메시지를 파악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보물 찾기 하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하라. 일단 과녁을 정한 후 활을 쏘면 , 어디로 쏴야 할지 모르고 무작정 덤빌 때보다 훨씬 덜 지루하다.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과감히 넘겼다가, 책의 핵심주제를 찾아낸 다음 다시 돌아와 읽으며 이해하라.

 

 

2. 저자와 대담하는 기분으로 읽어라.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를 묻고 그에 대한 저자의 답을 책 안에서 찾아가는 방식이다. 책을 읽을 때 한 손에 펜을 들고 책의 빈 공간에 내 생각을 적어 넣는다. ‘핵심 주장’, ‘좋은 사례’, ‘근거 부족’, ‘무엇무엇과 비교할 것’ 등, 저자가 건넨 이야기에 읽는 이 나름의 평가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책읽기를 저자와의 대담으로 여기는 순간, 독서는 지겨운 안구운동에서 흥미진진한 대뇌운동으로 전환한다.

 

 

3. 북 토크를 하듯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남들에게 들려주라. <코스모스>를 읽어 보니 이런 이야기더라, <통섭>은 어떤 함의를 가진 책이더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소감이나 책 속의 인상적 구절이 아닌 ‘자신만의 용어와 문장’으로 저자의 핵심논지와 적절한 사례를 요약할 것. 그 후에 더 생각할 거리를 발굴해 덧붙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책읽기의 끝은 적극적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다른 이에게 비판적으로 전수하는 것이다.

 

 

* 출처: 중앙일보 2014.5.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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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언은 국어사전엔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실수로 잘못 말함, 또는 그 말”이요, 영어사전엔 “부적절한 말(an impropriety in speech) 혹은 혀의 미끌어짐(a slip of the tongue)”으로 풀이되어 있다. 정언(正言)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바른말을 함, 또는 그 말”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언보다는 실언을 헤아릴 수 없이 허다하게 하는 것을 보고 나 자신이 깜짝 놀란다. 그만큼 바른말하며 살아가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실은 나 역시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실언을 해서 곤혹을 치른 적이 꽤 있다.

 

바른말을 하려면 우선 양심이 정의롭게 서야 하고 그래야만 올바른 행동으로 귀결될 수 있다. ‘정언정행’이란 정(正)으로 ‘언행일치’이어야만 명분을 얻을 수 있으며 모든 길로의 소통이 가능한 법이다.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한 시원한 정직이다. 그것이 정도(正道)다.

 

그러나 실상, 현실을 놓고 볼 때 실언을 통한 자기 과오를 은근히 면하려고 한다. 영어로 ‘혀의 미끌어짐’이 아주 적절할 것이다. ‘혓바늘이 돋아서, 혀에 상처가 나서’ 등으로 핑계를 대면서 ‘말이 헛 나왔다, 미안하다’ 하면 실수에 따른 자신의 귀책사유치고는 빠져나갈 이유가 많다.

 

옛 선인들은 말을 함에 신중하게 말하고, 간략하게 말하고, 때에 맞게 말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말을 잘하고 못하고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행실에 맞게 말을 해 언행일치가 되도록 하는 것을 아주 중시했다. 자신의 행실은 엉망이면서 말만 뻔지르르하게 잘하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말을 늘어놓는 것을 못난 사람의 전형으로 보았다.

 

최근엔 실언을 넘어 망언을 일삼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착잡하기 그지없다. 특히 세월호 사건에서 개탄스러운 일은 몰지각한 사람들과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일부가 깊은 생각 없이, 아니 현상에 대한 부정적 해석으로만 무장하여 실수 차원을 넘어 망동과 망언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사고 초기에 한 망동꾼이 “해경이 민간 잠수부를 막았다”는 허위 사실 유포로 놀라게 한 것서부터 어느 청년의 ‘국민 정서 미개’ 발언이 또한 그러하다. 심지어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비난하는 발언을 페이스북에 게재하는 경솔한 행동을 저질렀다. 결국 문제의 교수는 문제의 글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고,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현재 교수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문제의 글을 볼 수 없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발언 외에도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너무 비정상적인 글들이 많았다. 특히 가관인 것은 교수의 글에 대한 ‘페친’(페이스북에서 친구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댓글 반응이다. 문제의 글이 페이스북에 게재되었을 때 유가족을 비하하는 발언에 동조하는 내용의 댓글이 있을뿐더러 교수의 사과문에도 여전히 그의 발언을 옹호하는 페친이 있었다.

 

 

 

 

 

 

 

실언을 한 사람은 사과 한 마디 하면 책임을 질 수도 있지만, 그 실언의 내용에 동조하거나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지적을 하지 않은 주변 사람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친밀한 관계가 높은 상대방일수록 우리는 그 사람의 단점과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쉽지 않다. 괜히 상대방의 행동에 시시비비를 따지다가 한순간에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친밀한 진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잘못을 알려주고 바로잡아주는 것이 진정한 예의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논어』술이(述而)편에 노나라 임금에 대한 공자의 태도를 지적하는 무마기의 일화가 있다.

 

 

진나라의 사패(법을 관장하는 벼슬)가 물었다.

 

“(노나라 임금) 소공은 예를 아는 자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를 아는 자입니다.”

 

공자께서 물러나시자 (사패가) 무마기(공자보다 서른 살 연하의 제자)에게 예를 표하며 들어오게 하고는 말했다.

 

“나는 군자는 편을 가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군자도 편을 가릅니까? 소공은 오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같은 성이기 때문에 그녀를 오맹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임금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습니까?

 

무마기가 그 말을 알려주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운이 있구나. 만약 허물이 있어도 남이 그러한 점을 반드시 알려준다.”

 

 

陳司敗問. “昭公知禮乎.” 孔子曰 “知禮.”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 曰 “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君取於吳爲同姓, 謂之吳孟子. 君而知禮, 孰不知禮. 巫馬期以告.” 子曰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김원중 역, 145~146쪽)

 

 

오나라는 주왕조의 희성(姬姓) 중의 한 사람인 태백(泰伯)이 세운 나라로, 노나라와 함께 같은 희성의 나라였다. 진나라 사패가 공자를 비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소공이 같은 성의 오나라 여인과 결혼한 사실은 비난받을만한 일이지만 공자는 소공의 잘못은 말하지 않으면서 소공 편을 든다는 것이다. 후에 진사패가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사실을 듣고, 공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오히려 남이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다행이라 말하고 있다. 내나라 임금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던 자신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눈은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남의 눈에 티끌을 보지 말고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는 교훈의 말이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누구나 남의 허물이나 단점은 잘 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허물이나 단점은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에 이런 우화가 나온다. 두 사람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내려와 보니 한 사람은 얼굴에 검댕이 묻었고 한사람은 깨끗했다. 과연 누가 얼굴을 씻었을까? 답은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상대방 얼굴에 검댕이 묻은 것을 보고 자기 얼굴도 검댕이 묻었을 거라 여기고 씻었다.

 

하지만 검댕이 묻은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이 깨끗 하자 자기 얼굴도 검댕이 묻지 않았을 거라 여기고 얼굴을 씻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남의 얼굴에 묻은 검댕은 잘 보이지만 자기 얼굴에 묻은 검댕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남의 허물은 잘 보면서 자기 허물을 잘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허물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나 남의 허물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아주 야박한 속성을 지녔다. 시체말로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과 같다.

 

상대방의 허물이나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도 덕이 있는 사람으로서 누구와도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포용이 상대방의 허물을 용인하고 치부를 숨길 정도로 관대하게 대한다면 옳은 대인관계라고 할 수 없다.

 

상대방의 실언에 관대하고 묵인하는 잘못 또한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과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 혹은 유명인사의 실언에 지적하고 발끈한다면  자기 편 사람만 편드는 당동벌이(黨同伐異)에 가깝다. 공자는 그런 태도를 경계했다. 친하든 안 친하든 상대방의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으면 얼굴을 씻을 수 있도록 알려주거나 서로 닦아주면 좋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엄격하게 허물을 꾸짖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 발언 때문에 곤혹을 치른 문제의 교수는 자신의 사과문에 달린 페친의 위로와 응원의 댓글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교수가 깊이 반성하면 좋겠지만, 친구의 허물을 너무 관대하게 대하는 페친의 행동 때문에 괜한 자기위안을 할까봐 걱정된다. 그 교수는 자신을 지지하는 페친은 많겠지만, 그 중에 교수의 단점을 헤아리고 고쳐줄 수 있는 훌륭한 벗은 단 한 명도 없을 것 같다. 공자의 표현처럼 교수는 관계 운이 없다고 해야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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