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이언 C가 부릅니다. '겨자를 찍어 먹어요'

 

안녕. 쉽지 않죠.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죠. 먹고 싶은 게 더럽게 많죠. 매운 음식 먹고 싶죠? 매운 음식 안 좋아하는데도 매운 음식 먹고 싶을 거야. 그럴 땐 이 겨자를 찍어 먹어요. 매워도 조금 찍어 먹어요. 그러면 건강에 좋을 거예요.

 

 

 

향신료란 물의 열매, 잎, 줄기, 뿌리 등을 건조한 후 분쇄해서 만든 것이다. 오랜 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적은 양으로도 강한 향을 낼 수 있다. 불편하여 나라와 나라 사이가 지금보다 멀었던 옛날, 어렵사리 구한 식물의 향을 좀 더 오래 즐기려 만들어진 향신료는 그래서인지 이름부터 이국적인 맛이 느껴지고 평범하던 음식은 그 향기 하나로 색다른 음식이 된다. 의약품이 귀했던 고대에는 향신료가 약초처럼 쓰였다. 향신료의 역할은 식욕을 돋우는 역할 이외에도 악취 제거나 소화촉진 등을 들 수 있다. 중세유럽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더욱 널리 퍼져나가 15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쌀이나 은, 상아 등과의 무역이 가능했을 정도로 가치가 높았다. 바스쿠 다가마와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항해에 나선 이유는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향신료는 여러 가지 종류가 많지만,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겨자 소스다. 냉면을 먹을 때 빼놓지 않는 양념이 바로 겨자다. 맛있는 냉면의 조건은 깊은 맛이 나는 육수겠지만, 사실 톡 쏘는 맛의 겨자 때문에 냉면을 즐겨 먹는다. 생선회를 먹을 때도 겨자가 빠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간장에 겨자를 섞어 먹는데 나는 그렇게 먹지 않는다. 생선회를 아예 겨자에 바로 찍어서 먹는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음식에 겨자를 많이 찍는 편이다. 코에서 톡 쏘는 느낌이 들고, 입과 코안에 감도는 매운 기운이 눈동자로 올라와야 한다. 그러면 얼굴은 약간 붉어지고, 눈에 눈물이 살짝 나오려고 한다. 눈, 코, 입 전체로 매운맛이 확 올라왔다면 겨자의 맛을 제대로 느꼈다고 볼 수 있다. 겨자의 맛에 중독된 탓에 음식을 겨자에 찍어 먹기보다는 아예 젓가락으로 겨자를 떠서 먹는다. 옆 사람이 보기에는 매운 소스를 아무렇지 않게 먹는 내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한다. 매운 음식을 지나치게 먹으면 장에 염증을 일으킬 수 있다.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적당한 양을 먹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한 번 길들인 입맛, 한 번에 바꾸기 참 쉽지 않다. 겨자를 먹어야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다. 나는 비강(콧구멍 안)이 좁은 편인 데다가 비염 증세가 약간 있어서 콧속으로 숨을 쉬는 게 조금 답답하게 느낀다. 이럴 땐 겨자를 먹어줘야 한다. 톡 쏘는 기운이 비강에 가득 차면 콧속의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잊힌다. 다른 사람들을 잘 모를 거다. 겨자가 얼마나 매력 있는 향신료인지를. 지금까지 나처럼 겨자의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겨자 맛이 왜 좋은지를 설명해줘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일본 요리계의 전설 로산진은 겨자의 우수성을 알싸한 맛과 향기에서 찾는다. 그는 맵지 않은 서양 겨자를 귀하게 여기는 일본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여기서 로산진이 언급하는 서양 겨자가 노란 빛깔이 나는 머스터드소스일 가능성이 있다. 로산진은 우리에게 ‘와사비’ 또는 ‘고추냉이’로 알려진 일본 겨자가 최고라고 치켜세운다. (‘와사비’는 일본말이므로, ‘고추냉이’라고 쓰는 것이 낫다) 그러면서 일본 겨자를 비프스테이크에 곁들여 먹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겨자 마니아로서 로산진의 주장에 동의한다. 겨자에 찍은 족발이 맛있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 것이고, 삼겹살에도 잘 어울린다. 사실 나도 머스터드소스를 겨자만큼이나 좋아하지 않는다. 머스터드소스도 겨자의 열매나 씨로 만드는 향신료라서 톡 쏘는 맛이 남아 있으나 매운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모든 음식에 겨자를 발라 먹는 것을 좋아했다. 시간표처럼 철저하게 규칙적으로 살았던 칸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겨자를 휘저었다고 한다.

 

겨자에 대한 사랑은 절대로 변함이 없다. 맛이 너무 강해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 겨자를 적당하게 먹으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겨자가 건강에 좋다고 설명해도 사람들이 통 믿지 않으니 참. 겨자는 몸이 찬 사람에게 좋다. 나도 몸이 쉽게 차는 체질인데 겨자를 먹으면 몸에 열이 올라와서 혈액 순환이 잘 도는 것 같다. 그 대신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의 사람은 겨자를 자주 먹어선 안 된다. 조금은 의외의 상식인데, 겨자에 천식 증상을 완화해주는 셀레늄과 마그네슘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제는 울면서 겨자를 먹지 말고, 건강을 위해서 웃으면서 겨자를 살짝 찍어 먹어보자.

 

 

매워도 조금 찍어 먹어요. 그러면 건강에 좋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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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23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프와 삼겹살을 고추냉이와 함께 먹어도 색다른 맛일 것 같아요. ^^

cyrus 2015-08-24 18:21   좋아요 0 | URL
‘쌈장+돼지고기’ 조합도 좋지만, 자주 먹으면 쌈장의 짠맛이 질려요. ^^

에이바 2015-08-2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시를 좋아하는 건 고추냉이의 공이 팔할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회로 먹죠. 초장에 찍어서... 머스타드 종류는 다 괜찮아요. 그 중에서는 톡 쏘는 맛이 있는 디종 머스타드가 좋아요. 허니 머스타드는 별로고요.

cyrus 2015-08-24 18:22   좋아요 0 | URL
제가 소스의 종류와 맛에 대해서 잘 몰라요. 디종 머스타드는 처음 들어봅니다. 머스타드 소스도 종류별로 있는가 보죠? ^^

stella.K 2015-08-24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자가 확실히 묘한 매력이 있기는 하지.
잘못 먹으면 머리통 한쪽이 튀어오르는 총알을 맞은 느낌이랄까?ㅋ
그래도 먹을 기회가 그다지 많지가 않아.
나는 겨자 보다 하니 머스터드를 더 선호하는 편이긴 해.
언젠가 삶은 계란에 양파를 으깨 머스터드로 버무려 소를 넣은 모닝빵을
먹은 적이 있는데 맛있더군. 그후 몇번 만들어 먹은 적도 있는데
오늘은 왠지 당기는군.ㅋㅋ

cyrus 2015-08-24 18:25   좋아요 0 | URL
총알 맞은 느낌, 표현이 아주 좋은데요. ㅎㅎㅎ 저는 허니 머스타드를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아요. 치킨을 머스타드에 찍어 먹어도 되는데, 이상하게 소스를 찾지 않아요.

해피북 2015-08-24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자를 몸에도 양보해보세요 ㅋ
겨자를 푼 물에 동일한 양의 밀가루를 넣고 반죽해준후 거즈에 발라 덮으면 천연파스 가 된답니다 주위할점은 너무 많이 바르면 화상 위험있대요ㅋㅂㅋ

겨자하면 뭐니뭐니 해도 간장에 겨자를 살짝 풀고 쫄깃하고 탱글한 회 한점 찍어 먹는게 최고인거 같은데 키루스님은 겨자에 바로 찍어 드시는군요 ㅋ 저도 나중에 도전~~~을!

cyrus 2015-08-24 18:27   좋아요 0 | URL
지난번에 종편 채널에서 하는 건강 관련 방송에서 겨자찜질을 본 적이 있어요. 그 방송을 본 어머니가 제가 겨자를 많이 먹어도 아무 말도 안 해요. ^^
 

 

 

 

 

 

 

 

 

 

 

 

 

 

 

 

 

 

 

 

 

 

 

 

“갑자기 교실 벽이 모조리 무너지고 내가 모르는 어떤 들판에 서 있는 듯한 그런 순간이 있어. 굉장히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지. 하늘을 나는 새처럼 마음껏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루이 랑베르》 중에서, 47쪽)

 

 

 

우리나라 부모, 특히 어머니의 교육열은 미국의 대통령이 칭찬할 정도로 알아준다. 사실 좁은 땅에, 지하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이 정도의 수준으로 살 수 있게 된 저변에는 바로 이 교육열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과열은 역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요즘에는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엄마를 '돼지엄마'라고 부른다. 엄마 돼지가 새끼 돼지들을 데리고 다니듯, 여러 학부모를 몰고 다니면서 고액 과외에 관련된 정보를 알린다. 또한, 같은 또래의 아이를 둔 학부모들을 모아 팀 수업을 편성하는 일도 책임진다. 부모의 과잉 기대는 아이들을 강요와 통제의 감옥으로 인도한다. 그들을 가두는 학교와 학원 역시 아이들을 입시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학생은 많고 대학의 문은 좁으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과연 아이들은 학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학교생활에 얼마나 만족하며 다니고 있을까.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 인식하는 정도가 과거에 비해 크게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그저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막막한 공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곳으로 생각할 것이다. 학생들 앞에 주어진 교과목들. 흔히 사회에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는 건 사회에 나가보면 알게 된다. 대학입시를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다. “이런 걸 왜 배워야 하는 거죠?” 학습의욕이 없는 학생들의 불평불만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모순투성이로 가득한 것이 교과서이고 교육과정이다. 아이가 말없이 학교와 학원 수업을 잘 받고 있는데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부모들은 자녀들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저항성이 어느 정도인지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아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눈물과 아픔 속에 학원을 전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도한 학원 수강과 수능시험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학습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심각한건지 잘 모르는 눈치 없는 부모에게 세 권의 소설을 권하고 싶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현대문학, 2013), 발자크의 《루이 랑베르》(문학동네, 2010),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민음사, 2001). 이 세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 모두 공통으로 엄격한 통제와 규율로 작동되는 교육에 민감하다. 그리고 세 작품 모두 작가의 문학적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전적 색채가 강하다. 헤세, 발자크, 조이스는 자신들이 쓴 소설을 통해서 진정성이 없는 가르침만 강요하는 교육 현실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들의 정서 상태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학창 시절을 다 겪어 본 어른들도 주인공의 학교생활을 묘사한 작가의 필력을 확인하는 순간, 숨이 막혀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헤세는 부모님 곁을 떠나 혈혈단신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감성이 예민한 문학 소년은 신학교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신경쇠약증이 심해져서 학교에 입학한 지 일 년 만에 중퇴한다. 학교의 그늘에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헤세는 안정적인 삶을 찾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한다. 한때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행히 헤세는 시인이 되는 데 성공했지만, 《수레바퀴 밑에》의 주인공이자 헤세의 분신인 한스 기벤라트는 자신의 운명에 가중되는 억압의 수레바퀴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한다.

 

발자크도 헤세와 같은 운명으로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발자크의 어머니는 매정하게도 어린 발자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느껴보지 못한 발자크는 수도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돔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발자크는 기숙학교 생활을 거대한 감옥에 갇힌 듯한 기분이라고 회상했다. 그런 '주옥' 같은 시절을 재구성한 소설이 바로 《루이 랑베르》이다. 한스와 마찬가지로 루이 역시 아주 영특한 아이로 촉망받지만,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엄격하고 따분한 수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독서, 명상, 사색이 루이의 유일한 낙이다. 한스와 루이는 서로 감정을 공유하면서 함께 지낼 수 있는 믿음직한 단짝(《수레바퀴 밑에》의 헤르만 하일너, 《루이 랑베르》에서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설의 화자)을 만나지만, 이 행복한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 관계의 단절은 두 사람의 깊은 고립과 파멸을 초래하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조이스의 유년시절은 헤세와 발자크보다 조금 밝은 편이다. 학교 모범생에다가 실제로 전교 학생회장까지 맡은 적도 있는 '엄친아' 같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작가의 유년 시절이 반영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나름대로 공부 잘하는 '문제아'로 등장한다. 그는 예수회 신부가 되기 위해서 학교생활에 적응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종교의 길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티븐의 마음에 이단의 새싹이 조금씩 자라게 되고, 금욕을 중시하는 기독교 교리를 어기면서까지 사창가에 가기도 한다. 스티븐은 한스와 루이처럼 자유와 억압 사이에서 고민하고, 자유로운 사고 능력마저 말살하는 기성 교육제도에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두 인물의 태도와 완전히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 스티븐은 자신의 삶을 가두려는 종교, 교육이라는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진짜 자아를 찾으려고 치열하게 발버둥을 친다. 한스와 루이는 동료 학생들과 교사의 외면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움츠리는 저자세를 취했다면, 스티븐은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상황의 모순을 끊임없이 지적하여 맞서려고 한다. 교사로부터 부당하게 매를 맞은 스티븐이 교장에게 직접 찾아가서 논리정연하게 호소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아주 명료하게 설명한 덕분에 스티븐은 교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요즘 아이들이 교사의 부당한 행동 및 언행에 조금이라도 지적을 한다면, 교내에서 반항아로 낙인찍힐 것이다. 물론 모든 교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교사는 상식적인 수위를 넘는 발언과 행동으로 아이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엄격한 교사의 지시는 무조건 따른다고 믿는 아이들은 잘못된 상황을 알지 못하거나 어쩔 수 없이 묵인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학교에 갇힌 아이들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누려야 할 자유가 사회규범에 어긋난 비행청소년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청소년 시절은 가장 반항하기 쉬운 때고 고민이 많다. 아이들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던 고민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정도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 모두에게 '수능시험' 뒤에 가려진 성공만 바라보도록 가르친다. 어른들의 고집과 욕심이 중노동에 가까운 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을 더욱 지치게 한다. 조금이라도 튀는 발언이나 공부와 전혀 관련 없는 취미 생활을 하는 학생을 ‘문제아’로 바라보고, 최대한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보는 어른들의 교육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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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1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되길 희망하며, 한편 나는 어떤지 반성되는 글입니다.

cyrus 2015-08-18 21:2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미혼이지만, 결혼을 앞두는 젊은 사람들도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교육 문제에 무관심 하는 저도 반성합니다.

AgalmA 2015-08-22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가에 갇힌 국민과, 민족에 갇힌 집단심리....사람은 참 많은 것에 갇혀 있죠. 하나하나 다 인지하지도 못하기도 하고, 인지해도 어쩌지 못하기도 하면서... 교육은 특히나 가르치는 쪽도, 배우는 쪽도 다 노력해야 하는데, 한국은 너무 일방적인 게 늘 안타까워요. 사제적이지도 않은 완전 군대식에 관료식에 나쁜 것 일색의 짬뽕... 왕따 문화나 대학에서 기수 앞세워 기 잡고 하는 거 보면 그 자세부터 참 교육의 길은 먼 거 같았습니다.

cyrus 2015-08-22 21:30   좋아요 1 | URL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대학교에 가면 자유롭게 공부한다고 선생님에게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전공 학과 선배들, 심지어 대학교수의 기분에 맞춰야 인정받을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보고 어이가 없었어요. 집단에 어울리지 못한 사람을 이상하게 봤어요.
 

 

 

 

 

 

 

 

 

 

 

 

 

 

 

 

 

 

창비세계문학 단편전집 프랑스 편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창비, 2010)에 발자크가 쓴 『붉은 여인숙』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미지의 걸작』, 『영생의 묘약』과 함께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에 포함되었다. 세 작품 모두 짧은 분량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어떤 계층에 속하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탐욕과 광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발자크는 단편소설을 더 능숙하게 쓰는 것 같다. 그가 글을 잘 쓴다고 보기 어렵다. 발자크의 장편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이야기의 시간적 또는 공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최소 두세 쪽 이상을 쓴다. 그는 생리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그 모습을 통째로 종이에 옮기고 싶어 했다. 너무나도 자세하게 쓰는 습관 탓에 문장이 길어졌다. 《나귀 가죽》(문학동네, 2009)에서 라파엘이 친구에게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들려주는 대사가 압권이다. 라파엘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도박에 빠지게 된 계기까지 정말로 쉬지 않고 설명한다. 라파엘의 대사가 이야기 중반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지루해도 끝까지 참고 읽어야 한다.

 

발자크는 은근히 잘난 척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어 자신이 아는 최신 사상 이론을 설명한다. 《루이 랑베르》(문학동네, 2010)의 발자크의 자전적 소설이다. 루이 랑베르는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조숙한 인물이다. 그는 스웨덴보리의 신비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정신이 육체보다 더 우위를 두는 이론을 체계적으로 구상한다. 그리하여 열두 살의 나이에 ‘의지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집필한다. 하지만 논문은 완성하지 못한다. 그를 골탕먹이려는 동급생들이 신부에게 랑베르가 논문을 몰래 쓰는 사실을 밀고했기 때문이다. 신부는 논문 원고를 압수하고, 랑베르를 심하게 꾸짖는다. 소설에 나오는 ‘의지론’은 《나귀 가죽》에서도 나온다. 라파엘 역시 같은 제목의 논문을 집핍하는 걸로 나온다. 이 논문은 실제로 발자크가 완성하지 못한 책이기도 하다. 《루이 랑베르》 번역본의 분량은 얇은 편이다. 그러나 비교적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소설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루이 랑베르》는 철학 소설이다. 이 소설 역시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에 수록되었다. 랑베르가 줄기차게 사유하는 과정 하나하나 쫓아가기가 쉽지 않다. 이 소설의 화자는 랑베르가 유일하게 믿고 지내는 수도원 학교의 동급생이다. 랑베르는 화자에게 자신의 이론을 들려주면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사유의 힘에 스스로 경도된다. 독자는 랑베르의 철학적 장광설을 견뎌내야 한다. 단, 철학을 어려워한다면 과감하게 넘어가거나 속독할 것을 권한다. 정독하기보다는 역자 해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발자크는 늘 세상을 생리학자처럼 꼼꼼하게 살펴본다. 그러나 글을 쓸 땐 각종 사상과 이론에 심취한 현학적인 철학자가 된다.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쓰는 발자크의 글쓰기를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귀스타브 랑송 ‘낭만주의의 악습’라고 분석한다. 낭만주의 소설은 이성보다는 감정의 내면을 중시하여 공상과 환상을 동경한다. 발자크의 소설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전환하는 중간 지점에 분류된다. 발자크는 무명 시절에 가명으로 고딕 소설을 썼으며, <인간 희극>에 수록된 단편소설에 고딕풍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영생의 묘약』은 E.T.A. 호프만의 환상소설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호프만은 인간 내면의 악마성에 지배당하는 오싹한 과정을 그린 환상소설 《악마의 묘약》(황금가지, 2002)을 발표했다. 『영생의 묘약』 또한 실수로 묘약을 잘못 바르는 바람에 악마로 변하는 인물이 나온다. 『사막에 싹튼 열정』에서 사막은 미지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국적 장소로 나온다. 여기서 발자크는 낭만주의의 한 경향인 이국적 취미를 드러낸다. 발자크가 상상력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문학적 배경을 이해할 때 낭만주의와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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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5-08-13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이 발자크를 정말 싫어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또 묘하게 발자크 소설에 끌려요. 단편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cyrus 2015-08-14 20:46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까 발자크를 존경하는 작가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발자크에게 영향을 받은 에밀 졸라는 제외하고요. 발자크의 단편소설 세 편이 수록된 <사라진느>(문학과지성사)를 추천합니다.

yamoo 2015-08-13 2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지루한 소설에 대하면 양반 아닐까요? 전 아직 발자크 소설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조이스의 <율리시즈>만큼 지루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단연코요!ㅎ

cyrus 2015-08-14 20:47   좋아요 0 | URL
<율리시스> 번역본에 각 장의 이야기를 요약한 줄거리가 나오는데, 이거 없었으면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못합니다. <율리시스>를 줄거리를 먼저 봐야 합니다. ^^

페크pek0501 2015-08-14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가 그런 생각을 했죠. 왜 명작이라고 하는 소설은 지루할까?
그런데 서머싯 몸이나 크로닌의 소설을 읽어 보면 지루하기는커녕 재밌거든요.
이문열 작가가 엮은 세계명작산책 시리즈는 단편소설들 묶음이에요.
열 권 중 다섯 권 읽었는데, 다 재밌더라고요. 물론 이문열 작가가 재밌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뽑아 엮었겠지요.
결론은...
얼마든지 재밌는 명작 소설도 있으니 저는 잘 골라 읽겠습니다, 하는 것. ㅋㅋ

하지만 님처럼 한 작가의 작품들을 계속 읽어 나가는 건 유익한 작업 같습니다.
시루스 님, 하면 발자크가 생각날 것 같아요. ^^

cyrus 2015-08-14 20:50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이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소설은 의외로 본인은 재미있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2주 동안 발자크의 소설만 읽으니까 이제 적응이 됩니다. 전작주의 독서의 장점인 것 같아요. 단점이라면 다른 책들을 볼 여유가 줄어들거나 같은 작가의 책만 계속 읽으면 슬슬 지루해져요. ^^

오후즈음 2015-08-14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간 올려주시는 발자크에 관련된 책들 리뷰와 소개들을 보면서 정말로 Cyrus님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읽고 있어요. (그래서 이름도 첫스펠링은 대문자로 썼습니다!!!!)
모든 고전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지루한 얘기들이 많은것 같아요. 앞에서 덧글 다신분처럼 재미 있는 것들을 골라 읽으면 참 좋겠는데요.
그 지루함과 재미없음을 견디는 것이 뭔가 인간에게 큰 약(?)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고전 읽으라고 하는 걸까요?

cyrus 2015-08-14 20:59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고전을 잘 안 읽는 이유가 너무 옛날이야기라서 요즘 같은 시대에 읽으면 지루해요. 그래서 저는 고전작품을 추천하기가 망설여져요. 나는 재미있게 읽었고 유익한 고전작품인데 정작 다른 사람들은 재미없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고전작품 서평을 쓸 땐 다른 독자가 볼 땐 확실히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도 알리려고요. 유명한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끝까지 다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특정 고전작품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서평에서 확실히 설명한다면 페크님처럼 재미있는 작품을 골라 읽고 싶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기가 쉬워질 겁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8-14 0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알라딘에는 이런 글이 좀 많이 탄생해야 합니다. 발자크, 플로베르가 대표적인데, 이 양반들 항상 길게 묘사합니다. 특히... 플로베르가 보봐리 부인 옷 설명할 때 페이지 3,4페이지를 넘길 때 저는 폭발했습니다. 크아아아아아왕 ~~~ 오죽했으면 보봐리즘`이란 말이 탄생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해는 가더라고요. 지금은 나이키 덩크 하이`의 모양새를 설명하기 위해 4페이지에 걸쳐 묘사하는 작가는 없잖습니까. 누구나 쉽게 그 신발 이미지를 취할 수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현대 작가는 그저 용팔이가 나이키 덩크 하이를 신었다. 이렇게 묘사하지만 사진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시대에는 독자에게 이미지를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는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독자는 사진을 접할 기회도 거의 없고 사진을 접한다고 해도 흑백이니 말입니다...
그래도... ㅎㅎㅎㅎ 야무 님 말씀처럼 율리시즈보다 지루하지는 않을 겁니다. 율리시즈 읽다가 정말 폭발하는 줄 알았습니다. ( 언젠가 맘 먹고 다시 도전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cyrus 2015-08-14 21:11   좋아요 0 | URL
곰발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플로베르, 에밀 졸라가 글을 쓰던 시대에 처음으로 사진기가 등장했을 겁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지만, 정밀성이 높지 않았어요. 이때까지는 사진기보다는 사람의 눈이 더 믿을만했고 정확했죠. 정말 플로베르나 모파상이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을 보면 진짜 눈으로 본 걸 그대로 옮긴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적이에요. <율리시스>는 무더운 날씨에 읽으면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책이 엄청 무거워서 가뜩이나 짜증나는데, 계속 읽다보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ㅎㅎㅎ

transient-guest 2015-08-15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소설보다 재미있는 소설이 발자크 본인의 일생입니다. 저는 `고리오 영감`을 읽으면서 처음 발자크를 접했는데요, 그 후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보면서 발자크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작품도 좋지만, 그냥 발자크란 사람의 삶이 어쩌면 그리도 희극과 비극을 적절히 섞어놨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발자크란 이름만 떠올려도 웃음이 나와요.ㅎㅎ 그리고 제 추측입니다만, 발자크의 작법은 어느 정도 시대적인 영향도 있는게 아닐까 합니다. 플로베르도 그렇고 길고 복잡한 서술을 많이 사용하잖아요. 물론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ㅎ

cyrus 2015-08-17 22:2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난 달 말부터 발자크 평전을 읽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이 평전을 읽고 나서야 그의 소설도 새롭게 보였어요. 한편으로는 그가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서 외롭게 글을 써나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연민이 느껴져요. 게스트님 생각에 동의해요. 스탕달도 발자크와 비슷하게 문장이 대체로 길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이 있어요. ^^
 

 

 

 

 

 

 

 

 

 

 

 

 

 

 

 

 

* 『붉은 여인숙』(L'Auberge rouge, 1832년,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

** 이야기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동명 제목의 드라마가 나왔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인기를 끈 작품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도 잘 알려진 작가가 쓴 《빙점》은 발표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인 소재를 담고 있었다. 불륜, 유괴, 살인, 자살. 이 정도면 요즘 막장 드라마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들이 한 번쯤 군침 흘릴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한 드라마 ‘빙점’은 총 세 차례나 제작되었다. 그래도 《빙점》이 문단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원죄 의식이 깔렸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는 인간이 용서할 수 있는 윤리적 허용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독자를 향해 묻는다.

 

병원장 게이조의 아내와 안과 의사가 몰래 바람을 피우는 사이에 병원장의 딸이 유괴범에 납치되어 살해당한다. 게이조는 요코라는 여자아이를 양녀로 데려온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복수하기 위한 병원장의 계략이다. 요코는 친딸을 살해한 범인의 딸이었다. 게이조의 아내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요코를 친딸만큼 애지중지 보살핀다. 하지만 아내도 요코의 정체를 알게 된다. 아내는 더 이상 친딸을 죽인 살인자의 딸을 키우고 싶지 않다. 그리고 요코의 결혼까지 막으려고 한다. 결국, 자신이 살인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요코는 불행한 악연을 끊어버리려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녀는 유서에서 살인자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의 고통을 받는 자신의 억울한 상황에 대해서 하소연한다. 핏줄의 죄는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소설에 나올법한 최악의 상황을 실제로 겪는 당사자나 그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난처하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붉은 여인숙』에서도 살인자의 딸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는 요코처럼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아버지가 과거의 살인 사건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불편한 심정을 느끼는 사람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다.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게 된 남자의 사연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살인 사건의 경위부터 소개하겠다. 프로스뻬르 마냥프레데릭 따르뻬이유라는 두 명의 초급 군의관이 독일 라인 강에 있는 여인숙에 머문다. 그곳에서 역시 여인숙에서 머무는 사업가를 만난다. 사업가의 가방에는 엄청난 양의 현금과 보석이 들어 있다. 악마는 프로스뻬르를 유혹한다. 프로스뻬르는 사업가를 죽이고 그의 가방을 훔치는 위험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그는 순간적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잠든 사업가를 죽이려고 했으나 양심의 천사가 그의 행동을 저지한다. 프로스뻬르는 안 좋은 상황을 애써 지우려고 여인숙 밖으로 나와 잠시 바깥 공기를 쐰다. 그러고는 다시 잠을 청하는데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 여인숙 방 안에서 사업가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동료 군의관 프레데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프로스뻬르는 사업가를 살인한 혐의로 체포된다. 그는 자신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결백했으나 총살형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사업가의 돈에 눈이 멀어 그를 죽이는 상상을 했기 때문에 양심을 조금이라도 배반한 죄로 총살형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결국, 프로스뻬르는 살인자라는 낙인을 가슴에 달고, 총살형을 받는다.

 

자신의 결백함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고 포기하는 프로스뻬르의 모습 그리고 프레데릭이 사건 당일에 홀연히 사라지는 장면 때문에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진다. 작품 속 화자가 여인숙 살인 사건을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자, 마침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레데릭은 자신이 의심받는 상황을 애써 피하려고 한다. 프레데릭의 딸과 결혼을 앞둔 남자는 당황한 장인의 표정을 읽고, 그를 여인숙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자가 장인의 혐의를 밝히면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복잡해진다. 일단 살인자의 딸과 결혼하면 남자는 살인자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그 유산의 일부는 과거에 살인자가 훔친 현금과 보석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남자의 양심은 이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다. 만약에 재산을 사회에 반환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장인의 죄를 고백한다면 호화로운 귀부인의 삶을 꿈꾸는 아내의 미래가 사라진다. 남자는 결혼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기 위해서 열일곱 명의 친구들이 참여하는 투표로 결정하기로 한다. 아홉 명이 결혼을 반대하는 결과가 나온다. 그렇지만 남자는 투표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살인자의 자식에게 살인자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다만, 살인자가 부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재산으로 어떤 이익을 누리려고 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더욱이 의도적으로 그 이익을 챙겼거나 챙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공범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장물 취득죄를 면하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여자를 끝까지 지키고 싶은 남자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건의 진실은 공개해야 한다. 억울하게 살인죄 누명을 씌운 망자를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프레데릭은 극심한 병의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둔다. 만약에 프레데릭이 여인숙 살인 사건에 관련된 숨겨진 진실을 제대로 밝혔더라면, 남자는 떳떳하게 장인의 죄를 공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프레데릭은 진실을 회피하고 숨긴 죄로 인해서 천형을 받은 것일까. 그렇게 받아들이기에는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붉은 여인숙』은 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가득하다. 이 이야기를 접한 독자는 어디서부터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혼동하게 된다.

 

 

 

 

 

 

 

 

 

 

 

 

 

 

 

 

 

 

※ 발자크는 <인간 희극>의 세계를 묘사할 때, 작품 속 인물들을 또 다른 작품에 재등장시켰다. 프레데릭 따르뻬이유는 《나귀 가죽》에서 부유한 집주인으로 등장한다. 그가 어떻게 막대한 재산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붉은 여인숙』을 읽으면 된다. 《나귀 가죽》에 나오는 프레데릭은 나귀 가죽으로 단숨에 부자가 된 라파엘 앞에서 아부를 떤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자 앞에서 굽실거리는 비열한 자와 법의 힘을 무력하게 만들어 '갑' 행세하는 부자가 있었다.

 

 

“당신은 재산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군. 재산은 무례해도 된다는 면허증이지. 당신은 이제 우리 편이오. 여러분, 황금의 권능을 위해 건배. 6백만 프랑의 자산가인 드 발랑탱 씨는 권좌에 올랐소. 그는 왕이오,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소. 그는 다른 모든 부자들처럼 만인의 위에 군림하오. 앞으로 그에게 ‘모든 프랑스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인권선언 첫머리에 새겨진 거짓말일 뿐이오. 그가 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오. 백만장자들에게는 단두대도, 사형집행인도 없소.” (《나귀 가죽》 중에서,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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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1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빙점... 요즘 아직도 이 소설 읽는군요.

cyrus 2015-08-12 21:42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에 <빙점>을 처음 읽었을 땐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다시 읽어보니까 처음에 읽었을 때 보지 못했던 이야기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북다이제스터 2015-08-12 21:44   좋아요 1 | URL
저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요. 중학교 때 읽고 괜히 심숭생숭하던 느낌 다시 느껴보고 싶습니다. ^^

stella.K 2015-08-13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빙점이 절판된 줄 알았더니 어디선가 계속 나오는구나.
난 이걸 두 번 읽었지. 사춘기 시절 범우사판으로 읽었는데
그건 거의 다이제스트로 된 거였고, 30대 초중반 무렵쯤 다시 읽었던 것 같아.
한 권이 거의 500페이지쯤 되는 책 두 권짜리로.
다시 읽어도 좋더군. 아마도 이 책으로 내가 일본 문학을 알기 시작했던 것도 같아.
한때는 미우라 아야꼬가 좋아서 전작주의로 읽었던 적도 있는데
지금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구만. <길은 여기에>인가 하는 수필집은 정말 좋더군.
같지 않은 기독교 간증집이 판을 치는데 그런 거 읽는 거 보다
이 책을 읽는 게 기독교 신앙 입문에 훨씬 좋을 거라고 자부한다.^^

cyrus 2015-08-13 21:22   좋아요 0 | URL
<빙점>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일본소설 스테디셀러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 미우라 아야코에 대해서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빙점> 말고는 뭘 읽어야할 지 몰랐어요. 제가 무교인데다가 아야코의 책이 워낙 많이 나와서 딱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요. <길은 여기에>는 그냥 제목만 들어봤어요. 누님이 추천한 책이라면 꼭 읽어봐야겠어요. ^^
 

 

 

 

 

 

* 『사막에 싹튼 열정』

(Une Passion dans le désert, <인간 희극> 제1부 풍속 연구 '군대생활 장면')

 

 

 

발자크의 <인간 희극> 제1부 ‘풍속 연구’는 총 여섯 가지의 ‘장면’으로 분류된다. ‘사생활 장면’, ‘지방생활 장면’, ‘파리생활 장면’, ‘정치생활 장면’, ‘군대생활 장면’, ‘시골생활 장면’이다. 발자크의 대표작인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데》 등은 제1부에 포함되어 있다. ‘정치생활 장면’은 아직 단 한 편도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피에르 바르베리스의 《발자크》(화다, 1989)에 ‘정치생활 장면’ 수록작 <Z. 마르카> 일부가 인용되었지만, 이것만 가지고 작품의 특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군대 생활 풍경’에 발자크의 처녀작 <올빼미 당원>이 수록되어 있음에도 이작품 또한 번역되지 않았았다. 그나마 유일하게 번역된 작품이 바로 『사막에 싹튼 열정』이다. 분량이 짧은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외국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모은 《거짓말에 관하여》(중명, 2000)에 수록되었다. 네이버 책 정보에 검색하면 《거짓말에 관하여》에 관한 책 소개를 확인할 수 있다. 마크 트웨인, 안톤 체호프, 데이비트 허버트 로렌스, 도스또예프스끼 등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발자크의 『사막에 싹튼 열정』은 이 책 맨 마지막에 나온다.

 

작품의 화자는 애인과 함께 동물원을 구경하고 난 후에 동물도 인간처럼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애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화자는 동물 감정설을 믿게 된 계기를 밝힌다. 과거에 화자는 동물원 쇼를 구경하다가 한쪽 다리가 절단된 늙은 병사를 만나면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병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화자가 애인에게 들려준다. 병사는 한창 젊은 시절에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이집트 원정에 참전했다. 그는 이집트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으나 구사일생 탈출에 성공한다. 프랑스군 야영지를 찾으려고 광활한 모래사막을 헤매다가 임시 거처로 정한 동굴 속에 휴식을 취했는데, 하필 그곳에서 표범을 만난다. 병사는 표범이 자신을 공격하여 잡아먹을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병사의 걱정과 반대로 표범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에 다가가서 반려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고 장난을 친다. 병사가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표범은 더 좋아했다.

 

 

 

 

 

페르낭 크노프  「스핑크스 또는 애무」 (1896년)

 

사자 머리만큼이나 큰 표범의 머리는 여성스러운 우아함을 띠고 있었고 맹수의 잔인성을 속에 감춘 채 체구는 호리호리한 여성의 몸매처럼 잘 빠져 있었다. 한마디로 사막의 표범은 와인을 마신 네로 황제처럼 기분 좋은 듯 쾌활함을 풍기고 있었다. (『사막에 싹튼 열정』 중에서, 260쪽)

 

 

표범을 향한 경계심이 사라지게 되자 병사는 여성 같은 표범에게 ‘미뇽’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병사는 표범이 잠들면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표범은 병사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병사 곁에 조금이라도 떨어지지 않는다. 병사가 모래 수렁에 빠졌을 때, 표범이 그를 구출하기도 한다. 표범의 은혜에 감동한 병사는 죽을 때까지 표범과 같이 지내기로 한다. 이 사건 이후로 병사는 표범에 여성의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과 표범의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갑자기 표범이 야생 본능을 지닌 이빨을 드러내면서 병사의 다리를 문다. 병사는 살고 싶은 마음에 칼로 표범의 급소를 찌른다. 표범의 공격으로 병사는 다리 한쪽을 잃어버렸지만, 애지중지하게 여겼던 표범을 죽인 행동에 죄책감을 느낀다. 극적으로 구조된 병사는 전 세계를 누비면서 항상 가슴 속에 표범 가죽을 품고 다닌다. 그러면서 표범과 함께했던 사막이야말로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예찬한다.

 

발자크가 글을 썼던 시절에는 실제로 동물 감정설이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스위스의 관상학자이자 의사인 요한 카스파르 라바터(1741~1801)는 <관상학 소고>라는 책에서 동물과 인간의 감정과 성격이 서로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을 과학적으로 비교한 찰스 다윈보다 더 먼저 나왔다. 그러나 라바터의 관심은 동물학이 아니라 관상학이었다. 만약에 그가 동물 연구에 과학적으로 심혈을 기울였다면, 다윈처럼 그의 이름이 명예롭게 동물학 연구사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라바터가 쓴 책은 유럽 전역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관상학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라바터는 얼굴의 표정이나 형태를 통해서 감정을 정확히 읽어내려고 했다. 그의 관상학은 생리학, 해부학 등 당시에 새롭게 주목받는 학문을 총망라한 것이라서 그누구나 믿을 수 있는 그럴싸한 정설로 자리잡았다. 발자크도 라바터의 이론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라바터의 관상학뿐만 아니라 프란츠 요제프 갈(1758~1823)의 골상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발자크는 사람의 외면을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그 사람의 내면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리학적 관찰로 인간의 속성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을 반영하여 쓴 작품이 바로 <결혼 생리학>이다.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 곳곳에 등장인물을 관상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귀 가죽》(문학동네, 2009)에서 라파엘은 자신에게 엄격한 금욕생활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심술궂고 깐깐한 인상으로 묘사한다.

 

“큰 키에 메말라 홀쭉이며, 면도날같이 예리한 얼굴에 안색은 창백하고, 말씀은 항상 짤막하게 하는데다 노처녀처럼 심술궂으며 고위 행정관료처럼 깐깐한 그런 양반이었네. 아버지의 부성애는 나의 발랄하고 유쾌한 생각들을 굽어보듯 감시하고, 납관 속에 가두어버렸네. (...) 나는 학교 다닐 때 선생보다 아버지를 훨씬 더 무서워했어.” (《나귀 가죽》 중에서, 139쪽)

 

소설 결말에 병사는 사막의 아름다움이 어떤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사막의 아름다움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이 작품은 다른 발자크 소설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낭만주의적 성향이 나타난다. 낭만주의자들은 이국적 풍경에 매혹되었고, 동방 여행에 대한 동경심을 문학 및 예술작품의 모티브로 삼았다. 리얼리스트 발자크도 한때 낭만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사막을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간직한 곳으로, 그곳에 사는 표범을 매혹적인 관능미를 가졌으면서도 때로는 야만적으로 변하는 '사막의 여제'로 묘사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다면, 자신의 책에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동양을 그려낸 문제 소설로 이 『사막에 싹튼 열정』 을 추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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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1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발자크 책 리뷰를 자주 올리시니 누군지 모르지만 괜시리 구미가 점점 발동합니다. ^^

cyrus 2015-08-12 17:56   좋아요 0 | URL
발자크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서 그가 쓴 작품들을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전작주의 독서를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