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은 다양하다. 시험이나 과제 등의 필요 때문에, 혹은 연구의 목적으로 책과 자료를 뒤지기도 한다. 그저 나처럼 책 읽는 것이 편하고 좋아서 늘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도 있다. 그 목적이 어디에 있던지,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동안에는 누구나 자기만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독서는 ‘자유로움’에서 멀어지고 있다. 책을 잘 읽으려면 책을 통해 실제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 실생활에 적용하는 독서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 혼미한 시대에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기본요건으로 ‘독서법’이 강조되고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독서를 통한 성공담을 들려주는 자기계발 서적들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책 좋아하기로 소문난 유명인사들은 인문고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특히 성공한 경영인들이 고전이나 문학 등 인문학 전공자가 많았다는 사실은 독서로 쌓는 인문학적 교양과 창조력이 경영의 핵심역량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맞춰 권위 있는 교육기관 또는 연구기관은 고전과 현대서적을 골고루 소개한 도서목록을 만든다.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의 저자 이지성은 인문고전 독서가 두뇌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체계적으로 독서를 하면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도 천재적인 지성을 지닌 두뇌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문고전을 읽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바꿔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마땅히 대답하기 힘들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지성은 고전에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이지성의 책 제목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검색해보면, 연관 검색어로 ‘리딩으로 리드하라 목록’이라는 것도 나온다. 《리딩으로 리드하라》 뒤편에 있는 ‘단계별 추천도서 목록’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전의 인문학 지식이 둔재를 천재로 만들어주는 현자의 돌이 될 수 있을까? 고전을 즐겨 읽는 사람으로서 이지성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오독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딜레당트’다. 그래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독서를 열심히 하면서 깊이 있는 내공을 갖춘 이지성의 노력을 존경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성공’ 또는 ‘천재’라는 단어의 틀에만 맞추려는 그의 독서 인식에 반대한다. 이지성은 출판계의 연금술사다. 연금술사들이 하는 일이란 값싼 금속인 납을 화학반응을 통하여 가장 값비싼 금속인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처럼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지성은 마치 황금이라는 허상을 좇았던 중세의 연금술사처럼 고전 독서가 무조건 ‘황금빛 성공’을 보장해줄 거라고 주장한다.

 

이지성의 ‘단계별 추천도서 목록’은 알고 보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우리나라 유명 대학교 추천도서 목록을 외국 명문대가 선정한 고전 도서 목록을 적절하게 조합한 것이다. 이 목록에 미국 그레이트 북스 재단이 선정한 고전 도서 목록도 포함되어 있다. 시카고 대학 총장 로버트 허치슨시카고 대학을 세계 명문 대학으로 키우기 위해서 졸업 전까지 철학, 예술, 인문기초 영역에서 100여 권의 인문고전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교육방침을 마련했다. 시카고 주 정부는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고전을 읽고 토론할 수 있도록 ‘그레이트 북스’ 재단을 설립했다. 이지성은 시카고 대학의 교육방침을 옹호하면서 ‘천재’가 되는 인문 고전 독서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사실 이 내용만 보더라도 순진한 독자는 “인문 고전을 열심히 읽으면 사회에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구나.”라고 믿는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에는 고전 독서를 통해서 성공하는 천재로 거듭나는 사례가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한다. 비약이 있는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자녀를 원하는 부모들은 저자의 말을 맹신하게 된다. 그러고는 ‘단계별 추천도서 목록’대로 자녀에게 고전 읽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한다.

 

이지성 열풍은 사유와 비판이 결여된 인문학이 ‘문화자본’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공하기 위한 인문학과 독서’로 향한 대중의 관심 속에는 계층 상승의 열망이 숨어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에서는 자녀에게 일찍부터 책을 읽힌다. 이지성은 이러한 사례를 반복 언급하면서 자녀에게 가난의 대물림을 주지 않으려면 일찍부터 고전을 읽으라고 말한다. 이지성식 독서법의 등장이 인문학 열풍에 기여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이는 곧 인문학이 ‘성공’과 ‘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에 동의하는 것과 같다. 이지성 또는 이지성의 책을 좋게 보는 독자에게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공부의 배신》(다른, 2015)을 권한다.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명문대의 엘리트 교육이 현실에 순응하기만 하는 양 떼를 양산한다고 지적한다. 이지성이 그렇게 좋아하던 그레이트 북스 재단의 독서 프로그램도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다.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독서 프로그램 개발의 이면에는 이주민 자녀, 유대인 등을 미국의 지배계급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공부는 사유와 비판하는 방법을 잊게 한다.

 

이지성은 독자에게 자신이 만든 도서목록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자신만의 도서목록을 만들 것을 당부한다. 정말로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인터넷과 SNS에서는 이지성의 충고가 배제된 채 ‘단계별 독서목록’이 공유되고 있다. 심지어 그레이트 북스 재단의 도서목록은 독서 커뮤니티에서 ‘명문대의 독서목록’이라는 이유로 소개된다. 도서목록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목록에 있는 책을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는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목록에 있는 고전이 정말 나 자신의 정신을 살찌우게 하는 좋은 영양소가 될 수 있는지를. 천 년 동안 세계가 인정한 유명 고전이라고 해서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를 다 만족하게 하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완벽한 고전은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유명한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유명인사가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성공하기 위해서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너무 단순하다. 그리고 평생을 그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무슨 재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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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3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4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5-09-0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큼 별 짜게 주셨군요^^

cyrus 2015-09-04 18:50   좋아요 1 | URL
원래 별 한 개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나름대로 책 내용의 장점이 있어서 별 두 개로 정했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09-04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이 이끄는 인문학 그룹이라해야하나 폴리~ 라 하는것이 있는데 고등학교로도 인문학강좌 나가더군요~ 상위권학생들에게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데~~
좀 입맛이 쓰더군요~~ 강사진도 빵빵하던데~ 역시나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비슷한 이유로 이 분 별로 안 좋아해요. 리딩이 리드하기도 전에 재미가 먼저 없어져요~~ ㅎㅎ

cyrus 2015-09-04 18:57   좋아요 0 | URL
저도 이지성 씨가 운영하는 인문학 그룹, 봉사활동 단체가 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이지성 비판론자들은 저자의 활동 또한 현실성 떨어진다고 비판하더군요. 제 생각에는 학교 측이 성적 상위권 학생들을 따로 뽑아서 인문학 그룹 활동을 권했을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인문학 그룹이 진행된다면 모든 학생들에게 인문학 공부를 권하는 이지성 씨의 목적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저는 책 속에 사례와 일화가 너무 많아서 지루했습니다. ^^;;

fledgling 2015-09-04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면 ˝금나와라 뚝딱~!˝

cyrus 2015-09-04 19:30   좋아요 0 | URL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이 얼어붙은 내면을 깨는 도끼라고 말했는데, 책을 읽으면 `금도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순오기 2015-09-04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구 공공도서관에서 이분을 초청하려고 하는데...

cyrus 2015-09-04 19:34   좋아요 0 | URL
아마도 책에 나온 내용을 언급할 것 같습니다.

transient-guest 2015-09-04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지성의 초기 저작들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만, 지금까지의 그의 행보나 최근 저작을 보면 그 자신이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써의 독서론을 설파하는 듯 하여 이제는 읽지 않습니다. 자기계발서적이라는걸 읽을 필요성을 느끼는 인생의 시점이 있는데, 너무 빠지지 않으면 괜찮습니다만, 나중까지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문제가 있지요. 저는 이지성의 초기작은 돈벌기 위해서, 중기에는 이와 함께 진지한 내용도 있었지만, 얼마전부터는 거의 독단과 독선의 오류에 푹 빠져 아무 객관적인 증거도 없는 말로 자기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듯 합니다.

cyrus 2015-09-04 19:38   좋아요 0 | URL
이지성 책의 비판점을 아주 잘 설명했습니다. SNS에서 이지성을 비판하는 글을 보게 되는데, 생각보다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어요.

yureka01 2015-09-04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부터 인문학의 바람이 불었죠.
스티브잡스가 인문학에서 아이폰이 나왔다라고 말하기 전에는 인문학의 인자도 꺼낸 적도 없었죠.
기업에서 아이폰 따라 할려니 잡스가 인문학이라고 하니 그제서야 기업에서 인문학 강좌를 열어 우리도 아이폰 같은 생각 나와서 아이폰처럼 따라하려는 기업의 심리였다고..어느 인문학자는 지금의 인문학은 짝퉁이라고 하더군요.

인문학은 그야 말로 사람의 학문인데 돈뻘이 수단이된 인문은 가짜라고..

저도 공감 되더군요..

cyrus 2015-09-04 19:43   좋아요 0 | URL
`잡스의 등장= 인문학 전성기`라고 주장했던 기자들이 참 많았었죠. 거기에 맞춰서 출판사들이 책을 만들었고요. 짝퉁이 너무 많았어요.

페크pek0501 2015-09-04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에요. 좋은 책이 어떤 책인지를, 자신에게 필요한 책이 어떤 책인지를 알기 위해선 많이 읽어 봐야 하는데, 어떤 목록에 따라 읽게 되면 재미있는 책을 만나기가 어려울 수 있어요. 책이 재미없다고 느끼게 되면 큰일이죠. 그러니 우선 쉽고 재밌는 책부터 읽어서 책과 친해지는 것이 첫 번째인 것 같아요.

“반드시 읽어야만 하고, 행복과 교양에 필수적인 도서목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45쪽)
“최우수 도서 100선이나 최우수 작가 100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57쪽)
- <헤세의 문장론>에서.


cyrus 2015-09-04 19:48   좋아요 0 | URL
페크님이 소개한 헤세의 문장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고전이 `무조건 읽어야 하는 좋은 책`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사람들이 고전을 어려워하고 안 읽으려고 해요.
 

 

 

 

 

 

 

 

 

 

 

 

 

 

 

 

 

 

 

 

서울 같은 대도시를 거대한 장난감 인형 집이라고 가정해보자.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인형이 된 도시인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이런 조종의 끝은 생산성 향상에 맞추어진다. 도시 전체가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각 개인은 정신과 넋을 잊은 채 날마다 살아간다. 집 밖을 나서자마자 자동차로, 시간에 맞추기 위해, 몸과 유리된 노동을 위해, 미친 듯이 움직인다. 세 끼 배불리 먹고 여기에 더하여 약간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번다는 것이 이런 도시 생활을 무마해주는 자본주의의 선물이다. ‘쉴 새 없이 쇼핑하라’는 자본주의의 마법에 걸린 채 돌아가는 하루하루. 현대인을 매혹하며 진화하는 포장술은 그 알맹이에 대한 욕망을 부채질하기에 성공했다.

 

발터 벤야민은 이미 자본주의 대도시의 이런 문제들을 짚어냈다. 도시와 만나는 벤야민의 방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는 구경꾼처럼 현란한 야경에 온전히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다. 행인처럼 작은 걸음 하나를 옮길 때마다 이해득실을 따지며 도시를 오가지도 않는다. 도시의 산책자다. 벤야민은 근대 도시를 지켜보면서, 아름다우면서 야만적인 곳으로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허구적 대상)의 장소’라고 했다. 도시가 화려할수록 그늘도 짙다. 그늘에 가려진 도시의 얼룩은 우울이다. 욕망과 소비가 창궐하는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사는 사람은 그 같은 한없는 반복에 심각한 권태를 느낀다.

 

서울은 근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 도시다. 전통문화와 근대문화, 소비문화와 단절의 문화가 혼재한 ‘21세기 한국판 아케이드’인 셈이다. 서울은 한국의 정치권력과 행정 기능이 집중된 곳일 뿐만 아니라, 문화 지형에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곳이다. 서울에 새롭게 형성되는 시가와 구조물은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 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서울은 그 자체로 이미 희망과 꿈의 도시였다. 콘크리트 건물들, 특히 아파트는 그 욕망의 응집체다. 이 욕망은 재개발과 투기라는 이름으로 무한증식하며 허물고 새로 짓기를 반복한다. 우악스러운 건물의 모습에 도시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도시인 삶의 모습 또한 조금씩 변해갔다. 소유한 사람에게는 더 큰 여유를, 소유하려는 사람에게는 상실을 안겨준다.

 

도시는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는 사회적 장소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권력과 재력가들이 독차지하는 영역이었기에, 도시는 시민 중심이라는 실존적 개념을 이해 못 하고 있다. 주거공간은 시민의 개인 삶을, 도시는 시민의 공동생활을 보장하는 곳이다. 돈으로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이 주제가 되는 사회학적 원칙 대신 물질만능주의와 정부의 컬라버레이션에 조정되고 있다. 그 결과 콘크리트 집합체인 청계천, 광화문광장 등이 생겨났다. 파괴와 재건이 성장을 담보한다는 믿음만을 기초로 한 개발 계획은 오히려 도시를 초국적 자본의 투기 지역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기형적인 도시화는 과거의 흔적들을 말끔하게 지워나간다. 오늘날의 도시는 더 이상 실존적 장소의식을 환기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적인 교류가 차단되어가는 소외의 공간이 되어간다.

 

경제적 가치를 생산해내고 자본주의 체제를 작동시키는 토대로서의 도시의 속성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시는 역사와 문화를 지닌 장소이자 삶의 환경이다. 도시의 미래는 인간과 도시가 맺는 여러 관계를 두루 품어 구상되어야 한다. 이는 살아가는 방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후손을 위해 지구를 보존해야 함을 누구나 인정하는 이 시점에, 우리가 자라온 터전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벤야민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도시를 기록하는 것은 결코 과거를 간직하거나 회고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조건 지어지고 전개되는 바탕이자 맥락으로서의 공간을 보여주려는 것이며, 공간의 역사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그의 기록 행위는 도시인의 소외감을 개인적 체험의 형태로 드러냄과 동시에 과거 기억의 재현을 통해 거기 맞서고자 하는 절실한 의지를 보여준다. 도시에서 얻은 천박한 욕망을 벗어날 수 있는 유토피아를 찬기가 힘들고, 떠났다가도 결국 다시 도시로 돌아와 머물며 살 수밖에 없는 도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벤야민식 ‘삶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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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9-0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시는 단 하루라도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으면 식물상태에 빠지고..
단 하루라도 빼내지 않으면 더러워지는 곳.

사람들이 너무많이 모여 있으니 사람 귀한줄 보다는 사람이 천시받기 마련이고
그곳에 자본은 모두를 조종하는거 같더군요.

도시계획을 배웠지만 여전히 도시는 탈출을 감행하고 싶은 곳 1순위 ㄷㄷㄷ

cyrus 2015-09-03 18:07   좋아요 0 | URL
저는 파리지옥에 빠진 파리 한 마리 같아요. 도시생활의 달콤한 맛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여 도시생활에 빠져나오지 못하겠어요.

방랑 2015-09-03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난 우리 또래의 친구를 새로 알게 되면 꼭 꿈틀거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얘기는 오 분도 안 돼서 끝나버립니다.  

김승옥, 서울,1964년 겨울

cyrus 2015-09-03 18:09   좋아요 0 | URL
도시의 차가운 현실을 설명해주는 명문장이군요. 좋은 문장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랑스어 ‘Chagrin’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슬픔’, 또 다른 하나가 ‘표면이 오돌토돌한 가죽’이다. 발자크의 소설 『Le Peau de Chagrin』를 처음으로 번역한 역자는 제목을 ‘나귀 가죽’으로 정했다. 라루스 대백과사전에는 ‘Chagrin’를 ‘양, 염소, 나귀 등에서 얻어지는 표면이 오돌토돌한 가죽’이라고 정의한다. 작품에는 정체불명의 가죽을 나귀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가죽이 점점 줄어들수록 주인공의 목숨도 줄어든다. 주인공은 죽음을 앞두는 자신의 상황에 절망을 느끼는데, 작품 제목의 ‘Chagrin’은 '가죽'과 '슬픔', 복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Le Peau de Chagrin』은 우리말로 번역하기 힘든 제목이다. 『Le Peau de Chagrin』이 번역되지 않았을 때, 이 소설 제목을 제각각 다르게 불렀다. 다음에 나오는 두 개의 인용 문장은 알라디너 하이드님의 글에서 참고했다.

 

 

프로이트는 죽을 때까지 평생 하던 일을 계속했다. 즉 언제나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발자크의 『들나귀 가죽』이었다. 그는 “이 책이야말로 내게 정말 필요한 책이야”라고 말했다. (미셸 슈나이더, 《죽음을 그리다》 중에서)

 

해즐릿은 자신이 “클랜골른의 여관에서 셰리주 한 병과 식은 닭 요리를 앞에 두고 『신 엘로이즈』를 들고 앉아 있던” 날이 1798년 4월 10일이었다는 사실을 줄곧 기억했다. 롱펠로 교수가 대학에서 훌륭한 프랑스어 문체를 훈련하는 방법으로 발자크의 『상어 가죽』을 읽으라고 조언했던 것을 내가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잔 와이즈 바우어, 《독서의 즐거움》 중에서)

 

 

《나귀 가죽》을 읽은 독자라면 ‘상어 가죽’, ‘들나귀 가죽’이라는 표현이 무척 생소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지만 두 가지 명칭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다. ‘Chagrin’은  ‘상어 가죽’ 을 의미하는 영단어 'Shagreen'의 의미와 같다. 학술 논문 전문 웹사이트에 ‘상어 가죽’, ‘들나귀 가죽’을 검색하면 불문학 전공자들이 쓴 『Le Peau de Chagrin』에 관한 논문들을 확인할 수 있다.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1969년에 쓴 논문에 『Le Peau de Chagrin』을 ‘상어 가죽’ 으로 썼다. 『Le Peau de Chagrin』의 제목을 ‘마법 가죽’으로 쓰기도 하는데 제목만 언급되는 책 속에서 이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최초의 진정한 소설인 〈마법 가죽〉에서 발자크는 자신의 형식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여기서 그는 장래의 목적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중에서, 178쪽)

 

발자크는 《마법 가죽》 초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파,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중에서, 438쪽)

 

철학적 연구에 속하는 『마법 가죽』 (1831) 에서는 발자크의 신비주의를 엿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구체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발자크의 열정이 비현실적으로 구현된다. (대니얼 J. 부어스틴, 《창조자들》 중에서, 226쪽)

 

 

그밖에도 ‘도톨 가죽’, ‘야생 당나귀 가죽’으로 표현한 책도 있다.

 

 

거기에서 (< 도톨가죽>에서 발자크의 표현으로) 고객들은 몇 시간 만에 파산하고 ( 인근 총 제조업자의 도움으로) 자살하고, 쉬지 않고 이어지는 파티에 출석한 평복사제의 도움으로 더 좋은 세계로 갔다. (앨리스테어 혼, 《나폴레옹의 시대》 중에서, 113쪽)

 

같은 맥락에서 발자크의 소설 《야생 당나귀 가죽 Wild Ass’ Skin》 도 이상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A.J. 제이콥스,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중에서, 198쪽)

 

 


《시간 추적자들》(하랄트 바인리히, 황소자리, 2008)는 『Le Peau de Chagrin』의 명칭이 통일되지 않은 채 언급된다. 처음에는 ‘샤그랭 가죽’이라고 했다가, 그다음 쪽에서는 ‘야생 나귀 가죽’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 책의 주석에는 소설 제목을 ‘우툴두툴한 가죽’이라고 썼다.

 

 

이 최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샤그랭가죽이 모두 소진되고 이와 함께 그의 인생 시간도 남김없이 소진돼버렸다. 괴테의 극작품과 유사하게 발자크의 소설도 주인공의 죽음과 함께 최고의 순간에 대한 의식(혹은 환상) 이 이루어지면서 끝을 맺는다. (하랄트 바인리히, 《시간 추적자들》 중에서, 88쪽)

 

이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주인공이 야생 나귀 가죽을 샀던 골동품상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보자. (하랄트 바인리히, 《시간 추적자들》 중에서, 89쪽)

 

 

조금 특이한 사례이지만, 《공포문학의 매혹》 (H.P. 러브크래프트, 북스피어, 2012)의 역자는 '거친 엉덩이 피부'라고 썼다. 처음에는 역자의 단어 선택에 의아했는데, 하이드님의  댓글 답변 덕분에 궁금중이 해소되었다. 상어, 나귀의 엉덩이 부위에 있는 가죽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기괴한 작품들을 독일 못지않게 활발히 배출했다. 『아이슬란드의 한스』를 쓴 빅토르 위고와 『거친 엉덩이 피부 Le Peau de Chagrin』, 『세라피타』, 『루이 랑베르』를 쓴 발자크는 자연적 요소를 다소간 활용했다.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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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09-0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번역이란게 정말 어렵(?)군요...^^

cyrus 2015-09-02 17:59   좋아요 0 | URL
외국 서적을 만들 때 편집자들의 노고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고생하는 사람은 바로 번역자일 겁니다. 독자가 번역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번역자는 그에 대한 비난을 감수 받아야 하니까요. ^^

yamoo 2015-09-01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이 써주신 발자크 페이퍼 보고 <나귀가죽> 샀어요!
정말 재밌을 것만 같은 기대감 만빵입니다~ 줄거리만 살짝 봤는데도 기대감이 업~ㅎㅎ
발자크가 문장을 지루하게 쓴다는 소리가 진짜인지 좀 확인도 해 볼겸...겸사겸사^^

재밌고 인상적이라면 사이러스님께 추천 10개를 날려 드릴게욤^^

cyrus 2015-09-02 18:02   좋아요 0 | URL
<나귀 가죽>이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이 읽어봐도 좋은 발자크의 작품입니다. 소설에 대한 야무님의 감상이 기대됩니다. ^^

:Dora 2015-09-02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엔 스탕달 시리즈로 올려주실거죠?ㅎ

cyrus 2015-09-02 18:03   좋아요 0 | URL
발자크의 소설을 다 읽으면 ‘스탕달-빅토르 위고-플로베르-모파상-에밀 졸라’ 순으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
 

 

 

 

 

 

 

 

 

 

 

 

 

 

 

 

 

 

 

 

 

 

* 《랑제 공작부인》 (La Duchesse de Langeais, 1834년, <인간 희극> 제1부 풍속 연구 ‘파리 생활 풍경’)

 

 

 

발자크의 소설 《랑제 공작부인》(La Duchesse de Langeais)이 처음에 발표되었을 때 불렀던 제목은 ‘도끼에 손대지 마(Ne touchez pas lahache)’이다. 이 작품은 금성세계문학전집 20번에 《골짜기의 백합》과 함께 수록되었다. 금성세계문학전집은 오래전에 판이 끊긴 터라 헌책방에서만 만날 수 있다. 공공도서관에서 이 전집을 만나려면 오래된 책들을 따로 보관하는 보존서고에 찾아봐야 한다. 대구에 있는 모 도서관이 유일하게 금성세계문학전집 전 120권을 보존서고가 아닌 일반 자료실에 보관하고 있다. 놀랍게도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몇 권은 낙장이 있지만, 읽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금성세계문학전집 20번 덕분에 발자크의 <인간 희극> 작품 목록에 관한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2015년 8월 6일에 발자크의 <인간 희극>을 소개한 글(‘펜 하나로 세상을 정복하다’)을 쓰면서 나는 제1부 풍속 연구 『파리 생활 풍경』의 작품 목록에 의문을 느낀 적이 있다. 한 달 전에 표로 정리한 『파리 생활 풍경』의 작품 목록이다.

 

 

 

 

 

 

피에르 바르베리스의 《발자크》(화다, 1989) 속에 있는 <인간 희극> 작품 목록을 살펴 보다가 ‘13인의 비밀 결사’ 라는 제목에만 번호가 없다. 나는 처음에 ‘13인의 비밀 결사’가 하나의 독립된 작품인데, 출판사의 실수로 번호를 넣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런데 이 추측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페라귀스》, 《랑제 공작부인》, 《황금빛 눈을 가진 여자》 옆에 ‘첫 번째 에피소드’, ‘두 번째 에피소드’, ‘세 번째 에피소드’라는 글자가 있다. 이 세 작품이 ‘13인의 비밀 결사’ 3부작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13인의 비밀 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보다 관련 정보가 많지 않다. 《랑제 공작부인》의 역자 해설이 그나마 13인 비밀 결사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제정 시대에 활동했던 비밀 결사라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나폴레옹 왕정 전복을 기도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모였을 것이다. 《페라귀스》, 《랑제 공작부인》, 《황금빛 눈을 가진 여자》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모두 13인 비밀 결사에 가담한 실존 인물이다. 재미있게도 발자크는 ‘13인의 비밀 결사’ 작품 서문에서 13명의 조직원이 보여준 대담성과 강인한 마음을 칭찬하고 있다. 발자크는 왕정을 지지한 보수주의자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는 이유로 작품 전체를 정치적 견해와 연관을 지어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사실 《랑제 공작부인》의 줄거리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을 탄생하게 한 작가의 연애 경험담이다. 《랑제 공작부인》을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전인 1831년에 발자크는 영국 부인의 이름으로 서명된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독자, 특히 귀부인들이 보낸 팬레터를 소중히 여겼던 발자크는 부인에게 답장을 보낸다. 몇 달 동안 편지로 교류하면서 영국 부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녀는 명망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인 카스트리 후작부인이었다. 발자크보다 세 살 연상인 후작부인은 전 남편 카스트리 후작과 헤어지고,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장남과 사귄 적도 있다. 카스트리 부인은 발자크의 이상형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발자크는 자신의 속물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재산 많은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발자크에게 이런 만남은 단순히 작가와 독자 간의 돈독한 우정 그 이상이다. 《발자크 평전》(푸른숲, 1998)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를 귀족 사회로 편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교만한 속물 덩어리로 보았다. 발자크는 부인의 저택에 드나들면서 부인과의 관계를 더욱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단둘이서 알프스를 여행할 정도로, 두 사람은 거의 애인처럼 지낸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히 식어버린다. 1832년 10월에 부인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발자크만 혼자 프랑스로 돌아온다. 부인은 자신을 ‘돈’, ‘명성’ 그 자체로만 보는 발자크의 속물근성에 실망했거나 아니면 육체적 관계를 강요하는 발자크를 매몰차게 거절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실 카스트리 부인은 발자크가 편지 덕분에 직접 만난 여성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발자크는 독자로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다. 여성 독자들의 팬레터는 못생긴 숙맥이었던 발자크의 남성성을 확 살려주었다. 발자크는 펜 하나만으로 모든 여성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이 사건 이후로 발자크는 카스트리 부인과의 교제를 이어가지만, 예전의 친밀한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카스트리 부인과의 연애는 발자크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는다. 발자크는 부인을 증오하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삶에서 겪은 가장 힘든 패배’라고 말했다. 이러한 가슴 아픈 작가의 연애사가 반영된 작품이 바로 《랑제 공작부인》이다.

 

《랑제 공작부인》의 남녀 주인공 아르망 드 몽트리보 장군과 랑제 공작부인은 발자크와 카스트리 부인을 상징한다. 랑제 공작부인은 사랑의 감정 때문에 뜨거워서 미칠 지경인 몽트리보의 심장을 더 애태우게 한다. 부인의 ‘밀당’에 약이 오른 몽트리보는 그녀를 증오하게 되고, 복수하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카스트리 부인을 향한 발자크의 진심 어린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의외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랑제 공작부인은 뒤늦게야 몽트리보의 구애가 진실이었다는 점을 깨닫고, 복수심에 불타오른 몽트리보 또한 분노를 누그러뜨려 그녀를 다시 만나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발자크는 몽트리보와 부인과의 비극적 사랑을 통해서 사교계라는 사회 구조에 조종당하고 희생된 개인의 감정을 보여준다. 랑제 공작부인은 상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몽트리보 장군을 향한 애정을 숨기지만, 결국에는 진실한 사랑을 선택한다.

 

《랑제 공작부인》을 번역한 역자는 이 작품을 ‘진실한 여성에 대한 찬가’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카스트리 부인에 대한 발자크의 복수가 투영된 작품으로 보는 해석을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역자의 해설에 동의할 수 없다. 전자의 해석으로 작품을 본다면, 카스트리 부인을 향한 발자크의 분노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과연 카스트리 부인은 소설 속 랑제 공작부인처럼 단지 자신의 상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발자크의 구애를 거절했을까? 발자크가 자신의 연애사를 미화하면서까지 《랑제 공작부인》을 쓰는 모습이 석연치 않다. 분명 발자크의 마음속에는 부인에 대한 미움의 앙금이 남아있을 것이다. 발자크가 카스트리 부인을 복수하기 위해서 《랑제 공작부인》을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발자크는 랑제 공작부인을 진실한 사랑 앞에 참회하는 인물로 설정했을까. 자신의 소설을 애독하는 여성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발자크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결혼 생리학》은 경제적으로 성공을 크게 거두지 못했지만, 여성 독자들의 관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 발자크는 여성의 생각을 정확하게 관찰했고, 그걸 글로 대신 표현했다. 그 당시 여성은 남성처럼 본명으로 글을 쓰지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여성들은 발자크의 소설을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 독자들은 발자크에게 팬레터를 보냈고, 그를 직접 만나고 싶어 했다. 《랑제 공작부인》처럼 서로 간의 오해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 연인의 사랑 이야기는 여성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통속적인 전개 방식이다. 

 

발자크는 자신을 장난감처럼 취급한 카스트리 부인과의 만남을 후회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애사를 소재로 소설을 쓰는 그의 행동이 잘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서 여성 독자에게 가까이 접근했고, 이런 만남을 지속해서 유지하여 귀족이 되고 싶어 했다. 발자크의 여성 편력은 언론으로부터 심한 조롱을 받았으며 인기 작가임에도 권위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발자크는 펜 하나로 세상을 정복하는 문학의 나폴레옹이 아니라 여자들을 정복하고 싶은 프랑스판 카사노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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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9-01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발자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글을 읽으며 헤르만 헤세가 자꾸 생각이 났어요 ㅎ 이 당시 문인들은 카사노바 같은 성향이 있는것 같다는 ㅎ

근대 참 대단해요 도서관 서고까지 파악하며 책을 찾기도하고 때론 헌책방에서 보물같은 책을 찾는모습 부럽습니다 ^~^

cyrus 2015-09-01 20:15   좋아요 0 | URL
재 생각이지만, 외국 문학가 중에서 평생 반려자와 함께 살았던 로맨티스트를 꼽으라면 많이 없을 것 같아요. 기억도 안 나요. ^^;;

페크pek0501 2015-09-04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속물이 아닐 것 같은데, 발자크를 보면 그렇지가 않군요. 이렇게 의외로 실망하게 만드는 작가들이 있더라고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애도 사랑하는지 바람둥이들도 있고요.《랑제 공작부인》을 읽어 보고 싶군요. ^^

cyrus 2015-09-04 21:03   좋아요 0 | URL
저는 <랑제 공작부인>이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남녀 주인공이 서로 오해를 하는 바람에 남자가 여자를 복수하려다가 다시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와 결말이 식상했어요. ^^
 

 

 

 

 

 

 

 

 

 

 

 

 

 

 

 

 

 

 

 

그는 불결한 생선 비린내가 풍기는 파리의 한 시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부적인 후각으로 모든 냄새를 소유하려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자신만의 고유한 체취를 풍기지 못한다. 사람 체취를 향으로 만들기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 이야기다. 후각에 민감한 주인공은 ‘변태’ 혹은 타락한 하층계급의 후손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정 사회계층을 차별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악취가 난다는 이유를 들이댔다. 18세기 계몽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에 곳곳에 근대적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오직 자신의 노동력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이들은 비위생적인 환경의 좁은 곳에서 집단으로 거주하는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주거조건은 전염병의 발병과 전파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상류층 사람들은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했고,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따라서 향수는 생활필수품인 동시에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데 악취를 없애려고 향수를 자꾸 뿌려봤자 소용없었을 것이다. 악취를 맡지 않으려면 그냥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문필가 루이 세바스티엥 메르시에《파리의 풍경》에 대도시의 역겨운 이면을 적나라하게 소개한다. 이때 당시 파리의 위생상태는 최악이었다. 18세기의 파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 무척 더러운 곳이었다. 도시는 나날이 발전하는데도 위생에 대한 관심은 후퇴하고 있었다.

 

 

 

좁고 잘못 난 길들, 너무 높고 공기의 자유로운 순환을 가로막는 집들, 푸줏간과 생선가게, 하수구, 묘지들 때문에 대기가 나빠지고 불순한 입자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이 폐쇄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과도하게 높은 집들 때문에 1층과 2층 주민들은 태양이 가장 높이 솟아올랐을 때에도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게 된다. 시민이 휴일이나 일요일에 시골의 맑은 공기를 쐬려고 나가면, 성문 밖에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똥거름이나 다른 오물에서 나오는 악취를 맡게 된다. (《파리의 풍경》 1권, 92쪽)

 

 

인용한 문장만 딱 놓고 본다면 그루누이가 살던 도시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고, 속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놀랍게도 악취 문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악취의 원인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분뇨였다. 오늘날 화장실을 의미하는 ‘toilet’은 프랑스어 ‘toile’에서 유래된다. ‘toile’은 망토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거리를 걷다가 뱃속에 신호가 느껴지면, 망토를 들고 다니는 화장실 업자에게 돈을 내고 볼일을 봤다. 그런데 문제는 급한 용변 때문에 화장실 업자에게 돈을 내는 것이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 몰래 볼일을 보는 것이 더 간단했다. 이러니까 거리나 강 주변에 분뇨가 여기저기 방치되고 말았다. 따로 분뇨를 모아 놓은 구덩이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분뇨처리장과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곳에서 발생하는 가스가 파리의 대기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또한, 분뇨구덩이 주변에 있는 우물도 오염되었다. 파리를 대표하는 센 강에서도 오물이 흘러들었다. 위생에 무지한 파리지앵들은 분뇨로 오염된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수많은 분뇨 구덩이에서 오염된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 밤에 분뇨 구덩이의 오물을 수거하면 구역 전체로 오염이 확산되고, 불쌍한 사람들이 몇 명씩 목숨을 잃는다. 분뇨 구덩이들은 엉성하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라서 이웃 우물로 오물이 흘러들기도 한다. 항상 우물물을 쓰는 빵장수가 그런 이유 때문에 우물물을 안 쓰지는 않는다. 분뇨 수거인들 또한 시 밖까지 오물을 운반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새벽에 하수구나 개천에 쏟아버린다. 이 가공할 찌꺼기는 천천히 길을 따라 센 강으로 향하고, 강가를 오염시킨다. 아침이면 물장수들이 강가에서 물동이에 물을 긷고, 무감각한 파리인들은 그 물을 마실 수밖에 없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젊은 외과의사들이 해부학 실습을 하려고 훔치거나 산 시체들이 많은 경우 토막나서 분뇨 구덩이에 버려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분뇨 구덩이를 파보면, 때로는 끔찍한 해부용 시체 토막에 충격을 받고, 때로는 중범죄가 떠오른다. 오, 위대한 도시여! 그대의 성 벽 안에는 어찌나 많은 역겨운 공포가 감추어져 있는지! (《파리의 풍경》 1권, 93~94쪽)

 

 

분뇨 가스와 시체 토막이 썩는 냄새가 한데 어우러진 파리의 공기. 도대체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태연하게 살았던 것일까. 그들은 악취를 참고 살다 보니 위생상태에 너무 무감했다. 화장실이 없었던 베르사유 궁전에 귀족들은 정원이나 커튼 뒤에 숨어서 볼일을 봤다. 궁전 안에 진동하는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향수를 마구 뿌려댔고, 내부 인테리어도 자주 바꿨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도시 파리는 역겨운 악취의 공포를 감추려고 점점 화려하게 변신했다. 아름답고 쾌적한 풍경이 있는 신작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메르시에는 신작로를 ‘도시개발의 상징’으로 보았다. 알고 보면 프랑스는 역으로 말해 세상에서 가장 더럽게 지냈기에 최고급 향수와 멋진 신작로, 그리고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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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5-08-2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에서 향수가 발달한것은 말씀하신대로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귀족들이나 왕조차 세수같은 것을 거의 하지 않고 간단히 물수건으로 얼굴등을 데충 닦은뒤 몸의 냄새를 가리기위해 향수를 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글쓰신대로 파리시내가 온통 오물투성이여서 여성들의 경우 똥구덩이를 피하기위애 높은 굽의 신발을 신었는데 이게 오늘날 하이힐의 원조라고 할수 있지요^^

cyrus 2015-08-28 16: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때 당시 사람들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았었죠. ‘향수’에 초점을 맞춰서 글을 쓰다 보니 하이힐의 발명을 깜빡 잊고 있었어요. ^^

인디언밥 2015-08-28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처음에 알고 엄청 충격을...ㅠ 와 그런데 이런 식으로 책 읽으면 소설이 더 생생하게 와닿을 것 같아요. 교양서도 더 잘 들어올 것 같고.. 우와

cyrus 2015-08-28 16:56   좋아요 1 | URL
옛날 배경으로 쓴 외국소설이 지루하게 느끼는 이유가 배경에 너무 낯설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에 유럽의 중세, 계몽주의 시대 문화가 낯설어서 힘들었습니다. 과정이 번거롭지만, 시대 상황이나 문화, 풍속을 설명해주는 역사책을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훨씬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transient-guest 2015-08-28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사이유 궁전 내부에 화장실이 없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이런 인간들이 나중에 조선에 와서 더럽다고 욕하고 다녔다니 기가 찰 노릇이네요.ㅎㅎ 신나게 먹고 마시다가 계단 난간에서 불대포를 쏘았을 궁정시대의 귀족이 떠오르네요.ㅎㅎㅎ

cyrus 2015-08-28 16:5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잘 보면 서양인들도 몇 가지 약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때 자신들을 우월한 민족으로 여겼어요. 파리 토박이인 메르시에도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파리 사람들이 한심스러웠던 거죠. ^^

stella.K 2015-08-2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향수를 영화로 봤는데 거기서 첫 장면이 그거였지.
그 장면이 어찌나 충격적이던지. 지금도 생각난다.

우리나라도 저때의 프랑스와 다르지 않았을텐데
다른 것이 있다면 향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거라고 해야할까?ㅋ
그래서 신발의 굽이 높은 것도 그 이유라잖아.ㅎㅎ

cyrus 2015-08-28 17:04   좋아요 0 | URL
영화 <향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땔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 압권이에요. 저도 영화 시작 장면을 보면서 아이를 혼자 출산하는 그루누이 엄마의 모습이 안쓰러웠어요. 누님 말씀을 듣고 보니, 조선 시대의 위생 상태가 궁금해요. ^^

해피북 2015-08-28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에도 한양인근이 오물로 넘쳐났다는 글을 본적 있는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향수를 만들지 못했는지 앗. 저두 stella.k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요 ㅎㅎ

cyrus 2015-08-28 17:0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우리나라가 향수를 못 만들었다고 해서 프랑스와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조선 시대 생활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위생을 청결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의도하지 않게 뜻밖의 물건이 탄생될 수도 있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