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 500년 미술사와 미술 시장의 은밀한 뒷이야기
피에르 코르네트 드 생 시르 외 지음, 김주경 옮김 / 시공아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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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 얼마에요?"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1887년

 

 

두 달 전에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하는 반 고흐의 그림 전시회를 둘러보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도슨트가 반 고흐의 초상화 <탕기 영감>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신을 빙 둘러싼 채 그림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들을 향해 이런 질문을 했다. "여러분, 현재 이 그림의 가격이 얼마인지 아세요?" 그러자, 관람객 중 한 사람이 질문에 대한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대답을 했다. "1억이요!" 도슨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1억 조금 넘습니다. 정확한 가격을 아시는 분 없나요?" 전시회는 갑자기 경매장처럼 변했다. 관람객 한 명 한 명씩 아무 가격을 불러댄다. 2억, 3억 심지어 가장 큰 액수인 5억도 나온다. 고흐의 그림 가격을 정확하게 맞춘 관람객은 없었다. 도슨트는 "고흐의 <탕기 영감>은 아직 경매에 나오지 않아서 정확한 가격을 책정할 수는 없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략 10억 정도를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림 좋다. 이 그림 돈 좀 되겠지?"

 

 

그림 전시회에 가면 그림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관람객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이 돈 되는지 보는 유형이다. 가끔 그림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도슨트에게 질문을 한다. "이 그림, 얼마에요?" 엉뚱하거나 잘못된 질의는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 미술 시장이 확대되고, 미술품 경매 회사들이 늘어나면서 일반인들도 전시회 속에서만 보던 미술품을 쉽게 접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미술품은 곧 돈'이라는 공식이 성립해 버렸다. 신문지상에서도 ‘OOO 작가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XX그룹 또는 사업가 XXX가 몇억 원을 지원했다.’라는 기사보다는 ‘45억 원의 박수근 작품이 비자금으로 세탁되어…. 유명 작가 작품을 이중 담보로 수십억 원 불법 대출’ 등의 기사들이 눈에 띈다. 예술이 속물로 전락하고 있다.

 

 

 

 값비싼 그림, 돈만 있으면 만사 OK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장 멋진 그림일수록 그림의 가격은 비싸다고. 여기서 말하는 '가장 멋진 그림'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뛰어난 묘사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품을 말한다. 쉽게 예를 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불가사의한 미소로 수많은 세계의 관람객을 얼어붙게 만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의 가격은 어마어마한 액수라고 한번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술 시장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잘 그렸고,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유명한 화가의 그림만 값비싼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오랜 무관심과 창고의 먼지 속에 파묻힌 무명 화가의 그림 한 점이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경우가 있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지 간에 말이다. 그림 한 점을 런던 소더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값비싼 가격의 옷을 입히는 건 간단하다. 그림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 그림의 예술적 가치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부호들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도 가능하다. 돈으로 돈 되는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찰스 윌슨 필  『프린스턴 전쟁 직후의 조지 워싱턴』 1779년

 

 

미국 화가 찰스 윌슨 필(1741~1827)이 그린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전신 초상화는 미국인 초상화로는 세계 최고가를 기록했다. 2129만 6천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는 무려 241억 원이 넘는 액수다.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 이 초상화가 애초 예상가 1000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 비싼 값에 낙찰되었다. 필은 이와 비슷한 작품을 7점이나 더 그렸으며 이외에도 여러 점의 복사본도 제작되었는데 신생 독립국으로서의 미국과 나라를 이끌어가게 될 신흥 정치가로서의 조지 워싱턴을 유럽에 알리는 데 큰 일조를 했다. 이 그림은 총 8점의 워싱턴 초상화 중에서 유일하게 익명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미국인은 나라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미국 독립의 핵심이자 미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지 워싱턴이 승리의 기쁨에 만취한 채 여유롭게 서 있는 포즈를 보라. 영국을 완파하고 미국 독립의 선포를 상징하고 있는 이 그림을 미국인, 특히 돈 있는 미국의 부호들이 눈독 안 들일 리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의사 가셰의 초상』 1890년

 

 

반 고흐의 그림은 화가 생전에 달랑 한 점만 팔렸을 뿐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가 화가 사후에 가장 값비싼 가격으로 책정된 유형이다. 고흐의 작품성이 후대에 와서야 빛을 보게 되어 가장 비싼 그림으로 된 것도 있지만, 소유와 경매의 과정에서 '돈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고흐의 또 다른 초상화인 <의사 가셰>가 그랬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출신의 평범한 의사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은 백 년 동안 12명의 주인을 만나야 했다. 돈으로 사고파는 과정을 통해서 <의사 가셰의 초상>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자살하기 수주일 전 그렸다. 가셰 박사는 고흐의 정신 치료를 맡았던 신경과 전문의였다. 환자였던 고흐는 의사인 가셰에게 자신과 닮은 병적인 징후를 보았고 가셰의 얼굴을 자화상 그리듯 그려냈다. 그림은 고흐의 누이동생 요한나가 소유하고 있다가 300프랑의 가격으로 그림 수집가에게 판매하면서부터 거래의 여정(?)은 시작된다.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독일, 영국 그리고 다시 독일. 이때 그림은 '퇴폐 그림'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겪게 된다. 히틀러의 수하였던 헤르만 괴링은 박물관으로부터 초상화를 압류, 외국에 판매함으로써 전쟁비용을 충당하고자 했다. 다행히도 그림은 독일 출신 은행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유대인 금융업자에게 또 다시 팔게 되면서 주인의 얼굴이 자주 바뀌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금융업자는 그림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팔게 됨으로써 가셰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술관에 전시된 지 30년이 지난 1990년에 가셰의 얼굴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주인은 일본 제지회사의 회장인 료헤이 사이토. 가격은 8250만 달러(한화 93억 2만 9천백만 원). 15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이토는 뇌물 공여 혐의로 재판을 받고 3년 후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유언으로 자신이 수집한 그림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수집한 그림들' 중에 가셰의 얼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이토의 유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유자가 고인이 된 상태에 지금 가셰의 얼굴은 누가 소유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이 그림의 소유자가 누군지 모른 상태이다. 과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못지않게 고흐의 그림 또한 부호의 지갑을 열게 할 정도로 투기가 심했다.

 

 

 

 

파블로 피카소  『파이프를 든 소년』 1905년

 

 

고흐와 더불어 가장 비싼 그림의 화가는 바로 파블로 피카소(1881~1973)다. 단순히 파이프를 들고 있는 파란 옷의 소년을 그린 이 그림 한 점은 피카소의 작품 활동 초창기 시절인 청색 시대 때 제작되었다. 이 그림 역시 억만장자가 구입해서 소유하고 있다가 2004년에 경매에 내놓았는데 앞에 소개한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화>의 가격을 경신하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동시에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넘은 기록 또한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어마어마한 고가의 액수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세계적인 재벌 화상인 래리 가고시언을 이긴 익명의 구매자가 현재 이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래리 가고시언이라면 지금도 세계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화상이다. 그의 재력을 제치고 이 그림을 구입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루시안 프로이트  『잠자고 있는 사회복지 감독관』 1995년

 

 

 

 

프랜시스 베이컨  『삼면화』 1976년

 

 

소파에 누워 잠을 자는 뚱뚱한 사회 감독관의 누드를 적나라하게 그린 그림,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세 가지 형체가 그려진 그림.이 두 가지 그림을 처음 본 사람 대다수는 그림의 가격과 두 점의 그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면 놀랄 것이다. 2005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 현재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축구 리그인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첼시 FC 구단주인 러시아의 '큰 손' 로만 아브라모비치다.

 

외국 축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첼시 구단주 로만의 명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로만은 유독 축구를 가장 좋아하는 부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첼시 FC가 프리미어 리그 우승은 물론이고 세계 클럽 대항전에서도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1년 안에 감독을 여러 번 교체할 정도로 구단주로서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인내심 없는 그의 칼 같은 감독 해고 러쉬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팬이 있을 정도이다. 로만은 루치아 프로이트의 <잠자고 있는 사회복지 감독관>을 우리나라 돈으로 약 38억 원의 가격으로 구입했고 바로 이튿날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삼면화>를 무려 약 980억 원에 구입했다.

 

사족으로 로만의 현대미술 관심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의 모델 출신 애인 또한 현대미술 컬렉터다. 최근에는 로만이 '러시아 현대미술의 기수' 일리아 키바코프의 회화 39점과 설치미술 19점, 드로잉 100여점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림의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사지 않는 미술 거래  

 

사실 세상에 돈 되는 화가와 그림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아니 지금은 유명하고 비싼 가격으로 그림이 거래되어도 몇 년 지나면 유명세나 작품 값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화가에 대한 꾸준한 지원과 투자는 하지 않고 화가가 유명해 지고 작품 값이 올라가기만 바라는 마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품 한 점 사면서 몇 년간 그 작가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방식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선호하는 화풍의 취향이 하나의 유행처럼 많은 변화가 있듯이 미술 시장 거래의 추세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미술품을 자주 보다 보면 귀가 열리고, 많이 듣다 보면 눈이 트인다. 작품에 대해서 많이 알려고 하면 미술품 혹은 작가의 과거 이력과 미래 전망이 고스란히 나만의 생각, 나만의 그림 보는 법으로 정리된다. 이런 자세야말로 진정한 '미술 애호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요즘 '미술 애호가'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다. 미술 애호가라고 자처하는 모든 컬렉터들이 미술 지식에 무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그림을 남들에게 '보여 주기'식 명품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자신이 큰 돈 들여 구입한 그림을 자신의 자택 한쪽 벽에 걸어둔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림의 가치를 알려주기보다는 자신의 재력을 마음껏 자랑할 것이다. '나, 이 그림 1억 원으로 사들인 거야. 어때? 1억 원 그림 한 점 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잘먹고 잘살고 있어'

 

19세기 말,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했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1867~1939)는 타고난 심미안을 가지고 시대를 앞서 간 화가들의 재능과 가치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안목 덕분에 르누아르, 폴 세잔, 앙리 마티스 그리고 피카소 등의 화가들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유럽미술을 키워냈다는 후대의 평가는 과언이 아니다. 요즘처럼 돈만 중요시하게 여기는 세상에 볼라르와 같은 '미술 애호가'는 다시 나올 수 없을까? 요즘 미술 시장을 보면 씁쓸한 속물근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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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3-1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미술 작품도 재테크의 시장이 되기 때문이겠죠.많은 분들이 그림을 그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것 같더군요.

cyrus 2013-03-16 23:26   좋아요 0 | URL
그림에 어느 정도 지식과 식견이 있는 상태에 미술 작품을 구입하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주식투자차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돈 벌기 위해서 그림을 구입하는 건 좀 씁쓸하네요.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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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그런게 아니겠니
원하는 데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것


 

- 여행스케치 '산다는 건 그렇게 아니겠니' 중에서 -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1995년에 미래학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는 '디지털화하지 않으면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디지털 혁명의 부정적 측면은 디지털 세상이 갖는 강력한 특징 때문에 부각되지 못할 것이라며 디지털 낙관론을 펼쳤다. 아날로그가 모든 영역에서 디지털화하는 세상을 지켜보면서 그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느낀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스콧 피츠제럴드가 활약하던 1920년대를 '황금시대'를 동경한다. 길이 꿈꾸는 1920년대를 사는 아드리아나는 고갱과 드가가 살았던 1890년대를 '황금시대'로 꼽는다. 고갱과 드가는 한술 더 떠 르네상스 시대를 '황금시대'로 부르며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상상력이 죽은 시대'라고 한탄한다. 저마다 동경하는 '황금시대'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다. 모든 '황금시대'는 과거를 조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에 등장하는 세스는 과거의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는 직업 만화가이면서도 과거에 발행되었던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는 만화를 수집하는 외골수다. 그는 우연히 잡지 '뉴요커'에 실린 '캘로'라는 필명이 그린 만화를 알게 된다. 세스는 만화가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 어렸을 때 살았던 스트라스로이로 향하게 된다. 시간이 멈춘듯한 스트라스로이에서 세스는 잊고 있었던 과거 일상의 흔적을 발견한다.

 

 

 

 

 

 

하지만 만화 속 주인공의 성격에 대해서 독자들마다 호불호가 엇갈릴 것이다. 과거가 현재보다 낫고 현재는 좋았던 과거를 파괴하고 있는 슬픈 현실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비관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황금시대'를 추억하는 심리를 한 꺼풀 벗겨보면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나쁜 일은 빨리 잊고 좋은 기억만을 남기려는 경향이 강하면 '무드셀라 증후군'에 빠질 수도 있다.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복고 열풍을 빠진 현대인이나 만화 속 세스의 모습은 각박하고 치열한 현실에 기댈 곳 없는 상황과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오는 불안감의 표상이다. 불안정성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황금시대'에 열광하는 모양새다.

 

그래도 조금은 슬프다. 우리의 감성과 정서는 여전히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데 주변은 모두 디지털로 전환되고 있는 것 같아서다. 과거의 즐거웠던 일상을 담은 추억의 스냅사진은 언젠가 희미해질 기록이지만 추억은 더 진하게 남지 않겠는가.

 

약간의 소음이 음악의 일부인양 느껴지는 LP판과 소통이 있었던 아날로그 TV가 더 정겹고, 문자나 카톡보다는 학창시절 연애편지처럼 기다림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던 편지의 애절함도 그립다. 그렇다고 아날로그 생활만을 고집하며 살 수는 없다.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 감성을 불어넣어,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디지털 세상에서 행복과 동행할 수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 되지 않을까.

 

 

 

 

 

 

세스의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인생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당신의 인생이면서 또 나의 인생이기도 한 이야기. 어쩌면 무심하고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빛나는 이야기들. 아주 미국적인 것도 같지만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사들이 들어 있다.

 

인생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인생은 정해진 순서대로 예측가능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정해져있고, 예측가능한 대로만 된다면, 인생 살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필연적으로 불안감을 만들어 내고, 이 불안감은 때로는 현재를 괴롭힌다. 인간은 늘 불안감을 갖고 살아왔고, 이러한 뿌리 깊은 불안감으로 인해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을 찾고자 애써왔다.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을 찾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과거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확실성을 찾지 못하면 현실의 삶이 고달프면 과거를 동경하는 게 사람의 심리인 것 같다. '그래도 그 때가 좋았지'라는 과거 지향형의 향수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담긴다. 옛 향수를 안주 삼아 일상의 지친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자 하는 데는 현실이 고단하기 때문일 게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부정은 지금보다 별반 좋을 것도 없는 과거에서 위안을 삼으려는 경향을 커지게 한다.

 

사실 잘 산다는 것은 상대성이 있다. 세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행복의 가치도 다르고 만족의 크기도 저 마다 다르다. 결과가 과정을 대신해준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하고, 무엇보다도 인생이란 본디 불확실한 일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오늘의 행복을 놓치는 우를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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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회화의 혁명 - 도미에에서 샤갈까지
게오르크 슈미트 지음, 김윤수 옮김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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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과 학생들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

 

작년 2학기 때 수강했던 수업 중에 ‘서양미술사’라는 과목이 있다. 원래 전공은 행정학과인데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회화과 수업을 듣게 되었다. 본 전공과 전혀 다른 수업 분위기는 색다른 느낌을 받았고, 몇몇 회화과 학생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회화과 학생 특유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서양미술사’ 수업은 회화과 2학년 전공필수 과목이라서 수강생 중에는 11학번 2학년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교수가 수업 도중에 학생들을 훈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매번 하는 질문이 딱 하나 있었다.

“너희는 어떤 그림을 그리길 원하는가?” 회화과 학생들이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먼저 하는 것이 전공교수와 일대일 상담이다. 상담을 통해 학생들의 진로를 알아볼 수 있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전업화가나 미술 관련 분야의 직업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교수는 상담에 응하는 학생들에게 무조건 이 질문을 한단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회화과 학생들의 답변은 비슷하다. ‘대상을 정확하고 똑같이 그리는 것’. 교수는 학생들의 천편일률적인 답변에 일침을 가한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여기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금 현대미술이 빠르게 발전되는 시점에서 대상을 무조건 정확하게 그리려고 한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생각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시작된 근대미술

 

교수가 회화과 학생에게 던지는 이 간결한 질문은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학생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이 어떤 건지 묻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예술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예술적 정체성 없이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표현할 수 없다. 만약에 이 회화과 학생들이 유행에 따르듯이 다른 화가 지망생들과 비슷한 표현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거나 과거 화가들의 작품을 정확하게 모사하는데 그친다면 발전이 더디어질 것이고 전도유망한 화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술 창작이나 발상 면에서 독창성을 잃고 평범한 경향으로 흘러간다면 회화과 학생들은 방대한 분량의 서양미술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표현수단의 고정성이 강하면 예술의 신선미와 생기를 잃게 된다. 이것은 곧 ‘발전’이 아니라 ‘퇴행’이다.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면 여러 단계의 전환점을 기준으로 발전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마다 발전의 기준을 보는 관점이 차이가 있지만 근대서양미술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게오르크 슈미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회화 역사의 시작은 원근법, 명암, 신체적 비례 등의 정확성에 의한 묘사를 요구하지 않았던 중세 초기부터 보고 있다. 이때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리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표현으로 발전했다. 두 번째, 중세미술은 바야흐로 조토 디 본도네의 등장과 함께 현실의 묘사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공간적, 해부학적 정확성이 강조되었다. 세 번째의 발전 단계는 이전 시기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대상을 보는 인식이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바로 정확성을 강조한 고전적 화풍을 완전히 탈피하여 화가의 개성적 표현을 강조하는 근대미술로 도달하게 된다.

 

'근대미술'(Morden Art)의 정의 및 시기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가 다르게 구분되고 있지만 ‘예전’과 다른 ‘새로움’의 가치개념으로 보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적 회화방식에서 강조하는 표현의 정확성을 과감하게 버리는 진취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시기이다. 화가가 대상을 정확하고 똑같이 표현한다는 것은 근대미술 등장 이전 화가들에게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고전적 회화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통보함으로써 근대미술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근대회화의 시작은 도미에로부터

 

 

 

오노레 도미에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1850년경

 

 

근대미술의 시작은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등장과 함게 소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게오르크 슈미트의 소개는 다르다.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오노레 도미에의 등장을 시작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미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과거의 고전주의가 추구한 정형화된 이상이나 규범을 거부하고 오로지 눈으로 보고 경험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객관적인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란 과제를 수행하고자 한 사실주의는 그리스 고대 문화 모방을 강조한 신고전주의 미술과 비교해볼 때 전위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들은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은 그 시대의 현실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도미에가 사실주의 화파라고 해서 대상의 정확성을 추구한 건 아니다. 명암을 기조로 한 유동감과 높은 정신성을 지닌 표현을 통해 대상을 솔직 예리하게 관찰했다. 특히 대상을 시각적 영상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 대상을 고의로 왜곡시켜 그리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 기법을 이용해 화가의 진실된 감정을 캔버스에 표출하고 있다. 사물의 자연형태에 보다 주관적인 왜곡을 가하는 도미에의 그림은 충실한 재현에서 벗어나 형체와 비례가 파괴당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부자연스러움과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새로운 조형적 시도를 통한 창조성으로의 기대치를 높여주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자장가 (룰랭 부인의 초상)』 1889년

 

 

도미에의 선구자적 회화 기법은 프랑스 파리로 홀로 건너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는 젊은 반 고흐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흐가 습작 시절에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그도 오랜 모사와 독학 끝에 정확한 형태의 회화 묘사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하게 된다. 대샹을 정확하게 그린다고해서 진실적 가치를 제대로 담아낸다고 볼 수 없다고 고흐는 확신했다.

 

"모든 아카데믹한 형태는 오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도미에가 그런 형태를 그린다면, 그 비례는 아카데믹한 작가의 눈에는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일테지. 하지만 그 형태야말로 살아있는 형태일 것이다. 나는 아카데믹한 의미에서 정확한 형태를 그리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부정확함을, 그러한 뒤틀림을. 그러한 현실의 변형과 수정을 습득하는 것이 나의 최대의 열망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거짓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글자 그대로의 진실보다 더 진실하지 않은가."  (p 58~59)

 

 

 

 

폴 고갱  『시장』 1892년

 

 

해부학상의 정확성을 포기한다는 건 결국 실제처럼 공간감각을 구현하기 위한 원근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고갱의 『시장』이라는 그림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캔버스 중앙에 있는 5명의 여인과 배경은 원근법에 의해 정확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다. 장식 그림처럼 인물과 배경이 평면적이다.

 

 

 

 대상의 '표면'이 아니라 대상의 '이면'을 그려라

 

어느 문명,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미술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실물처럼 생생한’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각종 새들이 진짜로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일견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관객의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나 조각가의 놀라운 기술을 강조하는 이러한 일화들은 동,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특히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너무나 자랑을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다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위에 천이 드리워져 있어서 이를 걷으려던 제욱시스는 천 자체가 파라시오스의 그림인 것을 뒤늦게 알고 감탄하면서 새를 속인 자신보다 화가를 속인 파라시오스가 한 수 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 모두가 현재 우리들의 눈에도 실물로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미술 작품에는 이러한 기법 상의 관례나 사회 통념을 초월해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교감 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단지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미술 작품을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에 회회과 학생 중에 서양미술사 공부의 중요성을 못 느낀 이가 있다면 게오르크 슈미트가 쓴 책을 권하고 싶다.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싶어하는 생각을 쫓는다면 자신만의 개성적인 표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대상의 '표면'만 똑같이 묘사하는 빈 껍데기 그림보다는 대상의 '이면'에 숨겨진 실제적 특성을 정확하게 포착한 진실된 그림이야말로 미술의 진정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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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6
질 랑베르 지음, 문경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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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관심 있게 알아보고 있는 화가가 이탈리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다. 이름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와 비슷한데 국내에선 카라바조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선 미켈란젤로 못지않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고흐를 능가하는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불같은 성격, 시대를 앞서갔지만 결국 외면 받아야만 했던 남다른 천재 그리고 요절. 이러한 카라바조의 삶에 비하면 고흐는 양반에 불과하다. 경쟁 화가들 그리고 자신에게 그림을 주문했던 사람들을 무시하는 발언은 예사였고 수차례에 걸쳐 폭행 및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고 탈옥을 감행하여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보라. 딱 얼굴만 봐도 그의 격정적인 성격이 인상에서도 묻어 나온다. 예술적인 삶보다는 카라바조의 무시무시한 전과 이력이 제일 먼저 떠올려서 그런지 초상화 속에서 그가 쥐고 있는 것이 붓이 아니라 생전에 품속에서 지녔다던 단검처럼 보인다.

『성 마태오의 소명』1599~1600년


카라바조는 어린 시절부터 도제 생활을 거쳐 예술적 능력을 점점 키워나갔다. 콘타랠리 예배당에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와 <성 마태오의 소명>이 각광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권력자였던 델 몬테 추기경이 후원자로 나서고 로마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양식을 추구한 그는 악마적 화가,‘회화의 반(反) 그리스도'라는 비판도 받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집시나 부랑자, 창녀의 모습을 성자나 예수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성사회의 비판과 조롱을 비웃기라도 하듯, 충격적인 주제 선택과 표현 방식에 대한 고집이 묻어 나 있는 카라바조의 붓은 절대로 꺾이지 않았다.


『마리아의 죽음』1606년경






임종한 성모 마리아를 그리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의 썩어가는 시신을 모델로 사용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부탁했던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그림 모델에 대한 출처불명의 소문보다는 교회 관계자들을 더욱 실망하게 만든 것은 카라바조의 표현 방식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왼팔이 축 늘어진 채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임종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 있다. 교회 관계자들은 이러한 그림 구도를 마음에 들지 못했다. 성모의 죽음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장면이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성모 가까이에서 임종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 속 성모의 모습에 대해서도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맨 발을 드러낸 채 죽은 성모의 모습이 저속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를 들면서 카라바조의 그림을 비난했다. 그나마 그림 속 죽은 여자가 성모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희미한 후광만 그려져 있을 뿐, 이것마저 그려 넣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 또한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카라바조는 지극한 성스러움은 결국 지독한 세속적인 삶에 기초해 있으며, 성(聖)과 속(俗)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첫 번째 그림, 현재 소실됨)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수정된 그림)


카라바조는 그림 제작 주문자들로부터 총 두 번이나 거절당할 정도로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 마태오와 천사>다. 첫 번째 그림 속 성 마태오가 너무 초라하고 천사가 마태오 옆에 너무 가까이 묘사되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천사의 영감을 받아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마태오의 모습은 평범한 하층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마태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탓에 그의 발바닥은 그림을 보는 관중들 앞으로 드러나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본 순간, 마태오가 성인으로써의 면모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레토의 성모』1604~1605년


비록 성당이 요구하는 작품을 위해 카라바조는 고귀하고 근엄한 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도록 그림을 수정했지만 평범하고도 세속적인 종교화를 추구하고자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적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성 마태오와 천사> 두 번째 그림이 완성된 지 2년 뒤에 그려진 <로레토의 성모>에서는 성모와 아기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늙은 순례자의 맨발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카라바조는 그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사실주의적 화법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1593~1594년경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초창기의 카라바조 그림을 보게 되면 이미 사실주의적 표현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과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처음 보는 독자라면 훗날 그려지게 될 종교화에 비하면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점의 그림을 박물관에서 실제로 보게 된다면 좀 더 가까이 살펴 볼 것. 과일과 이파리가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과일은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흐를 정도로 싱싱하게 느껴진다. 특히 포도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각각의 포도 알맹이가 하얗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는데 포도 열매 위에 묻은 하얀 가루를 보는 듯하다. 이것을 사람들은 농약이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다행히도 농약 성분은 아니다. 그리고 카라바조가 살았던 시대에는 농약이라는 게 나오지도 않았다. 포도 속 당분으로 포도 껍질이 변해 생성된 것뿐이다. 하얀 가루가 많은 포도일수록 당분이 높고 신선함이 유지되어 있다. 과연 카라바조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그렸던 것일까?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1596~1597년


카라바조는 종교화를 그렸던 화가이면서도 동시에 폭행, 살인 전과가 적지 않은 범죄자라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독특한 화가이다. 하지만 렘브란트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등장할 수 있게 명암법을 처음으로 시도했으며 극적인 순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방식은 훗날 조르주 라 투르와 쿠르베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미술은 정당한 대우를 받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카라바조의 종교화를 반복해서 볼수록 차분해지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물론 화가의 생애를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을 본다면 그림이 주는 감동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카라바조도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의 모습을 주제로 한 그림 한 점을 남겼는데 불같은 성격의 화가가 그렸다는 생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고요하다. 두 눈을 감고 얼굴을 숙인 막달레나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면 눈물 한 방울이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막달레나의 얼굴에 흐르고 있는 이 눈물 한 방울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마저도 숙연하게 느껴진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09~1610년


카라바조의 생애와 미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찻잔 속의 태풍’이다. 카라바조는 평범한 기교의 예술에 의한 마니에리즘(Mannerism)이 지배하던 시대에 태어나 독특하고 파격적인 주제와 표현법으로 세상을 뒤흔들 젊은 천재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범죄 이력과 도주 생활은 활짝 펴야만했던 예술적 능력의 꽃을 시들게 만들었다. 카라바조의 예술이 세상에 가져다 준 파급 효과는 한 순간일 뿐이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점점 소멸되어가는 태풍처럼 카라바조는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다. 아마 반 고흐를 제외하면 이처럼 파격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짧은 삶을 살았던 예술가도 드물 것이다. 이제는 르네상스 거장 중의 한 사람인 미켈란젤로에 맞먹을 정도로 평가를 받고 있는 카라바조 출신의 미켈란젤로('카라바조‘라는 성은 화가가 태어난 지명으로부터 유래됨)를 고풍스러운 미적 취향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림 장면의 절반을 지배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흑(黑)의 영역이 많이 차지하고 있는 명암법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줄까? 그리고 과거의 불미스러운 이력만 가지고 장점을 무시하고 심지어 끝까지 냉담한 선입견을 거두지 않는 우리 사회 속에서 과연 전과자의 그림들이 그러한 선입견 없이 예술적 평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자신의 목을 참수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 자화상으로 그렸던 카라바조의 파격적인 예술을 아직 우리 사회는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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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2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바조를 다시 보게 돼서 정리가 돼요. 예전에는 마로니에 북스에서 나오는 화가 일대기 종종 읽었는데 요즘은 통-_-;; 저도 현대미술에 관심 좀 가져야 될 듯 싶어요. 아는 사람이 앤디 워홀 뿐이라니 orz

카라바조 페이퍼에 앤디 워홀 얘기하는 쓸데없는 댓글..

cyrus 2012-08-31 22:32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부터 마로니에북스 시리즈 완독 도전해보려고요. 분량도 많지도 않고 시리즈 중에 제가
관심 있는 화가들이 꽤 있어서 이번 기회에 화가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내일 모레부터 2학기 시작이라는 게 함정이네요.. ㅋㅋㅋ ㅠㅠ
다음 마로니에북스 시리즈는 앤디 워홀을 읽어보겠습니다요 ^^
 
자화상전 - 거장들의 자화상으로 미술사를 산책하다
천빈 지음, 정유희 옮김 / 어바웃어북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거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만약 거울이 없으면 맑은 물에라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야 말 것이다.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그때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의 관찰과 평가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람은 이 같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도 비추어 본다. 정확한 자기 확인과 자기 점검, 자기 준비와 자기 개선을 위해서다.

 

시인 윤동주는 달이 비치고 구름이 흐르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의 얼굴을 비추어준 거울은 어느 외딴 우물이었다. 우물 속에 비추어 들여다본 자신의 모습은 피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내면의 실체였다.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눈은 시력을 투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을 '수단'으로 빌리되 심안(心眼)을 동원해야 내면의 실체에 대한 투시가 가능할 것이다. 윤동주는 바로 그 같은 마음의 눈으로 두 번씩이나 돌아섰다 생각을 바꾸어 되풀이 자신을 성찰하고 점검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본래 그대로의 자신의 정확한 실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윤동주처럼 그렇게까지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거울'을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거울'은 그저 우리의 모습 원형을 그대로 비춰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일명 '셀카'라고 알려진 '셀프 카메라'(Self-camera)가 그것이다. 셀카는 단지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사진에 담는다. 연예인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부각시켜주기 위해서는 셀카를 많이 찍곤 하는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자신의 외모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 좋은 셀카를 찍을 수 있는 촬영 각도 등 셀카 찍는 방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본인 스스로 사진기술을 통해서 그대로 본떠서 재현한다는 것. 어찌 보면 화가들이 직접 자화상을 그리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셀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누구라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자화상인 셈이다. 이름만 들어도 잘 아는 유명한 화가들 중에서는 자화상 단 한 점을 남기지 않은 이가 드물다.  적어도 두 점 정도를 그린 화가에서부터 평생 죽을 때까지 수십 점이 넘을 정도로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캔버스에 담긴 다작 화가도 있다. 화가들이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자기 PR'의 용도인 동시에 은연중에 자신이 '화가'라는 예술적 기질이 내포되어 있는 자의식을 과시하기 위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도판 p 16) 

 

 

 

'자화상'을 예술에서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근원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자화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뒤러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 수 있었던 업적이 바로 자화상이다. 뒤러는 자화상을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진 복제품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자신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떳떳하게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뒤러가 활동하던 당시의 유럽 르네상스 시절에는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반해 독일에서는 '화가'는 그저 그림을 그리는 기능인 '화공'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피우기 전, 중세 시절에 활동한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석공이나 구두 수선공과 비슷했다. 그만큼 사회적 신분이 낮은 직업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그림이란 예술적 표현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림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삼는 정도에 불과했다. 중세의 화공들이 제작한 그림들 중에는 제작자의 서명이 없는 것이 많은데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화공'이라는 직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제약을 먼저 뛰어넘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뒤러였다. 뒤러는 젋은 시절 화가들이 주로 모여서 활동했던 공방 생활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 때만해도 여전히 화공은 사회적으로 그리 높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뒤러는 뛰어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이제 막 명예를 얻기 시작할 무렵인 29세 때 그려진『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에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도록 묘사되어 있다. 뒤러는 자신의 모습을 예수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스물아홉 살의 나를 네가 지닌 색깔 그대로 그렸다"라고 적힌 글귀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뒤러가 예수의 이미지를 차용한 의도는 자신을 예술적 창조자로서 타고난 자신의 재능의 원천을 신의 능력과 대등하다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뒤러는 자신의 실력이 신에 의해 부여되었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신과 대등한 존재로서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서 스스로 격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화상』 연대 미상

 

 

 

하지만 모든 화가들이 뒤러처럼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의 상징으로 자화상을 제작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에 비해 자화상만큼은 많이 남기지 않은 화가들도 있다. 그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르네상스가 낳은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자화상은 딱 두 점뿐이다. 두 점 다 소묘로 그려졌으며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년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유명 화가들 사이에서는 종종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듯이 조그맣게 본인의 얼굴을 그려넣는 방식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다 빈치 역시 몇 몇 작품에 자신의 젋은 시절의 모습을 그려넣었을 뿐 실질적으로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았다. 예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던 르네상스의 천재라면 자신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에 멋지게 채색된 자화상 한 두 점 정도 남겼을 법하다. 그런데 왜 다 빈치는 습작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달랑 소묘 자화상 두 점만 남겼을까?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다 빈치가 자화상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완벽함을 추구하는 천재의 전형적인 특성에서 찾고 있다.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했던 다 빈치는 자신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불완전함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 빈치는 자화상의 특성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화상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모든 것을 외부에 완전히 관객들 앞에서 드러내야하는 일종의 '자기고백'으로 인식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스물 네 살의 자화상』 1804년  (도판 p 164)

 

 

 

인간은 언젠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불완전함 또는 단점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게 되고 그것을 숨기려고 한다. 각각 개인의 특성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이 타의에 의해서 외부적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때로는 심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일반 사람들에 비해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들에게는 내면의 약점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심하게 다투고 난 뒤에 왼쪽 귀를 잘랐던 것도 단지 고흐의 특이한 성격 탓만으로 볼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위의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앵그르가 24살 때 그린 자화상이다. 그냥 봐도 한창 왕성하게 화가로 활동하던 젋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보통 자화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자화상 속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숨겨져 있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24살의 자화상은 앵그르가 일흔이 된 나이에 다시 개작한 것이다. 24살 때 제작하여 이미 완성된 그림에 일흔 살의 앵그르는 다시 손을 본 것이다. 자신의 완성된 그림이 화가 본인이 마음에 안 드면 다시 손질하여 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개작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나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고 생전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일흔 살의 앵그르가 그 많고 많은 자신의 작품들 중에 하필 젊은 시절의 자화상을 개작한 것일까?

 

사실 이 자화상 한 점으로 인해 앵그르는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24살의 자화상이 그려지기 전에 앵그르는 이미 비평가들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엘리트 예술가였다. 이미 젊은 나이에 벌써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청년 앵그르는 전작보다 더 뛰어난 작품들을 그리고 싶어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적 능력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그러한 자부심 속에서 만들어 진 그림이 바로 이 문제의 자화상이다. 신예 화가 앵그르는 자화상을 살롱전에 당당하게 출품했다. 그 당시 살롱전이라면 비평가와 대중들로부터 널리 인정받은 화가들의 그림만이 출품이 가능했던 그림 전시회다. 앵그르는 초상화 제작에 대한 재능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화상도 크게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앵그르는 그전에 자신을 칭찬했던 수많은 비평가들로부터 혹평만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살롱전에서도 입상하지 못하게 되는 불명예스러운 결과를 받아들여야했다. 그 후로 앵그르는 생전에 자화상을 제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8살에 되어서야 그는 무려 54년 전에 제작했던 자화상을 다시 그렸다. 어느 누구도 흠 잡을 데 없을 정도로 위대한 화가로 자리잡게 된 앵그르는 애써 과거의 상처를 잊기 위해서였을까?  그가 왜 자화상을 개작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성공의 꼭대기에 서 있는 앵그르가 실패한 자화상을 다시 손을 보게 됨으로써 젊은 시절에 겪었던 예술가로서의 흠을 한층 성숙되고 완벽한 예술적 명성이 묻어 나 있는 붓으로 직접 손질함으로써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했을 것이다. 앵그르는 자화상을 개작하는 것만으로 자기 위안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스물 세 살의 자화상』 1821년   (도판 p 174)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만을 똑같이 찍어내는 사진과 다르다. 렘브렌트, 반 고흐, 고갱 등 위대한 화가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점검하며 성찰하기 위해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유독 수 십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되돌아보면서 보다 나은 내면의 성숙을 이루어내기 위해 그리는 것이다. 렘브렌트는 매년 자화상을 그렸다. 그 역시 젊은 앵그르와 마찬가지로 명망 있는 화가로 출세하여 젋은 시절부터 부와 명예를 누리기 시작할 때 화려한 복장을 입은 자화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제 없는 탐욕으로 인해 그동안 화가로 활동하면서 얻은 수많은 재산을 탕진했고 부인의 죽음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한순간에 명성이 추락하게 되어 별 볼일 없는 가난한 늙다리 화가가 되었을 때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노년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다.  일그러진 자기 내면이 드러난 자화상, 늙어 쭈글쭈글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고통일 수 있지만 렘브란트에게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려 놓고 들여다보는 것은 그 고통을 감내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그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약점이 있고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물이라고 할 수 없다. 인생의 부귀영화는 죽을 때까지 오랫동안 누린다는 것은 쉽지 않으며 젋음의 상징인 검은 피부와 탱탱한 피부는 나세월의 변화 앞에서는 주름 가득한 피부와 흰 머리로 변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기나긴 인생을 종지부를 찍는 죽음 앞에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절대적인 숙명이다. 화가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인간의 불완전한 존재에 대해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이미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남들에 비해 그러한 약점 앞에서 무척 괴로워했다. 스물 세 살의 들라크루아는 이미 인간의 숙명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자화상 속의 모습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앞에서 크게 갈등을 했던 덴마크의 왕자 햄릿으로 형상화시켰다.

 

거울은 자칫 보기에 따라 자신의 모습에 반해 터무니없는 자아도취나 혹여 반대로 자기 환멸이나 절망에 사람을 빠뜨리게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나르시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 속에 숨겨진 모든 것까지 캔버스에 담고자했던 자화상 제작, 즉 이러한 화가들의 내면적 체험은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문 앞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에 걸맞게 실행하는 값진 노력이다. 그러하기에 고된 인생의 과정 속에서 내적 성찰의 노력이 만들어 낸 위대한 산물인 예술가들의 자화상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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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7-30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화상 이야기 흥미롭네요. 유일하게 자신의 모습을 남길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요?...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자가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분명 어긋나는 지점들이 있었을 법한데...그 부분을, 그 틈을 그림으로 설명하려고 했을까요?,,,특히 자의식이 강한 화가들은 더 그랬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사이러스님 글 읽으면서 글로 자화상을 묘사해본다면? 엉뚱한 생각도 함께 하게 되네요..
온통 미화와 왜곡으로 얼룩진 자화상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쪽팔려서 솔직하게 그려낼 수 있을지..ㅋㅋ

cyrus 2012-08-01 20: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맞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알라딘 블로그에 제 사적인 생활에 대한 글을 잘 안 쓰는 편이에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면 몰라도요 ^^:;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유명 화가의 자화상을 꽤 많이 소개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이야기가 빠진거요. 칼로의 자화상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유명한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