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데일리’, ‘미래한국’, ‘미디어펜’ 등과 같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언론을 들여다보면 종종 놀랄 만한 글을 보게 된다.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며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진보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이 언론의 이름만 언급해도 ‘꼴통 보수’들이 좋아할 만한 언론을 봐서 뭐하냐는 의미로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아예 이쪽 언론에 나오는 기사를 안 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쪽 사람들 생각이 싫다고 해서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저절로 달라질까? 올바른 자유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면 ‘자유’를 오용하는 자의 생각을 알아내고, 그 잘못된 점을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황순원, 최인훈, 신경림... 헬조선 조장하는 문학교과서] 미디어펜, 2015년 9월 26일

 

 

다음 링크로 소개된 기사는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26일에 처음 게재되었다. 미디어펜을 구독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내용의 기사를 잘 모를 것이다. 기사를 한 번 읽어보시라. 어이가 없을 것이다. 기사 읽기가 귀찮은 분들을 위해서 간략하게 내용을 요약하자면, 모 역사교육연구소 대표라는 사람이 몇몇 문학교과서 속 작품들이 학생들에게 시장경제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작품을 읽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우리 사회를 ‘헬조선’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은 문학교과서도 ‘좌편향’으로 치우쳤으니 다시 손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구소 대표가 의심하는 작가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총 9편의 작품인데 여기서는 5편만 소개하겠다.

 

 

1.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연패를 거듭하는 삼미 슈퍼스타즈 야구팀이 가장 아름다운 야구팀으로 설정한 내용은 ‘경쟁’이 주는 풍요로운 장점을 배제한 채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전교조 교사들의 견해와 비슷하다.

 

2. 최인훈 《광장》

남한을 게으르고 방탕한 곳으로 묘사된 부분은 학생들에게 남한이 북한과 같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3. 신경림의 시 《농무》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농촌이 피폐해지는 상황을 묘사한 시가 산업화 과정을 왜곡할 수 있다.

 

4.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1960년대 낙동강 유역의 조마이 섬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작품에 나오는 갈밭새 영감은 섬을 지키기 위해 섬을 차지하려는 국회의원의 앞잡이를 물속에 빠뜨려 살인죄라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간다. 섬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르는 살인 행위를 정당화될 수 없다. 약자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살인을 저질러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 수 있다.

 

5. 이강백의 희곡 《파수꾼》

작품에 나오는 촌장은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짓말로 이리떼가 나타난다고 말하는 파수꾼 ‘가’의 행동을 눈감아준다. 남북한의 군사 대치를 이용하여 사회를 통제하려는 권력자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안보를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잘못 해석할 수 있다.

 

 

문학교과서마저도 이념 논쟁에 자유로울 수 없다. 역사교과서 논란이 많이 알려진 탓에 문학교과서 문제는 언론의 수면 위로 잘 떠오르지 않는 편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사람은 보수주의자들이 문학교과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실을 잘 모른다. 역사교과서 논쟁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지금도 보수주의자들은 사회, 경제, 윤리 과목 교과서에 드러난 좌편향 시각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무관심만으로 일관한다고 해서 교과서 이념 논쟁이 생길 거라는 보장은 없다.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과 대립이 장기화될수록 교과서를 둘러싸고 서로 싸우는 일이 지속될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역사교과서가 정식으로 국정화된다면 보수주의자들이 노리는 다음 타깃은 문학교과서로 향할 수 있다.

 

 

 

 

 

 

 

 

 

 

 

 

 

 

 

 

 

 

 

 

 

만약에 문학교과서가 역사교과서처럼 국정화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단 먼저 시장경제 또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이 있는 작품이 교과서에 삭제된다. 미디어펜 기사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교과서 퇴출 작품 일 순위에 가깝다. 이 작품은 너무나도 유명하니 줄거리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1979년에 나온 작품이 지금도 나올 정도로 스테디셀러로서 그 위엄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이 소설이 마음에 안 들 것이다. 그다음으로 교과서에 퇴출당할 수 있는 작품은 일제 강점기 때 활동했던 사회주의 문학 작가들이 쓴 것이다. 최서해의 단편소설 《탈출기》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이다. 신경향파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사회주의 경향의 문학쯤으로 보면 된다. 낭만주의 문학을 거부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지향하여 현실의 모순에 저항하는 의식을 드러낸다. 《탈출기》의 주인공은 궁핍한 삶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 간도로 향하지만, 역시나 현실은 더욱 암울하기만 하다. 그때부터 주인공은 가난에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궁핍의 원인을 부조리한 현실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표출한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노오오오력’을 하지 않으면서 사회에 불평하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경제 상황은 지금과 너무나도 많이 달라서 ‘헬조선’과 연관 지어서 해석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작가가 사회주의 계열이라고 해서 교과서에 퇴출당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우습다. 과거에 월북 작가들의 작품을 금지했던 시절이 있었고,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여당의 태도를 봐서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한 번 일어날 수 있다.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 하지 말자,’라는 유행어가 있다. 특정 대상을 희화화한 개그였을 뿐인데, 그 대상을 비하하고 미풍양속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반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문학작품을 심각하게 읽는다. 사회 현실에 일어날 수 있는 잘못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장면을 보면 꼭 마치 ‘죽은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심정인 것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당신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그 사람’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준 완벽한 신이란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기실 완벽하지 못하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왜 자꾸 손바닥으로 세상의 그늘을 가리려고 하는가. 사회현실의 문제점을 묘사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그들의 행태는 자유주의의 원칙에 어울리지 않는다. 비판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이념의 색안경으로 문학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폴 오스터의 말을 알려주고 싶다.

 

 

소설은 허구입니다. 따라서 (그 용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소설은 거짓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소설가는 거짓을 통해 세상에 관한 진실을 말하려고 애를 씁니다. (《작가란 무엇인가 1》에서,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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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10-02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기는 일이지.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예전에 박통 때와 전통 때 가요 금지곡이 있었잖아.
근데 그게 알고보면 웃기는 게 많았지.
오죽하면 전두환 닮은 연예인은 출연도 못했잖아.
뭐 그 보단 거대담론격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진영논리에 빠져 자유롭지가 못한 것을 반증하는 꼴이지.
울나라가 하는 짓이 이래. 쩝

cyrus 2015-10-02 23:37   좋아요 0 | URL
정부가 국민을 통제하는 일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너무 몰라요.

yamoo 2015-10-0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엔날에는 문학 교과서도 국정교과서였슴돠~ㅎ

모 역사연구소에 있는 넘들은 무뇌아인가 보죠..ㅋㅋ
근거가 금서를 지정하는 국방부나 교황청의 논리와 비슷해 보입니다..ㅎ

제 생각에는 저런 작품들이 아주아주 많이 읽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그럼요~ㅎ

cyrus 2015-10-02 23:3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오히려 그분들이 고마워요. 덕분에 이런 좋은 문학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

페크pek0501 2015-10-0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쪽 다 읽어 봐야 한다는 점에서 금서란 있을 수 없다고 봐요.
양쪽 다 읽어 봐야 시각의 균형도 찾을 수 있다고 봐요.
좋은 세상이란 그런 게 아닐까 해요.
이쪽에서도 볼 수 있고 저쪽에서도 볼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세상 같은 것.
뭔가를 억압하거나 통제하려고 들지 않는 세상 같은 것.
선택권을 스스로 갖게 하는 세상 같은 것.

정치 세력에 따라 금서가 바뀌기도 하니 웃어야 할까요?

cyrus 2015-10-07 18:52   좋아요 0 | URL
금서의 역사를 돌아보면 기득권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금서목록을 만들어요. 그러다가 기득권자의 얼굴이 달라지면 금서목록도 변경되죠. 금서목록의 역사를 훑어보면 그 당시 시대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어요.
 

 

 

 

 

 

 

 

 

 

 

 

 

 

 

 

 

 

 

영월은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을 이루는 지역이다. 그곳에 가면 어린 임금 단종의 비애를 느낄 수 있다세조는 1457년 단종을 영월 청령포에 유배시켰다. 단종이 한양의 궁궐을 떠나 당도한 청령포는 뒤에 벼랑, 앞에 강줄기가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청령포에서 약 2개월가량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은 그곳이 홍수로 침수되는 바람에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관풍헌에 머물 당시 단종은 자규시(子規詩)’자규사(子規詞)’라는 제목의 시 2수를 짓는다. 어린 임금이 지은 시에는 그의 한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와

외로운 그림자로 푸른 숲에 깃들었다

밤마다 억지로 잠들려 하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마다 한스러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원한은 끝나지 않네

자규 울음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조각달만 밝은데

피를 뿌린 것 같은 골짜기에는 붉은 꽃이 지네

하늘은 귀머거린가 아직도 애끓는 나의 호소를 듣지 못하고

어이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 귀만 밝게 했는가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眼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撓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問哀訴
胡乃愁人耳獨聰

 

(자규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80~81)

 

 

달 밝은 밤 소쩍새 울음소리는 더욱 구슬퍼
시름 못 잊어 누 머리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으면 내 시름도 없었으리니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月白夜蜀魂湫

含愁情依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榮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자규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84)

 

    

 

자규는 두견새 또는 접동새라고 불리기도 한다. ‘자규사1행에 나오는 ‘촉혼 두견새의 또 다른 별칭이다. ‘촉혼이라는 이름은 고대 중국 촉나라에 유래되었다. 촉나라 왕 두우(杜宇, 또는 망제’(望帝)라고 부르기도 함)는 신하의 반란으로 폐위되었고, 한이 맺힌 채 비참하게 죽었다. 촉나라 왕의 원혼은 두견이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 돌아갈 수 없네)’를 울부짖으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촉혼불여귀는 두견새의 별칭이 되었다.

 

 

 

 

왼쪽이 두견새, 오른쪽이 소쩍새 (사진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그런데 단종이 한밤중에 들은 구슬픈 울음소리의 주인은 두견새가 아니다.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다. 두견새는 낮에 활동한다. 소쩍새와 두견새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올빼밋과에 속한 소쩍새는 두견새와 그 생김새가 전혀 다르고, 밤에만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봄부터 여름까지 소쩍소쩍하며 밤새 쉼 없이 애처롭게 울어대어 듣는 이의 심금을 자극하는 소쩍새. 이 점이 두견새와 헷갈리게 한다. 유홍준 교수는 자규사’ 1행을 원문 그대로 해석하는 대신에 달 밝은 밤 소쩍새 울음소리는 더욱 구슬퍼로 고쳐서 해석했다.

 

두견새는 한이나 슬픔의 정서를 표출하는 한국 고전문학의 소재로 등장한다. 정확하게 바로잡으면 소쩍새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내가 좋아하는 김소월접동새또한 소쩍새 울음소리를 애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라나

먼 뒤쪽의

진두강(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따라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夜三更)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김소월은 어린 시절, 숙모가 자신에게 들려준 전설을 토대로 이 시를 썼다. 평안북도 박천에 있는 진두강 가의 마을에 살았던 한 여인의 슬픈 이야기다. ‘큰 누나라고 불리는 여인은 시집갈 준비를 하게 되는데 신랑 쪽 집안에서 여인에게 예물을 많이 보냈다. 욕심 많은 계모는 예물을 제 손으로 차지하려고 여인을 괴롭혔다. 강제로 예물을 빼앗은 계모는 여인을 잔인하게 매질했다. 여인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남겨놓은 장롱에 갇혔고, 계모는 여인이 갇힌 장롱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여인은 아홉 명의 동생들을 남겨두고 계모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그녀의 원혼은 접동새가 된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서러움, 그리고 이승에 있는 동생들이 걱정되고, 너무나 그리워서 어두운 밤에 이 선 저 산 옮기면서 구슬프게 운다. 이 시에 나오는 새가 접동새인지 소쩍새인지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나는 큰 누나의 원혼이 깃든 새가 접동새라고 믿고 싶다. 큰 누나는 계모가 두려워서 밤에만 나타나 울 수밖에 없으니까. 사람들은 한밤중에 우는 새의 울음소리가 무섭다고 하지만, 큰 누나의 억울한 사연을 생각하면 밤에만 울어야 하는 접동새가 슬프게 느껴진다. 사소한 혼동이 있다고 해서 시의 애수는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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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9-25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마녀사냥>에 출연하는 허지웅은 자기 입으로 무성욕자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자신은 연애 의지가 없어서 스스로 무성욕자라고 밝혔다고 말했다. 허지웅의 무성욕자 발언 이후 그런 얘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예전엔 무성욕을 쉬쉬했지만, 허지웅의 무성욕자 발언 이후 무성욕이란 단어를 말하기 쉬워졌다. 그러나 평생 성욕의 유혹을 멀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세계 4대 무성욕자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붓다, 사마천, 토마스 아퀴나스, 루이스 캐럴. 붓다는 악마 마라의 유혹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반을 준비해 나갔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을 쓰기 위해서 남자로서 치욕스러운 형벌인 궁형을 받았다. 아퀴나스는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희망에 못마땅했다. 그래서 아들을 강제로 감금시켜서, 방 안에 매춘부 두 명을 들여보냈다. 아버지는 아들이 매춘부의 유혹에 못 이겨 세속적인 욕망을 따를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퀴나스는 벌거벗은 매춘부의 도발에도 몸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고 한다.

 

루이스 캐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로 더 유명하다. 그가 무성욕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캐럴은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말더듬이에 수줍은 성격 탓에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그는 많은 사람과 잘 어울렸다. 그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면 생전에 다방면으로 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수학교수였고, 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책도 몇 권 발표했다. 비록 공식적으로 성직자 생활을 하지 못했지만, 사제 서품을 받기도 했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자신과 친분을 맺는 사람들의 모습을 멋지게 담는 사진가가 되었다. 그가 찍은 소녀들의 사진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만약에 캐럴이 연애 혹은 결혼을 했더라면, ‘아동 성애자라는 오명이 따라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벌거벗은 소녀들을 사진으로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캐럴은 아동 성애자로 의심받았고, 이로 인해 후세 사람들은 그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실제 모델 앨리스 리델과의 관계를 주목했다. 연구가들은 캐럴이 앨리스 리델을 알고 지내는 소녀 이상으로 좋아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캐럴이 만난 사람 중에 여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캐럴은 이성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 문화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독실한 기독교신자답게 도덕적인 삶을 살아왔다. 당시 유행하는 패션에 무관심했다. 또한, 신체적 결함은 캐럴의 연애 감정을 싹 틔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말을 더듬을 뿐만 아니라 오른쪽 귀가 질병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캐럴은 자신의 모습이 여성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밀리 거트루드 톰슨 (1850~1929)

 

 

 

이성과의 만남 횟수가 적은 사람일수록 연애 세포가 쉽게 죽고 만다. ‘연애 못 하는 남자캐럴은 반려자를 만나뻔할 운명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삽화가인 거트루드 톰슨이라는 여성을 알게 된다. 캐럴은 그녀의 삽화 실력에 감탄하여 직접 편지를 써서 보냈고, 두 사람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관계가 돈독해진다. 이때 톰슨의 나이는 스물아홉, 캐럴은 곧 지천명에 눈앞을 두고 있었다. 나이 차가 꽤 많이 나는데도, 톰슨은 캐럴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캐럴을 처음 만났던 당시 상황을 기록했는데, 그가 어린아이에게 상냥한 신사였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함께 연극 공연을 보고, 전시회도 다녔다. 그러나 캐럴은 톰슨을 자신의 취향과 비슷한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으로 생각했다. 캐럴의 지인으로부터 이 사실을 안 톰슨은 전혀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며 쿨한 모습을 보였다. 시간이 지난 후에 톰슨은 캐럴의 반응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톰슨이 먼저 적극적으로 구애한다고 해도 캐럴은 그녀의 애틋한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캐럴은 사람들 앞에 자신의 능력을 펼쳤지만, 자신의 말 더듬는 버릇을 들춰내는 어른 사회가 불편했다. 반면 마음이 순수한 아이들은 캐럴의 말 더듬는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만 서면 말 더듬는 횟수가 많아질까 봐 조바심을 냈던 캐럴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유난히 행복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지은 이야기나 재미있는 농담을 들려주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캐럴은 모든 아이를 사랑했다. 판매되지 않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책들을 어린이 병원에 기부한 적이 있다. 캐럴은 어린이 환자들이 자신의 책을 읽으면 병이 빨리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캐럴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후에 어린이들은 캐럴의 따듯한 성품을 기억하기 위해서 직접 모은 돈을 기부했다. 이 기부금은 어린이 병원에 새로 마련되는 침대를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그 침대에 루이스 캐럴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런 멋진 일을 했는데도, 여전히 캐럴이 소녀 한 사람만 바라보는 특이한 어른으로 보이는가. 요즘 아동 성범죄가 지속해서 늘어날수록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아이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거나 껴안으면 의심받을 수 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나쁜 어른들 때문에 순수한 의도의 행위가 변질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선행을 펼치는, 캐럴 같은 착한 어른들이 오해를 받을까 봐 걱정된다. 어린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 이런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루이스 캐럴 상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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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9-2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들이 짝짓기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 사회가 좀 불편할때가 있습니다~
무성욕자라고 이야기할수 있는 사람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cyrus 2015-09-25 15:28   좋아요 0 | URL
남자들 사이에서 동정남이라고 고백하면 놀림 받습니다. 군 복무했을 때 제가 동정남이라는 이유로 선임들에게 갈굼 먹기도 했어요. ‘혼전순결’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

세실 2015-09-2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지웅도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지요.
루이스 캐럴상 좋은데요~~

cyrus 2015-09-25 15:30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는 방정환 선생이 유명하죠. 그분의 이름을 딴 상이 있어서 좋습니다. ^^

보슬비 2015-09-24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에밀리 거트루드 톰슨과 캐럴과 그런 만남이 있었군요. 알고 보니 엽서 그림이 더 마음에 드네요. ㅎㅎ

cyrus 2015-09-25 15:31   좋아요 0 | URL
구글에 ‘Gertrude Thomson’으로 검색하면 그녀가 그린 삽화 몇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잘 그렸습니다. ^^

초록장미 2015-09-2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스 캐럴상 좋네요~ 아이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어른은 분명 전체에 비하면 소수일 텐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제 눈도 흐려져가는 것 같아 슬플 때가 있어요. 루이스 캐럴상 같은 것을 만들어서 널리 홍보하면 아이를 귀여워하는 어른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cyrus 2015-09-25 15:33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 ‘방정환 문학상’, ‘마해송 문학상’ 같은 아동문학에 기여한 작가들에게 주는 상은 있는데, 방정환 선생처럼 아이들을 위해 선행을 베푼 사람들에게 주는 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달걀부인 2015-09-25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잘 몰라서 묻는건데요. 사마천처럼 궁형을 받았다해도 성적 욕망은 느낄수 있는건 아닌지.. 내시들끼리 성적인 결합들이 있었다고 하지않나요? ^^ 그냥 뜬금없는 댓글..

cyrus 2015-09-25 15:41   좋아요 0 | URL
부인님 말씀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거세가 되어 남성 호르몬 분비가 줄어든다면 성적 욕망도 감소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거세된 남성은 성적 욕망을 느끼지 않는지 궁금하긴 해요. 그렇다고 제가 직접 실험해볼 수가 없고... ㅎㅎㅎ

transient-guest 2015-09-25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확실히 그 행위에 대한흥미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다는 말이 여기서도 통용될 수 있겠네요.ㅎ 일단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사실 무성욕이든, LGBT든 상관이 없지요. 다만 여기에 붙는 label이 문제이고 편견 때문에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은게 이슈네요. 루이스 캐럴에 대한 이야기가 참 흥미롭습니다.

cyrus 2015-09-25 15:51   좋아요 1 | URL
캐럴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 그 다음에 사진을 찍는 일인데 여기에 몰두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성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어요. 남들에게 크게 미운 털 한 번도 박힌 적이 없을 정도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는데도, 캐럴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아요.

해피북 2015-09-2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할아버지가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손녀기다렸다가 데리고 가는 모습 참 훈훈했는데 요즘은 자꾸 의식하게 되는거같아요. 사회가 점점불안하니 불안해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든것들이 다 그렇게 비춰지는것만 같아요. 인식이 하루 빨리 바뀌면 좋겠어요. 루이스 캐럴상 깊은 공감한표 ㅋㅂㅋ!

cyrus 2015-09-25 15:58   좋아요 0 | URL
아동 성범죄가 많아지니까 예전에 가능했던 일들이 추억이 되고 말았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출입하려면 먼저 경비실에 가서 출입절차 확인을 받아야 해요. 예전에 집에 가는 지름길로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가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못 가요. 뭣도 모르고 지나가다가 경비 아저씨한테 쫓겨난 적이 있어요. ^^

stella.K 2015-09-25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성욕자는 의외로 많지 않을까? 교회나 성당, 사찰에도...
교회를 다니는 걸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가 무성욕을 견디지 못해서란
말도 있던데 꼭 성욕은 모든 사람이 다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성욕은 젊은 사람에게 왕성하게 있고, 노인은 없을 거란 식의 이분법적
사고도 문제지만, 사회가 성욕을 부추기기도 하잖아. 마치 그게 정상인 양.
그건 옳지 않은 것 같은데 반대로 성욕을 어떻게 해결하고 제어해 나갈거냐에
대해서도 논의는 있어야 한다고 봐.
무성욕자를 무슨 병이나 미성숙으로 바라보는 건 정말 문제가 있지.
이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끌리고 그러는 건 아니잖아. 그럼에도 우린 나와 다른 성을
가진 사람과도 우호적으로 잘 지내기도 하고 반대로 싸우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뭐.ㅋ


cyrus 2015-09-25 21:56   좋아요 0 | URL
<마녀사냥>이 섹스 장려 프로그램이잖아요. 요즘은 이 프로그램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 ‘낮이밤이’, ‘낮져밤이’가 유행했을 때 게스트에게 항상 먼저 이런 걸 물어봤잖아요. <마녀사냥>이 처음에 시작했을 때 좋았어요. 구성애 성교육 강의 이후로 성 담론을 소재로 한 방송이었으니까요. ^^
 

 

 

 

 

 

 

 

 

 

 

 

 

 

 

 

 

 

 

 

 

 

페이스북이나 북플을 이용하다 보면 종종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친구 관계를 맺은 분의 나쁜 소식을 접했을 때다.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려고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이런 행위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 마치 나쁜 소식에 좋은 감정을 느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대신에 댓글에 위로의 말을 남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견해를 밝힌 글도 차마 ‘좋아요’를 누르지 못한다. 그 사람의 생각이 싫더라도 예의상 ‘좋아요’를 눌러줄 수는 있다. 그런데 꼭 그렇게까지 모순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지난 15일에 ‘싫어요’ 버튼 기능을 도입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나쁜 소식에 대한 공감을 ‘좋아요’ 버튼을 눌러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요구해 왔다. 주커버그는 이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좋아요’ 이외에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방안을 제시했다. 이 기능이 나온다면 특정인의 부고 소식, 가슴 아픈 이야기,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기분 나쁜 사건 등을 알리는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를 필요가 없어진다. 슬픔,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면 ‘싫어요’를 누르면 된다.

 

그런데 ‘싫어요’ 버튼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상황이 무조건 좋다고 볼 수 없다. 다수의 사람이 특정인을 겨냥한 반감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특정인을 비하하려고 악의적으로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이 많아지면,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선량한 사람이 쓴 게시물에 남아있는 ‘싫어요’ 개수는 그 사람의 일생을 파괴해버리는 낙인이 될 우려가 있다. 그 사람은 천 개나 넘는 ‘싫어요’ 개수 때문에 한순간에 ‘마녀’가 된다. 그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싫어요’ 누르기만 바쁘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싫어요’를 누르는 디지털 마녀사냥을 보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올린 한 장의 사진이 누군가가 잘못 소개하여 공유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생각해보라. ‘싫어요’ 개수가 1분에 수십 개 이상 올라가고, 욕설이 담긴 메시지와 댓글에 시달려야 한다. 감정이 집단으로 분출되어 동일시하는 심리적 현상이 한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자신이 유리하게 만들도록 왜곡해서 쓴 잘못된 정보가 ‘좋아요’ 100개 넘어 받는다면, 누구나 그 사람의 정보를 믿는다. 그리고 ‘좋아요’를 많이 받기 위해서 남의 개인정보를 도용하여 자신이 직접 올리는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는 무조건 친한 사람의 글과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런데 이제는 ‘좋아요’ 하나 누르는 일에도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생각 없이 ‘좋아요’ 누르는 내 모습이 마치 자동차 전면 유리창에 알을 낳으려는 잠자리와 같아 보인다. 투명한 유리창이 물인 줄 알고, 거기에 알을 낳는 잠자리처럼 말이다. SNS 이용자 대부분은 깨끗하고 투명한 척하는 거짓이 진실인 줄 알고 ‘좋아요’를 누른다.

 

한동안 페이스북 접속을 멀리하고, 책에 관한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알라딘 서재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알라딘 서재가 ‘북플’로 변신하면서 이곳도 페이스북을 닮아간다. 자신의 일상을 알리는 사진을 공개하는 이웃이 있고, 책 소개를 짧게 알리는 이웃도 있다. 예전에 비하면 A4 1장 넘는 분량의 서평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이웃의 글은 ‘알라딘 서재’로 접속해서 읽는다. 하루에 읽는 이웃의 글은 보통 15~20편이다. 일부 글은 분량이 짧아서 정말 1초에 확인할 수 있고, 긴 내용의 글을 읽으면 3분 정도 걸린다. 진짜 꼼꼼하게 읽으면 5분 걸린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친구 관계’를 맺은 모든 분의 글을 일일이 다 읽는다거나, 꼼꼼하게 읽지 못한다. 나 또한 짧은 글과 사진이 주를 이루는 페이스북 환경에 오래 적응된 탓에 조금이라도 긴 내용의 글을 대충 읽는 경우가 있다. 솔직히 다 읽는다는 건 힘든 일이고, 관심 분야를 다룬 글 위주로 읽는다고 보면 된다. SNS 기능상 짧고 쓰는 글은 사람들이 읽기 편해서 좋긴 한데, 정작 책과 관련 없는 정보가 많아져서 아쉽다. 그래서 웬만하면 100자평, 일상을 공개한 사진이 있는 글에는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댓글도 달지 않는다. 글이 지나치게 긴 것도 읽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읽기 적당한 서평의 분량은 A4 용지 1장 반이다. 예전에 서평 한 편 쓰면 무조건 A4 용지 3장 정도 분량이 나왔다. 몇 년 전 모 언론사에 신문 칼럼을 쓰는 방법을 숙달하고 나면서부터 적당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새고 말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나 내 감정을 표현하기에 애매한 글이라면 ‘좋아요’를 누르지 않아도 된다. 이럴 때 필경사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I would prefer not to)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행위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극적 거절이다. ‘좋아요’를 누르는 행위와 그 개수만으로도 사람의 감정이 정직하게 표현되었다고 볼 수 없다. 또 다수가 열광하는 대상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사람을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좋아요’를 누르는 데에도 남의 시선에 의식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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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9-2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고장 소식에 ˝좋아요˝는 못누르겠더군요.ㄷㄷㄷ

cyrus 2015-09-23 18:07   좋아요 0 | URL
그런데 페이스북에 접속하면 그런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5-09-2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타인만을 위해 북플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Cyrus님께서도 그러실 듯...근데 바틀비가 무슨 뜻인지요?

cyrus 2015-09-23 18:11   좋아요 0 | URL
제가 소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군요. 허먼 멜빌이 쓴 소설 제목이 ‘필경사 바틀비’인데 ‘바틀비’가 주인공 이름입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09-22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떡해요~ ˝좋아요˝ 를 눌렀어요. ㅎㅎ 하지않을 권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할 권리보다 하지 않을 권리를 좀 더 존중해 줘야 한다고 현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cyrus 2015-09-23 18:15   좋아요 0 | URL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글에 항상 ‘좋아요’를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AgalmA 2015-09-25 00: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시스템과 상황은 계속 발생할테고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또 통제가 되니까요. cyrus님의 뜻도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또 살다보면 완벽히 자기 의지대로 못할 때도 있고, 본의 아니게 자기 의지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위축되고 좁은 관계망으로 안전성을 추구하게 되고 좁은 풀pool이 만들어지면서 [좋아요]의 끼리끼리 집단성은 또 강력해지죠. 결국 문제는 순환됩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건 침묵하거나 덮어버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상대와 주위에 대해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일 겁니다. cyrus님의 이 글도 그런 뜻이 담겨 있을 테고요. 다같이 사는 사회고, 어느 정도가 최선일 지는 각자의 역량에 달려 있겠지요....
책제목도 있듯이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는 뜻은 상대를 지적하는 데 쓰기보다 나나 상대의 실수, 부족함, 기대 미만도 감안하는 데 더 좋은 쓰임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쨌든 평가는 내 자의와 주관이 바탕이가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관계나 잘못을 바로 잡는 건 옳은 일이지만, 그 방식에 있어 상처까지 주는 경우가 많은 거 같습니다. 저도 반성하는 점이고요.
이런 여러 가지가 숙고된 글이라면 좋아요나 싫어요가 문제적이지 않을 겁니다. 어쨌거나 인간은 모든 걸 다 알고 말할 수 없으니 참....
한참 생각해 보고 이 댓글을 썼는데, 부족함이 있더라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cyrus 2015-09-23 18:36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사실 제가 ‘위축되고 좁은 관계망’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아갈마님의 말씀처럼 저와 ‘친구’ 관계를 맺는 분들만 글을 보게 되고,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겨요. 그런데 확고한 의지가 꼭 실천되는 건 아니에요. 가끔 짧은 글, 일상 관련 글에서도 ‘좋아요’를 누릅니다. 내가 당신의 글을 보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셈이죠. 그래서 제 글에 ‘좋아요’을 눌러주는 분들이 짧은 글을 남겨도 감사의 보답으로 ‘좋아요’를 누릅니다. 이런 과정이 아갈마님이 말씀하신, `강력해지는 집단성`입니다. 저 또한 ‘좋아요’에 신경을 안 쓸려고 해도, 자꾸 그쪽으로 향합니다.

2015-09-22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3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리미 2015-09-22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고민하는 부분이네요. 저는 알라딘 서재를 거의 이용하지 않았었고 책을 많이 읽게 된 것도 애들을 키우고 조금 한가해진 최근 몇년의 일이에요. 그동안 독서한 기록들을 수첩에 정리해 놓고 있다가 알라딘에서 북플 앱이 나와서 처음엔 나만의 기록으로 정리를 시작했는데, 역시나 SNS다 보니 자주 보이는 이웃분들과 교류가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좋아요`나 `댓글`에 조금씩 신경도 쓰이고요. 그저 내 맘 가는 대로 해보자라고 편하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한번쯤 고민해볼 문제이긴 한 것 같아요. 저는 리뷰도 아직은 너무나 서툰데 거기에 `좋아요`를 눌러주시고 댓글로 소통하는 이웃 분들이 계시니 힘이 나는 것만은 사실이고요^^
가끔씩 습관처럼 누르게 되는 것은 자제하려고 애쓰고도 있답니다^^

cyrus 2015-09-23 18:46   좋아요 0 | URL
제가 예전에 생각 없이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아서 곤혹을 치른 적이 있어서, SNS에 오르는 글을 읽을 때 신중해져요. ^^;;

인디언밥 2015-09-24 14:55   좋아요 0 | URL
저랑 같은 ㅜㅠ 공감해요

오후즈음 2015-09-2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이글엔 좋아요를 누를거예요. ^^가끔 슬퍼요, 화나요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cyrus 2015-09-23 18:5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카카오스토리처럼 븍플에 감정 표현 기능이 많이 생긴다면, 북플이 재미있어 것 같아요.

수이 2015-09-23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글을 정말 좋아서 좋아요_를 누르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의 글이 정말 좋아서 좋아요_를 누르는 경우도 있으리라고 봐, 나도 습관적으로 선호하는 글이나 좋아하는 사람의 글은 읽기도 전부터 먼저 좋아요_를 누르곤 하니까 좀 민망해하면서 이 글 읽고 있지만. 소극적 거절도 좋고_ 깊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쓰는 글이라서 좋아해. 북플 기능을 마음껏 활용해서 짧은 단상들이나 주절거림, 사진을 많이 올리는 사람으로서는 좀 많이 찔리네 ㅋ

cyrus 2015-09-23 18:57   좋아요 0 | URL
누님. 제 글 때문에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해요. SNS에 망하지 않는 이상, 글을 짧게 쓰고, 사진을 많이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예요.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요. 그리고 누님은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정말 양호한 편이에요. 누님은 이렇게 ‘좋아요’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잖아요. 그런더 제가 페이스북에서 만난 어떤 분은 하루에 다섯 개 이상 타임라인을 도배해요. 읽어보면 정말 쓸데없는 소리들이에요. 북플에서 누님이 어떤 책 읽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

만병통치약 2015-09-23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버튼에 공감합니다 버튼, 익명으로 누를 수 있는 어쩌라고 버튼을 적용해야합니다.그러면 저처럼 허영가득한 글에는 어쩌라고가 가득할테지만요 ㅋㅋ 이글에는 공감과 좋아요를 누릅니다.^^

cyrus 2015-09-23 18:59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익명일 때가 좋았어요. 저도 지적 허세 끼가 있는 글을 써서 ‘좋아요’ 수가 많지 않아도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여요. ㅎㅎㅎ

맥거핀 2015-09-23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알라딘에서도 누군가를 비판, 비난하는 글에 붙은 `좋아요` 숫자를 볼 때 뭔가 조금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주장이 타당하고 안 타당하고의 문제와 전혀 별개로 말이죠.) 저는 `좋아요`가 있든 `싫어요`가 있든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도 결론적으로는 cyrus님 같이 누르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cyrus 2015-09-23 19:02   좋아요 1 | URL
저는 그게 `편가르기`로 보여서 제가 아는 분들이 논쟁에 휘말리면 그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아요. 그냥 댓글만 달아요.

해피북 2015-09-24 1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누르는 ` 좋아요` 는 참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요 ㅎㅎ `힘내세요``고마워요``잘읽었어요` 등 누를때마다 마음을 다해서 누르게 됩니다. 책을 읽는다는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고 가끔은 외롭게도 느껴지고 힘들게 느껴지더라구요. 때론 이렇게 읽어서 뭐하나. 또 글은 적어서 뭐하지와 같은 지극히 원초적인 질문과 마주할때면 힘들어지기도 하고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혼자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끈기있게 다잡아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게 사실이더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웃님들의 글을 읽을적마다 `좋아요`를 누르고 있어요. 이웃님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진 않으실까, 이 글을 올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을까 등등을 생각하며 `힘내세요, 잘읽었어요`라는 마음을 담아서 누르게 됩니다. 그 글들이 토양이되서 성장(?)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것도 이웃으로써 함께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죠.

그렇지만, 솔직히 `좋아요`보다 더 좋은건 `댓글`인거 같아요. 그래서 댓글로 소통을 많이 할 수 있또록 생각을 많이 적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무튼 제가 누르는 `좋아요`는 이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오늘도 꾸욱 누르고 갑니다 ㅋㅁㅋ!!!


cyrus 2015-09-24 18:0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좋아요’만 누르는 것보다 ‘댓글’이 달린 게 더 좋아요. 왜냐하면 그 분은 확실히 제 글을 읽었으니까요. 해피북님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이웃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책 선물 주신 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인증샷 겸 서평을 올리겠습니다. ^^

인디언밥 2015-09-24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urus님 글이 좋아요~~~ ^0^

cyrus 2015-09-24 18:0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제 글의 입장이 불편하거나 글에 잘못된 것 있으면 댓글 달아주세요.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

하양물감 2015-09-3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이스북을 주로 하는 터라...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솔직히 제 글에 좋아요가 그리 많이 달리지 않는 편이라 신경을 덜 쓰긴 하지만요..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좋아요 많은 글에 좋아요 클릭하지 않고
댓글 많이 달린 글에 댓글을 잘 안달아요..이건 무슨 심뽀인지..ㅋㅋㅋ


cyrus 2015-10-01 13:33   좋아요 1 | URL
솔직하시군요. ㅎㅎㅎ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다는 건 각자 선택이니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페크pek0501 2015-10-0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저도 좋아요를 누를 땐 신중하겠습니다.^^

cyrus 2015-10-07 18:55   좋아요 0 | URL
너무 신중하면 SNS 접속하는 재미가 떨어질 수 있어요. ㅎㅎㅎ
 

 

 

 

 

 

 

 

 

 

 

 

 

 

 

 

 

 

 

몇 달 전 베스트셀러 순위에 독특한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표지엔 제목도 저자명도 없어 더 궁금증을 자아낸다. 표지 속 꽃들의 정체는 클림프의 그림 일부다. 책 제목은 《그림의 힘》(에이트포인트, 2015). 이 책의 저자이자 세계미술치료학회장 김선현 교수는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우리 뇌와 심신에 에너지를 선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 집중력을 높여주는 그림, 불안을 잊게 해주는 그림 등 탁월한 효과가 있는 명화들을 엄선했다고 한다. 이 책이 2권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가 치솟는 상황이 작년 ‘컬러링북’ 열풍과 유사하다. 작년에는 그림에 직접 색칠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올해는 그림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충격에 휘말린다는 스탕달 신드롬은 아니더라도 그만큼 어떤 미술 작품들은 우리 뇌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림치료의 효과는 임상실험으로 증명되긴 했으나 혹시나 단순히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단기간 내에 ‘기적’을 바라는 독자들이 있을까 봐 염려된다. 실제로 《그림의 힘》을 소개한 어느 언론 서평에서는 그림의 힘을 ‘기적’과 동등한 의미로 설명했다. 기적을 바라는 종교의 시대에 쓸법한 낡은 표현이다. 화가의 그림은 우리에게 기적을 주는 성화(聖畵) 정도까지는 아니다. ‘기적’이라는 단어에는 ‘영적 상태’를 내포한다. 초기 유럽 기독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도들은 거룩한 성물 앞에서 경건한 기도를 드린다. 시간이 흘러 성물은 예수와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으로 대체되는데 이것을 ‘이콘(icon)’이라고 한다. 신도들은 이콘을 보면서 하느님의 영적 힘을 인정하고 기적의 체험을 추구한다. 오늘날 그림이 감상의 대상이라면, 이콘이 유행했던 시대의 그림은 종교적 태도와 신앙을 전파하고,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명화를 이용한 그림치료를 ‘기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반 고흐가 외로운 친구 관계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까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체부 조제프 룰랭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그림의 힘》 1권에서 저자는 고흐의 초상화를 부드러운 사람과의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으로 소개했다) 단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우체부 아저씨의 모습을 그렸을 뿐이다. 그림은 종교적 성화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평화가 깃들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 하지만 기적을 바라는 것은 미술치료의 본래 목적과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종교에는 기적이 있어도 경제에는 기적이 없다”라는 정주영 전 현대 회장의 경영철학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미술에는 기적이 없다.

 

《그림의 힘》은 미술작품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독자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심리적 효과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림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상당한 배경지식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독자가 저자의 친절한 설명을 믿고 따라가는 《그림의 힘》의 구성방식이 독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독자가 저자의 해석에 동의하게 되면 그 해석의 틀에 따라 제 생각을 맞추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해석이 사고회로 과정에 개입되는 순간이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동기부여를 얻으려면 독자 스스로 현실적인 고민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그러니까, 자신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의 해석과 동떨어져도 좋고, 반대로 생각해도 좋다. 《그림의 힘》은 ‘아프니까 그림본다’ 같은 현대인에게 위로를 주는 명약 같은 책이 아니며, 이렇게 책이 만들어져서 버젓이 팔리면 안 된다. 오히려 이런 홍보 방식 때문에 미술치료 본연의 의미가 잊힐까 봐 걱정된다. 미술치료는 개인의 성격과 심리상의 문제점을 파악한 뒤 안정적이고 성숙한 심리 상태로 이끌어가려는 시도이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기적을 부르는 책’이라는 얄팍한 홍보 문구만 믿고 책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럴 바엔 차라리 부적을 사서 벽에 붙이는 것을 권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늘날의 미술에는 기적이 없으며 미술작품은 우리에게 영적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부적이 아니다.

 

 

 

 

 

 

 

 

 

 

 

 

 

 

 

 

 

 

 

 

 

 

 

 

 

 

 

‘그림의 힘’을 몸소 체험하고 싶어서 《그림의 힘》을 구입하기 보다는 그냥 본인이 특별히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이 있는 책을 고르는 것이 낫다. 아무 설명 없이 그림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책을 소개해본다. 미술평론가 로버트 휴즈가 직접 서문을 남긴 《명작 400선》(마로니에북스) 시리즈다.

 

 

 

 

 

 

 

 

일단 이 책의 구성이 너무나 단출하다. 책을 펼치면 휴즈의 서문이 있고, 나머진 전부 작품명만 달린 그림이 쭉 이어진다. 뒤쪽에는 작가 연보와 색인이 있다. 이 시리즈는 반 고흐, 마그리트, 마티스, 달리, 피카소 총 다섯 명의 화가의 작품 사진을 각각 400점씩 실었다. 정말로 책 한 권에 그림이 400점 실려 있는지 직접 세어보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그림 좋아하는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도 남을 양이다. 이 시리즈에는 작품 설명이 없어서 화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은 그림만 봐도 성이 차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다섯 권 중 세 권(피카소, 마그리트, 반 고흐)은 품절되었다. 하지만 《명작 400선》 시리즈를 ‘그림의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다. 기존의 미술 화보는 판형이 상당히 큰 편이다. 그래서 《명작 400선》 같은 언제든지 들고 다니기 편한 미술 화보는 많지 않다. 또한, 그저 그림만 봐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복잡한 미술 공부를 할 필요도 없으니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나’와 그림과의 일대일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림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벌써 쫄 필요 없다. 그림을 보는 것에 정해진 정답은 없다. 철저히 보는 사람의 몫일 뿐이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누군가는 감동을, 또 다른 누군가는 슬픔을 느낀다.

 

마음이 불안정하면 일체 대상에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게 된다. 모든 상황에 대해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이 있는 것을 우리는 늘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그림으로 향한 《그림의 힘》의 저자가 보는 눈과 독자 개인의 눈은 완전히 일치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명화에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 표현이다. 그림에 자신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투사하지 않는다면, 그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라보고 느끼는 행위는 축복이다. 그러다 보면 그림을 통해 혼돈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고, 풀어헤쳐 놓지 못했던 응어리진 상처들도 쏟아낼 수 있다. 그림을 잘 보는 방법? 특별한 건 없다. 그냥 자신 있게 그림을 보면서 즐겁든, 슬프든 자신만의 감정으로 느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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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9-16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명작 400선> 표지가 cyurs님의 서재 배경화면이였군요 ㅎㅎ 요즘 그림에 대해 궁금해서 알렝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을 살펴보는 중이였는데 이 책도 살펴봐야겠어요 정보 감사합니다^^

cyrus 2015-09-17 14:48   좋아요 0 | URL
제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해서 프로필 사진과 배경화면 모두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정했어요. 배경화면 그림 제목은 <조콘다>에요. ^^

물고기자리 2015-09-16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림의 힘>의 설명 방식이 정말 불편했어요. 전 그 설명들이 아름다운 그림들에 덧붙여진 불필요한 소음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책을 직접 봤더라면 사지 않았을 것 같아요. <명작 400선>은 소장해두고 보기에 좋을 것 같네요^^

cyrus 2015-09-17 14:51   좋아요 0 | URL
저자의 설명 때문에 독자는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읽게 됩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사실에 의아했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내용은 없었거든요. ^^

인디언밥 2015-09-16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명작400선..!! 북플하먄서 좋은 책들 많이 알아가는듯 ㅜㅠ

cyrus 2015-09-17 14:53   좋아요 1 | URL
책값이 조금 비싸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만 빼면 괜찮은 책입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9-16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시리즈 욕심 내면 책을 계속 사야 하는 부작용이.. ㅎㅎㅎㅎ.

cyrus 2015-09-17 14:54   좋아요 0 | URL
반값할인이 있었던 시절에 시리즈 다 살 걸 그랬어요. 반값할인 제도가 사라지고 나니까 책이 잘 안 팔렸던 것 같습니다. 시중에 구할 수 있는 게 두 권 뿐이에요. ^^

짱아 2015-09-1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글에 격한 공감 합니다..

cyrus 2015-09-17 14:5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5-09-1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왼쪽의 책 <그림의 힘>을 갖고 있는 1인이에요.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미술 치료나 독서 치료에 관심이 있다 보니 이런 책에 끌리더라고요. 그림에 대한 어떤 말은 동의하지만 어떤 말은 동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20쪽에 나온 그림(원이 여러 개 그려져 있는, 빨간색이 많은 그림)은 저에겐 별 의미 없는 그림인데 빨간색이 사람의 기분을 업 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 그래요.
우선 저는 이 책을 그림만 먼저 찬찬히 보기로 했어요. 상상력이 차단되는 걸 막기 위해서죠.
그런데 그림을 보다 보면 그 옆에 있는 글을 자꾸 읽게 된다는... ㅋㅋ

cyrus 2015-09-17 15:00   좋아요 0 | URL
나중에 에바 헬러의 <색의 유혹>의 빨간색 이야기를 읽어봐야겠습니다. 색깔마다 장단점의 효과가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그림의 책> 1권을 읽다가 그냥 포기했어요. 저도 하루하루 고달프게 살아서 힘들어 죽겠는데 도통 이 책을 봐서 힘이 나지 않았어요. ㅎㅎㅎ

yamoo 2015-09-1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압도적인 두깨의 미술책들이네요~ 아, 이런 건 진짜 반값도서전에서 건져야 하는 건데요...
이 시리즈 욕심이 날 만 하네요. 책값이 장난 아닐거 같지만..

제게 <색의 유혹>이 있습니다. 헌데, 색채에 대한 책 하면 제가 본 책으로는 파비 비렌의 <색채의 영향>이 가장 뛰어납니다. <색의 유혹>도 괜찮습니다만, <색책의 영향>을 강추드립니다!

그나저나 탐나는 시리즈 소개 감사합니당~!^^

cyrus 2015-09-20 19:25   좋아요 0 | URL
반값할인 판매가 사라지면서 품절된 비운의 시리즈예요. 온라인 회원 중고샵에서도 잘 나오지 않아서 구하기가 쉽지 않을 듯해요. <색채의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은 처음 들어봅니다.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15-10-06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7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3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4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4 2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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