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박물관 - 상상의 힘으로 서양미술사를 재구성하다
필리페 다베리오 지음, 윤병언 옮김 / 휴먼아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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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Scene #1  싸구려 복제 그림에서 비롯된 명작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파리스의 심판」(라파엘로의 원작 모사)  1517~1520년경

 

 

15141518년경, 복제 전문가인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는 은밀히 그림 한 점을 복제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심판을 묘사한 젊은 거장 라파엘로의 그림이다. 마르칸토니오는 이미 전과가 있었다. 1506년경, 뒤러의 판화 80여 점을 표절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던 그림 전문 위조범죄자였다. 그럼에도 4년 뒤에 다시 라파엘로의 그림에 손을 댄 것이다.

그 중 한 점이 파리스의 심판이다. 하지만 그의 복제는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의 사람들을 위한 업적이 되었다. 현재 라파엘로가 그린 원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르칸토니오가 복제한 판화를 통해서 라파엘로의 원작을 짐작해볼 수 있다. 마르칸토니오가 남긴 가짜그림 한 점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을 일으키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는데 그로부터 350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다.
 

1861년 어느 날, 마네는 오래된 판화 한 장을 손에 넣는다. 이 판화에 감동을 받은 마네는 그것을 수채화로 치밀하게 모사한다. 그런데 이 판화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마르칸토니오가 복제한 판화였다. 놀랍게도 대중의 기억 속에 묻힌 복제판화가 350년 뒤에 부활한 것이다.

 

 

 

 

 

조르조네  「전원의 합주」 1508~1509년경

 


이 판화에서 마네가 관심을 가진 인물은 따로 있었다. 화면의 오른쪽에 모여 앉은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그들이다. 모두들 신분이 바다의 신이다. 마네는 누드의 여인과 옷을 입은 남자가 어우러진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라는 그림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네는 조르조네의 그림 속 배경에 복제 판화 속 바다의 신들만 모셔 와서 유화로 그린다. 원작과의 차이라면, 누드였던 2명의 남자에게 옷을 입힌 것뿐이다. 마네의 그림은 살롱에 출품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그리고 관람객들로부터 심한 욕설과 함께 혹평을 받기도 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년

 

 

 

마네가 살롱에 출품한 그림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 그런데 제목처럼 한가롭게 점심을 먹는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낯뜨겁다. 벌거벗은 여인들은 옷을 입은 남자들 사이에 누드로 태연히 앉아 있거나 물에서 하반신을 씻고 있다. 관람객들은 이 그림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여인을 누드로 그리되, 여신처럼 이상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림 내용뿐만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마네가 조르조네의 그림과 원작을 복제한 판화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가져온 제작 과정이었다. 구도와 설정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요즘 말로 하면 마네는 다른 화가의 그림을 표절한 것이다.

 

 

 

 

 Scene #2  어서 와~ 상상 박물관은 처음이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제작비화를 설명하면 꼬리표마냥 따라오는 것이 마르칸토니오와 조르조네의 그림이다. 서양미술에 무지한 사람이라면 마네의 그림 제작이 표절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미술 비평가들 어느 누구도 마네의 그림을 표절이라고 시비 걸지 않는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올랭피아」와 더불어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네는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고 구도를 똑같이 흉내 내기만 하는 아마추어 화가가 아니다. 구도를 그대로 빌렸을 뿐 인물의 모습과 자세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원작을 표절한 것이 아니라 모방을 통한 변용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창작을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작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상상력 때문이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보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분노를 삼키지 못했던 관람객들은 틀렸다. 아니, 그들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마네의 작품 제작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보수적인 관람객과 화가들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창작이고,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진정한 창작이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필리페 다베리오. 이탈리아의 유명한 예술 평론가인 그가 마네의 그림이 걸려 있는 1863년 살롱전에 있었다면 기발한 상상력으로 원작에 변용을 시도한 점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자신이 만들려고 하는 ‘상상 박물관’에 전시하고픈 작품 1호일지도 모르겠다.

 

필리베 다베리오가 만든 ‘상상 박물관’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 박물관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수많은 그림들이 전시된 박물관에 가보면 연대기 순 혹은 작가별로 분류되어 있다. 관람객은 큐레이터의 안내에 따라 정해진 순서와 방법대로 그림을 감상한다. 르네상스 회화만 전시된 르네상스 관을 지나면 바로크, 로코코 순으로 전시된 그림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별로 전시된 그림을 본다면 방대한 미술사를 하루 만에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림을 본다면 정말 제대로 감상한 걸까? 일단 그림 한 점을 보려면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그림 속에는 화가가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전시회에 관람객이 붐빈다면 그림 한 점을 1분 이상 보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렇다고 큐레이터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오디오 북의 설명을 동시에 들으면서 그림을 보기에는 산만하다.

 

그러나 필리베 다베리오의 ‘상상 박물관’은 굳이 연대기 순으로 그림을 볼 필요가 없다. 3층과 반 지하로 구성된 상상 박물관에는 ‘생각하는 방’, ‘도서관’, ‘점심식사 방’, ‘놀이방’, ‘침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독특한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방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전시관 한 곳에 모여져 있다. 시대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필리베 다베리오의 개인적인 상상력으로 꾸몄다.

 

그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티치아노와 조르조네가 그린 비너스 두 점만 가지고 앵그르가 창조한 터키탕의 내부부터 시작해서 고야가 사랑했던 벌거벗은 마야 부인 그리고 마네가 그린 프랑스 매춘부 올랭피아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 모든 그림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전시한다. 벌거벗은 여체가 등장하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그렇게 특별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필리베의 시선은 여체 한 곳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그림 속 주변 대상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재미있는 상상력을 발동해서 그들을 하나의 연관성으로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한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년 / 페터 파울 루벤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13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1650년경 / 프란시스코 고야 「벌거벗은 마야」 1797~1800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녀」 1808년 /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루벤스의 거울은 벨라스케스가 훔쳐 갑니다. 거울에다 티치아노의 모델까지 같이 훔쳐 가게 되죠. 그렇게 해서 그의 비너스가 탄생합니다. 단지 사실주의 화가라기보다는 현실적인 화가다 보니 모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섹시한 작품을 그리기로 작정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벌거벗은 마야>가 탄생하게 되고... (중략) 8년 뒤에는 청년 앵그르가 루벤스를 모델로 다시 그리게 됩니다. 앵그르는 라파엘로의 터번을 상당히 사랑했던 인물이죠. 그래서 모델에게 터번을 씌운 채 그림을 그립니다. (중략) 이듬해(1863년)에 파리의 살롱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네가 그의 올랭피아를 <우르비노의 비너스>처럼 누드로 그린 뒤에 루벤스의 흑인 시녀를 데려다가 손에 꽃다발을 쥐게 하고 티치아노의 강아지 대신 검은 고양이를 집어넣은 그림이 전시되었던 겁니다. (137~138쪽)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그림들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선으로 설명하는 필리체의 능청스러운 상상력은 상상 박물관에 입장한 관람객들을 웃음 짓게 만든다. 그의 그림을 보는 법은 우리가 전시회에서 보는 방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필리체는 그림은 아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봐야 한다. 오랫동안 고정된 형태로 이루어진 사유의 틀은 상상 박물관으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버려두고 와야 한다. 시대와 주제를 초월한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Scene #3  미로와 같은 상상 박물관 즐기기

 

공짜로 전시한다고 해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빈손으로 상상 박물관에 출입했다간 미로 속에 갇혀버린 신세가 될 수 있다. 상상 박물관에 한 번 들어간 이상 쉽게 나올 수 없다. 필리베의 방대한 상상력으로 구축된 미로를 즐기고 출구로 나오기 위해서는 복잡한 미로를 유연하게 헤쳐 나올 수 있는 실타래, 즉 무한한 생각을 자유롭게 술술 풀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 박물관은 필리페 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미로 게임이다. 필리베는 미로와 같은 상상 박물관을 만들고 여기 들어온 독자와 관람객을 짓궂은 장난을 펼친다. 박물관 한 층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림을 먼저 제대로 알아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필리베가 큐레이터처럼 친절하면서도 상세하게 그림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림에 대한 설명을 잠깐 하고 나머진 개인적인 감상을 늘어놓을 뿐이다. 이제 막 서양미술에 입문한 독자나 관람객에게는 상상 박물관 출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상상력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에 ‘쏘우’ 필리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미적 게임에 갇힐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매혹적인 이야기에 사로잡히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러워 질 수 있다.

 

이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 상상 박물관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쏘우’ 필리베의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미로를 즐길 수 있는 자신만의 ‘상상력’ 실타래를 꼭 챙겨야 한다. 혹시 상상 박물관에 가보고 싶은 독자라면 꼭 ‘상상력’ 실타래를 챙기시길. 그런데 그 ‘상상력’ 실타래를 누구한테 받느냐고? 미술에 어느 정도 지식과 식견을 가진 아리아드네를 만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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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 열화당미술문고 210
김진송 / 열화당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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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O대'라는 글자로만 남은 화가

 

 

 

 

 

 

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8~1949년

 

 

혹시 이쾌대라는 이름의 화가를 아는가. 올해가 이쾌대 탄생 100주년이다. 이쾌대는 이인성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힌다. ‘월북작가’로 낙인찍혀 이름 없는 화가로 남아 있었다. ‘쾌’(快) 자가 빠진 채 ‘이O대’로만 알려졌다. 1991년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리면서 그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 드문 대작, 그리고 근대미술에서 찾아보기 힘든 군상으로 당시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인 대구, 그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올해 문화계 계획에도 그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지역 출신의 또 다른 천재화가 이인성(1912~1950)이 작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에서 이를 기념한 전시, 학술대회를 대대적으로 연 것에 비하면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도 위안을 삼아본다면 지난 달 27일에 대구미술관에서 이쾌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끝이다. 하지만 대구시 그리고 시민들은 화가 이쾌대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다. 타 시도들이 저마다 연관 있는 예술가들을 문화 브랜드로 발굴하고, 스토리텔링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다. 한마디로 대구의 작가를 스타로 만드는 붐 조성에 실패한 것이다.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한 어느 미술 관계자는 “수창초교를 함께 다닌 이인성, 이쾌대를 잘 엮으면 대구의 훌륭한 브랜드가 될 텐데 아쉽다”고 했다.

 

 

 

 ♣ 혼돈의 시대에 낀 천재 화가

 

이쾌대는 1913년 1월 16일 칠곡군 지천면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아버지 이경옥은 창원 군수를 지냈던 인물로, 일찍이 신식문물을 받아들였다. 이쾌대는 1928년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담임선생으로 화가 장발을 만나면서 미술을 권유받았다. 당시 장발은 “이쾌대만큼 데생력이 뛰어난 학생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함께 서울 생활을 했던 12세 위의 형 이여성은 당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진보적 지식인으로, 미술에 남달리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대구에서 사회주의 관련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려다 체포돼 3년간 복역하기도 했고 언론과 미술 분야에 몸담는 등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이쾌대와 그의 아내 유갑봉 여사

 

 

 

이쾌대는 1932년 한동네에 살던 유갑봉과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특히 아내를 모델로 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아내 유갑봉은 그가 북으로 간 후 소중하게 그림을 보관해왔다. 유갑봉은 포목점을 하면서 네 자녀를 키웠고, 198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회의 반공 분위기 아래서 그림들을 벽장 속에 감춰두고 지켜왔다. 물론 물질적 유혹도 잘 이겨냈다. 이런 유갑봉 여사 덕분에 오늘날 이쾌대의 작품을 고스란히 우리가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쾌대는 1934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했는데, 특히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다. 다양한 활동을 하던 이쾌대는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 모든 미술 단체가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하기를 독려하고 있었으나 이쾌대가 중심이 된 신미술가협회는 지식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치열하게 자신의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던 이쾌대는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48년 성북회화연구소를 열고 미술학도들을 가르쳤다.

 

해방 후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사회는 그와 상관없이 혼란스럽게 흘러갔다. 그의 형 이여성은 근로인민당 대표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면서 월북했고, 그때 남한은 정부수립 이후 좌익 소탕에 나서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1949년 초 이승만 정부는 이쾌대를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미술가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반공 포스터전에 참가시켜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6.25전쟁은 다시 이쾌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미처 피란하지 못했던 이쾌대는 북한군의 점령하에서 다시 정치적 전향을 강요받았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실 때문에 자수를 강요당하고 조선미술동맹에 재가입해야 했던 것. 이들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을 그려야 했다. 얼마 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다시 유엔군의 수중에 들어갈 무렵, 이들은 다시 혹독한 정치 보복이 닥쳐올 것을 직감했다. 미술동맹원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북으로 갔다. 저자 김진송의 표현을 빌리자면 둘 다 신념에 의한 선택으로 보기에는 역사의 격량이 너무 거세었다.

 

서울이 탈환되기 일주일 전 이쾌대는 서울을 빠져나왔고, 국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수용소에 수감됐고, 그 이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가 좌익으로 몰렸다는 사실과 1953년 휴전이 되자 북을 선택해 갔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으로 올라간 이쾌대의 소식은 몇몇 자료에 등장하지만 그다지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987년 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몇 몇 연구가들은 지금도 북한에 남아 있는 이쾌대의 흔적을 발굴하가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사료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인데다 북한 미술계에서도 이쾌대에 관한 언급을 쉬쉬하는 편이다. 그야말로 남북 양쪽에서 잊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나지 않은 독특함, 이쾌대만의 독창성

 

 

 

 

 

이쾌대 「무희의 휴식」1938년

 

 

이쾌대의 작품은 대개 인물풍속화다. 후기로 갈수록 당대 현실 속의 인물 즉 특정 상황 속의 인물을 묘사했지만 등단 초기만 해도 전통 속의 인물을 선호했다.「무희의 휴식」은 화사하기 그지없는 전통 복장의 젊은 무희의 좌상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그러나 그는 전통에만 한정 짓는 제작에만 머무르지 않고 진일보한 표현방식을 위해 실험했다.

 

 

 

 

 

이쾌대  「운명」 1938년

 

 

애매한 상황 속의 인물의 배치는 점차적으로 뚜렷한 시공간을 알리면서 존재의 이유를 확실하게 들어내든데 중점을 맞추고 있다. 그 같은 연장선상에서 30년대의 야심작으로 「운명」과 「상황」을 꼽게 한다. 「운명」은 좁은 방안에 누워 있는 남성 주위로 슬픔에 젖어 있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작품 「운명」은 구체적 사건이나 장소 혹은 인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화면에 나타난 사항만 가지고 볼 때, 가장과 같은 남성의 절망적 순간과 이를 슬픈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특정 상황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비극의 현장, 하지만 작품 속에는 그 구체성을 알리지 않고 있다.

 

 

 

 

이쾌대  「상황」 1938년

 

 

 

다만 제작년도인 1938년은 한 해 앞서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시기라는 점이다. 「상황」은 「운명」보다 적극적인 스토리텔링의 경우에 속하는 작품이다. 여타의 작품과 달리 서사적 구도는 무엇인가 엄청난 격동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무희가 춤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슬픔을 표하고 있는 젊은 여성은 상반신이 벗겨져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방바닥에는 깨진 그릇 파편이 뒹굴고 있어 뭔가 격렬한 상황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어떤 상황, 분명히 어떤 구체적 사건을 도해화한 것 같으나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이색 형식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가장 난해한 그림 중 하나일 것이다.

 

 

 

 

 

이쾌대  「2인 초상」 1939년

 

 

다만 「상황」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화면 중앙의 젊은 여성이다. 그의 자세는 춤추는 모습으로 ‘특정 상황’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식 전통복장, 암흑기 일제시대에 이러한 옷차림의 당당한 제시는 작가 의식의 단면을 확인하게 한다. 이쾌대는 화필을 들고 자신이 화가임을 천명한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같은 자화상도 더러 그렸지만 인상적인 작품은 「2인 초상」이다. 이 작품은 부부초상으로 부인을 전면으로 내세워 강건한 존재로 부각시킨 반면 화가 자신은 부인 뒤에서 하나의 실루엣으로 약화돼 있다. 부인의 그림자, 이색적인 부부초상화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페미니즘 측면에서 부상시킬 수 있다. 여성 강조의 부부초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부부초상 작품도 사례가 없어 의미부여를 각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쾌대 최고의 대작, '군상' 시리즈

 

 

 

 

 

이쾌대  「군상 Ⅳ」 1948년

 

 

이쾌대의 그림은 잔잔한 감동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시선을 압도하는 벅찬 감동은 강렬하다. 예컨대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스펙터클한 ‘군상’ 시리즈(‘군상-1 해방고지’, ‘군상 Ⅱ’, ‘군상 Ⅲ’, ‘군상 Ⅳ’)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35명의 남녀가 나체로 한 덩어리가 된 ‘군상 Ⅳ’는 광복의 기쁨과 건국의 열기로 달아오른 격동기를 조형한 절창이다.

 

무엇보다도 해부학에 근거한 근육질의 인물들이 압권이다. 웅장하다. 그런데 이들은 비현실적인 관념 속의 인물이다. 단적인 예가 있다. 각 인물들의 포즈가 작위적이란 점이다.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처럼 포즈가 과장되어 있다. ‘칼레의 시민’의 작위적인 포즈가, 칼레를 구하기 위해 나선 시민들의 결연한 비장미를 극대화 해주듯이, ‘군상 Ⅳ’의 포즈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해방공간의 낙관적인 전망과 열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비탄에 잠겼다가 서서히 일어서는 인간군상은 마치 빛을 향해 자라는 ‘향일성 식물’ 같다. 이 식물의 ‘머리’는 그림의 왼쪽에 놓여 있는 셈인데, 이 지점에 선 인물들의 눈동자가 유난히 빛난다. 이는 좌절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희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구성이 독특하다. 보편적인 시선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보통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볼 때, 사람들의 시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 위에서 아래로 이동한다. 그런데 ‘군상Ⅳ’는 이와 반대다. 인물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서서히 일어서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불편을 감수하며 그림을 ‘읽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그림의 무게중심은 왼쪽에 있다.

 

김진송은 이런 동세를 좌절에서 희망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혼란에서 안정으로 향해 가는 과정으로 읽었다. 역사의식을 지닌 작가가 해방 후의 혼란한 현실을 극복해야 하며 또 극복 가능하다는 의지를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만약에 이런 동세를 고려하지 않고 보면 어떻게 될까? 감상이 불편해진다. 일반적인 시선의 방향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힘겹다. 인물들의 시선과 마주치며 오른쪽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보면 물살의 흐름을 타듯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서양화에 전통적인 조형방식을 접목한 것이다.

 

 

 

 ♣ 분단 대립의 희생양, 이쾌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이쾌대는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며 “서구적인 지성과 동양적인 감성을 융화”(김용준)시킨 역동적인 작품세계를 일궈갔다. 그 중에서도 ‘군상 Ⅳ’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해방공간에서 발견한 우리 민족의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하나의 ‘조형적 사상’이다. 서로 뒤엉킨 인물들의 역동적인 포즈와 풍부한 표정은 가슴 벅찬 ‘볼거리’를 제공하며,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았던 해방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적인 문맥에서 이탈하여, 작품 자체만 감상해도 심심하지는 않다. 그만큼 볼거리가 쏠쏠하다. 이러한 훌륭한 대작을 대구 시민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알지 못했고 그림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남한에서는 월북화가라 해서 금기인물이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파가 아니라서 역시 금기인물이었던 이쾌대, 그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희생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20세기 전반부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뚜렷한 예술세계를 이룩했다는 점은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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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분야에서 이런 이유로 잊혀져버린 이름들이 제법 있을 것 같아요.
남에서는 월북했다고, 북에서는 숙청당했다고 양쪽 모두에서 금기가 되어버린 사람들이요.

문외한이지만, 딱 보기에도 그림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특히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참 독특한 느낌이네요.
덕분에 좋은 그림 잘 보았습니다.

cyrus 2013-08-02 00:0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은빛님이 선물한 <현대사 아리랑>이 생각났어요. 최근에 납북 문학가들이 재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환영하지만 여전히 남북한 양쪽에서 외면받거나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한 예술가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이쾌대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가장 독창적인 재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외면받았죠.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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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려면 먼저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야 한다. 춤에서의 공간 개념이란 한 마디로 단순하게 설명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일차적으로는 공간의 한 지점 안에서 신체 모든 부분들이 어떤 각도로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시간성과도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똑같은 포즈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느리게 회전하는 움직임의 경우에 어떤 각도로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지를 인식하고 그런 다음에 회전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객석의 관객이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운 각도에 시간을 보다 많이 배려하는 것, 말하자면 지극히 단순한 한 동작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선택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더 많이 깨어 있어야만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깊이 인식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에 의한 조화의 결과는 비단 춤만 있는 건 아니다. 사진은 언제 어디서든 조화의 느낌을 눈으로 볼 수 있다. 과거처럼 특정 부류만 비밀스럽게 향유하는 게 아니라 셔터를 누를 힘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을 만들고 소비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진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거친 욕’이 되기도,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되기도 한다. 사진 한 장은 ‘이미지’로 기능하기보다 의미를 주고받는 ‘언어’로 작동한다. 이미지를 넘어 의도를 담지(擔持)한 기호인 것이다.



“인간이 거기에 있기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故 최민식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그렇게 요약한다. 그는 인생의 반세기동안 인간을 찍었다. 인간은 최민식 사진의 영원한 주제였고 의미가 함축된 하나의 언어로 봤다. 지금까지 펴낸 12권의 작품집 제목이 모두 ‘인간’이었다. 반면 조던 매터는 삶이 거기에 있기에 셔터를 눌렀다. 그가 포착한 것은 단순히 인간의 활동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표정이며 인간의 그늘이고 인간의 현재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삶이라는 하나의 결합체로 사진을 통해 구성된다.



삶은 늘 반복의 연속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어느 날 문득,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오고 그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행복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어쩌면 쉽게 지나쳤기 때문에 소중한 줄 몰랐던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무용수들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지상에 묶여 있는 인간이 중력의 법칙에서 해방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파인더에 담아낸다. 도시 곳곳에서 이들은 마음껏 춤의 본능을 발산한다. 무용수들의 애크로바틱한 동작은 트램펄린이나 와이어를 이용하지 않았다. 무용수들의 포즈 역시 디지털 보정을 거치지 않았다. 맞다. 여기에 뽀샵질은 없다. 사진은 오직 무용수들의 100% 리얼한 동작에 의존했다. 조던 매터는 무용수가 점프해 허공에 떠 있는 장면을 담기 위해 셔터 속도를 1/320로 맞추고, 각각 점프마다 단 한 컷의 사진만 촬영했다. 무용수들의 결정적인 순간을 예측해서 한 번에 승부를 걸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들과 같이 움직이고자 몸이 들썩거린다. 그렇게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보는 이의 심장을 바운스(Bounce)하게 만드는 생(生)춤이다.



우리가 이들의 몸짓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은 몸이라는 언어가 그만큼 생동감과 소통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꿈과 사랑, 일, 인생 등의 주제를 표현하는 감정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전해진다. 그들이 높은 점프를 하고 고난도의 포즈를 취해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연기가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사진가의 삶을 살게 된 조던 매터의 진솔한 이야기가 만나면서 오랜 순간의 여운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가 세상을 감지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제한적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가끔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맛보기도 한다. 사실 영상 매체야 말로 확대된 시간과 공간을 가장 쉽게 보여주는 과학적 산물이지만. 사진이라는 것이 기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인간의 정서와 감정과 감동을 불어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진의 기적이다. 이것은 마치 시인이 무생물인 언어에 호흡을 넣어 생명의 말을 만들 듯이 조던 매터는 무생물인 카메라에 호흡을 불어넣어 일상적인 삶을 새롭게 잉태하고 있다.



무용수가 시간과 공간에 대해 더 많이 깨어 있을수록 더욱 풍부한 춤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듯이 더 많이 깨어 있는 관객일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보다 둔감한 관객이라면 시공 에너지의 섬세한 부분들의 아름다움을 상대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조던 매터의 사진을 보는 우리 독자 또한 그렇다. 우리가 일상에서 놓쳐 버리고 있는 공간이나 스쳐 지나는 시간에 대한 감지력이 지금보다 더욱 예민해지게 된다면 우리는 현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삶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좀 더 깊이 시간과 공간을 확대해서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놓쳐 버리는 ‘찰나’라는 시간 속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너무나 평범하고 미미하다고 여겼던 일상적인 것들이 값지고 위대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세상과 화해하고 삶을 사랑하고 감사하게 된다. 우리가 스쳐 지났던 모든 것, 우리가 지금 스쳐 지나가려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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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34
코르넬리아 슈타베노프 지음, 이영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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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게 피운 화가의 길

 

 

 

 

 

 

앙리 루소  『램프가 있는 자화상』 1900~1903년

 

 

 

보통 아마추어 화가라고 하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특정 화가에게 사사를 받고 활동하는 화가를 지칭한다. 서구의 경우 아마추어 출신 유명한 화가로는 반 고흐와 앙리 루소가 있다. 특히 앙리 루소는 독학으로 초현실주의 미학의 길을 열었고, 원시주의 미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피카소, 르동, 마티스 등 화가들과 전위 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루소는 살아생전에 일반인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죽어서도 화가의 이름 루소보다는 성()이 같은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을 그 유명한 사상가의 이름과 혼동한다면 루소 입장에서는 통탄한 일이다.

 

 

 

 

 

 

앙리 루소  『세관』 1890년

 

 

루소는 꾸준한 준비로 전업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예술가다. 전직이 세관원이었다. 1871년부터 무려 22년 동안 파리 세관의 세금징수원으로 밥벌이를 했다. 24시간 근무한 후 쉬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여유가 있었다. 루소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1884년 마흔 살 때였다. 이때 루브르박물관에서 유명한 그림들을 베껴 그릴 수 있는 모사 허가증을 받는다. 그는 직장과 가정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서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그림을 그렸다. 가슴 한 켠에는 뛰어난 화가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초보자 티를 겨우 벗을 무렵인 1885, 꿈에 그리던 살롱전에 난생 처음 출품한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자 노력하는 것’(헤밍웨이)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실험에 실패할 때마다 성공을 향해 한발 짝 한발 짝 다가가고 있다’(에디슨)는 말에 공감이라도 한 듯이 다시 캔버스와 씨름을 계속했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한다. 살롱전의 고답적인 스타일에 반기를 든 젊은 화가들이 창설한 앙데팡당전은, 루소가 새로운 그림을 선보인 단골 무대였다. 7년 동안 출품한 작품이 20점이나 된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아마추어 냄새가 풀풀 나는 루소의 그림을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사실 루소의 그림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을만큼 특이하다. 그 당시 많은 그림들이 유사한 스타일로 세련되게 그려졌던 것과 달리 아마추어가 그린 듯한 단순화된 형태와 원근법을 무시한 기묘함, 이질적인 색상 대비 등이 관람자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루소가 아니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 만큼 화가로서 자부심은 시들지 않았다. 그 시대 대부분 사람들이 그를 아마추어 화가, 우스꽝스러운 기인으로 여겼지만 루소 본인은 자신을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진지하게 믿었다. 1893, 루소는 그림에만 전념하기 위해 세관을 그만둔다. 제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듯이 과감하게 전업작가로 나선다.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열정은 뜨거웠지만 반응은 냉담했고, 생활마저 궁핍했다. 그런데 고진감래였다. 1905, 뜻밖의 희소식이 날아든다. 예전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던 가을 살롱전에 작가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마침내 제도권 비평가들도 그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화상들도 원시적인 동시에 몽환적인 루소의 그림을 구입해갔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그리다

 

 

 

 

 

 

앙리 루소  『나, 초상-풍경』 1890년

 

 

 

루소는 파리 풍경을 그렸다. 파리 하늘에는 비행선이 떠있고, 강변으로 낚싯줄을 드리우거나 산책을 하거나 느린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둔하고 우직하게 그렸다. 루소에게는 낮선 풍경을 제 눈으로 읽어내는 안목이 있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그림을 배우는 초보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1889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만국박람회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참가국 국민과 신상품이겠지만 박람회에서 제일 떠들썩한 화젯거리는 단연 에펠탑이었다. 센 강변에 우뚝 선 에펠탑은 박람회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였다. 그해 처음 전깃불 조명이 박람회에 사용돼 덕분에 늦게까지 입장이 허용되고 에펠탑 위로 설치한 큼직한 조명탑이 파리 시내를 비추는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했다. 번영을 누리고 있던 파리는 세상의 중심으로서 당당했다. 루소는 이러한 시대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나, 초상-풍경>에서 루소는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포기했다. 루소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하고 부유한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자화상에 애국심에서 우러나는 프랑스의 기술적 성과를 보여주는 두 가지 상징물인 에펠탑과 열기구를 그려 넣었다. 당시 화가들은 에펠탑이 흉물이라고 화면에 그려 넣기를 꺼려했지만 유일하게 쇠라만이 루소보다 1년 앞서 에펠탑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루소는 자신의 그림 속 곳곳에 만국기가 등장하고 프랑스 혁명의 환희를 표현하는 등 신념에 찬 애국정신을 보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살롱전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공개적으로 지식층의 전위미술과 경쟁했다. 이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상상력이 만들어 낸 정글의 세계

 

 

 

 

 

 

앙리 루소  『굶주린 사자』  1905년

 

 

 

루소는 태어나 한 번도 프랑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파리 밖 지척에 있는 아프리카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파리 사람들에게 마치 아프리카 탐험을 마치고 곧 돌아와 그린 것처럼 생생하게 과장하고 뻥 튀겼다. 사람들은 루소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열대의 정글 원시림에 다녀와서 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루소의 타고난 ‘뻥쟁이’ 기질이 한몫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 원정을 떠난 일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수도를 함락하고 오스트리아 선제후 막시밀리안 백작을 멕시코 황제로 임명했다. 뒤이어 멕시코에서 봉기가 일어나 주둔한 프랑스 군대가 퇴각했다.

루소는 자기가 원정군에 참전해서 싸우다가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고 허풍을 쳤다. 하급 세관원으로, 아마추어 화가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던 그에게 이렇게라도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지어낸 말이었다. 정글 풍경도 루소가 제 입으로 다녀와서 보고 그린 풍경이라고 떠벌리기도 했다. 사실 루소는 열대식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식물원에 가본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믿든 말든 루소는 일종의 과대망상증이 있었다. 그 과대망상이 어쩌면 이리 멋진 정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 덕분에 그림의 전달력과 흡입력은 더욱 강력해졌고, 결국 그는 정글의 화가로 굳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상상력이 주는 힘은 예술가로서의 루소에게는 일용할 양식이었다.  

 

 

 

 

 상상의 별을 바라보면서 꿈을 가지고 살았던 화가

 

 

 

 

 

앙리 루소  『꿈』 1910년

 

 

 

루소는 시대적인 흐름과 무관한 작품세계를 펼쳤다. 현실과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무의미한 이색적인 세계였다. 대표작의 하나인 <꿈>에도 두 세계는 공존한다. 원시림 한가운데 뜬금없이 알몸의 여인 야드비가가 몸을 돌려 정글을 둘러보고 있다. 숲속에는 사자와 코끼리, 새들이 모두 주시하고, 평화롭게 잠든 야드비가의 아름다운 꿈속에서 뱀을 벗처럼 부리는 사람이 부는 피리소리에 귀 기울인다. 달빛이 꽃잎과 신록의 나무 위에서 빛날 때 황갈색 뱀이 피리가 내는 선율에 귀 기울인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루소의 꿈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그렸는지 가시 돋친 질문을 퍼부었다. 루소의 대답은 간단했다.

 

 

“원시림 풍경에 무슨 붉은 소파냐고요? 야드비가는 소파에서 잠시 잠든 채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요술쟁이가 부는 피리소리를 듣습니다. 구성진 피리 선율이 잠든 숲을 깨웁니다. 야드비가가 소파에 누워 있다가 꿈에서 깨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시림 한복판에다가 소파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어느 날 루소가 친구의 방에서 본 빨간 의자가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의자를 본 순간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 폴란드 아가씨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다. 화면 가운데에 멕시코풍의 식물을 빼곡히 그려 넣고, 아름다운 새와 꽃, 과일도 배치했다. 또 수풀 사이에 사자와 코끼리도 더했다. 그런데 야드비가는 누구일까?

 

그림 속 여인의 실제 모델에 대해서 루소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루소가 젊어서 사랑했던 폴란드 여인일까. 루소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했던 시기인 1910년에 마치 자신의 죽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평생 마음에 담아뒀던 영원한 사랑 야드비가를 자신의 화폭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기로 마음 속으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진흙구덩이 속을 뒹굴고 산다. 그러나 우리들 중 몇몇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을 갖고 산다”라고 말했다. 화가들과 보통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면 현실에 길들여지지 못하고 헛된 환상에 살면서 일반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열대우림 속의 은밀하게 속삭이는 마술과 같은 소박한 자연의 이야기를 앙리 루소는 각박한 현실에서 별을 그리듯이 자신의 세계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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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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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미술은 어렵다 

 

 

 

 

바넷 뉴먼  『단일성 VI』 1953년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300억이라면 모두들 수긍하지만, 거대한 파란색 단색 화면에 한 가운데 하얀 줄만 그려져 있는 바넷 뉴먼의 <단일성 VI>이 487억 원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소더비즈 경매에서 뉴먼의 연작인 ‘단일성(Onement)’ 시리즈의 6개 작품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 4380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487억 원에 낙찰됐다.

 

현대미술은 대중에게 쉽게 감동을 주거나 그 의미가 잘 와 닿지 않는다. 혹자는 바넷 뉴먼이라는 이름이 생소할 것이다. ‘미(美)’ 혹은 미적 대상을 ‘아름답게’ 재현하는 과거의 예술 작품에 비해 현대미술 작품들은 그 외형이 단순하고 빈약하다. 그래서 여러 면에서 감상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중 으뜸은 ‘난해성’이고, 특히 말썽인 것은 ‘재현 대상에 대한 비지시성’이다. 고전미술의 처지에서 보면 미술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므로, 화가는 ‘이 작품은 무엇을 표현한 것’이라고 감상자에게 설명하는 게 도리다. 화가의 이런 설명을 보통 ‘재현 대상에 대한 지시성’이라 하는데, 현대미술은 종종 이 ‘도리’를 무시한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1955년

 

 

현대미술의 또 다른 당혹감은 재현 대상 그 ‘자체의 모호성’에도 있다. 구상이든 비구상이든 화가가 현실의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 혹은 발견할 수 없는 대상을 재현했을 때 감상자는 곤혹스럽다. 예를 들어 나무 판넬 위에 물감을 칠하고 그 위에 박제된 염소 머리와 타이어 등의 오브제를 설치한 라우센버그의 작품을 본다면 감상자가 느끼는 혼란은 극에 이를 것이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주체, 비평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흔한 말이지만 현대미술은 어렵다. 현대미술의 흐름을 소개하는 개론서를 읽어도 단번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작품들을 남긴 채 침묵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나름 친절하게 설명해도 예술가의 말들은 분명 지구상에 사용하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진의를 가슴 깊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하다. 자신의 작품을 ‘숭고’의 유형으로 특징짓는 뉴먼의 말을 먼저 읽어 보고 <단일성 VI>을 보라.

 

 

우리는 고양된 것, 즉 절대적 감정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자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열망을 다시 확증하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오랜 전설이라는 낡은 소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것의 현실성이 자명한 이미지들, 숭고든 미든, 시대에 뒤떨어진 이미지들을 연상시키는 소품이나 목발이 없는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서유럽 회화의 장치 노릇을 해왔던 기억, 연상, 향수, 전설, 신화와 같은 장애물들을 비워내고 있다. 예수, 인간, 삶으로부터 성전을 짓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부터 성전을 짓고 있다. 우리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자명한 계시의 이미지로, 그것은 역사에 대한 향수의 안경 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92쪽)

 

 

 

뉴먼은 생전에 끊임없이 자신의 미술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꼭 모든 현대미술을 주름잡은 예술가들이 뉴먼처럼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미술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한 관람자의 모습에 속상하거나 한심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난해한 현대미술을 관람자에게 설명하고 소개하기 위해서 비평가들은 화가의 대변인 역할을 자저했다. 우리가 보고 이해하려고 하는 현대 미술의 예술사적 의미와 그 맥락은 비평가의 ‘평론’에 의해서 탄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후 모더니즘의 흐름 속에 새로이 떠오른 예술 주체는 바로 비평가였다. 이전의 예술가들이 직접 강령과 선언문의 형태로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냈다면, 전후 미술 작품의 의미를 언어로 설명해준 이들은 바로 비평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를 비롯한 오늘날 비평가들의 평론은 작품에 사후적인 평가를 부여할 뿐 아니라 작품 자체를 성립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비평가 그린버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잭슨 폴록이 존재할 수 없었듯, 작품의 의미를 생산하는 비평가는 이 시대의 새로운 예술가였던 셈이다.

 

 

 

 "비평은 무슨, 빌어먹을!"

 

 

 

 

하지만 그림을 보는 비평가들의 눈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비평가들은 때때로 민망스럽고 시대착오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폴록은 물감을 흩뿌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으로 인해 영국 희대의 살인범죄자의 이름을 따서 ‘Jack the Dripper’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자 일부의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을 기법, 조화적인 면, 조직화가 결여된 ‘혼돈’(Chaos)이라고 혹평을 하자 폴록은 이에 대해 신경질적인 말로 답변한다. “혼돈은 무슨, 빌어먹을(No chaos. Damn it).” 폴록은 우연 자체를 부정하고 작품 제작에서 우연성이 개입하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에 물감을 바닥에 있는 화폭에 흩뿌리는 행동은 ‘영감, 비전, 직관적 결정’이라는 고도의 질서에 의해 작동된다.

 

폴록의 회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재능을 알아 본 비평가는 현대회화 비평의 양대 산맥(Berg)으로 우뚝 솟은 그린버그(Greenberg)와 로젠버그(Rosenberg)다. 두 사람은 폴록의 작품을 ‘추상표현주의’로 명칭 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근본적인 입장은 서로 달랐다. 그린버그는 선과 면의 구별, 형태의 요소가 해체되는 폴록의 그림은 새로운 추상적 차원으로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로젠버그는 그림의 평면성까지 한정된 그린버그의 비평을 넘어서 그림을 그리는 과정, 즉 행동(Action)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처음으로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는 명칭을 제안하기도 했다. ‘현대미술’이라는 같은 길을 동시에 걷고 있고, ‘폴록’이라는 불세출의 화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현대회화 비평의 양대 산맥은 노력했지만 출발하고 접근하기 위한 시작점은 서로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미 모더니즘 회화의 교황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그린버그는 로젠버그의 비평을 반박하는 대립 상태까지 가게 된다. 결국 화가 한 사람을 둘러싼 양대 산맥의 대립은 로젠버그가 뒤늦게 판정승하게 된다. 전성기가 지난 후부터 폴록은 초기의 흑백 구상으로 회귀하게 되면서 그를 옹호했던 그린버그의 비평은 무의미해졌다.

 

 

 

 

폴록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든든한 예술적 비평대상이 사라지게 된 그린버그는 전후 모더니즘 회화의 새로운 주자로 바넷 뉴먼과 마크 로소코의 색면추상을 지목하게 된다. 그린버그는 폴록의 회화에 강조했던 새로운 평면성의 형식을 이들에게도 적용했다. 그리고 그 특징을 색면추상에서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린버그는 화가의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뉴먼과 로소코는 자신들의 작품을 ‘형식’이 아닌 ‘숭고’의 체험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색면추상을 ‘미’의 관점 그리고 색채의 형태를 통해 분석하려고 했다. 뉴먼과 로스코를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추상주의 회화의 영역 속으로 포함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폴록보다 가장 많은 오해의 비평을 받아야만 했다. 뉴먼은 치열하게 비평가들과 설전을 벌였으며 로소코는 아예 작품에 대한 설명을 스스로 포기해버릴 정도였다.

 

 

 

 

그린버그의 망언(?)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62년에 그린버그는 어느 강연회에서 미국 미술 역사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재미있게도 그린버그가 지목한 ‘미국 미술 역사 30년’에는 팝아트라는 어마어마한 회화의 맥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미술 역사의 고요함을 주장하던 그 시기에 그린버그가 옹호하던 모더니즘은 서서히 퇴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바로 팝아트에 의해서 말이다. 추상표현주의를 필두로 한 모더니즘 예술도 한 때 새롭고 진보적인 형식이었다. 여기에 총대를 메고 선두를 이끌던 사람이 바로 그린버그였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 새롭고 젊은 예술이 등장하고 과거 혈기왕성했던 예술은 전혀 새롭지 않은 기성 예술로 전락하는 법. 그린버그는 모더니즘과 정반대인 팝아트의 신선한 등장이 여간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비평가의 눈을 제대로 사용하기

 

아서 단토는 그린버그가 무시했던 팝아트를 획기적인 미술사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는 ‘예술의 탈역사화’를 강조했다. 팝 아트 이후의 현대미술에서는 더 이상 역사적 방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헤겔이 말했던 예술의 종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다양한 양식이 혼재된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새로운 노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등장한 특정한 예술 양식이 독창성과 참신성의 기준으로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는 관점을 부정한다.

 

 

어떻게 하나의 양식이 다른 것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음 주면 추상표현주의자나 팝 아티스트, 혹은 사실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엇인가를 포기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서 말이다. (33쪽)

 

 

하지만 단토의 비평 역시 난점을 피할 수 없었다. 워홀을 비롯한 팝 아티스트들은 ‘팝아트’의 전형적인 양식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믿고 쓰는 모더니즘산(産)’ 폴록 때문에 헛물을 킨 그린버그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이다.

 

현대미술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예술적 담론을 되돌아보면 그림 좀 볼 줄 안다는 비평가들도 난해한 현대미술을 잘못 이해하는 관람자처럼 헛다리짚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삼을 수 있는 대목이다. 미술에 ‘미’자도 모르는 사람이나 이들보다 그림을 많이 본 비평가나 누구든지 간에 현대미술은 어렵다.

 

관람자는 그림 보는 비평가의 눈을 빌어서 현대미술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비평가의 눈은 난해한 현대미술을 쉽게 잘 보기 위한 망원경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그것을 의지하면 예술의 시야를 넓히기 위한 망원경은 색안경이 될 수 있다. 특정 회화의 양식만 선호하고 편견의 초점에만 맞춰진 비평가의 색안경은 이제 막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는 초보자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불량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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