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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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스마의 유래

 

 우리 사회에서 대중들을 매료시키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 카리스마가 있다’라고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짐승남’이라고 불리고 있는 남성미를 지닌 남자 연예인에서부터 국민들 앞에서 설득력 있으면서도 강력한 권위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정치인들까지, 카리스마는 다양한 범위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는 연예인, 정치인 등 특정인들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서에 등장하며 모든 사람들도 ‘계발해서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취급받고 있다.

 오늘날에는 ‘카리스마’를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대중을 심복시켜 따르게 하는 능력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카리스마의 어원적 유래는 종교, 즉 기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적 의미의 ‘카리스마’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바울이 사용한 ‘카리스마’에서 ‘카리스’는 그리스 어로 ‘신의 은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의 은총이 만들어 낸 결과물, 즉 신의 특별한 은총, 은혜를 뜻하고 있는 것이다.

 

 

 

 

 

마사초 <그림자로 병든 이를 치료하는 성 베드로> 1427~1428년

 (<역사의 미술관> pp 278)

 

일행 중 근엄한 표정을 지낸 채 앞장서서 걷고 있는, 붉은 천을 걸친 사도가 성 베드로이다. 고대 성경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성 베드로의 그림자만 스쳐도 불치병이 말끔히 나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베드로가 행하는 이 신비스러운 능력이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카리스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받게 되는 소명 또한 여기에 기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이 베푸는 은사를 통해 공동체에 봉사하고 결속하라고 주문했다. 특히 교회의 사도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카리스마를 받아 단일하고 다양한 `하느님의 은총의 관리자`로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는 만큼 그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치의 병도 나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카리스마’가 형성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권력의 의미를 지닌 ‘카리스마’가 사용되어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베버는 <경제와 사회>라는 저서에서 카리스마를 ‘권력’ 혹은 지배의 형태 중 하나라고 밝혔다. 여기서 뛰어난 지도자에 대한 추종자들의 개인적 신뢰에 바탕을 둔 ‘카리스마적 지배’라는 개념이 생겼으며 권력의 정당화가 행해지는 지배적 형태 중의 하나로 정립되었다. 이후 카리스마는 히틀러나 무솔리니, 존 F. 케네디 등 강력한 권위를 발휘했던 독재자나 뛰어난 매력을 지닌 정치인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화폭을 통해서 권력의 판타지를 실현시키다

 

 그러나 카리스마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던 고대 문명 그리고 막스 베버가 처음으로 의미를 재정립한 근대 문명에서만 탄생되고 사용되어진 것은 아니다.

 ‘카리스마’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강력한 지도자가 군림했던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카리스마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군주들은 이미 벌써부터 ‘카리스마’를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홍보적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왕의 모습을 그렸던 궁정화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절대군주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만드는 보조역할을 했다.

 

 

 

 

 

 

 

이아생트 리고 <태양왕 루이 14세> 1701년

(pp 53)

 

 

 

 프랑스의 황제 루이 14세가 오늘날까지도 ‘태양왕’이라는 수식이 따라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절대군주로써의 정치적 역량과 업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모습을 묘사한 궁정화가들의 능력도 한 몫 했다.

 루이 14세라고 하면 항상 베르사유 궁전이 떠오르듯이 그는 자신의 거대한 궁전에서 1년 내내 화려한 향연과도 같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려왔다. 하지만 화려한 모습 뒤에는 보이지 않는 그늘이 존재하는 법.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의 실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의 생활고는 엉망이었으며 종전 이후에는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정부 부채를 떠안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군주에 대한 민심은 떨어지게 되고 절대군주의 위엄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강력한 군주로서의 이미지만큼은 끝까지 유지하고자 했다. 그의 정치적 업적과 프랑스 사정이 형편없더라도 ‘황제’로서의 이미지는 루이 14세가 인정하고 싶은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초상화에서 대개 루이 14세의 포즈는 위세가 넘치고 거만한 군주의 모습이다. 이아생트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황제가 63세였을 때 그려진 것이다. 60세 넘은 군주의 모습치고는 리고의 초상화 속의 루이 14세는 인생의 흐름을 거슬린 듯하다. 얼굴에는 팔자 주름이 남아 있지만 지휘봉을 잡고 꼿꼿이 설 수 있는 정도로 아직 정정하다.

 

 

 

 

 

 

샤를 푀르송 <제우스로 그려진 루이 14세의 초상> 1653년경

(pp 58)

 

 

 

 절대군주로서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었던 루이 14세는 궁정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로나마 권력에 대한 기대를 보상받고자 했다. 권력에 대한 황제의 판타지는 이제는 자신을 무소불위의 신적 존재로써 그려지기에 이른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루이 14세를 그린 초상화는 수십 점이 넘는데 군주로서의 권위와 영광의 모습으로 그려진 이미지 덕분에 그는 ‘태양왕’이라는 강력한 군주의 카리스마가 만들어 낸 호칭이 붙여질 수 있었다.

 루이 14세 이외에도 세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강력한 군주의 카리스마를 발휘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부단히 관심을 쏟았으며 궁정화가들의 능력을 이용하고자 했다. 특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궁정화가로 활동했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의 식민지 섬에 살았던 ‘코르시카의 촌놈’을 한순간에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0~1801년

(pp 73)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는 격언과 함께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군주의 카리스마‘를 크게 각인시켜주었던 알프스 산을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리고 황제의 대관식을 그린 장면에서도 다비드는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의 적임자로써 권력적 정당성을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일부, 1805~1807년

(pp 86, 원 안에 대머리의 남자가 '카이사르의 유령' 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다비드는 황제 스스로 자신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고 난 뒤에 황후 조세핀에게도 자신이 직접 왕관을 씌워주는 극적인 장면을 그려 넣음으로써 교황마저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실세를 지닌 프랑스 황제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교황이 황제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주는 관례를 깨뜨린 나폴레옹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의 대리인’인 교황보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군주의 카리스마를 볼 수 있다. 더욱이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옆에는 로마의 시저 카이사르마저도 그의 대관식에 참석했기에 프랑스의 황제의 정당성을 더욱 입증해주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주고 있다.

 

 

 

 

 

 

 

앙투안 장 그로 <자파의 페스트 병원을 방문한 나폴레옹> 1804년

(pp 86)

 

 

 

 다비드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던 앵그르, 장 그로 등의 화가들도 나폴레옹의 카리스마를 부각시킨 그림들을 남겼다. 장 그로는 이집트 원정 당시 자파라는 지역에 임시로 설치된 페스트 병원 안에서 환자들을 만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 나폴레옹의 모습은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 치유를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 또한 사도 바울이 생각했던 카리스마의 의미와 부합되기도 한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은 단순히 프랑스를 다스리는 권력자로써의 카리스마를 지닌 황제의 모습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환자들에게도 국민을 향한 관대함과 애정을 보여주는 인간적인 마음을 지닌 온화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다.

 

 

 

 

 

 `정치적 지배력`이라는 이미지의 산물, 카리스마

 

 베버가 카리스마를 ‘지도자의 정치적 지배력’이라는 의미로 정립하기 시작하면서 근대에 이르게 되면서 특정 정치인의 정치적 지배력에 입각해 카리스마의 의미가 좀 더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치인으로서의 리더십에서 발현되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때로는 독재자, 사이비 종교 지도자와 관련되어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어지기도 했다.

 

 

 

 

 

 

하인리히 크니르 <히틀러의 초상> 1937년

(pp 202)

 

 

 

 그런 대표적인 카리스마의 예가 아돌프 히틀러 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올해 학교 수업을 통해서 베버의 권력 형태를 자세하게 배운 적이 있었는데 교수님께서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카리스마적 지배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활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긍할 수 있다. 그래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등장에 베버의 이론이 결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카리스마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인식이다. 이러한 입장은 베버의 카리스마 이론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다. 히틀러가 베버의 카리스마 이론을 이용해서 나치 정권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입증할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

 하지만 히틀러 역시 특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표출할 줄 아는 리더십을 지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인리히 크니르가 그린 히틀러의 초상화 역시 앞에서 소개된 루이 14세의 초상화와 비슷하게 나치 정권의 수장은 위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 팔에 채워진 나치 문양의 완장은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한 눈에 독일의 지배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표정에는 게르만 족의 우수성을 통해 유럽을 정복하려는 야심찬 의지가 담겨져 있다.

 

 

 

 

 

 

알렉산드르 게라시모프 <18차 당 대회의 스탈린> 1939년

(pp 114)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발휘한 정치인은 히틀러뿐만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강철’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소련을 미국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으로 발전시킨 업적을 이룬 위대한 정치인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정치적인 동지와 숙적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숙청을 단행하였고 강압적인 농업 및 이주 정책으로 인해서 수많은 인민들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나게 만든 독재자라는 오명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스탈린 치하 당시 그를 묘사한 그림들은 대개 온화로우면서 인자한 성품을 지닌 인민의 벗이자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특히 이 시기 때부터 지도자 주체화를 위한 미술작품들이 하나의 핵심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탈린을 우상화하는 그림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대중들에게 인민들을 위한 위대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구축할 수 있었다.

 특히 스탈린을 위한 우상화하는 그림들 중에는 배경에 레닌의 조각상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스탈린을 ‘레닌의 후계자’이며 ‘레닌에 버금가는 소련의 지도자’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스탈린은 레닌의 아우라를 이용해 소련을 이끌 소비에트의 지도자라는 카리스마를 인민들 앞에서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죽기 전에 레닌은 스탈린의 존재에 대해서 경계할 정도로 스탈린이 권력집착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권력을 잡는 것에 대해서 우려의 입장을 지니기도 했다. 하지만 레닌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버렸고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레닌은 스탈린을 자신과 버금가는 소련의 지배자로 만드는 데 기여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본인이 원하지도 않게 자신 역시 커다란 동상으로 부활하여 우상화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카리스마,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양날의 검

 

 지금까지 사도 바울에서부터 히틀러, 스탈린까지 ‘카리스마’의 역사를 정리해봤다. 카리스마는 막스 베버가 이론적으로 정립하기 전에 이미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종교적인인 의미를 벗어나 정치인들의 리더십에서 발현되는 능력 또는 자질로 변모해왔다.

 막스 베버에 대해 비평을 쓴 사회학자 앨버트 샐러먼은 카리스마를 정치적 지배력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사회학적 범주로서의 카리스마는 가치판단이 아니라 특별한 업적 때문에 지도자로 보이는 자질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의 추종자들 앞에서 증거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지식의 미술관> pp 280)

 

 군주와 정치인들은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정치적 추종자들과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스스로 창조하고 관리할 줄 알았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지도자의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루이 14세와 히틀러의 지도자적 카리스마에서 알 수 있듯이 상징의 세계에서만큼은 절대권력을 가진 카리스마를 보이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무능과 독재로 점칠 된 권력이었다. ‘특별한 업적’을 통해 지도자로써의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을 통해서 카리스마를 창조했다.

 오늘날에도 정치와 카리스마의 불가분의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버락 오마바가 흑인 최초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쉽’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존 F. 케네디를 언급하고, 열정적인 연설과 ‘희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이다. 모두 오바마의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스탈린식 카리스마 형성 전략은 3대 세습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북한에서도 볼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 최고 권력자로 급부상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 정권 내 체제가 불안정한데다 정권에 대한 민심도 예전과 같지 않아서 김정은 1인 단독 체제로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전망하고 있다. 그래서 김정은의 권력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당분간은 유훈통치를 통해 권력체제를 안정화하는 데 꾀할 공산이 크다. 죽은 레닌이 스탈린의 카리스마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듯이 죽은 김정일도 김정은의 카리스마를 형성하게끔 만드는 중요한 정치적 전략으로 작용할 것이다.

 카리스마의 왜곡된 전략은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횡행하는 사이비 종교가 대표적인 예이다. 일부 종교적 단체의 지도자들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메시아로 자처하여 신도들에게 금품, 성상납을 요구하거나 감금, 폭행, 살인청부 등으로 종교적 교리를 강화하는 데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이들은 종교라는 가면을 쓴 채 혹세무민하는 미신 집단일 뿐이다. 사이비 종교집단의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이 말했던 카리스마를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일부 이론가들은 불안정적인 감성에 치우친 추종자들의 존재로 인한 권력의 위험성 때문에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을 거부하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참신한 사고와 정치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데 있어서 베버가 주장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 또한 분명한 현실이다. 카리스마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대중들의 감성을 사로잡을 수 있는 훌륭한 능력과 자질이 바탕이 된 위대한 카리스마가 될 수 있고, 반대로 대중들의 감성을 위협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칼이 되어 권력자 본인의 이미지 상승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커다란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카리스마가 읽는 소리 그대로 ‘칼(刀) 있으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카리스마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단순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카리스마를 이용할 줄 아는 정치인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의지와 목표가 뚜렷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줄 아는 훌륭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대중들의 지지와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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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28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카리스마가 종교적 의미로 처음 사용된 말이군요. 또 하나 배우고 갑니다. 최근에는 정치적인 의미의 카리스마라는 것도 많이 퇴색된 것 같기도 하구요.
연말 잘 지내고 계세요? 그래도 간만에 cyrus님 글을 보니 반갑네요. 내년에 바쁘시더라도 종종 서재에서 뵈요. 해피 뉴이어~!!

cyrus 2011-12-28 21:28   좋아요 0 | URL
요즘 정치인들 중에는 케네디만한 대중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 보기가 어려워진거 같아요. 그나마 이번에 구치소에
수감된 정봉주 씨가 그런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생각해보는데요, 개인적으로
구치소 생활 때문에 카리스마를 어필하지 못한 게 아쉽게 느껴집니다.
 
반 고흐의 정원
랄프 스키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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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만들어 낸 작은 천국, 정원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어딜까. 철따라 수많은 빛깔의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흐르고, 온갖 종류의 새가 노래하며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풍요와 사랑이 넘치는 낙원의 땅 천국은 인간들에게는 꿈의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천국은 낙원의 동의어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꼭 천국으로 가기를 동경한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혼이 되어 소원대로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먼저 이승을 떠난 이들이 천국으로 무사히 안착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천국이라는 낙원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상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는 참된 신자가 죽은 후 그 영혼이 가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반드시 사후의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을 말하며, 현세에도, 또 인간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천국은 꼭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상상의 공간에 불과한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 삶의 주변을 둘러본다면 '천국'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가 많이 있다.

우리는 훌륭한 자연 경관을 보게 된다면 '천국에 온 기분이 든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많은 이들이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 자연 경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멋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일부 몇 몇 인간들 중에는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오랫동안 만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을 원본 그대로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 인간이 발명한 것이 바로 '정원'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돌, 물, 꽃, 나무 등의 자연재료를 통해 미적인 구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경관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한, 인공적인 공간에 불과하지만 정원 한 가득 차 있는 세상의 온갖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만가지 꽃들의 아름다움과 각각의 존재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정원이 딸린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작은 천국'인 셈이다.  

 
 

 고흐의 정원을 아십니까?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 묻어나 있는 정원은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들에게는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아틀리에(atelier)인 동시에 삶의 일부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지상의 천국’이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는 죽기 전까지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수많은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클로드 모네  <수련>  1916~1922년경 

 

   
  모네가 그린 정원의 풍경과 우명한 <수련> 연작은 대부분 지베르니 정원에서 탄생된 작품들이다. 모네는 부인과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게 여길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다음으로 모네가 좋아했던 것이라면 바로 지베르니 정원일 것이다.  
   

  
그에게는 지베르니의 정원은 단순히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예술적 영감의 장소 그 이상이었다. “내 그림과 꽃 이외에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라고 말할 정도로 모네라는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자신만의 개인적인 공간인 것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모네에게 정원은 아내와 자식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대상이었으리라. 모네가 세상을 떠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는 후세의 예술가와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위대한 명소가 되었다. 모네는 우리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상하는 법’을 이 정원에 남겨놓고 갔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을 열광적으로 사랑했으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고자 하였다. 특히 모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상파 화가들 같은 경우에는 공통적으로 정원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자 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사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정원의 풍경이야말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을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귀가 잘린 자화상>  1888년 

 

인상파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이 딸린 집을 마련해서 그 곳에서 창작 활동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반대로 정원을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풍경을 사랑했고, 그것을 표현한 화가도 있었다. 그가 바로 ‘해바라기’ 연작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지금까지도 고흐가 남긴 작품들을 본다면 ‘해바라기’ 연작 이외에도 고달픈 일상을 끝내고 어두운 방 안에서 감자를 먹는 소시민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이 역동적으로 그려낸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자살하기 직전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밀밭까지 고흐라는 이름은 잘 몰라도 그의 그림을 한 번 보는 순간, 영원히 잊혀버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모네처럼 정원을 무척 사랑했으며 600여 점이 넘는 작품들 중에 정원의 풍경을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더군다나 외로운 독학이 만들어 낸 자신만의 예술적 능력과 지향하고자 하는 미적 가치가 다르면 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외고집이 강했던 그의 인상을 생각한다면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원을 연관시킨다면 대조적인 느낌이 떠오른다. 특히 그는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에만 정착했던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부터 프랑스 파리, 프로방스, 아를, 뉘에넨, 오베르까지 한 곳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방황이 만들어 낸 방랑 생활 그리고 발작과 정신병으로 인한 병원 생활이 고흐의 인생 중 절반을 차지했다. 당연히 고흐에게는 모네처럼 정원을 딸린 집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흐가 정원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고흐는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목사가 꿈이었던 그는 성격 부조화로 전도와 설교를 버리고 화랑점원 일을 시작하지만 사랑의 실패와 아버지와의 불화로 젊은 생을 방황하다가 동생 테오의 권유로 그의 나이 30이 되어서야 늦게 그림을 시작한다. 정식 미술교육도 받지 않고 그림도 어려서 일찍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고흐는 렘브란트, 야곱 반 로이스달, 장 프랑수아 밀레 등 선대의 화가들의 그림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그려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아니 고흐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의 인생은 무척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고흐는 37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몇 명의 여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좋아하는 감정을 고백해보지만 연애로 결실을 맺어본 적이 없었다. 방황 속에서 혼란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고흐를 아껴주고 이해해주실 줄만 알았던 부모님조차도 고흐의 괴팍한 성격과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특히 자신처럼 목사의 길로 가길 원했던 아버지로서는 화가로 전향하여 한 곳에 정착된 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있는 가난한 아들의 모습에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나마 가족 중에서 고흐의 심정을 너그러이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동생 테오 밖에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  1889년 

(<반 고흐의 정원> pp 74)

 

외곬인데다가 조울증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고흐의 성격상 그 누구도 그와 친해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 발작까지 일으키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은 고흐를 더욱 멀리하기 시작했다. 고흐는 차라리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성격에 조롱하거나 멸시하지 이들이 살지 않는 정신병원과 요양원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프랑스 아를에서 정신 발작을 일으킨 빈센트 반 고흐는 1889년, 생레미라는 지방에 위치한 정신병자들이 모인 요양원에 자진 입원한다. 오랫동안 방황으로 인해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생의 의지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요양원에 도착한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요양원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방식으로 미치거나 정신 나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썼을 정도였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정신병원과 요양원 생활은 고흐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가두어 버릴 정도로 거의 지옥에 가까웠다. 더욱이 불시에 그를 습격하는 발작은 고흐에게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고흐는 간간히 정신이 온전히 들 때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특히 병원과 요양소 안에 위치한 정원을 그리는 것이 고흐에게는 유일한 낙이었다. 오랫동안 병원과 요양소에서 생활한 환자들에게는 병원의 정원마저도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공간에 불과했지만 외출마저도 할 수도 없는 고흐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감옥 같은 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서라고 정원의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자신이 소유한 정원은 아니었지만 고흐는 꽃과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거대한 밭과 수풀이 자라고 있는 오베르의 전원적인 풍경에서부터 고흐와 친분을 유지했던 가셰 박사의 집 안 있는 작은 정원까지, 그가 남긴 수많은 데생과 유화 작품들 중에는 꽃과 나무를 그린 것들이 많다. 

 

  

빈센트 반 고흐  <정원에 있는 마르게리트 가셰>  1890년 

 (pp 96~97)  

   
 

가셰 박사는 고흐의 정신 질환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던 고흐의 예술을 인정해준 고흐에게는 몇 안 되는 친분적인 인맥 중의 한 사람이다. 고흐 역시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가셰 박사를 위해서 몇 점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가셰 박사의 집에 있는 정원의 풍경을 그린 적도 있는데, 마르게리트는 가셰 박사의 딸이다.

 
   

 

무엇이 고흐를 정원의 풍경에 매료되도록 했던 것일까.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내용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고흐에게 정원은 지옥 같은 삶에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생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인 동시에 자신만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 이제 나는 자연 앞에서 예전처럼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다. ”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1월 중순, pp 33)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거친 인위적인 자연의 공간이지만 고흐는 정원이라는 특정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이 찾지 못했던 정원 특유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였다. 그에게는 정원은 자연의 모습을 탐구하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정원은 도시처럼 소란스럽지 않으며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이다. 그 어느 누구도 고흐의 그림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고 자신의 모습에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고흐는 꽃과 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에서만큼은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 이 정원이 나를 꿈꾸게 합니다 '

고흐는 정원을 단순히 그림을 편안하게 그릴 수 있는 평온한 공간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자연이라는 조화로운 현상은 오랫동안 잊혀진, 그리고 고흐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따사로운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주게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  <에텐 정원을 회상하며>  1888년  

(pp 44~45)

   
  정원을 대상으로 그린 고흐의 그림 중 유일하게 상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고흐의 누이와 어머니이며 오른쪽에는 하녀가 정원을 가꾸고 있다. 고흐는 캔버스에 칠해진 보라색과 노란색이 어머니의 성격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이 그림을 통해서 그는 단순히 정원에서 노닐던 기억을 회상한 것이 아니라 유년 시절, 포근하고 따뜻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림으로나마 기억하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의 고흐가 지낸 준데르트 지방에 위치한 목사관에는 정원이 있었다. 고흐의 어머니는 고흐와 그 밖의 자녀들이 집 근처의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 놀게 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고흐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곳에서 테오를 포함한 다섯 동생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 고흐에게는 자연은 재미있는 장난감인 동시에 예술적 상상력을 자아내는 대상이었다. 심각한 발작과 정신 질환 속에서도 고흐는 목사관의 정원의 모습 그리고 그 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 영원히 잊지 않았다.


“ 병을 앓으면서 다시 준데르트에 있는 집의 모든 방을 보았단다. 정원의 오솔길, 화초, 주변 풍경, 들판, 이웃, 묘지, 교회, 집 뒤쪽 텃밭, 묘지의 키 큰 아카시아나무에 튼 까치 둥지까지. ”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9년 1월, pp 15~16)


 

  

 

빈센트 반 고흐  <도비니의 정원>  1890년 

(pp 104)

 

자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외곬 성격인데다가 때때로 찾아오는 정신적 발작으로 괴로워야했던 고흐에게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정(情)을 그리워했으리라. 그런 허기진 애정 결핍은 정원을 통해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까지 회상하기에 이르면서 혼자서 외롭게 고독을 달래보려고 했다. 고흐에게는 정원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집이며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들이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이자, 애인이며 그리고 가족이었다. 개인 정원은 아니었지만 그는 따뜻한 정이 오고가는 대화를 나누는 가족과 같은 삶을 꿈꾸려고 했고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정원의 모습을 망각의 틈바구니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로 짧은 인생을 마감함으로써 고흐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정원 속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흐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안락한 지상낙원이었다. 

   

 


 '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가 있는 채마밭> (부분)  1887년 

   (pp 15)

 

동생 테오와 닥터 가셰, 우체부 직원 룰랭이 고흐에게는 그나마 친분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지만 고흐에게는 그들과의 관계만으로도 ‘밑 빠진 항아리’와 같은 애정 결핍을 채울 수가 없었다. 자살하기 전까지 수많은 편지를 교류함으로서 형제애를 돈독히 유지했던 동생 테오의 자화상을 단 한 점 그리지 않는 대신에 정원의 모습을 수십 점이나 그려낸 고흐의 창작 활동을 본다면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과 떨어져 지내는 동생보다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정원에서 피어나는 말 못하는 꽃들이야말로 고흐에게는 친숙한 존재였을 것이다. 고흐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장소에는 그 장소 특유의 환경적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는 인습적인 기법보다는 ‘자연의 언어’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계절에 따라 변화되는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강조하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중에서 -



 

김춘수 시인이 쓴 시구처럼 고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정원 속의 꽃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꽃처럼 누군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했으며 ‘화가’라는 의미 있는 존재로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의미 있는 존재로 알아준 것은 오히려 고흐가 동경하면서도 행복한 기억들을 꿈꾸고자 했던 정원 속의 꽃들이었다. 해바라기 그리고 정원 속 꽃과 나무의 모습을 담아낸 그의 그림들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또한 고독한 예술가의 인생을 기억해주는 음악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고흐가 사랑했던 정원의 모습은 많이 변했고 이제는 고흐의 흔적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고흐’라는 이름의 꽃은 시들지 않았다. 죽은 뒤에서나마 후대 사람들로부터 한 폭의 캔버스로 ‘자연의 언어’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예술적 염원이 인정받게 됨으로써 예술계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위대한 ‘꽃’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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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9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네의 수련 저 그림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첫 장면으로 나오더라고요. 진짜 아름다웠어요. 그림만큼이나. 저는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정말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그림이 그림이고, 나는 나이고. 암스테르담의 우중충한 거리가 생각나서 예전 사진을 들여다봤더니 렘브란트 미술관에도 갔더라고요. 그래서 렘브란트 다큐 찾아보고.. 요즘 그런 식. 뭔가 많이 공허해요.

cyrus 2011-11-30 23:43   좋아요 0 | URL
저도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사실 고흐는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꽤 많은 꽃과 나무들도 그렸더군요. 특히 아이리스를 그린 그림도 좋았고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아이리시스님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습니까? ^^;;
어제는 날씨가 좋다가 오늘은 갑자기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옆구리가 많이 춥더군요 ^^;;

꽃도둑 2011-11-2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오늘 새삼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넘쳐나요,. 저렇게 따뜻할 수가 있다니...

지금 고흐는 뭘하고 있을까요?
자신이 그리워하던 정원에서 거닐고 있을런지도...^^

cyrus 2011-11-30 23:44   좋아요 0 | URL
요양소나 병원 내부라면 먼저 쓸쓸한 분위기가 나기 마련인데
고흐가 그린 병원은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을 표현해서 그런지
꽃도둑님에게는 마음이 드셨는가보군요. ^^

맥거핀 2011-11-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과 그림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좋아지면서도,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누군가는 저거 관리한다고 고생좀 했겠네, 이 생각부터 먼저 드니, 이거 문제가 좀 있지요? (때로는 너무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이상한 공포심마저 들 때가 있어요.^^;) 아무튼 그림은 좋네요. 특히 <도비니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아주 좋네요.

cyrus 2011-11-30 23:46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정원 가꾸는 것도 쉬운게 아니죠.
저는 어렸을 때 정원 딸린 집을 가진 것이 꿈이었는데,, 식물 하나
가꾸는 것도 쉽지가 않더군요. 물 잘 줘야되죠, 햇빛 조절도
잘 해야되고,, 하여튼 관리해야될 게 많아서 수많은 식물이 자라는
정원을 관리한다는 것은 정말 부지런하고 식물을 사랑하느 사람만이
가능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국보순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1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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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수난받는 우리나라 문화유산들

  

 

  

 세계적인 암각화 유물인 국보 147호 천전리 각석에 남겨진 문제의 낙서  

(사진출처: 연합뉴스) 

 

 

최근에 한 고등학생이 수학여행을 갔다가 국보인 암각화에 장난삼아 낙서를 해서 처벌을 받게 되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울산시 울주군이 국보 147호인 '천전리 각석' 에 낙서한 범인을 잡기 위해 최고 1000만원의 포상금을 내걸고 수사를 확대한 것을 계기로 네티즌들 사이에 한국의 낙서 문화(?)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를 훼손한 혐의는 문화재 보호법 위반죄가 적용되어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해지며 이를 신고하게 되면 1000만원의 포상금이 지급된다.   

문화재 낙서 사건 이후로 국보 문화재에 대한 정부당국의 관리 소홀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문화재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인력의 부족과 숭례문 화재 사건 때처럼 초동 대처가 미흡한 관리 체제는 문화재를 훼손하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고 있다.  비단 관리 부실에 의한 문화제 훼손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의 도난과 해외반출이 매년 급증하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다.    

우리나라 국보 문화재가 수난받아야하는 이유에는 정부당국의 허술한 관리도 문제지만, 문화재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 역시 문화재를 훼손하는데 한 몫 하고 있다.    하지만 암각화 낙서 사건 이후 문화재 관리에 대한 처벌을 성토하는 대중들이 등장했다는 점에서만 본다면 문화재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그리 야박하지는 않는 것 같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MBC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무릎팍 도사' 에 출연한 이후부터 그가 쓴 문화재 소개 관련 저작들의 판매가 급증되는 동시에 유 교수가 언급한 문화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무릎팍 도사' 에 출연한 유 교가 자신이 답사한 문화유산 중 순천에 위치한 선암사를 최고의 문화재로 꼽게 되자 방송이 전파된 뒤에 선암사가 때 아닌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유 교수의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그동안 외면받았던 우리나라 국보 문화재의 진면목을 알릴 수 있어서 좋지만 때아닌 문화재 관심 현상의 이면에는 문화재라고 하면 낯설고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인식과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대중들의 심리도 숨겨져 있다.  

만약에 유 교수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문화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높일 수 있었을까?    

'나라의 보물을 순례하는 마음' 으로 우리 마음속에 간직할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소개한 유 교수의 신작 <국보 순례>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 문화재들의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해외 한국 문화재의 존재와 문화재 관리 보존의 중요성 역시 강조하고 있다. 

 

   

  너무나 모르고 있었던 우리나라 문화재의 가치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 신라 5세기, 국립경주박물관  (pp 89) 

 

흔히 삼국시대 금관 하면 신라 금관으로 대표되는 금속제 머리띠에 세움 장식을 갖춘 머리띠 형태의 관(冠)을 연상하기 쉽다.   저자의 표현대로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어느 왕관보다도 화려하고 장엄한 구성미' (pp 88)를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 금관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왕이 머리에 썼던 화려한 왕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금관의 용도는 왕의 부장용으로 만든 위세품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의 한 장면)

  

오늘날 사극에서 보면 왕의 머리 위에는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금관이 씌어져 있다. 하지만 사극에서의 금관의 용도는 잘못된 사실이다.  금관은 생전에 왕이 머리에 쓰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금관의 용도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금관이 고분에서 출토된 당시에는 박물관에 소장되었던 것처럼 장식들이 뻗쳐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부장용으로 만든 위세품(威勢品)이라고 하며 혹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관이 쓰던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 서양의 종은 귀에 들리고 한국의 종은 가슴 깊은 곳에 울린다. "

에밀레종,  통일신라 771년,  국립경주박물관  (pp 105~106)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대중의 낮은 관심과 무지는 국보 문화재로써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문화적, 예술적 가치가 저평가되고 있는 국보 문화재들이 수두룩하지만 '에밀레종' 만틈 대중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채 외면당하고 있는 비운의 문화재가 또 어디 있을까? 

에밀레종의 '에밀레' 는  아이가 어머니를 찾는 울음소리 '에밀레 에밀레(어머니 어머니)' 소리를 낸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종의 실제 명칭은 성덕대왕 신종이다.   통일신라 742년 신라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대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기 시작해 경덕왕의 아들이 혜공왕이 다스리던 771년에 완성되었다.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종이라는 역사적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정식 명칭보다는 '에밀레종' 이라는 독특한 이름과 함께 종소리가 신비롭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종은 세월이 지나면 부식되거나 깨져서 더 이상 칠 수 없게 된다.  성덕대왕 신종 역시 세월의 흐름을 비껴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난 과거, 긴 세월동안 사람들에게 고철덩어리에 불과한 종으로 홀대 받은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원래는 봉덕사에서 걸었던 것을  1460년(세조 6년) 영묘사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으므로 현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에 지금의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적지 않은 이동에다가 두 번째로 오래된 종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형태의 종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더욱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종의 소리를 듣기가 어려워졌다.  2002년 타종식 이후로는 에밀레종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제야의 종소리가 울릴 때면 에밀레종 소리가 더욱 그리워진다.  (pp 106)  

저자의 생각처럼 에밀레종이 울리는 소리를 마지막이라고 들어본 세대들 중에는 죽기 전까지 딱 한 번이라도 그 종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을 것이다.  반면 에밀레종이 울리는 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나를 포함한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마음 속 깊이 울리게 만드는 에밀레종의 신비로운 소리의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고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온전한 형태를 갖추면서도 아름다운 소리가 울리는 종을 이제는 소리마저 듣을 수 없는 그냥 박물관 앞뜰에만 걸려 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물로 남아 있다. 종의 진정한 가치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점은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지금도 박물관 견학 차 에밀레종을 구경하면서 지나가는 학생들에게는 그냥 '커다란 종' 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왼쪽)  목조반가사유상, 일본 아스카 7세기, 일본 고류지 (pp 143) 

(오른쪽)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전반, 국보 제83호,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 문화재의 멋과 예술적 가치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도 그 빛을 발하고 있 다.    해외에 있는 몇몇 문화재들 중에는 과거 서강 열강들의 약탈로 인해 지금까지도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 문화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예술 양식이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도 보급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외국의 박물관이나 유명한 유적지에 가면 심심찮게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오랫동안 일본 국보 제1호로 불렸던 일본 교토 고류지에 보하고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비슷하다.   이것만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보낸 것인지, 혹은 목조만 일보에 들여와 만든 것인지 단정할 수가 없지만 일본의 미술사가들은 불상의 양식이 일본식의 불상과 다른 도래(渡來) 양식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게다가 불상이 보관된 고류지는 진하승이라는 신라인이 세운 절이기 때문에 목조반가사유상이 당시 신라에서 유행하던 예술양식이 일본으로까지 유행, 보급되었다는 학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일본에 있는 불상과 우리나라에 있는 구리로 만든 불상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사진만으로도 목조 불상과 금동 불상의 미묘한 멋의 차이가 느껴진다.  처음 제작했을때만 해도 금박을 입힌 구리를 통해 미륵의 신성스러운 존재를 한층 부각시키고자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상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해 녹이 슬게 된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화려한 금빛만 퇴색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상의 아름다움 역시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목조 불상은 그렇지가 않다.  목조 문화재 역시 습한 날씨, 화재, 흰개미에 취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문화재를 어떻게 보관하느냐에 따라서 오랜 세월 속에도 제작 당시 아름다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오히려 목조 불상이 금동 불상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금동 불상은 녹이 슨 탓에 보는 이로 하여금 평안하게 만들어주는 미륵의 미소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반면에 목조 불상에서는 미륵의 미소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미륵의 미소를 보는 순간 근심과 번뇌가 사라지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잔잔한 물결이 일어나는 듯한 은은한 미륵의 미소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일본에 방문하면서 목조 불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찬사의 소감을 남기기도 하였다.     

 

지금 나는 이 미륵상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 칼 야스퍼스,  <유홍준의 국보순례> pp 142 재인용 -

 

  

 

 문화유산 보존, '반짝 관심' 이 아닌 '친숙한 관심' 이 필요할 때 

 

 

경복궁 근정전의 박석 (pp 184) 

 

<국보순례>에 수록된 '궁궐의 박석' 편에서는 박석의 아름다움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유 교수는 경복궁관리소장에게 근정전은 어느 때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관리소장은 장마철 큰 비가 내릴 때 빗물이 박석의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정말로 아름답다며 대답을 했다고 한다.  (박석 일화는 유 교수가 출연한 '무릎팍 도사' 방송에서도 언급되기도 했다)

사실 딱 한 번 경복궁 근정전에 가본 적이 있는데 <국보순례>를 읽기 전까지는 박석의 존재에 대해서 몰랐다.  그저 돌로 만든 바닥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박석을 실제로 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박석의 자연스러움을 오히려 마감에 충실하지 못한 우리 건축의 폐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pp 183) 

하지만 유 교수는 박석은 자연과 인공의 어울림을 꾀한 우리나라 특유의 건축 미학에 잘 맞아떨어진 건축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무릎팍 도사' 출연 당시 비 온 날에 한 번 박석을 구경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박석 일화를 통해서 알 수 잇듯이 문화재라는 것은 박물관 속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는'보물' 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일상에서도 볼 수 있는 친숙한 '문화유산' 일 수도 있다.   우리는 '보물' 문화재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국보',  또는 '값어치가 있는 물건' 이다.  문화재를 그저 재화적 가치가 높은 '보물' 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전통적 멋과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대중이 문화재를 '보물' 로만 인식하게 만들었던 것은 문화재를 꼭꼭 숨겨두면서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의 관리 방식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지나친 신비주의는 오히려 대상에 대한 타자의 관심이 줄어들 수 있는 역효과를 낳는다.  소중한 문화유산이 도난당하지 않게 철저하게 보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기적으로 유물 자체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대중들에게 '어필' 할 줄 알면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지 않을까?  

'유홍준 교수 효과' 만으로도 우리나라 문화재의 가치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오히려 대중의 '반짝 관심'  때문에 대중들의 관심에 힘입어 문화유산을 보존하기보다는 문화재 낙서 사건 같은 교양적이지 못한 행태가 늘어나지 않을까 되레 염려되기도 한다.

 

천전리 각석 낙서 사건 이후로 울주군은 더 이상 문화재가 훼손되지 않기 위해 인력과 예산을 늘려 첨단 감시장비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 방안을 마련하는 지자체의 행보는 보기 좋지만 과연 제도가 실효성이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과거 이전에도 문화재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와 법규가 마련되었다. 숭례문 방화사건 이후 관련 인력과 예산이 크게 늘고, 훼손행위에 대한 처벌도 강화되었지만, 잊혀질 때만 되면 문화재 훼손과 관련된 유사 사례가 반복되었다.

오늘날 귀중한 문화유산들은 기후변화, 기상재해 등으로 파괴되거나 손상될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러한 문화재 관리 및 보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지금 소중한 우리나라 문화재를 미래의 후손들까지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관심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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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5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6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5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6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0-1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하시던 얘기가 생각납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정말 좋은 곳, 볼거리가 많은데 무조건 해외로만 나가는 것 같다고.

그래서 나중에 차를 갖게 되면 그렇게 숨어있는(?), 아니 찾으려고 하지 않았던 곳을 꼭 찾아 보려고요!! ㅎ

cyrus 2011-10-16 20:0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오늘 1박 2일에서 경주 7대 보물 편을 재미나게 봤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견학으로 경주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참으로 의미 깊은 문화유산이 있다는 것을 TV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편견  

최근에 출간된 진중권<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은 3년 전에 출간된 <고전예술 편>을 이은 2편격이다.    1권 고전예술에는 고대부터 인상주의까지 모더니즘에 들어서기 전의 예술사적 시기를 다루고 있다면 <모더니즘 편>에서는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책 내용을 소개하기 전부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를줄 아는 '현대인' 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현대미술를 어렵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전미술은 너무 단순하고 고색하다고 해서 낡고 뛰덜어진 예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현대적인' 현대예술은 복잡하다고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도 이해 못하는 오늘날의 현대미술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당연히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아마도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들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현대미술은 고전미술보다 복잡하다' , '고전미술은 그림만 봐도 화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는데 반면 현대미술은 도통 무슨 의도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 '현대미술은 고전미술보다 당연히 모던(modern)하며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와 선입견에 불과하다.  

진중권은 <모더니즘 편>에서 현대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모더니즘' 적 예술사조를 소개하기 위해서 단순히 기존의 미술사에서 사용하던 통사적 전개보다는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특정 관점을 빌어 수많은 현대미술 사조들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모더니즘 편>에서는 한스 제들마이어(1896~1984)라는 미술사학자의 관점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자가 선택한 전개방식이 사뭇 이례적이다.   제들마이어는 예술 '보수' 주의자 로서 현대미술의 모순을 끄집어내는 미술사학자로 유명하다.  평소에 '진보' 입장에 서서 사회적 이면에 독설하기로 유명한 저자의 모습과 상반되어 흥미롭다.   

제들마이어는 20세기 초에 등장하다가 사라진 현대예술의 유행들이 전통적 예술 가치를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현대적 예술 가치를 찾고자 하였으나 결국에는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쉽게 좌절되어 심지어 다시 복고주의적 경향으로 되돌아갔다고 분석하였다.  현대예술의 전형적인 특징인 동시에 자기모순으로로 이르게 한 네 가지 예술적 근원으로  ‘순수성의 추구, 기술적 구축의 의지, 근원을 향한 열정, 광기에 대한 호기심’ 을 제시한다.

  

 

  순수성의 추구 : 야수파와 입체파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년 

(pp 36 수록) 

  

'순수성의 추구' 란 회화에서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색채, 형태, 원근법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20세기에 들어서 회화는 관객들을 위시한 표현 양식과 그에 대한 의미에 부여하다기보다는 회화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 배제시킴으로서 순수한 형태의 회화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예술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순수성을 표현하고자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순수성' 이라는 것이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는 미술 입문자나 독자에게는 그저 추상적인 용어로 들리지만 '예술의 순수성' 을 추구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현대미술사조가 야수파(fauvisme, 포비즘)입체파(cubism, 큐비즘)이다.   

야수파와 입체파는 20세기 초 거의 동시에 등장한 미술운동이었는데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표현 방식과 목적은 서로 달랐다.   야수파가 인상파의 화풍에 반기를 든 젊은 화가들이 일시적으로 교류를 맺게 되어 형성하였지만 입체파는 인상파로 활동했던 폴 세잔의 구축적인 원근법에 매료되어 초창기 입체파는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야수' 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수파 소속 화가들은 색채의 강렬함을 강조하였다.  그림으로 표현하고자하는 사물과 모델에서 볼 수 있는 실제 색채를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실제 색과는 상관없이 원색으로 표현하였다.  야수파 화가들은 원색으로서 빨강, 노랑, 파랑 등과 같은 화면의 전체적인 효과를 펼칠 수 있는 강렬한 색채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들> 1908년  

(pp 63 수록)  

 

그는 굉장히 단순하고 변형된 금속성의 인물을 고안했다.  그는 형태를 무시하고 장소, 인물, 집 등 모든 것을 기하학적 윤곽과 입방체(cubes)로 축약했다.  

- 루이 보셀의 비평,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 pp 55 -

   

반대로 입체파는 '정육면체' 를 뜻하는 Cube에서 비롯되었듯이 색채보다는 형태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당시 비평가들 역시 입방체로 구성된 입체파 회화의 표현방식에 대해서 경멸적인 비난을 퍼부었는데 인상파와 마찬가지로 조롱 섞인 의미에서 '입방체' 그리고 '입체파' 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세잔이 원근법이라는 오랫동안 예술가들을 지배한 기교를 제거한 것처럼 입체파 화가들 역시 원근법의 고정된 시선 대신에 여러 개의 시선이 공존하는 화면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루이 보셀의 비평대로 모든 형태들을 기하학적 원형에 가깝도록 표현하였다. 

하지만 오직 '예술의 순수성' 을 추구하다보니 정작 예술적 가치 자체는 관객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모호적인 용어에 불과하며 그런 관념에 불과한 '순수성' 을 찾는다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추상미술이라는게 많은 이들에게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들마이어는 추상미술을 '인간 행위의 근본을 무시' 하는 '사이비 종교와 같은 비교(秘敎)적인 예술'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pp 21)  

 

 

  근원을 향한 열망  : 표현주의

 

 에밀 놀데, <황금 송아지 주위의 댄스>  1910년 

(pp 29 수록)  

 

20세기 초 독일에서 등장한 표현주의 미술은 화가의 감정 또는 화가를 둘러싼 세계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의 순수함을 표현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표현주의 소속 화가들은 원시미술에서 생명력을 들어내고, 원시적이면서도 격앙된 색채를 통해서 근원적 순수함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들마이어는 오직 순수함을 추구했던 표현주의의 구호에 모순을 지적한다. 인간이 더욱 순진해지기 위한 열망이 강해질수록 점점 더 무의식에 숨겨진 어두운 심연으로까지 파고들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전쟁이 남긴 무력감과 허무주의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실망과 동시에 예술적 변질감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후로 표현주의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몇몇 표현주의 화가들은 '11월 그룹' 을 형성하여 정부의 후원 밑에서 활동함으로써 아방가르드 운동으로서의 표현주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고 키르히너 같은 화가는 자신의 예술이 그토록 믿어왔던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 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에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그리고 에밀 놀데나치당에 가입함으로써 표현주의 예술을 다시 한 번 부흥시키려고 하였지만 놀데의 정치적 전략은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훗날 나치의 히틀러는 표현주의 예술을 '퇴폐예술' 로 낙인찍어버렸다.  

 

 

  광기에 대한 호기심 : 다다와 초현실주의   

 

 

조르조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울>  1914년  

(pp 217 수록)  

 

키리코의 작품에서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어떤 황홀한 순간을 기다리는 듯하다.  엇갈린 원근법, 길게 늘어진 그림자,  정체불명의 광원(光源)이 만들어내는 신비스로운 분위기, 초현실주의자들은 거기서 수수께끼 같은 '경이' 를 보았다.  

-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pp 218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는 다다 초현실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다다는  본래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나 전쟁 이후에 형성된 무의미함 그리고 비합리성, 반도덕을 강조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들을 부정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전쟁 이전까지 예술작품이 외적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으며 부조리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남긴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존의 전통적 부르주아적 이해관계에 조롱과 경멸하는 동시에 재앙의 시대를 살아나갈 수 있는 묵시론적 광기를 통해서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가치와 형식을 거부하려는 다다는 '다다이즘'(dadaism)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변화됨으로써 '다다' 로서의 고유한 무정부주의적 의미가 퇴색된 채 하나의 예술운동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다다 특유의 허무주의만으로 예술의 본질을 찾을 수 없다는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라는 새로운 예술적 이념을 주창하였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 또는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할법한 낯선 꿈의 세계 그리고 광인의 착란 증상이 만들어낸 광기의 세계야말로 전쟁에서의 정신적인 해방과 예술로써의 진정한 창조 상태로 보았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역시 예술의 내재적 모순을 피할 수 없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비현실적이면서도 광기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해도 그들이 진정 '광인' 이 아닌 이상 초현실주의적 예술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정신 분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술적 구축의 의지 : 구축주의, 바우하우스

 

 

 블라디미르 타틀린,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최초 모형,  1920년 

 

시대가 가면 갈수록 현대미술은 더욱 더 새로운 유행의 예술사조들이 등장하게 된다.  1920년대까지도 여전히 예술가들은 예술의 순수함을 찾고자 하였는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계, 기술, 기하학' 과 같은 기계 역학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러시아 구축주의의 주요 멤버로 활약한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철판, 유리, 철사 등에 의한 공간구조에 창안하여 약 400 m 높이의 경사 나선형인 철골구조물인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계획하였다.  당시 철물이 부족한 소비에트 체제의 러시아 재정 상태로 인해 타틀린의 원대한 꿈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타틀린은 기술적 구조인 공간기능적인 여러 조건을 추상적인 모형으로 전개하여 '기술적 구축의 예술' 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그후 기술과 예술의 만남은 실제적인 사회적 기능을 제공할 목적으로 미술에서 추구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독일 데사우에 위치한 바우하우스 건물 

 

'기술과 예술의 만남' 이라는 현대적 예술적 인식은 독일에서도 정착되기 시작하는데 러시아에서 건너온 바실리 칸딘스키(칸딘스키 역시 러시아 특유의 구축주의 예술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와 파울 클레 등을 중심으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Bauhaus) 라는 조형예술 전문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기술과 예술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교육에 치중하였다.   바우하우스에 소속된 학생들과 교수들은  오늘날 산업적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미래' 를 위해서 '과거' 로 돌아간 현대미술  

결론적으로 제들마이어는 이 네 가지 근원으로 인해서 현대예술은 단순한 비(非) 예술로 전락, 역설적으로 자신이 기피하고자했던 예술적 가치와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자기모순과 파멸의 길을 걷게 된 원인으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황폐하고 부조리한 현대 세계를 지탱할 수 있는 그릇된 우상숭배를 오직 예술에서만 표현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현대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 파괴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급진적인 혁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제들마이어는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현대예술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진정한 조건으로는 '미래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라' 는 철학자 셸링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복음에 사로잡히는 나약한 정신' 이 아니라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강인한 정신'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pp 33)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과거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예술 '보수' 주의자다운 결론이다.  저자 역시 현대예술의 자기모순과 이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린 제들마이어의 분석에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만 가지고 그가 예술만큼은 '보수적인' 관점을 가졌다는 섣부른 결론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평소에 '진보주의자' 로써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독자들에게는 '예술' 에서만큼은 보수적인 관점에 동의하는 저자의 모습이 흥미로울 것이다.  저자가 말한대로 이 책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면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현대예술의 진면목을 알게 되며 제들마이어의 예리한 분석에 동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비록 '모더니즘' 예술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제들마이어의 분석만을 가지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보수' 와 '진보', 상반된 두 가지 관점으로 현대예술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책의 구성면에서 아쉽게 느껴지지만 복잡하면서 어렵다던 현대예술의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특징들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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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9-15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셨나요?.,,,
결국 현대미술도 '낯설게 하기군요... 작가 마음대로, 보는 사람 마음대로, 참으로 불칠전한 것이 현대미술이 아닌가 싶네요... 진중권의 미학세트를 사놓구선 포장지를 아직 뜯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걸 글을 읽으면서 생각났어요. 사이러스님의 글은 나날이 빛을 발하고 있군요. 게으론 독자 다녀갑니다..^^

cyrus 2011-09-15 16:30   좋아요 0 | URL
네, 올해 연휴에는 맛있는거 많이 먹고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연휴가 끝나도 여기 대구는 무척 덥네요. 물론 꽃도둑님이 사시는 곳도
더우시겠죠? ^^

stella.K 2011-09-2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봐도 대단하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못 쓸 것 같고,
뭐라고 쓰긴 써야하는데 난감해.ㅠ

cyrus 2011-09-21 16:03   좋아요 0 | URL
책의 주요 내용들만 뽑아서 정리한거랍니다. 솔직히 인문, 과학, 예술분야
책이 리뷰나 서평으로 쓰기에는 쉽지 않은거 같아요.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미학' 의 관점으로 보는 서양미술사

몇 달전부터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고 있다.  사실 읽는다라기보다는 그저 훑어보고 있다는게 옳다.   베개로 삼을 만한 엄청난 분량에다가 깨알 같은 작은 글씨는 아무리 미술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책을 펴기 전부터 압박감을 준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오늘날까지도 미술사의 고전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미술사 스테디셀러이지만 단지 미술사를 알기 위해서 이 책 한 권을 통째로 읽는다는 것은 괜한 오기일지도 모르겠다.     

곰브리치 외에도 B.W. 잰슨의 저서 역시 유명한데 기존의 많은 미술사들은 다양한 사조를 시간순에 따라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범위한 미술이 변모해나가는 흐름은 한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양식의 변화만큼은 파악할 수 없다.  더구나 미술 지식이 전무한 미술 비전공자들은  '양식의 변화' 라는 중용한 알맹이를 지나쳐버리고 수박 겉핥기로 읽게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서양미술사들의 저자는 대체로 외국인이다보니 서구의 시선과 관점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을수 밖에 없다.  서양과 동양의 그림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차이가 있가 마련인데 미술에 대한 서구인들의 미적 취향과 관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점도 미술사를 이해하는데 더욱 어렵게 만들게하는 원인 중의 하나다.    국내 출신의 미술 전공자들이 기록한 우리나라 독자들을 위한 서양미술사가 소개되고 있지만 여전히 기존의 서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감이 있다.

하지만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서술 방식은 독특하다.  미학자답게 '미학' 의 관점으로 미술사를 접근하고 있다.  미술사학에서 널리 알려진 논문이나 저서를 선택, 그것들을 선형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미술사를 구성한 것이다. 서양미술의 원리를 문제영역별로 제시하면서 역사를 통시적으로 함께 서술하는 방식이다.  

 

 

  '예술 의지' 에 따라 달라지는 미술의 양식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십자가 책형> (이젠하임 제단화 중 일부)  1509~1511년  

(진중권 <서양미술사 1> pp 175 수록)

  

 

파블로 피카소 <십자가 책형>  1930년

 

그뤼네발트피카소의 그림이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둘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뤼네발트의 그림에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몸에 곳곳이 난 성흔을 생생하게 볼 수 있지만 피카소의 그림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제목을 모른 상태로 보게 된다면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으로만 볼 수 있다.  그뤼네발트의 표현방식처럼 온전한 형태의 사람과 사물이 그려지 그림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피카소의 추상기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림인데도 표현방식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두 화가가 표현방식에서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때 활동한 독일 출신의 그뤼네발트는 인물을 가능한 한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릴려고 하였고, 20세기 화가 피카소는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리는 것이 목표였다.  

예술 의지가 다른 것이다.  저자는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가 제시한 두 가지 비례론을 끌어들이는데 그뤼네발트의 그림처럼 실물을 그대료 묘사하려는 ‘객관적 비례’, 실제 인체 비례에서 현저하게 벗어난 피카소의 묘사는 ‘제작적 비례’ 로 부를 수 있다.   

고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예술가들은 신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인체 비례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객관적 비례)   그러나 시대가 변할수록 창작의 방법으로서의 비례의 의미는 서서히 종말을 맞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창작의 근원을 자신이 표현하려는 의지에서 찾게 됨으로써 현대의 추상미술이 등장할 수 있었다. (제작적 비례)  

  

    

  형태냐 색채냐, 미적 관점의 충돌  

 

 

<푸른 옷을 입은 성모> 프랑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12세기경 

 

색과 빛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시기마다 다르다.  감각적 세계보다 초월적 세계를 중시한 중세에는 예술로 감각적 세계를 재현하기 보다 그 너머 초월적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중세의 장인들은 값비싼 재료의 화려한 색채를 초월적 빛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중세 고딕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의 미학인 명료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예술가들의 미감은 다시 형태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후로부터 시대에 따라 미술에서 강조되는 표현방식으로서 '형태' 와 '색채' , 이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미술의 역사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크 시대에는 회화의 고유성을 강조했다. 즉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형태보다는 색채의 효과에 중점을 두었다.   바로크 시대에 탄생된 예술작품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에 비하면 더욱 화려하다.   색채를 강조하는 표현양식은 프랑스의 로코코 시대에 이를수록 한층 더 화려한 색감을 더하게 되었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 때 유행한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은 화려한 생활을 누리는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미술양식이었다.

 

 

니콜라 푸생 <세례 요한과 성녀 엘리자베스, 기도하는 성 요셉이 있는 성 가족>  17세기경  

 

 

페테르 파울 루벤스 <세례 요한과 성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는 성 가족>  1634년경  

형태를 강조하는 고전주의적 그림들은 고대 조각상을 연상할 정도로 고정적이다. (니콜라 푸생)  하지만 색채를 강조하는 바로크 및 로코코풍의 그림들은 오히려 고전주의적 그림들보다 화려한데다가 색체의 효과 덕분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루벤스)  이러한 서로 상반된 미적 관점의 충돌은 한 세기동안 예술가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쟁의 화두였다.

    

그러나 비평가들 사이에서 화려한 미술양식의 유행에 반발함으로써 예전처럼 형태가 강조되는 미술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예술가들이 색채의 화려한 효과에만 치중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형태의 기본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형태와 윤곽을 강조하는 예술가 및 비평가들로 구성된 '고전주의자' 또는 '푸생주의자' 와 반대로 색체를 강조하는 입장의 예술가들은 '현대주의자' 또는 '루벤스주의자' 로 대립 구도가 형성이 되어 예술적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술적 논쟁이 불붙던 17세기는 절대왕정의 시기였기에 결국에는 귀족과 왕정들의 인기를 힘입은 바로크, 로코코 양식이 승리하게 되지만 유행의 흐름은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18세기에 터진 프랑스 혁명 이후로 왕정이 붕괴되면서 다시 고전주의적 미적 취향이 유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솜씨' 가 아니라 '의지' 

  

클로드 모네 <인상-해돋이>  1873년

  

클로드 모네가 <인상-해돋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살롱에 출품하였을 때 관객들은 정확한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은 안개로 가득한 어둠침침한 풍경에 무척 낯설어하였다.  심지어 비평가들은 '정확한 묘사' 를 강조하는 전통적 회화 표현 수단을 저버린 모네와 같은 예술가들을 향해 경멸감에 가까운 악평을 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유래된 단어가 바로 '인상주의' 인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은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처럼 빛의 미세하고 섬세한 효과를 표현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정확한 형체로 표현되는 고전주의적 예술를 선호하는 관객과 비평가들 입장에서는 인상주의자들의 표현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로 접어들게 되면서 누그러뜨린 형체들만 그려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추상미술이 등장하였을 때 관객과 비평가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표현양식에 아연실색하였다.  여전히 정확한 사물과 인간이 그려진 고전적 표현이 시각적으로 익숙해져있다보니 추상미술의 등장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보수적 비평가들은 추상미술의 등장에 '예술의 종말' 까지 운운할 정도였다.

오스트리아의 미술사가 알로이스 리글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솜씨' 가 아니라 '의지' 라고 하였다. (진중권 <서양미술사 1> pp 17)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특정한 미술양식이 유행하는데는 예술적 인식, 사고 등 예술가들이 표현하고자하는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고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술 본연의 예술적 감각 그리고 예술 의지를 알지 못한 채 그림을 보게 된다면 중세의 예술양식을 화려한 로코코 양식과 비교하여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정도의 수준으로 평하거나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예술을 접할 때는 실물과 정확하게 묘사할 줄 아는 화가의 역량만이 무조건 우수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기존의 미술사보다는 내용면에서는 깊이가 떨어지지만 미술의 양식이라면 이해가 깊은 독자라도 흔히 접근하기 꺼려해온 형식적 체계까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미술사가 유용하다.   

이 책을 통해서 고대 미술, 르네상스, 마니에리스모,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등 미술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지만 어렵게만 느껴졌던 미술사조들의 예술적 특징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전문적인 미술사에서 볼 수 없었던 미시적인 예술양식과 유행 역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미술사조에 강조되었던 예술적, 미학적 감각들을 숙지하고 있다면 두꺼운 분량의 곰브리치 미술사와 같은 전문서적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막 미술사를 입문하는 초보 독자들이라면 진중권표 서양미술사는 미술사의 기본적인 미적 흐름과 미술사조의 특징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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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9-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예술편이었군요. 저는 모더니즘편 읽고 있는데
읽기야 읽겠지만 리뷰를 어떻게 쓰나 한숨이 나오고 있습니다.ㅠ
근데 이책을 그렇게 빨리 읽었어요?
그것도 모자라 곰브리치도 읽고 있다닛!
저는 내친김에 오래 전에 사놓고 안 읽은 미학오디세이2를
일단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읽을 시간이 있을까 모르겠어요.흐~

cyrus 2011-09-08 00:32   좋아요 0 | URL
모더니즘 같은 경우에는 철학 지식을 요구하고 있어서
어려운건 사실이에요.. 저도 잠깐 모더니즘편을 훑어봤는데
확실한건지 모르겠지만,, 훑다보니 '벤야민'이라는 단어가
보이더군요. 읽기 전부터 어떤 내용이지 짐작이 가더군요 ^^;;

그래서 오랜만에 고전예술편을 읽어봤어요. 제가 작년에
처음 읽었는데,, 그 때는 미술에 대해 무지했던 때라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었습니다.
고전예술편 같은 경우에는 내용이 어렵지 않을거에요. ^^

맥거핀 2011-09-0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며칠 전에 모더니즘 편 사서 지하철타고 왔다갔다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미술작품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꽤 재밌더군요. 1편 예전에 보고 괜찮은 것 같아서 2편을 샀는데, 2편은 1편보다는 재미가 살짝 덜한듯한..(구성도 그렇구요.)

이 고전예술 편 보고 생각이 든 것은 미술사라는 것도 일종의 필연성이 엿보인다고 할까요. 잘 모를때는 이 미술양식들의 출현이 그저 별 연관없이 나온줄 알았는데, 어떤 사조가 지나간 후 다시 새로운 사조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연관이 있더군요. 재미있었습니다.

cyrus 2011-09-08 00:3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모더니즘은 현대미술에 대해서 다루다보니 현대미술에
생소한 독자들에게는 재미가 덜 할 수도 있다고 봐요.
저 같은 경우에도 현대보다는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양식을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아이리시스 2011-09-06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맨 윗 그림 진짜 좋아해요. 제가 성경을, 그러니까 성서를 많이 좋아하거든요. 모든 이야기는 성서 속에 있다고 배워서 꼭 읽어내고 싶어 핑크 성경책을 샀는데도 그건 제가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예요. 종교가 없는데 것과 상관없이 성경공부는 꼭 하고 싶어요. 곰브리치는 아는 분께 들었는데 아무데나 관심있는 부분 펼쳐읽으래요. 그림읽기에 관한 책을 많이 내신 분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면 오히려 경기 난다고.

오래 전에 <미학 오디세이>는 신세계를 열어준 인문서였는데, 새로 출간되고 관심이 덜해졌어요. 그치만 저도 꼭 읽어볼래요!

cyrus 2011-09-08 00:35   좋아요 0 | URL
종교에 상관없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자하는 아이리시스님의
모습이 보기 좋아요. 제 생각이지만 시중에 성경 이야기를 그린
그림을 설명하는 책이 있을거에요. 제목은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는 따로 페이퍼로 소개해드릴께요. (꼭 기억하고 계세요 ^^)
그 책을 보면서 성경 속 주요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곰브리치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관심 있는 부분에만 읽고 있는 편이랍니다.
요즘 인상파에 관심이 많아서 그 부분만 열독하고 있습니다. ^^;;

yamoo 2011-09-07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서양미술사...괜찮은 책이죠. 시루스님 지적대로 어여 우리 미술사가들의 독특한 시각이 느껴지는 미술 평론책들이 많이 출간됐음 합니다~

그나저나, 올리신 그림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시나요? 리뷰 쓸 때에는 그림이 2개이상 들어가지 않아 이상했는데...그림들을 어찌 많이 넣으셨는지 궁금하네요^^

cyrus 2011-09-08 00:3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와 같은 대중적인 서양미술사의 출간은 보기 드물텐데 말이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서양미술사 1>이 2008년인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미 알려져 있던 <미학 오디세이>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중들의 반응이 뜨겁지 않아서
아쉽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그 당시 진중권 씨가 한창 독설을
날리는 논객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탓도 있다고 봐요.

야무님은 작성하실 때 그림을 두 개 이상 넣는게 안 되는가보군요.
저는 아무런 불편없이 잘 되요. 혹시 지금도 안 된다면
알라딘 서재지기에 한 번 문의해보셔야 할 거 같아요.
시스템상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