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사라지지 마 - 노모, 그 2년의 기록
한설희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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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만큼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부르게 되는, 항상 부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부르지 못한 것만 같은 그 이름, 엄마. 엄마의 모습을 자신만의 피사체로 담아낸 사진집 <엄마 사라지지 마>는 예순아홉, 노년에 접어든 주부 사진가가 처음으로 사진기로 표현하는 시각적 사모곡이자, 내밀한 고백이다. 2010년부터 2년간 매일 경기도 용인 자신의 집에서 서울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죽음을 앞둔 어머니의 하루하루를 카메라에 담았다. 하얀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할 정도로 노년으로 접어든 자녀는 이미 백발이 성성한 93세의 노모를 바라볼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진가는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엄마 바라보기’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긴 시간, 한 번도 그녀에 대한 진솔한 마음을 드러낸 적은 없다. ‘엄마, 사라지지 마.’



사진가는 ‘엄마’를 이렇게 정의한다. 「주름 골이 깊고 검버섯이 핀 여자. / 흐트러진 백발과 초점 없는 눈으로 침묵하는 여자. / 고단한 세월이 옹이처럼 얼굴에 박힌 여자. / 혼자 누워 있거나 밥을 먹는 여자.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자.」(p 33)

그것은 사진가 자신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 시대 모든 어머니들이 살아낸 모성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길고 긴 산고를 겪고, 제 젖을 물리고, 제 살을 떼어주며 우리를 키워낸 엄마. 그 촌스럽고 어리석고 못난 이름, 한 남자만을 평생 바라보기로 약속한 순간 ‘여자’이기를 포기해버린 이름. 그래서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이다. 카메라 셔터의 손끝에서 더욱 미련하고 촌스럽게, 그래서 더욱 아프게 그려진다.



어두컴컴한 바다 깊숙이 사는 심해어는 햇빛이 들어오는 해수면 위로 오르면 오래 살지 못한 채 죽고 만다. 엄마는 빛이 전혀 투과되지 않은 고독의 심연 속에서 산 심해어다. 사진가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채 살았던 ‘엄마’를 세상의 빛이 비치는 양지로 머물도록 소리 내어 불러본다.

「엄마, 이거 봐요. 빛이 이렇게 좋아요. / 누가 밖에서 보면 어떡하니. / 구십 넘은 할머니를 누가 훔쳐본다고 그래요.」(p 55)




「저 하늘에 해와 달은 변함없이 비치지만 / 사랑하는 우리 엄마 어느 곳에 계시나요. / 비 옵니다. 비 옵니다.....」(p 79)

살아가면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하라’는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잘 와 닿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잘 알지만, 어쩐지 막연하게 엄마와 나는 헤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는 착각에 빠져 살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종종 ‘엄마’에 관한 것은 ‘2순위’가 되곤 한다. ‘다음에 해도 되니까, 나중에 봐도 되니까’라는 말로 엄마보다는 연인을, 친구를, 그리고 나 자신을 앞세우고 살지는 않았던가. 그래도 언제나 이해해줄 것만 같고, 언제나 기다려줄 것만 같은 사람도 바로 엄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스마트폰으로 향할수록 정작 가까이에 있는 것을 놓칠 때가 있다. 바로 엄마다. 혼자 있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 시간은 물 흐르듯이 지나간다. 그러나 엄마 곁에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공중으로 금방 증발되는 아세톤처럼 줄어든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같이 정말 소중하면서도 가까운 존재의 부재를 너무 뒤늦게 깨달아버린다.

「늦든 빠르든 우리는 언젠가 고아가 된다. / 내 머리 위를 받치고 있던 커다란 우산이 순식간에 거두어지고. /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비와 눈을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것. / 그것이 부모를 잃는 경험이 아닐까.」(p 20)




한평생, 무겁고 가혹한 삶에 억눌려 살아온 사람이 명줄만은 질기게 길어 아흔 해를 사는 엄마. 그 긴 세월을 자식한테 행여 누가 될까 뒷전에서 숨죽여 바라보며 가슴 속 응어리마저 삭히며 살아온 그녀는 사람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쓸쓸한 무인도가 되었다. 그 모습이야말로 지은 죄도 없는데 평생 자신을 희생하며 우리를 키워낸 우리들의 엄마일지 모른다.




이 사진집을 읽는 도중에 문득, 엄마 생각이 나면 가슴이 뻥 뚫린 듯 명치끝이 아려왔다. 분명 내 옆에 있는데도 말이다. 엄마의 따스한 감촉을 잃은 지 어언 10여 년이 지났다. 이제야 엄마와 함께 보낸 하루하루가 ‘행복’이었음을 깨닫는다. 「엄마가 거기에 있다는 것, / 그 사실이 새삼 고맙다.」(p 60) 사진가의 솔직한 고백은, 사실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마음껏 표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엄마가 계신 지금, 미루지 말고 함께 행복을 나눠보도록 아들인 내가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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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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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직감과 99%의 땀이다. 창의성은 직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이란 소위 잘 나가는 크리에이터가 쓴 책들을 읽고 따라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경험을 해보려는 '크리에이티브 중심적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에 익숙해진다면 굳이 긴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습관이 곧 노력이다. 크리에이터가 된다는 건 자신의 노력량에 따라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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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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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고독한 석전경우(石田耕牛)

석전경우(石田耕牛)는 거친 돌밭을 묵묵히 갈아매는 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는 뜻을 지닌 사자성어다. 양손에 물뿌리개를 든 채 정원으로 향하는 노인의 뒷모습은 속도전의 사회 속에서도 우직한 걸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고집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앞뒤 물불 가리지 않는 혈기왕성한 ‘황소’였지만 세월의 장사 앞에서는 평온함과 여유를 찾는 ‘우공’(牛公)이 된다. 한편으로는 정원의 노인의 뒷모습은 플랑드르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에 등장하는 농부를 연상케 한다.

젊은 이카루스가 광활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림 속 농부는 물에 빠져 살려 달라는 이카루스의 절규를 분명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 하고 있다. 그저 묵묵히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다. 세상은 개인의 운명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바깥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만들어 낸 쓸쓸한 뒷모습이기도 하다.




Scene #2 포옹으로 사랑 확인하기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사랑한다’는 말 자주 하기, 너무 식상하다. 그리고 말 한 마디만으로도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다. 서로 눈 마주치기, 너무 모호한 감이 있다. 비언어적 소통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뽀뽀와 키스, 시작 단계의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로써의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남녀 모두 공통적으로 ‘첫’ 키스와 뽀뽀에 대한 기억이 제일 강하다. 섹스는 사랑의 종착역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너무 타락했다. 그렇다면 남은 게 포옹하기(Hug). 포옹할 경우, 뇌에서 분비되는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옥시토신이 많이 나올수록 스트레스를 크게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 몇 년 전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했던 ‘프리 허그’(Free Hug) 운동이 우리 몸과 마음에 유익한 생리학적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스킨십은 의사소통을 하는 여러 가지 방식 중에서 가장 날것이며 직접적 방식이다. 그러나 삐뚤어진 ‘성’(性) 가치관에서 비롯된 흉흉한 범죄사고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 자유로운 포옹 행위가 어색해져만 가고 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도 오래 살다보면 연인 시절 때 자주 하던 키스나 스킨십이 줄어들듯이 간단한 포옹하는 것마저도 잊어버린다. '촉감 궁핍의 시대’인 셈이다. 인간은 말랑말랑한 살갗이 바깥에 있는 인체 구조를 지녔기 때문에 외부 촉감을 잘 느낄 수 있다. 엉큼한 흑심을 품은 채 인간 몸 구조를 잘 활용하는 포옹도 좋겠지만, 마음과 마음의 포옹이라도 서로 간에 우선 건네는 것이 더 좋다. 사진 속 연인처럼 포옹을 자주 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신체적 반응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간이 정지된 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있는 연인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Scene #3 따뜻한 모정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곳



아마도 아기를 어머니의 등에 업는 풍속이 있는 지역이 아시아권 국가뿐일 것이다. 유럽 풍속 중에 우리나라나 인도의 어머니처럼 아기를 등에 업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유럽의 경우, 아기를 요람 위에 재우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아기를 돌보는 풍속이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모정(母情)의 정도 차이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유럽보다는 아시아권 국가의 어머니들이 더 아기를 최대한 자신의 곁에 가까이 돌본다. 시장을 가더라도 어머니는 아기를 등에 업고 다닌다. 부엌에서 요리를 준비할 때도 그렇다. 박수근의 그림 속 어머니처럼 약간의 힘이 요구되는 노동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아기가 낮이나 밤에 잠드는 것을 제외하면 24시간의 반은 어머니의 등에 지낼 때가 많다. 어머니 당신 입장에서는 체력적으로 소모가 크지만 자신의 등 뒤에서 편안하게 잠이 든 아기의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다. 아기가 어머니의 등에 업히는 행위는 단순히 아기를 좀 더 안전하게, 그리고 간편해서 돌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등에서 나온 따뜻한 모정의 체온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이며 아기만의 집이다.



Scene #4 바다(Mer)와 어머니(Mère) 그리고 자궁(Matrice)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아기는 자신들 앞에 펼쳐진 거대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와 아기가 함께 하고 있을 때의 뒷모습은 어른이 되면서 잊혀져가는 모정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가끔 우리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때 함께한 존재들을 먼 기억의 저 편으로부터 끄집어내기도 한다. 어머니가 된 아이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의 존재를 그리워한다.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는 자궁 속에서 생활했을 때의 버릇이 남아 있다. 아기를 따뜻한 물에 목욕을 시키면 물에 대한 두려운 반응 없이 물장구를 친다. 자궁 속 양수를 받아들이는 신체적 반응에 의한 행동이다.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 나는 나는 넓은게 또 하나 있지 / 사람 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애”

‘어머니 은혜’의 노랫말처럼 정말 어머니의 존재는 넓고 넓은 바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다. 어머니의 자궁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세상 밖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




Scene #5 화려한 열정 뒤에 숨겨진 노력의 흔적




프랑스의 화가 에드가 드가가 남긴 수많은 그림들 중에는 유독 무희(무용수, 발레리나)들을 모델로 한 작품들이 꽤 많이 있다. 무희의 행동 하나하나 관찰을 했을 정도로 적지 않은 데생들도 남아 있으니 ‘무희의 화가’ 답다. 드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한순간의 동작 따위를 포착하는 데 명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드가는 여성혐오주의자다. 무희들의 순간 동작과 예기치 않은 손과 발의 움직임에 눈먼 그가 삶에서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또한 무희였다. 어떻게 보면 드가가 그린 무희들은 여성 혐오적 시선과 예술적 이상의 간극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드가의 사연은 그림을 보는 데 있어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드가의 섬세하고도 치밀한 관찰과 묘사는 마치 현장을 보는듯한 생생한 감동을 전해 준다. 드가의 무희 그림을 연상하게 만드는 사진 역시 그렇다. 우리는 역동적인 자세로 춤을 추는 우아한 모습의 무희만 생각한다. 그러나 토슈즈를 매만지는 동작에도 우아함과 섬세함이 느껴진다. 춤의 열정을 잠시 뒤로 한 채 복장을 점검하며 숨을 가다듬는 무희의 뒷모습에는 화려함 뒤에 숨겨진 피나는 노력의 흔적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



뒷모습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또 다른 제2의 정면’이다. 다만 보이지 않아서 뒷모습의 진면목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뒷모습을 통해 절실한 생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세월의 흔적 역시 정면에만 남는 건 아니다. 정면은 그저 드러난 앞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숨기고 가리기 위해서 가면을 쓰기에 급급하다. 꾸미고 장식되고 포장된 앞모습보다 꾸밀 수 없고 속일 수 없는 뒷모습이 더 정직하다. 이제 정면만 관리하지 말고 소홀히 했던 뒷모습도 돌아볼 줄 아는 삶의 내공이 필요하다. 뒷모습 또한 우리의 얼굴이다. 앞뒤가 서로 다른 이중적인 존재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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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9-2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모습은 꾸밀 수 있지만 뒷모습은 꾸미려고 하지도 않고, 꾸미기도 어렵기 때문에 앞모습보다 더 솔직한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새벽에 예쁘장한 여자가 지나가더라고요. 옷도 잘 입었고...스타일이 괜찮다 싶었는데, 거기다 찾아보기힘든 롱스커트까지...그런데 뒤에 뒷모습을 보니 롱스커트가 팬티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더라고요. 아마도 잔뜩 취해서 옷매무새를 정리 못했나 봅니다. 사이러스님의 글을 읽다보니 그 여인의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뒷모습이 문득 생각이 나네요.

cyrus 2012-10-02 20:17   좋아요 0 | URL
ㅎㅎㅎ 맞아요, 저도 가끔 운이 좋으면(?) 재미있는 뒷모습을 목격할 때가 있어요. ^^
 
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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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분노의 순간을 다시 살(生) 수 있다면! 나는 그 순간 내가 살아오던 인생이 그 말로 집약되어 버린 데 몹시 화를 내지 않았던가?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쩌자고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렵혀진 종이에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박쳐둘 수 있었단 말인가! 그 이별의 날, 내 친구는 내가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 준 셈이었다. 속이 후련했다. (중략) 그의 표정이 내 내부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던 셈이다. 나는 내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았다. 나는 이 새로운 인생에 책 부스러기를 동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 인 조르바』pp 14, 열린책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그리스 인 조르바』에서 시인인 '나'는 자유로운 인간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고 난 후부터 자신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 미완성인 채 수없이 원고 뭉치를 만지작거렸던 시인은 그동안의 글쓰기 인생에 대해서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조르바와 동행함으로써 책에만 골몰하게 파묻혔던 '책벌레' 생활을 청산하고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자유의 바다에 뛰어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조르바는 시인을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 그를 '책벌레'라고 부른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만 표현할 줄 밖에 모르는, 거대한 사회에 직접 부딪혀 행동하지 못한 사회적 숙맥을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다 겪어 본 천하의 조르바도 제대로 모르는 사실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줄 알고 책만 읽는 사람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르바처럼 자신의 생각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은 문학을 소홀히 하거나 낮추어 보지 않았다.




-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중에서 -


혁명가와 운동가로만 알려진 체 게바라가 시를 썼다는 사실은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르헨티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는 프랑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소포클레스, 랭보, 세익스피어에 심취할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던 '열혈남아'였다. 쿠바로 건너가 게릴라로 혁명운동에 동참한 그는 목숨을 건 전투중에도 괴테, 보들레르 등의 책을 베낭속에 갖고 다녔다. 적군의 총알이 자신의 심장을 뚫릴지도 모르는 전장 한가운데서 늦은 밤에 등불의 기름을 낭비하면서까지 괴테 전기를 읽고 있는 체 게바라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가의 색다른 면모이다.

일기에는 수많은 전투기록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간결한 시 같은 글들이 적지 않았다. 그가 쓴 시에는 일찍부터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혁명가의 진지한 내면고백이 담겨 있다.


내 나이 열 다섯 살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체 게바라 '나의 삶' 중에서, 『먼 저편』(문화산책) 수록)



보다 잘 사는 세상에 대한 간절한 꿈은 문학을 좋아했던 남미의 혁명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학 관련 상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노벨문학상, 그 영예를 차지했던 문학의 거장들도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출신 문학전문기자인 사비 아옌과 스페인 출신 사진기자 킴 만레사는 3년여 동안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16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과의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그 대담들을 모은 책의 제목이 『16인의 반란자들』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읽기 수월한 책이 많지 않다.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도 그들의 가벼운 인터뷰를 먼저 접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문학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이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잘못된 정치이든 폭력적인 민족주의든 어떤 형태로든 권위에 저항을 한다. 부당한 권위 앞에 맞서서 '펜'이라는 훌륭한 무기에서 비롯되는 문장의 힘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 작가들은 망명이나 이민 등을 선택해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반란자가 되기도 한다. 문학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고 사회에서 소외된 것들과 그 사회의 지배 논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올바른 의식은 기득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폄하당하기도 한다. 1995년 수상자인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는 점점 부당한 권위 앞에서 시들어져만 가는 포르투갈인들의 정신을 염려스러워한다. 하지만 그의 조국은 그의 문학과 생각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해버린 것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라도 '좌파'의 논리라고 규정짓는 우리나라 사회처럼 우리보다 좀 더 성숙한 사회의식을 형성한 서구 역시 이데올로기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내 책들이 지나치게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해요. 그들은 나만 이데올로기적이고 자기들은 아니라는 거요. 그들은 나만 이데올로기적이고 자기들은 아니라는 거요. 그들은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 급진적 신념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요. 나는 오로지 이데올로기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거나 공산당이라는 거요. 그런 그들에게 나는 할 말이 있어요. 삼라만상에는 거의 자라지 않는 나무도 있는데, 그건 그 나무가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 그렇다고 해서 세쿼이아가 올리브나무보다 낫다는 건 아니오. 그 반대도 아니고."
(주제 사라마구, pp 30)

1997년 수상자인 이탈리아의 다리오 포는 권력에 맞서기 위한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인 무기로 '풍자와 웃음'을 택했다. 고위층의 권위의식을 신랄한 말투로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희곡을 쓴 작가답다. 현재 그는 이탈리아의 민주화 운동에 힘쓰고 있으며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요. 광대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화형에 처해졌어요. 권력은 유머를 견디지 못해요. 하물며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통치자들조차 마찬가지요. 웃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다리오 포, pp 87)


다리오 포만큼이나 터키의 오르한 파묵 역시 특유의 유머로 오만한 엘리트들에 대한 조롱과 비판을 할 수 있는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터키 극우주의자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을 정도로 경호원의 동행이 필요한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호탕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평소에도 그가 긍정적인 마음과 유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머와 웃음 속에는 세상에 대한 직설적이고도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숨겨져 있다.





"또한 나는 경박한 자들을, 저 위에서 종교와 문화적 신념과 특권층이 아닌 계층들을 경멸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상류층을 증오해요. 나는 엘리트들의 오만함에 분노해요. 그들은 교만과 자존심으로 이 나라를 다스리고 민주주의와 문화를 파괴하고 있어요. 그건 서양이 이라크나 다른 나라들에게 저질렀던 어리석은 짓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요.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의 오만하고 천박한 행위 역시 마찬가지요." (오르한 파묵, pp 104)


1999년 수상자 귄터 그라스는 정작 참된 세상의 발전을 방해하는 적을 99%의 세계를 지배하는 1%의 존재, 즉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마당에서 자신의 텃세인마냥 휘젓고 다니는 자본가들과 그들과 결탁한 정치권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에 사회 불평등 구조에 대한 세계적인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는 지금, 그라스의 생각은 세계인들을 향한 일종의 경고처럼 들려진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소. 민주주의의 적은 극우와 극좌, 이슬람주의자들이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로부터 자유의 내용물을 비워내고 있는 것은 거대기업과 은행들, 입법권을 쥐고 흔드는 정치권력이란 게 증명되고 있어요. 우리를 쫓아내는 기업들은 자기들의 주가가 오르는 동안, 모두한테 익숙해진 파렴치한 타락행위를 일삼고 있어요. (생략) " (귄터 그라스, pp 210)


중국 출신의 가오싱젠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권력이 있으면 자유는 없다. 민주주의 체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좌파니 우파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차별성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해 정치권력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권력에 직접 맞서기보다는 망명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적인 존재를 위한 기본 조건마저 허락하지 않는 절대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창작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나약해요. 반면에 정치권력은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나를 짓밟을 수 있어요.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유일한 희망은 도피요. 나는 도망자이지, 영웅이 아니오. 도피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나를 바퀴벌레처럼 짓밟았을 거요. 나를 체제에서 벗어난 탈퇴자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지만, 나는 탈퇴자가 아니며 정치적으로 맞서지 않았어요. 나는 단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자유인으로서의 작가이며, 내가 거부했던 권력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마저 불허하는 절대권력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쳐야 했어요,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멀어져야 했고, 창작을 위해서 망명을 해야 힜어요. (생략)" (가오싱젠, pp 170)




주제 사라마구 부부


다리오 포 부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부부



새로운 사회개혁을 꿈꾸는 혁명가 또는 반란자들에게는 그들의 의지를 꺾으려고 하는 적대 세력이 존재하지만 이에 맞서 저항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든든한 지원자 또는 조언자가 있기 마련이다. 『16인의 반란자들』의 인터뷰는 단순히 16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활동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항상 그들을 오랫동안 바라 봤고 지켜 본 인생의 동반자들 덕분에 16인의 작가들이 저항의식을 갖춘 반란자가 될 수 있었다. 렌즈 속에 담겨진 몇 몇 작가들 부부의 사진은 흐뭇하게 느껴진다. 오랜 세월동안 이어진 끈끈한 작가들의 부부애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작은 볼거리 중 하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소설이 단지 하나의 문학 작품이 아니라 작가가 삶에 대해 느끼는 문제에 대해 싸워 나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은 사상이나 인간의 감정을 언어로 구축한 허구적인 세계로 이루어진 장르가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 삶을 둘러싸 일어나고 있는 실제 세계의 모습도 있다. 그리고 사회 문제가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로써 문학의 힘,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글은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겨내 진실을 알리는 파급 효과를 지니고 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질수록 문학에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 살면서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에게 멘토를 구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노벨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다양한 나라의 지성과 먼저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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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16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내 맘대로 좋은 책 탑5안에 드는 책이다.ㅋㅋ

cyrus 2012-03-16 22:0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좋았어요, 이 책 덕분에 작가들의 소설들이
얽어보고 섶어졌여요. ^^

잘잘라 2012-03-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엇! 이 책.. 포기했었는데.. 결국.. 다시 보관함으로~~~ ㅋㅎ

cyrus 2012-03-17 12:48   좋아요 0 | URL
네, 꼭 읽어보셔요. 위에 스텔라님도 말씀하셨지만 정말 좋은 책이에요 ^^

감은빛 2012-03-22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갖고 있는 책입니다.
시루스님의 멋진 소개 덕분에 조만간 장바구니에 담게 될 듯 하네요. ^^
 
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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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의 쓰나미에 휩쓸리는 현대인

 

하루 자고 나면 세상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되는 이 세상에서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며 그 변화의 방향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면 지위가 높아지는 사람보다 낮아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만큼 사회적인 불안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그것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인생의 낙오자나 실패자로 간주된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신이 혹시 세상의 왕따가 되지 않을까 또는 실패자로 규정되지 않을까 하는 만성적인 불안감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경제 불황, 실업률 증가, 구조 조정 등의 어두운 사회현실은 더욱 더 우리를 불안으로 내몰고 있다. 마치 불안은 삶의 전면에서 우리를 마구 뒤흔들어놓는 거대한 쓰나미와도 같다. 그리고 이처럼 불안이 휩쓸고 간 후에 남는 것이라고는 자괴감과 상실감 밖에 없다.

 

 

 

 '불안'이라는 성가신 불청객 달래기


알랭 드 보통은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기 때문에 불안이 야기된다고 분석한다.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 등으로 인해 불안한 것이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욱 커진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불안은 어쩌면 부와 권력에 안달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욕망의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비단 드 보통만이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이 겪고 있는 불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의 대부분은 서점의 '처세술' 코너에 쌓여 있다. 그 책들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전략'이다.

 

드 보통은 다르다. 그는 우선 불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삶이라는 전쟁터는 과연 어떠한 곳인가?', '삶은 과연 전쟁이기만 한 것인가?'  드 보통은 우리의 삶에서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불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를 통해서 이 성가신 불청객을 어떻게 달래주면서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언해준다.

 

 

 

 불안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

 

사회로부터 도태되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한 애처로운 불안의 절규와 몸부림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은 점점 더 소심해지고 작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불안을 감싸하고 다독일 줄 알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은 남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예외적인 인물들이며, 사회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갈 줄 아는 즐거운 산책자이다.

일찍이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욕이나 비난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성은 타인의 말과 시선이 실제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타인의 말보다 자신의 이성을 더 신뢰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남의 생각이나 판단을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보헤미안들은 경제적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에 대항함으로써,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키고자 한 삶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은 세상이 외면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몸소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불안에 당당했던 그들은 단순히 경제력이나 물질적 성공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가치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와 '불안'을 가둬버린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나보다 성공한 사람에 대한 불쾌감을 잘 표현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남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처럼 남들보다 잘 보이려고, 좀 더 우월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늘날 현대인을 점점 더 병들게 만든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다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차피 나는 남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한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불안감과 마주쳐야 한다. 그런데 알랭 드 보통에 의하면, 인간이 느끼는 불안감의 정도는 자신이 생각하는 준거집단, 바꿔 말하면 세상의 울타리에 한정된다고 한다. 세상에 나름의 울타리를 치고서는 적어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우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 스스로 '불안'이라는 불청객을 불러들이면서도 나가지도 못하게 만드는 폐쇄적인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불안' 불청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폐쇄적인 울타리를 만들어 자신의 마음을 가두려고 해서는 안 되거나 그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는 방법 밖에 없다.  이제까지 우리를 옭아맸던 세상 사람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야 한다. 비로소 우리는 불안을 삶의 침입자가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삶을 꾸려나갈 숙명적인 동반자로서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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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0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구나. 이번에 평가단 위시목록에 넣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나이들면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지더라구.
그런데 작가는 걱정과 불안을 같은 의미로 다룬 것도 같네.
그냥 걱정은 생각 안하고 불안만 다룬 것도 같고.
암튼 한번쯤 읽어야할 책인 것 같긴해.

cyrus 2012-02-01 21:01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구판으로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읽은지 하도 오래되어서 표지만 달라졌을뿐 내용은 똑같은거 같았어요.
가끔씩 잊혀질 때 한 번씩 읽어두면 좋을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