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맬서스의 영혼은 지금도 배회하고 있다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구 증가에 대한 강한 경고와 함께 매우 부정적이고 어두운 예측으로 유명하다. 인구 증가에 따른 생활조건의 악화와 지구상의 한정된 자원으로 인해 국가 간의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 자’와 ‘없는 자’간의 차이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낙관적인 주장도 있다. 당시 인구 증가율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인간의 극복능력과 지적능력의 향상, 새로운 기술의 발달 등으로 언젠가는 사회가 공평해 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범죄도 없으며 질병도 없는 그리고 심지어는 전쟁도 없는 세상으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낙관적 전망이 비교적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세계는 이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볼 수 있다.세계경제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선진국들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와 산아제한에 따른 인구 감소가 새로운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UN은 1990년대 초 16억 명이던 세계 인구는 현재 60억 명을 넘었고 2050년에는 100억 명에 이를 전망이다. 의학의 발달과 생활환경의 향상 등으로 평균 연령이 높아져 노령화 추세가 확연한 반면 인구 증가율은 현 인구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운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젠 맞지 않는 것으로 굳어진 맬서스식 인구론이 아니더라도 ‘인구 폭발’은 많은 사람에게 악몽이었다. 산림 황폐화와 수질 오염 등 환경 파괴, 인명 경시, 도시화에 따른 빈민층의 증가와 범죄 만연을 포함해 수많은 인위적 재해의 근본 원인이 인구 증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인구가 많다는 것은 경제 발전의 주요 장애 요인일 뿐 아니라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도 불리함으로 작용한다. 비관론자들은 인구 100억 명을 넘기 이전에 엄청난 대재난이 발생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낙관론과 비관론 모두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논의의 초점은 지구의 ‘생물학적 수용능력’에 모아진다. 낙관론자들은 품종개량과 농지개간을 통한 과거의 눈부신 식량증산 경험을 예로 들면서 끊임없는 과학기술 발전은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이란 장밋빛 전망을 제시한다. 지속적인 기술개발이 미래 인구가 먹고 남길만한 식량증산을 가져올 것이란 예측이다. 지난 수십 년간 식량증산 분야에서 이룬 녹색혁명의 성과를 전망의 근거로 제시한다.

 

반면, 비관론자들은 지구의 부양 가능 인구수는 최대 90억∼100억 명 수준으로 본다. 지금 추세라면 언젠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에 도달하리라는 예상이 된다. 환경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비관론자들은 무분별한 개발에 따른 부작용과 과학기술의 한계로 지금의 두 배나 되는 미래 인구는 필연적으로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경작지 감소, 개간할 땅의 부족, 농토의 황폐화와 수자원의 고갈은 지구의 수용능력을 한계에 달하게 할 것이란 전망이다.

 

 

 

 Scene #2  100억 명 인구가 사는 지구의 위기  

 

인간의 삶은 무기물 자원과 에너지에 의존한다. 처음 인간은 식량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었다. 이후 물과 바람 그리고 동물의 에너지를 이용했다. 필요성이 떨어지면 점차 다른 자원으로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결국엔 화석연료를 이용하기에 이르렀고, 지구 온난화라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대규모 기근과 식량 부족은 사회 붕괴로까지 치닫고 있다.

 

특히 세계 도처에서 인구 증가에 따른 물 부족 현상은 큰 문제를 낳는다. 20세기의 국가 간 분쟁 원인이 석유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물로 인한 분쟁 시대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말이 예사롭지가 않다.

 

 

 

 

 

 

 

 

 

 

 

 

 

 

세계 인구의 약 20% 정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체 식수원을 찾지 못해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수자원 부족 현상이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매년 수백만 명이 제대로 된 안전 식수를 공급받지 못해 수인성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100억  명』은 쓴 대니 톨링은 인구 80억 명에 도달한 시점에서 지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은 식량, 광물, 석유가 아니라 ‘물’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생수 회사들이 지하수를 대량으로 뽑아낸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물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다. 미국 텍사스 주와 5대호 부근, 인도 남부의 플라치마다 마을이 대표 사례이다. 코카콜라사가 플라치마다 마을에서 지하 관정 여덟 개를 뚫어 지하수를 마구 퍼 올린 결과, 땅이 황폐해지면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논밭이 갈라지고, 푸른 잎의 야자수는 시들어가고, 마실 물은 부족하다. 주민들은 “코카콜라 공장이 날마다 100만ℓ나 되는 지하수를 훔쳐가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100만ℓ면 2만 명이 하루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양이다. 알래스카 빙하수를 선박에 실어 중국에 수출한다는 이야기나 에베레스트 만년설을 녹여 병에 담아 파는 것을 가벼운 이야깃거리로만 받아들일 일이 아닌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은 시장을 통해 물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돈이 없는 사람들이 목마름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 밖에도 100억 명 인구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우려되는 것은, 환경오염으로 인해 앞으로는 이런 이상 기후 현상이 빈발해지고 그 정도도 격화되리라는 점이다. 산업문명의 무절제한 사용에 대해 지구생태계가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후환경을 변화시키는 원인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태양의 흑점 활동 등의 자연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온실가스와 대기오염 등 인위적인 요인도 있다.

 

“인류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앞으로도 환경은 계속 변화할 것이다. 산 자의 기준이 장기적으로 실현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기후학자 휴버트 램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기준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유구한 인류 역사와 비교해 인간의 삶은 아주 짧다. 인간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가장 무시무시한 요인은 날씨다. 전쟁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을 날씨는 해낼 수 있다.

 

지구 곳곳에서 강추위와 폭설이 계속되다가 다시 따뜻해졌다. 우리나라는 봄과 가을도 아주 짧아졌다. 여름철에는 온난화 때문인지 찜통더위가 며칠째 계속된다. 세계 각지에 지진이 나타나고, 산불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최근 극단적인 기상 이변 횟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1970년대에 영국의 과학자 러브록은 가이아(Gaia) 이론을 주장했다. 가이아는 대지를 다스리는 그리스의 여신이다. 지구의 동물, 식물, 무생물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주장이다. 인간, 동물, 식물, 숲, 산, 강, 호수, 바다, 토양, 대기. 이 모두가 지구라는 한 생명체에 소속된 일부라는 얘기이다. 강과 호수가 혈액이라면 산이나 숲은 골격이나 관절인 셈이다. 그래서 인간 세계가 변하면 자연이나 기후도 같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세계가 빠르게 변화하는 만큼 지구도 거기에 맞춰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론이다.

 

사람이 더우면 땀을 흘리듯 극지의 빙하는 녹아내려 지구 온난화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폭설과 폭우가 내려 더워진 지구를 식히고 있다. 급격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 흐트러진 대기의 온도, 산소, 탄산가스의 구성을 유지한다. 바다의 유기질, 무기질, 염분의 농도를 유지하려 쓰나미를 일으킨다. 사람이 과로하면 비틀거리듯 지진이 일어나 지각의 균형을 유지한다.

 

대지의 여신이 일으키는 분노는 멈출 줄 모른다. 현재 지구 평균 기온은 2도 이상 증가하고 있는데 미래 기후변화에 관한 시나리오에 따르면 2080년 지구 온도는 약 4℃ 상승할 것이라 보고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현재의 2배, 고위도에서 온도는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고지대가 해수면 보다 평균온도 상승이 클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반적으로 온도가 상승하면 지표면이나 해수면에서 증발되는 수증기의 양이 많아진다. 이렇게 물 순환이 가속화되면 물이 부족한 지역은 점점 건조해지고 더워지며, 물이 많은 지역은 강수량이 더 많아져 가뭄과 홍수가 반복된다. 지구의 물 순환이 크게 달라진다면 물의 가용성이 제약을 받아 농업생산성이 크게 저하될 것이다.

 

 

 

 

 

 

 

 

 

 

 

 

 

 

 

 

오늘날 지구상 많은 국가에서는 식량생산 혹은 생활용수와 산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지하수를 무분별하게 이용하고 있다. 기후 변화를 통제 불가능한 상황 속에 식량 및 용수 확보를 위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100억  명, 어느 날』을 쓴 과학자 스티브 에모트는 앞으로 ‘기후 이민자’가 생길 것이며 흔하게 사용될 단어로 예측했다. 물, 식량 그리고 자원이 부족한 국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한정된 물, 식량, 자원을 둘러싸고 무력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Scene #3  자연과의 공존 없이는 인간도 생존할 수 없다

 

지금까지 100억 명 인구 시대에 관한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나오고 있으나 이에 관한 내용부터 시작해서 대안까지 전문가들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대니 톨링의 시선은 낙관적이다. 일단 맬서스식 인구론을 비판하고 있으며 책 제목과는 달리 100억 명이 동시에 살아갈 것이라는 예상에 회의적이다. 그는 ‘현실적 개혁주의자’에 속한다. 즉, 현실은 암울해도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집단적 해결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살기 좋은 세상이 우리가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에모트는 전 지구적 비상사태에서 벗어나는 방법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혁신적 기술 개발, 다음은 인류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에는 회의적이다. 두 번째 방법은 지금 당장 이뤄지기 어려운 것으로 본다.

 

나는 대니 톨링의 '현실적 개혁주의론'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올 수 있다. 가이아 이론대로라면 생명체들은 지구가 품은 무한한 자연의 일부로써의 존재 그 자체이며 그것으로 지구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피해가 있더라도 이 지구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이 뚜렷한 치료 없이도 조금씩 아물어 가는 것과 같이 자연 복원력을 보이며 스스로를 치유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발전은 생태계의 불균형을 이루어 심각한 생태계의 파괴와 인류의 자멸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따라 원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환경 친화적인 삶으로의 의식의 전환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환경 친화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인간과 동물의 공존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제도나 법 질서로 이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지구라는 공간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다른 생명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선행돼야 한다. 공존이란 바로 ‘생명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지금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건 인간 스스로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식물, 동물과 같은 다른 생명들 덕분에 인간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우월하기 때문에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명들을 착취해서 번성하고 있을 100억 명 인구 시대를 맞아 조금이라도 고민을 하고 그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는 게 옮은 지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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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에 나온 문학과지성사판은 품절)

 

 

빛바랜 카프카의 흑백사진을 바라다보면 짧은 인생을 살다간 그의 철학적 고뇌와 성격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고독하면서도 희망이 묻어 있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만 같은 그의 큰 눈망울에서 따스한 정이 느껴진다. 사실 카프카는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때문에 소심하고 외롭고 저항성이 부족한 청년으로 자랐다. 이러한 환경 속에 자란 카프카는 매사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한 마리의 까마귀예요. 한 마리의 카프카죠. (중략) 인간들은 나를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봐요. 아무튼 나는 위험한 새요, 도둑이요, 까마귀예요. 그러나 가상에 불과하죠. 실제로 나는 빛나는 물건에 대한 감각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번쩍이는 검은 날개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나는 재처럼 회색이에요. 돌들 사이로 사라지기를 동경하는 한 마리 까마귀예요.”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중에서, 문학과 지성사, 49쪽)

 

카프카란 체코 말로 까마귀라는 뜻이다. 카프카는 자신을 날개가 위축된 고독한 까마귀요, 위험한 존재로 스스로 규정했다. 결국 자신이 가장 무서운 고독인 것이다. 군중들 한가운데서 불안에 벌벌 떠는 존재. 선천적으로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인 데다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카프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평생 동안 자기 속에 갇혀 있는 또 다른 카프카와 끊임없이 자기 부정과 싸워야 했다. 카프카는 짧은 생애 동안 아주 격정적이고 강렬하게 살다가 까마귀처럼 파란 하늘로 재빠르게 날아갔다.

 

카프카가 고독한 까마귀라면 보들레르는 그야말로 고독한 알바트로스다. 알바트로스의 날갯짓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알바트로스에게 '신천옹'(信天翁)이라는 신선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신성시한다. 새 중의 새, 창공의 왕자. 큰 날개와 몸통 때문에 높은 공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새.

 

날아오르지 못한 알바트로스는 지상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새로 전락하게 된다. 도움닫기를 하지 않으면 날아오를 수 없는데다 바람을 타지 않으면 비행할 수도 없다. 어부들이 항해 중에 알바트로스를 발견하면 곧 태풍이 올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알바트로스는 거친 바다의 폭풍 속을 넘나들고, 그를 향해 총알을 날리는 사냥꾼을 우습게 생각한다. 그가 펼치는 하얀 날개는 순수함의 상징이었다. 보들레르는 이 알바트로스를 신비주의의 표상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창공의 왕자도 때론 뱃사람들에게 잡힐 때가 있었다.

 

 

 

 

 

 

 

 

 

 

 

 

 

흔히 뱃사람들이 재미 삼아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이 한가한 항해의 길동무는
깊은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를 따라간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
가엾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노처럼 옆구리에 질질 끄는구나.

 

날개 달린 이 나그네, 얼마나 서툴고 기가 죽었는가!
좀전만 해도 그렇게 멋있었던 것이, 어이 저리 우습고 흉한 꼴인가!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낸다!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射手)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
그 거창한 날개도 걷는 데 방해가 될 뿐.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들레르는 자신을 알바트로스에 비유했다. 그 또한 알바트로스처럼 폭풍 속을 넘나들고 싶었다. 폭풍은 시적 자유, 사상적 자유를 의미했다. 그러나 그의 시와 사상은 뱃사람들(지상의 무식한 대중)에 의해 이해받지 못하고 조롱당하고 말았다. 거대 알바트로스도 선원에게 잡힌 신세면 고역을 면치 못한다. 성치 못한 몸으로 거대 날개를 질질 끌어야 하고 선원들의 담뱃불에 부리 지짐을 당하기도 한다. 고매한 영혼인 알바트로스는 평범한 선원들 앞에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알바트로스의 운명을 보들레르는 시인인 자신의 운명으로 치환했겠는가. 그래서 그는 불행했으며 단 하나의 시집만 남기고 지상에서 사라졌다.

 

시인의 존재가 그런 게 아닐까. 늘 시를 쓰다 보니 뭔가 제가 속한 세계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하며 컸던 것 같다. 시인은 소수자라 할 수 있는데 소수자의 생각과 느낌으로 살다 보니까 아무래도 비극성을 늘 갖고 사는 것 같다. 어쩌면 보들레르는 카프카처럼 지상 생활의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시인은 언제나 사회의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고 연약해요. 때문에 시인은 지상 생활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느끼죠. 시인에게 시인의 노래는 개인적으로는 외침에 불과하죠. 예술가에게 예술은 고뇌예요. 이 고뇌를 통해서 예술가는 새로운 고뇌를 위해 자신을 해방하죠. 시인은 결코 거인이 아니고, 자신의 실존이라는 새장 속에 갇힌 약간 다양한 색깔을 지닌 새에 지나지 않아요.”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중에서, 문학과 지성사, 49쪽)

 

너무 남다르고 앞서가는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독을 감당할 줄 알았다. 지상에 유배된 카프카와 보들레르는 끝없는 야유와 모멸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날개가 위축된 프라하의 까마귀, 하늘을 날지 못하는 지상의 알바트로스가 느껴야 할 고독은 이해 받지 못한 불길한 예언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문학으로써 현실을 감내해 보려는 것, 그것이 문학의 위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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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는 주인공이 동물이면서 글이 짧고 읽는 재미가 있다. 또한 삶에 대한 교훈도 들어 있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는 장르이다. 이야기 속 동물은 사람처럼, 혹은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행동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서는 인간 세상을 풍자한 주제가 많다. 우화는 그래서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만큼 글은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문학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우화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는 이솝이지만, 쇼펜하우어, 카프카 등 늘 ‘어려운 이야기’만 했을 법한 이들도 우화를 지었다. 특히 톨스토이는 자국인 러시아뿐 아니라 인도, 아랍 등에 전해 내려오는 각종 우화들을 엮어 우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짧은 이야기 속에 인간에 대한 통찰력과 혜안, 풍자와 해학까지 녹아 들어있는 우화의 매력을 당대 석학들도 외면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밖에 라 퐁텐 우화, 끄르일로프 우화도 알려졌는데 이 두 사람은 세계 각지에 흩어진 상태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이솝 우화를 집대성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이솝 우화와 중복된 내용이 꽤 있다.

 

 

 

 

 

 

 

 

 

 

 

 

 

 

 

 

라 퐁텐은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고대 로마 문예에서 발견되는 감수성과 문학적 취향을 존중했다. 그래서 라 퐁텐 우화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문체가 특징이며 교훈을 강조하는 우화의 기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라 퐁텐 우화집은 총 12권 24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6권은 1668년에, 7~11권은 1687년, 마지막 12권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694년에 완성되었다. 이 정도 삶의 이력만 보면 라 퐁텐은 우화집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남의 집에서 빌붙어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생전 루이 14세의 은총을 받은 명사였고, 부유한 후원자들 덕분에 편안하게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어쩌면 12권으로 구성된 우화집이 탄생한 것도 그런 무위도식의 삶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묘비명은 라 퐁텐의 삶을 그대로 축약해서 보여준다.

 

장(드 라 퐁텐)은 그가 왔던 것처럼 가버렸다.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많은 재물을 하찮게 여겼다.
시간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잘 쓸 줄 알았다.
시간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실컷 잠자는 데,
나머지 절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썼으므로.

 

그를 지켜 본 친구나 후원자가 썼을법한 묘비명이다. 그들에 눈에는 라 퐁텐이 방탕하고 게으른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라 퐁텐은 시간을 잘 쓸 줄 알았다. 시간의 반은 분명 우화집을 정리하는데 썼을 테니까.

 

 

 

 

 

 

 

 

 

 

 

 

 

 

 

 

 

 

 

끄르일로프는 이솝, 라 퐁텐에 비하면 생소한 이름의 작가이다. 그러나 끄르일로프가 우화를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톨스토이의 우화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18세기 말 부패로 물들인 관료 사회 속에 점점 외면 받는 민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한 끄르일로프는 당시 러시아의 부조리한 삶을 우화에 반영시켰다. 총 9권 198편으로 구성된 우화집은 교훈을 강조하기보다는 사회 비판 성향이 더욱 강하다.

 

 

 

 

 

 

 

 

 

 

 

 

 

 

 

라 퐁텐, 끄르일로프 이전에도 이솝 원작으로 알려진 우화는 15세기 인쇄술이 발달되면서 여러 가지 판본으로 만들어져 더욱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때 삽화가 등장한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에서 당시 출판된 우화들은 다양한 삽화가 곁들여졌다. 섬세한 풍경 묘사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그린 동물 모습을 비롯해 거친 밑그림 수준의 그림이나, 장식적 기교를 바탕으로 맵시 있게 그린 작품도 있다.

 

 

 

 

 

 

 

 

 

 

 

 

 

 

 

 

 

 

 

 

 

 

 

 

 

 

 

 

 

유명한 화가들도 우화 삽화 제작에 참여했는데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이 귀스타브 도레와 마르크 샤갈, 그랑빌이 그린 것이다. 귀스타브 도레는 라 퐁텐 우화 이외에도 『신곡』『돈 키호테』『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등 수많은 문학가들의 작품에 삽화를 제작해 명성을 얻었다. 샤갈은 1926~1927년에 라 퐁텐 우화를 소재로 100점의 구아슈 작품을 제작했는데 현재 전시되어 소개된 것은 불과 43점에 불과하다. 나머지 작품은 세계 대전을 겪는 과정에서 소실되거나 행방이 묘연하다.

 

 

 

 

 

황금부엉이 출판사에서 2권으로 나온 라 퐁텐 우화집은 도레의 삽화를 실었다. 시공사 라 퐁텐 우화집의 삽화는 구제라는 판화가가 1834년에 그린 것이다. 샤갈의 삽화를 볼 수 있는 라 퐁텐 우화(출판사는 지엔씨미디어)는 품절되었다.

 

 

 

 

 

(위) 구제의 삽화 / (아래) 도레의 삽화

 

 

이솝 우화라면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바로 ‘개미와 베짱이’다. 이 이야기 덕분에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으로, 베짱이는 무위도식을 대표하는 곤충으로 이미지가 굳혀졌다. 그런데 원전은 베짱이가 아니라 매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솝 우화가 전국 곳곳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진행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이 구술자에 의해서 달라진다. 매미에서 베짱이로 언제 탈바꿈했는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다.

 

1834년에 나온 라 퐁텐 우화에서 ‘매미와 개미’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구제의 삽화는 매미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베짱이(얼핏 보면 메뚜기처럼 보인다)를 그려 넣었다. 도레의 삽화는 아예 베짱이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도레가 그린 ‘개미와 베짱이’ 삽화는 싸늘한 느낌이 감돈다. 베짱이는 개미에게 먹이를 달라고 애절하게 구걸한다기보다는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눈밭 위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듯하다. 

 

도레와 구제의 삽화는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나 곤충의 형태를 세밀하게 묘사한 반면 샤갈은 화려한 색채와 과장된 형태로 그렸다. 그래서 샤갈의 라 퐁텐 우화집이 출판되었을 당시만 해도 일부 비평가들은 고전주의적이면서도 교훈을 강조하는 우화 형식에 어울리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 당시만 해도 텍스트와 삽화의 연관성을 중요시했으며 도레와 구제 또한 우화의 특성을 놓치지 않았다. ‘읽기’와 ‘보기’가 동시에 가능했다. 그러나 샤갈의 삽화는 ‘읽기’보다는 ‘보기’에 초점을 맞췄다. 그림은 교훈을 강조시키는 우화의 결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특정 장면을 부각시켰다. 눈으로 읽는 우화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우화로 변용시킨 것이다. 그래서 샤갈의 삽화는 텍스트만 떼어 놓고 보면 한 편의 멋진 그림이 된다.

 

 

 

 

 

 

(위) 구제의 삽화 / (아래) 샤갈의 삽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삽화가 ‘여자가 된 암고양이’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암고양이를 애지중지하게 키우던 남자는 그것의 매력에 사로잡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남자는 신에게 암고양이가 여자로 변신하기를 간절히 기도를 올렸는데 소원대로 이루어졌다. 고양이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여자로 변했다. 여자가 된 암고양이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처럼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와 고양이 여인은 잠결에 생쥐가 돗자리를 갉아먹는 소리를 들었다. 생쥐가 돌아다니는 것을 본 고양이 여인은 침대에 나와 바닥에 공격 자세를 취했다. 고양이가 생쥐를 공격하기 전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말이다. 아뿔사! 신은 실수했다. 몸은 변했으나 생쥐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양이의 습성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몸에 밴 천성이나 습관을 강조하고 있다. 구제는 이야기의 진행 과정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삽화를 그렸다. 생쥐를 잡으려는 고양이 여인과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는 남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샤갈은 여자로 변신한 고양이의 존재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고양이 얼굴을 한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샤갈의 고양이 여인은 탁자에 앉아 팔을 기댄 채 요염한 눈빛으로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강렬한 붉은 색과 남색으로 그려진 고양이 여인의 치마는 숨기지 못한 암고양이의 야생적인 본능을 돋보이게 만든다.

 

 

 

 

 

외모의 결점을 외면하고 좋은 모습만 바라보려는 나르시시즘을 비판하는 ‘남자와 그의 모습’에서 샤갈은 물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르키소스의 익숙한 자세를 그대로 차용했다. 나르시스트의 얼굴은 누런 빛깔에 흉하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전설 속에 나오는 괴물’과 같은 모습이다.

 

마지막에 소개할 샤갈의 삽화는 ‘개미와 베짱이’ 다음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우화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과연 어떤 우화를 묘사했는지 한 번 맞춰보시라.

 

 

 

 

 

우화는 어린이용 이야기가 아니다. 세월이 흘러도 바라지 않는 해학과 풍자는 어른 세계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도덕적 감화를 위한 우화의 시대는 지났다. 우화집의 삽화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기도 한다. 여러 양식과 분위기의 삽화를 보면 이솝 우화가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되고 표현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없는 우화는 허전해 보인다. 그런 황량하기 쉬운 짧은 글에 활력을 불어 넣는 것이 바로 삽화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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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어의 지느러미는 작다. 그래서 적이 다가오면 빨리 헤엄쳐서 도망칠 수 없다. 그 대신 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몸을 서너 배로 부풀린다. 그래도 적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몸에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맹독 성분의 물질을 낸다. 복어의 독은 자기방어를 위한 생존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어의 독이 강할수록 맛이 좋다. 그런 위험천만한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과 맞먹는 맛”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이다.

 

고독도 마찬가지다. 이제 고독은 외로움과 쓸쓸함의 대명사가 아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수동적 자기방어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또는 자신, 더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고독함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고독함을 느낄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스마트폰에 집중하면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혼자 고독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처럼 우리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적당한 양의 독은 약이 되지만 그 양이 지나치면 ‘중독’이 된다. 이것은 아름다운 고독이 아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전부를 독에 던지게 되면 병적인 집착이 되어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독 안에 든 쥐, 아니 고독 안에 든 은둔자인 것이다. 고독에 잘못 중독되면 자신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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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6-27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글쓰기를 하시네요 ㅎ
잘 지내시죠? 고독에 대한 것 왠지 저에게도 참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갑니다 ㅠ

cyrus 2014-06-27 12:41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루쉰님. 저는 평소대로 생각날 때마다 글을 쓰는데요. 엄청난 일은 아닙니다. ㅎㅎㅎ
 

 

고전. 자칫하면 고대의 책,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책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래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이 좋기 때문에 장구한 세월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좋게 평가되어 읽혀지는 작품이다. 고전에서 새로운 가치와 현재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발견하기 때문에 늘 고전을 펼쳐든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고전 읽기를 권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전은 ‘어른들조차 잘 읽지 않고 그저 이름만 아는 책’이랄 수 있다. 이런 실정인데도 청소년들에게는 꼭 읽어야 한다는 ‘지시’만 반복된다. 문제는 청소년들이 읽고 싶어도 고전을 읽기가 쉽지 않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펴낸 고전을 찾아볼 수 없고, 성인독자를 위한 번역본들이 대부분 성인들에게도 만만찮은 분량과 내용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전의 심오한 내용을 교과서에 언급된 한두 줄만으로 익히고 넘어가게 된다.

 

대입 논술고사에서 고전 관련 제시문이 나오는데 교양의 폭과 생각의 깊이를 가늠하는 데는 고전 지문이 가장 적합한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와는 연관성이 떨어진다. 대입 논술은 읽기 평가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독해능력과 지적 지구력을 요구한다. 교양을 쌓기 위해서 고전 읽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고전을 읽도록 만든다. 단기간에 논술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입문서에 의지하게 되는데 입문서와 요약서는 종종 혼동된다. 고전 요약본들은 군살만 찌우는 패스트푸드와 같다. 이런 책들로는 논술에 별 도움 안 되는 단편 지식만을 얻을 뿐이다. 제대로 된 입문서를 읽던가 아니면 고전을 직접 읽는 방법 밖에 없다.

 

대학교나 교육단체에서 고전 도서목록을 만들어 공개한다. 그런데 청소년들이 고전에 대한 호기심을 북돋아주기 위한 독서용이라기보다는 입시대비용 느낌이 강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입시위주 교육이 고전 읽기를 유도하는데 적잖이 방해가 된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책보다는 수능 문제집과 교과서에 익숙하다. 게다가 전자 매체의 범람은 독서를 멀리하게 만든다. 이렇듯 나름 많은 시도를 하고 있으나 고전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2015년부터 고등학교에 ‘고전’ 과목이 신설된다. 청소년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고전을 아예 교과목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고전을 공부를 한다? 고전을 읽는 행위를 넘어서 사고력을 높이는데 중점을 맞추는 의도가 있겠으나 읽어야 할 고전을 공부하는 과목으로 변화를 준 제도가 과연 내년에 고등학생이 될 아이들이 만족스러워할지 본격적으로 도입한 이후에 지켜봐야할 것 같다. 고전 읽기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높이면 고전 과목 도입이 성공했다고 본다. 다만 고착화된 성적과 평가 위주의 교육 방식을 답습한다면 고전은 입시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고전의 본래 의미를 더욱 퇴색시킬 수 있는 단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고전 과목 신설 발표 이후에 창비에서 『고전은 나의 힘』 시리즈를 출간했다. 한 세트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회 읽기’ 29편, ‘역사 읽기’ 24편, ‘철학 읽기’ 28편 등으로 총 81편의 고전을 수록했다. 내년에 고등학생이 될 청소년이 읽어야 할 고전 작품으로 선별되어 있다. 세 권에 수록된 고전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사회 읽기

 

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슬픈 열대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학교와 계급 재생산 - 폴 윌리스
나 홀로 볼링 - 로버트 D. 퍼트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 조지 리처
진보와 빈곤 - 헨리 조지
유한계급론 - 소스타인 베블런
경제학-철학 수고 - 카를 마르크스
아테네 전사자를 위한 추도 연설 - 페리클레스
군주론 - 니콜로 마키아벨리
사회 계약론 - 장자크 루소
통치론 - 존 로크
여권의 옹호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나는 고발한다 - 에밀 졸라
자살론 - 에밀 뒤르켐
고독한 군중 - 데이비드 리스먼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성 정치학 - 케이트 밀렛
상상의 공동체 - 베니딕트 앤더슨
사회학적 상상력 - C. 라이트 밀스
위험 사회 - 울리히 벡
권력 이동 - 앨빈 토플러
자유로서의 발전 - 아마티아 센
작은 것이 아름답다 - E. F. 슈마허
링크 - A. L. 바라바시

 


* 역사 읽기

 

라쇼몽.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역사. 헤로도토스
역사 철학 강의. 게오르크 헤겔
역사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H. 카
사기. 사마천
삼국유사. 일연
로마 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에마뉘엘 J. 시에예스
상식. 토머스 페인
제국의 시대. 에릭 홉스봄
제국주의론. 존 A. 홉슨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
조선 혁명 선언. 신채호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W. 사이드
블랙 아테나. 마틴 버널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B. 비숍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제임스 M. 블로트
고양이 대학살. 로버트 단턴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나탈리 Z. 데이비스
역사 앞에서. 김성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키스 젱킨스

 


* 철학 읽기

 

 유토피아 - 토머스 모어
 맹자 - 맹자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좋은 삶 - 에피쿠로스
 불법? 자살이 위법인가 - 버트런드 러셀
 소크라테스의 변명 - 플라톤
 노년에 관하여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노년 - 시몬 드 보부아르
 방법 서설 - 르네 데카르트
 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 장폴 사르트르
 성리자의 - 진순
 논어 - 공자
 리바이어던 - 토머스 홉스
 사회 계약론 - 장자크 루소
 공리의 원칙에 대하여 - 제러미 벤담
 맹자 - 맹자
 도덕경 - 노자
 역사 철학 강의 - 헤겔
 전론: 다 같이 잘사는 길 - 정약용
 순자 - 순자
 통치론 - 존 로크
 공산당 선언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향연 - 플라톤
 도덕 감정론 - 애덤 스미스
 삶의 괴로움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정념에 관하여 - 데이비드 흄
 사단 칠정을 논함 - 이황

 


책 내용 구성으로 보면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고전을 쉽게 설명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돋보인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고전 작품을 직접 읽고 엮었다. 그리고 작품의 발췌분량을 논술고사의 지문보다 호흡을 길게 해 글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태클을 걸자면,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 ‘고전’의 범주에 넣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러운 것도 있다. ‘사회 읽기 편’ 수록된 작품 목록을 보면 50년 전에 출판된 것도 있고, 거의 최근에 나온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면 레비스트로스, 마빈 해리스, 로버트 퍼트넘, 울리히 벡, 앨빈 토플러 등이 있다. 여기서 제일 최근에 나온 책의 작가는 장 지글러다. ‘오래된 책’이라는 고전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을 추천하고 소개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고전의 범주를 크게 넓힌다면 오히려 학생들의 혼란을 가중할 수 있다.

 

 

 

 

 

 

 

 

 

 

 

 

 

 

 

 

고전의 범주를 확대해버리는 경향은 예전에 대학교나 교육기관 추천 고전 목록이 나올 때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독으로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는 오히려 그런 경향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다카시가 생각하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고전이란 적어도 500년에서 1000년 정도의 시간 속에 검증을 받은 작품을 말한다. 여기서 다카시가 언급한 연도 횟수는 단순히 오래된 출판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널리 읽혀지고 많은 전문가나 지식인들에게 독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책을 말한다. 즉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층을 유지한 책이야말로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점이다.

 

레비스트로스나 장 지글러의 책은 지금으로서는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으나 다음 미래 세대의 시간까지 널리 읽혀지고 검증받을 수 있을지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의외로 책의 생명 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최고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전문가로부터 인정받은 책은 스테디셀러가 되지만, 우리가 죽고 난 뒤인 100년, 1000년 뒤에 그 명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먼 미래의 일이라서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나 토머스 페인의 『상식』 같은 책은 각각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이 발발하던 시기에 인기를 얻은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을 완독하는 독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읽겠지만, 특별한 목적이 아니면 우리는 이 책을 읽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권의 책을 생소하게 여기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고 말하기에는 의미가 혼란스러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독서할 가치가 높은 책이 고전이라고 했다.

 

제 아무리 유명한 사상가들이 쓴 책도 안심할 수 없다.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어도 점점 읽으려는 독자층이 적어진다면 2100년 고전 목록에 제외될 수 있다.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철학이나 고등학교 윤리에서 언급되는 중요한 사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리주의를 교과서에서 읽고 배울 뿐이지 사상의 정수가 담겨진 원전을 읽지 않는다.

 

다카시는 고전을 단순히 ‘꼭 읽어야 할 책’의 의미가 아니라 역사가와 평론가들만을 위한 책과 시대를 초월하여 일반인들이 읽은 책 그리고 역사책에 제목만 남아 있고 평론가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읽지 않는 책으로 구별되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나는 그의 예측에 동의한다. 사실 세상에 나오는 책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세상은 전문가만 읽는 책과 전문가, 일반인들이 읽는 책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리가 고전 읽기를 어렵게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고전이 ‘지식인들로부터 인정받은 책’ 혹은 ‘지식인들만 즐겨 읽는 책’이라는 일종의 엘리트 문화적 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식인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도서목록을 만들지만, 그 지식의 범위라는 것이 독자에게는 광대한 크기의 대륙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일반 독자는 ‘고전’이라는 지적 대륙에 발을 딛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기피하는 것이다.

 

다카시는 고전 읽기에만 충실하기보다는 최신 과학 정보를 소개한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너무 옛 것만 고집해도 그리 좋다고 볼 수 없다. 자고 나면 너무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 최신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 고전 도서목록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전 읽기만이 독서의 전부가 아니다. 추천 도서, 권장 도서, 필독 독서에 연령별, 수준별, 교과별 등등의 수식어가 붙은 고전 도서목록은 책을 읽어야 할 아이들을 옥죄게 할 수 있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고전이 ‘모두가 읽었으면 하지만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책’이 될 것이다. 고전은 ‘모두가 읽는 책’이 아니라 ‘읽고 싶어지는 책’이 되어야 한다. 즉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먼저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책이 진짜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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