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첫 번째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에 ‘왜 그러는 거니, 얘야?’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혹시 카버의 소설을 읽어 본 독자 분들께서는 이 글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무척 궁금하다. 만약에 내가 독서토론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면, 독서토론을 위한 지정도서로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아무래도 카버의 소설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소설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 싶다. 특히 내가 여기서 소개하려는 ‘왜 그러는 거니, 얘야?’ 같은 글은.

 

‘왜 그러는 거니, 얘야?’는 서간체 형식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외동아들을 둔 어머니가 미지의 인물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 내용은 어머니의 아들에 대해서 묻는 건데 어머니가 답장을 쓰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답장에 아들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다. 과거를 회상하듯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면서까지 아들이 자라면서 겪은 경험들을 어머니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카버의 소설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독자는 다음 소개되는 줄거리를 읽지 마세요)

 

 

그런데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특이하다. 어머니는 아들을 두려워한다. 아들은 평소 착한 성격이지만, 가끔 충동적으로 감정을 폭발하거나 거짓말을 서슴없이 일삼는 행동을 한다. 아들이 열다섯 살쯤 되었을 때, 자신의 집에 기르는 고양이를 끔찍한 방법으로 죽인 적이 있었다. 그 장면을 남편이 목격했지만 어머니는 믿지 않았다. 아들이 가족처럼 여기던 고양이를 끔찍하게 죽일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은 미심쩍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처음으로 일을 하게 되어, 월급을 받았는데 어머니에게 80달러를 받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자신보다 돈을 많이 버는 아들의 모습을 기특하게 여겼으나, 이 말이 ‘뻥’이었음을 알게 된다. 빨래를 하다가 아들의 주머니 속에 28달러짜리 급료 수표를 발견했다.

 

아들은 학교 성적이 우수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그러나 점점 밖으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아졌고, 어머니가 밖에 나가서 무엇을 했냐고 물어봐도 아들은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일도 아니라 듯이 대답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심지어 아들은 자신이 구입한 엽총과 사냥칼을 자기 차의 트렁크에 넣기도 했다. 도대체 저런 위험한 물건을 구입해서 차에 보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아들이 친구와 사냥을 하고 난 뒤에 다음 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아들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살펴봤다. 그 곳에서 진흙이 잔뜩 묻은 아들의 신발을 발견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차 트렁크 속에 피가 묻힌 채 둘둘 말려진 셔츠도 발견했다. 지금까지 이 모습을 쭉 지켜본 아들은 어머니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코피가 심하게 나서 묻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낯설게 느껴져만 갔다. 한 번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 마실 건지 물어보려고 아들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들은 무엇을 숨기려다가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어 크게 놀란 사람처럼 서랍 하나를 '꽝‘하고 닫으면서 어머니에게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나가요, 엄마가 엿보는 데 진절머리가 나요!”

 

갑작스러운 아들의 분노에 어머니는 무척 속상했다. 아들이 아닌 서로 남남처럼 지내는 하숙인처럼 취급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은 어젯밤의 분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 한동안 밖에 나갔다가 들어온 아들이 식사를 준비했다. 어젯밤에 소리를 지르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용기를 내어 아들에게 다가가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할 것을 요구했다. 그동안 밖에 나가면 무엇을 했으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러는 거니, 얘야?”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쳐다보다가 침묵했던 입을 열었다. “무릎을 꿇어요. 무릎을 꿇으라구요. 그게 첫째 이유예요.”

 

어머니는 아들의 대답에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갔다. 아들은 그 날 밤 집을 떠났다. 그 이후로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모자(母子)가 아니라 남남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소원해졌지만, 아들은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수한 성적과 최우수 졸업논문으로 학교를 졸업했고, 해병대를 제대하고 난 뒤에 정치에 도전했다. 아들은 텔레비전과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도 했다.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아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그의 주소를 알아내 몇 달에 한 번씩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어머니의 걱정과 두려움은 더욱 쌓여만 갔다. 결국, 어머니는 이름과 전화번호부를 바꾸면서까지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로 어머니는 누군가로부터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편지의 말미에 늙은 어머니는 자신이 이 나라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어머니이지만 두렵다고 밝혔다. 그리고 편지를 보내는 미지의 인물에게 어떻게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냈는지 궁금하다면서 물어보면서 소설은 끝난다.

 

“당신이 어떻게 제 이름과 주소를 알아냈는지 묻고 싶군요. 아무도 모르기를 기도해왔는데 말입니다. 왜 그러셨죠? 제발 좀 알려주세요.  -당신의 충실한 벗 드림” (292쪽)

 

카버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그들은 평온하고 행복하기보다는 항상 불안과 두려움을 달고 산다. 역시 ‘왜 그러는 거니, 얘야?’에 나오는 어머니의 삶은 불안하다. 아들 또한 평범하지 않다. 아들은 자신을 의심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어머니가 불편하다. 평범했던 모자 관계는 사소한 의심과 갈등으로 점점 어긋나기 시작하다가 아들로부터 진실한 대답을 원했던 어머니의 요구로 인해 위태로웠던 그들의 관계가 무너져버린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원래대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신의 감정이 깊어졌다. 아들을 그리워하면서도 그의 이중적인 면을 두려워하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하소연이 더욱 처량하게 느껴진다.

 

‘왜 그러는 거니, 얘야?’는 훌륭한 아들을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을 그린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어 보면 독자는 어머니처럼 아들의 행동을 의심하게 된다. 단일한 구성에,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최소화시키는 카버의 글쓰기는 등장인물이나 소설의 결말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켜주고, 여기에 독자의 다양한 해석을 나오게 만든다. 

 

 

 

 

 

 

 

 

 

 

 

 

 

 

 


일단 눈치가 밝은 독자라면 이 소설에 나오는 아들이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코패스의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고 일상생활도 잘해 가족조차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사소한 충동으로 자제력을 잃게 되면 잔인하고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른다. 또 다른 특징은 자기가 한 잔혹한 행위나 거짓말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충동적이고 무책임하며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한다.

 

아들이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죽이고 난 후에 드러나는 행동은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에 가깝다. 『진단명 사이코패스』의 저자 로버트 헤어는 사이코패스가 유년기부터 끊임없는 거짓말과 방화, 동물 학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또 자기합리화에 능숙하다. 고양이가 죽은 사실을 어머니에게 듣게 된 아들은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고양이가 죽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날 저녁 제가 트루디(죽은 고양이의 이름)에 대한 얘기를 하자 그애는 놀라고 충격을 받은 것처럼 굴었고, 우리가 현상금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애는 뭔가 타자기로 치고는 그걸 학교에 게시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날 밤 자기 방으로 가면서 그애는 엄마, 그 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트루디는 늙었어요. 고양이 나이로는 예순다섯이나 일흔쯤이었으니까 오래 산 거예요. 라고 말하더군요.” (284~285쪽)

 

이 소설의 또 다른 의문점. 아들의 어머니를 감시하고, 어머니의 집 주소를 알고 편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아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은 이름과 집 주소가 바뀐 어머니의 안부가 궁금해서 감시한 것은 아니다. 주지사가 되어서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은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니의 존재가 껄끄러울 것이다. 어머니가 공개석상에서 주지사의 어머니라고 밝히는 순간, 아들의 차 트렁크 안에 발견한 피 묻은 셔츠의 비밀 또한 공개될 수도 있다. 아들은 과거에 연루된 살인 사건이 내막이 한 치라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의심을 막아야 한다. 아마도 아들은 어머니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동안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의중을 떠보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과거에 있었던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고 꺼림칙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잊지 않고 있다면, 감시자에게 청부살인을 시켰을지도 모른다. 즉, 어머니의 답장은 아들이 계획한 무시무시한 살인의 함정일 수도 있다.

 

소설의 해석이 너무 상상력이 지나친 것도 있지만, 이 정도 범행을 충분히 생각해볼 가능성이 있다. 범죄자라면 자신의 범죄 행위를 목격한 증인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어머니는 언젠가 자신도 아들에게 살해당할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만약에 아들이 무릎을 꿇으라고 말했을 때 방으로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운명을 어떻게 되었을까? 살인자 또는 사기꾼이 된 아들을 잉태하고 키운 어머니로서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다. 아들의 하수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면서 어머니는 고립되어 간다. 아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의 마음은 애가 탄다. “왜 그러는 거니, 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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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에는 항상 권력관계가 존재해 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힘없고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피해자라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 권력관계에서 성적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피해자는 법적 권리를 보장받으며 가해자는 처벌된다’는 평범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 유명 자기계발서를 낸 ‘샘앤파커스’가 수습사원을 성추행한 일로 시작한 상무를 복직시킨 결정은 여전히 직장 내 여성노동자들이 성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문제의 상무는 업무력 테스트를 빙자해 정규직 전환을 앞둔 수습사원들에게 술자리를 요구했고, 심지어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려가 옷 벗을 것을 요구하면서 성추행을 저질렀다.

 

갑을관계의 부당성이 성범죄 영역에서 드러나는 것이 직장 내 성추행, 성폭행이다. 비정규직 여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이유는 지위 관계가 전제되는 직장의 특성상 갑과 을이 존재하고, 이들이 ‘을’이기 때문이다. 작년 온 나라를 들끓게 하였던 ‘윤창중 사태’를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직장에서 남성 상사들이 여성인 부하 직원들을 술을 핑계로 괴롭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국의 풍토에도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라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비정규직’과 ‘성범죄’는 어떠한 고용 구조와 환경에서 발생하느냐에 따라 해당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큰 차이가 있다. 비정규직은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차별적 조건에서 일해야 한다. 대개 이들에겐 노조라는 울타리가 없어서 부당한 일이 생겨도 호소할 곳이 없다.

 

직장 내의 갑은 비정규직의 ‘불안’을 볼모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들은 승진 혹은 정규적 전환 조건이라는 미끼를 내세워 부하 여직원들의 옷을 벗게 만든다. 그런데도 기업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눈 감아버린다. 정규직은 법에 호소할 안전장치라도 있지만 비정규직은 무방비 상태이다. 그들에겐 더 가혹하고 비열한 권력의 종속관계가 존재한다. ‘을’의 입장에 있는 피해자들은 문제 제기를 할 경우 바로 해고되거나 직장 내 진급이 어려워지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반면,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라고 협박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부조리극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왜곡된 성의식 때문이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비상식적인 인식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재판부의 ‘성편향적인 객관성’에 근거한 판결은 용기 내어 고소하고, 고통스러운 수사와 재판 과정을 겪어낸 피해자들을 절망케 한다. 최근에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보는 판결들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폭행과 협박에 얼마나 저항했는지를 피해자가 증명해내야 하는 ‘최협의설’이 적용된다. 서울서부지검은 문제의 상무가 옷을 벗으라는 요구를 하고 키스를 한 점 등은 인정하지만, 피해자의 저항이 없어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이런 판결은 반(反)성폭력 운동의 흐름에 역행하는 결과이다.

 

우리나라 법은 성폭력이라는 끔찍한 범죄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필사의 저항’을 요구한다. 저항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름에 불구하고, 법은 ‘목숨을 건 사투’ 아니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이분법으로 성범죄 여부를 판단한다.

 

어느 경우든 갑의 부당한 횡포와 우월적 지위의 남용에 의한 권력형 성범죄는 근절되어야 한다. 이 비인도적인 범죄를 침묵하는 출판사는 끔찍한 범죄를 묵인하고 있는 공범일 수밖에 없다. 사내 성폭력을 눈 감는 출판사에 나온 책을 불매 운동을 한다고 해서 끝날 일은 아니다. 언론에 노출되는 성범죄를 보면서 ‘나와는 상관없다’고 거리두기를 하는 우리의 인식이 바꿔야 한다. 성범죄는 상대적으로 권력 있는 사람이 약자에게 행사하는 성적 폭력이다. 우리가 성범죄에 둔감할수록 정당한 문제 제기도 어려운 비상식적인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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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9-18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만드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짓들인지...(책 만든다고 그렇게 크게 다를 바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요.)

올려주신 성명문을 읽어보니 가해자 당사자도 그렇고, 회사 전체적으로도 문제가 많군요. 어떤 책을 냈나 살펴보니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류의 책은 없지만 불매운동이라도 해야하는 거 아닌지..

cyrus 2014-09-18 22:21   좋아요 0 | URL
오늘 해당출판사가 자사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어요. 그런데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문은 올리지 않았어요. 어쨌든 출판사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데 여전히 반응은 썩 좋지 않더라고요. 동종업계 출판업자들도 실망스럽게 생각하고요.

올해 출판업계에 연이어 좋지 않은 소식이 터지네요. 사재기 의혹이 있는 출판사 몇 군데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까지 터졌으니 말이죠... 하필이면 문제의 출판사들이 자기계발서를 펴내는 곳입니다.

마태우스 2014-09-1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좋지만 무엇보다 제목이 멋지네요 자사 베스트셀러로 샘앤파커스의부도덕을 비판하는제목이라니요 마니배우고가요

cyrus 2014-09-20 23: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님.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4-09-2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와 관련된 조직이 항상 은폐하는것이 문제더군요.가정 정직하고 도덕적인줄 알았던 전교조의 성폭행 미수사건도 이를 은페하려다 문제가 된 케이스죠ㅡ.ㅡ

cyrus 2014-09-25 17:1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조직은 끔찍한 사건을 숨기거나 단순한 일로 무마하면 쉽게 넘어갈거라 생각하는데 나중에 밝혀지면 범죄에 동조하는 걸로 보여지게 됩니다. 비록 조직의 이미지가 좋지 않더라도 확실하게 사과하고 다음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방지해야 합니다.
 

 

엑셀로 장서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생각보다 작업이 오래간다. 하루 절반은 공무원 시험 준비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 외에 사람을 만나거나 독서를 하다 보니 장서목록 작성이 점점 뒷전으로 밀린다. 장서목록 작업이 아직 마무리 된 것도 아닌데도 이놈의 책 사재기 버릇은 여전하다. 선(先) 목록 추가, 후(後) 독서. 일단 구입한 책은 바로 목록에 추가하면 읽기 시작한다.

 

 

장서목록을 작성하면 꼭 그 책의 품절, 절판 상태도 기록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 품절, 절판된 것도 있다. 절판된 책을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죽은 책은 그것을 기억하는 독자들의 간절한 염원을 통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출간된 지 오래 되었고, 지금도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테디셀러는 천수를 누린다.

 

 

결국 책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독자들의 관심이다. 독자들이 좋은 책을 알고, 입소문이나 독자(혹은 전문가)서평 덕분에 알려진다면 판매부수가 높아진다. 그러나 잘 나가던 책도 예상치 못한 불운으로 인해 판매가 멈춰질 수 있다. 출판사가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해 문을 닫게 되어 일찍 생을 마감하는 책도 있다. 책 중에 가장 수명이 짧은 것은 장르문학이다. 장르문학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독자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늘어났지만, 미국과 일본에 비하면 아직까지 출판시장에서 크게 기세를 펴지 못한다. 올해 과학소설 전문출판사 불새가 나온 지 1년도 채 못 되어 문을 닫은 소식은 국내 장르문학의 냉혹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보다 더욱 슬픈 사실은 소리 소문 없이 출판이 중단되는 책이다. 독자들의 관심 밖에서 밀려난 책은 조용히 절판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 때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던 책도 절판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과거에 베스트셀러였던 책이 최근에 절판된 사실을 알고 나면 기분이 묘하다. 책도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나 보다.

 

 

 

 

 

 

 

 

 

 

 

 

 

 

 

 

류시화 시인의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초판 1991년)은 2000년에 집계한, 10년 간(1989~1998년) 베스트셀러 순위에 가장 많이 올랐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에 문을 닫은 종로서적과 교보문고의 주간 베스트셀러에 무려 21회나 등장했다. 2001년에 100쇄 발간 기념으로 시낭송 CD도 나올 정도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시집이었다. 2008년에 재출간되었으나 현재 이 책마저도 절판되었다.

 

 

 

 

 

 

 

 

 

 

 

 

 

 

한 때 우리나라 도서시장에 ‘교양’ 키워드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지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들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독서를 통한 교양 함양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들녘, 2001년)은 교양서적 붐을 타고 35만 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교양에 목마른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서양적 개념의 교양으로 치우친 내용 구성이 아쉽지만, 유럽의 역사, 문학, 예술, 철학과 성 담론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문명과 교양의 핵심을 압축해 서양지식에 입문하는 독자가 읽기에 가장 좋은 책이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교양』이 품절된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2004년에 사진을 추가한 컬러판이 출간되었지만 이 책 또한 품절이다. 현재 유일하게 판매되는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책은 『슈바니츠의 햄릿: 그리고 이 작품을 문화적 기념비로 만든 모든 것』(들녘, 2008년)뿐이다. 한 때 도서시장을 주름 잡았던 또 한 권의 책 그리고 저자가 이렇게 잊혀 간다.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2004년에 타계했다. 그의 타계 소식을 인터넷 뉴스 기사로 접한 것이 엊그제 된 것 같은데 벌써 10년이나 지났다.)

 

 

 

 

 

 

 

 

 

 

 

 

 

 

 

 

예전에 알라딘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읽었던 책들도 서점에서 사라졌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H.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열린책들, 2011년)과 박정희 정권 시절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던 원로 언론인 김종철의 『폭력의 자유』(시사인북, 2013년)이다. 나온 지 5년도 채 넘기지 못한 채 품절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8기 신간 평가단, 『폭력의 자유』는 13기 신간 평가단 활동 첫 도서였다. 개인적으로 『폭력의 자유』 품절이 너무나도 아쉽다. 언론인을 희망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지금도 권력 앞에서 쩔쩔 매고, 진실에 눈 가리고 외면하는 언론의 모습은 여전한데 한국 언론의 어두운 역사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년)은 너무나도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지난달에 출판사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마지막으로 반값도 아닌 53% 할인으로 판매되다가 11일에 절판되었다. 올해 안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오늘도 알라딘에 읽고 싶은 책을 검색하다가 절판 사실을 알고 ‘품절도서 의뢰센터’ 버튼을 눌러 본다. 이번에만 열여섯 번째. 야속하게도 왜 내가 읽고 싶거나 사고 싶은 책이 절판이란 말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수급 통보 메일이 오지 않는다. 이래서 책은 사고 봐야 한다. 살 생각만 해놓다가 절판되고 난 뒤에서야 사지 못하면 후회된다. 우리가 쉽게 사고 볼 수 있는 책도 세월 앞에 스테디셀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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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인 『젖가슴 생태학』 가제본을 어제 다 읽었다. 평소 같으면 책 한 권 읽고 나면 서평을 써야하지만, 프리뷰어 활동은 가제본을 읽었으면 편집 방향에 대한 의견이나 오, 탈자를 해당 출판사에 알려줘야 한다. 그래서 평소에 책 읽는 속도보다 천천히 읽었고, 중요한 내용이나 오자가 있으면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원래 책에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독서를 많이 하는 명사들은 밑줄 긋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책이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길 원하는 독특한 성격 탓에 아직까지 독서 고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독서의 달인이나 고수가 되기보다는 그냥 책 읽기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성스럽게 보관하는 괴팍한 책성애자(冊聖愛子)로 남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밑줄 긋기의 중요성을 절대로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눈으로 읽는 것보다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으면 책에 대한 집중력이 생겨 책의 주제나 핵심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나중에 가제본이 정식으로 출판되어 나오면 다시 읽어볼 필요 없이 바로 서평을 작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가제본을 읽는 동안 밑줄을 긋지 않았다면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편집자의 심정이 되어 오, 탈자 하나라도 찾기 위해서 읽었으니까. 책 속에 있는 여성 가슴 사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 내가 흡족할만한(?) 사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시무룩)

 

그래도 프리뷰어로 선정되어 이 책을 읽게 돼서 정말 운이 좋다. 만약에 이 책이 정식으로 출간되었다면 당장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젖가슴’이라는 제목 때문에 선뜻 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나중에 최종 제목을 선정하게 되면 ‘젖가슴’이라는 단어를 제외해선 안 된다.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특히 여성 독자들이 많아야 한다. 여성 독자들이 이 책을 더 부끄러워하겠지만, 자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중에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면 꼭 필독해야 한다.

 

가제본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자, 어색한 문장을 정리해본다. 계속 반복해서 읽어봐도 확신이 들지 않은 내용이 있으면 구글링을 동원해서 확인했다. 혹시 내가 지적한 내용에 잘못된 점이나 더 추가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얼마든지 댓글에 달아줘도 좋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1. 인간의 젖가슴은 지방과 기질(Stroma)이라는 연결조직으로 이뤄진 살덩어리다. 

 

→ 이 책을 읽다보면 처음에 가슴을 구성하는 조직으로 ‘기질(Stroma)’라고 언급되는데 다음 장에 읽어보면 Stroma를 ‘지질’이라고 표현한 곳도 있었다. Stroma는 세포로 이루어진 결합조직을 말한다. 우리말로 풀어내면 ‘기질’, ‘지질’ 둘 다 사용된다. 여기서 말하는 ‘기질’은 기력과 체질을 뜻하는 ‘氣質’이 아니라 ‘基質’이다. ‘지질’은 한자어로 ‘支質’이다. ‘기질’과 ‘지질’ 둘 중 하나로 통일시켜 사용해야 하며, 독자가 단어의 의미를 혼동하지 않도록 한자어가 추가되어야 한다.

 


2. 진화생물학자들은 젖의 분비에 관여하는 6000여 개의 유전자는 가장 보존도가 높은 것들로, 이는 털이나 발가락, 체리가르시아 아이스크림을 소화하는 능력 등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처럼 최근에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이 문장의 주어는 ‘젖의 분비에 관여하는 6000여 개의 유전자’다. 이 6000여 개의 유전자는 털이나 발가락을 소화하는 능력 등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처럼 최근에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인데, 주어 앞에 ‘진화생물학자들은’이 왜 있는지 궁금하다. 이 문장을 반복해서 읽으면 문장이 어색하게 읽혀진다. ‘진화생물학자들은’을 빼도 된다.

 


3. 상자 모양의 베이지색 기계는 질량분석기로 ‘트리플 쿼드’라는 멋진 최신식 장치였다. (중략) 서로 다른 분자를 구분하고 확인하기 위해 이 기계는 색상과 분자량, ‘비행시간’을 이용한다. 즉 분자를 지그재그 모양의 통으로 보내 연통 크기의 작은 실리더로 날아가게 한다.

 

→ 질량분석기는 분석하려는 시료를 기체 상태의 이온으로 바꾼 후 질량을 측정해 분자의 종류와 성질을 분석할 수 있는 장치다. 질량분석기의 원리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면 글이 길어지고 내용이 옆으로 샐 수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오타가 ‘실리더’다. 피스톤이 왕복 운동되는 장치인 ‘실린더’(Cylinder)의 오타로 추정된다.

 


4. 질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폐경 덕분에 자유로와진 나이든 여성들은 손주들을 먹이고 키우는데 힘을 보탰다.

 

→ 자유로와진(X) / 자유로워진(O)
   나이든 (X) / 나이 든 (O)
   키우는데 (X) / 키우는 데 (O, ‘데’가 ‘곳’이나 ‘장소’, ‘일’이나 ‘것’, ‘경우’의 뜻을 나타낼 때 의존명사로 띄어 써야 한다)

 


5. 재향군인이 병원을 찾아와 ‘벤젠에 노출된 적이 있다’고 말할 때 어리둥절해하는 의사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게 제 바램입니다.

 

‘바라다’와 ‘바래다’. 이 두 개의 동사를 사람들이 많이 틀리기 쉽고, 혼동해서 사용한다. 몇 년 전에 ‘무한도전’에 의해서 유행했던 ‘~을 하길 바래’도 알고 보면 어법상 잘못된 말이다. ‘바라다’는 생각하는 대로 어떤 일이나 상태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하는 것을 뜻하며, ‘바래다’는 햇볕이나 습기에 의해 색이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명사로 쓰면 ‘바라다’는 ‘바람’, ‘바래다’는 ‘바램’으로 쓰는 것이 맞다. 그래서 5번 문장에 '바램입니다'를 '바람입니다'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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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9-13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밑줄 긋고 읽었는데 저도 책을 너무 아끼는 마음에 밑줄을 긋지 않고 읽고 있습니다. 가끔 눈에 띄는 오타는 휴대폰으로 찍어 두었다가 리뷰 작성할 때 같이 쓰곤 했지요. 요즘은 그것도 귀찮아서 잘 안하고 있습니다.

cyrus 2014-09-13 21:00   좋아요 0 | URL
최근에 알라딘 전자북 어플을 설치해서 스마트폰으로 전자북을 읽어봤는데요, 밑줄긋기와 메모 기능이 있어서 좋았어요. 원래 전자북을 선호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요즘 전자북의 장점에 눈을 뜨고 있어요.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 그냥 책이 사고 싶은 마음에 간 것이 아니었다. 정말 사고 싶은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가게 되었다. 그 책이 바로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5년, 줄여서 ‘사우것’)이었다. 카버의 또 다른 작품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문학동네, 2004년)와 최근 개정판이 나온 『대성당』(문학동네, 2014년)은 예전에 구입했다. 이제 『사우것』만 사면 국내에 번역된 카버의 모든 작품집을 소장하게 된다. 운이 좋았다. 서점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이 책을 사지 않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서점에서 산 책들을 책장에 꽂았다. 참으로 못된 버릇이다. 책을 사자마자 바로 읽는 성격은 내 서재에 나간 지 오래됐다. 내가 그동안 사서 읽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내 방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지만 사방에 책상, 서 너 개의 책장을 세울 수 정도로 적당하다. 내가 두 다리를 뻗어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방 내부의 공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 창문 바로 앞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1인용 소파가 있다. 이 정도면 책장을 둘러싸인 좁은 방도 꽤 만족스러운 서재가 된다. 책상에서 한 발짝만 움직여도 내가 원하는 책들이 한 눈에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내 방을 보는 외부 사람이라면 넓지 않은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서재를 갖춘 방이 딸린 집을 12년째 살고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내 방이 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 근래 내 방에 책이 점점 많아지면서 넓은 서재의 중요성을 느끼고 시작했다.

 

앞으로 사야 할 책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책을 꽂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어린 시절에 읽었던 아동도서나 동화 전집, 대학생 때 산 전공도서 그리고 다시 읽을 기회가 없는,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을 종이박스에 담아 옷장 겸 잡동사니를 보관한 창고가 된 내 동생의 방에 보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없는 건 마찬가지. 이젠 책을 꽂는다기보다는 책을 쌓는다는 표현을 해야 한다. 책이 다 꽂혀 있는 책장 받침에 책을 누워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튼튼한 목재 책장이라면 상관은 없지만, 만든 지 연도가 오래된 목재 책장이라면 책의 무게에 감당하지 못한다.

 

 

 

 

 

 

 

사진 속 여닫이가 있는 책장은 부모님이 신혼 시절에 구입한 것이다. 27년째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 나오는 목재 책장에 비교하면 튼튼함이 떨어진다. 책장 받침을 지탱하고 있는 나사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오랜 세월로 인해 썩게 되고,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두 달 전에 책장을 정리하는 도중에 책장 받침이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 상태를 발견했다. 책 한 권을 꽂으면 ‘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책장 받침이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책장 제일 윗칸은 받침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책 꽂을 공간이 저렇게 충분한데도 어쩔 수 없이 책을 꽂지 못한 채 그냥 저 상태로 놔두고 있다.

 

 

 

 

 

 

 

 

 

 

 

 

 

 

 

 

 

오카자키 다케시『장서의 괴로움』(정은문고, 2014년)에 자신의 책으로 가득한 목조건물이 무너질까봐 괴로워한다. 일부 독자는 오카자키의 괴로움에 쉽게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목조건물이 많은 것도 아닌데다 지진의 위험성이 아직은 덜한 편이다. 오카자키 같은 장서가의 괴로움은 일본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오래된 목재 책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오자카지의 괴로움을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다음에 책장을 새로 사게 되면 나사가 없는 것을 살 생각이다. 

 

사실 이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책 건망증’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사우것』을 구입하던 날이었다. 추석 연휴동안 집에서 쉬게 될 동생이 읽을 책이 있는지 내 방을 찬찬히 둘러봤다. 그러자 책장에 꽂힌 『사우것』을 발견했다. 동생은 그 책을 보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동생이 그 책을 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동생은 책장에서『사우것』을 빼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오빠, 왜 이 책이 책장에 꽂혀 있어? 이거 예전에 내가 읽는다고 빌려갔잖아? 같은 책을 또 산거야?”

 

아뿔싸, 내가 같은 책을 두 권이나 사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사우것』을 산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을 깜빡 잊고 같은 책을 사고 만 것이다. 심지어 동생이 『사우것』을 빌려 간 일도 같이 잊고 있었다. 처음에 동생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니 한 달 전에 교보문고에서 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짓말을 해도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었다. 나의 실수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도 있었다. 동생은 자신의 가방 속에 있는 또 다른 『사우것』을 꺼내 보여줬다. 두 권의 『사우것』은 책 표지만 같은 것도 아니었다. 2013년 12월 2일에 찍은 1판 10쇄였고, 교보문고에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도장자국도 남아 있다. 살면서 이런 우습고도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요사이 찾는 책을 발견할 확률이 점차 낮아져 분명 집에 있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오거나 서점에서 다시 사오는 일이 심심찮게 있다. 위험한 것은 다시 사오거나 빌려온 책마저 장서의 파도에 떠밀려 ‘해저 깊은 곳’에 잠겨버리는 일이다.” (오카자키 다케시, 『장서의 괴로움』중에서, 18쪽)

 

 

아직 내 서재는 오카자키만큼 2만 권이나 되는 ‘장서의 파도’에 떠밀릴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서재에 있는 책이 그렇게 적은 권수는 아니다. 『장서의 괴로움』을 읽고 난 후부터 서재에 몇 권의 책이 있으며, 어떤 책이 있는지 엑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모범장서가 공모를 진행하고 있어서 다음에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소장 도서 목록을 미리 만들고 싶었다. 책이 꽂힌 책장 한 칸 한 칸씩 사진을 찍어 일일이 확인해가면서 엑셀에 기록했다. 도서 목록을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많아야 400권 정도로 예상했다.

 

 

 

 

 

 

그런데 예상한 것보다 권수가 많았다. 오카자키가 말했던 최상의 보유 권수인 500권을 넘었다. 지금도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중인데 800권을 넘은 상태다. 6년 전에 구입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권 세트를 포함한다면 1000권은 거뜬히 넘었다. 엑셀에 기록된 800권의 도서는 아동용 도서를 제외한 것이다.

 

독서를 전문적으로 하는 서평가들이 소장한 책의 권수에 비하면 1000권은 아직 장서가로 명함을 내밀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성인이 읽는 책을 읽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작년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렇게 많이 책을 샀을 줄 꿈에도 몰랐다.

 

사실 도서 목록을 작성하면서 1000권을 샀다는 사실에 만족스럽지 않았다. 작성중인 도서 목록은 그 많은 책들 중에 제대로 읽은 책이 많지 않다는, 이 불편한 진실을 기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3년 독서 인생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었던 책들도 눈에 띄었다. “아, 나로 예전에 이런 책을 샀구나!” 갑자기 몇 년 전에 다 읽었거나, 혹은 읽다 말거나 그리고 아예 종이 한 장도 펼치지 않았을 책들이 읽고 싶어졌다. 나는 그동안 세월의 파도에 떠밀려 망각의 심해 깊은 곳에 잠겨버리고 있는 책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오늘도 도서 목록을 작성하면서 잠겨 버린 채 내 기억 속에 사라질 뻔한 책들을 한 권씩 한 권씩 건져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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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9-11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뿌리칠 수 없는 삶의 동반자, 책이겠지요? 고은 시인께서는 책이 자신을 못 살게 군다는 표현을 쓰시더군요...

cyrus 2014-09-12 14: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흔적님. 책에 대한 표현에 동의합니다. 책은 우리의 삶을 이롭게 하면서 한편으로 괴롭게 만드는, 두 얼굴의 아내 같기도 합니다.

blanca 2014-09-1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같은 책 읽으셨군요, 반가워요 !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을 언젠가는 엑셀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있답니다.^^;; 저는 개방형 책장이라 책에 먼지가 너무 많이 쌓이더라고요. 햇빛으로 변색도 되고요. 다음에는 님처럼 덮개가 있는 책장을 사야 하나 이러고 있어요. 아, 저도 책욕심 요새 줄이느라 의도적으로 있는 책 다시 읽자, 이러고 있는데 솔직히 읽었던 책을 또다시 읽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아요.

cyrus 2014-09-12 15:0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좋고 저 이외에도 공감하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개인적으로 흡족하게 생각해요. 덮개형 책장을 오랫동안 사용해본 저로선 느겼던 것이지만, 약간의 단점도 있답니다. 일단 덮개를 열면 소리가 나는데다가 유리라서 아이들이 직접 덮개를 열고 닫는다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책등이 다 보이는 개방형 책장이 나은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으라면 절대로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하루 자고 나면 읽고 싶은 신간도서들이 많이 나오는데 전에 산 책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죠... ^^;;

korin 2014-09-18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집광 혹은 애서광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책을 통해 자신만의 만족하는 독서가로 남을 것인지 늘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매년 책을 읽고 이를 정리하기 위해 꺼내놓은 책들에 책상이 점령될 때마다 책속에 길을 잃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이른 아침에 좋은 글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