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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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그런게 아니겠니
원하는 데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것


 

- 여행스케치 '산다는 건 그렇게 아니겠니' 중에서 -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1995년에 미래학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는 '디지털화하지 않으면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디지털 혁명의 부정적 측면은 디지털 세상이 갖는 강력한 특징 때문에 부각되지 못할 것이라며 디지털 낙관론을 펼쳤다. 아날로그가 모든 영역에서 디지털화하는 세상을 지켜보면서 그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느낀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스콧 피츠제럴드가 활약하던 1920년대를 '황금시대'를 동경한다. 길이 꿈꾸는 1920년대를 사는 아드리아나는 고갱과 드가가 살았던 1890년대를 '황금시대'로 꼽는다. 고갱과 드가는 한술 더 떠 르네상스 시대를 '황금시대'로 부르며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상상력이 죽은 시대'라고 한탄한다. 저마다 동경하는 '황금시대'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다. 모든 '황금시대'는 과거를 조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에 등장하는 세스는 과거의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는 직업 만화가이면서도 과거에 발행되었던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는 만화를 수집하는 외골수다. 그는 우연히 잡지 '뉴요커'에 실린 '캘로'라는 필명이 그린 만화를 알게 된다. 세스는 만화가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 어렸을 때 살았던 스트라스로이로 향하게 된다. 시간이 멈춘듯한 스트라스로이에서 세스는 잊고 있었던 과거 일상의 흔적을 발견한다.

 

 

 

 

 

 

하지만 만화 속 주인공의 성격에 대해서 독자들마다 호불호가 엇갈릴 것이다. 과거가 현재보다 낫고 현재는 좋았던 과거를 파괴하고 있는 슬픈 현실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비관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황금시대'를 추억하는 심리를 한 꺼풀 벗겨보면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나쁜 일은 빨리 잊고 좋은 기억만을 남기려는 경향이 강하면 '무드셀라 증후군'에 빠질 수도 있다.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복고 열풍을 빠진 현대인이나 만화 속 세스의 모습은 각박하고 치열한 현실에 기댈 곳 없는 상황과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오는 불안감의 표상이다. 불안정성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황금시대'에 열광하는 모양새다.

 

그래도 조금은 슬프다. 우리의 감성과 정서는 여전히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데 주변은 모두 디지털로 전환되고 있는 것 같아서다. 과거의 즐거웠던 일상을 담은 추억의 스냅사진은 언젠가 희미해질 기록이지만 추억은 더 진하게 남지 않겠는가.

 

약간의 소음이 음악의 일부인양 느껴지는 LP판과 소통이 있었던 아날로그 TV가 더 정겹고, 문자나 카톡보다는 학창시절 연애편지처럼 기다림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던 편지의 애절함도 그립다. 그렇다고 아날로그 생활만을 고집하며 살 수는 없다.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 감성을 불어넣어,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디지털 세상에서 행복과 동행할 수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 되지 않을까.

 

 

 

 

 

 

세스의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인생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당신의 인생이면서 또 나의 인생이기도 한 이야기. 어쩌면 무심하고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빛나는 이야기들. 아주 미국적인 것도 같지만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사들이 들어 있다.

 

인생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인생은 정해진 순서대로 예측가능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정해져있고, 예측가능한 대로만 된다면, 인생 살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필연적으로 불안감을 만들어 내고, 이 불안감은 때로는 현재를 괴롭힌다. 인간은 늘 불안감을 갖고 살아왔고, 이러한 뿌리 깊은 불안감으로 인해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을 찾고자 애써왔다.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을 찾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과거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확실성을 찾지 못하면 현실의 삶이 고달프면 과거를 동경하는 게 사람의 심리인 것 같다. '그래도 그 때가 좋았지'라는 과거 지향형의 향수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담긴다. 옛 향수를 안주 삼아 일상의 지친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자 하는 데는 현실이 고단하기 때문일 게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부정은 지금보다 별반 좋을 것도 없는 과거에서 위안을 삼으려는 경향을 커지게 한다.

 

사실 잘 산다는 것은 상대성이 있다. 세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행복의 가치도 다르고 만족의 크기도 저 마다 다르다. 결과가 과정을 대신해준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하고, 무엇보다도 인생이란 본디 불확실한 일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오늘의 행복을 놓치는 우를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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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회화의 혁명 - 도미에에서 샤갈까지
게오르크 슈미트 지음, 김윤수 옮김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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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과 학생들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

 

작년 2학기 때 수강했던 수업 중에 ‘서양미술사’라는 과목이 있다. 원래 전공은 행정학과인데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회화과 수업을 듣게 되었다. 본 전공과 전혀 다른 수업 분위기는 색다른 느낌을 받았고, 몇몇 회화과 학생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회화과 학생 특유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서양미술사’ 수업은 회화과 2학년 전공필수 과목이라서 수강생 중에는 11학번 2학년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교수가 수업 도중에 학생들을 훈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매번 하는 질문이 딱 하나 있었다.

“너희는 어떤 그림을 그리길 원하는가?” 회화과 학생들이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먼저 하는 것이 전공교수와 일대일 상담이다. 상담을 통해 학생들의 진로를 알아볼 수 있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전업화가나 미술 관련 분야의 직업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교수는 상담에 응하는 학생들에게 무조건 이 질문을 한단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회화과 학생들의 답변은 비슷하다. ‘대상을 정확하고 똑같이 그리는 것’. 교수는 학생들의 천편일률적인 답변에 일침을 가한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여기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금 현대미술이 빠르게 발전되는 시점에서 대상을 무조건 정확하게 그리려고 한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생각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시작된 근대미술

 

교수가 회화과 학생에게 던지는 이 간결한 질문은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학생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이 어떤 건지 묻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예술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예술적 정체성 없이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표현할 수 없다. 만약에 이 회화과 학생들이 유행에 따르듯이 다른 화가 지망생들과 비슷한 표현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거나 과거 화가들의 작품을 정확하게 모사하는데 그친다면 발전이 더디어질 것이고 전도유망한 화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술 창작이나 발상 면에서 독창성을 잃고 평범한 경향으로 흘러간다면 회화과 학생들은 방대한 분량의 서양미술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표현수단의 고정성이 강하면 예술의 신선미와 생기를 잃게 된다. 이것은 곧 ‘발전’이 아니라 ‘퇴행’이다.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면 여러 단계의 전환점을 기준으로 발전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마다 발전의 기준을 보는 관점이 차이가 있지만 근대서양미술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게오르크 슈미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회화 역사의 시작은 원근법, 명암, 신체적 비례 등의 정확성에 의한 묘사를 요구하지 않았던 중세 초기부터 보고 있다. 이때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리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표현으로 발전했다. 두 번째, 중세미술은 바야흐로 조토 디 본도네의 등장과 함께 현실의 묘사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공간적, 해부학적 정확성이 강조되었다. 세 번째의 발전 단계는 이전 시기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대상을 보는 인식이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바로 정확성을 강조한 고전적 화풍을 완전히 탈피하여 화가의 개성적 표현을 강조하는 근대미술로 도달하게 된다.

 

'근대미술'(Morden Art)의 정의 및 시기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가 다르게 구분되고 있지만 ‘예전’과 다른 ‘새로움’의 가치개념으로 보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적 회화방식에서 강조하는 표현의 정확성을 과감하게 버리는 진취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시기이다. 화가가 대상을 정확하고 똑같이 표현한다는 것은 근대미술 등장 이전 화가들에게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고전적 회화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통보함으로써 근대미술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근대회화의 시작은 도미에로부터

 

 

 

오노레 도미에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1850년경

 

 

근대미술의 시작은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등장과 함게 소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게오르크 슈미트의 소개는 다르다.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오노레 도미에의 등장을 시작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미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과거의 고전주의가 추구한 정형화된 이상이나 규범을 거부하고 오로지 눈으로 보고 경험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객관적인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란 과제를 수행하고자 한 사실주의는 그리스 고대 문화 모방을 강조한 신고전주의 미술과 비교해볼 때 전위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들은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은 그 시대의 현실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도미에가 사실주의 화파라고 해서 대상의 정확성을 추구한 건 아니다. 명암을 기조로 한 유동감과 높은 정신성을 지닌 표현을 통해 대상을 솔직 예리하게 관찰했다. 특히 대상을 시각적 영상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 대상을 고의로 왜곡시켜 그리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 기법을 이용해 화가의 진실된 감정을 캔버스에 표출하고 있다. 사물의 자연형태에 보다 주관적인 왜곡을 가하는 도미에의 그림은 충실한 재현에서 벗어나 형체와 비례가 파괴당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부자연스러움과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새로운 조형적 시도를 통한 창조성으로의 기대치를 높여주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자장가 (룰랭 부인의 초상)』 1889년

 

 

도미에의 선구자적 회화 기법은 프랑스 파리로 홀로 건너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는 젊은 반 고흐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흐가 습작 시절에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그도 오랜 모사와 독학 끝에 정확한 형태의 회화 묘사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하게 된다. 대샹을 정확하게 그린다고해서 진실적 가치를 제대로 담아낸다고 볼 수 없다고 고흐는 확신했다.

 

"모든 아카데믹한 형태는 오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도미에가 그런 형태를 그린다면, 그 비례는 아카데믹한 작가의 눈에는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일테지. 하지만 그 형태야말로 살아있는 형태일 것이다. 나는 아카데믹한 의미에서 정확한 형태를 그리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부정확함을, 그러한 뒤틀림을. 그러한 현실의 변형과 수정을 습득하는 것이 나의 최대의 열망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거짓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글자 그대로의 진실보다 더 진실하지 않은가."  (p 58~59)

 

 

 

 

폴 고갱  『시장』 1892년

 

 

해부학상의 정확성을 포기한다는 건 결국 실제처럼 공간감각을 구현하기 위한 원근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고갱의 『시장』이라는 그림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캔버스 중앙에 있는 5명의 여인과 배경은 원근법에 의해 정확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다. 장식 그림처럼 인물과 배경이 평면적이다.

 

 

 

 대상의 '표면'이 아니라 대상의 '이면'을 그려라

 

어느 문명,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미술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실물처럼 생생한’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각종 새들이 진짜로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일견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관객의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나 조각가의 놀라운 기술을 강조하는 이러한 일화들은 동,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특히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너무나 자랑을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다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위에 천이 드리워져 있어서 이를 걷으려던 제욱시스는 천 자체가 파라시오스의 그림인 것을 뒤늦게 알고 감탄하면서 새를 속인 자신보다 화가를 속인 파라시오스가 한 수 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 모두가 현재 우리들의 눈에도 실물로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미술 작품에는 이러한 기법 상의 관례나 사회 통념을 초월해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교감 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단지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미술 작품을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에 회회과 학생 중에 서양미술사 공부의 중요성을 못 느낀 이가 있다면 게오르크 슈미트가 쓴 책을 권하고 싶다.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싶어하는 생각을 쫓는다면 자신만의 개성적인 표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대상의 '표면'만 똑같이 묘사하는 빈 껍데기 그림보다는 대상의 '이면'에 숨겨진 실제적 특성을 정확하게 포착한 진실된 그림이야말로 미술의 진정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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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6
질 랑베르 지음, 문경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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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관심 있게 알아보고 있는 화가가 이탈리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다. 이름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와 비슷한데 국내에선 카라바조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선 미켈란젤로 못지않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고흐를 능가하는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불같은 성격, 시대를 앞서갔지만 결국 외면 받아야만 했던 남다른 천재 그리고 요절. 이러한 카라바조의 삶에 비하면 고흐는 양반에 불과하다. 경쟁 화가들 그리고 자신에게 그림을 주문했던 사람들을 무시하는 발언은 예사였고 수차례에 걸쳐 폭행 및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고 탈옥을 감행하여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보라. 딱 얼굴만 봐도 그의 격정적인 성격이 인상에서도 묻어 나온다. 예술적인 삶보다는 카라바조의 무시무시한 전과 이력이 제일 먼저 떠올려서 그런지 초상화 속에서 그가 쥐고 있는 것이 붓이 아니라 생전에 품속에서 지녔다던 단검처럼 보인다.

『성 마태오의 소명』1599~1600년


카라바조는 어린 시절부터 도제 생활을 거쳐 예술적 능력을 점점 키워나갔다. 콘타랠리 예배당에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와 <성 마태오의 소명>이 각광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권력자였던 델 몬테 추기경이 후원자로 나서고 로마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양식을 추구한 그는 악마적 화가,‘회화의 반(反) 그리스도'라는 비판도 받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집시나 부랑자, 창녀의 모습을 성자나 예수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성사회의 비판과 조롱을 비웃기라도 하듯, 충격적인 주제 선택과 표현 방식에 대한 고집이 묻어 나 있는 카라바조의 붓은 절대로 꺾이지 않았다.


『마리아의 죽음』1606년경






임종한 성모 마리아를 그리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의 썩어가는 시신을 모델로 사용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부탁했던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그림 모델에 대한 출처불명의 소문보다는 교회 관계자들을 더욱 실망하게 만든 것은 카라바조의 표현 방식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왼팔이 축 늘어진 채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임종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 있다. 교회 관계자들은 이러한 그림 구도를 마음에 들지 못했다. 성모의 죽음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장면이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성모 가까이에서 임종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 속 성모의 모습에 대해서도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맨 발을 드러낸 채 죽은 성모의 모습이 저속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를 들면서 카라바조의 그림을 비난했다. 그나마 그림 속 죽은 여자가 성모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희미한 후광만 그려져 있을 뿐, 이것마저 그려 넣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 또한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카라바조는 지극한 성스러움은 결국 지독한 세속적인 삶에 기초해 있으며, 성(聖)과 속(俗)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첫 번째 그림, 현재 소실됨)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수정된 그림)


카라바조는 그림 제작 주문자들로부터 총 두 번이나 거절당할 정도로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 마태오와 천사>다. 첫 번째 그림 속 성 마태오가 너무 초라하고 천사가 마태오 옆에 너무 가까이 묘사되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천사의 영감을 받아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마태오의 모습은 평범한 하층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마태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탓에 그의 발바닥은 그림을 보는 관중들 앞으로 드러나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본 순간, 마태오가 성인으로써의 면모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레토의 성모』1604~1605년


비록 성당이 요구하는 작품을 위해 카라바조는 고귀하고 근엄한 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도록 그림을 수정했지만 평범하고도 세속적인 종교화를 추구하고자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적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성 마태오와 천사> 두 번째 그림이 완성된 지 2년 뒤에 그려진 <로레토의 성모>에서는 성모와 아기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늙은 순례자의 맨발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카라바조는 그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사실주의적 화법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1593~1594년경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초창기의 카라바조 그림을 보게 되면 이미 사실주의적 표현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과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처음 보는 독자라면 훗날 그려지게 될 종교화에 비하면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점의 그림을 박물관에서 실제로 보게 된다면 좀 더 가까이 살펴 볼 것. 과일과 이파리가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과일은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흐를 정도로 싱싱하게 느껴진다. 특히 포도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각각의 포도 알맹이가 하얗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는데 포도 열매 위에 묻은 하얀 가루를 보는 듯하다. 이것을 사람들은 농약이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다행히도 농약 성분은 아니다. 그리고 카라바조가 살았던 시대에는 농약이라는 게 나오지도 않았다. 포도 속 당분으로 포도 껍질이 변해 생성된 것뿐이다. 하얀 가루가 많은 포도일수록 당분이 높고 신선함이 유지되어 있다. 과연 카라바조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그렸던 것일까?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1596~1597년


카라바조는 종교화를 그렸던 화가이면서도 동시에 폭행, 살인 전과가 적지 않은 범죄자라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독특한 화가이다. 하지만 렘브란트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등장할 수 있게 명암법을 처음으로 시도했으며 극적인 순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방식은 훗날 조르주 라 투르와 쿠르베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미술은 정당한 대우를 받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카라바조의 종교화를 반복해서 볼수록 차분해지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물론 화가의 생애를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을 본다면 그림이 주는 감동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카라바조도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의 모습을 주제로 한 그림 한 점을 남겼는데 불같은 성격의 화가가 그렸다는 생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고요하다. 두 눈을 감고 얼굴을 숙인 막달레나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면 눈물 한 방울이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막달레나의 얼굴에 흐르고 있는 이 눈물 한 방울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마저도 숙연하게 느껴진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09~1610년


카라바조의 생애와 미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찻잔 속의 태풍’이다. 카라바조는 평범한 기교의 예술에 의한 마니에리즘(Mannerism)이 지배하던 시대에 태어나 독특하고 파격적인 주제와 표현법으로 세상을 뒤흔들 젊은 천재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범죄 이력과 도주 생활은 활짝 펴야만했던 예술적 능력의 꽃을 시들게 만들었다. 카라바조의 예술이 세상에 가져다 준 파급 효과는 한 순간일 뿐이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점점 소멸되어가는 태풍처럼 카라바조는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다. 아마 반 고흐를 제외하면 이처럼 파격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짧은 삶을 살았던 예술가도 드물 것이다. 이제는 르네상스 거장 중의 한 사람인 미켈란젤로에 맞먹을 정도로 평가를 받고 있는 카라바조 출신의 미켈란젤로('카라바조‘라는 성은 화가가 태어난 지명으로부터 유래됨)를 고풍스러운 미적 취향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림 장면의 절반을 지배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흑(黑)의 영역이 많이 차지하고 있는 명암법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줄까? 그리고 과거의 불미스러운 이력만 가지고 장점을 무시하고 심지어 끝까지 냉담한 선입견을 거두지 않는 우리 사회 속에서 과연 전과자의 그림들이 그러한 선입견 없이 예술적 평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자신의 목을 참수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 자화상으로 그렸던 카라바조의 파격적인 예술을 아직 우리 사회는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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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2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바조를 다시 보게 돼서 정리가 돼요. 예전에는 마로니에 북스에서 나오는 화가 일대기 종종 읽었는데 요즘은 통-_-;; 저도 현대미술에 관심 좀 가져야 될 듯 싶어요. 아는 사람이 앤디 워홀 뿐이라니 orz

카라바조 페이퍼에 앤디 워홀 얘기하는 쓸데없는 댓글..

cyrus 2012-08-31 22:32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부터 마로니에북스 시리즈 완독 도전해보려고요. 분량도 많지도 않고 시리즈 중에 제가
관심 있는 화가들이 꽤 있어서 이번 기회에 화가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내일 모레부터 2학기 시작이라는 게 함정이네요.. ㅋㅋㅋ ㅠㅠ
다음 마로니에북스 시리즈는 앤디 워홀을 읽어보겠습니다요 ^^
 
자화상전 - 거장들의 자화상으로 미술사를 산책하다
천빈 지음, 정유희 옮김 / 어바웃어북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거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만약 거울이 없으면 맑은 물에라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야 말 것이다.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그때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의 관찰과 평가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람은 이 같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도 비추어 본다. 정확한 자기 확인과 자기 점검, 자기 준비와 자기 개선을 위해서다.

 

시인 윤동주는 달이 비치고 구름이 흐르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의 얼굴을 비추어준 거울은 어느 외딴 우물이었다. 우물 속에 비추어 들여다본 자신의 모습은 피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내면의 실체였다.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눈은 시력을 투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을 '수단'으로 빌리되 심안(心眼)을 동원해야 내면의 실체에 대한 투시가 가능할 것이다. 윤동주는 바로 그 같은 마음의 눈으로 두 번씩이나 돌아섰다 생각을 바꾸어 되풀이 자신을 성찰하고 점검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본래 그대로의 자신의 정확한 실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윤동주처럼 그렇게까지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거울'을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거울'은 그저 우리의 모습 원형을 그대로 비춰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일명 '셀카'라고 알려진 '셀프 카메라'(Self-camera)가 그것이다. 셀카는 단지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사진에 담는다. 연예인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부각시켜주기 위해서는 셀카를 많이 찍곤 하는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자신의 외모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 좋은 셀카를 찍을 수 있는 촬영 각도 등 셀카 찍는 방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본인 스스로 사진기술을 통해서 그대로 본떠서 재현한다는 것. 어찌 보면 화가들이 직접 자화상을 그리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셀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누구라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자화상인 셈이다. 이름만 들어도 잘 아는 유명한 화가들 중에서는 자화상 단 한 점을 남기지 않은 이가 드물다.  적어도 두 점 정도를 그린 화가에서부터 평생 죽을 때까지 수십 점이 넘을 정도로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캔버스에 담긴 다작 화가도 있다. 화가들이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자기 PR'의 용도인 동시에 은연중에 자신이 '화가'라는 예술적 기질이 내포되어 있는 자의식을 과시하기 위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도판 p 16) 

 

 

 

'자화상'을 예술에서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근원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자화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뒤러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 수 있었던 업적이 바로 자화상이다. 뒤러는 자화상을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진 복제품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자신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떳떳하게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뒤러가 활동하던 당시의 유럽 르네상스 시절에는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반해 독일에서는 '화가'는 그저 그림을 그리는 기능인 '화공'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피우기 전, 중세 시절에 활동한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석공이나 구두 수선공과 비슷했다. 그만큼 사회적 신분이 낮은 직업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그림이란 예술적 표현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림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삼는 정도에 불과했다. 중세의 화공들이 제작한 그림들 중에는 제작자의 서명이 없는 것이 많은데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화공'이라는 직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제약을 먼저 뛰어넘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뒤러였다. 뒤러는 젋은 시절 화가들이 주로 모여서 활동했던 공방 생활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 때만해도 여전히 화공은 사회적으로 그리 높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뒤러는 뛰어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이제 막 명예를 얻기 시작할 무렵인 29세 때 그려진『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에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도록 묘사되어 있다. 뒤러는 자신의 모습을 예수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스물아홉 살의 나를 네가 지닌 색깔 그대로 그렸다"라고 적힌 글귀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뒤러가 예수의 이미지를 차용한 의도는 자신을 예술적 창조자로서 타고난 자신의 재능의 원천을 신의 능력과 대등하다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뒤러는 자신의 실력이 신에 의해 부여되었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신과 대등한 존재로서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서 스스로 격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화상』 연대 미상

 

 

 

하지만 모든 화가들이 뒤러처럼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의 상징으로 자화상을 제작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에 비해 자화상만큼은 많이 남기지 않은 화가들도 있다. 그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르네상스가 낳은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자화상은 딱 두 점뿐이다. 두 점 다 소묘로 그려졌으며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년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유명 화가들 사이에서는 종종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듯이 조그맣게 본인의 얼굴을 그려넣는 방식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다 빈치 역시 몇 몇 작품에 자신의 젋은 시절의 모습을 그려넣었을 뿐 실질적으로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았다. 예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던 르네상스의 천재라면 자신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에 멋지게 채색된 자화상 한 두 점 정도 남겼을 법하다. 그런데 왜 다 빈치는 습작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달랑 소묘 자화상 두 점만 남겼을까?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다 빈치가 자화상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완벽함을 추구하는 천재의 전형적인 특성에서 찾고 있다.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했던 다 빈치는 자신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불완전함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 빈치는 자화상의 특성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화상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모든 것을 외부에 완전히 관객들 앞에서 드러내야하는 일종의 '자기고백'으로 인식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스물 네 살의 자화상』 1804년  (도판 p 164)

 

 

 

인간은 언젠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불완전함 또는 단점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게 되고 그것을 숨기려고 한다. 각각 개인의 특성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이 타의에 의해서 외부적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때로는 심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일반 사람들에 비해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들에게는 내면의 약점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심하게 다투고 난 뒤에 왼쪽 귀를 잘랐던 것도 단지 고흐의 특이한 성격 탓만으로 볼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위의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앵그르가 24살 때 그린 자화상이다. 그냥 봐도 한창 왕성하게 화가로 활동하던 젋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보통 자화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자화상 속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숨겨져 있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24살의 자화상은 앵그르가 일흔이 된 나이에 다시 개작한 것이다. 24살 때 제작하여 이미 완성된 그림에 일흔 살의 앵그르는 다시 손을 본 것이다. 자신의 완성된 그림이 화가 본인이 마음에 안 드면 다시 손질하여 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개작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나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고 생전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일흔 살의 앵그르가 그 많고 많은 자신의 작품들 중에 하필 젊은 시절의 자화상을 개작한 것일까?

 

사실 이 자화상 한 점으로 인해 앵그르는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24살의 자화상이 그려지기 전에 앵그르는 이미 비평가들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엘리트 예술가였다. 이미 젊은 나이에 벌써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청년 앵그르는 전작보다 더 뛰어난 작품들을 그리고 싶어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적 능력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그러한 자부심 속에서 만들어 진 그림이 바로 이 문제의 자화상이다. 신예 화가 앵그르는 자화상을 살롱전에 당당하게 출품했다. 그 당시 살롱전이라면 비평가와 대중들로부터 널리 인정받은 화가들의 그림만이 출품이 가능했던 그림 전시회다. 앵그르는 초상화 제작에 대한 재능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화상도 크게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앵그르는 그전에 자신을 칭찬했던 수많은 비평가들로부터 혹평만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살롱전에서도 입상하지 못하게 되는 불명예스러운 결과를 받아들여야했다. 그 후로 앵그르는 생전에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8살에 되어서야 그는 무려 54년 전에 제작했던 자화상을 다시 그렸다. 어느 누구도 흠 잡을 데 없을 정도로 위대한 화가로 자리잡게 된 앵그르는 애써 과거의 상처를 잊기 위해서였을까?  그가 왜 자화상을 개작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성공의 꼭대기에 서 있는 앵그르가 실패한 자화상을 다시 손을 보게 됨으로써 젊은 시절에 겪었던 예술가로서의 흠을 한층 성숙되고 완벽한 예술적 명성이 묻어 나 있는 붓으로 직접 손질함으로써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했을 것이다. 앵그르는 자화상을 개작하는 것만으로 자기 위안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스물 세 살의 자화상』 1821년   (도판 p 174)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만을 똑같이 찍어내는 사진과 다르다. 렘브렌트, 반 고흐, 고갱 등 위대한 화가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점검하며 성찰하기 위해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유독 수 십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되돌아보면서 보다 나은 내면의 성숙을 이루어내기 위해 그리는 것이다. 렘브렌트는 매년 자화상을 그렸다. 그 역시 젊은 앵그르와 마찬가지로 명망 있는 화가로 출세하여 젋은 시절부터 부와 명예를 누리기 시작할 때 화려한 복장을 입은 자화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제 없는 탐욕으로 인해 그동안 화가로 활동하면서 얻은 수많은 재산을 탕진했고 부인의 죽음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한순간에 명성이 추락하게 되어 별 볼일 없는 가난한 늙다리 화가가 되었을 때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노년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다.  일그러진 자기 내면이 드러난 자화상, 늙어 쭈글쭈글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고통일 수 있지만 렘브란트에게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려 놓고 들여다보는 것은 그 고통을 감내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그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약점이 있고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물이라고 할 수 없다. 인생의 부귀영화는 죽을 때까지 오랫동안 누린다는 것은 쉽지 않으며 젋음의 상징인 검은 피부와 탱탱한 피부는 나세월의 변화 앞에서는 주름 가득한 피부와 흰 머리로 변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기나긴 인생을 종지부를 찍는 죽음 앞에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절대적인 숙명이다. 화가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인간의 불완전한 존재에 대해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이미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남들에 비해 그러한 약점 앞에서 무척 괴로워했다. 스물 세 살의 들라크루아는 이미 인간의 숙명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자화상 속의 모습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앞에서 크게 갈등을 했던 덴마크의 왕자 햄릿으로 형상화시켰다.

 

거울은 자칫 보기에 따라 자신의 모습에 반해 터무니없는 자아도취나 혹여 반대로 자기 환멸이나 절망에 사람을 빠뜨리게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나르시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 속에 숨겨진 모든 것까지 캔버스에 담고자했던 자화상 제작, 즉 이러한 화가들의 내면적 체험은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문 앞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에 걸맞게 실행하는 값진 노력이다. 그러하기에 고된 인생의 과정 속에서 내적 성찰의 노력이 만들어 낸 위대한 산물인 예술가들의 자화상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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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7-30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화상 이야기 흥미롭네요. 유일하게 자신의 모습을 남길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요?...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자가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분명 어긋나는 지점들이 있었을 법한데...그 부분을, 그 틈을 그림으로 설명하려고 했을까요?,,,특히 자의식이 강한 화가들은 더 그랬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사이러스님 글 읽으면서 글로 자화상을 묘사해본다면? 엉뚱한 생각도 함께 하게 되네요..
온통 미화와 왜곡으로 얼룩진 자화상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쪽팔려서 솔직하게 그려낼 수 있을지..ㅋㅋ

cyrus 2012-08-01 20: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맞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알라딘 블로그에 제 사적인 생활에 대한 글을 잘 안 쓰는 편이에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면 몰라도요 ^^:;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유명 화가의 자화상을 꽤 많이 소개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이야기가 빠진거요. 칼로의 자화상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유명한데 말이죠.
 
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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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나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생각한다.

 

 

-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블릭『르네 마그리트』시공아트, pp 11 -

 

 

 

 

 

 

 

 내가 좋아하는 마그리트의 그림들

 

 

 

 

 

 

르네 마그리트  「모험 정신」 1960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특별한 화가를 꼽으라면 르네 마그리트다. 블로그 메인사진이 마그리트의 그림이다. 그의 그림들은 아름답지도 않다. 그런데 블로그 메인사진으로 올릴 정도로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그림은 '어렵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 「교장」 1955년

 

 

 

처음 알라딘 블로그 시작할 때 메인사진이 마그리트의「교장」이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라고 하면 여러가지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중산모를 쓴 남자의 뒷모습이다. 마그리트는 중산모를 쓴 남자의 뒷모습을 주제로 여러가지 작품들은 남겼는데「교장」과 「모험 정신」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림 속 중산모를 쓴 남자는 뒤돌아선 상태이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자신의 시선이 향하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황무지다. 그의 머리 위에는 하현달이 떠올려져 있다.

 

이 그림을 블로그 메인사진을 올리게 된 이유는 특별히 마그리트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블로그라는 것을 처음으로 시작한 때가 2010년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닉네임 설정 못지 않게 블로그 메인사진을 어떤 것을 쓸까 나름 고민을 많이 했었다. 결국 선택한 것이 마그리트의 그림이었는데 특별히 그의 그림을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그리트의 '중산모 사나이'가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과 부합된다고 생각해서 정했다. 온라인 공간은 하루에 수십명 또는 많게는 수백명 사람들과 동시에 접속, 교류할 수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과는 다르게 서로 얼굴을 모른 채 만난다. 세이클럽, 트위터, 페이스북 등 멀리 떨어져 있어도 수많은 사람들과 손쉽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의 수단이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사람들마다 추구하는 성향이 각기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실명, 거주지 등 자신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 과정(?) 도출 끝에 마그리트의 그림을 메인사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만해도 나는 마그리트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그리트가 어떠한 의도로 저런 그림을 그렸으며 심지어 블로그 메인사진에 있는 그림의 제목조차 모르고 있었다. 알라딘 서재이웃의 덕분에 그림의 제목을 알게 되었지만 왜 뒤돌아 선 중절모 사나이가 그려진 그림의 제목이 왜 하필 '교장' 이며 또는 '모험 정신'이라고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현재 블로그 메인사진을 「모험 정신」으로 변경, 설정한 이유는 단지 '모험 정신'이라는 제목에 혹해서 분위기 전환할 겸 바꾼 것이다. 메인사진을 변경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유지하면 지루하기 쉽상이다. 기분에 따라 가끔씩 바꿔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메인 사진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9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에 대해서 너무 무기했기에 최근에 마그리트의 미술세계를 알 수 있는 수지 개블릭의『르네 마그리트』를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물론 마그리트의 미술을 이해하고 싶은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마그리트의 또 다른 그림「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대해서 분석한 미셸 푸코『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때문이다. 이 책이 작년에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그리고는 읽지 않았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표현이 적절하다. 마그리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의 어리석은 행동이 푸코의 이 얇은 책을 가볍게 본 것이다.

 

사실 수지 개블릭의 책도 쉽지가 않다. 이 책은 마그리트의 미술 세계를 그가 표현했던 특정한 오브제들을 주제별로 분류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내가 제일 어려워한 내용이 바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장(제8장 '단어의 사용')이었다. 사실 그의 그림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붓을 쥐고 있는 '화가'이면서도 동시에 생각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은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뛰어난 상상이나 환상 등 인간의 무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상상력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기발한 발상, 관습적 사고의 거부,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시적인 조형성 등 고정관념을 깨는 소재와 구조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이런 개성 강한 화풍이 오히려 마그리트의 미술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작용이 되기도 한다. 혹자들은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자'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데 맞는 사실이다. 당대 초현실주의자들이 마그리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100% 초현실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다. '초현실주의'에 마그리트의 미술을 포함할 수 있지만 반대로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에 포함할 수 없는, 참으로 기묘한 관계다.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초창기 시절동안 마그리트는 그 당시 앙드레 브로통을 중심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었던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를 맺은 적이 있다. 그러나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자들 간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그리트가 추구하는 미적 경향과 달랐으며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을 이끌고 있었던 앙드레 브로통과의 불화는 그가 초현실주의와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자들.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즉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비합리적인 세계를 지향하여 '보여주기'와 '정형화된 아름다움' 등과 같은 기존의 미적 가치에 대한 반발심은 같았지만 그것을 토대로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이 달랐을 뿐이었다.  

 

 

 

 

 

 

 

르네 마그리트 「헤겔의 휴일」 1958년

 

 

 

초현실주의가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보다 비중을 두었던 것에 비해 마그리트의 작품은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면서도 철저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근거를 가진다. 실제로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화가라는 이름 대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단지 '보여주기' 식의 이미지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철학자처럼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마그리트의 작품은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림, 상식을 뒤엎는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며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철학적인 그림인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

 

 

 

 

 

르네 마그리트 「사나워질 듯한 날씨」 1928년

 

 

 

마그리트는 사과, 토르소, 튜바, 담배 파이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모순되거나 대립하는 요소들을 같은 화폭에 결합하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환경에 위치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이러한 기법을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고 한다.

 

여성의 토르소는 그걸 제작한 조각가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용도가 있고, 튜바는 소리를 내기 위한 용도의 악기다. 그리고 의자는 우리가 앉기 위한 도구다. 우리가 보고,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물들에게는 고유의 용도가 있으며 그러한 용도에 의해 우리는 그 사물에게 정형화된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는 우리가 부여한 사물의 용도 및 의미는 불필요하다.  마그리트는 그러한 익숙한 감각에서 결별할 것은 주장하며 자신의 생각을 '철학 논문'으로 쓰는 대신에 그림으로 표현했다. 마그리트에게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물의 의미들은 고정관념 또는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1959년

 

 

 

하나하나의 사물은 극히 보통의 물체라도, 그것들이 일상적인 위치를 떠나서 만났을 때 사람들에게는 낯설면서도 강렬한 충동을 느낄 수 있다. 「피레네의 성」은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현상이다. 하늘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중력의 작용을 거스를 수 없다. 커다란 돌덩어리는 바다로 추락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그리트는 중력의 작용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하늘의 돌덩어리가 바다 아래로 추락하지 않는 거지?  원래 중력에 의해서 떨어져야하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림이 어딨어?' 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과학자 또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입견이 강한 사림일 것이다. '중력의 원칙'을 모르면 학창 시절에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마그리트의 그림을 볼 땐 중력의 원칙을 몰라도 된다. 오히려 이 그림을 보면서 낯설었다거나 신기하게 느껴졌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했다고 보면 된다. 그것이 마그리트가 진정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원하는 '그림을 보는 방식'이다.

 

마그리트는 '생각하는 자'답게 익숙한 대상의 의미를 배제시키면서도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을 창조하여 낯설음과 혼란의 미학을 만들고자 했다.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는 '고립’, 독수리를 돌의 재질과 같이 변형시키는 식으로 사물이 가진 성질 가운데 하나를 바꾸는 '변경', 성채와 나무 밑동을 결합하는 식의 '사물의 잡종화', 작은 사물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하는 식의 '크기의 변화',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두 사물을 나란히 붙여놓는 '이상한 만남',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이미지의 중첩',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 안에 존재하는 '패러독스' 등의 방법으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마그리트를 좋아하세요

 


 

 

 

 

 

자신이 제작한 「야만인」옆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그리트 (1938년에 촬영,

 

수지 개블릭『르네 마그리트』시공아트, pp 56) 

 

  

 

현대미술 특히 '초현실주의'라고 하면 그림들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맞다. 어려운 건 사실이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형체들이 난무하는 그림들을 보면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머릿속이 궁금하게 된다. 마그리트 역시 그렇다. 『르네 마그리트』를 쓴 저자 수지 개블릭은 마그리트가 생전에 살아있을 당시 8개월동안 함께 지냈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마그리트의 미술 세계를 상세하면서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 한 권만 가지고 마그리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마그리트의 미술은 익숙한 사고방식을 배제해야하며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요구한다. 특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해석은 철학 배경 지식 없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우며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이 유독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고 분석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어렵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 것. 우리는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면 그 그림 속에 그려진 대상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를 알게 된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그림은 예외다. 중산모를 쓴 남자의 그림이 왜 하필 제목이「교장」인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바위의 성이 도대체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마라. 마그리트는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 생각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러한 요구에 대해 머리 아프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회피하면 된다. 그것은 선택의 몫이다.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생각해야 하는 감상법은 철학자들에게 맡겨두자. 그 대신에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낯설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년

 

 

 

 

 

 

우리가 믿어 왔던 상식이나 철학 등을 뒤흔들어 놓는 일대 변혁을 가져다준 '마그리트 미학'을 최근 기업들이 창의력 개발에 이용하려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또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디자인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마그리트의 그림은 한 번 보고 나서도 머릿속에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화가들 대부분은 일반 사람들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며 문제가 있을 정도로 성격적 결함이 있기 마련이다. 마그리트도 그러한 예술가적 천운을 피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은 마그리트 평생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다. 그러한 불행의 원인은 그를 우울증에 고통스러워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통해서 그러한 마음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했다.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가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뜻이 마그리트는 그림을 그리되 거기에 철학을 덧붙였다.

 

그는 여느 화가들과 다르게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렸으며 자신의 예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튀는' 행동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한 마그리트의 익명성 덕분에 중산모를 쓴 남자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르네 마그리트 「심금」 1960년

 

 

 

그러나 마그리트는 쇼펜하우어처럼 비관주의자이요 고독을 심취한 외톨이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장난끼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잘못 이해했더라도 너그러이, 쿨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자신의 그림을 해석했다는 사람들에게는 마그리트는 항상 '당신이 저보다 더 운이 좋으십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겸손한 척 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해석하려는 선입견으로만 바라보는 자들을 은근히 조롱하는 마그리트다운 유머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유쾌한 수수께끼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공존이 불가능한 두 영역의 병치적 발상은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심금」속 유리잔 위에 담겨진 흰 구름 같이 의외로 신선하면서도 평화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마그리트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은 유쾌한 장난이면서도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이다. 그래서 그의 어려운 그림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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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피레네의 성>을 좋아한답니다. 거대한 돌섬이 떠있는 광경은,
이상하게 가슴을 뛰게 하거든요... 아마 제 동경이겠지요.

오랜만에 시루스님의 메인 타이틀 그림을 다시 보는군요. 첨에 봤을 때
저 매끈한 뒷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달도. 저는 초생달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제게 <교장>이라는 그림의 제목을 붙이라 한다면, 초월이라 붙이겠어요!

저는 온라인 세상, 오프라인 세상을 선긋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인연이 된다면 충분히 온라인 세상의 사람들도 오프라인에서 교류하고 지낼 생각이 있답니다. 또한 온라인 세상의 사람에 대해 환상을 품는 경향이 상당한데, 그것은 깨버려야할 과업이라는 생각도 있구요... ㅋㅋ

cyrus 2012-02-27 20:32   좋아요 0 | URL
저도 제일 좋아해요. 사실 글에서 소개한 그림 말고도 정말 좋은 그림
많아요. 진짜 그의 그림이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아서,, 그래서
좋아할 수 밖에 없는거 같아요.

ㅎㅎ 초월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리는데요. 단순히 달이라는 의미도 있고
나의 존재에 대해서 초월하겠다는(?) 의미도 있는건가요? ^^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을 구분하지 않는 마고님의 생각이
마그리트의 생각가 유사한데요, 마그리트도 틀에 박힌 이분법적 사고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

차트랑 2012-02-27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들어서기만 하면 정신을 못차리게하는 마그리트...
초현실은 거의 독화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ㅠ.ㅠ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를 읽고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면에 철학을 깔아 놓고는
그 구멍으로 기어들어오거나 말거나...
뭐 그런 도발 정신의 화신 ㅠ.ㅠ
그러나 사고의 틀을 완전하게 벗어나게 하는 자유로움을
그야말로 선물하는 사람 마그리트...
전 여전히 머리가 아프죠 ㅠ.ㅠ
그러나 글에 추천을 하지 않을 수는 없군요^^

cyrus 2012-02-27 20:34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덕분에 마그리트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도 여러 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읽은 마그리트 개론서만 해도 두 세번 정도 읽었을
정도니까요. ^^;;

꽃도둑 2012-02-2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일할 때 아예 책을 사버렸잖아요...
기억나세요? 아바타에 대해 물었더니 마그리트 그림이라고 해서...
검색을 하다보니 아,,특이한 거예요. 마침 얼마 있다가 세일을 하길래 그림책을 사버렸잖아요..암요, 좋아합니다...^^

cyrus 2012-02-27 20:34   좋아요 0 | URL
혹시 세일할 때 산 책이 마그리트 그림들 모아놓은 책 맞죠?
저도 구입했어요, 세일하고 있었을때요 ^^

꼬마요정 2012-02-2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판다님이 마그리트 그림이랑 사진이랑 자주 올려주셨어요.
그 때 보면서 친숙해졌는데... 오늘 여기서 마그리트를 만나네요~^^
옛날 생각나요...

cyrus 2012-02-27 20:36   좋아요 0 | URL
제 글이 요정님에게 알라딘의 추억을 불러일으켜줬네요.
기회가 된다면 마그리트 그림에 소개하는 글을 써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