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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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잊혀져가는 한국화 속 선인들의 감정

요즘 우리 미술계에선 현대미술 전시는 흘러넘쳐도, 제대로 된 한국화 전시는 드물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같은 경우에는 르네상스부터 근대까지 광범위한 미술사조들의 그림을 매일 볼 수 있지만 양이 한정되어 있어 보존 유지가 필요하는 한국화 특성상 간송미술관에 일 년에 두 차례 여는 특별한 전시가 아니면 화랑가에서는 볼만한 전시를 접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관객들이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한국화 전시 환경의 풍토가 척박하다보니 정작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그림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무관심할 수 밖에 없다.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진 서양화에 에 눈이 익숙해져 흑백의 한국화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화 특유의 정취와 고아한 미(美)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한국화에는 잔재주를 품은 채 먹물로 그려진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한국화 속에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던 그 당시 화가 또는 시대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옛 그림을 보게 되면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선인들의 감정 및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화가 대중들의 인식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어지듯이 선인들의 감정도 잊혀지게 된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에서 ' 옛 생각 ' 이 단지 옛 것의 아름다움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심정을 관객은 그림을 통해 교감할 수 있다.   '옛' 이라는 단어만 가지고 고리타분한 생각일거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옛 그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이며 착각이다.  시간은 초월하더라도 옛 그림 속에서 남아 있는 '옛 생각' 들은 현대인들이 느끼고 있는 생각 및 감정과 똑같으며 세속에 파묻혀 검정이 무더져 가는 회색의 현대인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던 감정을 깨워주기도 한다.  
 

 

 

   노인을 술 푸게 하는 것   

 

 

정선 <꽃 아래서 취해 (심화춘감도)> 18세기   (책 pp 19) 

 

한 손에 막대기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은 길은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은 막대기로 치려고 하였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우탁 (고려 말의 학자, 1263~1342) - 

 

봄은 조물주의 탄생이 시작되는 세상의 서막이다. 겨울잠에 잠들었던 나비가 훨훨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눈 속에 꼭 닫았던 꽃봉오리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화려한 꽃잎을 펼친다.  

그러나 봄이 온다고해서 모든 사람이 다 즐겁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꽃과 나비를 보면서 누군가는 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노인은 술병과 술잔이 엎어져 있을 정도로 취한 상태이다.  봄의 생동한 기운에 흥해서 술에 취한 것일까?     술을 마시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인데 술 취한 노인의 표정은 썩 기쁘지가 않다.    노인은 봄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게 아니라 춘수(春瘦)을 달래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있다.    봄은 젊음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인들에게는 봄은 그리 달갑지가 않다.  봄이 온다는 것은 곧 세월의 시작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어찌 잡을 수 있으랴. 

춘수는 곧 흐르는 세월 앞에서 탄식할 수 밖에 없는 봄만 되면 뒤숭숭해지는 마음의 병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인간은 무능한 존재일뿐이며 인생은 유한하다.  

고려 말의 학자 우탁은 시조를 통해서 두 손에 쥔 막대기와 가시를 통해서 어떻게든 '늙은 길' 과 '백발' , 즉 흘러가는 세월과 시간으로 인해 생기는 '늙음' 을 막아보려고 한다.   반대로 춘수에 시달리는 노인은 코 빠지도록 술을 마심으로써 힘겨운 마음의 고통, 즉 늙음에 대한 회한 그리고 인생 무상의 서글픔을 잊으려고 하는 듯하다.    봄이라는 세상이 노인을 술 푸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 살아 가고파  

 

 이한철 <물 구경 (의암관수도)>  19세기  (책 pp 108~109)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다네. 

 

-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 -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강희안의 <고사관수도>가 연상되었다.  바위 위에 앉아서 물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은 강희안의 그림과 비슷하지만 이한철의 그림이 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물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시원스럽다.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을 벗아나기 위해서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바닷가를 휴가지로 많이 찾는 편이다.  역시 선인들도 공부에 심신이 지치게 되면 산 중의 계곡과 같은 자연의 공간 안에서 휴식의 즐거움을 찾았다.  

관수세심(觀水洗心).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씼는다고는하지만 그림 속 선비는 마음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속이 만들어낸 마음 속 고충들을 씻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자연 속에서 마음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계곡을 찾아왔지만 한 선비는 물의 흐름에 매로된 나머지 동행한 선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동료 선비와 종이 귀가하자고 종용하고 있지만 선비는 당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치원의 시구처럼 ' 온 산을 둘러 싸인 ' 계곡의 물소리는 세상의 번잡한 시비를 잠재우고 있다.  자연의 시원한 물 소리로 인해서 복잡하고 시끄럽기만한 세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아예 세속에 대한 그리움마저 들지 않는다.   아마도 선비는 사회 현실을 외면한 채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된 최치원처럼 물소리를 통해서 그동안 세속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동시에 세상과 단절하고 자연 속에 은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조가 국화를 그렸던 진짜 이유

 

 

 정조 <들국화> 18세기 (책 pp 155) 

 

국화야, 너는 어찌하여 삼월동풍(三月冬風)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어 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 조선 후기의 문신 이정보(1693~1766) 의 시조 -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1752~1800)가 그린 국화 꽃송이 위에는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메뚜기는 한 번에 수많은 알을 낳는데 '다산(多産)' 을 상징한다. 국화 옆 바위는 인간의 '수명' 을 뜻하며 국화의 '국(菊)' 자는 '살 거(居)' 자와 발음이 비슷하다.   저자는 한자의 종합적 해석을 통해서 ' 오래 살아서 자식의 복을 누리라 ' 는 기원을 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정조 대왕이 단순히 여가로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닐 것이며 '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 이라는 한 나라의 임금다운 낙관도 있는 그림인데 국화의 의미가 가벼운 감이 든다.   

국화는 사대부들이 자주 그렸던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이다.  사군자는 그림 속 매화, 난, 국화, 대나무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는 ' 고결한 군자 ' 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정보의 시조 속 에 나오는 국화처럼 서리가 생기는 추운 겨울에 핀 것은 아니지만 추운 겨울의 서릿발에서도 꽃송이를 피울줄 아는 국화의 특징은 군자로서의 지조와 절개와 유사하다.  자신보다 거대한 바위 틈에서 꽃송이를 피우는 그림 속 국화를 보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채 꽃을 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천명월주인옹 ' 이라는 낙관에는' 온갖 물줄기를 고루 비추는 밝은 달의 임자 ' 라는 거창한 의미가 있는데 정조 대왕은 국화의 그림을 통해서 조정의 사대부들에게 지조와 절개를ㅇ 유지할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물줄기뿐만 아니라 조선 방방곡곡 고루 비치는 밝은 달이 되고 싶었던 군주가 부귀에만 급급한 사대부들에게 향하는 의미 있는 충고인 셈이다.  

 

   

  마음으로 옛 그림을 느끼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그의 책에서 "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고 말한 바 있다. 유홍준 교수의 말은 어쩌면 우리나라에는 옛 유산들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옛 그림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빗대고 있다.  

으레 그림을 보게 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항상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있다.  ' 과연 이 그림의 가격은 얼마나 나갈까? '    그림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미적 가치를 먼저 알내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림을 팔면서 얻을 수 잇는 진정한 재화적 가치만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단지 아름답고 좋은 작품을 알아본다고해서 그것이 미술 또는 미술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림을 보면서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이말로 미술을 제대로 즐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미술 작품에 대한 안목과 식견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양의 잣대가 아닌 건전하고 다양한 취향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밑거름일뿐이다. 

한국화와 같은 우리나라 옛 그림에 대한 관심과 작품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옛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그림을 보면서 아름다움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자주 접하게 됨으로써 심미안이 향상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림 속에 숨겨진 선인들의 옛 생각들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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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8-19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명과 함께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미술관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참 좋습니다~

cyrus 2011-08-19 23:01   좋아요 0 | URL
제가 읽은 책 역시 읽었을 때 미술관을 관람한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제 글에 있는 그림은 책 속에 수록되어 있는 일부분에 불과하고요,,
사계절 형식으로 꽤 많은 그림이 수록되어 있어요,
어떻게 보면 짤막한 에세이 형식의 글이라서 내용의 깊이가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국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으로서
좋은거 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8-1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가 그린 국화라니, 완전 감동이에요. 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꽃그림은 좋아요. 예뻐요, 그림이. 아마 금방 시들기 때문에 꽃에게서는 별반 매력을 느끼지 못하나봐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지, 꽃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우리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 좋을 것 같아요.^^

cyrus 2011-08-19 23:03   좋아요 0 | URL
국화 그림 이외에도 남계우라는 사람이 그린 꽃 그림도 이뻐요.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아요,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생소하면서도 멋진 옛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책입니다. ^^

양철나무꾼 2011-08-2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 이 책 읽으면서 cyrus님 떠올렸었어요.
그림에 일가견이 있으신 님이 참 좋아할 것 같다 싶었거든요.
이제 개강이겠네요~^^

cyrus 2011-08-23 20:26   좋아요 0 | URL
이제 1주일 하루 남았어요.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방학 기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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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로테스크하다 '

  

 

 


프란시스코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1년
 

 

 

 

이 그림을 보게 되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흡사 오랫동안 굶은듯한 야인(野人)이 간만에 포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지만 그림 속 야인이 손에 쥔 채 먹고 있는 것은 산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리고 저 그림 속 야인의 저 광기어린 두 눈을 보라!   이 그림을 처음 본 관객 입장에서는 식인종을 그린 그림 또는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고야가 자신의 '귀머거리 집' 에서 그렸던 연작 벽화 [검은 그림] 중 하나이다. 그림 속 야인은 고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를 그린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 크로노스(Kronos) ' 라고 불리우며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투르누스에게는 우리에거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제우스와 그의 아내인 헤라, 저승의 신 하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등 6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는데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자식으로부터 지배권을 빼앗긴다는 예언에 미쳐버린 나머지 태어난 자식들을 잡아 먹는(!) 만행을 저지른다.  저 그림이 바로 신화 속 사투르누스의 잔인한 행위을 고야가 표현했던 것이다.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속 사투르누스의 부릅뜬 두 눈은 광기를 내뿜으며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행위에 대해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림 속 사투르누스의 모습이 더욱 음울하고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나름 교양 좀 있다는 사람들은 고야의 그림을 보면서 얻은 인상을 ' 그로테스크하다 ' 라고 표현할 것이다.  ' 그로테스크하다 ' 라는 말에는 그림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투르누스의 괴기스러움을 뜻하고 있다.


 

  그로테스크란 무엇인가? 

독일의 문학비평가 볼프강 카이저(1906~1960)가 쓴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1957년)는 그로테스크라는 하나의 예술적 양시을 개념으로 정립하고 그 의미를 역사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책일 것이다.   

 

 

 

볼프강 카이저가 태어나기 전에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카를 로젠크란츠<추의 미학>(조경식 역, 나남, 2008)에서 추를 미학에서의 필수적인 요소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예술사 속에서 추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움베르토 에코<추의 역사>(오숙은 역, 열린책들, 2008)을 통해서 광범위한 추의 미학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임마누엘 칸트는 추의 개념 중에서도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곧 미적 형상화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추가 미적 형상화를 거부하는 경우 일반적인 미의 개념에 반하는 것으로 성립되는데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로테스크 역시 미적 형상화를 거부하는 반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젠크란츠와 에코가 다루고 있는 추와 그로테스크는 서로 의미가 일맥상통하면서도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추는 미에 대립되는 미적 범주라고 한다면 그로테스크는 개별적 표현양식이다.     

15세기 이전에는 그로테스크는 문자, 식물, 기하학적인 모티프가 어울려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아라베스크 양식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예술양식으로서의 그로테스크라는 명칭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루카 시뇨렐리 <단테 (오르비에토 대성당 프레스코화)> 1499~1504년
 

 

 

 


루카스 킬리안 <그로테스크 문양> 1607년
 

 

' 그로테스크 ' 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유희적인 명람함이나 자유로운 환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가 파괴된 세계와 대면할 때의 긴장감과 섬뜩함 또한 의미했다.  사물, 식물, 동물, 인간의 영역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정역학의 질서, 대칭의 질서, 자연스러운 크기의 질서도 사리지고 있다.  

 -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아모르문디,  

1장 [그로테스크: 실재와 용어] pp 45~46 -  

   

그로테스크는 15세기 미술 양식 중의 하나로 그 의미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공상의 생물, 괴상한 인간의 형상, 꽃 ·과일 ·촛대 등 일상적인 사물을 복잡하게 결합시킴으로써 형성된 일종의 괴기취미의 유행에서 유래되었다.  

몽테뉴가 자신의 에세이에서 ' 괴이한 것들, 잡다한 형상에서 따온 조각들을 짜깁기한 것 ' (pp 51)이라고 그로테스크를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현상과 질서에 반하는 왜곡된 형태의 예술양식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로테스크 개념의 확장  

그러나 유럽에서는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통상적으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 기이함, 부자연스러움, 익살맞음, 우스움 ' 등으로 매우 광범위한 의미가 내포되어 이에 대한 확고한 본질의 의미가 제대로 부여되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예술 비평가들은 그로테스크를 예술을 자연의 모방으로 보는 원칙에서 벗어나 있으며 예술가의 주관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다소 냉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로테스크 양식은 기존의 예술 관념에 반하는 천박하고 저급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그로테스크는 단순히 장식 명칭의 용어에서 벗어나 점차적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로테스크 양식이 관찰자에게 발휘하는 심리적 영향력의 효과를 최초로 언급, 분석한 인물은 18세기 때 캐리커처 이론가로 활동했던 크리스토프 빌란트였다.  

빌란트는 순전히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캐리커처를 하나의 유형으로 예를 들면서 초자연적이고 모순된 형상을 통해서 관찰자로 하여금 조소와 혐오감, 충격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함으로써 그로테스크의 효과를 정확히 짚어 냈다.   

그리고 빌란트는 그로테스크 예술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화가로 피터르 브뤼헐로 손꼽았다.  

16세기에서 17세기 때 수많은 화가를 배출했던 화가 일가가 네덜란드의 브뤼헐 일가이다. 농민의 생활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남겨서 ' 농민의 브뤼헐 ' 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대(大) 피터르 브뤼헐(1525?~1569),  지옥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그려서 ' 지옥의 브뤼헐 ' 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小) 피터르 브뤼헐(1564?~1638)까지 오늘날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브뤼헐 일가의 그림들 중에는 같은 장면을 그린 묘사한 그림이 많아서 오늘날까지도 누가 그린 것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1559년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일부
 

   

 ' 냉정한 관심 ' 이라는 표현처럼 브뤼헐은 인간의 일상이 생경한 것으로 변모하는 광경을 통해 뭔가를 가르치거나 경고하거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세상을 불가해하고 모호한 세계, 우스꽝스럽고 경악스럽고 소름 끼치는 세계로서 그리고 있을 뿐이다.  

 - 같은 책, 2장 [그로테스크 개념의 확장] pp 68 -

  

  


 

피터르 브뤼헐 <네덜란드 속담> 1559년
 

  


 

피터르 브뤼헐 <네덜란드 속담> 일부 - " 악마에게 고해성사를 하다 "

  

브뤼헐은 언어 속에 감춰진 섬뜩함을 그림으로 재현했는데, 다양한 속담의 내용을 [네덜란드 속담]에 모아 담음으로써 혼란한 세계상을 그려 낸 것이 그 예이다. 감상자는 그림을 훑어보며 처음에는 조소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림의 한가운데, 정확히 작은 성당의 바로 아래 지점(혹은 이 누각 역시 교회 건물의 일부는 아닐까?)에 이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 악마에게 고해성사를 하다 ' 라는 네덜란드 속담이 묘사된 부분이다.  도시를 찾은 농부가 고해 신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인데, 자세히 보면 고해 신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다.  괴상한 얼굴에다 머리카락이라기보다 건초다발에 가까운 머리털을 가졌으며 머리에는 뿔인지 나뭇가지인지 모를 무너가가 돋아나 있는 괴물일 뿐이다.  

 - 같은 책, 2장 [그로테스크 개념의 확장] pp 69 -

  

피터르 브뤼헐은 이전에 지옥을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브뤼헐은 제단화로 대표되는 기존의 종교적인 회화의 틀에서 벗어나 지옥의 세계를 자신만의 양식으로 표현하였다.  

브뤼헐이 창조한 괴기하게 짝이 없는 비현실적인 세계는 당시 기독교적 사상에서 통용되던 무시무시한 지옥의 모습이 아닌 어떠한 이성적, 감정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적 그로테스크를 유발하고 있다.   

 

 

 


빅토르 위고 (1802~1885)

   

그로테스크 개념에 대한 의미 확장의 과정은 낭만주의 시대까지도 이어지게 된다. 여전히 그로테스크는 ' 괴기스러움 ' 과 ' 익살스러움 ' 라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지만 프랑스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그로테스크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괴기스러움을 그로테스크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헨리 퓨젤리(퓌슬리) <맥베스와 세 명의 마녀들>
 

 

그리스 신화의 에우메니데스(복수의 여신)보다도 <맥베스>에 나오는 마녀가 훨씬 더 섬뜩하다. 

  - 빅토르 위고,  같은 책, 제3장 [낭만주의 시대의 그로테스크],  pp 103에서 인용 -  

  

그리고 그로테스크의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희곡' 을 탄생시킨 작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가리켰다.  위고는 셰익스피어를 비극과 희극, 전율과 공포이 담긴 ' 드라마 ' 의 소유자로 평가하였으며 볼프랑 카이저 역시 예술가들 중에서도 그로테스크를 비극과 희극에 결합시킨 위대한 작가로 셰익스피어를 손꼽고 있다. 
 

 

  

  현대의 그로테스크   

20세기에 이르러 세기말에 대한 유럽의 공포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접하게 되면서 예술에서의 그로테스크는 한층 더 다양해지기 시작하였다.  

문학계에서는 아르투로 슈니츨러그로테스크 연극이라는 새로운 문학양식을 창조하였으며 독자들에게 괴기스러움과 섬뜩함의 정서를 전달하는 소설을 창작하는 공포소설가들이 등장하였다.  

예술계에서는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초현실주의의 등장으로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드러나게 하는 공상, 환상의 세계를 다룬 작품들이 탄생되었다.  

특히 볼프강 카이저는 그로테스크의 의미가 연상되게 하는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조르지오 데 키리고,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를 예로 들고 있다.  

 

 


 

조르지오 데 키리코 <어느 날의 수수께끼> 1914년
 

  

 


조르지오 데 키리코 <사랑의 노래> 1914년
 

 

키리코의 작품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영역, 즉 기계적인 것과 생물적인 것이 혼합되면서 지금껏 익숙하던 세계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시간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의 혼합이다.  이는 인간의 시간 질서를 통째로 뒤흔든다.  고대의 조각상이현대 일상의 흔해 빠진 도구들과 나란히 놓여 있거나 르네상스 건축물 위로 공장의 굴뚝이 솟아 있는 모습을 보면 역사적 유산에 대한 현대인의 의식이 흔들릴 지경이다.  

 - 같은 책, 5장 [현대의 그로테스크] pp 281 -

 

 


 

살바도르 달리 <내란의 예감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 1936년
 

 

달리의 작품에서 통일성이나 소재가 지닌 독자적 특성을 사라지고 없다.  왜곡되고 뒤틀리고 분해된 형상, 구역질나고 혐오스러운 형상이 의도적으로 '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 묘사된 광경은 감상자가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기도 힘들게 만든다.   

 - 같은 책, 5장 [현대의 그로테스크] pp 282 -

  

카이저는 네 명의 화가들의 표현 양식은 우리가 접하는 사물과 현상 간의 익숙한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생경한 세계를 창조하여 관객에게 불길한 감정을 전달하는 효과를 취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로테스크 장식미술의 양식과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이 연상시키고 있다고 평을 내림으로써 그로테스크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의 힘이 20세기에도 여전히 발휘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삶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그로테스크의 시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볼프강 카이저가 영면하기 3년 전에 집필한, 지금으로써 50여 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보니 그로테스크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역사적 범위가 한정적일 수 밖에 없으며 비평가답게 문학 작품의 텍스트를 다루는 내용에서는 전문적인 비평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자가 독일 태생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다양한 문학 작품의 텍스트들은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작품들은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리고 문학을 전문적으로 비평하는 그가 회화 예술에서의 그로테스크도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연구와 분석을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지만 화려한 도판을 담지 않은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원서 자체가 빽빽한 글자로 이루어진 형태로 출간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나마 국내 번역본에는 책 첫머리에 책에서 언급되는 몇 점의 미술 작품들이 실려 있다.  하지만 다양한 그로테스크 예술을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는 만족감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미술과 문학에서 사용되어지는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라는 점 그리고 아직 그로테스크라는 예술적 양식이 생소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다.    

그리고 이 책은 단순히 그로테스크 양식을 소개하는 책이 아닌 곧 현실에서 실현될 그로테스크의 세계 속에 살아야하는 후세의 독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신이 내려준 형벌이라고 여겨지던 흑사병의 유행에 유럽 전역이 두려움을 떨어야했고 19세기의 시대가 접어들기 시작하는 세기말에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사회적인 감정으로 유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세기에는 두 차레의 세계 대전을 통해서 전쟁의 참상을 인류는 경험해야했다.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현실세계인 동시에 현실세계가 아니다.  그로테스크가 조소와 더불어 섬뜩함을 유발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고정된 질서에 따라 움직이던 세계가 여기서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생경한 것으로 변하고 혼란에 휩싸이며 모든 질서 역시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로테스크의 창작은 현세에 깃들어 있는 악마적인 무언가를 불러내고 그것을 정복하는 일이다.

 - 같은 책, pp 71~72, pp 309 -

 

불확실한 변화의 세상을 경험한 인류는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공포를 형성하게 되었고 공포를 유발하게 만드는 생경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로테스크라는 악마적이면서도 괴기스러운 형식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테스크의 세계를 정의한 볼프강 카이저의 말대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그로테스크하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휩싸여 경쟁 체제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온갖 비인간적인 죄악이 동원되고 있으며 안정적으로 돌아가던 경제가 한순간에 붕괴되어 혼란의 정국에 치닫게 되는 나라도 있다.   수많은 인명 살상을 낳게 만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핵무기 사용에 대한 두려움에 무던해졌으며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화약고 같은 세상.   평화롭기만한 세상의 중심 한가운데 무시무시한 핵폭탄 한 발이 투하되는 동시에 지구 속 세상은 한순간에 모든 질서가 무너질 것이며 그림으로만 보던 지옥의 모습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야말로 그로테스크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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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28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이미지들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대단해요!
글치 않아도 알라딘 평가단 예술분야 책 중 하나가 이건데
잘 읽을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되더군요.
뭐 시루스님만큼 리뷰 잘 쓸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예습은 톡톡히 되는 것
같습니다.
서평단 책들이 어려워 갈등하는중이라능...ㅜ

cyrus 2011-06-29 12:00   좋아요 1 | URL
이 책이 신간평가단 도서라구요,,? ㅎㅎ
저는 겉표지와 내용만 보고 바로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어요.
그런데 생각했던거보다 도판이 많이 실려 있지 않은데다
책에 언급되고 있는 문학작품들이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게 많아서
생소했어요. 문학 관련 내용은 좀 지루하더라구요.
그나마 미술 관련 내용은 읽어볼만했어요. 본문 내용 중간에
흑백 도판이라도 실려 있었다면 좋은 책이었을거에요 ^^

stella.K 2011-06-29 13:14   좋아요 1 | URL
그런데도 별이 4개라닛...!
이거 넘 후한 거 아닙니까?
평가단 가면 갈수록 실망스러워 보입니다.
제가 뭐 읽을 책이 없어서 평가단 하는 것도 아니고.
지난번에 한번 입바른 소리 했는데, 또 할 수도 없고
암튼 갈등이어요.ㅜ

책 잘 받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제 육필이 좀 괴발세발이죠?
테이핑도 매끄럽지 않고.
제가 좀 그렇습니다.ㅜㅋㅋ
그래도 책 만큼은 즐독하시길!^^

2011-06-2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1-06-29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왠지 올려놓으신 그림들을 보아도, 별로 충격이 오지 않으니..제가 뭔가 이상해진 걸까요? 어쩌면 말씀하신대로 현실 자체가 워낙 '그로테스크'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에서 계속 일어나니까요..현실이 워낙 그로테스크해서 때로는 아주 평범한 작품이 도리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흥미를 느끼게끔 잘 쓰셔서 긴 글인데 후딱 읽었네요.^^

cyrus 2011-06-30 13:13   좋아요 1 | URL
그렇죠.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앞날이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장면이나 사건에도 무덤덤할 뿐이니,,
아이러니합니다.

아이리시스 2011-06-30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야는 늘 그림이 저러니 그런가 보다,하다가 점점 내려하면서 헉. 저는 겁도 많으면서 겁없는 척 무서운 거 다 읽고 다 보고 꼭 후회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 진짜 꼭 봐야겠어요. 문학부분 지루하다 하시니 걱정이 살짝^^

2011-07-01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의 왕 -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마리노 네리 글 그림,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0년 11월
절판


죽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예술 작품이라면 한스 발둥 그린의 <죽음과 소녀>(1518~1520년 작)가 유명하다. ' 죽음과 소녀 ' 모티브는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단골 레퍼토리였는데 에곤 실레가 그린 <죽음과 소녀> 역시 유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인 죽음을 공감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라면 단연 한스 발둥의 그림이다.

중세 말기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걸쳐 수많은 전쟁과 기근, 설상가상으로 페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전염병이 전 유럽 대륙을 휩쓸게되었는데 이 때부터 죽음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와 호기심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죽음과 소녀 ' 모티브 역시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유행하게 된 주제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눈 앞에서 목격했던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캔버스로 표현된 죽음의 이미지는 그 때의 공포가 재현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떨 수 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그림이었다.

한스 발둥 그린의 그림에는 죽음을 해골로 표현하고 있는데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으로서 해골을 표상하게 되는 인간의 일반적인 인식과 딱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죽음 앞에서 공포를 떨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연약한 나체의 소녀로 대비시켜 표현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이라는 운명의 키스 앞에서 순백의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는 젋은 소녀는 한없이 그저 울고만 있을 뿐이다. ' 죽음과 소녀 ' 라는 알레고리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상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지만 결국에는 인생의 유한함을 받아들여하며 절대로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진리(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풍만한 육체의 소녀가 등장하는 ' 죽음과 소녀 ' 모티브의 그림을 맨 처음 보게 된다면 메멘토 모리라는 그림에서 말하고자하는 주제가 떠오르기보다는 에로틱한 분위기로 바라볼 수 있다. 한스 발둥은 이 그림 이외에도 ' 죽음과 소녀 ' 를 주제로 한 여러 가지 버전의 그림을 제작하였는데 죽음 앞에 대면하는 소녀들은 거의 누드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의 절정을 ' 작은 죽음 ' 이라고 표현한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무의식 사이에서 흐르고 있는 죽음과 에로티시즘 사이의 근친성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 죽음과 소녀 ' 모티브일 것이다.


한스 발둥 그린, 에드바르드 뭉크, 에곤 실레 등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 죽음과 소녀 ' 모티브와는 대조적으로 이탈리아 만화가 마리노 네리는 ' 죽음과 소년 ' 이라는 색다른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강의 왕>은 2006년 루체른 만화 페스티벌, 2007년 코미카첸 국제 리얼리티 만화 페스티벌에 수상하여 국제적인 예술 만화가로서 인정 받고 있는 마리노 네리의 대표작이므로 이 작품을 통해서 마리노 네리는 2008년 올해의 이탈리아 만화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리노 네리의 <강의 왕>은 78페이지라는 얇은 분량의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혀지는 것이 아니다. 브루노라는 소년이 우연히 해골을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감정의 흐름들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해골을 발견하게 된 브루노는 해골의 출처에 대한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기 시작하는데 오랜 상상 끝에 최종적으로 해골은 ' 강의 왕 ' 이 수집했던 수많은 해골들 중의 하나라고 결론을 짓게 된다. 그러다가 브루노의 마을에는 갑작스럽게 강이 범람하게 되었는데 브루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이 강물에 휩쓸려 잠길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서 자신이 ' 강의 왕 ' 이 소유하고 있는 해골을 훔친 원인 때문에 강의 범람이 생긴 것이라고 믿게 된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줄거리이지만 이 책에서는 만화의 내용을 보다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정보의 글도 소개되고 있지 않아서 난감할 수 있다. 코미카첸 만화 페스티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이탈리아의 비평가 엘렉트라 스탐보울리스의 심사평이 그나마 마리노 네리의 작품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이다. 스탐보울리스는 <강의 왕>의 주제를 ' 소년의 시선으로 해석한 세계 ' 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 해골을 발견하게 되면 그 해골이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하지 마라.

그냥 해골일 뿐이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 " (p 15)


" 하지만 이건 어리석은 생각일 수도 있다. 해골도 한때는 누군가의 얼굴이었을 테니. " (p 15)



스탐보울리스에서 말하고 있는 소년 브루노의 시선이 머물고 해석하고 있는 ' 세계 ' 는 브루노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광대한 세상을 뜻하고 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브루노는 강의 범람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무시무시한 파괴의 원인이 자신이 훔친 해골 때문이라고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세상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을 그린 내용의 만화라고 말하고 있는 스탐보울리스의 평에서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과연 브루노는 단순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도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마리노 네리의 작가 노트 형식의 글이나 해설문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책의 구성 덕분에 독자는 만화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의 해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있다. 브루노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처럼 말이다. 해골이라는 대상의 이미지가 곧 ' 죽음 ' 이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연상되어지듯이 나는 <강의 왕>에 등장하는 해골 그리고 브루노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란 것이 바로 ' 죽음 ' 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해골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 브루노는 해골의 유래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 죽음 ' 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며 이 때부터 죽음에 대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발현된다. 프로이트의 자아발달 단계 이론에 의하면 브루노는 잠복기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것이다. 잠복기는 5세부터 사춘기 초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에 어린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어른들에게 질문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지적 욕구의 발달은 어린이가 성장하는데 점층적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다.




" 사악한 힘과 어둠 속에 살고 있는 괴물들을 무찌르자.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 (p 34)



그러나 동심으로 가득찬 어린이들에게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다. 다 큰 어른들도 해골 앞에서 공포감을 느끼기 마련인데 죽음이라는건지 잘 모르는 어린이들에게는 해골은 그저 신기한 대상일뿐이다. 브루노는 해골을 무서워하기보다는 대수롭지 않게 만지작거리면서 자신의 침대에 들여놓기도 한다. 해골을 향한 왕성한 호기심 앞에서 브루노는 해골에 대한 두려움 따위 느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해골을 사랑스러운 장난감인마냥 들고 다니면서 ' 피테코 아저씨 ' 라는 애칭을 붙일 정도로 해골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브루노의 동심은 긍정적인 메멘토 모리를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한스 발둥의 <죽음과 소녀>에서 드러나고 있는 관념적이면서도 공포심을 조장하고 있는 메멘토 모리와는 분위기가 대조적이다.




" 안녕, 브루노! " (p 65)


" 난 너무 금방 잊혀지는 그런 것들 중의 하나야... 네게도 그렇겠지.... 나하고 다른 것들이 밖으로 다시 나와 전부 다 부숴 버릴 때가 된 게 아닌지 서로 상의하고 있다 ... 네 생각은 어떠냐? (p 66)




강이 범람하고 있을 때 브루노는 해골과 상상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데 이 때부터 브루노는 생(生)과 관련된 모든 대상들을 파괴하는 죽음의 공포를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다. 해골은 강의 범람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가라앉게 되는 마을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에 마을 전부가 물에 잠기게 된다면 브루노는 ' 강의 왕 ' 이 될 수 있다고 권유하고 있다. 결국, 해골이 브루노에게 권유하고 있는 ' 강의 왕 ' 은 단순히 강의 범람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대상이 아닌 곧 세월이 흐르면 모든 생명들을 멈추게 하는 ' 죽음의 왕 ' (혹은 ' 시간의 신' 크로노스)인 것이다.


" 다시 가져가. 알아들었어? 난 이제 갖기 싫어! 내 말 들려? 이제 싫다고!!! (p 71)



그러나 자신 때문에 마을이 가라앉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즉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하게 되면서 애지중지하게 여기던 해골을 강 멀리 던져버리게 된다. 해골을 던져버리는 브루노의 모습은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 모든 게 정지해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강은 계속 흐르며
모든 것을 천천히 쓸어 갈 것이다." (p 77)




" 나도 모르는 어느 곳으로 ,,, 적어도 다음에 강이 범람할 때까지는 ,,, " (p 78)



브루노는 어린 나이에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유한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깨닫게 되지만 브루노가 변증법적인 탐구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삶의 진리를 터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눈여겨 볼 만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해 브루노는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의 단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인생의 전환점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 라고 말하였다. (그의 유명한 명구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와 같아서 사람들마다 제각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구적이지 않으며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만물의 변화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항상 들고 다니는 모래시계 안에 갇혀버린 살아있는 존재들이 겪어야 할 죽음이라는 운명이다. 인간은 죽으면서 백골은 진토가 되며 웅장하고 화려했던 신전은 세월의 풍파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지게 된다. 이렇듯 시간이 흐르면서 다가오게 되는 죽음의 운명은 살아있는 세계를 파괴해버린다. 그리고 살아 숨쉬고 있는 것들을 정지해버린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곧 찾아오게 될 죽음의 신의 강림은 점점 잊혀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는 죽음의 운명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일부러 회피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브루노 역시 어른으로 자라게 되면 어린 시절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단순히 어린 시절의 기억의 일부로 묻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의 왕>을 접하게 된 어른 독자들은 시간의 기억 속에서 잃어버리고 있었던 삶의 한계성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대면이 암울하게 느껴지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한 번 지나간 세월 다시 잡을 수 없다고 세상의 덧없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쇼펜하우어가 되지는 말자. 수천년 전부터 오랫동안 죽음을 기억하라고만 전해내려왔던 메멘토 모리의 진리만 기억하지 말고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도록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긍정적인 삶의 희망도 기억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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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20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읏..

갑자기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 "죽음과 소녀" 가 땡기네요. 니콜라 푸생의 그림도 좀 생각나고 말이죱. 그리고 메멘토모리 + 해서 카르페디엠도 외쳐보고요 ^^

cyrus님 학교 적응 잘 하고 있으시죠? ㅎ

cyrus 2011-03-21 08:43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바람결님. 슈베르트의 음악도 있었군요. ^^
저야 잘 지냈고 있어요, 바람결님도 잘 지내고 계신가요?

양철나무꾼 2011-03-21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가 떠올랐었는데...
슈베르트는 저 그림처럼 기괴하고 섬뜩하지는 않은데 말이죠, 오히려 경쾌하고 당돌하죠.
이젠 본격적으로 학교생활 시작하셨나 봐요? 제대로 뜸하신걸 보니...
건강하셔야 해요~^^

cyrus 2011-03-21 08:46   좋아요 0 | URL
벌써부터 전공 교수님들이 레포트를 내주시니 어제는 알라딘에 들릴
여유가 없었네요,^^;; 이번 신간평가 도서 서평도 써야하는데,,
양철댁님도 건강하셔요 ^^

책먹는인간 2011-03-2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4번째 그림밑에 오타가 있네요. '고'가 빠졌어요. 태클은 아닙니다 ^^;;
잘 읽었어요

cyrus 2011-03-28 07:59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긴 글이라서 오타 찾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비어즐리 또는 세기말의 풍경
박창석 지음 / 한길아트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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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는 자신의 시를 악의 꽃이라 불렀다. 나는 너의 그림을 죄의 꽃이라 부를 것이다.  

- 비어즐리의 일러스트에 대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 -

  

  

 

  세기말의 일러스트레이션, 비어즐리 

   

 


[클라이막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 일러스트, 1894년

    

어느 여인이 목이 잘린 얼굴을 든 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여인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머리를 무서워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다. 잘린 머리 앞에서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기 마련인데 이 여인은 무섭지 않은가 보다.  오히려 잘려 나간 머리를 든 채 공중부양을 하면서 그윽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의 표정이 더 무섭고 기괴하게 느껴진다. 

영국의 유명 일러스트레이션 오브리 비어즐리는 성서 속의 인물을 퇴폐적인 팜 파탈(femme fatal)로 묘사하고 있다. 헤롯 왕의 딸인 살로메가 자신이 사랑했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유하게 되면서 키스를 하려고 하는 장면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의 일러스트를 담당한 비어즐리의 파격적인 묘사는 희곡 출판 판매 처분까지 내릴 정도로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흑백의 강렬한 대조와 섬세한 선묘와의 조화가 이루고 있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형태묘사는 퇴폐적 분위기로 가득 찬 환상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당시 사회를 주름 잡고 있던 부르주아와 보수적인 예술가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단지 사회를 문란하게 만드는 퇴폐적인 그림이라고 낙인이 찍히게 된다.   

비어즐리의 <살로메>는 인간의 이성과 상반되는 광기 어린 치명적인 사랑을 잔혹하게 그려냄으로써 비어즐리라는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한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지만 그 단지 이 작품 때문에 비어즐리가 기성 사회로부터 비난의 뭇매를 맞아야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비어즐리는 <살로메> 일러스트보다 좀 더 퇴폐적이면서도 더 야한 그림들을 그려냈다. 일러스트 묘사의 선정성 때문에 여기서 소개하기에는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라시스트라타>에 수록된 일러스트들은 현대 성인만화를 보는듯한 노골적이고 거침 없는 성적 묘사로 가득하다.  원작 속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과 반전(反戰)을 주장하고 있는 의로운 여주인공인 라시스트라타는 비어즐리는 한순간에 음탕한 여인으로 바꿔 놓았다. <라시스트라타> 일러스트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은 가슴은 물론 음부까지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으며 남성들의 성기 역시 과장되게 그려지고 있다.   

만약에 비어즐리의 일러스트가 우리나라에 나오게 된다면 선정성 시비 때문에 ' 제 2의 이현세 ' 논란이 재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퇴폐적인 일러스트를 수록하고 있었던 문학잡지 <옐로 북>은 세상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채 폐간될 정도로 비어즐리과 그의 일러스트는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주범으로 낙인 찍혀야 했다. 반면에 유미주의 예술가들은 비어즐리의 일러스트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에게는 에로틱하고 퇴폐적인 비어즐리의 일러스트가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으로 보였을 것이다.   비어즐리의 예술성을 ' 죄의 꽃 ' 이라고 비유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와 비어즐리, 세기말의 두 예술가의 얕궂은 운명   

 

 


     오스카 와일드 (1854~1900)     오브리 비어즐리 (1872~1898)    

   

국내에 비어즐리의 일러스트와 그의 생애를 볼 수 있는 책은 <비어즐리 또는 세기말의 풍경>이 유일한 텍스트이다.  비어즐리의 파격적인 일러스트가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시각적인 충격을 주고 있지만 오스카 와일드와의 관계 역시 비어즐리의 생애를 논할 때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다.

오브리 비어즐리와 오스카 와일드,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향하고 있는 심미주의적 가치라는 하나의 끈을 통해서 예술적인 교류 차원의 친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비어즐리 덕분에 오스카 와일드는 오늘날에도 유미주의적 문학의 대명사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비어즐리가 본격적으로 잡지 <옐로북>을 통해서 자신의 예술성을 담아낸 일러스트를 창작하는데 몰두를 하게 되면서부터 와일드와의 관계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와일드의 동성애적 스캔들로 인해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의 일러스트를 담당했던 비어즐리마저 동성애 혐의가 짙은 의혹을 받게 된다.      

 


 

비어즐리가 그린 오스카 와일드의 캐리커처, 1893년 

박창석, <비어즐리 또는 세기말의 풍경> p 26 

 

오스카 와일드가 비어즐리를 동성애적인 감정을 느꼈는지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와일드와 비어즐리가 결정적으로 불화를 초래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동성애자인 와일드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자신에 대한 비어즐리의 사랑이 식어버렸음을 알게 된 후부터 생긴 질투 때문에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독창적인 유미주의적 예술성을 동경하는 나머지 질투로 바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옐로북>이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와일드와 비어즐리의 관계를 한순간에 갈라질 수 있었던 것일까?  

 


 

<옐로북> 창간호 표지(1894년 4월),  p 38 



비어즐리의 <옐로 북>에서의 활동은 <살로메> 일러스트보다 더 대중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옐로 북>에 수록된 일러스트가 더 예술적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문학가 E.F. 벤슨은  " 비어즐리가 없는 <옐로 북>은 무미건조하다 " 라고 평가내릴 정도로 <옐로 북>은 비어즐리 단 한 사람 덕분에 세기말 퇴폐문학의 산물로 인정받고 있다. 이토록 비어즐리에게 <옐로 북>은 자신의 퇴폐적인 예술성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자유로운 표현의 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살로메>와 오스카 와일드의 생애에도 비어즐리가 없었다면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어즐리의 생애 역시 무미건조한 삶이 아닌 파격적인 삶을 살다 간 세기말이 낳은 기인이었다.  

비어즐리는 자신의 일러스트에 벌거벗은 누이를 그릴 정도로 누이에 대한 깊은 애착심을 느꼈는데 결국에는 누이와 근친상간이라는 극단적인 관계까기 맺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성애 스캔들만큼 비어즐리의 근친상간 스캔들도 영국 사회에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비어즐리는 기성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으며 ' 패륜적 댄디 ' 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비어즐리와 와일드의 삶에서 무척 흥미로운 사실은 두 명 다 기성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아웃사이더였으며 동성애와 근친상간이라는 일탈의 사랑으로 인해 스캔들을 겪었다는 점에서 서로 닯은 점이 있다.   

그리고 더 신기로운 사실이 또 있다. 와일드는 동성애 스캔들로 인해서 프랑스 남부지방에 위치하는 망통이라는 곳으로 추방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비어즐리는 결핵 때문에 요양 차 망통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지역에 있었지만 이미 앙숙이 된 사이였으니 서로 왕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죽기 전에 가톨릭에 심취했다고 하는데 이렇듯 두 사람의 운명에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예술성으로 가득한 비어즐리의 일러스트   

비어즐리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였지만 당시 활동하고 있었던 라파엘 전파에드워드 번 존스 그리고 유럽으로 전해내려 온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자신만의 섬세하고 장식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비어즐리가 활동하던 세기말 유럽에는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적인 취향을 즐기고 선호하는 자포니즘(Japonism)이 유행하였는데 많은 화가들 가운데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비어즐리 역시 자포니즘 유행을 지나칠 수 없었다.   

 

 


호소다 <A beauty in the snow>, 일본 우키요에 
 

 


 

[공작무늬 치마] 중 일부, <살로메> 일러스트, 1894년 

p 84 

  

<살로메> 일러스트 중의 하나인 [공작무늬 치마]에서 살로메가 입고 있는 화려한 옷이 일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연상시키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머리에는 장식된 휘황찬란한 공작 깃털은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일러스트가 독창적인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캐릭터의 이미지가 아닌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성격과 예술 양식이 부합된 캐릭터로 재창조한다는 점이다.  비어즐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작품의 일러스트에 참여할 정도로 나름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 속에서 단 몇 줄도 언급 안 되는 헤롯 왕의 의붓딸을 비어즐리는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화려한 요부 살로메로 탈바꿈하였다.   

  


 

[숲 속의 알리바바] ,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일러스트, 1897년 

p 188

 

이뿐만 아니라 비어즐리는 유명한 문학 작품의 일러스트 작업에 참여했는데 요절함으로써 미완성으로 남게 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일러스트에서 또 한 번 그의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알리바바는 우리가 알고 있던 슬기롭고 의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뚱뚱한데다가 얼굴의 미소에는 간사함이 흘러 넘친다.  그리고 그의 모은 화려한 옷과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비어즐리는 <아라비안 나이트> 속의 알리바바가 아닌 탐욕으로 가득찬 세기말 풍조에 걸맞는 19세기 말의 알리바바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검은 고양이], 1894년 

p 173

 

비어즐리가 사용하는 흑백 대조는 에드거 앨런 포의 공포소설 <검은 고양이>을 위한 그림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애꾸눈 검은 고양이와 흰 색으로 처리된 여자의 대조는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지크프리트] ,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일러스트, 1892~93년 

p 180

 

이 일러스트는 비어즐리가 자신의 모든 예술 양식을 최대한 발휘한 작품이라고 강한 애착을 보였을 정도로 뚜렷한 흑백 대조 묘사뿐만 아니라 섬세한 선묘 그리고 자포니즘적인 영향까지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일러스트에 가까운 형태가 구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알려져 있는 퇴폐적이고 음란한 일러스트가 아닌 온전히 예술성이 갖춰진 비어즐리의 몇 안 되는 작품이다. 

 

  

 

  고단한 삶, 잠시라도 잊게 해다오     

 

 


에두아르 마네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1859년

  

비어즐리가 요절하기 전에 남은 생의 에너지를 쏟아부어가면서 완성한 일러스트가 음란한 일러스트로 유명한 <라시스트라타>인데 벌거벗은 나체의 여자들이 즐비한 비어즐리의 일러스트만 보게 된다면 비어즐리를 ' 변태 일러스트 '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유럽 세기말에 활동한 악명 높은 성인 만화가로 평가한다는 것은 세기말을 대표하는 유행 사조인 유미주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에로티시즘은 세기말 사회의 화려한 이면만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기말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의 이면에 숨겨진 퇴폐성과 변태성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퇴폐성은 결국에는 불확실한 미래와 냉혹한 자본주의로 가득찬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동경이 만들어낸 쾌락주의적 욕구인 것이다.  세기말을 살다간 수많은 예술가들은 매음굴을 들락날락거렸으며 독하기로 유명한 압생트(absinthe)를 즐겨 마시면서 삶의 고뇌를 감각적인 쾌락을 통해 잠시나마 잊으려고 하였다.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압생트를 ' 창조력에 도움이 되는 술 ' 로 알려지게 되면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상습적으로 마시게 되면 환각 상태를 유발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독특한 일러스트를 만들어낸 비어즐리는 한 때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도 했었는데 퇴폐적인 미에 대한 지나친 탐닉이 정신착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한 때 동지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일러스트를 압생트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비어즐리에게 퇴폐적이면서도 음란한 일러스트는 기성 사회로부터 멸시를 받아야만했던 세상에 대한 고단함을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현실도피, 또는 눈으로 즐길 수 있는 자신만의 압생트였다.    

이토록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비어즐리의 일러스트 속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열광했던 이유가 세기말이라는 이름 아래 암울한 사회에 잠시나마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던 그들만의 우울과 고독 때문인 것이다.  비어즐리의 일러스트를 먼저 보기 전에 비어즐리의 생애와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먼저 이해하고나서 그의 퇴폐적인 일러스트를 접하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세기말적 우울과 고독이 묻어나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S  

오스카 와일드나 아르누보 양식 혹은 비어즐리의 일러스트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며 국내에서 비어즐리의 일러스트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예술 관련 도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그러나 이 책의 옥의 티는 오스카 와일드의 문학 작품에 대한 정보에 대해 살짝 미흡한 점이다. 저자가 만화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오스카 와일드와 비어즐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공은 칭찬해줄만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텍스트를 직접 읽어보지는 못한 거 같다. 


[춤의 대가] , <살로메> 일러스트, 1894년 

p 104
 

[춤의 대가]라는 <살로메>의 일러스트를 소개한 저자의 내용을 인용하면 , , ,  

쟁반 받침대를 일본판화의 실루엣 효가를 차용해 남근 모양의 실루엣으로 표현하였다.  (p 105) 

라는 문장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 쟁반 받침대 ' 는 텍스트를 읽지 않아서 생긴 오류의 내용이다.   즉, 일러스트에 있는 검고 기다란 형체는 쟁반 받침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음사에서 나온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정영목 역)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크고 검은 팔, 사형 집행인의 팔이 우물에서 나온다. 손에 쥔 은 방패 위에 요카난(요한)의 머리가 있다.  (p 206) 

결국에는 일러스트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자면 쟁반 받침대가 아니라 요한의 머리를 자른 사형 집행인이 내민 팔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면 먼저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먼저 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훨씬 비어즐리의 일러스트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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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08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안 할 수 없는 포스트군요. 흥미롭게, 누군가에게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비어즐리라는 이름 처음 들었는데, 많이 흥미가 생겼어요.^^

cyrus 2011-03-09 09:37   좋아요 0 | URL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이랑 이 책을 같이 읽어보면 더 재미있을겁니다.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3-08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르누보 양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비어즐리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들여다 본적은 없는것 같네요^^ 저에게 아주 유용한 포스트라 마음으로는 추천 열 번 했어요 ㅎㅎ

cyrus 2011-03-09 09:40   좋아요 0 | URL
아르누보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 내용이 없어서 아쉽지만
그래도 국내에 비어즐리의 예술에 대해서 이 책만큼 상세하게 소개한 책은
없을거에요 ^^

아이리시스 2011-03-08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핑크핑크핑크핑크.................... 핑크표지예요, 제가 좋아하는.
근데 이건 좀 미친 핑크네요.
아르누보, 비어즐리........ 저도 배우고 갑니다.
살로메는 볼 때마다 후덜덜, 흑.

cyrus 2011-03-09 09:41   좋아요 0 | URL
지금은 저런 잔혹한 일러스트는 약과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놀랬을까요? ^^;;

양철나무꾼 2011-03-08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월터크레인이 그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그림책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게, 일본풍의 그림투성이어서 였어요.
여기서 '자포니즘'을 또 보게 되다니 반가운걸요~^^

cyrus 2011-03-09 09:43   좋아요 0 | URL
비어즐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직업도 나오지
않았을거 같아요. 그만큼 비어즈리가 일러스트의 선구자로서 평가받기도
하죠. ^^

굿바이 2011-03-0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어즐리를 열심히 연구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그 그림들이 생각납니다.
우키요에와 관련한 이야기들도 해주었는데 가물가물 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1-03-09 09:44   좋아요 0 | URL
비어즐리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하신 분이라면,, 전공이 예술 혹은
만화 분야쪽이겠네요. ^^

잘잘라 2011-03-0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300에 나오는 페르시아왕 볼 때 느낌하고 똑같아요.
알리바바 일러스트요.
위 아래 머리 잘린 그림보다 훠얼씬 징그럽단 느낌.. ㅡㅡ;;

cyrus 2011-03-09 09:45   좋아요 0 | URL
비어즐리의 일러스르를 보면 약간 과장되게 표현한게 많아요.
오히려 그렇게 표현하게 되니 그의 일러스트를 한 번 보게 되면
잘 잊혀지지 않은거 같습니다 ^^

마녀고양이 2011-03-08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어즐리의 그림은 어쩐지 처절한데요.. 굉장히 처절해요.
압생트는 환각 물질이 강하게 있어서, 지금은 판매 금지 술이죠.
고흐와 같은 동시대 예술인의 애호술이었다 하죠. 비어즐리의 그림은
딱 그런 느낌이네요........ 슬퍼요.

야하다 하니 생각나는데,
데카메론을 고전이라 읽었을 때 당혹감과
'SXE, 잃어버린 자유, 춘화로 읽는 성의 역사'에 담긴 그림을 숨어서 읽던
기억이 납니다.

cyrus 2011-03-09 09:48   좋아요 0 | URL
어떻게 보면 비어즐리도 와일드 못지 않게 불우하게 살다갔죠.
생전에 자신의 작품들은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했고요,,
비어즐리와 같이 당시 사회로부터도 무시당한 세기말의
아웃사이더 예술가들이 압생트나 매음굴에 집착하는 이유가
불우한 삶을 어떻게든 잊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되네요.

카스피 2011-03-08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생기는 리뷰입니당^^

cyrus 2011-03-09 09:50   좋아요 0 | URL
이 책에는 제가 포스팅한거 이외에도
다양한 비어즐리의 일러스트를 볼 수 있답니다. 그런데 좀 야한게
많답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03-0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살로메도 군인들의 방패에 눌려 죽지요...요카난의 피맛을 본 후에...
 
눈속임 그림 - 트롱프뢰유, 실재를 흉내 내고 관객을 속이다
이연식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명탐정 셜록 홈즈는 그의 절친한 동료인 왓슨 박사와 함께 사건 의뢰인이 살고 있는 집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홈즈가 맡게 된 사건은 사건 의뢰인의 언니의 사망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홈즈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무리 조그만한 부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방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습니다.   

 " 저 초인종의 끈은 어디로 연결되어 있나요? "  

홈즈가 사건 의뢰인에게 물었습니다.  침대 위에 매달린 초인종의 끈은 그 끝이 베개 위에 닿아 있었습니다.  

 " 2년 전에 달았는데, 가정부의 방으로 통해 있을거에요. " 

 " 언니가 달게 했나요? "  

 " 아니에요.  언니나 저는 가정부에게 일을 시킨 일이 없어요. 가정부는 우리 집에 오래 있지도 않았구요. "  

 " 그렇다면 이런 초인종 끈은 별로 필요가 없었을 텐데 , , , , , " 

홈즈는 침대가 다가가 잠시 관찰한 후, 초인종의 끈을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 아니, 이건 초인종 끈이 아니잖아 ! "     

홈즈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 울리지 않나요? " 

 " 울릴 리가 없죠.  자, 잘 보십시오. 끈 끝이 환기 구멍 바로 위 고리에 묶여 있죠? "  

 " 어머, 이상하군요!   전 여태껏 몰랐어요. 아마 언니도 몰랐을 거에요. "   

 " 이상한 건 이것뿐이 아니오. 환기 구멍은 바깥쪽을 향해 뚫려 있어야 원칙인데, 이건 옆방으로 통했군요. 별 얼간이 같은 건축가도 다 있었군그래. "  

 
 - 코난 도일 <셜록 홈즈의 모험> [얼룩 띠의 비밀] 중에서 -

     

 

  추리소설의 법칙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간략하게 정의를 내리라고 하면,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이성적인 사고 능력과 지식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는데 중점을 두는 소설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추리소설의 시초에는 오귀스트 뒤팽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 추리소설들을 쓴 에드거 앨런 포 이며 한 주인공으로 한 작품에서 추리 소설을 이루게 하는 공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법칙에다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 추리소설을 확립한 작가는 아서 코난 도일이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추리소설들도 다양한 주제와 캐릭터 그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복잡한 트릭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추리소설들에는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요즘과 같은 다양한 플롯과 캐릭터들로 무장된 추리소설들이 쏟아져나오는 시대에 ' 추리소설은 이렇게 써야한다' 는 식의 불문율은 무의미하겠지만,  추리소설이라는 텍스트를 성립되게 하는 조건은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출간된 문고판 <셜록 홈즈 시리즈> 중에 추리소설의 법칙에 대한 내용이 소개된 걸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이런 기본적인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은 추리소설이라면 독자들은 텍스트에 대한 몰입을 하지 못할 것이다.

 1)  수수께끼의 해결에 이르러서는 모든 단서가 명백히 그려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을 간파당하지 않도록 트릭을 써야 한다.  

  2)  범인은 추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우연에 따른다든지,  

       자백에 의해 결정되서어는 안 된다. 

  3)  작가는 독자를 상대로 지혜 겨루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소개된  

       법칙은 독자와 작가 사이에 맺어진 일종의 신사 협정인 셈이다. 함부로 이 협정을  

       깨뜨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문고판 <셜록 홈즈 시리즈>를 편역한 역자는 코난 도일이야말로 추리소설의 법칙을 충실히 지켜진 작품이라고 평을 하고 있다.  특히, 법칙 3 과 같은 내용은 추리소설 성립에서 중요한 골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추리소설을 읽기 위해 책을 집어든 독자는 소설 속의 범인을 찾아내려는 탐정이 되는 동시에 작가가 만들어낸 트릭을 간파하려는 작가에 대한 도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의 도전은 쉽지기 않다. 작가는 독자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생각지도 못하는 트릭들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의 텍스트를 통해서 작가와 독자가 서로 머리싸움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추리소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게 만드는 진정한 매력인 것이다.

   

 

  관객을 속이는 그림, 트롱프뢰유  

작가와 독자 간에 머리싸움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추리소설이라면, 반대로 그림으로 화가와 관객이 서로 머리싸움을 할 수 있는 미술에서의 유일한 장르가 바로 트롱프뢰유다. 

트롱프뢰유( trompe-l'œil)는 프랑스어로 '눈속임' 을 뜻하는 단어이다. 지금은 실제의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을 가리키는 미술 용어로 사용한다. 지금까지 그려진 트롱프뢰유 그림들을 소개하는 이 책의 제목인 <눈속임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객의 눈을 속이는 그림인 것이다.  신라 때 활동했다고 알려진 전설의 화가 솔거의 소나무 그림이 트롱프뢰유라고 볼 수 있다.  솔거는 황룡사 벽에 거대한 소나무 그림을 그렸는데 새들이 진짜 소나무인줄 알고 앉으려다가 부딪쳤다고 한다.   

전설 속으로 전해내려 오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솔거의 일화를 통해서 솔거의 천재적인 그림 실력을 강조하기보다는 존재하는 대상을 실물 그대로 그려야한다는 화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 뒤에는 미술가의 능력은 아무도 부여받을 수 없는 특별한 재능이며 현실을 그대로 그리려는 모든 화가들의 원초적인 야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술가의 일반적이면서도 확고한 관념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림이 트롱프뢰유이다. 그릴려고 하는 대상을 완벽히 묘사하되, 캔버스 안에서 담을 수 있는 현실을 왜곡하며 관객들을 속여야 하기 때문이다.      

      

  

  트롱프뢰유의 법칙   

 

 


아드리안 판 데르 스펠트 & 프란스 판 미리스 <꽃이 있는 정물>, 1658년 

(p 194)

 

만약에 당신 앞에 이 그림이 놓여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림에는 많은 꽃들이 놓여져 있다. 화가들이 주로 그리는 보편적인 정물화이다.  

그런데, 꽃 옆에 오른쪽에는 파란 커튼이 달려 있다. 당신은 커튼으로 반쯤 가려져 있는 꽃을 보기 위해서 커튼을 좀 더 걷어내기 위해서 무심코 캔버스 쪽으로 손을 뻗는다.    

커튼 부분에 손을 닿는 순간, 당신은 당황하게 된다.  꽃을 가리고 있는 파란 커튼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보니, 파란 커튼은 꽃과 함께 캔버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인 것이다.  

아드리안 판 데르 스펠트와 프란스 판 미리스가 그린 <꽃이 있는 정물>은  트롱프뢰유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이 두 화가는 캔버스에 커튼을 그리게 함으로써 그림을 보는 관객들에게 캔버스를 가릴 때 사용하는 커튼인양 속임수를 쓴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추리소설에도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가 독자들을 속이기 위한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텍스트는 결말이 뻔하기만한 싸구려 B급 소설이 된다. 트롱프뢰유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알량한 방식만으로 관객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트롱프뢰유를 그리게 된다면 그것은 실력이 미숙한 화가의 그림으로 치부된다. 이것은 그냥 눈속임일 뿐이다.  즉,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관객들을 제대로 속일 수 있는 진짜 ' 트롱프뢰유' 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트롱프뢰유 제작에도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있었으며 화가들은 이를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였다.  

  1) 그리기 용이한 것 

  2) 그렸을 때 효과가 좋은 것 (화려하고 다채로운 것) 

  3) 주변에서 쉬이 보고 접할 수 있는 것  

  - <눈속임 그림> p 122 -

 

<꽃이 있는 정물>은 트롱프뢰유의 성립 조건을 충분히 갖춰져 있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정물화는 화가들에게는 그리기 쉬우면서도 많이 그리는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꽃과 커튼 같은 경우에는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일반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꽃들이 놓여져 보이게 하는 2차원적인 구도는 커튼을 3차원의 입체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만들고 있다.  

 

  


얀 판 데르 파르트 <바이올린>, 1700년경 

(p 18~19)

얀 판 데르 파르트가 그린 <바이올린>이라는 그림 역시 트롱프뢰유 특유의 조건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문을 열어본 순간, 바이올린 한 개가 걸려져 있는 또 다른 문이 있다. 관객들에게는 문 뒤에 또 다른 문을 열어보고 싶은 호기심 혹은 저 바이올린을 떼어내려고 한다면 이것이 사람을 속이는 그림, 즉 트롱프뢰유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처음에 문은 실제이지만, 바이올린이 걸려 있는 또 다른 문은 벽에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화가가 이길 것인가 아니면 관객이 이길 것인가?       

 

 


페레 보렐 델 카소 <비평으로부터 도망치기>, 1874년 

(P 167)

트롱프뢰유의 어원에는 사람을 속이다는 뜻의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지만, 미술에서의 트롱프뢰유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화가들은 트롱프뢰유를 그리면서 관객들을 속이는 동시에 평소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 앞에 놓여진 그림 한 점을 보면서 ' 좋다, 나쁘다 ' 라는 식으로 그림에 대해서 평가적인 감상을 하게 된다.  만약에 자신이 보고 있는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면 제일 먼저 화가의 실력을 의심하게 된다.  그림을 보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든 말든, 그림에 대한 좋지 않는 평가는 다른 직업과는 다르게 자존심이 강한 화가들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화가들 입장에서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그림이 절친한 동료인 폴 고갱에게 지적당하자 이에 대한 분노로 반 고흐가 면도날로 귀를 잘라 버렸겠는가?   그리고, 델 카소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쓴쏘리만 하는 비평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캔버스 밖으로 탈출하려고 한다.  

어쩌면, 트롱프뢰유는 자신의 그림 실력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위선적인 독자들과 비평가들을 제대로 골탕 먹일 수 있는, 화가들만의 유일한 스트레소 해소법일지도 모른다.  관객이 자신의 눈 앞에 놓인 트롱프뢰유의 속임수를 미쳐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면 관객은 화가에게 완벽히 패한 것이다.  트롱프뢰유는 단지 관객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을 수 있는 어퍼컷이다. 보이지 않는 화가의 어퍼컷에 맞은 관객은 그림 앞에서 한 순간에 얼간이가 되고 만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그렇게 불쾌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화가의 속임수를 알아차리게 되면 누구나 다 재미있어 하게 된다.  트롱프뢰유는 화가들의 해학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그러나, 화가의 속임수에 당한 일부의 관객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 뭐야,  이거 너무 시시하잖아. 별 것도 아닌거 가지고 속아넘어 갔네. ' 

제발, 트롱프뢰유를 볼 때는 그런 말은 하지 않도록 하자.  

추리소설에서도 작가와 독자 간의 신사 협정이 있듯이 트롱프뢰유에도 화가와 관객 간의 신사 협정이 존재한다. 관객들은 트롱프뢰유는 단순히 시시한 눈 속임수에 불과하며 누구나 다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 협정을 파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관객들은 그림 보는 안목이 낮아서 문제가 아니다. 트롱프뢰유 보는 재미를 모르는 '진짜' 얼간이들이라서 문제이다.  

 

 

* 그림 출처:  

출판사 아트북스 http://blog.naver.com/artbooks21?Redirect=Log&logNo=60116957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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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0-12-30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롱프뢰유, 재밌어요^^ 그림도, 리뷰도.

cyrus 2010-12-30 19:0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메리포핀스님^^ 긴 글인데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말 잘 보내시고 내년에도 좋은 일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마녀고양이 2010-12-30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셜록 홈즈 이야기로 시작해서, 추리 리뷰인가 했네요.
그런데 정교하게 트롱프뢰유로 유도하다니. 대단하십니다, 정녕. ^^

올 여름 방학에 일산 킨텍스에서 트릭아트전 했잖아요. 그게
이런거네요. 사진 찍기 좋았는데... ^^
그림의 커튼... 저두 언뜻 보고 속았다는. 진짜 흥미로운 리뷰였습니다!

앞으로 리뷰 못 쓰게따,, 사이러스님이 점점 멋지게 쓰셔서. 크.

cyrus 2010-12-30 20:23   좋아요 0 | URL
네, 그것도 어떻게 보면 트롱프뢰유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림들입니다.
이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제가 소개한 그림들 외에도
다양한 그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미술 도서치곤 내용도 그리 어렵게 되어 있지 않구요.
약간 흠이라면,,, 책 크기가 작을뿐더러, 분량도 적답니다.
크기도 조금 더 크고, 내용도 더 소개되었더라면
트롱프뢰유 그림 보는 눈도 즐겁고,
재미있는 내용의 책이 될 수 있었을겁니다.
마고님도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