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종합편성 채널의 건강 프로그램이 날이 갈수록 인기를 얻고 있다. 어머니가 드라마 다음으로 많이 보는 방송이 건강 프로그램이다. 한 번은 건강 프로그램에 치매를 예방하는 건강 비법이 소개된 적이 있었다. 방송 스튜디오에 치매 판정을 받은 70대 노인이 출연하여 자신의 건강 비결을 밝혔다. 노인은 치매를 막기 위해 손가락 체조와 필사를 꾸준히 했다고 말했다. 노인이 성서를 필사한 노트도 공개되었다. 그 방송을 본 어머니는 필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나는 그 마음을 확인하고, 어제 《동주 따라 필사하기》를 주문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필사 노트에 흡족해하셨다.
나는 필사가 두뇌 발달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믿지 않는다. 손을 열심히 움직이면 두뇌를 자극할 수는 있다. 암기해야 할 내용을 손으로 글씨를 여러 번 쓰면 기억력이 향상된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하지만 실험 결과만 믿고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확실히 두뇌를 좋게 하려면 필사만 하는 게 아니라 소리 내어 글을 읽고 글자를 암기해야 한다. 두뇌를 확실하게 사용하면서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필사는 공부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오늘날의 필사는 자기 성찰을 위한 힐링 문화로 재조명받고 있다.
필사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간단하다. 펜, 공책, 필사하고 싶은 책. 이게 전부다. 세 개의 준비물 모두 집에 있는 것들이다. 아차, 책과 담 쌓은 사람이라면 집에 글자만 있는 책이 단 한 권도 없을 수 있겠다. 아, 사람들아 책 좀 사라! 필사하고 싶은 책은 아무나 해도 좋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나 소설이 좋다. 필사는 소박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독자들은 필사를 시작하려고 필사용 책을 구입한다. 2년 전에 컬러링북이 출판업계에서 힐링 아이템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어른들은 복잡한 생각에 벗어나 색칠 놀이에 푹 빠졌다. 그 힐링 문화 트렌드를 이제 필사가 바통을 이었다. 독자들은 좋은 문장을 정독하고 손으로 직접 쓰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컬러링북이 시각의 자극을 통해 생각을 비워나가는 방법을 알려줬다면, 필사용 책은 ‘문학’이라는 감성적인 콘텐츠를 통해 생각의 속도를 차분하게 해준다. 필사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 필사용 책은 가장 일반적인 시집부터 소설, 수필, 성경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선보여지고 있다. 필사용 책을 찾는 사람들이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내가 주문한 《동주 따라 필사하기》의 정가는 13,900원이다. 알라딘 할인 가격은 12,510원이다. 《동주 따라 필사하기》는 읽는 용도의 시집과 필사용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집에 시집과 공책 두 권 다 있으면 《동주 따라 필사하기》를 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세상의 유행에 둔감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필사용 책을 사는 것이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필사용 책을 구입하는 결정은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인 행위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필사는 소박한 준비물만 있어도 충분하다. 서재에 꽂힌 윤동주, 김소월 시집을 필사용 도서로 사용해도 된다. 그 다음에 쓰다 만 공책이나 수첩에 필사할 수 있다.
필사용 책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불쾌한 말로 들리겠지만, 필사 유행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해 필사용 책을 사는 행동은 어리석다. 행동경제학 측면에서 본다면 필사용 책을 구입한 독자들은 눈앞의 이익에 눈멀어 이성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눈앞의 즐거움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현재 편향(Present Bias)’의 덫에 걸렸다. 우리는 현재 자신이 원하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먼 훗날의 일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중시해 돈을 쓰는 경향이 있다. 필사를 꾸준히 실천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필사가 아무리 좋아도 살다 보면 바빠서 필사하는 일을 점점 미루거나 필사의 재미를 예전보다 덜 느낄 수 있다. 이러면 후회가 확 밀려온다. 아, 내가 13,900원을 내면서까지 필사용 책을 왜 샀을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책 상태를 유지했으면 알라딘 중고시장에 팔면 된다. 하지만 이미 필사 흔적이 남아있는 책을 과연 누가 사겠는가.
필사는 조용히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는 소박한 기록 행위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공책만 있으면 된다.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다. 필사 유행을 감지한 출판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필사용 책을 내놓기 시작한다. 일단 독자들의 지갑을 열리게 하는 책만 만든다. 출판사들은 감성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면서 필사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책을 더 많이 팔아보려는 그들의 노력이 가상하다. 열려라, 지갑! 평소에 책을 사지 않던 독자들은 필사용 책 앞에서는 지갑을 자연스럽게 연다. 우리나라 작년 가구당 책 사는 데 쓴 돈이 한 달에 16,623원이다. 책 읽는 데 사용한 시간은 하루 평균 6분. 서점 주인들은 시집이나 수필집이 안 팔린다고 울상을 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사용 시집’을 선호하는 젊은 고객층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만약 필사가 유행되지 않았으면 윤동주 시집은 지금처럼 꾸준히 팔려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독서와 필사 모두 ‘아날로그 행위’에 속한다. 사실 필사는 독서를 기반으로 하는 활동이다. 먼저 글을 읽고, 그 글 속의 문장을 천천히 손을 써보면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요즘 사람들은 독서를 멀리하고 필사를 좋아한다. 지금의 출판 시장은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